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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2013/05/10 - [Deeper Into Movie/리뷰] - 테이크 쉘터 [Take Shelter] (2012)

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

제프 니콜스의 SF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미드나잇 스페셜]이 어떤 영화가 될지 조금 상상이 안 가긴 했다. 2007년 [샷건 스토리즈]에서 출발한 제프 니콜스는 기본적으로 지역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카와세 나오미나 스와 노부히로, 아오야마 신지처럼 어떤 지역을 떠나면 성립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스는 테렌스 맬릭이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같은 희귀한 사례를 제외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미국 중남부 서민-화이트 트래시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고 거기서 출발한다. (심지어 아칸소는 맬릭이나 링클레이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영역이다.) 아칸소 백인 하층민들을 소재로 삼았던 [샷건 스토리즈]와 [머드]. 오하이오와 버지니아라는 남부라는 문화적 친연성을 지닌 곳에서 영화를 만든 [테이크 쉘터]와 리뷰 예정인 [러빙]...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영화는 영화 언어에 미처 포섭되지 않았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동시대 감독 중에서도 미국에서만 성립 가능한, 가장 미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장르의 세계에 들어선다니 기대와 걱정이 앞설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드나잇 스페셜]은 생각보다 멀리가지 않았지만 상당히 넓어진 영화다. [미드나잇 스페셜]의 배경인 루이지애나 주는 전작들과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나 연출 면에서 니콜스는 장 르누아르부터 시작해 테렌스 맬릭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자연주의 영화의 전통과 스티븐 스필버그와 존 카펜터 같은 장르 영화의 거장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즉 지역 영화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을 품고 탈지역적인 장르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전작을 보지 못했거나 평범한 관객들이라면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장르로 대표되는 탈지역적 요소를 먼저 발견하고 심심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 [미드나잇 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장르적인 요소들은 너무나 구닥다리기 때문이다. 아니 시대가 언제인데 [E.T.]나 [스타맨]에 기독교 구세주 SF 설화를 도입하나? 비주얼은 왜 이렇게 안 멋져? 모름지기 SF 영화란 삐까번쩍 해야지! 이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상술했듯이 니콜스는 아직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떠날 생각이 없이, 자신의 땅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즉 장르를 생각하고 지역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지역에서 장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드나잇 스페셜]은 지역이 품고 있는 문화를 장르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장르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지역은 바이블 벨트와 늪지대, 황량한 모텔과 주유소, 신흥종교단체로 가득차 있다. [미드나잇 스페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 영화보다는 지역 영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니콜스는 장르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지역 영화를 만든다는걸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미드나잇 스페셜]은 심심한 장르 설정과 익숙한 추격전 플롯에서 불구하고 단단하게 뿌리박은 영화 언어 속에서 생경할 정도로 낯섬과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그것은 대부분의 장르 영화들이 가볍게 여겼던 '공간'의 특성 (이는 지역적인 특성이기도 하며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와 같은 영화적 특성이기도 하다.) 이 강하게 대두되어서 생기는 부분도 있으며 (이 부분은 분명 존 카펜터에게 배운 것이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미국 남부 고딕의 전통이 새로운 활력을 얻었기에 생기는 부분이 있다.

사실 이런 "공상과학"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비주얼 설계라는걸 생각해보면, [미드나잇 스페셜]이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비주얼은 어떤걸 접하고 생각했기에 저런 리듬의 저런 비주얼이 가능한지 묻고 싶을 정도다. 어떤 부분은 바이블 벨트에서 자란 지식인이라는 이점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있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특정 종족의 묘사는 분명 성경에서 비롯된 천사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어떤 장면은 단순히 문화적 이점이라고 넘길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주유소 시퀀스에서 알튼이 기적을 부리는 장면이 그렇다. 느긋하면서도 갑자기 비현실적인 상황이 관객 앞에 툭 떨어지는 이 시퀀스는 경이롭다.

이런 태도는 영화 속 샷과 몽타주를 구성하는 방식하고도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제프 니콜스는 서사에 따라 차곡차곡 누적되는 샷과 몽타주의 구조를 믿는 고전적인 부류의 영화 감독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뉴욕 감독'이였던 제임스 그레이랑 달리 니콜스는 미국 남부 영화인이기에 가능한 느긋한 리듬이 있다.  도입부는 니콜스만의 느긋한 리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드니 루멧의 [허공에의 질주]가 그랬듯이 우리는 로이와 알튼 일행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지를 알려면 기다려야 한다.

이는 속도를 중시하는 장르 영화로써는 그렇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미덕이 있다. 니콜스는 자신만의 샷과 몽타쥬 방식으로 천천히 쌓아올리면서 인물들의 불안과 상실, 기쁨과 긴장 같은 감정들은 신중하게 끌어낸다. 그렇기에 니콜스가 선택한 샷엔 신기할 정도로 헤아릴수 없는 인간을 위시한 피사체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가득하다. 마이클 섀넌을 비롯한 연기진들의 연기는 그런 확고한 믿음으로 세워진 샷에서 시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F.W.무르나우의 [선라이즈]와 장 르누아르에서 발원한 자연주의/휴머니즘 영화의 충실한 후예기도 하다. 우직한듯 보여도 [미드나잇 스페셜]의 인물 관계나 묘사는 어떤 위악이나 아이러니가 담겨있지 않다. 알튼, 로이와 사라의 가족 관계라던가 어딘가 어벙해 보이는 연구원 폴 세비어, 회의주의자 루카스 모두 단단한 존재들이다. 제프 니콜스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강점 중 하나가 바로 위악이나 비극으로 빠질 수 있는 캐릭터에게 단단한 뿌리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미드나잇 스페셜]은 아마도 니콜스의 바이블 벨트적인 성향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영화기도 할 것이다. 상술하기도 했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알튼과 알튼이 속한 특정 종족은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와 사도, 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 점에서 무신론자에게 [미드나잇 스페셜]은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니콜스는 지식인으로써 현실을 근심하면서도 미국 남부인 특유의 독실하게 뿌리박힌 어떤 '믿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는걸 잊으면 안된다. 

누설 때문에 적을 수 없지만 [미드나잇 스페셜]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인간 관계에서 이뤄지는 믿음과 사랑에서 출발해 '믿으면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천당간다' 식의 구약식 죄의식과 맹목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이 지구가 그렇게 나쁜 공간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점에서 [미드나잇 스페셜]은 '백인의 의무식 구원주의'에 빠진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다르다. 제프 니콜스의 지역 영화적 특색은 여기서 다시 한번 발휘한다. 이 땅을 떠나지 않더라도 행복해질수 있다고,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라고. 니콜스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루카스 같은 회의주의자/무신론자인 글쓴이마저도 긍지를 가지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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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1

토익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이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얼마전엔 단기지만 알바도 했습니다.

