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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 The Gleaners and I] (2000)

아네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목을 듣고 그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다룰 것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르다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지점 역시 밀레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는 직접 보거나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 한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이 다큐멘터리는 미술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바르다가 그 그림을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삭을 줍는다'라는 행위다. 버려진 이삭을 줍는다는 행위는 상품 가치를 잃은 잉여 생산물을 주워서 쓰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수도 있을 것이다. 밀레가 살았던 시대는 1차 산업혁명이 완료된 19세기였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체제가 정착한 20세기 이후 현대 사회에도 그런 '이삭줍는 사람들'이 있을까? 바르다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바르다는 이삭으로 대표되는 대량 자본주의의 잉여 생산물이 어떻게 재활용되는가를 추적한다. 불량 판정을 받고 처분되는 감자를 쓸어다 먹는 사람들, 폐품을 주워다 예술품을 만드는 예술가, 파장하는 시장에서 음식을 주워다 먹는 노숙자... 많은 사람들이 바르다의 카메라 앞에서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증언하고, 이에 대한 바르다 자신의 코멘트도 이어진다.

바르다가 좌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실제로 바르다의 영화는 페미니즘과 좌파적 관점을 빼놓으면 분석이 불가능해진다.), 작 중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잉여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윤택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다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잉여 생산물의 가치를 판별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아닌, 당장 먹고 살기에도 절박한 빈민들이나 관점 자체가 다른 아웃사이더들이다. 

바르다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버려지는 잉여 생산물이 과연 사회에 통용될 수 없는 '불량'인지를 묻는다. 이 다큐에서 적당한 가공 과정을 거치고 나면 버려진 잉여 생산물들은 더 이상 잉여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노숙자 보호소에서 거주하며 공부하는 청년은 그 점에서 바르다의 질문과 대답을 구체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그 이후]를 봐야 되겠지만 적어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안에서 이 청년은 지식과 삶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재분배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아네스 바르다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고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이후 영화들처럼,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잠시 불었던 DV 카메라 혁명을 빼놓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이며, 주제 의식하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르다는 DV 카메라가 누벨 바그 세대의 정신을 재해석할 수 있으며, 필름 중심의 기존 영화 제작 체계를 전복시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다큐에서 DV 카메라는 페드로 코스타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다. 바르다는 DV 카메라 하나를 들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정 도중에도, 작업 구상 도중에도 즉흥적이고 자유연상적으로 이미지를 채집하고 선별해 배치한다. 바르다는 이를 통해 카메라와 자신의 몸을 일체화시킨다. 바르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카메라 렌즈도 향하고 반대로 렌즈가 머무는 곳에 바르다의 시선도 머문다. 바르다는 이 과정에서 어느새 노년을 맞이한 여성 감독으로써 자신을 성찰하며, 누벨바그 시절 거리로 나가 생생한 배우들과 풍경을 잡아냈던 성취를 2000년대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디지털 카메라는 그 점에서 바르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도구기도 하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사라지는 과거로 남는걸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바르다는 영화 속에서 주제가와 가까운 랩을 시전하기도 한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를 통해 그림 속 이삭을 줍는 행위를 사회경제학적 관점과 DV 카메라로 대표되는 미학적 관점, 여성의 관점을 결합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원제 Les Glaneurs Et La Glaneuse는 그 점에서 프랑스어 특유의 '명사의 성' (남성형 Le와 여성형 La.)을 이용해 복잡미묘한 통찰을 함축하고 있다. 바르다는 남성형으로 이뤄진 '이삭 줍는 사람'에다 여성형으로 이뤄진 La Glaneuse를 덧붙여 이미지를 줍고 선정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난삽해보이지만 흥미로운 폭풍이다. 경제학적인 성찰을 다루면서도 바르다 자신의 독백과 사소한 일상을 스케치하는 클립들이 튀어나오는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로 보자면 끊임없이 불어나는 눈덩이를 (혹은 게임 [괴혼]에 여러 물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별) 연상케한다. 때문에 정돈되어 있지 않고 마구잡이로 진행된다고 느낄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을 줍는 행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바르다는 이 다큐가 어떤 모양새를 취해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치밀한 사유를 거쳐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바르다는 동료인 크리스 마르케와 피에르 롬의 [아름다운 5월]이 보여줬던, 중심이 없는듯 하면서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인터뷰와 자료화면들 간의 사유를 추구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21세기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20세기의 역사로 사라질듯 보였던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바르다 자신도 예측과 달리 90이 되어서도 신작을 내놓을 정도로 정정한걸 보면 이 다큐가 어떤 활력이 되었던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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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Peter - Every Planets Son

여러분 [라스트 엑자일]이라는 애니메이션을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 애니메이션에서 오프닝을 부른 가수가 오키노 슌타로였죠. 하지만 이 사람이 원래 비너스 피터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는건 잘 모르실겁니다.

사실 그럴만도 한게 비너스 피터는 오야마다 케이고 (플리퍼즈 기타)의 트리토리아 레이블 초창기 멤버였지만 그리 히트한 밴드는 아니였거든요. 오죽했으면 국내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은 1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팔리고 있을 정도니깐요. 플리퍼즈 기타가 정립한 시부야계 특유의 세련된 노선을 대대적으로 내세운 밴드인데도 히트를 못 친게 이상하긴 합니다. 매드체스터의 충실한 이식까지는 좋았지만, 당대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앞섰던 것일까요. 훨씬 선배도 살롱 뮤직도 컬트로 끝난걸 보면 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곡도 딱 매드체스터 음악을 열심히 공부한 티가 난다라는 느낌의 곡입니다. 독자적인 노선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지만 그 자체로는 즐길만한 곡이라고 할까요. 쟁글쟁글 연주에서 시작해 사이키델릭하게 밀어붙이는 오버더빙 기타 사운드와 브라스가 스톤 로지즈나 제임스, 샬라탄즈 같은 그때 그 시절 밴드의 정수를 체화하고 있어서 귀가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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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의 첫 장면은 황급하게 노빌의 저택을 빠져나가는 하인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각자 이유를 대면서 저택을 빠져나가지만 그 이유가 알리바이라는건 명백하다. 왜냐하면 저택엔 곧 부르주아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인들의 머릿속엔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마치 모종의 사실을 깨닫고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되겠어라고 외치며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티는 계속되어야 하고, 하인들이 없어도 그들에겐 집사가 있다. 노빌 부부를 위시한 부르주아들은 하인들이 빠져나간것도 모르고 예정된 파티를 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음식, 멋진 음악, 아름다운 그림들... 부뉴엘은 하인들이 알수 없는 이유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잊은 것마냥 이들의 파티를 보여준다.

