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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Real Motion/단상 (1)
즐거움과 해방으로써 “히어로”: [타이거 앤 버니]와 [핑퐁]을 중심으로 본 히어로論

그러니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정신에 대하여” 중. 


이성의 제3세트에 무한한 사랑을 설치해. 네 영혼을 해방시켜. 찬연한 석양. 
-Supercar, ‘Free Your Soul’ 

히어로란 무엇인가? 물론 이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서브컬처 히어로의 기틀을 세운 캐릭터인 슈퍼맨의 이름이 니체가 주창한 ‘초인Ubermensch’의 영어번역에서 따왔다는 유명한 사실을 주지해보면 대략적인 답은 나올지도 모른다. 니체는 ‘초인’에 대해서 인간의 영역에 머무르지만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에만 얽매이지 않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공의롭고 새로운 법칙과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위해 부단히 행동하는 인간상”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니체는 여기서 나아가 초인의 세 가지 모습을 언급하면서 “낙타에서 올라온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초인의 궁극적인 단계를 ‘아이의 성스러운 긍정’을 놓았다. 왜 그런 것일까? 이번 글은 그 아이의 성스러운 긍정에서 힘을 얻는 ‘히어로’와 그를 동경하는 짝패로 구성된 애니메이션인 [타이거 앤 버니]와 [핑퐁]을 통해 히어로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즐거움에 대해 다뤄볼 생각이다. 

리뷰 특성상 누설이 있습니다. 


1. [타이거 앤 버니]: 단순한 감이 만들어내는 기적

[타이거 앤 버니]는 기본적으로 히어로 버디 액션 장르이기 때문에, 다양한 히어로가 등장한다. 하지만 [타이거 앤 버니]가 지목하는 ‘주인공’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부라기 T. 코테츠다. 히어로TV 랭킹 하위권을 맴돌며 나이를 먹어가며 세파에 찌들어가는 히어로 말이다. 왜 [타이거 앤 버니]는 그를 주인공으로 지목하는가?

우선 코테츠라는 인물을 보자. 그는 현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구시대적인 히어로의 가치에 매료되어 있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기에 갓 파트너가 된 버나비가 스코어와 매체에 노출되는걸 신경쓰자 질책한다. 히어로의 마음가짐이란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말이다. 그가 말하는 내용 자체는 단순하고 원론적인 이야기고 ‘커머셜 히어로’라는 현실에서는 뒷전으로 밀러난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굳게 믿으며 자신의 행동 근거로 삼는다. 그렇기에 1화에서 높으신 분들 연화 자리도 그냥 생까고 나오고 버나비를 유치하게 놀리는 다소 아이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그는 어른의 법칙과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거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아이와 어른이 공존하는 모습이야말로 코테츠 캐릭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코테츠의 이런 아이스러움과 어른스러움의 교차가 만드는 행동방식은 2화에서 버나비가 코테츠를 까면서 “아저씨처럼 감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나랑 맞지 않는다.”와 코테츠 본인이 “시뮬레이션은 별로…”라고 하는 대사로 요약된다. 이 대사를 통해 우리는 코테츠의 행동 양식이 버나비의 시뮬레이션과 대척되는, 어떤 단순한 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시대적 히어로의 가치와 결부되어 순수한 운동감를 만들어낸다.

