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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The Soft Boys - I Wanna Destory You

소프트 보이즈는 1970년대 말 영국 컬리지 록/네오 사이키델릭을 이끌었던 밴드입니다. 네오 사이키델릭이라고 해도 뭔가 약빠는 느낌 보다는 (없는건 아닙니다. 약간 맛이 간 가사라던가.) 사이키델릭 록 특유의 배배꼬인 훅과 에너지를 포크 록을 거쳐 포스트 펑크로 간결하게 재해석한 밴드라는 느낌입니다. 그 점이 R.E.M.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요. 로빈 히치콕은 이후 솔로로도 나름 주목할만한 성과를 냈다는 점도 적어놔야 되겠군요.

사실 그런 자질구레한 설명보다는 제목에서 예견될법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음. 요새같이 복잡하고 힘든 시대에 어울리는 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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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five - Luv U Tokio


더우니깐 긴 글 쓰는 것도 귀찮고... 당분간은 음악 땜빵글만 줄창 올릴지도요?

올해 초에 나온 타카하시 유키히로+레오 이마이+토와 테이+오야마다 케이고+콘도 토모히코 (애너니매스)+스나하라 요시노리 (전기 그루브)라는 굉장한 멤버들이 참가한 일렉트로닉 프로젝트 밴드입니다. 올해 초에 앨범 냈는데, 아직 못 샀습니다. 다만 이 곡을 들어봤을떄 저번에 올린 토와 테이 새 앨범 수록곡과도 방향성이 비슷하고 아무튼 흥미롭다고 할까요. 요새 유행하는, 1980년대풍의 복고 지향적인 (핫 칩이라던가, 레스 뮤직 디지털=스튜어트 프라이스) 일렉트로클래시 성향의 곡입니다.

보통 이런 프로젝트 밴드들은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곡만 놓고 보면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앨범 듣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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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계단을 오를때 [女が階段を上る時 / When A Woman Ascends The Stairs] (1960)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살펴보면 소위 물장사하는 여성들 (게이샤나 마담)을 다루는 영화들의 비중이 꽤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이 생각보다 포괄하는 폭이 다양하다는걸 생각해보면 (이전에 리뷰했던 [가을이 오다]라던가.) 물장사하는 여자들을 다루는 영화의 비중이 높다는건 나루세 미키오가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곧장 말해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과 관련된 멜로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며, 물장사 연작들은 그런 관심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도쿄 뒷골목 시대에 뒤떨어진 게이샤들의 쓸쓸한 모습을 보여줬던 [만국]이나 [흐르다]랑 달리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의 배경은 도쿄 긴자 '라일락'이라는 바다. 다카미네 히데코가 맡은 케이코는 남편을 잃고 긴자 바에서 마담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성기는 지나간데다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후배 마담은 자신의 손님을 가로채 승승장구하고, 바 주인은 케이코를 닦달한다. 케이코의 꿈은 자신의 바를 차리는 것이지만 그것조차도 자신만을 바라보는 가족들 때문에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케이코를 바라보는 매니저 코마츠가 있다.

