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I'm Not There/생각 (39)
20161126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


그 날 모였던 여러분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PS. 1987년 6월 항쟁에 참가한 적이 있는 부모님도 인파수를 보고 놀라셨더라고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환점을 보는 느낌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서울 종로구 세종로 1-68 | 광화문광장
도움말 Daum 지도
0  Comments,   0  Trackbacks
폴 리쾨르의 미메시스 이론의 비판적 재구성: 비행 모델

일관성 있는 이야기란 무질서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일련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하기가 뇌의 운동이 곧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이러한 이해 방식은 이야기는 어떻게 될 수 있는가?

 이야기란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주시하면서 그에 일련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 3부작을 통해 서술성과 시간성의 순환이 악순환이 아니라, 그 양쪽이 서로를 보강하는 건실한 순환성임을 입증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시간성과 서술성의 상호 보강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양자가 선순환을 이루기 보다는 통상 두 가지 상반된 형태로 나뉘어져 고찰되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이 대립을 심리적 시간과 우주적 시간으로 보며 이 둘의 측면만을 바라봤기 때문에 아포리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런 아포리아를 넘어서기 위해 리쾨르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 심리적 시간론과 우주론적 시간론이 서로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시간의 형상화로서의 이야기 하기를 제안하고 있다. 리쾨르는 이 해결책을 세가지로 나눈다.

 1) 심리적 시간과 우주적 시간 사이에 벌어지는 시간성의 첫 번째 아포리아의 해결책은 서술적 정체성이다.

 이야기 된 시간은 현상학적 시간과 우주론적 시간의 틈새 위에 던져진 다리와 같은데, 이 다리를 리쾨르는 제3의 시간을 만드는 <이야기의 재현활동>이라고 부른다. 이 시간은 나름의 고유한 변증법인 역사와 허구의 상호교배적 통합에서 솟아나는 새싹을 가지고 있다. 리쾨르는 동일성과 자기성의 차이를 말하면서 실체적 혹은 형식적 정체성과 서술적 정체성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역사적이거나 허구적인 이야기들이 갖는 카타르시스적 효과로 정화되고 정제된 삶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 분석학은 서술적 정체성 개념에 대한 철학적 탐색을 위한 교육적 실험이 된다. 주체는 자기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하는 스토리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며 역사적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생산했던 텍스트들을 수용함으로써 정체성을 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런 해결책에 대해 한계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서술적 정체성은 일관되어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것이다. 또한 주체의 자기성에 대한 물음을 완전히 규명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행동의 범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보다는 상상력을 구사한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는 윤리적으로 올바름을 주장한다는 데서 이미 윤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2) 단수의 시간과 복수의 시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간성의 두 번째 아포리아의 해결책은 총체성과 총체화이다. 

 두 번째 아포리아는 단수 집합명사로 이해된 비켜갈 수 없는 시간 개념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언제나 미래, 과거, 현재의 세 가지 탈자태로 분리되는데서 생겨난다. 총체화라는 절차는 역사에 대한 사유를 실천적인 차원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이런 불완전한 매개 때문에 두 번 째 아포리아에 대한 이야기의 해결책은 첫 번째 만큼이나 적절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3)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시간의 세 번째 아포리아와 이야기의 한계

시간의 측정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야기를 통한 시간의 재형상화 그 자체의 한계가 있다. 전자의 내적한계는 이야기하는 기술이 고갈될 정도까지 넘어서서 가늠할수 없는 것에 근접하는 것을 뜻한다면, 후자의 외적 한계는 나름대로 시간을 말하려고 애쓰는 다른 종류의 담론들로 인해 이야기 장르가 넘쳐나는 것을 뜻한다.

 리콰르는 이 세 가지 아포리아를 이야기를 통해 해결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들 각각의 서술적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요구한다고 주장해야 한다”면서 긍정적으로 결말을 짓고 있다.

 리콰르의 이야기의 철학과 미학은 이렇듯 이야기의 시간의 모순성 간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를 풍부하게 포착하고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데 줄거리의 다양한 분기, 개념적인 총체화와 우발적인 현재 사이의 불완전한 매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불확정성과 멈추지 않는 재형상화의 넘쳐남과 같은 한계들이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한 형상화와 고차의식의 이야기가 비록 일정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 이야기 하기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뇌 자체가 무의미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고 투명한 의식 장치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뇌 자체가 무의미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고 투명한 의식 장치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환경과 몸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조절하고 매개하는, 환경 생태학과 몸의 생리학에 의해 이종적으로 제약 받고 있는, 한계를 내포한 중개자라는 이유와도 합치할 것이다.

 이렇게 인지과학적으로 재핵석된 이야기의 시학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뇌의 이야기-하기와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이야기-하기를 하나의 통합된 틀 속에서 이해하는데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등장한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예시로 든다. 미메시스는 ‘고귀한 행동의 재현’으로 서술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극의 작중 인물들에 수행된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 비극 모델을 불협화음으로 간주하며 화음적으로 보이는 것도 실은 불협화음이 모여서 이뤄진 것으로 본다. 화음 안에 불협화음을, 인과적인 논리를 가진 줄거리 안에서 예기치 않게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적인 것을 포함하게 한다는 것, 윤리학에서 대립되는 개념들이 시에서는 겹합된다는 것은 “행동의 재현”이라는 미메시스가 다중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슨 리쾨르가 보기엔 미메시스는 허구적인 공간을 여는 단절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메시스 (1)은 시작 창조가 출발해야 할 상류로서, 모든 인간의 행동 중에서 재현의 대상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 실천에 관한 윤리학의 영역으로 “전-형상화 단계”로 볼 수 있다. 즉는 행동의 뜻을 체험된 시간의 층위에서 풀어보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주목할 가치 있는 행동의 사슬인 뮈토스를 구성하는 창조적인 재현 행위가 바로 미메시스 (2)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뮈토스는 온갖 기대에 반해 행동이 가치 있는 사람을 불행 속에 던지는 방법들에 대한 탐험으로서 행동이 어떻게 미덕의 실천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가를 가르치는 윤리학과 대위법을 이루지만, 동시에 행동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그 윤리적인 특징만을 빌려온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형상화 단계”로 지칭되며 미메시스 (1)에서 이해된 행동의 뜻을 줄거리고 꾸며, 실제로 이야기를 옮기는 과정이다. 형상화와 뮈토스는 이때 일치한다.

 한편 미메시스 (3)은 설득력 있는 사실임직함에서 비롯되는, 선택의 선택의 선택이라는 3차선택에 의한, “배우는 즐거움”과 관계되어 있다. 이는 “재형상화 단계”로서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 세계의 교차지점의 형성이다. 즉, 독자가 이야기의 뜻을 풀어 삶의 뜻을 찾아가는 작업이 이뤄지는 단계이다.

 이렇게 미메시스 (1)이 가리키는 현실 세계가 미메시스(2)를 통해서 형상을 갖추고 미메시스(3)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재형상화를 통핸 우리의 체험은 그 깊이를 드러내고 방향성을 변형시킨다.

 리쾨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재해석하여 시간의 형상화를 통해 불협화음을 내표한 화음을 만드는 이야기 하기의 행위를 <윤리적 행동(프락시스)의 선별 -> 예술적 창작->작품-관객이 공동 구성한 문화의 세계>라는 절차로 압축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 하기의 일반 이론은 그 점에서 상류미메시스 (1)->시간의 형상화를 미메시스(2)->포이에시스통한 <삼중의 미메시스>를 통해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일반이론이라고 함은 단지 허구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역사 서술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이야기 일반에 대한 이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역사 서술에 대한 일반 이론을 미메시스적인 관점으로 따라가보자면 역사가의 역사 서술은 재현할 가치가 있는 행동들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일정한 줄거리로 다시 엮는 선택의 선택, 마지막으로는 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이 그로부터 어떤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의미를 다시 해석해내는 선택의 선택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삼중의 미메시스라는 이야기의 일반이론은 인지생태학적인 이야기 이론과 비교해보면, 시간성과 서술성의 순환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이야기의 일반 이론은 인지생태학적인 이야기 이론과 달리 불협화음을 내는 화음을 만드는 반전을 가진 줄거리의 구성을 통해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현실과의 일시적인 단절을 통한 현실과의 재연결이라는 이중의 측면이 잘 드러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지생태학적 설명을 능가 하지만 동시에 단절의 측면을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삼중의 미메시스는 물줄기보다는 비행의 모델로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다. 비행 모델은 단절과 연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비행과 착륙이라는 과정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단절, 즉, 비행의 목적 역시 명확하게 해주며 단절의 위험을 잘 보여줄수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정신 기호와 가독 기호: 이미지와 사유, 보기와 소리

시간 기호는 또한 정신 기호와 가독 기호인데 사유의 이미지와 독해되어야만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정신 기호의 개념을 통해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하는데 이 질문엔 시네마와 사유 간의 관계라던가 이미지가 어떻게 정신을 감화하는가, 정신은 무엇이고 사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담겨 있다. 들뢰즈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이미지를 읽고, 보고, 들어야 하는가를 위시한 몇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고 보그는 보고 있다.

고전적 사유의 이미지

예술사가인 엘리 포르의 시네마 예찬은 진화하는 사회의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시네마는 운동과 지속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카메라의 비인간적인 눈을 통해 지각되지 않은 세계의 특징들을 우리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포르의 시네마에 대한 신념은 기계적으로 생산된 움직이는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정신에 충격을 주고, 비반성적인 정신적 습관의 지적 자동 작용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추긴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런 관점이 고전적 시네마의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정신적 자동 기계”라는 개념을 차용하고 있는데-스피노자는 정신도 인과성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관념들의 고유한 형성과 접속은 물리적 법칙의 필연성과 동등한 필연성을 따라야 한다라고 보고 있다-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의 반응이 지닌 비자발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더 나아가 현대 시네마와 시간-이미지로 전환할 때, 그 용어를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사유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에이젠슈타인의 글로 돌아간다.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글에서 개별적인 쇼트들 속에는 충돌과 갈등, 도표의 방향들 척도 부피 크기의 충돌들이 있고, 몽타주 속에는 쇼트들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몽타주 충돌에 의해 생성된 개념은 전체의 개념, 즉 각각의 폭발적인 쇼트들을 결합하는 유기적 전체성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사유에 대한 충격 효과를 가지고, 사유가 전체를 생각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생각하도록 한다.” (IT 206; 158)

 하지만 이미지에서의 사유로의 이런 운동 외에 또한 사유에서 이미지로의 보완적인 운동이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에서의 파토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에이젠슈테인이 감각적 사고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은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 상호간의 결합적인 친화력을 통한 사유이다. 예술은 논리적 사유를 이미지들과 형상들의 감각적 사고와 조합한다.

 만약 영화의 유기적 전체라는 개념이 개별적인 폭발적인 쇼트들과 쇼트에서 쇼트로의 도약의 파토스에 의해 생성된다면, 전체에 대한 부분들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개별적 부분들은 전체의 실존을 전제한다. 하나의 폭발적인 쇼트로부터 다음의 폭발적 쇼트로의 도약은 파토스를 생성시키고 관객에게 충격을 주입하지만, 이런 형상으로 보기 위해서는 감각적 사고의 무의식적인 과정들을 통한 결합을 필요로 한다. 두 이미지의 이러한 형상적 결합의 형성과 함께 두 이미지의 감화적인 힘은 증가된다.

 첫 번째 과정은 이미지에서 개념으로의, 부분들에서 전체로의, 충격-파토스에서 사유로의 운동과 관련이 있다. 서로 두 이미지의 상호간의 결합을 통해 각 이미지의 감화적 추동력은 증가된다. 두 번째 과정에서 운동은 개념에서 이미지로, 전체에서 부분들로, 감각적 사유에서 배가된 파토스-충격으로 이동하며 발생한다.

 모든 영화는 “우리를 이미지들로부터 의식적 사유로 끌어올리는 감각적 충격”을 포함하고, “그 다음 우리를 다시 이미지로 되돌려 보내고 다시 감화적인 충격을 우리에게 주는 형상을 통한 사유”를 포함하는 회로를 확립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성공적인 영화는 강력한 감정과 비판적 인식의 유기적 통일성 속에서 이미지에서 사유로의, 사유에서 이미지로의 두 가지 상반된 운동을 혼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영화는 행동을 고취해야 하고, 비평적 인식은 혁명적 의식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들뢰즈는 여기서 이미지와 사유 사이의 세 번째 관계를 보는데, 이미지에서 사유로의 운동의 관계가 아니라 전자와 후자의 동일성의 관계를 본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대응을 설정해 인간의 행동에 따라 새로운 특질들을 얻고 변하는 걸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와 이미지의 동일성,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감각-운동 도식의 기본이 되는 통일성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유기적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결합하는 감화적인 충돌과 도약으로 된 변증법적 시네마를 주창했지만 들뢰즈는 그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에이젠슈타인의 이론이 고전 시네마에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네마 전체에서 우리는 “탁월한 의식화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전체와의 관계, 이미지들의 무의식적 펼침 속에서만 형상화할수 있는 사유와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 인간 사이, 자연과 사유 사이의 감각-운동 도식적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외부의 사유

고전 시네마의 사유 이미지에서 중심적인 것은 감각-운동 도식의 통합적인 현존인데, 감각-운동 도식은 사유와 이미지 사이의, 인간과 세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가능케 한다. 현대 시네마에서의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가 세계와 우리 사이의 관계의 단절을 선호한다. 

