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171203

작년 연말엔 나라 망할것 같은 분위기에 시위 나가느라 한 해가 끝나는지 잘 모르겠던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정상적인 연말 느낌이네요. 올 한 해는 그 잔해를 수습하는 느낌입니다.

다시는 이런 힘든 일은 경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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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가디언 [人喰いの大鷲トリコ / The Last Guardian] (2016)

(누설이 있습니다.)

우에다 후미토는 걸작 [완다와 거상]을 내놓은 뒤, 10년 이상을 침묵해왔다. 그의 신작 [더 라스트 가디언]은 원래 PS3로 나올 게임이었으나, 계속 미뤄졌다. 심지어 PS4 런칭작으로도 선정되지 않았을 정도니깐. 우에다 후미토 본인은 이미 개발을 다 해뒀다고 말했지만, 게이머들에게 [더 라스트 가디언]은 불로초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다행히 2015년부터 발매 계획이 잡히기 시작하더니, 2016년 본격적으로 공개되었고 그해 연말 게임이 나왔다.

우선 우에다 후미토 팬들이라면 이 게임이 [이코]와 [완다와 거상]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답은 [이코]다. [완다와 거상]은 극도로 단순화된 오픈 월드에 플레이어를 던져놓고 보스를 차례대로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퍼즐화하는 신선한 시도를 취했다면, [더 라스트 가디언]은 [이코]처럼 고립된 신비로운 무대를 배경으로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스테이지와 퍼즐을 풀어가는, 전통적인 퍼즐 어드벤처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주인공을 잡아 이끄는 그림자 괴물에 이은 적 골렘 병사도 건재하다. 우에다 후미토가 장르를 창조하는 게 아닌, 장르를 재발명하는 타입의 게임 개발자이긴 해도 [더 라스트 가디언]은 명백히 [이코]의 정신적 후속작에 가깝다.

하지만 [더 라스트 가디언]은 [이코]의 자기복제하는 게임은 아니다. 두 게임은 '동반자'라는 요소를 공유하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코]의 요르다는 신비한 동반자라는 개념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는 주인공과 같은 위치에서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요르다는 RPG 게임의 NPC 동료를 재해석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라스트 가디언]의 동반자 식인 독수리 토리코는 다르다. 그러니깐 정말로 보기 힘든 타입의 상호작용을 하는 동반자다.

우선 이 토리코는 엄청나게 '크다'. 실제로 토리코를 보게 되면 그 크기에 흠칫 놀라게 될 것이다. 프레임에 꽉 들어찬 토리코는 그 자체로도 스펙타클이다. 우에다 후미토는 전작에서 거상을 만들듯이 토리코라는 생물을 만들어간다. 플레이어는 토리코를 풀어준 이후, 토리코를 데리고 다니며 유도해야 한다. 토리코를 타고 올라 발판으로 삼거나 날아서 이동하며, 퍼즐 도구로 쓰이거나 그림자에게 공격받는 플레이어를 대신 지켜준다. 어떤 부분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동물과 같이 행동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고질라나 킹콩처럼 행동하는 이 생물은 정말 특이한 감흥을 안겨준다. 개새라는 말은 적어도 제대로 짚은 셈이다. 토리코는 창작물 통틀어 독특하게 만들어진 괴수다.

우에다 후미토와 소니 재팬 스튜디오가 이 게임에 오랫동안 매달렸던 이유도, 이 토리코라는 생명체를 게임에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할지에 대한 고민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직관적인 게임은 아니다. 우에다는 각 상호 작용 포인트를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이 숏을 이어붙이는 것처럼 '법칙은 있되 설명은 없이' 배치한다. 그리고 조작을 최대한 단순화한 뒤, 인물들의 반응에서 그 상호 작용 포인트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도록 유도했다. 때문에 우에다 후미토 게임을 플레이를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스테이지에 배치된 상호 작용 지점을 학습하고 상상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우에다 후미토가 이전에서 선보였던 게임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 그 자체로 레벨 디자인이 되는 [더 라스트 가디언]에서 플레이어가 상상해야 하는 부분은 더욱 정교해졌다. 요르다랑 달리 토리코는 그 크기 때문에 이동할 수 없는 구간이 있고, 반대로 토리코 혼자서 이동 가능한 구간이 있다. 토리코의 속성에 맞춰 고안된 퍼즐들라던가 실상 지극히 단순한 조작 체계도 한 몫한다. 플레이어는 이런 다양한 지점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토리코를 조종해야 한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동료 NPC를 위해 배치된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를 움직이는 레벨 디자인와 결합하는 실험을 하는 게임이다. 

