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8번째 생일

또다시 1년을 버텼습니다.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제 생일은 봄의 초입부라서, 정말로 한 해가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더라고요. 이제 일이 좀 풀려야 한건데 말이죠.

다음 1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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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프로젝트] 예고편

이건 또 언제 보러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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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과 엽전들 - 긴긴 밤

이 곡이 초판에 실린 곡이라 상당히 듣기 힘들었던 곡인데, 2000년대 초에야 신중현과 엽전들 초판이 재발매되면서 들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새 신중현 관련 앨범들이 재발매되고 있는데, 조금씩 사모을 생각입니다. 절판만 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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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지구 [Na srebrnym globie / On the Silver Globe] (1988)

한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쓰면서, 제작 당시 상황은 영화 속 샷과 시퀀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긴 하다. 현장에서 누가 싸웠다던가, 이 장면은 어떤 과정으로 찍었고 어떤 난항을 겪었는지 같은 정보는 샷과 시퀀스의 의중을 파악할 단서와 더불어 논리의 근거를 더해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제작 당시 상황은 앞으로 펼쳐질 서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현실을 허구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순간 영화는 메타픽션의 미로가 되버린다. 그럼에도 제작 당시 상황을 영화로 끌고 왔다면 그래야만 했던 사정과 고백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오손 웰즈가 있다. [위대한 앰버슨가]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웰즈의 영화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무자비한 편집 가위와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서 투쟁해야 했던 웰즈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안제이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도 이 부류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줄랍스키는 말한다. 이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고, 지금에서야 이런 형태로 내놓을 수 밖에 없다고. 이 변명이 펼쳐지는 쇼트들은 1988년의 폴란드다. 사실 이 영화는 1970년대 중반에 찍었다. 프랑스에서 만든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로 폴란드 영화계에서 다시 기회를 잡은 줄랍스키는 할아버지 예지 줄랍스키의 SF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공산 독재 정권 치하에서 [은빛 지구]는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다른 폴란드 영화인 리샤르드 부가이스키의 [신문] 역시 80년대 초에 촬영했다가 90년대 들어서야 공개할 수 있었다.) 영화 촬영은 중단되었고, 줄랍스키는 폴란드를 떠나 근 10년 이상을 해외에서 활동해야 했다.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인서트 샷들은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외계인 안제 줄랍스키의 한탄이다. 줄랍스키는 말한다: 1/5이 날아간 영화를 완성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완성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은빛 지구]는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행성 개척 대서사시라고 부를만한 SF 영화다. 일련의 우주인들이 지구를 떠나 외계 행성에 내린다. 하지만 고된 여정 끝에 우주인 일부가 사망하고, 남은 사람들은 토착민들이 사는 해변가에 정착한다. 그들의 2세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지만 지구의 문명을 전혀 알지 못하고 토착민들과 함꼐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원초적인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남은 우주인들은 전부 죽고, 그들의 신호를 받아 우주인 마렉이 착륙한다. 정착민들은 그를 신화에 등장하는 구원자로 떠받든다. 마렉은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운명은 마렉을 구원자의 길로 이끈다. 

하지만 [은빛 지구]를 보고 난 뒤 서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사는 절반 이상이 미친 전도사의 방언이나 다름없고, 인과 관계는 숭숭 빠져있다. [은빛 지구]의 서사는 강렬한 상징과 인물들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끌려가지만, 정작 그 행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나마 설명해줄것 같은 부분들은 날아가버렸다. 사실 대사나 장면 설계들을 보면, 이 영화에서 어떤 정합성을 기대하면 안된다는걸 알게 될것이다. [은빛 지구]는 표면상 SF를 표방하고 있지만, 장르를 다루는 태도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처럼 상징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지구가 배경이었다면 불가능한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구 한 구석에서 촬영한) 비주얼과 설정 뿐이다. 애시당초 걸작이 될 수 없었던 무모한 영화였지만, 검열로 더욱 기괴해져버렸다.

의외로 주제를 파악하는건 어렵진 않다. [은빛 지구]는 노골적인 예수 이야기다. 줄랍스키는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마렉을 향한 구원자 운운이라던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십자가 상징에서 예수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일종의 제의적인 형태로 이뤄지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제의를 다루는 줄랍스키의 태도는 반종교적이다. [은빛 지구]의 세계는 주류 종교가 내세우는 성인의 헌신과 신성의 아름다움보다는 주류 종교가 들추고 싶지 않았던 샤머니즘과 원시적인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꼬챙이에 사람을 앉혀놓는 장면, 기괴한 원시 부족, 방언을 내뱉는 무녀의 존재, 악마를 상징하는 기괴한 생물... 요컨데 줄랍스키는 종교적 믿음이나 논리 자체를 매우 폭력적인 무언가로 보고 있다.

