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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 Mrs. Miller] (1971)

(누설이 있습니다.)

로버트 알트만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시작은 그래도 익숙한 서부극 도입부다. 떠돌아다니던 한 남자가 개척 마을에 당도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전형적인 서부극의 도입부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알트만은 심술궃게도 서부극에서 기대할법한 상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주인공 존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거나 악당과 대치하는게 아니라 카드를 꺼내들어 포커판을 벌인다. 그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맥케이브에 대한 소문 (아이러니하게도 "악당을 잔혹하게 죽인 악랄한 총잡이"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서부식 소문이다.)을 수군거린다. 다음 시퀀스. 맥케이브는 어느새 이 마을 개발에 관여하고 있다. 요컨데 도입부 시퀀스와 다음 시퀀스 간의 격차가 느껴진다.

맥케이브가 어느 정도 기틀을 닦아놓은 마을에 영국인 포주 콘스탄스 밀러가 당도한다. 밀러 부인으로 불리는 이 여자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업가다. 그는 맥케이브에게 마을을 문명화할수 있는 사업을 제안하고, 그들은 계약을 맺는다. 마을 창녀의 구질구질함을 지적하며 투자 비용을 요구하는 밀러 부인의 대사는 알트만이 서부의 야만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하는지 잘 알려주는 대사다. 영국인인 밀러 부인이 보기엔 미국 서부는 문명의 손길이 못한 낙후된 지역에 불과하다. 

사실 고전 서부극에서도 야만성은 미화되지 않고 오히려 거리감을 두고 섬뜩하게 그려졌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접근 방식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다. 이 영화의 관점은 존 포드를 비롯한 서부극 감독들보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가깝다. 자연히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속 서부는 다른 모습을 띌 수 밖에 없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관계는 사업 투자와 개발 계획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며, 인물들 역시 우아함을 찾아볼 수 없다. 섹스 조차도 일종의 상거래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보타이 정장, 털코트를 입은 채 트름을 하며 돌아다니는 맥케이브는 우아하고 고독한 무법자가 아니라 약삭빠른 도박가이자 지방 유지에 가깝다.

자연히 배경이 되는 공간 역시 완전히 다르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일반적인 서부극에게서 기대할 쨍한 햇빛 아래의 사막이 아니다. 오히려 깊숙한 산 속 눈내리는 마을의 질척한 진흙과 더러운 눈더미로 가득한, 척박한 동네다. '눈'과 '비'는 그 점에서 일종의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함과 동시에,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다. 여기다 산으로 둘러쌓여 평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주변 환경은 유폐된듯한 느낌마저 주게 한다.

여기서 촬영 기법에 대해 언급해야 되겠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인 빌모스 지그몬드는 렌즈에 뿌연 느낌을 강조하는 디퓨전 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디퓨전 필터는 극도로 로맨틱한 질감을 강조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대다. 이 영화의 질감은 (고감도 필름을 썼는지) 필름 입자가 강조된, 탁하고 희뿌연 질감이다. 이 거칠거칠한 화면에다가 상술한 눈과 비가 상시 내리는 작중 배경이 겹쳐지면 영화 속 한기는 단순히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한기의 영화다. 그리고 그 한기 속 서부의 정경은 로맨티시즘이 깃들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서서히 꽁꽁 싸맸던 현실주의자의 갑옷을 벗어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알트만이 선택한 '탈의'의 방식은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는 반-서부극으로써 자본주의와 서부극으로써 전통적인 공동체를 오가면서 생긴다. 발단은 지방 유지들의 재산을 탐식하는 기업의 등장이다. 번창하는 맥케이브의 마을에 눈독들이는 해리슨 쇼네시 광산 회사가 맥케이브에게 접근했을때, 맥케이브는 거만을 떨면서 그들의 제안을 거부한다. 자본가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기에 가능했던 행동이다. 여기까지는 이전 장면들처럼 철저히 자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해 있다.

맥케이브가 뒤늦게 마음을 돌려서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을때, 실책은 돌이킬수 없는 파국으로 돌아온다. 회사에서 고용한 킬러 삼인조 (버틀러, 브리드, 키드)을 문명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했던 맥케이브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로 돌아간다. 이 삼인조는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서부극의 사악한 악당들이지만, 동시에 거대 기업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묘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맥케이브의 토착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는 현대화된 기업 앞에서는 사라져야 하는 서부와 동일시된다. 알트만은 여기다 맥케이브가 무법자는 커녕 총조차 제대로 쏘지 못하는 건달이라는걸 폭로하면서, 맥케이브를 강제적으로 서부의 사나이가 되도록 몰아붙인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지금까지 폐기했던 고전 서부극의 가치로 은근슬쩍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일면 자본주의에 찌든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들의 인상이 달라지는 부분도 이 지점부터다. 맥케이브는 자신의 본성이 건달이라는걸 잘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꼬이는 여자는 창녀 밖에 없다고 자조한다. 그의 자조는 그가 왜 밀러 부인이 제시한 매각/이주 제안을 거부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마을 경영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하는 게이머처럼 공동체의 정 따윈 관심없고 이득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답은 간단하다. 이 마을에서 그는 선구자로 존경받기 때문이다.

아마 별 의미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하루하루 살아온 맥케이브에게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었을 것이다. 킬러 삼인조에게 거부 당하고 맥케이브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 비티와 알트만은 자신의 성취감이 부정당해서 화가 났다는걸 명백히 한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는 고전적인 서부 사나이의 모습로 돌아간다. 밀러 부인과 다툰 뒤, 사과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통속적이지만 제대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 맥케이브는 고결함 따윈 없는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사업가지만, 그 이상의 탐욕을 바라지 않고 만족해하는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이며, 거칠고 투박한 로맨티스트다. 이 너저분한 이상주의자가 마침내 모든 외피를 벗어던졌을때, 밀러 부인은 그 진심을 인정하게 된다. 일견 서부극과 어울리지 않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레너드 코헨의 포크곡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때도 이때다.

