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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1942)


저 유명한 햄릿의 대사에서 따온 제목을 보면 마치 거창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른스트 루비치의 [사느냐 죽느냐]는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왕실 암투극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의 시대는 1940년대 폴란드 극단, 즉 동시대다. 이 영화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나치 앞에서 이뤄지는 문제다. 그런데 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거창한 레지스탕스 활동이 아니다. 영화는 마치 현재의 암울함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희극적 설정을 깔아둔다. 마리아와 요셉은 반 나치적인 풍자극과 셰익스피어를 연기하는 폴란드 배우 부부다. 요셉이 고뇌에 잠겨 있는 동안, 마리아는 자신의 팬인 소빈스키 중위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는 소빈스키에 푹 빠지게 되고 요셉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질투하게 된다. 문제는 이 뒤다. 소빈스키는 반나치 운동에 가담해 있었고, 나치가 폴란드로 들어오면서 전쟁의 불길로 휩싸이게 된다. 소빈스키는 나치 스파이를 제거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오고, 마리아와 요셉은 소빈스키의 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영화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데, 이 시퀀스는 마치 이후 이어질 기나긴 연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리아와 요셉은 배우로써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땐 그들은 총체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고 둘은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 부분이라면 이 위기와 해결과정이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일반적인 극영화로 위장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이한 연극 두 편이 뒤엉켜있다. 마리아와 요셉, 소빈스키의 개인적 삼각관계, 나치를 상대로 한 스파이 작전으로 대표되는 역사/사회적 관계다. 루비치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합쳐버린다. [사느냐 죽느냐]가 코미디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전혀 들어맞지 않는 두 영역, 세계와 개인이 겪는 위기가 얼렁뚱땅이지만 세련된 임기응변 (혹은 연기)을 통해 전환점이 되거나 전진하기 때문이다. 와중에 도덕적 가치는 불경할 정도로 흐려진다. 소빈스키와 마리아의 통정은 햄릿의 명대사를 방아쇠 삼아 전개되고, 반대로 통정의 디테일에 대한 상대방의 무지는 스파이가 누군지 밝혀내는 장치가 된다. 한편 요셉의 개인적 질투는 안면도 없는 나치 장교를 속이는 행동에 동참해서라도 아내의 사랑을 되찾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파시즘과 애국주의는 아무런 무게를 가지지 못하고 붕붕 날아다닌다.

루비치는 이 모든 상황과 캐릭터를 일종의 가면 놀이처럼 만들어간다. 루비치는 관객에게만 이 가면들 간의 관계를 알려준다. 작중 인물들은 상대가 쓰고 있는 가면이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하거나, 일부분만 알 뿐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가면 속에서 연기하면서 상황이 어떤지 파악해야 한다. 루비치가 써내린 유려한 대사는 상황을 은폐함과 동시에 가면 뒤의 핵심을 찌르는 도구다. 은유와 비유, 예의와 비꼼의 전투가 가면 앞과 뒤에서 이뤄진다. 가면은 단순히 연기에 그치지 않고 문이라는 도구로도 확장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서스펜스와 이완은 문의 열림과 닫힘을 통해 제시된다. 문을 열었을떄 거기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마리아가 실렌츠키 교수의 방문을 받는 장면이 그렇다.), 문이 닫히고 난 숏에서 사람들은 한숨을 돌리거나 직전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쓴다. 문은 그 점에서 등장인물의 분투이자 그 분투의 희극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문은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도구기도 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요셉이 실렌스키 교수로 위장해 나치 앞에서 거짓말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정말 이 소재와 시대배경으로 이런 코미디를 해도 되는 것일까?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프로파간다 영화다. 폴란드 연극인들이 나치 스파이를 잡아내고 연합군으로 탈출하는 내용에서 프로파간다적인 성향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엔 프로파간다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 프로파간다를 내세워야 하는 배우들과 자유 폴란드 군인들은 선전물적으로 용감하기 보다는 루비치 특유의 가벼움을 유지하고 있다. 루비치가 독일 국적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폴란드인에 대한 이런 묘사들은 아슬아슬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루비치 역시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초반부 극단원의 대사를 빌어 제시된다. ‘연극인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건 숨는 것 뿐.’ 현실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배우가 총을 들게 되면, 그것은 배우가 아니라 배우였던 군인일 뿐이다. 배우가 싸우기 위해서는 연기를 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일 뿐이다. 문은 그 점에서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마술이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대사를 반하듯이 나치가 머무는 곳들을 희극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이 권력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게 나치가 아닌 폴란드인이라는 점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명백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있다. 음모의 연극은 현실의 비극을 과장되게 모사한 희극으로 진행되고, 음모의 주체들은 죽지 않고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루비치에게 나치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유머도 없는 사악한 발연기 배우들이다. 그들은 현실과 연극을 파악할 재간이 없으며, 영문도 모른채 죽거나 강제로 퇴장당한다. 중요한 점은 이런 퇴장이 아무런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얻는 것은, 필사적으로 연기를 해서 얻어내는 자들이다. 이 영화의 무례해보일 정도로 경박한 태도는 역사적 비극을 이겨내려는 도피적이면서도 역설적인 페이소스다. 루비치는 현실과 픽션의 접합점을 넘나들며 현재진행적인 역사의 비극 속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점잖게 놀린다. 그는 파시즘에게 심각함과 위압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걸 알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의 영어 대사는 To Be Or Not To Be다. 투 비가 되느냐 낫 투비가 되느냐. 조종당하는 인형이 되느냐 줄을 자르고 달려나가는 자동 인형이 되느냐. 이 순간 경박해보이는 인물들이 벌이는 희극은 역사의 폭압을 저항하는 도구가 된다.

