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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Deeper Into Movie (304)
[희망의 건너편] 예고편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일단 기본은 할것 같고, 마침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평이 좋더라고요. 수입 되면 좋겠는데... 여튼 기대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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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 피어스 [Mildred Pierce] (1945)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밀드레드 피어스]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미스터리다. 시작하자마자 총을 맞은 남자의 입에서 밀드레드 피어스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다음에 한 여자가 위태하게 바닷가를 바라보다가 식당으로 간다. 여자의 이름은 밀드레드. 밀드레드는 식당에서 사업 동료이자 관심을 보이는 남자 윌리를 데리고 나간다. 달콤한 환상에 빠진 남자가 목격한건 사라진 밀드레드와 살인 현장. 한편 집에 돌아온 밀드레드는 두번째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불러가게 된다. 그러나 경찰은 범인을 전 남편인 알버트 피어스로 단정지은 상태. 대체 알버트랑 이혼한 이유가 뭔지 물어보는 경찰들에게 밀드레드는 과거를 얘기하게 된다.

[밀드레드 피어스]는 한마디로 여성 수난사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밀드레드 피어스는, 젊었을 적 남편 알버트와 열렬히 사랑해 결혼했지만 남편의 부동산 사업 실패로 부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알버트는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고, 화가 난 밀드레드는 알버트를 내쫒는다. 케이와 비다라는 두 딸을 데리고 밀드레드는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전부터 밀드레드를 짝사랑했던 윌리는 이 참에 고백을 해오지만, 밀드레드는 거절하고 식당 웨이트리스로 삶을 시작한다. 부지런한 밀드레드는 웨이트리스로서 성공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딸에게 웨이트리스로써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래서 윌리랑 같이 레스토랑을 차리고 성공하나, 허영심 많은 딸 비다는 밀드레드를 부끄러워하고 비난한다. 마음에 없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던 밀드레드는 신분 상승을 위해 유럽 귀족 출신인 몬테 바라건과 결혼하지만 그것은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밀드레드 피어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남자들이 아닌 여자라는 점이다. (이는 영화에도 적용되는데, 영화의 회상을 이끌어가는 것도 밀드레드의 보이스오버다.) 처음엔 안락한 가정 주부로 시작한 밀드레드 피어스는 파탄난 가정 상황을 보고 도무지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남편을 내쫓는다. 작품 속 밀드레드의 선택은 철저히 경제적 자립에 맞춰져 있다. 윌리랑 결혼하면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딸들은 말하지만 밀드레드는 거절하고 직장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업을 꾸릴 계획을 구상한다.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은 그 점에서 1930년대 이후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 현상을 궤뚫고 있다. 또한 밀드레드의 사업이 식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의 욕망과 음모의 근원이었던 그리스 식당과 연계되어 있다.

하지만 밀드레드의 욕망과 선택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게 아니다. 웨이트리스 취직까지는 그래도 살기 위해서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식당을 차리는 부분부터 조금씩 다르다. 케인은 밀드레드가 웨이트리스 일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변모하는 당위성을 외부에 둔다. 밀드레드가 식당을 차리는 이유는 비다가 웨이트리스 일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다의 욕망이 가속될수록, 밀드레드 역시 자신의 연애조차 귀족적 가치를 위해 팔아넘겨버린다. 밀드레드는 딸 비다의 욕망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파국이다. [밀드레드 피어스]의 멜로드라마는 자신이 현재 있는 위치와,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랑 불일치하면서 발생한다. 밀드레드는 그 간격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그 불일치는 어머니로써 딸에 대한 애정,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심이라는 기혼 직장인 여성들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어찌보면 매우 경제학적인 필름 느와르-멜로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케인의 주제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 마이클 커티즈는 공간를 비정상적으로 확장시킨다.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는 비정상으로 넓고 깊은 영화다. 배우 머리 위는 비정상적으로 높으며, 인물 주변의 공간들 역시 필요한 가구나 장식물을 제외하면 여백이 많다. 대화를 위해 투 샷이나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도, 채워지지 않는 여백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필름 느와르 특유의 흑백 그림자도 스며든다.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의 그림자 연출은 일급 필름 느와르 연출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감옥과도 같다. 밀드레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화 속 공간들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으며, 밀드레드가 체념하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액자 밖 경찰소 취조실은 밀드레드를 그림자로 압박한다. 커티즈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여성들의 불안과 불일치, 멜로드라마적 상황을 공간감으로 표현한다.

[밀드레드 피어스]의 결말은 소설과 영화가 상이한 비전을 보여준다. 원작 소설에서 비다는 훨씬 사악하고 악랄했으며, 마지막엔 밀드레드를 배반하고 바라건과 함께 성공의 길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직 헤이즈 코드가 남아있던 시절의 할리우드에서 비다가 맞이한 결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각본가 라날드 맥도널과 캐서린 터니가 새로이 선택한 결말은 좀 더 권선징악적이다. 바라건은 비다의 손에 죽고, 모든 것이 탄로난 비다는 잡혀간다. 원작파들은 영화판 [밀드레드 피어스]가 타협의 결과물이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판에서 새로 선택한 결말은 원작의 그 결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비다와 밀드레드에 거대한 골이 있다고 못 박는다. 범죄를 고백할때도 비다는 끝내 엄마 탓만 한다. 때문에 밀드레드가 자수하는 장면도, 비다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라는 인상을 준다. ("제 잘못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밀드레드는 그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경찰로 대표되는 남성 시스템은 밀드레드가 비다에 대한 속죄를 할 수 없도록 밀드레드와 비다를 법적으로 분리한다. 그 점에서 영화판의 결말은 밀드레드의 주체성이 모두 박탈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업도 가족도 속죄도 모든 것을 잃은 밀드레드에게 돌아갈 곳은 전 남편 버트다. 기존의 가부장 질서로 복귀하는 밀드레드 앞에 펼쳐진 것은 해가 뜬 도시의 풍경이다. 하지만 햇빛을 비웃듯이 결말 샷에서 밀드레드는 이전보다도 더 왜소해진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이 결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밀드레드는 채울 수 없는 걸 채우려다가 끝내 존재 자체가 부서져버렸다. 햇빛조차도 밀드레드를 감싸지 못하며, 그녀는 홀로 걸을수 조차 없다.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는 그 점에서 여성 주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이룰 수 없는지 탁월하게 보여준 뒤, 멜로드라마를 이끌어내는 느와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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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달려가는 차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옷차림과 멋진 저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제목이 지칭하는 부르주아라는걸 알게 된다. 부르주아들은 저택의 주인 부부 앨리스와 앙리 세네샬이랑 같이 밥을 먹으러 왔다. 하지만 앙리는 일하느라 바쁘고 결국 앨리스가 그들과 함께 만찬을 하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 뒤부터는 조금 이상해진다. 앨리스와 부르주아들은 고오급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식당의 주인이 죽는 바람에 밥을 먹지 못한다. 부뉴엘은 시침 뚝 떼고 평이한 어법으로 부르주아의 일상을 그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비일상적인 사건을 등장시키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뒤집는다.