하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자본주의를 다루는 영화다. 이 말은, 맥케이브의 이상주의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밀러 부인은 그걸 잘 알고 있던게 분명하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결말은 차갑지만 비장미가 느껴지는 서부 사나이의 비극과 살아남을 자들의 단결, 한 개인의 모호한 동선을 통한 애도가 겹쳐져 있다. 같이 섹스를 하고 난 뒤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를 떠나 쓸쓸히 사라진다. 알트만이 밀러 부인이 어디로 갔는지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동안,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들고 킬러 삼인조와 어설프게 싸우다가 눈 속에 파묻혀 죽는다. 맥케이브가 역사 속으로 냉동되는 동안 알트만은 불타오르는 교회를 끄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을 중간중간 보여주면서 아이러니를 강화한다. 그리고 알트만은 맥케이브가 줬던 보석을 바라보는 밀러 부인의 눈을 클로즈업 하는걸로 끝난다.

밀러 부인의 심경이 제대로 표현되진 않지만, 적어도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와 킬러 삼인조간의 대결, 나아가 해리슨 쇼네시의 탐욕을 막을 수 없는 위치다. 그렇기에 밀러 부인은 그저 개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도주를 제안하지만 맥케이브는 거절하고 죽는다. 밀러 부인이 어떻게 살지는 미지수지만, 해리슨 쇼네시 손아귀에 들어간 마을에서 밀러 부인의 입지가 좁아질 것은 분명하다. 이제 맥케이브로 대표되던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는 끝났고 도시에서 온 자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밀러 부인 역시 자신 역시 사라질 것을 예감한다. 알트만은 그런 밀러 부인의 우울하고 허탈한 심정을 줄리 크리스티의 조용한 침묵이 담긴 얼굴과 눈을 통해 모호하지만 근사하게 표현해낸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반서부극/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불리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안티테제는 서부극의 원형을 이해해야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알트만은 반서부적 가치와 서부적 가치 사이를 오가며 아이러니와 쓸쓸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서부극을 반대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소멸의 안타까움과 애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알트만은 중간중간 서사에 복속되지 않거나, 추상적인 샷을 통해 (상술한 결말이 그렇다.) 영화의 주제를 꼬아서 표현하는데 이게 효과적이였는지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차가운 한기의 아름다움으로 한 시대의 종언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절에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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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새벽을 부르는 루의 노래] 예고편

갓아사 갓사아키 존경합니다. 그러니 한국 개봉도 하야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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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mans - ずっと前

드디어 [空中キャンプ] 리마스터반을 구했습니다. 내친 김에 기존에 있던 [宇宙 日本 世田谷]도 리마스터반으로 바꿨고요. 제대로 듣는건 이번이 처음인데 일렉트로닉보다는 생각보다 밴드 중심의 변종 레게에 중심이더라고요. 그래도 피시만즈의 경박한듯 하면서 쓸쓸한 감수성을 만끽하기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곡은 처음 들었을때 꽃혔던 곡입니다. 맑게 울리는 스틸 기타와 드럼머신, 현악이 인상적이죠. 'SLOW DAYS'의 쿨한 휘청임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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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 The Gleaners and I] (2000)

아네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목을 듣고 그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다룰 것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르다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지점 역시 밀레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는 직접 보거나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 한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이 다큐멘터리는 미술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바르다가 그 그림을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삭을 줍는다'라는 행위다. 버려진 이삭을 줍는다는 행위는 상품 가치를 잃은 잉여 생산물을 주워서 쓰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수도 있을 것이다. 밀레가 살았던 시대는 1차 산업혁명이 완료된 19세기였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체제가 정착한 20세기 이후 현대 사회에도 그런 '이삭줍는 사람들'이 있을까? 바르다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바르다는 이삭으로 대표되는 대량 자본주의의 잉여 생산물이 어떻게 재활용되는가를 추적한다. 불량 판정을 받고 처분되는 감자를 쓸어다 먹는 사람들, 폐품을 주워다 예술품을 만드는 예술가, 파장하는 시장에서 음식을 주워다 먹는 노숙자... 많은 사람들이 바르다의 카메라 앞에서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증언하고, 이에 대한 바르다 자신의 코멘트도 이어진다.

바르다가 좌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실제로 바르다의 영화는 페미니즘과 좌파적 관점을 빼놓으면 분석이 불가능해진다.), 작 중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잉여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윤택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다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잉여 생산물의 가치를 판별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아닌, 당장 먹고 살기에도 절박한 빈민들이나 관점 자체가 다른 아웃사이더들이다. 

