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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18/01 (12)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가르시아]는 연못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샷은 위태롭다. 한 소녀가 연못 경계에 있는 나무에 누워 있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서서 저택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소녀는 마치 물에 빠질것처럼 누워있다. 왜 하필 물가에서 영화를 시작할까. 아마도 이 영화 감독이 샘 페킨파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헤모글로빈과 슬로모션에 취한 성질머리 더러운 마초. 그 마초는 물의 죽음과 땅의 생명 그 사이에 잉태를 할 수 있는 여자를 배치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제시한다. 죽음과 삶, 그리고 매장의 경계를 여인이 가로지를 것이다. 그리고 슬로 모션은 죽음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며 기록할 것이다.

곧이어 소녀가 위태롭게 누워있었던 이유가 등장한다.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라." 멕시코 갱 제페의 선언으로 [가르시아]는 비틀리고 우울한 여정을 시작한다. 제페에게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허락없는 임신이다. 제페의 딸 테레사는 한량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와 통정을 했고, 그 결과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폭압적인 가부장은 이걸 용서치 않고 자신의 유사 아들들인 갱들을 이용해 알프레도 가르시아를 처벌하려고 한다. 이 처벌을 대리하는 자인 사펜즐리와 퀼이 여성이 배제된 게이 커플이라는 점은 (암시적이지만 그들은 여자를 싫어하고 파트너의 시체를 향해 눈물짓는 모습을 보인다.), 제페 일당이 극단적인 가부장과 남성성에 취해 있다는걸 보여준다.

사펜즐리와 퀼은 곧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를 찾아낸다. 보통 이런 줄거리의 느와르/범죄 영화라면 베니를 좀 더 장르적으로 세공된 과거와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할 것이다. 하지만 페킨파와 고든 도슨이 쓴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베니는 제페 일당의 위압적인 남성상과는 한발짝 떨어져있다. 한때 미군이었지만, 퇴직해 바 주인으로 살고 있는 베니는 위축되어 있다. 가끔 거칠게 굴지만 차라리 상처받은 채 그늘로 숨어든 짐승에 가깝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거친 과거의 일부였던 가르시아의 행적도 잘 알지 못하고 여성인 엘리타를 경유해서 알게 된다. 베니는 골칫거리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애인인 엘리타와 평온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금전적 이득은 그를 파국의 여정으로 향하게 만든다.

[가르시아]의 구조는 서부극 그것도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같은 1970년대 페킨파가 즐겨 만들었던 폭력적인 서부극과 닮아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관계의 종말]에 가깝다. 피에 절어 살았던 마초는 지쳤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이 옛 친구를 팔아야 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종말이다. 다만 페킨파는 이 여정을 평범한 서부극으로 만들지 않고, '카르텔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현대 서부극의 영역에서 만들고 있다. 페킨파의 현대 영화들에서 이런 노선을 취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는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결과는 기묘하다. 이 영화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 홀려 파멸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애도의 완수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머리는 그 점에서 영화가 추구하는 애도의 완수를 그로테스크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는 잘려진채 자루에 담겨 여러 사람을 오간다. 페킨파는 머리의 행방을 통해 인물 간의 갈등과 액션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정작 가르시아의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고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페킨파의 터치는 좀 심술궃은데 있다. 편안하게 매장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제페의 복수심과 금전적 이득 때문에 가르시아의 머리는 주인의 몸을 떠나 무수한 사람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주인인 알프레도 가르시아는 이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 뿐이다. 효수된 머리와 브로맨스라. 페킨파의 악취미 중에서도 최고 악취미라 할 수 있겠다.