첫번째 좌절 시퀀스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식당을 나오는 이유가 예의와 체면이라는 이유가 강하게 대두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짐짓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약속이 파토난 시퀀스 다음에 라파엘이 대사로 있는 미란다 공화국 대사관에서 앙리와 프랑소와, 라파엘이 모인다.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가던 도중 라파엘은 개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반정부주의자 여성을 발견한다. 라파엘의 선택은? 옆에 있던 저격총을 들어 인형을 쓰러트린다. 이 황당무계한 라파엘의 행동은, 그 자체로 훌륭한 블랙 유머이면서도 부르주아의 가치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예의와 체면은 상대와 마주하지 않으면 쉽게 벗겨지는 가면이다.

사실상 [절멸의 천사]의 리메이크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하지만 구성 면에서는 훨씬 대담한 영화다. [절멸의 천사]가 집 밖을 나가려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고 난파된 상황을 서서히 비틀어갔다면,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만찬을 벌인다는 행위를 중심에 두고 사방팔방 에피소드가 뻗어나가는 영화로 만든다. 몇몇 장면은 순전히 만찬을 기다리다가 끼어든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 멕시코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면서 부뉴엘의 영화는 서사 형식이 대담해지는 구석이 있는데 (로드 무비 구성만 세워둔 뒤 온갖 상징/풍자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은하수]가 대표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그 대담해진 서사 구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파악하기 편하게 구성된 편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시도와 좌절이라는 두 축을 오가는 시지프스와 같은 영화다. 그들에게 만찬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는 행위이며, 그 항유는 식탁 뒤쪽에서 노동자들을 부려먹어야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식탁과 부엌은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저택의 식탁과 부엌을 연상케 한다. 등장 인물들은 그런 계급적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품위없다고 비웃는다. 코냑 마시는 법을 모르는 운전 기사를 데려다 놓고 마시게 한 뒤, 저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대목은 부르주아의 교양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런 예의범절과 교양을 내세우면서도 성욕과 식욕에 주체를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원초적인 욕망들은 세네샬 부부 머리에 달려있는 풀잎처럼 집요하고 너저분하게 매달려 그들을 까발리고 모욕한다. 이 위선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조롱이 이중성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부뉴엘과 카리에 칼끝은 부르주아에 머물지 않는다. 미셸 피콜리가 연기하는 주교 역은 부뉴엘의 가톨릭을 향한 조롱을 압축한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 결말 이후 이 캐릭터가 아무 언급없이 사라지는 부분은 한이 서린 악의가 느껴진다. 부뉴엘에게 종교란 세속적인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소멸해버리는 하찮은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미란다 공화국에 이르면 할 말은 더 없을 것이다. 부뉴엘과 카리에의 조롱은 딱히 숨기는 부분 없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부뉴엘 영화가 된 것도, 그 대담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에 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부뉴엘과 카리에의 징벌이 떨어진다. 부르주아들은 영화 내내 계속 만찬을 방해받은 뒤, 좌절한다. 그리고 이 뒤엔 부뉴엘과 카리에가 있다. 특히 부뉴엘이 만찬을 방해하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어이없는 자유연상으로 이뤄진다.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하기도 하며, 젊은 장교의 넊두리를 듣다가 식당의 음식이 모조리 사라졌다는걸 알아차리기도 하며, 갱단이 총을 쏴 죽기도 한다. 부뉴엘이 꾸려가는 자유연상은 파시스트의 폭력과 종교의 엄숙주의을 풍자하는 것이기도 하며, 유령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별다른 개연성 없이 서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유연상이 계속 이어질수록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유령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은근슬쩍 튀어나온다. 부뉴엘과 카리에는 서사상에서 가능할것 같지 않은 상황을 기어이 이끌어내 진행시키면서 영화 자체의 현실성을 파괴한다. 델 토로를 비롯한 라틴 환상 영화들의 대가가 부뉴엘의 어떤 지점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부뉴엘은 이런 자유연상을 도구 삼아 환몽 구조를 통해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들은 이 환몽을 통해, 욕망 때문에 도래할 파국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피는 도피일뿐. 부르주아는 도피한 곳에서도 끊임없이 욕망과 파국을 만나야 한다. 개연성 없는 자유 연상과 환몽 구조 속에서 부르주아들의 캐릭터들은 얄팍해져 가고 자신의 죽음 역시 한낱 개꿈으로 취급된다. 심지어 그 개꿈엔 전혀 관련없는 경찰들도 포함된다. 부르주아들이 들어간 장군의 저택이 아무런 복선없이 연극 무대로 돌변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꿈과 풍자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준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저택은 언제든지 갈아치울수 있는 무대 장치에 불과하며, 부르주아와 만찬은 연기의 재료로 격하된다.

이 영화의 결론은 죽음이 다시 꿈으로 무화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부뉴엘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경멸스럽게 여겼던 캐릭터는 라파엘인것 같다. 착취가 은밀하고 비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부르주아랑 달리 그는 정말로 국민들을 쥐어짜고 경멸하는 파시스트 권력자다. 심지어 라파엘은 자신을 암살하러 온 반정부주의자 여성에게 성희롱적 모욕과 동시에 비밀 경찰을 시켜 잡아가게 만든다. 그 점에서 (꿈 속 식탁 아래에서도, 꿈 밖에서도)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든 게걸스럽게 집어먹으려는 라파엘의 샷은 부뉴엘의 블랙 코미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부뉴엘은 파시스트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음에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찌질스럽게 표출해대는 파시스트를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다시, 시지포스의 반복이다. 부뉴엘이 선택한 결말은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했던 부르주아들의 행진 샷이다. 처음엔 만찬을 즐기러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샷은, 온갖 환몽 구조를 거치고 나서 결말에 등장했을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대체 저 길은 만찬이 있을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이어지는게 맞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건가? 확실한건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은 다시 시작될 만찬을 고대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부뉴엘은 끊임없이 부르주아의 만찬을 방해할것이다. 어둠 속 길이 마침내 환하게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걷는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벗어날수 없는 림보다. 정말이지 악랄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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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

꿈결같다.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현란한 초원의 초록색과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 푸른 하늘, 돌담... 어떤 평론가는 굶주리고 추운 여행 끝에 도달한 낙원이라고 말했는데, 테크니컬러에 담긴 아일랜드 이니스프리를 보노라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여기엔 어떤 한치의 황량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 포드는 그 황홀한 전원에 도착한 사나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그는 숀 손튼이며 동시에 서부 사나이로 유명한 존 웨인이다. 서부극의 거목인 두 존은 이렇게 아일랜드로 왔다. 포드와 웨인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는 뿌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맞이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덕목으로 생각할법한 무덤덤한 익명성 따윈 없는 사람들이다. 활짝 웃으며 새로 도착한 손님에게 떠들썩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어찌보면 주책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박력에 숀은 살짝 정신이 혼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숀은 그게 마냥 싫지 않다. 이 도입부는 [말 없는 사나이]의 중요한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 없는 사나이]를 이끌고 가는건, 작지만 분명한 사람들의 흐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숀을 관광객으로 생각하지만, 숀은 이 이니스프리에 살려고 도착했다는건 명박하다. 숀은 역을 떠나 앞으로 살 집으로 간다. 이때 [말 없는 사나이]는 매우 아름다운 첫 만남 시퀀스를 준비한다. 양 떼를 끌고 가다가 시선을 돌리는 마치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는 평이하면서도 독특한 흐름을 구체화해내고 있다. 숀이 메리를 바라보자 샐쭉한 인상의 메리가 고개를 휙 돌린다. 둘은 이내 제 갈길을 가지만 숀의 샷과 메리의 샷이 만들어내는 몽타주는 신비로우면서도 유쾌한 활기를 띈다. 