바르다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버려지는 잉여 생산물이 과연 사회에 통용될 수 없는 '불량'인지를 묻는다. 이 다큐에서 적당한 가공 과정을 거치고 나면 버려진 잉여 생산물들은 더 이상 잉여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노숙자 보호소에서 거주하며 공부하는 청년은 그 점에서 바르다의 질문과 대답을 구체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그 이후]를 봐야 되겠지만 적어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안에서 이 청년은 지식과 삶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재분배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아네스 바르다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고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이후 영화들처럼,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잠시 불었던 DV 카메라 혁명을 빼놓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이며, 주제 의식하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르다는 DV 카메라가 누벨 바그 세대의 정신을 재해석할 수 있으며, 필름 중심의 기존 영화 제작 체계를 전복시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다큐에서 DV 카메라는 페드로 코스타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다. 바르다는 DV 카메라 하나를 들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정 도중에도, 작업 구상 도중에도 즉흥적이고 자유연상적으로 이미지를 채집하고 선별해 배치한다. 바르다는 이를 통해 카메라와 자신의 몸을 일체화시킨다. 바르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카메라 렌즈도 향하고 반대로 렌즈가 머무는 곳에 바르다의 시선도 머문다. 바르다는 이 과정에서 어느새 노년을 맞이한 여성 감독으로써 자신을 성찰하며, 누벨바그 시절 거리로 나가 생생한 배우들과 풍경을 잡아냈던 성취를 2000년대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디지털 카메라는 그 점에서 바르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도구기도 하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사라지는 과거로 남는걸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바르다는 영화 속에서 주제가와 가까운 랩을 시전하기도 한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를 통해 그림 속 이삭을 줍는 행위를 사회경제학적 관점과 DV 카메라로 대표되는 미학적 관점, 여성의 관점을 결합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원제 Les Glaneurs Et La Glaneuse는 그 점에서 프랑스어 특유의 '명사의 성' (남성형 Le와 여성형 La.)을 이용해 복잡미묘한 통찰을 함축하고 있다. 바르다는 남성형으로 이뤄진 '이삭 줍는 사람'에다 여성형으로 이뤄진 La Glaneuse를 덧붙여 이미지를 줍고 선정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난삽해보이지만 흥미로운 폭풍이다. 경제학적인 성찰을 다루면서도 바르다 자신의 독백과 사소한 일상을 스케치하는 클립들이 튀어나오는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로 보자면 끊임없이 불어나는 눈덩이를 (혹은 게임 [괴혼]에 여러 물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별) 연상케한다. 때문에 정돈되어 있지 않고 마구잡이로 진행된다고 느낄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을 줍는 행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바르다는 이 다큐가 어떤 모양새를 취해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치밀한 사유를 거쳐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바르다는 동료인 크리스 마르케와 피에르 롬의 [아름다운 5월]이 보여줬던, 중심이 없는듯 하면서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인터뷰와 자료화면들 간의 사유를 추구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21세기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20세기의 역사로 사라질듯 보였던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바르다 자신도 예측과 달리 90이 되어서도 신작을 내놓을 정도로 정정한걸 보면 이 다큐가 어떤 활력이 되었던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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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Peter - Every Planets Son

여러분 [라스트 엑자일]이라는 애니메이션을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 애니메이션에서 오프닝을 부른 가수가 오키노 슌타로였죠. 하지만 이 사람이 원래 비너스 피터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는건 잘 모르실겁니다.

사실 그럴만도 한게 비너스 피터는 오야마다 케이고 (플리퍼즈 기타)의 트리토리아 레이블 초창기 멤버였지만 그리 히트한 밴드는 아니였거든요. 오죽했으면 국내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은 1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팔리고 있을 정도니깐요. 플리퍼즈 기타가 정립한 시부야계 특유의 세련된 노선을 대대적으로 내세운 밴드인데도 히트를 못 친게 이상하긴 합니다. 매드체스터의 충실한 이식까지는 좋았지만, 당대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앞섰던 것일까요. 훨씬 선배도 살롱 뮤직도 컬트로 끝난걸 보면 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곡도 딱 매드체스터 음악을 열심히 공부한 티가 난다라는 느낌의 곡입니다. 독자적인 노선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지만 그 자체로는 즐길만한 곡이라고 할까요. 쟁글쟁글 연주에서 시작해 사이키델릭하게 밀어붙이는 오버더빙 기타 사운드와 브라스가 스톤 로지즈나 제임스, 샬라탄즈 같은 그때 그 시절 밴드의 정수를 체화하고 있어서 귀가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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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의 첫 장면은 황급하게 노빌의 저택을 빠져나가는 하인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각자 이유를 대면서 저택을 빠져나가지만 그 이유가 알리바이라는건 명백하다. 왜냐하면 저택엔 곧 부르주아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인들의 머릿속엔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마치 모종의 사실을 깨닫고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되겠어라고 외치며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티는 계속되어야 하고, 하인들이 없어도 그들에겐 집사가 있다. 노빌 부부를 위시한 부르주아들은 하인들이 빠져나간것도 모르고 예정된 파티를 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음식, 멋진 음악, 아름다운 그림들... 부뉴엘은 하인들이 알수 없는 이유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잊은 것마냥 이들의 파티를 보여준다.

바보 같은 부르주아. 이게 지옥의 저택인지도 모르고! 부뉴엘과 원작을 쓴 호세 베르가민이 마련한 이 저택은 예삿 저택이 아니다. [절멸의 천사]는 도입부에 등장했던 불가해한 탈출이 가져다주는 카오스를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먼저 피아노 독주회 도중 그 유명한 닭발이 등장하는 샷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이 닭발이 왜 등장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절멸의 천사]는 이유를 대면 지는 초현실주의자가 만드는 영화다. 그러니 닭발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소도구로써 인식하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독주회라는 우아한 상황에서, 고급 레스토랑에도 안 어울릴법한 닭발은 시공을 뒤흔들 폭풍의 전조다. [절멸의 천사]는 그 유명한 설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문명의 보호를 받는 부르주아를 야만으로 퇴화시키는걸 보여주는게 최우선인 영화다. 닭발은 연주회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부뉴엘의 중지 손가락으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런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소품과 거기서 기반한 비논리적인 샷들은 [절멸의 천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닭발을 꺼내는 샷을 기점으로 부뉴엘은 영화의 개연성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첫번째 징조는 의지의 삭제다. 부뉴엘은 아무렇지 않게 파티가 끝나고 나가려는 인물들을 붙잡아 뇌세척을 하고 재운다. 이 과정이 은근슬쩍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의심하지만 그 의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한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 계급은 다양한 공간에서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릴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부르주아 문화의 중심이지만 역설적으로 생존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인 접대실"에다 가둬버린다. 피아노와 소파, 미술품이 밥을 먹여주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한정된 공간 밖에 머물수 없게 된다. 심지어 그들을 보좌해줄 하인들조차 없다. (재미있게도 부뉴엘은 집사장도 부르주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간 관리자도 노동자 계급을 탄압하는 부르주아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본 것일까?)  [절멸의 천사]는 부르주아의 저택이 '생존과 본능의 공간'과 '문명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부르주아를 보살피는 수족이 없으면 무너지는 곳이라는걸 폭로한다.