결말은 어떤 지점에서 양가적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명백한 해피 엔딩이다. 하지만 그 해피 엔딩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향은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발표된 해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이다. 망명객인 루비치의 입지를 반영하듯이 폴란드 배우들과 군인들은 고국에 남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영국으로 도망친다. 영국에서 마무리짓는 결말은 셰익스피어의 고향에서 햄릿을 연기한다는 배우로써 성취를 보여주는 결말이면서도, 동시에 가면놀이의 유희가 궁극적으로 폴란드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전후 이어지는 폴란드의 수난사와 망명 폴란드인들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더욱 비극적이다.) 정리되지 않은 채 남은 소빈스키와 부부 간의 삼각 관계은 그 자체로 웃기기도 하지만, 극 초에 생겼던 긴장 관계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걸 명백히 보여준다. 오로지 루비치가 만들어낸 픽션 속에서만 그들은 파시즘의 폭압을 이겨내고, 어정쩡한 삼각관계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자체를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듯 하다. 소빈스키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나치즘의 뻣뻣한 폭압하고 거리가 먼 불경하지만 즐거운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불경할 정도로 경계 흐리기와 경쾌한 폭소로 파시즘을 하찮게 만들면서도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을 같이 제시하는 것으로 동시대의 그림자를 포착했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알 수 없었던 루비치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반복’으로 마무리짓는다. 그 찡긋거림이야말로, 어두운 현실에서도 유머의 힘을 믿었던 자의 제스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년뒤 역사는 루비치와 영화의 손을 들었다. 루비치는 짧긴 해도 나치가 패망하는걸 보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한 자도 있었다. 영화의 주연이었던 캐롤 롬바드는 영화 촬영 후 전쟁 채권 독려 집회에 참여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렇게 [사느냐 죽느냐]는 어두웠던 한 시대의 증언이자 희극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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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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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Le lion est mort ce soir / The Lion Sleeps Tonight] (2017)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카메라가 돌아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배우는 테라스에 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때 카메라는 늙은 배우의 얼굴로 다가간다. 스와 노부히로는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시작하면서, 의도적인 기만을 부린다. 사전정보 없이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보게 된다면, 시퀀스 배치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위화감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다니. 당연하겠지만 이 장면은 극중극이다. 컷 소리와 함께 배우는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다음 시퀀스인 분장실로 넘어간다.

촬영을 종료하고 장은 스태프에게 말한다. 옛날 독립 영화는 원 신 원 컷으로 찍었고 다음이 없었다고. 스와는 여기에 동조하듯이 도입부를 원 신 원 컷으로 찍었다. 시간 이미지가 타임코드의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에서 스와와 장은 시간을 기록하는 매개체라는 개념으로써 영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동조와 별개로 장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사실 영화에서 죽음을 연기한다는 것만큼이나 기묘한 영역도 없을 것이다. 생물이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사다르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죽음을 재현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다. 스와는 이 지점에서 서사의 모티브를 얻는다. 대체 경험없는 재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촬영 현장은 잠시 중단된다.

