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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Deeper Into Movie/단상 (8)
서부극에서 총이 발사되기까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블리자드제 FPS 게임 [오버워치]에 등장하는 맥크리라는 캐릭터가 있다. 대놓고 서부극 무법자를 가져온 이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궁극기는 '황야의 무법자Deadeye'다. 무방비가 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화면에 있는 대상을 오랫동안 조준하고 있으면 한 방으로 처치하는 이 궁극기와 "석양이 진다.... It's High Noon."이라는 대사는 곧 인터넷 상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이 대사는 왜 유행어가 되었는가? 그것은 [오버워치]라는 게임이 빠른 스피드의 하이 테크놀로지를 배경으로 한 하이퍼 FPS의 흐름과 반대로 대상을 처치하기 위해 다소간의 뜸을 들어야 하는, 느긋한 호흡 때문이였다.

'황야의 무법자'가 보여주는 이 느긋한 호흡이야말로, 서부극의 리듬을 이해할수 있는 중요한 단서 아닐까? [오버워치]에서 맥크리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석양을 지기까지, 플레이어는 꽤 오랜시간 인고를 하면서 상대의 틈을 빠르게 파고들어야 한다. 즉 적대하는 상대를 향해 총이 발사되는건 한순간이지만, 그 발사되기까지 그 과정엔 어떤 텀이 있다. 

이런 느긋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에 마무리되는 리듬은, 단순히 총이 등장하는 결투 뿐만이 아니라, 서부극 전체의 리듬하고도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오에 이뤄지는 1:1 대결도 대결이지만, 서부극은 총이 발사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총이 발사되기 이전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장르다. 심지어 고전들보다 좀 더 자극적인 재미로 무장한 스파게티 서부극이나, 총이 발사되어 피부와 뼈를 찢는 순간에 천착하는 샘 페킨파의 서부극에서도, 세련된 대사를 온갖 문제에 대해 떠벌이는 요란스러운 쿠엔틴 타란티노의 서부극도 자세히 보면 총이 발사되기까지는 일반적인 액션 영화와 비교해보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총이 발사되는 순간을 묘사하는 컷도 그렇다. 서부극에 등장하는 리볼버나 소총은 현대 액션 영화들의 기관총이나 자동권총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발사되지 않는다. 스피드 클립과 문 클립이 동원되더라도 서부의 사나이들이 들고 다니는 리볼버는 느긋하게 총알이 채워지고 발사된다. 그리고 이런 느긋한 리볼버라는 무기를 묘사할때도 리볼버에서 총알이 떠나는 순간을 과장하거나 극대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부극을 보는 사람은 그 느긋한 호흡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를 보면서 와이어트 어프가 죽은 동생의 복수하기까지 꽤 오랜시간동안 기다려야 하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수색자]에서 에단이 조카 가족을 잃은 뒤 조카를 찾고 복수를 하기 위해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복수심에 불타는걸 바라봐야 한다.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 닥 토빈이 옛 갱단 단원들에게 총을 들이대기까지 우리는 우스꽝스럽지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싸움과 처참한 겁탈을 지켜봐야 한다. 심지어 야심 없어보이는 버드 보티커의 [7인의 무뢰한]에서도 초반부 총격전은 시원스럽게 생략되고 벤이 뭘 하는지 궁금해하며 그의 행적을 뒤쫓는다.

이처럼 서부극은 총이 발사될때까지 왜 인물들이 총을 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납득시키는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왜'는 감독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존 포드의 인물들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과, 버드 보티커의 인물들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은 매우 상이하다. 포드의 [황야의 결투]나 [수색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등장하는 총을 든 사나이는 위태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되찾기 위해 총을 쏜다. 안소니 만의 총을 든 사나이는, 과거에서 탈주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과거 간의 충돌 속에서 총이 발사된다. 버드 보티커의 총을 든 사나이는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저항에서 총을 든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무법자들이 등장하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멕시코인을 착취하는 고용주에게 총구를 돌리는 보안관이 주인공인 [빅 건다운]은 어떠한가?

좋은 서부극은 인물들이 왜 총을 들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고 동시에 그 납득에서 귀결된 액션에서 감흥를 안겨준다. 우리는 존 포드의 영웅들이 왜 공동체를 지키고 싶어하는지, 그 과정을 납득한다. 우리는 버드 보티커의 사나이가 가진 결투의 미학이 어떤 윤리체계로 작동하는지 납득하며, .안소니 만의 인물들이 어두운 과거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한다. 라울 월시나 리처드 플레이셔, 앙드레 드 토스 같은 고전 서부극 감독부터 몬테 헬먼이나 로버트 알트만 같은 수정주의 서부극 감독들까지 필자가 미처 접하지 못한 영화들을 찾아보면 사례는 무수할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서부극은 총이 발사되는 순간만큼이나 그 이전,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나 관계가 안겨주는 드라마도 느긋하지만 성실하게 다룬다. 그 점에서 서부극은 역시 총이 등장하긴 하지만 배배꼬인 상황과 욕망, 그리고 그 위에 드리운 살벌한 철근 콘크리트의 어둠과 씁쓸함에 집중하던 필름 느와르보다도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엮인 액션의 순수함을 맛볼 수 있는 장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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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에서 일본 무사도 문화는 어떤 식으로 접목되는가?

서구권에서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라는 저서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대표적인 리버럴리스트였던 니토베 이나조는 독실한 기독교도로 미국으로 넘어가 1899년 “무사도: 일본의 정신” 이라는 책을 내면서 일약 유명해지게 된다. 니토베는 이 책에서 일본정신의 정수가 무사도라 보면서 무사계급의 도덕적 존재 양상인 의, 용, 감위견인의 정신, 인, 예, 성, 명예, 충의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양의 일본 인식을 바로잡자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토베는 이를 통해 일본이 나름 높은 도덕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군사적으로도 강대한 근대 국가라고 보여주려고 했다.

 이 [무사도]가 저술된 배경에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관련이 있는데 당대 서구제국주의에게서 동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니토베의 [무사도]는 그 점에서기독교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일본 정신을 설명하고자 하고자 했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니토베의 이런 전략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동양인 학자는 오리엔탈리즘의 체계를 <조작>할 수 있게 되므로, 그들이 스스로 미국에서 받은 훈련 받으며” “원주민의 정신을 서구인의 입맛에 맞게 소개한” ‘원주민정보원’ 전략을 취한 것이였으며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1, pp 516-517 이는 곧 서구인들에게 일본이 서구와 동등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걸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서구인들에게 [무사도]는 문명화된 군사강국 이미지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이였는데, 일단은 군사강국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면서 그 비결을 무사도에도 찾았지만, 그 무사도는 차라리 근대국가적이라기 보다는 봉건국가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와 미국의 일본인식] 실제로 연구 자료에 따르면 무사도 출간 이전 미국 언론에서 1900년 이전엔 무사도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았다면, [무사도] 출간 이후 [무사도]는 프랑스, 독일 등 7개 국어로 소개 되었으며 이후 이어질 일본 사무라이 영화 열풍의 기초가 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하지만 이런 무사도 열풍은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그라들었고, 그 이후로 다시 움트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사무라이 무사도 정신이 서구 대중문화에 파급을 미치기까지

 하지만 이런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이 본격적으로 서구권에 정착하게 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정확히는 일본 영화가 서구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일본 영화는 곧 서구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베니스와 베를린, 칸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영화제들은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 신도 가네토 같은 감독들을 모셔해오면서 일본 영화는 곧 동아시아 영화계를 뛰어넘어 글로벌한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영화의 장르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서구 대중들 머릿속에서 자리잡은 영화는 사무라이 영화였다. [7인의 사무라이]는 곧 서부극으로 무대를 바뀌면서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가 되었고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은 조지 루카스를 매혹시켜 [스타워즈]의 모티브가 되었다. 또다른 [요짐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코바야시 마사키가 만든 [할복]이라던가 오카모토 키하치의 [대보살 고개], 고샤 히데오의 [짐승의 검] 같은 영화들도 서구 관객들에 문을 두드리면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구로사와 아키라나 코바야시 마사키가 지식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사무라이 영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면 좀 더 밑바닥에서는 [자토이치 시리즈]라던가 [아들을 동반한 검객] 같은 가볍고 난폭한 사무라이 영화들이 하위 문화 매니아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쌓여온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매혹은 1975년 제임스 크라벨이라는 작가가 [쇼군]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제임스 크라벨은 이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매혹을 “가상의 영국 선원이 일본에 난파해서 사무라이 세계의 일원이 되면서 빠져들게 된다는 기제를 사용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1980년 리처드 체임벌린이 주연하는 미니시리즈로 제작돼 1억2000만명이 시청하는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이는 지금까지 방영된 모든 미니시리즈 중 두 번째로 많은 시청자 수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0907100080

 그리고 [쇼군] 소설이 발표된 2년 뒤 나온 상기한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 역시 사무라이 영화와 문화가 서구인들의 인상에 강하게 남아있게 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루카스는 단순히 영화의 플롯을 베껴오는 정도가 아니라 복식이라던가 제다이의 원형을 사무라이 문화에서 가져온 뒤, 기를 포스로 번역하면서 이런 사무라이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서구 관객들조차 익숙하게 받아들일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점에서 [스타워즈]와 [쇼군]은 일본 사무라이 문화가 이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저변을 확대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쇼군]이 방영되고 [스타워즈] 후속편들이 대히트를 치던 1980년대에 이르면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머물지 않고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어 무시할수 없는 비중으로 올라서게 된다. 때마침 당시 일본 버블 경제의 여파로 떠오르는 해라고 불리면서 주목과 경계를 서구권에서 경계를 받기 시작했고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너도나도 일본 문화에 접하게 된다. 이 시절에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던 더 베이퍼스의 ‘Turing Japanese’라는 곡은 그런 1980년대 일본 열풍을 제대로 보여주는 곡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런 급부상으로 인해 일본은 “경제동물”이라 불리며 경원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기도 했으며 이런 불안감은 기존의 서구 위치를 위협하는 일본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다.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일본 전광판과 야쿠자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온 형사 이야기를 다룬 [블랙 레인]은 이런 열광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198-90년대부터 헐리우드에서는 [스타워즈]처럼 인용 수준이 아니라 사무라이 문화에 매혹되거나 그 룰에 따라 행동하는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나온 알랭 들롱이 주연하고 장 피에르 멜빌이 만든 [사무라이]는 어찌보면 그런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영화였고 [헌티드]라던가 [킬빌], [한니발 라이징], [블레이드], [신 시티] 같은 영화들이 사무라이 문화나 사무라이 이미지를 차용해 지금껏 그려왔던 히어로의 이미지에 사무라이와 무사도 이미지를 덧붙여 고독함을 차용하고자 했다. 

 이렇게 1980년대부터 서구권 내 일본 열풍은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대한 매 지금도 이 유행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킬빌]와 같은 영화로 꾸준히 재생산되고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헐리우드 영화에서 일본 무사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재현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스트 독], [라스트 사무라이]와 [더 울버린]을 통해 헐리우드 영화가 무사도로 대표되는 사무라이 문화를 어떻게 접목시키고 소화했는지 파악해볼 예정이다.

[라스트 사무라이]: 세계화에 저항하는 고독한 전통의 사무라이



라스트 사무라이 (2004)

The Last Samurai 
7.4
감독
에드워드 즈윅
출연
톰 크루즈, 와타나베 켄, 사나다 히로유키, 티모시 스폴, 빌리 코널리
정보
전쟁, 액션 | 미국 | 153 분 | 2004-01-09

에드워드 즈윅의 2003년작 [라스트 사무라이]는 1876년 일본 개항기와 세이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미국이 독립한지 100년. 남북 전쟁과 인디언 전쟁으로 공을 세운 네이든 알그렌은 그러나 화려한 명성과 달리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네이든은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사무라이 반란군을 토벌할 정부군의 군사 고문으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정부군은 대패하게 되고 네이든은 포로로 사무라이 반란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반란군의 본거지에서 네이든은 사무라이 문화를 접하고 그들의 정신에게 감화되어 나중엔 정부군에 저항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라스트 사무라이]은 후일 언급할 [더 울버린]처럼 일본에 건너왔다가 무사도 정신에 매혹되는 서양인 캐릭터를 내세워 무사도 문화를 소개하는 영화다. 하지만 개인적인 드라마에 비중이 쏠린 [더 울버린]과 달리 [라스트 사무라이]는 좀 더 큰 틀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점이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에 영향을 받은 영화지만,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 정신 문화와 서구 정신 문화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던 니토베의 의도와 달리 순순하게 그 두 세계가 별개의 세계라는 걸 인정하고 시작한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영화에서 네이든은 서구화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에 부응해 온 캐릭터로 설정되며 일본의 문화는 영화 초반부엔 네이든의 시각에 맞춰서 이질적이고 불쾌한 무언가로 그려진다. 네이든이 전쟁에서 패한 사무라이의 할복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장면이라던가 사무라이 마을에 도착해 겪는 의식주 문화에 대한 혼돈들은 네이든으로 대표되는 서구인들에게 일본 문화는 동등한 세계가 아니라 처음 접한 다른 세계라는걸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내에서 서구로 대표되는 네이든 캐릭터가 왜 무사도 문화에 매혹되었는가? 이 답은 초반부 네이든이 조국과 명예를 위해 싸웠지만 인디언 학살과 전쟁의 참상으로 고통받는 캐릭터라는 작중 설명에서 해명이 된다. 여기서 에드워드 즈윅과 각본가 존 로건은 서구의 문화가 명예를 잃어가는 문화로 해석하고 일본의 무사도 문화에서 그 답을 찾는다. 그리고 서구와 근대적인 서구 문화를 수입하려는 일본 정부군과 전통적인 무사도 문화를 지키려는 잔존 사무라이들의 대립에서 무사도 문화에서 자신의 생의 의미를 찾게 되어 일본인들에게 ‘불공평한 조약’을 맺지말라고 충언하는 경지에 이르는 서구인 네이든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문화를 세계화하려는 서구 문명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도는 영화 발표 당시인 2004년이라는 연도를 생각해보면 세계화에 대한 회의주의로도 확장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 일본 문화와 무사도 정신은 세계화에 대항하는 문화 상대주의의 상징으로써 기능하고 있다. 그 점에서 [라스트 사무라이]의 무사도는 단순히 멋있다 수준의 겉햝기가 아닌 진지하게 탐구하고 고민해볼만한 타자의 문화로 그려지며 에드워드 즈윅과 존 로건은 그 타자의 문화에서 인류 공통의 가치를 발견해내 관객들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로맨스라는 문제에서도 후술할 [더 울버린]과 [라스트 사무라이]는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데, [라스트 사무라이]의 타카가 네이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계기는 일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네이던의 노력에서 비롯된다면 [더 울버린]의 마리코가 울버린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건 울버린이 실제적인 위협에서 자신을 지켜줬기 때문이다. 즉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무사도 문화로 대표되는 타자의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가 캐릭터 관계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스트 사무라이]의 일본은 SF 소설가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했듯이 “실은 서구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종류의 "잃어버린 미학", 퓨리타니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 케이카쿠는 이어서 이 영화는 그럼에도 ‘익숙해진 일본인의 얼굴을, 외국인의 시선과 필름이란 필터를 거쳐서, 이화한다’면서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http://noobcoela.egloos.com/2451722 이 외에도 이토 케이카쿠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에서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이런 감각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며, 배우가 배우의 이미지로 나오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에드워드 즈윅의 연출과 시선이 어떻게 일본 문화를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한 이 독특한 매력이야말로 [라스트 사무라이]의 장점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토 케이카쿠가 설명한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이화’라는 매력은 김효순의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에서 [라스트 사무라이]를 다룬 부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김효순은 이 논문에서 반란군을 이끄는 영주 가츠모토의 자결장면에 나오는 벚꽃 연출을 설명하면서 이 장면은 “일본문화를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환상에 의해 연출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김효순의 지적은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한 ‘이화’라는 매력은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무사도 문화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그려진 무사도 문화와 일본인들의 세계는 정작 일본인이 만든 일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들로 대표되는 전통 문화가 왜 세계화라는 흐름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야 하는가’라는 대답이 됨과 동시에 변하지 않고 고정된 문화로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고스트 독: 사무라이의 길]: 아이러니와 패러디, 그리고 진심이 담긴 문화적 칵테일