이 어처구니없지만 황망한 애도의 여정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영화의 여정을 더욱 불편하고 우울한 감정에 푹 젖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을 꼽으라면 (페킨파가 선호했던 배우 중 하나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바이커로 등장해 베니를 무력화하고 엘리타를 강간하려는 시퀀스가 있다. 일단 이 시퀀스가 그동안 숨어있었던 베니의 남성성과 폭력성을 끌어낸다는건 명백하다. 페킨파는 이 사건을 지금까지 야성을 잃고 안전하고 무력하게 살아온 베니가 가르시아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그런 악한이 못되잖아요") 결국 베니는 그 응답에 답해 바이커들을 쏴 죽여버린다. 여기까지는 으레 있는 페킨파의 악취미려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뒤 흥미로운 연출이 있다. 불쾌한 강간 미수가 바이커의 죽음으로 끝나고 페킨파가 보여주는 시퀀스는 또다른 무기력과 연약한 고백이다. 사건을 수습하고 호텔 화장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엘리타에게 베니는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 페킨파는 문을 열어놓고 욕실 바닥에 앉아있는 엘리타와 그 앞에 앉은 베니를 보여준다. 이 쇼트의 엘리타의 배치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입부 연못의 경계에 서 있던 테레사랑 닮아있다. 욕실이 물과 떼놓을수 없는 장소라는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여자는 물과 땅 경계선상에서 위태롭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페킨파가 생각하는 순정 마초는 경계선상의 위태로운 여자를 감싸준다, 라는 제스처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제스처는 결말과 연결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르시아]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여자다. 엘리타는 처음부터 죽음을 모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지만, 남자의 회유에 어쩔수 없이 여정을 떠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강간 미수 시퀀스에서 가장 현명하면서도 단호히 대처한 자 역시 여성 엘리타다. 그리고 가르시아의 목을 자를 기회가 왔을때도 엘리타는 전 애인의 안식을 모독하는것에 망설인다. 베니는 윽박지르면서도, 엘리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고 사랑을 되뇌이지만 돌아온 것은 또다른 매장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베니는 먼지투성이가 되어가며 제페의 갱단원들을 쏴죽여 머리를 찾아오며, 사펜즐리와 퀼도 죽인다. 사랑했던 여자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엔 옛 친구의 머리가 담기고, 머리를 건네주겠다는 제페의 부하들도 쏴죽인다. 베니는 제페의 저택에 반드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베니가 제페의 저택에 도착했을때, 제페는 새로 태어난 손자의 세례식을 치루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을 죽어갔지만 제페는 아무렇지 않게 탄생을 성수로 축복한다. 제페에게 베니는 묻는다. 16명의 사람이 죽일만큼 이 머리는 가치가 있었냐고. 하지만 제페는 그 머리를 돼지 먹이로 주라고 말한다. 머리의 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베니는 분노한다. 그 분노는 투박하지만 섬세한 사랑을 짓이기고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에 대한 분노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기묘함은 시종일관 마초적인 태도로 밀고가다가 갑자기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과 연대하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자신이 자초한 무의미한 죽음 끝에 마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남성성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여성을 지키고 진정한 악과 동귀어진한다.

사실 결말에 드러나는 '멋진 척'은 다른 페킨파 영화와 비교해봐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이 결말을 마냥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니의 대사엔 테레사를 위로보다는 가르시아를 향한 브로맨스가 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베니는 연대라고 하기엔 자기완결적인 멋에 지나치게 취해 있다. 이 자기완결적 멋이 제페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폭압적인 가부장에게 박해받는 여자를 돕는 카우보이들이 나오는 전작 [라이드 더 하이 컨트리]랑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가르시아]는 창작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게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이 결말이 후련한 카타르시스와 애잔한 감정을 남기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베니가 자기완결적인 미학에 빠져있더라도 방황하던 가르시아의 머리는 마침내 안식을 찾았고, 살아남은 테레사와 아이는 끔찍한 가부장에게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페킨파는 진정으로 무고했던 테레사와 아이야말로, 이 무의미한 폭력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 본다. 여성을 혐오하고 아이를 혐오한다고 악명높았던 페킨파답지 않다고 할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우울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제의화된다. 페킨파는 어찌보면 카르텔 서부극을 빌어 고전 비극을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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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몬스터 헌터 월드를 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영화 리뷰가 미뤄지고 있네요. 스토리 퀘스트만 끝나면 후딱 돌아오겠습니다. (오래 안 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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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나이가 들수록 시간 가는게 두려워진다. 가끔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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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レファントカシマシ - 今宵の月のように

