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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완다와 거상 리메이크 예고편
2010/09/16 - [Fight Test/잡담] - 완다와 거상과 이코, 그리고 HD

2017/11/29 - [Fight Test/리뷰] - 더 라스트 가디언 [人喰いの大鷲トリコ / The Last Guardian] (2016)

오..오오...오오오...! 올 2월 발매라고 합니다.

덤으로 우에다 후미토 신작도 되도록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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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한 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 In This Corner of the World] (2016)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의 시작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외화면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상물들은 결국 작품 속 세계 인식을 나레이션에다 기준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의 주인공인 우라노 스즈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평범한 일상물이다. 호감을 가진 남자가 있지만 중매로 구레 시에 사는 공무원 슈사쿠에게 시집간 스즈. 호죠 가의 시집살이는 그리 쉽지 않지만 스즈는 특유의 밝고 느긋함으로 어려움으로 견뎌나간다. 코노 후미요는 스즈와 호죠 가의 일상을 구성할 디테일을 빼곡히 알고 있고, 카타부치 스나오 역시 원작자의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하며, 모든 디테일을 평등하게 다룬다.

하지만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시대를 알리는 자막이 뜨는 순간 관객은 이 이야기를 미시사에만 맞춰 볼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2차 세계 대전 말기 히로시마 현 구레 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미시사를 구성하는 나레이션과 캐릭터하고 거시사를 구성하는 자막과 원경이 서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스즈는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레는 명백히 전시 상태이며, 스즈가 만나는 사람들은 얌전하지만 분명하게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둠을 담아내고 있다.

원작자 코노 후미요는 자신이 그리는 미시사가 미시사로 머물수 없다는걸 알고 있다. 원작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전작 [저녁뜸의 거리]의 피해자 코스프레 또는 가해자로써 일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한 대답도 담았기 때문이다. 코노는 다시 한번 [저녁뜸의 거리]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할머니가 경험했던, 전쟁 이전의 역사를 미시사로 구성하면서, 당시의 디테일이 담고 있는 정치성을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태극기 시퀀스는 일견 작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미시사에서 정치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카타부치 스나오는 코노 후미요와 똑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다. 일단 애니메이션을 보면 알겠지만, 원작은 중심 사건 없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2시간 이내의 통일된 각본을 쓰기 까다롭다. 카타부치 스나오는 원작을 각색하면서 야마다 요지가 200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떠올린 것 같다. 야마다 요지는 일련의 2차 세계 대전 영화에서 일상적인 영역에 어떻게 비일상적인 정치가 개입하는지를 다루었다. 카타부치는 야마다 요지의 성과를 이어받아 풍부한 일상사적 디테일들이 어떻게 거시적인 역사와 연결되는지, 관객이 어떻게 이걸 받아들어야 하는지 나레이션과 후경 간의 대립을 통해 질문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섬뜩한 부분 역시, 일상을 그리는 스즈의 순진한 나레이션과 대사가 아무렇지 않게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적 사상을 담아낼때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스즈에겐 폭탄은 형형색색 폭죽처럼 그려지고, 국가가 주입한 "결전복"이니 "대일본제국의 함"이니, "여자의 장기인 죽창" 같은 슬로건들은 순진한 목소리와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긴장 관계를 이룬다. 외화면에서 흐르는 목소리가 내화면에서 쏟아지는 폭격 소리 같은 부조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을 동화적으로 포장할때 카타부치 스나오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알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긴장 관계를 읽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오직 관객만이 스크린 외부 음향과 내부 음향 간의 대립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긴장 관계가 깨지는 순간, 영화는 스즈의 비정치성을 산산히 깨트린다.

영화의 초반부. 스즈는 어렸을때를 회고하면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후 이어질 현실적인 본편과 뚝 떨어진 이 환상적인 플래시백은 다소 이질적이다. 하지만 이 회고는 스즈의 유아적인 세계를 보여주면서, 스즈의 나레이션이 현실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걸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스즈는 주체적으로 주변 현실을 로맨틱하게 포장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지만, 딱 한번 주체적인 환상을 박탈당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스즈의 실수로 하루미가 죽었을때다. 이 순간 카타부치는 냉정하게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이뤄진 장면들에다 스즈를 밀어넣는다.

