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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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細野晴臣 - 恋は桃色

호소노 하루오미는 핫피 엔도라는 불세출의 포크 록 밴드 리더랑 YMO 리더로 유명하지만 정작 솔로 활동 중 포크 앨범은 1973년 데뷔작인 [Hosono House] 한 장 밖에 없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 해리 앤 맥이라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만 이것도 컨트리랑 블루스 위주고... 아무튼 [Hosono House]는 그 점에서 유니크한 앨범으로 남아있습니다. 

[Hosono House]는 일본식 프로그레시브/사이키델릭 포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핑거링으로 진행되는 기타 코드는 비틀린 스케일과 즉흥 연주를 반복하고 있으며, 소리층위는 반 다이크 파크스나 비치 보이스의 영향을 받은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핫피 엔도에서 좀 더 코어하게 발전했으면서도 호소노의 느긋한 목소리에 따뜻한 감성의 멜로디를 잃지 않은, 묘한 매력이 있는 앨범인데, 이 곡은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먹힐만한 곡입니다. 실제로 야노 아키코, 서니 데이 서비스, 나카무라 카즈요시가 커버하기도 했고요. 호소노는 이 앨범에서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포크 음악을 완성해서 더 이상 포크 음반을 내놓지 않는 걸까요? 관련 인터뷰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튼 이 앨범은 엘리펀트 카시마시나 서니 데이 서비스 같은 분카이 록은 물론이고 나기사 니 테 같은 뮤지션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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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범죄 [Indagine Su Un Cittadino Al Di Sopra Di Ogni Sospetto / 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 (1970)

[완전범죄]의 시작은 흐름이 있는 모호한 파편이다. 아마 처음 보는 관객들은 왜 남녀가 아파트로 몰래 숨어들어가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도착적인 섹스 끝에 여자를 살해했을때조차도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가 없다. 마침내 살인을 저지른 남자가 수사 사건으로 현장에 불려갔을때 관객들은 [완전범죄]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지 갈피를 잡게 된다. [완전범죄]는 범죄를 숨기려고 하는 경찰 수사관의 얘기다.
 
관객은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 경찰인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거나 들킬 생각이 전혀 없다. 수사관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이 세 전제는 오오바 츠구미와 오바타 타케시의 [데스노트]나 김성훈의 [끝까지 간다]랑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완전범죄]는 [데스노트]나 [끝까지 간다]에서는 기능적으로 쓰였던 '권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서사를 뒤틀어버린다. 이 영화엔 동료 수사관들은 범인을 가르키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의심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완전범죄]는 이를테면 파시즘적 권력이라는 블랙홀 때문에 상식의 벡터가 왜곡되고 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이런 비정상적인 설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단적으로 영화가 끝날때까지 주인공은 이름 없이 직위로만 불린다. 마치 그에겐 어떤 개성이 필요없다듯이 말이다. 이 익명성은 마치 그의 캐릭터가 같은 위치에 있는 다른 이들게도 적용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본가 우고 피로와 엘리오 페트리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바로 피의자와 피해자, 증인이라는 일반인들과 수사관이라는 권력자 간의 인간 관계다. 수사관들은 가식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언론인들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그 권력에 야합한다. 와중에 일반인들은 권력 앞에 무력하다.

페트리와 피로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성 권력이다. 페트리와 피로는 사도마조히즘과 강간 이미지야말로 파시즘의 성적 이미지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연기하다가 진짜로 살해당한 아우구스타는 일반인들이 파시즘에게 매료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아우구스타 입을 빌려 주인공에게 매력 없다고 조롱해버림으로써 그 매료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이때 아우구스타가 퍼붓는 '유아기'와 '발기부전'야말로 영화의 핵심을 궤뚫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게도 아우구스타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혁명가인 안토니오다. 페트리와 피로는 파시즘보다 사회주의가 더 '성숙'하고 '섹시'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엘리오 페트리가 [완전범죄]를 위해 동원한 영화적 수법은 클로즈 업과 몽타쥬의 교란이다. 먼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컷은 클로즈업이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얼굴이나 대상을 강조해 보여주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페트리가 공을 들이는 클로즈 업은 주인공 얼굴의 클로즈 업이다. 애인과 바람을 피울때도, 파시스트적인 연설을 할때도, 수사를 할때도, 자신에게 범죄 증거를 받아 고발하러 온 시민을 교묘하게 압박할때도 페트리는 지안 마리아 볼론테의 오만한 표정 연기로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심지어 심문당하는 증인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할때도 프레임 밖 주인공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페트리에게 클로즈 업은 파시스트의 언어이자 파시즘적 관계의 정점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다.

