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 [機動警察パトレイバー2 the Movie / Patlabor 2: The Movie] (1993)

1990년대를 수놓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테크노 스릴러적 요소가 가미된, 로봇 활극에 가까운 애니메이션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가 주목을 받고 인기를 받았다면, 그런 활극을 매우 일상적인 설정에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만들어낸 유우키 마사미의 다른 대표작인 [철완 버디]가 우주 스케일을 넘나드는 얘기임에도 지독히도 일상적인 질감을 끌어냈듯이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리얼 로봇의 흐름에서도, 그것을 전쟁 같은 것에 연관짓지 않고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군수산업 얘기가 등장하긴 하지만 도쿄 경시청이라는 '일상적' 요소가 어느새 '비일상적' 요소에 동화되었다고 할까. 이는 단순히 현실적인 질감을 구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장르의 '비일상성'을 '일상성'에 녹여내는 과정. 분명 선례가 있음에도 [패트레이버]는 그걸 인상적으로 성공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극장판 시리즈로 넘어가 보자.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은 그 점에서 아직은 장르의 '비일상성'이 안겨주는 쾌감에 솔직한 작품이였다. 바빌론 프로젝트를 둘러싼 음모와 호바 에이이치의 모호한 정체와 의도, 플랑 세캉스라고 할 만한 풍경 몽타쥬 등은 '파국'의 호러가 어른거리긴 했지만, 적어도 정리가 되는 스토리와 특차2과의 활기와 액션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를 활극으로 볼 여지를 남겨놓았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는 활극으로써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보다는 '일상의 파국'이라는 점에서 [패트레이버]를 만들고 싶어한듯 하다. 1편에서 호바 에이이치의 설정을 '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건 오시이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잘 알려주는 부분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는 오시이가 아쉽게 놓아야 했던 지점을 활극 요소를 성립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밀고가는 희귀한 애니메이션이다. 기본 구조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과 동일하다. 도쿄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악당이 있으며, 주인공들은 그 악당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 이건 다른 [패트레이버] 시리즈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가 1보다 훨씬 나아간 이유는, 그 악당과 파국의 설정이 장르의 안전성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패트레이버 2]는 당시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가 서 있던 현실에 대해 강하게 말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에 볼 수 있는건 '종말'이다. 이건 단순히 거창하게 아포칼립스적 설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 내 시간대로 따지만 가장 후반부에 위치한 이 애니메이션은 특차2과의 종말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특차2과 멤버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했으며 남아있는건 곧 창고행을 기다리고 있는 잉그램과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어른 키이치와 시노부다. 비록 평행세계 개념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 [패트레이버] 프랜차이즈지만 이 작품은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미 시리즈의 완결을 의도한 작품인 셈이다. 아마 평행세계의 특차2과 역시 이런 사건 없어도 [패트레이버 2]에서 묘사했듯이 비슷하게 소멸했을 것이다.

아마 [패트레이버 2]를 보는 관객이라면 잘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에 혼란함을 느낄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는 배배꼬인 필름 느와르 플롯을 [패트레이버 2]에서 확장시키고 발전하고 있다. 츠게의 사상은 본편을 보는 내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그와 관련된 시노부의 심리 역시 중요하게 그려진다. 전작에서도 키이치와 시노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여기서 이 둘은 표면적인 주인공인 아스마와 노아를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그리고 그 활약상은 충분히 주인공으로 인정할만하다.) 닳디 닳은 두 성인남녀가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1950년대 미국 필름 느와르의 후예라 할 수 있다.