즉 사람을 구하는게 “히어로로써 본연의 임무”라는 믿음과 단순한 감이, 순수한 운동감이 담긴 액션을 만드는 것이다. 3화에서 폭탄을 처리할때 고민 끝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과 동선, 그리고 ‘타격’감이야말로 [타이거 앤 버니]가 주는 순수한 운동감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토 감독과 니시다 각본가는 코테츠가 탑을 뚫고 버나비가 폭탄을 차서 하늘 위로 날려버리는 동선으로 액션 장르의 기본적인 쾌감을 보여준다. 상황이 종료된 후 버나비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했냐는 질문에 ‘순간적인 판단으로…’라고 말하고 코테츠는 ‘그게 감이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들을 통해 [타이거 앤 버니]는 이 단순하고 즐거운 동선이 만들어낸게 ‘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감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운동감의 결정판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해내는 ‘결정타’인 ‘굿 럭 모드’다. 재미있는게 이 굿 럭 모드는 실제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기술이다. 하지만 굿 럭 모드가 주는 타격과 그 쾌감은 화려하고 즐겁다. 왜냐하면 이 ‘굿 럭 모드’는 히어로로써 난관을 극복하는 ‘상징’으로써 액션이기 때문이다. 그 액션이 ‘실용적’인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타격과 동시에 [타이거 앤 버니]의 ‘순수한 운동감이 담긴 액션’을 만드는 요소로는 ‘기지’가 있다. 1쿨 마지막. 제이크가 불러온 첫번째 위기에서 코테츠는 자신의 불찰로 버나비를 화나게 하고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제이크에게 패한다.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 이 와중에 제이크는 히어로들을 비웃으면서 “생각해봤자 소용없어”라고 하는데, 이 대사가 되려 제이크에게 한방 먹이는 코테츠의 한방이 된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코테츠는 아픈 것을 무릎쓰고 달려가 버나비가 히어로로써 활약할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뒤엎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승리로 이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타격’만큼이나 ‘기지’도 [타이거 앤 버니]의 액션의 쾌감에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코테츠는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든 돌파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 것일까? 3화에서 코테츠는 카리나에게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히어로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마음가짐은 미스터 레전드에서 물러받은거라는건 2화부터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뒤, 코테츠는 “누군가 인정을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한다. 이를 통해 [타이거 앤 버니]는 코테츠의 동력이 인정욕구가 아니라는걸 명백히 한다. 그렇다면 의무일까? 물론 의무도 중요하긴 하지만 단순히 의무라고 단정짓기엔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다. 코테츠는 히어로로써 진심으로 즐기고 있고 그 일에 열심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해답은 3화에서 코테츠가 레전드 상을 보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장면과 16화에서 여러 일들로 상심한 코테츠가 미스터 레전드의 영상을 보는 장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때 레전드를 보는 코테츠의 표정은 천진난만하다. ‘그래 저런 좋은 시절이 있었지…’라는 애잔한 표정이 아니라 아직도 그 시절에 머물러있는듯한 표정이다. ‘그때에 머무른듯한 반짝반짝 빛나는 표정’이야말로, 단순히 의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에 있고 그것이 그만의 히어로의 법칙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코테츠의 천진난만한 표정에 담긴건 아마도 ‘단순하고 순수한, 살아있다는 즐거움’ 아닐까? 미스터 레전드와 코테츠가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자신을 부정하는 코테츠에게 미스터 레전드는 ‘그것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힘이다.’라고 말해준다. 그 말을 들은 코테츠는 웃는다. 그때까지의 코테츠의 태도를 보면 그 웃음은 능력을 얻은 뒤 처음으로 웃었던 순간이였을 것이다. 이 웃음과 웃음에서 파생된 벅차오름이야말로 코테츠의 동력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 레전드로 대표되는 ‘히어로’는 코테츠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긍심을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을 나눠준 처음으로 느꼈던 긍정과 희망, 충만함이 그를 지금까지 이끌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자신이 느꼈고 지금도 믿고 있는 그 충만한 ‘살아있다는’ 감정과 감각을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점들은 코테츠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이는 똑같은 자기 부정에 시달렸지만, 결국 사회를 거부하고 붕괴시키려고 했던 크림하고 완벽하게 대조된 것이다.