부뉴엘과 베르가민은 낄낄거리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캐릭터의 이성을 붕괴시킨다. 의지가 삭제된 캐릭터들은 그래도 여기 머무르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갈려고 생각은 하지만, 그 경계선상에 서는 순간 중요한 연결고리를 잊고 '아 그 뭐더라.' 하면서 돌아선다. 등장 인물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악랄하게도 그 해결책은 중요한 '선'을 넘지 못한다. 절박한 갈망은 있되, 의지와 해결책은 원천봉쇄된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초반부에 등장한 하인들의 도주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절멸의 천사]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언제든지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빠져나갈수 있지만 부르주아는 그러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웃는다.

접대실의 물자가 바닥날수록 합리적으로 판단할 이성은 본능 앞에서 초라해진다. 절정인 세번째 단계는 당연하게도 아포칼립스적 생존 투쟁기다. 부르주아는 이 순간부터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근친상간, 유치하지만 무시무시한 투닥거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자, 굴러다니는 동물뼈, 카발라에 심취해버린 부르주아들, 마약, 잘린 손의 호러스러움... 부뉴엘은 중간에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 시퀀스를 삽입하면서 그들을 한껏 비웃는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비슷하게 부르주아의 문명 속 고립극을 다룬 J.G.발라드의 [하이 라이즈]의 선조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난처함은 구경거리가 된다. 

부뉴엘은 이 황당한 문명 속 아포칼립스를 벽에 있는 수도 파이프를 뜯어서 목을 축이는 시퀀스와 갑자기 저택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동선으로 극대화한다. 문명의 화려함을 누리기 위해 벽 뒤에 은폐한 수도 파이프는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기계장치의 베르가민과 부뉴엘이 바깥에서 보낸 양은 자유롭게 '선'을 넘나들며 부르주아를 희롱한다. 그 앞에 선 부르주아들은 굶주린 짐승과 다름없다. 부뉴엘은 은폐된 소도구 (파이프)의 폭로와 두 동선의 대조 (갇혀있는 부르주아와 저택 밖에서 들어온 양)로 부르주아의 허울을 벗겨낸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는 의지만 사라진다면 문명과 가장 멀어져 추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덤으로 이뤄지는 가톨릭 모독은 더욱 노골적이다. [절멸의 천사]에서 가톨릭과 가톨릭 예술은 말그대로 변기통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의 설정이 상당히 인공적이고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 속 부르주아들은 현실에 속해있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창작자의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쥐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 속 캐릭터 설정은 일관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단적으로 이 영화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부르주아 캐릭터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성격보다는 일련의 기행들로 기억된다. 심지어 각 시퀀스 별로 캐릭터들의 설정이 일관성도 없다. 하지만 일관성 없이 캐릭터가 그려짐에도 영화의 카오스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에 더욱 매정하게 다가온다. 부르주아의 캐릭터 따윈 아무런 상관없다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캐릭터들을 그냥 멍청이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들을 모욕하는 법을 알고 있다. 상술했지만 이 부르주아들은 나름 이성적으로 재난을 풀려고 하는데, 이 점 때문에 [절멸의 천사]은 오히려 더 매정해진다. 그들은 똑똑하지만 베르가민과 부뉴엘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여기다 부뉴엘은 갑작스럽고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담은 샷과 몽타주로 서사를 흔들어놓고, 캐릭터의 일관성을 발기발기 찢어가면서 카오스를 만든다. 부뉴엘은 그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던가 데이빗 린치로 이어지는 전후 현대 영화의 비논리적 구성과 후대 "병맛"의 선구주자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절멸의 천사]는 명성과 달리 디씨 막장 만화들처럼 가볍게 즐기면 되는 영화다.

[절멸의 천사]의 결말 부분은 싱거워 보인다. 이 영화는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기대할법한 전멸로 끝나지 않는다. 부뉴엘은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외국인인 레티시아와 피아니스트 실비아에게 준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피아노 독주회를 재현하는 것으로 저택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야만의 끝에서 예술와 문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그들은 간신히 그 공간을 빠져나올 의지를 얻게 된다. 예술에 대한 긍정일까? 그것보다는 상황 자체를 재구성할 논리를 기어이 부여함으로써 탈출했다고 보는게 좋을듯 하다. 결국 부르주아들은 예술과 외부인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올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견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부뉴엘은 그 다음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성당으로 장소를 바꿔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뉴엘은 예정된 아포칼립스를 보여주지 않고 군중에게 발포하는 경찰과 또다시 흘러들어오는 양떼를 보여주면서 좀 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부뉴엘은 부르주아의 꼴불견은 총을 쏴댈 상황까지는 아니였지만, 가톨릭의 꼴불견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풍경이라는걸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스페인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부뉴엘 자신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끝으로 부뉴엘은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데, 부뉴엘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멕시코 시절을 총결산하고 멕시코보다 좀 더 자유로운 영역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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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 Sidran - Get It Yourself

봄이니깐 땡기는 앨범 1. 보즈 스켁스랑 협업했던걸로 알려진 뮤지션인데, 현지에서도 그렇게 유명한 편은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재즈 영향이 있긴 한데 틴 팬 앨리라던가 193-50년대 스탠더드 팝/재즈가 1970년대 휭크랑 혼종을 이룬 팝을 하는 분입니다. 소울적인 색채가 나긴 하지만 좀 더 산뜻하고 AOR 그쪽에 가까운 느낌? 이맘때 가벼운 날씨하고 잘 어울리는 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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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박근혜 탄핵! 오 예 신 난 다

-부모님은 큐슈 여행을 가신다고 하는데, 왠지 음반 쇼핑하러 다시 일본 가고 싶어지네요. 아 사고 싶어라 서니 데이 서비스 [도쿄] 박스셋.