스와는 실마리를 유령 영화에서 찾는다. 영화 제작은 중단되고 장은 근처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런데 그 저택은 장의 옛 여자친구 쥘리에트가 살던 집이다. 그 집에 머물면서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유령 들린 저택 영화지만, 호러 영화는 아니다. 쥘리에트의 유령은 별다른 원한도 해결해야할 숙원도 없다. 그들은 산책을 하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이 둘이 나란히 놓였을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육체적인 대조일것이다. 이미 죽어서 실체 없는 과거의 이미지로만 남은 쥘리에트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지만, 장은 늙었다. 그 대비에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을 맡은 장 피에르 레오는 팔팔한 소년의 얼굴로 은막에 데뷔했다. 소년에서 시작해 청춘, 장년까지 인생 전부를 은막에 맡긴 사람이다. 그런 그가 늙고 노쇠한 육신으로 앉아있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그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처럼 스타의 노쇠한 육체 이미지가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영화다.

쥘리에트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진리를 상징한다면, 쥘을 비롯한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아이들의 시점에서 본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귀신 들린 저택 영화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도 막연한 소문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과 장의 만남은 어딘가 어색한 거리감이 감돈다. 장은 과거의 회고에 젖어 조용히 있고 싶지만, 이 저택의 내막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장을 유령이라 착각한다.  그런데 이 착각은 어느정도 뼈가 있는 착각이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모르는 것 이상으로 장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장은 영화를 찍고 있지만, 아이들은 장이 나왔던 영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데 그들은 스타로써 장이 아닌, 평범한 배우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이를 위해 스와 노부히로는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어른의 비중을 확 빼버린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 이후로 등장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를 돕는 영사 기사와 쥘의 어머니 뿐이다. 그런데 영사 기사는 장을 아는 체 하지 않고, 쥘의 어머니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장과 만나지 않는다. 요컨데 장은 현재에 뚝 떨어진 과거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체 뭘 하러 저택에 왔단 말인가? 장이 배우라는걸 생각해보면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아이들이 영화를 찍으려고 온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장은 촬영을 쉬러 왔음에도 영화를 찍어야 하는 신세다. 물론 아이들의 영화 촬영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 호러 영화를 자처하지만, 돈도 없고 특수 효과비도 없는 아이들도 뭔가 거창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아이들에게 영화 만들기는 놀이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가 디지털 캠코더라는 점 역시 그 유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 만들기는 놀이 이상으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정작 아이들은 딱히 계획이 없다. 그저 장이 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캐스팅을 시도하려는 정도다. 상술했던 필름 시절 원 신 원 컷의 정신에 대한 초반부 대사랑 스와 노부히로가 디지털 삼인삼색으로 DV 영화를 찍었던 걸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노련한 배우 장은 아이들에게 영화 만드는 법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미덕은 이 가르침이 고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장은 실제 장 피에르 레오의 성격을 반영한듯한 퉁명스러운 노인네지만 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주려고 한다. 다소 실소가 나오는 호러 코메디 시나리오도 진지하게 받아준다. 물론 시행착오는 있다. 장과 아이들이 한 시퀀스를 반복해 찍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언제 들어와서 어떤 대사를 하고 어떻게 나가는지 모른채 끊임없이 실수한다. 마지막 테이크에서 장이 제멋대로 대사를 치고 나가버리는 것도 그의 짓궃은 유머가 반영되어 있다. 어찌보면 영화의 중반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젊음과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 간의 희극적인 줄다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영화는 기어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쥘의 고백이 큰 공헌을 했을지도 모른다. 쥘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상실과 그 이후의 삶이 뭔지 아는 아이다. 쥘은 아버지를 잃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어머니에게 혼란을 느낀다. 쥘의 고백을 통해 장은 쥘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쥘은 그 점에서 쥘리에트의 거울쌍적인 변주라 할 수 있는 캐릭터다. 쥘리에트를 잃은 장은 이제 막 상실을 경험한 쥘을 위로하기 위해 영화에 조금 더 진지해진다. 아이들과 장이 찍기로 한 마지막 장면은 호수에서 이뤄진다. 호수로 가는 버스에서 아이들은 The Lion Sleeps Tonight이라는 노래를 듣고 들어본적이 있다며 알아차린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세대 간에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순간, 즐거운 합창이 영화 속 영화의 결말로 인도한다. 이 즐거운 합창은 스와 노부히로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이다. 그리고 장은 처음으로 쥘리에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아이들에게 털어놓는다.

