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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스플래툰 2 런치 예고편

제가 스위치를 선물받은 것은 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튼 진짜 재미있습니다. 자세한 소감은 훗날 적을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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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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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car - [Answer] (2004)
만약 당신이 전작 [Highvision]의 몽환적인 세계를 기대하고 [Answer]를 집어들었다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첫 트랙 'Free Hand'의 짧지 않은 앰비언트 드론 사운드 위에 먼저 등장하는 것은 철컥거리는 퍼커션 소리와 강한 베이스이기 때문이다. 뒤이어 베이스가 이끄는 두번째 트랙 'Justice Black'을 지나 'Sunshine Fairyland'에 이르면 기타는 1960년대풍 사이키델릭 록 특유의 기타 리프를 삑삑거리는 펜더 로드 사운드와 함께 얹여놓는다. 이 곡에서 그들은 마리화나를 피우며 꽃을 꽃은채 라디오로 베트남전 소식을 듣는 일본 히피 같아 보인다. 너는 슈퍼카잖아? 슈게이징 기타 팝과 YMO와 ELO의 어딘가에서 들을법한 싼티나는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결합된 밴드잖아?

하지만 실망한다면 조금 기다려주기 바란다. [Answer]는 어찌보면 슈퍼카 최대이자 최후의 야심작이며, 그 야심을 모두 실현시킨 희귀한 앨범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 앨범에는 전작을 사로잡았던 강한 훅의 멜로디는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 슈퍼카는 [Jump Up]부터 조심스럽게 시도한 음향 실험과 구조의 결합을 완연하게 꽃을 피운다. [Futurama]와 [Highvision]에서 음향 실험은 부유하는 기체와 단단한 기타 노이즈 간의 결합이었다. 두 앨범에서 기타 중심의 록밴드와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어느 정도 구별되어 있었다.

[Answer]에서 그들은 록 편성의 악기와 목소리마저 하나의 음향처럼 다룬다. 심지어 그들은 멜로디라던가 곡의 구조를 최소화한 뒤, 청자들이 반복되는 음향과 구조에 빠져들기를 원한다. 전반적으로 [Answer]는 치밀한 리듬 위에 단단하게 잡힐것 같은 음향들이 정교하게 쌓여서 움직이는 앨범이다. 물안개처럼 퍼지는 앰비언트 신스 사이로 채워가는 퍼커션과 불길한 베이스, 나카무라 코지 특유의 나태한 보컬이 뭉쳐 천천히 움직이는 'Dischord'는 이 앨범의 변화를 함축한 곡이다. 뉴 오더나 프라이멀 스크림처럼 베이스 리듬과 퍼커션이 강조되는 것도 특기할만하다.

그럼에도 이 앨범을 슈퍼카의 앨범이라 부를 수 있다면, 슈게이징 특유의 내성적인 멜로디와 가사, 보컬로 전해지는 특유의 쿨하면서도 허무주의적인 서정이 여전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싱글로 발매한 'Wonder Word', ' Recreation', 'BGM'은 과거와 현재의 슈퍼카가 만나는 귀중한 곡들이다. 'Wonder Word'와 'Recreation'와 'Harmony'가 기타팝 시절 내성적인 슈퍼카의 모습을 클린 톤 기타를 사이키델릭, 일렉트로닉을 통해 재해석하고 있는 곡들이라면, 'BGM'은 반대로 YMO 오마쥬를 담은 일렉트로닉 팝 속에 텔레비전를 연상케하는 임프로바이제이션 기타를 배치함으로써 LAMA나 iLL을 통해 이어질 나카무라 코지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앨범은 질주하는 에너지보다 독특한 정념 만들기에 집중했던 [Jump Up]와 색채가 유사하지만, 그 앨범보다 훨씬 노련하게 모든 요소들을 통제하고 배치하고 있다. [Futurama]와 [Highvision]를 거쳤기에 가능한 앨범이라고 할까.