-형이 직장 취직 후 리얼하게 곶통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일상에 찌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적나라해서 보기 힘들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죽음의 의미를 체감하게 됩니다. 특히 [로건] 보고 난 뒤 (예상하긴 했지만) 후유증이 심했습니다. 정말로 내가 알고 있던 어떤게 끝났구나 그런 느낌. 그 시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느낌. 그런 생각을 할때마다 좀 두렵고 그렇습니다. 알고 있는게 전부 남아있지 않고 오로지 새로운 것만으로 채워진 세상이 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네요. 노인들이 과거에 매달리는 이유도 그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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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에드만 [Toni Erdmann] (2016)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때, 약간의 신랄함을 동반한 유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때 그 예감은 완전히 박살났다. 영화의 첫 샷은 문이다. 금방이라도 열릴것 같은 문은 예상과 달리 빨리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드디어 택배 기사가 나타나고 문이 열리지만, 분장하고 나타난 토니 에드만은 생뚱맞다. 유머는 빗나가고, 리듬과 리액션도 그렇게 활기차지 않다. 빈프리트/토니 에드만은 사람들이 웃길 바라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할 뿐이다. 결국 그는 허겁지겁 유머를 접을수 밖에 없다.

차라리 이 영화의 도입부는 초라하게 몰락한 히어로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하고 닮아있다. 빈프리트 몸에 붙어있는 혈압측정기는 그의 육체가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으며, 피아노 강습은 짤린데다 부인과는 이혼한지 오래다. 같이 살고 있는 개 역시 죽어가는 중이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토니 에드만]은 [로건]보다도 훨씬 매정하다. 빈프리트는 자신이 슬프고 지쳐있다는걸 직시하지 못하고 계속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던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토니 에드만]은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세상에 사는, 어느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늙은 피에로의 분장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도입부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히어로의 불가능성'과 연계된다.

[토니 에드만]를 이해하려면, 샷 내 대화와 행동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것이 어떤 뉘앙스를 띄며 맥락을 형성하는지 봐야 한다. 먼저 주목해야 하는 대화는 빈프리트와 어머니의 대화다. 죽어가는 개를 안락사시키지 그러냐라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빈프리트의 대답은 웃기기 보다는 날이 서 있다. "양로원에서 안락사 일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를 안락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것."이라는 빈프리트의 대답은 블랙 유머적 비꼬기에 가깝다.  대체 왜 빈프리트는 어머니를 그런 가시돋힌 말을 내뱉는 것일까? 어떤 멜로드라마적 사연이 있어서?

아니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두 캐릭터의 세대와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주목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영화가 독일 영화라는 것도 주지하길 바라고 있다. 이 부분은 단서가 없으면 독일 바깥 사람들은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행히도 아데가 영화 마지막에 단서를 던져놨기에 놓쳤더라도 그 부분을 본 뒤 이 영화의 도입부를 다시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빈프리트 어머니와 빈프리트는 독일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전후 세대인 빈프리트는 그걸 알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세대가 저지른 나치 범죄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빈프리트의 대사는 죽음은 당신 생각과 달리 간단히 이뤄지는게 아니지만, 어머니와 빌리를 사랑하니 안락사시키진 않겠다라는 복잡미묘한 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그 복잡미묘함과 간극이야말로 [토니 에드만]이 영화 내내 구축하고 있는 이상한 리듬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다.
 
서로 사랑하지만 어쩔수 없이 배어있는 세대의 결점에 충돌하고 밀려나는 [토니 에드만] 속 가족 관계는 빈프리트와 그의 딸 이네스로 이어진다. 그들이 영화에서 처음 만났을때 빈프리트의 분장이 이네스의 옷에 '묻는다'. 이네스는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얼룩을 지워내려고 애쓴다. 얼룩이 묻고 그걸 닦아내려고 애쓰는 행동은 [토니 에드만] 내에서 자주 나오는 행동이며, 상술한 세대론과 겹쳐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네스는 아버지의 얼룩과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워내려고 한다. 그에 대답하듯이 이 시퀀스에서 관계의 어색함은 더욱 증폭된다. 아버지는 딸의 깜짝 생일 파티가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들어왔고, 딸은 이 상황을 의례적인 일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일로 도피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랑 대화를 나누려고 할때 이 불편함과 어색함은 실체화된다. 자신을 일부러 외면하는 딸에게 차라리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는 아버지의 블랙 유머적 비판은 딸의 무덤덤한 환영에 막혀버린다. 소통의 시도였던 유머가 통하지 않는 셈이다.

[토니 에드만]이 놀라운 지점은 애완견 빌리의 죽음 시퀀스와 딸을 찾아가는 첫 장면이다. 빈프리트의 슬프고 지쳐있는 감정이 처음으로 구체화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젠 빈프리트에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는 빌리의 죽음을 애도할줄 모르며, 루마니아로 떠나버린 딸은 빌리를 애도할수도 없다. 아내는 이미 타인이 된지 오래다. 오로지 혼자서 애도를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빌리의 무덤을 판 뒤 마당 한 구석에 빈프리트가 쓰러져 있는 샷은 그 점에서 슬프고 두렵다. 이 샷에서 빈프리트는 빌리의 시체랑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샷이 끝날때까지 그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 장면만 떼놓고 보면 빈프리트는 빌리를 따라 죽어버린것만 같다. 마렌 아데는 이 시퀀스에서 빈프리트를 정물처럼 다루면서 죽음과 애도, 슬픔의 감정을 한 세트로 묶어서 보여준다.
 