와중에 [더 라스트 가디언]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에다 후미토는 개별 스테이지마다 토리코와 소년을 떼어놓으려고 애를 쓴다. 좋은 호러 게임이 그렇듯이 [더 라스트 가디언]은 위협으로 스스로 들어가도록 플레이어를 유도하고,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을 생각토록 하게 한다. [이코]에서 고안했던 서스펜스 설계를 답습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몇몇 지점에서 우에다 후미토는 무성 영화만이 가능한 순수한 서스펜스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음향과 조명, 캐릭터의 동선과 액션을 배치하는 것으로 우에다 후미토는 비디오 게임의 액션이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 질문한다.

변함없이 좋은 부분도 있다. 우에다 후미토는 1급 비주얼 아티스트도 꿀리지 않을 자기만의 세계관과 미적 일관성이 있으며, [더 라스트 가디언]에서도 여전하다. 그는 여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아는 시각 예술가다. 첫 풀 HD 게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에다 후미토는 그 드넓은 공간을 자유자재로 늘렸다가 줄인다. 탑 밖을 빠져나와 거대한 절벽과 텅 빈 허공으로 둘러싼 성을 토리코와 함께 보고 있으면 그 원초적인 풍경에 눈물이 더럭 날 정도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장대한 프레임을 살릴줄 아는 몇 안되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서사는 어떠한가? 후미토 특유의 쓸쓸한 느낌의 전개부터 설명 없이 상상하게끔 만드는 부분은 여전하다. 사실 [이코]랑 크게 다를 게 없는 [더 라스트 가디언]의 서사를 독특하게 만드는 부분도 괴수 장르에서 비롯된다. 우에다 후미토는 로딩 화면에 단서를 던져두었다. 16세기 박물학 서적에서 가져온 이 가상의 생물 일러스트들은, 과학이 막 움트던 시절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모습을 띄고 있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자연의 법칙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세계가 어떤 공포과 미신을 만들어냈는지, 회상을 통해 보여준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공포보다는 체념이 가깝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원망과 체념. 

사실 이 체념은 우에다 후미토 전작을 장악하고 있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는 고립된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부조리한 세계의 법칙을 개인이 파괴하는 이야기에 계속 끌린다.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그 법칙 때문에 고통받으며, 소년들은 그 법칙을 파괴하는 모험을 떠난다. 제물로 바쳐진 이코는 같이 나가기 위해서 기어이 요르다의 어머니인 여왕를 죽여야 했고, 완다는 위험과 파국을 무릎쓰고 부조리하게 죽은 소녀를 살리기 위해 기어이 악마를 부활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두 작품과 달리 [더 라스트 가디언]은 더 나아간다. 파괴 이후 마무리짓는 두 작품과 달리, [더 라스트 가디언]은 내부의 법칙을 파괴한 그 이후의 삶을 짧게지만 다루고 있다.

