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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Go To Fly/문학 (16)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1818)


프랑켄슈타인

저자
메리 셸리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6-1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09년 뉴스 위크 선정 ‘역대 세계 최고의 명저 10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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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적 비극이 새로운 육신을 얻다

둥둥 떠 있다가 허우적거리는 일에 불과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의식이 생활에 더 밀착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사물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평면 위에서 점점 착오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J, 나는 내내 이 착오를 완성하고 그 미개로 죽겠습니다. J. 

-김경주, '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중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너무 잘 알려졌기에 잘 읽지 않는 소설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지금까지 제법 오독되어 왔던 소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프랑켄슈타인] 원전을 읽는 것은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를 부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 도입부에선 굳이 잘못 알려진 지식을 지적하진 않겠지만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편견들은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이후 어떤 장르적 원형 이상의 인류 무의식에 자리잡은 이미지를 제공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초는 바로 낭만주의다.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 것을 거부한 낭만주의는 곧 갓 만들어진 고딕 문학과 결합되었다. 고딕 문학은 인간의 어둡고 극단적인 감정 (사랑과 공포)과 거기서 촉발되는 숙명적인 파국을 축축한 감수성과 언어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프랑켄슈타인]은 그 점에서 낭만주의와 고딕 문학의 충실한 피조물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인 작가를 설명하면서 남편을 예시를 드는건 자칫 잘못 하면 오독의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메리 셸리가 그 유명한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퍼시 셸리의 아내였다는 사실은 메리가 이 낭만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또 [프랑켄슈타인] 자체가 괴담 들려주기에서 출발했다는 흥미로운 트라비아 역시 이 소설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인 '공포'에 기반하고 있는, 충실한 고딕 문학의 자손이라는걸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프랑켄슈타인]의 피부와 뼈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들은 매우 지적이면서도 어두운 비탄으로 차 있다. 밀튼의 [실낙원] 인용으로 출발한 [프랑켄슈타인]은 지식의 극한을 추구했다가 통제할수 없는 비극으로 빠져들어가는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흉측한 모습에 절망하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부정한 피조물 간의 애증어린 멜로드라마로 넘어간다. 소설의 대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이 두 캐릭터는 지적이고 유려한 말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끔찍한 혐오감과 창조주로 대표되는 세상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좌절감, 분노를 표출하는데, 이 와중에 이성과 감각이라는 두 요소가 충돌해 흥미로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고상해서 고독한 괴물'의 시조라고 할만한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자신의 감각과 접한 세상과 지식의 아름다움과 자신을 내친 세상에 대한 분노라는 격렬한 감정을 동시에 표출하며 반대로 프랑켄슈타인은 지식의 끝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그 호기심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진행될수록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독한 우울에 시달리는 것과 대비된다. 그리고 이 둘은 내면을 잠식해가는 불안함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수 있다. 어느 쪽이든 이 둘은 캐릭터 만들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존재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프랑켄슈타인]은 훌륭한 캐릭터와 감수성을 지닌 고딕 소설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지금까지 사람들 기억에 남아있는 고전이 된 것은 그 소재와 구성에 있다. 먼저 이 소설의 소재가 일반적인 고딕 소설하고는 거리가 멀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이 소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괴물은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처럼 민담으로 대표되는, '과거에서 온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에 탄생한 존재'다. 그렇다면 이 괴물은 어떤 영역에 속해있다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개구리 뒷다리에 전기를 흘렸더니 뒷다리가 반응했다던 갈바니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메리 셸리의 고백에서 우리는 익숙한 장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렇다. [프랑켄슈타인]은 낭만주의와 고딕 문학의 피조물이기도 하지만 SF 문학의 창조주기도 하다. 물론 이전부터 과학적 발견에 대해 다룬 소설들은 있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적 발견에 기반한 사고실험을 소설의 원동력 삼아 충실하게 밀고가는 SF 문학의 기본 모토를 확실히 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프랑켄슈타인]의 낭만주의와 고딕적 감수성은 매우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이 소설의 어두운 감수성을 이끌어내는 요소들은 유령이나 미치광이 귀족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극단적인 감정으로 미쳐버린 인간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에게는 첨단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과학과 과학의 발견이 가져오는 두려움이 고딕적인 감수성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힘을 얻은 인간이 통제할수 없는 창조물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찬 [프랑켄슈타인]은 그 점에서 책임감 없는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비극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미치광이 과학자와 그 피조물의 표본으로 남아 후대 창작자들에게 영원히 모티브로 써먹히는것도 그 때문이다. 