물론 그런 자신감은 작중 내내 항상 솟아오르는게 아니며 오히려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예전에도 몇 번 흔들리기도 했지만 코테츠는 이해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넘어오곤 했다. [타이거 앤 버니]의 2쿨은 코테츠의 자기긍정이 흔들리는데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믿었던 미스터 레전드가 감추고 있던 어두운 면과 능력이 1분이 감퇴해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면서 코테츠도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히어로로써 싸울 수 없는 상황이 실제로 등장하게 되자, 코테츠는 낙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가족을 지킬수 없다면 어떻게 히어로가 될 수 있냐고 ‘가족’을 선택하고 히어로로 은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버나비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걸 몰랐기에 코테츠의 선택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게 쓸쓸히 바에 앉아있던 코테츠는 버나비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알게 된다. 어느새 버나비가 코테츠를 ‘히어로’로써 자신을 동경하고 그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와 관련해서 1쿨 마지막에 등장하는 중요한 대사가 있다. 자신이 코테츠의 임기응변을 믿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거냐고 질책하는 버나비에게 코테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나를 믿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이 대사는 ‘히어로’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 버나비는 코테츠를 믿게 된 것일까? 아마도 버나비 역시 어느 순간 ‘히어로 코테츠’를 통해 자기를 긍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복수만을 생각해오고 그것이 히어로의 동력이 되었던 버나비는 자신의 고독과 상처를 철두철미한 계산, 거만함과 쇼맨십으로 가면을 쓰면서 세상을 대해왔다. 하지만 그 가면 속에는 상처받고 주눅든 아이가 있었다. 9화에서 버나비의 이런 숨겨져있던 아이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부모님이 준 장난감을 부서트리지 않으려고 집중해 받아낸다던지 결국 “부모에게 받은 물건은 소중히 해야죠” 하면서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아 온다. 이때 하는 코테츠의 대사는 의표를 찌른다. “의외로 유치하다?”

그렇다. 버나비의 ‘시뮬레이션’과 ‘선배는 비상식적이에요.’라는 대사들 속에는 어린 아이가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버나비는 유년기의 즐거움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돌아가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가면을 쓴다. 그런데 코테츠는 계속 그의 마음을 두들긴다.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코테츠는 ‘즉물적인 본능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즐거움’을 계속 버나비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게 코테츠는 버나비에게 “다른 사람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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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코테츠는 버나비가 위기에 처해있을때 달려와준다. 버나비가 자신을 믿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을 향해 달려와주는 코테츠의 순수한 모습에 버나비는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을 보답받고 즐거워하게 된다. 처음으로 “과거와 가면에서 벗어나 어디론든지 날아갈 수 있겠다는 자기긍정”을 얻게 된 것이다. 허나 코테츠의 자기긍정이 흔들리는 2쿨에서는 이 관계도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여기서 코테츠와 버나비가 싸우다가 헤어지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버나비가 평소와 달리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걸 볼 수 있다. 버나비는 “평생 과거에 사로잡혀 살 거”라고 말하며 두려워한다. 겨우 과거에서 떠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새로운 진실이 자신을 붙잡는걸 두려워하고 있다. 그 와중에 가족을 선택하겠다는 코테츠의 말은 버나비에게는 히어로가 다시 자신을 버리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버나비를 매버릭이 구워삶는것은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코테츠는 결국 본의아니게 자신이 버나비와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걸 깨닫고 반성한다. 결국 그는 다시 그들에게 달려와 히어로로써 다시 어둠과 맞서 싸운다. 그 어둠은 기억을 조작해 영원한 거짓을 만들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그답게 터무니 없다. 쿠소 슈츠와 과거의 장소로 데려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작전.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심지어 오랜 친구인 벤마저도 한탄할 정도니. 하지만 그것이 또다시 기적을 불러일으켜 불가능을 역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리고 최후의 싸움에서 그는 생사의 도박에 자신을 내던진다. 뒤늦게 능력감퇴를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슬퍼하는 버나비에게 죽어가던 코테츠는 이렇게 말한다. "바보. 알면 안 되지. 숨기고 있는 것인데."