이미 [더 라스트 가디언]의 결말은 정해졌다. 토리코와 소년의 우정은 지속될 수 없다. 일련의 모험 끝에 악습을 파괴했더라도, 그들은 두 종족 간의 경계선상에서 헤어져야만 한다. [더 라스트 가디언]의 결말이 그토록 처연한 멜로드라마로 다가온다면, 고립된 공간에서 성립한 피해자-가해자의 우정이 세계의 인습과 화해불능이라는걸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에다 후미토는 부조리한 법칙이 만든 피해자와 가해자를 억지로 화해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국의 카타르시스에 탐닉하지 않지 않는다. 그는 서로의 영역에서 삶을 이어가도록 암시하게 한다. [더 라스트 가디언]이 좀 더 성숙해진 작품이라면, 부조리한 법칙이 만들어낸 한 사회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대하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더 라스트 가디언]의 단점은, 우에다 후미토 뇌 속에서 이뤄진 정교하고 복잡한 사변들이 매끄럽게 구체화 되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그는 토리코의 조작에 시뮬레이션의 흔적을 보이지 않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과감한 생략을 가했다. 그 결과는 비디오 게임스럽지 않은 불편함과 피곤함을 감수해야 한다. 토리코를 불러와 지시하는 과정은 단순하지만 직관적이지는 않다. 그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있냐, 없냐에 따라 [더 라스트 가디언]에 대한 평은 갈릴 것이다. 그리고 오랜 개발 기간 동안 누적된 소스 코드의 복잡함으로 쾌적하지 못한 플레이라는 점도 아쉽다. 도중에 버벅거리는 부분이라던가 팝인 같은 부분은 긴 개발 끝에 지쳐서 다듬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어찌보면 타이밍을 놓친 불운한 게임이다. 이 게임이 예정대로 PS3 시절에 나왔다면, 기술적인 문제는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와 별개로 효율적이지 않은 명령 체계 역시 게이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하지만 우에다가 이 게임을 버리지 않고 개새를 깎은 이유도 납득이 되긴 한다. 적어도 [더 라스트 가디언]처럼 과감하게 레벨 디자인과 NPC 동반자, 인간과 비인간 캐릭터 간의 실험을 밀어붙인 게임은 보기 힘들다. [더 라스트 가디언]이 우에다 후미토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는 않겠지만,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치진 않았다는 증거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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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uetones - Slight Return

"어디 갔어? 너에겐 친구가 필요할 뿐이었지. 그저 부탁만 하면 되는 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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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룸 [Jalsaghar / The Music Room] (1958)

사티야지트 레이의 데뷔작인 아푸 삼부작은 네오 리얼리즘에 기반한 성장기였다면, 그 이후 영화들은 그 틀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동료들이 그랬듯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붙들려는 영화적 시도와 개성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네번째 영화 [뮤직 룸]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쇠락과 닮아간다. 이 영화는 아푸 삼부작처럼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하기엔 형식적인 매혹이 어른거리며, 양식화된 비극이라고 하기엔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의 근대화와 구세대의 몰락이라는 현지의 화두를 잡고 있다. 어느쪽이든 사티야지트는 [뮤직 룸]을 통해 평생을 추구할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상징과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음악실이 등장하는 이상,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서민이 아닌 유한계급의 사람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할 것이다. 이야기는 1920년대 인도에서 시작한다. 후주르 로이는 귀족 자제의 후예다. 그는 생활력이 없고 음악실에서 인도 전통 음악가들을 불러 소일한다. 하지만 잘못된 영지 경영과 더불어 서구 문명에 보수적인 후주르의 행태는 그를 점점 몰락의 길로 몰아넣는다. 이웃집 사채업자인 마힘 강굴리는 그 틈을 노려 빠르게 성장하지만, 후주르는 그의 성장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사실 연대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비스콘티에게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아직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고저택에 들어가지 않았던 시절이다.), [위대한 앰버슨가]라던가 영국 고딕 소설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원작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사티야지트와 원작자 타라상카 밴디오파댜아이가 어떤 의도로 이 이야기를 끌어왔는지, 인도 문학에서 이런 주제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애매한 추측에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다만 후주르 로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점들이라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영지의 음습한 분위기, 신화적인 몰락은 식민지 시절 수입된 영국 고딕 문학에 등장하는 몰락한 시골 귀족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는건 분명하다. 서구 문명에 대해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티야지트 본인 역시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직 룸]의 기이한 매력은 단순히 서구 문학 전통의 충실한 이식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인도 문화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일지도 모르겠지만, 후주르 로이의 몰락은 영국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비논리적인 박력으로 진행된다. 후주르의 아들과 부인이 사망하는 순간 절제된 샷은 되려 불안감을 스멀스멀 퍼트리며, 아무도 없는 음악실을 쓸쓸히 머무르는 후주르를 덩그러니 보여줄때 카메라는 후주르의 절망을 샹들리에와 같이 모조리 퍼올려낸다. 후주르가 음악실에 슨 거미줄을 건져내는 샷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폐허에 대한 매혹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평범해야 할 샷을 환각처럼 만들어버린다. 이 모든 것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흑백 영화의 음영을 마치 판화처럼 사용한다. 형식으로 보면 [뮤직 룸]은 예정된 몰락에 대한 공포를 그리는 공포 영화나 다름 없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사기일 것이다. 사티야지트가 음악실을 채우는 음악은 쉐나이를 비롯한 벵갈 전통 음악이다. 영화 속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타블로와 시타르 소리는 드론 음악 특유의 정적인 흐름과 울림이 있다. 사티야지트는 드론이 가지고 있는 음향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연주 장면을 찍을때 느린 줌인과 고정된 카메라는 마치 연주자가 영원히 연주할것마냥 그 순간을 담아낸다. 그때만큼은 [뮤직 룸]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후주르의 심상에 공감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샹들리에 위에 깔리는 시타르 소리는 그 점에서 [뮤직 룸]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면 추나 다름없다.