[토니 에드만]은 여기서 장면을 끊고 바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있는 이네스가 일하는 직장으로 넘어간다. 아마 어느정도 영화의 언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황했을 것이다. 독일과 루마니아가 아무리 EU로 국경을 열었다고 해도, 물리적인 거리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빈프리트 (나아가 몽타쥬)는 물리적 거리를 무시한 채 집에서 이네스의 직장으로 워프한다. 그가 하는 행동은 더 황당하다. 출근하는 이네스 앞에서 마치 자신이 왔다는걸 시위하듯이 스윽하고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네스는 몇 번 슬쩍 보고 난 뒤 그냥 재빠르게 가버린다. 이네스는 빈프리트가 왔다는걸 알았지만, 거기서 아는체했다면 자신의 커리어가 작살난다는걸 알기에 그 자리에서 빈프리트를 무시한다. 물리적 거리를 무시하고 딸 앞에 나타난 빈프리트의 동선이 슈퍼히어로적 황당함과 비현실성이 묻어나온다면, 이네스의 무시는 현실의 냉엄함을 드러낸다. 영웅 서사에서 영웅은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각성한다면 빈프리트는 빌리의 죽음을 통해 유머의 영웅로써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마렌 아데는 그 탄생마저도 무덤덤한 리액션으로 초라하게 처리한다.

이네스는 대신 자신의 비서 안카를 빈프리트에게 보내 환대한다. 이네스의 이런 행동은 마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처럼 영화 내내 이네스는 누군가의 대리로써 일하거나 대리를 보내 자신의 의사를 대신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네스의 직업은 기업의 아웃소싱과 관련된 상담역이다. 이네스를 극도로 효율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냉혹한 최전선에 있는 것이다. 이네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졸라매고 자신의 가치를 기업에 맞추려고 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를 떠나는 순간까지 이뤄지는 시퀀스들은 이네스 나아가 자본주의의 리듬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있다. 빈프리트의 묵언 시위에 대해 대답하듯이 이네스는 가장 공적인 영역에 가장 사적인 인물인 아버지를 데려가 자신의 리듬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과시하려고 한다. 전후 세대의 투쟁과 낙관주의는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하지만 그런 과시는 좀처럼 이네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고객은 이네스의 제의에 대해 건성으로 넘겨들으며 이네스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객의 부인과 함께 원하지도 않는 쇼핑을 하러 가야 한다. 빈프리트의 블랙 유머는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라는 사적 영역에서 이뤄진 유머를 공공연연하게 공적 영역에 뿌리고 다니며,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독일인들의 시혜적 태도 ("우에카라메센"이 가장 어울리는 단어일것이다.)에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별다른 액션 없이 앉아서 대화하는 샷으로 이뤄지는 [토니 에드만]의 중반부는 가식 아래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정치사회적 혈투다. 하나의 샷 속에서도 대화 샷들은 어색하게 빗나가고 행동과 표정 속에선 냉담한 순간과 수직적인 권력 관계가 비져나온다. 그것은 성차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적 차별이기도 하고 국가간의 관계이기도 하다. 빈프리트의 삶이 죽음과 소멸,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실패의 비극에 갇혀 있다면 이네스의 삶은 효율 중심의 가식적인 관계와 사회적 편견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초라함을 보여줬던 긴 리듬의 샷을 이용해 이네스의 일상을 파헤친다. 그리고 거기서 나치 시절 착취한 뒤 사탕발림이 담긴 독일 자본주의에게 착취당하는 루마니아의 현실부터 시작해 성차별과 신자유주의의 냉엄함을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담아내고 있다.

빈프리트는 이 과정을 보면서 딸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심경인지 알게 된다. 이네스를 향해 그러고도 인간이 맞냐는 빈프리트의 일갈은 당연하겠지만 신자유주의를 향한 이상주의의 일갈이며 딸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는 발언이다. 사실 이네스도 자신이 비인간적이며 행복하지 않다는걸 알고 있다.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빈프리트에게 이네스는 대놓고 말한다: "행복이요? 그건 제게 너무 먼 단어에요." 치즈 강판이라는 생일 선물로도 해소되지 않고, 마음껏 푹 잘 수도 없는 이네스의 스트레스는 결국 푹 자다가 전화를 놓치는 사건으로 폭발하고 만다. 아버지의 방문이라는 사건과 클라이언트의 환심 사기라는 사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게 밝혀진 뒤 빈프리트는 물러나기로 한다. 이때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따라다니던 카메라를 이네스에 맞춰놓고 이네스의 심적 고통을 활짝 열어보인다. 이네스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리듬엔 아버지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버렸다. 빈프리트도 그 사실을 깨닫고 사라지는 걸 선택한다. 유머의 히어로는 이렇게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만 했다면 [토니 에드만]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두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려낸 드라마로 끝났겠지만, 마렌 아데는 이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는다. 아버지가 떠난 후 이네스는 아버지를 위해 짐을 싸다가 찧은 발톱을 제거하려다가 옷에 피를 묻힌다. 아버지에 대한 얼룩진 감정을 어떻게든 지우려고 애쓰는 이네스. 그런 이네스 앞에 갑자기 빈프리트는 가발과 틀니를 낀 채 "독일 대사이자 컨설턴트 업무를 하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 이네스와 직장 동료들 앞에 나타난다. 이네스는 반평생 들었던 "시덥잖은" 유머를 신선한 유머인 마냥 받아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부분에서 [토니 에드만]은 비밀 정체성를 다루는 히어로 영화 구조를 뒤집어 영화를 진행한다. 비밀 정체성을 가진 히어로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나는 히어로 영화랑 달리, [토니 에드만]은 진짜 정체성일때 실패하는 히어로가 비밀 정체성을 착용하고 다시 나타나 판을 뒤엎는다.