원작이 되는 예르지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예스러운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걸 고려해보면, 영화 [은빛 지구]의 그로테스크함은 안제이 줄랍스키만의 폭력적인 상상력에서 뻗어나온 괴물이라 할 수 있겠다. 군무와도 같은 부족의 춤, 대체 어떻게 발견하고 만든건지 궁금한 풍광과 의상 및 세트 디자인, 오버액팅을 불사하는 인물들의 열정적인 연기는 [은빛 지구]의 그로스테크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초 만들었던 [퍼제션]의 간음하는 촉수괴물에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반대편에서 줄랍스키는 순수한 사랑을 꺼낸다. 하지만 줄랍스키의 사랑은 순수하되 무지와 두려움에 맞서듯이 미쳐있다. 이처럼 줄랍스키는 세상이 극단으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그 극단에서 인물은 중간을 택할 수 없다. 사악해지거나 순수함에 미쳐버리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은빛 지구]는 줄랍스키의 극단과 광기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중 하나기도 하다. 줄랍스키는 폴란드 독재 정권에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망명 폴란드 감독들의 영화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문라이팅]이 대표적일 것이다.)이 그렇듯이, [은빛 지구]에도 폴란드 지식인의 분노와 체념의 정서가 녹아 있다. 먼저 영화에서 지구를 떠난 것은 지도자나 노동자도 아닌 지식인이다. 이 우주인들에게서는 어떤 탈출이나 도피 욕망이 느껴진다. 이 우주인들은 사랑을 이룰수 없는 지구를 떠나 지구와 동떨어진 행성에서 사랑을 찾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우주인의 후손들은 지구를 잊어버린채 광기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그들의 기원을 알고 있는 또다른 지식인 마렉이다. 마렉은 그들을 이끌고 바다 너머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이 시도 역시 실패한다. 줄랍스키는 실패로 점철된 신화에서 구원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뤄질수 밖에 없는것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 물음에 줄랍스키는 답하지 못한다. 줄랍스키가 결말로 생각한 마렉의 동료가 죽는 장면은 오로지 나레이션 음성으로만 진술될 뿐이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았어야 할 영상의 부재는, [은빛 지구]에 아로새겨진 폴란드 역사의 비극을 상기케 한다. 

이제 메타 영화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일단 [은빛 지구]는 카메라의 시선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종종 카메라를 전달하거나 소유권에 대해 얘기한다. 초중반부 줄랍스키는 카메라를 든 캐릭터의 성격을 카메라의 움직임에다 반영하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는 문명의 관찰자에서 원시 부족의 본능으로 변모해간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 이전의 영화임에도, 무모할 정도로 막나가는 카메라 스턴트에 캐릭터의 개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경탄스럽다. 

여기다 줄랍스키는 자의식 똘똘 뭉치는 점프 컷을 활용하거나 의미없는 쇼트를 끼어넣는 것으로 카메라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곤 하는데, 이런 관점들은 영화의 신화적인 분위기와 충돌하면서도 묘한 영역을 남기곤 한다. 하지만 중반부 마렉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관점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오직 줄랍스키의 자의식만 남아있다는 점은 아쉽다. [은빛 지구]의 카메라 움직임은 대담하고 고심을 담긴 했지만 온전한 결과물가 되기엔 부족하다.