그러나 [뮤직 룸]은 후주르의 심상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후주르를 다룰 때 사티야지트는 냉정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3시간이 아닌 100분이다. 간결하다면 간결한 러닝타임이다. 비극적인 몰락을 다루지만, 사티야지트는 후주르를 다룰때 그가 현실적으로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제시한다. 하인, 부인, 심지어 정부나 그가 경멸하는 강굴리 가까지... 하지만 후주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음악실에서 멋진 전통 음악들을 소개하고 향유하는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지주의 운명이라고 자기합리화한다. 그 자기합리화의 허약함이 드러난다는건 명백하다. [뮤직 룸]은 사티야지트는 후주르의 인도 전통 예술에 대한 집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의 몰락을 가차없이 밀어붙인다. 어떨땐 지나치게 혹독하다 싶을 정도다.

자연히 [뮤직 룸]은 양가적일수 밖에 없다. 우리는 후주르의 몰락을 그러게 왜 저런 멍청한 선택을 하나, 싶은 심정으로 보면서도 그가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매혹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은 거부하기 힘든 법. 실상 사티야지트는 강굴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그의 영악한 처세술은 인정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예술엔 공감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강굴리의 음악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뮤직 룸]에서 사티야지트는 근대 문명과 전통 문명 사이에서 상반된 인물들을 배치하고 고민한다. 그 고민은 아시아가 맞이해야 했던 고민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은 구시대의 종말이다. 후주르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고집의 결과이지만, 기이하고도 장엄한 몰락이기도 하다. 그는 예정된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 화려하게 선형적인 몽타주를 흐트러트리고 죽는다. 불꽃처럼 불타오르는 결말을 정리하며 사티야지트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수 없더라도, 후주르는 쉽게 타자화할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후주르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돈키호테적인 사랑은 정녕 가치 없었던 것일까? 그의 비극이 시대와 전혀 연관 없는 것일까? 후주르는 그 점에서 인간적인 결함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캐릭터다. [뮤직 룸]은 그 인간적인 결함과 시대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몰락의 애잔함을 정교한 영화적 형식과 맞물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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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Sweet - Girlfriend

제가 미국적인 음악을 꼽으라면 몇 가지 떠오르는 예가 있는데, 톰 페티 (고인의 명복을.)라던가 미국제 하드 록 전통과 건강한 코러스와 멜로디가 결합된 파워 팝. 지금 올라온 매튜 스위트가 매우 미국적인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드와이트 트왈리라던가 위저, 파운틴 오브 웨인 같은 뮤지션들을 떠오르게 한달까요. 버드와이저 맥주 까고 AM 라디오 틀고 막춤 추면 좋을법한 곡입니다. 긍정적인 의미로요.