메리 셸리는 창조주와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피조물이라는 지극히 원형적인 구도를 빌려오면서도 발상의 전환으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낸다. 그리고 이 창조물과 피조물의 관계에 생식의 문제를 제거하고 여성 캐릭터들을 주체가 아닌 배경으로 배치하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물려준 페미니즘에 기초한 문제의식도 드러낸다. 프랑켄슈타인이 여성 괴물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여성 괴물은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기반하고 있는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두려움엔 괴물에게 생식이 부여된다면 괴물이 증식해 인류를 위협할거라는 두려움도 있고, 어머니-아내-하녀 이외의 여성 주체는 완벽하게 이해할수 없으며 이해하거나 만드려는 노력도 실패하리라는 남성-과학자 주체의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 어느 쪽이든 [프랑켄슈타인]이 도발적으로 던지는 문제의식엔 성정치 문제와 이성우위 사고관에 대한 문제제기도 끼어있다는걸 지적하고 싶다.

그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에 그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충실했던 화자가 개입하는 부분도 의미심장하다. 배를 이끌고 북극을 탐험하려고 하던 화자는 마지막 파트에서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북극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딜레마에 빠진다. 이때 이성과 탐구욕으로 대표되는 프랑켄슈타인은 열변으로 이성과 호기심을 따라 영웅이 되자며 북극으로 가자고 주장하나, 화자는 (잠깐 열변에 혹하면서도) 결국 선원들의 말을 들어 삶을 선택해 돌아간다. 돌아가던 도중 프랑켄슈타인은 병들어 죽고 괴물이 화자 앞에 나타나 창조주의 죽음에 절망을 토로하며 자신도 죽으러 갈것이라고 말하며 사라진다. 메리 셸리는 화자로 대표되는 독자들에게 통제를 잃은 이성 위주의 사고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결말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보기에 서사적로 정교하지 못한 구석이 많다. 괴물에 대한 묘사도 상상력 부족이였는지 어물쩍 넘어가는 구석도 있고 고딕 소설 특유의 극단적으로 명암이 뚜렷한 캐릭터들도 지금 사실주의와 정교하게 구성된 캐릭터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호불호가 갈리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그 극단적인 감수성에 결합된 흥미로운 사고실험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을 쉽게 내치지 못하게 한다. 특히 인공지능과 안드로이드를 다룬 작품들에 드리운 [프랑켄슈타인]의 그림자는 (안드로이드/로봇 장르 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조차도 [프랑켄슈타인]의 오마주라 할 정도로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소설이 찌르고 있는 '인간이 만들어 낸 예측 불가능한 피조물'이 가져오는 공포가 지금도 유효하다는걸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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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떼 [Die Rauber] (1782)


도적 떼

저자
프리드리히 폰 실러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거장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처녀작이자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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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내 직업이 보복이라고 말해라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도적 떼] (aka. 군도)는 데뷔작이자 질풍노도 문학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희곡이다. 질풍노도는 독일 문학 사조 중 하나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뒤섞인 독특한 사조를 말한다. 폭압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향한 열망 (계몽주의), 그리스 로마 시대에 대한 재발굴 (고전주의), 숙명적인 비극 (낭만주의)이라는 점에서 [도적 떼]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질풍노도가 어떤지 확인할수 있는 희곡이다. 한마디로 휘몰아친다. 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달리 [도적 떼]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영역에도 손을 대고 있었기에 다른 개성을 가지게 된다. 비슷한 작품이라면 하인리히 폰 클라비스트의 [미카엘 콜하스]를 들 수 있겠다.


발표 당시 굉장한 필화 사건을 일으켰던 [도적 떼]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오셀롯], [리처드 3세]를 섞어넣은듯한 작품이다. 한마디로 영주 아들 카를이 밑바닥 생활 끝에 음모로 쫓겨 난 뒤 도적이 되어 군주가 된 폭압적인 동생 프란츠를 향해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은 혁명을 일으킨다는 내용인데, 궁중 내 암투와 음모를 꾸미는 인물, 밑바닥 삶에 대한 애정부터 시작해 문체와 대사까지 여러모로 실러가 셰익스피어에 영감을 받았다는게 느껴진다. 다만 [도적 떼]는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인 인식과 비판에 머물렀던 (그래서 범용성이 높은 '고전'이 된거지만) 셰익스피어와 달리 훨씬 시대 상황과 맞닿아있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변혁의 징조가 곳곳에 감지된다고 할까.