더 이상 일상의 안온함은 스즈를 보호해주지도, 포근하게 상상할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잘려나간 팔처럼, 전쟁과 군국주의는 스즈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이 상흔이 어떤 의미인지 펄럭이는 깃발 앞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에서 세상 한 구석 역시 세상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한다. 어떤 지점에서 스즈의 울부짖음과 눈물어린 대사는 직접적으로 정치성을 담은 원작보다도 훨씬 통렬한 구석이 있다.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이뤄진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조. 그 회의와 자조가 한 인물의 유아적인 세계 인식을 깨트리면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정치 애니메이션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선언한다. 단지 작위적일 정도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담았던 원작과 달리 애니판에서는 이 부분의 연출이 평상시와 다를바 없이 그려지는게 아쉽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일본인들에게 원체험처럼 남아있는 원폭의 이미지인 하얀 빛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보여줄때 카타부치 스나오가 인용하는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비]다. 두 영화 모두 한 개인이 가족에 편입되려고 할때 핵폭탄이 터지고, 인물들은 하얀 빛을 맞이한다. 마치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을 전부 삭제 혹은 정화하려는 것처럼. 어쩌면 당신은 [이 세상의 한 구석에]를 [검은 비]의 프리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 비]가 핵폭탄 이전의 세계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는 것처럼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결국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일상을 유지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 시대가 끝난 자리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으로 부모가 죽은 고아 소녀를 입양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하루미와 팔은 돌아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스즈는 호죠 가로 대표되는 '세상의 한 구석'에 입양되고 입양함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반대로 친가족이었던 우라노 가는 전부 죽거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스즈가 알고 있던 두 세계 중 예전부터 알고 있던 (구)세계가 멸망하리라는 암시.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상흔을 안고 살아갈 스즈 부부. 카타부치 스나오는 후반부를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으로 설정한 뒤,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고아가 된 일본인들이 서로를 입양하는 것에서 살아갈 힘을 찾아낸다. 

영화의 결말은 다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다. 하지만 그 요괴는 더 이상 아이를 납치하지 않는다. 바구니는 텅 비어있고, 스즈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즈는 어른이 되어 정화된 (것처럼 보이는) 신세계를 살아간다. 영화는 거기서 마무리짓는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으로 그 시대를 돌아보는 작품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포근하면서도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은,  [검은 비]를 감싸고 있던 필사적인 삶을 행한 의지라던가 [유레카]에서 꿈꾸었던 대안 가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요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물었던 나와 세계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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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새해인사

2018년에도 좋은 일이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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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1

연말을 감기몸살로 골골거리면서 보내다니.... 덕분에 이 세상의 한 구석에 리뷰는 내년으로 미뤄졌습니다.

남은 2017년 잘 지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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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Johnson - When You Got a Good Friend

존경합니다 블루스 킹 갓 로버트 존슨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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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이차선 [Two-Lane Blacktop] (1971)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2017/01/26 - [Deeper Into Movie/리뷰] - 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자유의 이차선]은 이전작처럼 길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길 위에 선 몬테 헬만의 인물들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고,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으로 서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전작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먼저 시대가 현대로 변했고 주인공 자리엔 잭 니콜슨 대신 비치 보이즈의 데니스 윌슨과 싱어송라이터 제임스 테일러가 대신하고 있다. (헬만이 사랑한 워렌 오츠는 계속 나온다.)