그 결과 [완전범죄]는 클로즈 업과 클로즈 업이 아닌 샷 간의 몽타주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클로즈 업에서 드러난 파시스트의 권력이 다른 평범한 샷들의 방향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페트리는 수사과정을 시간순으로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서브 플롯이나 연설, 플래시백, 환영으로 도주한다. 마치 명백한 서사적 목표인 '살인마 주인공을 처벌한다' 를 일부로 방기하는 등장인물들을 조롱하듯이 말이다. 도입부의 파편화된 샷으로 이뤄진 미스터리는 일종의 예고였던 셈이다. 페트리는 서사와 몽타쥬의 교란, 파편화를 이용해 상식적인 영화 언어를 휜다. 그리고 그 휘어짐은 파시즘에 대한 은유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가족의 친구]나 [일 디보]의 선조인 셈이다. 이런 휘어짐은 야비한 느낌의 엔리오 모리코네의 사운드트랙도 한 몫한다.

하지만 소렌티노가 펠리니식 성찰과 유미주의로 나아간다면, 페트리와 피로는 정반대로 그 혼란을 밀어붙인다. 그 결과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오네스코나 카프카, 피란델로 같은 부조리극의 세계다. 징후는 아우구스타의 애인인 안토니오에게서 시작한다. 다른 심문자랑 달리 안토니오의 등장 시퀀스에서 주인공은 롱 샷에 짓눌려 초라하게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안토니오와 주인공이 마주 섰을때, 이 영화가 유지하던 클로즈업의 권력은 파괴된다. 안토니오는 이 영화 인물들 중에서 아우구스타랑 더불어 주인공에게 정면으로 반항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죽어버린 아우구스타랑 달리 안토니오는 자신의 알리바이와 논리를 갖춰 또박또박 반박한다. 

성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좌파 혁명가에게 밀려버린 파시스트가 선택한 끝은 자폭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베르톨루치의 [순응자]처럼 한 떨기의 쓸쓸함조차도 허락받지 못한다. 아니 페트리와 피로의 야유는 여기서 절정에 달한다. 이 영화의 끝은 훌륭한 부조리극이다. 자신이 살인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울부짖는 주인공의 말에도 동료들은 허튼 소리하지 말라고 일축해버린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되버린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건 오직 시스템의 종이 되는것 뿐이다. 페트리와 피로는 확인 사실로 이 모든 과정을 환상으로 처리하고 동료들을 불러모으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지으면서 명백하게 한다.

[완전범죄]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파시즘이 휘두르는 권력을 신랄할정도로 까내리면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구축'되는가를 체계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완전범죄]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여럿이나 청와대에 들이앉아 추태를 부리며 자멸하는걸 똑똑히 보고 있다. 만약 이들의 속성을 정확하게 짚어낸 한국 영화가 등장한다면 그 영화는 [완전범죄]처럼 한국 영화사의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어떤 인상을 가졌더라도 그는 법의 종복이며, 법에 귀속되어 인간의 판단을 벗어난다."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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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공식 예고편

2015/07/20 - [Deeper Into Movie/리뷰] - 더 울버린 [The Wolverine] (2013)

개인적으로 울버린을 꽤 좋아하기도 하고, 휴 잭맨도 좋아하는 배우인데다 [더 울버린]이 걱정했던 것보다 꽤 괜찮은 영화여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선 변종 서부극스러운 분위기에 플러스. [올드맨 로건] 배경으로 한다고 했을때 울버린이 너무 늙게 나오는거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럭저럭 괜찮게 나왔습니다.