장이 잠시 혼자 남아있을때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해후와 애끓는 안타까움의 고백 뒤에 쥘리에트는 장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다시 만날수 있냐는 장의 말에 쥘리에트는 모호하지만 긍정의 뜻을 남긴다. 쥘리에트는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사라지는데, 이 쇼트는 아이들이 찍던 영화의 결말과 비슷하다. 장의 기억을 반영한 아이들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쥘리에트는 장 앞에서 현존했고, 반대로 아이들의 영화가 완성되자 쥘리에트는 완전하게 영점으로 돌아갔다. 쥘리에트는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적 또는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장은 죽지 않는다. 또는 자살하지 않는다. 로건이 죽은 이들을 거쳐 로라와 아이들에게 마지막 생의 의지를 되찾었던 것처럼, 장은 아이들과의 영화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일이 있다는걸 알게 된다. 바로 죽음을 연기하는 일이다. 짧은 휴가는 그렇게 끝나고 장은 마치 백일몽처럼 아이들앞에서 사라진다. 아이들의 반응 역시 신기루를 놓친듯한 아쉬움과 묘한 깨어남을 보인다.

하지만 쥘이 남아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쉬움을 품고 마을을 거닐던 쥘은 골목에서 사자를 발견한다. 뜬금없는 환상 시퀀스지만, 쥘만이 볼수 있다는 점에서 스와 노부히로의 의도는 명백하다. 쥘은 장과의 짧은 만남이 결코 신기루가 아니라는걸 알고 있다. 쥘과 장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장은 쥘을 통해 버스에 흘러나오던 노래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는데 성공했다. 스와 감독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누군가 기억되는 것이며,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와 배우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죽음을 연기하는 장이다. 하지만 망설였던 초반부와 달리, 마지막의 장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죽음과 소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였다는걸 알게 된 것이다. 이 망설이지 않음은, 이제 말년에 접어든 장 피에르 레오 자신의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그 다짐을 노사자의 뜬 눈을 강조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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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6

바빠서 블로그 갱신이 느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갱신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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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or Kids 예고편

돈 있으면 사서 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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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번째 생일

또다시 1년을 버텼습니다.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제 생일은 봄의 초입부라서, 정말로 한 해가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더라고요. 이제 일이 좀 풀려야 한건데 말이죠.

다음 1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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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프로젝트] 예고편

이건 또 언제 보러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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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과 엽전들 - 긴긴 밤

이 곡이 초판에 실린 곡이라 상당히 듣기 힘들었던 곡인데, 2000년대 초에야 신중현과 엽전들 초판이 재발매되면서 들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새 신중현 관련 앨범들이 재발매되고 있는데, 조금씩 사모을 생각입니다. 절판만 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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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지구 [Na srebrnym globie / On the Silver Globe] (1988)

한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쓰면서, 제작 당시 상황은 영화 속 샷과 시퀀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긴 하다. 현장에서 누가 싸웠다던가, 이 장면은 어떤 과정으로 찍었고 어떤 난항을 겪었는지 같은 정보는 샷과 시퀀스의 의중을 파악할 단서와 더불어 논리의 근거를 더해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제작 당시 상황은 앞으로 펼쳐질 서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현실을 허구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순간 영화는 메타픽션의 미로가 되버린다. 그럼에도 제작 당시 상황을 영화로 끌고 왔다면 그래야만 했던 사정과 고백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오손 웰즈가 있다. [위대한 앰버슨가]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웰즈의 영화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무자비한 편집 가위와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서 투쟁해야 했던 웰즈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안제이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도 이 부류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줄랍스키는 말한다. 이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고, 지금에서야 이런 형태로 내놓을 수 밖에 없다고. 이 변명이 펼쳐지는 쇼트들은 1988년의 폴란드다. 사실 이 영화는 1970년대 중반에 찍었다. 프랑스에서 만든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로 폴란드 영화계에서 다시 기회를 잡은 줄랍스키는 할아버지 예지 줄랍스키의 SF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공산 독재 정권 치하에서 [은빛 지구]는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다른 폴란드 영화인 리샤르드 부가이스키의 [신문] 역시 80년대 초에 촬영했다가 90년대 들어서야 공개할 수 있었다.) 영화 촬영은 중단되었고, 줄랍스키는 폴란드를 떠나 근 10년 이상을 해외에서 활동해야 했다.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인서트 샷들은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외계인 안제 줄랍스키의 한탄이다. 줄랍스키는 말한다: 1/5이 날아간 영화를 완성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완성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은빛 지구]는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행성 개척 대서사시라고 부를만한 SF 영화다. 일련의 우주인들이 지구를 떠나 외계 행성에 내린다. 하지만 고된 여정 끝에 우주인 일부가 사망하고, 남은 사람들은 토착민들이 사는 해변가에 정착한다. 그들의 2세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지만 지구의 문명을 전혀 알지 못하고 토착민들과 함꼐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원초적인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남은 우주인들은 전부 죽고, 그들의 신호를 받아 우주인 마렉이 착륙한다. 정착민들은 그를 신화에 등장하는 구원자로 떠받든다. 마렉은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운명은 마렉을 구원자의 길로 이끈다. 