또한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길을 잃거나 도주해야 했던 이전작과 달리, [자유의 이차선]의 주인공들은 아예 목표 의식이 희박해져버렸다. 부조리한 상황 역시 훨씬 은밀하게 영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운전수와 정비공은 드래그 레이스를 한다. 그러다가 경찰이 등장해 도망쳐 어디론가 달린다. 대체 얼마나 달렸나 싶을까 잠시 차를 멈춰세웠을때 한 여자가 몰래 차를 탄다. 하지만 운전수와 정비공은 여자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운전수와 정비공이 G.T.O를 만나면서 헬만은 그만의 기이한 실존주의를 슬슬 펼쳐가기 시작한다. 운전수와 정비공과 달리 나이가 많아보이는 G.T.O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캐릭터다. 그는 히치하이킹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다를 떨어대며 끊임없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다. 그는 여자에게 영영 떠돌수 없다고 말하며, 스피드에만 집중하는 주인공 일행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자신에게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주인공 콤비랑 별반 다르지 않은 캐릭터다. 그의 수다는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헬만은 G.T.O.와 주인공 일행을 대조시키면서 캐릭터들이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관객이 재고하도록 한다.

이들이 뉴욕을 향해 경주 내기를 걸면서 [자유의 이차선]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자유의 이차선]은 모든 요소들은 헬만 특유의 완만한 리듬에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장소들은 비슷비슷하기 그지 없다. 저예산의 한계였을수도 있겠지만, 헬만이 선정한 공간들은 유달리 시간이 고여 흐르지 않는 곳들이다. 모텔, 휴게소, 농장, 주유소, 불법 드래그 레이싱, 한적한 시골길... 길과 길 사이엔 아무것도 없거나 무덤덤한 사건들 뿐이다. 가끔 등장하는 불법 드래그 레이싱 역시 그런 무덤덤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질주와 휴식 이 두 개의 행위를 오갈 뿐이며, 그 이상의 요소들은 집어넣지 않는다.

요컨데 [자유의 이차선]은 익명의 영화다. IMDB 가서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캐릭터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워렌 오츠가 맡은 G.T.O처럼 가명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들에게 개성을 부여하는 것은 미국 머슬카 문화와 거기서 파생된 레이싱, 기계 부품들이며 상대방에 대한 관심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자동차와 길 위의 열정을 그려냈던 [길 위에서] 같은 비트 기행 문학을 오마주/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서 그렸던 저항과 흥청망청한 열정은 밋밋한 미국 중서부 풍경 속에서 가라앉아버리고, 프리 섹스의 대안 공동체는 동승객에 대한 덤덤함으로 대체된다. 이 영화에는 섹스는 암시로 처리된다.

헬만은 대신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중음악부터 시작해 자동차 음향이 스크린을 채우고, 음향은 조용한 인물들과 밋밋한 풍경을 대신해 리듬을 그려간다. 기이하게도 이 순간 헬만은 로베르 브레송과 닮아간다. 이 영화의 연기는 제한적이다. 비전문 배우인 제임스 테일러와 데니스 윌슨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며 연기하는 워렌 오츠조차 많은 연기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브레송이 그랬듯이 공허함과 침묵의 공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어둠에 묻혀있다가 점점 밝아오는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클로즈업 쇼트들의 감흥은 쉽사리 잊기 힘들다.

대놓고 코믹한 영화는 아니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은근 무성 코미디스러운 구석이 있는 영화다. 주인공 일행과 G.T.O가 벌이는 경주는 사실상 전 재산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지만, 헬만은 이 경주를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에 은근히 가볍게 다루고 있다. 운전수랑 정비공은 그닥 잃어도 별 상관은 없어보이고, 여자는 애시당초 제 3자다. 심지어 이 경주에 안달복달해야할 G.T.O조차도 종종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정신 팔린 모습을 보인다. 캐리커처화된 히치하이킹 승객들도 그렇고 고작 앞섰다 싶으면 자동차가 고장나 뒤따라온 경쟁 상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헬만은 전지적 작가의 권능을 활용한 뒤 슬쩍 웃는다.