[토니 에드만]이 이상한 영화라면, 무수한 롱테이크를 골라 선택해 잘라서 붙인 영화의 편집 방식을 비롯해 영화가 리듬을 구축하고 강조하는 방식이, 내러티브 영화의 관습을 인정하면서도 기이하게 뒤틀고 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초라하고 생뚱맞아보이고, 느릿한 페이스로 진행되는 영화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동시에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직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네스의 회의 장면을 길게 묘사하는 시퀀스가 있다. 토니 에드만이 난입하지 않고 이네스의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따분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퀀스가 영화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그 다음 시퀀스들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마렌 아데는 샷 나아가 개별 시퀀스 속에 등장하는 서사적 장치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도록 한 뒤, 토니 에드만이 등장한 이후 그 요소를 계속 패러디하고 모방한다. [토니 에드만]이 웃긴 이유는 이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요소들이 다음 시퀀스에서 기상천외하게 변주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생뚱맞음과 어색함을 모면하려는 인물들의 행동이 더욱 기괴하게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인물의 불가능성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애매하고 너저분한 회색 지대로 떨어진다. 마렌 아데는 이렇게 유기적으로 직조된 리듬을 마음대로 구부러트리며 인물들을 굴러가게 만든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 시퀀스들을 분석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게 황당한 개별 사건들이 개연성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부러짐을 담당하는 토니 에드만은 어떤 캐릭터인가? 그는 이네스처럼 상담역에 종사하고 있으며 유창하지만 나사 빠진 비지니스 영어를 사용한다. 대놓고 이네스를 패러디한 캐릭터인 셈이다. 거기다 인생에 방귀 쿠션 말고 대안이 있냐는 이네스의 비난에 진짜로 방귀 쿠션으로 등장해 성차별적인 직장 상사를 비웃고, 애완견 빌리의 죽음은 45년 된 애완거북의 죽음으로 패러디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치즈 강판에 간 치즈 가루를 연상케하는 가루를 머리에 흩뿌린다. 그야말로 처음은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재현되는 셈이다. 전반부의 서사적 장치들이 황당하게 비틀려서 등장하는 동안 이네스의 대응과 행동도 괴상해진다. 정사를 나누던 도중 애인의 정액을 케이크에 묻혀서 먹는다던가 아버지를 마약 파티로 데려가 마약을 하는 모습을 노출하는 과정은 도무지 상식적인 행위라 볼 수 없다. 이네스의 기행 역시 전반부에 등장했던 서사적 요소의 극단적인 패러디라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런 패러디조차도 생뚱맞고 어색하기 그지 없다. 비밀 정체성은 시작하자마자 딸에게 간파당한지 오래고 빈프리트도 이 게임을 딱히 엄격하게 진행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빈프리트가 이네스 집에 숨어들어 이네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독창회로 끝나는 파트는 그 점에서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구분되었던 토니 에드만과 빈프리트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빈프리트가 가지고 있는 낙관주의가 마냥 긍정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니 에드만의 활기는 차가운 신자유주의적 해고에 가로막히고 애원과 '유머를 잃지 마세요.'라는 진심어린 충고는 공허한 공수표처럼 남발될 뿐이다. 풀이 죽은 토니 에드만에게 이네스는 당신이 믿는 이상주의가 얼마나 공허한지 아냐고 쏘아붙이지만 금세 눈물을 흘리고 만다.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빈프리트의 어머니의 비윤리성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유머와 삶의 지혜는 이네스도 내심 공감하지만 쉽게 성립될 수 없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다시 인물의 불가능성을 끌어들여 분열된 정체성을 지닌 채 세대 간의 깊은 간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피에로의 슬픔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쉽게 가라앉지 않은 서운함을 억지로 누른 채 터져나오는 이네스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은 정말로 굉장하다. 마렌 아데는 지나치게 늘어지는 도입부와 불안한 음정, 노골적으로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 이네스의 표정에서 얼룩과 간극 속에 서 있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리고 곡을 진행하면서 감정을 고조시키며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절창 부분에서 곡이 가지고 있던 달콤한 감상주의와 이상주의를 어떻게든 간극을 좁히고 달라지고 싶어하는 인물의 고통이 시너지를 일으켜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잡아낸다. 행복해보이(지만 이네스를 수족으로 부리는 독일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는 루마니아 대가족 앞에서 벌어지는 독일 핵가족 구성원이 벌이는 복잡한 감정의 전투라는 점에서 이 시퀀스는 [토니 에드만]의 웃픈 순간들과 정치사회적 맥락을 집약한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독창이 끝난 뒤 이네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떠나가고 빈프리트는 또다시 실패했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이네스는 자신의 생일 파티를 희한한 방식으로 일그러트린다. 토니가 방귀 쿠션으로 성차별적인 구실을 대며 단합을 강요하는 강압적인 대화의 리듬을 일그러트렸다면 이네스는 옷을 입다가 다 벗어버린 뒤, 찾아온 사람들에게 황당한 이유를 대며 게임에 참여하라고 한다. 물론 이 게임은 외부자였던 토니와 달리 마냥 공평한 관계로 이뤄지지 않는다. 비서 안카 같은 경우엔 상사인 이네스의 눈치를 보고 있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네스는 자신과 상사 게롤트, 안카의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다 벗겨버리면서 직장 내 관계를 무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이네스는 토니 에드만의 유머를 받아들여 신자유주의를 그럴싸하게 속인 뒤 벗겨버린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채 우스꽝스러워진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태어난 듯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와중에 동료인 슈테프나 남친이 이 놀이에 동참하지 않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이네스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아마 이 시퀀스가 끝난 뒤, 그들은 자연히 이네스랑 멀어졌을 것이다.