이 영화가 휴 잭맨 마지막 울버린이라는게 아쉽긴 하지만... 뭐 이후 제작진들이 알아서 잘 하겠죠. 여튼 정말 그는 울버린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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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6

이게 나라냐. 진짜.

날려먹은 4년이 억울해서 못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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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 Journey to the Shore] (2015)

2013/08/26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규 [叫 / Retribution] (2006)

죽은 남편이 돌아와 여행을 제안한다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의 기본 뼈대는 판타지 장르에서는 참신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해안가로의 여행]의 도입부는 신비롭다. 장을 보고 팥죽을 만들던 주인공 미즈키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미즈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남편 유스케가 서 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듯이.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엔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안다. 심지어 친절하게 유스케는 자신이 실종되었다는걸 죽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 장면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이전 프레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당혹감과 경외감을 느낀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영화는 지구의 물리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워즈]나 [그래비티]처럼 무중력을 현실로 가정한 공간에서 영화를 진행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 무중력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중력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관객들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공간에서 영화를 찍던 도중 중력을 거스르는 장면이 등장하면, 우리는 당황하며 이전 컷과 이후 컷을 따로 분리하려고 한다. 그 전까지 강하게 세워져 있던 현실의 프레임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떤 허구의 마술이 일어난다. 그 마술이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의 진짜 매력 중 하나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령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유령은 현실에 속하지 않은 것이기에 인간이 등장하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편집이나 샷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평범한 장르 영화의 유령들은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요시의 유령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를 깨닫게 해준다. 기요시의 유령들이 영화 탄생 후 무수하게 등장한 마술 중에서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면, 그는 숏의 구성과 연결, 사소한 소품들이나 몸짓, 그림자와 색채에서 중력과 무중력을 구성할 줄 아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술을 담당하고 있는 유스케를 보자. [절규]의 여자 귀신이 그랬듯이, 우리는 그의 모습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아사노 타다노부라는 훌륭한 배우가 연기를 했다는 점도 있지만 유스케의 복장이라던가 (실제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유스케의 주황색 코트였다. 옷의 색이 하나의 캐릭터화된다는 느낌이였달까. 같이 다니는 미즈키의 무채색 옷과 대조되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대사 사이에 등장하는 어떤 침묵의 간극, 무심하게 일어날 수 없는 현실을 흘러내보내는 행동거지에서 우리는 그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분명히 죽었을 유스케가 살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 터무니없음에 당혹해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 받아들임은 전작들과 달리 절망이나 묵시록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절박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즈키가 큰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게 유스케의 유령을 받아들이는 것도, 오히려 그 멜로드라마적인 물기에 잠겨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스케가 돌아오길 기대하며 썼다는 기원문은 미즈키가 중력을 거르는, 어떤 영화적 현상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스케의 제안에 미즈키처럼 따라 여행을 떠나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유스케와 미즈키의 여행은 일종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유스케는 자신이 없었던 지난 3년간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사람들을 미즈키가 체험하길 원한다. 유스케가 보여주는 이야기엔 지박령처럼 한 자리에 머물며 죽음을 인지 못하는 유령도 있으며 반대로 유령을 잊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의 얘기도 있다. 즉 유스케가 어떤 영화적인 사건이라면 미즈키는 관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스케와 미즈키가 처음으로 찾아간 신문 배달을 하는 시마카게라는 할아버지를 보자. 중간의 반전으로 시마카게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며 지박령처럼 그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는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마카게가 머무는 장소다. 미즈키가 그 장소에 들어섰을 때, 관객들은 그 장소가 죽은 장소라는걸 쉽게 알아차린다. 혼자서 머물기엔 지나치게 넓은 공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어두운 그림자, 어딘가 빛바랜 가구들... 에피소드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그런 소멸해버린 시간과 공간을 기요시가 호러 장르에서 구축했던 어법을 빌어 서늘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곳은 영화의 마법이 드러나는 최초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시마카게가 만드는 꽃 사진 콜라쥬는 그런 마법의 일부이자 총화라 할 수 있다. 잠든 시마카게를 데려와 침대에 눕히던 미즈키와 유스케를 뒤로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꽃 사진 콜라쥬가 등장한다. 이때 다음 컷에서 카메라는 트랙인을 하면서 콜라쥬를 확대해 보여준다. 벽 한가득 차 있던 꽃 사진 콜라쥬는 화면 가득히 채워진다. 그리고 미즈키의 넋을 잃고 바라보는 리액션 컷이 붙는다.

