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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18/04 (3)
LAMA - Know Your Lights

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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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1942)


저 유명한 햄릿의 대사에서 따온 제목을 보면 마치 거창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른스트 루비치의 [사느냐 죽느냐]는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왕실 암투극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의 시대는 1940년대 폴란드 극단, 즉 동시대다. 이 영화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나치 앞에서 이뤄지는 문제다. 그런데 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거창한 레지스탕스 활동이 아니다. 영화는 마치 현재의 암울함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희극적 설정을 깔아둔다. 마리아와 요셉은 반 나치적인 풍자극과 셰익스피어를 연기하는 폴란드 배우 부부다. 요셉이 고뇌에 잠겨 있는 동안, 마리아는 자신의 팬인 소빈스키 중위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는 소빈스키에 푹 빠지게 되고 요셉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질투하게 된다. 문제는 이 뒤다. 소빈스키는 반나치 운동에 가담해 있었고, 나치가 폴란드로 들어오면서 전쟁의 불길로 휩싸이게 된다. 소빈스키는 나치 스파이를 제거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오고, 마리아와 요셉은 소빈스키의 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영화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데, 이 시퀀스는 마치 이후 이어질 기나긴 연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리아와 요셉은 배우로써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땐 그들은 총체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고 둘은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 부분이라면 이 위기와 해결과정이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일반적인 극영화로 위장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이한 연극 두 편이 뒤엉켜있다. 마리아와 요셉, 소빈스키의 개인적 삼각관계, 나치를 상대로 한 스파이 작전으로 대표되는 역사/사회적 관계다. 루비치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합쳐버린다. [사느냐 죽느냐]가 코미디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전혀 들어맞지 않는 두 영역, 세계와 개인이 겪는 위기가 얼렁뚱땅이지만 세련된 임기응변 (혹은 연기)을 통해 전환점이 되거나 전진하기 때문이다. 와중에 도덕적 가치는 불경할 정도로 흐려진다. 소빈스키와 마리아의 통정은 햄릿의 명대사를 방아쇠 삼아 전개되고, 반대로 통정의 디테일에 대한 상대방의 무지는 스파이가 누군지 밝혀내는 장치가 된다. 한편 요셉의 개인적 질투는 안면도 없는 나치 장교를 속이는 행동에 동참해서라도 아내의 사랑을 되찾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파시즘과 애국주의는 아무런 무게를 가지지 못하고 붕붕 날아다닌다.

루비치는 이 모든 상황과 캐릭터를 일종의 가면 놀이처럼 만들어간다. 루비치는 관객에게만 이 가면들 간의 관계를 알려준다. 작중 인물들은 상대가 쓰고 있는 가면이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하거나, 일부분만 알 뿐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가면 속에서 연기하면서 상황이 어떤지 파악해야 한다. 루비치가 써내린 유려한 대사는 상황을 은폐함과 동시에 가면 뒤의 핵심을 찌르는 도구다. 은유와 비유, 예의와 비꼼의 전투가 가면 앞과 뒤에서 이뤄진다. 가면은 단순히 연기에 그치지 않고 문이라는 도구로도 확장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서스펜스와 이완은 문의 열림과 닫힘을 통해 제시된다. 문을 열었을떄 거기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마리아가 실렌츠키 교수의 방문을 받는 장면이 그렇다.), 문이 닫히고 난 숏에서 사람들은 한숨을 돌리거나 직전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쓴다. 문은 그 점에서 등장인물의 분투이자 그 분투의 희극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문은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도구기도 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요셉이 실렌스키 교수로 위장해 나치 앞에서 거짓말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정말 이 소재와 시대배경으로 이런 코미디를 해도 되는 것일까?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프로파간다 영화다. 폴란드 연극인들이 나치 스파이를 잡아내고 연합군으로 탈출하는 내용에서 프로파간다적인 성향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엔 프로파간다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 프로파간다를 내세워야 하는 배우들과 자유 폴란드 군인들은 선전물적으로 용감하기 보다는 루비치 특유의 가벼움을 유지하고 있다. 루비치가 독일 국적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폴란드인에 대한 이런 묘사들은 아슬아슬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루비치 역시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초반부 극단원의 대사를 빌어 제시된다. ‘연극인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건 숨는 것 뿐.’ 현실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배우가 총을 들게 되면, 그것은 배우가 아니라 배우였던 군인일 뿐이다. 배우가 싸우기 위해서는 연기를 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일 뿐이다. 문은 그 점에서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마술이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대사를 반하듯이 나치가 머무는 곳들을 희극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이 권력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게 나치가 아닌 폴란드인이라는 점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명백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있다. 음모의 연극은 현실의 비극을 과장되게 모사한 희극으로 진행되고, 음모의 주체들은 죽지 않고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루비치에게 나치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유머도 없는 사악한 발연기 배우들이다. 그들은 현실과 연극을 파악할 재간이 없으며, 영문도 모른채 죽거나 강제로 퇴장당한다. 중요한 점은 이런 퇴장이 아무런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얻는 것은, 필사적으로 연기를 해서 얻어내는 자들이다. 이 영화의 무례해보일 정도로 경박한 태도는 역사적 비극을 이겨내려는 도피적이면서도 역설적인 페이소스다. 루비치는 현실과 픽션의 접합점을 넘나들며 현재진행적인 역사의 비극 속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점잖게 놀린다. 그는 파시즘에게 심각함과 위압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걸 알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의 영어 대사는 To Be Or Not To Be다. 투 비가 되느냐 낫 투비가 되느냐. 조종당하는 인형이 되느냐 줄을 자르고 달려나가는 자동 인형이 되느냐. 이 순간 경박해보이는 인물들이 벌이는 희극은 역사의 폭압을 저항하는 도구가 된다.

결말은 어떤 지점에서 양가적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명백한 해피 엔딩이다. 하지만 그 해피 엔딩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향은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발표된 해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이다. 망명객인 루비치의 입지를 반영하듯이 폴란드 배우들과 군인들은 고국에 남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영국으로 도망친다. 영국에서 마무리짓는 결말은 셰익스피어의 고향에서 햄릿을 연기한다는 배우로써 성취를 보여주는 결말이면서도, 동시에 가면놀이의 유희가 궁극적으로 폴란드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전후 이어지는 폴란드의 수난사와 망명 폴란드인들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더욱 비극적이다.) 정리되지 않은 채 남은 소빈스키와 부부 간의 삼각 관계은 그 자체로 웃기기도 하지만, 극 초에 생겼던 긴장 관계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걸 명백히 보여준다. 오로지 루비치가 만들어낸 픽션 속에서만 그들은 파시즘의 폭압을 이겨내고, 어정쩡한 삼각관계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자체를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듯 하다. 소빈스키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나치즘의 뻣뻣한 폭압하고 거리가 먼 불경하지만 즐거운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불경할 정도로 경계 흐리기와 경쾌한 폭소로 파시즘을 하찮게 만들면서도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을 같이 제시하는 것으로 동시대의 그림자를 포착했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알 수 없었던 루비치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반복’으로 마무리짓는다. 그 찡긋거림이야말로, 어두운 현실에서도 유머의 힘을 믿었던 자의 제스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년뒤 역사는 루비치와 영화의 손을 들었다. 루비치는 짧긴 해도 나치가 패망하는걸 보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한 자도 있었다. 영화의 주연이었던 캐롤 롬바드는 영화 촬영 후 전쟁 채권 독려 집회에 참여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렇게 [사느냐 죽느냐]는 어두웠던 한 시대의 증언이자 희극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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