편의상 물장사 여인 연작으로 분류하긴 했지만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은 여러모로 [만국]이나 [흐르다]랑 차별점들이 많다. 먼저 이 영화는 2.35:1 화면비를 사용한 영화다. 나루세 미키오는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처럼 테크닉을 과시하는 타입은 아니였지만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나 이후 찍은 시네마스코프 비율 영화들을 ([가을이 오다], [흐트러진 구름]) 보면 그가 영화적 테크닉을 교활하게 활용할줄 아는 감독이라는걸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이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진 도입부는 그 점에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걸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자조적인 나레이션 위로 일본 건물 계단 특유의 좁디좁은 계단에서 케이코는 양옆의 벽에 짓눌려 탈출할 구석을 찾지 못하고 오르락 내리락하는걸 반복한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 시네마스코프 비율은 그야말로 탈출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케이코라는 인물 자체도 [만국]이나 [흐르다]의 게이샤들하고는 다르다. 물론 한 물 갔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마담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케이코에겐 [만국]이나 [흐르다]의 게이샤들과 달리 동지들이 보이지 않는다. 케이코 주변의 마담들은 케이코를 이용할 생각을 품고 있거나 시스템의 피해자가 되어 퇴장하거나,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 배경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 케이코가 겪어야 하는 수난은 오로지 케이코 혼자 겪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수난의 끝은, 돈을 위해 정조를 포기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손님과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것에서 극에 달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가정은 개인을 얽매는 굴레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애증의 존재로 그려질때가 있는데,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도 그 부분은 여전하다. 케이코가 냑향해 요양하는 시퀀스가 그렇다. 서사상으로는 긴자로 대표되는 중심 서사와 한발 짝 떨어진 시퀀스지만, 케이코는 긴자로 대표되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다가 이 집에서조차 케이코는 소아마비 조카를 위해 자신의 가게를 차리겠다는 꿈을 일부 포기해야만 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애정으로 묶여있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가족이라는 관계를 이 시퀀스에서 낱낱이 해부한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 연대의 대상을 이성인 매니저 코마츠 켄이치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코마츠는 케이코가 자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연대엔 연정도 있지만, 영화는 코마츠가 케이코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이유를 세상을 헤쳐나가면서도 어떤 품위를 잃지 않는 당당한 태도라 설명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연대가 파탄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는 상당히 매몰찬 편이다. 결국 코마츠조차도 케이코의 변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로 남는 셈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는 그 점에서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속하지 못하는 여성 수난사를 일종의 시지포스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의 결말은 답답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긍정의 힘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결말이라 할 수 있다. 케이코가 그 수렁에서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겠지만, 그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코마츠를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에게서 어떤 긍정의 힘을 발견했던 것 아닐까. 그렇기에 영화를 끝맺는 케이코의 영업용 웃음은 그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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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 - Ong Ong

생각해보니 제가 작년에 나온 블러 새 앨범 [The Magic Whip]에 대해 코멘트를 안 했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겐 좋은 앨범이였습니다. 막 엄청나게 쩌는 걸작!은 아니지만 명성과 기다림에 보답하는 앨범이라고 할까요. 

전반적으로 2000년대 이후 알반 취향 (제3세계권 음악과 힙합에 대한 매혹, 소피스틱 팝 풍의 어쿠스틱과 일렉트로닉의 하이브리드, 약간 몽상적이고 우울한 멜로디) 이 많이 드러나는 앨범이긴 하지만 뭐 저야 그쪽으론 호에 가깝고, 노이즈 기타가 주도하는 콕슨 취향의 로큰롤도 분명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아 만족스러운 복귀작이였다고 할까요. 나온지 1년이나 지났지만 생각나면 자주 꺼내듣는 앨범이 되었습니다. 

'Go Out'은 약간 낯설긴 했는데, 이 곡은 옛날 블러 생각나기도 하고 꽤 잘 뽑힌 곡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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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3

더워.... 글 쓰기도 싫어질 정도로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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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 이야기 [The Tales of Hoffmann] (1951)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는 그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감독에 속한다. 그 얼마 안 되는 인지도도 [분홍신]에 집중되어 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지만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는 앨프리드 히치콕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영국에 남아서 훌륭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호프만 이야기]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분홍신]의 성공에 고무되어 만든 영화라는게 분명한데, 발레나 오페라 같은 무대 예술을 스크린에 올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요정낭만주의의 대표주자 E.T.A 호프만이 원작을 쓰고 자크 오펜바흐가 오페라로 각색한 [호프만 이야기]는 몇가지 각색에 불구하고 꽤나 충실하게 이식되어 있다. 독일 뉘른베르크. 호프만은 린돌프와 사귀고 있는 스텔라라는 발레리나를 짝사랑하고 그걸 눈치챈 스텔라는 호프만에게 만나자고 한다. 발레 공연이 끝난 뒤, 한 선술집에서 호프만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노래를 부르고 그가 겪은 세가지 사랑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기계인형 올림피아, 베니스의 고급 창부 줄리에타, 소프라노 안토니아. 