나이 슬슬 먹어가는데, 쌓여있는게 별로 없는 것 같고 앞으로 세상 나가는게 조금 두렵고 마 그렇습니다. 블로그도 얼마전에 (2006년 12월 20일) 10주년을 맞이했는데 이 블로그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만 드네요. 적어도 제 전공으로 세상을 살려면 뭔가 일반적인 길과 다른 쪽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만 있습니다.

제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더 늙기 전에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였습니다. 이제서야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은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가끔 제 자신이 어린 아이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벌써 성인의 의무를 져야 한다니 부담스럽네요. 정말 어른이라는게 그냥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리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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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お早よう / Good Morning] (1959)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이나 [동경 이야기]로 대표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즈 야스지로 영화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는 영화다. [동경 이야기]로 스타일의 완성한 오즈는 [이른 봄]부터 초기작들을 다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놓고 [부초이야기]의 리메이크를 자처했던 [부초]랑 동시기인 [안녕하세요]는 전후에 만든 [태어나기는 했으나]에서 다뤘던 아이들로 다시 돌아온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태어나기는 했으나]의 느슨한 리메이크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안녕하세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로써는 최첨단 문물이었던 텔레비전이다. 이웃집 신식 문물을 텔레비전에 환장한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어떻게든 텔레비전을 집에 들여놓고 싶어하지만 엄격한 그들의 부모님은 거부한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침묵하는 것으로 반항하고 이 와중에 미노루와 오사무 주변의 친구들과 어른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우선 다른 오즈 야스지로 영화들도 그렇지만, [안녕하세요]를 보는 관객들이라면 어떤 강력한 구조가 영화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첫 두 컷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으례 그래 왔듯이 지금까지 꾸준히 개척해왔던 필로우 샷과 정물 샷으로 영화의 확고한 구조를 세운다. 두 집의 지붕 처마를 이용한 프레이밍 위에 등교하는 아이들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진행되는 공간과 인물을 모두 설명해낸다. 이 장면의 정교함과 치밀함은 무서울 정도다. 기본적으로 이웃한 집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동선이 많은 영화인데, 오즈는 철저히 다다미 쇼트을 기반으로 문 프레임과 그 곳을 오가며 대화하는 인물의 동선을 맞춰서 프레임을 짜고 있다. 스타일면에서 완숙한 시절의 영화답게 [안녕하세요]는 넉넉한 인심과 달리 치밀하기 그지 없다.

재미있는것은 [안녕하세요]에서는 그 치밀한 구조를 이탈하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정확하게 뭘 지시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도구'에 가까운 존재들이였다. 하라 세츠코나 류 치수 같은 오즈의 대표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들은 오즈 영화 속에서 비슷비슷한 표정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얌전하며 예의바르며, 가끔 감정을 표출한다 해도 단아하게 정리해낼줄 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초인적으로 현명하다. 그렇기에 오즈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친숙한 현명함에 안도감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오즈가 강력하게 믿는 세계 법칙의 일부로써 행동한다.

하지만 [안녕하세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비교적 자유롭다.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반복되는 인사말로 대표되는 오즈의 세계를 한심하게 여기며, 자신이 욕망하는걸 얻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반항한다. 그들은 명백히 오즈의 우주를 이루는 세계의 법칙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반항한다. 이는 유성 영화에 대한 무성 영화적 반항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좋은 날씨네요' 같은 발화를 우습게 여기며 방귀를 끼는 간단한 행위에 즐거움을 느끼며, 어쩔수 없이 말을 할때조차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유성영화적이기 보다는 무성영화적이다. 찰리 채플린 같은 무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무성영화적 유머는 비단 아이들에게만 발견되는게 아니다. 미츠에가 식칼을 들어 세일즈맨의 연필을 깎는 장면은 아마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장 웃긴 장면일 것이다. 여기엔 오즈 자신의 셀프 패러디도 담겨 있다. 아이들의 이마를 누르면 방귀를 뀐다는 설정 자체가 반복되는 오즈 영화 특유의 반복되는 구조를 연상케하지 않는가? 심지어 오즈는 친절하게 한 아이는 똥을 지리게 한다. 

[안녕하세요]는 다른 오즈 영화들보다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한쪽엔 TV와 서양 잠옷을 입는 부부가 사는 집과,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사는 아파트로 대표되는 서구식 공간이 있으며 다른 한 쪽은 다다미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민의 공간이 있다. [안녕하세요]의 전개 대부분은 미노루와 오사무가 문명의 이기 때문에 두 공간을 왔다갔다하면서 이뤄진다. 흥미롭게도 미노루와 오사무는 설정상 학교를 다니는 연령대의 아이들임에도 이 영화에서 학교는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한다. 두 공간의 대조를 집중해달라는 의도 때문일까?

이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은 세대라는 문제도 반영되어 있다. 아마 [안녕하세요]는 류 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상이 완고한 가부장으로 출연하는 얼마 안되는 영화일 것이다. 류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 케이타로가 미노루와 오사무를 혼내는 장면은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부장성이 드러나는 장면일 것이다. 노리코 삼부작에서 류치수는 온화하고 현명한 노인이라면, [안녕하세요]의 케이타로는 현실에 찌든 모습이 강하다. 이런 찌듬은 케이타로 뿐만 아니라, 해고 뒤 쓸쓸히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는 토미자와라는 캐릭터로 잘 드러나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명백한 균열이 영화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것은 상술한 세대 간의 갈등이기도 하고, 새로운 문물과 그걸 향유하는 자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하고, 시대의 흐름을 못 쫒아가는 자의 낙오이며, 소통의 엇갈림으로 발생하는 오해기도 하다. 때론 그 균열은 비등점까지 치닫는다. 아무것도 모른채 미노루와 오사무가 갉아먹는 주축돌에다 쥐약을 발라놓는 계획을 하는 타미코라던가, 엉뚱한 오해로 이웃들이 뒷담화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오즈 영화답지 않은 아슬아슬함이 있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그 균열을 극한으로 밀고 가지 않는다. [안녕하세요]는 초반부에 세워졌던 세계를 이루는 구조에 대한 강력한 믿음으로 이내 다른 오즈 영화들처럼 그 균열을 금세 메꾼다. 다만 [안녕하세요]는 그 균열을 메꾸는 자는 전작들처럼 현명한 인물이 아니라, 중재자다. 오즈는 이 균열을 메꿀 자로 아이들의 영어교사인 헤이이치로를 내세운다. 그는 서구식 아파트에 살며, 영어라는 신문물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어른이다. 그는 아이들의 방귀 농담을 바보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두 형제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요컨데 헤이이치로는 아이들의 세계를 떠났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줄 아는 사람이다.