동시에 이 장면은 유령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연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스케의 등장이 그랬듯이, 꽃 콜라쥬 역시 유스케와 미즈키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침대에서 잠들었을 때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벽에 붙은 꽃들을 비추는 인공적인 조명 연출은, 마치 그가 사라지기 전에 남기는 유언처럼 조용하고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비록 시마카게는 외롭게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했지만, 그가 살아있던 흔적은 그렇게 현계에 남아 관객들의 멜랑콜리를 자극한다.

이렇게 빛을 조절해 다른 시공간에 속한 것 (유령)을 불러와 어떤 아름다움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은 유스케가 두 번째로 데려가는 곳인 중년 부부의 음식점 에피소드에서도 이어진다. 음식점에서 일을 돕던 미즈키는 우연히 집안에서 피아노를 발견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미즈키는 후지에에게 갑작스러운 제지를 받게 되고, 후지에와 후지에 여동생 마코의 사연을 듣게 된다. 후지에가 괴로운 과거를 얘기할 때 영화는 관객이 알아차리기 힘든 속도로 조명을 서서히 어둡게 한다. 후지에가 사과하고 싶다고 털어놓는 순간, 미즈키와 관객 눈 앞에 마코가 나타난다. 이제는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다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마코는 유스케와 같은 시공간에 속해있다가 불현듯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미즈키는 놀라지 않는다. 미즈키는 마코에게 피아노를 쳐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템포에 맞게, 천천히”. 마코가 피아노를 칠 때, 어두웠던 방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함께 서서히 다시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코는 환하게 웃는다. 마코가 환하게 웃는 순간 우리는 소녀가 원하던 것을 이뤘다는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컷에 후지에의 마코는 사라지고 없다. 마코가 떠난 방엔 빛과 두 사람의 눈물로 채워진다.

상기했듯이 기요시는 유스케의 등장을 평범하면서도 낯설게 처리하면서 유령이 어디서 왔는지를 상기하게 했다. 그렇다면 유령이 자신의 얘기를 마무리한 뒤엔 어떻게 사라져야 하는가? 먼저 전에 등장한 시마카게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고 있다. 시마카게의 아내는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사라지는 장면은 평범한 일상을 마무리하듯이 어느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채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 마코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코는 후지에의 고백 속에서 뭘 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 공간에 계속 머물며 죽은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시마카게와 달리, 마코는 후지에의 염원이 불러낸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원하는걸 이룬 마코는 환한 웃음과 함께 밝은 빛이 채워지면서 불현듯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기요시는 각 유령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을 파악하고, 어떻게 사라질지 연출하고 있다.

후지에와 마코 에피소드가 끝나고 기요시는 문득 여행을 갑자기 중단한다. 유스케가 토모코라는 애인이 있다는걸 안 미즈키는 유스케와 다투던 도중 돌아가서 물어보겠다고 뛰쳐나온다. 그 다음 샷에서  미즈키는 자신의 집에서 잠이 깬다. 이때 기요시는 시마카게가 사라진 이후의 공간을 보여주던 방식으로 미즈키의 집을 보여준다. 이 시퀀스 자체는 현실과 비현실간의 간극을 환몽 구조로 보여주는 흔한 시퀀스이지만, 신문들과 고지서가 보여주는 물질성과 현실성은 영화 내 맥락에서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유령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헛된게 아니라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무언의 주장이랄까. 