하워드 혹스의 [빅 슬립]이 그랬듯이, [패트레이버 2]의 이야기는 전체 그림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복잡한 얘기가 아님에도 모호한 인물들과 단서, 심리를 점진적으로 배치한 구불구불한 미로를 구성하면서 그 속으로 따라가야 하는 키이치와 시노부의 심리를 구축한다. [패트레이버 2]의 도입부는 그 점에서 그 미로로 안내하는 단서인 셈이다. 분명 츠게 유키히토의 과거를 그리고 있지만, 그가 겪었던 전쟁의 기억에 대한 몽환적인 파편이 서사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도입부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츠게라는 사실을 좀 지나서야 알 수 있다. 또한 츠게 역시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정리하기 때문에 관객은 끊임없이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렇다면 대체 [패트레이버 2]가 필름 느와르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체제의 존속에 대한 질문이다. 이미 [패트레이버 1]에서 오시이는 호바 에이이치가 겪었던 사회적 계급과 차별을 설명하면서, 그 소외가 어떻게 체제를 위협하는지를 그려냈다. [패트레이버 2]에서 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먼저 한국인이 쉽게 알기 힘든 일본의 기형적인 경찰 권력과 자위대 권력의 대립이 있다. 패전국 일본이 받아들여야 했던 체제는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수동적으로 살아야 하는 군대와 그 역할을 넘겨받은 경찰 간의 대립이 이뤄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 체제가 어떻게 이뤄졌으며 어떤 비정상을 은폐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1990년대 CNN이 마련한 비디오 전쟁의 문제가 개입된다. 전쟁이 엔터테인먼트적이고 비현실적인 영상으로 대체하는 사회. 그 와중에 일본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패트레이버 2]가 이 체제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역에서 이뤄진다. 초반부 시노부가 영상을 확대해 이상한 증거를 발견하는 부분은 명백히 안토니오니의 [확대] (혹은 [욕망])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대]에서 토마스가 사진을 확대해 평온한 공원 정경 뒤에 숨겨진 살인 사건을 발견해내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파악하지 못한채 끝끝내 은폐되었다면 [패트레이버 2]에서 시노부와 키이치는 가라오케 영상과 TV 영상을 확대해 전투기를 발견해내지만, 그것조차도 조작된 거짓이라는걸 나아가라는걸 알아차린다.  안토니오니가 기록된 이미지와 기억 간의 불일치를 통해 이미지의 신뢰성에 대해 질문한다면, 오시이는 동시간에 기록된 이미지 간에도 언제든지 거짓이 스며들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다 오시이는 도쿄를 공격하려는 전투기가 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군 간 전투를 유도하려고 했다는 전개로 그렇게 스며든 거짓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표현한다. 결말에 등장하는 도쿄를 바라보는 츠게의 시점 샷이 마치 HUD 디스플레이처럼 묘사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상당히 직접적으로 오시이의 질문을 담고 있다.

그런데 [패트레이버 2]가 흥미로운 부분은 안토니오니의 이미지에 대한 불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끌어온다는 것이다. 조작된 이미지로 츠게 일당의 자위대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도쿄로 입성한다. 그런데 자위대가 도쿄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여줄때 오시이는 자위대가 도쿄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태양은 외로워]식의 인물이 부재한 기나긴 몽타쥬 연출로 묘사한다. 이 시퀀스가 너무나 천진하고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으로써는 순간적으로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설마 오시이는 현 평화 체제를 가짜라 규정하고, 자위대가 보통 군대화되는 세계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규정하는건가? 키토 모히로는 자신의 만화 [나루타루]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어, "적어도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보통군대화에 대한 소망을 말한 바 있는데 오시이 역시 비슷한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키토 모히로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이상의 전체주의를 부정했듯이, [패트레이버 2] 후반부는 그 군대가 느끼는 천진한 아름다움 역시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 부정은 키이치에게서 이뤄진다. 키이치는 처음부터 군경 간의 권력 투쟁에 대해 냉소적이며, '아무것도 하지 말자'라는 사보타주로 비정상적인 체제 내 암투를 부정한다. 그리고 지금 이 세계를 이루는 평화는 거짓이라 말하는 아라카와에게 그런 거짓된 평화라도 있는게 낫지 않냐고 말한다.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일상의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물들의 활약상을 다뤘던 걸 생각하면, 진짜 파국은 거짓 평화로 1대 1로 대체할 수 없다는 오시이의 시선이 [패트레이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오시이는 여기다가 '패트레이버' (나아가 과거로 밀려난 알폰스)라는 히어로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을 서브플롯으로 추가해 설명한다. 작전을 수행하러 가기 전, 위험하니깐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는 아스마에게 패트레이버를 영웅처럼 동경하고 사랑했던 노아는 '로봇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어른이 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스마와 노아 일행은 죽지 않고 도쿄를 구한 영웅이 된다. [패트레이버 2]가 어른스러운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면, 진실과 거짓조차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순화된 대립을 거부하고 희망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트레이버 2]의 결말은 선언이다. 눈 앞의 도쿄 나아가 현실조차 조작된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인간 츠게 앞에서 시노부는 눈 앞에 있는 자신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점에서 시노부는 [패트레이버 2]에서 가장 크게 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노부는 일련의 모험을 통해 파국으로 끝난 관계조차도 부정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자는 사람이 된다. 특차2과는 그렇게 소멸되었고, 평화는 조작된 이미지 앞에서 허약하지만 여기엔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간이 있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오시이는 말한다. 그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영웅 서사를 부정하는듯 하면서도, 다시 영웅 서사에서 현실을 근심하고 바꿀 힘을 찾아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0  Comments,   0  Trackback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