헤이이치로의 중재로 소동이 끝난 후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초반부의 안정된 구조로 돌아간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약간의 꾸지람을 듣고 그렇게 원하는 텔레비전을 얻고, 직장에서 밀려난 세일즈맨 토미자와는 새로운 직장을 얻는데 성공한다. 이웃들도 어느새 오해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 역시 그런 일상 속에서 일어난 유아적인 욕구 해소다. 정밀하게 구성된 프레임 속에서 공간과 인물 간의 관계가 강조되는 와중에 정곡을 찌르지만 넉넉한 인심을 품은 유머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안녕하세요]는 자크 타티의 영화랑 닮아있는 영화기도 하다.

대체 그런 균열마저도 품어안을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곳일까? 그 믿음의 단서은 영화의 제목인 '안녕하세요'에서 온다. 아이들의 투덜거림을 인정하면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일견 단순한 인사조차도 분명 의미가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오즈는 그 의미의 아름다움을 헤이이치로를 통해 보여준다. 일련의 소동이 끝난 후 헤이이치로와 미노루 형제의 이모인 세츠코는 승강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그들은 그러나 고백 대신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인삿말을 한다. 하지만 이 인삿말이 무의미한 인사가 아닌 어떤 관계의 시작이라는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이다.

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형제 중 오사무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마무라 쇼헤이의 [니시긴자역 앞에서]에서 출연한 바 있다. 오즈가 그 영화를 보고 오사무에 캐스팅했을지는 전적으로 역사가의 몫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의식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마무라가 반 오즈주의자였다는걸 생각해보면, [안녕하세요]에서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을 품어안는 방식은 후배들이 일으킨 쇼치쿠 뉴웨이브에 대한 답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무의미하다."는 후배들의 도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오즈는 분명 그 안녕하세요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안녕하세요'는 오즈의 성찰과 더불어 오랫동안 구축해온 영화 언어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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渚にて - 不実の星

나기사 니 테는 일본 프로그레시브 포크 록 밴드입니다. 대곡 지향 (보통 7-8분)에 복잡한 구조의 멜로디와 기타 연주, 다양한 소리 층위는 카르멘 마키 & OZ를 연상케 하며 (요닌바야시도 빼놓을수 없겠습니다만) 1990년대에 데뷔한 밴드답지 않게 상당히 히피 추종적인, 초속적인 분위기를 자랑합니다. 제가 구입한 1집은 타케다 마사코가 참여하지 않아서 시바야마 신지의 솔로 프로젝트라는 인상이 강합니다만, 이후 작업들을 들어보면 이때부터 기본틀은 다 잡혀있습니다.

어찌보면 무비톤이나 에스퍼즈 같은 후배 서구권 애시드 포크 밴드들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만, 나기사 니 테는 전반적으로 동아시아 프로그레시브/애시드 포크 록의 독특함을 선점하고 있는 밴드입니다. 가사는 동시처럼 순진무구하지만 가슴아프게 찌르기도 하며, 소리는 복잡하면서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죠. 

그래서인지 몰라도 해외에서도 어느정도 알려진 밴드기도 합니다. 제가 구한 1집도 미국의 재규자우어 레이블에서 발매했으니깐요. 전반적으로 김두수를 연상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어렵게 작업해온 김두수랑 달리, 나기사 니 테는 빡센 스튜디오 작업과 깔끔한 마스터링을 자랑하는게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작업한게 느껴져서 부럽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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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스 [Hrutar / Rams] (2015)

아이슬란드의 가수인 비요크는 2008년 한국 음악 잡지랑 내한 인터뷰를 하던 도중, “아이슬란드에는 신선함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곳의 풍경은 매우 삭막하고 솔직해요. 상당히 ‘구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복잡한 느낌은 없어요. 그래서 아이슬란드에는 아이러니가 별로 없죠.” 라고 말한 바 있다. 1년에 10편 정도의 영화가 나오고, 대부분의 영화계 종사자들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아이슬란드 영화계가 간만에 배출한 [램스]는 그런 비요크의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설정은 단순하다. 40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내던 시골 양치기 형제가 양이 폐사될 위기에 처하자,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는 얘기다. 그리머 해커나르손의 연출 역시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잔 기교 없는 샷과 구도, 몽타쥬, 가끔 등장하는 썰렁한 유머는 아키 카우라스마키나 로이 안데르손 같은 북유럽 유머 거장이나 다구르 카리 같은 선배 아이슬란드 감독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구식'이다.

 하지만 [램스]의 ‘삭막하고 솔직한 구식 연출’은 오히려 장점이다. 그리머 감독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잘 알고 있다. 양이 죽어버리면 생활 기반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농부들이 살아가는 [램스]의 세계는 한국의 축산 농가와 그리 다르지 않으며, 중심이 되는 형제간의 갈등과 화합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익숙한 상황과 감정이 낯선 공간과 디테일과 배합되며 독특한 맛이 나는 것이다. 무뚝뚝하지만 정직한 태도 때문에 절로 영화의 결말을 보면서 그들이 행복해지길 바라게 된다.