토모코와의 대화 끝에 미즈키가 유스케를 부르는 장면은, 미즈키가 유스케의 유령이 절대로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결론 끝에 나왔던 거 아닐까. 그 점에서 미즈키의 집에 등장했던 죽은 식물들과 고지서들은 시마카게의 낡은 꽃처럼 유령과 얽혀있던 시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같은 어조임에도 이전에 쌓인 성찰에서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의심을 품고 있던 관객들조차 이 영화의 세계가 유령이 어떤식으로 살아가는지 받아들이게 된다. 유스케가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유스케와 함께 마을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던 미즈키는 마을 아이에게 영계로 이어지는 폭포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행방불명된 타카시와 남아있는 카오루의 사연이 등장한 이후, 미즈키는 다시 폭포로 갔다가 죽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여전히 영화 속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등장하지만 이전 장면들과 달리 긴장감으로 차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딸과 비슷하거나 어린 배우가 아버지를 연기하는 부조화도 그렇지만, 유스케를 원망하며 미즈키를 다그치는 미즈키의 아버지는 [절규]나 [회로]에 나왔던 유령처럼 무언가 서늘하고 냉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그동안 미즈키가 만나왔던 유령들과 달리 유스케처럼 온전히 미즈키에게만 속한 유령이기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어쩌면 인간인 네가 이 여행을 올 필요가 없었다고 현실을 재차 각인시켜준 존재일지도 모른다. 바람을 피우며 소중한 딸인 미즈키에게 상처를 주는 남편 따윈 잊어버리고 출발하라는 유혹이랄까.

하지만 미즈키는 기요시의 남자들과 달리, 그 유령을 달래는데 성공한다. 미즈키는 이미 여러 명의 귀신과 토모코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여행이 3년 동안 비어 있었던 어떤 순간을 채우고 떠나보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다음 컷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언급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음 시퀀스에서 우리는 미즈키가 맞이해야할 유스케와의 기나긴 이별 준비 시퀀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사하고도 큰 연관관계도 없는 시퀀스임에도 기요시는 풀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감상적인 음악을 깔면서 유스케와 미즈키가 시골 마을에서 일상을 보내는 과정들을 몽타쥬로 연결해 보여준다. 직전에 등장하는 유스케가 빵 봉지를 잘 못 뜯는 신은, 유스케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암시로 받아들일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신은 직전 신과 이후 신과도 전혀 연관이 없고 의미도 언뜻 파악하기 힘들다. 기요시는 놀이터에서 유스케가 멀리 어딘가를 보는 걸 미즈키가 그걸 바라보게 세팅을 한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리 촬영을 한다. 음악이 고조되며 두 사람이 거의 일직선이 되었을 때, 기요시는 미즈키의 바스트 샷으로 넘어간다. 미즈키가 유스케를 바라보고 있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을때, 기요시는 달에 구름이 스쳐지나가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이 끝날 때, 앞 뒤 신과 연결되어있다는걸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 기요시는 인간인 미즈키와 유령인 유스케 간의 어떤 간극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여행이 끝나야만 하는 것임을 드러내게 한다.

그렇기에 후회를 안고 원념이 되어가는 타카시를 성불 시키고, 우주와 시간, 사랑에 대한 다소 장황하고 직설적인 고백이 이어진 뒤 미즈키와 유스케는 섹스를 하게 된다. 실종 직전 부부관계가 그렇게 원만했다고 할 수 없었음에도, 이 시퀀스에서 미즈키와 유스케는 마치 신혼여행에 온 부부처럼 몸을 섞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 여행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걸 증명하듯이 그들은 마지막 행선지인 유스케가 사라졌던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닷가는 솔직히 절경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다. 동아시아 (한국이라면 강원도) 어딘가에 내려서 해변가로 가는 버스 티켓 한 장 얻으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어업 도구들과 배들이 널려있는 그런 곳. 기요시는 그런 일상적인 풍경을 애써 지우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대신 한적한 풀밭에 배우들을 앉혀놓고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는 햇빛과 풀들을 묘사한다. 거기서 유스케는 덤덤히 아름다운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상기했듯이 [해안가로의 여행]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도 볼 수 있다고 적은 바 있다. 