다만 노련해졌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전까지 슈퍼카의 허무주의와 한 줌의 희망이 젊음에 기반하고 있었다는걸 생각하면, 밴드로써 정체성이 달라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전작들보다 두드러지는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이 빚어내는 감정은 그 점에서 이질적이다. 이 앨범의 허무주의와 희망은 풋풋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깨달은 어른의 허무주의와 희망이다. 제목의 '대답'은 그 점에서 당시 슈퍼카가 직면했던 질문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기도 하다. 유달리 후반부 트랙들이 슬픔으로 가득한 것도 끝을 예감했기에 만들어진 거 아닐까? 그들은 쿠루리처럼 변해버린 모습을 안고 밴드로 나아갈수도 있었다. 하지만 슈퍼카는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해산을 선택했다. 그렇게 아오모리에서 온 소년소녀들은 어른이 된 채 한 시기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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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1943)

얼마 전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회고전에서 만난 영화들은, 그간 이 감독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호프만 이야기]를 보고 리뷰를 쓰면서 막연히 지적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영화들은 고전기 영화들의 간결한 우아함과 더불어 영화라는 매체의 즉물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즉물성의 허망함을 역사 인식과 철학의 경지로 이끌어올린 걸작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미룬채 조각난 샷들을 이어 호기심을 이어간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훈련을 하다가 전쟁 훈련을 위한 포로를 잡기 위해 터키탕을 찾아간다. 거기엔 늙은 군인 윈 캔디가 있다. 어느때처럼 꼰대질을 하다가 졸고 있는 윈 캔디는 현실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훈련을 시작하려는 젊은 장교 스피더에게 예의범절을 훈계하다가 망신을 당한다.

이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화사에서 손꼽힐 우아하고 아름다운 플래시백 도입부를 보여준다. 스피더에게 망신을 당하는 늙은 윈 캔디를 뒤로 한 채 카메라는 쭉 앞으로 트랙 인 하다가 냉탕에서 수영하다가 맵시있게 나온 젊은 윈 캔디를 보여준다. 볼품없고 추레한 육신이 카메라의 전진으로 이뤄지는 영화의 마술을 통해 젊은 육신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영화적으로 젊어졌다가 늙어가는 과정은 볼품없어지는 윈 캔디의 여정과 발맞춤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새로 태어난 젊은 윈 캔디가 도입부의 윈 캔디가 되기까지 단 한번도 현재으로 돌아가지 않고, 플래시백의 이야기를 따라가길 고집한다. 따라서 우리는 늙은 윈 캔디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가 '늙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초적인 정보만 쥔 상태에서 윈 캔디의 캐릭터를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꼰대 캐리커처를 확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늙고 별볼일 없는 꼰대라는 첫인상과 달리 도입부 이후 젊은 윈 캔디는 그야말로 캡틴 잉글랜드나 다름없다. 어쩜 저렇게 티끌없이 해맑고 순수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젊은 윈 캔디는 기사도와 이상을 숭상하는 혈기방장한 군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화의 초반부는 수정주의적 관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구식 모험담이다. 인물들의 가치관은 명확하고, 실제 현실의 논리는 흑백에 따라 단순하게 재단된다.

스타일 면에서도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도입부의 비교적 절제된 톤을 벗어던진 극도로 인공적인 세트와 미술로 뛰어든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시각적 성찬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양복들,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인물들, 숨막힐 정도로 프레임을 수놓는 소도구들과 세트... 심지어 영화가 점점 냉정해질때에도 카메라는 영국 전원의 아름다움과 미로 같은 대저택의 웅장함을 빼어나게 뽑아낸다. 초기 컬러 영화 특유의 독특한 원색 역시 이런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관객들에게도 이런 묘사는 '비현실적'이었을것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묘사하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은 현실의 구질구질함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는 인형놀이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공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윈 캔디가 대영제국을 모욕한 독일 신문기사를 읽고 결투를 벌이기 위해 독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두 인물을 보여준다. 테오 크레치마르 슐도프와 이디스 헌터는 영화 내 윈 캔디의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다. 대결 상대로 나온 슐도프는 영국과 반대되는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사상 영국의 라이벌로 그려지는 대상은 프랑스일텐데, 왜 이 영화는 프랑스인이 아닌 독일인을 영국인의 라이벌로 내세웠을까? 답은 영화 외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는 막바지긴 해도,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시절이었다. 이 영화는 전시 선전 영화로 기획되었다. 슐도프는 그 점에서 전시 유럽 대륙을 체화한 캐릭터다.