[자유의 이차선]이 작가로써 몬테 헬만을 파악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하면, 은유적이었던 서부극과 달리 좀 더 본격적으로 196-70년대 미국 청년 문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일단 주역 둘 캐스팅이 1960년대 미국 록 음악에 중요한 뮤지션이다. 또한 이 영화에 빼곡히 등장하는 자동차에 대한 디테일들은 히피즘과 결합된 자동차 개조 문화인 커스텀 컬처를 반영하고 있다. 어느 정도 상업적인 고려도 있었겠지만, 헬만은 팝 문화의 아이콘과 당대 로드 무비 장르를 끌어들여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실존적인 침묵 (실제로 헬만은 연극 무대에 있을땐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리기도 했다.)으로 가득찬 여정에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한다. 그들이 서부에서 시작해 뉴욕으로 가는 이유도 헐리우드에 대한 환멸과 뉴욕의 현실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당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성 캐릭터의 활용도 눈에 띈다. 다른 주인공들처럼 이름이 없는 이 여성 캐릭터는 [바람 속의 질주]와 [복수의 총성]에서 밀리 퍼킨스와 함께 발전시킨 도발적인 여성 캐릭터 활용과 맥이 닿아있다. 이 여자는 무심하게 남자들의 경주를 지켜보며 관계를 가지고 차를 바꿔탄다. 그녀는 애초에 어느 남자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캐릭터며, 자기 흥미와 욕망에 따라 여정을 함께 한다. 마지막에 이 여자가 떠나는 것으로 경주가 마무리되는 것도 흥미롭다. 여자는 마치 자동차가 질렸다듯이 휴게소에서 만난 바이크를 탄 남자랑 같이 떠나버리고 두 남자들의 경주는 흐지부지된다. 

G.T.O.는 여느때처럼 다른 손님을 태우며 자신의 차가 방금 전에 있었던 두 남자와의 경주에서 땄다고 거짓말한다. 한편 운전수와 수리공은 드래그 레이싱을 하러 간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에 가지 않고, 서부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그 사이의 황야를 방황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196-70년대 미국 도로를 달린다는 것, 나아가 청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무덤덤한 황야를 떠돌아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방황이 마냥 무기력한건 아니라고 헬만은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드래그 레이싱이 시작하기 전 불타오르는 필름이다. 이 불타오르는 필름이 [바람 속 질주] 마지막에 등장하는 질주하는 말과 주인공의 쇼트에서 확장된 건 명백하다. 헬만에게 196-70년대 미국 청년들의 삶은 과묵한 불꽃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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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5 즐거운 성탄절

모두가 행복해지는 날이 되길.

(그냥 이 곡 올리고 싶어서 쓰는 글이야! 신경 쓰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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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강화도 가족 송년회

(12월 절반 이상을 [제노블레이드 2] 하느라 날려먹었어! 망할 가챠의 키즈나...)

간만에 형이랑 부모님이랑 같이 강화도를 다녀왔습니다. 그냥 하루치기 드라이브여서 큰 건 없었고, 민물장어 식당에서 점심 먹고 보문사 관광하고 (별로였습니다. 올라가는게 약간 힘들었는데 석모도 경치 감상 빼고는 너무 상업화되서.....) 집에 돌아왔네요. 개인적으로 해변가에 가보고 싶었는데, 러시 아워 피하느라 내릴 기회가 없었던게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요새 퍼그뱀이 바빠서 가족끼리 움직일 일이 적었는데 (여름 휴가땐 저희 아버지가 아프셔서 같이 가질 못했습니다.) 이렇게 같이 갔다와서 다행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행동할 시간이 적어지는데 오늘 안 갔으면 후회했을것 같아요. 송년회도 겸사겸사했네요.

2017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나이만 먹어가고 별로 달라지는게 없어서 걱정되고 그렇네요. 미래가 아무것도 안 보여요.

뱀발. 날짜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길. 임시저장해둔 글을 그대로 활용해서 올리는거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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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 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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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The Lost City of Z] (2017)

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2016/05/29 - [Deeper Into Movie/리뷰] - 이민자 [The Immigrant] (2013)