바보 같은 부르주아. 이게 지옥의 저택인지도 모르고! 부뉴엘과 원작을 쓴 호세 베르가민이 마련한 이 저택은 예삿 저택이 아니다. [절멸의 천사]는 도입부에 등장했던 불가해한 탈출이 가져다주는 카오스를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먼저 피아노 독주회 도중 그 유명한 닭발이 등장하는 샷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이 닭발이 왜 등장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절멸의 천사]는 이유를 대면 지는 초현실주의자가 만드는 영화다. 그러니 닭발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소도구로써 인식하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독주회라는 우아한 상황에서, 고급 레스토랑에도 안 어울릴법한 닭발은 시공을 뒤흔들 폭풍의 전조다. [절멸의 천사]는 그 유명한 설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문명의 보호를 받는 부르주아를 야만으로 퇴화시키는걸 보여주는게 최우선인 영화다. 닭발은 연주회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부뉴엘의 중지 손가락으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런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소품과 거기서 기반한 비논리적인 샷들은 [절멸의 천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닭발을 꺼내는 샷을 기점으로 부뉴엘은 영화의 개연성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첫번째 징조는 의지의 삭제다. 부뉴엘은 아무렇지 않게 파티가 끝나고 나가려는 인물들을 붙잡아 뇌세척을 하고 재운다. 이 과정이 은근슬쩍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의심하지만 그 의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한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 계급은 다양한 공간에서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릴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부르주아 문화의 중심이지만 역설적으로 생존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인 접대실"에다 가둬버린다. 피아노와 소파, 미술품이 밥을 먹여주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한정된 공간 밖에 머물수 없게 된다. 심지어 그들을 보좌해줄 하인들조차 없다. (재미있게도 부뉴엘은 집사장도 부르주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간 관리자도 노동자 계급을 탄압하는 부르주아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본 것일까?)  [절멸의 천사]는 부르주아의 저택이 '생존과 본능의 공간'과 '문명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부르주아를 보살피는 수족이 없으면 무너지는 곳이라는걸 폭로한다.

부뉴엘과 베르가민은 낄낄거리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캐릭터의 이성을 붕괴시킨다. 의지가 삭제된 캐릭터들은 그래도 여기 머무르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갈려고 생각은 하지만, 그 경계선상에 서는 순간 중요한 연결고리를 잊고 '아 그 뭐더라.' 하면서 돌아선다. 등장 인물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악랄하게도 그 해결책은 중요한 '선'을 넘지 못한다. 절박한 갈망은 있되, 의지와 해결책은 원천봉쇄된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초반부에 등장한 하인들의 도주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절멸의 천사]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언제든지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빠져나갈수 있지만 부르주아는 그러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웃는다.

접대실의 물자가 바닥날수록 합리적으로 판단할 이성은 본능 앞에서 초라해진다. 절정인 세번째 단계는 당연하게도 아포칼립스적 생존 투쟁기다. 부르주아는 이 순간부터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근친상간, 유치하지만 무시무시한 투닥거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자, 굴러다니는 동물뼈, 카발라에 심취해버린 부르주아들, 마약, 잘린 손의 호러스러움... 부뉴엘은 중간에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 시퀀스를 삽입하면서 그들을 한껏 비웃는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비슷하게 부르주아의 문명 속 고립극을 다룬 J.G.발라드의 [하이 라이즈]의 선조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난처함은 구경거리가 된다. 

부뉴엘은 이 황당한 문명 속 아포칼립스를 벽에 있는 수도 파이프를 뜯어서 목을 축이는 시퀀스와 갑자기 저택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동선으로 극대화한다. 문명의 화려함을 누리기 위해 벽 뒤에 은폐한 수도 파이프는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기계장치의 베르가민과 부뉴엘이 바깥에서 보낸 양은 자유롭게 '선'을 넘나들며 부르주아를 희롱한다. 그 앞에 선 부르주아들은 굶주린 짐승과 다름없다. 부뉴엘은 은폐된 소도구 (파이프)의 폭로와 두 동선의 대조 (갇혀있는 부르주아와 저택 밖에서 들어온 양)로 부르주아의 허울을 벗겨낸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는 의지만 사라진다면 문명과 가장 멀어져 추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덤으로 이뤄지는 가톨릭 모독은 더욱 노골적이다. [절멸의 천사]에서 가톨릭과 가톨릭 예술은 말그대로 변기통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의 설정이 상당히 인공적이고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 속 부르주아들은 현실에 속해있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창작자의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쥐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 속 캐릭터 설정은 일관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단적으로 이 영화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부르주아 캐릭터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성격보다는 일련의 기행들로 기억된다. 심지어 각 시퀀스 별로 캐릭터들의 설정이 일관성도 없다. 하지만 일관성 없이 캐릭터가 그려짐에도 영화의 카오스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에 더욱 매정하게 다가온다. 부르주아의 캐릭터 따윈 아무런 상관없다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캐릭터들을 그냥 멍청이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들을 모욕하는 법을 알고 있다. 상술했지만 이 부르주아들은 나름 이성적으로 재난을 풀려고 하는데, 이 점 때문에 [절멸의 천사]은 오히려 더 매정해진다. 그들은 똑똑하지만 베르가민과 부뉴엘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여기다 부뉴엘은 갑작스럽고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담은 샷과 몽타주로 서사를 흔들어놓고, 캐릭터의 일관성을 발기발기 찢어가면서 카오스를 만든다. 부뉴엘은 그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던가 데이빗 린치로 이어지는 전후 현대 영화의 비논리적 구성과 후대 "병맛"의 선구주자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절멸의 천사]는 명성과 달리 디씨 막장 만화들처럼 가볍게 즐기면 되는 영화다.

[절멸의 천사]의 결말 부분은 싱거워 보인다. 이 영화는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기대할법한 전멸로 끝나지 않는다. 부뉴엘은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외국인인 레티시아와 피아니스트 실비아에게 준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피아노 독주회를 재현하는 것으로 저택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야만의 끝에서 예술와 문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그들은 간신히 그 공간을 빠져나올 의지를 얻게 된다. 예술에 대한 긍정일까? 그것보다는 상황 자체를 재구성할 논리를 기어이 부여함으로써 탈출했다고 보는게 좋을듯 하다. 결국 부르주아들은 예술과 외부인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올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견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부뉴엘은 그 다음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성당으로 장소를 바꿔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뉴엘은 예정된 아포칼립스를 보여주지 않고 군중에게 발포하는 경찰과 또다시 흘러들어오는 양떼를 보여주면서 좀 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부뉴엘은 부르주아의 꼴불견은 총을 쏴댈 상황까지는 아니였지만, 가톨릭의 꼴불견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풍경이라는걸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스페인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부뉴엘 자신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끝으로 부뉴엘은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데, 부뉴엘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멕시코 시절을 총결산하고 멕시코보다 좀 더 자유로운 영역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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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 Sidran - Get It Yourself

봄이니깐 땡기는 앨범 1. 보즈 스켁스랑 협업했던걸로 알려진 뮤지션인데, 현지에서도 그렇게 유명한 편은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재즈 영향이 있긴 한데 틴 팬 앨리라던가 193-50년대 스탠더드 팝/재즈가 1970년대 휭크랑 혼종을 이룬 팝을 하는 분입니다. 소울적인 색채가 나긴 하지만 좀 더 산뜻하고 AOR 그쪽에 가까운 느낌? 이맘때 가벼운 날씨하고 잘 어울리는 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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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박근혜 탄핵! 오 예 신 난 다

-부모님은 큐슈 여행을 가신다고 하는데, 왠지 음반 쇼핑하러 다시 일본 가고 싶어지네요. 아 사고 싶어라 서니 데이 서비스 [도쿄] 박스셋.

-형이 직장 취직 후 리얼하게 곶통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일상에 찌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적나라해서 보기 힘들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죽음의 의미를 체감하게 됩니다. 특히 [로건] 보고 난 뒤 (예상하긴 했지만) 후유증이 심했습니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던 어떤게 끝났구나 그런 느낌. 그 시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느낌. 그런 생각을 할때마다 좀 두렵고 그렇습니다. 알고 있는게 전부 남아있지 않고 오로지 새로운 것만으로 채워진 세상이 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네요. 노인들이 과거에 매달리는 이유도 그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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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에드만 [Toni Erdmann] (2016)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때, 약간의 신랄함을 동반한 유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때 그 예감은 완전히 박살났다. 영화의 첫 샷은 문이다. 금방이라도 열릴것 같은 문은 예상과 달리 빨리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드디어 택배 기사가 나타나고 문이 열리지만, 분장하고 나타난 토니 에드만은 생뚱맞다. 유머는 빗나가고, 리듬과 리액션도 그렇게 활기차지 않다. 빈프리트/토니 에드만은 사람들이 웃길 바라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할 뿐이다. 결국 그는 허겁지겁 유머를 접을수 밖에 없다.