 탈접속된 이미지들에 의해 제기되는 분명한 의문은 “어ᄄᅠᇂ게 그것들이 재접속 될 수 있는가?” 인데 고전 시네마에서는 이미지들의 자연적인 조화, 극성, 대조를 통해 연결된다. 그 안에서 이미지들은 선행하는 이미지와의 일정한 친화성에 따라 다음 이미지를 뒤따른다. 하지만 감각-운동 도식과 함께 이러한 내적 독백은 붕괴되고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고전 시네마에서 이미지들 간의 틈새는 그 이미지들의 기능이고, 하나의 이미지가 종결하는 지점, 혹은 한 이미지가 시작하는 지점이지만 현대 시네마에서 그 틈새는 근본적이다. 하나의 일정한 이미지와 더불어 현대 시네마의 도전은 시작되고 둘 사이의 틈새를 유발할 다른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현대 시네마에서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는 직접적으로 흑색 스크린과 백색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 틈새는 표준적인 할리우드 편집의 전형을 위반하는 현대 시네마의 거짓 연속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각 이미지들과 청각 이미지들 간의 불연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현대 이미지는 자의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접속은 상식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틈새, 즉 무리수적 절단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이의 간격이라는 개념이 이미지들과 사유 간의 현대적 관련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전적인 사유의 이미지는 개념과 이미지의 동일성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서 개념으로 그리고 개념에서 이미지로의 복합적인 운동을 수반한다. 고전 이미지들은 “연합, 근접성, 유사성, 대조 혹은 대립의 법칙들”에 의해 수평축을 따라 연결되는데, 통합하는 감각-운동 도식 속에서 이미지들의 자연적인 친화성이 내적 독백의 형상적 언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즉 고전 시네마에서 전체는 열린 전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시네마에서는 전체는 외부다. 외부는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 즉 틈 혹은 간격 속에서 표명된다. 들뢰즈의 이런 선언은 외부와 틈새 사이의 대립이라는 면에서 현대 이미지의 수직축과 수평축을 분명하게 구별한다는 점에서 일견 모순되어 보일수도 있다고 보그는 설명하면서도 틈새가 현대 이미지의 수평축과 수직축에 공통점이 있다는게 들뢰즈의 요점이라고 설명한다. 즉 슴새는 이미지들을 수평적으로 접속하고, 수직적으로 그것은 외부를 표명한다. ‘외부’는 고전적 전체의 현대적 대응물, 다시 말해 틈 혹은 간격이지만 또한 생성적인 힘으로, 즉 구성적인 “이미들의 둘 가운데”로서 역설적으로 착상된 전체다. 현대적 전체는 “블랑쇼가 ‘외부의 분산’의 힘 혹은 ‘거리 두기의 현기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현대 시네마에서 ”전체는 틈새 속으로 통과하는 외부의 역량“인 것이다.

 이런 틈새 속으로의 외부의 역량 혹은 힘의 이행은 사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전 시네마에서 이미지들의 충돌은 사유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취하게 하면서 전체를 사고하고 사유에 충격을 준다면 현대 시네마는 사유가 일련의 연접적인 유리수적 좌표 속에 그 충격을 동화시킬 수 없는 채로 그렇게 한다. 현대 시네마가 사유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외부에 대해서, 즉 틈새 속으로 이행하는 분산적인 거리 두기의 힘에 대해서다.

 정신적 자동 기계

“외부의 사유 그 자체” “비사유 혹은 사유 내부의 사유 불가능한 것” “사유자 속의 이질적인 사유자”, 이 모두가 비 개인적이고 탈 실재화된 ‘다른’ 사유, 다시 말해 정신적 자동 기계의 사유를 증명한다. 들뢰즈는 이런 모티프에 대한 확장된 탐험으로서 드레이어의 영화를 해석하면서 미라를 선택한다. 미라와 같은 정신적 자동 기계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현대 영화에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의 재현이 아니라 사유의 양식으로서의 그것의 활성화이다.

 이때 일견 미라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단순히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장소 혹은 어떤 내부 세계보다 더욱더 내부인 어느 지대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그들은 특정한 화자 혹은 관점으로부터 탈접속된 언어, 즉 일종의 자유 간접 화법을 언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자유 간접 화법은 현대 시네가 열망하는 일반적인 “자유 간접 비전”의 언어적 상응물이다. 고전 시네마의 상식적인 시퀀스들 속에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내적 독백의 부재는 안정된 관점으로부터 탈접속되며 생각하기의 다른 방식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현대 시네마의 이미지들은 정신적 자동 기계의 자유 간접 생각하기의 이미지라 할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자동장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일단 정신적 자동 기계는 “사유를 넘어서는 사유”라는 점에서 관객 속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적 자동장치의 자유 간접 보기와 생각하기는 이미지 속에, 스크린 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정신적 자동 기계는 내부와 외부이고, 관객 내부뿐만 아니라 이미지들의 외부 양쪽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지 세계 속에서는 그런 내외부의 분명한 차이가 없을뿐더러 분리되어 확인할 수 있는 정신에 결코 속하지 않는다.

 이미지 세계는 정신적 자동 기계의 뇌 세계이다. 들뢰즈가 현대 이미지의 “두뇌적 구성 요소들”을 열거할 때 그는 단순히 틈새의 세 가지 외관들, 즉 점-절단, 재-연쇄,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이라는 목록을 작성하는데, 그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이 뇌와 스크린의 동일성을 명백하게 만든다. 점-절단, 혹은 무리수적 절단은 외부의 표명으로서의 틈새이다. 그것은 무리수처럼 둘 중 하나에도 속하지 않고 두 실체를 분리한다는 점에서 ‘무리수적’이다. 재-연쇄는 “그리고”로서의, 차이의 비-자의적이지만 특별히 지정하지 않은 관계들에 따른 이미지들의 수평적인 접속으로서의 틈새이다. 마지막으로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은 가시적으로 되는 틈새이며 위상적이다. 왜냐하면 그것 속에서 외부와 내부가 통합되기 때문이다.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와 함께 인간과 세계의 결합은 와해된다. 에이젠슈테인의 도식에서 사유와 이미지는 행동-사유에서 통합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궁극적으로 비무관심적이고,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통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시키는 감각-운동 도식의 부재 속에서 세계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며 세계에 대한 믿음조차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대 시네마의 목표들 중 하나는 세계에 대한, 어떤 다른 세계 혹은 이 세계의 어떤 미래의 유토피아적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현대 영화감독들은 세계와 인간을 과거의 시트들, 현재의 첨점들, 거짓의 역량들의 시간 기호들을 통해 접속한다. 각 영화의 시간 기호들은 일종의 문제를 구성하는데 들뢰즈는 이 문제를 정리와 구별한다. 정리는 공리적인 체계화가 가능한 닫힌 집합의 요소들이고, 문제는 외부에서부터 간섭하는 사건, 그리고 그것에 의해 후속의 분석의 조건이 구성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선택을 모든 문제의 기본적인 요소라 보며 나아가 믿음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고, 믿는다는 것은 매 순간 선택하는 자유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각 집합의 시간 기호들은 선택과 관련이 있고, 그 선택의 긍정은 믿음의 행동이다. 그러나 시간 기호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문제들은 아니다. 시간 기호들은 사유와 이미지들 사이에의, 정신과 세계 사이의 접속을 설정하지만, 단지 정신적 자동 기계의 자유 간접 시각을 통해 창안된 접속만을 설정한다. 그것들은 이 세계에 대한, 그러나 다르게 보이고 생각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한다.

 만약 우리가 들뢰즈가 사유의 이미지들에 대해 다루는 방법을 요약하려고 한다면 1) 이미지-사유 관계들, 2) 정신 기호들, 3) 정신계, 그리고 4) 정신 기호들과 시간 기호들 사이의 관계로 나눌수 있을 것이다.

 1) 이미지와 사유 관계들: 고전 시네마는 이미지와 사유의 세 가지 관계들을 설정한다. 첫 번째 운동에서 이미지들의 충격은 통합하는 전체의 개념을 생성시키고 두 번째 운동에서 감각적 사고의 내적 독백은 각 이미지가 전제하는 전체로서 역할과 표현으로 출연하며 세 번째 운동에서 세계와 정신은 감각-운동 도식의 통합하는 힘을 통해 합쳐진다. 대조적으로 현대 시네마는 사유에 대한 세 가지 새로운 관계들을 발전시킨다.

 2) 두개의 축은 사유의 고전적 이미지를 조직화하며 두 종류의 고전적 정신 기호가 있다. 첫 번째 종류에 따라 이미지들은 유리수적 절단들을 통해 연결되었고, 이런 조건하에서 확장 가능한 세계를 형성했다. 다른 종류의 정신 기호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의 시퀀스들의 적분을 표식하고, 뿐만 아니라 확장된 시퀀스들 속에서의 전체의 미분을 표식했다. 또한 현대 시네마의 정신 기호들은 두 분류로 구분되는데, 정신 기호들로서 비연쇄적 이미지들을 가진다.

 3) 현대 정신 기호들은 단일한 정신계, 세 가지 대뇌적 구성 요소들을 가지는 뇌의 세계를 형성한다. 점-절단은 ‘무리수적’이고 재-연쇄는 ‘확률적’이며,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은 ‘위상적’이다.

 4) 정신계의 기호들은 또한 시간 기호들이다. 외부의 수직축과는 일반적인 문제로서의 일정한 시간-이미지가 상응한다. 들뢰즈가 연속적인 것과 불연속적인 것을 조정하는 고전과 현대 시네마의 방법들을 대조할 때, 그는 “전체가 틈새 안으로 이행하는 외부의 역량이 될 때, 그것은 시간의 비-연대기적 관계들에 따라서 무리수적 점들의 시퀀스와 일치하는 시간 혹은 연속성의 직접적 제시”라고 말한다. 외부의 역량이 틈새 속으로 이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비- 연대기적 시간의 주어진 형식의 설명 불가능하고 결정 불가능하며, 혹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문제라는 사건이다. 그리고 틈새들의 재연쇄는 파손된 연대기적 시간의 분산된 점들을 상호간의 소통 속에 설정하는 역설적인 연속성이다. 

 무언의 가독 기호와 가청적 가독 기호

 모든 시간 기호는 정신 기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가독 기호이다. 들뢰즈가 가독 기호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모호하다고 보고 있다. 그 용어는 ‘’표현 가능한‘ 것의 비유형성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용어인 렉톤에서 차용한 것이다. 하나의 명제의 렉톤이 그것의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가독 기호는 추정상 외부적 대상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내재적으로 파악될 때의 이미지를 지칭한다. 이미지를 내재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시지각 기호로, 즉 감각-운동 도식과 그것의 외부적 결합들로부터 탈접속된 이미지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들뢰즈가 이미지를 읽어야만 한다고 말할 때 이미지 해석 뿐만이 아니라 보기와 소리의 내적 관계를 통해 생산된 시간-이미지의 차원 혹은 역량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 ‘가독 기호’는 이미지가 렉톤처럼 그것의 외적 대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보기와 소리에 대한 그것의 내적 관계들에 의해 독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고전 시네마에 가독 기호가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 고전 가독 기호에 대해 무성 영화의 자막과 유성 영화의 소리와 연계시켜 보고 있다. 무성 영화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세계의 자연성의 무엇인가를 보유하는데 그 자연성은 작용과 반작용의 영역으로서, 상호 작용하는 힘들간의 물질적인 접속들의 영역으로서 그것의 물리적 존재에 의해 특성화된다. 단어는 자막 뿐만이 아니라 이미지들 속에서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무성 영화들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은 보여지고 읽혀지는데, 가시적 세계는 그것의 자연성을 보유하고, 화법은 간접적 양식으로 그 자체를 표명하게 된다.

 이렇게 구축되어왔던 자막과 시각적 이미지의 세계는 유성 영화의 음향의 출현과 함께 달라졌다. 발화를 들을 뿐만 아니라 읽게 된 것이다. 음향은 “시각적 이미지의 새로운 차원, 새로운 구성 요소”가 되며 시각적 이미지는 어느정도 탈자연화된다. 무성 영화에서 언어는 행동에 종속적이며 구두 교환은 간접적으로 결과적인 상황까지 이동하는 행동을 통해 단지 암시될 뿐이다. 하지만 유성 영화에서는 화법의 특유한 특징인 사회성과 인간적 상호 작용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단계에서 화법은 전제 조건적인 정황들과 결과적인 상황에 의해 상대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유한 리듬과 형식을 가진다.

 이런 화법적인 사회성의 모델은 상호 교환, 화제 개시, 그리고 교환 종결을 위한 제한 없는 규칙들을 가지는 대화, 때로는 논리적으로 서로 연관되고 서로 연관되고 또 어떤 때는 서로 아무런 분명한 관련이 없는 자유-형식의 연속적인 토픽들을 가지는 대화이다. 영화에서 음향의 도입과 함꼐, 대화와 같은 그러한 기초적인 사회성의 형식은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더 이상 발화는 선행하는 조건들과 후속 결과들의 간접적인 기능으로서만 표현되지 않는다. 지금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지닌다. 결과적으로 발화 행동은 “자율적인 순환, 확대, 그리고 진전을 통해, 상화간에 냉담하거나 분산되거나 혹은 무관심하거나간에, 개인들 혹은 그룹들 간의 상호작용을 창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시각적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인물들의 의도들, 동기들, 암시들의 시각적 기호들은 그들의 얼굴들과 몸짓들 속에 독해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음향의 도래와 더불어 인물들은 거짓말할수 있고, 속일 수 있고, 왜곡할 수 있으며, 잘못 말할 수 있고, 빗대어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음향은 시각적 이미지를 카메라가 잡히지 않는 곳에서의 음성으로 팽창하고, 주변 환경의 소음은 프레임 너머로 그리고 화면 밖 영역으로의 공간의 연속을 나타낸다. 