한편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은 지금까지 언급한 미국 영화들이 일본 문화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매우 독특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영화다. 야마모토 츠네모토의 [하가쿠레: 사무라이의 길]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인용을 하는 주체 고스트 독이 포레스트 휘태커라는걸 알게 된 관객들은 당황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도무지 사무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위치만 적자면 그는 ‘흑인’ ‘갱스터’이다. 심지어 그가 섬기는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일본인도 아니고 이탈리아 갱스터다. 하지만 고스트 독은 흑인 갱스터이지만 끊임없이 사무라이 문화를 언급하고 사람들에게 무사도 정신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한다. 심지어 적이 죽이려고 달려드는 장면에서도 고스트 독은 사무라이의 자세로 그들을 대응하고 무사도 문화를 전파하려고 한다.

 이렇게 짐 자무시는 시침떼듯이 갱스터 장르에 무사도 문화를 접붙여놓고 서로 충돌하는 부분에 대해서 별다른 봉합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스트 독]엔 “진정한 무사도 정신을 지닌 일본인 캐릭터”는 영화에서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쿵푸 마스터가 등장하긴 한다.) 오히려 자무시는 고스트 독에 대한 다른 갱스터들이 어떻게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장면을 넣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루이가 고스트 독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그런 충돌을 노렸다는걸 선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 인용은 코미디에 가까운 모양새를 띄게 된다. 본인은 진지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스트 독의 사무라이 추종은 혼자 붕 떠 있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영어 밖에 모르는 고스트 독과 프랑스어 밖에 모르는 아이스크림 장수 레이몬드와의 괴상한 대화들은 그런 붕떠 있는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의 위치를 은유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무사도 문화 뿐만이 아니라 [고스트 독]은 베티 붑을 비롯한 고전 영화나 만화를 위시해 다양한 문화들의 인용들로 가득차 있는 영화인데, 그 인용들이 노골적이여서 원본을 신경쓰지 않을수 없게 된다. 적어도 짐 자무시는 ‘타자’가 ‘이국의 문화’를 인용하는게 코미디로 보일 수 있다는걸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유머 소재로 삼는 모습조차 보인다. 이 점에서 [고스트 독]은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작하지만 정작 사무라이 캐릭터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를 아이러니하게 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허나 재미있는 것은 이런 안 어울리는 것끼리 아무런 붙어서 생기는 코미디가 실은 매우 강한 존중과 사랑에 담겨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짐 자무시는 코미디 만큼이나 [고스트 독]에서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사무라이 영화들이나 야쿠자 영화들을 인용을 어떤 아이러니 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가장 명백한 예로는, 스즈키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을 흉내낸 하수구 살인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고스트 독이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감정 이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웃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지함과 성실함은 [하가쿠레]로 대표되는 무사도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가 매번 인용하는 무사도 문화는 갱스터 세계의 지저분하고 각박한 인물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빛나며 그의 가치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앞서 말한 무사도와 고스트 독의 관계를 은유한듯한 레이몬드와의 관계 역시 자세히 보지만 웃기지만 그들의 관계 자체도 코미디만으로 남지 않는다. 그들은 엉뚱한 말을 늘어놓지만 감정의 방향 자체가 엇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스트 독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무사도 문화 인용이 동시에 그를 진지하고 위엄 넘치는 ‘히어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결말에 등장하는 고스트 독의 죽음과 고스트 독이 남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은 그 점에서 이 영화를 단순히 유머가 아니라 다른 면모로 볼 수 있게 유도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또 사실을 지적하자면 ‘흑인’ ‘갱스터’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 인용은 짐 자무시 머릿속에서 뜬금없이 진행된 사고 실험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힙합 그룹 우탱 클랜 중국 호북성 무당산에 자리잡은 무당파에서 이름을 따온 이스트코스트 힙합 그룹으로 데뷔작 [Enter the Wu-Tang : 36 Chambers]에서 중국 무술 영화에서 샘플을 따와 곡을 만들면서 유명해졌다.

으로 대표되는 흑인들의 동아시아 무술 영화 (쿵푸/사무라이 등등) 애정은 상당히 깊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 영화 [화산고]가 미국에서 래퍼들이 더빙에 참여해 개봉해 반향을 이뤄냈다는 점도 그런 흑인들의 동아시아 무술 영화에 대한 매혹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자무시는 친절하게 우탱 클랜의 멤버인 RZA를 영화 음악 감독으로 기용하고 “변장을 한 사무라이”라는 이름으로 카메오 출연시키기도 한다. 그 점에서 [고스트 독]은 흑인 문화와 일본 문화 간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주류 백인 문화와 대비되는 성채를 만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고스트 독]은 그 점에서 이중적으로 무사도 문화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무시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코미디 소재로 삼고 있지만, 동시에 그 무사도 문화가 돈키호테의 이상만큼이나 현실에서 이뤄질수 없는 존재라는걸 보여주면서 감독 역시 무사도 문화에 매료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그 점에서 [고스트 독]는 위에서 언급된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매혹된 서구인들에 대한 위트넘치는 헌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로 촉발된 무사도 문화에 대한 서구권의 관심은 전후 일본 문화와 사무라이 영화가 서구권에 수입되면서 촉발되었고 이는 곧 서구권 영화가 자기 식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언급한 세 영화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일본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존중받아야 할 타자의 문화와 서구 문화가 근대화 되면서 잃어버린 새로운 이상향으로 일본의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고 있다면, [더 울버린]은 캐릭터의 내면과 그 캐릭터가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고결한 가치관을 묘사하기 위해서 무사도 정신과 문화를 인용하고 있다. [고스트 독]은 이런 무사도 문화 인용에 대한 농담과 진심이 섞인 코멘터리를 통해 고전과 현대, 인종을 넘나드는 문화적 칵테일을 만들어내는데 주목하고 있다.


참고 문헌 

박수형,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자포니즘의 신화적 의미 연구] (2008, 홍익대학교)

김효순, [일본의 전통전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2005, 고려대학교)

함동주,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와 미국의 일본인식] (2012, 이화여자대학교)

(*참고로 울버린에 대한 분석은 2015/07/20 - [Deeper Into Movie/리뷰] - 더 울버린 [The Wolverine] (2013)에다 올려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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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의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적 특정성과 '멜로적 감수성'에 대해

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글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 중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멜로적 감수성이 정확히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민족적 특정성과 연관이 되는지를 분석할 예정이다. 분석의 틀로는 프레데릭 제임스의 [정치적 무의식]와 폴 윌레만의 국가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에 대한 간단한 약력을 적어야 이 글을 이해하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 출신으로,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정확히는 증조할아버지가 우크라이나 오스트로폴 출신이며 제임스 그레이의 집안은 예술하고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유대인 중산층 이였다. (이는 후술한 제임스 그레이의 회고하고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가 태어나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낸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는 러시아계 미국인/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이 브라이튼 비치를 중심으로 찍혀지고 있으며 주요 무대 배경이 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는 미국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로컬’과 ‘민족’이라는 특성이 상당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감독으로 손꼽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여러모로 두 가지 프레임으로 흥미로운 분석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가 감독한 영화는 미국 내 러시아 유태계 이민자라는 민족 정체성과 비서사적으로 쌓여온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어떻게 문화 형성체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이끄는 운명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 간의 긴장이 ‘멜로’라는 감수성으로 맺혀 장르 서사를 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법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런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일견 상품화된 문화제국주의를 세계에 팔고 있는 미국 영화의 일반적 흐름하고는 차별화되는 구석이 있다.


이 글이 그의 영화 중 [리틀 오데사]  (혹은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와 [투 러버스]를 분석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꼽히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가 범죄 장르와 가족 드라마로써 제임스 그레이의 맹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투 러버스]는 범죄 장르에서 벗어나 ‘가족 드라마’와 ‘멜로적 감수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준 최초의 제임스 그레이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미그랜트]까지 발표된 2014년 시점에서 그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라면 두 영화를 먼저 접근해야 하기에 선택했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의 특징이라면 그가 구사하는 서사 구조는 매우 기본적이고 간단하며 장르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부터 살펴보자. [리틀 오데사]의 갈등과 드라마는 폭력적인 가부장인 아버지에게 반발하지만 동시에 폭력에 물든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아직 ‘비성인 남성’인 소년, 그리고 ‘모성’으로의 회귀라는 유구한 가족 드라마와 차디차고 비정한 범죄 장르의 서사들에서 빌려 왔다. 이 영화는 가족에게서 탈출하고자 고향을 떠났던 킬러가 암살 의뢰를 실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킬러인 주인공 조슈아가 뉴욕 브라이튼 비치를 떠난 이유를,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만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대로 조슈아는 ‘여성’인 어머니 일리나와 옛 연인 알라, ‘비-남성’인 동생 루벤 에게는 애정을 표한다. 


그렇지만 이 모성에 대한 조슈아의 욕망은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어머니는 병으로 끝내 죽고, 알라와 루벤은 조슈아와 갱단의 총격 속에서 사망한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조슈아는, 혼자 남겨진 채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모성에 대한 환상을 꿈꾸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느와르와 가족 드라마의 요소를 빌려 온 [리틀 오데사]에서 그레이는 가부장의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연약한 동생의 변화를 통해 폭력의 유전과 그를 통해 숙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 새로운 전기가 된 [투 러버스]도 기실 살펴보면 로맨스 영화의 기본적인 구조를 빌려오고 있다. 그레이는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고뇌하는 남자라는 평이한 소재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빌려 몽상적이고 우울한 사랑 이야기를 전개한다. 먼저 주인공인 레너드는 유전적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에게 파혼당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하고 동업자인 사업가의 딸인 산드라가 레너드에게 접근한다. 이렇게 산드라와 레너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레너드는 이웃집에 사는 여성인 미셸을 만나게 되고 순식간에 푹 빠지게 된다. 산드라와 미셸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존재로 가정적이고 편안한, 산드라와 달리 미셸은 불안정하고 난잡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미 애인이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레너드는 미셸을 향한 사랑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투 러버스]는 두 개의 사랑을 통해 갈등하는 인물을 통해 ‘안정’과 ‘모험’이라는 두 갈림길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런 일견 간단하고 장르 원형적인 서사들을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미국에 정착한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문화를 상징하는 코드들과 장면들을 집어넣는다. [리틀 오데사]에 등장하는 조슈아와 루벤의 외할머니의 80번째 생신과 어머니 일리나의 장례식,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단성 성가들, ‘러시아’를 연상시키게 하는 인물들의 복장이 그렇고 [투 러버스]의 산드라 남동생의 유대인 성인식과 두 가족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식사 자리, 마지막 엔딩의 유대인들이 모여 벌이는 신년회 등이 그렇다. 이 장면들과 세밀한 설정들은 주인공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긴장감하고는 관계없는, 어찌 보면 지극히 ‘민속학’적인 장면들이다.


 그레이는 영화 내에 그런 코드들과 장면을 집어넣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에 민족이라는 코드를 분명하게 상기시키며 장르 서사에 침윤시키고 작동시킨다. 이런 상기가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위치와 연계 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브라이튼 비치로 돌아와 해야 하는 일은 타 민족인 이란 출신의 사업가를 손봐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조슈아가 알고 있던 러시아계 유대인 갱들이 동원된다. 이 와중에 조슈아를 부끄럽게 여기는 조슈아의 아버지 아르카디는 신세를 지고 있는 러시아 갱인 보리스에게 조슈아를 없는 아들이라 칭하면서 보리스와의 관계를 유지시켜 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고자 한다.

그가 사랑했던 범죄 장르 영화의 틀에서 벗어난 [투 러버스]에 이르면 유대인 커뮤니티의 그림자와 그와 대조되는 타자의 커뮤니티는 더욱더 은밀하고 공고하게 자리매김한다. [리틀 오데사]처럼 [투 러버스]의 유대 커뮤니티는 가족이라는 존재와 맞물려 돌아간다. 레너드가 비유대계 약혼녀와 파혼한 이유가 ‘유전적인 결함’라는 점과 산드라가 가족이 담겨 있기에 뮤지컬인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고 하는 대사에서 유대 커뮤니티와 가족이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레너드는 아버지의 세탁소 사업을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산드라와의 사랑이 유대인 아버지들이 진행하는 사업적인 관계하고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산드라와 레너드의 관계는 미국에 이민 온 레너드의 가족사진 앞에서 시작해 산드라의 남동생이 한 명의 유대인 성인으로써 인정받는 의식의 자리에서 커뮤니티 내에서 선언된다. 이 모든 유대 커뮤니티의 안온한 약속들이 따뜻한 실내에서 진행된다는 것도 주지해야 할 부분이다. 