숀은 수다스러운 아일랜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메리와 그 오빠인 레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숀 가문의 옛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레드는 숀이 들어와 사는 상황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사사건건 숀에게 시비를 걸며, 아일랜드식으로 일대 일 격투를 벌이자고 한다. 한편 메리는 결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져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긴다. 이를 보듯이 알 수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일랜드의 느긋한 마음씨를 대변한다면, 메리와 레드는 미국인인 숀이 알아야 하는 아일랜드의 풍습이다. 메리와 숀의 결합은 이 아일랜드의 풍습을 거쳐야 이뤄질 수 있다.

[말 없는 사나이]는 큰 서사 없이 일련의 유쾌한 소동극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숀과 메리의 결합이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포드는 그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다. 포드는 서부극의 전제를 가져와 아일랜드라는 지역에서 익살스럽게 패러디한다. 총잡이의 대결은, 마을 축제와 술이 끼얹어진 주먹다짐으로 넘어가고 근심이 가득찬 마을 사람들은 이제 신이 나서 주먹다짐을 지켜본다. 수줍지만 이뤄질수 없었던 서부 사나이와 마을 처녀의 연정은 휘몰아치는 바람 안에서 격정적인 몸언어로 표출된다. 바람이 불어닥치는 숀의 집에서 메리과 숀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말 없는 사나이]의 격한 바람과도 같은 영화적 매력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플롯이 없는 [말 없는 사나이]를 일관성 있게 묶는 건 군중의 힘이다. 킹 비더의 [군중]이 그랬듯이, [말 없는 사나이]는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의 힘이 매력적인 영화다.  하지만 [군중]에 등장하는 군중이 도시의 익명적인 흐름을 담아냈다면, [말 없는 사나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시골 커뮤니티의 매력이 크다. 이 커뮤니티는 뿌리로 돌아온 미국인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가 낯설어하는 풍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 미국인이 어떻게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건을 만드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본다. 이 미국 영화의 절정을 이끌고 가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쇼트가 장소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뻔뻔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활기다. 이 부분에 이르면 [말 없는 사나이]는 버스터 키튼과 같은 무성 활극 영화와 같은 매력을 태연히 과시한다.

[말 없는 사나이]가 흥미로운 점은, 그런 소탈하면서도 낙천적인 풍습과 이상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히로인인 메리가 그렇다. 얼핏보면 서사의 흐름에 따라 숀이라던가 레드의 가부장적 체제에 순종적으로 편입될 것 같은 메리는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메리는 자신의 재산을 숀의 집으로 가져오는걸 상당히 중요히 여긴다. 그리고 메리의 고집을 숀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격하게 화를 낸다. 메리에게 그 풍습은 자신의 존재 의의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숀은 메리와 이어지기 위해서는 순종시키는게 아니라, 이해와 설득을 거쳐야 한다. 아일랜드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으로써는 추측의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커뮤니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 관심을 가졌던 포드다운 전개라 할 수 있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서 페미니즘적인 묘사를 읽어낸 평론가도 있다는 것도 첨언하고 싶다.)

물론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드는 은근슬쩍 서부극의 어둠을 영화 속에 이끌어온다. 숀이 레드랑 싸우길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할때 포드는 단발적인 플래시백으로, 숀이 왜 아일랜드로 와야만 했는지 설명한다. 미국에 오기 전 권투 선수로 활동하던 숀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룰이 있는 스포츠였지만, 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폭력에 이골이 난 사나이며, 폭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를 느낀다. 숀의 과거는 존 포드의 내심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포드는 숀을 아일랜드로 데려와 백인 사회에서도 천민 취급 받았던 아일랜드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긍정성으로 치유한다. 레드와 싸움을 통해 숀은 자신의 주먹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커뮤니티에 포함될 수 있다는걸 확인한다.

[말 없는 사나이]는 황야 너머로 사라진 서부 사나이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다. 존 포드는 숀을 거기다 내려다 놓고 더 이상 총질은 필요없고 이젠 정말 행복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이니스프리 커뮤니티가 말이 되는가를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냉소를 신경쓰지 않는다. 말이 되던 말던,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고 때론 납득이 잘 안 될지도 몰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선량함을 포드는 믿는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숀과 메리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의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길 기원하게 된다. 그동안 서부극을 통해 울적하게 서부 총잡이의 소멸을 얘기했던 존 포드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는 정말 기적과도 같다. 그 점에서 [말 없는 사나이]는 포드 영화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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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의 유명한 단편 [방파제]의 기본 전제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였다. 마르케는 어린 시절 우연히 잊지 못한 이미지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남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를 거쳐 시간을 횡단하는 행위라 말했다. 그리고 마르케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진 이미지와 기억, 시간을 한데 모아 몽타주로 이뤄진 꿈을 꿨다. 설정이 자세한 영화는 아니였지만, 이 우울한 단편 영화가 지금까지도 SF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들어가는지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서 마르케는 정지한 사진들 속 살아있는 여인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음의 놀라움을 끌어냈다.

마르케의 실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는 [방파제]에서 뻗어나온 묵상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에서 제목 따온 [태양 없이]는 일종의 기행문 영화다. [태양 없이]에서 시간과 이미지의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여기에 있는 개별 공간을 횡단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제 시간과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은 픽션 속 주인공이 아닌 크리스 마르케의 분신인 사진작가 샌도르 크리스나다. 샌도르는 카메라 한 대와 종이와 펜을 챙긴 채 지구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아이슬란드의 아이들 세 명이다. 샌도르는 이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행복의 이미지를 얘기하지만, 이 행복의 이미지가 쉽게 다른 이미지랑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 그 다른 이미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이 정녕 하나로 연결될 수 없는지, 고민한다. 

제목이 뜨고, 그는 아이슬란드를 떠나 홋카이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북쪽 섬에서 돌아오던 샌도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 순간은 전쟁의 순간이다. [밤과 안개]에서 겪었고 [방파제]의 남자가 살아가야만 했던 그 순간. [밤과 안개]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있었던 전쟁을 상상한 뒤, [방파제]에서 마르케는 도래할 전쟁을 상상하는 것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회고했다면, [태양 없이]의 샌도르는 평화의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전쟁를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산발적인 편지를 보낸다.

마르케는 얼핏 보면 연결되지 않을듯 같은 순간들을 연결한다. 샌도르가 발길을 내딯는 곳은 둘로 나눠진 세계다. 한편엔 섹스 박물관과 산리즈카 투쟁이 이어지는 일본과 제국주의와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낸 미국, 프랑스가 있으며, 한편엔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가 있다. 태양이 있는 세계와 태양이 없는 세계. 마르케는 이 둘로 나눠진 세계를 영화의 몽타쥬를 이용해 하나로 통합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태양 없이]는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의 결합이다. 