제임스 그레이 팬덤은 갸우뚱했을지도 모른다. [이민자]로 현대와의 작별을 고한 제임스 그레이는 코스튬 드라마에 이어 고색창연한 모험 영화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도시 Z]는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원작을 기반으로 도시 Z를 찾아 아마존 밀림으로 떠났던 탐험가 퍼시 포셋를 다룬다. 영화 타이틀이 뜨는 순간은 의미심장하다. 어둠 속에서 아마존 원주민들이 불꽃을 피울때, 제임스 그레이는 타이틀을 띄워 저 불꽃이 있는 곳이 '잃어버린 도시 Z'이며 이 영화의 종점이라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 제임스 그레이는 사슴 사냥을 떠나는 영국군들을 보여준다. 부감 샷으로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 사슴은 Z이며, 그 Z를 쫓아 샛길로 들어서는 주인공 퍼시 포셋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길을 갈 것이다. 이후 그레이는 마침내 찾아낸 사슴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퍼시의 샷을 길게 보여주면서 그를 끌어당기는 운명의 힘을 예감케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퍼시는 자연을 폭력으로 굴종시킬수 있었으나, 문명 밖 세계인 아마존에서는 그런 행동이 불가능하다는걸 깨달을 것이다. 

그 다음 그레이는 포셋 부부를 사냥 축하 파티장으로 불러들이면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를 인용한다. 잘 차려 입었지만 불편해하는 (니나의 코르셋에 대한 농담이 대표적이다.) 예의바른 남녀들, 노란 색과 붉은 색의 조명과 색감, 그리고 드리워진 상류 사회의 그림자. 그레이는 포셋 가문에 드리워진 방탕함과 추문을 흘리면서 퍼시의 인정 욕구를 설명한다. 퍼시는 그레이의 다른 주인공들처럼 인정 욕구를 갈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이미 영국 사회에 편입된 머레이 경과 퍼시의 첫 만남을 보여줄때 그레이는 높낮이를 이용한 미장센으로 둘의 불화를 암시한다.

도입부로 퍼시의 캐릭터를 설명한 그레이는 퍼시를 런던으로 데려오면서 Z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당연히 퍼시의 첫 여정은 영국 제국주의의 첨병로써 수행한다.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써 퍼시 포셋은 두 나라 간의 국경을 정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영국 제국주의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퍼시는 여정 도중, 단순해보였던 아마존에 문명과 관련된 비밀이 있다는걸 알고 매혹된다. 퍼시가 느끼는 매혹은 장소의 물성에 대한 영화적 매혹이기도 하다. 그린 스크린과 CG의 시대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정말로 아마존으로 가서 배우를 고생시키면서 아마존이라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담아내고자 한다.

동시에 그레이는 아마존 밀림을 향한 퍼시의 도전을 좌절시키면서, 출발과 귀환의 구조를 만든다. 이 구조를 반복하면서 시간은 흘러가고 영국 제국주의와 상류층 사회에 대한 환멸과 미지의 도시 Z에 대한 동경은 더욱더 커져간다. [잃어버린 도시 Z]는 20세기 초입 유럽이 겪어야 했던 격렬한 변화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퍼시의 실패는 잭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료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1차 세계 대전으로 대표되는 19세기적 가치관의 몰락과 무지비한 현대 문명의 등장이기도 하다. 밀림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사람과 사회는 달라진다. 그레이는 그 변화에 애잔함을 느낀다. 영화 후반부에 퍼시가 자신은 늙었다고 장성한 아들에게 한탄하는 장면이 무게감이 느껴진다면, 그레이 특유의 인과율적인 작법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퍼시는 이 인과율 속에서 영국 사회가 바라는 세속적인 가치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Z와 아마존 문화를 존중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퍼시의 Z에 대한 매혹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퍼시 혼자의 것이 아니라는게 명백해진다. 먼저 퍼시의 아내 니나가 있다. 비록 퍼시의 여정에 동행하지 않지만, 그레이는 니나의 업적과 좌절을 통해 19세기 서구 문명의 여성 억압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 어떻게 여성들이 저항했는지 보여준다. 니나는 행복해지고자 발버둥쳤던 [이민자]의 에바에서 발전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한편 잭 같은 경우, 좀 더 복잡한 그레이의 가족 묘사에 맞닿아있다. 아직 어렸던 잭은 아버지의 부재에 상처받으면서도 그와 같이 있길 원한다.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동시에 부상당해 앞을 보지 못한 채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무력감과 씁쓸합을 느낀다. 퍼시의 가족들은 Z라는 궁극적인 목표 앞에서 고뇌하고 갈등한다.