 반대로 레너드를 유혹하는 비유대계인 미셸의 삶은 가족하고 거리가 먼 존재들로 이뤄져 있다. 미셸은 아버지와 싸우면서 등장하고 그녀의 삶은 클럽과 마약, 춤, 오페라로 상징된다. 또 미셸이 유부남 로날드 (물론 그는 비유대계 백인이다.)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며, 중반부에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유산한다는 점 역시 그녀가 유대 커뮤니티의 가족적인 삶하고 거리가 멀다는 걸 방증해준다. 또한 따뜻한 방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이뤄졌던 산드라와 달리, 미셸을 향한 레너드의 사랑은 창밖으로 훔쳐보기와 사진 찍기라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시작해 실외 옥상의 차갑고 우울한 공기와 빛에서 섹스와 고백, 포옹이 이뤄진다. 그나마 간신히 미셸의 실내로 들어온 레너드는 미셸을 사랑하는 사이인 로날드를 숨어서 지켜봐야 하고, 로날드가 떠난 뒤에도 미셸에게 키스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돌아선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는 그런 민족 커뮤니티에 대한 묘사와 세팅들이 ‘장르 서사’ 자체를 진행시키는데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감행한다. 그런데 그런 감행이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에 깊게 침윤되어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이 감행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이다.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민족 커뮤니티에 소속되길 원하거나 아니면 탈주하길 욕망하며, 그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욕망들이 얽히면서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를 작동시키는 장치가 된다. (후술하겠지만 이 욕망은 유태 문화의 민족주의하고 거리가 멀다. 차라리 커뮤니티를 향한 지극히 개인의 욕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렇게 집어넣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들과 그것의 서사적인 위치는 폴 윌레만이 주창했던 민족적 특정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족적 특정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폴 윌레만은 민족적 특정성과 민족주의 담론을 이야기하면서 ‘흑인 영국 필름’에 대한 예시를 들었다. 흑인 영국 필름은 분명 영국적이지만 민족주의인 것은 아니다, 라는 윌레만의 지적은 흑인 영국 필름이 영국 흑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경우에는 그 영화에서 흑인 문화를 재발견하고 재배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윌레만은 그런 재발견과 재해석을 비판하며 그것과 다른 대안적인 방법론을 찾고자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나오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민족적 특정성이, 캐릭터를 설명하진 않고 그것이 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그것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다는 것이다. 즉슨 유태 문화가 어떤 서사의 방아쇠가 되진 않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서사의 방아쇠는 유대 문화라는 로컬리티를 지워내도 전개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다곤 부정할 수 없다,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시선과 달리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인 캐릭터들은 이미 자신이 유대인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먼 ‘미국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유대인임을 자긍심을 가지고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유대 민족의 삶이 자연스럽게 미국적인 삶에 침윤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위에서 언급한 [리틀 오데사]에서 나오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며 흐르는 유대교 단성 성가 음악과 아버지 아르카디의 어머니 생신을 기념해 벌어지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가 그렇다. 전자의 경우, 결말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고 조슈아가 멍하게 앉아 있는 장면에서 단성 성가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존재하며 ‘중력’을 구성한다. 이 중력은 서사 속에 있는 조슈아를 끌어당기며 안착시키려고 한다. 이런 단성 성가의 케이스처럼 영화가 유대 문화에 침윤되어 있으며 조슈아를 끊임없이 끌어당기려고 하고 조슈아는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증오하는 아버지를 밀어내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여성과 비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에 대한 애정이 중력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중력은 후자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 같은 장면들에서 비서사적으로 드러나면서 그것이 ‘디아스포라의 역사’하고 연계되어 있다는 걸 분명하게 한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 커뮤니티에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결말에 이르러선 그 커뮤니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박살났기 때문이다.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중력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서 언급한 역사론 하고 언급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슨은 “역사는 텍스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근본적으로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덧붙여야 할 것은 역사는 텍스트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슨은 그렇게 텍스트 화된 역사가 하나의 상처로써 작동한다고 보고 있으며, 그것이 ‘욕망을 거부하고 집단적 실천뿐만 아니라 개인적 실천에도 거침없는 한계들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을 끌어당기는 중력은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인 역사에서 잉태된 존재이며 그것은 영화 내의 구체적인 텍스트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서사와 텍스트 주변에 분명하게 존재하며 서사 속에 있는 인물을 끌어당겨 개인적인 실천에 한계를 부여하고 개인을 커뮤니티에 안착시키게 하려고 한다.


 이 와중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은 그 중력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음’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멜로의 감수성이 드러나고 있다. 즉 비서사적으로 구축된 ‘민족적인 정체성’이 서사 속으로 침윤해 커뮤니티 내의 안착을 유도하는 중력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캐릭터를 젖어 들어가게 해 캐릭터를 무겁게 한다. 그렇게 축축해진 캐릭터는 침묵과 슬픔이라는 감정 속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것은 곧 멜로의 감수성으로 귀결된다. 요약하자면 제임스 그레이의 멜로는 침윤 혹은 젖어 들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서사적인 역사가 만들어내는 멜로적 감수성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적과 달리 정치적 한계로 연결되지 않는다. 창작자로써 그레이는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사랑’한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폭압적인 가부장 아래에 있는 혈연적으로 연결된, 비-성인, 비-남성 유대인들(동생 루벤, 어머니 일리나, 옛 연인 알라)에게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유대 커뮤니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조슈아는 처음 의뢰를 받고 고향과 거기에 있는 유대 커뮤니티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며, 그 수장인 아버지와 불화한다.


 이런 두 감정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제임스 그레이는 인터뷰 할 때마다 자신의 가족사를 자주 언급하는 편인데 이런 유대 커뮤니티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과 관련해 흥미로운 인터뷰가 있다. 실은 그레이의 가족들은 처음 그가 영화감독이 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은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연줄도 없다. 할리우드 출신도 아니다. 넌 절대 감독이 되지 못할 거다."라고 말하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레이는 이렇게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 있다.”라고 정리한다. 이 발언은 그레이 영화를 휘감고 있는 민족과 가족, 그리고 멜로적 감수성 간의 관계를 접근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결국 유대인 커뮤니티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혈연 가족의 양면적인 모습에서 그레이는 애정과 동시에 그런 양면성이 만들어내는 중력에 얽매여 있음에 슬픔과 동시에 떠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두 개의 모순된 감정은 그의 영화 내에서 단죄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머물러 있으며 그레이의 인물들을 침윤시키고 멜로의 감수성에 젖게 할 뿐이다.


 이 멜로의 감수성은 [투 러버스]에 이르면 완연해진다. [투 러버스]에 이르면 주인공이 소속된 유대 커뮤니티는 [리틀 오데사]와 달리 파괴되지 않는다. 레너드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도, 총격전으로 가족을 잃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인 레너드를 옭아매어 잡아 담기는 중력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레너드는 그 속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레너드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인 비유대계 여성 미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겐 매몰차게 대하지 못한다. 그렇게 정리하고 미셸을 찾지만 정작 미셸은 ‘사랑을 주는’ 비유대계 남성을 선택해 레너드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실연당하고 해변에 고통스럽게 머물러 있던 레너드는 미셸에게 주려고 했던 반지를 주워 새해를 맞이하며 유대인 커뮤니티의 편안함 속에 있는 산드라에게 선물해준다. 그렇게 중력에 안착하려는 순간, 산드라를 껴안고 있는 레너드의 눈빛은 흔들린다. 이 흔들리는 눈빛에서 관객들은 두 개의 모순되고 상반된 개념과 감정들인. 떠남과 안착, 슬픔과 기쁨. 변화와 안정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미셸과 함께 떠나려고 해도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매정하게 버리지 못하는 레너드의 모습과,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산드라 품 안에서 행복해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안고 싶어 했던 미셸을 잊지 못하는 레너드가 동시에 등장하는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제임스 그레이의 축축한 멜로적 감수성의 총화이며 동시에 그 감수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결말은 영화 중반부에서 슬쩍 흘러나왔던 지하철을 타고 가며 사랑을 나누는 타 인종 간의 커플을 (유대인 커뮤니티 바깥에 있는) 타자와의 사랑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너드하고 연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기존의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로 해석될 수 없는 영역에서 멜로적 감수성을 띈 중력을 통해 비서사적으로 축적되어온 민족 커뮤니티와 그 커뮤니티하고 갈등하는 캐릭터를 이야기하고자 하며, 이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미국 바깥의 ‘내셔널 영화’와 대척되는 ‘미국 영화’라는 일반적인 공식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드러나는 비서사적인 역사성과 유대인 커뮤니티의 민족적 특정성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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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객잔]과 [안녕, 용문객잔]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장르적 구조과 감정

(과제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호금전의 [용문객잔]과 이를 인용한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은 동일한 결말의 구조와 샷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사라짐이라는 샷이다. 그리고 이 사라짐이라는 샷에는 공통적으로 애잔함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애잔함의 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게 흥미롭다.


[용문객잔]의 결말에선 영화 내내 조소겸으로부터 충신 우겸의 자식들을 지키던 협객들이 동료의 희생을 겪으면서까지 조소겸을 물리치는 컷이 나온 직후 살아남은 협객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이 나온다. 여기엔 어떤 내러티브적인 설명이나 이별의 대사도 없다. 심지어 그전까지 중요한 인물들이였던 우겸의 자식들을 비롯한 생존자들도 제대로 된 대사 없이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뿐이다. 살아남은 협객들은 왼쪽으로 향해 걸어가 사라진다.


 이런 [용문객잔]의 결말 구조는 미국 서부극의 구조에서 자주 사용하던 결말을 차용한 것이다. 존 포드의 [수색자]이나 [셰인]의 결말에서 집약되듯이, 서부극에서 커뮤니티의 위기를 해결한 영웅은 구원을 원했던 커뮤니티를 벗어나 자신이 왔던 자연 (예를 들면 모뉴먼트 밸리)과 그것이 제공하는 풍광으로 걸어들어가 천천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이런 지평선 쪽으로 사라짐은 곧 서부극의 영웅을 자연이 가지고 있는 원초성과 자유와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자연=영웅과 문명 이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문명의 전경에서 출발해 광활한 자연의 후경으로 사라져 가는 서부극 영화의 미장센은 곧 신화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어졌다.  


다시 [용문객잔]의 결말로 돌아가면 이 장면은 와이드 샷으로 찍혔기에 인물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오로지 형태로만 등장한다. 그리고 이 장면엔 아무런 건물들도 등장하지 않고 강만 나온다. 협객들은 카메라와 멈춰서서 배웅하는 인물들이 있는 화면 오른쪽=전경에서 멀어져 화면 왼쪽에 있는 후경인, 아무도 없는 지평선으로 향해 사라진다. 이렇듯 [용문객잔]은 서부극의 결말 샷을 인용하면서 중국 무협의 신화성을 영화 속에서 만들어낸다.  [용문객잔]은 이를 통해 신화화된 무협의 세계 속에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과 예를 지키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사라지는 강인한 영웅들을 찬양하고 동시에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다만 [용문객잔]의 신화성은 커뮤니티 자체보다는 충절 쪽 (무고하게 죽은 충신 우겸의 의지)에 방점이 맞춰져 있다.) 


[안녕, 용문객잔]에서도 얼핏 보면 이런 비슷한 구조의, 신화화된 공간과 사라진다는 결말을 취하고 있다. 문을 닫는 영화관을 뒤로 하고 일을 마친 영사 기사가 빗 속으로 사라지고 그 뒤로 절름발이 여자 역시 빗속으로 나서서 집으로 절뚝절뚝거리며 돌아간다.  그러나 [안녕, 용문객잔]은 [용문객잔] (나아가 서부극)의 어법을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 배치나 미장센, 나아가 그 의미는 인용의 대상이 된 [용문객잔]하고는 전혀 다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절름발이 여자는 [용문객잔]처럼 카메라에서 멀어지는게 아닌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화면 오른쪽 끝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빠져나간다. 그렇게 빠져 나간 후 화면의 후경에 남아있는 것은 내일이면 사라질 영화관이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용문객잔]과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먼저 문명과 생존자들에게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던 용문객잔의 협객들과 달리, [안녕, 용문객잔]의 절름발이 여자는 자연=후경=영화관에서 벗어나 도시=프레임 바깥으로 편입되어 간다. (혹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영화 속 절름발이 여자, 나아가 먼저 퇴장한 영사 기사는 협객이나 카우보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영웅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문명에 속한 개인들이다. 따라서 자연히 영화 끝까지 프레임에 남아 있는건 ‘신화’ 정확히는 ‘신화의 공간’이다.