근데 이 뮤직비디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양놈들 참 이런 삘 좋아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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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깊은 욕망 [神々の深き欲望 / The Profound Desire of the Gods]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시작은 바다 생물들의 모습이다. 꿈틀거리는 이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해보인다. 이 위험천만한 생물들은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가 그랬듯이 이마무라는 자연 근처에서 영화를 시작할때, 강렬한 생물 이미지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마무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의 이미지를 잘게 쪼개 나열한 뒤 그 위에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배치한다. 그 다음 우마와 네키치로 대표되는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등장시키면서, 도덕률을 어기고 본능에 따라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자연과 근친 상간이라는 두 이미지는 [신들의 깊은 욕망], 나아가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앞에서 신 남매의 근친 관계와 섬의 탄생을 다루는 전래 민요를 부르는 가객의 모습이다. 인류 문화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예술 양태를 꼽으라면 노래와 그림, 연극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깊은 욕망]을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다. 가객의 노래는 [신들의 깊은 욕망]을 휘감는 원초적인 자연과 근친상간적인 관계가 신화적 기반에 바탕에 두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마무라는 영화라는 매체가 문명에 기반한 것이며, 이 서사를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선 신화적인 화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입부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섬에 사는 우마와 네키치는 근친상간적 관계이며 네키치에겐 전 부인에게 얻은 카메타로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토리코라는 자식이 있다. 네키치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바다에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낚시를 하는 바람에, 바위를 떨어트릴 구멍을 만들라는 벌을 받는다. 한편 우마는 류 류겐이라는 지역 유지의 첩으로 무녀일을 하고 있으며, 카메타로는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때 카리야라는 측량 기사가 제당 공장 개발건으로 도쿄에서 내려온다. 전임 시마지리를 찾아온 카리야는 어떻게든 공장 개발을 하고 싶어하고 카메타로는 카리야를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네키치의 방해와 더불어 카리야는 토리코에게 빠져버린다. 하지만 개발의 손길은 서서히 쿠라게 섬으로 다가오고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맞는다.

[신들의 깊은 욕망]의 절반은 기가 약한 문명인이 쿠라게 섬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끌려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리야는 개발을 위해 섬으로 찾아오지만, 옛 동료는 섬에 동화해버렸다는걸 발견한다. 카리야는 측량을 위해 섬의 숲으로 들어가지만, 마을 사람들과 문명의 연계를 담당하는 류는 그 영역이 신성한 무녀들의 영역이라고 뜯어말린다. 카리야의 눈에는 쿠라게 마을은 알 수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지만, 그는 혼자 왔기에 마을 전체의 규칙을 깨부술 수 없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카리야의 의지는 점점 시들어가고 때마침 끼어든 네키치의 계략과 토리코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버린다. 카리야는 후토리 가에 편입되어 있는 동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반면 후토리 가는 복잡하다. 이미 [인류학 입문] 같은 영화에서 근친상간적 관계와 기괴한 욕망에 탐닉하며 광기에 빠져드는 인물을 차분히 보여줬던 이마무라 쇼헤이는 후토리 가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댄다. 후토리 가의 부자 네키치와 카메타로는 둘 다 쿠라게 마을의 아웃사이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며 마을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탈주의 방법은 차이가 난다. 네키치 부자가 무인도로 건너와 섬 밖을 빠져나가는 걸 얘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네키치는 폭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지만, 실상은 마을에 내려오는 미신에 매혹되어 있다. 그는 근친상간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돌이 떨어질 구멍을 파며, 개발 계획에 대해 마뜩치 않아한다. 구멍에 돌이 들어가는 순간 네키치는 우마와 함께 신화에 등장하는 무인도에 정착할 생각이다. 네키치는 그 점에서 신화적인 욕망과 탈주를 꿈꾸는 자다.

반대로 카메타로는 처음에 카리야 기사의 조수로 배치되는 장면도 그렇지만, 쿠라게 마을 자체를 지긋지긋해한다. 카메타로는 문명화된 술집과 카리야 기사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 문명 사회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카메타로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탈주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지만, 그가 선택한 탈주 방법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런 식으로는 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카리야 기사로 대표되는 본토의 문명만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카메타로는 가문에 내려오는 근친상간 관계를 거부하는 자다. 영화 초반 토리코의 유혹에도 카메타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짜증만 낼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남자들 사이엔 여자들이 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끌어가는 기괴한 에너지는 근친상간 관계의 목표이자, 주체인 여성들에게서 비롯된다. 이 둘이 마을의 샤머니즘 전통과 연계되어있는 캐릭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지역 유지의 집에 강제로 머물며 성적인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오빠 네키치와의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마도 인상적이지만 토리코는 이마무라가 만들어낸 여성상 중에서도 강렬하기 그지 없다. 정신박약을 앓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인 토리코 앞에서 전통과 문명은 일시적으로 대립이 무화된다. 토리코가 미국에서 온 속옷을 입고 좋아하는 장면과 신내림을 받는 장면은 토리코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두 세계를 포섭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토리코의 불가해함은, [신들의 깊은 욕망] 전체를 이끌어가는 우연과 초자연적 전개와 맞물려 들어가며 영화의 신화적 성격을 강화한다.

