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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패터슨 [Paterson] (2016)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구 10만명 정도 되는 이 소도시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제외하면 흔한 교외 지역이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눈에 이 평범함은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강점이다. [패터슨]은 일종의 농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드라이버이자 시인 패터슨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코미디 영화인가 싶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유머기도 하다. 자무시가 유머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A-B-A 구조가 문학의 운율이나 리듬을 연상케하는걸 주의해보면, [패터슨]의 반복된 유머는 영화의 구조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 이후에 데뷔한 영화 감독답게 구조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감독이긴 했지만, [패터슨]은 여타 자무시 영화 중에서도 그 구조가 뚜렷하게 보이는 영화다.

[패터슨]은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개별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별 장으로 구성된 영화들은 대체로 장마다 다른 상황과 샷, 몽타주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패터슨]은 장이 넘어가도 비슷한 상황과 샷을 반복한다. 전제를 살펴보자. 패터슨은 아내 로라와 함께 사는 아마추어 시인이며, 버스 운전사다. 매일 아침 일어나 프레이크로 아침을 먹고, 버스 운전을 한 뒤 퇴근해 바에 가서 술을 마신다. 전개로 보자면, [패터슨]은 같은 순간을 반복하는 영화다. 도입부인 월요일은 영화 전체의 구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화요일이 되었을때 영화는 패터슨의 삶, 나아가 영화의 리듬을 깨닫게 하고 수요일부터 변주에 들어간다. 이렇게 시작한 변주는 주말이 되면서, 변화를 맞이하고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자무시는 [패터슨]을 만들면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뼈대로만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운 바이 로]의 숲 속에서 헤매는 시퀀스라던가 [고스트 독]의 아이스크림 장수 시퀀스에서 드러나듯이, 자무시는 같은 요소의 반복과 변주로 최면을 걸 줄 아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까운 [패터슨]는 패터슨의 심리 변화를 일상을 구성하는 개별 쇼트에 섬세하게 깔아두고 관객이 파악하도록 만들었다. 첫번째 날을 통해 관객은 패터슨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두번째 날부터 관객은 패터슨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알게 된다. 버스, 폭포, 골목길, 도시락, 불독, 바, 성냥갑 그리고 시 노트....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디테일은 늘어나거나 달라지거나, 심지어 사라진다. [패터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쇼트를 차지하는 삶의 요소가 패터슨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감지해야 한다. 로라가 만든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고 다시 도시락 통에 집어넣는 패터슨의 쇼트라던가 각 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주잔을 들여다보는 쇼트의 유무가 대표적이다. 가끔 자무시는 패터슨의 심리를 반영한 오버랩과 음향 몽타주로 일상의 순간을 채색하기도 하다.

자무시가 보는 패터슨 시는 웃기면서도 어둠을 간직한 도시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종/사회 서브텍스트다. 패터슨은 백인이지만, 패터슨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흑인이나 인도인이 많다. 생활에 찌든 인도인 버스 기사 동료,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메소드 맨부터 시작해 패터슨 시는 백인보다는 흑인이나 인도인 같은 인종들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패터슨의 아내인 로라조차 이란계라는 암시가 들어간다. 허리케인 카터와 아나키즘에 대한 언급부터 차를 탄 채 흥청망청 노는 건달들, 금요일에 등장하는 에버렛의 가짜 총격전 소동은 패터슨 시의 불안과 어둠이 어떤 식인지 편린을 살짝 보여준다. 패터슨은 그 불안과 어둠에서 한발 짝 떨어져 평화롭게 살지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안과 어둠은 패터슨이 겪는 창작의 난항과 맞물려간다. 