그 다음엔 영화 외적인 상황과 잘려나간 서사에 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은 폴란드 변사 나레이션의 전통을 빌려 전개된다.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권에서는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남자 해설자가 모든 대사를 읽는 전통이 있었다. 줄랍스키가 맡은 나레이션은 그런 점에서 복합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일단 이 나레이션은 조국을 떠나 프랑스라는 타국에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해야 했던 줄랍스키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동안 타자로써 살아야했던 그는 고국 영화의 전통을 상기하면서, 자신이 폴란드인이라는걸 적극적으로 인식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나레이션 전통이 외국 영화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폴란드에서 버림받은 [은빛 지구]의 운명과 묘하게 연계되는 구석이 있다. 필름이 사라진 자리에 스틸 사진을 넣어서 만들수 있었음에도 줄랍스키는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영상을 기어이 쓴다. 이 선택은 어딘가 고집스럽고, 처연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안제이 줄랍스키는 [은빛 지구]가 끝내 '폴란드 영화가 될 수 없었던 영화'라 생각하고 있다. 결국엔 날아간 필름 1/5는 돌아올 수 없으며, 다시 찍더라도 기존 분량과 어색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줄랍스키는 그 깨달음을 1988년 폴란드라는 상황을 개입시키면서 드러낸다. 마치 제3자마냥 사라진 영화의 서사를 얘기하는 줄랍스키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린다면, 이 영화가 맞이해야 할 운명을 예감해서 아니였을까 싶다. 줄랍스키는 영화를 마무리짓고 쇼윈도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고 선언한다. 마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사람처럼. 물론 새로운 삶은 순탄치 않았고, 줄랍스키는 2015년 타계했다.

[은빛 지구]가 정상적인 제작 과정을 거쳐 공개되었더라도, 걸작이 되진 않았을것이다. 남아있는 필름엔 줄랍스키 개인의 자의식과 감정이 통제없이 넘쳐나고, 거대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빠지는 단순화의 함정들도 보인다. 마지막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는 다짐도 왠지 느끼하게 들리다면, 객관적 성찰과 자아도취의 경계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은빛 지구] 역시 다른 줄랍스키 영화들이 그랬듯이  천생 컬트 영화로 낙인찍혔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빛 지구]는 제1세계 컬트 영화들과 달리, 그런걸 허용할 수 없는 국가에서 태어났고 창작자는 처참하게 남겨진 필름을 수습해야 했다. 완성도와 무관하게 [은빛 지구]가 이상하게 슬프게 다가온다면, 어쩔수 없이 폴란드사의 부조리와 싸웠지만 끝내 패배한 개인이 보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패배는 폴란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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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웨이 아웃] 예고편

이거 재미있을련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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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 She Brings the Rain

벼르고 벼르던 캔의 [Soundtracks] 앨범을 샀습니다. 리뷰에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딥 엔드에 이들의 'Mother Sky'가 실렸거든요. 캔을 좋아하는지 사야지 생각하다가 결국 샀습니다. 근데 문제는 [딥 엔드] 말고는 다른 영화들은 제가 모릅.... [Deadlock]은 독일산 네오 서부극이라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영화랑 음악 모두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뉴 저먼 시네마와 크라우트 록의 연계라는 점에서 흥미있는 탐구 대상이 될것 같습니다.

앨범 자체는 음... 과도기적이에요. 'Mother Sky'는 확실히 다모 시절을 연상시키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말콤 무니 시절 곡은 처음 들어보는 거긴 한데, 이 곡 같은 경우엔... 싸이키델릭 재즈 팝이네요. 다모 시절을 대표하는 기계적이고 모토릭한 리듬은 찾아볼수 없지만, 재즈 베이스 운용과 후렴을 장식하는 단장을 끓는듯한 기타 간주와 조용해서 더 무서운 무니의 보컬이 조용한 광기를 만들어내는게 인상적인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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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Paterson] (2016)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구 10만명 정도 되는 이 소도시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제외하면 흔한 교외 지역이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눈에 이 평범함은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강점이다. [패터슨]은 일종의 농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드라이버이자 시인 패터슨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코미디 영화인가 싶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유머기도 하다. 자무시가 유머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A-B-A 구조가 문학의 운율이나 리듬을 연상케하는걸 주의해보면, [패터슨]의 반복된 유머는 영화의 구조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 이후에 데뷔한 영화 감독답게 구조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감독이긴 했지만, [패터슨]은 여타 자무시 영화 중에서도 그 구조가 뚜렷하게 보이는 영화다.