[도적 떼]의 주역들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는 한마디로 그리스 로마 시절부터 시작한 르네상스 시절에 대한 향수와 복권이다. 카를을 비롯한 도적 떼들은 인간을 억누르는 종교와 구습을 추방하고 (특이하게도 이 희곡에서 가톨릭 신부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만 반대로 개신교 목사는 악역의 악행을 비판하면서도 구원을 바라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인간의 가치를 복권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체제는 부정된다. 당시 독일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된 프랑스나 다른 나라들과 달리 개별 영주가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고 영주가 전횡을 저지르는게 가능했던것도 이런 사회적 부조리에 한 몫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남들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젊은이들의 사회 인식 자체가 도적질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가능케한 것이다. 심지어 이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건 악역인 프란츠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는 장자 상속으로 인한 부당함에 삐뚤어져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도적 떼]는 혁명의 성공을 다루는 희곡이 아니다. 오히려 그 혁명의 실패를 다루는 희곡이다. 결말을 말하자면, 카를의 도적질로 통한 혁명은 반쪽만 성공한다.프란츠를 몰아내고 복수하는데 성공하지만 카를은 모든 것을 잃은 상태다. 불행히도 카를의 정신상태는 현명하기에 자신의 상태를 쿨하게 무시할수 없는 지경까지 몰리게 된다. 이런 파괴와 약탈을 계속하자는 도적들을 카를은 모든 것을 버려버린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 조차도. 카를의 이런 유약하고도 섬세한 내면과 도피적인 행각과 이로 인해 촉발되는 비극은 독일 낭만주의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무겁고 이상적인 도원향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만 그 행동은 극단적인 쪽으로 촉발되고 결국엔 파국으로 이른다. 어찌보면 카를과 프란츠는 매우 바이런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적 떼]는 매우 다크 히어로/안티 히어로적인 작품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적 떼]는 지금 보면 매우 모순적인 작품이 된다. 독자가 지금 현재에 도래한 미래를 꿈꾸는 혁명을 얘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이뤄질수 없을거라고 체념하고 좌절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끓어넘치는 에너지가 꺾이고 쓰러져가는 '허무'가 강하게 남는 작품이라고 할까. 카를이 아말리아를 죽이게 되는 것도,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벌인 체념이라는 인상도 강하다. 원래 [도적 떼]가 결말이 카를의 행위를 정당화하는걸 끝난걸 보면 지금의 [도적 떼]는 타협의 산물일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 실러는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해야 했었다.) 실러가 후일 귀족 작위를 받은 것도 어찌보면 그런 현실에 대한 체념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러는 혁명가라기 보다는 혁명을 꿈꾸던 문학가였기에 가능했던 행적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적 떼]는 보편적인 진리를 꿈꾸며 극을 마무리하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카를이 자신을 희생하는 방법은 자세히 뜯어보면 체제의 투항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순교에 가깝다. 배고픈 농부 가족에게 자신을 맡기는 그 단순하지만 슬픈 희생은 이 단순한 체념이 실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던지는 마지막 폭탄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점에서 [도적 떼]는 검열의 칼날 속에서도 지금도 고전으로 남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적 떼]는 여러모로 첫 작품 답게 야심과 서투름으로 가득찬 작품이다. 몇몇 장면 묘사는 미진한 부분이 있으며 아말리아 캐릭터는 실제하는 여자라기 보다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진다. 시대적 한계로 인한 검열의 흔적도 쉽게 찾아볼수 있다. 그 하지만 실러는 이를 굉장한 에너지와 설득력으로 풀어낼 재주가 있었으며 몇몇 대사들은 그 에너지만으로도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다. 완벽한 작품은 아니더라도 기억할만한 데뷔작으로 기록될 자질은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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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Белые ночи / White Nights]

백야 외

저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0-06-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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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기본으로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는 [가난한 사람들]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초기와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걸작들을 쏟아내던 후기 사이에 끼어있는 시절에 쓰여진 소설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들은 [죄와 벌]이라던가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만개한 특유의 도덕론이라던가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문장들은 제거된, 소품에 가까운 소설들이 모여 있다.

대부분은 [백야]를 기대하고 책을 샀을것이고, 그 기대는 배반하지 않는다. [백야]는 그야말로 몽상가의 짝사랑 이야기다. 해가 지지 않는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여름, 주인공은 즐거운 사람들 사이에서 우울과 몽상으로 소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루하루를 거리를 쏘다니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고독에 빠져 여러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주인공은 상심해있는 나스첸카를 만나게 되고, 짝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나스첸카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주인공의 짝사랑을 모른다.

[백야]의 사랑은 한마디로 철저히 정신적인 것이다. 낮도 밤도 아닌 그 공간에서 주인공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공간에 갇혀 살아간다. 초반의 이야기와 상관없는 장황한 독백도, 사실은 그 공간에 갇혀있는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주인공은 그야말로 19세기 등장한 도시 문화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산보자인 것이다. 허나 이 산보자는 백야 속에서 혼자이기에 도시 속에서 고독에 갇혀 있다. 

나스첸카의 만남은 고로, 자신처럼 낮도 없는 근대적 공간에 갇혀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싹트게 하는 단초가 된다. 나스첸카는 첫 만남에서 할머니에게 말그대로 매여있는 존재다. 그런 나스첸카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집 밖에 있는 세상으로 나가게 할 수 있으며 교양있는 사내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사내는 또 나스첸카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스첸카는 그 남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나스첸카는 사랑에 보답받지못하고 홀로 남겨졌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게 된다. 주인공이 나스첸카에게 매료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주인공은 나스첸카가 자신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섞이지 못하고 혼자만의 고독에 갇혀있다고 보았고 거기에 공명한 것이다.