 그리머 감독의 유머 감각도 기억할만하다. 같이 집을 나서면서도 서로에게 말도 안하고 가버리는 형제의 모습을 롱 샷으로 보여주는 장면, 개에게 편지를 물어 보내는 걸로 형제가 최소한의 의사 소통을 하는 장면, 기절한 키디를 구미가 포크레인에다 실어 병원에다가 내려다놓고 가버리는 장면, 지하에다가 양을 키우면서 태연하게 밥을 먹는 구미 같은 소소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유머가 많다. 이 또한 ‘구식’ 연출의 신중함으로 덕을 많이 보는 경향이 크다. [램스]의 유머는 침착한 리듬과 컷 연결이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연출하면서 생기는 위화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처럼 그리머 감독은 정직하게 샷을 쌓아올리며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구미와 키디 형제간의 감정/태도 변화를 짚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 매개체에 있는 건 양이다. 이 양을 향한 아이슬란드인들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열광적인 애정은, 상기한 유머로도 표출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우수 양 선발 대회로 형제간의 질투와 다툼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양을 살리기 위해 두 사람의 관계는 놀랄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 점에서 [램스]는 양이라는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매력을 샷에 우직하게 담아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그리머 감독은 종종 롱 샷으로 양과 인간이 아이슬란드의 삭막하지만 매력적인 자연 풍경을 누비는 걸 보여주기도 하는데, 북유럽 영화들이 어떤 식으로 자연 풍경을 활용해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왔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램스]는 비요크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아이러니라던가 복잡한 느낌 없이 삭막하고 솔직한 영화다. 그 솔직함 때문에 복잡한 걸작이 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램스]의 신선함 역시 거기서 비롯되고 있다. 로컬 시네마로써 가능한 영역 속에서 성실하게 일궈낸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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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nettes - Be My Baby

팝 역사를 얘기할때 빼놓고 지나갈수 없는 곡이죠.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의 매력과 초기 걸그룹/버블검 사운드를 만끽할 수 있는 명곡이라 봅니다.

필 스펙터는 아무래도 프로듀서에 가까운 뮤지션인지라 본인 명의의 정규 앨범이 없습니다. 그래서 음반 사실때 좀 난감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캐롤 앨범인 [A Christmas Gift For You From Phil Spector]도 걸작이고 입문용으로 괜찮긴 한데, 이건 캐롤 앨범인지라 'Be My Baby'를 위시한 명곡들이 안 실려있죠. 

사실 진짜배기는 [Back to Mono]이긴 합니다만, 이건 비싸기도 하고 상대적인 구반인지라 제가 구한 [The Phil Spector Collection]도 나쁘진 않습니다. 이게 저 캐롤 앨범과 베스트 컴필레이션을 합쳐놓은 앨범인지라 입문용으로 괜찮아요. 절판된게 문제이긴 하지만 [Phil Spector Wall of Sound Retrospective Philles Sound 1961-1996]라는 단품버전도 있으니 상술한 캐롤 앨범과 같이 지르면 OK.

찾아보니깐 [Phil Spector Presents The Phillies Album Collection]라고 당시 나왔던 프로듀싱해준 앨범을 복각한 박스셋에다 필 스펙터 본인 명의로 나온 컴필레이션인 [Wall Of Sound: The Very Best Of Phil Spector 1961-1966]도 나왔군요. 으으음.... 몇 곡 빠지긴 했지만 이거랑 캐롤 앨범 같이 사도 나쁘진 않을것 같긴 합니다. 곡 수가 차이 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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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새해인사: New Year's Honours


2017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올해는 작년보다 덜 슬펐으면 좋겠습니다.

100번째 창문
giantroot

(당분간 과거형 땜빵으로 리뷰들과 글들이 올라올겁니다. 빨리 따라잡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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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아들 [Saul fia / Son of Saul] (2015)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2015년 칸 영화제의 센세이션 중 하나였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중에서도 회색지대인 시체 처리반 ‘존더코만도’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비극을 재현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했다는 평가와 도덕 판단이 부재한 듯한 시선과 더불어 역사의 비극을 영화 연출의 첨단으로 나가기 위해 착취한것 아니냐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그렇다면 [사울의 아들]은 어떤 식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 영화가 현대 영화 중에서 어떤 전통에서 출발했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영화는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논쟁에 휩싸였다. 무수한 영화들이 나왔지만 이 논쟁의 첨단에 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와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를 들수 있다. [밤과 안개]는 이미 사라져버린 참상의 공간과, 분명하게 남아있는 당시 자료 사진을 교차시키면서 질문을 던졌다. [밤과 안개]는 끔찍한 참상을 당시에 찍혔던 영상들과 사진들로만 보여주고, 자신이 찍은 카메라는 없어져버린 공간만을 보여주면서 현재 시점에서 역사의 비극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한건 아닐까, 라는 고뇌를 던졌다. 실제로 레네는 [밤과 안개] 이후 [히로시마 내 사랑]부터 [사랑해 사랑해]까지 기억의 불일치와 재현이라는 문제에 파고들면서 그 고뇌의 근원을 파헤치고자 했다.

 한편 란츠만은 [쇼아]에서 조금 더 신중한 태도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수용소 생존자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면서도 비극의 순간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영화엔 어떤 자료화면도, 재연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란츠만은 생존자들이 회고하는 증언은 오로지 암시적인 세팅 속에서 드러났으며 동시에 그 재현 불가능한 끔찍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란츠만의 반대편에는 고다르가 있었다. 고다르는 란츠만을 향해 공격을 몇 번 가했는데, 그는 란츠만이 영화의 가능성, 나아가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논쟁을 틀어막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심지어 고다르는 란츠만을 홀로코스트 이후 시는 불가능하다, 라는 아도르노의 발언을 엮어 비판하기까지 했다. 이 논쟁은 곧 다른 학자들을 통해 이어졌으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사울의 아들]은 바로 고다르와 란츠만이 논쟁했던 그 지점에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영화다. 시작부터 알 수 있겠지만, 영화는 1인칭 시점의 영화다. 물론 로버트 몽고메리의 [호수의 여인]이나 [하드코어 헨리]처럼 주인공의 눈과 카메라가 동일시 된 영화가 아니다. 라즐로 네메스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처음부터 완강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이 오직 사울 하나의 시선만을 허용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첫 장면은 그 점에서 영화의 시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낸다. 핀트가 엇나간 프레임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고 그 중 제일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화면 가득히 잡힌다. 맞다. 그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사울이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알아차리자마자 네메스 감독은 그를 계속 행동하게 만든다. 네메스 감독은 1.37:1이라는 좁디좁은 프레임에서 영화는 부단히 움직이는 사울의 움직임과 시선만을 가득 채운 뒤, 그가 바라보는 캐릭터나 사물들을 아웃포커스로 처리한다. 이쯤 되면 어딘가 완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 아웃포커스는 마치 거기 있는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듯하다.

