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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Go To Fly/비문학 (11)
장 보드리의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



사유 속의 영화

저자
이윤영 (편역)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04-18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영화, 오로지 영화만이!” 20세기 최고의 지성들이 쓴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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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의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시작은 프로이토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트는 “사진기”의 비유를 들면서 광학적인 비유를 통해 심리 현상 전체에 통합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새로운 비유로 넘어갔다. 이처럼 광학적인 비유를 들었던 프로이트의 이런 선택은 지구 중심 세계관의 종말을 불러왔던 광학 장치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계를 맺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광학 장치는 회화 작품을 만들때에는 인위적인 원근법을 도입하는데 쓰였다는 것이다. 보드리가 지적하는 점은, 이 인위적인 원근법이 ‘주체’를 역동적인 중심으로 놓거나 의미의 기원을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광학적 도구가 이데올로기 생산에 쓰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의문이 ‘중립성’이라는 점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보드리는 그 중립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어떤 ‘기술적’ 기준에 의해 규정되는지를 정립해야 한다고 보면서 앞으로 보완되고 검증되고 교정되어야 할 몇몇 지침들을 정립하고자 한다. 객관적인 현실과 기입의 장소인 카메라 사이에서, 기입과 영사 사이에서 일정한 작용들과 결과적으로는 완성된 작품을 만드는 작업이 끼어든다. 이처럼 영화가 날 것 그대로의 질료하고 단절되고 분리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완성된 작품만 보고서는 중간 변형 단계를 짐작할 수 없는데 이는 카메라가 실제로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매개 정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샷 분할과 몽타주가 아무리 상호 의존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이 다루는 의미 있는 질료가 차이나기 때문에 샷 분할과 몽타주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며 완성된 작품과 그 소비에도 구분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영화적 특수성은 하나의 작업, 다시 말해 하나의 변형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며 완성품의 소비가 인식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아니면 감춰지는지를 파악하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니면 그 효과 자체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질문하고도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다.

 영화사는 르네상스식 원근법적인 구성을 모델로 삼으면서 성장했다. 보드리는 그렇기에 영화는 원근법을 파괴한다기 보다는, 기준적 규범으로써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불연속적이며 복수의 시점에 기반을 둔 그리스인들의 원근법과 달리, 중심이 있는 공간을 위주로 발전해왔으며 주체가 반드시 점유해야 하는 지점 자체를 한정하고 있다. 때문에 광학적 구성은 환영적 현실을 창조하는 잠재적 이미지의 영사-반사로 나타나게 되며 이상적인 보기의 지점을 정돈하게 된다. 이는 존재의 완전성과 동질성이라는 형이상학의 감각적 재현이라는 서구식 회화의 비전하고도 연관관계가 있으며 영화가 만들어낸 관념론적 담론하고 연계시켜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드리는 영화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연속된 이미지를 녹화할수 있다는 점에서 통합적이고 실체화시키는 특성에 대한 교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즉슨 현실에서 이뤄진 순간들의 절단 혹은 채취된 이런 이미지들은 카메라가 움직이기 때문에 ‘주체-눈’의 고정된 위치를 중화시키고 무화시키는 시점의 다양성을 생각해볼수 있기 때문이다. 영사작용은 고정된 연속적 이미지를 움직임의 연속성과 시간적 차원을 복구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불연속적 요소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지는 연속성의 복구가 문제를 만들어낸다. 즉 관객은 서로 차이가 나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를 지워야지 영화의 연속성을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술적 차원에서도 각 이미지들 사이에서 차이 선택의 최소화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의 24프레임 내에서 간극이 있는 반복이 계속 일어나지만 정작 관객은 그 간극을 완벽하게 다른 이미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드리는 꿈으로 대표되는 무의식의 언어에 담긴 어떤 불연속성을 통해 영화의 물질적인 기반을 작용하는걸 파악할수 있을거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영화가 물질적 쓰기의 체계를 숨기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관념론을 내포하는 장치의 기계적 모델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차이를 기입하는 광학 장치와 필름과 최소한의 차이를 선택하고 줄이는 기계 장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형성된다. 움직임과 연속성은 최소한의 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미지 그 자체는 지워진다. 정리하자면 영화 카메라로 찍힌 어떤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은 연속성, 움직임, 의미로 변형시키는 영사기를 통해 해방되고 동시에 의미와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또 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움직임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의 메커니즘은 스스로 움직여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스스로 움직이는 눈이 어떤 물질적인 것에 구속되지 않는데다, 세계는 눈을 위해 구성될 것이다. 움직임은 초월적 주체가 드러날 수 있는 가장 우호적 조건을 실현시킨것 같으며 주체의 가능성과 권력을 강화시킨다. 이 주체의 가능성과 권력을 통해 영화 이미지는 특정한 무언가를 이미지화하기 위해 의미로써 구성한다. 보드리는 절대적 여기와 그것돠 대립된 다양한 인식들이 지각되진 않지만 따라다닌다고 본 후설의 이론을 인용해 연속성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정립한다. 연속성은 주체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주제의 위치를 제한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연속성은 차이를 부정하는 체계에서 출발한 형식적 연속성과 영화적 공간 속애서 내러티브적 연속성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온다. 그리고 내러티브적 연속성의 추구는 본질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의미가 발원하는 지점에 대한 통일성을 어떤 식으로돈 보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묘사한 메커니즘이 이데올로기적 기계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배치가 필요하다. 보드리는 이에 영화 상영관의 조건을 끌고 와 그것의 폐쇄성과 제한된 공간에서만 효과적으로 스크린-거울 이미지가 작동한다고 보고 있다. 영사기와 암실, 스크린이라는 서로 다른 요소의 배치는 라캉이 묘사한 거울 단계가 작동하는데 필수적 배치를 재구성하게 한다. 하지만 이 재구성은 두 가지 보완적인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운동 능력의 미성숙과 시각기관의 조숙한 성숙이다. 현실감의 기원은 여기에 바탕에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즉 영화가 흉내내는 현실은 자아의 현실이지만 동시에 자기 몸의 이미지가 아니기 떄문에 이중적 차원의 동일시를 구분할 수 있다. 이미지 그 자체의 동일시와 초월적 주체의 동일시라는 두 가지 동일시를 놓고 보면 카메라는 후자의 초월적 주체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건데, 관객은 카메라를 통해 스펙터클을 작동시키고 이를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과 동일시한다. 보드리는 카메라를 초월적 자아를 통해 유기적 통일성으로 통합되면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카메라와 주체의 관계를 주목해야 하며 ‘주체가 카메라를 통해 스스로 구성되고 포착할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미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중심적 자리의 환영적 제한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려는 기능이야말로 영화가 수행하려는 특수한 기능인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재현의 이데올로기와 초월적인 관찰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일관적인 체계를 구축하는데, 이 때문에 보드리는 영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규정한 모델에 호응하는 일종의 대체적 심리 장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대체적인 심리 장치를 구성하는 결정적 기본적인 장치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영화의 근본을 뚫을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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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서사(서사)ㆍ기억ㆍ비평의 자리

저자
발터 벤야민 지음
출판사
| 2012-12-3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발터 벤야민 선집 제9권 서사(서사)ㆍ기억ㆍ비평의 자리이 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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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니콜라이 레스코프라는 한 이야기꾼을 고찰하고 있는 에세이이다. 먼저 벤야민은 현 시점에서 이야기꾼이라는 존재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야기꾼을 ‘어떤 거리와 시각을 취하게끔 한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경험을 나눌 줄 아는 능력’하고 연계시킨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꾼이 드물어지는 현상이 나타난 이유로는 경험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꾼의 이야기의 원천은 무엇인가? 벤야민은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는 ‘경험’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이야기꾼을 두 종류로 분류를 하는데 이는 농부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뱃사람으로 나뉜다. 한 곳에 정착한 자의 이야기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자의 이야기가 이야기꾼의 원조가 된 것이다. 물론 이 두 영역은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와 이야기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벤야민은 레스코프에 대해 “공간적으로 먼 곳의 이야기나 시간적으로 먼 과거의 이야기에 정통해 있었다”라고 말한다. 신자이자 러시아 주재원으로 일했던 레스코프는 러시아 전설들을 마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확고한 천성을 가진 인물들을 그려내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벤야민은 진정한 이야기꾼은 “드러내거나 숨긴 채로 유용한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으”며 이야기꾼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현대로 올수록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줄어든데다 진리의 서사적 측면인 지혜가 사멸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종말엔 근세 초기에 등장한 소설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 소설이 지금까지 산문문학과 차이가 나는 부분을 바로 구전의 전통과 독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경험으로 만든다면, 소설은 철저히 개인적인,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에서 시작해 그것을 극단으로 끌고 간다는 점이 있다.