하지만 전시 선전 영화의 관점에서 봐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는 좀 이상하다. 파웰과의 다른 전시 선전 영화인 [침입자들]이나 [콘트라밴드]와 달리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의 슐도프는 응징이나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럴수도 없는게, 윈 캔디와 슐도프가 처음 만난 시기는 양국 관계가 험악하지 않았던 1차 세계 대전 이전 얘기다. 아직 전쟁이 덜 크고 끔찍했던 시절, 조금이나마 19세기 신사도 문화가 남아있던 시절. 이쯤되면 알 수 있겠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국과 유럽이라는 테마를 좀 더 큰 캔버스로 옮겨서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잡해져만 가는 영국과 유럽의 관계를 윈 캔디가 물려받은 미로 같은 저택처럼 확장해간다.

우아한 신사의 결투로 포장하긴 했지만 윈 캔디와 슐도프의 관계는 불알친구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제의 격한 결투는 멋진 상처를 남겨주고 신문에서의 국가 간 설전은 우정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이디스 역시 그런 징검다리 중 하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삼각관계로 이어질수 있는 관계를 신사적인 양보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윈 캔디는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접어버리고, 슐도프와 헌터의 행복을 빌어주며 떠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초반부의 모든 사건들을 명쾌하고 긍정적인 논리로 정리하면서, 영화의 순진함과 구식 모험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공적인 세트를 강조한다. 

역설적으로 도입부에 제시된 순진한 아름다움은 영화가 이어질수록 조금씩 빛을 바래간다. 이 영화가 대영제국주의의 로맨틱한 회상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의혹을 대부분 지울수 있다면, 윈 캔디와 슐도프가 겪는 인생여정을 통해 초반부를 재구성할 여지와 동시에 안쓰러움을 전하기 때문이다. 괜한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상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의 행복을 위해 쉽게 이디스를 포기했던 윈 캔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댓가를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기사들의 소꿉장난과 같았던 군인을 현실의 위치에 되돌려놓고, 새로이 등장한 신병기들은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 신대륙 미국 장교들은 무례하기 그지없고 언제라도 쉽게 화해할수만 있었던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깊은 골이 패지기 시작한다. 현실은 처음부터 조금씩 복잡했지만 윈 캔디는 파악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복잡해진다.

윈 캔디가 더욱더 비극적인 어릿광대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실과 자식 세대의 과오를 지켜보며 성장하는 슐도프랑 달리 그 현실을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슐도프가 반가워하는 윈 캔디를 외면하는 반응 샷은 그 점에서 가슴은 찢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대영제국의 환상을 반영한 초반부가 순진맹충하다는걸 분명하게 인식하지만, 그 순진맹충함 속에서 쌓인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슐도프의 처량한 모습은 결국 거대한 역사에 속해있지만 그 엄혹함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개인의 슬픔을 보여준다. 포로 수용소에서 풀러나 낙관론에 젖어있는 윈 캔디와 친구들 앞에서 보이는 슐도프의 무표정한 눈빛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의 현실 인식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독일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제공한다.

이런 변화는 데보라 카가 멋지게 연기해낸 세 사람의 '그녀'하고도 관련이 있다. 두 남자 주인공과 달리, 데보라 카의 '그녀'는 환상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개성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다. 윈 캔디의 '그녀'들은 매번 현실에 발맞춰 나타나지만, 윈 캔디에게 '그녀'들은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윈 캔디는 이디스를 사랑하지만, 젊은날 우정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고 이디스의 환영 바바라를 찾아내 사랑했지만 다시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럼에도 윈 캔디는 이 세상에 없는 이디스 근처를 맴돈다. 정작 두 이디스의 환영들은 분명한 직업과 자기 삶을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특히 조니는 윈 캔디를 현실로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해낸다.) 윈 캔디는 환영에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바쳐버렸다.