하지만 나스첸카와 주인공 간의 큰 차이가 하나 있다. 나스첸카의 보답받지 못한 사랑은 실제로 이뤄진 관계에서 답신 없는 정체 상태에 있다면, 주인공의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처음부터 끝날때까지 제대로 발신되지 못한다. 마지막에서야 도달하긴 하지만 나스첸카는 결국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기다리던 사랑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기에 주인공과 나스첸카의 상처에 대한 공명은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나스첸카에게 주인공과의 관계는 우정과 공명에 방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반대로 주인공에게 나스첸카과의 관계는 공명하면서도 나스첸카가 자신만을 봐주기 바라는, 사랑의 감정에 방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기에 [백야]는 꿈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한쪽이 받을 수 없는 사랑은 결국 무너질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스첸카의 선택에 주인공은 가슴아프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백야에 있었던 꿈같은 경험으로 그 기억을 간직한다. 마지막 독백은 그런 주인공의 심리를 극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이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의 공명을 원하는 개인의 심리와 그것의 불가능함을 설파하면서 솜에 젖어 피곤한듯한 감수성으로 독자들을 매혹한다. 도스토예프스키 다른 소설들이 엄청난 스케일로 밀어붙인다면, '백야는 짧고 단아하지만 그 속은 격정적이고 어찌할수 없는 매혹적인 사랑의 우울이 무게있게 담겨있는 걸작이다.

다른 단편들을 리뷰하고 끝내자고 한다 '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는 배우자의 불륜을 희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품이다. '약한 마음'은 모든 이들이 행복지기를 바라던 한 청년이 끝내 미쳐버린 이야기를 통해 아가페적인 사랑과 그것의 무거움을 다루고 있다. 타인과의 공명과 그 축축한 무드라는 점에서 '약한 마음'은 '백야'하고 연관해서 읽어볼만한 가치는 있을듯 하다. ' 와 연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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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으로 가는 문 [The Door into Summer] (1957)


여름으로 가는 문

저자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출판사
마티 | 2009-08-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SF 최초의 그랜드마스터' 로버트 하인라인의 대표작!SF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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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개의 문과 1개의 여름, 그리고 때때로 고양이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와 함께 뉴웨이브 이전 SF 거장으로 꼽히는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은 초기를 마감하고 중기 하인라인를 여는 소설로 뽑힌다. 이 소설은 다작으로 유명한 하인라인 작품들 중에서도 [스타쉽 트루퍼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낯선 땅 이방인]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소설이다. 하지만 심각한 태도로 심각한 내용을 다뤘던 저 세 작품과는 달리 무척이나 가볍고 소품스러운 소설이며 (13일만에 완성하고 오타 고치는 정도의 가벼운 퇴고를 해 발표했다고 한다.) 동시에 그 점 때문에 하인라인의 걸작이라 불릴만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줄거리도 간단하다. 발표 당시엔 근 미래인 1970년대 미국 서부. 애인과 친구에게 배신당한 천재 공학자 댄은 얼떨결에 냉동수면을 통해 미래 세계로 가 정착한다. 그렇게 살던 중 우연히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법을 알아내 자신이 행복해질수 있는 모종의 계획을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험은 표지에도 등장하는 고양이 피트와 아름다운 소녀 리키가 댄의 모험의 원동력이 된다.


하인라인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는 밀리터리 기술에 대한 (작가 자신이 해군사관학교 출신이다.) 마초적인 매혹, 독일의 성장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철저한 자기 수련과 히피적인 이상주의 공동체 속에서 성장해가는 청소년들, 그리고 이를 위해 동원되는 엄청난 장광설 같은 자유지상주의적인 요소가 많다. 하지만 [여름으로 가는 문]에는 그런 요소들이 쏙 빠져 있다. (아예 없는건 아니다. 누드 온천 공동체에서 만난 변호사 부부라던지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그답다고 할 수 있다.)


[여름으로 가는 문]은 소품답게 대단한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는건 아니지만 1950년대에서 바라본 2000년대에 대한 하인라인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 소설을 하드 SF로 분류하는데 이견을 달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오토캐드, 자동 청소 기기 (심지어 하인라인은 이 자동 청소 기기들 중 하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다.) 같은 부분들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물론 그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상상하고 치밀하게 구성했다는게 놀랐다.


다만 시간여행에 대한 부분은 그 정교한 설정과 가설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낡은 티가 난다. 양자역학이 확실히 정립하기 이전에 나온 소설이여서 그런지 이 소설은 다층우주가 아닌 한가지 선으로 이뤄진 단일 우주의 세계로 보고 있는데 그 결과 복잡함은 줄어들었지만 양자역학이 어느정도 대중에게도 익숙해진 지금 보면 시대에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것조차 예스러운 느낌으로 즐길 수 있다면 이 또한 구식 SF을 즐기는 방법이리라.