최근에 이들의 히트작인 [明日に向かって走れ -月夜の歌-]을 중고로 사서 듣고 있는데, 어떤 지점이 일본인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이 앨범이 왜 히트했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굉장히 남성적인 서정성이라고 할까, 미스터 칠드런부터 스피츠, 서니 데이 서비스까지 이어지는 계보의 한 단면을 확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단지 이들은 어떤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는지는, 초기작을 한번 들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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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 / The Silence of the Sea] (1949)

장 피에르 멜빌은 이전까지 없는 길을 만들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멜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고 존 카사베티스가 그랬듯이 개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멜빌은 장편 데뷔작으로 베르코르 (본명 장 브륄레)의 소설 [바다의 침묵]을 점찍었다. 멜빌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도중, 런던 공습 아래에서 마음을 빼앗겼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가 그랬듯이 조합에 소속된 멜빌이 판권과 영화 제작 권리를 얻는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긴 투쟁 끝에 베르코르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영화화하는데 허락했다. 그 조건은 바로 24명의 레지스탕스 멤버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투표를 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말이 결정이었지, 24명 중 1명이라도 반대했다면 감독 멜빌은 다른 데뷔작을 들고와야 할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난 시기인데다 멜빌 역시 레지스탕스 출신이니 이 조건을 거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멜빌의 데뷔작은 어렵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프닝은 그 점에서 갓 장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짜 감독 멜빌의 조심스러움과 끝나버린 한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바다의 침묵] 도입부는 단순히 액자식 구조라 하기 힘들다. 멜빌은 책을 주고받는 과정을 익명화된 얼굴과 은밀한 행동, 장식 없는 하얀 표지의 책이라는 이미지로 일종의 범죄 거래처럼 묘사한 뒤, 책을 펼치면서 관객을 이야기로 인도한다. 이 이상한 오프닝은 어딘가 간절하다. 이후 대두될 범죄 장르적 묘사는 차치하더라도, 이 은밀한 행동과 이미지들은 억압되어 있다. 멜빌은 마치 얼마전까지 있었던 비시 프랑스 시절의 생활 양태가 어땠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사족같이 보일지 몰라도, 멜빌은 [바다의 침묵]을 만들면서 자신이 겪었던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억압은 [바다의 침묵]의 기이한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나치 군대가 주둔하고, 나치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한 노인과 노인의 질녀가 머물고 있는 집에 하숙하게 된다. 프랑스를 좋아하는 베르너는 친절하고 정중하게 노인과 노인의 질녀에게 말을 건다. 그 주제는 베르너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프랑스 문화에 대한 매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베르너는 두 사람이 있는 거실로 찾아와 말을 걸고 베르너의 대화 시도는 독백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침묵은 그 점에서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침묵은 매우 수동적인 저항이다. 침묵은 사람을 죽일수도, 바꿀수도 없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하는 강제된 상황을 거부할수는 있다.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살고 싶으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베르너는 그걸 알고 있다. 그가 계속 말을 걸러 오는 이유도, 그 침묵을 깨고 나치 독일로써 프랑스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도다. 베르코르는 그 긴장 관계를 서술 방식을 통해 구축한다. 원작 소설은 노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노인은 주변을 관찰하거나 최소한의 행동만 할뿐 끝나기 직전까지 베르너한테 말을 걸지 않기에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이내 질녀와 진주인공 베르너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버린다. 베르코르는 침묵을 이용해 시점을 교묘하게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소설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서술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레이션을 이용할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원작의 문장 일부가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시각적인 매체이기에 보이지 않는 나레이션은 보이는 이미지에게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간의 충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멜빌은 끊임없이 시선을 맞추려는 베르너와 노력과 아예 베르너에게 등진 두 사람을 프레임에 배치하면서 침묵의 권력 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대사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클로즈업를 배치하면서 침묵하는 얼굴의 부동성을 강조한다. 무수한 클로즈업은 베르너의 유창한 대사에 대항해 베르너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떤 지점에서 [바다의 침묵]은 정기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날마다 인물들은 위치가 배정받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원작과 영화 모두 권력을 쥐고 있는 베르너를 타자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술을 담당하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사실 '침묵'외는 다른 부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끔 베르너가 등장하지 않을때, 얘기를 나누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무거운 침묵 자체가 캐릭터화된 것처럼 보인다. 자연히 우리는 서술의 대상이 되는 베르너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베르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살짝 도취된듯 하면서 교양과 인류애, 잔혹한 현실 간의 괴리에 좌절감을 느끼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질녀는 베르너의 입체적인 모습에 망국의 치욕과 성적 긴장감을 동시에 느낀다. 

