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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18/07 (4)
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서 어떤 유사성과 감정을 잡아내느냐이다. 레네는 그 사실을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과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보면서 배웠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여행]과 [스트롬볼리]를 통해 픽션을 연기하는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담긴 이탈리아 시골을 영화 속에 배치하면서 영적인 구원과 낯섬이라는 감각을 이끌어냈다. 한편 바르다는 라 푸앵쿠르트를 여행하는 현대적인 성 규범을 받아들인 젊은 여행자 커플의 픽션적 시점과 가부장적인 삶을 사는 라앵쿠르트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다큐멘터리적 관점을 결합하려고 했다. [밤과 안개]는 네오 리얼리즘과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레네와 마르케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앙드레 바쟁은 크리스 마르케가 '밤과 안개' 이후 1958년 내놓은 데뷔작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기행문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영화에 의해 다큐멘트된' 에세이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바쟁이 지적한 병렬 편집은, '밤과 안개'가 크리스 마르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를 편집하면서 도입한 두 개의 시공간의 병렬적 배치는 특정 공간에 속한 개인이 다른 시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와 [석상 역시 죽는다]에서 도입했던 병렬 편집의 가능성을 픽션의 영역에서 실험했다면, 크리스 마르케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발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이후 크리스 마르케를 주목받게 만든 단편은 바로 [환송대 La Jetee]라는 단편 영화였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든 첫 픽션 영상물인 이 영화는 그러나, 활동사진Motion picture가 아니다. 크리스 마르케는 '포토 로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치 사진 슬라이드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그동안 알고 있던 문명이 멸망한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은 한 남자를 찾아낸다. 이 남자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공항 환송대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시간 여행하는 약을 먹게 된 남자는 이미지의 근원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환송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억 이미지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 전체가 멈춰진 사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영화적 샷 구조처럼 배치한다. 이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크리스 마르케는 말한다: "일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보았던 얼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평화의 모습이었다. (중략) 다가올 광기를 버텨내기 위해 부드러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일까?" 라카프라식으로 말하자면 환송대의 남자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1차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1차 기억 직전에 있던 여인의 얼굴이라는 파생된 1차 기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그 1차 기억을 쫓아가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남자가 시간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의 과거에서 여자는 한 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남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기억은 온전히 보존할수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여자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자는 남자를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는데, 반대로 보자면 여자야말로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가 사는 파괴된 현재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여자를 찾지 않는다. 대신 약과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SF 장르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1차 기억의 순간으로 돌아가 자기 방식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여자로 대표되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려는 남자의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도는 분절적인 순간들로 표출된다. 홀린듯한 만남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조각난 채로 남자의 체내로 흡수된 뒤, 재구성된다.

마르케는 이 디테일이 확장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향성과 겹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 담긴 파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5월]이 그랬듯이)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표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환송대]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횡단면이다. 1960년대가 지나가버린 미래에 살고 있는 관객은 그 시절과 함께 호흡할 수 없지만, 크리스 마르케가 35mm 필름 위에 남긴 사진을 통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박물관 시퀀스는 즉물적으로 남아있던 트라우마의 기억을 스스로의 선택과 만남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남자, 나아가 영화의 의도를 은유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진들은 SF 픽션 장르인 디스토피아라는 틀로써 재구성되고 있다. [환송대]는 1960년대 파리라는 공간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길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는 이전에 있었던 전쟁을 서서히 잊으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현실의 파리, 또 하나는 이미 일어난 가상의 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파리. 이 단편을 보면서 어딘가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를 연상했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마르케는 SF 장르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이 미래의 한 순간이 될수도 있었다고, 혹은 그 역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에 대한 기록이 될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과 관계는 희미해지고,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시적 우울함은 1960년대 파리와 도래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미래를 상상케 한다. 이런 이중화 작업은 후술할 [태양 없이]의 중심이 되는 영상과 음향의 재조립, 기계적 장치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에 큰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결국엔 끊어질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남자는 왜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사에서는 생존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를 조종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겐 의사와 과학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좀 더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생의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다. 연출에서 마르케는 좀 더 흥미로운 이유를 배치해둔다.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이미지의 주인공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자다. 침대에 누워서 미소지으며 카메라/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뤄져 있다.