 즉슨 신화가 문명을 떠나는게 아니라, 문명이 신화를 스스로 떠나는 것이다. 이 영화 내용이 한때 신화를 상영하며 사람들을 기쁘게 했던 공간이 마침내 신화로 화하며 사라지는 걸 다루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안녕, 용문객잔]의 결말의 미장센은 저물어가는 신화를 뒤로 하고 현실/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녕, 용문객잔]은 신화인 용문객잔의 장면과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고 그것을 보는 관객들을 보여주는 메타픽션적인 전개와 연출과 더불어 원작 결말의 미장센을 뒤집어놓으면서 [용문객잔]에 담겨있는 신화적인 퇴장과 고유의 가치관을 거꾸로 전유해 [용문객잔]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영화사 내의 신화성과 아우라, 그리고 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구식 단관 영화관에 대한 메타픽션적인 추모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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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버지, 다시 살아나는 아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과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비교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Nameless Gangster] (2012)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2012)

Nameless Gangster : Rules of Time 
8.2
감독
윤종빈
출연
최민식, 하정우, 조진웅, 마동석, 곽도원
정보
범죄, 드라마 | 한국 | 133 분 | 201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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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0000)

Vengeance Is Mine 
8.3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출연
미야코 초초, 바이쇼 미츠코, 오가타 켄, 오가와 마유미, 키요카와 니지코
정보
드라마, 스릴러 | 일본 | 139 분 | 0000-00-00


*과제용으로 제출한 글을 조금 다듬어서 낸 글이라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두 영화의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과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이하 [범죄와의 전쟁])은 내용 자체로 보면 다른 장르에 속해있다. [범죄와의 전쟁]이 깡패로써 성장해가고 몰락하는 과정을 띄고 있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쫓아가는 영화다. 그러나 일견 관계 없어보이는 두 영화지만 결말의 구조는 서로 닮아 있다는게 흥미롭다. 이 글에서는 이 둘에 담겨있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립에 다루면서 정치사회적인 맥락을 발견하고 동시에 두 영화 속의 세세한 점들의 차이가 어떻게 궁극적으로 질문의 깊이가 가지는 차이로 이뤄지는지 다뤄볼 생각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은 혈연적인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게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범죄와의 전쟁]은 이 관계가 조금 복잡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익현은 자식이 있는 가장으로 묘사되지만 정작 영화 속에서 이 자식들은 익현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동기로써 제시될 뿐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한다. 형배 역시 아버지가 있지만 이 아버지는 먼 친척인 대부님의 말을 잘 들어라라고 훈계하고는 극에서 빠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이 실제적인 부자 관계는 형배와 익현 쪽이 훨씬 강하게 제시된다. 이들은 실제 부자 지간은 아니지만 점점 ‘대부님’과 ‘형배야’라는 호칭으로 집약되는 끈끈한 관계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이제 두 영화의 결말을 보자. [범죄와의 전쟁]의 결말은 이렇다. 먼 친척인 최형배에게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여 최형배를 사법 거래로 넘겨준 최익현은 형배가 증오어린 시선을 받으며 퇴장하는 것을 그저 멍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익현은 자신의 아들을 검사로 키워 “반달”에서 벗어나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손주 돌잔치에서 앞으로 탄탄대로로 나갈 자신의 가족에 대한 미래에 승리를 자축하던 익현을 향해 갑자기 카메라가 그를 천천히 트랙 인 하더니 형배의 목소리로 “대부님”이라는 말이 나오고 익현이 힘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끝난다. 


 다음은 [복수는 나의 것].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인과 사기를 저지르던 에노키즈 이와오가 잡히고, 이와오는 아버지인 에노키즈 시즈오에게 “죽어도 당신과 난 남남이야. 당신도 날 용서하지 않겠지만 나도 당신을 용서 못해.”라고 말한다. 5년 뒤 사형당한 이와오의 유골을 시즈오와 이와오의 아내인 카즈코가 수습해 산에 간다. 케이블카에서 이와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저런 미래를 상상하던 시즈오와 카즈코는 산에 도착해 유골을 뿌리지만, 유골은 갑자기 프리즈 프레임으로 정지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몇 번이나 유골을 뿌리려는 시도는 프리즈 프레임으로 저지되고 끝내 유골은 허공에 멈춘 채로 영화는 끝이 난다.


먼저 이 두 영화의 결말이 어떤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어떻게 비슷한지 보자. 이 결말들은 본편의 후일담 형식으로 결말이 놓여져 있다. 이 공간은 본편의 사건에서 살아남은 캐릭터들이 앞으로 그들이 나아갈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축복하는 자리로 그려진다. [범죄와의 전쟁]은 익현의 아들이 검사로 임명 된 뒤 돌잔치에서 끝을 맺고 [복수는 나의 것]은 5년 후 유골을 받아 재를 뿌리면서 시즈오와 카즈코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복수는 나의 것]은 여기에다 죽은 자의 추모라는 의미가 덧붙여진다. 


두 영화 모두 과거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현재를 축복하지만 어떤 유령적인 존재가 그 행복함을 방해받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는 아버지이고 프레임 밖으로 퇴장하거나 죽는 존재는 아들이나 아들같은 존재이며 이 퇴장당한 아들들은 아버지들에게 배반당해 정부/사법 기관에게 넘겨져 처벌받은 후 후일담에서는 은근슬쩍 그 존재가 무시된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익현은 형배를 사법 기관에 팔아버린 후 익현은 단 한마디도 형배를 언급하지 않으며 오직 혈연으로 이어진 자신의 아들에 대한 자랑만을 늘어놓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에서 시즈오와 카즈코는 “우릴 천국의 사원으로 데려가달라”라고 말하면서 이와오의 유골을 받아 뿌린다. 이 행위에는 이와오에 대한 추모가 보이질 않고 오히려 미래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두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아들 간의 관계가 어떤 유사한 정치적인 함의를 띄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살아남은 자들인 아버지를 보자. 두 영화에서 이 아버지들은 후술한 ‘아들’과는 반대로 실제로는 욕망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권력에 비굴한 이중적인 인물상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큰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이중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두 영화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범죄와의 재구성]의 익현은 ‘반달’이라는 말에서 들어나듯이 완전한 건달도 그렇다고 일반인도 아닌 위치에서 탐욕스럽게 자신의 이득을 챙기면서도 힘의 논리에는 비굴하고 이중적인 캐릭터다. 또한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법으로 대표되는 공식적인 권력에 대해 친화적이며-그는 항상 수첩에 담긴 수많은 인맥을 통해 법망을 피해다니며, 자신의 아들이 검사가 되길 원하며 실제로 마지막엔 그 소망을 이룬다.-‘아들을 호로 자식으로 만들 수 없다’라고 말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이런 익현은 이중적인 모습은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폭력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익현이 얻어터지는 장면은 상당히 자주 나오지만, 반대로 익현이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은 얼마 되지도 않고 그것조차 형배나 그의 부하들이 행사한 실재적인 폭력 뒤에 소심하게 휘두르거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악다구니하는 수준에 그친다. 이런 그의 비굴함은 그가 초반에 애국애족이라는 이유를 갖다대며 경멸했던 일본인 (그것도 야쿠자)에게서 받은 총알이 없는 리볼버로 구체화된다.


한편 [복수는 나의 것]의 시즈오는 자신의 재산인 배를 빼앗으려는 일본군에게 소심하게 저항하다가 결국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해, 병든 아내를 버려두고 며느리인 카즈코와 묘한 욕망에 빠지면서도 이와오의 비난과 범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려는 이중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특히 시즈오가 야스다에게 부탁해 야스다가 카즈코하고 관계를 맺는 장면은 이런 시즈오의 이중적인 면모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카즈코는 그런 시즈오를 보고 “아버님은 교활한 사람이라고 이와오가 그랬다”라고 말하면서 그 이중성을 확실하게 못 박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이중성은 [범죄와의 전쟁]처럼 폭력보다는 성의 문제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와오가 현지처를 여기저기 만들며 성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분출하는 것과 반대로 시즈오는 카즈코를 향한 성적 욕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서로 관계를 지속시키기 보다는 다른 남자에게 카즈코를 넘겨주는 행위를 통해 변태적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으로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제엔 신앙심의 문제가 개입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설정상 시즈오와 그의 가족은 카톨릭이고 시즈오는 독실한 신자처럼 나온다. 하지만 정작 시즈오는 그 카톨릭 교리에 완전히 따르지도 (카즈코하고 묘한 관계를 이어가는 장면.) 그렇다고 그것을 버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냐, 난 짐승 같은 마음을 억눌렀다. 신을 배신할 순 없었어.”)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에서 종교와 신앙심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익현이 가지고 있는 인맥 네트워크라는 점으로 강조된다.


두 영화 모두 그런 아버지 (혹은 유사 아버지)의 반대쪽에 아들(이나 혹은 유사 아들)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이 두 영화에 나오는 아들들은 아버지의 그런 위선적이고 강한 권력에 대해 비굴한 면모에 대해 냉소하거나 혹은 반항한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가 이중성을 보이는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실천하는데서 드러난다.


먼저 [범죄와의 전쟁]에서 아들 포지션을 맡고 있는 형배를 보자. 처음부터 깡패였던 형배는 익현과 달리 영화 내내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데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빈 총’으로 협박하는 익현과 달리 별로 흉기로 보이지 않는 ‘마이크’를 통해 살벌하게 후려치는 형배의 모습은 완력적으로 익현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리고 폭력성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는걸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형배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유사 아버지인 익현의 어정쩡한 경계선상에 있는 윤리와 행동에 대해 회의감을 품는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중반부에 형배가 건달들의 일에 끼어드려는 익현 앞에서 거울을 깨는 장면인데, 여기서 그는 대부님은 건달도 아닌데 그러면 뭐냐고 물어본다. 익현은 이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깨진 거울을 바라본다. 당연히 거기에 비친 익현의 얼굴상은 일그려져 나타난다. 형배에게 익현은 자신처럼 건달의 욕망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범적인 시민도 아닌 자신보다 더 추하게 일그러진 인간이며 이런 비판적인 시간은 영화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구체화되어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배반을 하게 된다.


한편 [복수는 나의 것]의 이와오의 반항과 갈등은 형배보다 훨씬 더 질긴데다 자멸적인 기운이 강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저지르거나 현지처를 만들고 대학 교수로 위장해 여자를 불러달라고 말하며 섹스에 탐닉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와오는 형배와 달리 어느 한 구석에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욕망에 충실하게 방종하고 잔인한 행동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반항을 한다. 


형배가 그렇듯이 이와오는 아래에서 언급할 모종의 사건으로 아버지에 대해 실망한 뒤 아버지의 이중적인 윤리관과 비굴한 태도를 비웃으며 반항적이고 비판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벳푸 여관에 돌아온 이와오가 진사을 알고 카즈코에게 매춘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게 했다고 따지고 시즈오와 카즈코가 이를 반박하자 내숭떨지 말라며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부분이다. 이와오가 보기에 아버지 시즈오는 욕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욕망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것이며 자신은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둘에게 선언한다. 또 카즈코에게 “아들은 낳지 말라”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이와오 자신이 이 반항을 질긴 무언가 (혈연)로 보고 있으며 그것을 궁극적으로 끊으려는 의지를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와 갈등이 캐릭터의 동선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데 벳부의 여관이라는 고정된 장소에 머무르며 살아가는 아버지 시즈오와 달리, 이와오는 일본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사기를 치고 살인을 하고 섹스를 한다. 즉 캐릭터의 이동과 정체가 캐릭터를 설명하고 대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가 아버지를 향해 ‘난 내 다리로 자유롭게 도망다녔어’라고 말하는 부분은 그가 가지고 있는 반항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들이 있지만 두 영화는 이중적이고 비굴한 아버지와 권력에 반하며 욕망에 충실한 아들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두 영화에 등장하는 이중적이고 부정적인 아버지들과 반대로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아들이라는 대립 구도가 궁극적으로 시대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지점이 극적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서 또다른 공통점이 생긴다. 그 점에서 두 영화에서 다룬 아들과 아버지의 대립은 곧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립의 끝에서 아들은 끝내 아버지를 몰아내지 못하고 패해 스크린 밖으로 사라지고 아버지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복수는 나의 것 [復讐するは我にあり / Vengence is Mine] (1979)


먼저 [복수는 나의 것]은 사건의 배경인 1963년을 기점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와오가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 시즈오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천황의 어명을 받들어 제국주의적 침략을 기획하는 군국주의적 권력이 휘두르는 횡포에 대해 소심하게 반항을 하다가 이와오가 ‘폭력’이라는 실재적인 반항을 하자 겁을 먹고 무력한 반항마저 취소하고 군대를 “일본 제국을 위해 배를 바치겠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이와오는 전후에도 비굴한 방식으로 살아남고도 윤리에 반하는 욕망을 품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윤리에 반하는 욕망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킨다. 


 여기에는 역사가 잉태한 국가 간의 정치권력 문제도 끼어드는데 초반부에 이와오가 미군복을 입고 영어를 하며 방종한 생활을 이어가는 부분은 그가 아버지-일본에 대한 반항의 도구로써 일본을 굴종시킨 나라인 미국을 이용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틀에서 벗어난 뒤에도 이어져 이와오가 궁극적인 탈주의 공간으로 대만이나 오키나와라는 여기 일본이 아닌 타자의 공간을 선택하려고 하는데서 드러난다. 한편 [복수는 나의 것]에서 아버지를 굴종시키게 한 더 큰 아버지-국가는 명확한 캐릭터로 드러나지 않고 ‘천황의 명’이라던지 ‘배를 강탈하려는 일본 해군’, ‘경찰’이라는 모호한 대상으로 지칭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마무라 쇼헤이는 전쟁에서 패한 후로도 여전히 일본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더 큰 아버지-국가”인 군국주의의 망령이 "실제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한편 [범죄와의 전쟁]의 시대적 배경은 제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 범죄와의 전쟁은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정권 시절에 행해졌던 공권력의 특별 단속을 지칭하고 있으며 실제로 초반에 그 여파를 보여준 후 익현과 형배의 성장과정을 묘사한 후 시대가 1990년대로 넘어가는 후반부부터 그 정책이 본격적으로 깡패 개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과정을 통해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있다.


물론 이 정책은 깡패와 별다른 윤리적 도덕적 차이가 없는 공권력이 (이는 법령이 시행되자마자 깡패들과 내통하고 있던 경찰들이 연락을 취해 알리는 장면과 깡패들을 때려잡는 형사들의 모습이 지금까지 묘사해왔던 영화 속 깡패들의 폭력 장면과 그렇게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준법과 건전한 사회라는 명목 하에 초법적이고 강제적인 폭력을 써서 민주화의 여파로 끝나지 않은 혼란을 뒤덮으려 한다는 점에서 적인 성격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정책을 실현한 노태우 정권이 전두환과 함께 군부 출신인데다 전두환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교묘한 정책으로 민주화를 갈라놓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이 발생한다.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범죄와의 전쟁]은 그 더 큰 아버지-국가의 얼굴이 검사 조범석이라는 분명한 캐릭터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범석은 깡패와 다를 것 없는 행동을 보이는데다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제외하면 형배에겐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익현을 윽박지르고 갈구는 장면이 훨씬 더 나온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정책에 대한 형배의 선택도 이 범죄와의 전쟁에서 형배는 대적하는걸 포기하고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도피조차 공권력과 내통한 익현이 팔아넘기는 것으로 좌절된다. [복수는 나의 것]의 이와오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자랑하듯이 범죄를 저지르다 우연한 신고로 잡히는 걸 생각해보면 [범죄와의 전쟁]의 형배는 더 큰 아버지인 공권력에게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잡히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차이점은 두 영화 초반부에도 잘 드러난다. 사실 이 장면도 둘 다 주인공들이 경찰에 구속되고 그가 어떻게 범죄의 길에 빠졌는가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잡혀들어가 회상하는 건 아들인 이와오고, [범죄와의 전쟁]에서 잡혀들어가 회상하는 것은 익현이다. 즉 비슷한 주제와 타락, 대립 구도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서술하는 주체가 다른 것이다. 