왜 코테츠는 능력이 감퇴하는 걸 버나비에게 숨기고 생사의 도박에 자신을 맡긴 것일까? 죽어가면서 코테츠는 버나비랑 함께 다녔던게 즐거웠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분명하게 히어로로써 싸우는 것이 힘들때도 있지만 즐거운 순간이 있다고 긍정한다. 그렇기에 생사마저 아무래도 좋을 만큼, 한계를 뛰어넘어 반드시 즐거움을 지키고 이기겠다는 즉물적이고 순수한 본능이 코테츠를 뛰어들게 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저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더이상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코테츠는 사람을 지키는 히어로로써 믿음을 생각할 틈새도 없이 H-01를 잡아채는 것으로 순수한 운동을로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히어로로써 다시 기적을 일으킨다. 에너지건을 맞고도 코테츠는 또다시 상식을 뒤집어엎고 벌떡 일어나 어둠을 몰아낸다. 그리고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떤다. 그 웃음 속에서 코테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인다.

그렇기에 히어로가 절망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 절망을 주겠다는 매버릭의 궤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절망을 인위적으로 줘서 히어로가 빛나는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적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히어로가 빛난다고 그는 믿고 있다. 능력이 1분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점점 퇴물로 밀려난다고 해도 그는 절망과 싸울 수 있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마지막엔 자신이 동경했던 미스터 레전드마저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타락해버린 미스터 레전드와 달리 그는 정말로 ‘히어로로써’ 즐거워하고 있고 살아있다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기적을 일으킨다. 코테츠의 매력과 힘은 ‘상식을 뒤엎고 단순하면서도 즐겁게 빛나기’ 때문에 있다.

마지막으로 코테츠는 히어로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버나비도 자신을 찾겠다고 떠난다. 히어로업계에서 떠나 잠시 고민하던 버나비는 부모님 무덤을 보다가 1104+728=10313329라는 숫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것은 부모님 생일 그리고 자신의 생일과 탄생 당시 무게였다. 동시에 버나비는 부모님과 함께 했던 짧았지만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다른 사람을 지키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자기긍정과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자신의 과거에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버나비는 히어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엔 "자기 한계는 자기가 단정짓는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평범해진다 해도 언제든지 즐겁게 히어로로써 싸워나가는 코테츠가 있다.

[타이거 앤 버니]의 코테츠가 매력적인 어른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어린아이의 즐거움을 누구보다도 믿고 신뢰하고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하고 즐겁고,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런 코테츠의 행동양식과 거기서 파생되는 액션이야말로 [타이거 앤 버니]가 제공하는 장르적인 쾌감이기도 하다.


2. [핑퐁]: 순수한 가속과 비행으로 자유로워지는 영혼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유아사 마사아키의 [핑퐁]에 등장하는 히어로는 분명 [타이거 앤 버니]의 히어로랑 다르다. 궁극적으로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장르에 속해있기에 히어로의 위치는 상이할 수 밖에 없다. [핑퐁]은 스포츠 만화이기 때문에 정의나 도덕의 문제로 넘어가지 않고, 재능과 노력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렇기에 핑퐁의 히어로는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는 아니며 오히려 은유에 가깝다. 또한 이미 성장이 끝난 [타이거 앤 버니]와 달리 [핑퐁]의 등장인물들은 아직 젊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개념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 두 작품의 히어로가 원동력이 의외로 닮아있으며, 그 원동력이 주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과정이 비슷하다는게 재미있다. 그렇기 때문에 [핑퐁]은 장르적인 도구들에 가려졌던 [타이거 앤 버니]의 ‘히어로’보다 ‘히어로’를 구성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들을 더욱 순수한 밀도로 보여준다.