하지만 훈련된 르포 작가이기도 한 마르케=샌도르가 선택한 스케치 영상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다. 그는 일본 문화에 깊게 매료되어 인류학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산리즈카와 우익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들을 잡아내고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자연 풍경과 가난한 현실을 끌어온다. 편지를 통해 차분히 전해지는 나레이션에서는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지식인의 결기가 돋보인다. 샌도르의 통찰 일부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을 찌르기도 한다. [태양 없이]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광주 시민들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도쿄 좌파 시위대를 잠시 보여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편린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준다. 

이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에서 통일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샌도르가 보낸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샌도르가 읽지 않는다. 샌도르의 묵상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이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즉 [태양 없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뤄진 기행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왜 이런 형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여기서 [태양 없이]가 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보자.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를 찍으면서 동시 더빙이 아닌, 후시 더빙을 사용했다. 이 후시 더빙은 단순히 독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음향에도 적용되어 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일부는 기술적인 문제기도 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마이크가 달린 ENG 카메라는 그리 흔한게 아니였고, 필름 카메라는 녹음 기사를 동반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대표적이다.) 필시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느라 8-16mm 카메라를 사용했어야 할 크리스 마르케에게 기록과 동시 녹음은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하야오 야마네코가 등장한다. 비디오 게임 개발자인 하야오 야마네코는 현실을 바꿀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테이프로 채집한 전쟁과 시위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조작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야오 야마네코는 그것이 TV에 등장하는 이미지보다 더 진실하며, 대상의 특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하야오의 말은 상당히 궤변처럼 들린다. 어떻게 추상화 된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크리스 마르케는 반대로 추상화되지 않은 이미지조차도 언제든지 풍화되어 소멸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는 [밤과 안개]에 관여한 사람이다.) 하야오는 그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려는 시도보다, 본질을 잡는 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야오는 이 이미지들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구역'이라고 부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은 법칙을 따라 길을 찾아가야 했다. 하야오는 컴퓨터로 왜곡된 이미지로 '구역'을 만들어 전쟁과 투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스스로 다시 생각할 영역을 만들고자 한다. 

하야오의 시도는 [태양 없이]의 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수 있는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현실을 단순히 기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낼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 다.  [아름다운 5월]에서 그는 파리라는 한 공간에 집약된 다양한 영역들을 옮겨다니면서 한 시대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장르 픽션을 정지된 사진으로 재구성한 [방파제]를 거쳐 [태양 없이]에 이르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개별적으로 분리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꾸는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악과 나레이션, 현장 녹음한 소음을 후시 더빙한 음향들... 때문에 별다른 플롯이 없어도 집중력이 높은 영화기도 하다. [태양 없이]를 본다는 것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성한 꿈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소 난해할수도 있는 이 한편이 지독히도 감성을 건드린다면 영화가 가지는 시청각적 매력을 마르케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샌도르가 생각하는 [현기증]은 살인 사건 그 이상으로 은밀하게 시간과 공간의 현기증을 설명하는 영화다. 샌도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겹쳐 생각한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죽은 매들린을 다른 인물인 주디를 통해 재현하려는 시도는 샌도르가 필름과 테이프로 기록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재구성해 꿈, 나아가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로 은유된다. 그리고 샌도르와 하야오가 만든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구역'을 만들어낸다. 필름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즉물적인 기록이 가능한 점)을 인지한 뒤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라는 글에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 이후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케의 구성된 꿈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단순히 영상에 멈추지 않는다. 하야오의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크리스 마르케는 컴퓨터 게임 비평가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 도쿄를 들르던 도중 샌도르는 남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팩맨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샌도르는 이 노란색 구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피력한다. 샌도르의 눈에서 바라본 팩맨은 인간의 운명을 픽셀을 통해 은유한 완벽한 예시다. 그리고 그 은유는 당분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마르케는 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세상을 은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미지와 결합될때 강한 힘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딩시 노년을 바라보는 영화 감독이 태동기에 있던 컴퓨터 게임에게서 가능성과 유효한 통찰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마르케는 단순히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태양 없이]를 만든게 아니다. 오히려 샌도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마르케의 속내는 절박하다. 열렬한 좌파였던 마르케는 다양한 공간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무구할 정도로 순수한, 행복의 이미지로 쉽사리 등장하지 못한다. 기니비사우 프라이아 시장에 만난 여자의 표정을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샌도르의 고민은 마르케의 고민이기도 하다. 마르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태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그는 진심으로 땅에 발을 붙이는 사람들을 염원하고 걱정하고 있다.

친구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샌도르는 [태양 없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샌도르 크리슈나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닌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시를 쓰는 법은 영화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하며 글과 편지이기도 하다. 이제 샌도르는 일본에서도, 기니비사우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껏 쌓여왔던 과거를 바라보고 동시에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호주의 에뮤처럼 샌도르가 길어올린 영상과 편지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지의 수신인이 말한다.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이 기대감이야말로 [태양 없이]가 진정 바라는 소통의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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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예고편

현존하는 미국 감독 중에서도 단연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인데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힙니다. 심지어 원작을 읽었는데도 말이죠. 드디어 뉴욕을 떠난 감독이 향한 곳이 머나먼 아마존이라... 차기작은 아예 우주던데 말이죠.

뭐 그래도 감독이니깐 기본 이상은 해줄거라고 믿고 특유의 황갈색 톤의 필름룩은 여전해서 마음에 듭니다. 개봉 시즌이 묘하게 추석 시전과 겹치는 것 같긴 한데 흥행은 기대 안하고 (...) 후딱 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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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Elle] (2016)

(강력한 누설이 있습니다.)

아마 크레딧이 지나가자마자 얼굴이 벌개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파울 페르후번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당당하게 강간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소리를 외화면에서 흩뿌린다. 엉뚱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샷은 강간 장면이 아닌 검은 고양이의 정면 응시 샷이다. 때문에 파울 페르후번이 [엘르]에서 취한 시점이 고양이의 시점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그 착각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두번째 샷에서 이미 강간은 다 끝난 상태다. 하지만 피해자인 미셸은 울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일어나 청소하고 욕조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단 두-세번째 샷을 통해 파울 페르후번과 [엘르]는 장르 관습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이미 네덜란드 영화계와 할리우드를 자기 방식으로 조교시킨 음탕한 네덜란드 애처가이자 정숙하고 침착한 사디스트인 파울 페르후번은 이번엔 뻔뻔하게도 이자벨 위페르를 내세워 프랑스 영화계를 조교하려고 한다. 