 여기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들이 법과 공권력에 반항하려고 빠져나가려고 하는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법에 반항하며 빠져나가 이익을 챙기려는 것은 아들보다는 외려 아버지 쪽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공권력에서 탈주하는 것은 공권력에 굴종했던 아버지의 이중적인 삶의 행태를 폭로하고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자멸적인 방식이라면 [범죄와의 전쟁]에서 공권력에서 탈주하는 것은 탐욕스럽게 이득을 취하면서도 정상적인 삶과 가족을 유지하려는 아버지의 이중적인 행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차이는 “나는 짐승이다”라고 선언하는 이와오의 대사와 “호로자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형배의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다시 결말로 돌아가보자. 이 유령이 된 아들들이 살아남은 아버지들의 축복과 행복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궁극적으로 이 방해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나는 본다. 즉 유령으로써 아들이 드러내는 기법과 거기에 담긴 주제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유령이 된 형배는 목소리로 드러나 대부님을 호명하지만 그는 목소리에만 머물며 영화의 이미지에서 강하게 차지하고 있는건 익현의 피로하고 초췌한 얼굴이다. 반대로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령이 된 이와오는 프리즈 프레임을 통해 자신의 유골이 날아가는 걸 집요하게 방해하고 끝내 프리즈 프레임 된 유골 이미지로 영화가 끝나게 된다. 


이 때문에 나는 [범죄와의 전쟁]와 [복수는 나의 것]은 아들의 유령이 비정상적인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국가 권력에 굴복하면서 살아온 아버지들의 비굴한 생존방식을 따져 묻지만 궁극적으로 질문의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범죄와의 전쟁]에 등장하는 아들 형배의 유령은 끝내 혈연-아들의 성공을 축복하는 아버지 익현의 이미지에 깊숙이 침범하지 못하고 이미지가 아닌 익명의 시선과 음향으로 현현해 질문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리고 그 혈연-아들은 영화 내내 아무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에서야 드러나는데 아버지에 대해 복수하거나 그것을 단죄하려는 행동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결국 영화의 주체성은 형배에게 넘어가지 않고 익현에게 머문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아들 이와오는 자신을 망각하고 새 미래로 나가려는 아버지 시즈오와 아내 카즈코의 행동을 프리즈 프레임이라는 실재적인 이미지 조작을 통해 방해하고 끝내 성공해버린다. 비록 유골은 실제 세계의 법칙에 따른 중력에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겠지만 픽션인 영화에서는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영화의 주체성마저 바꿔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두 영화는 유령적인 주체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갈라진다. [범죄와의 전쟁]은 한 시대를 비굴하게 살아남은 아버지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그에 대한 부채 의식과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말 그대로 비굴하게 살아남은 아버지를 영화적인 언어로 복수하려고 달려들고 있다. 아버지를 향한 두 영화가 보여주는 시선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이고 의미가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복수는 나의 것]은 아버지 세대의 죄악과 비굴함에 대해 철저하게 따지며 냉정하게 묻고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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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 정리

이 글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 (1995, 한나래)에 실린 토마스 앨새서의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를 과제를 위해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번역투에 어색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토마스 앨새서의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1995년 장 두셰가 조르주 멜리에스와 루이 뤼미에르 간의 논쟁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두셰는 가상 현실로의 변화란 한 종류의 사유에서 다른 종류의 사유로의 변화이고, 인간이 실제적인 것과 맺는 관계를 바꾸고, 교란하고 심지어는 국해하려는 목적을 갖는 변화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바쟁이 옹호했던 뤼미에르주의자이 실천했던 영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앨새서는 두셰의 이런 주장과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끌어온 뤼미에르에 대한 인용을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려면서 지난 100년은 몇몇 뤼미에르 추종자들에게서 뤼미에르를 지키는 과정 아니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앨새서는 이 질문에서 사실 뤼미에르는 다큐멘터리적 측면에 대한 것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앨세서는 영화 탄생에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술적인 더 깊은 이유가 있는지를 들면서 영화의 필연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필연성은 고대 회화나 유희에 비롯된 여러 철학적 과학적 실험들에서 증거를 찾고 있다. 이런 계보는 영화라는 것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있었다는 걸 일깨워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시네마토그래프는 19세기에 속하지만 그것의 사회적 측면, 도시적 삶의 현대성에 관여하는 방식, 기술적으로 추동된 커뮤니케이션으로 보면 20세기에 속한다. 즉슨 문화적으로 자신을 정의하고자 하는 특정한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던 것은 전혀 다른 역사를 제공한 동시성과 순간성의 장치에 대한 조급함이였다. 예를 들어 만일 영화를 고전 영화 이론과 영화사의 견해처럼 재현과 의미화 작용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영화를 변형하거나 영화를 생기게끔 한 사회적 공간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간 오후나 저녁 때 수천만 번이나 되는 우리의 경험을 1차적인 증거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19세기엔 분할, 재결합, 조립 가능한 실체로서의 시간을 경제적으로 탐구하고 관리하려는 압력이 있었는데 영화의 사용 가치는 분절하고, 설계하고 최종적으로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연속 촬영 역시 노동하는 신체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영화사를 설명하는 다양한 도입점은 영화의 기원과 초창기가 영화의 미래를 사고하는데 매우 적합한 경로임을 예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한 도입점으로 인해 우리는 또한 역사가들이 아마도 반사실적 혹은 가상 역사로 간주하는 것에 의준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이런 반사실적인 개념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역사를 고려해보고자 하는 태도다. 그 역사들에는 산 자를 유령들이 가리며 영화와 다르지 않게 죽지 않는 자들로 그 공간을 메운다. 이는 산업에서처럼 우리의 꿈 안에서 영화의 위치를 인식하는 적절한 공간을 영화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거나, 가능한 모든 다른 종류의 역사들과 인류가 상상하고 현실로 만들고자 했던 대안적인 역사에 실체를 부여하는 영화사의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엄격히 말해서 영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기묘한 존재론적인 위치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영화 선구자들이 경험한 명백한 실패를 통해 영화에 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그들이 겪은 일들은 그들을 고무시킨 가정, 가치, 그리고 상상된 목표를 더 잘 이해하게 해 주는 자료들이였던 것이다. 영화는 인식론적인 단절로 사고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져 있고, 사용되던 것들을 개선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앨새서는 영화의 유레카적인순간이 아니라 텔레비전과 인터랙티브 미디어,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영화의 미래의 고고학, 영화가 탄생한 순간에 그것이 직면했던 문제가 무엇이였는지 탐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관점은 앨새서의 루이 뤼미에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먼저 앨새서는 영화의 선구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되려 영화의 미래를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머레이는 운동을 분석하기보다는 재구성하려는 사람을 경멸했으며 에디슨 역시 키네토스코프에 관한 특허권을 취득하려 하지 않았다.

루이 뤼미에르는 달랐다. 그는 에디슨이 내치다시피한 크로노포토그래피를 개선해 시스템으로서 개발된 시네마토그래프와 그것으로 만든 영화를 통해 동시대인들에게 마술가로 여기게 하였다. 이런 루이 뤼미에르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반응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 한 종류의 재현인 시각과 또 다른 종류의 재현인 시각의 움직임간의 차이를 강조했으며 이는 리얼리스트적이라기 보다는 마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뤼미에르의 영화는 영화사에서 리얼리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앨새서는 두셰와 반대로 뤼미에르 영화가 갖는 극단적인 인위성과 정교함이 갖는 스타일의 의지와 형식적인 구성의 의식적인 원리에 주목하며 이것이 대단히 생산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은 리얼리즘이나 마술적인 이미지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점을 발견한 사람들은 196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 아방가르드 작업을 했던 영화 감독들과 비평가들이였다. 그들은 낯설게 하기 전략을 사용해서 비규범적이고 비내러티브적인 연출을 성취했고 대안적인 역사에 도달하는 계보를 창조했는데 이는 뤼미에르 영화를 형식적 일관성과 메타시네마적인 구조의 견지에서 해독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앨새서는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배치를 갖는 뤼미에르의 단일 숏과 단일 장면의 영화는 플롯이 없는혹은 조정, 편집, 손대지 않은 기록이 아니라 연속적인 내러티브가 조심스럽게 취사 선택된 많은 결정들을 반영하는고도로 구조화된 것이라는 도텔바움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도텔바움은 뤼미에르 영화의 도입과 결말을 주목하면서 결말이 영화의 도입부와 재결합하거나 도입부를 거꾸로 반영하고, 매우 효과적인 내러티브의 종결을 제공하는 행동과 사건을 기록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시간적 공간적 구성은 사건 그 자체의 인과적 혹은 기능적인 논리를 전경화하고, 영화의 시작이 행위의 시작과 일치하면서 그것을 보강하도록 한다.

이런 행동의 범위와 지속이 영화 그 자체에서 신호화 되고, 그것이 내러티브 서스펜스와 관객을 능동적으로 참여케 하는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도텔바움은 뤼미에르 영화에서 매우 복잡한 공간의 구조적인 사용과 주인공, 액션의 반복, 프레임 내의 운동의 이중화와 깊이 있는 배치의 증거를 발견하는데 이는 단순한 내용을 굴곡시키는 미묘한 형식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영화는 또한 몇 가지 수준에서 기본적인 내러티브 구성, 즉 균형, 불균형, 균형의 회복과 같은 3박자라는 최소한의 요구를 존중한다.

그리하여 묘사되는 행동의 본성과 지속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닌 필름의 한정된 길이와 허구적인 사건과 물질적인 대상으로서의 영화가 스펙터클하게 수렴하면서 출연하는 서스펜스가 발생하게 된다. 뤼미에르는 심도와 공간을 활용해 특정한 종류의 공간적 실험을 시도한다. 뤼미에르의 영화 안에 내포된 관객은 헤라클레이토스적인 강의 비가역성에 깊이 몰두하는 전형적인 영화 관객이 된다. 이 영화 관객은 회화나 스틸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 즉 물리적으로 자유롭게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관객과는 다르다. 운동을 포함하고 눈을 집중시키는 프레임과 카메라 배치 기능이 가리기와 겹치기의 유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앨새서는 뤼미에르에게 부여된 다큐멘터리의 아버지라는 칭호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이 점은 아방가르드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구조적 특징의 역사적인 원리를 우리가 어디에서 발견하는가, 그리고 루이 뤼미에르에게서 어떻게 이 역사적인 원리의 구체화를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이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성공은 사실 영화 자체와는 무관하다. 시네마토그래프는 뤼미에르가 상표를 붙인 소프트웨어를 더 폭넓게 활용하기 위해 개발된 새로운 하드웨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뤼미에르 영화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접근이 흥미를 끄는 것은 그들의 분석이 논쟁적으로 반사실적이라는 점이다. 더 전통적인 영화사적 접근이라면 아방가르드보다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일부분이였다고 주장했겠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계속해서 보여지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닫히면서도 열리는 경험을 보여주기 위해, 그래서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의 순환 필름을 개선하면서 또한 논평하고, 이제 영화가 보드빌의 연속 공연과는 다른 오락적인 공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더 명확한 사회 역사적인 결론으로 이끈다.

세잔 큐비즘 인상주의자를 언급하는 것은 영화사 뿐만이 아니다. 예술사 역시 이미지들의 세계를 이끌어낸 사진과 영화의 독특한 보는 방식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몇몇 예술사가들은 새로운 매체가 암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주목의 형식인 응시를 관찰자에게 부여한다고 강조하며 이미지의 전체적인 일관성을 고려하면서 점차적으로 이미지를 구성하거나 이미지에 손을 대는 리얼리즘적인 응시와 이미지를 통과하는 꽃으로, 또한 이미지를 분해하고 분석적으로 이미지에 스며들기 위해 누이 시각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쪽으로 더 향해 있는 자연주의적인 응시를 예시로 들었다. 앨새서는 이런 점이 흥미로운 것일지 몰라도 영화 선구자들을 고무시킨 역사적인 상상과 개념적인 전제를 이해하는데에는 부차적이고 성급한 범주화라고 보고 있다.

앨새서는 그러나 다른 역사주의적 관점이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픽한 시각에 관한 개념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전통적 이미지 보기와 관람으로 거슬러올라가는데 이는 사진적인 시각을 실천하면서 발전했고 그 자체 이미지를 사고하는 방식이자 이미지를 보는 방식이다. 이는 또 시각 예술에서 회화적인 것의 한 세기로부터 차용한 것이자 시각을 소유하는 행위를 함축하는 것이다.