영화로 옮겨지면서 이 경향은 더 심화된다. 전반적으로 멜빌의 카메라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보다는 베르너를 따라다니는데 더 관심이 많아보인다. 영화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베르너가 파리로 가는 시퀀스에 있다. 이 시퀀스 도입부에서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파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는 베르너의 클로즈업과 파리의 화려함이 교차편집된다. 개선문과 역사적인 동상들을 올려다 보면서 기웃기웃거리는 베르너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로 프랑스 문화에 존경을 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베르너는 진심으로 나치 장교로써 권위와 이웃 국가 간의 교류라는 상반된 요소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시퀀스에서 멜빌은 전쟁이 막 끝난 파리에 서서 나치 시점에서 파리는 어떻게 다가왔을지 고민한다.

[바다의 침묵]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베르너가 침묵의 클로즈업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는 순간에 있다. 장교 클럽 시퀀스는 그 점에서 노인의 집 시퀀스를 뒤집어놓으면서 각성을 유도케한다. 베르너는 나치즘으로 찌든 동생과 장교들에게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베르너를 둘러싼 나치 장교들은 베르너를 조롱하며 아리아 우월주의와 파시즘의 파괴 욕구를 외친다. 같은 장소와 같은 샷, 같은 행동과 대사의 반복과 변주에서 벗어났을때 베르너는 자신이 얼마나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이상주의자며 자신을 향한 노인 가족의 '바다의 침묵'이 강제적으로 지워진 굴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멜빌은 실내극을 통풍시키면서 역사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무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인물은 자신들의 역할이 실로 하찮지만 폭력적인 걸 깨닫는다. 멜빌의 침묵의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베르코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하찮지만 폭압적인 족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베르너는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자신에게 주워진 위치를 알아버린 베르너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동부 전선으로 가기로 한다. 안락한 후방에서 허위와 기만에 갇혀 있기 보다는 실제로 행동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동부 전선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들에게 베르너의 선택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베르너는 다른 나치과 달리 순수하지만 열성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믿고 회의하고 말을 걸었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처럼 역사가 만들어버린 무대의 굴레를 부수지 못한다. 선함을 믿을수록 죽음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운명. 

그 어찌할수 없는 엄숙한 비극의 순간에서 베르너는 드디어 침묵의 클로즈업과 대화하게 된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 역시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불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 두마디만큼 처절하게 가슴을 찢는 대사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다소 단조로울수도 있는 젊은 감독의 연출을 불멸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도 침묵의 클로즈업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통해 영화는 역사의 폭력을 이해하고 끊을 단초를 제공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막 끝난 역사의 비극과 얘기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고, 거기서 영원히 남을 자신의 영화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르코르는 그 의도를 이해하고 이 영화를 세상에 공개했다. [바다의 침묵]은 가장 멜빌답거나 가장 완숙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간절한 멜빌의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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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Were Never Really Here 예고편

2012/09/03 - [Deeper Into Movie/리뷰] -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2013/07/16 - [Deeper Into Movie/리뷰] - 모번 켈러의 여행 [Morvern Callar] (2002)

린 램지 신작이 마침내! 내용도 마음에 들고, 예고편도 마음에 듭니다.