 물론 네메스 감독이 만드는 영화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아웃포커스엔 단호한 결기가 서려 있다. 이 결기는 대체 무엇일까? 다시 첫 장면부터 생각해보자. 고정된 카메라에서 어떤 인물을 다가오게 한 뒤, 그 인물이 움직이는 동선에 찰싹 달라붙는 촬영 방식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어떤 기다림을 읽었다. 네메스의 카메라에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쥐]의 블라덱 슈피겔만일수도, 아니면 [인생의 아름다워]의 귀도일수도, 아니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유태인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가 알다시피 사울이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의 얼굴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카메라를 트랙인하는 등의 “선명한” 방식을 쓰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답은 “네메스는 카메라의 전지전능함을 믿지 않는다.”, 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카메라가 감히 역사의 비극 속에 있었던 인간을 고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주인공 앞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다. 몽타주나 편집을 이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카메라를 고정시킨 뒤 흐릿하게 넘어 보이는 유태인들 속에서 주인공 사울을 불쑥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 그가 속해있는 역사적 상황에 끌려 다니는 주인공을 계속 쫓아다닌다. 사울은 카메라 앞에 그렇게 ‘등장’한 뒤 홀로코스트 현장으로 뛰어들고, 카메라는 그 인물을 순응한 뒤, 그를 따라다닌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은 핸드헬드와 스테디캠 같은 인물의 시점에 몰입하고자 하는 촬영방법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적인 극사실성을 추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일견 사실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울의 얼굴과 몸, 가끔 근처로 들어오는 인물들만을 허용하는 카메라의 아웃포커스는 오히려 모든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만들고 있다. 모든 시퀀스에서 사울이 겪는 수난은 흐릿하거나 프레임 밖 음향으로 처리된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보다는 오히려 자크 오디아르나 페드로 코스타 같이 인물의 움직임과 운동감을 표현주의적으로 담아내는 영화에 가깝다.

 물론 이 추상화는 관객들이 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친절히 설명된 존더코만도라던가 소품들과 희미하게 보이는 세트들은 ‘홀로코스트’라는 상황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왜 네메스는 ‘그 주변’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얼마 안 있어 등장하는 가스실 시퀀스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가스실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네메스가 시각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오로지 분주히 움직이는 사울과 그 동료들이다. 하지만 이 시퀀스가 끝날 무렵 네메스는 사울이 틀어막는 문 너머로 들리는 끔찍한 비명이 외화면 에 울러퍼진다. 하지만 이 음향이 외재 음향이 아니라 내재 음향이 외재화 되었다. 즉 네메스는 가스실의 비명이라는 영화 속 음향이 영화 속 음향이라는 사실이 교묘하게 지우고 사운드 편집을 통해 가스실의 비명이 마치 주인공들이 인지할 수 없는 디제시스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더욱 끔찍하다. 디제시스 바깥으로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듯 [사울의 아들]은 음향을 일종의 몽타주라고 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끌고 간다. 이 영화에서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행동이나 음향들의 근원은 상술했지만 아웃포커스 효과로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울이 근원과 가까이 있을 때에만 마지못해 보이는데, 그조차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음향들은 화면과 따로 노는 것도 아니며, 어떤 유기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낸다. 대표적으로 화형식이 거행되는 들판에서 사울이 랍비를 이끌고 나오는 시퀀스가 그렇다. 이 시퀀스가 우리는 시각 이미지를 통해선 간신히 거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지만 반대로 대사가 포함된 음향을 들으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학대받으며 노역하는 수용자들, 불태워지는 시체들……. 그렇기에 우리는 희미한 이미지들과 분명한 소리를 합하면서 그 현장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이야말로 [사울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함이다. 이 영화의 지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함 속에서 주인공을 압박한다.

 드라마라는 측면에서도 [사울의 아들]은 경계선상에 있다. 우리는 사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딘가 가까이 하기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사울은 고결하지 않은 주인공이다. 그가 하는 몇몇 행동은 범죄다. 인간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러니는 “우리는 이미 죽은 상태다”라는 선언으로 등장한다. 죽은 자를 애도한다는 인간적인 행위는 살아있는 자를 이용하고 죽음과 비윤리를 외면한다는 아이러니를 반복한다. 심지어 네메스는 그 아이러니를 강화하기 위해 사울의 캐릭터를 애매하게 조형했다. 사울은 진짜로 자기 아들을 매장하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어떤 도덕적 속죄를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네메스는 이 모든 행위는 이미 ‘죽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네메스는 어딘가 림보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영화적인 상황을 구성한다. 아웃포커스된 프레임 역시 일종의 림보적 효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의 아들]이 취한 영화적 기법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네메스는 강제수용소라는 현장을 재현한 세트를 만든 뒤, 촬영할 땐 일부러 그 현장을 흐릿하게 처리한다. 하지만 네메스는 정 반대로 그 현장에서 음향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네메스는 음향을 명확하게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이미지를 대신 ‘보여줄’ 수 있는 장치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음향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이미지와 합하거나 대조하는 방식으로 강조한다.

 그 결과 우리는 [사울의 아들]에 새겨지는 아웃포커스된 이미지에 음향으로 참상의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사울의 아들]에서 음향은 단순히 이미지에 종사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은 란츠만식 침묵도 아닌 고다르식 드러냄도 아닌, 흐릿한 화면에 선명히 들리는 음향의 폭격으로 두 가지 방법론을 모드 선취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사울의 아들]을 보는 관객들은 흐릿한 화면에서 발생하는 선명한 소리를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 심지어 사울이 아수라장에 있을 때 에도 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수라장을 헤치고 사울이 무엇을 이루고자 행동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이 선택한 방법은 논쟁적인 구석이 있다. 사실 오로지 사울의 시선만을 허용하는 이 영화의 샷은 놀랍게도 2000년대 중반부터 이뤄진 FPS 게임, 특히 밀리터리 FPS 게임의 경향과 닮아있다. 2000년대 초중반, 엉성했던 폴리곤 그래픽이 발전하면서 [콜 오브 듀티] 시리즈나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 [배틀필드] 시리즈 같은 게임들은 방 안 모니터에서도 실제 전장으로 데려가는 만족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들은 모두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어에게 (고증과는 관계없이) 만족감을 줄만한 화려한 폭발과 총기 소음을 통해 전장을 누비는 영웅이 될 기회를 주었고 금세 돈을 쓸어 모았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들이 레퍼런스로 참조한 영화들과, 그 영화들을 모니터 위에 재현한 전쟁 이미지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블랙 호크 다운]이 정립한 저널리스틱한 태도로 때로는 “제대로 보이지 않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스크린 위의 사실성의 극한을 추구했던 전쟁 영화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들이 역으로 [13시간]이나 [액트 오브 밸러], [론 서바이버] 같은 전쟁 영화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자연히 그들은 전쟁을 엔터테인먼트 화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심지어 미군은 이 흐름에 편승해 [아메리칸즈 아미] 같은 모병 게임부터 E3에서 홍보 부스를 설치해 모병을 했던걸로 유명하다.