 들뢰즈에 따르면 음악은 열린 전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고전 운동-이미지에 특별한 영향을 미친다. 들뢰즈는 한편으로 소리 연속체는 시각 이미지를,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화면 밖 영역에 대화, 음향 효과, 음악을 포함하는 연속체를 수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은 ‘이질적인 신체’의 ‘특수한 자율적인 역량’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의 관계는 기능 면에서 화면 위 장면의 음향적 구성 요소에서부터 영화의 리듬들에 대한 조화로운 강화를 거쳐, 자율적인 ‘이질적 신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친 가능한 영역들의 전영역을 포괄한다. 이런 관계들의 연속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열린 전체와 개별적 이미지들을 연관시키는 접는 적분과 펼치는 미분의 표현적 상호 작용에 음악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음악은 시각적 운동-이미지와는 구별되는데, 왜냐하면 운동-이미지와 달리 음악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즉각적 이미지 속에서 열린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시각적 이미지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이고 음악적이며, 운동보다 측량할 수 없는 의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음악의 추상적이면서도 지각 가능한 “즉각적 이미지”는 열린 전체의 직접적인 제시인데, 그 자격으로 그것은 하나의 자율적 실체로서 시각적 이미지들과 반응하고, 그 이미지들을 반향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공통된 구조와도 무관하게” 그 이미지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현대의 가독 기호

 따라서 무성 영화에서 발화는 삽입 자막에서 읽혀진다. 그리고 화법은 언제나 간접적이다. 고전 유성 영화에서 화법은 직접적이고, 시각적 이미지에 기여하는 구성 요소가 된다. 무성 영화들의 시각적 이미지는 그것의 자연성을, 그 결과로 읽혀져야 하는 것이 된다. 고전 유성 영화는 음악 속에서 잠재태적으로 자율적인 요소, 즉 전체와 일치하지 않고 그 전체에 대한 간접적인 시각적 제시를 동반하는 직접적인 음향적 제시를 확인한다. 하지만 이런 자율성은 오직 상대적인데 음악은 시각 이미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오직 현대 시네마에서만 시각과 음향은 자율적인 요소들이 된다. 그런 시네마에서 화법은 직접적이지도 또한 간접적이지도 않으며, 자유 간접적이다.

 현대 감독들이 자유 간접 화법을 창안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시네마의 자유 간접 화법은 순수 발화 행동이고, 표준 어구로부터 그리고 상식적인 세계의 시각적 이미지들과의 연쇄로부터 ‘탈연쇄한’ 화법이다. 동시에 화법이 고립적으로 되고, 그것의 일상적인 가시적 좌표들로부터 분리될 때 시각적 이미지는 고유한 낯섦에 도달한다.

 현대 시각적 이미지들과 소리 이미지들은 ‘읽혀져야만’ 하는데, 표준적인 맥락들로부터 벗어나고 탈접속된 이 이미지들이, 일정한 이미지들의 출현에 앞서서는 예상될 수 없는 방식으로, 재접속되고 재연쇄화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들뢰즈는 현대 시각적 이미지의 “고고학적, 층위학적, 구조학적인” 본성을 풍경의 감각을 물질화하면서 생기는 거라 보면서 진부한 시각적 표현들을 벗어나는 이미지를 창안하고, 그것에 의해 “지질학적 지질구조학적 역량”에 의해 구체화한 이미지들 속에서 감각을 물질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현대 시각적 이미지가 감각을 물질화하는, 그리고 다른 이미지들과 다양한 재연쇄화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다층화된 힘들의 지대라는 점에서 그것은 고고학적 층위학적 지질구조학적이다. 그리고 각 이미지의 접속은 관객이 이미지들의 특정한 계열 속에서 현실태화 하는 재연쇄화에 의해 이미지들을 읽도록 한다. 시각과 언어의 분리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지질학적 층 혹은 토대들을 드러내는 반면, 발화 행동 혹은 심지어 음악의 동작은 영묘한 창시자의 역할을 지니게 한다.

 현대 시네마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은 무리수적 절단의 틈새들을 통해 재연쇄화되고, 음향 역시 이러한 절들과 관계가 있다. 현대적 시각 이미지들은 언제나 하나의 극한, 즉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이 보는 것, 그리고 이미지들의 재연쇄화가 가시화하는 것의 극한을 향한다. 마찬가지로 순수 발화 행동의 자유 간접 화법은 통레적인 코드들이 분절하는 것의 극한을 향한다. 이야기 꾸미기는 되기이고, 극한을 넘어서는 변형적인 운동이다. 그것은 음성학 통사론 의미론과 같은 언어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변주 속에 설정하는 언어의 용례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현대적 시각 이미지들 속에서 비전은 “지가시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오직 보여질수 있는 극한으로 이르게 된다.”

 비전과 발화는 내부적으로 한정된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또한 그 둘 사이의 극한, 즉 보기가 말하기와 다른, 그리고 말하기가 보기와 다른 지점으로 밀어붙인다. 그 극한은 두 가지를 분리하지만 그렇게 행할 때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맹인, 티레시아스적인 비전과 실어증 환자 혹은 기억상실증 환자의 그것인 목소리 사이엔 통약 가능성은 없고 오로지 둘 사이에는 상보성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보적인 관계를 비 자의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각 영화가 하나의 특정한 문제 혹은 하나의 집합적 문제에 중심을 두는 것, 즉 시각적 이미지들의 재연쇄화, 발화 행동의 재연쇄화, 그리고 둘 사이의 재연쇄하는 통래를 생산하는 생성적인 차이이다. 

 만약 고전 시네마에서 소리 연속체가 화면 위의 사건들, 화면 밖 영역의 음향 그리고 반사적인 보이스-오버와 음악의 절대적인 화면 밖 영역을 접속한다면, 그 연속체는 현대 시네마에서는 다른 형식을 취한다. 현대 시네마들에서 발화 행동의 생소함은 말하기를 흥얼거리기 혹은 노래하기의 음악적 차원으로, 혹은 형성되지 않은 음향과 소음의 소리 영역으로 이행하도록 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 시네마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발화의 분리가 단지 시각과 모든 소리의 보다 더 큰 분리의 한 양상이라 볼 수 있을것인데, 모든 현대 영화가 화면 이미지들의 시각적인 영화와 발화 음악 소음의 소리적 연속체에서 형성된 소리의 음향적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가독 기호들은 음향과 시각의 이접의 역량을 개발하는데 이는 둘 사이의 생성적인 이접으로부터 발생하는, 상보적이고 전체화할 수 없고 비대칭적인 통래 속에서 다시 속박되어야 한다.

 시네마, 연극, 텔레비전에 관한 각서

 연극과 텔레비전은 시네마와 분명한 관계를 가지는 두 가지 매체인데, 들뢰즈는 보기와 소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연극과 텔레비전을 상호 비교하는 하나의 방법을 찾는다. 바로 대화를 포착하는 방법이다. 시네마는 연극 무대에서는 이용할수 없는 방식들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말을 제시하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고 화면 밖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카메라 쇼트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음향 효과를 통해 주위 공간을 연장해 대화의 공기를 보여주거나 통합시킨다.

 한편 영화와 텔레비전은 훨씬 미묘한 관계라 할 수 있는데, 텔레비전의 주요한 특징들 중 하나는 그것의 청각적 시각적 구성 요소들의 분리 가능성이라 본다. 들뢰즈는 텔레비전의 발달이 현대 시네마의 자율적인 요소들로서 소리와 보기를 처리하는 법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텔레비전 이미지는 전자 이미지이고, 진정한 화면 밖 영역을 가지지 않지만 대신에 그것들을 회전시키는 역량과 같이, 가역적이고 이중으로 인화가 불가능한 오른쪽 면과 반대쪽 면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영속적인 재조직화의 대상인데, 그것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는 선행하는 이미지의 어떤 지점에서든지 그 지점에서 발생할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텔레비전 이미지와 현대 시네마 이미지는 다르다고 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위시한 정보 기술은 창조성을 위한 가능성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제공하지만 시네마적인 관심은 최종적으로 감독들을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기술보다는 미학에 의존한다. 즉 텔레비전은 그 특성으로 시네마에게 창조적인 자극을 가하지만 시네마는 궁극적으로 텔레비전 이미지의 ‘성격’을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깊은 차이가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들뢰즈와 시네마]: 3장 열여덞 개의 기호들

들뢰즈는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법에 대한 시도라고 보았다. 실제로 [시네마 1]의 많은 부분이 운동-이미지와 관련된 기호들이 등장한다. 보그느는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정-이미지로 나눠지는 운동-이미지들은 들뢰즈의 시네마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고자 한다.

퍼스와 기호

들뢰즈가 지목한 학자는 베르그송과 찰스 샌더슨 퍼스다. 퍼스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이미지들의 체계적인 분류를 가장 철저히 시도한 기호론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보그는 들뢰즈가 정확히는 기호의 비언어적 이론에 대한 헌신을 높게 산다고 보고 있다. 소쉬르와 퍼스는 각자가 독립적으로 기호들에 대한 일반 이론의 개념을 개발했는데, 프랑스 시네마 이론가들은 기의와 기표 사이의 언어적 대립에 그것의 기초를 두는 소쉬르적인 접근 방법을 선택했지만 들뢰즈는 언어적 기호로부터 시각적 기호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대안을 제안했다. 들뢰즈는 이 와중에 서사를 시간과 공간 구조의 부차적인 산물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서사의 규칙성과 계속성의 가능성의 조건은 인간 행동의 유효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조직된 상식적 공간-시간의 규칙성과 계속성이다. 우리의 실용적인 세계는 우리의 필요, 욕망, 의도, 계획에 의해 조작된다. 그러므로 ‘감각-운동 도식’은 ‘경로적 공간’이라는 상식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이것을 서사를 만들어낸다. 들뢰즈는 감각-운동 도식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고전 시네마하고 현대 시네마의 차이를 찾아내며 비서사적과 비언어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퍼스의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들뢰즈는 퍼스의 기호학 이론에서 두 가지의 한계성을 발견하는데 첫 번째로는 퍼스가 궁극적으로 비언어적 기호를 언어적 기호의 하위를 둔다는 점과 두 번째로는 세 가지 근본적인 이미지들의 기원에 대해서도, 모든 다른 이미지들을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로서의 지각-이미지가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들뢰즈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퍼스가 아니라 베르그송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들뢰즈는 퍼스의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의 범주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는데, 순서대로 “단지 그 자체만을 지칭하는 것, 특질 혹은 잠세력, 순수한 가능성”, “단지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서만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 존재, 작용-반작용, 노력-저항”이며, 삼차성은 “단지 한 사물을 다른 것과 관련시킴으로써만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 관계, 법칙, 필연성”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들뢰즈는 퍼스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며 베르그송의 세 가지 형태의 운동-이미지들을 개발하고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일차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감정-이미지와 퍼스의 일차성 사이의 평행을, 행동-이미지와 이차성 사이의 평행을 관찰한다. 지각-이미지를 삼처성과 연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들뢰즈는 삼처성의 범주와 상응하는 네 번째 운동-이미지, 관계-이미지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가정한다. 그리고나서 들뢰즈는 퍼스의 분류 도식 밖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종류로서 지각-이미지를 다룬다. 들뢰즈는 이렇게 나눠놓은 영도성,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에다 두가지 추가적인 유형들을 확인한다. 감정-이미지와 행동-이미지 사이의 중간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이미지와 관계-이미지 사이의 중간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그것들의 연역이 지각의 분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들뢰즈는 퍼스의 개념이 아니라 지각에 대한 베르그송의 설명을 여섯 가지 유형의 운동 이미지와 연결한다. 지각 이미지, 즉 살아 있는 존재의 지각의 특징이 되는 그 이미지는 그것의 발생과 우선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각 이미지는 세 가지 방식으로, 즉 그것의 발생에 의해, 간격의 기능으로서의 그것의 구성에 의해, 그리고 전체의 기능으로서의 그것의 구성에 의해 분화될 수 있다. 

