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의 첫 장면은 황급하게 노빌의 저택을 빠져나가는 하인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각자 이유를 대면서 저택을 빠져나가지만 그 이유가 알리바이라는건 명백하다. 왜냐하면 저택엔 곧 부르주아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인들의 머릿속엔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마치 모종의 사실을 깨닫고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되겠어라고 외치며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티는 계속되어야 하고, 하인들이 없어도 그들에겐 집사가 있다. 노빌 부부를 위시한 부르주아들은 하인들이 빠져나간것도 모르고 예정된 파티를 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음식, 멋진 음악, 아름다운 그림들... 부뉴엘은 하인들이 알수 없는 이유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잊은 것마냥 이들의 파티를 보여준다.

바보 같은 부르주아. 이게 지옥의 저택인지도 모르고! 부뉴엘과 원작을 쓴 호세 베르가민이 마련한 이 저택은 예삿 저택이 아니다. [절멸의 천사]는 도입부에 등장했던 불가해한 탈출이 가져다주는 카오스를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먼저 피아노 독주회 도중 그 유명한 닭발이 등장하는 샷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이 닭발이 왜 등장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절멸의 천사]는 이유를 대면 지는 초현실주의자가 만드는 영화다. 그러니 닭발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소도구로써 인식하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독주회라는 우아한 상황에서, 고급 레스토랑에도 안 어울릴법한 닭발은 시공을 뒤흔들 폭풍의 전조다. [절멸의 천사]는 그 유명한 설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문명의 보호를 받는 부르주아를 야만으로 퇴화시키는걸 보여주는게 최우선인 영화다. 닭발은 연주회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부뉴엘의 중지 손가락으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런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소품과 거기서 기반한 비논리적인 샷들은 [절멸의 천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닭발을 꺼내는 샷을 기점으로 부뉴엘은 영화의 개연성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첫번째 징조는 의지의 삭제다. 부뉴엘은 아무렇지 않게 파티가 끝나고 나가려는 인물들을 붙잡아 뇌세척을 하고 재운다. 이 과정이 은근슬쩍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의심하지만 그 의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한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 계급은 다양한 공간에서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릴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부르주아 문화의 중심이지만 역설적으로 생존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인 접대실"에다 가둬버린다. 피아노와 소파, 미술품이 밥을 먹여주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한정된 공간 밖에 머물수 없게 된다. 심지어 그들을 보좌해줄 하인들조차 없다. (재미있게도 부뉴엘은 집사장도 부르주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간 관리자도 노동자 계급을 탄압하는 부르주아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본 것일까?)  [절멸의 천사]는 부르주아의 저택이 '생존과 본능의 공간'과 '문명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부르주아를 보살피는 수족이 없으면 무너지는 곳이라는걸 폭로한다.

부뉴엘과 베르가민은 낄낄거리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캐릭터의 이성을 붕괴시킨다. 의지가 삭제된 캐릭터들은 그래도 여기 머무르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갈려고 생각은 하지만, 그 경계선상에 서는 순간 중요한 연결고리를 잊고 '아 그 뭐더라.' 하면서 돌아선다. 등장 인물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악랄하게도 그 해결책은 중요한 '선'을 넘지 못한다. 절박한 갈망은 있되, 의지와 해결책은 원천봉쇄된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초반부에 등장한 하인들의 도주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절멸의 천사]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언제든지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빠져나갈수 있지만 부르주아는 그러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웃는다.

접대실의 물자가 바닥날수록 합리적으로 판단할 이성은 본능 앞에서 초라해진다. 절정인 세번째 단계는 당연하게도 아포칼립스적 생존 투쟁기다. 부르주아는 이 순간부터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근친상간, 유치하지만 무시무시한 투닥거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자, 굴러다니는 동물뼈, 카발라에 심취해버린 부르주아들, 마약, 잘린 손의 호러스러움... 부뉴엘은 중간에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 시퀀스를 삽입하면서 그들을 한껏 비웃는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비슷하게 부르주아의 문명 속 고립극을 다룬 J.G.발라드의 [하이 라이즈]의 선조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난처함은 구경거리가 된다. 

부뉴엘은 이 황당한 문명 속 아포칼립스를 벽에 있는 수도 파이프를 뜯어서 목을 축이는 시퀀스와 갑자기 저택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동선으로 극대화한다. 문명의 화려함을 누리기 위해 벽 뒤에 은폐한 수도 파이프는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기계장치의 베르가민과 부뉴엘이 바깥에서 보낸 양은 자유롭게 '선'을 넘나들며 부르주아를 희롱한다. 그 앞에 선 부르주아들은 굶주린 짐승과 다름없다. 부뉴엘은 은폐된 소도구 (파이프)의 폭로와 두 동선의 대조 (갇혀있는 부르주아와 저택 밖에서 들어온 양)로 부르주아의 허울을 벗겨낸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는 의지만 사라진다면 문명과 가장 멀어져 추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덤으로 이뤄지는 가톨릭 모독은 더욱 노골적이다. [절멸의 천사]에서 가톨릭과 가톨릭 예술은 말그대로 변기통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의 설정이 상당히 인공적이고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 속 부르주아들은 현실에 속해있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창작자의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쥐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 속 캐릭터 설정은 일관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단적으로 이 영화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부르주아 캐릭터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성격보다는 일련의 기행들로 기억된다. 심지어 각 시퀀스 별로 캐릭터들의 설정이 일관성도 없다. 하지만 일관성 없이 캐릭터가 그려짐에도 영화의 카오스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에 더욱 매정하게 다가온다. 부르주아의 캐릭터 따윈 아무런 상관없다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캐릭터들을 그냥 멍청이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들을 모욕하는 법을 알고 있다. 상술했지만 이 부르주아들은 나름 이성적으로 재난을 풀려고 하는데, 이 점 때문에 [절멸의 천사]은 오히려 더 매정해진다. 그들은 똑똑하지만 베르가민과 부뉴엘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여기다 부뉴엘은 갑작스럽고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담은 샷과 몽타주로 서사를 흔들어놓고, 캐릭터의 일관성을 발기발기 찢어가면서 카오스를 만든다. 부뉴엘은 그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던가 데이빗 린치로 이어지는 전후 현대 영화의 비논리적 구성과 후대 "병맛"의 선구주자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절멸의 천사]는 명성과 달리 디씨 막장 만화들처럼 가볍게 즐기면 되는 영화다.

[절멸의 천사]의 결말 부분은 싱거워 보인다. 이 영화는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기대할법한 전멸로 끝나지 않는다. 부뉴엘은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외국인인 레티시아와 피아니스트 실비아에게 준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피아노 독주회를 재현하는 것으로 저택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야만의 끝에서 예술와 문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그들은 간신히 그 공간을 빠져나올 의지를 얻게 된다. 예술에 대한 긍정일까? 그것보다는 상황 자체를 재구성할 논리를 기어이 부여함으로써 탈출했다고 보는게 좋을듯 하다. 결국 부르주아들은 예술과 외부인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올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견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부뉴엘은 그 다음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성당으로 장소를 바꿔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뉴엘은 예정된 아포칼립스를 보여주지 않고 군중에게 발포하는 경찰과 또다시 흘러들어오는 양떼를 보여주면서 좀 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부뉴엘은 부르주아의 꼴불견은 총을 쏴댈 상황까지는 아니였지만, 가톨릭의 꼴불견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풍경이라는걸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스페인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부뉴엘 자신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끝으로 부뉴엘은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데, 부뉴엘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멕시코 시절을 총결산하고 멕시코보다 좀 더 자유로운 영역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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