친구를 외면했던 슐도프가 영국으로 넘어와 경찰들 앞에서 덤덤하게 인생역전을 설명하는 롱테이크 샷은 그 점에서 슬프다. 슐도프는 어려운 독일의 상황에서 자신이 믿었던 가치가 환상이라는걸 깨달았고, 현실에 맞춰 발빠르게 타락해버린 아들들에게서 떠나야만 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화려함을 벗겨낸 경찰서에다 상처입은 유럽의 영혼을 앉혀놓고 그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탄식한다. 우리 유럽에겐 (비록 환상이었더라도) 고결한 나날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고결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런 쓸쓸한 인식에 기반한 탄식은 파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프레스버거의 입김이 강하기도 하다. 프레스버거는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윈스턴 처칠이 바랄법한 전시 선전용 메시지로는 부적합해져버린다. 이 영화가 독려하는 나치에 대한 항전 의지는 선악 논리보다는 인간의 삶 그 자체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점에서 전쟁 이후의 복잡해질 도덕과 미덕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외부에서 나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된 슐도프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명료한 가치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다. 슐도프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순 없어도, 남아있는 삶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있다고 믿는다. 그걸 말하려고 독일을 떠나 윈 캔디 앞에 나타난 것이다.

군대에서 밀려난 윈 캔디는 처음엔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계속 현역으로 있을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조니와 슐도프의 독려로 순순히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긴 하지만, 그 역시 완고한 윈 캔디의 고집에 일련의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윈 캔디를 동정하거나, 적어도 이해할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군인인 스피더는 그 점에서 윈 캔디의 거울상 같은 캐릭터다. 고집 세고 어른 말은 잘 안 들으려는 모습은 초반부 윈 캔디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 모습에서 윈 캔디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이 때 윈 캔디의 시점 샷으로 등장하는 물 위에 뜬 낙엽은, 가히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을 연상케하는 심원한 통찰과 서정미를 지니고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를 설명하는 또다른 요소인 영국 전원에 대한 시적 예찬이 (윈 캔디와 바바라의 별장과 슐도프의 포로 수용소 시퀀스에서도 간간히 드러난다), 응축된 쇼트라고 할 수 있다. 저물어가는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지긴 했어도,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한때 윈 캔디와 바바라가 살았던 집이 부셔졌더라도, 우리는 살아갈거라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말하며 영화를 끝낸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불멸의 영화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면,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들이 어떻게 꼰대가 되었는가를 보여준 뒤 그것이 인간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기 때문이다. 실로 영국 영화가 자랑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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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ch Boys - I Get Around

비치 보이즈: 나의 계절이 돌아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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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L'enfer / The Hell] (1994)

2017/05/09 - [Deeper Into Movie/리뷰] - 도살자 [Le Boucher / The Butcher] (1970)

클로드 샤브롤의 [지옥]은 프랑스 시골 마을의 전경을 트래킹하면서 시작한다. 그 다음 샤브롤은 결혼식장으로 옮겨가 인물들을 소개한다. 아마 샤브롤 매니아들은 이 정경에 움찔할지도 모르겠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도입부는 샤브롤의 대표작인 [도살자]를 닮았다. 샤브롤은 또다시 피와 비극으로 얼룩진 로맨스를 다루고 싶은 것일까?

글쎄, 결론만 말하자면 절반만 맞는 사실이다. [지옥]의 러브 스토리는 비극으로 얼룩진 건 맞다. 하지만 빛과 어둠의 연인들이 애절하게 이별하는 [도살자]와 달리 [지옥]의 커플을 바라보는 샤브롤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지경이다. 어쩌면 이 냉혹함은 존경하는 선배에게도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옥]은 소름끼치는 [디아볼릭]을 만들어낸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미완성 프로젝트를 리메이크한 영화기 때문이다. [디아볼릭]의 냉혈함과 샤브롤의 어두컴컴함이 만나다니 처음부터 행복한 결말 따윈 없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도입부의 결혼식을 장식했던 넬리와 폴이라는 커플이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호텔을 운영하며 사는 넬리와 폴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할 커플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날 넬리가 결혼 전 연애 경험을 폴에게 털어놓으면서 이 둘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폴은 넬리가 자신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단정하고, 넬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지옥]에서 흥미로운 점은, 샤브롤 영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루이스 부뉴엘의 영향을 받은,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적인 연출을 비교적 알기 쉽게 (?) 찾아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미 샤브롤은 1970년대에 [파멸]이라는 영화에서 거의 캠피할 지경까지 가는 무의미하고 초현실적인 쇼트와 폭력적인 인물 관계를 결합시키는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샤브롤은 엘렌 주변의 인물들의 캐리커처성을 부풀림과 동시에 엘렌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플롯의 정합성을 가볍게 흘러보내면서 야비하고 불쾌한 유머로 부르주아들을 공격해댔다.