차라리 이 영화의 도입부는 초라하게 몰락한 히어로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하고 닮아있다. 빈프리트 몸에 붙어있는 혈압측정기는 그의 육체가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으며, 피아노 강습은 짤린데다 부인과는 이혼한지 오래다. 같이 살고 있는 개 역시 죽어가는 중이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토니 에드만]은 [로건]보다도 훨씬 매정하다. 빈프리트는 자신이 슬프고 지쳐있다는걸 직시하지 못하고 계속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던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토니 에드만]은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세상에 사는, 어느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늙은 피에로의 분장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도입부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히어로의 불가능성'과 연계된다.

[토니 에드만]를 이해하려면, 샷 내 대화와 행동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것이 어떤 뉘앙스를 띄며 맥락을 형성하는지 봐야 한다. 먼저 주목해야 하는 대화는 빈프리트와 어머니의 대화다. 죽어가는 개를 안락사시키지 그러냐라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빈프리트의 대답은 웃기기 보다는 날이 서 있다. "양로원에서 안락사 일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를 안락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것."이라는 빈프리트의 대답은 블랙 유머적 비꼬기에 가깝다.  대체 왜 빈프리트는 어머니를 그런 가시돋힌 말을 내뱉는 것일까? 어떤 멜로드라마적 사연이 있어서?

아니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두 캐릭터의 세대와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주목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영화가 독일 영화라는 것도 주지하길 바라고 있다. 이 부분은 단서가 없으면 독일 바깥 사람들은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행히도 아데가 영화 마지막에 단서를 던져놨기에 놓쳤더라도 그 부분을 본 뒤 이 영화의 도입부를 다시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빈프리트 어머니와 빈프리트는 독일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전후 세대인 빈프리트는 그걸 알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세대가 저지른 나치 범죄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빈프리트의 대사는 죽음은 당신 생각과 달리 간단히 이뤄지는게 아니지만, 어머니와 빌리를 사랑하니 안락사시키진 않겠다라는 복잡미묘한 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그 복잡미묘함과 간극이야말로 [토니 에드만]이 영화 내내 구축하고 있는 이상한 리듬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다.
 
서로 사랑하지만 어쩔수 없이 배어있는 세대의 결점에 충돌하고 밀려나는 [토니 에드만] 속 가족 관계는 빈프리트와 그의 딸 이네스로 이어진다. 그들이 영화에서 처음 만났을때 빈프리트의 분장이 이네스의 옷에 '묻는다'. 이네스는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얼룩을 지워내려고 애쓴다. 얼룩이 묻고 그걸 닦아내려고 애쓰는 행동은 [토니 에드만] 내에서 자주 나오는 행동이며, 상술한 세대론과 겹쳐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네스는 아버지의 얼룩과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워내려고 한다. 그에 대답하듯이 이 시퀀스에서 관계의 어색함은 더욱 증폭된다. 아버지는 딸의 깜짝 생일 파티가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들어왔고, 딸은 이 상황을 의례적인 일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일로 도피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랑 대화를 나누려고 할때 이 불편함과 어색함은 실체화된다. 자신을 일부러 외면하는 딸에게 차라리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는 아버지의 블랙 유머적 비판은 딸의 무덤덤한 환영에 막혀버린다. 소통의 시도였던 유머가 통하지 않는 셈이다.

[토니 에드만]이 놀라운 지점은 애완견 빌리의 죽음 시퀀스와 딸을 찾아가는 첫 장면이다. 빈프리트의 슬프고 지쳐있는 감정이 처음으로 구체화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젠 빈프리트에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는 빌리의 죽음을 애도할줄 모르며, 루마니아로 떠나버린 딸은 빌리를 애도할수도 없다. 아내는 이미 타인이 된지 오래다. 오로지 혼자서 애도를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빌리의 무덤을 판 뒤 마당 한 구석에 빈프리트가 쓰러져 있는 샷은 그 점에서 슬프고 두렵다. 이 샷에서 빈프리트는 빌리의 시체랑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샷이 끝날때까지 그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 장면만 떼놓고 보면 빈프리트는 빌리를 따라 죽어버린것만 같다. 마렌 아데는 이 시퀀스에서 빈프리트를 정물처럼 다루면서 죽음과 애도, 슬픔의 감정을 한 세트로 묶어서 보여준다.
 
[토니 에드만]은 여기서 장면을 끊고 바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있는 이네스가 일하는 직장으로 넘어간다. 아마 어느정도 영화의 언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황했을 것이다. 독일과 루마니아가 아무리 EU로 국경을 열었다고 해도, 물리적인 거리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빈프리트 (나아가 몽타쥬)는 물리적 거리를 무시한 채 집에서 이네스의 직장으로 워프한다. 그가 하는 행동은 더 황당하다. 출근하는 이네스 앞에서 마치 자신이 왔다는걸 시위하듯이 스윽하고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네스는 몇 번 슬쩍 보고 난 뒤 그냥 재빠르게 가버린다. 이네스는 빈프리트가 왔다는걸 알았지만, 거기서 아는체했다면 자신의 커리어가 작살난다는걸 알기에 그 자리에서 빈프리트를 무시한다. 물리적 거리를 무시하고 딸 앞에 나타난 빈프리트의 동선이 슈퍼히어로적 황당함과 비현실성이 묻어나온다면, 이네스의 무시는 현실의 냉엄함을 드러낸다. 영웅 서사에서 영웅은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각성한다면 빈프리트는 빌리의 죽음을 통해 유머의 영웅로써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마렌 아데는 그 탄생마저도 무덤덤한 리액션으로 초라하게 처리한다.

이네스는 대신 자신의 비서 안카를 빈프리트에게 보내 환대한다. 이네스의 이런 행동은 마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처럼 영화 내내 이네스는 누군가의 대리로써 일하거나 대리를 보내 자신의 의사를 대신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네스의 직업은 기업의 아웃소싱과 관련된 상담역이다. 이네스를 극도로 효율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냉혹한 최전선에 있는 것이다. 이네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졸라매고 자신의 가치를 기업에 맞추려고 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를 떠나는 순간까지 이뤄지는 시퀀스들은 이네스 나아가 자본주의의 리듬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있다. 빈프리트의 묵언 시위에 대해 대답하듯이 이네스는 가장 공적인 영역에 가장 사적인 인물인 아버지를 데려가 자신의 리듬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과시하려고 한다. 전후 세대의 투쟁과 낙관주의는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하지만 그런 과시는 좀처럼 이네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고객은 이네스의 제의에 대해 건성으로 넘겨들으며 이네스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객의 부인과 함께 원하지도 않는 쇼핑을 하러 가야 한다. 빈프리트의 블랙 유머는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라는 사적 영역에서 이뤄진 유머를 공공연연하게 공적 영역에 뿌리고 다니며,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독일인들의 시혜적 태도 ("우에카라메센"이 가장 어울리는 단어일것이다.)에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별다른 액션 없이 앉아서 대화하는 샷으로 이뤄지는 [토니 에드만]의 중반부는 가식 아래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정치사회적 혈투다. 하나의 샷 속에서도 대화 샷들은 어색하게 빗나가고 행동과 표정 속에선 냉담한 순간과 수직적인 권력 관계가 비져나온다. 그것은 성차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적 차별이기도 하고 국가간의 관계이기도 하다. 빈프리트의 삶이 죽음과 소멸,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실패의 비극에 갇혀 있다면 이네스의 삶은 효율 중심의 가식적인 관계와 사회적 편견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초라함을 보여줬던 긴 리듬의 샷을 이용해 이네스의 일상을 파헤친다. 그리고 거기서 나치 시절 착취한 뒤 사탕발림이 담긴 독일 자본주의에게 착취당하는 루마니아의 현실부터 시작해 성차별과 신자유주의의 냉엄함을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담아내고 있다.