시각을 소유하는 행위는 스테레오스코프에 강화되었는데 이는 1890년대에 독일에서 발명된 물품이다. 24명의 사람이 앉아서 천천히 회전하는 슬라이드 쇼를 교대로 볼 수 있게끔 한 회전식 슬라이드 상자인 스테레오스코프는 뤼미에르에게도 영향을 미쳐 깊이 있는 무대 배치, 화면 밖 공간의 사용, 시선의 각도와 축 모두가 특정한 관람 방식과 결합했다. 즉슨 스테레오스코프는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과 비평가들이 이영화에서 발견한 형식주의적인 강박 관념에 역사 유물론적인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이 스테레오스코픽한 시각이 진부한 것이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시각에 대한 연구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스테레오스코프를 언급하는 것은 루이 뤼미에르가 평생동안 3차원 관렴뿐만 아니라 컬러 사진, 사운드 계량 장치에 몰두했다는 것을 이해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미심쩍어 했던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뤼미에르의 관심사를 이미지-재인지, 인공지능 기계, 광학적이고 음향적인 센서를 중요하게 사용하는 현대적인 작업과 연결시키게 해준다. 뤼미에르의 실천이 갖는 스테레오스코픽한 차원이 그를 그의 가장 가까운 후계자들과 구별짓게 하면서 과학적인 선임자와 같은 계보에 놓이게끔 한다. 뤼미에르는 지각을 분리시키고 시각의 차이를 통한 시각을 사용했고, 평면적이면서 동시에 심도감이 있고, 통일되면서도 분할되어 있고, 상이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집중되어 있는 두 층위나 세 층위의 이미지를 눈으로 보게끔 만들었다. 눈이 이미지를 스캐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놀랄 만한 것이였다. 우리는 또한 흥미와 매혹의 관점이 증식됨을, 그리고 그것이 단안 원근법에서 벗어나게 함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움직이는 이미지가 고정되고 정적이던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움직이고 살아나게 한 연습의 결과로서 나왔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효율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공간에 대한 인상을 만들어낸 스테레오스코프를 특이하게 개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반사실적인 것이 아니다. 외관상으로는 3차원적인 환영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시각장과 회화적인 경험에 대한 진기한 독해를 위해 구조화된 이 공간이 루이 뤼미에르를 원근법적인 리얼리즘의 미학이나 환영주의의 영향으로 이끌고 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 둘이 영화의 역사를 규정짓게 된 이후론 뤼미에르는 영화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영화에서 환영주의의 승리는 단지 실증주의적 역사의 흔적일 뿐이다. 그 역사 뒤에는 많은 가상 역사가 숨어 있다. 환영주의를 통해 루이 뤼미에르를 그 영화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영화의 첫 번째 우두머리로 상징화는 것은 그의 시네마토그래프가 발생시킬 수 있는 환영주의를 통해 가능한 보기를 검토하고 상세함과 정밀함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가 추구한 독특하고 개인적인 의제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뤼미에르가 영화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21세기와 가상적인 것의 패러다임이 초래할 여러 가능성을 위해 그를 보존해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앨새서는 루이 뤼미에르가 만든 이 가상성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뤼미에르는 그것의 선조와 산파자였으며 그렇기에 위대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경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결국 우리 자신(과 영화)를 잘 알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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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돌아와서 왜 떠나가는가?

[수색자]가 [라스트 오브 어스], [스플린터 셀: 컨빅션], [인간 합격], [유레카]에 드리운 트라우마와 재생의 그림자

존 포드의 [수색자] (1958)는 서부극 영화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영화다. 시대착오적 영웅인 에단 에드워즈가 기나긴 시간에 걸려 코만치 부족에게 납치당한 조카딸을 찾느라 5년동안 수색을 벌인다는 내용의 영화다. 존 포드는 이 영화는 끔찍한 시간과 사건을 넘기 위한 한 영웅의 내외적 투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투쟁으로 인해 그가 얼마나 망가져가고 그가 증오하는 대상과 닮아가는지 보여준다.

[수색자]에서 매력적인 부분이라면 엔딩일 것이다. 트라우마의 시간을 넘어서 가족들과 공동체는 다시 한 곳으로 모인다. 허나 그 트라우마의 시간을 넘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인 영웅은 뒤돌아서 떠나간다.

이 결말 자체는 고전 서부극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비판적인 인식에 기반을 둔 결말이지만 (생각과 다르게 이런 식의 공동체와 개인간의 관계에 대한 시선들은 고전 서부극이라 불리는 존 포드의 [역마차]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수색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 데비와 새로운 공동체로 대표되는 마틴이 주요한 극적 원동력으로 등장하기에 ‘트라우마 치유와 공동체 복원’라는 느낌이 강해진다.

걸작이 그렇듯이 [수색자]는 곧 후배 작품들에 직간접적으로 그림자를 남겼는데 이 글에선 서부극에서 점점 멀어지는 형식으로 그 그림자들을 살펴볼까 한다. 비약이 심하고 누설도 많으니 유의하기 바란다.

1. [라스트 오브 어스] (2013): 맹세할 수 있어요?

사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대놓고 현대/근미래의 서부극을 만드려는 욕망이 담겨있는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 욕망이 ‘안정적’으로 체화된 케이스라 생각한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루고 있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주인공 조엘이 겪었던 트라우마로 시작한다. 조엘의 트라우마는 바로 딸을 잃어야 했던 사건이다. 시간은 건너 뛰어 붕괴된 공동체 속에서 상실에 시달리고 있는 조엘은 만사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던 중 엘리를 만나 어쩌면 옛날 공동체를 되살릴수 있다는 희망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주인공 조엘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점은 [라스트 오브 어스]가 서부극의 영역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못 박아두고 있다. 하지만 이 영웅은 서부극의 영토가 아닌 ‘양키’들의 땅인 보스턴에 있다. 왜냐하면 이미 서부는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종종 보이는 폐허에 대한 낭만적인 시선은 서부극 특유의 황무지에 대한 낭만주의를 그대로 가져 온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본다. 이제 황무지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미국 어디에나 있다. 허나 이 낭만은 동시에 절망과 체념도 담겨 있기도 한데, 평범한 서부극과 달리 [라스트 오브 어스]의 황무지는 최소한의 문명마저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선 황무지는 피안이 아닌 하나의 일상이 되버렸다. 조엘과 수많은 사람들이 상실감과 악몽, 우울증, 일탈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허문영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면, “육체적 능력과 물질적 능력이 소진하면 그들에겐 오직 초라한 죽음이 기다릴 것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엔 돌아오는 과정은 떠나는 것과 동일시되어 있지만 조엘과 엘리의 여행이 처음부터 치유로 시작하는건 아니다. 공동체는 이미 붕괴되어 있었고 조엘은 잃어버린 것이 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애써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고 조엘은 생각한다. 파이어플라이가 시도하려는 구 공동체의 복원에도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연스럽게 냉소와 소통의 부재, 욕이 한동안 둘 사이를 맴돈다.

하지만 자신의 동생 토미가 이끄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당연하게도 이 마을은 서부 개척 마을의 그것을 그대로 닮아있다. 심지어 여기서 사람들은 서부극 주인공처럼 말을 타고 다닌다. 당연히 도회적인 파이어플라이하고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 엘리는 조엘의 과거를 알게 되고, 자신을 매정하게 내치려는 조엘에 실망해 혼자 떠나려고 한다.

허나 엘리가 도망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조엘은 끝까지 엘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토미의 마을이 보이는 산 등성이에 왔을때 갑자기 조엘은 토미의 마을을 물끄러미 보다가 엘리를 데려가기로 마음먹는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 장면에서 조엘과 엘리가 내심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했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됬다고 생각한다.

이에 토미는 조엘과 엘리가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다면 돌아오라고 말한다. 전에 등장했던 보스턴은 군대가 그들을 쫓고 있고 반겨줄 사람조차 없다. 빌은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못 박으며 피츠버그는 죽은 도시다. 파이어플라이는 한번도 공동체 편입을 제안한 적이 없다. 그러던 중 토미가 처음으로 돌아올 곳을 제안한 것이다. 어쩌면 조엘은 토미에게 ‘돌아와서’ 공동체에 대한 어떤 믿음과 붕괴된 현실을 확인한걸지도 모른다.

조엘과 엘리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콜로라도와 유타로 간다. 어쩌면 이 두 주는 텍사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옛 서부라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수색자의 촬영지도 텍사스와 유타, 콜로라도다. 배경은 텍사스이긴 하지만.) 여기서 [수색자]의 영역인 납치와 수색이 등장한다. 이 수색 과정은 처음엔 수색 대상이 파이어플라이로 시작했다가, 조엘을 치유할 약, 마지막엔 엘리로 변한다.

셋 다 회복의 모티브를 띄고 있다는건 의미심장하다. 우선 파이어플라이는 구 공동체의 회복을 상징하는 존재다. 조엘을 치유할 약은 말할것도 없고, 조엘이 엘리를 찾아나서는 부분은 이전과 다른 절박함이 담겨 있다. 이 절박함은 에단이 데비를 찾아나설때 보였던 집착과 닮아있다. “절대로 그 공동체가 널(데비=엘리) 데려가도록 하지 않겠다!” 나는 조엘의 집착이 [수색자]에서 데비를 백인들의 집으로 데려오는 것에 담겨있는 함의와 같다고 생각했다.

엘리를 데려간 공동체는 인육을 먹는 집단이다. 조엘도 약탈자 (무법자!)생활을 했지만 인육을 먹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걸 보면 이 집단은 [수색자]의 코만치처럼 철저히 타자의 집단으로 설정한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리더인 데이빗은 스카처럼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나온다.

다만 스카가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정상적인 공동체를 이끄는 등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캐릭터였다면 데이빗은 이해할 구석을 보여주는 척하다가 갑자기 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가 이끄는 공동체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심지어 데이빗의 리더십은 스카와 달리 최악으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카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데이빗에겐 거리를 두게 된다.

새로운 서부극에선 미국 원주민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기에 더욱 극단에 있는 금기를 타자화시켰다고 하면 무리일까? 확실한 것은 그들은 주인공에게 위협적인 타자이며 이를 넘기 위해서 광기어린 행동으로 표출된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데이빗은 엘리에게 머리가 산산조각나 죽는다.

이런 ‘기껏 걸음마를 뗀 공동체가 언제 붕괴할지 모른다’라는 절박함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솔트레이크 시티에 도착했을때 그들은 아무말 없이 기린이 사라지는 것을 잠시동안 본다. (이 장면의 경이감은 후술할 [유레카]에 불쑥 등장하는 자연 풍광과 그것을 관조하는 인물들을 담은 컷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서사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캐릭터의 깊은 면과 치유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조엘은 엘리가 떠나지 말고 자신과 영원히 머물길 원한다.

하지만 엘리는 수색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 엘리는 그 수색을 멈추지 않았을까? 엘리가 과거의 문화에 대한 집착을 (엘리는 노래를 좋아하고영화 포스터에 호기심을 보인다.) 보이는걸 생각해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엘리는 새 공동체만큼이나 구 공동체를 복구하고 싶어한다.

허나 조엘은 그렇지 않다. 작중에선 설명이 없지만, 나는 조엘이 구 공동체를 완벽하게 복구될리가 없으며 복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릴것이라는걸 알아차렸던 거 아닌가 생각한다. 엘리를 맡기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엘리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신이치로가 한 “난 그렇게 오래 못 기다려. 그렇게 오래 못 살 거야.” 대사가 떠오른다. 불행히도 어른에겐 시간은 얼마 없다.

그렇게 그들은 최종 목표인 마를렌과 파이어플라이를 향해 간다. 허나 그 곳엔 충격적인 진실이 있었다. 엘리의 뇌 자체를 드러내야 백신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즉슨 구 공동체를 복구하기 위해선, 새 공동체의 붕괴를 담보해야 한다. 당연히 새 공동체와 치유의 꿈을 꾸던 조엘은 거부하고 파이어플라이를 모두 물리치고 엘리를 들고 나가려고 한다. 이 과정의 연출을 보면 조엘의 이성이 거의 마비되어, 새 공동체에 대한 희망에 빠져버렸다는게 보인다. 구 공동체와 새 공동체의 공존이 불가능해졌을때 조엘은 과감히 후자를 택한 것이다.

이때 마를렌이 등장한다. 그녀는 조엘에게 구 공동체의 가치를 역설하며 그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게임은 장면을 일시적으로 자르고 운전하는 조엘을 보여주면서 그 결과를 ‘유보’한다. 플레이어가 새 공동체는 영영 불가능하는 것인가, 라는 불안감에 잡혀 있으면 뒷좌석에서 깨어나는 엘리가 보이고 조엘의 선택도 그와 동시에 나온다.

[라스트 오브 어스]의 무서움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엘리에게 조엘은 거짓말을 한다. ‘파이어플라이는 너와 같은 항체를 가진 사람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그 놈들은 치료를 포기했다.’ 하지만 반대로 조엘은 구 공동체-파이어플라이를 완벽하게 파괴해버렸다. 엘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다.

토미의 마을에 들어서면서 조엘과 엘리는 서로의 개인사를 털어놓는다. 그때 엘리는 갑자기 아까 말했던거 사실이라고 약속하라고 말한다. 조엘은 잠시 멈칫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엘리가 받아들이며 게임은 막을 내린다.

이를 보듯이 [라스트 오브 어스] 결말엔 유보라는게 중요한 흐름으로 등장한다. 조엘의 선택이 뭐였는지 바로 보여주지 않는 것, 조엘의 거짓말에 엘리가 대답하지 않는것, 조엘이 사실이였다는 말을 할때 잠시 멈칫하는것. 나는 이 유보야말로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좋은 부분이라 생각하는데 이 유보가 새로 세워진 공동체에 대한 의문 제기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어쩌면 토미와 데이빗의 등장으로 결말의 ‘선택’은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토미는 새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데이빗은 그에 대조되는 에너지를 줬다. 구 공동체 없이도 새 공동체 토미의 마을이 와이오밍 주에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이 되었던 주답게 여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도 서부극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옛 서부가 황폐해진 이상 새로운 서부 이상향으로 와이오밍 주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명멸하는 반딧불firefly 대신 전기가 항상 들어오는 수력발전소가 있는 와이오밍 주 마을 말이다.

하지만 유보를 통해 드러났듯이 조엘과 엘리의 공동체는 여전히 불안하다. 우선 이 공동체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환영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엘이 엘리에게 딸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 그렇다. 어쩌면 조엘은 엘리를 사라의 환생라 보고 있는거 아닐까? 그가 사라의 환영에 집착하고 있다는 좋은 예로 사라가 선물한 고장난 시계다.

하지만 엘리가 이야기하는 트라우마는 가족과 상관없는 (엘리는 고아다.), 죽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다가 그들은 결국 조엘의 동생인 토미가 세운 공동체로 편입되는데 이것 역시 결국 군대 체제인 파이어플라이와 다른, 가족과 혈연으로 대표되는 구 공동체 아닌가? 환영과 집착, 혈연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공동체는 과연 지속될수 있을까?

2. [스플린터 셀: 컨빅션] (2010): 재미있군. 자네가 충성을 말하다니.

불안을 남긴채 [수색자]의 흔적이 느껴지는 또다른 공동체 복구극을 보자. 톰 클랜시의 [스플린터 셀]은 서드 에셜론에 소속된 스파이 샘 피셔를 다루고 있는 게임이다. 재미있게도 이 시리즈는 더블 에이전트와 에센셜즈, 컨빅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작가진들은 서부극의 구조를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블 에이전트에서 샘은 자기 실수로 부하를 잃고 딸 역시 죽은 후 서드 에셜론을 그만둔다. 결국 고통스럽게 현장으로 복귀하지만 마지막엔 자기 친우를 죽이고 서드 에셜론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사실 [스플린터 셀]의 샘 피셔가 서부극의 총잡이, 그것도 보안관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는 말 대신 비행기와 지프를 타고 세계라는 사막을 떠돌아다니며 각지에서 일어나는 ‘시스템’을 붕괴시키려는 악의를 혼자서 싸우며 해결한다. 초기 3부작에서 그의 동료들은 통신이나 기지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날 뿐이다. 세계라는 황야에서 동료는 스쳐지나갈 뿐이며 적만이 나타날 뿐이다.