이마무라는 [인류학 입문]에서도 그랬듯이 근친상간을, 문명의 도덕률을 반하는 행위며 자연과 가깝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매혹을 보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이 문명과 자연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서사를 진행했던 [인류학 입문]과 달리 자연에서 진행되는 영화인지라 이런 대비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리야와 토리코의 관계가 있다. 카리야는 토리코랑 사랑을 나눌때도 마치 여동생 다루듯이 다루고, 주변 사람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진짜 근친상간 관계인 네키치와 우마에 이르면 더 할말이 없다. 네키치와 우마의 관계는 어떤 사랑보다도 순수하기에 더욱 기괴하다. 네키치가 구멍을 파는 행위는, 지극히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기괴한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국엔 승자는 현대 문명이다. 역설적으로 그 문명이 들어서는 과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쿠라게의 미신에 속해있던 후토리 가의 가장 야마모리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뒤 죽는다. 그리고 돌이 구멍 속으로 들어간 뒤 인물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우마는 노로로써 힘을 잃고, 토리코가 대신 우마를 잇는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토리코가 노로의 힘과 의무를 이해하기 만무하다. 카리야는 도쿄로 돌아가버리고 노로로 대표되는 마을의 샤머니즘적 전통은 몰락한다. 여기서 이마무라는 미신을 지탱하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미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때 어떻게 사람들은 스스로 전통과 미신을 폐기처분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네키치와 우마의 파멸 시퀀스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신화/제의적 속성을 밀어붙이는 시퀀스다. 이마무라는 여기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망망대해에서 도망가려는 네키치와 우마, 그리고 그들을 쫓는 마을 사람들의 동선을 서스펜스를 빌어 쉴새없이 밀어붙인다. 특히 말 없이 가면을 쓴 채 네키치와 우마를 쫓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호러 영화 속 살인마와 다름없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 자체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증오와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은 작은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이 와중에 카메타로는 문명 사회로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와 고모를 살해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폭력을 받아들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과거의 복수다.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쿠라게 마을은 비행장과 코카콜라가 자연스러운 곳이 된다. 영화 후반부에 사라진 카리야는 아무렇지 않게 본처와 외가 사람들을 끌고 자본가 계급 행사를 한다. 카리야 앞에 나타난 건 얼마 전 고향으로 돌아와 기관사가 된 카메타로다. 카리야는 변해버린 쿠라게 마을을 둘러보며 미신을 믿었던 마을은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한다. 하지만 고민에 잠겨 있는 카메타로는 카리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쿄에 있을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그 날 있었던 일이 마을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이에 대답하듯이 이마무라는 기차를 운전하는 카메타로 시점 샷으로 수풀 사이로 뛰어가는 토리코를 툭 던져놓는다. 문명의 아이콘인 기차는 갑자기 멈춰서고 카메타로는 극도의 충격과 흥분 상태에 빠진다. 카메타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카메타로 다음에 우마를 묶었던 붉은 돛을 단 빈 배가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분명한 것은 토리코와 붉은 돛의 샷은 유령처럼 홀연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쿠라게를 상징하는 토리코와 우마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리야 기사는 토리코 얘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즉슨 카리야는 토리코랑 이 섬 자체를 백일몽처럼 여기고 있다.)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토리코는 무녀의 춤을 추듯이 격렬하게 등장해 기차를 신경쓰지 않고 달려가다가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토리코로 대표되는 대자연은 자신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킨 쿠라게 마을과 본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이마무라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쿠라게 마을은 과거의 미신을 벗어던진 곳인가? 이마무라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쿠라게 마을의 근대화는 결국엔 제물이 필요했고, 이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다시 폭력적인 신화적 제의를 거쳐야 했다. 이마무라는 문명은 쿠라게 마을에서 또다른 이름의 미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마무라는 그 과정을 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하는 문명과 작은 사회의 폐쇄성을 경멸한다. 그리고 언젠가 대자연과 대자연에서 비롯된 전통은 유령처럼 돌아와 근대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이 결말은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과 비슷하면서도 더 복잡한 인류학적 화두를 찌르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불러일으켰지만 [신들의 깊은 욕망]은 그 점에서 쇼치쿠/닛카츠 뉴웨이브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희대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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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예고편