어찌보면 미즈키가 떠나지 말고 여기 계속 있어달라는 지극히 신파적인 고백은, 이야기와 서사가 끝난다는 사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이야기가 끝나고 무언가를 얻거나 잃은 캐릭터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 어딘가는 서사마다 다르다.) 우리는 그곳을 따라갈수 없다. 작가 혹은 절대자가 서술하지 않기 떄문이다. 그저 우리는 상상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 결말은 스파이크 리의 [그녀]에서 사만다가 시어도어에게 더 넓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난다고 고백하며 떠나가는 결말과 닮아있다.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실에서 비롯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듯이 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더이상 약하지 않다. 어떻게 사과할줄 몰랐다고 말하는 유스케의 말에 "원하는건 이뤘어."라고 대답하는 미즈키의 말이 그렇다. 무언가 원하고 있었기에, 불현듯 등장했다는걸 깨닫고 그것과의 여행에서 원하는걸 찾아냈기 때문이다. 유스케가 사라지는 장면은, 상술했던 마코나 타카시가 불현듯 사라지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서 충만한 감정을 발견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미즈키는 유령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방식을 이미 충분히 체득했기에, 그 사라짐을 아파하지 않는다. 그저 밝은 햇빛을 잠시 만끽할 뿐이다. 

스파이크 리는 비물질계로 떠나는 자들을 배웅한 물질계의 두 남녀가 밝아오는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서 영화를 마무리지었다. 기요시는 거기서 조금 더 보여준다. 미즈키는 남편이 돌아오길 고대하며 쓴 기원문을 태운다. 그때 카메라가 보여주는 성냥곽은 두 개의 시계가 그려져있다. 마치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며 움직여 온 미즈키와 유스케의 여행을 상징하듯이. 그리고 미즈키는 짐을 들고 프레임 오른켠 앞으로 전진해 사라진다. 

미즈키가 사라지는 방식은 유령이 사라지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미즈키는 프레임 안에서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프레임을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난다. 그것이 인간이 사라지는 방식이라고 기요시는 생각했던 것일까. 음악이 흐를때 우리가 볼 수 있는건 이별을 맞이하며 바라봤던 해안가다. 그 순간 이 해안가는 한 유령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프레임 밖의 '더 아름다운 곳'을 찾아 떠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증언자가 된다. 이때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은 너무나 우아하다. 마치 지금까지의 여행을 정리하는듯한 움직임이라고 할까. 거기서 기요시는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 전작들에서 편린으로 등장했던 유미주의가 완연하게 꽃을 피운다. 이 영화가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를 의심없이 그대로 가져온다고 꼬투리 잡을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큐어]나 [회로], [절규]에 내세울 정도로 좋아한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삶과 영화를 좀 더 사랑하는 방식을 배울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령이 어떤 시공간에 속하는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극적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영화 언어로 배치하는 과정에서 정서적인 힘이 나온다고 할까. 그런 부분에 설득당했기에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겨둔 해안가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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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9

-처음으로 부산영화제를 갔다 왔습니다. 인기작은 포기하고 맘 편하게 영화 골라서 봤어요. 어차피 좀만 기다리면 개봉할건데 정력 낭비할 일은 없죠.... 덕분에 해운대도 느긋하게 돌아다녔습니다. 다만 외할머니가 나이를 드신게 마음 아팠습니다. 살아있을때 자주 뵈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본 영화 리뷰는 언제 다 쓰냐...! (과제에 치이는 중)

-뭔가 블로그를 몰아쓰는게 일기를 몰아쓰는 느낌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휘발되기 전 재구성해 올리는 느낌이랄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제가 뭘 했는지 다 까먹어 버리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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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움 [淵に立つ / Harmonium] (2016)

[하모니움]의 도입부를 장식하는건 스즈오카 부부의 딸 호타루의 풍금에 맞춰 울러퍼지는 메트로놈의 음이다. 그리고 음에 맞춰 조각조각난 타이틀 '늪에 서다'라는 타이틀이 붙어졌다가 다시 사라진다. 마치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산산조각나 사라지는 것처럼 맞춰진 오프닝 시퀀스는 불길함을 안기기 충분하다.