강간 사건이 잠깐 물러난 자리에 이어지는 것은 미셸의 일상이다. 미셸의 일상은 (이자벨 위페르가 [다가오는 것들]에서 편안한 연기해냈던) 프랑스 중년 지식인 캐릭터가 누리던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기적이 일어날 자리엔 강간이 일어났다. 자연히 [엘르]는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일탈한다. 페르후번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깔깔 비웃으면서 발기발기 찢는다.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랑 살겠다며 찌질하게 구는 징징거리는 아들, 무례하기 그지 없는 아들의 여친, 안 팔리는 주제에 폭력만 휘두르다 이혼당한 지식인 전 남편, 섹스에 환장한 어머니의 젊은 남친, 낙하산이라고 미셸을 경멸하는 게임 회사 직원... 미셸의 일상은 루이스 부뉴엘과 마르코 페라리의 경박함과 미카엘 하네케의 서늘함을 품고 사정없이 해체된다. 미셸이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모아 만찬을 하는 시퀀스에서 날아다니는 위선과 경박함, 부글거리는 성적 에너지는 페르후번이 부뉴엘이 시전했던 풍요로운 부르주아의 식탁을 작살내는 쇼트들을 존경하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미셸이 게임 회사 사장이라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출판게에서 일하다가 낙하산으로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뒷설정은 미셸의 위치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미셸은 전통 지식인 사회에서도 떨어져 있고, 신세대가 주축이 된 게임 업계에서도 한발짝 떨어져있는 아웃사이더다. 전통 지식인 사회와 이혼했지만, 발 붙이고 싶어하는 게임업계와도 사이가 냉랭한 상태에서 강간이 끼어들게 된다. 슬슬 미셸의 캐릭터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미셸은 강간 사건을 '게임'으로 보고 있다. 미셸은 게임의 NPC를 뛰어넘어 플레이어가 된 뒤, 최종적으로 '프로듀서'가 되고자 한다. 디자이너를 총괄하는 프로듀서.

이때 미셸이 개발하는 게임은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다. 간과하기 쉽지만, 페르후번은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는 고블린이 주인공인 안티 히어로 잠입 게임이다. 이 게임의 비중은 의외로 크다.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건 아니지만 페르후번은 이 게임의 개발 과정과 그에 관련된 소동들을 서브 플롯으로 삽입한다. 심지어 미셸은 게임 모델링을 활용해 만든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은) 포르노 영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강간 사건을 겪은 미셸에게는 이런 모욕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영상을 만든 엔지니어는 미셸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지만, 미셸은 오히려 그 성적 대상화를 역으로 반격한다. 미셸은 그 영상을 보고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는 차분하고 남자의 팬티를 벗겨 성기를 유심하게 관찰한 후 냉정하게 모욕을 준다. 페르후번은 이 서브플롯을 통해 미셸이 강간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강간하는 고블린에 가깝다는걸 명백히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진상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게임의 결말에서 주인공인 복제 고블린은 무도덕한 본체 창조주 오크 마법사를 소멸시키고 본체 스틱스의 정체성을 차지하게 된다. 정체성의 문제라던가 아버지 살해라는 모티프라는 점에서 이 게임의 플롯은 미셸의 과거사나 주변 환경과 묘하게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복제'인 미셸은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가? 미셸이 죽이고 싶어하는 원본은, 경건하고 온화한 중산층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자비한 살인마로 돌변한 아버지다. 미셸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내심 불편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강간 사건은 미셸이 안고 있는 불편함을 수면 위로 올려보낸 셈이다.

[엘르]가 이상한 안티 히어로물이라 할 수 있다면, 중후반부 강간범의 정체가 드러난 뒤 미셸이 취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미셸 앞집에 사는 강간범 파트리크는 묘하게 미셸의 아버지와 닮아있다. 멀쩡한 중산층 부부의 가장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은 미셸 그 이상으로 비틀린 범죄자다. 미셸은 파트리크의 비틀린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닫아달라고 파트리크에게 부탁해 같이 정리하는 미셸의 시퀀스는 사실상 둘의 섹스 시퀀스나 다름없다. 이 장면이 불편하다면 초반부의 강간 시퀀스의 뉘앙스와 행위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미 미셸을 욕망에 충실하고 재주가 많은 고블린이라고 정의내렸다. 고블린은 인간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는 존재다. ("하하하. 당최 알아먹지 못하는구나? 살거나 죽거나... 이제는 더이상 내게 명령할 수 없어.") 무도덕한 지식인에게서 태어난 - [엘르]에서 탄생은 축복이 아니라, 한낱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조시의 흑인 아이는 정숙한 여성상에 대한 빅 뻐큐에 프랑스 백인 지식인 사회가 두려워하는 악몽이며, 또다른 고블린이다. - 고블린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인정하게 되고, 중산층의 위선을 차분하게 까발린다. 미셸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미셸의 입장을 따라갈수 있다면 그건 고블린의 내면이 어떻게 설계되어있는지 알아차린 이자벨 위페르의 공이 크다.

영화 후반부, 미셸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병으로 잃는다. 하지만 어머니 유골은 소동으로 제대로 뿌려지지 못한 채 허겁지겁 막을 내리고, 아버지 시체 앞에서 미셸은 대놓고 비웃고 경멸한다. 미셸에게 부모의 죽음은 차라리 본체로부터 해방에 가깝다. 미셸은 무책임한 창조주를 직접 소멸시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소멸을 애도하지 않고 경멸하는 것으로 복수를 완수한다. 이 순간 미셸이 책임지고 있는 게임이 동시에 완성되는건 당연하다. 미셸은 게임 완성 축하 파티에서 작가 남편과 게임 업계의 뚜쟁이가 된 뒤, 친구 안느에게 안느의 남편과 바람 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안티 히어로 고블린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 잔칫날의 배경 음악으로 '삶에 대한 욕망'과 '고립시키자'가 나오는 건 고블린과 페르후번의 사악한 유머일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강간범 파트리크다. 파티에서 나온 미셸은 파트리크를 불러내 헤어지자고 선언한다.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 선언을 통해 폭압적인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강간하려고 발악하려는 파트리크를 똑바로 응시하는 미셸의 얼굴 샷은 그 점에서 로라 멀비가 지적했던 시선의 권력 관계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다. 미셸은 파트리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음으로써 파트리크를 부끄럽게 만든다. 미셸은 부모를 죽일수는 없었지만, 강간범 파트리크의 존재 이유를 빼앗을수 있었다. ("날 봐라! 스틱스! 내가 네 운명을 선택하는 것을 보라고.") 파트리크는 발악하다가 자멸하고 곧 이어 상황을 모르는 빈센트의 손에 살해된다.

[엘르]의 클라이맥스는 철저한 아이러니다. 어느 누구도 파트리크와 미셸이 이상한 관계를 맺었다는걸 모른다. 빈센트의 살인은 정당방위로 경찰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아내인 레베카 역시 범죄자 파트리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초반부 남성들에게 모욕당한 미셸은 마지막에 게임의 프로듀서로써 성공한다. 그 '게임'은 진짜 '게임'이기도 하고, 강간범과의 파워 게임이기도 한다. 미셸은 파트리크를 죽이면서 법을 비롯한 남성의 장치를 빌리지 않고 빛으로 위장한 "어둠의 주인"이 된다. 미셸이 키우다가 언급 없이 사라진 검은 고양이는 그 게임으로 인도하기 위한 환상이었던 것일까?