지각 이미지

고전 시네마에서 우리는 어떤 시각적 이미지가 주관적 관점의 재현으로 취급될 때 그 시각적 이미지를 하나의 지각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주관적 이미지를 주목할만 하게 만드는 것은 상응하는 ‘객관적’ 이미지, 즉 ‘정상적으로’ 보여질 때의 샹들리에 혹은 복도와 그 주관적 이미지의 차이라고 모두가 믿어왔다. 하지만 이는 카메라의 시점이 쇼트마다 변화되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보그는 지적하고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자유 간접 화법’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직관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 자유화법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두 상호 연관적 주체들의 분화”이며 “주체화의 두 가지 분리할 수 없는 행동들을 동시에 수행하는 언표 행위의 배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주체화 과정, 혹은 하나의 이질적인 체계 속에서의 두 주체 입장들의 생성을 통해 파졸리니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개념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어내고 들뢰즈는 이 대립에 주목한다. 객관적 ‘사물들 속의 지각’ 안에서 ‘물질 속의 눈’은 단일한 진동적 유동의 탈중심화된 파동을 따라가는데, 들뢰즈는 이런 흐르는 지각 이미지를 유상체 (레움)이라고 불렀다. 이 유상체는 사물들 속에서의 지각을 향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그 지각이 충분히 표명되는 것은 단지 세 번쨰 지각-이미지, 즉 그램 속에서이다. “즉 물질 속에서의 기체적 지각으로서 물질의 작용과 반작용이 얼마나 멀리 확장되든지 간에, 그것이 작용을 가하는 모든 지점들을 공간 자체 속에 있는 그 어떤 지점도 다 지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정도” (IM 117; 81) 인 발생 기호인 것이다. 이렇게 단일하고 고정된 비결정성의 중심에 의해 결정된 지각과 사물들 속에서 보편적 지각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와 키노 아이를 다루는 글에서 잘 나타나는데, 어ᄄᅠᆫ 시간적 질서든지 그것으로 우주의 모든 지점들을 비교하고 연결하는 수단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그 이상으로 “이미지의 발생적 요소, 즉 운동의 분화적 요소”와 이를 통한 운동의 생성적 세포라는 베르토프의 발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시네마가 다른 지각을 향해 인간 각을 초월한다면 지각의 미분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그것을 모든 가능한 지각의 발생적 요소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지각이 변호사키게 하는 지점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그램은 “사물 속에서의‘ 지각, 즉 어ᄄᅠᆫ 다른 지점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며, 각 지점 그 자체는 발생적/미분적 운동의 진동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미지

 감정 이미지는 지각과 나가는 행동 사이의 간격을 점유하는데 인간에게서 고정된 수용체들의 주요한 집결은 얼굴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양한 감정들이 등록된다. 들뢰즈는 초상화 속에서 두 가지 경향들을 주목하는데, 하나는 얼굴의 통합하는 윤곽을 강조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각각의 얼굴 생김새들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들뢰즈는 이런 통합하는 표면과 강밀한 특성 사이의 대립과 감탄과 욕망이라는 열정들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통합하는 표면과 강밀한 특성이 각각 순수 특질과 순수 역량이라는 서로 대조되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들뢰즈는 “감정-이미지야말로 시네마에서 클로즈업이고, 클로즈업이 얼굴이다”라고까지 표현하면서 그것이 모든 공간-시간의 좌표들로부터 얼굴을 추상화하고 그것으로 얼굴을 변용태를 표현하는 완전한 실체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클로즈 업 된 얼굴은 차라리 자율적인 대상, 운동의 경향들을 가진 고정된 표면이며 하나의 감정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 이미지는 하나의 표현된 것으로 독립적으로 고려되는 역량 혹은 특질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성 도성과 윤곽 도상은 감정 이미지들의 두 가지 구성의 기호들이라 할수 있는데 하나는 운동의 개별적 간격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 다른 하나는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감정 이미지는 퍼스가 일차성이라고 부르는 것, 즉 특수한 상황에서의 그것의 현실태적 표명과 상관없는 채로 고려될 때의 특질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클로즈업은 얼굴에서 순수한 특질을 추출해내지만 들뢰즈는 얼굴 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서도 그런 특질을 추출해낼수 있다고 보고 있다. 클로즈업 자체가 구체적 실체를 변화니켜 감정적인 특질/역량을 표현하는, 운동 경향이 있지만 탈맥락화된 고정된 표면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로즈업만이 감정-이미지를 창조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드레이어와 브레송의 영화들에서 들뢰즈는 클로즈업 이외의 샷들에서 원근법적 좌표를 허용하지 않고 클로즈 업 샷들처럼 감정-이미지를 창출해내는 과정을 찾아낸다. 보그는 이를 “ 도상이 특질-역량을 얼굴 혹은 그것의 상응물에 의해 표현하게 하는 기호라면, 특질 기호 혹은 능력 기호는 특질 역량을 임의의 공간에 의해 표현하게 하는 기호”라고 설명한다. 들뢰즈는 이런 임의의 공간을 구현케 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는 그림자, 서정적 추상, 색채로 구분 했으며 이를 통해 좌표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잠재력과 역량들, 특질들을 표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충동 이미지

 변용태의 잠재태적 임의의 공간과 행동의 현실태적 환경 사이에서 들뢰즈는 그 어느 쪽에도 분명하게 속하지 않는 한 영역, 즉 ‘본원적 세계들’과 ‘충돌들’의 영역을 충동 이미지가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자연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루이스 브뉘엘, 조셉 로지 같은 감독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영화들이 구체적인 세목들로 된 실재하는 세계에 내재적이면서 그 세계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충동들과 힘들의 원초적인 세계를 보는 비전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고 있다. 이 감독들의 세계는 본원적 세계라 불리는 세계가 따라다니는데 형성되지 않은 질료로 구성되고 구성된 주체들과 관련조차 없는 비-형태적 기능들, 행동들, 혹은 에너지 역동력에 의해 횡단되는 세계다. 

 본원적인 세계는 임의의 공간과 현실태적 환경 사이의 중간 지점에 존재한다. 그것은 임의의 공간처럼 파편화되고 탈접속되었지만 현실태적인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충동 역시 정서들과 행동들의 중간에 있다. 그것들은 다양한 정황들 속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 형식들을 취할 수 있는 원형적 행동들이다.

 들뢰즈는 충동-이미지의 두 가지 기호를 확인하는데, 징후와 물신(혹은 우상)이다. 징후들은 파생된 세계 속의 충동들의 현존이고, 우상들 혹은 물신들은 파편들의 재현이다. 충동 이미지들은 선과 악의 물신들로 구성되는데, 이것들은 파생된 환경에서부터 떼어낸 파편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발생적으로, 환경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본원적 세계의 징후들을 포착한다. 여기서 물신은 실재하는 환경으로부터 충동을 떼어낸 것으로서 본원적 세계와 일치하는 파편들이며 징후는 본원적 세계와 연관된 특질들과 역량들을 지정하고 있다. 들뢰즈는 그럼에도 본원적 세계는 충동-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발생적 요소라고 정리한다.

행동-이미지

행동-이미지야말로 서사와 가장 큰 근친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허나 이 부분에서 들뢰즈의 논의는 서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운동-이미지들의 배열을 전제하고 그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보그는 주장하고 있다. 행동-이미지는 리얼리즘의 영역, 즉 구체적이고 특정한 공간-시간 속에서 현실태한 특질들과 역량들의 영역이고, 분리된 행동들 속에서 구체화한 정서들과 충동들의 영역이다.

 행동 이미지는 언제나 힘들이 포위하는 환경과 개체 혹은 개체들의 연관된 작용들/반작용들을 수반하는데 그런 점에서 퍼스의 이차성의 범주를 예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위 환경의 중심에서 행동은 환경과의 다른 것들과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단일 기호라고 부르는 환경과 연관되는 기호를 그는 “환경 속에서, 즉 사물들의 상태 혹은 한정된 공간-시간 속에서 현실태화하는 것으로서의 특질-역량의 앙상블”로 규정한다. 이항식이라고 붙인 특정한 행동과 연관된 기호는 “모든 싸움, 말하자면 행동-이미지의 구성 기호들이다.” 통합 기호와 이항식은 큰 형식 행동-이미지의 구성 기호이다.

 들뢰즈는 장르들 속에서 작동하면서 큰 형식 행동-이미지의 일종의 물리학을 구성한다. 다섯 가지 법칙을 발견한다. 첫 번쨰는 구조적인 것인데, 하나의 유기적 전체의 구성 요소들로서의 환경적 힘들의 필수적인 성질과 관련된다. 두 번쨰 법칙은 환경에서 행동으로의 이행과 관련이 있다. 세 번째는 수렴하는 힘들이 결국에는 단일한 쇼트에서 마주칠 것을 그리고 분리된 행동들의 교대가 충돌하는 힘들이 서로 동시적으로 현존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질 것을 요구한다. 네 번째는 다른 것들 속으로 차례로 끼워 넣는, 싸움의 세트화 규칙이다. 다섯 번째는 포괄하는 환경과 정적의 행동 사이의 “거대한 틈”의 법칙이다.

 이런 다섯 가지 법칙들은 주위 환경의 통합 기호와 포괄화한 행동들의 이항성들을 구성하지만 그것들의 구조적의 관계들의 발생은 세 번째 기호에 의해 표식되는데, 들뢰즈는 그걸 각인이라고 명명한다. 주입하는 상황과 폭발하는 행동이 동시에 나오는 것은 바로 특정의 “정서적 대상들” 속에서다. 그러한 대상들에서 우리는 환경과 인물 사이의 내적인 발생적 접속의 외적 기호를 본다. 

 보그는 여기서 범죄 영화 장르와 탐정 영화 장르의 차이에서 큰 형식과 작은 형식의 차이를 찾아낸다. 보그에 따르면 범죄 영화는 “지하 세계 환경에 범죄자들을 설정하고 나서 그들의 행동을 추적”하는 반면 탐정 영화는 “신비롭고 단편화된 행동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 행동들이 일어나는 상황을 폭로하는 단서들을 추적”한다. 이런 식으로 다른 큰 형식 장르들도 마찬가지로 작은 형식 대응물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는 작은 형식의 발생적 기호를 벡터라고 부른다. 그리고 큰 형식의 호흡-공간과 작은 형식의 골격-공간을 대조함으로써 그것을 소개한다. ‘나타남’과 ‘현존으로 오는 것’을 통해 이런 호흡의 운동을 현현하는 것이다. 이는 골격과 사라짐이라는 형태로 나오는데, 들뢰즌 그것들 속에서 공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대조적인 수단들을 본다. 첫 번째는 개별적 요소들이 이미 설정되고 구조화 되어 있는 포위하며 에워싼 전체에 대한 하나의 구형적 착상을 통한 것이고, 두 번째는 연관되면서도 이질적인 요소들의 열린 공간이 구성되는 것과 같이 개별적인 요소를 인접하는 요소와 연결되게 하고, 그러고 나서 계속 또 다른 요소와 연결되게 하는 국부적 작용을 통한 것이다. 국부적인 골격-공간은 파편들 나타남들 사라짐들로 구성되는데, 그러나 그것들은 곧잘 서로 연결된다.

 큰 형식의 발생적 기호인 각인은 정서적인 대상을 통해 외부 환경과 내부 행동을 결속한다. 그리고 그 자체의 방식으로 벡터도 같은 일을 한다. 들뢰즈는 주로 골격-공간을 횡단하는 우주의 선이라는 관점에서 벡터를 묘사하면서도 “특이점들 혹은 그것들의 강밀도적 절정에서의 주목할 만한 순간들을 통일시키는 톱니 같은 선”으로 벡터를 규정한다. 즉 벡터는 우주의 톱니 같은 선에 의해 횡단하는 골격-공간을 생성하면서, 행동과 상황을 조합한다는 점에서 작은 형식의 발생적 기호이다.

반성-이미지

반성 이미지는 행동 이미지와 관계 이미지 사이에 설정된다. 반성 이미지는 큰 형식에서 작은 형식으로의 이행, “형식들의 변형”을 허용하는데 들뢰즈는 반영-이미지의 기호들을 형상이라고 부르고, 형상을 행동-이미지의 “이러한 기형, 변형, 변질의 기호”로 정의한다. 들뢰즈는 관계-이미지를“관계들을 그것의 대상으로 보는 이미지”로 다룬다. 그러나 관계-이미지와는 달리 반성-이미지는 행동 이미지의 기형, 변형, 변질로서의 그 행동-이미지와 결속된 채로 있기에 반성-이미지는 “행동과 관계 사이의 매개체이다.”

 들뢰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에이젠슈타인의 두 영화를 인용하면서 조각적/조형적 그리고 연극적/배경화법적인 형상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도치의 형상과 화법적 형상 혹은 화법의 형상을 확인한다. 화법적 형상은 그것이 행동 이미지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작은 형식과 큰 형식을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반성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발생적 기호인가? 반성-이미지는 “행동과 상황이 간접적인 관계들 속으로 진입할” 때 생기는데, 행동과 상황 사이의 간접적인 관계의 직접적인 반성, 말하자면 반성-이미지의 모든 형상들 속에서 내표되고, 전제된 것의 명시적 제시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들뢰즈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행동-이미지들을 그것들의 극한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변형의 일반적인 과정, 즉 몇 가지 경우들에서는 큰 형식과 작은 형식의 전환을 초래하지만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 두 형식들의 계속적인 분리를 허용하는 과정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 영화를 다루면서 이 영화들이 감각 운동 도식의 붕괴의 징조를 다루고 있고, 따라서 운동 이미지 일반의 소멸의 징조라 보고 있다.