여기다 패터슨의 과거는 의외로 밝지 않다. 침대 근처 놓여진 사진들을 추측해보면 패터슨은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다. 패터슨이 (실제 미군으로 복역했던) 애덤 드라이버의 자전적인 캐릭터일리는 없겠지만, 나이가 애덤 드라이버랑 비슷하고 2010년대가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패터슨은 9/11 테러 이후 입대한 미군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패터슨]의 인종 설정은 조금 특별해진다. 험악했던 21세기 미국-중동 간 정세에 관련되어 있던 폭력 전문가가 제대 후 이란계 아내과 다양한 인종의 동료들을 두고 시를 쓰며 평온하게 살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설정을 통해 반 이민주의 시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폭력 전문가가 어떻게 현실로 돌아올수 있었는지 한번 곱씹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창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패터슨]의 창작은 더블 이미지와 연계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 로라는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로라는 만약 낳는다면 자신과 패터슨을 닮은 쌍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직후 밥을 먹던 패터슨은 오하이오 블루 매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창작 과정을 일상 속에 배치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창작물은 대상을 반영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더블 이미지로 남게 된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다. 스크린 위에 새겨지는 패터슨의 시어를 담은 자막은 실재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패터슨 뿐만이 아니라 로라에게도 해당되는데, 로라는 그것이 매우 기술친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패터슨이 반복한다면 로라는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로라는 기타 연주와 컵케이크 만들기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체득한다. 자무시는 부부가 서로 존중하듯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존중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원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봉 후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음반을 모으고 연필로 시나리오 작업하는 자신의 삶에 자식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창작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바 있는데 패터슨은 그 점에서 자무시의 지론이 반영된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들어서면 재능의 문제는 영화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로라와 패터슨의 포물선이 다르다. 로라는 모든 창작에 대해 초보자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로라는 처음 창작을 했을때 느끼는 신선함에 매혹된 사람이다. 당연히 로라의 시도는 어딘가 어설프기 그지 없다. 꾸준히 축적되어 있는 상태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어설픔을 도로 도시락통에 들어가는 한 입 베어문 컵케이크라는 필로우 쇼트로 압축해 보여준다. 로라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눈빛이 약간 걱정을 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로라는 꾸준한 자세로 자신의 어설픔을 극복하고 소기의 성과를 낸다. 주말에 이르면 판 컵케이크는 대성공을 거두고 기타 연주 역시 그럴싸해진다. 

반대로 패터슨은 이전부터 꾸준히 쓰고 있는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를 발표할 생각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겸손함이다. 패터슨은 시에 엄청난 자부심 같은 것은 없고 명성에 대한 욕심도 없다. 패터슨은 자신의 시를 로라와 같이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패터슨은 내심 자신이 쓰는 시가 뛰어나길 바란다.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패터슨의 좌절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시를 쓰는 소녀를 만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시어가 쓰여진 시 노트를 본다. 이내 무표정으로 묻히지만 패터슨의 감정에 동요가 일어났다는걸 눈치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무시의 태도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만큼이나 현실적이고 명확하게 말한다. 세상 어딘가엔 범인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 패터슨의 재능은 노력으로 갈고 닦은 재능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의 재능은 아니다. 계속 반복될 것만 같은 패터슨의 일상을 흔들리는 순간도 천재를 만났을때 이뤄진다. 다소 생뚱맞은 [잃어버린 영혼의 섬] 인용은 외친다. "사람을 해부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을 조각 낸다고요! 원주민이 이상한 이유를 알았어요 그들은 희생자들이에요!"

패터슨은 자신의 창작 과정이 천재의 그것과 달리 살아있는 일상을 조각내면서 만든 키메라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의심이 커졌을때, 일상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좌절감은 지속된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가짜 총격전 소동을 일으키는 에버렛과 시 노트를 아작낸 부부의 개 마빈은 그 점에서 패터슨의 심리에 반응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자무시는 여기서 물질 매체의 유한함을 언급하면서 패터슨이 그동안 만들어왔던 창작물 대부분을 무로 만들어버린다. 발표되지 않은 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백업하지 않은 문서는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다. 심지어 기술조차도 일어나버린 소멸을 막지 못한다. 일순간에 패터슨의 시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시는 사라지고 패터슨은 창작을 지속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창작의 상징이었던 폭포 앞에서 패터슨은 패터슨 시로 여행 온 일본인 시인을 만난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 정보를 꺼내며, 패터슨이 좋아하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 얘기를 꺼낸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에게, 몇 가지 사실을 가르쳐준다. 어떤 예술가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훌륭한 작품을 써냈다는 걸. 그리고 "때때로 빈 종이가 가장 큰 가능성을 보여주지요."라는 말을 남긴다. 일본인 시인이 떠난 뒤, 패터슨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이 일본인 시인을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매혹과 더불어 노자/장자부터 시작해 세이 쇼나곤의 오카시로 이어지는 관찰과 깨달음의 경지를 영화로 끌어온다.  아하, 라는 대사는 그 점에서 새로운 깨달음이자 시작이다.