[파멸]은 그 실험이 지나친 나머지 병맛 부조리극을 연상케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가 되었지만, [지옥]은 사정이 다르다. 모든 인물들이 얄팍했던 [파멸]과 달리, [지옥]은 그런 얄팍함이 덜하다. 우선 샤브롤은 [지옥]의 넬리에겐 어느 정도 감정 이입을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때도 폴의 의처증은 도를 지나쳤고 무시무시하다. 작중 넬리가 겪는 폭력은 일상적인 부부싸움이라 보기에도 어렵다. 심지어 폴과 넬리 이외의 등장인물들은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폴의 비정상성과 대조된다. [지옥]은 데이트 폭력 보고서라 할만큼, 부부 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폭력이 어떻게 가속화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샤브롤이 야비한 조소를 보내는 대상은 남편인 폴이다. 샤브롤이 폴을 조롱할때 [지옥]은 히치콕의 [이창]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에서 많은 걸 빌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지옥]은 집착의 시선이 어떻게 영화 전체의 시공간을 잡아먹게 되는지 약간의 초현실주의를 동원해 보여주는 영화다. 도입부 폴의 일상에서 샤브롤은 힌트를 흘러놓는다. 폴이 친구랑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서 얘기하는 시퀀스가 그렇다. 평범한 대화 시퀀스처럼 보이지만, 폴의 샷과 친구의 샷은 어딘가 시선이 맞지 않는다. 샷을 떼어넣고만 본다면 폴과 친구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된 몽타주의 의도는 명백하다: 폴은 처음부터 자신의 시선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도살자]가 그랬듯이, 샤브롤은 일상을 보여줄때도 어딘가 초현실적이고 불안한 샷으로 몽타주를 교란해 은밀한 긴장을 조성한다.

이처럼 [지옥]은 슬금슬금 의심과 집착을 풀어놓으면서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흐트러트리기 시작한다. 넬리는 종종 폴의 시각에서 수상쩍은 행동을 하지만 그 수상쩍은 행동의 진상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넬리가 자동차 수리공 마르티노랑 배를 타고 놀러간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놀러간건지 아니면 은밀하게 섹스를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알수 없음이 폴의 의심과 분노를 낳는다. [지옥]의 지옥은 진상을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가 점진적으로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어둠 속에서 호텔 손님이 찍은 필름을 즐겁게 보다가, 넬리와 마르티노를 떠올리고 폴이 발광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전환점이라 할 만하다. 남들의 행복한 홈 비디오 앞에서 폴이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호하지만 집요한 간통의 이미지다. 폴은 그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미쳐버린다. 이 잔인한 아이러니가 지나간 후, 폴은 영화 속 현실을 제대로 지각할 자격을 잃어버린다. 간신히 상황이 진정된 순간에도 폴은 넬리를 계속 의심하고, 특정한 주관적 이미지에 집착해 폭력을 휘두른다. 샤브롤은 그것이 부르주아가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신경증이며, 끔찍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부부의 호텔이 어둠으로 가득한 감옥으로 돌변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샤브롤은 전원의 빛으로 가득했던 영화 속 세계를 최종적으로 표현주의 특유의 강렬한 어둠에 가둬버림으로써 지옥을 완성한다.