[여름으로 가는 문]을 가득 채우고 있는건 특유의 로맨티시즘이다. 특히 동물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웃음지을수 밖에 없는 고양이 피트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귀여운 묘사라던지 다소 어두운 뒷배경 (설정상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에 불구하고 미래 세계에 대한 발전한 기술상에 대한 장미빛 시선,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연상시키게 하지만 부정적인 면모는 싹 빠져있는 순수한 소녀에 대한 찬양&키잡 연애담에서는 마초마초했던 [스타쉽 트루퍼즈]하고는 다른 로맨티시즘으로 가득하다. 물론 이런 작품을 감싸고 있는 로맨티시즘이 1950년대 미국에 깔린 "너무 지나쳐서 오히려 무서운, 병적인 낙관주의"에서 나온거 아닐까 ([마스터]의 프레디나 [실물보다 큰]의 에드 같은 병자는 극단적으로 배제된!) 의심해보기도 하지만.


[여름으로 가는 문]은 거창한 매력이라던지 하인라인의 철학은 같은건 찾아보기 힘들지만 솔직히 나는 그의 철학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히 글쓰기와 이야기의 즐거움으로 무장한 [여름으로 가는 문]이 훨씬 매력적였던 것 같다. 물론 SF 소설로도 훌륭한 걸작이라 할만하다.


P.S. 이 소설은 일본에서 번역된데다 상당한 히트를 기록해 야마시타 타츠로라는 걸출한 가수가 이 책 제목을 빌려 곡을 쓰기도 했다. 일본의 SF 문학 토양은 상당히 좋은걸로 유명해 (어지간한 작품은 다 소개가 됬다.) 열악한 풍토의 한국에 사는 나 같은 독자는 부러울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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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자살하다 [The Virgin Suicides] (1993)


처녀들, 자살하다

저자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06-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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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viously, Doctor, you've never been a 13-year-old girl.

-Cecilia Lisbon


사이렌을 위한 노래 (나는 네 놀이터의 연인이야)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는 다섯 자매의 자살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서실리아의 자살 기도다. 여기서 독자들은 '우리'라고 지칭하는 화자들의 인도를 받아 리즈번 다섯 자매를 소개받는다. 아름다운 리즈번 자매들은 '우리'들의 선망과 욕망의 대상이지만 서실리아의 죽음 이후 이 자매는 점점 망가져가며 자신을 유폐시켜가면서 죽어간다.


[처녀들, 자살하다]는 여러모로 나보코프의 [롤리타] 영향을 받은 소설이다. 10대 소녀에 매혹된 남성들이 끈적끈적하고 페티시즘적인 분위기에 허우적댄다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증거품을 그렇게 오래 가지고 있는건 정상은 아니다.),점이 그렇다. 하지만 매정하게 화자 험버트를 향해 킬킬거렸던 [롤리타]와 달리 [처녀들, 자살하다]는 나른하고 애조에 찬 회고에 가깝다. 일단 이 소설의 '우리'는 현재 시점으로 이 소설을 전개하고 있는게 아니라 '과거'의 시점으로 회고하고 있다. 리즈번 자매의 자살은 단순히 가슴아픈 첫사랑의 끝만이 아니라 유년기의 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리즈번 자매는 자살했을까? 소설은 제법 많은 이유들을 내놓지만 구체적으로 콕 찝어 말해주진 않는다. 다만 이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억압적이고 종교와 아들에 집착하고 소녀성性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성과 성적 각성에 대한 유제니디스의 시선은 후속작 [미들섹스]에서 여자로 살아왔다가 사실은 생물학적 남자라는걸 알게 된 트랜스젠더 소년/소녀의 성적 모험기로 극에 달한다.), 리즈번 부부을 위시한 어른들, 풍요롭지만 가식적이고 질식할 것 같은 교외 사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실망... 이 모든 것들이 끈적끈적하게 달라 붙어 진액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솔직히 어머니 아버지는 리즈번 부부가 정상적인 부부라 봤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한 위치에 있는 소년들이 그녀들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그 소통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 점에서 [처녀들, 자살하다]는 세이렌들의 슬픔을 이해하려고 했던 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소통 실패의 기록이며 세이렌의 망령에 빠져 행복해하다가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의외로 그리스인의 시선도 많이 느껴지곤 하는데 서술자의 속성이 모호하고 그 사건에 간섭했다가 다시 코멘트를 다는 등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와 닮았다던지, 그리스 출신 할머니의 코멘트가 이 소설의 주제를 이해할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닌 주변인들의 시선으로 1970년대 미국을 바라본다고 할까.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다시 유럽 이민자 험버트를 통해 미국을 본 [롤리타]와 공유하고 있다. 