 이런 서사 형식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와 대조되는 새로운 소통의 형식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정보이다. 이제 사람들은 멀리서 온 소식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 즉각 검증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이해 가능한 정보 듣기를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어떤 교훈으로써 이야기하는 기술이 드물어진 것도 이 정보의 대두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벤야민이 레스코프를 주목하는 이유는 “기이한 일, 놀라운 일이 지극히 정밀하게 이야기되지만 사건의 심리학적 연관이 독자에게 강요되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다. 레스코프를 통해 벤야민은 진정한 이야기가 어떤 것이며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 이후로 도래한 ‘정보’가 가지고 있는 한계도 짚어내고 있다. 정보는 새로웠던 순간이 지나면 소진되지만 반대로 이야기는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심리학적인 분석과 설명을 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을 하여금 동화되게 하는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계속 전파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완과 동화 과정이 현대 사회에서는 부족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다.

그 점에서 이야기는 ‘전달의 수공업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순수한 실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보고하는 사람의 삶 속에 일단 사물을 침잠시키고 나중에 다시 그 사물을 그 사람에게서 건져올린다. 즉슨 이야기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발레리를 인용한다. 발레리에 따르면 현대인은 시간을 줄일 수 없는 일에는 더 이상 손대지 않는다. 현대인의 삶에 따라 이야기도 더욱더 축약되어가는 현상을 보이며 이는 영원성에 대한 생각의 소멸과 연계가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영원성은 죽음의 모습과 연계되어 있음.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줄어든 것과 연계된다. 19세기 시민사회와 과학의 발달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게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과정인데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에서 공적인 과정이자 가장 전범적인 과정이였다. 하지만 현대로 갈수록 점점 요양원이나 병원 같은 지각의 세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임종에 이르러 이야기가 권위와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것과 연관이 있는데 이는 헤벨의 뜻밖의 재회에서 드러나는 세월의 힘이 담긴 문장에서 확인할수 있다.

어떤 서사형식이든 그것을 연구하는 작업에는 이 서사 형식이 역사 기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탐구하는 일이 포함된다. 더 나아가자면 역사 기술이 모든 서사 형식의 창조적 무차별성이 나타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연대기는 그런 역사 기술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서사 형식이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인 연대기 기록자와 역사가 간에는 차이가 있는데 연대기 기록자는 설명의 의무가 없지만 역사가는 그 연대기 기록을 설명해야 한다. 중세 연대기 기록자들은 해명 불가능의 영역에 자신의 연대기를 기록해 세상사 흐름에 포함시킨다.

이야기꾼 속에는 연대기 기록자가 세속적인 형태로 보존되어 있고 레스코프는 연대기 작가와 이야기꾼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작가다. 그렇기에 레스코프의 이야기에서는 세상사의 흐름을 분명하게 구분하는게 불가능하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는 자의 관심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재현할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기억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서사적 능력이다. 이야기꾼이 서사를 만들어내는데에는 자신의 체험 혹은 다른 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승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야기꾼은 기억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이 여러 서사 형식들의 공통의 출발점을 나타낸다면 서사시는 소설과 이야기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사시에서 소설이 독립되었을때 기억과 이야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게 밝혀졌다.

기억: 사건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는 전통의 연쇄. 한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에서 연결되며 수많은 사건들에 바쳐져 있다. 이런 연쇄는 서사적 기억, 이야기의 뮤즈. 소설의 뮤즈는 회상. 잠깐동안 지속되는 이야기꾼의 기억과 달리 한 명의 주인공과 한 명의 사건을 다룸. 서사시에서 분리된 소설은 곧 기억이라는 유산을 물러받게 되는데, 루카치를 인용하자면 소설에서는 의미와 삶이 분리되고 본질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이 분리된다. 이걸 통찰하면서 도달할수 없는 삶의 의미를 파악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인식의 정리와 그 정리를 인식하고 삶의 의미를 주는 것에서 끝을 맺는 형식이야말로 매우 소설적인 것이다.

소설을 읽는 자는 고독하다. 이 고독 속에서 소설의 독자는 소설의 소재를 정복하고 삼켜버린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속에 기록된 어떤 사건에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발견할수 있을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원초적이지만 건져낼수 있는 개념은 다양하다. 위대한 이야기꾼들의 공통된 점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의 발판들을 자유롭게 이용한다는 점에 있다. 동화는 그런 이야기의 순수한 마력을 잘 보여주는 예로, 인류가 악몽을 떨쳐내기 위한 방도들을 찾아볼 수 있음. 레스코프는 그런 동화의 정신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레스코프는 의인으로 정점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위계를 탐구하는데, 점점 내려갈수록 이 탐구는 신비주의적인 관점에 가까워지면서도 이야기꾼의 천성 자체가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벤야민은 이야기꾼이 이야기 소재인 인간의 삶과 맺는 관계는 그 자체가 수공업적인 협동 작업이라고 보며 이를 위해선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그 경험의 원료를 탄탄하고 유용하며 일회적인 방식으로 가공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야기꾼을 교사와 현자의 반열에 올려다 놓으며 소설의 시대에서 이야기꾼의 위치를 복권하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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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Dying Words] (2009)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저자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2-06-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지난 십 년간 나온 사라진 언어에 관한 모든 책 중에서 지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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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에번스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한 언어학자가 희귀 언어를 발굴 복원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시작은 호주에 있는 카야르딜드어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지적하면서 촘스키가 만든 언어학의 주류적인 해석이였던 '보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관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고 저자는 이 언어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쓸쓸하게 적어내리면서 하나의 언어가 단순히 문화를 담아내는 것 이상의 복잡함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언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세계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 도입부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주류 언어와 다른 소수 언어들의 세계와 그것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현실에 있는지 독자들을 알려주려고 한다. 다만 이 책은 단순히 언어의 소개와 단상에 머물지 않고 언어학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을 취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깐 책 전체 기조가 근본적인 언어의 '구조'가 어떻게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어떻게 결착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가볍게 읽기엔 다소 어려운 책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언어학의 지식이 있어야지 이해하면서 읽을수 있다고 할까.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언어학이 문학하고는 완전히 다른 논리학과 프로그래밍의 영역에 걸치고 있다는걸 드러내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그런 일견 난해해보이는 언어 구조가 실은 그 자체로 무수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보편성으로 환유될 수 없는 체득된 문화가 배어 있는지 꽤나 감동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책이기도 한다. 저자는 호주의 아넘랜드 사회의 무수한 언어들과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의 양태, 그리고 아넘랜드 언어의 구조와 갈라져 나간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독특한 부족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왜 "이 언어들이 그렇게 좁은 영역에 많이 남아있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사라졌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사라졌는가?"

저자는 그것이 어느정도 인류의 진화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영토 팽창주의자들의 야욕이 강했던 단일 문화/세력권의 등장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보고 있다. 그런 단일 문화/세력권의 언어는 통치의 유용함을 위해 여러 정책들을 이용해 언어를 통일하거나 잠식하는 과정을 거쳐 일종의 언어 권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무수하게 남아있던 언어들을 사라지게 하는데 저자는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언어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는 점, 지속적인 형태로 말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늦게 등장했다는 점도 들고 있다. 비록 구술 언어로써 흔적이 문자 언어에 남아있다고 해도 이것을 재현하고 보존하는건 힘든 일이며, 그 보존 방법에 대해서도 단순히 녹음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영상 촬영을 해 구술하는 그 순간도 보존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논쟁이 있다고 밝힌다. (일단 저자는 후자 쪽에 가까운 편이다.)

