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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17/09 (9)
Blackalicious - Make You Feel That Way

블랙칼리시우스는 1990년대 말 DJ 섀도우의 레이블로 유명한 모웩스로 데뷔한 힙합 듀오입니다. DJ 섀도우 하면 눈치챘겟지만, 이 분들도 2000년대 초에 등장했던 얼터너티브 힙합 붐에 연계된 분들입니다. (사실 연배로 보면 꽤 짬밥이 있는...) 가사는 사색적이며 서정적이며, 소울 뮤직에 얹어진 재지한 샘플링과 유기적으로 배치된 비트들은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 곡은 좀 대중적으로 먹히게 만든 곡인데, [Blazing Arrows]에 실린 다른 곡들은 좀 더 비슷한 시기의 더 룻츠나 에리카 바두, 제이 딜라, 커먼 같은 소울쿼라이언스가 추구했던 네오 소울의 실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소울쿼라이언스 멤버들 일부가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고 얼터너티브 힙합의 거두인 주라식 5가 참여한 곡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들의 인지도는 엄청 높진 않습니다만... (이 곡은 그래도 좀 인기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2000년대 초 미국 대안 힙합의 숨겨진 보석 같은 앨범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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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달려가는 차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옷차림과 멋진 저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제목이 지칭하는 부르주아라는걸 알게 된다. 부르주아들은 저택의 주인 부부 앨리스와 앙리 세네샬이랑 같이 밥을 먹으러 왔다. 하지만 앙리는 일하느라 바쁘고 결국 앨리스가 그들과 함께 만찬을 하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 뒤부터는 조금 이상해진다. 앨리스와 부르주아들은 고오급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식당의 주인이 죽는 바람에 밥을 먹지 못한다. 부뉴엘은 시침 뚝 떼고 평이한 어법으로 부르주아의 일상을 그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비일상적인 사건을 등장시키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뒤집는다.

첫번째 좌절 시퀀스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식당을 나오는 이유가 예의와 체면이라는 이유가 강하게 대두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짐짓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약속이 파토난 시퀀스 다음에 라파엘이 대사로 있는 미란다 공화국 대사관에서 앙리와 프랑소와, 라파엘이 모인다.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가던 도중 라파엘은 개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반정부주의자 여성을 발견한다. 라파엘의 선택은? 옆에 있던 저격총을 들어 인형을 쓰러트린다. 이 황당무계한 라파엘의 행동은, 그 자체로 훌륭한 블랙 유머이면서도 부르주아의 가치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예의와 체면은 상대와 마주하지 않으면 쉽게 벗겨지는 가면이다.