이 세 사랑의 이야기는 좌절과 실연으로 가득차 있다. 기계인형 올림피아는 그 완벽한 외견으로 호프만을 사랑에 빠지게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으로 표현된 고장 끝에 결국 부서지며, 고급 창부 줄리에타는 처음부터 호프만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따라 호프만을 농락한 끝에 그의 진짜 모습을 빼앗어버린다. 한편 소프라노 안토니아는 호프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재능을 소진한 끝에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액자 밖 호프만과 스텔라 (원작에서는 오페라 가수로 나오지만 영화판에서는 발레리나로 나온다.)의 사랑도 호프만의 좌절로 끝난다. [호프만 이야기]는 그 점에서 문학이 만들어진 이래로 유구히 내려온 남성의 시점에서 바라본 팜 파탈 혹은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물론 [호프만 이야기]가 소위 호러나 SF 문학에서도 시조격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유명한 조지 로메로가 이 영화를 사랑했다는 얘기도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계인형 올림피아는 그동안 쌓여왔던 고색창연한 근세 기계인형 이미지를 정리해, 이후 등장할 여성 안드로이드와 사이보그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으며 ([꼭두각시 서커스]에 등장하는 인형 올림피아는 여기서 따온 것일까?)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뤄질 미지의 영역을 상상하고 탐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SF라 볼 수 있다. 또한 흑마술과 저주, 유령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줄리에타와 안토니아의 이야기는 오컬트 장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를 감상한다는 것은, SF와 호러 장르의 근원에 있는 예스러운 전통을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가 이런 환상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실연담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데 골몰하는 동안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비주얼 폭격이라 불릴만한 시각적인 양식을 구축한다. 이 양식은 단순히 무대 미술 뿐만이 아니라, 영화적 연출에도 녹아있는데 [호프만 이야기]가 단순히 오페라 녹화 영상으로 그치지 않고, 영화적인 매력으로 승화된 것도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공이 크다. 그들은 무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공간의 확장과 거기서 비롯된 동선 배치, 시야각의 변화 같은걸 마음껏 누리며 원작의 상상력을 확장한다. 세번째 안토니아 에피소드 도입부에서 안토니아가 사는 섬으로 향하는 호프만 시퀀스를 보면 알겠지만 이 장면의 공간 연출은 무대보다는 영화에 가깝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는 꽤나 호사스러운 영화기도 하다. 애시당초 리얼리즘은 쌈싸먹은 얘기가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분홍신]으로 구축한 초창기 컬러 영화 특유의 색감이 입혀진 화려한 세트와 엄청난 혹사를 했을게 분명한 배우들의 연기가 디졸브와 이중 노출, 클로즈 업, 몽타쥬 등 다양한 영화적 기법과 만나면서 호화스러운 시각적 성찬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는 좋은 소스로 필히 감상해야 하는 영화기도 하다.

어찌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시대를 제대로 타고난 영화일지도 모른다. 1950년대 인공적인 스튜디오 세트 제작 체계가 영화계 트렌드는 [호프만 이야기]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무대적인 요소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영화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가능했다고 할까. 이후 영국 영화가 키친 싱크와 성난 청년 흐름으로 소박한 모양새로 돌아섰던걸 생각해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정말 영국 영화가 가능했던 한 시기가 응축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파웰은 이런 환상적인 모양새를 대부분 버리고 냉정하고 살벌한 톤으로 그린 [저주의 카메라] 감독이기도 하니깐 단순화시킬수 없겠지만.)