스틸 샷으로만 이뤄진 영화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남자가 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움직임Motion이 가지고 있는 행복함으로 다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발버둥이다. 파괴된 세상에서 이전에 남아있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집착은, 남자가 여자로 대표되는 과거의 행복함에 어떤 죄책감이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 집착은 영상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광적인 매혹을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마르케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마르크 드 가스틴의 'La Mervilleuse vie de Jeanne d'arc'라는 무성 영화에 출연한 시몬 쥬느비에브라는 배우에 매혹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케의 사진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조선 여인의 얼굴을 담은 사진에 대한 묘사가 있었던 걸 보면, 마르케는 여성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찾았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케는 생에 대한 로맨티시즘적 감상과 낙관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을 담은 생에 대한 발버둥이 좌절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당신 모두 좀비'를 연상케하는 [환송대]의 순환 고리는 우로보로스적 비극이다. 영화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었으며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였다는걸 밝히면서 끝난다. 여인의 움직임이 비극과 파괴의 또다른 1차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때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르케가 생각하는 역사의 비극이란, 결과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과 과정을 바꾸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시간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자는 끝내 미래의 여행자들에 속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지도자들이 보낸 암살자를 통해 과거의 순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라카프라는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순수한 형태로만 이뤄질수 없고 트라우마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2차적일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송대]는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으 이야기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드려는 2차적인 시도를 파괴된 현재가 방해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결말은, 현재에 대한 마르케의 인식이 아도르노적 부정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었던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는 드골 정부의 강력한 우파 정권의 힘 앞에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드골은 표면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우대하고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중요한 자리엔 나치 부역자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했다.

[환송대] 직후 만든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레이션은 "감옥이 있는 한 세상은 행복할 수 없다." 였다.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끝나는 [환송대]의 순환적 비극은 아도르노가 부정성 미학에서 주장했던,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화해되지 않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슬로건과 맞닿아있다. 알제리 전쟁과 과거 인식을 방해하는 내부의 파시즘이라는 당시 프랑스의 부정성은 단 한 순간의 행복에 다가가려고 하는 남자를 암살하는 남자의 시대로 표출되고, 또다른 비극의 순환 고리를 만든다. 마르케는 SF 장르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파괴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떻게 1차 기억과 2차 기억을 재정립하는 시도를 방해하는지 [환송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는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적 틀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으로 기억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그렸으며, [태양 없이]는 기계적 조작을 통한 추상화와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남아있는 시간의 현기증을 포착하려고 했다. 마르케의 시도들은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1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2차 기억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의 찬란한 자유연상적 성과를 이어가려는 시도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유 과정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 동시에 역사/사회적 의미를 잃지 않는 정교한 방법론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1995년 마르케는 역사 게임을 만드는 게임 디자이너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레벨 파이브]라는 작품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또한 말년의 크리스 마르케는 유튜브와 비디오 영상에 관심을 기울여 짧은 클립들을 올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라카프라가 주장했던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며, 이 관계망 전체를 성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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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tano Veloso - If You Hold A Stone

5월말에 사서 잘 들었던 앨범... 일본에서 카에타누 벨루조 앨범들이 새 마스터를 써서 SHM-CD로 재발매된지라 (염가 재발매 포함) 좀 구해기 쉬워졌더라고요. 아직 2집 (화이트 앨범)이나 갈 코스타랑 같이 작업한 데뷔작, 문제작 Araca Azul은 구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구할 생각이긴 합니다.

앨범에 대해 적자면, 1집의 쾌활함이 많이 줄어들고 좀 다운된 느낌이긴 합니다. 당연한게 이 앨범 녹음 당시 벨루조는 망명 생활 중이었으니깐요. Maria Bethania랑 이 곡 정도가 예외적으로 특유의 밝음이 남아있긴 한데... 그래도 어딘가 애잔함을 안겨주는게 영국의 추적추적거리는 날씨가 트로피칼리아의 들썩이는 감수성에 녹아든 것 같은 독특함이 있습니다. Transa랑 Araca Azul을 들어보면 이 앨범의 방향성이 어떻게 됬는지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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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a La Garde / Custody] (2017)