사실상 [절멸의 천사]의 리메이크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하지만 구성 면에서는 훨씬 대담한 영화다. [절멸의 천사]가 집 밖을 나가려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고 난파된 상황을 서서히 비틀어갔다면,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만찬을 벌인다는 행위를 중심에 두고 사방팔방 에피소드가 뻗어나가는 영화로 만든다. 몇몇 장면은 순전히 만찬을 기다리다가 끼어든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 멕시코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면서 부뉴엘의 영화는 서사 형식이 대담해지는 구석이 있는데 (로드 무비 구성만 세워둔 뒤 온갖 상징/풍자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은하수]가 대표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그 대담해진 서사 구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파악하기 편하게 구성된 편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시도와 좌절이라는 두 축을 오가는 시지프스와 같은 영화다. 그들에게 만찬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는 행위이며, 그 항유는 식탁 뒤쪽에서 노동자들을 부려먹어야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식탁과 부엌은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저택의 식탁과 부엌을 연상케 한다. 등장 인물들은 그런 계급적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품위없다고 비웃는다. 코냑 마시는 법을 모르는 운전 기사를 데려다 놓고 마시게 한 뒤, 저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대목은 부르주아의 교양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런 예의범절과 교양을 내세우면서도 성욕과 식욕에 주체를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원초적인 욕망들은 세네샬 부부 머리에 달려있는 풀잎처럼 집요하고 너저분하게 매달려 그들을 까발리고 모욕한다. 이 위선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조롱이 이중성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부뉴엘과 카리에 칼끝은 부르주아에 머물지 않는다. 미셸 피콜리가 연기하는 주교 역은 부뉴엘의 가톨릭을 향한 조롱을 압축한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 결말 이후 이 캐릭터가 아무 언급없이 사라지는 부분은 한이 서린 악의가 느껴진다. 부뉴엘에게 종교란 세속적인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소멸해버리는 하찮은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미란다 공화국에 이르면 할 말은 더 없을 것이다. 부뉴엘과 카리에의 조롱은 딱히 숨기는 부분 없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부뉴엘 영화가 된 것도, 그 대담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에 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부뉴엘과 카리에의 징벌이 떨어진다. 부르주아들은 영화 내내 계속 만찬을 방해받은 뒤, 좌절한다. 그리고 이 뒤엔 부뉴엘과 카리에가 있다. 특히 부뉴엘이 만찬을 방해하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어이없는 자유연상으로 이뤄진다.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하기도 하며, 젊은 장교의 넊두리를 듣다가 식당의 음식이 모조리 사라졌다는걸 알아차리기도 하며, 갱단이 총을 쏴 죽기도 한다. 부뉴엘이 꾸려가는 자유연상은 파시스트의 폭력과 종교의 엄숙주의을 풍자하는 것이기도 하며, 유령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별다른 개연성 없이 서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유연상이 계속 이어질수록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유령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은근슬쩍 튀어나온다. 부뉴엘과 카리에는 서사상에서 가능할것 같지 않은 상황을 기어이 이끌어내 진행시키면서 영화 자체의 현실성을 파괴한다. 델 토로를 비롯한 라틴 환상 영화들의 대가가 부뉴엘의 어떤 지점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부뉴엘은 이런 자유연상을 도구 삼아 환몽 구조를 통해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들은 이 환몽을 통해, 욕망 때문에 도래할 파국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피는 도피일뿐. 부르주아는 도피한 곳에서도 끊임없이 욕망과 파국을 만나야 한다. 개연성 없는 자유 연상과 환몽 구조 속에서 부르주아들의 캐릭터들은 얄팍해져 가고 자신의 죽음 역시 한낱 개꿈으로 취급된다. 심지어 그 개꿈엔 전혀 관련없는 경찰들도 포함된다. 부르주아들이 들어간 장군의 저택이 아무런 복선없이 연극 무대로 돌변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꿈과 풍자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준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저택은 언제든지 갈아치울수 있는 무대 장치에 불과하며, 부르주아와 만찬은 연기의 재료로 격하된다.

이 영화의 결론은 죽음이 다시 꿈으로 무화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부뉴엘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경멸스럽게 여겼던 캐릭터는 라파엘인것 같다. 착취가 은밀하고 비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부르주아랑 달리 그는 정말로 국민들을 쥐어짜고 경멸하는 파시스트 권력자다. 심지어 라파엘은 자신을 암살하러 온 반정부주의자 여성에게 성희롱적 모욕과 동시에 비밀 경찰을 시켜 잡아가게 만든다. 그 점에서 (꿈 속 식탁 아래에서도, 꿈 밖에서도)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든 게걸스럽게 집어먹으려는 라파엘의 샷은 부뉴엘의 블랙 코미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부뉴엘은 파시스트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음에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찌질스럽게 표출해대는 파시스트를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다시, 시지포스의 반복이다. 부뉴엘이 선택한 결말은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했던 부르주아들의 행진 샷이다. 처음엔 만찬을 즐기러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샷은, 온갖 환몽 구조를 거치고 나서 결말에 등장했을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대체 저 길은 만찬이 있을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이어지는게 맞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건가? 확실한건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은 다시 시작될 만찬을 고대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부뉴엘은 끊임없이 부르주아의 만찬을 방해할것이다. 어둠 속 길이 마침내 환하게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걷는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벗어날수 없는 림보다. 정말이지 악랄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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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8일 휴가 이예이 이예이... 근데 관리하고 있는 자판기에 돈이 잘 안나오는데다 고장도 잘 나서 슬픔...