무시무시한 감금과 폭력의 반복의 끝에 도달한 결말은 도입부의 반복이다. 샤브롤은 아까까지 이뤄졌던 아비규환과 도래할 파국 앞에서, 갑자기 모든 것을 리셋해버린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해하는 폴을 냅둔뒤 도입부의 평온한 전원을 트래킹하는 샷으로 돌아간다. 이 때 샤브롤이 마지막으로 올리는 자막은 다음과 같다. "끝도 없이." 거기서 [지옥]은 끝난다.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에서 그랬듯이 샤브롤은 파국 직전의 진공 상태에서 영화를 끝내고, 평온한 도입부로 돌아가 이 지옥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선언해버린다. 참으로 악랄하기 그지 없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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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스위치 생김

사실 스위치 생길거라고 생각도 안 했는데 형이 선물로 사왔더라고요. (뻘이지만 저희 형도 스위치 있습니다.) 여튼 괜시리 미안해지네요. 부담주는 것 같아서...

여튼 잠깐 DS 있었던거 제외하면 온전하게 제 첫 휴대용 게임기입니다.... 일단 [마인크래프트]를 깔긴 했는데 딱히 할건 같진 않고, 곧 발매될 [암즈]나 같이 하자고 한 상태입니다. [마리오 카트 8 딜럭스]도 할것 같긴 한데....

...생각해보니 [스플래툰 2] 곧 나오잖아? 이거 같이 해야지 잇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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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野火 / Fires on the Plain] (2014)

시작은 따귀다. 첫 샷에서 츠카모토 신야는 자신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구타한다. 이 폭력이 담긴 샷들은 거칠고 불안정하다.  츠카모토는 이 도입부를 통해 자신의 첫 전쟁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몸에다 새겨넣으려고 애쓴다. 그의 영화가 과잉된 육체와 속도의 에너지를 만화적 과장을 무릎쓰더라도 프레임에 새겨넣으려는 연출로 유명해졌다는걸 생각해보자. 츠카모토에게 전장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장소다. 그 점에서 [노비]의 따귀는 어떤 약함도 허용되지 않는 과잉된 현장을 육체에 체득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하지만 [노비]는 츠카모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노비]의 원작은 오오카와 쇼헤이의 체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원작은 이미 이치가와 곤이 1950년대에 영화화한 적이 있다. 이치카와 곤의 [들불]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는 감상하지 않은 지금 이 순간 적는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가 고전기 스튜디오 시절 감독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츠카모토가 만들었던 것보다는 훨씬 정제된 영화였을 것이다. (실제로 고어 묘사가 삭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체 츠카모토는 원작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만든 것일까?

[노비]가 내세우는 주인공 타무라 일등병은 낙오자다. 폐병에 걸렸다고 항의를 해도, 전쟁을 만들어낸 불합리한 시스템은 그의 병을 모른척 하고 내쫓는다. 그는 계속 전장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군상을 만난다. [노비]의 서사 구조는 한 점이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타무라는 전장에서 빠져나가 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그 이동마저도 쉽지 않다. 퇴각할 수 있다는 정보는 점점 신빙성을 잃어가고 점과 점 사이를 지나가면서 타무라는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다. 극단적인 수직 권력 관계, 폭력, 무의미한 죽음, 식인....

[노비]가 전장을 다루는 방식은 추상화다. 일부는 저예산 독립 제작을 고수하는 츠카모토 특유의 제작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 방식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의도적으로 배경을 추상화시키고 있다. [노비]에 등장하는 동남아의 정글은 문명은 커녕 전장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부조리극처럼 추상화된 곳이다. 샷과 샷 간의 시공간은 명확한 구분이 없이 흘러가며, 인물들의 행동은 의미를 잃고 동물처럼 퇴화해 있다.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원색의 강렬한 자연, 제목의 들불, 병약한 타무라가 정신을 잃고 암전되는 장면, 디졸브와 얼굴 클로즈업 샷을 쪼개는 기법을 오가며 지옥 속 인간의 심리와 육체를 휘갈겨 그려낸다.

하지만 츠카모토는 추상화된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안다. 타무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현지인들을 조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영화의 차가운 응시를 격렬하게 보여준다. 이 시퀀스는 구조상 상당히 초반에 등장하는데, 타무라의 불안한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훔쳐보는 현지인들은 전쟁의 광기가 상관없이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숨어있던 타무라가 등장하는 순간, 이름없는 현지인 커플의 행복은 산산조각 난다. 서로에 대한 의심과 한계에 도달한 이성은 이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간다.

