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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투 러버스 (2014)

Two Lovers 
8
감독
제임스 그레이
출연
호아킨 피닉스, 기네스 팰트로, 비네사 쇼, 이사벨라 로셀리니, 엘리어스 코티스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미국 | 109 분 | 201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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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러버스]의 시작은 연못에 뛰어드는 남자다. 'We Love Our Customers'라는 문구가 달린 옷 다발을 떨어트린채 남자는 자살을 시도한다. 거기서 이별을 고하는 여자의 환영은, 물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과 죽음을 모두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곧 실패로 돌아간다. 정확히는 스스로 포기한다는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에 올라온 남자는 절대로 자신이 뛰어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그의 완강하게 부인하는 태도는 그가 이별로 인한 슬픔에 푹 젖어있으며 죽음에 뛰어든 행동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떤 저항할수 없는 힘에 떠밀렸다는 걸 알게 한다. 


"세탁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물에는 왜?"라는 사람의 말처럼, 주인공 레너드가 푹 빠져있는 슬픔은 (옷을 세척해 말린 뒤 깔끔하게 내놓는) 세탁소를 하는 주인공 레너드의 가족하고는 상치되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레너드를 말리는 것은 부모가 아닌, 자기 방에 있는 라지에이터며 레너드 부모님은 방 밖에서 애만 태울 뿐이다. 그렇기에 바로 이어지는 산드라의 방문은 어떤 전환점이 된다. 산드라가 레너드의 방으로 들어오게 됨과 동시에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레너드의 심리가 공개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레너드가 이별해야만 했던 과거에 DNA 결함을 집어넣어 레너드가 앓고 있는 우울증을 혈연과 연결시키며 어찌 헤어나올수 없는 내적인 문제로 발전시킨다. 레너드와 전 애인은 아이를 낳으면 모두 죽는다는, 혈연이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졌고 그렇기에 헤어질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과거는 산드라의 첫 등장이 혼자가 아닌 화목한 가족들과 함께이며, 인종 적으로도 레너드랑 같은 유대인이라는 점,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고 하는 대사들하고 서로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감이 둔한 관객이더라도 [사운드 오브 뮤직]엔 가족이 담겨 있노라고 산드라가 고백하는 장면에 이르면 산드라가 가족적인 가치를 대변하며 레너드의 상처를 덮을만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산드라가 제약회사에 근무한다는 설정은 어찌보면 그런 상징을 알아차린 관객을 위한 감독의 윙크 아닐까? 그렇기에 이 두 만남은 일견 순조로워 보인다.


그렇지만 그레이는 산드라와 레너드를 바로 이어주지 않고 미셸을 등장시킨다. 미셸의 등장은 여러모로 산드라랑 정반대다. 가족들과 사이좋게 등장한 산드라랑 달리 미셸은 등장하지도 않는 아버지랑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가 등장하고, 초대도 없이 불쑥 집으로 들어오며 거실 주변을 맴돌지 레너드 방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또한 멀리서 찾아오는 산드라와 달리, 미셸은 바로 옆 집에 산다고 한다. 조금 뒤에서야 밝혀지는 거긴 하지만 편안해보이는 산드라랑 달리 미셸은 화려하지만 마약과 우울증에 빠져있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결정적으로 미셸은 산드라랑 달리 비 유대인이 다. 그러나 레너드는 그런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미셸에게 푹 빠져버린다.


[투 러버스]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레너드는 미셸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산드라도 사랑한다. 그렇다고 그 두가지 감정에 우선 순위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말에서야 정해지긴 하지만, 적어도 레너드는 산드라를 사랑하는 만큼 미셸도 사랑한다. 왜 그럴까? 단순한 양다리인것일까? 그것은 미셸과 산드라를 향한 각각의 레너드의 두 감정의 성질이 서로 다르지만 비슷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성질이야말로 [투 러버스]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의 성질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는 레너드의 사진 찍기로 나온다. 두 여자가 등장하기 전 레너드는 풍경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그 풍경 사진엔 제목이 없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의 제목 짓기를 인용하자면 "사진에 있어서 제목짓기가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현장의 사진처럼 모든 요소와 맥락들이 그 사진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통해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목을 짓지 않은 레너드의 풍경 사진들은 옛 연인과 헤어진 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물 사진 역시 그 옛 약혼자다.) 구체화되지도, 헤아릴수 없는 그의 슬픔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풍경 사진들이 황량하기 그지 없다는 것은 일종의 주석일 것이다.