물론 파웰과 프레스버거 스타일의 발전상으로 따지자면 [호프만 이야기]는 파웰과 프레스버거 다른 영화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때문에 이 부분은 차후 이뤄질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만든 컬러 영화 대표작 [분홍신]이라던가 [흑수선] 리뷰로 미룰수 밖에 없다.) [호프만 이야기]가 영화사에 남을 시각적 성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들 커리어 후반기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두 감독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빛낸 만가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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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enage Fanclub - I'm In Love


어-예 

틴에이지 팬클럽 새 앨범 나와라 나와라 노래를 불렀더니 정말로 9월에 발매된다고 하네요. 텀이 너무 긴거 아닌가라는 불만도 좀 있지만 역시 틴에이지 팬클럽은 검증된 음악을 제공하는 그룹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공개된 첫 싱글도 상큼하니 좋고요. 

이번 기회에 두번째 내한 ㄱㄱ 어떻습니까? (*참고로 제 인생에서 제일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틴에이지 팬클럽 내한을 못 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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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의 집 [Casa De Lava / Down to Earth]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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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폰타야나스 연작을 거슬러 올라와 도착한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의 집]은 말그대로 연대기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피]와 [뼈] 사이에 놓여져 있는 영화다. 아직은 완벽한 픽션의 영역에서 [피]의 주연이였던 이네스 드 메디어로스가 기용되었지만, 집안과 리스본 시내를 머물던 흑백 카메라가 리스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나 총천연색 카보베르데에 도착했다. 페드로 코스타가 왜 [피]를 만든 후 리스본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고 카보베르데에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추측할수 밖에 없지만 무언가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였거니, 하고 추측해본다.

[용암의 집]의 시작은 카보베르데에서 분화하는 화산이다. 필름입자가 도드라지게 찍혀진 분화하는 화산과 마그마 다음으로, 카보베르데 주민의 얼굴 클로즈업이 담긴 몽타쥬가 흘러간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는 이 시작을 '코스타의 실수'라고 말했지만 [용암의 집]의 도입부는 카보베르데가 품고 있는 이미지를 포착한 뒤, 몽타쥬로 연결해 조용히 폭발시키는 멋진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도입부가 흥미로운 점은 고요함과 뜨거움이 동시에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카보베르데 주민들의 얼굴들은 로베르 브레송을 연상시키는 침묵에 잠겨있지만, 격렬하게 흐르는 영화 음악과 분절된 편집은 그와 대조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페드로 코스타는 [용암의 집] 도입부를 통해 조용하게 분출하는 카보베르데의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무대화하는데 성공한다.

페드로 코스타는 서사를 다룰때 어떠한 설명을 일부러 무시하고 생략과 결과를 통해 정서를 전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페드로 코스타가 묘사하고자 하는 분위기는 무엇일까? 도입부가 지나 짤막하게 등장하는 리스본에서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활기차게 웃으며 일하러 가는 동료 노동자들과 달리, 영화의 중심인 레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무표정은 놀랍게도 카보베르데 사람들의 얼굴들을 배치한 초반부 컷과 닮아있다. 여기까지 봤다면 알 수 있겠지만 [용암의 집]은 숨길것도 없이 '유령 영화' 혹은 '좀비 영화'다.

마리아나가 카보베르데에 도착하면서 이런 좀비 영화적인 성격은 강해진다. 영화 속 카보베르데는 분명한 인과관계 없이 흘러가는 느릿한 악몽과 같은 곳이다. 통성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마리아나를 알아보며, 레앙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은 자신은 아이가 50명이나 있다고 말한다. 해변가를 산책하던 마리아나는 왠 소년에게 공격받고, 개는 살해당한다. 자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마리아나가 가지고 있는 서구의 지식들은 해체되어간다. 온다던 헬리콥터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등장하지 않고, 레앙을 위해 준비해둔 백신은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낯선 곳에서 마리아나는 철저한 타자다.

하지만 [용암의 집]은 착취적으로 이국을 소모하는 영화는 아니다. 페드로 코스타는 이 악몽을 타자화하지 않고, 카보베르데라는 공간에 대해 묵상한다. 페드로 코스타는 카보베르데를 떠나는 청년들을 보여주면서, 이 느릿한 몽유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흐름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폰타야나스가 그랬듯이, [용암의 집]에 등장하는 카보베르데의 느릿한 우울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고 '그냥 살아가는 곳'이다.