 물론 [사울의 아들]이 FPS와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상기한 FPS 게임들은 [사울의 아들]처럼 창작자 자신이 알 수 없는 걸 상상하지 않고 흐릿하게 처리하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알 수 없는걸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채워넣는다. 적어도 [사울의 아들]은 밀리터리 FPS 게임들처럼 안일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전장의 이미지를 착취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장면에서 [사울의 아들]은 섬뜩하게도, FPS 게임이 추구하는 극한의 현실성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인다. [사울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사울의 행동과 시점만을 허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궁극적으로는 주체의 행동을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사울이 노동을 하는 샷, 사울이 죽은 아들의 시신을 보며 슬픔을 참는 샷, 사울이 도망가는 샷, 사울이 사람들과 언쟁을 벌이는 샷, 사울이 계단을 올라가는 샷, 사울이 나치에게 모욕을 당하는 샷.... 심지어 카메라가 사울에게서 멀어질 때도 카메라는 사울 근처에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등장시켜 참상을 목격케 한다. 즉 서사적으로 네메스는 사울에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카메라는 사울에 몰입해 있다. 후술할 마지막 시퀀스를 제외하면 이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원칙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상술했던 사울이 학살당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랍비를 찾아 헤매는 시퀀스이다. 다. 이 순간을 묘사하는 카메라는 FPS 게임들이라던가 [칠드런 오브 맨] 같은 전쟁의 참상 속에 달려가며 숨 가쁘게 질주하는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상기한 FPS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 시점에 몰입을 해 즉각적으로 총을 쏘고 달려가서 적을 때려눕힌다면, [사울의 아들]을 보는 사람들은 사울이 살아남기 위해 하는 액션들에 몰입해 그가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지 서스펜스를 느끼며 체험한다. 한마디로 카메라가 이입하는 대상에 몰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다음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이는 영화 제작 현장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딜레마에 가깝다. 라즐로 네메스는 강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역사적 자료에 기반에 수용소 세트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수용소 옷을 입히고 촬영을 해야 한다.

이 준비 과정이 일반적인 전쟁 영화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사운드 스테이지 촬영으로 전쟁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에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거친 지금 이 시기에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전쟁 영화 촬영을 한다면 가짜가 될 게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이건 네메스가 추구하는 윤리와 미학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 전쟁과 감금, 학살은 사운드스테이지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울에게서 멀어져 전체를 조감하는 구도로 촬영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된다면 네메스가 세워놓은 윤리는 금이 가게 될 것이다. 결국 네메스는 여타 전쟁 영화나 FPS 게임들처럼 정교하게 재현한 수용소에서 시야각을 좁히고 흐리게 하는 방식으로 디테일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비극에 예의를 표한다. 

 이렇게 고집스럽게 사울 주변만의 시선을 고집하던 [사울의 아들]은 결말에서 자신의 원칙을 하나 깬다. 어떻게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울은 아들의 시체마저 강에서 잃어버리고, 겨우 탈출해 어느 외딴 집에 숨는다. 이때 사울은 소련군을 찾아 동포들을 해방시키자는 계획을 흘려듣다가, 한 아이가 자신을 향해 바라본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때 사울은 환하게 웃는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사울에게서 벗어나 아이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아이가 독일군에게 입이 막혀있는 동안, 사울이 있는 곳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아이는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결말 시퀀스의 구성은 그동안 사울에게 몰입해왔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카메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이에게 넘어가 마무리 짓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장면은 사울의 시선이 아이의 시선으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울의 심리에 기반을 두어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울이 아이를 향해 웃는 장면은 사울의 마음 깊은 기저에 안식과 평화와 연계되어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소련군에 대해 떠드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사울의 표정만을 집중하는 카메라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르는 소련군이라던가 반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안식이다. 그 순간은, 소년이 어느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채 다음 샷에서 유령처럼 불쑥 등장한다. 소년의 이런 등장은 마치 사울의 아들이 유령으로 등장한 것과 같은 느낌마저 준다.

 이 순간 카메라는 갑자기 사울에게서 멀어져 소년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한창을 멀어졌을 때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며 사울이 죽음을 맞이한다. 섬뜩한 점은 사울의 죽음은 초반에 등장한 가스실 시퀀스처럼 외화면에 울려 퍼지는 외재 음향처럼 보이는 내재 음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네메스는 이로써 극을 이끌었던 사울의 죽음을, 가스실 희생자들이나 살해당한 무수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과 동일시한다. 이때 급격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울에게 닥쳐올 역사의 비극을 못 보겠다듯이 아이와 함께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갑자기 멈춰서고 아이는 숲 너머로 사라진다. 그렇게 카메라가 멈춰서 바라보는 곳은 사울이 죽은 곳도 아닌 아이가 사라진 곳이다. 결국 마지막 프레임에 남는 건 아무도 없는 울창한 숲 뿐이다.

 이 결말은 홀로코스트를 바라보는 라즐로 네메스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결말이라 할 수 있다. 네메스는 이 결말에 대해 마냥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아이러니컬한 구원이라 평가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울이 죽은 폐가를 돌아보지 않고 아이를 바라본 것은 무엇 때문 이였을까? 사울의 죽음이 결과적으로는 “이미 죽어버린 자”를 위한 역설적인 구원이라면, 그 역설적인 구원을 기억할 자로 사울의 아들을 닮은 남자아이를 지목한 것일까? 하지만 마지막을 장식한 텅 빈 화면은 무력해보인다. 네메스는 비극의 현장으로 돌아가지도 않지만 미래를 쫓아가지도 않는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던 영화의 카메라와 아웃포커스 기법과 연계시켜보면, 이 결말의 미장센은 그렇게 영화 내내 밀고 갔던 자신의 방법론이 정말로 옳았는지, 미래를 쫓아가 확인해야 할지 확신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 가깝다. 그렇기에 네메스는 마지막 프레임에 어느 누구도 쫓아가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이 선택한 결말은, 그동안 자신이 구축해왔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카메라가 가질 수 있는 FPS식 몰입의 위험성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프레임으로 제거하려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울의 아들]은 권선징악식 홀로코스트의 종말을 얘기하지도, 희생자에 대한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영화의 의도는 끔찍한 참상의 희생양이 현실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선택의 아이러니 도덕적 판단 없이 그 무게를 이해하길 바라는 것이다. [사울의 아들]이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면 홀로코스트와 전쟁이라는 스펙타클을 기대할법한 순간을 일부러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영리하면서도 신중하게 프레임 내 정보를 통제하고 가치판단을 배재한 채 배우의 움직임에서 어떤 원초적인 슬픔과 절박함을 끌어낼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은 여전히 논쟁적인 구석이 있다. 과연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스펙터클을 억누르지 않았던 게 올바른 선택이었는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가 그랬듯이, 네메스는 어떻게 영화에서 폭력적인 이미지가 작동하는지 인식했으며 그 인식과 사유를 윤리적으로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던 건 인정해야 할듯하다. 단적으로 [사울의 아들]을 보면서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관객은 없을 것이다. 관객들은 그 스펙타클에서 어떤 공포와 무력감, 슬픔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점에서 [사울의 아들]은 상술한 FPS 게임의 스펙타클의 무비판적 오락화이라는 함정을 피해 역사가 가지고 있는 끔찍함을 전달하는데 일단은 성공했다.