관계-이미지

들뢰즈는 관계-이미지를 퍼스의 연속성, 규칙성, 습관, 규정, 법칙, 해석, 재현, 사유를 다루는 삼차성의 범주와 동일시한다. 퍼스에게서 우주 속의 모든 것은 습관들을 형성하는, 즉 순전한 우연성과 불확정성으로부터 규칙성, 연속성, 일반성으로 이전하는 경향을 지닌다. 틀뢰즈는 퍼스에게서 삼차성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들뢰즈가 삼차성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확인하는 것은 관계의 개념이다. 관계 이미지는 정신적 이미지, 즉 정신적인 것이 이미지 속으로 도입되는 사유의 형상이다. 들뢰즈는 어느 정도 정신적인 것이 다른 이미지들 속에, 즉 감정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의식 속에 말하자면 행동 이미지에 고유한 목표들 선택들 계산들 속에 내포된다고 지적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런 관계-이미지의 시네마를 드러낸 감독으로는 히치콕을 꼽는다. 들뢰즈는 나르보니의 “해석적 열정과 해독의 열망”이 관계 이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며, 삼차성의 뚜렷한 현존이라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제 삼자라는 항목의 중재가 하나의 관계로서 행동을 구조화하며 그 속에 개입한다. 그리고 행동을 구성하는 관계들을 카메라와 쇼트들을 통해 관객들이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히치콕은 정신적 이미지의 시네마를 창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계-이미지 구성의 기호들은 표식이고 탈표식이다. 표식은 자연적인 관계의 기호이며 “관습적인 계열 속에서 다른 항목들을 지칭하는 항목인데, 각 항목이 다른 항목들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것과 같다. 탈표식은 그러한 계열로부터 벗어나는 용어, 즉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가는 정신의 습관적 운동을 붕괴시키는 불안한 변칙적 요소다. 관계-이미지의 발생 기호는 상징인데, 그것은 하나의 전체를 구상하는 추상적 관계의 기호다. 따라서 관계 이미지의 기호들에 대한 들뢰즈의 요약적 특성화는 구성의 두 가지 기혹들은 표식, 즉 습관(‘자연적인’ 관계)에 따라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합하는 경우, 그리고 탈표식, 즉 이미지가 그것의 관계 또는 자연적인 계열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발생적 기호는 상징, 즉 우리가 두 가지 이미지들을 비록 자의적으로 일치되는 것이라고 해도, 비교하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결론

들뢰즈는 평범한 체계 수립자가 아니며 그의 분류법은 새로운 보기의 방식에 대해 말하는 새로운 용어들을 창안하기 위한 생성적 장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그는 그 개념들과 그것들의 형성의 논리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것들은 분석 대상들과 그것들의 상호 관계들을 분절하기 때문이다. 또한 들뢰즈는 관습적인 기호학자라 할 수는 없는데, 들뢰즈 자체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기호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분류법은 단지 그 조각들과 그것들을 생성하는 창조적 과정들에 적합한 언어를 창안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여섯가지 운동 이미지들은 각자는 그 자체의 기호적 질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경우에는 들뢰즈의 노력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기를 착상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보기의 다른 방식, 즉 상식이 보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즉 정서 에너지 리듬 벡터 관념 정신적 관계를 가시적 세계 안에서 인지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을 상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이와부치 고이치의 [전지구적 프리즘: 트랜스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위해서]

이와부치 고이치의 [전지구적 프리즘: 트랜스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내 문화 교류를 다루고 있는 글이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내의 문화 교류의 폭발적인 증진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대중 문화는 동아시아권 국가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열풍들 속에 일본의 미디어들의 반응과 달리 이와부치는 역사적인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국수적인 시각’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화를 촉진하는 대중 문화의 잠재력을 쉽게 무시하면 안되지만 동시에 그 대중문화가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고 단순화되어서 수용되서도 안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수출은 전지구화가 가속되었던 시기에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데, 이는 단순히 미국화를 넘어서 전지구화와 문화권력의 탈중심화라는 점에서 독특한 현상을 낳게 되었다. 이와부치는 이런 권력의 탈중심화로써 비서구 국가들의 다국적 기업의 출현을 든다. 미국의 자리를 차지한다기보다는 미국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차이를 육성하면서 ‘균질화의 특정한 형식’을 만들어냈는데, 이 균질화는 결국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일본 대중 문화의 유행은 그런 점에서 미국 문화의 상상계에 깊이 각인된 대중문화의 한 형식을 빌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부치의 논의는 특정한 문화적 의미들과 감정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대중 문화를 통해 재현되는 젊은이의 고뇌, 꿈, 로맨스는 특정 양식과 현재적 근대의 의미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그 양식과 의미는 일본적 맥락에서 지구적인 균질화와 이질화가 서로 뒤섞인 구성을 분명하게 결합한다. 그렇기에 일본의 대중문화는 다른 동아시아 문화들과 달리, 더욱 친밀하게 다가오며 이는 대만 시청자들에 미국 TV 드라마와 일본 TV 드라마에 대한 의견으로도 잘 드러난다. 

 일본 대중 문화의 이런 전지구화와 문화적 근접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전략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먼저 문화적 근접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는게 중요하다. 경제 발전의 일정한 수준을 획득했던 자본주의 사회 국민들의 공통적인 경험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우호적인 수용을 지지하는 동시성을 생기게 했다. 따라서 문화적 근접성의 경험은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되는지를 묘사하는 역동적인 것, 다시 말해 시간적 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1980년대 서구권의 일본 붐과 달리 동아시아의 일본 붐은 동아시아의 경제적 발전과 그에 따른 문화적 생산 능력의 증진과 관계가 있다.

 두 번쨰로 일본이라는 무대 안에서 일본의 대중문화는 미국 문화의 자장 안에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는 지구화된 소비 대중 문화의 핵심 형태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표출된다. 전 지구화는 서구의 근대적 세계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냈고, 미국에서 구성된 근대성의 영향은 전 세계에 퍼졌다. 하지만 근대적 경험이 강제된 비서구 국가들은 토착화된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형식들을 만들어왔고 이는 같으면서 다른 복잡한 인식을 만들어왔다. 이런 같으면서 다른 문화적인 인식은 아시아 시청자들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통해 느끼는 복합적인 인식과 동일하며 이는 일본 대중문화를 재창작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부치는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를 대만에서 만들어낸 [유성화원]과 [도쿄 러브 스토리]가 한국 드라마 제작에 끼친 영향과 이로 인해 탄생하게 된 한류 열풍을 들면서 새로운 문화적 유대가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부치는 이런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아시아 대중들의 복합적인 문화 인식의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일본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구조적인 불평등이라는 어두운 면도 낳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슨  트랜스적 흐름과 연결들이 탈식민 정치와 다중문화적 정치학과 반드시 교차하고 있는게 아니라, 외려 소수자가 사는 사회에서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는 방법에도 무관심할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는 지구화한 소비주의에 기반했기 때문에 특정 그룹을 더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다국적기업들과 자본의 권력은 기본적인 소비주의 교의와 조화하면서 국가적 틀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한편, 다수가 아닌 행운의 몇몇에게만 이익을 준다. 

 글의 결론에서 이와부치는 ‘진부한 세계주의’의 시대에 필요한 대화체적 상상력을 글로벌리제이션 과정에 생긴 사회 간이나 사회 내부의 다양한 모순들과 연동하게 해야 하면서 대중문화를 통해 위장된 경계를 가로지르는 교섭의 중요성을 수용하고 세상을 진짜로 다르게 만들기 위해 다중면을 가진 교섭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하는 협동적인 트랜스 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문화와 문명의 전통: 초기 문화연구에 대한 고찰

(이 글은 존 스토리의 [대중문화와 문화이론]를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다수의 대중문화는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소수 권력층의 정치적 관심거리였지만 그 이후로는 신호나 징후로서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변화는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비롯되었는데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산업자본주의의 새로운 노동관계로 인해 일어난 주거분리하고 연관관계가 있다. 이 때 피지배층만이 갖는 문화가 등장했고 문화의 융합과 회 안정이라는 개념은 도전받기 시작했다.

 매튜 아놀드는 근대 대중문화의 연구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그는 직접적으로 대중 문화를 언급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일반적인 문화 영역 안에 대중문화의 위치를 규정했던 점 때문이였다. 아놀드에게 문화는 두 가지 의미로 시작하는데 지식체계로써 문화와 도덕적/사회적 이득을 주는 문화로 나눠진다. 아놀드는 “인간의 생각과 표현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이성과 신의 의지를 널리 퍼지도록 하게 하는 것”라고 문화를 정의하면서 그것들이 ‘읽고 관찰하고 생각함으로써 알수 있는 최선의 것을 알려는 열망으로 활기차게 객관적으로’ 얻을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놀드는 거기다가 “고상한 무위”를 추구하려고 하는게 대중문화라고 보고 있다. 

일견 정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놀드의 이런 고찰을 읽어보면 무정부 상태야말로 대중문화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아놀드가 이런 고찰을 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도시 남성 노동계급이 정식으로 정치에 진입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동반되었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놀드가 1866-7년에 발표한 참정권에 대한 문제를 다룬 글을 읽어보면 그의 논의가 계급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놀드는 마르크스와 달리 결국 중산층과 귀족을 노동자 계급보다 우위에 두면서 영원한 정신이 상황의 도움을 받아 ‘이겨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즉슨 교육이 노동계급의 위험한 노동계급적인 문화를 거부하고 이겨내는 문화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권위의 중심 역할을 하던 귀족층이 쇠퇴한데다 민주주의가 출현하면서 노동 계급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욕구를 조절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법적 절차를 밟은 혁명’이라고 불리는 교육과 문명화에 대한 이론으로  그렇기에 아놀드는 대중문화에 대한 최초의 이론가로 불리지만 정작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정치적 무질서의 징후 정도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놀드의 이런 시설은 산업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특히 콜러릿지의 ‘문명의 발달을 이끄는 것은 교화된 지식인 계층의 기능’이라는 인식에서 비롯하고 있다.

 이런 아놀드에게 영향을 받은 리비스는 1930년대를 문화적 위기의 시대로 규명했다. 리비스의 연구는 40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리비스주의는 “문화를 지켜 온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다”라고 보고 있다. 변천해온 것은 저 소수의 위상이다. 그런 소수의 위상이 상반되어 대량 문명과 대문화는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이끌 것처럼 위협하고 있다. 리비스주의는 이런 대항능력을 학교에서 훈련시키도록 선언하고 그것에 대한 저항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리비스는 대중 소설과 광고로 대표되는 현재의 돌이킬수 없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리비스와 리비스주의는 전원적인 신화적 과거를 호명하며 권위와 위계질서에 기반을 두면서 지적 자극과 감정적 즐거움을 주는 일반 문화를 찾기 시작했다. 리비스주의는 엘리티시즘으로 비판을 받지만 그가 문화 연구에 큰 역할을 했다는건 부정할수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5여년간 미국의 지식인들은 대량문화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는데 앤드류 로스는 대량이란 요소를 미국적/비미국적인 것의 공식적 차이를 밝히는 주요한 용어들 중 하나로 보았다. 로스는 그의 연구 대부분을 봉쇄라는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랑 연관시켰는데 이 논의에서 로스는 다수가 저급한 문화를 택한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미학적 자유주의, 대중문화 친절한 사회화 기능을 한다는 진보적 진화론의 태도, 사회통제 형식으로 보는 사회주의적 태도로 나눈다.

 버나드 로젠버그는 미국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복지가 대량 문화의 비인간적 영향으로 위협받는다고 보고 있으며 대량문화는 그 태생이나 표본 어느 쪽으로 보아도 미국의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화이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현재를 혹평하기 위해 과거를 낭만화한다고 비판하면서 또한 미국에서 고급문화가 얼마나 융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드와이트 맥도날드의 대량문화에 대한 비판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다. 그가 보기에 대량문화는 고급문화의 생명을 위협하고 정치적 지배의 도구로 만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맥도날드의 전망은 매우 비관적인데, 문화적 엘리트가 없는 미국은 유치한 군중으로 득시글거리는 대량문화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맥도날드의 전-트로츠키주의는 반 덴 하그의 자유주의로 옮겨감에 따라 분석은 다시 변한다. 반 덴 하그에게 대량문화는 대중사회의 대량생산의 불가피한 결과다. 고급문화에 대한 대량문화의 유혹은 하나는 대량문화에서 나오는 재정적 보답이고 다른 하나는 잠재적으로 엄청난 수를 차지하는 관중이다. 이는 군중이 취향이 전보다 저하되었다기보다는 서구사회에서 문화 제작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미국에서 소비된 문화 텍스트와 그 산물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 역시 대량문화가 마약과 같은 것이라는 최종적인 귀결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대량 문화는 궁극적으로 결핍의 상징이며 이는 대리만족과 대리 인생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다. 반 덴 하그는 대량문화의 공허한 텍스트와 생산물들을 소비하면 할수록 결국 공허감만 더 커지고 그에 따라 대량문화의 소비는 더 늘어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기본욕구의 억압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만족의 경험이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반 덴 허그는 대량 문화의 소비 방법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낭만적인 시각을 동원하는 ‘문화적 향수병자’하고는 다른 비판적인 시선을 획득하게 되는데, 대량생산기술을 없앤다고 더 만족하게 될지 모를지 알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에드워즈 실즈는 이런 반 덴 하그의 시선을 비판하면서 산업이 삶을 빈곤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대량 문화에 있는게 아니라, 대량문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응이다. 레슬리 피들러는 반대로 대량문화를 ‘분수를 모른다’라는 대중문화라 말하면서 미국의 대량문화를 동질적이고 평준화 된 것이 아닌 위계적이며 다원적인 것으로 보았다. 쉴즈도 비슷한 유형을 제시하면서 꼭대기의 우월한 문화, 중간의 평범한 문화, 바닥의 거친 문화가로 나누면서 평범하고 거친 문화가 우월하고 세련된 문화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변화를 나쁘게 보지 않으면서 미학적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대량문화에 대한 이런 논쟁들은 문화적 선택과 소비는 이제 소속계급의 징표이자 계급차이의 표시이며 소비자의 선택의 다양성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수 있다.