이런 사례 연구들과 더불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언어학자가 겪는 희귀 언어 연구 과정의 고충과 사연들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간신히 살아남은 언어, 제대로 잊혀져가는 언어, 멸절한 언어.... 기적적으로 생환한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에반스의 서술은 차분하면서도 희열에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런 언어의 보호는 무엇보다도 실제 그 언어를 쓰는 화자의 인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사례들을 설명하면서 덧붙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희귀 언어를 보호해야 하는가? 물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희귀언어의 보호가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기본 명제를 깔아두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이라면 희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이 어떻게 운문 문학의 구조하고 연결되어있는지였다. 쿠와루어로 지어진 서사시 [톰 아야 캉게]의 시적 구조를 분석한 부분에서 저자는 "정연하게 상호 연관된 정형구들"과 "음보와 음조 변화"를 서술하면서 이 운문 문학이 언어적 구조와 어떻게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지 서술하고 있는데, 실제 화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그 매력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저자의 노력과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구조가 매우 감명깊게 와닿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일견 어렵고 난해해보이는 언어의 구조가 한 인간과 나아가 그 인간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그 언어의 가치를 통해 희귀 언어가 왜 보호되어야 하며, 그 희귀 언어를 쓰는 자들과 연구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물론 편안하게 읽기 힘든 책이고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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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03)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
고병권 지음
출판사
그린비(그린비라이프) | 2003-03-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특기 사항[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니체의 주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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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향한 즐거운 긍정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알기 쉽게 풀어놓은 책이다. 정확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용을 다루면서 니체가 왜 이런 책을 썼으며 나아가 어떻게 사유하는가를 추적한다. 도입부는 그래서 그런 니체의 사상이 "자신의 체험 기록"을 정의하며 젊은 시절 니체가 투쟁했던 사실들을 나열한다. 니체가 혐오하는 것들은 기독교를 기반에 두고 있는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라 강력히 비판한다. '저 세계'에만 있는 부르주아 문화에는 인간이 지은 죄만을 탓하고 있다.


그렇게 니체는 죽음의 문화를 돌파하기 위해 여러 방도들을 찾지만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문화의 상징인 헤겔, 우울로 도피하는 쇼펜하우어, 평준화된 무리로 만드는 바그너와 결별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는가? 니체는 병이라고 대답한다. 니체는 여기서 "건강한 자의 모험으로서의 질병"을 제시한다. 그는 생의 결핍 때문에 겪는 고통과 생의 과잉 떄문에 겪는 고통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 결과 니체에게 병은 익숙했던 영토를 낯설게 만들고 전쟁을 일으켜 물갈이하는 일종의 치유의 모험으로 묘사된다. 이 모험은 분명 고통스러운거지만 니체는 그 모험을 시도해 자신의 철학을 개척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니체는 위대한 건강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이는 하나의 이상이 아닌 수백 개의 건강을 즐겁게 횡단하는 변모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낡은 세계는 파괴되고 재생되는데 이는 분노와 원한이 아닌 새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긍정으로 귀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재생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니체는 그 과정을 종교적 계시록이 아니라 기쁜 소식, 복음으로 받아들이길 원했다. 그렇다면 왜 이원론적 종교로 유명한 조로아스터의 창시자 차라투스트라를 인용한 것일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선과 악의 투쟁을 사물들의 운행에 있어 본래의 톱니바퀴로 본 최초의 인간이였고, 진실하고 정직하기에 도덕을 넘는게 가능했기에 그를 지목했다고 밝힌다. 그렇기에 이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손에서 본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존재로 변신한다. 이 재창작이야말로 니체가 의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니체의 사상에서 중요한 코드라면 '영원회귀'라 할 수 있다. 이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이 영원회귀엔 긍정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모든 점이 바로 중심점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이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시킨 영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며, 이리하여 현재의 모든 순간, 현실의 이 대지 위의 삶 자체가 그대로 영원한 가치로 이어져 힘차게 긍정되어 간다"라는 뜻의 영원회귀는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 발언을 가능케 한다. 니체에게 신은 현재의 모든 순간을 부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파괴는 심각하지 않다. 니체는 웃음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며 사랑이며 동시에 탄생과 창조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존재기도 하다. 니체는 동시에 신체의 재발견을 통해 본능적이면서도 즐거운 감각을 추구하자고 한다. 그렇기에 니체의 철학은 끝없이 자신을 갱신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허례허식을 부정하고 종교를 부정하고, 과학맹신주의도 부정한다. 심지어 아픔과 병마저도 자신을 갱신하는 단계로 쓰인다. 남은 것은 현재에 있는 자신을 향한 무한한 긍정과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현재 속 미래다.그렇기에 니체는 의외로 동양 철햑 그 중에서도 불교라던지 노자와 장자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니체는 최초의 유희와 신체의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을 통해 헤겔과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 서구 사회의 일방향적인 궁극을 향한 사상을 배격하고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철학은 근엄하거나 무겁지 않다. 오히려 가볍다. 그 점에서 니체는 마르크스와 함께 최초의 현대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마르크스가 계급론과 유물론으로 사회를 구조로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인라 할 수 있다면 니체는 궁극이라는 것이 반드시 완성된 무언가가 아닐수도 있으며 끝없이 갱신되는 무언가며, 그것이 즐거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던져줬다는 점에서 후일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개될 사상의 단초를 던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고병권은 이런 니체의 문학적 서술 아래에 담겨 있는 사상을 끄집어내 읽기 편하게 만들었다. 단락별로 니체의 원문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 고병권의 글은 매우 부드럽게 흐른다. 물론 니체의 사상을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글을 읽어야 하겠지만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일견 난해해 보이는 니체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여줬다는 점에서 니체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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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2013)


일베의 사상

저자
박가분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3-10-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김치녀’ ‘홍어’ ‘보슬아치’ ‘좌빨좀비’ ‘노알라’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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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국가를 향한 욕망이 낳은 음험한 키메라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은 2014년 한국 인터넷에 화제가 되고 있는 일베라는 사이트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일베는 일간 베스트의 준말로 최근 인터넷 사이트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이트다. 저자는 이 일간 베스트라는 사이트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첫 장에서 박가분은 일베의 탄생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용어를 들며 ‘그들만의 문화와 코드’가 있다고 보았다. 이 와중에 일베의 기원을 디씨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디씨서 잉여 문화와 막장 문화 그리고 병맛 문화라는 현 한국 인터넷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코드를 발견하는데, 전자는 자조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표현으로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호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병맛 문화는 자신 스스로 통상적인 관습과 상식 그리고 의미지평을 넘어선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짐짓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추함과 혐오스러움으로 굴절되어 표현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관심병 문화에서는 위악적인 컨셉을 통해 자신이 관심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일베를 비롯한 인터넷 문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짤방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박가분은 짤방이 가지고 있는 호수성이라는 부분을 지적한다. 저자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증여의 논리]라는 서적을 들면서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특정 선물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산, 증여되고 각각의 계열들을 가로질러 이동되며 공유되는 공간으로 특징짓는다. 이를 통해 짤방 자체가 증여와 답례의 교환 행위가 수직적인 문화가 아닌 수평적인 문화를 생성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호수성은 긍정적인 면모가 아니라 부정적인 면모를 띄기도 하면서 이 호수성이야말로 인터넷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일베가 영향력이 있는 이유를 단순히 사회 불안정성의 증대나 "재미만을 추구하는 단체"라는 해석을 배격하고 '팩트'로 대표되는 사실 중심주의 (실은 그것도 매우 왜곡되어있긴 하지만)로 대표된다고 보았다. 이 사실 중심주의의 데이터베이스의 문화가 있는데, .원래 일베가 디시인사이드의 '일간베스트'를 저장해 보여주던 곳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슨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되는 것으로 시작한 커뮤니티 특성이 일베의 '팩트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팩트주의야말로 일베가 외부 사이트와 대결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저자는 여기서 인터넷 초창기 논객 문화를 이끈 강준만을 불러온다. 강준만은 인용과 실명 비판을 통해 깎아내리는 논쟁을 통해 평등과 연대감을 추구하며 하이퍼텍스트적인 글쓰기를 추구했는데 이는 부정적인 호수성을 추구하는 인터넷 문화가 맞물려 그를 인터넷 논객으로써 자리잡게 했다고 보고 있다. 즉슨 강준만과 그가 만든 [인물과 사상]은 인터넷 문화의 효시가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일베가 세상과 대결하는데 쓰는 방식은 이런 부정적인 호수성을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호수성은 팩트주의와 결합해 인터넷에서는 어떤 욕망이든 다 표현할 수 있는 상호적이고 평등한 공간이며, 모두가 희화화될 수 밖에 없다는 삐뚤어진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는 혐오발언을 문화적 권리 정도로 여겨 소수자에 대한 자유로운 비하나 혐오로 표출되곤 한다. 