근데 한국 개봉은 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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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harcyde - Passin' Me By

파사이드의 [Bizzare Ride II the Pharcyde]는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음반이었습니다만, 리마스터반이 안 나오던 앨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20주년 기념 앨범이 나왔더라->그러나 절판->포기->어 25주년 기념 앨범 나옴? 이 루트가 되서 사버렸습니다.

힙합사에서도 자랑할 명반이라는 얘긴 들었지만, 정말 귀에 쩍쩍 달라붙는 명반이더라고요. 재즈 샘플링을 이용한 laid-back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도 까불까불 잘 논다고 할까... 제이 스위프트를 비롯한 젊은 프로듀서진의 패기라던가 자신감이 확연히 느껴지고, 파사이드 멤버들도 호응해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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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타임 [Good Time] (2017)

(누설이 있습니다.)

[굿타임]의 시작은 뉴욕 상공이다. 사프디 형제는 그 상공에서 한 건물로 쭉 확대해 들어가다가 한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바꿔치기 한다. 이 도입부는 당혹스럽다. 뉴욕이라는 배경이 제시되자마자 마스터 샷 없이 한 인물의 내밀한 표정이 곧바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인물은 정상이 아니다. 닉이라 불리는 인물과 상담사와의 대화는 제대로 된 샷-리버스 샷 구조를 구축하지 못하고 계속 빗나간다. 부조리극 같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폐소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굿타임]을 보는건 그리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굿타임]은 이 장면 이후로도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클로즈 업의 미로로 관객을 인도하는 영화기 떄문이다.

이 불편한 대화 시퀀스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형 코니에게 방해받는다. 상담사에게 욕을 하고 닉을 끌고 나가는 코니. 이쯤되면 코니가 닉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코니는 닉를 데리고 은행으로 털기로 한다. 코니는 지옥같은 뉴욕이 싫고, 버지니아로 대표되는 남부로 동생과 떠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범죄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어설프다. 사프디 형제가 그들의 은행 털이를 묘사하는 부분도 비장르적이다. 대체 어느 강도가 무기 없이 협박문 하나로 은행을 턴단 말인가? 코니는 득의양양해하지만, 곧 그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는게 드러난다. [굿타임]의 도입부는 장르의 실패를 다루는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다.

곧 닉은 잡혀가고 코니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코니의 바뀐 목표는 닉의 보석금 획득이다. 하지만 브로커 (아이러니하게도 사프디 형제처럼 유대인이다.)에게 바칠 지폐는 손상되어 쓸 수 없고, 애인의 어머니 신용카드를 이용해 카드깡할 기회도 사라진다. 코니는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몰래 꺼내기로 하지만, 정작 데려왔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와중에 코니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코니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게 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랬듯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의와 관계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쯤되면 [굿타임]의 부조리가 단순히 장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성체처럼 주인공을 가지고 논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코니는 뭘 해도 사프디 형제와 로널드 브론스틴이 만든 미로를 뛰어넘을 수 없다. 코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뉴욕의 밤을 해메는 것 뿐이다. 하지만 코니는 오디세우스와 달리 영웅 서사가 될 수 없다. 대도시의 익명성과 대중 문화의 아이콘들은 여정을 CCTV 영상 기록처럼 만들어버리고, 코니의 덜떨어짐과 후술할 성격적 결함은 인물의 헤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분명 필름 느와르스러운 구조에도 코니는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조차 되지 못한다. '굿타임'은 '운수 좋은 날'이나 다름없다.

