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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Go To Fly (50)
장 보드리의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



사유 속의 영화

저자
이윤영 (편역)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04-18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영화, 오로지 영화만이!” 20세기 최고의 지성들이 쓴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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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의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시작은 프로이토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트는 “사진기”의 비유를 들면서 광학적인 비유를 통해 심리 현상 전체에 통합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새로운 비유로 넘어갔다. 이처럼 광학적인 비유를 들었던 프로이트의 이런 선택은 지구 중심 세계관의 종말을 불러왔던 광학 장치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계를 맺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광학 장치는 회화 작품을 만들때에는 인위적인 원근법을 도입하는데 쓰였다는 것이다. 보드리가 지적하는 점은, 이 인위적인 원근법이 ‘주체’를 역동적인 중심으로 놓거나 의미의 기원을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광학적 도구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쓰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의문이 ‘중립성’이라는 점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보드리는 그 중립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어떤 ‘기술적’ 기준에 의해 규정되는지를 정립해야 한다고 보면서 앞으로 보완되고 검증되고 교정되어야 할 몇몇 지침들을 정립하고자 한다. 객관적인 현실과 기입의 장소인 카메라 사이에서, 기입과 영사 사이에서 일정한 작용들과 결과적으로는 완성된 작품을 만드는 작업이 끼어든다. 이처럼 영화가 날 것 그대로의 질료하고 단절되고 분리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완성된 작품만 보고서는 중간 변형 단계를 짐작할 수 없는데 이는 카메라가 실제로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매개 정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샷 분할과 몽타주가 아무리 상호 의존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이 다루는 의미 있는 질료가 차이나기 때문에 샷 분할과 몽타주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며 완성된 작품과 그 소비에도 구분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영화적 특수성은 하나의 작업, 다시 말해 하나의 변형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며 완성품의 소비가 인식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아니면 감춰지는지를 파악하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니면 그 효과 자체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질문하고도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다.

 영화사는 르네상스식 원근법적인 구성을 모델로 삼으면서 성장했다. 보드리는 그렇기에 영화는 원근법을 파괴한다기 보다는, 기준적 규범으로써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불연속적이며 복수의 시점에 기반을 둔 그리스인들의 원근법과 달리, 중심이 있는 공간을 위주로 발전해왔으며 주체가 반드시 점유해야 하는 지점 자체를 한정하고 있다. 때문에 광학적 구성은 환영적 현실을 창조하는 잠재적 이미지의 영사-반사로 나타나게 되며 이상적인 보기의 지점을 정돈하게 된다. 이는 존재의 완전성과 동질성이라는 형이상학의 감각적 재현이라는 서구식 회화의 비전하고도 연관관계가 있으며 영화가 만들어낸 관념론적 담론하고 연계시켜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드리는 영화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연속된 이미지를 녹화할수 있다는 점에서 통합적이고 실체화시키는 특성에 대한 교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즉슨 현실에서 이뤄진 순간들의 절단 혹은 채취된 이런 이미지들은 카메라가 움직이기 때문에 ‘주체-눈’의 고정된 위치를 중화시키고 무화시키는 시점의 다양성을 생각해볼수 있기 때문이다. 영사작용은 고정된 연속적 이미지를 움직임의 연속성과 시간적 차원을 복구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불연속적 요소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지는 연속성의 복구가 문제를 만들어낸다. 즉 관객은 서로 차이가 나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를 지워야지 영화의 연속성을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술적 차원에서도 각 이미지들 사이에서 차이 선택의 최소화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의 24프레임 내에서 간극이 있는 반복이 계속 일어나지만 정작 관객은 그 간극을 완벽하게 다른 이미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드리는 꿈으로 대표되는 무의식의 언어에 담긴 어떤 불연속성을 통해 영화의 물질적인 기반을 작용하는걸 파악할수 있을거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영화가 물질적 쓰기의 체계를 숨기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관념론을 내포하는 장치의 기계적 모델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차이를 기입하는 광학 장치와 필름과 최소한의 차이를 선택하고 줄이는 기계 장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형성된다. 움직임과 연속성은 최소한의 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미지 그 자체는 지워진다. 정리하자면 영화 카메라로 찍힌 어떤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은 연속성, 움직임, 의미로 변형시키는 영사기를 통해 해방되고 동시에 의미와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또 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움직임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의 메커니즘은 스스로 움직여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스스로 움직이는 눈이 어떤 물질적인 것에 구속되지 않는데다, 세계는 눈을 위해 구성될 것이다. 움직임은 초월적 주체가 드러날 수 있는 가장 우호적 조건을 실현시킨것 같으며 주체의 가능성과 권력을 강화시킨다. 이 주체의 가능성과 권력을 통해 영화 이미지는 특정한 무언가를 이미지화하기 위해 의미로써 구성한다. 보드리는 절대적 여기와 그것돠 대립된 다양한 인식들이 지각되진 않지만 따라다닌다고 본 후설의 이론을 인용해 연속성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한다. 연속성은 주체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주제의 위치를 제한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연속성은 차이를 부정하는 체계에서 출발한 형식적 연속성과 영화적 공간 속애서 내러티브적 연속성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온다. 그리고 내러티브적 연속성의 추구는 본질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의미가 발원하는 지점에 대한 통일성을 어떤 식으로돈 보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묘사한 메커니즘이 이데올로기적 기계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배치가 필요하다. 보드리는 이에 영화 상영관의 조건을 끌고 와 그것의 폐쇄성과 제한된 공간에서만 효과적으로 스크린-거울 이미지가 작동한다고 보고 있다. 영사기와 암실, 스크린이라는 서로 다른 요소의 배치는 라캉이 묘사한 거울 단계가 작동하는데 필수적 배치를 재구성하게 한다. 하지만 이 재구성은 두 가지 보완적인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운동 능력의 미성숙과 시각기관의 조숙한 성숙이다. 현실감의 기원은 여기에 바탕에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즉 영화가 흉내내는 현실은 자아의 현실이지만 동시에 자기 몸의 이미지가 아니기 떄문에 이중적 차원의 동일시를 구분할 수 있다. 이미지 그 자체의 동일시와 초월적 주체의 동일시라는 두 가지 동일시를 놓고 보면 카메라는 후자의 초월적 주체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건데, 관객은 카메라를 통해 스펙터클을 작동시키고 이를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과 동일시한다. 보드리는 카메라를 초월적 자아를 통해 유기적 통일성으로 통합되면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카메라와 주체의 관계를 주목해야 하며 ‘주체가 카메라를 통해 스스로 구성되고 포착할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미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중심적 자리의 환영적 제한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려는 기능이야말로 영화가 수행하려는 특수한 기능인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재현의 이데올로기와 초월적인 관찰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일관적인 체계를 구축하는데, 이 때문에 보드리는 영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규정한 모델에 호응하는 일종의 대체적 심리 장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대체적인 심리 장치를 구성하는 결정적 기본적인 장치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영화의 근본을 뚫을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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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서사(서사)ㆍ기억ㆍ비평의 자리