그나저나 세월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아니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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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But the Girl - Rollercoaster

아무래도 이 곡이 실린 앨범 [Amplified Heart]이 이들의 분기점이긴 합니다. 이 이후로 에브리씽 벗 더 걸은 매시브 어택이나 토드 테리의 손을 빌어 좀 더 당대의 일렉트로닉/댄스 뮤직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니깐요. 'Missing' 리믹스의 히트가 크긴 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이후로도 완벽히 과거랑 결별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EBTG 특유의 소피스틱 팝은 어느정도 전자음 친화적이기도 했고 일렉트로닉 노선을 도입한 앨범들 역시 여전히 과거의 라운지 뮤직이나 포크 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 앨범 중 딥 하우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가장 춤추기 좋은 마지막 앨범 [Temperamental]에서도요.

그래도 한 시기의 정리라는 점은 맞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이들이 해왔던 사색적인 포크 팝, 보사노바를 비롯한 라운지 뮤직의 풍윤한 질감이 살아있으면서도, 새로운 일렉트로닉 뮤직에 대한 관심도 언뜻 보이니깐요. 대니 톰슨이나 리처드 톰슨 같은 페어포트 컨벤션 멤버들의 세션 참여도 근사하고, 트레이시 손의 보컬과 음악의 질감이 최적의 싱크로를 이루고 있는 가을에 어울리는 명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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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

꿈결같다.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현란한 초원의 초록색과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 푸른 하늘, 돌담... 어떤 평론가는 굶주리고 추운 여행 끝에 도달한 낙원이라고 말했는데, 테크니컬러에 담긴 아일랜드 이니스프리를 보노라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여기엔 어떤 한치의 황량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 포드는 그 황홀한 전원에 도착한 사나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그는 숀 손튼이며 동시에 서부 사나이로 유명한 존 웨인이다. 서부극의 거목인 두 존은 이렇게 아일랜드로 왔다. 포드와 웨인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는 뿌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맞이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덕목으로 생각할법한 무덤덤한 익명성 따윈 없는 사람들이다. 활짝 웃으며 새로 도착한 손님에게 떠들썩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어찌보면 주책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박력에 숀은 살짝 정신이 혼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숀은 그게 마냥 싫지 않다. 이 도입부는 [말 없는 사나이]의 중요한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 없는 사나이]를 이끌고 가는건, 작지만 분명한 사람들의 흐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숀을 관광객으로 생각하지만, 숀은 이 이니스프리에 살려고 도착했다는건 명박하다. 숀은 역을 떠나 앞으로 살 집으로 간다. 이때 [말 없는 사나이]는 매우 아름다운 첫 만남 시퀀스를 준비한다. 양 떼를 끌고 가다가 시선을 돌리는 마치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는 평이하면서도 독특한 흐름을 구체화해내고 있다. 숀이 메리를 바라보자 샐쭉한 인상의 메리가 고개를 휙 돌린다. 둘은 이내 제 갈길을 가지만 숀의 샷과 메리의 샷이 만들어내는 몽타주는 신비로우면서도 유쾌한 활기를 띈다. 

숀은 수다스러운 아일랜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메리와 그 오빠인 레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숀 가문의 옛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레드는 숀이 들어와 사는 상황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사사건건 숀에게 시비를 걸며, 아일랜드식으로 일대 일 격투를 벌이자고 한다. 한편 메리는 결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져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긴다. 이를 보듯이 알 수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일랜드의 느긋한 마음씨를 대변한다면, 메리와 레드는 미국인인 숀이 알아야 하는 아일랜드의 풍습이다. 메리와 숀의 결합은 이 아일랜드의 풍습을 거쳐야 이뤄질 수 있다.