 문화이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발전적 성과를 보면 문화와 문명의 전통에서 입각한 접근방식은 다소 고루해보일수 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영국의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걸 잊으면 안 된다. 한 세기 이상 문화분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였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문화와 문명이 지닌 걱정거리는 한마디로 사회적 문화적 배타성과 범위의 확장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근대화로 인해 확장되어가는 대중과 대중 문화에 대해 기존 지식인계층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문제에 대해 시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민했다는 점에서 탐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영화적 사건에 대해
(션 큐빗의 'The Cinematic Effect' 일부분을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The Cinematic Event

영화적 사건의 시간은 분산된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구성의 분열은 시간의 분산을 생산하고 있으며, 빛에 민감한 은염의 난반사되어 흩뿌려짐과 단속적 시선에 모두 걸릴 수 없다는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참석하지만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움직임을 경고하고 있다.

영화의 첫 순간에는, 분석적인 눈이 빛의 작은 구멍과 작은 구멍, 절반정도 보이는 움직임을 주변부처럼 주변 인식을 흐리게 하며, 그 세부는 탈출하지만 순수한 운동처럼 존속을 도약하게 한다. 

영화적 이미지는 의미에서 동일하지 않은 프레임 속의 각각의 사건이 시간에 완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각 표상으로 단편적이며, 때문에 각각의 투사의 사건은 초점 맞추기와 한계 이미지의 새로운 조립을 불러 일으킨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동시에 움직임, 한순간, 그리고 산만한 시선, 미세 광학 구분의 궤적 모두 포함하고 있다. 

매력으로써 시네마토그래프는 19 세기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도시 문화에 속한다. 도시들을 향한 인구 흡수가 의 상태에 대한 이유를 소통을 경제적 혹은 경관을 중심에 맞춘 것처럼, 모두 영향과 이유가 되었다. 도시의 매력은 특히 스펙터클의 사회적 존재가 되었던 19 세기의 마지막 10 년 동안의 주요한 에너지였다. 이런 사회는 다시 같은 유행을 타는 산보자와 소통 할뿐만 아니라 전달 될 소비자로 개별화하기 위해선 대량의 인구가 필요하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여유 있는 최신 유형, 움직임 등 소비자의 본 발명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런 매력과 힘들은 노동자들이 초췌한 집으로 돌아오거나, 닭을 키우거나, 그들의 작은 지분, 터무니없는 양말, 야채를 재배하는 같은 순간들이 실종된 것에서 비롯된다. 농민 경제의 자급자족의 잔여는 카메라의 돌림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현대의 리옹, 프랑스에서 여기있는 사람들 모두는, 찍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드보르가 주장한 것처럼, 소비자가 된다는 건, 우리가 소비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소통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는 소통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이 초상화를 민주화 하면, 모두가 극적인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시네마토그래프에서, 관객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비전은 형성 과정에서 기계적 지각과 함께 동기화된다. 카메라, 프린터, 프로젝터가 하나의 장치로 설계된 것은, 시네마토그래프는 현 단계에서 가시적인 표현을 위한 도구에 있었으며 따라서 뿌리깊은 군중의 가시성에 영향을 주기 위해 계측기로써 만들어졌다. 한편 마리의 전통은 인간의 지각으로 포착하기 위한 이벤트의 분석을 위한 영화의 과학적 사용을 인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메를로퐁티의 낙관적인 현상학과 감시의 푸코의 비관적인 이론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범투시의 영역를 만든다. 이 "객관적인" 비전이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시네마토그래프는 "인식에 대한 믿음의 붕괴"로 관객을 제시했다. 하나는 지각 자체의 파편화된 개체, 다른 하나는 지각 그 자체로 말이다. Marey 전통에서, 시각의 분석은 개체의 세계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연결된다;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인간과 기계 지각은, 기계에 의해 재구성된 인간, 그것의 실현을 위해 새로이 편심된 인간의 감각 기관의 기계적인 의존에 상호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필수적인 인간-기계 인식의 가능성을 만드는 동안, 시네마토그래프도 버치와 바쟁에 의해 정밀한 불멸의 신화를 생성한다. 그런 반응에 우리는 러시아에서 첫 시네마토그래프회에 참석한 고리키가 남긴 감상문에서 그림자, 유령, 그리고 유골의 무성과 무색의 영역에 대해 언급한, 잘 알려진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고리키는 영화의 장소와 외설적 미래의 부도덕함을 혹평했던 것처럼, 꿈에 대한 첫 번째 시간적 시스템과 영화의 감각 역시 예지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은 잊고 있다. 이상한 상상은 당신의 마음을 공격하고 의식은 약해지고 희미해져 가기 시작한다 ...." 

그 순간에, 시네마토그래프의 표상적인 힘은 질문을 받게 된다; 개체와 대상은 영화에게 인간과 기계 고유의 인식 영역을 제공받음과 동시에 용해된 전망 속에 용해된다. 분석적인, Marey 전통은, 인지 또는 인식의 과정보다는 "차이에 종속된 동일의 개념적인 형태를 의미" "재인지"에 대해 주장한 길 들뢰즈가 주장한 의미에서 표현적이다. 한편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우리는 Vaughan이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발견했던 대상 및 주제 영역 모두에서 정체성의 상실의 가능성과 자기 표현의 손실과 함께 인식의 모든 순간의 고유성의 감각을 얻음에 직면하게 된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모든 개체, 모든 일이, 차이 속에서 삼켜지고 자신의 정체성, 각각의 차이 사이의 차이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는 다름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현대 미술은 이러한 조건을 실현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변형과 치환의 진정한 대가가 된다.’”

고르키의 오몽의 니즈니 노브고로드시 연구에서 밝혀지 것처럼, 차이의 확산은 의식의 퇴색과 생각이 다름에 속하는 것으로 경험됨이 발생하는 산만한 상태를 제공한다. 이 산만한 시선, 동일하지 않음의 깜박거림에 매료된 관객을 유도했던 최면적인 황홀경이란 현상은 여전히 텔레비전, 콘솔 게임 및 인터넷에 대한 비판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의 출현은, 조나단 Crary가 주장했던, 순수하고 세심한 의식에서부터 소설의 분리가 아니다. 반대로 산만함은 주의력을 고정하려고 하는 시네마토그래프처럼 정밀하게 그 고안되어 있다.: “산만함을 19세기 후반의 문제로 보려고 하면 세심한 관찰자의 병렬 구조에서 분리 될 수 없다." 세심함을 생성하도록 구성 된 조각화은 또한 꿈꾸는 듯한 황홀경을 생성한다.

황홀경은 시간 속에서 구성된 영원한 형식이다. 이 모순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를 집중하게 한다: 시작과 중단의 문제. Elsaesser는 "항구를 떠나는 배"의 릴 프레임에 의한 갑작스러운 끝뿐만 아니라 구성된 서스펜스의 순간을 닫는 프레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남자를 본다. 하지만 이야기의 긴장감은 다음에 일어날 것에 대한 우려를 생성하는 반면, 산만한 시청자에게는 액션이 중단 이유에 대한 표현의 동기나 어떠한 신호없이 찾아오는 서스펜스에 대한 정지 경험의 총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처음의 영향은 비교적 용이하게 카메라와 프로젝터 모두 제어된다. 그러나 필름스트립의 끝은 대부분 분명히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뿐만 아니라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확실히 확인할 수 있듯이 액션의 끝의 효용성이 아니다. 그런 다음, 뭐가 문제인지는 결말의 긴장감 다음에 무슨 일이 아니라 무슨 일이 지금 벌어졌다, 다. 

그 경험의 전부는 어땠는가? 고르키에겐 경험은 빛이 “나갔을 때“ 시작된다: 어둠을 제외한 움직이는 이미지는 존재의 정적에서 움직임이 되어감에서 빛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상영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각각의 프레임은 프레임 라인이 렌즈 앞에 구멍을 가로 질러 이동하는 동안은 프로젝터의 빛을 차단하는 셔터의 움직임에 의해 중복 되어, 두 번 노출된다. 그래서 프레임라인은, 두 배로 보이지 않는, 환등기의 반복되는 꺼짐 뒤에 숨겨진 어둠이다. 사진 이미지와 1895년과 1896 년 뤼미에르의 쇼 시작 부분에 상영된 싱글 프레임은 빛에 민감한 분자들의 임의적으로 튄 자국이다. 스틸 이미지는 래스터 이미지의 발명 전까지는 격자 이미지가 없었으며, 그 발명은 일반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의 레이더 모니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에 움직이는 이미지는, 뤼미에르 시네마토그래프의 카메라 프린터 프로젝터 렌즈의 전면 프레임의 정확한 촬영에 종속되어 격자 이미지로서 삶을 시작한다. 

프레임라인은 과거와 현재, 네거티브와 영화 운동의 순간을 나타나도록 구별한 프레임에서 프레임을 분리하며, 현재를 그들의 순수한 차이처럼 영화적 순간으로 구분한다. 

하나의 축이 시간을 표시하는 그래프에서 원점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것도 그렇다고 그 구별도 아닌, 0으로 표시된다. 우리는 이미지를 수학적으로 부호화 된 시대를 다시 돌아보고,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은 더 이상 수학에 대한 문외한으로 남지 않으며, 영화적 현재와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는 프레임은 보이지 않도록 머무르는 프레임라인에 대한 분리 대신, 공간적이며, 일시적이지 않은 중대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픽셀로 간주 될 수 있다.

0이란 관계나 수량이 아니다. 우리는 “4” 자체를 4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0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반면에 0은 형용사로서 사용할 수 있다:“숫자 0은, 그렇기에, 모든 개념들이 예시화되는 것의 부정의 연장선상으로서 확인될 수 있다.”(Zalta, 2000)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의 명사로서 0 자체는 예시화의 실패 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그 어떠한 것도 ‘자신 이외에는 특징적이지 않은’이라는 개념에 복속되지 않기에, 나는 0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0이란 그 자신 이외에는 동일하지 않다는 개념에 속해있다”(Frege 1974: 87) 동일하지 않음이라는 개념은 0의 내부적인 다름, 차별성이라는 특질을 드러낸다. 0은 어떠한 사물이나 개념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관계’인데, 이는 그자체로 언제라도 비동질적인, 차별성인 것이기 때문이다. 0은 행동한다,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봐야하는데 그 자치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또한 0은 다른 정수들(1,2,3,4...)과의 관계속에서 행동하는데, 이는 그 정수들의 반대 존재가 바로 0이기 때문이다. 그 아무것도 영화의 시작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0은 이미지-차이점들, 환경이나 지지기반들, 그리고 분명한 행위를 유발하는 기제들-가 시작되기 전의 비동일함(비특질적인), 혹은 움직이지 않은 것의 불안정성들(현재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될것인가 사이에서 발생하는)이다. 0은 좌표공간에 있어서 원점, 모든 좌표의 축들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원점으로서, 0은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이는 차이의 척도로서의 특권이다. 점묘화 방식으로 구성된 이미지에서, 원점-(0,0)으로 표시되는-은 스크린 맨 위 왼쪽에 위치하며, 이를 통해서 컴퓨터 화면상의 모든 화소들은 그 지점을 원점으로 삼아 자신의 좌표를 끌어낸다. 각각 5 픽셀 단위 좌표들은 0이란 구별불가능한 차이점(비어있는 좌표인 0,0)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있느냐에 따라서 상징화된다. 그리고 최초의 ‘차이점’으로서 이 텅 비어있는 좌표이자 기원인 (0,0)은 필수적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것의 불안정한 속성의 결과는 끊임없는 움직임의 기원으로서 작용한다.

