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시작은 이렇다: 황야 저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고 일련의 도적 무리들이 튀어나와 돈을 요구한다. 카우보이 세 명이 멀리서 그 과정을 지켜본다. 익숙한 서부극의 설정이다. 하지만 다음 샷. 도적들은 마차에 있던 승객과 마부의 호주머니를 털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도적들은 짜증내며 그들을 내보내고 지켜보던 카우보이 세 명은 다시 길을 떠난다.

서부극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뭔가 기대가 어긋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영화의 악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카우보이들은 악행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바람 속의 질주]는 무언가 중요한 동기와 열정 자체가 배제되어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바람 속의 질주]는 하지도 않은 일을 오해받은 사람들의 얘기다. 번과 웨스, 오티스는 어떤 대단한 사명감이나 정의감을 지닌 인물들이 아니다. 초반부에 만났던 도적 무리랑 같이 오두막을 쓸때도 약간의 경계심을 제외하면 그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든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카우보이 자체는 엄청나게 특이한 인물상은 아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가 이상한 이유는, [자니 기타]가 그랬듯이 정통 서부극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징후는 갑자기 등장한 자경대가 도적떼들을 쏴죽이고 번과 웨스, 오티스를 도적 패거리로 오해했을때 생긴다. 갑자기 이 세 명은 공권력에 반항한 악당이 되고, 오티스는 죽는다. 남은 번과 웨스는 살기 위해 도망간다.

사실 수동적인 쪽은 웨스와 오티스만 해당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잭 니콜슨이 맡은 번은 반항적이고 행동적인 캐릭터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도적떼를 다시 만났을때 웨스와 오티스는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하는 반면, 번은 반발한다. 심지어 무기력한 상황들이 이어질때도 번은 계속 불만을 표출하고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저돌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저돌성은 각본과 연기를 모두 맡은 잭 니콜슨의 연기에서 비롯된다. 후일 [샤이닝]이나 [배트맨]에서 널리 알려지게 될 특유의 오버액팅은 아니지만, 이미 여기서 완성된 니콜슨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 연기는 여전하다. 오히려 과시 없이 다른 연기자와의 조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샤이닝]이나 [배트맨]보다도 훨씬 뛰어난 구석이 있다.

번과 웨스가 한 민가에 숨어들면서 이야기는 다시 한번 다른 방향으로 꺾는다. 번과 웨스가 들어선 민가는 에반과 캐서린 부부와 10대로 보이는 딸 아비게일로 구성된 가족이 사는데, 이들 역시 다른 의미로 짓눌려있는 캐릭터들이다. 번과 웨스, 오티스가 부조리한 시스템의 희생양이라면, 이들은 단조로운 현실에 찌들어 있다. 무성의하게 반복되는 도끼질과 삭막한 식탁은 그런 단조로운 현실의 체화다. 이들의 단조로운 일상은 번과 웨스라는 비일상이 끼어들면서 흔들린다.

하지만 이 흔들림에도 어떤 짜릿함이 결여되어있다. 번과 웨스는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생각이 없고 (웨스가 별 일 없을거라고 강조하는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들 역시 그들의 단조로움을 끼어든 불청객을 불편해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가족은 개성조차 희미하다. 번이 아비게일을 데리고 나가면서 "멀리서는 내가 애비의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는 대사는 이 가족이 얼마나 몰개성한 존재인지 아이러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바람 속의 질주]은 어떤 짓누름에 대한 반발이 영화적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짓누름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압적이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거의 실존적인 경지로 주인공들을 밀고 간다.  주인공들은 한번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자신을 변론하지 못한다. 캐서린이 그들에게 무고를 어떻게 증명할거냐고 물어보자, 그들도 증명할 수 없는 방법이 없다고 시인해버린다. 남은 건 그저 생존 뿐이다. 소통의 순간조차 이어지지 못하고 파탄으로 끝난다.

여기까지 오면 알 수 있겠지만 고전기 서부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체념의 정서가 [바람 속의 질주]를 감싸고 있다. 결국 태생적으로 도주극이 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에센셜 킬링]에겐 먼 선조뻘 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을 짓누르고 있는 건 무엇인가? 말을 보면서 번과 애비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딸이 이방인과 얘길 나누기 싫어하는 에반, 치안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번의 혐오, 단조로운 삶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당신들이 하는 일이 더 외로워 보인다'라고 반문하는 애비... 이 영화가 1960년대 서구 청년 문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에 발표된 영화라는걸 유념하자. [바람 속의 질주]는 서부극의 영역에서 1960년대의 공기를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조금 더 나아가 베트남전에 대한 서브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바람 속의 질주]는 해석보다도 그 시대를 안고 돌파하려는 독특한 영화적 에너지가 매력적인 영화다. [바람 속의 질주]의 샷을 정의하자면 단조로움의 샷이다. 단적으로 몬테 헬만은 총격전을 찍을때도 긴장감을 노릴 생각이 없다. 단적으로 총격전 시퀀스에서 샷과 리버스 샷 길이는 느긋하기 그지없고, 주인공 일행은 싸우기는 커녕 도망가기 급급하다. 배우들의 연기 언어 역시 최소화되어 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의 단조로움은 통제가 안 된 방만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단조로움은 확실한 리듬이 있다. 삭막하고 건조하기 그지 없는 황무지를 담아낸 촬영, 절제되어 있지만 핵심을 찌르는 배우들의 뛰어난 앙상블 연기를 통해 몬테 헬만은 관객들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 관객들은 최면에 빠진 채 단조로움 속에 담긴 꿈틀거리는 리듬을 쫓아간다. 샘 페킨파가 죽음의 순간을 파편화하고 늘리는 방식으로 허무주의의 아름다움을 설파한다면 몬테 헬만은 삭막할 정도로 이질적인 황무지를 배경으로 삼고 샷과 컷, 시퀀스들의 흐름을 단조로 편곡해 반복하는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생경하고 느슨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집중력이 높은 영화다. 
 
영화의 결말이 폭발적인 질주로 끝나는 점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행동하던 웨스는 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번은 웨스를 버려둔 채 말을 타고 도주한다. 마치 지금까지 쌓여왔던 억압과 단조로움의 샷을 깨트리려고 하듯이 이 승마 장면은 박력이 넘친다. 고전기 서부극를 연상케하는 질주의 쾌감이 담겨있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번은 마침내 허무주의의 늪에서 탈출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번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번이 도망갈 수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 점에서 [바람 속의 질주]의 결말은 상당히 양가적이다. 영화는 억압에서 탈주를 꿈꾸면서도 '그 뒤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엔 대답을 아낀다. 어쩌면 정직한 답일 것이다. 이 영화를 발표할 당시 몬테 헬만이나 잭 니콜슨 모두 한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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