영화의 시작은 이혼 소송을 위해 출근하는 조정위원들이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면 카메라는 두 인물(과 그들의 변호사)을 병렬로 배치한다. 앙트완과 미리암. 미리암은 앙트완이 가족들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로 앙트완은 미리암이 믿을수 없는 아내였으며, 자식들을 협박해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 다음 부부의 성격에 대한 다른 이들의 증언이 나온 뒤 이야기는 부부의 아들인 줄리앙으로 넘어간다. 줄리앙의 증언은 부부의 소송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증언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기 부족하다고 앙트완은 주장한다.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주장을 하는 두 인물의 숏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둘은 시퀀스가 끝날때까지 서로 마주보지 않고 조정위원만 바라본다.) 주장이 끝났을 무렵 앙트완과 미리암, 조종위원를 동시에 보여준 뒤 묻는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죠?" 이 말은 관객을 향한 말이다. 르그랑 감독은 관객에게 사전 정보를 배제하고 주장 숏을 배치한 뒤, 각자의 숏에 숨어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냐고 물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송의 중간 결과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이다. (앙투안의 친자 접견권을 인정하여 줄리앙에게 2주에 한번 주말을 아버지와 보내게 하라고 판결한다.) 왜냐하면 이 시퀀스의 다른 숏에서도 한 쪽으로 기울어질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결정적이어야 할 조세핀의 부상 역시 앙트완의 알리바이로 반박된다. 요컨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걸 파악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앙트완에 대해 설명하는 동료들의 증언은, 사실인것처럼 보여도 자기 포장적인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리암은 자기 포장적 전술을 거의 쓰지 않고, 실제적인 피해와 대책을 호소한다. 언술의 차이에서 폭력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조정위원회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앙트완의 자기포장과 미리암의 호소는, 사적 언어가 아니라 예의바른 공적 언어를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요컨데 공적 영역에서는 위장이 이뤄지고 있으며, 법 체계는 그에 대한 판단을 미룰수 밖에 없다. 법은 논리적이고 명확한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게 꼬여있다.

이 두 영역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도구와 관찰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르그랑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은, 가정을 세워놓고 전개하는 연구자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이 공적인 (나아가 법) 영역에서 벗어났을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야말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대전제인 셈이다. 그리고 이 대전제는 이전에 르그랑이 만든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서 일부 선험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프리퀄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도입부가 끝나자 르그랑은 인물들을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리암과 아이들이 새로 정착한 곳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공영 아파트다.

미리암은 앙트완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암이 사는 곳은 현 시점의 앙트완에게는 공적인 장소나 다름없다. 이를 증명하듯이 앙트완과 줄리앙의 만남은 미리암 부모의 집 앞에서 이뤄진다. 이미 이혼 소송 중인 앙트완에게 미리암 부모는 남이며, 실제로도 미리암의 가족은 앙트완을 적대한다. 앙트완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여기서 르그랑은, 관계에 대한 부담감이 폭력을 가능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앙트완은 가장 약한 고리인 줄리앙을 건드면서 자신이 빠진 (그러나 있어야 할) 사적 영역으로 진입하려고 한다. 집 문을 나서는 순간, 줄리앙은 앙트완의 뜻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줄리앙에게는 미리암이 있기 때문이다. 줄리앙이 거짓말을 한 이유도 어머니 미리암 때문이었다. 요컨데 르그랑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공간과 폭력, 인간 관계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앙트완은 이 사실을 이용해 미리암과 줄리앙을 괴롭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무시무시함은 사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폭력과 권력 관계가 얼마나 교묘하며, 그것이 공권력의 사각지대에 있다는걸 보여주는데 있다. 보안 요원이라는 설정답게 앙트완은 통제하는 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남들 앞에서는 위협하지 않으며,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줄리앙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줄리앙에게 직접적인 소리나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도망가던 줄리앙이 차량에 치일뻔하자 돌아서는 모습을 보자. 그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서 정신적으로 괴롭힐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줄리앙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조세핀 나아가 미리암에게 접근하려고 한다.

