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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Real Motion/리뷰 (25)
이 세상의 한 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 In This Corner of the World] (2016)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의 시작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외화면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상물들은 결국 작품 속 세계 인식을 나레이션에다 기준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의 주인공인 우라노 스즈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평범한 일상물이다. 호감을 가진 남자가 있지만 중매로 구레 시에 사는 공무원 슈사쿠에게 시집간 스즈. 호죠 가의 시집살이는 그리 쉽지 않지만 스즈는 특유의 밝고 느긋함으로 어려움으로 견뎌나간다. 코노 후미요는 스즈와 호죠 가의 일상을 구성할 디테일을 빼곡히 알고 있고, 카타부치 스나오 역시 원작자의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하며, 모든 디테일을 평등하게 다룬다.

하지만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시대를 알리는 자막이 뜨는 순간 관객은 이 이야기를 미시사에만 맞춰 볼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2차 세계 대전 말기 히로시마 현 구레 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미시사를 구성하는 나레이션과 캐릭터하고 거시사를 구성하는 자막과 원경이 서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스즈는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레는 명백히 전시 상태이며, 스즈가 만나는 사람들은 얌전하지만 분명하게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둠을 담아내고 있다.

원작자 코노 후미요는 자신이 그리는 미시사가 미시사로 머물수 없다는걸 알고 있다. 원작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전작 [저녁뜸의 거리]의 피해자 코스프레 또는 가해자로써 일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한 대답도 담았기 때문이다. 코노는 다시 한번 [저녁뜸의 거리]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할머니가 경험했던, 전쟁 이전의 역사를 미시사로 구성하면서, 당시의 디테일이 담고 있는 정치성을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태극기 시퀀스는 일견 작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미시사에서 정치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카타부치 스나오는 코노 후미요와 똑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다. 일단 애니메이션을 보면 알겠지만, 원작은 중심 사건 없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2시간 이내의 통일된 각본을 쓰기 까다롭다. 카타부치 스나오는 원작을 각색하면서 야마다 요지가 200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떠올린 것 같다. 야마다 요지는 일련의 2차 세계 대전 영화에서 일상적인 영역에 어떻게 비일상적인 정치가 개입하는지를 다루었다. 카타부치는 야마다 요지의 성과를 이어받아 풍부한 일상사적 디테일들이 어떻게 거시적인 역사와 연결되는지, 관객이 어떻게 이걸 받아들어야 하는지 나레이션과 후경 간의 대립을 통해 질문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섬뜩한 부분 역시, 일상을 그리는 스즈의 순진한 나레이션과 대사가 아무렇지 않게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적 사상을 담아낼때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스즈에겐 폭탄은 형형색색 폭죽처럼 그려지고, 국가가 주입한 "결전복"이니 "대일본제국의 함"이니, "여자의 장기인 죽창" 같은 슬로건들은 순진한 목소리와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긴장 관계를 이룬다. 외화면에서 흐르는 목소리가 내화면에서 쏟아지는 폭격 소리 같은 부조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을 동화적으로 포장할때 카타부치 스나오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알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긴장 관계를 읽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오직 관객만이 스크린 외부 음향과 내부 음향 간의 대립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긴장 관계가 깨지는 순간, 영화는 스즈의 비정치성을 산산히 깨트린다.

영화의 초반부. 스즈는 어렸을때를 회고하면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후 이어질 현실적인 본편과 뚝 떨어진 이 환상적인 플래시백은 다소 이질적이다. 하지만 이 회고는 스즈의 유아적인 세계를 보여주면서, 스즈의 나레이션이 현실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걸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스즈는 주체적으로 주변 현실을 로맨틱하게 포장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지만, 딱 한번 주체적인 환상을 박탈당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스즈의 실수로 하루미가 죽었을때다. 이 순간 카타부치는 냉정하게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이뤄진 장면들에다 스즈를 밀어넣는다.