이 걸작을 개봉관에서 볼 수 있다는건 좋은데 시간대... 괜찮을련지... (4시간짜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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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3

세상에 2017년도 얼마 안 남았어.... 작년 이맘때 최순실과 박근혜 때문에 시위 나가던게 엊그제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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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 [Ο Θίασος / The Travelling Players] (1975)

한 사람이 등장해 [양 치는 처녀 골포]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선언한다. 다음 샷.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역에 도착한다. 카메라는 그들이 역 앞에 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멈춰 섰을때 카메라는 그들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이 프레임이 친숙하다고 생각하다면, 정확하게 봤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이 등장인물들을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다룬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뜬다. 1952년. "고참들이 있었고 젊은 배우가 있는" 이 유랑 극단은 옛날에 들렀던 마을 에이온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는 유랑극단이 건물로 들어가고 난 뒤, 갑자기 유세 방송을 바꿔버린다. 파파고스 (로 위장한 그리스 독재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는 괴벨스와 메탁사스로 바뀌고, 국가소년단원들이 단복을 입고 그들을 맞이해야 한다.

[유랑극단]은 [양 치는 처녀 골포]를 올리려는 극단의 시도와 좌절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시작해 전후 독재 정권에서 끝난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극단을 떠나가고 아이가 태어나고, 새로운 단원이 들어온다. 그들을 좌절로 밀어넣는 것은, 그리스 독재 권력이다. 파파고스와 괴벨스, 메탁사스가 하나의 시퀀스에서 음향 몽타주로 얽히는 장면은 [유랑극단]의 정치적 지형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앙겔로풀로스에겐 2차 세계 대전 파시즘과 전후 파시즘이 하나의 흐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하나의 몽타주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민중들은 다르다. 사실 [유랑극단]의 서사를 복기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듯 하면서도, 헷갈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설명 대신 앙겔로풀로스가 이끌어오는 이름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다. [유랑극단]의 시퀀스는 단일한 시간이 아닌 여러 개의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형적으로 흐르는듯 하다가 긴 독백을 빌어 과거를 회고하거나 반대로 기나긴 롱테이크 속에 돌연 시간을 뛰어넘는다. 배우들은 카메라를 보면서 당시 시대를 설명하거나, 현실과 연극 무대의 연출이 겹쳐저 아이러니한 신화적 비극을 만들어내거나, 사람들이 사라진 텅 빈 화면 위에 울려퍼지는 전쟁을 암시하는 음향들은 끊임없이 화면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둔다. [유랑극단]은 하나의 몽타주로 이뤄진 파시즘이 어떻게 역사를 난도질했는지, 의도적인 분절을 통해 관객들이 인식하길 유도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 민중을 다룰때 [유랑극단]은 그리스 신화를 빌어온다. [유랑극단]의 등장 인물들은 엘렉트라, 오레스테스, 아가멤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원형적 비극을 그리스 현대사와 연결시킨다. 한국인들이 [유랑극단]를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 비극이 어떻게 재해석되어 있는지는 완벽하게 이해하긴 쉽지 않을것이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비극적인 관계에서 유추할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유랑극단]의 서사가 퇴장과 이별을 통해 전진한다는 점은, 허우샤오셴의 [비정성시]만큼이나 한국인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한국사를 닮아있다. [유랑극단]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폭력적인 흐름에 자유롭지 못하고 숙명론적인 퇴장을 받아들어야 한다. [유랑극단]을 만들면서 앙겔로풀로스가 자크 리베트의 영화를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세계를 무대처럼 다루고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서사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랑극단]은 리베트 영화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 폭력적인 흐름은, 상술했던 음향 몽타주와 파시즘과의 관계랑 연계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음향 몽타주는 총소리다. 총소리가 들릴때마다 모여있던 민중들은 그 소리에 놀라 도망간다.)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는 그 큰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 빨치산이 되지만, 그들은 영화 말미에 패배한다. 심지어 오레스테스는 밀고자였던 후임 단장을 처벌했음에도, 유랑극단의 일그러짐 나아가 그리스사를 정화하지 못한다. 와중에 남아있던 엘렉트라는 강간당한다. 이들의 싸움과 패배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조각나버린 영화적 시간에서 탈출하려는 시도와 실패를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을 가로지르며 행진할 수 있는 건 나치-왕당파-파시스트 뿐이다.