[패터슨]은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개별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별 장으로 구성된 영화들은 대체로 장마다 다른 상황과 샷, 몽타주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패터슨]은 장이 넘어가도 비슷한 상황과 샷을 반복한다. 전제를 살펴보자. 패터슨은 아내 로라와 함께 사는 아마추어 시인이며, 버스 운전사다. 매일 아침 일어나 프레이크로 아침을 먹고, 버스 운전을 한 뒤 퇴근해 바에 가서 술을 마신다. 전개로 보자면, [패터슨]은 같은 순간을 반복하는 영화다. 도입부인 월요일은 영화 전체의 구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화요일이 되었을때 영화는 패터슨의 삶, 나아가 영화의 리듬을 깨닫게 하고 수요일부터 변주에 들어간다. 이렇게 시작한 변주는 주말이 되면서, 변화를 맞이하고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자무시는 [패터슨]을 만들면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뼈대로만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운 바이 로]의 숲 속에서 헤매는 시퀀스라던가 [고스트 독]의 아이스크림 장수 시퀀스에서 드러나듯이, 자무시는 같은 요소의 반복과 변주로 최면을 걸 줄 아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까운 [패터슨]는 패터슨의 심리 변화를 일상을 구성하는 개별 쇼트에 섬세하게 깔아두고 관객이 파악하도록 만들었다. 첫번째 날을 통해 관객은 패터슨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두번째 날부터 관객은 패터슨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알게 된다. 버스, 폭포, 골목길, 도시락, 불독, 바, 성냥갑 그리고 시 노트....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디테일은 늘어나거나 달라지거나, 심지어 사라진다. [패터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쇼트를 차지하는 삶의 요소가 패터슨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감지해야 한다. 로라가 만든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고 다시 도시락 통에 집어넣는 패터슨의 쇼트라던가 각 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주잔을 들여다보는 쇼트의 유무가 대표적이다. 가끔 자무시는 패터슨의 심리를 반영한 오버랩과 음향 몽타주로 일상의 순간을 채색하기도 하다.

자무시가 보는 패터슨 시는 웃기면서도 어둠을 간직한 도시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종/사회 서브텍스트다. 패터슨은 백인이지만, 패터슨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흑인이나 인도인이 많다. 생활에 찌든 인도인 버스 기사 동료,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메소드 맨부터 시작해 패터슨 시는 백인보다는 흑인이나 인도인 같은 인종들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패터슨의 아내인 로라조차 이란계라는 암시가 들어간다. 허리케인 카터와 아나키즘에 대한 언급부터 차를 탄 채 흥청망청 노는 건달들, 금요일에 등장하는 에버렛의 가짜 총격전 소동은 패터슨 시의 불안과 어둠이 어떤 식인지 편린을 살짝 보여준다. 패터슨은 그 불안과 어둠에서 한발 짝 떨어져 평화롭게 살지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안과 어둠은 패터슨이 겪는 창작의 난항과 맞물려간다. 

여기다 패터슨의 과거는 의외로 밝지 않다. 침대 근처 놓여진 사진들을 추측해보면 패터슨은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다. 패터슨이 (실제 미군으로 복역했던) 애덤 드라이버의 자전적인 캐릭터일리는 없겠지만, 나이가 애덤 드라이버랑 비슷하고 2010년대가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패터슨은 9/11 테러 이후 입대한 미군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패터슨]의 인종 설정은 조금 특별해진다. 험악했던 21세기 미국-중동 간 정세에 관련되어 있던 폭력 전문가가 제대 후 이란계 아내과 다양한 인종의 동료들을 두고 시를 쓰며 평온하게 살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설정을 통해 반 이민주의 시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폭력 전문가가 어떻게 현실로 돌아올수 있었는지 한번 곱씹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창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패터슨]의 창작은 더블 이미지와 연계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 로라는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로라는 만약 낳는다면 자신과 패터슨을 닮은 쌍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직후 밥을 먹던 패터슨은 오하이오 블루 매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창작 과정을 일상 속에 배치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창작물은 대상을 반영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더블 이미지로 남게 된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다. 스크린 위에 새겨지는 패터슨의 시어를 담은 자막은 실재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패터슨 뿐만이 아니라 로라에게도 해당되는데, 로라는 그것이 매우 기술친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패터슨이 반복한다면 로라는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로라는 기타 연주와 컵케이크 만들기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체득한다. 자무시는 부부가 서로 존중하듯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존중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원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봉 후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음반을 모으고 연필로 시나리오 작업하는 자신의 삶에 자식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창작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바 있는데 패터슨은 그 점에서 자무시의 지론이 반영된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들어서면 재능의 문제는 영화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로라와 패터슨의 포물선이 다르다. 로라는 모든 창작에 대해 초보자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로라는 처음 창작을 했을때 느끼는 신선함에 매혹된 사람이다. 당연히 로라의 시도는 어딘가 어설프기 그지 없다. 꾸준히 축적되어 있는 상태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어설픔을 도로 도시락통에 들어가는 한 입 베어문 컵케이크라는 필로우 쇼트로 압축해 보여준다. 로라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눈빛이 약간 걱정을 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로라는 꾸준한 자세로 자신의 어설픔을 극복하고 소기의 성과를 낸다. 주말에 이르면 판 컵케이크는 대성공을 거두고 기타 연주 역시 그럴싸해진다. 