창작물이 파괴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일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패터슨 시의 패터슨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빈 종이의 가능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패터슨은 로라의 깨달음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인 셈이다. 매번 새로운 것을 접근하고 만들어내는 로라의 접근방식은 패터슨에게도 적용되고 교훈을 남긴다. 결말은 새로운 공책과 일주일의 시작이다. 패터슨 시는 그렇게 하루를 살 것이고, 패터슨은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시를 계속 쓸 것이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은 그 점에서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인 정보에서, 미국의 일상을 찾아낸 뒤 일상의 신비로움과 창작의 회노애락을 사람들에게 깨우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그는 창작의 과정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존재한다고, 시의 문장을 마무리짓는다.

우리는 뮤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뮤즈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김목인, '뮤즈가 다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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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어떤걸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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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크라이 5 스토리 예고편

메이크 그레이트 트럼프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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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ニーデイ・サービス - 星空のドライヴ

소카베 케이이치=상은 얼마나 흑역사로 여기길래 데뷔곡임에도 1집은 커녕 베스트 앨범에도 안 실었던걸까....

물론 플리퍼스 기타 짭에서 벗어날 수 없긴 한데, 곡 자체는 풋풋하면서도 잘 뽑았거든요. 90년대 초의 드럼머신과 신스, 간주 기타의 즉흥 연주가 매력적입니다. 어쩌보면 가지 않았던 길 아닐까 싶은데, 이 노선으로 쭉 갔다면, 서니 데이 서비스는 시부야케이와 같이 거론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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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가르시아]는 연못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샷은 위태롭다. 한 소녀가 연못 경계에 있는 나무에 누워 있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서서 저택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소녀는 마치 물에 빠질것처럼 누워있다. 왜 하필 물가에서 영화를 시작할까. 아마도 이 영화 감독이 샘 페킨파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헤모글로빈과 슬로모션에 취한 성질머리 더러운 마초. 그 마초는 물의 죽음과 땅의 생명 그 사이에 잉태를 할 수 있는 여자를 배치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제시한다. 죽음과 삶, 그리고 매장의 경계를 여인이 가로지를 것이다. 그리고 슬로 모션은 죽음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며 기록할 것이다.

곧이어 소녀가 위태롭게 누워있었던 이유가 등장한다.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라." 멕시코 갱 제페의 선언으로 [가르시아]는 비틀리고 우울한 여정을 시작한다. 제페에게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허락없는 임신이다. 제페의 딸 테레사는 한량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와 통정을 했고, 그 결과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폭압적인 가부장은 이걸 용서치 않고 자신의 유사 아들들인 갱들을 이용해 알프레도 가르시아를 처벌하려고 한다. 이 처벌을 대리하는 자인 사펜즐리와 퀼이 여성이 배제된 게이 커플이라는 점은 (암시적이지만 그들은 여자를 싫어하고 파트너의 시체를 향해 눈물짓는 모습을 보인다.), 제페 일당이 극단적인 가부장과 남성성에 취해 있다는걸 보여준다.

사펜즐리와 퀼은 곧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를 찾아낸다. 보통 이런 줄거리의 느와르/범죄 영화라면 베니를 좀 더 장르적으로 세공된 과거와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할 것이다. 하지만 페킨파와 고든 도슨이 쓴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베니는 제페 일당의 위압적인 남성상과는 한발짝 떨어져있다. 한때 미군이었지만, 퇴직해 바 주인으로 살고 있는 베니는 위축되어 있다. 가끔 거칠게 굴지만 차라리 상처받은 채 그늘로 숨어든 짐승에 가깝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거친 과거의 일부였던 가르시아의 행적도 잘 알지 못하고 여성인 엘리타를 경유해서 알게 된다. 베니는 골칫거리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애인인 엘리타와 평온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금전적 이득은 그를 파국의 여정으로 향하게 만든다.