빈프리트는 이 과정을 보면서 딸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심경인지 알게 된다. 이네스를 향해 그러고도 인간이 맞냐는 빈프리트의 일갈은 당연하겠지만 신자유주의를 향한 이상주의의 일갈이며 딸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는 발언이다. 사실 이네스도 자신이 비인간적이며 행복하지 않다는걸 알고 있다.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빈프리트에게 이네스는 대놓고 말한다: "행복이요? 그건 제게 너무 먼 단어에요." 치즈 강판이라는 생일 선물로도 해소되지 않고, 마음껏 푹 잘 수도 없는 이네스의 스트레스는 결국 푹 자다가 전화를 놓치는 사건으로 폭발하고 만다. 아버지의 방문이라는 사건과 클라이언트의 환심 사기라는 사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게 밝혀진 뒤 빈프리트는 물러나기로 한다. 이때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따라다니던 카메라를 이네스에 맞춰놓고 이네스의 심적 고통을 활짝 열어보인다. 이네스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리듬엔 아버지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버렸다. 빈프리트도 그 사실을 깨닫고 사라지는 걸 선택한다. 유머의 히어로는 이렇게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만 했다면 [토니 에드만]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두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려낸 드라마로 끝났겠지만, 마렌 아데는 이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는다. 아버지가 떠난 후 이네스는 아버지를 위해 짐을 싸다가 찧은 발톱을 제거하려다가 옷에 피를 묻힌다. 아버지에 대한 얼룩진 감정을 어떻게든 지우려고 애쓰는 이네스. 그런 이네스 앞에 갑자기 빈프리트는 가발과 틀니를 낀 채 "독일 대사이자 컨설턴트 업무를 하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 이네스와 직장 동료들 앞에 나타난다. 이네스는 반평생 들었던 "시덥잖은" 유머를 신선한 유머인 마냥 받아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부분에서 [토니 에드만]은 비밀 정체성를 다루는 히어로 영화 구조를 뒤집어 영화를 진행한다. 비밀 정체성을 가진 히어로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나는 히어로 영화랑 달리, [토니 에드만]은 진짜 정체성일때 실패하는 히어로가 비밀 정체성을 착용하고 다시 나타나 판을 뒤엎는다.

[토니 에드만]이 이상한 영화라면, 무수한 롱테이크를 골라 선택해 잘라서 붙인 영화의 편집 방식을 비롯해 영화가 리듬을 구축하고 강조하는 방식이, 내러티브 영화의 관습을 인정하면서도 기이하게 뒤틀고 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초라하고 생뚱맞아보이고, 느릿한 페이스로 진행되는 영화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동시에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직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네스의 회의 장면을 길게 묘사하는 시퀀스가 있다. 토니 에드만이 난입하지 않고 이네스의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따분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퀀스가 영화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그 다음 시퀀스들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마렌 아데는 샷 나아가 개별 시퀀스 속에 등장하는 서사적 장치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도록 한 뒤, 토니 에드만이 등장한 이후 그 요소를 계속 패러디하고 모방한다. [토니 에드만]이 웃긴 이유는 이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요소들이 다음 시퀀스에서 기상천외하게 변주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생뚱맞음과 어색함을 모면하려는 인물들의 행동이 더욱 기괴하게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인물의 불가능성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애매하고 너저분한 회색 지대로 떨어진다. 마렌 아데는 이렇게 유기적으로 직조된 리듬을 마음대로 구부러트리며 인물들을 굴러가게 만든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 시퀀스들을 분석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게 황당한 개별 사건들이 개연성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부러짐을 담당하는 토니 에드만은 어떤 캐릭터인가? 그는 이네스처럼 상담역에 종사하고 있으며 유창하지만 나사 빠진 비지니스 영어를 사용한다. 대놓고 이네스를 패러디한 캐릭터인 셈이다. 거기다 인생에 방귀 쿠션 말고 대안이 있냐는 이네스의 비난에 진짜로 방귀 쿠션으로 등장해 성차별적인 직장 상사를 비웃고, 애완견 빌리의 죽음은 45년 된 애완거북의 죽음으로 패러디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치즈 강판에 간 치즈 가루를 연상케하는 가루를 머리에 흩뿌린다. 그야말로 처음은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재현되는 셈이다. 전반부의 서사적 장치들이 황당하게 비틀려서 등장하는 동안 이네스의 대응과 행동도 괴상해진다. 정사를 나누던 도중 애인의 정액을 케이크에 묻혀서 먹는다던가 아버지를 마약 파티로 데려가 마약을 하는 모습을 노출하는 과정은 도무지 상식적인 행위라 볼 수 없다. 이네스의 기행 역시 전반부에 등장했던 서사적 요소의 극단적인 패러디라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런 패러디조차도 생뚱맞고 어색하기 그지 없다. 비밀 정체성은 시작하자마자 딸에게 간파당한지 오래고 빈프리트도 이 게임을 딱히 엄격하게 진행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빈프리트가 이네스 집에 숨어들어 이네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독창회로 끝나는 파트는 그 점에서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구분되었던 토니 에드만과 빈프리트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빈프리트가 가지고 있는 낙관주의가 마냥 긍정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니 에드만의 활기는 차가운 신자유주의적 해고에 가로막히고 애원과 '유머를 잃지 마세요.'라는 진심어린 충고는 공허한 공수표처럼 남발될 뿐이다. 풀이 죽은 토니 에드만에게 이네스는 당신이 믿는 이상주의가 얼마나 공허한지 아냐고 쏘아붙이지만 금세 눈물을 흘리고 만다.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빈프리트의 어머니의 비윤리성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유머와 삶의 지혜는 이네스도 내심 공감하지만 쉽게 성립될 수 없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다시 인물의 불가능성을 끌어들여 분열된 정체성을 지닌 채 세대 간의 깊은 간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피에로의 슬픔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쉽게 가라앉지 않은 서운함을 억지로 누른 채 터져나오는 이네스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은 정말로 굉장하다. 마렌 아데는 지나치게 늘어지는 도입부와 불안한 음정, 노골적으로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 이네스의 표정에서 얼룩과 간극 속에 서 있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리고 곡을 진행하면서 감정을 고조시키며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절창 부분에서 곡이 가지고 있던 달콤한 감상주의와 이상주의를 어떻게든 간극을 좁히고 달라지고 싶어하는 인물의 고통이 시너지를 일으켜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잡아낸다. 행복해보이(지만 이네스를 수족으로 부리는 독일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는 루마니아 대가족 앞에서 벌어지는 독일 핵가족 구성원이 벌이는 복잡한 감정의 전투라는 점에서 이 시퀀스는 [토니 에드만]의 웃픈 순간들과 정치사회적 맥락을 집약한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독창이 끝난 뒤 이네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떠나가고 빈프리트는 또다시 실패했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이네스는 자신의 생일 파티를 희한한 방식으로 일그러트린다. 토니가 방귀 쿠션으로 성차별적인 구실을 대며 단합을 강요하는 강압적인 대화의 리듬을 일그러트렸다면 이네스는 옷을 입다가 다 벗어버린 뒤, 찾아온 사람들에게 황당한 이유를 대며 게임에 참여하라고 한다. 물론 이 게임은 외부자였던 토니와 달리 마냥 공평한 관계로 이뤄지지 않는다. 비서 안카 같은 경우엔 상사인 이네스의 눈치를 보고 있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네스는 자신과 상사 게롤트, 안카의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다 벗겨버리면서 직장 내 관계를 무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이네스는 토니 에드만의 유머를 받아들여 신자유주의를 그럴싸하게 속인 뒤 벗겨버린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채 우스꽝스러워진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태어난 듯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와중에 동료인 슈테프나 남친이 이 놀이에 동참하지 않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이네스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아마 이 시퀀스가 끝난 뒤, 그들은 자연히 이네스랑 멀어졌을 것이다.