흥미롭게도 [용암의 집]엔 [행진하는 청춘]의 모티브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보인다. 레앙은 벤투라처럼 카보베르데에서 포르투갈로 넘어온 공사 노동자이며 [행진하는 청춘]에 등장했던 렌토의 "용암으로 만든 집에서 같이 살고 싶다"는 연서는, 레앙과 아내(로 추정되는 인물) 간의 연서로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등장한다. 그렇다면 렌토는 레앙의 또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명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행진하는 청춘]에서 희망을 점차 잃다가 우발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렌토의 모습은 [용암의 집]에 등장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좀비 레앙에서 이어진 것은 명백하다.

레앙이 카보베르데인들의 생기 잃은 모습을 집약해 보여준다면, [얼굴 없는 눈]으로 유명한 에디트 스콥이 맡은 이디스는 훨씬 복잡한 의미를 내포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포르투갈 살리자르 정권의 상흔을 지니고 카보베르데의 섬에 정착한 이디스는, 꽤나 모호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디스의 아들이 말하길, 이디스는 마리아나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마리아나가 살리자르 정권 이후 세대라는걸 생각해보면 마리아나에 대한 이디스의 거부감은 자신을 버리고 망각한 포르투갈에 대한 거부감일것이다. 그렇기에 이디스는 인종과 관계없이 카보베르데인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코스타 감독은 이디스가 카보베르데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았던 포르투갈과 카보베르데 간의 묘한 관계를 암시한다. 좀 더 확장하자면 [얼굴 없는 눈]에서 가면만 쓰고 세상과 유리되어 성에 갖혀 살아가던 크리스티앙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라 할수도 있을것이다.

이디스와 마리아나의 엇갈린 운명은 그래서 흥미롭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마리아나는 카보베르데의 일원이 되어간다. 이디스의 아들과 충동적으로 자는 것부터 시작해, 깨어난 레앙을 보고도 리스본에 있을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페드로 코스타는 마리아나가 붉은 원피스에서 무채색의 옷을 갈아입는걸로, 마리아나가 카보베르데에 정착했음을 명백하게 한다. 마리아나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는 용암의 집 밖에서 돌을 던지며 분해하는 장면이다. 

반대로 완벽하게 정착한듯한 보였던 이디스는 영화 마지막에 카보베르데를 떠나 포르투갈로 향한다. 그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암시에도 불구하고 이디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마냥. 이디스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처럼 페드로 코스타는 [피]처럼 침묵을 택한다. 그저 문턱에 걸쳐 잠든 아이가 집으로 들어가는 컷을 통해, 경계선상에 있던 마리아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는 암시를 남길 뿐이다.

[피]가 인공적인 상징과 고도로 계산된 영화광적인 이미지들을 서사를 배치하는 전형적인 아트하우스 영화였다면, [용암의 집]은 추상적인 내러티브를 기반에 두면서도 다큐멘터리적인 연출을 도입해, 카보베르데인과 그 곳의 풍경을 그대로 포착/채집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단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카보베르데인들이 축제를 벌이는 시퀀스은 외지인인 페드로 코스타가 영화를 위해 조작했다기보는, 촬영날 우연히 일어났던 카보베르데인들의 축제 속으로 코스타가 들어가서 찍은것처럼 보인다. 어찌보면 후작들이 인물 다큐멘터리스러웠다면 [용암의 집]은 인류학 다큐멘터리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용암의 집]은 지금 시점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자연 풍광이 가져다 주는 미적 쾌감을 영화적 동력으로 삼는 페드로 코스타 영화기도 하다. 붉은 색 태양과, 검은색 화강암, 갈색 토양이 어우러진 카보베르데의 풍광은 마치 황야같이 보이는데 어찌보면 [용암의 집]을 만들면서 페드로 코스타는 서부극을 만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시공간이 모호해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마리아나의 클로즈업을 담은 컷이라던가 거의 흑백 호러 영화를 연상케하는 해변가 시퀀스는 [피]에서 보였던 영화광적인 매료가 담겨있기도 하다.