영화 속 [양 치는 처녀 골포]가 지극히 통속적인 희극임에도 비극으로 다가온다면, 끊임없이 일관된 파시즘에게 짓눌림에도 극을 올리려는 시도가 정치적 저항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희생양이 되던 영국과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매력에 이끌려 그리스를 떠나더라도, 좌파 투쟁 끝에 처형당하더라도 유랑극단은 끊임없이 [양 치는 처녀 골포]를 올리려고 한다. 그것은 픽션이기에 가능한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전향 선언을 한 필라데스와 반대로 옥사한 오레스테스를 목도한 엘렉트라가 떠나버린 여동생 크리소테미스의 아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슬프다. 허우샤오셴의 가족들이 그 비극 속에서도 식탁으로 돌아온다면, 앙겔로풀로스의 극단원들은 희극을 올린다. 한마디로 [유랑극단]은 시지포스적인 비극이다.

그리고 카메라가 있다. [유랑극단]의 카메라는 처연하고 아름답게 그 분절된 시공간과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 앙겔로풀로스의 카메라는 프레임 속 그리스 민중들을 군무처럼 다룬다. 하지만 그들은 1940년대에서 50년대로 넘어온 파시스트들처럼 분절된 시공간을 넘지 못한다.그들은 오직 서사를 찢고 등장하는 소격 효과 시퀀스에서만 자신의 비극을 토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격 효과가 끝나면 다시 역사의 비극에 투신해야만 한다. 단체이면서도 뿔뿔이 흩어져만 가는 유랑극단은 그 점에서 지극히 앙겔로풀로스적인 피사체다. 어떤 지점에서 [유랑극단]은 30년 이상을 이어갈 앙겔로풀로스만의 인물 동선을 완성시킨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끝은 다시 에이온에 도착한 유랑극단이다. 하지만 이 결말 시퀀스의 시간대는 1952년 이후가 아니라 1939년이다. 이 결말이 당혹스럽다면, 시작 (1939년)과 끝(1952년)이 뒤집어져 있기 때문이다. 앙겔로풀로스는 수미상관적인 미장센을 이용해 루프물마냥 결말을 짓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두 쇼트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뒤집혀진 결말은 영화의 정치적 지향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며, 1970년대 중반 그리스 현실에 대한 앙겔로풀로스의 대답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1970년대에 만들어졌음에도 끝내 1952년을 넘지 못하고 30년대에 50년대 사이를 계속 헤맨다. 그리고 헤멤의 끝에서 [양 치는 처녀 골포]는 겨우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는 [유랑극단]을 만들면서 막 파파도풀로스 독재 정권에서 해방된 그리스가 어디로 가야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유랑극단]은 그 점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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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de - Twisterella

사실 라이드가 멜로디를 잘 쓰는 밴드이긴 합니다만, 아마 라이드의 멜로디가 가장 빛나는 곡 중 하나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무거운 베이스라인 뒤에 나오는 맑고 명징하게 울리는 기타 훅은 슈퍼카나 일렉트릭 글래스 벌룬 같은 후배 슈게이징 팝을 위한 안내서가 된 게 분명합니다. 동시에 브릿팝과 슈게이징 간의 가교가 어땠는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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