이때 털을 뒤집어 쓴 쿠케리가 등장한다. 이 쿠케리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탈을 벗지 않지만 쿠케리의 행동을 보면 그게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인물들이 이 쿠케리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층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걸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흥미롭다. 당혹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는 안카와 꽃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이네스, 그리고 쿠케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놀라는 게롤트의 대조는 이들의 권력 관계를 생각케 한다. 쿠케리가 새해맞이 축제에 등장하는 악귀를 쫓는 불가리아의 탈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왜 마렌 아데가 쿠케리를 누드 파티에 불러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쿠케리와 홀딱 벗은 이네스는 완벽하게 대조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의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하고 만끽한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움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마렌 아데는 쿠케리와 이네스를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이네스의 시점 샷으로 쿠케리를 쫓아가면서 쿠케리가 다정하게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본다. 직후 이네스는 쿠케리를 '아빠'라 부르며 포옹한다. 이네스의 응시를 통해 아파트 내에서는 모호했던 쿠케리의 정체가 확연해지는 순간 이네스와 빈프리트는 마침내 얼룩을 묻히지 않고 포옹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포옹에서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의 행복한 장난 이후, 이네스는 서서히 뒤로 빠지면서 엉거주춤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그들은 가면을 써야 짧은 포옹을 나눌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냉엄한 현실에 어정쩡하게 끝난다. 이네스에겐 끝나지 않은 생일 파티가 있으며, 빈프리트도 그걸 안다. 그 점에서 이 장면은 완벽한 봉합이라기 보다는 짧은 면회에 가깝다. 하지만 빈프리트는 애써 막지 않는다. 이네스도 애써 머물지 않는다. 이전 시퀀스의 눈물과 실망과 달리 그들은 그렇게 끝날 수 있다는걸 인정하면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쇠잔한 육신을 다시 꺼내들어 마지막 파트를 장식한다. 기나긴 접촉 시도 끝에 이뤄진 행복한 포옹. 하지만 빈프리트 역시 자신의 어머니처럼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며 이네스의 셔츠에 튄 피는 끝내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마렌 아데는 그런 그림자와 얼룩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을 담아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낸다.

[토니 에드만]의 결말이 빈프리트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어찌보면 논리적이다. 마렌 아데는 선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는 이제 완전히 죽었다. 부녀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빈프리트일것이다. 하지만 이네스는 여전히 바쁘고 원하던 중국은 가지 못한 채 독일에서 더 멀어진 싱가포르로 간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그걸 알듯이 빈프리트는 이네스를 데리고 어두운 창고로 들어가서 어머니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어둠을 반추한다. 그리고 빛으로 가득찬 바깥으로 나온 부녀는 인생에 대한 상투적인 교훈을 나눈다. 상투적이지만 맞는 말이고, 마렌 아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토니 에드만]의 마지막 놀라움은 그 뒤에 있다. 틀니와 나치 시절 모자를 쓴 이네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빈프리트는 카메라를 찾겠다고 사라지고, 기다리던 이네스는 틀니와 모자를 벗는다. 그리고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기다리며 골똘히 상념에 잠긴 이네스의 얼굴 샷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몇몇 평자들은 이 결말을 상당히 우울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세대의 간극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며, 부모의 소멸만이 예정된 이네스의 현실은 달라진게 없다고.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분명 [토니 에드만]이 도달한 결말은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어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토니 에드만]의 결말은 단순히 비극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회색 지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네스는 더 이상 전화로 도피하지 않으며, 스스로 틀니와 할머니의 모자를 찾아내 쓰고 빈프리트를 향해 웃어보인다. 일단은 마렌 아데는 두 사람의 포옹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프리트가 영화적으로 소멸했을때 (결말 이후 그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영화는 그걸 보여주지 않기에 소멸했다고 봐야 한다.) 이네스는 그걸 벗는다. 윗 세대의 물건은 분명 자신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이 이네스의 개성이 될 수 없다. 이네스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바더 마인호프로 대표되는 독일 68세대가 과거와의 결별 시도는 극렬하기로 유명했다.) 자신도 자신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걸 깨닫고 고민한다.

이네스의 고민은 마렌 아데 본인의 고민이기도 한다. 자신과 부모 세대의 간극을 인정한다는 것. 곧 다가올 부모 세대와의 이별을 받아들인다는 것.할머니 세대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부모 세대의 유머를 가져오면서도 변화한 현실의 벽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마렌 아데는 그 질문에서 영화를 멈춰세운다. [토니 에드만]이 성숙한 영화라면 긍정과 부정을 모두 껴안은채 창작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영화적으로 치열하게 사유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와 마렌 아데 감독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 [토니 에드만]은 어설프고 너저분한, 평범한 관계의 회색성을 포착하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치열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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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の骨 - 燃え殻

우마노 호네는 키린지에서 동생을 담당했던 (2013년쯤 탈퇴했습니다.) 호리고메 야스유키의 솔로 프로젝트입니다. 최근에 낸 솔로 앨범은 본인 명의로 낸듯 합니다만, 여튼 키린지로 활동한 시절엔 이 명의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이 곡은 첫 앨범 낼 당시 싱글이였고요.

키린지의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로맨티시즘으로 가득한 스웜프 뮤직과 시티 팝, 70년대 SSW 음악의 블렌드겠죠. 이 앨범에도 그 감수성이 제대로 살아있습니다. 첫 트랙인 'My Stove's on Fire'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스웜프/소울 뮤지션인 로버트 레스터 폴섬의 대표곡을 멋들어진 휭키 리듬으로 커버하고 있습니다. 본인 곡들도 다들 훌륭하긴 하지만 역시 이 곡이 가장 최고인것 같아요. 뮤직 비디오에 떠다니는 조각배가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키린지의 '에일리언즈'에 버금가는 키린지표 명발라드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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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북 [La tortue rouge / The Red Turtle] (2016)

(누설이 있습니다.)

미카엘 두독 드 위트의 [아버지와 딸]은 그 자체로 걸작이었다. 삶과 죽음, 이별의 순환을 마음 아프게 그려낸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그전까지 조용하게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두독 드 위트의 명성을 단숨에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준 작품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쪽 사람들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구애가 여러차례 이어졌지만 이번에 리뷰할 [붉은 거북]이 나오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늦은 나이에 장편 데뷔하게 된 두독 드 위트의 장편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

두독 드 위트는 그동안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그의 드라마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인물들의 디테일은 최소화되어 있고, 어떤 행위 ([아버지와 딸]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기다림이었다.)의 반복이나 강조, 변주로 극을 꾸려간다. 그 와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이미지가 영화 내내 이어지는 액션을 보조하며 의미를 불어넣는다. 두독 드 위트는 대사를 비롯한 디테일이 영상의 기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감독이다. 단편에서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였다. 어차피 짧은 길이에서 복잡한 서사를 다룰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줄이는게 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편에서는 이 전략은 항상 성공적일수 없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이외에 채워야하는게 많기 때문이다.