[용암의 집]은 이후작들에 비해 독해할 수 있는 많은 상징이 표면에 드러나 있는 영화기도 하다.  이것은 장점으로도 단점으로도 작용하는데, 적어도 [반다의 방] 이후 작들에 있던 자기고백에 담긴 아름다움은 [용암의 집]엔 없다. 반대로 정교하게 계산된 촬영이라던가 [피]보다는 덜 관습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편한 서사 전개는 [반다의 방]을 보면서 졸았던 사람이라면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관객의 자유겠지만 적어도 [용암의 집]에 드러난 표면은 이후 페드로 코스타 영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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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ニーデイ・サービス - 苺畑でつかまえて


올초에 나왔던 싱글이 너무 좋아서 올립니다. 그나저나 새 앨범 [Dance to You]이 곧 나온다면서요? 주문각이라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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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의 방 [No Quarto Da Vanda / In Vanda's Room] (2000)

2014/05/17 - [Deeper Into Movie/리뷰] - 뼈 [Ossos / Bone] (1997)

2016/05/29 - [Deeper Into Movie/리뷰] - 피 [O Sangue / The Blood] (1989)

2016/06/24 - [Deeper Into Movie/리뷰] - 행진하는 청춘 [Juventude em Marcha / Colossal Youth] (2006)

페드로 코스타는 [용암의 집]과 [뼈]를 제작할때 자신이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이 맞지 않다는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뼈]를 제작할때만 하더라도 페드로 코스타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35mm 혹은 16mm 필름만이 더 큰 세계로 나갈수 있는 통로였으며 아직 국제적인 입지가 단단하지 않았던 페드로 코스타는 피터 그리너웨이처럼 소니의 지원을 받아 HD 카메라를 쓸수도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등장한 도그마 선언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새로이 등장한 DV라는 캠코더 형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하모니 코린과 라스 폰 트리에, 토마스 빈터베르 같은 새로운 세대들은 캠코더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네마의 시작이였다.

그렇기에 [뼈]에서 [반다의 방]으로 넘어오면서 너무나도 많은게 달라져버렸다. [행진하는 청춘]에서도 간단히 언급하긴 했지만, DV 캠코더의 등장한 페드로 코스타에게 어떤 기회였던게 분명하다. 더 이상 인물들은 누군가를 연기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인공적인 조명기기는 확 줄어버렸다. 간단히 말해 [반다의 방]은 페드로 코스타의 관심이 디지털 캠코더의 기동성을 이용해 어떻게 폰타야나스의 현실과 영화광적인 매료를 혼합해 (다큐픽션) 보여줄 것인가를 보여준 첫 영화다. 

[반다의 방]은 [뼈]에서 조심스럽게 언급되었던 마약에 대한 암시는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영화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아무런 설명없이 반다와 반다의 여동생 지타가 마약을 하는 장면으로 '던져진다'. 우리는 이들이 마약을 하며 수다를 떠는 장면에서 어떤 일상의 피로함을 찾아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발표된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레퀴엠]이 마약하는 장면을 극단적인 컷 분할과 배분으로 쾌락을 극대화해 보여줬다면, 페드로 코스타는 청개구리처럼 그 행위들에게서 집요하게 쾌락을 지워내고 행위만을 반복한다. 반다와 지타에겐 마약은 과일을 파는 행위나 다름 없는 일상의 일부인 것이다.

이처럼 [뼈]의 여주인공을 맡은 반다는 폰타야나스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 반다는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자신의 방에 있거나 잠을 자거나 마약을 한다. 그리고 반다의 방 반대편에는 반다가 간신히 인지하는 마약판매상이 살고 있다. (이들은 만나지 않는다.) 반다는 가끔 그 방을 나와 곧 사라질 폰타아냐스에 과일을 팔러 돌아다닌다. 2시간 5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이 구조는 반복되거나 변주되는데, 후반부 폰타야나스가 재개발로 무너지면서 이 구조는 천천히 변하기 시작한다.