0은 또한 최저선이자, 14세기 복식 부기의 발명 이후로 모든 회계장부의 총합으로서 기능해왔다. 빛과 신용의 관계 사이에서(낙천주의자의 행복으로), 0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평등이었다. 이는 단순한 돈의 부재가 아닌, 지출과 소비가 일치하는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열역학 1법칙-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있어서도 0은 똑같은 지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하나의 안정된 시스템으로서, 시간에 걸쳐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모든 총합과 총손실은 원 에너지의 0의 총합인 것이며, 만들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에너지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0의 개념은 20세기 세속주의를 특징짓는, “끝내주는 것과 소름끼치는 것들은 더 이상 가장 완벽한 존재의 외피를 뒤집어 쓰지 않는다;그 대신에 공허를 향한 믿음으로서, 우리의 패배를 위한 열망으로써 작용한다. 부정적인 이론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영화에 있어서 숫자 0은 비어있거나 비활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다:모든 행위의 총합. 이러한 0의 개념은 원점으로서의 0의 개념을 보완한다. 역학적인 평등으로서의 최종 결과물이자 보존물인 0과 모든 좌표평면의 원점으로서의 0개념이 혼합되면서, 0은 모든 평등계와 함께 데카르트적 사상 영역에 그 존재를 확장한다. 그렇기에 0은 행위가 일어나는 지점의 순수한 관계적인 지점인 것이다. 원점으로서의 0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좌표평면에서의 표현은 모두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복식부기에 있어서 0에서부터, 그리고 0으로부터의 방황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영화 제작을 향한 어떠한 현금의 흐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이질적인 프레임들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는 영사 슬라이드의 보이지 않으며, 인지불가능한 계속됨이란, 그럼으로 역설적인 지점에서, 차이의 계속됨, 0이란 공허가 아닌 모든 다름의 총합임을 드러낸다. 일시적인 차원으로서, 0이란 형용사도, 명사도 아닌 하나의 ‘동사’이다. 간헐적인 이미지의 깜빡임이 행위를 구성하지 않는 지점들을 제외한 아무 가치 없는 행위. 버릴리오는 우리가 신의 0의 시간으로부터 반기를 들은 것이 아닌가 라고 두려워하였다:“신에게 있어서, 역사란 사건들의 경관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어떠한 것을 이어받지 아니한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Virilio, 1996, 9) 이 동시성은 우리 인간들은 오로지 통시성에서만 인지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들은 특히 겔러리에서, 하얀 라이트박스에 위치한 영사 슬라이드에 걸려서 전시된다. 이러한 형태의 전시들이 보여주는 역설이란, 움직이는 이미지란 현존하지 않지만-반면 영사 슬라이드는 실존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영사 중에서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동시에 이는 영상의 움직임을 희생함으로서 그것이 현존하게 된다. 버릴리오의 신은 필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영사 슬라이드를 인지할 뿐이다. 성스러우면서 변함없는 현실로서, 라이트 박스를 통해서 보여지는 영화 필름의 테두리는 오로지 존재할뿐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아니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의 전시는 박물관에 박제된 나비와도 같다;사랑스럽지만, 그것은 죽어 있다. 성스러운 현존에서, 그들의 시간은 정지해있으며 동시에 0은 공허가 된다. 그러나 0의 시간은, 신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모든 시대에 동시에 현존하는 듯하지만, 하나의 신은 인지할 수 없는 인간의 원리이다. 그리고 신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신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의 존재가 불완전하고 타자화된 존재들만이, 오로지 객체가 된 자들만이, 다른 의미로는 비구분적인 것이, 그것이 바로 0이다, 그리고 그 0만이 시간 속에서 시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살아갈 수 있다.

영화의 시간을 만드는 필름 테두리의 0의 시간은 인간이란 존재를 구성하는 별난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를 성스러움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은 성스러움 자체가 스스로 자체 충족 가능하다는 점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이라는 표현에 익숙하기는 하지만-솔직히 우리는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와 그 표현 사이의 내적인 차이를 찾아내지 못하는데-이 불안정한 전체성과 평등함의 부재는 우리를 집에 혼자 묶어두지 않게 하며, 우리를 사회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초기 순간들은 이런 지점들에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정지되어 있는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뤼미에르 시절의 영화들은, 모든 이미지들은 고정되지 않고 사회적인 이미지를 이용해서 비구분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였다. 정적인 사진의 이미지들을 원용하기 보다는, 영화는 자기 자신으로 완결된 하나의 이미지의 원용을-콜드리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영화가 왜 영화인가? 라는 지점들이 여기서 드러난다-끝낸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은, 항상 다르다. 영화의 가장 급진적인 불안정성은, 인간의 자율성으로부터 얻어낸 테크놀로지의 성취이며 동일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객체성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영화의 발명 이후로 몇십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통치적인 개념과 의사소통 네트워크의 종결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관계적인 원칙-기술에서 이미지, 이미지에서 이미지, 객체에서 객체, 이미지에서 객체, 객체에서 테크놀로지-이 모든 영화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TRPG 크라우드 펀딩 사례를 통해 본 문화 자본에 대한 하위 문화의 반란


*글쓴이 주: 이 글은 2013년 6월에 과제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2014년 6월 현 상황하고는 다를수가 있습니다.


2013년 한국에서 크라우드 펀딩 열풍이 불고 있다. 2013년 4월에 개봉한 [지슬]과 5월에 개봉한 독립영화 [환상 속의 그대]는 촬영 도중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으는데 성공했고 이에 힘입어 흥행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있었으니 2013년 5월, 국내 유일의 TRPG 출판사인 초여명에서 텀블벅에서 모금을 시작한 TRPG 룰북인 던전월드의 모금이 유례없이 예정 목표 금액을 뛰어넘어 모금을 무사히 완료했다는 소식이였다. 이 결과 던전월드는 1998년 발매된 겁스에 이은 15년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룰북이 되었다.


 해외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는데,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에서는 1990년대를 풍미했던 컴퓨터 게임 개발자 팀 쉐퍼의 신작 게임 프로젝트가 예상 금액을 훨씬 뛰어넘는 340만 달러에 성공하고 나아가 또다른 유명한 옛날 컴퓨터 게임인 웨이스트랜드 후속작 역시 300만 달러로 모금에 성공하는 등 1990년대 컴퓨터 게임의 복권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국내외 컴퓨터 게임 언론들은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성공한 문화 투자 사례들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에서 문화 자본은 어떻게 형성이 되며, 이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나아가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주류 문화 자본에서 배척받은 소수 문화가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새로운 대안 투자 문화를 통해 부활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크라우드 펀딩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문화자본이 흥행이 안 된다고 판단한 프로젝트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금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크라우드 펀딩이란 무엇인가? 통칭 소셜 펀딩이라 말하는 크라우드 펀딩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해 소규모 후원이나 투자 등의 목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이다. 


 현재 자리잡은 크라우딩 펀딩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눠볼 수 있다.

 지분투자 : 신생 기업 및 소자본 창업자를 대상으로 엔젤투자 형식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유형으로 투자금액에 비례한 지분 취득. 수익 창출이 목적이다. 오퍼튠이 여기 속한다.

 대출 : 인터넷 소액대출을 통해 자금이 필요한 개인 및 개인사업자에 자금을 지원하는 유형으로 대출에 대한 이자 수취가 목적. 온라인 마이크로크레딧, P2P 금융(Peer to peer finance)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오퍼튠, 머니옥션, 팝펀딩이 여기 속한다.

 후원 : 다수의 후원자들이 모금자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전적보상 이외의 형태로 일정 부문 보상받는 유형. 공연, 음악, 영화, 교육, 환경 등의 분야에서 주로 활용. 텀블벅, 펀듀, 팝펀딩이 여기 속한다.

 기부 : 후원 형식의 소셜 펀딩과 유사하지만 후원자들에 대한 보상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 순수 기부의 목적으로 지원하는 유형이다. 해피빈이 여기 속한다. 


 이 중에서 우리가 살펴볼 크라우딩 펀드의 양태는 바로 후원 부문이다. 왜냐하면 서문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닌,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위해 돈을 모아주고 그 댓가로 결과물에 플러스 알파를 얻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후원 형태 사이트 중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세를 얻고 있으며 서문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프로젝트를 올려 성공한 사이트인 텀블벅의 구조를 살펴보자. 텀블벅은 독립적인 문화창작자들을 위한 온라인 펀딩 플랫폼을 모토로 건 사이트다. 제한 시간동안 목표 금액을 모집한 뒤 기한 내에 목표 금액을 달성하면 기부자가 등록한 카드 혹은 계좌에서 일괄 자동이체가 된다. 반대로 모금에 실패할 경우 예약은 없었던 일로 되며 이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5%의 수수료를 제외한다면 텀블벅은 어떤 비용을 요구하지 않으며 프로젝트에 대한 권리도 온전히 등록자 자신의 것이라고 인증해주고 있다.


 사실 크라우드 펀딩이 각광 받기는 요 근래에 들어서이지만 크라우드 펀딩 개념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편이다. 펀딩에 관한 이념이 발전하면서 소액금융, 소액대출, 개인 대 개인 대출 같은 은행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1:1 혹은 1:다수 형식의 펀딩 서비스가 등장했으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크라우드 펀딩의 효시를 중세 유럽의 한 유명 작곡가의 경우 창작악보나 초연티켓을 사전에 후원 그룹에 한정 판매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향후 ‘Threshold Pledge System(혹은 Street Performer Protocol)’이라는 형식으로 발전하기도 했다.1602년에 세계 최초의 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주식거래소를 통해 상장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합자동인도회사)의 주식은 기업의 영업활동에 대한 투자 개념으로서의 크라우드 펀딩 사례라고 할 수 있다.이 회사는 아시아까지의 위험하고 값비싼 항해 의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주식을 공모했는데 이를 통해 일반인들로부터 엄청난 금액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현재와 같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가 만들어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킥스타터라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가 등장하고 여기서 모집을 시작한 프로젝트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한 크라우드 펀딩이 2010년대 들어서 각광을 받게 됬는가? 우선 2000년대에 들어선 웹 2.0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에 따른 영향이 크다. 생산자가 데이터를 갱신하는 웹사이트들의 집합체가 웹 1.0이였다면 웹 2.0은 웹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하는 하나의 완전한 플랫폼을 의미한다. 즉 웹 2.0은 주체가 생산자이며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상호작용을 통해 콘텐츠를 재생산하며,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그 사회적인 네트워크로 2000년대부터 도래한 것이 바로 소셜 네트워크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주지하다시피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같이 “사회적 연결에 의해 유대를 맺고 있는 인자(actor)들이 형성한 네트워크로서 개인적인 영역 속에서 사회적인 상호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 네트워크의 주요 특성으로는 사용자와 미디어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빠른 확산 속도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소셜 네트워크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전문화되어 생산적인 비즈니스 환경이 조성되었다. 소셜 네트워크로 자신과 자신의 상품을 홍보하고 나아가 피드백을 얻는 문화는 이제 2000년대에는 흔한 형태가 되었다. 무수한 공식 홈페이지와 블로그, 트위터들이 그것을 반증한다.


 텀블벅이나 킥스타터 같은 현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들의 대부분이 소셜 네트워크 비중이 크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들 사이트 대부분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텀블러, 블로그로 퍼갈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놓는 것도 사회적 연결에 의해 유대를 맺고 있는 인자들을 통해 무한정 퍼져나가 잠재적 투자자가 보고 찾아와 투자 할 수 있도록 ‘바이럴’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문화 상품 크라우드 펀딩의 역사와 의의

 물론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올라온 프로젝트들 중엔 문화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상품들에 대한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이 많긴 하지만 이 보고서는 텀블벅에서 중점적으로 이뤄지는 문화 상품에 대한 크라우드 펀딩 사례들을 중점으로 살펴 볼까 한다.


 문화에 대한 크라우드 펀딩은 1997년 마릴리온이라는 영국 밴드의 미국 공연 자금을 위해 인터넷 캠페인을 연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이 사례는 밴드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순전히 팬들이 자발적으로 이뤄진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 사례는 지금의 크라우드 펀딩의 프로토타입으로 꼽히며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릴리온의 성공은 곧 팬 펀딩이라는 개념으로 몇몇 사이트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킥스타터 같이 전문적으로 모아서 크라우드 펀딩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트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킥스타터라는 온라인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등장하고 여기서 프로젝트 투자가 성공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크라우드 펀딩의 사례를 꼽으라면 2000년초에 유행했던 네티즌 펀드를 그 시초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심마니 엔터펀드와 인츠필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 99년 인츠필름에서 펀드레이징을 한 반칙왕이 97% 수익률로 대박을 낸 후 본격화하기 시작하여, 공동경비구역JSA 150%,친구 293.63% 등이 대박 신화를 이끌면서 2000년대 전반기에 제작된 유명한 영화들이 이 네티즌 펀드를 통해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자금을 성공적으로 모집한 사례가 있다.실제로 네티즌펀드는 영화자금을 모은다는 개념보다는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나 (투자자에게 영화표 1매 제공,이를 통해 추가 매출 및 홍보 효과 발생) 규모가 커지면서 풋옵션,원금보장형 등의 수익성 중점 펀드들이 등장하였고,금융감독원이 이들을 유산수신행위로 규정하고 단속에 나서기 시작 하였다. 또한 영화 자체로는 수익이 났으나 기획사들의 투명하지 않은 회계처리로 인하여 실제로 통장에는 자금이 남아있지 않는 등 여러 문제점들로 인해 투자자들이 등을 돌리면서 많은 네티즌펀드 전문 회사들은 문을 닫게 되었다.


 비록 네티즌 펀딩은 여러 제재와 문제들로 한계로 금세 사그라들었으나 대한민국 역시 해외의 사례들처럼 한국의 소비자들 역시 어떤 간접적인 매개체 없이 문화 생산자에게 직접 모금을 하고 싶은 욕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금융법에 걸리지 않고도 네티즌 펀딩 회사를 통하지 않고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1대 1 연결을 하는 킥스타터를 위시한 소셜 네트워크 기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들이 2000년대 중반부터 해외에서 등장하기 시작했고 킥스타터의 성공을 본받아 위에서 텀블벅 같은 사이트가 한국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정받지 못한 하위 문화상품들, 그리고 반란

 그렇다면 서문에서 언급한 사례들을 통해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한 문화 상품들이 처한 환경을 살펴보자. 크라우드 펀딩에 올라온 문화 상품 기획들 대부분 은 기존 문화 자본에게서 제대로 투자 받기 힘든 것들이 많다. 서문에서 언급한 [환상 속의 그대]나 [지슬] 같은 독립 영화는 기획에서 시작해 재정적 벌충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미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바다. 또한 마사토끼 같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만화가 역시 웹툰 연재처의 지배에서 벗어난 만화를 그리기 위해 한 화 단위로 펀딩을 해 성공적으로 종료된 사례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위의 사례들의 성공은 아직 그 문화의 근본적인 체질까지 바꾸지는 않았기에 TRPG와 1990년대 복고 컴퓨터 게임의 크라우드 펀딩은 여러모로 놀랍다. 먼저 이 보고서의 시발점이 된 TRPG 문화를 살펴보자. 한국 TRPG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198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온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수준이였다가 1990년대에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를 통해 소개되면서 활황이 불었다. 그 이후로 게임매거진 등 TRPG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일본이나 영미권과 달리 그 수요가 턱없이 적었기 때문에 곧 하향세에 들어선다. TRPG 서적을 보급하는데 적극적이였던 출판사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들어와 사업을 벌였지만 이 출판사는 곧 사업을 접으면서 소수만이 즐기는 문화로 전락했다. 이제 와서 정식으로 관련 책이 출판될리도 없었고 실제로 이번 모금을 주도한 초여명 역시 적은 인원 (사원이 단 두 명이라고 한다.) 때문에 무리한 출판 대신 명맥을 유지할수 있는 정도로 관련 상품만 출판을 해왔다. 