저자
발터 벤야민 지음
출판사
| 2012-12-3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발터 벤야민 선집 제9권 서사(서사)ㆍ기억ㆍ비평의 자리이 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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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니콜라이 레스코프라는 한 이야기꾼을 고찰하고 있는 에세이이다. 먼저 벤야민은 현 시점에서 이야기꾼이라는 존재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야기꾼을 ‘어떤 거리와 시각을 취하게끔 한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경험을 나눌 줄 아는 능력’하고 연계시킨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꾼이 드물어지는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경험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꾼의 이야기의 원천은 무엇인가? 벤야민은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는 ‘경험’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이야기꾼을 두 종류로 분류를 하는데 이는 농부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뱃사람으로 나뉜다. 한 곳에 정착한 자의 이야기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자의 이야기가 이야기꾼의 원조가 된 것이다. 물론 이 두 영역은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와 이야기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벤야민은 레스코프에 대해 “공간적으로 먼 곳의 이야기나 시간적으로 먼 과거의 이야기에 정통해 있었다”라고 말한다. 신자이자 러시아 주재원으로 일했던 레스코프는 러시아 전설들을 마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확고한 천성을 가진 인물들을 그려내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벤야민은 진정한 이야기꾼은 “드러내거나 숨긴 채로 유용한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으”며 이야기꾼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현대로 올수록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줄어든데다 진리의 서사적 측면인 지혜가 사멸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종말엔 근세 초기에 등장한 소설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 소설이 지금까지 산문문학과 차이가 나는 부분을 바로 구전의 전통과 독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경험으로 만든다면, 소설은 철저히 개인적인,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에서 시작해 그것을 극단으로 끌고 간다는 점이 있다.

 이런 서사 형식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와 대조되는 새로운 소통의 형식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정보이다. 이제 사람들은 멀리서 온 소식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 즉각 검증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이해 가능한 정보 듣기를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어떤 교훈으로써 이야기하는 기술이 드물어진 것도 이 정보의 대두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벤야민이 레스코프를 주목하는 이유는 “기이한 일, 놀라운 일이 지극히 정밀하게 이야기되지만 사건의 심리학적 연관이 독자에게 강요되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다. 레스코프를 통해 벤야민은 진정한 이야기가 어떤 것이며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 이후로 도래한 ‘정보’가 가지고 있는 한계도 짚어내고 있다. 정보는 새로웠던 순간이 지나면 소진되지만 반대로 이야기는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심리학적인 분석과 설명을 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을 하여금 동화되게 하는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계속 전파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완과 동화 과정이 현대 사회에서는 부족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다.

그 점에서 이야기는 ‘전달의 수공업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순수한 실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보고하는 사람의 삶 속에 일단 사물을 침잠시키고 나중에 다시 그 사물을 그 사람에게서 건져올린다. 즉슨 이야기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발레리를 인용한다. 발레리에 따르면 현대인은 시간을 줄일 수 없는 일에는 더 이상 손대지 않는다. 현대인의 삶에 따라 이야기도 더욱더 축약되어가는 현상을 보이며 이는 영원성에 대한 생각의 소멸과 연계가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영원성은 죽음의 모습과 연계되어 있음.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줄어든 것과 연계된다. 19세기 시민사회와 과학의 발달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게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과정인데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에서 공적인 과정이자 가장 전범적인 과정이였다. 하지만 현대로 갈수록 점점 요양원이나 병원 같은 지각의 세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임종에 이르러 이야기가 권위와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것과 연관이 있는데 이는 헤벨의 뜻밖의 재회에서 드러나는 세월의 힘이 담긴 문장에서 확인할수 있다.

어떤 서사형식이든 그것을 연구하는 작업에는 이 서사 형식이 역사 기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탐구하는 일이 포함된다. 더 나아가자면 역사 기술이 모든 서사 형식의 창조적 무차별성이 나타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연대기는 그런 역사 기술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서사 형식이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인 연대기 기록자와 역사가 간에는 차이가 있는데 연대기 기록자는 설명의 의무가 없지만 역사가는 그 연대기 기록을 설명해야 한다. 중세 연대기 기록자들은 해명 불가능의 영역에 자신의 연대기를 기록해 세상사 흐름에 포함시킨다.

이야기꾼 속에는 연대기 기록자가 세속적인 형태로 보존되어 있고 레스코프는 연대기 작가와 이야기꾼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작가다. 그렇기에 레스코프의 이야기에서는 세상사의 흐름을 분명하게 구분하는게 불가능하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는 자의 관심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재현할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서사적 능력이다. 이야기꾼이 서사를 만들어내는데에는 자신의 체험 혹은 다른 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승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야기꾼은 기억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이 여러 서사 형식들의 공통의 출발점을 나타낸다면 서사시는 소설과 이야기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사시에서 소설이 독립되었을때 기억과 이야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게 밝혀졌다.

기억: 사건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는 전통의 연쇄. 한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에서 연결되며 수많은 사건들에 바쳐져 있다. 이런 연쇄는 서사적 기억, 이야기의 뮤즈. 소설의 뮤즈는 회상. 잠깐동안 지속되는 이야기꾼의 기억과 달리 한 명의 주인공과 한 명의 사건을 다룸. 서사시에서 분리된 소설은 곧 기억이라는 유산을 물러받게 되는데, 루카치를 인용하자면 소설에서는 의미와 삶이 분리되고 본질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이 분리된다. 이걸 통찰하면서 도달할수 없는 삶의 의미를 파악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인식의 정리와 그 정리를 인식하고 삶의 의미를 주는 것에서 끝을 맺는 형식이야말로 매우 소설적인 것이다.

소설을 읽는 자는 고독하다. 이 고독 속에서 소설의 독자는 소설의 소재를 정복하고 삼켜버린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속에 기록된 어떤 사건에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발견할수 있을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원초적이지만 건져낼수 있는 개념은 다양하다. 위대한 이야기꾼들의 공통된 점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의 발판들을 자유롭게 이용한다는 점에 있다. 동화는 그런 이야기의 순수한 마력을 잘 보여주는 예로, 인류가 악몽을 떨쳐내기 위한 방도들을 찾아볼 수 있음. 레스코프는 그런 동화의 정신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레스코프는 의인으로 정점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위계를 탐구하는데, 점점 내려갈수록 이 탐구는 신비주의적인 관점에 가까워지면서도 이야기꾼의 천성 자체가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벤야민은 이야기꾼이 이야기 소재인 인간의 삶과 맺는 관계는 그 자체가 수공업적인 협동 작업이라고 보며 이를 위해선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그 경험의 원료를 탄탄하고 유용하며 일회적인 방식으로 가공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야기꾼을 교사와 현자의 반열에 올려다 놓으며 소설의 시대에서 이야기꾼의 위치를 복권하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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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1818)


프랑켄슈타인

저자
메리 셸리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6-1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09년 뉴스 위크 선정 ‘역대 세계 최고의 명저 10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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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적 비극이 새로운 육신을 얻다

둥둥 떠 있다가 허우적거리는 일에 불과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의식이 생활에 더 밀착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사물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평면 위에서 점점 착오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J, 나는 내내 이 착오를 완성하고 그 미개로 죽겠습니다. J. 