[처녀들, 자살하다]의 단점이라면 너무 많은 것을 쥐어주지만 정작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다. 미스테리가 되기엔 너무 많은게 주어지고 명확한 주제를 표출하기엔 약간 2% 부족하다고 할까. 그리고 처녀작이여서 그런지 아직은 테크닉적으로 미숙하다던가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리즈번 자매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며 냉소적이지만 애조를 띈 몽환적인 어조로 풍요로웠던 1970년대 미국의 이면을 보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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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세계 [The Drowned World] (1962)


물에 잠긴 세계

저자
J. G. 발라드 지음
출판사
문학수첩 | 2012-04-1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물에 잠긴 지구, 멸종 위기에 처한 인류의 생존경쟁!하드코어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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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역진화의 시작


J.G.발라드의 첫 중편 소설인 [물에 잠긴 세계]는 익숙한 디스토피아 설정에서 빌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상은 홍수가 난 마냥 모두 잠겨 있으며 기후는 열대로 돌아가 거대한 이구아나와 열대 동식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주인공 로버트 케런즈는 이런 상황에서 호화스럽지만 점점 몰락해가는 삶을 누리고 있는 생존자다. 어느날 릭스 대령이 이끄는 부대에서 불면증을 앓던 하드웍이 사라지고 케런즈와 연인 베아트릭스, 정신과 의사 바드킨은 물에 잠긴 세계에 매혹되어 '역진화'의 여정에 올라서게 된다.


클리쉐라면 클리쉐이지만 J.G.발라드가 이 재난을 묘사하는 방식은 기존 디스토피아 소설하고 거리가 멀다. 케런즈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꽉꽉 채워 묘사되며 사건보다는 심리의 변화가 우선시된다. 게다가 발라드에게 이 재난은 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길하지만 거부할수 없는 매력과 역진화의 단초를 가진 존재다.


소설은 이를 모든 정신은 물질에 기반에 두고 있다는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바드킨이 '저 물에 잠긴 풍경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잠재되었던 홍수의 기억을 흔들어 꺼내는 것이라네' 말하는 부분에서 재난의 풍경이라는 가시적인 존재가 어떻게 비가시적인 존재인 정신을 변형시키고 마침내 물질-인간의 신체에게도 역으로 영향을 미쳐 인간을 역진화의 길로 이어지게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변화는 물과 자궁이라는 매우 프로이트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이미지로 형상화 된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이후 세계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우주전파로 점점 크리스탈화 (보이지 않는 것이 가시적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됨) 된다는 [크리스탈 세계]와 자동차 충돌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자동차 충돌이 성적인 리비도로 전이됨) 인간군상들을 그려낸 희대의 문제작 [크래쉬]로 이어지는 J.G.발라드가 품고 있는 미학의 단편을 엿볼수 있다. 나로써는 이런 유물론적이며 정신과 현상의 관계를 그려내는 발라드만의 미학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소설에서는 생존자들은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케런즈, 베아트릭스, 바드킨 등 그 재난 속에 매료되면서 역진화를 통해 새로운 인간의 조건으로 나가려는 이들, 그 재난을 거부하고 현재의 이득을 추구하는 스트랭맨과 그것을 방관하는 릭스 대령. 소설은 케런즈 일당에게 손을 들어주면서 물을 빼는 작업을 하는 스트랭맨에게는 지독한 혐오감을 보인다. 발라드의 주장에 따르면 스트랭맨은 가시적인 가치에만 집착하며 위에서 언급한 정신과 물질 간의 피드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다. 이는 릭스 대령도 비슷하다. 소설은 이런 구도를 통해 변화를 받아들이는 인간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런 시선은 소설 마지막에 케런즈가 도시를 떠나면서 극대화되는데, 소설은 결말을 원시로 돌아간듯한 아득한 이미지들로 형상화하면서 신화적인 얼개로 풀어낸다. 그렇기에 소설의 끝은 이카루스의 추락과 같은 자멸적이면서도 퇴폐적인 낭만으로 넘실거린다. 역진화의 끝은 인류 존재 자체의 소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새로운 길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와 함께.


완벽한 소설은 아니다. 스트랭맨 파트는 그 중요성에 비해 좀 길며 베아트릭스 캐릭터는 작가가 그렇게 잘 다룬것 같지 않다. 그리고 기본적인 상상력은 그 즉물적인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탈 세계]에 비하면 아직 남의 것을 빌려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J.G.발라드라는 이후 영미 SF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발라드리언이라는 사전에도 등록될 정도로 극렬 빠들을 불러모은 작가의 시작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작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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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요양원 [Sanatorium pod klepsydrą / Sanatorium Under the Sign of the Hourglass] (1937)

모래시계 요양원(슬라브 문학 3)

저자
브루노 슐츠 지음
출판사
| 2003-02-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폴란드의 국민작가로 사랑을 받고 있는 브루노 슐츠의 소설집.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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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독서토론회용으로 쓴 독후감입니다.


판타즈마의 요양원에서


모래시계 요양원은 브루노 슐츠라는 폴란드 작가가 쓴 단편(?) 소설집이다. 물음표를 친 이유는 이 소설은 개별적인 단편 소설이라 보기엔 느슨한 연결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야꿉과 아들이자 화자인 조제프, 아델라 같은 이름들이 등장하고 또 미묘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차라리 연작 소설집, 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듯 하다.