[굿타임]을 구성하는 클로즈업과 부감은 그 점에서 영화 속 미로를 대하는 사프디 형제의 관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 특히 코니는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처럼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혀 얘기를 늘어놓고 이는 끊임없이 다른 이의 클로즈업과 충돌을 일으킨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을때도 사프디 형제는 전경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미장센을 조밀하게 잡는다. 때문에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임에도 길을 못 찾고 해메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탈의 집 시퀀스는 [굿타임]의 동선이 어떤 식으로 혼돈을 주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클로즈업들은 시퀀스 사이에 배치된 롱 샷과 부감 샷 앞에서 그 절박함을 잃어버린다. 반대로 너무 넓어져서 인물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굿타임]은 클로즈업의 절박함과 롱 샷/부감의 하찮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물을 초라하게 만든다.

사프디 형제가 보여주는 미로의 세부 묘사들은 팝 아트에 기반한 표현주의로 세공되어 있다. 마리오 바바나 마이클 만을 컬러리스트로 초빙한듯한 형광빛 색채, 대중문화 아이콘과 르포식 영상 기법, 실험적인 일렉트로닉 뮤지션으로 유명한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가 제공한 1980년대 풍 사운드트랙 속에서 사프디 형제의 카메라는 춤을 추듯이 절박하게 목표를 향하는 인물과 혼돈스러운 공간을 오간다. 전반적으로 샷과 편집의 리듬은 감정과 혼돈에 맡기고 있다. 그 점에서 마약과 섹스, 우연으로 점철된 레이의 혼돈스러운 플래시백은 [굿타임]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당신은 이 영화를 [핫라인 마이애미] 세계에 떨어진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라고 부를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코니가 이 부조리한 미로에서 벗어나 동생을 구하려는 시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맥거핀화된다는 것이다. 초반부 닉이 구치소에서 두들겨맞는 시퀀스는 코니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하지만, 정작 영화는 그 동기에서 코니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중후반부가 되면 닉의 행보와 존재감은 사라지고 코니는 완전히 닉을 잊어버린듯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다.

닉이 코니에게 의지하고 있다는건 명백하다. 하지만 코니가 닉을 생각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그 이상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코니가 레이를 닉으로 착각하고 데려오는 시퀀스다. 아무리 그래도 코니와 닉은 20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을 것이다. 단순히 붕대를 감고 있다고 해서 남을 동생으로 착각한다는건 도무지 정상적인 판단력이라 할 수 없다. [굿타임]의 가장 중요한 의문점은 코니의 '착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코니의 부주의함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어쩌면 코니가 닉을 사랑하는건 마약을 향한 마약 중독자의 심정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코니는 닉이 없으면 우월해질수도, 자신감을 얻을수 없다. '네가 있어서 나는 훌륭하다.'는 반대로 말하자면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코니가 닉을 상담사에게 보내려는 할머니의 팔을 부수고 가출한 것도, 중독자의 독점욕에서 비롯된 저항에 가깝다. 코니는 닉을 마약처럼 사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매우 허약한 존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니의 사랑은 닉을 위기로 밀어넣는다. 닉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으며 그저 엉뚱한 말을 뱉으며 끌려다니는 인물이다. 닉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인물이다. 코니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굿타임]의 초라한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다. 코니는 닉을 어떻게 대할지 정상적인 방식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엇나간다. 이 와중에 마약이 들어간 스프라이트와 닉은 코니에게 그닥 다를 바 없어진다. 혈육 닉이 마약을 팔려는 레이로 바뀌는 과정은 마약 중독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혈육은 마약으로 대체될 수 없다. 코니에게 남은 것은 광폭하지만 왜소한 종말이다.