우선 밝혀두자면 [붉은 거북]은 그의 단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장편은 아니다. 캐릭터 설정과 대사가 없다는 점, 서정적인 생로병사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 간결한 작화가 그렇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단편들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서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두독 드 위트가 장편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달라져야고 생각했던 것은, 풍경의 스케일이였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소박한 스케일이였던 그의 단편들과 달리 [붉은 거북]은 장편의 자유를 확실히 누리겠다듯이 광활한 하늘과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의 스펙터클에서 애니메이션을 꾸려간다. 그 점에서 보자면 [붉은 거북]은 [아버지와 딸]의 해변가와 언덕을 확장시킨 영화라 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식 난파극을 자처하는 [붉은 거북]이 재미있는 점은, 난파 이전 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부터 물에 빠져 있는 남자를 보여주며 시작한다는 점이다. 당연하겠지만 두독 드 위트는 그의 이름이 무엇이고, 이전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즉 이 남자에게는 그동안의 과거나 뿌리가 없다. 심지어 환영에서도 당연히 등장해야 할 가족이나 친구는 등장하지 않으며, 생뚱맞게 현악단만이 그가 육지하고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암시할 뿐이다. 

[붉은 거북]이 감독의 단편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세워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사실을 비틀자면, 두독 드 위트는 디테일이 필수적인 공동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초기 단편 두 개는 지극히 우화적인 액션만을 그렸고, 관계로 시선을 확장한 [아버지와 딸]에서도 딸은 분명 가정을 이뤘지만 딸의 가족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딸은 아버지라는 원형적인 상징에 매달려 행동을 반복한다. [붉은 거북]의 남자 역시 공동체와의 고리를 끊은 채 바다로 향하다가 지극히 개인적인 장소인 무인도에 표류한다.

[붉은 거북] 초반부는 섬을 나가려는 남자의 시도를 꾸준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계속 좌절된다. 전형적인 난파극 전개지만 상술했듯이 이 남자에게 어떠한 과거나 뿌리가 없다는걸 생각해보면 섬 밖을 나가려고 하는 의도는 조금 복잡하다. 이 남자는 가족보다는 막연한 문명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뭔가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들보다는 그것이 안겨주는 편안함을 먼저 떠올리고 그리워한다고 할까. 그에 답하듯이 두독 드 위트는 남자의 탈출을 방해하는 캐릭터로 붉은 거북을 등장시킨다. 

어쩌면 남자가 무인도에서 탈출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있는 육지로 돌아가려는게 아닌, 자연인 무인도에 정착을 거부하려는 제스처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니가 제시하는 변곡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남자는 자신을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가 붉은 거북이라는걸 알게 된 뒤 우연히 해변가로 온 붉은 거북을 죽인다. 그리고 후회하던 와중 붉은 거북이 여성으로 변한걸 알게 된다.

[붉은 거북]의 흥미로운 부분은 살해와 죽음의 모티브다. 첫번째로 살해와 죽음 모티브가 행해지는 이 시퀀스에서 남자의 동기를 이해하긴 어렵진 않다. 섬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가 좌절해 분풀이했다는게 선명히 명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왜 살해당한 붉은 거북은 인간 여성으로 변하는가? 이는 소통의 벽에 대한 붉은 거북의 답이라 생각한다. 붉은 거북과 남자는 '다른 종'이다. 그렇기에 두 존재는 통하지 않고, 결국 소통의 시도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남자는 문득 후회하고, 그 후회에 답하듯이 판타지적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두독 드 위트는 소통의 파국이 결국 타자였기에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지닌 간극을 줄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주체가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붉은 거북]은 어떤 선을 그어두고 있는데, 이는 결말의 정서하고도 연결된다고 본다.

여자와 남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붉은 거북은 가족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 부분부터 남자는 문명과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는 모습을 보인다. 관계가 형성되면서 문명과 땅은 남자에게 머나먼 무언가로 다가온다. 와중에 아들은 남자가 갔던 길을 반복한다. 남자가 빠진 절벽 아래 바다에 떨어져 빠져나오는 장면은 두말할것도 없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아들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림에도 부부가 늙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애니의 3분의 2가 흘렀음에도 젊은 시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아들이 장성한 성인이 됬을때에도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 역시 약간의 시간만 흐른 것처럼 보인다.

여기다 스포일러가 되는걸 각오하고 적자면, 이 순간 두독 드 위트는 아들이 섬을 떠나는 계기를 준비한다. 두독 드 위트는 바다에서 건너온 유리병에 아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것에서 아들과 아버지, 문명 간의 고리를 마련한다. 시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는 문명의 부산물에서 아들은 매혹을 느낀다. 그 매혹이 실체화되는 계기는 또 파괴와 죽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두독 드 위트는 이 시퀀스에서 무수히 쓰러진 나무들을 보여주면서 파괴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이 이미지의 강렬함 때문에 우리는 아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와 여자를 찾아다니는걸 보는 동안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빠져든다. 다행히도 기우로 밝혀지만, 남자와 여자가 성치않은 몸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분명 죽음의 기운이 묻어나온다. 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 섬이 아닌, 저 너머 문명만이 자신을 보호해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해일이 밀려오는 장면에서 3.11 도호쿠 대지진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3.11이 다뤄야 할 죽음과 공동체의 붕괴가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연결에 그쳐야 할듯 하다.

아들이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첫 징후는 다시 바다 속 거북 무리를 만나면서 이뤄진다. 자연을 연상케하는 붉은 거북과 문명을 연상케하는 계단이 아들 앞에 나타나는 환영 장면은 작중 상징을 함축한 시적 표현이라 쳐도, 아들이 떠나는 날 남자와 여자가 마치 구조 신호를 보내듯이 연기를 피우는 샷은 좀 이상하다. 정작 아들은 배를 타고 사라지지 않고, 헤엄쳐 붉은 거북들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샷 연결만 보자면 부부가 준비한 신호는 아들을 데려갈 붉은 거북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두독 드 위트는 유리병을 제외한 문명적 요소가 이 섬에 나타나는걸 거부하고 있다. 아들을 문명으로 데려갈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대변인인 거북이 데려가게 만든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아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이뤄지는 환상 시퀀스로 처리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된 여자가 허공에서 정을 나누는 순간 남자는 얼마 안 되는 문명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고 자연과 동화된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개인과 자연에서 비롯된 걸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원형의 이미지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아들이 떠나면서 [붉은 거북]은 다시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아들이 떠난 이후 부부는 갑자기 늙기 시작한다. 당연한 순리겠지만 장성한 아이가 자기 세상을 찾아 부부를 떠나는 순간, 부부에게 남은건 노화와 소멸 뿐이다. 두독 드 위트는 이런 세상사의 진리를 노화 이미지의 압축과 대조로 정리해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정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먼저 죽는다.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죽은 남자를 놔두고 다시 붉은 거북이 되어 흐느끼며 바다로 돌아가는 걸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최후엔 붉은 거북이 되는 이 구조를 통해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온전히 인간이 된게 아니라는걸 암시한다. 

여자의 변신은 차라리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쓸쓸히 떠나가는 모습에 가깝다. 간극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영원히 좁힐수 없는 간극이 있었으며, 결국엔 그걸 최후에 인정해야 한다고 두독 드 위트는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두독 드 위트는 애도를 담은 붉은 거북의 눈물을 통해 그런 간극을 좁히지 못했음에도 무위는 아니였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붉은 거북]은 원형적인 가족 관계에서 출발해 이별과 소멸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딸]의 장편 리메이크이기도 하다.