[가르시아]의 구조는 서부극 그것도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같은 1970년대 페킨파가 즐겨 만들었던 폭력적인 서부극과 닮아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관계의 종말]에 가깝다. 피에 절어 살았던 마초는 지쳤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이 옛 친구를 팔아야 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종말이다. 다만 페킨파는 이 여정을 평범한 서부극으로 만들지 않고, '카르텔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현대 서부극의 영역에서 만들고 있다. 페킨파의 현대 영화들에서 이런 노선을 취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는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결과는 기묘하다. 이 영화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 홀려 파멸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애도의 완수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머리는 그 점에서 영화가 추구하는 애도의 완수를 그로테스크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는 잘려진채 자루에 담겨 여러 사람을 오간다. 페킨파는 머리의 행방을 통해 인물 간의 갈등과 액션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정작 가르시아의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고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페킨파의 터치는 좀 심술궃은데 있다. 편안하게 매장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제페의 복수심과 금전적 이득 때문에 가르시아의 머리는 주인의 몸을 떠나 무수한 사람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주인인 알프레도 가르시아는 이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 뿐이다. 효수된 머리와 브로맨스라. 페킨파의 악취미 중에서도 최고 악취미라 할 수 있겠다.

이 어처구니없지만 황망한 애도의 여정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영화의 여정을 더욱 불편하고 우울한 감정에 푹 젖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을 꼽으라면 (페킨파가 선호했던 배우 중 하나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바이커로 등장해 베니를 무력화하고 엘리타를 강간하려는 시퀀스가 있다. 일단 이 시퀀스가 그동안 숨어있었던 베니의 남성성과 폭력성을 끌어낸다는건 명백하다. 페킨파는 이 사건을 지금까지 야성을 잃고 안전하고 무력하게 살아온 베니가 가르시아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그런 악한이 못되잖아요") 결국 베니는 그 응답에 답해 바이커들을 쏴 죽여버린다. 여기까지는 으레 있는 페킨파의 악취미려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뒤 흥미로운 연출이 있다. 불쾌한 강간 미수가 바이커의 죽음으로 끝나고 페킨파가 보여주는 시퀀스는 또다른 무기력과 연약한 고백이다. 사건을 수습하고 호텔 화장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엘리타에게 베니는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 페킨파는 문을 열어놓고 욕실 바닥에 앉아있는 엘리타와 그 앞에 앉은 베니를 보여준다. 이 쇼트의 엘리타의 배치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입부 연못의 경계에 서 있던 테레사랑 닮아있다. 욕실이 물과 떼놓을수 없는 장소라는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여자는 물과 땅 경계선상에서 위태롭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페킨파가 생각하는 순정 마초는 경계선상의 위태로운 여자를 감싸준다, 라는 제스처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제스처는 결말과 연결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르시아]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여자다. 엘리타는 처음부터 죽음을 모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지만, 남자의 회유에 어쩔수 없이 여정을 떠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강간 미수 시퀀스에서 가장 현명하면서도 단호히 대처한 자 역시 여성 엘리타다. 그리고 가르시아의 목을 자를 기회가 왔을때도 엘리타는 전 애인의 안식을 모독하는것에 망설인다. 베니는 윽박지르면서도, 엘리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고 사랑을 되뇌이지만 돌아온 것은 또다른 매장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베니는 먼지투성이가 되어가며 제페의 갱단원들을 쏴죽여 머리를 찾아오며, 사펜즐리와 퀼도 죽인다. 사랑했던 여자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엔 옛 친구의 머리가 담기고, 머리를 건네주겠다는 제페의 부하들도 쏴죽인다. 베니는 제페의 저택에 반드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베니가 제페의 저택에 도착했을때, 제페는 새로 태어난 손자의 세례식을 치루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을 죽어갔지만 제페는 아무렇지 않게 탄생을 성수로 축복한다. 제페에게 베니는 묻는다. 16명의 사람이 죽일만큼 이 머리는 가치가 있었냐고. 하지만 제페는 그 머리를 돼지 먹이로 주라고 말한다. 머리의 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베니는 분노한다. 그 분노는 투박하지만 섬세한 사랑을 짓이기고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에 대한 분노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기묘함은 시종일관 마초적인 태도로 밀고가다가 갑자기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과 연대하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자신이 자초한 무의미한 죽음 끝에 마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남성성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여성을 지키고 진정한 악과 동귀어진한다.