그렇다면 일베를 이끌게 한 것은 무엇일까? 박가분은 그것을 바로 정상국가에 대한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2002년 촛불시위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월드컵과 반미 촛불 시위는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이전과는 다른 감성을 지닌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다는 믿음을 안기게 했다. 이것이 2002년을 이루고 있었던 정상국가에 대한 욕망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동시에 그 욕망이 진정한 '진보'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와 반한나라당이 결합한 무엇인가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젠 2008년 촛불 시위를 지나 일베 등장 전후로 그 비난 대상이 북한과 진보로 옮겨 간 것이다. 그렇기에 일베라는 존재는 여러모로 2002년과 2008년의 촛불시위의 반대급부로 등장한 다른 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촛불시위의 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축제의 광장에서 기존의 가치체계, 정치와 비정치,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을 통합시켜서 정상국가로 나가고자 했던 열망 아니였을까? 그렇기에 일베의 등장은 이 열망이 지금 길을 잃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박가분은 극우적인 일베를 넘어서기 위해서 조윤호가 지적했듯이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국민'이라는 딜레마를 지적하며 궁극적으로는 '정상 국가'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베의 사상]은 완벽한 책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박가분이 내세우는 자료들은 자기가 아는 것 위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있어서 논지가 협소해지는 과정이 있으며, 호수성 같은 개념들은 그렇게까지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만약 [일베의 사상]이 가치가 있다면 지금 현 인터넷 문화와 사회 문제를 하나로 묶어 통시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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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발터 벤야민 선집 6)

저자
발터 벤야민 지음
출판사
길(도) | 2008-06-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벤야민의 초기 사상을 주도한 언어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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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를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는 예술자의 이상적인 수용자에 대한 개념을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왜 벤야민은 ‘이상적인 수용자’에 대한 개념을 부정할까? 이에 벤야민은 예술이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벤야민은 예술이 인간의 주의력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보면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는다. “시에서 본질적은 것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다.”라는 시에 대한 벤야민의 인식에서 알 수 있듯이 벤야민은 예술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라고 보고, 이런 생각은 곧 지금 예술을 번역하는 일이 비본질적인 것만을 전달한다고 보고 있다.


 벤야민이 보기에 번역은 일종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작으로 돌아가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하나는 그 작품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수 있는가와 작품은 그 본질에 따라 볼 때 번역을 허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그 번역이 요구하기도 하는지라는 물음이다. 이에 벤야민은 원작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그 원작들의 번역 가능성에 표출되며 단순한 의미의 번역이 아닌, 원작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가능성에 대해 주목했다. 이 미지의 가능성을 ‘신의 기억’이라고 벤야민은 정의하는데, 이는 후에 서술한 번역이 종교적인 열망과 닮아있다는 점하고 일맥상한다. 비록 언어적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이 불가능하다 해도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분리하는 가운데 특정 언어적 형상물들에 대한 번역’을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벤야민은 긍정하면서 원작들에 내재하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번역 가능성으로 표출되며, 그것이야말로 작품의 특징이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사유에서의 특정한 상관 개념은 인간에게만 관련되지 않으면 최상의 의미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여기서 벤야민이 가지고 있는 예술관과 번역관에 대한 편린을 확인할 수 있다. 즉슨 벤야민이 생각하는 사유와 그것의 특정한 상관 관계는 인간과 관련이 있지 않을 때야 그 진가가 온전히 드러나며 그것들을 번역을 한다고 해도 굳이 인간과 결부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동요하는 본성인 영혼의 통치나동물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역사적인 것으로 삶의 영역을 규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규정이야말로 더 철학이 모든 자연적 삶을 역사의 보다 더 포괄적인 삶으로부터 이해해야 할 과제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역사가 그 혈통을 원천으로부터 알고 형상화를 예술가의 시대에서, 영원한 사후의 삶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삶의 영역을 규정하는 삶의 언표라는게 살아있는 자에게 무언가 의미하는게 없어도 살아있는 자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사후에 번역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원작의 사후에 번역이 나왔다고 정리하면서 “당대에 발굴되지 못한 가능성”이 후대에 발굴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들은 그것들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개는 독특하고 고귀한 삶의 전개로서 어떤 독특하고 고귀한 합목적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삶과 합목적성은 겉보기엔 다를지 몰라도 보다 상위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곳에서만 해명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 상위의 영역이란 삶을 위해 합목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의 표현, 그 삶의 의미의 재현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이다. 삶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재현’이라는 점에서 벤야민은 예술에서 ‘재현’에 방점을 찍으며, 삶과는 다른 유니크한 특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번역은 이렇게 숨겨진 관계를 드러낼수 없지만 재현은 할 수 있으며 그 관계를 맹아로서 또는 집약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재현을 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사유한 언어들 사이에 있는 독특한 수렴 관계, 즉 근친적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벤야민은 번역들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보며 전통적 번역 이론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벤야민은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와 인식비판을 제안하고 있으며 그 인식 비판에서 현실적인 것에 대한 모사에 대해 부정하며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추구한다면 번역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원작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 과정을 겪는데, 그 과정을 무시하고 후대의 주관성으로 보는 것은 사유의 무능함이 낳은 소치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이 표출된다면 어떻게 표출되는 것인가? 벤야민은 모사와 원작 사이의 모호한 동일성에서 표출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이런 언어들의 초역사적 근친성은 각각의 언어들 가운데 어떤 개별 언어가 아니라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다. 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단어가 서로에게 각각 상이하게 다가오며 대체될 수 있는게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볼땐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그렇다. 다시 말해 개별 언어에서 의도된 것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번역들은 변화하고 있는 언어들의 이질성을 해결하려는 임시적인 방편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이런 이질성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벤야민은 이런 과정을 종교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왜 종교적인 문제나면 번역은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이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과정이 종교의 방향과 같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번역에서 전달에 해당하는 부분을 번역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번역은 실제의 언어를 뒤덮으며 강압적이고 낯선 채로 머물고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벤야민은 번역이 하나의 고유 형식이라면 번역자의 과제도 작가의 과제와 다른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란 원작의 메아리를 깨워 번역어 속에서 울러 퍼지게 하는 의도, 번역어를 향한 바로 그 의도를 찾아내는데 있다. 그러면서 문학작품의 의도가 언어의 총체성이 아닌, 특정한 언어적 의미 연관만 직접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번역은 그 문학 작품의 외부에서 원작을 불러들인다. 여기서 벤야민은 원작과는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 뿐만 아니라 파생적이고 궁극적이며 이념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며 번역을 문학과 가르침 사이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을 가는 것은 매우 험난하다. “번역 속에서 순수언어의 씨앗을 심는다”는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인 노동이 필요하며 ‘의미의 재현’이라는 기존 번역의 기준을 폐기한다면 새로운 번역 기준과 그 방법론에선 그것들을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의도하는 것이 의도된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주목한다. 그는 그렇기에 형식이 재현에서 충실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며 직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벤야민은 이 직역이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를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번역이 의미의 재현을 그만둔다면 어떤 것을 노려야 할까? 벤야민은 번역의 자유는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의 언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린 고로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가의 과제라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마지막으로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의미의 번역이 아닌 형식의 번역 가능성을 살리는 쪽으로 번역이 나아가야 하며 의미를 잠깐 스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번역이 나올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점에서 [번역자의 과제]는 단순히 번역 이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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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2: 산문 (2003)


김수영 전집 2(산문)

저자
김수영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3-06-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초판 출간 이후에 발굴된 작품들을 다수 수록하였다. 이글들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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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세상에 불온한 사랑의 장도리를 던져라


[김수영 전집] 2권은 그가 그동안 써왔던 산문을 하나로 묶어서 내놓은 책이다. 이 산문들은 '거대한 뿌리'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풀' 같은 시들 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그의 사상이 제대로 드러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전집이라는 타이틀 답게 이 책은 시론, 문화 비평부터 시작해 소소한 일상들을 다룬 수필까지 제법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우선 이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지금까지 한국 문학계에서 김수영을 읽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강신주 정도를 제외하면 김수영은 저항시, 참여시의 대부로 여겨져 왔다. 물론 그런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김수영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수영에 대한 논의 대부분이 이 '저항' 자체에 맞춰져 있었던 것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김수영의 '참여'라는 것은 차라리 근본적인 미적인 태도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옮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식민지 모더니즘에서 출발해 비트 세대에 도달한 경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비트 세대를 설명하자면 195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부유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미국 중산층의 허식을 비웃으며 그 뒤에 감춰진 "지저분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것"들을 복원하려는 문학적인 시도였다. (직접적인 선조로는 월트 휘트먼을 자주 든다.) 당시엔 금기시된 묘사와 비속어 사용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앨런 긴즈버그의 장시 '울부짖음'과 여행기의 형태를 빌어 끝없는 방탕 속에서 젊음을 구가하는 사람들과 길의 생명력을 발견한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s'와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로 손꼽힌다.