더 이상 일상의 안온함은 스즈를 보호해주지도, 포근하게 상상할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잘려나간 팔처럼, 전쟁과 군국주의는 스즈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이 상흔이 어떤 의미인지 펄럭이는 깃발 앞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에서 세상 한 구석 역시 세상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한다. 어떤 지점에서 스즈의 울부짖음과 눈물어린 대사는 직접적으로 정치성을 담은 원작보다도 훨씬 통렬한 구석이 있다.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이뤄진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조. 그 회의와 자조가 한 인물의 유아적인 세계 인식을 깨트리면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정치 애니메이션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선언한다. 단지 작위적일 정도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담았던 원작과 달리 애니판에서는 이 부분의 연출이 평상시와 다를바 없이 그려지는게 아쉽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일본인들에게 원체험처럼 남아있는 원폭의 이미지인 하얀 빛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보여줄때 카타부치 스나오가 인용하는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비]다. 두 영화 모두 한 개인이 가족에 편입되려고 할때 핵폭탄이 터지고, 인물들은 하얀 빛을 맞이한다. 마치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을 전부 삭제 혹은 정화하려는 것처럼. 어쩌면 당신은 [이 세상의 한 구석에]를 [검은 비]의 프리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 비]가 핵폭탄 이전의 세계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는 것처럼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결국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일상을 유지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 시대가 끝난 자리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으로 부모가 죽은 고아 소녀를 입양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하루미와 팔은 돌아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스즈는 호죠 가로 대표되는 '세상의 한 구석'에 입양되고 입양함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반대로 친가족이었던 우라노 가는 전부 죽거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스즈가 알고 있던 두 세계 중 예전부터 알고 있던 (구)세계가 멸망하리라는 암시.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상흔을 안고 살아갈 스즈 부부. 카타부치 스나오는 후반부를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으로 설정한 뒤,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고아가 된 일본인들이 서로를 입양하는 것에서 살아갈 힘을 찾아낸다. 

영화의 결말은 다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다. 하지만 그 요괴는 더 이상 아이를 납치하지 않는다. 바구니는 텅 비어있고, 스즈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즈는 어른이 되어 정화된 (것처럼 보이는) 신세계를 살아간다. 영화는 거기서 마무리짓는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으로 그 시대를 돌아보는 작품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포근하면서도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은,  [검은 비]를 감싸고 있던 필사적인 삶을 행한 의지라던가 [유레카]에서 꿈꾸었던 대안 가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요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물었던 나와 세계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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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북 [La tortue rouge / The Red Turtle] (2016)

(누설이 있습니다.)

미카엘 두독 드 위트의 [아버지와 딸]은 그 자체로 걸작이었다. 삶과 죽음, 이별의 순환을 마음 아프게 그려낸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그전까지 조용하게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두독 드 위트의 명성을 단숨에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준 작품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쪽 사람들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구애가 여러차례 이어졌지만 이번에 리뷰할 [붉은 거북]이 나오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늦은 나이에 장편 데뷔하게 된 두독 드 위트의 장편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

두독 드 위트는 그동안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그의 드라마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인물들의 디테일은 최소화되어 있고, 어떤 행위 ([아버지와 딸]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기다림이었다.)의 반복이나 강조, 변주로 극을 꾸려간다. 그 와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이미지가 영화 내내 이어지는 액션을 보조하며 의미를 불어넣는다. 두독 드 위트는 대사를 비롯한 디테일이 영상의 기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감독이다. 단편에서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였다. 어차피 짧은 길이에서 복잡한 서사를 다룰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줄이는게 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편에서는 이 전략은 항상 성공적일수 없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이외에 채워야하는게 많기 때문이다.

우선 밝혀두자면 [붉은 거북]은 그의 단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장편은 아니다. 캐릭터 설정과 대사가 없다는 점, 서정적인 생로병사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 간결한 작화가 그렇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단편들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서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두독 드 위트가 장편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달라져야고 생각했던 것은, 풍경의 스케일이였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소박한 스케일이였던 그의 단편들과 달리 [붉은 거북]은 장편의 자유를 확실히 누리겠다듯이 광활한 하늘과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의 스펙터클에서 애니메이션을 꾸려간다. 그 점에서 보자면 [붉은 거북]은 [아버지와 딸]의 해변가와 언덕을 확장시킨 영화라 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식 난파극을 자처하는 [붉은 거북]이 재미있는 점은, 난파 이전 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부터 물에 빠져 있는 남자를 보여주며 시작한다는 점이다. 당연하겠지만 두독 드 위트는 그의 이름이 무엇이고, 이전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즉 이 남자에게는 그동안의 과거나 뿌리가 없다. 심지어 환영에서도 당연히 등장해야 할 가족이나 친구는 등장하지 않으며, 생뚱맞게 현악단만이 그가 육지하고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암시할 뿐이다. 

[붉은 거북]이 감독의 단편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세워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사실을 비틀자면, 두독 드 위트는 디테일이 필수적인 공동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초기 단편 두 개는 지극히 우화적인 액션만을 그렸고, 관계로 시선을 확장한 [아버지와 딸]에서도 딸은 분명 가정을 이뤘지만 딸의 가족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딸은 아버지라는 원형적인 상징에 매달려 행동을 반복한다. [붉은 거북]의 남자 역시 공동체와의 고리를 끊은 채 바다로 향하다가 지극히 개인적인 장소인 무인도에 표류한다.