[뼈]부터 페드로 코스타는 설명을 대폭 축소해버리고 어떤 구조를 반복하거나 조금씩 변주하는 형식으로 서사를 구축하는, 사무엘 베케트나 포스트 펑크를 연상케하는 작법을 구사하고 있다. [뼈]에 삽입된 포스트 펑크 밴드 와이어의 곡은 그 점에서 페드로 코스타의 작법을 함축한 음향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와이어의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페드로 코스타는 잔인할 정도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구조를 과묵하고 집요하게 반복해 쌓아올리고 약간의 변주를 넣는 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반다의 방]를 이루고 있는 두 구조는 폰타야나스를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다. [뼈]와 [행진하는 청춘]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기본적으로 페드로 코스타는 집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페드로 코스타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집을 얻고 싶어하는 욕망을 드러내왔는데, 흥미롭게도 [반다의 방]의 반다는 폰타야나스 3부작의 주인공 중 처음부터 제대로 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그 반다의 방을 중심으로 삼아 가지를 치며 뻗어나간다. 어찌보면 참 솔직한 제목이다.

반다 뿐만이 아니라 반다의 어머니 레나, 동생 지타, 새아빠와 어린 남동생까지 반다의 가족은 폰타야나스에서는 빠듯하긴 해도 그럭저럭 뿌리를 내린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뿌리는 얼마 안 있어 뽑힐 예정이다. 반다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지 않지만, 반다가 과일을 팔러 돌아다니는 장면은 이상하게도 전작들의 방황하는 주인공들과 닮아있다. 유치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의 반다와 폰타야나스 주민들은 마치 [라스트 오브 어스]나 [폴아웃] 시리즈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 등장하는 생존자들 같다. 파괴된 공간을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는 모습 말이다. 더 나아가면 페드로 코스타 영화 리뷰에서 빼놓을수 없는 감독, 존 포드가 그려냈던 공동체를 언급할수도 있을것이다. (사견이지만, [반다의 방]과 [폴아웃]이나 [웨이스트랜드]는 외양과 달리 그 근원은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바로 존 포드 말이다.) 

하지만 [반다의 방]의 구조는 [뼈]와 달리 [라스트 오브 어스]보다는 [폴아웃]이나 [웨이스트랜드]에 가깝다. 한마디로 [반다의 방]의 폰타야나스는 오픈 월드 게임처럼 '열려있다'. 전작 [뼈]의 인물들을 얽매던 형식적인 서사마저 삭제되었기에 반다의 동선이 자유로워졌다고 할까. 반다는 더 이상 코스타가 짜준 동선이 아닌, 자신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고 페드로 코스타는 디지털 캠코더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그 리듬을 잡아낸다. 물론 오픈월드 게임이 그렇듯이 현실세계의 무한함을 통채로 옮겨놓은건 아니지만, 그건 매체의 특정상 어쩔수 없는 것이니 생략한다.

[뼈]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 연기를 아기 얼굴에다 뱉어내는 장면 보고 실제로 한거 아닐까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는 어느 관객의 말처럼, 페드로 코스타는 [뼈]에서 완성시킨 방법론을 [반다의 방]를 통해 폰타야나스의 삶에 배인 찌든 때를 매우 리얼하게 잡아낸다. 실제로 있는 낡은 공간부터 시작해 반다가 기침을 하다가 이불에다 침을 뱉어내거나 마약을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손길을 치밀하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배치하면서 구질구질하게 찌든 삶의 흔적들도 잡아낸다. 