르그랑이 생각하는 권력의 근원은 거리감이다. 르그랑은 앙트완이 어떻게 줄리앙과 미리암을 가두는지 프레이밍 기법으로 인물들을 불안정하게 배치한다. 앙트완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퀀스에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없으며,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앙트완을 거북스러워할때 앙트완은 거구로 프레임 속 두 사람을 가리거나 짓누른다. 끊임없이 회유하는 앙트완의 입은 줄리앙의 도망칠수 없는 감옥이며 미리암은 앙트완의 폭력적인 포옹을 받아줘야 한다. 당연하겠지만 앙트완/미리암,줄리앙의 시선은 서로 닿지 않는다. 심지어 사적인 공간인 집안으로 이동했을때도 이런 권력 관계는 더욱더 강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물의 거리와 시선 제약을 통해 폭력의 구조화에 매달린다. 가끔 집요하다 못해 어깨에 힘이 들어간 구조적인 숏들이 보이긴 하지만, 르그랑의 야심이 단단한 뿌리가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앙트완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르그랑는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하지 않는다. (프리퀄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르그랑은 중요한 힌트를 앙트완의 친정집 시퀀스에 배치해뒀다. 먼저 앙트완과 앙트완의 아버지 조엘이 처음 만나서 하는 대사는 사냥에 대한 것이다. 매우 폭력적인 행위를 함께하는 남성성의 확인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 다음 소동을 일으킨 앙트완을 내쫓을때 조엘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이 집의 왕이다"라고 말한다. 조엘의 대사는 사적 공간의 주인으로써 선언이다. 그 선언이 매우 가부장적인 폭력으로 이뤄져있다는 건 앙트완을 대하는 조엘의 폭력적인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앙트완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진 것은 조엘의 실책이 크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이 생길 것이다. 왜 조엘과 아내 마들레인은 앙트완과 같은 파국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이는 조엘을 대하는 마들레인의 태도로 설명된다. 기성 세대인 마들레인은 미리암과 달리 조엘이 보이는 폭력적인 태도에 대항할 방법을 쓰지 못한다. 요컨데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젠더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앙트완이 줄리앙을 건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앙트완의 장녀인 조세핀은 자기결정권이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정위원회에서도 언급되는 사실이며, 르그랑 역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을 통해 이미 성년에 들어선 캐릭터라는걸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 내내 앙트완은 조세핀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재미있는건 조세핀의 설정엔, 미묘한 계급적 욕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조세핀은 음악 학교를 다니고 있고, 직장을 관둔 미리암이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학비라고 언급된다. 여기서 조세핀이 배우는 음악이 클래식 같은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한 음악이라는걸 유추해볼수 있을 것이다. 조세핀의 음악 학교는 어떤 계급 상승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에게 연애를 통해 조세핀의 학교 생활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미리암의 말은, 조세핀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하는 의중이 깔려 있다.

조세핀의 생일 파티는 그 점에서 여러모로 이상한 시퀀스다. 파티장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조세핀의 생일은 마치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 열리는 것 같다. 대체 누구인가? 답은 파티장에 오지 못한 '그 사람'이다. 실제로 앙트완이 미리암을 만나서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인데 딸의 생일을 축하하지도 못하냐, 다. 조세핀의 성대한 생일 파티는 앙트완을 향한 선전포고다. "더 이상 날 때리지 못할 것." 이 파티장을 빌리라고 돈을 낸 사람이 앙트완을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미리암의 아버지라는걸 생각해보면 더 명백해진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르그랑은 파티장 시퀀스 중 일부에서 대화를 빼버리고 배경 음향만 남긴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의 벨소리가 음향 몽타주로 불편함과 긴장감을 유도한다는걸 생각해보면 파티장의 소음이 앙트완의 벨소리를 차단하는 안전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즉슨 미리암과 남매는 공적 영역에서 타인들의 소음을 통해 보호받는다.

그런데 이 뒤 등장하는 시퀀스에게 밖으로 불려나가 앙트완에게 위협받는 미리암과, 조세핀과 남자친구 사뮤엘의 축가 연주 장면이다. 두 시퀀스가 동시에 전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세핀과 사무엘의 연주 장면을 분석해보자. 조세핀과 사무엘이 무대에 올라와서 연주하는 곡은 클래식이 아닌 록이다. 심지어 연주하는 곡은 C.C.R.의 Proud Mary다. 이 곡은 일상을 떠나 미국을 방랑하는 내용의 곡이다. 원곡은 남성이 불렀지만, 이 곡을 커버해서 유명해진 가수 중엔 여성인 티나 터너가 있다. 그런데 티나 터너는 가정 폭력을 당한 경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조세핀과 사뮤엘은 모든 불을 끄고 인사를 하듯이 쪽지를 남기고 퇴장하는 장면을 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모든 행동과 상징은 마치 미리암의 상황을 은유함과 동시에, 계급 상승의 바람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은 임신으로 인한 도주다. 임신이라는 사건은 어떻게 조용하게 수습될만한 사건이 아니다. 조세핀은 앙트완이 개입하는게 싫어서 계급 상승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고 도주를 선택한다. 요컨데 더 이상 쫓아올수 없을 정도로 자신과 아버지 간의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하지만 조세핀의 도주엔 상황의 회피 뿐만이 아니라 공황으로 인한 판단력의 마비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한 순간 보이는 반응은, 기쁨이 아닌 공포과 충격에 질린 숨소리다. 조세핀은 가정의 파탄을 지켜본 아이다.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가정이 생긴다는 얘기고, 자신의 부모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주하는 일이다. (작년 말 개봉한 [초행]이 그랬다.) 조세핀은 이런 현실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연륜을 쌓지 못했다. 그런걸 쌓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기도 했고. 조세핀과 사무엘의 도주에 어둠이 깔려있다는 점은 그 점에서 불길하기 그지 없다. 남은 희망은 사뮤엘이 앙트완과 달리 조세핀의 공황을 얼마나 진정시킬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한 뒤 남은 어둠이 미리암과 줄리앙으로 이어지면, 불길한 예감을 할 수 밖에 없다. 미리암은 대체 왜 앙트완에게 들통난 공용 아파트로 돌아오는가? 그것은 일종의 자기 위로일것이다. 그 정도로 했으면 앙트완이 자신의 영역에 접근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은 현관을 두들기는 앙트완의 음향을 통해 박살난다. 여기서부터 르그랑은 명백히 호러 영화로 만든다. 줄리앙이 앙트완이 총을 발사하면서 일시적으로 청각을 상실하는 장면은, 앙트완에게서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던 벨소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 더 이상 줄리앙은 앙트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들을 가치도 잃어버렸다. 상황은 연쇄살인마에게서 도주하려는 모자로 변모한다. 미리암과 줄리앙이 숨어든 장소가 화장실이라는 점은 [샤이닝]을 의식한 것일까?