산드라랑 미셸이 등장하면서 그는 인물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화에서 레너드의 카메라에 제일 먼저 찍히는 여자는 산드라가 아니라 미셸이라는 점이다. 산드라가 레너드'에게' 다가온다면 미셸은 레너드'가' 접근한다. 그렇기에 카메라와 시선의 주도권을 쥔 레너드가 가장 먼저 찍는 사진은 미셸일수 밖에 없다.


알프레도 히치콕의 [이창]처럼 창을 마주한 레너드와 미셸의 시선의 관계는 일단은 카메라를 쥔 레너드 위주로 돌아간다. 먼저 레너드와 미셸의 두번째 만남은, 미셸을 우연히 발견한 레너드가 미행하다가 우연한 만남인 척 하면서 시작된다. 돌아온 레너드는 화장을 하던 미셸을 향해 플래시를 터트리고 미셸은 뒤돌아본 뒤 그를 자신의 공간 (클럽)으로 초대한다. 거기서 레너드는 불륜남 로날드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미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미셸이 레너드에게 걱정을 털어놓는동안 레너드가 몰래 너머로 훔쳐보는 장면은, 관음증적이지만 동시에 저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미셸이 가지고 있는 상처에 대한 공감에 가깝다.


미셸하고 함께 해주고 싶다는 욕망엔 유대 혈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레너드의 심리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손님을 사랑한다'라는 문구에 담긴 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인 커뮤니티에 속한 레너드네 가족이 운영하는 세탁소는 단순히 고객 친절 이상으로, 다른 사업체들과 제휴적인 '사랑'를 맺고 싶어한다. 미셸과 떠나기 직전 레너드는 산드라의 아버지를 만나고 산드라와의 결합이 단순히 사랑이 아닌 서로 간의 사업적 이득이 따라온다는걸 알게 된다. 물론 산드라는 절대로 불순한 의도로 레너드에게 접근하는건 아니지만, 이 장면은 뉴욕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과 관계 성립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며 그것이 개인을 어떻게 탈주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걸 반증하듯이 레너드 방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는 사투 끝에 우주의 끝에서 외계인과 접촉한 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그러나 정작 레너드가 찍은 미셸의 사진은 영화 내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사진은 제대로 사진 찍는 장면이 없는 산드라다. 물론 산드라의 사진은 딱 한 컷 제외하곤 항상 누군가를 동반하고 있으며  (레너드나 자기 가족들)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은 레너드를 향한 안정감과 상처를 덮어줄수 있는 모성적인 따스함이 담겨 있다. 즉 미셸이 카메라에 찍혀진다면 산드라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투 러버스]에서는 그 숙명적인 유대 커뮤니티의 총화로 어머니 루스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서사 속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로지 걱정하고 바라만 볼 뿐이다. 심지어 아들이 떠난다고 할때도 루스는 마음 아파하지만 그를 보내준다. 그리고 결말에서 지치고 외로운 아들을 보듬어 안아준다. [리틀 오데사]에서 유대 커뮤니티의 축제는 따뜻하고 흥겹지만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고독과 슬픔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걸 생각해보면, 그레이는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미래와 감정을 속박하는 면모도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연줄도 없으니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감독이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민족이 만들어내는 질긴 끈이 인물을 휘감고 있기에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도 상이하게 달라질수 밖에 없다. 아이를 유산한 사건으 로 고통스러워 하며 이렇게 불안정하고 어두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미셸의 말에 레너드는 화를 내면서 자신도 불안정하고 상처투성이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옷을 벗지 않고 옥상의 추위를 견디며 섹스를 한다. 반대로 산드라는 레너드의 리스트컷을 보고 '걱정할 필요도 무안해할 필요도 없다. 곁에 있어주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대화가 나왔을때 둘은 이미 한창 전에 따뜻한 방에서 섹스를 한 상태다.