이때 털을 뒤집어 쓴 쿠케리가 등장한다. 이 쿠케리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탈을 벗지 않지만 쿠케리의 행동을 보면 그게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인물들이 이 쿠케리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층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걸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흥미롭다. 당혹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는 안카와 꽃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이네스, 그리고 쿠케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놀라는 게롤트의 대조는 이들의 권력 관계를 생각케 한다. 쿠케리가 새해맞이 축제에 등장하는 악귀를 쫓는 불가리아의 탈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왜 마렌 아데가 쿠케리를 누드 파티에 불러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쿠케리와 홀딱 벗은 이네스는 완벽하게 대조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의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하고 만끽한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움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마렌 아데는 쿠케리와 이네스를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이네스의 시점 샷으로 쿠케리를 쫓아가면서 쿠케리가 다정하게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본다. 직후 이네스는 쿠케리를 '아빠'라 부르며 포옹한다. 이네스의 응시를 통해 아파트 내에서는 모호했던 쿠케리의 정체가 확연해지는 순간 이네스와 빈프리트는 마침내 얼룩을 묻히지 않고 포옹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포옹에서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의 행복한 장난 이후, 이네스는 서서히 뒤로 빠지면서 엉거주춤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그들은 가면을 써야 짧은 포옹을 나눌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냉엄한 현실에 어정쩡하게 끝난다. 이네스에겐 끝나지 않은 생일 파티가 있으며, 빈프리트도 그걸 안다. 그 점에서 이 장면은 완벽한 봉합이라기 보다는 짧은 면회에 가깝다. 하지만 빈프리트는 애써 막지 않는다. 이네스도 애써 머물지 않는다. 이전 시퀀스의 눈물과 실망과 달리 그들은 그렇게 끝날 수 있다는걸 인정하면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쇠잔한 육신을 다시 꺼내들어 마지막 파트를 장식한다. 기나긴 접촉 시도 끝에 이뤄진 행복한 포옹. 하지만 빈프리트 역시 자신의 어머니처럼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며 이네스의 셔츠에 튄 피는 끝내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마렌 아데는 그런 그림자와 얼룩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을 담아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낸다.

[토니 에드만]의 결말이 빈프리트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어찌보면 논리적이다. 마렌 아데는 선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는 이제 완전히 죽었다. 부녀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빈프리트일것이다. 하지만 이네스는 여전히 바쁘고 원하던 중국은 가지 못한 채 독일에서 더 멀어진 싱가포르로 간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그걸 알듯이 빈프리트는 이네스를 데리고 어두운 창고로 들어가서 어머니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어둠을 반추한다. 그리고 빛으로 가득찬 바깥으로 나온 부녀는 인생에 대한 상투적인 교훈을 나눈다. 상투적이지만 맞는 말이고, 마렌 아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토니 에드만]의 마지막 놀라움은 그 뒤에 있다. 틀니와 나치 시절 모자를 쓴 이네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빈프리트는 카메라를 찾겠다고 사라지고, 기다리던 이네스는 틀니와 모자를 벗는다. 그리고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기다리며 골똘히 상념에 잠긴 이네스의 얼굴 샷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몇몇 평자들은 이 결말을 상당히 우울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세대의 간극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며, 부모의 소멸만이 예정된 이네스의 현실은 달라진게 없다고.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분명 [토니 에드만]이 도달한 결말은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어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토니 에드만]의 결말은 단순히 비극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회색 지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네스는 더 이상 전화로 도피하지 않으며, 스스로 틀니와 할머니의 모자를 찾아내 쓰고 빈프리트를 향해 웃어보인다. 일단은 마렌 아데는 두 사람의 포옹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프리트가 영화적으로 소멸했을때 (결말 이후 그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영화는 그걸 보여주지 않기에 소멸했다고 봐야 한다.) 이네스는 그걸 벗는다. 윗 세대의 물건은 분명 자신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이 이네스의 개성이 될 수 없다. 이네스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바더 마인호프로 대표되는 독일 68세대가 과거와의 결별 시도는 극렬하기로 유명했다.) 자신도 자신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걸 깨닫고 고민한다.

이네스의 고민은 마렌 아데 본인의 고민이기도 한다. 자신과 부모 세대의 간극을 인정한다는 것. 곧 다가올 부모 세대와의 이별을 받아들인다는 것.할머니 세대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부모 세대의 유머를 가져오면서도 변화한 현실의 벽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마렌 아데는 그 질문에서 영화를 멈춰세운다. [토니 에드만]이 성숙한 영화라면 긍정과 부정을 모두 껴안은채 창작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영화적으로 치열하게 사유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와 마렌 아데 감독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 [토니 에드만]은 어설프고 너저분한, 평범한 관계의 회색성을 포착하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치열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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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の骨 - 燃え殻

우마노 호네는 키린지에서 동생을 담당했던 (2013년쯤 탈퇴했습니다.) 호리고메 야스유키의 솔로 프로젝트입니다. 최근에 낸 솔로 앨범은 본인 명의로 낸듯 합니다만, 여튼 키린지로 활동한 시절엔 이 명의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이 곡은 첫 앨범 낼 당시 싱글이였고요.

키린지의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로맨티시즘으로 가득한 스웜프 뮤직과 시티 팝, 70년대 SSW 음악의 블렌드겠죠. 이 앨범에도 그 감수성이 제대로 살아있습니다. 첫 트랙인 'My Stove's on Fire'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스웜프/소울 뮤지션인 로버트 레스터 폴섬의 대표곡을 멋들어진 휭키 리듬으로 커버하고 있습니다. 본인 곡들도 다들 훌륭하긴 하지만 역시 이 곡이 가장 최고인것 같아요. 뮤직 비디오에 떠다니는 조각배가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키린지의 '에일리언즈'에 버금가는 키린지표 명발라드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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