포셋 가문의 사람들이 제임스 그레이 영화 주인공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커뮤니티의 편입 이외의 다른 길이 열려있다는 점이다. [잃어버린 도시 Z]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국에서 아마존으로 떠나는 과정을 간략화한다. 그러면서 한 인물이 갈망하는 공간을 현재 시공간에 서서히 겹쳐놓기 시작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 시퀀스를 앙상한 전장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철저하게 파괴된 공간 속에서 퍼시는 현대 문명에 염증을 느낀다. 동료를 잃고 염소 가스에 쓰러지는 이 시퀀스의 결말은 그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이때 그레이는 갑자기 영적인 순간을 마련한다. 부하들의 손에 이끌린 퍼시는 집시 점쟁이를 만나게 되고, 점쟁이는 퍼시에게 당신은 아마존과 도시 Z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순간 퍼시와 점쟁이는 전장이 아닌 아마존 숲 속에 있다. 

이 갑작스러운 뛰어넘음은 그레이의 인물들을 결말로 이끄는 운명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 Z는 변해가는 세상에 변치 않는 가치관이며, 그레이가 만들어냈던 등장인물들이 바라던 평화와 안식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던 그들은 Z로 가야만 하고, 기어이 영화 속 여정의 과정을 생략/단축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투 러버스]의 레너드가 그랬듯이 Z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가족에게서 떠나가야만 한다. 그레이는 가족과 이상향 사이에 있는 간극과 고뇌를 산발적인 플래시백으로 형상화한다. 퍼시는 여정 도중 고난을 겪을때마다 플래시백을 빌어 가족을 생각하며, 잭이 아버지 퍼시를 설득해 마지막 여정을 떠날때 등장하는 플래시백 역시 영국에 남겨진 가족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Z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을때, 운명은 그들을 미지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잃어버린 도시 Z]의 후반부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묵상이다. Z 근처에 있는 족장은 그들을 보고 '이 곳도 저 곳도 속하지 않은 영혼'이라며 머물 집을 찾으라고 말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잭과 퍼시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두려워하면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임을 보여줄때 영화는 정중한 침묵으로 가득찬 쇼트를 이어가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서구 문명에서 떨어져 나온 포셋 부자는 Z를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플래시백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린다. 마지막 플래시백에서 퍼시는 자신의 과거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행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거리감을 느낀다. 그는 결국 가족이라는 커뮤니티에서 관찰자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짧았던 순간을 결코 잊지 않으려고 한다.

실제 퍼시 포셋은 사기꾼이었다고 한다. 데이비드 그랜의 원작 역시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영화 [잃어버린 도시 Z]의 결말은 자기완결적이다. 결말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그들의 영혼이 머물 집을 상상하지 않고, 남겨진 니나에게 돌아간다. Z에 대한 열망이 퍼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고 말하는 니나는, 남편과 아들이 남긴 물건을 가지고 지리학회장에게 보여준다. 미심쩍어하는 지리학회장을 남겨두고 니나는 떠난다. 하지만 니나가 향하는 곳은 런던이 아닌 밀림이다. [이민자]의 결말과 같은 구도지만, 여자와 남자는 분리되지 않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뉴욕을 떠난 제임스 그레이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 곳에서 인물들은 함께 할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레이는 이상을 쫓는 행위는 분명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잃어버린 도시 Z]는 그 점에서 우주로 갈 그레이의 차기작 [에드 아스트라]를 예측해볼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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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ohtrix Point Never ft. Iggy Pop - The Pure and the Damned

사실 OPN에 대해서는 별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얼마전에 본 사프디 형제의 [굿 타임] (리뷰 준비중입니다) 사운드트랙은 기가막히게 잘 써서 흥미가 좀 생겼습니다. 영상과 음향 몽타주의 충돌이라고 해야 할까, 원초적인 매력이 있더라고요. 이게 정말 계속 갈 재능인지는 좀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만 (레픈...) 그래도 이 이기 팝과 협업한 엔딩 트랙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피아노 앰비언스가 인상적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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