브루노 슐츠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몽롱하다. 이야기들은 상식을 벗어나기 일쑤며 도약과 비약을 통해 펼쳐지는 환상들은 종잡을수 없다. 게다가 그 묘사란 어떤가. 거의 시에 가까운 문장들이 쏟아진다. 플롯 전개보다는 묘사를 통해 사람의 이성을 몽롱하게 녹여버린다고 할까.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게 쉬운 경험은 아니였다. 하지만 처음엔 이게 뭐지? 하면서 읽다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모래시계 요양원]은 한마디로 '패배하고 좌절하는 돈키호테들을 마술적인 강림을 통해 되살리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 돈키호테는 '나'나 '에지오', '연금수령자'일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버지로 나타나는데 이 아버지 야꿉은 단지 시럽을 얻기 위해 허풍 찬 연설을 늘어놓거나 위협적이고 거만한 검은 콧수염의 사내와 몸싸움을 벌이는 황당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그 아버지도 운명 앞에서 패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이 아버지를 시간을 되돌리는 모래시계 요양원에 넣어버린다. 이 모래시계 요양원은 모든 시간의 법칙들이 뒤집혀지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고 초현실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유령의 영토다. 아들 조제프는 처음엔 그 유령의 시간과 인과율에 당황하지만 결말에 도달하면 그 유령의 시간과 인과율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유령의 시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행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브루노 슐츠가 이런 돈키호테 식 영웅들을 되살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시간과 인과율를 환상으로 파괴/해체한 뒤 유령의 시간과 인과율로 통해 재생하는 방법이다. 밀랍인형을 되살려 군대를 만들고 (봄) 노인이 시간을 거슬러 아이가 되고 (연금 수령자), 남자는 하늘을 날아 사랑하는 여인의 창문에 도달한다. (에지오) 모든 사건들은 비약을 거듭하고 초현실주의와 탐미주의에 가까운 문장들이 쏟아진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탈출'에 이르면 이 되살림이 어떤 실존적인 경지에 도달하는걸 볼 수 있다. 카프카의 [변신]의 영감을 얻은게 분명한 이 단편에서 슐츠는 카프카가 가지 않았던 길을 시도한다. 할부처럼 천천히 죽은 아버지는 벌레가 되어 나타난다. 그 죽음에 대한 저항은 이내 요리가 되는걸로 가혹한 판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 아버지는 불구의 몸을 이끌고 요리에서 벗어나 끝내 가버린다. 그레고르의 패배와 소멸로 끝낸 카프카와 달리 슐츠는 아버지를 살려 보낸다.


그러나 지상에서 아버지의 방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다음 번의 분할된 죽음,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확장된 그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다. 왜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을까. 어느 모로 보나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운명은 너무나 완전하게 아버지를 좌절시켜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정도였는데, 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중략) 

푹 삶아지고, 가는 길에 다리 하나를 흘리기는 했지만, 남은 기력을 모아 아버지는 집 없는 방황을 시작하기 위해 어딘가로 지친 몸을 끌고 갔으며, 우리는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탈출' 중


다만 소설적 재미는 별로 없다는 단점도 있다. '모래시계 요양원', '연금 생활자', '아버지의 마지막 탈출' 같은 경우엔 몽롱하게 녹여버리는 묘사와 소설적 구조, 주제를 모두 갖춘 수작이지만 '봄' 같은 경우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봄이라는 마력에 대해 굉장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묘사가 이야기하고 살짝 겉도는 불균질한 면모도 있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괜찮다.) 아예 아무런 사건 전개나 캐릭터 발전 없이 무드 피스로 날아가버리는 단편도 있다. 이건 단편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히도 슐츠는 이 소설집으로 통해 어떤 극에 달했지만 그 극을 풀어내기도 전에 (장편을 준비중이였다고 한다.) 죽어버렸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컬트 작가가 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래시계 요양원이 선사하는 폴란드의 감수성이 묻어있는 쓸쓸하고 몽롱한 분위기들과 문학적인 시도는 한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소 읽는게 어렵긴 하지만.....


P.S.이 소설은 [사라고사 매뉴스크립트]로 유명한 보이체크 하스가 감독을 맡아 1973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단편 [모래시계 요양원]을 기본으로 브루노 슐츠의 다른 단편들과 그의 생애를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이 소설을 하자고 한 이유도 영화판 포스터 때문이였다.



나는 이 포스터가 소설의 미학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골에 뇌가 없고 눈이 있다는 것은 이 소설을 '뇌=이성'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눈=감각'으로 느끼라는 뜻이라고 본다. 뭐 이런 것들이 그렇듯이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포스터 그림 자체가 브루노 슐츠의 미적 세계관하고 잘 어울리지 않는가.