그 점에서 산드라와 레너드의 섹스 장면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는 미셸의 존재가 암암리에 등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미셸과 산드라 간의 공유점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보자. 불륜남 로날드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미셸은 레너드에게 만나서 판단해달라고 말한다. 거기서 레너드는 로날드와 미셸의 감정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날드는 미셸을 데리고 오페라를 보러갈거라 말하고 레너드는 오페라 CD를 사들고 돌아와 듣는다. 


그때 산드라가 들어오고 오페라를 듣고는 '오페라는 본 적이 없다.'라고 고백하다가 키스를 한 뒤 섹스로 넘어간다.  레너드와 산드라가 섹스를 나눌 때 그레이는 (미셸의 영역에 있는) 오페라 음악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오페라는 끈질기게 남아서 레너드 방 저 편에 있는, 불꺼진 미셸의 방과 함께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을 감싼다. 이 때문에 두 남녀가 가장 개인적인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다른 여자가 주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불온한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속되게 말하자면 이 연출은 플라토닉한 오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너드에게 이 오쟁이는 결코 산드라에 대한 기만이나 내치는 것이 아니다. 미셸을 통해 산드라를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하면 억측일까? 적어도 두 사랑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레너드가 찍은 산드라의 사진이 등장하는 시점이, 미셸을 한 번 거부한 다음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미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산드라에게 사랑을 받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너드는 유대인 산드라에게 상처를 덮을 사랑을 받지만 반대로 비 유대인 미셸에게는 상처를 덮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일견 모순되보이는 두 감정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런 점에서 [투 러버스]의 사랑과 그것의 성질은 차라리 상처에 대한 디아스포라적인 공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는게 좋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그레이가 이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걸 떠올리게 한다. 먼저 이 장면이 관음증적인 시선의 역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하지만 미셸은 옥상에서 섹스를 한 후 돌아와서 대화를 나누다가 레너드(와 관객)을 향해 자기 가슴을 드러내 보인다. 분명히 이 장면의 시선의 주체는 전과 달리 미셸에게 있다. 레너드가 자신의 상처를 솔직히 보여준 만큼, 자신도 자신의 내밀한 속살을 솔직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에 레너드가 주체였던 관음증적인 시선 권력은 여기서 붕괴한다. 둘이 그 다음 함께 떠나기로 한 것도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산드라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이 때 레너드는 산드라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미셸에 대한 공감과 함께 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내려와 미셸을 한창을 기다리던 레너드는,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레이는 그 모습을 어둡게 처리해 제대로 알 수 없게 한다. 마치 남이 다가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미셸이라는게 밝혀지면서 관객들은 미셸이 결국 레너드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미셸은 레너드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가족을 버린 로날드를 선택하겠다고 한다. 레너드가 그랬듯이 미셸 역시 모든 것을 포기한 로날드에 대한 공감과 함께 해주고 싶다는 감정 때문에 레너드를 포기한다. 레너드는 고통스러워하지만 결국엔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가 잠든 미셸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가 포기했을때 그 역시 그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백야]처럼 이 모든 것은 한낱 꿈이였을지도 모른다. 커뮤니티로부터 탈주, 새로운 사랑, 상처를 감싸안아주는 디아스포라적인 사랑 모두.


그렇게 바닷가로 간 레너드는 미셸을 위해 사 온 반지를 모래사장에 던진다. 그러더니 천천히 바다로 다가간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레너드는 바다를 물끄러미 보다가 떨어진 반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산드라에게 그 반지를 끼워준다. 아무런 사실을 모르는 산드라는 기뻐하며 사실을 아는 레너드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레너드와 산드라를 남기고 카메라는 뒤로 빠지면서 끝난다. 


이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카메라야말로 [투 러버스]의 모든 것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엔 남자는 자신의 상처를 안아주고 디아스포라적인 사랑을 '해주는' 가족같은 사람을 선택하고 행복해하지만 잔향처럼 남아있는, 디아스포라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과 있었던 덧없지만 꿈결같은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축축한 감정에 젖어드는 것이다. 그 모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간극에서 발생하는 한없이 슬프지만 동시에 강하게 응축되어 관객을 적시는 감정이야말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매력인 것이다. [투 러버스]는 그 매력을 알기에 충분한 영화다.


P.S. 한가지 적어놓자면 [투 러버스]는 한국에 개봉한 적이 없이 IPTV 시장으로 직행했다. 고로 영화 사이트의 정보는 믿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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