차이점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구도에서 악을 물리치는데에서 ‘순수한 운동감’이 드러나는 [타이거 앤 버니]와 달리 [핑퐁]은 캐릭터간의 1대 1 대결 구도에서 ‘순수한 운동감’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두번째로는 작품을 지배하는 ‘순수한 운동감’이 어디서 비롯되는가가 있다. [타이거 앤 버니]는 히어로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액션의 동선 (“굿 럭 모드”)에서 구체화된다면, [핑퐁]이 주는 순수한 운동감은 가벼운 탁구공의 ‘비행’, 그걸 쳐내는 선수들의 ‘가속’으로 구체화된다. 특히 ‘가속’과 ‘비행’이야말로 ‘타격’과 ‘기지’로 대표되는 [타이거 앤 버니]의 액션의 쾌감과 차별화되는 [핑퐁]만의 액션의 쾌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타이거 앤 버니]에도 날아다니는 스카이 하이가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 순수한 운동감은 ‘정의와 도덕을 수호하는 자로써 히어로’라는 개념에 얽매여 있지 않기에 어떤 깨달음의 경지로 묘사된다.

또한 [핑퐁]은 스포츠 만화답게 실력이 캐릭터를 분류하고 계급을 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잡고 있다. 그냥 평범하게 재미로 탁구를 치는 사람들, 노력으로 올라온 사람, 원래 재능이 타고 났던 사람, 재능을 숨겨왔다가 드러냈던 사람 등등… 그리고 이 실력은 대결의 승패로 캐릭터의 희비와 행로가 엇갈리기도 한다. 페코가 과신하고 까부는 것도 그 실력이 만들어내는 작중 계급에서 상위 계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핑퐁]과 [타이거 앤 버니]의 큰 차이를 또 하나를 꼽으라면 이 부분이 있다. [타이거 앤 버니]의 코테츠는 상위 계급은 커녕 하위 계급이며, 실력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활약이 얼마나 노출되느냐가 중요한 현실적인 척도로 자리잡는다. 

햐지만 핑퐁의 세계에서 대결의 승패로’만’ 판가름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실력으로만 보자면 콩웬거 (차이나), 스마일이나 카자마 류이치 (드래곤), 페코 모두 출중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스마일이나 차이나, 드래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페코만의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히어로’로써 자신감과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핑퐁]의 히어로는 다시 [타이거 앤 버니]가 보여줬던 히어로에 가까워진다.

당연하겠지만 [핑퐁]의 히어로는 능글능글한 호시노 유타카 (페코)다. 페코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위기일 땐 날 불러! 마음 속으로 세 번 불러!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그럼 내가 달려올께. 핑퐁 별에서 달려올께!”

원작에서나, 애니에서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 대사를 통해 [핑퐁]은 페코를 히어로로 각인시킨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페코도 코테츠만큼이나 철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탁구 훈련이나 학교 시험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고 유유자적 놀러다니거나 내기 탁구를 치고 웃어른에게도 반말을 쓰고 과자를 처묵처묵한다. 때론 ‘나는 탁구로 세계에서 짱 먹을꺼야. 그러면 이 탁구장은 유명해지겠지.’라던가 ‘노력은 재능없는 녀석들이나 하는거야’ 같은 유치한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다만 페코의 경우 나이차 때문인지 코테츠와 달리 훨씬 유치하고 싸가지 없으며 (…)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 곁들어져 있긴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페코를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스마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가 철없긴 하지만 누구보다도 남을 생각하는 아이라는게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화에서 페코는 스마일에게 “너랑 같이 있으면 즐거워”라고 말하며 ‘코이즈미 선생님이 널 생각해서 그런 말 하는거야’라고 진지한 충고를 던진다. 장난스러운 태도지만, 이 대사에서 우리는 페코가 스마일을 진심으로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걸 드러내고 있다.