초기 삼부작에선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래도 공동체는 여전히 굳건했고 영웅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더블 에이전트에 이르면 영웅이 속한 공동체의 수장-대장과 죽음을 맞이하고 영웅의 소중한 사람도 죽는다. 악한 자들이 그 공동체를 차지해버렸고 영웅은 집으로 돌아가는게 아닌 황무지의 방황을 선택한다.

[스플린터 셀 컨빅션]에 이르면 샘은 유머감각을 잃고 폭력적으로 적을 대하는데, 이는 [수색자]에서 [더티 해리]로 이어지는 거침없는 심판자인 서부 사나이를 체현하고 있다.

컨빅션이 재미있는게, 떠남과 이동, 도착이라는 묘사가 전작에 비해 상당히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전작들이 전개에 필요한거 아니라면 이동이 등장하지 않고 뿅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생각해보면 독특하다 할 수 있는데, 이 여정의 묘사 때문에 게임은 전반적으로 로드무비 나아가 서부극의 어법과 닮아간다.

따라서 컨빅션이 [수색자]와 비슷하게 여정과 수색의 과정으로 채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샘은 여기서 에단이 그랬듯이 악당들을 윽박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며 그 수색을 이어진다. 전작 샘이 느물거리는 유머를 지니며 여유를 잃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건데, 이는 자신과 공동체를 트라우마의 시간으로 내몰은 자들에게 대한 분노나 다름없다. 마치 에단이 코만치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표출했던 것처럼. 에단이나 샘이 잃어버린 것이 약한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나 후반부에 샘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사실 자신이 서드 에셜론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딸의 존재조차 이용하려는 내부 스파이 때문에 램버트가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죽은 척했다는 것을. 이 사실을 알았을때 샘은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감정이 섞여 있으면서도 애써 냉정하게 폭력을 통제해왔던 폭력 전문가가 처음으로 상궤에서 벗어난,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마구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 분노엔 조금이나마 믿었던 공동체에 대한 배반감, 그렇게 믿었던 의사 아버지들 (램버트와 리드)이 사실은 자신에게 매몰된 트라우마의 시간을 도래하게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고 사실 그 더럽혀진 공동체가 사실상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자괴감이 섞여 있다. 조엘이 그랬듯이 수색의 끝에 도달한 진실은 그동안의 자신의 인식을 재고해야 할 정도로 경악스러웠던 것이다.

게임의 전개가 빅터의 ‘증언’으로 구성되어있는건 그 점에서 흥미롭다. 자신을 심문하면서 영상을 녹화하는 적 앞에서 빅터는 마치 샘이 죽은 것처럼 말을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증언하는 장면은 안나가 샘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나온 직후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의 장면까지 도달하기 전까지 샘의 생사를 확신할 수 없다. (당연히 죽었을리가 없다는건 다들 짐작할 것이다. 유비소프트가 밥줄을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 않는가.)

이런 도입부 때문에 해당 파트가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빅터가 어느 시간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끝난 후? 헬기 추락한 뒤? 아니면 워싱턴 DC에서 헤어진 후?) 나아가 게임 속에 계속 등장하는 샘은 산 자의 회고 속에 등장하는 망자처럼 보인다. 거기다 캠코더 프레임 속에서 이뤄지는 연출은 영상 매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인 ‘애도’와 ‘기억의 재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왜 빅터는 굳이 ‘죽었다’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그 질문을 기다렸다듯이 빅터는 미국이 샘이 죽였다고 말한다. 이 말엔 빌리 더 키드 같은 자유로운 서부의 사나이를 죽인 (부패한 메기도의 손에 놀아난 미국과 서드 에셜론이라는) 자들에 대한 힐난과 동시에 애도를 담고 있다. 지극히 미국적인 애도인것이다. 잠시간의 애도가 끝나고 빅터는 그 과정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작중에서 갑작스러운 과거사 파트의 등장도 이런 구조의 연장선상에 있다. 스셀 컨빅션의 이야기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살아있는 자의 회고이므로 그와 얽힌 사소한 추억들도 반드시 등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회고엔 자신이 만들고 지켜낸 두 공동체 (가족과 국가/단체)에 대한 망자의 헌신이 녹아 있다. 이런 점은 [수색자]보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지키고 했던 하나의 공동체는 전혀 깨끗하지 않으며 외려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는게 만천하에 드러난다. 남은 것은 자신이 그 공동체의 붕괴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낸 샘이 함께 하자는 안나의 제안을 뿌리치고 “재미있군. 자네가 충성을 말하다니.”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영웅이 돌아와 확인한 트라우마의 근원은 바로 자기 자신이나 다름없었고 영웅은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은채 다시 떠날 수 밖에 없다.

이런 모든 회고를 끝낸 빅터는 마지막 대사를 읇는다.

“지금 샘은 사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어.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더군. 남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샘은 그걸 가족이라고 봤지. 그리고 샘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돌아왔어. 샘이 사라와 함께 떠나기 전에 나한테 한 말이 뭔지 아나? 빅터, 모든게 고맙네. 전부 자네 덕분이네. 난 자네를 친형제처럼 사랑하네 라고 했지. 친형제… 그것은 가족이지? 그렇지 않나?”

그리고 그에 대답하듯이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영웅이 떠나 그렇게 도달한 곳은 바로 딸과 “친형제처럼 사랑하는” 빅터인 것이다. 즉슨 공동체의 재생을 확인하고 떠난 에단과 달리 샘은 공동체의 붕괴를 확인하고 새로운 재생을 하기 위해 황무지로 떠난 것이다.

[블랙리스트] 프리퀄 만화 [에코스]에서는 이런 재생과정이 다뤄져 있다. 샘은 여전히 사라를 다시 잃을까 악몽을 꿀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으며, 사라는 자신은 이미 어른이고 괜찮다고 안심시킨 뒤 그를 떠난다. 그리고 샘은 비를 맞으며 집, 나아가 빅터에게 돌아간다. 빅터는 여전히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러나 서사 산업은 언제나 새로운 사건과 트라우마를 원한다. [블랙리스트]에선 그 빅터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고 사라가 속해있는 공동체마저 붕괴할 위기에 처한다. 샘은 분노하며 새로운 미션에 뛰어든다.

하지만 나는 종종 [블랙리스트]가 사상적으로나 캐릭터 작법으로나 전작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리스트]의 샘은 트라우마의 시간을 겪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줬던 공동체의 일부처럼 보인다. 옛 친구를 쏘고 냉담하고 씁쓸하게 한마디 던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무렇지 않게 다섯번째 자유란 이름으로 국방장관과 무수한 타자들을 죽이고 또 악당을 죽은것처럼 처리한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빅터와 사라를 걱정하는 모습은 기만처럼 다가온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블록버스터 액션 게임의 쾌락이라는 명목으로 이런 대의를 위한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은 것일까? 트라우마의 시간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두 일본 영화를 통해 전개하고자 한다.

3. [인간합격] (1999): 뭘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되찾을 수 있을거 아니에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간합격]은 서부극이라던지 거기서 영감을 받은 활극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수색자]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요시이 유타카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사고를 당한 후 10년만에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지만 가족은 해체된 상태다. 그는 그 가족을 복구하고자 한다.

사실 공동체의 해체와 이를 복구하려는 노력은 굳이 서부극을 빌려오지 않아도 흔하디 흔한 소재다. 하지만 유달리 [인간합격]과 [수색자] 나아가 서부극 사이엔 기이할 정도로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유타카가 회복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 그렇다. 아버지가 남긴 ‘조랑말 목장’을 만들어 가족들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다른 것도 많은데 왜 하필 목장, 그것도 서부극의 아이콘 중 하나인 조랑말일까?

물론 이에 대한 서사적인 당위성은 있다. 작중에서 조랑말은 유타카의 어린아이지만 어른으로 대접받는 상황은 표현하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어째서 유타카와 조랑말이 되어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기요시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느 정도 [수색자] (비약이 심하다면 서부극의 관습이라 한정짓겠다.) 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심지어 대사에서도 그 그림자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집으로 데려와야지” “무슨 집? 코만치들한테 습격당해서 다 타버린 집으로?” / “아무래도 집에 가야 될 것 같은데” “안가는게 낫지 않을까?”) 여기에 언급된 작품들이 그렇듯이 [인간합격]도 붕괴된 상태를 원래대로 돌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기요시는 이런 시도를 하려는 유타카를 어린아이로 묘사한다. 옷입는 것부터 시작해 (20대 중반인 그는 마치 10대 소년처럼 안 어울리는 옷을 입는다.) 떼쓰는 장면, 유치한 행동을 시작해 심지어 여동생의 입을 빌어 ‘철없는 아이’라고 완벽하게 못 박는다. 이런 유타카의 모습은 [수색자]의 시대착오적이고 때론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에단의 모습과 많이 겹친다. 어른은 폭압적이고 아이는 순진무구하다.

심지어 기요시는 에단에 대척되는 적대자인 스카 (데비를 납치한 코만치)도 데려온다. 교통사고 가해자였던 무로타가 그렇다. “난 자네 인생을 망쳤어! 자넨 날 망치고! 샘샘이야. 이젠 같아졌다고!” 라고 저주하는 무로타의 대사는 스카의 “백인이 내 두 아들을 죽였다. 그래서 난 백인들의… (카메라는 백인들의 전리품을 보여준다)” 대사하고 겹친다.

스카와 데이빗이 소녀를 납치하는 것으로 주인공의 공동체를 부정한다면 무로타는 유타카의 목장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는 형식으로 주인공의 공동체를 부정한다. 단지 스카는 퇴장할때까지 끝까지 타자로 남는다면 무로타의 분노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잃어버린것은 유타카 뿐만이 아니였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와 방법이 있던 [수색자]의 에단과 달리, [인간합격]의 유타카에겐 목표와 방법이 없다. ‘데비’와 ‘사라’라는 트라우마와 그 대상이 분명히 있었던 [수색자]나 [스플린터 셀: 컨빅션]와 달리 [인간합격]의 요시이 가족들은 자신들의 붕괴를 트라우마라 생각하지 않고 (한 인물은 심지어 “운명이 다했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런 운명적인 힘으로 붕괴를 설명하는 부분은 [유레카]에서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심지어 그 회복의 기회마저 거부한다. [수색자]와 [인간합격]이 갈리는 지점이라면 이 부분일 것이다.

그 결과 ‘수색’의 과정과 결과도 달라진다. 우선 유타카는 조엘처럼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자각을 못하는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에단과 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무엇을 잃어버렸는가’에 대한 질문이 유타카에게는 중요하게 대두된다. 목적이 있는 폭력과 대화, 충돌이 이어지는 [수색자]나 [스플린터 셀: 컨빅션], [라스트 오브 어스]의 수색 과정과 달리, [인간합격]의 수색 과정은 침잠, 느닷없는 폭력과 엉뚱하고 순진무구한 행동들의 연속이다.

사실 공동체의 파괴도 그렇다. 극이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일어난 스카의 파괴가 트라우마의 시발점이 되는 것과 달리 무로타의 파괴는 이미 극이 시작하기 전에 일어났으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파괴 역시 사실 실제적인 파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파국을 재확인하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가깝다. 그렇기에 결말도 달라질수 밖에 없다. 공동체의 복구를 확인한 후 집을 ‘떠나는’ 에단이나 집으로 돌아온 샘과 조엘과 달리 유타카는 홀로 남아 집을 지키다가 자살같은 죽음을 선택한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것은 두 영화에서 신화가 서사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차이라고 보는게 타당할듯 하다. [수색자]에서는 신화는 희미해질언정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단이 없더라도 젊은 영웅인 마틴이 그 공동체 신화를 이어갈 것이다. [스플린터 셀: 컨빅션]나 [라스트 오브 어스]에선 신화까진 아니더라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간합격]의 신화같은 “가족 공동체”는 종언을 고했으며 그 복원은 절대로 이뤄질수 없다. 심지어 젊은 영웅였던 유타카 역시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붕괴한다. 붕괴한 신화의 파편 속에서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영웅에게 남은건 죽음 뿐이다.

결말은 그래서 씁쓸하면서도 따스하다. 유타카의 신화같은 소망은 끝내 살아 생전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죽고 나서 가족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다시 흩어지는 가족들. (마치 황지우의 ‘여정’처럼. ‘(전략) 통통배로/직행버스로/고속버스로/택시로/혹은 비행기로/모두들 일이 밀렸다고, 목포로, 광주로, 부산으로, 혹은 서울로, 혹은 엘에이로’) 유타카가 살아있었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였던 후지모리가 짐을 뒤적이다 유타카가 받았던 엽서를 발견한다. 유타카의 유사 아버지였던 후지모리가 그의 존재를 증언해준다는 게 인상깊다. 공동체 복원을 꿈꿨던 우화극의 영웅은 그렇게 사라지고 유사 가족의 일원만이 그를 추모한다.

영화에서 유타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애매하게 대답하는 후지모리에게 유타카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난 가능하다고 봐. 물론 물건이라면 원상태로 돌아올 수 없지만.” 후지모리의 애도는 곧 부서진 공동체의 회복을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영웅에 대한 애도인 것이다. 하지만 샘과 달리 유타카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회복을 이뤄냈기 때문에 더욱 애잔하다.

4. [유레카] (2000):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

20세기의 영웅의 죽음을 증언한 후지모리는 그렇게 21세기 되어 생판 모르던 남의 양아버지가 된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에선 이 문제가 더욱 교묘하고 철저하게 배치된다. 키타큐슈 어느 소도시에 버스 하이잭 사건이 일어나고 세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마코토 ([인간합격]의 후지모리 역을 맡았던 야쿠쇼 코지가 맡았다)와 남매인 나오키와 코즈에. 마코토는 사라지고 나오키와 코즈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 2년이 지난후 마코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이 세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언급한 작품들 중에서 [유레카]는 [수색자]의 언급을 직접적으로 하는 영화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직접적으로 존 포드와 [수색자]에게 오마쥬를 바쳤다. 아니나 다를까 아오야마 감독은 주인공들을 서부극 캐릭터들처럼 다룬다. 마코토가 돌아오는 장면의 미장센과 그의 차림새는 마치 서부극의 영웅이 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점에서 [유레카]는 언급한 작품 중 [수색자]의 그림자를 가장 짙게 드리운 현대극일것이다.