-김경주, '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중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너무 잘 알려졌기에 잘 읽지 않는 소설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지금까지 제법 오독되어 왔던 소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프랑켄슈타인] 원전을 읽는 것은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를 부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 도입부에선 굳이 잘못 알려진 지식을 지적하진 않겠지만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편견들은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이후 어떤 장르적 원형 이상의 인류 무의식에 자리잡은 이미지를 제공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초는 바로 낭만주의다.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 것을 거부한 낭만주의는 곧 갓 만들어진 고딕 문학과 결합되었다. 고딕 문학은 인간의 어둡고 극단적인 감정 (사랑과 공포)과 거기서 촉발되는 숙명적인 파국을 축축한 감수성과 언어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프랑켄슈타인]은 그 점에서 낭만주의와 고딕 문학의 충실한 피조물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인 작가를 설명하면서 남편을 예시를 드는건 자칫 잘못 하면 오독의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메리 셸리가 그 유명한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퍼시 셸리의 아내였다는 사실은 메리가 이 낭만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또 [프랑켄슈타인] 자체가 괴담 들려주기에서 출발했다는 흥미로운 트라비아 역시 이 소설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인 '공포'에 기반하고 있는, 충실한 고딕 문학의 자손이라는걸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프랑켄슈타인]의 피부와 뼈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들은 매우 지적이면서도 어두운 비탄으로 차 있다. 밀튼의 [실낙원] 인용으로 출발한 [프랑켄슈타인]은 지식의 극한을 추구했다가 통제할수 없는 비극으로 빠져들어가는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흉측한 모습에 절망하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부정한 피조물 간의 애증어린 멜로드라마로 넘어간다. 소설의 대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이 두 캐릭터는 지적이고 유려한 말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끔찍한 혐오감과 창조주로 대표되는 세상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좌절감, 분노를 표출하는데, 이 와중에 이성과 감각이라는 두 요소가 충돌해 흥미로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고상해서 고독한 괴물'의 시조라고 할만한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자신의 감각과 접한 세상과 지식의 아름다움과 자신을 내친 세상에 대한 분노라는 격렬한 감정을 동시에 표출하며 반대로 프랑켄슈타인은 지식의 끝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그 호기심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진행될수록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독한 우울에 시달리는 것과 대비된다. 그리고 이 둘은 내면을 잠식해가는 불안함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수 있다. 어느 쪽이든 이 둘은 캐릭터 만들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존재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프랑켄슈타인]은 훌륭한 캐릭터와 감수성을 지닌 고딕 소설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지금까지 사람들 기억에 남아있는 고전이 된 것은 그 소재와 구성에 있다. 먼저 이 소설의 소재가 일반적인 고딕 소설하고는 거리가 멀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이 소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괴물은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처럼 민담으로 대표되는, '과거에서 온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에 탄생한 존재'다. 그렇다면 이 괴물은 어떤 영역에 속해있다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개구리 뒷다리에 전기를 흘렸더니 뒷다리가 반응했다던 갈바니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메리 셸리의 고백에서 우리는 익숙한 장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렇다. [프랑켄슈타인]은 낭만주의와 고딕 문학의 피조물이기도 하지만 SF 문학의 창조주기도 하다. 물론 이전부터 과학적 발견에 대해 다룬 소설들은 있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적 발견에 기반한 사고실험을 소설의 원동력 삼아 충실하게 밀고가는 SF 문학의 기본 모토를 확실히 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프랑켄슈타인]의 낭만주의와 고딕적 감수성은 매우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 소설의 어두운 감수성을 이끌어내는 요소들은 유령이나 미치광이 귀족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극단적인 감정으로 미쳐버린 인간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에게는 첨단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과학과 과학의 발견이 가져오는 두려움이 고딕적인 감수성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힘을 얻은 인간이 통제할수 없는 창조물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찬 [프랑켄슈타인]은 그 점에서 책임감 없는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비극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미치광이 과학자와 그 피조물의 표본으로 남아 후대 창작자들에게 영원히 모티브로 써먹히는것도 그 때문이다. 

메리 셸리는 창조주와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피조물이라는 지극히 원형적인 구도를 빌려오면서도 발상의 전환으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낸다. 그리고 이 창조물과 피조물의 관계에 생식의 문제를 제거하고 여성 캐릭터들을 주체가 아닌 배경으로 배치하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물려준 페미니즘에 기초한 문제의식도 드러낸다. 프랑켄슈타인이 여성 괴물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여성 괴물은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기반하고 있는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두려움엔 괴물에게 생식이 부여된다면 괴물이 증식해 인류를 위협할거라는 두려움도 있고, 어머니-아내-하녀 이외의 여성 주체는 완벽하게 이해할수 없으며 이해하거나 만드려는 노력도 실패하리라는 남성-과학자 주체의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 어느 쪽이든 [프랑켄슈타인]이 도발적으로 던지는 문제의식엔 성정치 문제와 이성우위 사고관에 대한 문제제기도 끼어있다는걸 지적하고 싶다.

그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에 그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충실했던 화자가 개입하는 부분도 의미심장하다. 배를 이끌고 북극을 탐험하려고 하던 화자는 마지막 파트에서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북극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딜레마에 빠진다. 이때 이성과 탐구욕으로 대표되는 프랑켄슈타인은 열변으로 이성과 호기심을 따라 영웅이 되자며 북극으로 가자고 주장하나, 화자는 (잠깐 열변에 혹하면서도) 결국 선원들의 말을 들어 삶을 선택해 돌아간다. 돌아가던 도중 프랑켄슈타인은 병들어 죽고 괴물이 화자 앞에 나타나 창조주의 죽음에 절망을 토로하며 자신도 죽으러 갈것이라고 말하며 사라진다. 메리 셸리는 화자로 대표되는 독자들에게 통제를 잃은 이성 위주의 사고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결말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보기에 서사적로 정교하지 못한 구석이 많다. 괴물에 대한 묘사도 상상력 부족이였는지 어물쩍 넘어가는 구석도 있고 고딕 소설 특유의 극단적으로 명암이 뚜렷한 캐릭터들도 지금 사실주의와 정교하게 구성된 캐릭터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호불호가 갈리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그 극단적인 감수성에 결합된 흥미로운 사고실험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을 쉽게 내치지 못하게 한다. 특히 인공지능과 안드로이드를 다룬 작품들에 드리운 [프랑켄슈타인]의 그림자는 (안드로이드/로봇 장르 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조차도 [프랑켄슈타인]의 오마주라 할 정도로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소설이 찌르고 있는 '인간이 만들어 낸 예측 불가능한 피조물'이 가져오는 공포가 지금도 유효하다는걸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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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버린 [Wolverine] (1981)