상술한 [폭력의 역사]는 폭력 이미지의 메커니즘을 갱스터/액션 영화라는 장르 언어와 지독할 정도로 철저한 논리적인 샷/시퀀스 연결법과 시퀀스 간의 대위법이 맞물려 드러냈으며 동시에 관객이 스스로 객관적으로 그 과정을 재구성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사울의 아들]이 선택한 방식은 사기극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안고 있다. 실제로도 영화는 헛디딜 뻔 한 순간들을 종종 노출한다. 가령 사울이 랍비를 찾아가던 도중, 멀리서 도망가다가 총살당하는 유태인을 흘끔 보여주는 시점 샷을 보자. 네메스는 이 컷에 담긴 총살당한 유태인의 디테일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전 샷들처럼 흐릿하게 처리할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자면, 그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줬다고 해도 영화 감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총살당한 유태인이 사울과 관계있는 것도 아니고, 사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을 고집하면서 굳이 보여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영화를 만약 VR로 관람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흐릿하지만 존재하는 디테일들은 과연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 올 것인가? 이 영화의 윤리적인 당위성은 1.33:1이긴 해도 비교적 넓은 스크린이기에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관객은 사울에게만 허용된 영화 속 관찰자 시선보다 넓은 시야를 보장받기 때문에 사울과 사울이 속한 배경 상황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반대로 얘기하면 주관적인 샷과 그 주관적 샷 너머에 있는 흐릿하지만 객관적인 후경의 비율을 상당히 위태롭게 잡혀있다는 얘기도 된다. 

 동시에 [사울의 아들]의 인물 간의 폭력적인 관계가 샷의 논리에 반영되는 방식이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샷-리버스 샷 구도가 거의 없이 사울의 샷이 중심이 되는 영화인데다, 서사 자체도 나치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라면 청소하는 척 하면서 시체를 찾으러 온 사울이 변명하자 나치들이 모욕을 주는 장면인데, 이때도 네메스는 나치에 대해 혐오를 보일 뿐 그들의 심리나 논리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에서 나치는 마치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과 같은 존재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를 재난영화라고도 우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를 배재한 천재지변적 묘사는 감정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있지만, 반대로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맹점도 안고 있다. 이런 단순화는 체험에 비중을 두다보니 어쩔 수 없는 맹점이라 본다.

 재구성의  원초적인 감각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영화적 비관주의를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전하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사울의 아들]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텅 빈 프레임은 그 점에서 조금 섬뜩하다. 마치 보이지 않지만 저항할 수 없는 허무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고 망설이는 인상이랄까. 극단적인 체험이 끝나고 네메스는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면서 카메라를 멈춘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울의 아들]은 FPS와 VR 시대에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에 대한 도발적인 텍스트로 받아들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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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野元春 - SOMEDAY

이 시기가 되니깐 괜히 생각나는 곡입니다. 일본의 시티팝을 언급할때 빠질수 없는 곡이죠. 빌리 조엘이라던가 국내에서는 하마다 쇼고까지 유구한 전통 속에서 완성된 1980년대 일본 시티팝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곡입니다. 동명의 앨범도 걸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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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우스 [Aquarius] (2016)

[아쿠아리우스]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것은 인물보다도 브라질 동남부 해안도시 헤시피의 옛날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다. 흑백으로 이뤄진 이 사진들이 배치된 이유는 명백하다: 클레베 멘돈사 필로에겐 어떤 인물보다도 헤시피라는 공간이 중요하다. 그는 헤시피라는 공간이 거쳐왔던 역사를 짧게라도 좋으니 관객들이 학습하길 바란다. 이런 욕망에는 매우 향토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필로의 고향은 바로 헤시피이며, 그의 전작 [네이버링 사운즈] 역시 헤시피가 배경인 영화다.

낡은 엽서 같은 사진들에서 시작한 영화는 다음 시퀀스에서 곧 인물로 좁혀들어간다. 하지만 필로는 곧장 시놉시스를 보고 상상할법한 클라라의 현재로 들어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클라라의 과거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필로는 클라라와 친족들이 모여서 이모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장면을 통해, 아쿠아리우스가 아직 허물어질 필요가 없었던 그 시절의 순간을 각인시키려고 한다. 이 시퀀스가 가져다주는 행복함은 뒤에 이어질 치열한 암투와 과부로 살아가는 클라라의 현재와 대비되기도 하다. 
 
이때 필로는 꽤나 인상적인 몽타쥬를 보여준다. 젊은 클라라가 아파트 안에 놓여진 장롱을 슬쩍 시선을 던지자, 장롱 샷이 등장하고 직후 짧은 플래시백 형식으로 클라라가 남편과 함께 장롱 위에서 섹스를 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어떤 물체가 개인의 기억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필로는 알랭 레네 같은 현대 영화의 유산을 의식하고 있다. 너무나도 거침없이 이어지는 몽타쥬 연결이라던가 높은 노출 수위를 통해 관객은 클라라라는 인물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들어서게 된다. [아쿠아리우스]는 이 시퀀스를 통해 명백히 클라라의 개인적인 영역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오프닝이 끝나고 '클라라의 머리카락' 장으로 넘어오면 (이 영화는 여러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아쿠아리우스]는 본격적으로 전개에 들어간다. 이 파트를 시작하는 시퀀스에서 필로가 사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탁월하다. 필로는 아쿠아리우스 주차장에서 철거 담당자들이 차에서 내리는 동안 잠자고 있는 클라라의 모습을 부감 트래킹 샷으로 보여준다. 약간 과시적인 기색이 있긴 하지만 필로는 집 안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공간의 대조를 통해 클라라의 삶이 어떤식으로 흔들릴지 설명한다. 바깥과 벽, 그리고 사적인 공간의 대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제 아쿠아리우스는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철거되어야 할 옛 건물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클라라는 떠나지 않는다. 디에고가 주장하는 바로는 개발업자는 못마땅해하지만 클라라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둘 간의 긴장감이 감돌면서 은밀하면서도 추잡한 협박이 이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이 과정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로는 클라라의 일상을 느긋하게 풀어내면서 아쿠아리우스 철거를 다루고 있다. 클라라는 할 말이 많은 재미있는 캐릭터고, 그걸 다루는 과정은 꽤 흥미진진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겠다: 클라라는 왜 아쿠아리우스를 떠나지 않는가? 표면적으로 클라라는 아쿠아리우스를 굳이 버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든다.  실제로도 필로가 보여주는 아쿠아리우스라는 공간은 낡긴 했어도 디에고가 주장하는것처럼 당장 철거해야 할 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클라라가 디에고에게 저항하는 이유는 훨씬 복잡하다. 영화 초반부에 분명한 단서가 던져진다. 지역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클라라는 자신이 구입한 중고 존 레논의 LP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자신이 LP나 책에 매료되는지 설명한다.