산문 전집에 실린 김수영의 '멋'을 읽어보면 김수영은 비트 문학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자꾸 높아지는 고층 건물 아래를 지나다니는 신사숙녀의 자태가 현미경적으로 작아지는 어제오늘, 설사 여봐라는 듯이 공을 들여 몸단장을 하고 멋을 내보았대야 그것은 나병균처럼 없다. 이런, 없는 나병균을 나병균이라고 의식하면서 쾌감이 아닌 혐오감을 자아내게 하기 위해서 꺼먼 눈언저리의 도랑이나 핏기 없는 하얀 볼의 화장을 했다면 조금은 멋이 있다. 비트의 미학. (…) 비트의 미학은 나병균의 미학일 뿐만 아니라 현미경에 거역하는 미학이며, 개성을 말살한 미학이며, 획일주의에 항거하는 미학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획일주의에 항거하고 있는 나병균의 미학이야말로 김수영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이어령과의 논쟁을 비롯해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 ―시인과 현실", "대중의 시와 국민가요", "시의 뉴 프런티어" 같은 글에서 그는 "유치하고 단순해질" 자유를 원하면서 왜 한국 사회는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해방 직후의 혼돈이 가장 자유로웠다"가 말하는 김수영에게 자유는 단순한 현 체제에 대한 저항 뿐만이 아니라 더욱더 깊숙한 정신적이고 생활에 대한 것을 노리고 있다. 이는 굳어있는 정신에 대한 저항이며, 지금까지 인간을 사로잡고 있었던 쇠사슬을 끊으려는 저항이다. 그는 비트에서 시작해 초현실주의, 모더니즘, 정치적 저항주의를 거쳐 자신만의 '자유론'을 완성하고자 한다.

보통 작가의 생애를 작품이나 비평에 결부시키는 것은 비판받기 십상이지만 김수영의 사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몇가지 개인사를 알아야 적어야 할 것 같다. 먼저 그의 삶에서 6.25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인민군으로 징집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아비규환을 겪어야 했고 (인민군 군복을 찾기 위해 산을 하루종일 뒤졌다던가,  사형 당하기 직전 시체 더미에서 숨었다가 살아남았다던가, 포로 수용실 화장실에 갔더니 토막난 시체를 발견했다던가, 이를 스스로 뽑았던가) 간신히 살아남았을때 아내는 다른 남자랑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물론 김수영의 생사가 불명이였기에 아내도 어쩔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였다는건 김수영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혼하고자 찾아온 아내를 강제로 이끌어 같이 살았다는게 무척이나 의외의 선택이였다. 어찌보면 김수영 입장에서는 아내의 배반은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재결합이 순탄하게는 가지 않았다. 김수영은 술에 취할때마다 아내와 가족들을 폭행하고 구박했으며 술과 생활고에 쩔어 신경질적인 태도로 보였다.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 김수영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일부라 생각했다.

김수영의 위대함은 그런 파괴되고 일그러진 자아와 개인사를 그대로 글 속에 치열하게 투영시키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사랑'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김수영이 써내린 일그러짐 속에서 우리 자신의 편린들을 찾아낼수 있으며 그의 단점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 깨우치게 되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점에서 김수영의 글 쓰는 방식은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서 자신이 겪었던 무절제하고 난잡한 섹스와 일탈, 방랑, 인간적인 단점을 그대로 노출시켰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나병균처럼, 흉하고 더러운 언어와 사건들이 그의 글에서는 어떤 가식도 치장도 없이 쓰여져 있었고 그 문장들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빛나고 있다.

어찌보면 김수영은 비트 제네레이션을 스스로 뛰어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비트 제네레이션는 그렇게 자신이 반발하는 사회에 대한 혁명은 이루지 못하고 몇몇은 동양 신비주의에 겉핧기로 빠졌거나 주화입마에 빠져 의미없는 무절제 그 자체에 스스로 빠져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고 살아남은 대부분은 히피 운동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히피 세대 대부분은 끝내 유토피아의 상상에 갇혀 끝났다. 김수영은 6.25 전쟁과 4.19 혁명을 보면서 부조리한 세상과 그것을 바꾸자 하는 혁명이 가지고 있는 힘,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유토피아적인 상상이 허무한 것을 간파했다. 그렇기에 김수영은 비트의 병균적인 사랑 미학이 단순히 개인의 방종에 끝나지 않고 부조리한 사회 자체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가 이어령과 박인환을 비판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흉하고 더러운 언어를 예단하고 포장하려는 술수를 부렸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가 비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비트의 흉내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런데 대부분의 비트의 아류들은, 화장의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화장의 태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힙스터적인 글쓰기를 견지했던 박인환은 가루가 되도록 까일수 밖에 없었고, 정치적인 불온성으로만 논지를 전개해나간 이어령은 글을 오독한거나 다름없다고 말해버린다. 그의 몸 속에 스며든 비트의 미학은 단순히 정치로만 한정되지 않는 어떤 사랑에 대한 믿음과 선비적인 지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부분에서 당대의 인식에 갖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국어보다 일본어와 영어에 익숙한 언어적 정체성, 자신을 유교적인 가치관에 못 벗어난 인간이라는 걸 자조하는 부분이라던가,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를 진정한 혁명의 이상으로 칭찬했다는 점 (당연히 카스트로의 쿠바는 김수영의 이상과 달리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중이다.)등 꼽으라면 무수히 나올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한계를 숨기려 하기보다는 드러내놓고 부단히 자신을 갱신하고 미래에 대한 믿음을 글 내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그렇기에 김수영의 글은 김수영 인간 자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된다. 오장환의 '병든 서울'에서 잠시 느껴졌던 그런 해방감과 희열감이 그가 담뱃갑에 써내려갔던 글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 전집 2 산문편]은 지금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수영이 꿈꿨던 사랑의 이상이라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그 사랑의 이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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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 그리고 도시의 여성 산보자: [사진의 작은 역사], [구경꾼의 탄생],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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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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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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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의 탄생 - 세기말 파리, 시각문화의 폭발

저자
바네사 R. 슈와르츠 지음
출판사
마티 | 2006-01-1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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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노문화의푸른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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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진의 작은 역사], [구경꾼의 탄생],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 세 책을 읽고 제출한 독후감을 약간 수정해서 내놓은 글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사진의 작은 역사’는 사진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자본주의가 흔들리게 된 지금, 사진의 산업화와 역사, 미학적 변화를 통해 사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저작이다. 그는 일단 지금까지 사진 예술의 미학을 논의할 때 적용되던 기존의 속물적인 예술 개념에 대해 ‘아둔한데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비판하면서 사진이 가지고 있는 본질, 즉 기술에 대해 재인식을 요구한다.

벤야민은 이 와중에 초기 사진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말기 초상 회화에서 등장했던 빛과 그림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던 복제기술인 메조 틴트 기법을 주목하면서 초기 사진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분위기(후술하겠지만 이것은 아우라다)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대 (1930년대) 사진들은 그런 분위기가 붕괴하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논의를 할 수 있게 됬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술과 예술, 아우라에 대한 논의는 후속작인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이어져 확장한다. 그는 이 글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라고 말하며 글의 서문을 열고 있는데 이는 벤야민의 매체미학이 단순히 미학에만 머물지 않고 어떤  역사적 경제적인 발전 양태와 관계있어왔다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이어 자본주의 아래에서 있었던 생산 조건의 변화들이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게 됬는지 지금에서야 파악이 가능해졌다고 보고 있다. 벤야민은 이런 생산 조건의 변화를 파악하는 방식을 현재의 생산 조건에서의 예술의 발전 경향들을 파악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고른 것은 ‘현재’의 예술의 발전 경향은 바로 예술의 기술적 복제다. 벤야민은 이를 파악해 예술의 발전 경향과 사회적 변화, 나아가 어떤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던지고 있다.

벤야민은 일단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예술 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이 기술적 복제가 역사적으로 긴 간격을 두고, 그러나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가면서 관철됬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인쇄 기술을 예로 들면서 석판 인쇄부터 이 인쇄 기술이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이 석판 인쇄의 간편함은 곧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으며 영상의 복제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사진 매체가 등장해 완전히 근본부터 뒤집어 엎는 혁명을 일으켰다. 벤야민은 이 혁명을 ‘손에서 눈으로 예술적인 임무가 옮겨졌다’, ‘그것은 예술의 작업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표현하며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어 벤야민은 가장 완벽한 복제에도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 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가 빠져있다고 적고 있다. 이 현존재는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복제품에는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던 진품성의 영역 전체는 기술적 복제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고 다른 어떤 복제의 가능성에서도 벗어나 있다. 하지만 간단히 위조품으로 낙인 찍을수 있는 기존 복제와 달리 기술적 복제는 그렇게 쉽사리 낙인을 찍을 수 없는데 벤야민은 그 이유로 기술적 복제는 원작에 대해서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를 가져다 놓을 수 있다.