이 시퀀스 말미에 등장하는 현지인 여성의 광기 넘치는 비명은 그 점에서 무시무시하다. 츠카모토는 타무라가 현지인들에겐 무시무시한 가해자에 불과하며, 그 증거로 피해자의 악에 찬 절규를 타무라와 관객 앞에다 가져다놓는다. 이 시퀀스가 그럼에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면 타무라 역시 제국주의의 피해자라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무라는 현지인 여성도 쏴 죽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짓지만, 동시에 피해자 타무라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교회는 결국 구원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고어 묘사가 있다. 전장에서 갈려나가는 병사들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고어 호러 영화와 닮아있으며, 그것들을 표현하는 샷들은 샘 페킨파처럼 파편화되어 흩날린다. 츠카모토 신야의 B급 정신이 전쟁 영화에 이식된 것이다. 얼핏보면 [노비]의 어법은 위험해보인다. 전쟁 영화에서 고어 영화의 피범벅을 빌러, 끔찍함을 영화적 즐길거리로 만드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비]는 전쟁을 쉽사리 스펙터클화하지 않는다. 비슷한 어법을 쓰지만 살짝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듯한 샘 페킨파와 달리, [노비]의 슬로모션과 쪼개진 샷들은 넘쳐나는 고어의 과잉을 차갑게 응시한다. [노비]의 고어 묘사가 무서운 이유는 결국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육은 그 점에서 [노비]의 고어 묘사의 집약판이라 할 수 있다. 츠카모토가 [노비]를 현 시점에서 리메이크한 이유도, 1950년대 당시엔 불가능했던 고어 묘사와 인육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건 원작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노비]에서 인육이 원숭이 고기로 위장되는건 상당히 흥미롭다. 인육이 상징하는 극단적인 생존 본능이, 원숭이의 고기로 포장되면서 잠시나마 본능과 도덕이 양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육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 양립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까발려진다. 줄곳 생존만을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이동하던 타무라가 분노하는 순간 역시 이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 죽어가던 타무라의 양심은 다시 깨어난다. 타무라는 최후의 순간, 인육을 더 이상 먹는걸 거부하면서 무의미한 존재가 되길 거부한다.

그렇게 거부했건만 타무라는 스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포로가 되서야 살아나갈수 있었다. 여기서 원작과 츠카모토판 영화와 차이가 발생한다. 츠카모토는 원작과 달리 타무라 앞에서 나가마츠가 자살하는 것에서 본편을 마무리 지은 뒤, 막간 자막에 게릴라에게 습격 당했다는 디테일을 추가하면서 오오카와가 품고 있던 회의적 시선을 강화시킨다. 당사자인 오오카와가 트라우마로 묘사하지 못했던 순간을 전후 태생인 츠카모토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재현할 수 있기에 가능했던 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노비]는 '들불'을 일본어로 음독한 제목이다. 오오카와 쇼헤이의 원작이 그랬듯이 [노비]에서도 들불은 생존과 죽음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노비]의 마지막 쇼트는 오오카와가 그려냈던 '들불'을 츠카모토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일본으로 돌아온 타무라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경험을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고, 트라우마로 인한 거식증은 그를 괴롭힌다. 잠시 쉬러 나온 타무라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영화 내내 등장했던 불의 이미지가 유리창에 비춰지는 환영을 본다. 이때 타무라는 마치 불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츠카모토는 일본조차도 들불로 대표되는 군국주의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불안에 갇혀있다고 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노비]가 마지막에 보여준 불의 감옥은 무시무시하고 섬뜩하다.

*원작에 대한 정보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74669&cid=41773&categoryId=50387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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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잉여 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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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op Rock - Daylight


Life’s not a bitch life is a beautiful woman. 

Your only call her a bitch because she won’t let you get that pussy.

별개로 이 앨범 꽤 괜찮습니다. 풍성한 악기라던가 전원적 비트에 사색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독특한 힙합 앨범 찾으신다면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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