울버린

저자
크리스 클레어몬트 지음
출판사
시공사(만화) | 2013-04-25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엑스맨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울버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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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클레어몬트와 프랭크 밀러의 [울버린]은 소위 프랭크 밀러의 초기 시절에 나왔던 만화책이다. 울버린 1-4 이슈와 언캐니 액스맨 172-173 이슈를 묶었다고 보면 좋다. 대체적으로 울버린이라는 마블 내 최고 인기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울버린 웨폰 X]와 이 책을 드는 경우가 많고 2013년에 나온 영화 [울버린]도 이 만화책에서 많은걸 빌려왔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것은 [울버린]은 오해와 달리 프랭크 밀러가 혼자서 글 쓰고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리스 클레어몬트라고 엄연한 글작가가 붙어있다. 하지만 [울버린]을 소개할때 프랭크 밀러의 이름은 반드시 언급되는데, 이는 프랭크 밀러의 작가적 개성이 [울버린] 이후로 크리스 클레어몬트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울버린]은 프랭크 밀러의 대표작인 [다크 나이트 리턴즈] 이전에 나온 시리즈다.) 물론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클레어몬트가 생각했던 울버린과 밀러가 생각했던 울버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가서 시너지 효과를 보였던 것도 있다.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 [울버린]과 [울버린 웨폰 X]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짐승 병기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뮤턴트의 투쟁기다. 다만 개별 요소는 다르다. [울버린 웨폰 X]는 존 카펜터의 [괴물] 같은 한정된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몬스터 서스펜스/호러물, 프랑켄슈타인 풍의 실패한 창조주, 실내극의 요소를 도입해 극한 상황에 짐승이 되어가지만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로건이라는 캐릭터의 내적 갈등에 집중했다. [울버린]은 좀 더 울버린이 캐릭터들이나 배경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집중한다. 여기엔 사이클롭스나 스톰 같은 엑스맨 멤버들도 등장하고 그 유명한 야시다 마리코도 등장한다.

크리스 클레어몬트와 프랭크 밀러가 끌어오는 배경은 다름 아닌 일본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일본은 현실의 일본하고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울버린]이 그려내는 일본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이나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같이 일본인이 그려낸 일본을 본 외국인들이 그려낸 일본에 가깝다. 그래도 교묘하게  일본 서민들의 삶을 다룬 고전 일본 영화들 속에 자신의 고상한 취향을 은밀하게 섞어놓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나 현대 일본 팝 문화가 존재하는 일본의 현실을 그려낸 쪽에 가까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달리, [울버린]은 [퍼시픽 림]처럼 일본 팝 문화가 그려내는 세계를 그대로 현실에 이식하는 쪽에 가깝다.

[울버린]의 일본 문화에 대한 애정은 당시 198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경제적인 발전에 따라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관심과 경계심이 커졌다. 사실 예전부터 일본은 서구권에 많이 노출되온 나라기도 했지만 그 문화가 본격적으로 서브컬쳐에 스며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쿠로사와 아키라가 서구권에서 환대를 받고 쿠로사와의 빠였던 [스타워즈]가 사무라이 이미지를 이용해 제다이라는 희대의 서브컬처 아이콘을 만들면서부터다. [울버린]에서 보여주는 사무라이에 대한 이미지는 [7인의 사무라이]나 [요짐보], [인의 없는 전쟁] 같이 꾸준히 쌓여져 왔던 일본 사무라이 영화나 (소위 인협이라 불리는) 야쿠자 영화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물론 [블레이드 러너]나 [뉴로맨서]에서 볼 수 있었던 '도래한 미래'로 볼 수 있는 일본 도시 조경에 대한 충격도 담겨있다.

그렇다면 왜 하고많은 일본 문화 중에서도 '사무라이'인것인가? 그 점을 지적하기 전에 울버린 캐릭터의 기원이 서부극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걸 알아둬야 할 것이다. DC의 슈퍼맨이나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로 대표되는 미국식 정파 히어로와 달리 울버린은 DC 배트맨과 더불어 다크 히어로로 분류되는 캐릭터다. 이런 현대적인 다크 히어로의 이미지는 보통 서부극의 무법자와 느와르의 탐정에서 비롯되었다는걸 주지해야 할 것이다. 야생엔 무법자가 있다면 도시엔 탐정이 있다고 할까. 이 중 배트맨이 탐정 이미지를 가져갔다면 울버린은 무법자를 가져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울버린의 탄생이 1880년 캐나다 서부 앨버타 주라는걸 생각해보면 그가 서부 개척사 시절에 몸을 담그고 있는 캐릭터라는건 쉽게 알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원은 안락한 집을 떠나 정처없이 세상을 방황한다는 서부극 무법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방랑 클리셰 중 하나로 시작된다. 그렇기에 그가 프로페서 X가 이끄는 엑스맨에 가입한다는 초기 설정은 그가 오랜 방랑 끝에 자신을 받아주는 공동체에 들어서는 익숙한 서부극의 서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최근 전개된 울버린의 죽음 이슈에서 그가 스스로 만든 공동체를 떠나는건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어찌보면 두 작가가 울버린에게 일본 사무라이 문화를 붙여준 것은 서부극 화법에서는 그다지 잘 다뤄지지 않았던 (사실 서부극 자체도 산업혁명이 진행된 뒤에 나타난 장르라 이 부분은 "인디언"이 아니면 깊게 다뤄지진 않는다. 단적으로 서부의 무법자들은 '총'을 쓴다.) 울버린의 '야수성'을 보듬어줄 단초를 발견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무사도나 추신구라에서 보여주는 폭력과 그것이 어떤식으로 작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유교의 인의예지에 기반한) 주장들은 분명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역사책을 들여다보면 일본의 사무라이는 어떤 고상한 전사가 아닌 그냥 먹고 살기에 바빴던 평범한 공무원들이라는게 명백히 드러나지만 (이미 일본 작가와 영화감독들이 탐구한 영역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는 야마나카 사다오의 [인정 종이풍선]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하나], 야마다 요지의 [황혼의 사무라이]가 있다.) 적어도 사무라이 문화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폭력과 절제의 조합은 여러모로 미국의 만화 작가들에겐 '이국적'인 매력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울버린]은 타자의 문화에 대한 순진한 편견과 이해, 폭력, 시적인 고독을 품은 굉장히 이상한 매력을 지닌 만화가 된다. [울버린]은 로키 산맥에서 사람에게 다쳐 죽어가면서 발광하는 곰을 처치한 뒤 씁쓸해하는 무법자라는 서부극의 영역에서 출발해 일본에서 있었던 짧은 연에서 찾아온 비극적인 정혼 소식에서 비롯된 암투라는 사무라이/야쿠자물의 영역으로 넘어가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와중에 울버린은 폭력과 타자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외부인에 대한 배척 (의외로 이 부분은 작가들은 일본인이 외국인 보고 내뱉는 가이진外人라는 단어를 제법 예리하게 쓰이고 있다.)를 맞닥트리면서 자신의 야수성과 인간다움에 대한 고뇌를 하며 답을 얻는다. 