후카다 코지는 당돌하게도 다음 시퀀스로 오즈 야스지로가 세계 영화계에 남긴 유산 중 하나인, '가족이 밥을 먹는 장면'을 이어간다. 하지만 [하모니움]의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불편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밥상에서 나누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죄에 관한 대사도 그렇지만, 침침한 조명과 다소 스산한 기운이 스며든 스즈오카 가족의 식탁엔 활기참이나 친밀함은 없다. 

오즈의 밥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려고 드는 후카다 코지의 악의는, 곧 토시오라는 캐릭터로 연결된다. 점잖고 친절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토시오는 속내를 쉬이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이 점은 곧 후반부에 드러나는 토시오의 죄와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당연한 벌이라 생각하는 뒤틀린 심리하고도 연결된다. 그 점에서 토시오의 침묵은 균열의 징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한 야사카 소타로가 등장하는 샷은 후카다 코지가 선배 감독 중 누굴 존경하고 인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바로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다. 소타로의 첫 등장 샷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유스케가 처음 등장하는 샷처럼 낯설고 음기로 가득차 있다. 이 샷에서 소타로는 표정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데다 그를 감싸고 있는 빛은 지나치게 환한 나머지 위화감이 든다.

다만 유스케가 이내 친밀함을 드러내며 미즈키에게 과거를 환기시킨다면, 소타로는 친밀함을 극도로 인위적으로 표출하면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킨다. 그 인위적인 친밀함을 걷어내보면 소타로는 무도덕한 짐승이다. 그리고 이런 짐승성은 종종 성적인 긴장감이나 서스펜스로 드러나기도 한다. 소타로가 목욕하고 나오던 도중 풍금 연습하던 아키에와 호타루를 마주치는 장면이라던지 물놀이 도중 토시오를 협박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점에서 소타로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의 에노키즈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후카다 코지가 다음으로 꺼내든 카드는 바로 종교다. 한국 영화와 달리 현대 일본 영화에서 기독교인을 다룬 영화를 찾아보기는 꽤 힘든 편인데, [하모니움]은 그 희귀한 케이스에 속한다. 오프닝에 슬쩍 대두된 종교적 죄의 개념은 이내 교인인 아키에와 소타로의 관계를 통해 회개와 속죄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처음엔 소타로를 낯설어하던 아키에는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소타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는 애정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은 곧 죄의 경계를 위태하게 배회하게 되고 그 결과는 파국이다. 후카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공을 들인 캐릭터가 아키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키에의 감정은 열려있다.

소타로가 아키에에게 죄를 털어넣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인상적이다. 클로즈 업을 많이 쓰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 시퀀스는 유달리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를 활용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소타로의 클로즈업 샷이 압도적이고, 아키에의 리버스 샷은 비중이 적다. 하지만 아키에의 표정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늘 열려있기에 안정감을 주지만 소타로의 고백은 미심쩍음을 남긴다. 심지어 그의 고백과 참회가 진짜인가? 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 점에서 후카다 코지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이 영화의 성패는 캐릭터의 투명성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츠츠이 마리코, 아사노 타다노부, 후루타치 칸지 등 세 배우의 인상적인 연기도 빼놓지 말아야 되겠지만.