이때 미리암과 줄리앙을 구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두 얼굴이다. 하나는 경찰서 오퍼레이터고, 또다른 하나는 앞집에 사는 할머니다. 이들은 앙트완 시야 바깥에서 앙트완의 행동을 제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퍼레이터의 정면 숏과 욕조 안에 숨은 미리암과 줄리앙의 숏이 붙는 순간 긴장과 동시에 어떤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면, 공권력이 마침내 사적 영역의 폭력을 파악헀기 때문이다. 이제 오퍼레이터는 앙트완/미리암, 줄리앙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앙트완이 제압당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이상하게 연출되었다. 우선 샷건을 들고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앙트완의 숏은, 가정폭력범의 모습이 호러 영화의 공식을 통해 구체화된 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앙트완은 연쇄살인마나 다름없다. 이때 경찰들이 등장해 앙트완을 제압한다. 

르그랑은 이 상황의 전후 숏과 동선을 이상하게 붙였다: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경찰 기동대가 갑자기 나타나 앙트완의 뒤에 순간이동해 제압하는 것처럼 붙였다. 이때 경찰 기동대의 음향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상식적인 답은 '앙트완 몰래 현관문을 열고 숨어든 경찰 기동대가 덮쳤다'가 답일 것이다. (상황 자체도 그것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기습과 국면 전환의 숏이 앙트완의 시점에 맞춰 갑작스럽기 때문에 전후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동선을 상식적인 숏과 편집으로 붙이지 않았다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공간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편집을 이렇게 구상했다, 라고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미리암의 공영 아파트는 앙트완과 공포에 떠는 미리암과 줄리앙 밖에 없었다. 앙트완은 한때 자신에게 공적이었던 영역을 밀고 들어왔고 사적인 지옥으로 화하기 직전이다. 하지만 미리암과 줄리앙, 앞집 할머니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앙트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무지로 인해 앙트완은 공간의 권력을 잃고 경찰에게 제압당한다. 앙트완의 단말마가 "내 아내"라는 소유격적인 대사라는 점은 공간의 권력을 잃은 자의 발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적 영역 속 폭력에 대한 시민 사회의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영화일까?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이 미리암이나 줄리앙이 아닌, 앞집 할머니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전화를 걸고, 불을 끄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을 피하는 상식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앞집 할머니가 보이는 극도의 조심스러움은 흥미롭다. 앙트완은 할머니, 나아가 앞집에 누가 사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앞집에 할머니가 산다는 걸 아는 사람은 미리암과 줄리앙 뿐이다. 할머니의 행동이 보이는 조심스러움과 시점 숏으로 제시된 미리암과의 시선 교환, 총격전으로 부서진 문 이미지는 익명의 선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암시를 남기고 있다.이 부분을 설명하면 내용을 넘어서는 상상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확언을 하지 않겠다. 다만 할머니의 시점 숏에서 사건 이후의 삶과 상처를 걱정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건 확실하다. 그리고 이 걱정은 냉철한 연구자의 태도로 서사를 전개했던 자비에 르그랑의 연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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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ntals - Friends Of P.

아무리 들어도 위저 mk.2 (실제로 위저 전 멤버가 만든 밴드)이지만 이런 사운드 싫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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