이 과정 속에서 두 작가들은 미국 히어로와 서부극의 무법자, 일본 사무라이과 닌자, 야쿠자를 한껏 뒤섞으면서 거기서 튀어나오는 혼종을 즐긴다. 사무라이의 명예를 중얼거리며 답답하게 고집 부리면서도 아버지를 처단하는데 동의하는 마리코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이국적 팜 파탈 닌자 유키오로 대표되는 일본 여자 캐릭터들과 서부극 히어로 울버린이 맺는 [나비부인]적 관계가 그럴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이지 않고 지극히 장르적으로 과장 왜곡되어 있지만 동시에 상당한 깊이를 지니고 있는 흥미로운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그런 과장되고 왜곡된 서사와 캐릭터들은 1980년대 미국 만화 특유의 현란한 색감과 장면을 설명하는 독백, 독특한 타이포그래피, 도쿄와 미야기를 오가며 마천루와 일본 성과 정원, 닌자와 사무라이 간의 액션을 단칼에 그려내는 프랭크 밀러 특유의 잉크선 굵은 화풍으로 구체화된다. 한마디로 1980년대 미국 아니면 낳을수 없었던 시각 예술인것이다.

[울버린]은 그 점에서 당시 동료들과 달리 후발주자로 출발했던 (울버린은 1974년에 나온 캐릭터였고 동료들과 달리 갓 10년째 되던 신생 캐릭터였다.)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의 개성을 확고하게 자리잡게 한 수작이며 이후 [다크 나이트 리턴즈]로 꽃 필 프랭크 밀러의 마초 미학의 단초를 찾아볼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프랭크 밀러의 다른 대표작인 [로닌]과 더불어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닌자 슬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일본이 본 서구가 받아들인 일본'라는 이상한 매력이 어디서 기원했는가를 찾아볼수 있는 중요한 단서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마블의 상술 때문에 결말이 클리프행어로 끝나 단권 완결성은 부족해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결국 마블 언리미티드를 끊어서 봐야 한다는 점이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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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떼 [Die Rauber] (1782)


도적 떼

저자
프리드리히 폰 실러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거장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처녀작이자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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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내 직업이 보복이라고 말해라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도적 떼] (aka. 군도)는 데뷔작이자 질풍노도 문학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희곡이다. 질풍노도는 독일 문학 사조 중 하나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뒤섞인 독특한 사조를 말한다. 폭압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향한 열망 (계몽주의), 그리스 로마 시대에 대한 재발굴 (고전주의), 숙명적인 비극 (낭만주의)이라는 점에서 [도적 떼]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질풍노도가 어떤지 확인할수 있는 희곡이다. 한마디로 휘몰아친다. 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달리 [도적 떼]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영역에도 손을 대고 있었기에 다른 개성을 가지게 된다. 비슷한 작품이라면 하인리히 폰 클라비스트의 [미카엘 콜하스]를 들 수 있겠다.


발표 당시 굉장한 필화 사건을 일으켰던 [도적 떼]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오셀롯], [리처드 3세]를 섞어넣은듯한 작품이다. 한마디로 영주 아들 카를이 밑바닥 생활 끝에 음모로 쫓겨 난 뒤 도적이 되어 군주가 된 폭압적인 동생 프란츠를 향해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은 혁명을 일으킨다는 내용인데, 궁중 내 암투와 음모를 꾸미는 인물, 밑바닥 삶에 대한 애정부터 시작해 문체와 대사까지 여러모로 실러가 셰익스피어에 영감을 받았다는게 느껴진다. 다만 [도적 떼]는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인 인식과 비판에 머물렀던 (그래서 범용성이 높은 '고전'이 된거지만) 셰익스피어와 달리 훨씬 시대 상황과 맞닿아있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변혁의 징조가 곳곳에 감지된다고 할까.


[도적 떼]의 주역들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는 한마디로 그리스 로마 시절부터 시작한 르네상스 시절에 대한 향수와 복권이다. 카를을 비롯한 도적 떼들은 인간을 억누르는 종교와 구습을 추방하고 (특이하게도 이 희곡에서 가톨릭 신부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만 반대로 개신교 목사는 악역의 악행을 비판하면서도 구원을 바라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인간의 가치를 복권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체제는 부정된다. 당시 독일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된 프랑스나 다른 나라들과 달리 개별 영주가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고 영주가 전횡을 저지르는게 가능했던것도 이런 사회적 부조리에 한 몫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남들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젊은이들의 사회 인식 자체가 도적질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가능케한 것이다. 심지어 이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건 악역인 프란츠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는 장자 상속으로 인한 부당함에 삐뚤어져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도적 떼]는 혁명의 성공을 다루는 희곡이 아니다. 오히려 그 혁명의 실패를 다루는 희곡이다. 결말을 말하자면, 카를의 도적질로 통한 혁명은 반쪽만 성공한다.프란츠를 몰아내고 복수하는데 성공하지만 카를은 모든 것을 잃은 상태다. 불행히도 카를의 정신상태는 현명하기에 자신의 상태를 쿨하게 무시할수 없는 지경까지 몰리게 된다. 이런 파괴와 약탈을 계속하자는 도적들을 카를은 모든 것을 버려버린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 조차도. 카를의 이런 유약하고도 섬세한 내면과 도피적인 행각과 이로 인해 촉발되는 비극은 독일 낭만주의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무겁고 이상적인 도원향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만 그 행동은 극단적인 쪽으로 촉발되고 결국엔 파국으로 이른다. 어찌보면 카를과 프란츠는 매우 바이런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적 떼]는 매우 다크 히어로/안티 히어로적인 작품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적 떼]는 지금 보면 매우 모순적인 작품이 된다. 독자가 지금 현재에 도래한 미래를 꿈꾸는 혁명을 얘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이뤄질수 없을거라고 체념하고 좌절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끓어넘치는 에너지가 꺾이고 쓰러져가는 '허무'가 강하게 남는 작품이라고 할까. 카를이 아말리아를 죽이게 되는 것도,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벌인 체념이라는 인상도 강하다. 원래 [도적 떼]가 결말이 카를의 행위를 정당화하는걸 끝난걸 보면 지금의 [도적 떼]는 타협의 산물일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 실러는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해야 했었다.) 실러가 후일 귀족 작위를 받은 것도 어찌보면 그런 현실에 대한 체념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러는 혁명가라기 보다는 혁명을 꿈꾸던 문학가였기에 가능했던 행적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적 떼]는 보편적인 진리를 꿈꾸며 극을 마무리하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카를이 자신을 희생하는 방법은 자세히 뜯어보면 체제의 투항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순교에 가깝다. 배고픈 농부 가족에게 자신을 맡기는 그 단순하지만 슬픈 희생은 이 단순한 체념이 실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던지는 마지막 폭탄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점에서 [도적 떼]는 검열의 칼날 속에서도 지금도 고전으로 남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적 떼]는 여러모로 첫 작품 답게 야심과 서투름으로 가득찬 작품이다. 몇몇 장면 묘사는 미진한 부분이 있으며 아말리아 캐릭터는 실제하는 여자라기 보다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진다. 시대적 한계로 인한 검열의 흔적도 쉽게 찾아볼수 있다. 그 하지만 실러는 이를 굉장한 에너지와 설득력으로 풀어낼 재주가 있었으며 몇몇 대사들은 그 에너지만으로도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다. 완벽한 작품은 아니더라도 기억할만한 데뷔작으로 기록될 자질은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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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아의 기사 읽는 중