[하모니움]은 이처럼 소타로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고 보이는 순간조차도 소타로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우리는 소타로가 호타루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소타로는 호타루가 장애인이 되버리는 첫번째 파국 이후 사라진 뒤 영화가 끝날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후카다 코지는 첫번째 파국 직후, 시간을 뛰어넘어 구조를 반복한다. 낯선 자가 철공소에 도착하고 그 낯선 자가 다시 한번 파국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타카시가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두번째 파트는 소타로가 등장하는 첫번째 파트하고는 거울쌍을 이루고 있다. 타카시가 소타로의 아들이라는 점, 악기에 능한 소타로와 그림에 능한 타카시가 호타루에게 접근하는 점, 진상 폭로 시퀀스 등이 그렇다. 하지만 첫번째 파트에 남아있는 상흔과 이상 심리는 두번째 파트를 서서히 파국으로 밀어넣는다. [하모니움]이 인상적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이런 죄의식과 불안을 조금씩 꺼내서 비정형적인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에 있다. 반복과 대칭을 이루는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후카다 코지는 고조되어야 할 폭로의 순간을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게 처리한다던가, 평범한 일상을 아슬아슬한 서스펜스와 욕정으로 채워넣는 식으로 엇박자를 놓는다. 

롱 샷으로 정욕이 끓어오르는 소타로와 무심히 던져진 야외 섹스하는 커플의 신음 소리, 흰 옷을 벗고 붉은 셔츠로 돌아가는 소타로, 식물인간이 된 호타루를 감시 카메라로 살피며 밥을 먹는 토시오, 갑자기 토시오에게 뺨을 맞고 당황해하면서도 화를 내지 않는 타카시가 그렇다. 토시오가 소타로와 타카시에게 프레스기로 구멍을 뚫는 과정을 가르쳐주는 장면은 그 점에서 영화 전체의 리듬감을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멍이 점진적으로 커져가듯이, [하모니움]의 영화적 리듬은 점진적이지만 낯설게 반복되며 죄의식으로 빠져든다.

두번째 파국이자 호타루의 진짜 죽음을 다루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영화는 아예 환영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아키에와 토시오는 마침내 소타로가 사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소타로를 찾아가던 도중 아키에는 타카시에게 복수를 위해 그를 도구로 쓰겠다는 의도를 거리낌 없이 나타낸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건 풍금을 연주하는 아이와 흰 옷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다. 이 샷 자체는 그동안 쌓여왔던 비틀린 상황과 달리 불현듯 등장해, 마치 유령이 다시 도래한 느낌마저 줄 정도다. 하지만 후카다 코지는 잔인하게도 그 평온을 깨트려버린다. 이제 남은건 진짜 파국 밖에 없는 것이다.

아키에와 호타루가 자살을 시도하는 결말 역시 그런 불현듯 등장하는 환영과 그 환영을 깨트리는 잔인한 현실의 대조로 이어져 있다. 후카다 코지는 이 순간부터 거의 시적 이미지로 영화를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좀 진부한 이미지를 과하게 밀어붙인거 아닐까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 자체로는 꽤나 허망한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다. 죄 없는 아이들이 죄를 대속하고 죄 있는 어른만 남아버린 현실. 여기서 후카다는 매정하게 영화의 막을 내린다. 마치 진짜 파국 '이후'를 상상해본적이 없다듯이. 과연 후카다 코지는 그 파국 이후를 다룰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하모니움]의 비정한 결말은 요사이 일본 영화에서 보기 드문 진득한 독기를 지니고 있다는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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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생각보다 수업이 빡세서 자연히 블로그는 방치네요. 1주일에 5페이지 은근 꽉꽉 채우는게 힘들어요...

그래도 블로그는 너무 오래 방치하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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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닛 코스터!

요새 제가 [디스아너드 2]랑 더불어 제일 기대하고 있는 게임입니다. 제가 롤러코스터 타이쿤 시리즈를 엄청 좋아하서 말이죠. 놀이공원은 자주 안 가면서 이런건 좋아한단 말이죠. 

롤러코스터 타이쿤 월드가 대차게 망한 지금, 파키텍트와 더불어 유일한 희망입니다. 다음달에 프리오더 걸면 알파 잡아볼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그 기간에 부산영화제 가는지라... 으으... 잠깐 잡을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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