반다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명징한 에피소드와 대화로 이뤄진다면, 마약판매상과 주변 인물들 이야기는 대단히 추상적으로 진행된다. 이들은 반다와 달리 폰타야나스가 파괴될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가구를 가져다 놓고 마약을 하는 등 도무지 떠날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초중반부 그들의 행동은 평범한 내러티브 영화에 익숙한 사람은 물론이고, 파편화된 서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당혹할 만큼 한 점으로 잘 응집되지 않는다. 그저 어둠속에서 중얼거리거나 추상화된 프레임에 갇힌다. [행진하는 청춘]의 렌토 에피소드가 그랬듯이 페드로 코스타는 그 에피소드가 어떤 일관된 구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걸 알면서도 그걸 집어넣는다.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고 폰타야나스 재개발이 진전되면서 나란히 흘러가던 이 두 구조는 변하기 시작한다. 먼저 마약판매상은 폰타야나스를 완벽하게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에 맞춰 주변 사람들도 하나 둘씩 폰타야나스를 떠나간다. 이때 페드로 코스타는 인물들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집어 넣는다. 대표적으로 목발을 짚은 청년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픽션 영화처럼 철저히 계산된 구도의 미장센으로 찍혀져있기에 묘하게 그 인물의 유언처럼 느껴진다. 여튼 그들이 떠나는 장면에서 [뼈]의 마지막 장면이나 [행진하는 청춘]의 유령처럼 등장하거나 불쑥 등장하는 인물의 동선을 찾아낼수 있다.

반다의 방 역시 폰타야나스 재개발에 큰 영향을 받는다. 여전히 반다의 행동은 변하지 않지만, 폰타야나스 재개발로 집을 잃은 청춘 몇몇이 반다의 방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흑인 청년이 반다의 방을 찾아와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흘러가던 두 흐름이 하나로 합쳐지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고정된 카메라에 침대에 누운 반다와 그 앞에 앉은 흑인 청년은 앞으로 흘러갈 인생과 현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다. 만약 이 영화나 [행진하는 청춘]이 그 난해한 모양새와 달리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이런 자기고백에 담긴 어떤 삶의 에너지를 잡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반다의 방 시퀀스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반다는 언제나 그랬듯이 일하러 나가고, 반다의 동생 지타는 남동생을 데리고 논다. 이때 페드로 코스타는 대사 없이 굉음을 내며 울려대는 방 바깥의 불도저와 포크레인 소리와 남동생이 우는 소리를 동시에 들려준다. 이 말미는 소리와 이미지의 결합이 매우 밀도높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다. 페드로 코스타는 이 결말을 통해 "반다의 방"은 언젠가 외부의 굉음에 깔려 사라지겠지만 (실제로 [행진하는 청춘]에서 반다는 새로운 아파트로 이주한지 오래다.) 반다의 방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갈 것이라는걸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반다의 방]은 [행진하는 청춘]에 비하면 뭔가 덜 정제된 영화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긴 러닝타임도 그렇지만 [반다의 방]은 시각적으로도 방법론적으로도 픽션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기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뼈]나 [피], [행진하는 청춘]에서 드러난 매혹적인 빛과 그림자, 소리의 마술이 [반다의 방]에서는 밀려나고, 대신 실제로 있는 빈민가의 구질구질한 가난과 일상을 날것으로 턱하고 내놓는 느낌이랄까.

다시 말해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오가는, 꽤나 복잡한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끄집어냈던 [행진하는 청춘]과 달리 [반다의 방]에서 "실제"로 있던 가난의 정경들에서 영화적 힘을 끄집어내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지 않나는 의구심을 지울수 없다. 사실 [반다의 방]에서 제일 인상깊은 시퀀스들은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에 입각한 시퀀스들이다. 반다가 기침을 하다 침을 뱉어내는 장면이라던가 마약을 하는 장면이라던가, 인물들이 자기 생각을 털어놓는 장면들은 인물들은 카메라를 전혀 의식을 하지 않고, 관객들은 거기에 푹 잠기게 된다. 

반대로 [반다의 방]에서 정교하게 구성된 허구적인 시퀀스들은 그 테크닉에 비해 다소 소극적으로 머물러있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물론 이후 페드로 코스타가 10년 이상을 추구하게 될 스타일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라던가 구질구질한 폰타야나스의 일상이 붕괴되는 과정을 과묵하지만 장엄하게 그리면서, 디지털 캠코더의 자유로움을 만끽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반다의 방]을 지지할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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