니헤이 츠토무의 만화는 사실 소문만 들었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시도니아의 기사가 애니화 되고 여기저기서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서 봐야 되겠다는 생각+최근 하던 일이 안 풀린 것에 대한 화풀이로 싸그리 들고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코스믹 호러물입니다. 세대 우주선를 다룬 SF (하인리히의 [조던의 아이들]이라던가.)에다가 건담 스타일의 메카닉 액션을 끼어넣은듯한 내용입니다. 다만 이 메카닉 액션이 한 대 한 대가 강한게 아니라 고만고만한 스펙의 메카닉이 뭉쳐 악전고투 끝에 밀어붙이는 처절함이 돋보인다고 할까요. 그렇기에 주인공의 먼치킨성이 적절하게 조절되는 감이 있습니다. 아무리 주인공이 날뛰어도 기본적인 화력+a 정도니깐요. 적쪽도 성장을 하고 힘겹게 싸운다는 느낌이 진짜 팍팍 듭니다. 츠무기 나오는 부분에서도 완급 조절이 탁월하다고 할까요.


이야기 자체는 무난하면서도 재미있게 풀려가는 편입니다. 가우나라는 생명에 대한 설정이나 비주얼 같은건 독창적인 부분도 있고 (약간 [솔라리스] 삘 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작가가 디테일와 물량 면에서는 독보적이라 하는데 시도니아의 사회상을 묘사한 부분은 진짜 뚝심 하나가 느껴집니다. 감탄하면서 읽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캐릭터들 자체도 하나하나가 은근하면서도 톡톡 튀는 맛이 있다고 할까요. 특히 츠무기가 매우 귀엽습니다.


여튼 만족스러운 만화책이였습니다. 앞으로도 사모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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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Dying Words] (2009)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저자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2-06-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지난 십 년간 나온 사라진 언어에 관한 모든 책 중에서 지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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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에번스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한 언어학자가 희귀 언어를 발굴 복원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시작은 호주에 있는 카야르딜드어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지적하면서 촘스키가 만든 언어학의 주류적인 해석이였던 '보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관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고 저자는 이 언어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쓸쓸하게 적어내리면서 하나의 언어가 단순히 문화를 담아내는 것 이상의 복잡함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언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세계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 도입부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주류 언어와 다른 소수 언어들의 세계와 그것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현실에 있는지 독자들을 알려주려고 한다. 다만 이 책은 단순히 언어의 소개와 단상에 머물지 않고 언어학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을 취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깐 책 전체 기조가 근본적인 언어의 '구조'가 어떻게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어떻게 결착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가볍게 읽기엔 다소 어려운 책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언어학의 지식이 있어야지 이해하면서 읽을수 있다고 할까.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언어학이 문학하고는 완전히 다른 논리학과 프로그래밍의 영역에 걸치고 있다는걸 드러내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그런 일견 난해해보이는 언어 구조가 실은 그 자체로 무수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보편성으로 환유될 수 없는 체득된 문화가 배어 있는지 꽤나 감동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책이기도 한다. 저자는 호주의 아넘랜드 사회의 무수한 언어들과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의 양태, 그리고 아넘랜드 언어의 구조와 갈라져 나간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독특한 부족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왜 "이 언어들이 그렇게 좁은 영역에 많이 남아있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사라졌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사라졌는가?"

저자는 그것이 어느정도 인류의 진화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영토 팽창주의자들의 야욕이 강했던 단일 문화/세력권의 등장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보고 있다. 그런 단일 문화/세력권의 언어는 통치의 유용함을 위해 여러 정책들을 이용해 언어를 통일하거나 잠식하는 과정을 거쳐 일종의 언어 권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무수하게 남아있던 언어들을 사라지게 하는데 저자는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언어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는 점, 지속적인 형태로 말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늦게 등장했다는 점도 들고 있다. 비록 구술 언어로써 흔적이 문자 언어에 남아있다고 해도 이것을 재현하고 보존하는건 힘든 일이며, 그 보존 방법에 대해서도 단순히 녹음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영상 촬영을 해 구술하는 그 순간도 보존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논쟁이 있다고 밝힌다. (일단 저자는 후자 쪽에 가까운 편이다.)

이런 사례 연구들과 더불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언어학자가 겪는 희귀 언어 연구 과정의 고충과 사연들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간신히 살아남은 언어, 제대로 잊혀져가는 언어, 멸절한 언어.... 기적적으로 생환한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에반스의 서술은 차분하면서도 희열에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런 언어의 보호는 무엇보다도 실제 그 언어를 쓰는 화자의 인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사례들을 설명하면서 덧붙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희귀 언어를 보호해야 하는가? 물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희귀언어의 보호가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기본 명제를 깔아두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이라면 희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이 어떻게 운문 문학의 구조하고 연결되어있는지였다. 쿠와루어로 지어진 서사시 [톰 아야 캉게]의 시적 구조를 분석한 부분에서 저자는 "정연하게 상호 연관된 정형구들"과 "음보와 음조 변화"를 서술하면서 이 운문 문학이 언어적 구조와 어떻게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지 서술하고 있는데, 실제 화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그 매력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저자의 노력과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구조가 매우 감명깊게 와닿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일견 어렵고 난해해보이는 언어의 구조가 한 인간과 나아가 그 인간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그 언어의 가치를 통해 희귀 언어가 왜 보호되어야 하며, 그 희귀 언어를 쓰는 자들과 연구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물론 편안하게 읽기 힘든 책이고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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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03)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
고병권 지음
출판사
그린비(그린비라이프) | 2003-03-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특기 사항[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니체의 주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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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향한 즐거운 긍정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알기 쉽게 풀어놓은 책이다. 정확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용을 다루면서 니체가 왜 이런 책을 썼으며 나아가 어떻게 사유하는가를 추적한다. 도입부는 그래서 그런 니체의 사상이 "자신의 체험 기록"을 정의하며 젊은 시절 니체가 투쟁했던 사실들을 나열한다. 니체가 혐오하는 것들은 기독교를 기반에 두고 있는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라 강력히 비판한다. '저 세계'에만 있는 부르주아 문화에는 인간이 지은 죄만을 탓하고 있다.