이렇게 기술적 복제로 복제된 예술작품은 예술 작품 존속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예술 작품의 진품성이라는 핵심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벤야민은 이를 아우라라 불렀는데 그는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라고 보고 있었다.

이 아우라라는 개념이야말로 벤야민의 철학을 관통하는 개념으로 아까 언급한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먼저 주창한 개념이지만 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한층 확장되어 예술 전반까지 아우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이 아우라를 특수한 형식의 지각으로, 기술과 대상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적으로 규정되며 이런 아우라가 일종의 제의적인 숭배 태도를 가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량복제 기술이 예술에 적용되면서 이 일회적인 가치를 가진 아우라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아우라가 새로운 수용 맥락을 요구하게 됬다.

재미있게도 벤야민은 이 아우라의 붕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닌, 예술이 제의적인 기능과 의식에서 해방되어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고 보며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아우라는 사실 자료를 파시즘적으로 재가공할 위험이 있다고 그는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벤야민의 주장은 그가 몸담고 있던 사회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즉 벤야민은 기술복제라는 새로운 상황이, 예술의 아우라라는 부르주아적인 현상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정치적인 실천을 실현시킬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벤야민은 동시에 이런 실천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가 못을 박아두었다. 그는 당시에도 있었던 스타 숭배를 사이비 아우라라 비판하면서 이를 해체하고 다른 이상을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고찰했다.

벤야민의 이런 기술 복제에 대한 관점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다소 순진하고 미흡한 부분도 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에 죽었기 때문에 전후에 있었던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TV 방송 같은걸 예측하지 못했고 미디어 기술의 발전에 따른 개인이 영상을 대량복제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 (유튜브로 촉발된 UCC) 돌발적으로 등장한 시대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후자의 질문은 후대 학자들이 풀어야만 하는 문제로 남겨졌다. 또 스타 아우라를 역으로 이용해 정치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한 장 뤽 고다르의 [만사형통] 같은 시도들에 대해서도 예측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우라가 파시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도구라는 지적에서 그는 무척이나 193-40년대에 등장한 레니 리펜슈탈이라던지 선전 영화의 위험성부터 시작해 1980년대의 MTV 문화로 인한 감각적인 영상, 1990년대 걸프 전쟁을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게릴라 전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버린 CNN, 2000년대 UCC 문화 같은 것들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이는 전후 세계의 모든 영화 감독들의 ‘아우라와 스펙타클이 가지고 있는 파시즘’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점만으로도 벤야민의 철학은 기술의 발전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체 철학의 대부로 자리 잡을수 있었다.

벤야민이 이런 고찰을 하게 된 계기는 19세기 파리의 시각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파사주 프로젝트와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벤야민의 도시 문화에 대한 연구는 비록 벤야민의 때이른 죽음으로 이 연구는 완성되지 못하고 메모 덩어리로 끝이 났지만 그래도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바네사 R. 슈와르츠의 [구경꾼의 탄생]은 벤야민이 봤던 19세기 파리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슈와르츠의 [구경꾼의 탄생]은 19세기 파리에 있었던 스펙타클 몇 가지를 골라서 설명해주는 책이다. 정기간행물, 시체를 감상하는 산보자, 밀랍인형 박물관, 디오리마, 뉴스 영화가 나온다.

파리가 이런 식으로 스펙타클의 전시장이 된 이유를 저자는 오스망화로 보고 있다. 오스망화는 185-60년대에 파리에서 전개된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상승과 관련된 심대한 경제적 문화적 변동의 약어로 이런 재설계로 인해 파리는 가장 먼저 모더니티의 전시장이 됬고 곧 파리는 현대 도시의 프로토타입같은 모습을 보이곤 했다.

먼저 나오는 것은 대로와 정기간행물이다. 이 대로는 건설되는 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곧 현대적 파리의 상징이 되어 카페, 극장, 신문 같은 유행하는 호사품들과 볼거리들을 제공되기 시작했다. 카페와 극장은 파리라는 도시의 스펙타클을 관람하기 위한 하나의 좌석이 되었으며 신문은 항시 도시에서 일어나는 스펙타클을 기사로 보도하거나 대중소설나 일러스트 같은 자체적인 스펙타클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파리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스펙타클을 하나 만들어낸다. 바로 시체를 관람하는 것이다. 이 파트에서 저자는 파리 모르그에 전시된 아이의 시체를 보러 파리 시민들이 몰려든 걸 묘사한다. 저자는 이 모르그를 실증주의 성지로 묘사하면서 과학의 발전을 통해 ‘선정적인 이야기 속에서 평범함과 일상이 묻어나고 삶이나 죽음마저도 구경거리가 된 파리와 어울렸다’고 보고 있다. 이는 죽음이나 병적인 것들과 동떨어져 있었고 오히려 쿨한 볼 거리에 가까웠다.

이 시체를 관람하는 행위는 곧 밀랍인형 박물관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밀랍인형 박물관은 시체전시라는 내용에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결합해 절묘한 방식을 만들어냈으며 상기한 모르그의 시체 관람이 전해주던 구경거리화된 현실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당대 파리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다.

이 밀랍 박물관은 단순히 인물을 배치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레벵 박물관의 디오라마 같은 경우 하나의 시간과 사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서사를 3차원으로 재현했으며 여러 위치에 전시물을 부여해 관객의 관심을 유도했으며 나아가 장면의 서사를 전개시키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런 밀랍 인형 박물관의 전시 형태는 곧 관람객이 박물관 전시에 동작을 이입할 권력을 주었다. 즉 박물관 안의 산보를 통해 서사를 진행시키거나 그 서사를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접근법을 밀랍 박물관은 만든 것이다.

밀랍 박물관의 이런 식의 스펙타클의 형상화는 파노라마로도 이어진다. 우선 파노라마는 전체 풍경이라는 그리스어를 의미하고 있으며 그 말대로 전체 풍경을 보여주는 상영 체계였다. 이 파노라마의 장치 원리는 거대한 원형그림을 세워놓고 천장 틈새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을 그림에 비추어 자연의 환영을 보여주는 형식이였으며 관람객들은 어두운 통로로 들어와서 방 한가운데 있는 플랫폼 위에 선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그림으로 둘러쌓여서 그림이 전해주는 스펙타클을 맛보았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실제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시각적 착시가 가져오는 것으로 스펙타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파노라마는 원래는 풍경 묘사로 시작했지만 세기말이 되면서 밀랍 박물관처럼 신문을 각색해 현실의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변모는 밀랍인형관의 전시 체계나 디오리마하고 많은 연관 관계가 있었다.

이 파노라마가 성공한 이유는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재현이 만들어내는 환영을 보고 있는 관객을 현실이라 믿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영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설득력은 파노라마에서 싹트게 되다가 마침내 영화에서 활짝 꽃피우게 되고 파노라마의 자리를 빼앗게 된다. [구경꾼의 탄생]의 마지막 역시 영화의 등장이다. 저자는 영화와 영화적 경험을 연속이자 동시에 단절을 표시하는 매체라 말하며 대중 수용자인 관객과 현실을 구경거리로 전환시키려는 기술적 시도를 결합시켰다고 보고 있다.

이런 지난한 변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파리라는 도시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스펙타클을 만들었으며 시체 관람과 거기서 영향을 받은 밀랍박물관, 디오리마, 파노라마를 거쳐 영화로 넘어가는 도시 스펙타클의 역사를 조감하고 있다.

[구경꾼의 역사]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시체 감상 부분이였다. 벤야민의 저작들을 보면 [구경꾼의 역사]가 소재로 삼고 있던 19세기 파리에서 살면서 시를 쓴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한 인용이 많은데, 이 [악의 꽃]에는 시체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난다. 비록 이 시체의 이미지는 파리 구경꾼들과 보들레르가 전유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보들레르에서는 [구경꾼의 역사]에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탐미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래도 시체 이미지가 당대 문화사적 맥락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벤야민의 기술복제 논문에 담긴 논지들은 이런 지난하고도 변화무쌍한 19세기 파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걸 확인할수 있었던 점도 인상 깊었다.