 그러던 중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서 몇몇 개인이 주도한 시스템 발행 프로젝트인 ‘Dawn of FATE’가 목표 금액의 500%를 넘는 소소한 성과를 거두자 초여명은 텀블벅을 통해 출판 자금을 모금하자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처음엔 TRPG 시장의 협소함 때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 결과 ‘Dawn of FATE’보다 3배에 넘는 1900%를 돌파하게 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는 지금까지 진행됬던 텀블벅 프로젝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또한 이런 던전월드의 성공은 새로이 출범한 TRPG 출판사인 롤과 롤이 추구하는 TRPG 룰북 프로젝트인 ‘고민해결! 마법 해결서점’ 역시 무난하게 예상 금액을 돌파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야말로 크라우드 펀딩이 죽어버린 한국 TRPG 문화를 어느정도 살려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크라우드 펀딩을 지원받은 컴퓨터 게임 쪽도 그 체질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케이스다. 먼저 서문에 언급된 팀 쉐퍼는 1990년대 초중반에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했고 판매량도 좋았던 소위 유명 컴퓨터 게임 제작자였다. 그는 조지 루카스가 만든 루카스아츠라는 게임회사에서 일하면서 무수한 게임들을 만들어 히트를 쳤고, 게임 평론가들에서는 위대한 게임 개발자 중 한 명으로 꼽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만드는 게임들이 2000년대 컴퓨터 게임 유행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 되는 바람에, 신작 제작 비용을 투자자들에게 얻기 어려워졌다. 


 [웨이스트랜드 2] 같은 경우는 1980년대에 나온 유명 컴퓨터 RPG 게임 [웨이스트랜드]의 후속작이다. 이 게임은 핵전쟁이라는 당시 게임에서 보기 힘들었던 설정을 극도로 살려 TRPG 특유의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도’와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로 평론가와 게이머들에게 극찬을 받았던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 역시 판권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시간이 지나가버려 게임업계의 트렌드와 어울리지 않는데다 기획으로 나온 게임 난이도 어렵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기존 게임 자본에 투자를 받지 못하고 번번히 엎어져야 했다.


이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이뤄진 ‘후원’ 대부분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판명되어 가장 기초가 될 제작비용에 투자를 받지 못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례들이 많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속성은 어떤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간단히 설명하고 들어가볼까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사회학과 경제학을 설명할 때 등 헤겔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 이후로 등장했다. 처음엔 헤겔의 변증법-그것도 가장 급진적인 헤겔 좌파-에서 출발한 마르크스는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이 가지고 있는 현실 안주적인 사상을 거부하고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른 새로운 변증법과 포이어바흐가 주창한 유물론을 결합해 독자적인 철학을 만듬과 동시에 그 철학을 통해 사회를 종횡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는 사회학과 정치학, 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인물이 되었다.


 마르크스가 유달리 독보적인 이유는 이전 철학들을 종합하면서도 그 관심사가 기존의 철학자들하고 달랐으며, 그 시선이 가지고 있는 통찰력이 혁신적이였기 때문이였다. 그는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통해 제시되어 한창 각광 받고 있던한 자본주의 사회의 메카니즘을 규정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의 철학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당대 경제 순환을 이해하기 위해 공식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공식을 성립하는데에는 동료였던 경제학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향과 도움도 컸다.


 마르크스의 자본 순환 공식은 

 M->X-LP…C’…-> M’ (M+ △m)

 -MP


 이런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M=화폐자본, C=상품, LP=상품1 (노동력), MP=상품2 (생산수단), △m=잉여가치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생산수단은 에너지, 자연자원, 기계류, 토지, 건조환경 등으로 나눠지며 노동력은 노동력의 상품으로의 전환은 시초축적의 수탈과정에 의해 형성된다. 즉 이 공식을 풀이해보면 자본가가 화폐자본을 투입해 상품1인 노동력과 상품2인 생산수단을 사들여 잉여가치를 얻은 화폐자본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중심이 되는 화폐 가치론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 가치론에 대한 기호언어학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과 속 내용으로 나눠진다. 이 두 가지는 다시 질료, 형태, 실체로 다시 나눠지는데 표현의 질료, 형태, 실체는 화페의 물질성, 가격 (교환가치), 화폐체계로 나눠지며 내용의 질료, 형태, 실체는 미분화된 노동, 가치, 분화된 노동으로 나눠진다. 이 중 가치는 교환가치(표현-형태)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심층적인 형태인데 질료는 노동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를 통해야 드러나는 표현의 형태는 화폐 그 자체다. 


 그렇다면 텀블벅에서 올라오는, 사회에서 교환가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화 프로젝트 중에서 TRPG, 구식 컴퓨터 게임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서브컬처, 하위 문화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위 문화는 어떤 것인가?


 하위 문화 또는 서브컬처(subculture)는 한 사회에서 정통적・전통적인 위상을 지닌 문화에 대해, 그 사회의 일부 집단에 한정하여 일정한 위상을 지닌 문화를 가리킨다. 그 예로는 대중문화, 도시문화, 청소년 문화 등이 있다. 지배적인 문화나 체제를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서브컬처는 카운터컬처(대항문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위문화 또는 부차적 문화라는 역어로 불리기도 한다. 


 용어의 기원은 1950년에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사용한 것이 최초이다. 의미는 ‘주류문화에 반하는 개인의 모임’이었다. ‘서브’(sub)란 사회적 주류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일탈한, 인종적으로 소외된 그룹이나 스트리트 칠드런(street children), 동성연애자 등의 하위집단이란 의미로, 미디어 문화 이외의 가치관과 행동양식, 언어 등, 원래의 ‘문화(컬처)’에 대응하는 의미에서 서브’컬챠’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문맥상으로 주로 다음과 같은 용법이 있다. 

 1. 사회의 지배적 문화로부터 일탈한 문화 양태, 언어, 종교, 가치관 등을 포함하고, 사회학 분야에서 주류 문화와의 상대 개념으로 이용된다. 

 2. 회화나 순문학, 클래식 음악 등의 하이 컬처에 대하여, 주로 소수파에 속하고 취미성이 강한 문화를 가리킨다. 

 3.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특촬물, 피규어 등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한 오타쿠 문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1항이 원래의 의미로, 경제 성장과 도시화, 그에 따른 대중문화 저변의 확산 등으로 인해 2나 3항에 해당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어느 경우에도 ‘기성문화에 대비되는 2차적인 측면’이라는 함축적인 뜻이 있다. 한자어로 ‘하위문화’라는 번역이 통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 것으로 보인다. 또, 미대생이나 아티스트 지망생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나 문화를, 상업성에 기반한 기존의 문화와 구별하려는 뜻에서, 컬처럴 스터디스(cultural studies)적인 의미를 담아서 서브컬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점에서 보자면 언급한 TRPG나 게임은 2, 3번에 속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서브 컬처에 대한 개념과 마르크스의 이론을 통합해서 크라우드 펀딩을 살펴보자면 크라우드 펀딩에 올라온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상품에 대한 계획도 있고 노동력과 생산수단에 대한 계획도 있는데 잉여가치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 ‘주류’ 투자 자본 권력에서 버려진 ‘하위 문화’들이며, 크라우드 펀딩은 그 기존 투자 자본 대신 새로운 투자 자본을 얻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하위 문화가 주류에게서 교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건 아니다. 비디오 게임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새로이 떠오르는 문화 산업으로 각광 받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엄청난 거금이 투입되어 게임이 나오는 경우도 있으며 웨이스트랜드2 역시 그 교환가치를 인정받을 뻔 했다. 한국의 TRPG 책들 역시 크라우드 펀딩으로만 나온 것도 아니다. 당장 이번 레포트의 주인공인 초여명 역시 자비로 겁스GURPS라는 룰북을 기존의 출판 방식으로 번역 출판한 선례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사례에서 언급한 198-90년대 컴퓨터 게임들은 그 거금의 투자에서 항상 제외되어 왔으며 한국 TRPG 서적 판매량은 처참하거나 간신히 적자를 메꾸는 수준이여서 2013년 6월 현재까지 서점엔 겁스 한 권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나마 주류 문화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영화나 음악 같은 경우엔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TRPG나 비디오 게임은 아직까지 주류 문화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기에 상업적인 자본에 100%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텀블벅이나 킥스타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한 크라우드 펀딩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기존 투자 문화에 대한 역습이라 할만한다. 그렇다면 점으로 살펴본 문화 산업 같은 경우엔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문화하고도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다. 컴퓨터 게임 분야는은 애시당초 컴퓨터 기술에서 출발한지라 이런 쪽은 발달되어 있는 편이다. 게임 제작자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의견을 피드백하는 등 활발한 의견 주고 받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그 문화나 생태가 잘 안 알려진 TRPG는 어떤가? 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TRPG 문화 같은 경우엔 TRPG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RPG세션이라던가 네이버 TRPG 카페를 통해 구인글을 올려서 구인을 하는 형식으로 플레이어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커뮤니티를 TRPG 사업을 하는 사업자들 (ex. 초여명, 롤) 역시 주목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이 사람들은 이 커뮤니티와 소셜 네트워크, 텀블벅 프로젝트를 오가며 분주히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 유저들은 그것들을 보고 후원을 하고 관심이 있는 소셜 네트워크의 다른 사회적 인자에게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이 발달하고 그 하위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층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정착하고 나아가 소셜 네트워크를 향유하게 되면서 크라우드 펀딩 열풍에 기여를 한 게 된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하고는 큰 관계가 없지만, 이런 과거 하위 문화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끈 후원자들 대부분이 한때 유행했던 당시 하위 문화의 향유자이며 대부분 사회에 들어서면서 재력이 생겼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대표적으로 팀 셰퍼의 후속작이라던가 웨이스트랜드2 같은 8-90년대 어드벤처/게임 후속작에 대한 폭발적인 크라우드 펀딩 열풍은 8-90년대 게임을 즐기며 자라왔던 영미권의 1-20대들이 나이를 먹어 사회에 진출해 돈을 모았다는게 중요한 성공 요인이라 생각한다. 한국 TRPG 출판 크라우드 펀딩 열풍 역시 1990년대 잠깐 불었던 한국 TRPG 열풍 당시에 향유층이였던 젊은 세대들이 나이를 먹고 어떤 사업에 투자할 재정적 여력이 됬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이 두 케이스에서 새로 들어온 젊은 세대의 투자 비율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운동 자체가 어떤 향수나 복고하고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TRPG나 198-90년대 컴퓨터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RPG 게임들은 다시 첨단 유행을 탈 것 같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론

 보통 TRPG나 컴퓨터 게임 같은 게임 문화는 문화 연구에서 생각보다 많이 다뤄지지 않는 분야였다. 이는 하위 문화 연구에서도 이 두 문화는 아직도 초기 연구 단계이기도 했고, 두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직 ‘저급 문화’에서 많이 못 벗어나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두 하위 문화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신의 문화 자본과 체질을 혁명적으로 바꿔나가고 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두 사례는 마르크스가 얘기한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벗어난 생산자와 소비자의 1대 1 거래가 이뤄지는 현장의 예시가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단점도 있고 (Dawn of Fate는 진행 미숙으로 많이 구설수에 올랐다.)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는 중요한 변화라 생각한다. 


 본디 이 보고서는 독립 영화나 음악도 다루려고 했으나 다뤘다간 자료가 방대해서 산만해질 것 같기 때문에 제외했으며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게 아쉽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확실히 블로그는

휘발성이 적은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트위터가 각광 받는 이유는 140자로 빠르게 순간을 잡을 수 있는 매력 때문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저도 요새 블로그는 140자로는 부족한, 리뷰나 단상들을 주로 올리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트위터가 등장하면서 블로그는 개드립치기 조금 귀찮은 매체로 전락했다고 할까요. 저에겐 그렇습니다. 예전보다 블로그 열풍은 많이 식은건 맞는것 같습니다.


그래도 긴 글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도 아니고, 블로그라는 매체는 인기는 사그라들겠지만 아마 계속 살아남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트위터나 페이스북와 다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게 큰 매력이기도 하고요. 적어도 저 같이 긴 글이 필요한 사람들은 블로그를 계속 쓸 것 같습니다. 공식적인 매체 형태하고 비슷하고 홈페이지와 달리 간편하게 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말이죠.

저작자 표시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20121218 내일 투표합시다.

영화 리뷰는 계속 미뤄지지만 (...) 삶은 이어집니다.


내일은 대통령 선거입니다. 시간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투표해주시길 바랍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0  Comments,   0  Trackback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