사실 결말에 드러나는 '멋진 척'은 다른 페킨파 영화와 비교해봐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이 결말을 마냥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니의 대사엔 테레사를 위로보다는 가르시아를 향한 브로맨스가 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베니는 연대라고 하기엔 자기완결적인 멋에 지나치게 취해 있다. 이 자기완결적 멋이 제페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폭압적인 가부장에게 박해받는 여자를 돕는 카우보이들이 나오는 전작 [라이드 더 하이 컨트리]랑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가르시아]는 창작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게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이 결말이 후련한 카타르시스와 애잔한 감정을 남기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베니가 자기완결적인 미학에 빠져있더라도 방황하던 가르시아의 머리는 마침내 안식을 찾았고, 살아남은 테레사와 아이는 끔찍한 가부장에게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페킨파는 진정으로 무고했던 테레사와 아이야말로, 이 무의미한 폭력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 본다. 여성을 혐오하고 아이를 혐오한다고 악명높았던 페킨파답지 않다고 할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우울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제의화된다. 페킨파는 어찌보면 카르텔 서부극을 빌어 고전 비극을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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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몬스터 헌터 월드를 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영화 리뷰가 미뤄지고 있네요. 스토리 퀘스트만 끝나면 후딱 돌아오겠습니다. (오래 안 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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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나이가 들수록 시간 가는게 두려워진다. 가끔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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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レファントカシマシ - 今宵の月のように

최근에 이들의 히트작인 [明日に向かって走れ -月夜の歌-]을 중고로 사서 듣고 있는데, 어떤 지점이 일본인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이 앨범이 왜 히트했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굉장히 남성적인 서정성이라고 할까, 미스터 칠드런부터 스피츠, 서니 데이 서비스까지 이어지는 계보의 한 단면을 확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단지 이들은 어떤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는지는, 초기작을 한번 들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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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 / The Silence of the Sea] (1949)

장 피에르 멜빌은 이전까지 없는 길을 만들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멜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고 존 카사베티스가 그랬듯이 개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멜빌은 장편 데뷔작으로 베르코르 (본명 장 브륄레)의 소설 [바다의 침묵]을 점찍었다. 멜빌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도중, 런던 공습 아래에서 마음을 빼앗겼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가 그랬듯이 조합에 소속된 멜빌이 판권과 영화 제작 권리를 얻는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긴 투쟁 끝에 베르코르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영화화하는데 허락했다. 그 조건은 바로 24명의 레지스탕스 멤버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투표를 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말이 결정이었지, 24명 중 1명이라도 반대했다면 감독 멜빌은 다른 데뷔작을 들고와야 할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난 시기인데다 멜빌 역시 레지스탕스 출신이니 이 조건을 거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멜빌의 데뷔작은 어렵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프닝은 그 점에서 갓 장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짜 감독 멜빌의 조심스러움과 끝나버린 한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바다의 침묵] 도입부는 단순히 액자식 구조라 하기 힘들다. 멜빌은 책을 주고받는 과정을 익명화된 얼굴과 은밀한 행동, 장식 없는 하얀 표지의 책이라는 이미지로 일종의 범죄 거래처럼 묘사한 뒤, 책을 펼치면서 관객을 이야기로 인도한다. 이 이상한 오프닝은 어딘가 간절하다. 이후 대두될 범죄 장르적 묘사는 차치하더라도, 이 은밀한 행동과 이미지들은 억압되어 있다. 멜빌은 마치 얼마전까지 있었던 비시 프랑스 시절의 생활 양태가 어땠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사족같이 보일지 몰라도, 멜빌은 [바다의 침묵]을 만들면서 자신이 겪었던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억압은 [바다의 침묵]의 기이한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나치 군대가 주둔하고, 나치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한 노인과 노인의 질녀가 머물고 있는 집에 하숙하게 된다. 프랑스를 좋아하는 베르너는 친절하고 정중하게 노인과 노인의 질녀에게 말을 건다. 그 주제는 베르너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프랑스 문화에 대한 매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베르너는 두 사람이 있는 거실로 찾아와 말을 걸고 베르너의 대화 시도는 독백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침묵은 그 점에서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침묵은 매우 수동적인 저항이다. 침묵은 사람을 죽일수도, 바꿀수도 없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하는 강제된 상황을 거부할수는 있다.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살고 싶으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베르너는 그걸 알고 있다. 그가 계속 말을 걸러 오는 이유도, 그 침묵을 깨고 나치 독일로써 프랑스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도다. 베르코르는 그 긴장 관계를 서술 방식을 통해 구축한다. 원작 소설은 노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노인은 주변을 관찰하거나 최소한의 행동만 할뿐 끝나기 직전까지 베르너한테 말을 걸지 않기에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이내 질녀와 진주인공 베르너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버린다. 베르코르는 침묵을 이용해 시점을 교묘하게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소설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서술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레이션을 이용할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원작의 문장 일부가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시각적인 매체이기에 보이지 않는 나레이션은 보이는 이미지에게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간의 충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멜빌은 끊임없이 시선을 맞추려는 베르너와 노력과 아예 베르너에게 등진 두 사람을 프레임에 배치하면서 침묵의 권력 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대사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클로즈업를 배치하면서 침묵하는 얼굴의 부동성을 강조한다. 무수한 클로즈업은 베르너의 유창한 대사에 대항해 베르너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떤 지점에서 [바다의 침묵]은 정기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날마다 인물들은 위치가 배정받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원작과 영화 모두 권력을 쥐고 있는 베르너를 타자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술을 담당하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사실 '침묵'외는 다른 부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끔 베르너가 등장하지 않을때, 얘기를 나누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무거운 침묵 자체가 캐릭터화된 것처럼 보인다. 자연히 우리는 서술의 대상이 되는 베르너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베르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살짝 도취된듯 하면서 교양과 인류애, 잔혹한 현실 간의 괴리에 좌절감을 느끼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질녀는 베르너의 입체적인 모습에 망국의 치욕과 성적 긴장감을 동시에 느낀다. 