그렇게 니체는 죽음의 문화를 돌파하기 위해 여러 방도들을 찾지만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문화의 상징인 헤겔, 우울로 도피하는 쇼펜하우어, 평준화된 무리로 만드는 바그너와 결별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는가? 니체는 병이라고 대답한다. 니체는 여기서 "건강한 자의 모험으로서의 질병"을 제시한다. 그는 생의 결핍 때문에 겪는 고통과 생의 과잉 떄문에 겪는 고통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 결과 니체에게 병은 익숙했던 영토를 낯설게 만들고 전쟁을 일으켜 물갈이하는 일종의 치유의 모험으로 묘사된다. 이 모험은 분명 고통스러운거지만 니체는 그 모험을 시도해 자신의 철학을 개척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니체는 위대한 건강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이는 하나의 이상이 아닌 수백 개의 건강을 즐겁게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낡은 세계는 파괴되고 재생되는데 이는 분노와 원한이 아닌 새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긍정으로 귀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재생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니체는 그 과정을 종교적 계시록이 아니라 기쁜 소식, 복음으로 받아들이길 원했다. 그렇다면 왜 이원론적 종교로 유명한 조로아스터의 창시자 차라투스트라를 인용한 것일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선과 악의 투쟁을 사물들의 운행에 있어 본래의 톱니바퀴로 본 최초의 인간이였고, 진실하고 정직하기에 도덕을 넘는게 가능했기에 그를 지목했다고 밝힌다. 그렇기에 이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손에서 본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존재로 변신한다. 이 재창작이야말로 니체가 의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니체의 사상에서 중요한 코드라면 '영원회귀'라 할 수 있다. 이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이 영원회귀엔 긍정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모든 점이 바로 중심점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이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시킨 영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며, 이리하여 현재의 모든 순간, 현실의 이 대지 위의 삶 자체가 그대로 영원한 가치로 이어져 힘차게 긍정되어 간다"라는 뜻의 영원회귀는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 발언을 가능케 한다. 니체에게 신은 현재의 모든 순간을 부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파괴는 심각하지 않다. 니체는 웃음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며 사랑이며 동시에 탄생과 창조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존재기도 하다. 니체는 동시에 신체의 재발견을 통해 본능적이면서도 즐거운 감각을 추구하자고 한다. 그렇기에 니체의 철학은 끝없이 자신을 갱신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허례허식을 부정하고 종교를 부정하고, 과학맹신주의도 부정한다. 심지어 아픔과 병마저도 자신을 갱신하는 단계로 쓰인다. 남은 것은 현재에 있는 자신을 향한 무한한 긍정과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현재 속 미래다.그렇기에 니체는 의외로 동양 철햑 그 중에서도 불교라던지 노자와 장자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니체는 최초의 유희와 신체의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을 통해 헤겔과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 서구 사회의 일방향적인 궁극을 향한 사상을 배격하고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철학은 근엄하거나 무겁지 않다. 오히려 가볍다. 그 점에서 니체는 마르크스와 함께 최초의 현대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마르크스가 계급론과 유물론으로 사회를 구조로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인라 할 수 있다면 니체는 궁극이라는 것이 반드시 완성된 무언가가 아닐수도 있으며 끝없이 갱신되는 무언가며, 그것이 즐거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던져줬다는 점에서 후일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개될 사상의 단초를 던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고병권은 이런 니체의 문학적 서술 아래에 담겨 있는 사상을 끄집어내 읽기 편하게 만들었다. 단락별로 니체의 원문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 고병권의 글은 매우 부드럽게 흐른다. 물론 니체의 사상을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글을 읽어야 하겠지만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일견 난해해 보이는 니체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여줬다는 점에서 니체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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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2013)


일베의 사상

저자
박가분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3-10-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김치녀’ ‘홍어’ ‘보슬아치’ ‘좌빨좀비’ ‘노알라’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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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국가를 향한 욕망이 낳은 음험한 키메라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은 2014년 한국 인터넷에 화제가 되고 있는 일베라는 사이트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일베는 일간 베스트의 준말로 최근 인터넷 사이트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이트다. 저자는 이 일간 베스트라는 사이트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첫 장에서 박가분은 일베의 탄생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용어를 들며 ‘그들만의 문화와 코드’가 있다고 보았다. 이 와중에 일베의 기원을 디씨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디씨서 잉여 문화와 막장 문화 그리고 병맛 문화라는 현 한국 인터넷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코드를 발견하는데, 전자는 자조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표현으로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호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병맛 문화는 자신 스스로 통상적인 관습과 상식 그리고 의미지평을 넘어선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짐짓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추함과 혐오스러움으로 굴절되어 표현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관심병 문화에서는 위악적인 컨셉을 통해 자신이 관심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일베를 비롯한 인터넷 문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짤방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박가분은 짤방이 가지고 있는 호수성이라는 부분을 지적한다. 저자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증여의 논리]라는 서적을 들면서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특정 선물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산, 증여되고 각각의 계열들을 가로질러 이동되며 공유되는 공간으로 특징짓는다. 이를 통해 짤방 자체가 증여와 답례의 교환 행위가 수직적인 문화가 아닌 수평적인 문화를 생성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호수성은 긍정적인 면모가 아니라 부정적인 면모를 띄기도 하면서 이 호수성이야말로 인터넷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일베가 영향력이 있는 이유를 단순히 사회 불안정성의 증대나 "재미만을 추구하는 단체"라는 해석을 배격하고 '팩트'로 대표되는 사실 중심주의 (실은 그것도 매우 왜곡되어있긴 하지만)로 대표된다고 보았다. 이 사실 중심주의의 데이터베이스의 문화가 있는데, .원래 일베가 디시인사이드의 '일간베스트'를 저장해 보여주던 곳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슨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되는 것으로 시작한 커뮤니티 특성이 일베의 '팩트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팩트주의야말로 일베가 외부 사이트와 대결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저자는 여기서 인터넷 초창기 논객 문화를 이끈 강준만을 불러온다. 강준만은 인용과 실명 비판을 통해 깎아내리는 논쟁을 통해 평등과 연대감을 추구하며 하이퍼텍스트적인 글쓰기를 추구했는데 이는 부정적인 호수성을 추구하는 인터넷 문화가 맞물려 그를 인터넷 논객으로써 자리잡게 했다고 보고 있다. 즉슨 강준만과 그가 만든 [인물과 사상]은 인터넷 문화의 효시가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일베가 세상과 대결하는데 쓰는 방식은 이런 부정적인 호수성을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호수성은 팩트주의와 결합해 인터넷에서는 어떤 욕망이든 다 표현할 수 있는 상호적이고 평등한 공간이며, 모두가 희화화될 수 밖에 없다는 삐뚤어진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는 혐오발언을 문화적 권리 정도로 여겨 소수자에 대한 자유로운 비하나 혐오로 표출되곤 한다. 