하지만 [은빛 지구]를 보고 난 뒤 서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사는 절반 이상이 미친 전도사의 방언이나 다름없고, 인과 관계는 숭숭 빠져있다. [은빛 지구]의 서사는 강렬한 상징과 인물들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끌려가지만, 정작 그 행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나마 설명해줄것 같은 부분들은 날아가버렸다. 사실 대사나 장면 설계들을 보면, 이 영화에서 어떤 정합성을 기대하면 안된다는걸 알게 될것이다. [은빛 지구]는 표면상 SF를 표방하고 있지만, 장르를 다루는 태도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처럼 상징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지구가 배경이었다면 불가능한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구 한 구석에서 촬영한) 비주얼과 설정 뿐이다. 애시당초 걸작이 될 수 없었던 무모한 영화였지만, 검열로 더욱 기괴해져버렸다.

의외로 주제를 파악하는건 어렵진 않다. [은빛 지구]는 노골적인 예수 이야기다. 줄랍스키는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마렉을 향한 구원자 운운이라던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십자가 상징에서 예수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일종의 제의적인 형태로 이뤄지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제의를 다루는 줄랍스키의 태도는 반종교적이다. [은빛 지구]의 세계는 주류 종교가 내세우는 성인의 헌신과 신성의 아름다움보다는 주류 종교가 들추고 싶지 않았던 샤머니즘과 원시적인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꼬챙이에 사람을 앉혀놓는 장면, 기괴한 원시 부족, 방언을 내뱉는 무녀의 존재, 악마를 상징하는 기괴한 생물... 요컨데 줄랍스키는 종교적 믿음이나 논리 자체를 매우 폭력적인 무언가로 보고 있다.

원작이 되는 예르지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예스러운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걸 고려해보면, 영화 [은빛 지구]의 그로테스크함은 안제이 줄랍스키만의 폭력적인 상상력에서 뻗어나온 괴물이라 할 수 있겠다. 군무와도 같은 부족의 춤, 대체 어떻게 발견하고 만든건지 궁금한 풍광과 의상 및 세트 디자인, 오버액팅을 불사하는 인물들의 열정적인 연기는 [은빛 지구]의 그로스테크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초 만들었던 [퍼제션]의 간음하는 촉수괴물에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반대편에서 줄랍스키는 순수한 사랑을 꺼낸다. 하지만 줄랍스키의 사랑은 순수하되 무지와 두려움에 맞서듯이 미쳐있다. 이처럼 줄랍스키는 세상이 극단으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그 극단에서 인물은 중간을 택할 수 없다. 사악해지거나 순수함에 미쳐버리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은빛 지구]는 줄랍스키의 극단과 광기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중 하나기도 하다. 줄랍스키는 폴란드 독재 정권에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망명 폴란드 감독들의 영화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문라이팅]이 대표적일 것이다.)이 그렇듯이, [은빛 지구]에도 폴란드 지식인의 분노와 체념의 정서가 녹아 있다. 먼저 영화에서 지구를 떠난 것은 지도자나 노동자도 아닌 지식인이다. 이 우주인들에게서는 어떤 탈출이나 도피 욕망이 느껴진다. 이 우주인들은 사랑을 이룰수 없는 지구를 떠나 지구와 동떨어진 행성에서 사랑을 찾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우주인의 후손들은 지구를 잊어버린채 광기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그들의 기원을 알고 있는 또다른 지식인 마렉이다. 마렉은 그들을 이끌고 바다 너머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이 시도 역시 실패한다. 줄랍스키는 실패로 점철된 신화에서 구원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뤄질수 밖에 없는것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 물음에 줄랍스키는 답하지 못한다. 줄랍스키가 결말로 생각한 마렉의 동료가 죽는 장면은 오로지 나레이션 음성으로만 진술될 뿐이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았어야 할 영상의 부재는, [은빛 지구]에 아로새겨진 폴란드 역사의 비극을 상기케 한다. 