영화로 옮겨지면서 이 경향은 더 심화된다. 전반적으로 멜빌의 카메라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보다는 베르너를 따라다니는데 더 관심이 많아보인다. 영화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베르너가 파리로 가는 시퀀스에 있다. 이 시퀀스 도입부에서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파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는 베르너의 클로즈업과 파리의 화려함이 교차편집된다. 개선문과 역사적인 동상들을 올려다 보면서 기웃기웃거리는 베르너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로 프랑스 문화에 존경을 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베르너는 진심으로 나치 장교로써 권위와 이웃 국가 간의 교류라는 상반된 요소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시퀀스에서 멜빌은 전쟁이 막 끝난 파리에 서서 나치 시점에서 파리는 어떻게 다가왔을지 고민한다.

[바다의 침묵]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베르너가 침묵의 클로즈업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는 순간에 있다. 장교 클럽 시퀀스는 그 점에서 노인의 집 시퀀스를 뒤집어놓으면서 각성을 유도케한다. 베르너는 나치즘으로 찌든 동생과 장교들에게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베르너를 둘러싼 나치 장교들은 베르너를 조롱하며 아리아 우월주의와 파시즘의 파괴 욕구를 외친다. 같은 장소와 같은 샷, 같은 행동과 대사의 반복과 변주에서 벗어났을때 베르너는 자신이 얼마나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이상주의자며 자신을 향한 노인 가족의 '바다의 침묵'이 강제적으로 지워진 굴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멜빌은 실내극을 통풍시키면서 역사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무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인물은 자신들의 역할이 실로 하찮지만 폭력적인 걸 깨닫는다. 멜빌의 침묵의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베르코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하찮지만 폭압적인 족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베르너는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자신에게 주워진 위치를 알아버린 베르너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동부 전선으로 가기로 한다. 안락한 후방에서 허위와 기만에 갇혀 있기 보다는 실제로 행동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동부 전선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들에게 베르너의 선택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베르너는 다른 나치과 달리 순수하지만 열성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믿고 회의하고 말을 걸었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처럼 역사가 만들어버린 무대의 굴레를 부수지 못한다. 선함을 믿을수록 죽음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운명. 

그 어찌할수 없는 엄숙한 비극의 순간에서 베르너는 드디어 침묵의 클로즈업과 대화하게 된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 역시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불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 두마디만큼 처절하게 가슴을 찢는 대사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다소 단조로울수도 있는 젊은 감독의 연출을 불멸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도 침묵의 클로즈업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통해 영화는 역사의 폭력을 이해하고 끊을 단초를 제공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막 끝난 역사의 비극과 얘기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고, 거기서 영원히 남을 자신의 영화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르코르는 그 의도를 이해하고 이 영화를 세상에 공개했다. [바다의 침묵]은 가장 멜빌답거나 가장 완숙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간절한 멜빌의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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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램지 신작이 마침내! 내용도 마음에 들고, 예고편도 마음에 듭니다.

근데 한국 개봉은 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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