P.S.2 슬라브 문학 시리즈로 나온 작품인데 카렐 차펙의 로봇과 브루노 슐츠 단편집 두 권만 내고 망해버렸다. (현재 로봇은 절판 상태...) 책이나 번역 퀄리티가 제법 좋은 편이여서 더욱 안타깝다. 해석 같은 것도 꼼꼼하게 달려있고 작가가 그린 그림도 삽입되어 있다. 번역 난도도 상당히 높은데 문장의 미려함을 잘 살려내고 있다. 번역자 생계가 걱정되서 검색을 해봤더니 그래도 안정적으로 잘 나가고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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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1963)
추운나라에서돌아온스파이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존 르카레 (열린책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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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첩보 장르에서 중요한 대접을 받고 있는 소설입니다. 르카레는 실제로 첩보원 생활을 한 사람이였고 (대사관 쪽의 화이트 스파이였다고 합니다.) 그의 경험은 소설의 중요한 뼈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보통 스파이 소설이라고 하면 007처럼 간지나는 남자와 세계를 위협한 사악한 악당, 화려한 액션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 소설은 그런 환상을 철저히 제거합니다. 액션은 세 장면 정도 등장하고, 게다가 화려함 없이 처절하고 비루한 발악에 가까운 묘사로 표현됩니다. 첩보 장면도 철저히 심리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주인공도 제임스 본드와 다릅니다. 앨릭 리머스는 그레고르 잠자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첩보원 판이라 할 정도로 관료사회에서 천천히 마모되어 가는 중년입니다. 게다가 이야기는 작전의 실패로 좌천 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좌천에서 시작으로 이어지는 좌절을 보면 오히려 정리해고 당한 중년의 현시창 소설처럼 보입니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친 그는 지금 핑그르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라는 광장의 구절이 생각난다고 할까요.

-이렇게 중반부까지 현시창 묘사가 이어지다가 중반부부터 다시 첩보물로 전환합니다. 관리관은 앨릭을 시켜 다시 한 번 동독으로 스파이로 보냅니다. 자신의 존재 의의 회복과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은 부정한 존재 문트를 파멸 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열의를 가지게 된 리머스지만 그 결과는 또 현시창이 됩니다.

-아까 소설의 첩보 장면이 철저히 심리전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는데, 이 심리전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앨릭은 첩보에 노련한 프로이며, 그 프로다움으로 심리전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정중하고 예의 바른 (게다가 양도 무척 많습니다.) 대화 속에 숨겨진 거짓과 기만, 그리고 간파 같은 서스펜스 상당히 밀도높게 짜여져 있습니다.

-물론 이 두뇌전도 주제와 관련 있습니다. 르카레가 그려내는 첩보전은 관계, 특히 현대 사회의 관계의 연장선상입니다. 첩보원 생활에 잔뼈가 굵은 앨릭에겐 관계는 그저 목적(첩보전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뿐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친밀함에 대해 의심하고 위장하고 거부합니다. 반대로 리즈는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믿는 사람이고, 앨릭에게 사심없이 접근합니다. 처음엔 거부하는 앨릭이였지만, 결국 리즈로 대표되는 사랑과 온기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합니다. 책 뒤 해설을 보면 르카레라는 성은 필명인데다 아버지는 사기꾼이였다고 하는군요. 현대인들의 거짓과 위장에 대한 르카레의 관심은 어쩌면 이런 내력에 바탕을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르카레는 현실적인 비전으로 등장 인물들의 세계를 바라보지만, 그 시선은 냉소주의라기 보단 오히려 그 관계를 잔인하게 무화시키는 현실에 대한 차디찬 고발에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 마지막 결말은 무척이나 허무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인 낭만주의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낭만주의는 르카레가 2001년에 발표한 [콘스탄트 가드너] 같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사람과 이상을 거짓과 음모를 이용해 마구 쓰다가 버리는 기계적인 체제에 대한 냉정한 폭로와 거기에 고립된 현대인들의 고독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로버트 러들럼의 [제이슨 본 시리즈] 같은 체제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첩보물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분량 조절이 잘 된 편입니다. 반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데다 그 반전 이후 이어지는 결말은 간략하지만 강렬합니다. 무엇보다 초반부의 현시창 묘사를 중후반부의 첩보전하고 유기적으로 연결을 잘 한 점을 높게 사고 싶습니다. 현실의 비루함과 차가움을 묘사하면서도 후반부의 서스펜스와 연결되는 떡밥을 치밀하게 뿌려놓았다고 할까요.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적도록 하겠습니다. 

"상대를 속이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다.그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만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배우나 사기꾼은 때때로 그것을 즐기는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첩보원은 그렇지 못하다" (정확한 문장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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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 요새 읽는 소설책
까라마조프씨네형제들(상)
카테고리 소설 > 러시아소설
지은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 (열린책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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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내사랑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레이먼드 챈들러 (북하우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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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책을 안 읽었다 싶어서 오래간만에 책을 빌려와 읽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서적 분이 고프기도 했어요. 히히.

뭐 둘다 말이 필요없는 고전이죠. 다만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재미있긴 한데 두툼한 두께에 3권짜리 대하 소설여서 이걸 다 읽을 수 있을지 고민되고... 안녕 내 사랑은 그 정도는 아닌데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 때문에 미뤄지고 있는 중 ㅠㅠ

자세한 건 따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둘 다 개별 포스팅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 포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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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프랑스 추리 소설 표지에서 친숙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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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보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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