그렇다면 일베를 이끌게 한 것은 무엇일까? 박가분은 그것을 바로 정상국가에 대한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2002년 촛불시위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월드컵과 반미 촛불 시위는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이전과는 다른 감성을 지닌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다는 믿음을 안기게 했다. 이것이 2002년을 이루고 있었던 정상국가에 대한 욕망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동시에 그 욕망이 진정한 '진보'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와 반한나라당이 결합한 무엇인가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젠 2008년 촛불 시위를 지나 일베 등장 전후로 그 비난 대상이 북한과 진보로 옮겨 간 것이다. 그렇기에 일베라는 존재는 여러모로 2002년과 2008년의 촛불시위의 반대급부로 등장한 다른 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촛불시위의 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축제의 광장에서 기존의 가치체계, 정치와 비정치,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을 통합시켜서 정상국가로 나가고자 했던 열망 아니였을까? 그렇기에 일베의 등장은 이 열망이 지금 길을 잃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박가분은 극우적인 일베를 넘어서기 위해서 조윤호가 지적했듯이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국민'이라는 딜레마를 지적하며 궁극적으로는 '정상 국가'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베의 사상]은 완벽한 책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박가분이 내세우는 자료들은 자기가 아는 것 위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있어서 논지가 협소해지는 과정이 있으며, 호수성 같은 개념들은 그렇게까지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만약 [일베의 사상]이 가치가 있다면 지금 현 인터넷 문화와 사회 문제를 하나로 묶어 통시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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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발터 벤야민 선집 6)

저자
발터 벤야민 지음
출판사
길(도) | 2008-06-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벤야민의 초기 사상을 주도한 언어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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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를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는 예술자의 이상적인 수용자에 대한 개념을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왜 벤야민은 ‘이상적인 수용자’에 대한 개념을 부정할까? 이에 벤야민은 예술이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벤야민은 예술이 인간의 주의력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보면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는다. “시에서 본질적은 것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다.”라는 시에 대한 벤야민의 인식에서 알 수 있듯이 벤야민은 예술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라고 보고, 이런 생각은 곧 지금 예술을 번역하는 일이 비본질적인 것만을 전달한다고 보고 있다.


 벤야민이 보기에 번역은 일종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작으로 돌아가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하나는 그 작품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수 있는가와 작품은 그 본질에 따라 볼 때 번역을 허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그 번역이 요구하기도 하는지라는 물음이다. 이에 벤야민은 원작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그 원작들의 번역 가능성에 표출되며 단순한 의미의 번역이 아닌, 원작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했다. 이 미지의 가능성을 ‘신의 기억’이라고 벤야민은 정의하는데, 이는 후에 서술한 번역이 종교적인 열망과 닮아있다는 점하고 일맥상한다. 비록 언어적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이 불가능하다 해도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분리하는 가운데 특정 언어적 형상물들에 대한 번역’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벤야민은 긍정하면서 원작들에 내재하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번역 가능성으로 표출되며, 그것이야말로 작품의 특징이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사유에서의 특정한 상관 개념은 인간에게만 관련되지 않으면 최상의 의미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여기서 벤야민이 가지고 있는 예술관과 번역관에 대한 편린을 확인할 수 있다. 즉슨 벤야민이 생각하는 사유와 그것의 특정한 상관 관계는 인간과 관련이 있지 않을 때야 그 진가가 온전히 드러나며 그것들을 번역을 한다고 해도 굳이 인간과 결부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동요하는 본성인 영혼의 통치나동물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역사적인 것으로 삶의 영역을 규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규정이야말로 더 철학이 모든 자연적 삶을 역사의 보다 더 포괄적인 삶으로부터 이해해야 할 과제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역사가 그 혈통을 원천으로부터 알고 형상화를 예술가의 시대에서, 영원한 사후의 삶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삶의 영역을 규정하는 삶의 언표라는게 살아있는 자에게 무언가 의미하는게 없어도 살아있는 자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사후에 번역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원작의 사후에 번역이 나왔다고 정리하면서 “당대에 발굴되지 못한 가능성”이 후대에 발굴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들은 그것들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개는 독특하고 고귀한 삶의 전개로서 어떤 독특하고 고귀한 합목적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삶과 합목적성은 겉보기엔 다를지 몰라도 보다 상위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곳에서만 해명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 상위의 영역이란 삶을 위해 합목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의 표현, 그 삶의 의미의 재현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이다. 삶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재현’이라는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에서 ‘재현’에 방점을 찍으며, 삶과는 다른 유니크한 특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번역은 이렇게 숨겨진 관계를 드러낼수 없지만 재현은 할 수 있으며 그 관계를 맹아로서 또는 집약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재현을 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사유한 언어들 사이에 있는 독특한 수렴 관계, 즉 근친적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벤야민은 번역들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보며 전통적 번역 이론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벤야민은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와 인식비판을 제안하고 있으며 그 인식 비판에서 현실적인 것에 대한 모사에 대해 부정하며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추구한다면 번역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원작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 과정을 겪는데, 그 과정을 무시하고 후대의 주관성으로 보는 것은 사유의 무능함이 낳은 소치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이 표출된다면 어떻게 표출되는 것인가? 벤야민은 모사와 원작 사이의 모호한 동일성에서 표출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이런 언어들의 초역사적 근친성은 각각의 언어들 가운데 어떤 개별 언어가 아니라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다. 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단어가 서로에게 각각 상이하게 다가오며 대체될 수 있는게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볼땐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그렇다. 다시 말해 개별 언어에서 의도된 것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번역들은 변화하고 있는 언어들의 이질성을 해결하려는 임시적인 방편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이런 이질성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벤야민은 이런 과정을 종교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왜 종교적인 문제나면 번역은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이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과정이 종교의 방향과 같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번역에서 전달에 해당하는 부분을 번역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번역은 실제의 언어를 뒤덮으며 강압적이고 낯선 채로 머물고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벤야민은 번역이 하나의 고유 형식이라면 번역자의 과제도 작가의 과제와 다른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란 원작의 메아리를 깨워 번역어 속에서 울러 퍼지게 하는 의도, 번역어를 향한 바로 그 의도를 찾아내는데 있다. 그러면서 문학작품의 의도가 언어의 총체성이 아닌, 특정한 언어적 의미 연관만 직접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번역은 그 문학 작품의 외부에서 원작을 불러들인다. 여기서 벤야민은 원작과는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 뿐만 아니라 파생적이고 궁극적이며 이념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며 번역을 문학과 가르침 사이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을 가는 것은 매우 험난하다. “번역 속에서 순수언어의 씨앗을 심는다”는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인 노동이 필요하며 ‘의미의 재현’이라는 기존 번역의 기준을 폐기한다면 새로운 번역 기준과 그 방법론에선 그것들을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의도하는 것이 의도된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주목한다. 그는 그렇기에 형식이 재현에서 충실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며 직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벤야민은 이 직역이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를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번역이 의미의 재현을 그만둔다면 어떤 것을 노려야 할까? 벤야민은 번역의 자유는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의 언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린 고로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가의 과제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마지막으로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의미의 번역이 아닌 형식의 번역 가능성을 살리는 쪽으로 번역이 나아가야 하며 의미를 잠깐 스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번역이 나올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점에서 [번역자의 과제]는 단순히 번역 이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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