그러나 [유레카]는 [수색자]보다는 [인간합격]에 가까운 영화다. 아니 [인간합격]의 트라우마 제공자는 이름이라도 있었다. [유레카]에서 주인공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범인은 익명의 존재로 끝내 남아 사살되버린다. 심지어 이 범인의 동기는 지극히 추상적으로 남기 때문에 뭐라 원망할수도 대답할 수도 없다.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잃어버렸는지도 알기가 힘들다.

[유레카]에 이르면 트라우마로 붕괴된 공동체는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해진다. 마코토의 아내 는 이혼을 청하면서 “당신과 나는 아마 운명이 아니였던것 같다.”라고 슬프게 읇조린다. 나오키 남매의 엄마는 남편의 학대에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병으로 죽는다. 사와이네 가족은 마코토에게 힘이 되주지 못한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유레카]엔 복구할만한 가족은 없으며 복구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시간에 살아남은 자들은 애써 그걸 실현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대안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아무도 치유를 위한 침묵을 방해하지 않는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한 시간이 흐르고 묵묵히 서로에게 의지할 곳이되준다. (별 상관없어보였던 아키히코조차, 사실은 그만의 트라우마의 시간-[헬프리스]-이 있었다는게 나중에 드러난다. 그 역시 공동체에 편입되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 구축 시도는 또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마코토는 살인범으로 오해받는다. 마코토는 전형적인 오해받는 무법자다. 마코토가 범죄를 저질렀다던가 그런건 아니지만 친족들에게도 살인범으로 오해받고, 형사에게 “당신이 정말 싫다.”라는 말을 들으며 감옥에 가두는 걸 보면 그와 그가 이끄는 새로운 공동체는 트라우마의 시간을 겪지 못한 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 부분에서 마코토에게 또다른 고민이 제시된다. 전 부인 유미코에게 던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대사는 나온 이후부터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을 엮는 중요한 문장이 된다.

에단, 샘, 조엘, 유타카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에단과 샘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고 조엘은 아닌 척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유타카는 깨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미친듯이 매달렸다.

하지만 마코토는 자식도 없고 아내도 떠나갔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부모가 보호하고 치유하기엔 마코토는 너무 커버렸다. 의무감으로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코즈에와 나오키는 본질적으로 타자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마코토는 유미코는 비록 내겐 불가능했지만 당신이라면 분명 그게 가능할거라고 대답한다. 난 유미코의 이 말이 마코토를 해메지 않게 한 결정적인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버린다. 바로 [수색자]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마코토는 타무라 남매와 남매의 사촌인 아키히코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여정에 오른다. 떠나기 직전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그를 의심하고 싫어했던 형사가 “당신 돌아올 거지?”라고 묻는다. 마코토의 대답은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다.

마코토의 이 대사는 돌아올 곳이 있었던 에단과 샘, 조엘, 돌아올 곳을 만들고자 했던 유타카하고 대조된다. 돌아올 곳은 지금 여기엔 없고, 생길리도 없다. [유레카]의 트라우마의 시간은 인물들에게 도저히 끊을수 없는 가혹한 운명과 굴레가 되버렸다. 고아의식이 마침내 영혼마저 삼켜버린 것이다.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황무지로 떠나는 것이다. 에단과 무수한 선후배 카우보이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아오야마는 [수색자]와 달리 떠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새로운 여정을 보여준다. 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바로 트라우마의 시작인 장소다. 그들은 거기서 시작해 황량한 자연과 다양한 곳들을 떠돈다. 허문영 평론가가 지적했던 것처럼 “황무지는 불친절하지만 세상과 달리 그들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기에 그들이 필요한 침묵의 시간을 안겨준다. [유레카]는 그 침묵의 시간을 완벽하게 찍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런 치유 과정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자가 있다. 나오키가 그렇다. 더 이상 자기에게 주워진 가혹한 굴레를 못 이기고 광기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오키에게 연인을 잃은 마코토는 그러나, 나오키를 버리거나 죽이지 않는다. 그에겐 다른 치유법이 필요하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마코토는 나오키의 죄를 직시하도록 하고 그가 죽지 말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떠나보낸다.

그렇게 나오키를 떠나보낸 일행들. 냉소적인 아키히코는 마코토에게 그냥 거기에 머무는게 나오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묻는다. 이에 마코토는 아키히코를 내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뭐가 ‘행복하겠지’,라는거냐!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고! 나오키가 어디론가 가버렸더라도 언젠가 잃어버린 걸 되찾으러 다시 돌아온다구!!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너 같은 인간들은 아무것도 아닐테니! 나는 말이지, 그 애를 보호하는 걸로 내 삶을 살아갈꺼니까!”

이 대사만큼이나 마코토 자신이 던졌던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와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처절한 대답도 없을 것이다. 마코토는 이 지난한 여정을 통해 결국엔 돌아올 곳이 없더라도, 머나먼 곳에 떠나왔더라도, 우리는 어디론가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아직 약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그런 곳을 만들어줘야 하는게 자신과 같은 어른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레카]는 [망념의 잠드]하고 겹치고 있는데 자세한 것은 다른 글에서 다루겠다.)

이 대사를 말할 때 마코토의 말투가 언급했던 스셀 컨빅션의 빅터가 샘을 회고하는 투하고 비슷하다는 것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허문영 평론가를 다시 인용하자면 “빌리 더 키드를 추모하는 팻 개릿의 어조”) 하지만 빅터의 어조가 자유로웠던 영웅을 죽인 자들을 비난하며 기다리는 쪽에 가깝다면 마코토의 어조는 상처받은 영혼을 쉽사리 매도하는 걸 비난하며 그를 언제까지 기다리겠다는 영웅의 선언에 가깝다.

이 떠남이 끝나고 마코토의 타인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은 마침내 코즈에를 통해 꽃피운다. 실어증에 빠지고 나오키와 아키히코마저 떠나보낸 코즈에는 마지막 바다와 산에서 자신의 언어와 색깔을 찾고 트라우마의 시간을 껴안는다. 그리고 그들은 에단과 데비가 그랬던 것처럼 ‘돌아간’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집을 보여주지 않고 갑자기 조감 샷으로 그들이 가지 않은 들판들과 산을 보여준다. 아까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라는 대사와 엮어 생각해보면 이는 기존 체제의 편입이 아닌게 분명하다. 오히려 자기들만의 운명과 있을 곳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로 보는게 타당할듯 싶다. 이 점에서 마코토는 결국 기존 공동체에 편입됬던 샘과 조엘이라던지, 개척에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유타카하고는 다르다.

그 점에서 [유레카] 역시 공동체에 대한 어떤 간절한 소망이 간절히 담겨 있으면서도 위의 작품들과 다른 혈연과 국가를 뛰어넘는 타자들 간의 수평적이고 비혈연적인 연대를 꿈꾸고 있다.

이상 [수색자]에 빚진 현대극들이 어떻게 트라우마와 재생을 상상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네 작품엔 공동체 (특히 가족)와 붕괴, 그리고 재생이 중요한 원동력으로 자리잡는다. 어떤 이는 쉽게 그것을 이뤄내고 어떤 이는 실패하고 어떤 이는 긴 시간 끝에 찾아낸다. 과연 이들이 꿈꿨던 공동체는 어떻게 그 이야기를 이어갈것인가? 이 부족한 글로는 그저 애매한 예측만 할 뿐이다.

P.S.1 글 작성 도중 톰 클랜시의 부고를 들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P.S.2 이 글은 허문영 평론가의 새드 배케이션 비평 “수평적이며 비혈연적인 유대의 힘”에서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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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와 장면, 그리고 흐름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는 3시간짜리 영화다. 보통 영화 길이가 2시간 안팎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유레카]의 영화 길이는 이례적으로 길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장면들도 한 사건을 길게 보는 롱테이크가 많으며 대사도 그리 많지 않다. 아오야마 감독이 내한했을 당시 씨네21에서 [유레카]를 왜 그렇게 찍었나, 라고 물어보니 아오야마는 '삶의 노이즈를 찍고 싶어서 그렇게 찍었다.'라고 말했다.

아오야마는 왜 그런 '노이즈'가 낀 긴 서사를 선택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엔 그 이유는 아오야마의 선배이자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에게 같이 사사받았던 동료였던 쿠로사와 키요시가 쓴 '영화 수업'에서 그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글에서 '흐름'이 영화와 각본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보고 있다. ("설렁 훌륭한 각본이나 스탭이 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흐름 없이 훌륭한 영화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유레카]는 버스 하이잭이라는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를 서사와 영화로 담아내기 위해 '삶의 노이즈'가 낀 긴 흐름을 택한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오야마는 그런 느린 흐름이야말로 자신이 극중 캐릭터들이 느끼고 있는 고통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도무지 헤어나올수 없다'라는 감각을 관객들이 느낄수 있도록 서사와 영화의 흐름을 유장하게 구성했다.

이런 아오야마의 길고 느린 흐름이란 선택이 당위성이 있었으며 성공했는가? 나는 충분히 당위성이 있었고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저 위의 사진 속 장면일 것이다. 아오야마는 저 장면을 통해 상처받은 그들이 권태스럽지만 고요히 시간을 보내는 걸 별말없이 보여준다. 혼자도 그렇다고 군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닌, 고요한 게슈탈트-공동체 속에서 서서히 공감하고 치유하는 장면은 이뤄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으며 '상처받은 자들의 대안가족적 관계와 치유'라는 서사에도 어울린다.  

(첨언하자면 이 장면의 흐름과 미장센은 서부극에서 비롯된거기도 하다. 서부극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는 사막과 자연 속에서 카우보이들은 종종 그 속에서 침잠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아오야마는 [유레카]에서 그것을 현대 일본 키타큐슈에 맞게 재구성했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가 가지고 있는 3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과 느린 흐름이 무의미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아오야마는 자신이 왜 그런 '노이즈'가 낀 흐름이 필요한지 차분하게 관객들을 설득시키고 증명했다. 물론 그 설득과 증명이 모든 관객에게 먹히는건 아니지만-대부분의 관객은 지루하다 여길 가능성이 크다.-그렇다 하더라도 [유레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차분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화의 흐름이 어떻게 관객에게 울림을 안겨주는지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반면 침묵과 느림을 선택했지만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신작 [온리 갓 포기브스]가 무참히 까이는 이유도 어찌보면 감독이 선택한 흐름과 그 이유를 관객에게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걸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의 신작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드라이브]와 [브론슨]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흐름을 만들어가는지 대충 알고 있다. 일단 두 영화에서 확인해본 결과 윈딩 레픈은 느린 흐름에 퍼지는 핏자국들과 주먹 세례를 사랑하는 감독이다. 

이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다. 적어도 [드라이브]와 [브론슨]에서는 그런 흐름의 선택에 당위성이 있었다. (각각 드라이버의 멜랑콜리한 감수성과 범죄자의 유명해지고 싶다는 심리) 하지만 나는 윈딩 레픈의 그런 선택이 매우 위태하게 느껴졌다. 때때로 그 극단적인 미학의 대비가 서사와 흐름의 당위성을 넘어서 산만하고 난잡하게 흐트러지려고 하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드라이브]에서 엘레베이터에서 '해결사 얼굴을 산산히 으깨버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에서 윈딩 레픈은 드라이버가 해결사 얼굴이 부수는 장면을 보여준다. (물론 직접적인 폭력은 거의 안 나오고 소리로.) 분명 레픈의 의도는 바로 전에 이어졌던 로맨틱한 키스 씬에 대비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만 놓고 보면 충분히 논리적이다.

그러나 이 폭력은 데이빗 크로넨버그나 박찬욱 영화에 나오는 폭력과 달리 유달리 늘어진다는 느낌도 있다. 비슷한 스타일의 폭력 장면인 크로넨버그의 [동방의 약속]에서 사우나에서 벌어지는 나체 폭력 씬이나 [폭력의 역사]에서 톰이 강도들을 상대하는 장면하고 비교를 해보자. 둘 다 [드라이브]하고 비슷한 잔혹한 신체 손괴/폭력이 등장하지만 크로넨버그는 그 손괴가 가져오는 등장인물들의 끔찍한 육체적 피로감과 감정, 나아가 이런 폭력이 서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당위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드라이브]에는 얼굴 으깨기 폭력은 서사의 당위성이 충족된 이후에도 (서사에서 보자면 드라이버가 해결사 얼굴을 부수면서 아이린이 질겁하는 장면에서 그 당위성이 충족됬을 것이다.) 일부러 느린 템포로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오래 사람 얼굴을 부술수 있어!"라는 관객이 느끼는 '현실성의 임계치'에 도달하기 직전 딱 멈춘다. 마치 이걸 봐달라듯이.

그렇다. 레픈의 영화에 등장하는 느린 흐름과 침묵은 자신이 만들어낸 서사의 흐름이 요구해서라기보다는 관객들이 영화 속에 있는,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과 이미지에 계속 매어두기 위해 일부러 늦춘 것이다. 그의 영화가 종종 영화광의 과시욕으로 넘치는건 당연한 귀결이다. 레픈 영화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가 [드라이브]나 [브론슨]처럼 그래도 뭔가 씹을 건덕지라도 영화 속에 넣어뒀다면 그가 만든 느린 흐름은 어느정도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 씹을 건덕지조차 없는 상황에서 흐름과 이미지만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영화는 재앙이 될 것이다.

[온리 갓 포기브스]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영화를 보고 리뷰에서 다룰 수 있다면 다루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레픈은 서사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흐름보다는 그런 이미지에만 열광하는 스타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치명적인 문제점이라 생각한다. 

즉슨 우리가 서사를 만들고 그것을 구성하는 장면을 만들때 "그 장면이 가지고 있는 흐름이 서사 전체의 흐름하고 어울리는가? 그럴만한 당위성이 있는가?"를 한번 냉정하게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때도 그 서사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조응하는지도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P.S. 게임의 서사 흐름에 대해 간략히 적자면 요새 나오는 AAA급 게임들은 흐름이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다양한 흐름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논지는 기회가 되면 적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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