이제 메타 영화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일단 [은빛 지구]는 카메라의 시선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종종 카메라를 전달하거나 소유권에 대해 얘기한다. 초중반부 줄랍스키는 카메라를 든 캐릭터의 성격을 카메라의 움직임에다 반영하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는 문명의 관찰자에서 원시 부족의 본능으로 변모해간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 이전의 영화임에도, 무모할 정도로 막나가는 카메라 스턴트에 캐릭터의 개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경탄스럽다. 

여기다 줄랍스키는 자의식 똘똘 뭉치는 점프 컷을 활용하거나 의미없는 쇼트를 끼어넣는 것으로 카메라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곤 하는데, 이런 관점들은 영화의 신화적인 분위기와 충돌하면서도 묘한 영역을 남기곤 한다. 하지만 중반부 마렉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관점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오직 줄랍스키의 자의식만 남아있다는 점은 아쉽다. [은빛 지구]의 카메라 움직임은 대담하고 고심을 담긴 했지만 온전한 결과물가 되기엔 부족하다.

그 다음엔 영화 외적인 상황과 잘려나간 서사에 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은 폴란드 변사 나레이션의 전통을 빌려 전개된다.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권에서는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남자 해설자가 모든 대사를 읽는 전통이 있었다. 줄랍스키가 맡은 나레이션은 그런 점에서 복합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일단 이 나레이션은 조국을 떠나 프랑스라는 타국에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해야 했던 줄랍스키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동안 타자로써 살아야했던 그는 고국 영화의 전통을 상기하면서, 자신이 폴란드인이라는걸 적극적으로 인식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나레이션 전통이 외국 영화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폴란드에서 버림받은 [은빛 지구]의 운명과 묘하게 연계되는 구석이 있다. 필름이 사라진 자리에 스틸 사진을 넣어서 만들수 있었음에도 줄랍스키는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영상을 기어이 쓴다. 이 선택은 어딘가 고집스럽고, 처연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안제이 줄랍스키는 [은빛 지구]가 끝내 '폴란드 영화가 될 수 없었던 영화'라 생각하고 있다. 결국엔 날아간 필름 1/5는 돌아올 수 없으며, 다시 찍더라도 기존 분량과 어색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줄랍스키는 그 깨달음을 1988년 폴란드라는 상황을 개입시키면서 드러낸다. 마치 제3자마냥 사라진 영화의 서사를 얘기하는 줄랍스키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린다면, 이 영화가 맞이해야 할 운명을 예감해서 아니였을까 싶다. 줄랍스키는 영화를 마무리짓고 쇼윈도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고 선언한다. 마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사람처럼. 물론 새로운 삶은 순탄치 않았고, 줄랍스키는 2015년 타계했다.

[은빛 지구]가 정상적인 제작 과정을 거쳐 공개되었더라도, 걸작이 되진 않았을것이다. 남아있는 필름엔 줄랍스키 개인의 자의식과 감정이 통제없이 넘쳐나고, 거대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빠지는 단순화의 함정들도 보인다. 마지막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는 다짐도 왠지 느끼하게 들리다면, 객관적 성찰과 자아도취의 경계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은빛 지구] 역시 다른 줄랍스키 영화들이 그랬듯이  천생 컬트 영화로 낙인찍혔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빛 지구]는 제1세계 컬트 영화들과 달리, 그런걸 허용할 수 없는 국가에서 태어났고 창작자는 처참하게 남겨진 필름을 수습해야 했다. 완성도와 무관하게 [은빛 지구]가 이상하게 슬프게 다가온다면, 어쩔수 없이 폴란드사의 부조리와 싸웠지만 끝내 패배한 개인이 보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패배는 폴란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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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웨이 아웃] 예고편

이거 재미있을련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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