[말 없는 사나이]는 큰 서사 없이 일련의 유쾌한 소동극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숀과 메리의 결합이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포드는 그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다. 포드는 서부극의 전제를 가져와 아일랜드라는 지역에서 익살스럽게 패러디한다. 총잡이의 대결은, 마을 축제와 술이 끼얹어진 주먹다짐으로 넘어가고 근심이 가득찬 마을 사람들은 이제 신이 나서 주먹다짐을 지켜본다. 수줍지만 이뤄질수 없었던 서부 사나이와 마을 처녀의 연정은 휘몰아치는 바람 안에서 격정적인 몸언어로 표출된다. 바람이 불어닥치는 숀의 집에서 메리과 숀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말 없는 사나이]의 격한 바람과도 같은 영화적 매력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플롯이 없는 [말 없는 사나이]를 일관성 있게 묶는 건 군중의 힘이다. 킹 비더의 [군중]이 그랬듯이, [말 없는 사나이]는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의 힘이 매력적인 영화다.  하지만 [군중]에 등장하는 군중이 도시의 익명적인 흐름을 담아냈다면, [말 없는 사나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시골 커뮤니티의 매력이 크다. 이 커뮤니티는 뿌리로 돌아온 미국인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가 낯설어하는 풍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 미국인이 어떻게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건을 만드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본다. 이 미국 영화의 절정을 이끌고 가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쇼트가 장소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뻔뻔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활기다. 이 부분에 이르면 [말 없는 사나이]는 버스터 키튼과 같은 무성 활극 영화와 같은 매력을 태연히 과시한다.

[말 없는 사나이]가 흥미로운 점은, 그런 소탈하면서도 낙천적인 풍습과 이상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히로인인 메리가 그렇다. 얼핏보면 서사의 흐름에 따라 숀이라던가 레드의 가부장적 체제에 순종적으로 편입될 것 같은 메리는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메리는 자신의 재산을 숀의 집으로 가져오는걸 상당히 중요히 여긴다. 그리고 메리의 고집을 숀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격하게 화를 낸다. 메리에게 그 풍습은 자신의 존재 의의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숀은 메리와 이어지기 위해서는 순종시키는게 아니라, 이해와 설득을 거쳐야 한다. 아일랜드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으로써는 추측의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커뮤니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 관심을 가졌던 포드다운 전개라 할 수 있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서 페미니즘적인 묘사를 읽어낸 평론가도 있다는 것도 첨언하고 싶다.)

물론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드는 은근슬쩍 서부극의 어둠을 영화 속에 이끌어온다. 숀이 레드랑 싸우길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할때 포드는 단발적인 플래시백으로, 숀이 왜 아일랜드로 와야만 했는지 설명한다. 미국에 오기 전 권투 선수로 활동하던 숀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룰이 있는 스포츠였지만, 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폭력에 이골이 난 사나이며, 폭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를 느낀다. 숀의 과거는 존 포드의 내심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포드는 숀을 아일랜드로 데려와 백인 사회에서도 천민 취급 받았던 아일랜드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긍정성으로 치유한다. 레드와 싸움을 통해 숀은 자신의 주먹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커뮤니티에 포함될 수 있다는걸 확인한다.

[말 없는 사나이]는 황야 너머로 사라진 서부 사나이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다. 존 포드는 숀을 거기다 내려다 놓고 더 이상 총질은 필요없고 이젠 정말 행복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이니스프리 커뮤니티가 말이 되는가를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냉소를 신경쓰지 않는다. 말이 되던 말던,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고 때론 납득이 잘 안 될지도 몰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선량함을 포드는 믿는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숀과 메리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의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길 기원하게 된다. 그동안 서부극을 통해 울적하게 서부 총잡이의 소멸을 얘기했던 존 포드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는 정말 기적과도 같다. 그 점에서 [말 없는 사나이]는 포드 영화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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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펜슈타인: 뉴 콜로서스 첫 공개 예고편

땜빵~ 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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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 단발머리

사실 조용필을 알게 된건 EZ2DJ에 실려있던 'BoB'이라는 리메이크 곡이었는데요, 그 곡이 유달리 인상이 깊었거든요. 찾아보니 원곡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곡을 불렀던게 조용필이더라... 이렇게 됬습니다.