[붉은 거북]은, 단편에서 장편으로 그럴싸하게 넘어오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채워야 할 빈 칸이 많아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다. [붉은 거북]은 움직임과 스케일, 이미지의 원초적인 매력에 대한 두독 드 위트만의 개성을 장편 애니메이션에 이식하는데 성공했지만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이뤄진 단순한 서사는 장편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보기엔 힘들다. 지나치게 단선적인 구조라고 할까. 짧은 러닝타임인데도 리듬이 단조로운 점도 아쉬움을 더한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자체가 원형적인 만큼 고루한 서사의 반복이라고 비판을 가할 구석도 있다. 

하지만 [붉은 거북]은 잃은것보다는 얻은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후반부 같은 경우엔 두독 드 위트 특유의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대조,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이별의 의미를 잘 잡아내고 있다. [붉은 거북]은 그 점에서 데뷔작으로써는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두독 드 위트가 자신의 리듬감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그의 커리어가 결정될듯 하다. 아니면 그냥 단편 작업에서 만족할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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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ニーデイ・サービス - 桜 super love

좀 더 전통적인 [Sunny] 앨범도 좋았습니다만, [Dance to You] 앨범이 상당히 크리티컬이더라고요. [MUGEN]과 [Love Album]에서 더욱 심화하고 싶었던 드럼머신이 이끄는 매드체스터 팝, 밴드 중심 기타 록의 결합이 이 앨범에서 짧고 굵게 농축되었다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드러머인 마루야마 씨가 이번작에서는 비중이 줄었던 점도 있겠지만, 그래도 소카베 솔로작들의 팝적 감수성이 밴드라는 구성하고 잘 녹아있는 느낌입니다. 현지 평단에서도 대체적으로 호평인지라 재결성 이후 최고작으로 되는 듯 합니다. 

특히 이 곡은 봄의 감각을 그대로 체화한듯한 아름다움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곡입니다. 삑삑거리는 전자음과 휭키한 기타가 상큼한 감수성이 인상적이라고 할까요. 본인들도 아는지 올 초에 EP로 내놓았더라고요. 그럴만한 곡입니다. 어딘가 초탈한듯하면서도 서정적인 가사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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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빙 [Loving] (2016)

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

2017/01/13 - [Deeper Into Movie/리뷰] - 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나 임신했어." 고요한 어둠 속 여자의 얼굴에 이 대사가 깔리면서 제프 니콜스의 [러빙]은 시작한다. [러빙]이 흥미로운 점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시작 부분이 없이 처음부터 전개 단계에 들어선다고 할까.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그런 이야기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니콜스는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다가 사랑에 빠졌을수도 있고, 동네 학교에서 친해졌을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은 이미 사랑에 빠져있고, 변치 않을 것이다.

제프 니콜스는 러빙 부부가 가진 사랑의 견고함의 증거로 임신을 제시하면서, 관객이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니콜스의 의도에 화답하듯이 다소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과 말이 나온다. "그거 잘 됐네." 도래한 사건과 사건에 대한 긍정, 조엘 에저튼과 루스 네가의 표정과 간단한 샷/리버스 샷, 짧은 대사를 통해 [러빙]은 시작하자마자 평범하지만 중요한 변곡점을 그려낸다. 그들은 어둠 속 고요에 있지만, 기쁨의 순간을 맞이했다.

어떤 평자들은 이 영화의 도입부가 니콜라스 스파크 소설이나 다름없다는걸 인정하자고 했는데 절반은 맞는 말이다. [러빙]은 일상의 통속성을 영화적이지 않다고 내치지 않고, 그걸 끌어안으면서도 새로운 각도로 보여주려고 하는 영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러빙]에서 식사 장면이라던가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장면들의 비중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러빙 부부를 불멸로 만들어 준 [라이프] 지의 사진을 찍는 그레이 빌렛이 러빙 가족을 방문하는 시퀀스는 일상의 통속성에서 아름다움을 꺼내고자 하는 니콜스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빌렛은 자신이 겪었던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아이들과 러빙 부부에게 들려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서 잠깐의 틈을 빌어 특별한 순간을 잡아낸다. 고요하지만 분명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의 순간을 잡아내는 이 시퀀스는, 오히려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통속성의 개념이 얼마나 게으른지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자동차 경주 장면, 미장이 일을 하는 리처드의 일상, 밀드레드 가족과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는 리처드의 장면이 지나가고 [러빙]은 두번째 변곡점에 들어선다. 공터에서, 리처드는 밀드레드를 데려다 놓고 여기다 당신, 나아가 우리들의 위한 집을 지을거라고 말한다. 이때 니콜스의 카메라는 버지니아 캐롤라인 카운티의 드넓은 땅을 보여준다. 땅에서 비롯된 잉태에 대해 그 잉태에 걸맞는 기둥과 벽돌을 쌓겠다는 다짐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니콜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이 존 포드에서 기원한 "땅과 거기에 뿌리박은 공동체에 물리적으로 정박"하는 샷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러빙]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빙]의 도입부에는 의미심장한 샷이 있다. 자동차 경주를 즐겁게 관람하는 리처드와 밀드레드 부부를 바라보는 익명의 청년들을 담은 샷이다. 이들은 익명적 존재로 머물지만 그렇기에 이 샷은 어딘가 불길함을 안겨준다. 러빙 부부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백인 집단의 응시가 절대로 축복이나 인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러빙 부부가 그들의 관계를 공적으로 인정받으러 워싱턴 D.C.에 갔다온 뒤 일이 터지고 만다. 버지니아 주가 연방 정부는 인정해도 우리 주는 인정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관계를 훼방놓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러빙 부부는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금기시되었던 흑백 커플이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서 비롯된 차별에서, [러빙]은 행복한 부부의 이야기에서 집으로 대표되는 행복이 이 땅 위에서 뿌리박기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화두로 넘어간다. 만약 당신이 [로건]을 거쳐 이 영화로 왔거나 그 반대라면 [러빙]을 [로건]에 등장하는 먼슨 부부의 프리퀄이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두 영화에서 집은 언제나 파괴될 위기에 놓여있으며 어른인 부부는 힘겹게 그 집을 지키거나 돌아가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니콜스 역시 맨골드처럼 도회적 요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중에서 밀드레드가 버지니아 주 정부랑 싸우기로 결심한 계기가 지극히 도회적인 자동차와 콘크리트라는 위협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제프 니콜스가 이 실화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를 수락한 이유는, 남부 백인 지식인으로써 부채 의식과 더불어 그만의 관심사를 풀어낼 기회라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항상 불안 위에 서 있으면서도 신뢰와 사랑으로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하지만 이전까지 불안의 근원이 모호하게 설정되었다면 (코스믹 호러였던 [테이크 셸터], 장르화된 메타포로 다뤄졌던 [머드]와 [미드나잇 스페셜]) [러빙]은 그 불안이 어디서 오는가를 응시하고 그려내는 영화다. 

[러빙]에 땅에 정착하려는 부부를 거부하는 것은 부당한 공권력이며, 나아가 익명의 시선에 숨어있는 차별이다. [러빙]이 현명한 부분은, 그런 일상을 엄습하는 차별을 형상화하는데 멜로드라마틱한 묘사를 배제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이 있다. [러빙]에서 이뤄지는 인종 차별은 마치 잡히지 않는 기체 또는 공기처럼 그려진다. 러빙 부부는 다른 인종차별 영화에 나오는 피해자들처럼 극단적인 폭력이나 수난은 당하지 않는다. 밀드레드가 소송을 걸기로 마음 먹은 뒤, 인터뷰에서 '저희를 비난하는 분들도 많지만'이라고 언급하긴 하지만 [러빙]은 그 비난하는 얼굴들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무표정한 익명의 사람들의 응시 샷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러빙 부부가 사랑을 나눌때에도, 평범한 일상을 그릴때에도 그 익명의 응시 샷들은 갑작스럽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러빙]에서 무표정한 응시 샷들은 [테이크 셸터]의 불길한 멸망의 징조 샷처럼 어떤 영화적 공기다.