이어지는 김소영의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의 두 글은 이 발전상과 벤야민의 기술 복제가 예술에 끼치는 영향을 종합하고 있다. 먼저 ‘도시를 걷는 그녀, 플라네즈’에서는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글쓴이는 이 소설에서 도시 문화 속에서 여성의 존재, 나아가 역사적 주체성은 거의 없었다고 보고 있다. 글쓴이는 영화를 통해 이 주체성을 회복시키려고 하면서 서구의 텍스트들을 살펴 보고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 글쓴이는 플라톤의 동굴 이론과 현대 영화 이론의 공간적 수사학, 프로이트의 건축물을 들며 이것들이 어떻게 영화 평론 내에서 작동하는지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내 이런 수사학들은 ‘고고학적 작업’으로 전락했다고 보면서 이를 대체할만한 동적인 관객을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글쓴이가 드는 동적의 관객은 바로 [구경꾼의 역사]에서 들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입에 있었던 도시인들이다. 이들은 도시에 매혹되어 있었으며 그 매혹과 영화는 역시 산업화된 대도시의 생산력을 토대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김소영은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를 들고 온다.

위에서 [구경꾼의 역사]에서 주지했듯이 파리의 파노라마와 디오리마는 도시 대중의 시선이 가장 몰리는 곳인 ‘대로’에 놓여져 있었다. 글쓴이는 초기의 영화와 그것의 카메라 움직임은 이런 대로를 활보하는 대중의 시선을 따라 갔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확실히 초기 영화들은 철도라던가 (최초의 영화 제목은 ‘기차의 도착’이었다.) 이동하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전개했던 기술 복제와 예술에 관한 논의는 위에서 전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고 벤야민이 저작활동을 했던 당시 영화의 흐름을 간략히 집자면 1920년대부터 영화는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나 카메라의 배치를 달리해 찍은 각각 이미지들의 연결을 고민하는 몽타주 기법이 도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몽타주들은 종종 도시문화와 스펙타클에 매혹된 산보가 (플라네르)하고 연관되고 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를 유토피아로 묘사하는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베를린, 대도시 심포니], 세계로 퍼진 마천루의 이미지를 가지고 미래의 도시를 상상한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등 초기 몽타주와 카메라 기법을 이용해 19세기 파리보다 더욱 발전한 메트로폴리스라는 구경거리를 관람하는 구경꾼들의 시선과 매혹을 담아내고 있었다.

비록 벤야민 자신은 이 당시 영화보다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곤 하지만, 이런 예술가-플라네르의 변화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품]을 통해 19세기 ‘아우라’의 유물들인 아케이드, 파노라마, 산업도시들의 몰락과 동시에 20세기적인 ‘기술복제’의 아이이자 혁명의 파이오니어인 영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 혁명의 아이가 잘못하면 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도 명백히 하고 있다.

김소영은 이제 여기에 여성이라는 존재를 놓기 시작한다. 우선 그녀는 도시의 여성 플라네르는 창녀라는 존재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이는 가정과 같은 개인적 영역을 여성의 공간으로, 그리고 거리나 공공 영역들을 남성의 공간으로 구획하는, 성차에  근거한 사적 영역/공적 영역의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이분법은 곧 밤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의 인권 운동을 통해 깨졌다.

이제 이렇게 자유를 얻은 여성 플라네르들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영화와 아케이드다. 여가 시간에 공적 공간에서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를 소유할 수 없었던 여성 주체에게 영화와 영화관은 그 권리를 안겨주었다. 물론 이 권리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지금도 온전하다고 하기엔 힘들다. 그리도 아케이드는 윈도우 쇼핑을 통해 영화와 비슷한 파노라마적인 쾌감을 여성 주체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런 둘의 공통점은 이미지를 소모한다는 점에 있었으며 여성의 근대적 정체성과 욕망이 부분적으로 형성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와중에 등장하는 여성 감독이 있다. 바로 엘비라 노타리라는 감독이다. 비록 인정받진 못했지만 엘비라는 나폴리 지역의 영화문화의 초기 지도를 만들었으며 나폴리라는 도시의 매혹적인 파노라마를 펼쳐보였다. 엘비라 노타리의 영화들은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영화 이론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졌던 수인/관객이 아닌 동적이고 유목적인 성격에 주목하게 만든다. 나폴리는 전통적으로 동적인 스펙타클을 제공하는 도시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철도가 건설된 곳이다. 나폴리의 상영관은 그 모더니티의 중심인 아케이드에서 상영됬다. 따라서 나폴리 여성들에게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모더니티의 총화를 맛보러 간다는 것이였고 엘비라 노티라는 그 욕망에 걸맞는 영화를 만들어서 내보낸 것이였다. 즉 엘비라 노타라 같은 여성 영화 감독과 여성 관객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남몰래 어머니 도시를 배회하는 쾌락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마냥 해방적인 것도 아니였다. 전쟁의 업화 이후 간신히 일어나는 중이였던 독일의 베를린은 사정이 달랐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여성들도 공장을 나가야 했다. 이런 공장은 모더니티와 성적 해방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동량 강화라는 족쇄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해방조차 남성-파시즘의 등장으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됬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런 여성들의 영화를 전유한 모더니티 항유가 현대 영화이론 중 수용이론에 대한 대안의 근거로 제시할만하다고 보고 있다.

‘영화 연구의 소지형도’는 상품으로서의 스펙타클과 그에 매혹된 관객과의 관계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19세기 파리와 20세기 초 벤야민의 시대를 거처 마침내 20세기 말엔 모든 삶이 거대한 스펙타클들의 축적이 되어버린다. 이 거대한 구경거리의 사회에서 문화는 점점 상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글쓴이는 그에 따라 영화 연구는 이제 이미지가 정교하게 상품화되는 문화 전반에 대한 학문이 되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현 시대를 전자복제 시대라고 보고 있다.

글쓴이는 남성과 여성의 텔레비전 시청 스타일을 들면서 이 곳에서도 사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연관짓는 사고가 가정을 일터와 분리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됬다고 보고 있다. 허나 소비사회가 등장하면서 이 엄격한 구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글쓴이는 비디오 테이프와 텔레비전이라는 전자 복제 시대의 대표적인 매체를 비교하면서 이 구분이 어떤 식으로 흔들리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리모컨을 통해 독서를 하는 것처럼 영상을 받아들인다던가.)

이를 통해 글쓴이는 영화 관람이 특정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는거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적자면 지금까지 영화 관람은 내러티브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글쓴이는 이어 영화 연구의 첫 번째 과제로 관객들이 영화 카메라가 탐사해 열어 주는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또바로 읽는 힘을 부여해줘야 하며 나아가 동시대의 모든 복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김소영의 [시네마, 테크노의 푸른 꽃]에 실린 두 편의 글은 1996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읽어야하는 글이다. 1990년대 한국은 민주화 이후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으며 기존의 문예영화 스타일의 내러티브 중심의 비평을 배격하고 새로운 비평 형식을 찾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도시를 걷는 그녀, 플라네즈’는 그런 페미니즘적인 접근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여성적 스펙타클에 대한 고찰과 파악을 통해 영화 이론의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고 있으며, 두 번째 ‘영화 연구의 소지형도’는 그렇게 정리한 화두를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영화 비평을 할 것인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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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무지쿠스 [The World in Six Songs] (2009)


호모 무지쿠스

저자
대니얼 J. 레비틴 지음
출판사
마티 | 2009-12-20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음악 본능'이 진화에 관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해답을 줄 ...
가격비교

대니얼 레빈의 [호모 무지쿠스]는 음악과 뇌, 인지과학과 진화학을 넘나들면서 음악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책은 음악을 여섯 종류로 나누면서 이런 음악들이 어떻게 분화되었고 어떤 식으로 음악이 만들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대니얼 레빈은 먼저 음악의 힘을 이끈 문화적 생물학적 힘은 무엇일까 추측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레빈은 단일한 뇌 기제의 진화가 공통의 사고 양식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언어와 예술이 발달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관점 바꾸기와 관계 짓기로 들고 있다. 레빈은 이런 관계의 이해는 음악 감상의 근본을 이루는 핵심이라 보면서 '옥타브 동치성'을 예를 들면서 모든 예술은 인간 경험의 어떤 측면을 표상하고자 하며 선택이 개입한다고 정리했다. 

대니얼 레빈은 그러면서 이런 창조적인 뇌가 자웅선택이 각광받던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자연선택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이런 핵심은 예술가가 살아남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노래와 예술가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 정리한 레빈은 우애의 노래, 기쁨의 노래, 위로의 노래, 지식의 노래, 종교의 노래, 사랑의 노래로 구분한다.