예전부터 리마스터반을 사야 되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택시 운전사] 도입부에서 나오는걸 듣고 나니 이번엔 꼭 사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결국 장만했습니다. 다시 들어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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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의 유명한 단편 [방파제]의 기본 전제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였다. 마르케는 어린 시절 우연히 잊지 못한 이미지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남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를 거쳐 시간을 횡단하는 행위라 말했다. 그리고 마르케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진 이미지와 기억, 시간을 한데 모아 몽타주로 이뤄진 꿈을 꿨다. 설정이 자세한 영화는 아니였지만, 이 우울한 단편 영화가 지금까지도 SF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들어가는지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서 마르케는 정지한 사진들 속 살아있는 여인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음의 놀라움을 끌어냈다.

마르케의 실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는 [방파제]에서 뻗어나온 묵상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에서 제목 따온 [태양 없이]는 일종의 기행문 영화다. [태양 없이]에서 시간과 이미지의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여기에 있는 개별 공간을 횡단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제 시간과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은 픽션 속 주인공이 아닌 크리스 마르케의 분신인 사진작가 샌도르 크리스나다. 샌도르는 카메라 한 대와 종이와 펜을 챙긴 채 지구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아이슬란드의 아이들 세 명이다. 샌도르는 이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행복의 이미지를 얘기하지만, 이 행복의 이미지가 쉽게 다른 이미지랑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 그 다른 이미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이 정녕 하나로 연결될 수 없는지, 고민한다. 

제목이 뜨고, 그는 아이슬란드를 떠나 홋카이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북쪽 섬에서 돌아오던 샌도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 순간은 전쟁의 순간이다. [밤과 안개]에서 겪었고 [방파제]의 남자가 살아가야만 했던 그 순간. [밤과 안개]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있었던 전쟁을 상상한 뒤, [방파제]에서 마르케는 도래할 전쟁을 상상하는 것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회고했다면, [태양 없이]의 샌도르는 평화의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전쟁를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산발적인 편지를 보낸다.

마르케는 얼핏 보면 연결되지 않을듯 같은 순간들을 연결한다. 샌도르가 발길을 내딯는 곳은 둘로 나눠진 세계다. 한편엔 섹스 박물관과 산리즈카 투쟁이 이어지는 일본과 제국주의와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낸 미국, 프랑스가 있으며, 한편엔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가 있다. 태양이 있는 세계와 태양이 없는 세계. 마르케는 이 둘로 나눠진 세계를 영화의 몽타쥬를 이용해 하나로 통합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태양 없이]는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의 결합이다. 

하지만 훈련된 르포 작가이기도 한 마르케=샌도르가 선택한 스케치 영상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다. 그는 일본 문화에 깊게 매료되어 인류학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산리즈카와 우익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들을 잡아내고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자연 풍경과 가난한 현실을 끌어온다. 편지를 통해 차분히 전해지는 나레이션에서는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지식인의 결기가 돋보인다. 샌도르의 통찰 일부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을 찌르기도 한다. [태양 없이]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광주 시민들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도쿄 좌파 시위대를 잠시 보여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편린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준다. 

이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에서 통일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샌도르가 보낸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샌도르가 읽지 않는다. 샌도르의 묵상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이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즉 [태양 없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뤄진 기행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왜 이런 형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여기서 [태양 없이]가 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보자.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를 찍으면서 동시 더빙이 아닌, 후시 더빙을 사용했다. 이 후시 더빙은 단순히 독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음향에도 적용되어 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일부는 기술적인 문제기도 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마이크가 달린 ENG 카메라는 그리 흔한게 아니였고, 필름 카메라는 녹음 기사를 동반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대표적이다.) 필시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느라 8-16mm 카메라를 사용했어야 할 크리스 마르케에게 기록과 동시 녹음은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하야오 야마네코가 등장한다. 비디오 게임 개발자인 하야오 야마네코는 현실을 바꿀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테이프로 채집한 전쟁과 시위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조작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야오 야마네코는 그것이 TV에 등장하는 이미지보다 더 진실하며, 대상의 특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하야오의 말은 상당히 궤변처럼 들린다. 어떻게 추상화 된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크리스 마르케는 반대로 추상화되지 않은 이미지조차도 언제든지 풍화되어 소멸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는 [밤과 안개]에 관여한 사람이다.) 하야오는 그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려는 시도보다, 본질을 잡는 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야오는 이 이미지들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구역'이라고 부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은 법칙을 따라 길을 찾아가야 했다. 하야오는 컴퓨터로 왜곡된 이미지로 '구역'을 만들어 전쟁과 투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스스로 다시 생각할 영역을 만들고자 한다. 