반대로 패터슨은 이전부터 꾸준히 쓰고 있는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를 발표할 생각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겸손함이다. 패터슨은 시에 엄청난 자부심 같은 것은 없고 명성에 대한 욕심도 없다. 패터슨은 자신의 시를 로라와 같이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패터슨은 내심 자신이 쓰는 시가 뛰어나길 바란다.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패터슨의 좌절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시를 쓰는 소녀를 만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시어가 쓰여진 시 노트를 본다. 이내 무표정으로 묻히지만 패터슨의 감정에 동요가 일어났다는걸 눈치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무시의 태도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만큼이나 현실적이고 명확하게 말한다. 세상 어딘가엔 범인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 패터슨의 재능은 노력으로 갈고 닦은 재능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의 재능은 아니다. 계속 반복될 것만 같은 패터슨의 일상을 흔들리는 순간도 천재를 만났을때 이뤄진다. 다소 생뚱맞은 [잃어버린 영혼의 섬] 인용은 외친다. "사람을 해부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을 조각 낸다고요! 원주민이 이상한 이유를 알았어요 그들은 희생자들이에요!"

패터슨은 자신의 창작 과정이 천재의 그것과 달리 살아있는 일상을 조각내면서 만든 키메라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의심이 커졌을때, 일상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좌절감은 지속된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가짜 총격전 소동을 일으키는 에버렛과 시 노트를 아작낸 부부의 개 마빈은 그 점에서 패터슨의 심리에 반응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자무시는 여기서 물질 매체의 유한함을 언급하면서 패터슨이 그동안 만들어왔던 창작물 대부분을 무로 만들어버린다. 발표되지 않은 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백업하지 않은 문서는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다. 심지어 기술조차도 일어나버린 소멸을 막지 못한다. 일순간에 패터슨의 시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시는 사라지고 패터슨은 창작을 지속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창작의 상징이었던 폭포 앞에서 패터슨은 패터슨 시로 여행 온 일본인 시인을 만난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 정보를 꺼내며, 패터슨이 좋아하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 얘기를 꺼낸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에게, 몇 가지 사실을 가르쳐준다. 어떤 예술가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훌륭한 작품을 써냈다는 걸. 그리고 "때때로 빈 종이가 가장 큰 가능성을 보여주지요."라는 말을 남긴다. 일본인 시인이 떠난 뒤, 패터슨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이 일본인 시인을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매혹과 더불어 노자/장자부터 시작해 세이 쇼나곤의 오카시로 이어지는 관찰과 깨달음의 경지를 영화로 끌어온다.  아하, 라는 대사는 그 점에서 새로운 깨달음이자 시작이다.

창작물이 파괴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일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패터슨 시의 패터슨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빈 종이의 가능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패터슨은 로라의 깨달음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인 셈이다. 매번 새로운 것을 접근하고 만들어내는 로라의 접근방식은 패터슨에게도 적용되고 교훈을 남긴다. 결말은 새로운 공책과 일주일의 시작이다. 패터슨 시는 그렇게 하루를 살 것이고, 패터슨은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시를 계속 쓸 것이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은 그 점에서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인 정보에서, 미국의 일상을 찾아낸 뒤 일상의 신비로움과 창작의 회노애락을 사람들에게 깨우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그는 창작의 과정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존재한다고, 시의 문장을 마무리짓는다.

우리는 뮤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뮤즈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김목인, '뮤즈가 다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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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어떤걸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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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크 그레이트 트럼프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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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카베 케이이치=상은 얼마나 흑역사로 여기길래 데뷔곡임에도 1집은 커녕 베스트 앨범에도 안 실었던걸까....

물론 플리퍼스 기타 짭에서 벗어날 수 없긴 한데, 곡 자체는 풋풋하면서도 잘 뽑았거든요. 90년대 초의 드럼머신과 신스, 간주 기타의 즉흥 연주가 매력적입니다. 어쩌보면 가지 않았던 길 아닐까 싶은데, 이 노선으로 쭉 갔다면, 서니 데이 서비스는 시부야케이와 같이 거론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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