페코가 추락하는 것은 그 ‘히어로’로써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페코 잘못이 크다. 페코를 좌절시킨 두 대결을 자세히 보면 페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차이나와의 대결은, 자신의 실력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위에는 더 위가 있다는 걸 깨닫게 했고 아쿠마와의 대결은 노력이 없는 재능은 썩기 쉽다는걸 드러냈다. 코테츠의 추락처럼 페코의 추락은 히어로를 기반하고 있는 능력에 대한 불신과 의혹에서 찾아온다. 그리고 끝내는 그 능력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사표 쓰고 낙향 시도=라켓 폐기)

그리고 히어로 각성의 계기 역시 [타이거 앤 버니]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탁구를 포기하려고 했던 페코는 ‘너는 나의 히어로였다’며 탁구를 계속하라는 충고하는 아쿠마와 타무라 탁구장에 걸린 사진을 보면서 알게 된다. “아쿠마가 왜 자신을 질투하면서 그런 충고를 해줬는가”하고 “스마일이 정말로 웃었던 순간”을. 그리고 그 둘을 이끌었던게 자신이였다는 걸 깨달으면서 페코는 다시 탁구를 치기로 한다. 스마일은 “히어로 페코”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고,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써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스마일은 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려왔다. 왜냐하면 페코가 너무 실력에 자만한 나머지 히어로로써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페코는 “그 녀석이 웃지 않는건 내 탁구가 째째해져서야.”라고 자조한다. 버나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자조한 코테츠처럼, 페코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에 취해 스마일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한다. 그렇기에 페코는 자신을 평생토록 부르고 있는 스마일에게 달려가고자 한다.

페코가 달려가려고 하는 스마일이야말로 “히어로 페코”를 통해 사람이 변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일 것이다. 히어로의 극단에 있는 스마일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인데, 흥미롭게도 스마일의 과거는 코테츠나 버나비의 어린시절처럼 자기 부정으로 차 있다. 부모의 이혼과 바쁜 어머니에게서 많은 정을 얻지 못했던 그는 감정을 숨기는 것으로 세상을 대처해나간다. 그렇게 살아가던 스마일은 페코를 만나게 된다. 페코는 자기를 긍정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아는 아이며, 친구를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페코를 통해 탁구를 배우면서 스마일은 ‘웃게’ 된다. 탁구를 하면서 ‘웃어서’ 스마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윽고 스마일에게 탁구는 본능적인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페코의 나태함 때문에 탁구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자 스마일은 다시 혼자가 되고 아무런 열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매사를 방관하는 식으로 세상에 대응하려고 한다. (1화에서 “감정을 표현하는데 지쳤거든요.”)

2화에서 그가 탁구에 각성하는 장면을 보자. 문을 닫고 ‘히어로 등장’을 외치는 스마일에게 로봇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때 로봇이 하는 말이 “히어로는 오지 않아.”다. 히어로의 부정. 이 부정 뒤에 “너는 기계다”라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 순간 스마일의 팔은 로봇의 눈과 팔처럼 변이해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준다. 이 변이야말로 스마일이 세상과 맞서는 새로운 방책에 눈을 떴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페코가 더 이상 그에게 오질 않자, 스마일은 방관자에서 벗어나 철갑옷과 무기를 두르고 세상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 뒤 유별나게 스마일의 태도가 차가워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도 그런 변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버나비가 가면을 써 세상을 대한다면 스마일은 세상에게서 한발짝 멀어짐으로써 세상과 대한다.

그렇지만 스마일은 끝내 드래곤처럼 냉정해지지 못한다. 아쿠마가 퇴출 당한 뒤, 스마일은 이적을 권유하는 카이오 학원를 거부한다. 그리고 죠에게 말한다. “저도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결국 이 대사를 통해 스마일은 자신이 로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6화에서 아이들이 “로봇은 폭주했지만 사실은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라는 대사는 그런 스마일의 철갑 아래에 있는 꿈틀거리는 감정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히어로를 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페코는 스마일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순수할정도로 ‘즐거움’과 ‘자기긍정’의 감정이 인물들을 변화하게 하는 촉매가 된다는 점에서 [핑퐁]은 [타이거 앤 버니]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두번째 인터하이에서 페코와 드래곤의 경기를 보자. 여기서 페코는 무릎 부상으로 움직이는 것에 제약을 받게 된다. 수세에 몰리며 드래곤에게 ‘히어로’로써 자격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던 페코에게 스마일은 말한다. “페코라면 즐겁게 칠 수 있어. 놀 상대가 강할 수록 높이 날 수 있다고.” 그리고 페코는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있던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킨다. 이때 차이나는 이 경기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탁구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는 느낌이야."