그 점에서 [아쿠아리우스]는 현대 영화가 발명해낸 '시공간의 역사성/정치성'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이토 케이카쿠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데드 미디어'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매체의 정치성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데드 미디어는 음반이나 책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유방암으로 도려내야만 했던 클라라의 유방과 아쿠아리우스라는 건물로 이어지고 있다. [아쿠아리우스]는 소멸하기 마련인, 눈에 보이는 물체의 역사성과 개인의 미시사를 영화에 이끌어들이고 있다. 클라라가 돈을 훔치고 잠적한 가정부의 환영과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걸 동시에 보는 환상 장면은 [아쿠아리우스]가 '데드 미디어'의 역사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요컨데 [아쿠아리우스]는 SF 장르에서 볼 수 있었던 문제의식을 현대극에 이식하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점은 [아쿠아리우스]는 데드 미디어를 고리타분하게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라라는 스마트폰이나 MP3 같은 새 문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들 역시 클라라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배어들어 있다. 클라라가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간이 낳은 흔적을 무시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아쿠아리우스]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시퀀스는 정치적인 저항과 데드 미디어의 가치가 만나는 부분이다. 윗집에서 클라라를 쫓아내기 위해 난교파티를 벌이는걸 목격하고 돌아온 클라라는 친구가 알려준 남창 파울로를 불러낸다. 격렬한 섹스를 나누던 도중 파올로가 클라라의 도려낸 유방을 눈치채고 당황해하자 클라라는 아무렇지 않게 파울로의 손을 도려낸 가슴에 올려놓는다. 1980년대 섹스 심벌로 유명했던 소니아 브라가의 스타 아우라와 캐릭터의 당당함이 만나는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클라라, 나아가 필로가 저항하는 건 새로운 문물이 아니라 데드 미디어의 역사성과 개인의 미시사를 경제적인 이득을 빌미로 강제로 제거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억압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에서 디에고로 대표되는 재개발업자들이 클라라의 일상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방식은 심증만 있지 명쾌한 물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클라라가 부끄럽다고 비난하고 사라지는 옛날 이웃집 주인의 아들, 난장판을 벌이다 갑자기 사라진 난봉꾼들, 수상한 흔적을 봤다고 클라라에게 귀뜸하는 안전요원의 증언, 갑자기 나타나 아쿠아리우스를 제멋대로 리모델링하는 인부들...

이처럼 [아쿠아리우스]가 개인을 향한 탄압을 영화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어딘가 불투명하고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다. 물론 관객들은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단들이 디에고가 사주한거라는 의심 (혹은 확신)을 가지지만, 디에고는 그런 확신을 교묘하게 회피하고 딱히 묘안이 없는 클라라는 골머리를 썩인다. [아쿠아리우스]가 심오한 주제의식과 달리 의외로 흥미진진한 영화인 이유도 이런 인과관계의 은폐에서 생기는 서스펜스에 있다. 즉 '가시적'인 데드 미디어를 파괴하려는 정치적인 탄압은 '비가시적'으로 전개되는데, 이 대조를 통해 필로는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며 정치적인 메시지를 구축한다.

당연하겠지만 [아쿠아리우스]의 역사성/정치성은 브라질 현실에 기반해있다. 우리는 [아쿠아리우스]를 보면서 헤시피의 역사,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빈부격차, 인종과 경제 문제를 알 수 있다. 클라라는 자신의 조카들을 데리고 자신의 가정부인 라제네가 사는 빈민가로 데려가면서 헤시피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고, 백인 재개발 업자를 만나 당신네 가족들 (클라라 가족은 메스티소쪽으로 그려진다.)이 부자가 된건 얼마 안 되었으니 처신 잘하라는 협박을 듣기도 한다.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외국 관객들은 [아쿠아리우스]가 드러내는 지역적 특색에 대해 마음 깊숙히 공감할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쿠아리우스]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동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박물학적인 매체"라는 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쿠아리우스]의 결말은 그 점에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강렬한 반격이다. 내부자의 고발을 들은 클라라는 사람들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클라라네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흰개미 둥지다. (흰개미가 건물을 붕괴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곤충이라는건 다들 알 것이다.) 클라라는 이 흰개미 둥지를 떼내 디에고의 회사를 방문한다. 아니라고 계속 발뺌하는 디에고에게 클라라는 화가 나서 이걸 보라며 들고 온 흰개미 둥지를 책상에 던진다. 필로는 이 흰개미 둥지를 접사한 샷으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분명 이 결말은 브라질 현실에 대한 필로의 직설적인 일갈이며, 영화 내내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던 디에고 일당의 진상짓에 짜증을 내던 관객들에겐 '사이다'같은 결말이다. 데드 미디어가 비가시적인 억압을 박살내는 장면이라는 점에서도 논리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결말을 보면서 시원함을 느끼면서도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 결말은 그 뒤 분명히 이어질 클라라와 디에고가 법정에서 이어질 진흙탕 싸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클라라의 승리만을 암시할 뿐이다. 그 점에서 [아쿠아리우스]의 결말 샷은 너무 쉽고 단순하게 이뤄져 있다. 필로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아쿠아리우스]의 결말 샷은 필로가 만들 또 다른 영화의 시작 샷이기도 하다. 마치 박근혜 탄핵안 가결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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