이 아이러니로 이뤄진 안티 히어로 극을 실제 여성들이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강간의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미셸의 행동은 도무지 현실로 옮길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어떤 여성들에게 [엘르]의 미셀은 결국 남성이 ([엘르]의 원작, 각본, 감독 모두 남성이다.) 만들어낸 기벽증으로 가득한 환상 (까놓고 말해 히토미 꺼라 식의)으로 다가올 것이다. 페르후번은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상된 비판에 대답한다. 미셸은 불명예스럽게 이사가는 레베카를 위로한다. 이때 레베카는 풀이 죽은듯 보여도 이겨낼 기운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안나랑 미셸이 얘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미셸의 인생은 어둠 없이 안나랑 즐거울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당신은 이 고블린이 맞이한 결말에 납득할 수 있는가? 이 연대가 정말로 진실하게 느껴지는가? [엘르]는 강력한 에너지로 밀어붙인 뒤, 관객을 회색 영역에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파울 페르후번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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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러버스 앤 베어 [Two Lovers and a Bear] (2016)

킴 누옌의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도입부는 광활한 설원이다. 두 남녀가 제트스키를 타면서 나아가는 장면에서 설원이 가져다 주는 원초적인 쾌감이 느껴진다. 그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얼음을 뚫어 낚시를 한다. 아 이 도입부는, [투 러버스 앤 베어]의 감수성이 얼음에 기반해 있으며 내용과 구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암시하고 있다. '부모의 구속력은 지대하다'는 대사는 그들이 부모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단단한 얼음을 뚫는 행위는 영화 내내 이어질 두 사람의 사투를 예감케 한다.

그걸 증명하듯이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차가운 영화적 공기 속에서 끊임없는 하강 곡선을 그리는 영화다. 킴 누옌은 벡터의 충돌을 통해 전제를 세운다. 주인공 로만은 남쪽에서 북쪽 알래스카로 도주해왔다. 로만에게 남쪽은 부모로 대표되는 고통이며, 오직 설원에서만 자신의 고통을 삭일 수 있다. 하지만 로만의 연인인 루시는 알래스카는 끊임없는 고통이며 남쪽 이야말로 도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벡터는 어긋나 있으며, 이는 영화 내내 끊임없는 충돌과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섹스는 도무지 '들어가지지' 않고, 로만은 술에 취해 자신을 집 안에 유폐 시킨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은 번번히 좌절되며,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사랑은 어쩔수 없는 하강 곡선을 그린다. 이 고전적인 전제는 [투 러버스 앤 베어]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투 러버스 앤 베어]가 이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전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비 전형적인 구석이 있다.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차가운 영화적 공기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두 사람의 사투를 서서히 추상화 한다. 두 연인과 곰에 대한 사변조의 농담은 그렇다 쳐도, 로만과 루시의 눈에만 보이는 불쑥 내습하는 루시 아버지는 영화의 멜로드라마에 또다른 층위를 형성한다. 킴 누옌은 멜로 드라마를 유령, 판타지적 존재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합하는 누옌의 연출은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전후 현대 영화의 기조와 맞닿아 있다. 

어느 지점에서는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상처받은 연인들의 사랑 얘기가 아닌, 전장에서 살아남은 소년병들의 트라우마를 형상화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로만과 루시는 과거에 부모와 지독한 전쟁을 치뤘으며,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상처는 공유되지 않으며, 사랑으로 버티는 것도 두 연인에게는 버겁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두 연인의 선택은 자살에 가까운 무모한 여정이다.

킴 누옌은 지극히 추상적인 액션이나 무드를 지속시키면서 심리적 불안을 구축한 뒤, 일거에 해소하는 방식으로 쾌감을 구축하기도 한다. 로만이 얼음 틈에 끼어서 탈출하는 신을 보자. 이 신은 서사와 무관하게 길게 찍혀 있기에, 해소되지 않은 불안함을 안고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로만이 힘겹게 탈출에 성공했을 때 누옌은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Seven Nation Army'를 설원 화면과 함께 틀어주면서 그 쾌감을 관객과 공유케 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벙커 폭파 장면도 그렇다. 혹한에 유일한 피난처를 부수고 나간다는, 상당히 개연성 없고 답답한 장면이지만, 막상 영화 속에서는 루시의 공포와 로만의 결단에 압도되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물론 이는 데인 드한과 타티아나 마슬라니라는 훌륭한 두 배우의 호연 때문에 가능한 마법이기도 한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모든 장면들이 킴 누옌의 의도대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두 연인과 곰에 대한 농담은 문학적 상징과 영상 언어와 충돌해 어색하며, 곰이 등장해 로만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생뚱 맞은 유머에도 불구하고 전개하고 잘 엮여 있지 않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단점은 관념적인 주제 의식이 로맨스가 디디고 있는 현실과 충돌하는 부분에 있다. 누옌은 지속적으로 멜로 드라마의 통속성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지만, 아직 그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종종 통제를 잃고 관념적으로 흘러가더라도 하더라도 [투 러버스 앤 베어]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귀중한 가치가 있다. 캐릭터의 어리석음 마저 받아들이는 성숙함이다. 킴 누옌은 전작 [르벨]처럼 매정한 세상에 상처받고 미숙한 미성년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특히 잊기 힘든 엔딩은 더욱 그렇다. 로만과 루시는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는 커플이었고,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킴 누옌은 저 멀리 날아가는 헬리콥터와 두 연인이 잠든 얼음 덩어리 쇼트를 통해 로만과 루시의 지난한 사랑과 투쟁이 의미 없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길 기원한다. 적어도 이 순간 누옌이 지닌 간절함과 아름다움은 그 누구보다도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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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1943)

얼마 전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회고전에서 만난 영화들은, 그간 이 감독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호프만 이야기]를 보고 리뷰를 쓰면서 막연히 지적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영화들은 고전기 영화들의 간결한 우아함과 더불어 영화라는 매체의 즉물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즉물성의 허망함을 역사 인식과 철학의 경지로 이끌어올린 걸작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미룬채 조각난 샷들을 이어 호기심을 이어간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훈련을 하다가 전쟁 훈련을 위한 포로를 잡기 위해 터키탕을 찾아간다. 거기엔 늙은 군인 윈 캔디가 있다. 어느때처럼 꼰대질을 하다가 졸고 있는 윈 캔디는 현실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훈련을 시작하려는 젊은 장교 스피더에게 예의범절을 훈계하다가 망신을 당한다.

이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화사에서 손꼽힐 우아하고 아름다운 플래시백 도입부를 보여준다. 스피더에게 망신을 당하는 늙은 윈 캔디를 뒤로 한 채 카메라는 쭉 앞으로 트랙 인 하다가 냉탕에서 수영하다가 맵시있게 나온 젊은 윈 캔디를 보여준다. 볼품없고 추레한 육신이 카메라의 전진으로 이뤄지는 영화의 마술을 통해 젊은 육신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영화적으로 젊어졌다가 늙어가는 과정은 볼품없어지는 윈 캔디의 여정과 발맞춤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새로 태어난 젊은 윈 캔디가 도입부의 윈 캔디가 되기까지 단 한번도 현재으로 돌아가지 않고, 플래시백의 이야기를 따라가길 고집한다. 따라서 우리는 늙은 윈 캔디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가 '늙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초적인 정보만 쥔 상태에서 윈 캔디의 캐릭터를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꼰대 캐리커처를 확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늙고 별볼일 없는 꼰대라는 첫인상과 달리 도입부 이후 젊은 윈 캔디는 그야말로 캡틴 잉글랜드나 다름없다. 어쩜 저렇게 티끌없이 해맑고 순수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젊은 윈 캔디는 기사도와 이상을 숭상하는 혈기방장한 군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화의 초반부는 수정주의적 관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구식 모험담이다. 인물들의 가치관은 명확하고, 실제 현실의 논리는 흑백에 따라 단순하게 재단된다.