먼저 우애의 노래에서 그는 인간이 노래를 통해 하나가 되고 단결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사회적인 종인 영장류와 그를 이어받은 호모 사피엔스가 거대한 무리를 형성하고 그것을 유지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그 이득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으며 음악도 거기에 레빈은 보고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더 잘 반응하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는 전쟁과 사냥에만 국한되지 않는, 정치적인 구조를 만들어내는데에도 도움을 줬으며 하위 집단의 소외된 사람들을 단결시키는데도 큰 영향을 줬다.

두번째 기쁨의 노래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면 도파민 호르몬 수치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음악을 연주할때 생기는 기쁨을 사회적 유대와 더불어 자신의 감정상태를 알리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이런 점은 상업적인 영역 뿐만이 아니라 지도의 영역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뇌는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진화와 적응의 산물인데 이는 보상과 처벌이라는 시스템으로 발전해왔는데 이것은 뇌의 복잡한 신경화학적인 상태하고 연관이 있다.

세번째 위로의 노래에서는 노래의 특정한 리듬과 선율 모티브의 반복이 예측가능성의 요소가 편안함을 안겨주는 것으로 시작해 자장가의 구조적 특성, 소외된 자들을 위한 노래에서 느껴지는 호르몬 분비의 문제와 심리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레빈은 이런 연대감을 돋보이게 하는 행동이 회복의 과정을 돕는다고 보고 있다.

네번째 지식의 노래는 음악의 구성적인 요소가 사회 전체가 꼭 알아야 하는 필수 지식을 나누고 막강한 기억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지식의 도구로써 음악이 쓰였다고 정리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음악의 최초의 기능 아니였을까 보고 있다. 레빈은 지식은 감정이라 말하면서 지식을 골라 기억하고 전파하는 것은 감정에 따른 판단이라 말하고 있다. 그 점에서 지식의 노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득한 교훈을 최적으로 맞춰진 형식으로 만들어진 노래라 할 수 있다.

다섯번째 종교의 노래에서는 음악적 뇌의 발달과 관점 바꾸기의 일면인 자의식이 영적 열망이 일어나게 만들고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욕망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종교, 제의, 믿음과 연관된 노래가 초창기 인류의 사회 체계를 만들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반복된 동작을 수반한 의식에 공통의 내러티브나 세계관이 결부된 종교의식에서 음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한데 이는 음악의 구조가 종교의식의 행위와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노래에서는사랑과 그 신경화학적 작용이 장기적인 유대와 애착을 위해 세워졌다고 말하며 사랑의 노래는 우리의 감정을 명확히 드러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음악을 감상할 때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 지각의 일부를 이루는데 레빈은 음악이 정직한 신호라는 가설을 차용해 이 사랑의 노래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진화적 생물학적 유산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들은 신경화학적으로 우리를 자극하며 사랑하는 이와 정서적 연대를 이루게 만들게 한다.

[호모 무지쿠스]은 전문적인 이론보다는 사례들과 연구들을 통해 쉽고 편하게 음악과 진화생물학 간의 연계를 통해 왜 음악이 그렇게 인간의 삶에 일부가 되었는지, 그리고 명곡들이 우리를 감동시키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대니얼 레빈이 이 이상의 깊은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음악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생각하기엔 좋은 책 아니였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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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2012)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저자
이명준 지음
출판사
바오출판사 | 2012-07-0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주사파의 조직문화와 행동양태를 낱낱이 파헤치다!한 NL 운동가의...
가격비교

시대의 컴플렉스를 넘어서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는 영광의 1980년대 학생운동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2000년대 학생운동 사이에 낀 1990년대 학생운동 세대의 회고록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 세대는 운동권 후일담으로 많이 다뤄진 바가 있고 2000년대는 더 이상 학생운동 시대가 아니기에 이 책에서 회고하는 1990년대 학생운동은 그들이 어떻게 몰락해갔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공백기의 기록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는 '시스템이 완성된 후'의 학생운동의 모습과 그 사상, 구체적인 행태를 적고 있는 회고록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학파는 NL이고 따라서 PD계열은 간간히 언급될 뿐이다.

책은 신입생이 어떻게 운동권과 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동아리나 학과 미팅으로 신입생들과 접촉을 시작한 선배 운동권들은 곧 그들을 여러 시위와 농활들을 데려가면서 '의식화' 과정을 시킨다. 이 의식화는 NL의 경우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묵묵하게 '운동'이란 대의에 헌신해야 진정한 가치를 이룰 수 있다는게 골자다.

의식화 과정이 끝나면 인간관계가 운동권에 맞게 재구축이 되며 총학과 여러 학내 행사와 투쟁을 통해 하나의 운동권 학생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은 처음으로 돌아가 신입생들과 접촉한다. 이 과정이 제법 상세하고 냉철하게 다뤄져 있기 때문에 의외로 인류학적인 시선이 강한 책이기도 하다. 더불어 왜 비운동권 학생회가 파행으로 운영되는지, 신입생이 NL이라던지 PD을 선택하는 이유도 흥미롭다. 

이 책의 다른 축은 바로 NL의 사상을 이루고 있는 주체 사상이 무엇인가이다. 주체 사상은 한마디로 완전한 주체를 따라 혁명과업을 달성하자는 이야기다. 송두율 교수가 주창한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통해 완성된 주체인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상이다. 민족민중해방 투쟁과 자주국가 설립에 대한 믿음과 신념은 곧 이들이 "미제 꼭두각시에 불과한" 한국 사회, 나아가 미국에 대한 투쟁의 불길을 높일수 있는 주요한 원동력이 된다. 이런 접근은 곧 다른 분야로도 뻗어나가는데, 특히 NL이 문화를 바라보는 시점이 인상깊었다. 사실 루카치 죄르지의 사회주의 사실주의과 극단적인 카프-민족주의 문화론을 교조적으로 답습해 웃겼다는게 정확하겠지만.

물론 이런 과정에서 의문이나 비판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운동권 시스템은 용납치 않는다. 나오는건 오로지 혹독한 비판과 공허하고 소름끼치는 침묵 뿐이다. 이런 시스템의 탄압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운동을 그만두거나 지지부진해지거나 혹은 더 악랄해진다. PD 이야기는 피상적으로 언급되지만 저자는 PD 또한 조금 나을 뿐이지 그 내부체계의 혹독함은 그닥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다. 괴물과 싸우다가 마침내 괴물이 되버린 것이다.

NL의 문제는 한마디로, 이상은 있으되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한국 민주주의가 문제가 많다는 것도 사실지만, NL의 비판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흑백론에 갇혀 있다. 그 사상을 고치려는 시도는 '불경하거나 혹은 반동'으로 낙인찍혀 시스템 내에서 완벽하게 차단된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2012년 통진당 부정경선 역시 이런 고질적인 문제에서 나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한마디로 통진당은 대학 운동권 문제가 고스란히 사회에 진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책에선 다루지 않고 있지만 요새 시끄러운 이석기 사태도 이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것이다. 적어도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한마디로 비판이 부재한 시스템이 만들어낸 비극, 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파시즘과 나치를 떠올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자 역시 운동권 단결 대회를 다루는 부분에서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고결한 이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서글펐다. 세상이 엿같다는건 모두가 공감하고 이들은 그 엿같은 세상을 좀 더 낫게 하기 위해 온갖 발악을 했지만 불행히도 그 발악은 모두 헛발질에 민폐만을 끼칠 뿐이였다. 그리고 엿같은 체제는 그런 발악을 '국가보안법'이란 이름으로 킬킬킬 비웃으며 짓밟을 뿐이고 세상은 나날이 엿같아진다. 저자는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며 어떤 이념이나 새로운 새로운 진보가 한국에 도래하길 바라면서 끝내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은 1990년대 민주화 이후론 이념은 더 이상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게 됬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2000년대 이후 한국 역시 세계적으로 도래한 테러리즘 시대로 들어왔다는 그런 느낌도 있다. 다만 북한 역시 동시에 테러리즘의 아이콘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아직도 머리 위에 북한을 두고 있는) 우리 눈엔 여전히 이념처럼 보이도록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인터넷에서 연재됬던 것을 연재종료 직후 조금 다듬어 부랴부랴 낸 수준이라, 냉정하게 따지면 책 자체의 가치는 '보존' 이상의 가치는 없다. 한 장 정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또 저자도 인정했지만 PD 계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시피하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상당한 수작이며 한국 운동권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떤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좋은 길잡이가 되줄만하다.

P.S.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굉장히 흥미로운 소스라 생각한다. 이걸 가지고 영화화한다면 90년대 쏟아져 나왔던 운동권 후일담과 다른 그런 물건이 하나 나올 것 같다. 실제로 저자도 이것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일종의 해설서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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