버지니아로 가자는 코니의 말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코니가 생각하는 뉴욕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상담사와 할머니가 있고, 춥고 외로운 곳이다. 코니는 뉴욕에서 빠져나가야지 형제가 행복해질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그게 다른 남부도 아니고 미국의 시발점 중 하나인 버지니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뉴욕의 군상들은 그 점에서 버지니아와 대비되는 현대 미국의 사회/정치적 텍스트를 함유하고 있다. 코니의 발버둥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흑인들이다. 유대인 브로커는 법망을 넘나들며 알트 라이트의 상징이 되버린 개구리 페페가 무분별한 향락과 범죄를 장식한다. 한편 코니의 체포와 마약상 레이의 추락사는 마치 유튜브 충격 범죄 실황처럼 부감 샷과 로우 앵글/롱 샷을 빌어 연출된다. 코니는 춥고 싸늘한 광란의 이미지로 점철된 현대 미국과 뉴욕이 싫고 동생을 데리고 미국의 개척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코니의 마지막 클로즈업이 일종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면 뉴욕 탈주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프디 형제는 코니가 실패한 이유를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프디 형제의 마지막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코니를 바라보는 사프디 형제의 시선이 어떤 건지 보여주고 있다. 코니를 가두고 있던 경찰차 창살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줌 인에 흐려져 사라진다. 이미지를 광폭하게 확대하는 것으로 뉴욕의 창살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연출로 창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걸 코니나, 사프디 형제나, 관객 모두 알고 있다. 코니는 그 실패를 끝으로 영화 속에서 퇴장한다.

남은 것은 닉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닉은 상담사를 따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들의 방으로 이동한다. 영화의 결말은 갑작스럽다. 환자들을 모아놓고 상담사는 물어본다. "무언가 좋아하는게 있으면 지나가세요."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들. "사탕을 좋아하시나요?" "사랑에 빠져본적 있나요?" "거짓말을 해본적이 있나요?" 환자들은 지나가고 당황해하던 닉 역시 그 질문에 대답하듯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는 군중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계속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그게 어떤 형태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사프디 형제는 어느 부분에서 편집되었는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한다. 이 시퀀스의 인물 동선은 마치 영화 내내 이어졌던 클로즈업을 은유하는것처럼 보인다.

다시 질문. "친구가 있으면 지나가세요." 닉이 지나간다.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 갑자기 카메라는 방 밖으로 나가 방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환자들을 보여준다. 이 카메라 위치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닉이 지나가던 지나가지 않던 상관없다. 닉은 형을 친구로 생각했고, 그 어설픈 은행 강도짓을 형제로써 우애를 다지는 과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닉은 코니와 함께 타락한 뉴욕을 떠나 태초의 버지니아에서 행복하게 지낼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니는 닉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고 파멸에 치달았다. 닉은 퀸스에 홀로 남겨졌다. 방 밖에서 닉은 다른 환자들, 나아가 영화 내내 부감 쇼트로 보여졌던 도시 풍경 속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과거 시제의 질문이었지만, 닉은 현재 시제로 외롭고 외로울 것이다. 홀로 남겨진 닉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한채 외로이 군중 속에서 휩쓸려 다닐 것이다. 이때 사프디 형제는 닉에게 연민을 금치 못한다. 이기 팝의 엔딩 주제곡은 그 연민의 감정을 외화면에서 '순수한 녀석과 망할 녀석은 하나였다', 라며 체화한다. 분명 사프디 형제는 [굿타임]에서 더 나아간 영화를 만들겠지만, 이 연민의 감정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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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e Michelle Gun Elephant - ドロップ

한 앨범의 엔딩 트랙으로는 완벽했던 곡. 어딘가 허무하고 절절한 감수성이 사무치게 울리는 개러지 록 발라드입니다.

다시 들어도 치바 유스케의 칼칼한 보컬은 아베 후토시의 칼 같은 기타하고 완벽한 짝이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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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다와 거상 리메이크 예고편
2010/09/16 - [Fight Test/잡담] - 완다와 거상과 이코, 그리고 HD

2017/11/29 - [Fight Test/리뷰] - 더 라스트 가디언 [人喰いの大鷲トリコ / The Last Guardian] (2016)

오..오오...오오오...! 올 2월 발매라고 합니다.

덤으로 우에다 후미토 신작도 되도록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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