페코의 이런 단순한 즐거움은 두 인물을 변화하게 한다. 먼저 드래곤. 그의 세계는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제왕적인 카자마 가에서 자라난 그는 새처럼 날고 싶었지만 날 수 없고 좌절하다 죽은 아버지를 보고 자유롭게 날고 즐기는 즐거움과 해방의 감정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믿고, 오로지 ‘자신의 힘’만을 믿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드래곤의 탁구는 외롭고 고독하다. 스마일의 고독이 예민한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라면 드래곤의 고독은 최정상으로 올라가야지만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받을 수 있다는 불안함과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가혹하게 페코를 밀어붙인다. “히어로는 사람을 구해야 되는것 아니냐”고. 하지만 이는 히어로를 증오해서가 아니다. 애니판에서만 추가된 유리에의 “류짱은 누구보다도 히어로를 기다려왔으니깐.”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 머무를것 같은 두려움 말이다.

그 대답에 응하듯이 자신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게 된 페코는 마음껏 가속하면서 ‘히어로’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러버나, 무릎 부상, 신발 같은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좋아지고 날아다닐수 있다는 순수한 운동감이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신기하게도 그 ‘히어로’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 드래곤과는 달리 매우 천진난만하다는 것이다. “탁구라는 건 엄청나게 재미있는거라고!” 그 천진난만함은 드래곤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탁구 때문에 즐거워했던 유년 시절을 깨우고 마침내 산을 타고 고통스럽게 가던 드래곤조차 날게 한다. 드래곤은 이렇게 말한다. “전신의 세포가 미칠듯이 좋아하고 있어. 가속하라고 명령하고 있어. 가속해. 가속해.”

이 신체마저 떨리게 하는 가속이야말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운동감의 극한이다. 그리고 가속은 비행에 도달하고자 하는 움직임 중 하나라는걸 생각해보면 . 그 가속 끝에서 드래곤은 “히어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여긴 정말 좋구나.”라고 말한다. 이제 이 순간부터는 승패조차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 가속 자체가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궤뚫는 기제가 된다. 더 이상 날아오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도 드래곤은 더이상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아올랐다는 것과 그 기회를 제공해준 히어로를 기뻐한다. 코테츠가 번잡한것들에서 해방되어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하고 히어로로써 가치를 통해 버나비와 동료들을 자유롭게 해준 것처럼, 페코도 드래곤에게 자유로워질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날아오르게 한다. 그리고 페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한다고 드래곤.”

이 사랑은 아가페적인 것이다. 생의 즐거움을 함께 나눠가지는 것. 그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자는 것. 그렇기에 페코는 코테츠처럼 자신의 아픔과 한계을 무릅쓰고, 아니 그것을 초월하고 가속한다. 그리고 드래곤에게 사랑을 준 뒤 날아올라 스마일을 향해 간다. 히어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스마일에게. 이 순수할 정도로 긍정적인 에너지. 즐거움의 감정. 그것이 발생시키는 엄청난 속도와 비행. 이 모든 것이 페코한테서 흘러넘친다. 그 와중에 스마일은 페코의 공을 받으려고 하다가 상처 입는다.