하야오의 시도는 [태양 없이]의 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수 있는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현실을 단순히 기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낼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 다.  [아름다운 5월]에서 그는 파리라는 한 공간에 집약된 다양한 영역들을 옮겨다니면서 한 시대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장르 픽션을 정지된 사진으로 재구성한 [방파제]를 거쳐 [태양 없이]에 이르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개별적으로 분리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꾸는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악과 나레이션, 현장 녹음한 소음을 후시 더빙한 음향들... 때문에 별다른 플롯이 없어도 집중력이 높은 영화기도 하다. [태양 없이]를 본다는 것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성한 꿈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소 난해할수도 있는 이 한편이 지독히도 감성을 건드린다면 영화가 가지는 시청각적 매력을 마르케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샌도르가 생각하는 [현기증]은 살인 사건 그 이상으로 은밀하게 시간과 공간의 현기증을 설명하는 영화다. 샌도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겹쳐 생각한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죽은 매들린을 다른 인물인 주디를 통해 재현하려는 시도는 샌도르가 필름과 테이프로 기록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재구성해 꿈, 나아가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로 은유된다. 그리고 샌도르와 하야오가 만든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구역'을 만들어낸다. 필름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즉물적인 기록이 가능한 점)을 인지한 뒤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라는 글에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 이후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케의 구성된 꿈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단순히 영상에 멈추지 않는다. 하야오의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크리스 마르케는 컴퓨터 게임 비평가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 도쿄를 들르던 도중 샌도르는 남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팩맨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샌도르는 이 노란색 구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피력한다. 샌도르의 눈에서 바라본 팩맨은 인간의 운명을 픽셀을 통해 은유한 완벽한 예시다. 그리고 그 은유는 당분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마르케는 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세상을 은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미지와 결합될때 강한 힘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딩시 노년을 바라보는 영화 감독이 태동기에 있던 컴퓨터 게임에게서 가능성과 유효한 통찰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마르케는 단순히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태양 없이]를 만든게 아니다. 오히려 샌도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마르케의 속내는 절박하다. 열렬한 좌파였던 마르케는 다양한 공간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무구할 정도로 순수한, 행복의 이미지로 쉽사리 등장하지 못한다. 기니비사우 프라이아 시장에 만난 여자의 표정을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샌도르의 고민은 마르케의 고민이기도 하다. 마르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태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그는 진심으로 땅에 발을 붙이는 사람들을 염원하고 걱정하고 있다.

친구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샌도르는 [태양 없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샌도르 크리슈나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닌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시를 쓰는 법은 영화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하며 글과 편지이기도 하다. 이제 샌도르는 일본에서도, 기니비사우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껏 쌓여왔던 과거를 바라보고 동시에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호주의 에뮤처럼 샌도르가 길어올린 영상과 편지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지의 수신인이 말한다.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이 기대감이야말로 [태양 없이]가 진정 바라는 소통의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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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예고편

현존하는 미국 감독 중에서도 단연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인데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힙니다. 심지어 원작을 읽었는데도 말이죠. 드디어 뉴욕을 떠난 감독이 향한 곳이 머나먼 아마존이라... 차기작은 아예 우주던데 말이죠.

뭐 그래도 감독이니깐 기본 이상은 해줄거라고 믿고 특유의 황갈색 톤의 필름룩은 여전해서 마음에 듭니다. 개봉 시즌이 묘하게 추석 시전과 겹치는 것 같긴 한데 흥행은 기대 안하고 (...) 후딱 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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