스타일 면에서도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도입부의 비교적 절제된 톤을 벗어던진 극도로 인공적인 세트와 미술로 뛰어든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시각적 성찬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양복들,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인물들, 숨막힐 정도로 프레임을 수놓는 소도구들과 세트... 심지어 영화가 점점 냉정해질때에도 카메라는 영국 전원의 아름다움과 미로 같은 대저택의 웅장함을 빼어나게 뽑아낸다. 초기 컬러 영화 특유의 독특한 원색 역시 이런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관객들에게도 이런 묘사는 '비현실적'이었을것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묘사하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은 현실의 구질구질함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는 인형놀이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공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윈 캔디가 대영제국을 모욕한 독일 신문기사를 읽고 결투를 벌이기 위해 독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두 인물을 보여준다. 테오 크레치마르 슐도프와 이디스 헌터는 영화 내 윈 캔디의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다. 대결 상대로 나온 슐도프는 영국과 반대되는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사상 영국의 라이벌로 그려지는 대상은 프랑스일텐데, 왜 이 영화는 프랑스인이 아닌 독일인을 영국인의 라이벌로 내세웠을까? 답은 영화 외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는 막바지긴 해도,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시절이었다. 이 영화는 전시 선전 영화로 기획되었다. 슐도프는 그 점에서 전시 유럽 대륙을 체화한 캐릭터다.

하지만 전시 선전 영화의 관점에서 봐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는 좀 이상하다. 파웰과의 다른 전시 선전 영화인 [침입자들]이나 [콘트라밴드]와 달리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의 슐도프는 응징이나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럴수도 없는게, 윈 캔디와 슐도프가 처음 만난 시기는 양국 관계가 험악하지 않았던 1차 세계 대전 이전 얘기다. 아직 전쟁이 덜 크고 끔찍했던 시절, 조금이나마 19세기 신사도 문화가 남아있던 시절. 이쯤되면 알 수 있겠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국과 유럽이라는 테마를 좀 더 큰 캔버스로 옮겨서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잡해져만 가는 영국과 유럽의 관계를 윈 캔디가 물려받은 미로 같은 저택처럼 확장해간다.

우아한 신사의 결투로 포장하긴 했지만 윈 캔디와 슐도프의 관계는 불알친구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제의 격한 결투는 멋진 상처를 남겨주고 신문에서의 국가 간 설전은 우정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이디스 역시 그런 징검다리 중 하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삼각관계로 이어질수 있는 관계를 신사적인 양보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윈 캔디는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접어버리고, 슐도프와 헌터의 행복을 빌어주며 떠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초반부의 모든 사건들을 명쾌하고 긍정적인 논리로 정리하면서, 영화의 순진함과 구식 모험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공적인 세트를 강조한다. 

역설적으로 도입부에 제시된 순진한 아름다움은 영화가 이어질수록 조금씩 빛을 바래간다. 이 영화가 대영제국주의의 로맨틱한 회상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의혹을 대부분 지울수 있다면, 윈 캔디와 슐도프가 겪는 인생여정을 통해 초반부를 재구성할 여지와 동시에 안쓰러움을 전하기 때문이다. 괜한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상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의 행복을 위해 쉽게 이디스를 포기했던 윈 캔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댓가를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기사들의 소꿉장난과 같았던 군인을 현실의 위치에 되돌려놓고, 새로이 등장한 신병기들은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 신대륙 미국 장교들은 무례하기 그지없고 언제라도 쉽게 화해할수만 있었던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깊은 골이 패지기 시작한다. 현실은 처음부터 조금씩 복잡했지만 윈 캔디는 파악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복잡해진다.

윈 캔디가 더욱더 비극적인 어릿광대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실과 자식 세대의 과오를 지켜보며 성장하는 슐도프랑 달리 그 현실을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슐도프가 반가워하는 윈 캔디를 외면하는 반응 샷은 그 점에서 가슴은 찢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대영제국의 환상을 반영한 초반부가 순진맹충하다는걸 분명하게 인식하지만, 그 순진맹충함 속에서 쌓인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슐도프의 처량한 모습은 결국 거대한 역사에 속해있지만 그 엄혹함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개인의 슬픔을 보여준다. 포로 수용소에서 풀러나 낙관론에 젖어있는 윈 캔디와 친구들 앞에서 보이는 슐도프의 무표정한 눈빛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의 현실 인식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독일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제공한다.

이런 변화는 데보라 카가 멋지게 연기해낸 세 사람의 '그녀'하고도 관련이 있다. 두 남자 주인공과 달리, 데보라 카의 '그녀'는 환상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개성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다. 윈 캔디의 '그녀'들은 매번 현실에 발맞춰 나타나지만, 윈 캔디에게 '그녀'들은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윈 캔디는 이디스를 사랑하지만, 젊은날 우정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고 이디스의 환영 바바라를 찾아내 사랑했지만 다시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럼에도 윈 캔디는 이 세상에 없는 이디스 근처를 맴돈다. 정작 두 이디스의 환영들은 분명한 직업과 자기 삶을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특히 조니는 윈 캔디를 현실로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해낸다.) 윈 캔디는 환영에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바쳐버렸다.

친구를 외면했던 슐도프가 영국으로 넘어와 경찰들 앞에서 덤덤하게 인생역전을 설명하는 롱테이크 샷은 그 점에서 슬프다. 슐도프는 어려운 독일의 상황에서 자신이 믿었던 가치가 환상이라는걸 깨달았고, 현실에 맞춰 발빠르게 타락해버린 아들들에게서 떠나야만 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화려함을 벗겨낸 경찰서에다 상처입은 유럽의 영혼을 앉혀놓고 그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탄식한다. 우리 유럽에겐 (비록 환상이었더라도) 고결한 나날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고결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런 쓸쓸한 인식에 기반한 탄식은 파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프레스버거의 입김이 강하기도 하다. 프레스버거는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윈스턴 처칠이 바랄법한 전시 선전용 메시지로는 부적합해져버린다. 이 영화가 독려하는 나치에 대한 항전 의지는 선악 논리보다는 인간의 삶 그 자체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점에서 전쟁 이후의 복잡해질 도덕과 미덕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외부에서 나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된 슐도프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명료한 가치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다. 슐도프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순 없어도, 남아있는 삶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있다고 믿는다. 그걸 말하려고 독일을 떠나 윈 캔디 앞에 나타난 것이다.