이때 스마일을 둘러싸고 있는 철갑옷은 깨져 나가고, 핏줄이 흐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참고로 이 로봇 연출은 유아사 마사아키의 오리지널이다. 매우 [케모노즈메]스럽다고 할까.) 무채색의 화면 속에서 스마일은 붉게 빛나는 자신의 피의 맛을 느끼면서 “밖의 쇠를 부술 수 있는 안의 쇠,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에 원래부터 있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페코와 스마일은 상처와 아픔마저도 아무렇지 않다. 그리고 최초의 즐거움으로 돌아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마지막에 스마일이 흘리는 눈물은 그 살아있음에 대한 희열과 그걸 깨우쳐 준 히어로 페코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리고 스마일이 숨어있던 창고에 문을 열고 손을 내밀는 어린 페코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 희열의 순간이 끝나고 난 뒤에도 등장 인물들은 히어로가 준 ‘살아있음을 느낄수 있는 힘’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탁구 선수를 그만두었지만 스마일은 이제 페코의 활약상을 보며 스스로 웃고, 뭘 할지 몰라서 꺼려했던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모두들 자기 길을 달려가고 한때 길을 잃고 헤매던 아쿠마와 에가미도 즐겁게 살아간다. 그리고 슬럼프에 빠져 이대로 끝날까 두려워하는 드래곤에게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선수 저 의외로 좋아해요.”

그렇다. 코테츠가 능력 1분이라는 한계 때문에 점점 평범해진다 해도, 버나비는 그를 내치지 않는다. 왜냐면 즐거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즐거움을 알게 된 스마일은 재능도, 노력도 결국 지금을 즐겁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걸 알게 된다. 평범해진다고 해도, 지금의 즐거움을 느낄수 있다면 괜찮노라고 스마일은 드래곤에게 말한다. 그리고 스마일은 페코가 버렸던 라켓을 발견해 바다를 향해 던진다. 한때 꿈을 포기할뻔했지만 이젠 훨훨 날아가는 페코를 스마일은 응원한다.

3. 결말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는 글에서 지성을 시각으로 묘사하면서 “언제나 재구성하려 하며,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기에 창조를 배척한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베르그송은 지성이 “무생물이나 물체를 다루는데는 능하지만 생물을 다를때는 곤란을 겪는다”고 보았다. 반대로 본능에 대해서는 촉각으로 묘사하며 “생명의 형식 그 자체를 본떠 만들어진 것”이며 “유기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본능은 생명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가르쳐줄수 있는 존재”라 보았다. 이런 베르그송의 지성과 본능에 대한 통찰이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히어로 알렉시스 조르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조르바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들은 ‘펜대 운전사’인 주인공을 해방시킨다.

그렇게 본다면 ‘히어로’라는 것은 결국에 본능이라는 생명의 형식이 가지고 있는 가치, 나아가 본능이 가장 1차적으로 느끼는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존재 아닐까? 코테츠가 ‘히어로’의 가치에 집착하는 것도, 버나비와 그의 동료들이 그가 추구하는 히어로상에 매료를 느끼는 것도, 스마일이 그토록 애타게 히어로를 기다렸던 이유도, 페코가 아픔을 뛰어넘고 히어로가 되겠다고 각오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달려올 수 있는, 살아있다라는 은밀하고도 위대한 즐거움. 이것이야말로 ‘히어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쾌락 아닐까?

돌아온 히어로를 반기면서 스마일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이야말로 이 글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히어로는 상식을 뒤엎고, 어둠을 몰아낸다. 무엇보다 단순하고 밝고 즐겁고 빛나고 있어.”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쾌락을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로부터 격리된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정신에 대하여” 중.

P.S.

[킬라킬]에서도 마코와 류코 역시 그런 히어로와 그를 동경하는 평범한 짝패라는 구성을 이루고 있지만 마코는 위에 언급한 안경잽이들과 다르게 긍정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일치하진 않는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키려는 류코를 향해 ‘달려가는’ 마코의 즐거운 표정은 분명 히어로를 동경하는 자가 달려가면서 느끼는 순수한 운동감의 쾌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 류코가 센케츠를 완벽하게 입고 펄펄 날아다니며 누이를 공격하는 부분에서 센케츠가 기분이 최고라고 하는데 이것도 본문과 연계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에가미 우는 톤이 딱 파이어 엠블렘이여서 뿜었다. 참고로 성우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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