이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러빙 부부의 일상에 침입하지 않지만, 분명히 위협적이다. 그것은 백인 청년들이나 카운티 경찰처럼 경멸을 담은 응시기도 하며, 임신한 밀드레드의 배를 바라보는 흑인 점원처럼 '앞날이 걱정된다'라는 식의 체념의 응시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진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버지니아 주 정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을 통해 악의적으로 실체화된다. [러빙]이 관객을 눈물짓게 만든다면 작위적이지만 무서운 폭력 앞에 단단한 개인들이 힘없이 수그리는 순간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빙 부부가 버지니아 주 법정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추방 명령을 언도받을때 니콜스는 흰색으로 이뤄진 빛과 색감을 강조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백인 중심주의/차별이 그때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공기'였던지, 그 공기로써 악의가 쉽게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니콜스는 인물들의 불가능성이 사건이 아닌 어떤 공기에 짓눌려 나타는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다.

[러빙]은 그 기체처럼 그려지는 차별을 그리면서, 거기에도 상대적인 격차가 있다는 점도 명시한다. 이 격차는 백인인 리처드와 흑인인 밀드레드가 겪는 수난의 강도에서 먼저 제시된다. 니콜스는 같이 차별받는 두 사람이 같은 시간 속에서 어떤 액션과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지 대조하면서 격차를 제시한다. 리처드는 얼마 안 있어 환한 바깥에 서게 되지만, 밀드레드는 감옥 구석에 웅크려서 언제 올지 모르는 해방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니콜스는 그 상대적인 격차 속에서 백인이 겪어야 하는건, 일종의 훈육이라고 말한다. 직후 경관이 리처드를 불러놓고 "너같은 무지렁이는 모르겠지. 울새는 울새끼리, 종달새는 종달새끼리 살아야 한다는 건."라고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때 그의 표정과 몸짓은 마치 법칙을 모르며 까부는 철없는 아이를 혼내는 어른의 모습이다. 이 훈육의 제스쳐야말로, 니콜스가 생각하는 차별의 작동방식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며 사회가 제공하는 기초 교육만 받았던게 분명한 리처드와 밀드레드는 차별 구조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견식은 가지지 않았다. 러빙 부부는 차별에 본능적인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걸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소수자 커뮤니티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밀드레드랑 달리, 리처드의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리처드는 그 커뮤니티가 겪는 차별의 부차적인 존재에 가깝다. 설정상 리처드는 밀드레드와 같은 흑인들과 같이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흑인 밑에서 일을 하면서 한번도 그들을 혐오하지 않았다. 리처드의 아버지는 작중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리처드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물러받았을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렇게 리처드가 믿었던 당연하다고 생각한 가치관이 흔들리는 순간, 상술한 기체로써 위협의 샷들이 리처드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영화에서 리처드의 불안이 드러나는 시퀀스가 몇 군데 있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밀드레드랑 같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시퀀스를 보자. 이 시퀀스를 찍으면서 니콜스는 [러빙]보다 먼저 찍은 [미드나잇 스페셜]을 의식했던게 분명하다. 한밤중 도로라는 시공간 설정과 조심스럽고 신중한 배우의 연기, 자동차라는 수단이 그렇기도 하지만 이 장면엔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언제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로이 일행의 불안함이 그대로 옮겨와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엘 에저튼도 그대로 옮겨왔다.) 두번째는 소송 때문에 대중에 노출된 이후로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다가 해코지한다고 쫓아온다고 착각한 채 미친듯이 돌아오는 리처드의 귀갓길이다. 니콜스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이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긴장감이 [테이크 쉘터]와 [머드],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알 수 있다. 기체/공기로써 불안감이 남성 주체에게 들이닥치는 순간, 남성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무너질 공포에 휩싸인다. 제프 니콜스는 그 명제에 관심을 가지고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러빙]은 그럼에도 리처드가 차별에 싸우기로 마음먹은 밀드레드처럼 위대해질수 있었던 이유를, 기체/공기로써 내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감수하면서도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리처드의 흑인 친구가 답을 내놓지 않았는가. 리처드가 밀드레드랑 헤어졌다면 리처드는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리처드는 그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지만, 그는 돌아와서 밀드레드에게 "나는 당신을 지켜줄수 있어."라고 말한다. 헤어진다는게 쉬운 답이라는걸 알면서도, 그 구조를 전문적으로 분석할 두뇌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는 포기하지 못한다. 그저 가장 단순한 말과 행위을 되뇌이면서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며 밀드레드와 함께 나아가고자 한다. 그 장면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와 접촉을 각인시키고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를 방해하는 기체로써 차별을 명징하고 물리적인 '행동'으로 반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부부를 도와주는 변호사 필 허시콥의 첫 등장 샷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발과 다리라는 점은 흥미롭다. 물리적으로 걷는 샷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변호사가 (버지니아 주 변호사와 달리) 러빙 부부와 같이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과 버니 코헨은 성공하고 싶다는 야심이 넘치지만, 분명한 선의로 갑갑했던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레이처럼 러빙 부부에게 없었던 객관적으로 문제을 분석할줄 아는 지성으로 부부와 함께 그걸 넘어설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하지만 [러빙]은 그들에게 과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최종 변론을 펼치는 감동의 순간. 니콜스는 러빙 부부를 법정에 참석시키지 않고, 변호사에게도 두 샷 정도만 할애한다. 그리고 교차 편집으로 두 샷을 평온한 러빙 부부의 일상 위에 사운드 몽타주로 겹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 접촉의 아름다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행위의 숭고함. 법정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끌어올 수 있었으면서도 니콜스는 단호히 일상으로 향한다. 프랭크 카프라와 존 포드를 위시한 미국 영화의 대가들이 그렇게 믿었던 가치관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 단순한 사랑을 부당하게 탄압하는 공기에 저항하고 같이 걷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러빙]은 법정 영화로써 안티 클라이맥스적 모양새임에도 강력한 울림을 안겨준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응시다. 마지막으로 대법관들에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는 변호사 듀오에게 리처드는 잠깐 먼 곳을 응시한다. 대체 그는 뭘 응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다음 대답과 눈빛이 모든 걸 대답하고 있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리처드의 응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땅의 리듬과 단순한 방식을 믿으며 기체로써 불안과 차별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마침내 집을 짓는데서 마무리 짓는다. 비록 마지막은 짧았지만 그저 사랑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고, 그 사랑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쑥스러워하고 침묵했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랑은 영원한 무언가가 된다.

그 점에서 버지니아 주 정부가 후레자식을 만든 죄를 범했다고 러빙 부부를 비난하는 순간 패배는 정해졌다. 그들의 성명은 지금까지 쌓여온 땅의 리듬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 나아가 영화를 이루는 샷과 몽타쥬의 연쇄와 리듬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니콜스에게 땅의 리듬은 영화적 리듬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이 언급은 의도적이다. 이미 니콜스는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그런 울타리 없는 땅 위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이어오며 대부분의 관객들이 소망하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샷과 몽타주의 연쇄로 쌓아오는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러빙]을 통해 지금 이 시대, 나아가 미래 세대를 위해 믿음을 가져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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