군대에서 밀려난 윈 캔디는 처음엔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계속 현역으로 있을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조니와 슐도프의 독려로 순순히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긴 하지만, 그 역시 완고한 윈 캔디의 고집에 일련의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윈 캔디를 동정하거나, 적어도 이해할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군인인 스피더는 그 점에서 윈 캔디의 거울상 같은 캐릭터다. 고집 세고 어른 말은 잘 안 들으려는 모습은 초반부 윈 캔디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 모습에서 윈 캔디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이 때 윈 캔디의 시점 샷으로 등장하는 물 위에 뜬 낙엽은, 가히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을 연상케하는 심원한 통찰과 서정미를 지니고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를 설명하는 또다른 요소인 영국 전원에 대한 시적 예찬이 (윈 캔디와 바바라의 별장과 슐도프의 포로 수용소 시퀀스에서도 간간히 드러난다), 응축된 쇼트라고 할 수 있다. 저물어가는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지긴 했어도,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한때 윈 캔디와 바바라가 살았던 집이 부셔졌더라도, 우리는 살아갈거라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말하며 영화를 끝낸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불멸의 영화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면,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들이 어떻게 꼰대가 되었는가를 보여준 뒤 그것이 인간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기 때문이다. 실로 영국 영화가 자랑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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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L'enfer / The Hell] (1994)

2017/05/09 - [Deeper Into Movie/리뷰] - 도살자 [Le Boucher / The Butcher] (1970)

클로드 샤브롤의 [지옥]은 프랑스 시골 마을의 전경을 트래킹하면서 시작한다. 그 다음 샤브롤은 결혼식장으로 옮겨가 인물들을 소개한다. 아마 샤브롤 매니아들은 이 정경에 움찔할지도 모르겠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도입부는 샤브롤의 대표작인 [도살자]를 닮았다. 샤브롤은 또다시 피와 비극으로 얼룩진 로맨스를 다루고 싶은 것일까?

글쎄, 결론만 말하자면 절반만 맞는 사실이다. [지옥]의 러브 스토리는 비극으로 얼룩진 건 맞다. 하지만 빛과 어둠의 연인들이 애절하게 이별하는 [도살자]와 달리 [지옥]의 커플을 바라보는 샤브롤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지경이다. 어쩌면 이 냉혹함은 존경하는 선배에게도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옥]은 소름끼치는 [디아볼릭]을 만들어낸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미완성 프로젝트를 리메이크한 영화기 때문이다. [디아볼릭]의 냉혈함과 샤브롤의 어두컴컴함이 만나다니 처음부터 행복한 결말 따윈 없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도입부의 결혼식을 장식했던 넬리와 폴이라는 커플이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호텔을 운영하며 사는 넬리와 폴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할 커플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날 넬리가 결혼 전 연애 경험을 폴에게 털어놓으면서 이 둘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폴은 넬리가 자신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단정하고, 넬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지옥]에서 흥미로운 점은, 샤브롤 영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루이스 부뉴엘의 영향을 받은,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적인 연출을 비교적 알기 쉽게 (?) 찾아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미 샤브롤은 1970년대에 [파멸]이라는 영화에서 거의 캠피할 지경까지 가는 무의미하고 초현실적인 쇼트와 폭력적인 인물 관계를 결합시키는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샤브롤은 엘렌 주변의 인물들의 캐리커처성을 부풀림과 동시에 엘렌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플롯의 정합성을 가볍게 흘러보내면서 야비하고 불쾌한 유머로 부르주아들을 공격해댔다.

[파멸]은 그 실험이 지나친 나머지 병맛 부조리극을 연상케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가 되었지만, [지옥]은 사정이 다르다. 모든 인물들이 얄팍했던 [파멸]과 달리, [지옥]은 그런 얄팍함이 덜하다. 우선 샤브롤은 [지옥]의 넬리에겐 어느 정도 감정 이입을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때도 폴의 의처증은 도를 지나쳤고 무시무시하다. 작중 넬리가 겪는 폭력은 일상적인 부부싸움이라 보기에도 어렵다. 심지어 폴과 넬리 이외의 등장인물들은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폴의 비정상성과 대조된다. [지옥]은 데이트 폭력 보고서라 할만큼, 부부 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폭력이 어떻게 가속화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샤브롤이 야비한 조소를 보내는 대상은 남편인 폴이다. 샤브롤이 폴을 조롱할때 [지옥]은 히치콕의 [이창]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에서 많은 걸 빌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지옥]은 집착의 시선이 어떻게 영화 전체의 시공간을 잡아먹게 되는지 약간의 초현실주의를 동원해 보여주는 영화다. 도입부 폴의 일상에서 샤브롤은 힌트를 흘러놓는다. 폴이 친구랑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서 얘기하는 시퀀스가 그렇다. 평범한 대화 시퀀스처럼 보이지만, 폴의 샷과 친구의 샷은 어딘가 시선이 맞지 않는다. 샷을 떼어넣고만 본다면 폴과 친구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된 몽타주의 의도는 명백하다: 폴은 처음부터 자신의 시선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도살자]가 그랬듯이, 샤브롤은 일상을 보여줄때도 어딘가 초현실적이고 불안한 샷으로 몽타주를 교란해 은밀한 긴장을 조성한다.

이처럼 [지옥]은 슬금슬금 의심과 집착을 풀어놓으면서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흐트러트리기 시작한다. 넬리는 종종 폴의 시각에서 수상쩍은 행동을 하지만 그 수상쩍은 행동의 진상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넬리가 자동차 수리공 마르티노랑 배를 타고 놀러간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놀러간건지 아니면 은밀하게 섹스를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알수 없음이 폴의 의심과 분노를 낳는다. [지옥]의 지옥은 진상을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가 점진적으로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어둠 속에서 호텔 손님이 찍은 필름을 즐겁게 보다가, 넬리와 마르티노를 떠올리고 폴이 발광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전환점이라 할 만하다. 남들의 행복한 홈 비디오 앞에서 폴이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호하지만 집요한 간통의 이미지다. 폴은 그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미쳐버린다. 이 잔인한 아이러니가 지나간 후, 폴은 영화 속 현실을 제대로 지각할 자격을 잃어버린다. 간신히 상황이 진정된 순간에도 폴은 넬리를 계속 의심하고, 특정한 주관적 이미지에 집착해 폭력을 휘두른다. 샤브롤은 그것이 부르주아가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신경증이며, 끔찍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부부의 호텔이 어둠으로 가득한 감옥으로 돌변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샤브롤은 전원의 빛으로 가득했던 영화 속 세계를 최종적으로 표현주의 특유의 강렬한 어둠에 가둬버림으로써 지옥을 완성한다.

무시무시한 감금과 폭력의 반복의 끝에 도달한 결말은 도입부의 반복이다. 샤브롤은 아까까지 이뤄졌던 아비규환과 도래할 파국 앞에서, 갑자기 모든 것을 리셋해버린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해하는 폴을 냅둔뒤 도입부의 평온한 전원을 트래킹하는 샷으로 돌아간다. 이 때 샤브롤이 마지막으로 올리는 자막은 다음과 같다. "끝도 없이." 거기서 [지옥]은 끝난다.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에서 그랬듯이 샤브롤은 파국 직전의 진공 상태에서 영화를 끝내고, 평온한 도입부로 돌아가 이 지옥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선언해버린다. 참으로 악랄하기 그지 없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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