[붉은 거북] 초반부는 섬을 나가려는 남자의 시도를 꾸준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계속 좌절된다. 전형적인 난파극 전개지만 상술했듯이 이 남자에게 어떠한 과거나 뿌리가 없다는걸 생각해보면 섬 밖을 나가려고 하는 의도는 조금 복잡하다. 이 남자는 가족보다는 막연한 문명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뭔가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들보다는 그것이 안겨주는 편안함을 먼저 떠올리고 그리워한다고 할까. 그에 답하듯이 두독 드 위트는 남자의 탈출을 방해하는 캐릭터로 붉은 거북을 등장시킨다. 

어쩌면 남자가 무인도에서 탈출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있는 육지로 돌아가려는게 아닌, 자연인 무인도에 정착을 거부하려는 제스처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니가 제시하는 변곡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남자는 자신을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가 붉은 거북이라는걸 알게 된 뒤 우연히 해변가로 온 붉은 거북을 죽인다. 그리고 후회하던 와중 붉은 거북이 여성으로 변한걸 알게 된다.

[붉은 거북]의 흥미로운 부분은 살해와 죽음의 모티브다. 첫번째로 살해와 죽음 모티브가 행해지는 이 시퀀스에서 남자의 동기를 이해하긴 어렵진 않다. 섬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가 좌절해 분풀이했다는게 선명히 명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왜 살해당한 붉은 거북은 인간 여성으로 변하는가? 이는 소통의 벽에 대한 붉은 거북의 답이라 생각한다. 붉은 거북과 남자는 '다른 종'이다. 그렇기에 두 존재는 통하지 않고, 결국 소통의 시도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남자는 문득 후회하고, 그 후회에 답하듯이 판타지적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두독 드 위트는 소통의 파국이 결국 타자였기에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지닌 간극을 줄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주체가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붉은 거북]은 어떤 선을 그어두고 있는데, 이는 결말의 정서하고도 연결된다고 본다.

여자와 남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붉은 거북은 가족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 부분부터 남자는 문명과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는 모습을 보인다. 관계가 형성되면서 문명과 땅은 남자에게 머나먼 무언가로 다가온다. 와중에 아들은 남자가 갔던 길을 반복한다. 남자가 빠진 절벽 아래 바다에 떨어져 빠져나오는 장면은 두말할것도 없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아들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림에도 부부가 늙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애니의 3분의 2가 흘렀음에도 젊은 시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아들이 장성한 성인이 됬을때에도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 역시 약간의 시간만 흐른 것처럼 보인다.

여기다 스포일러가 되는걸 각오하고 적자면, 이 순간 두독 드 위트는 아들이 섬을 떠나는 계기를 준비한다. 두독 드 위트는 바다에서 건너온 유리병에 아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것에서 아들과 아버지, 문명 간의 고리를 마련한다. 시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는 문명의 부산물에서 아들은 매혹을 느낀다. 그 매혹이 실체화되는 계기는 또 파괴와 죽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두독 드 위트는 이 시퀀스에서 무수히 쓰러진 나무들을 보여주면서 파괴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이 이미지의 강렬함 때문에 우리는 아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와 여자를 찾아다니는걸 보는 동안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빠져든다. 다행히도 기우로 밝혀지만, 남자와 여자가 성치않은 몸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분명 죽음의 기운이 묻어나온다. 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 섬이 아닌, 저 너머 문명만이 자신을 보호해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해일이 밀려오는 장면에서 3.11 도호쿠 대지진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3.11이 다뤄야 할 죽음과 공동체의 붕괴가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연결에 그쳐야 할듯 하다.

아들이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첫 징후는 다시 바다 속 거북 무리를 만나면서 이뤄진다. 자연을 연상케하는 붉은 거북과 문명을 연상케하는 계단이 아들 앞에 나타나는 환영 장면은 작중 상징을 함축한 시적 표현이라 쳐도, 아들이 떠나는 날 남자와 여자가 마치 구조 신호를 보내듯이 연기를 피우는 샷은 좀 이상하다. 정작 아들은 배를 타고 사라지지 않고, 헤엄쳐 붉은 거북들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샷 연결만 보자면 부부가 준비한 신호는 아들을 데려갈 붉은 거북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두독 드 위트는 유리병을 제외한 문명적 요소가 이 섬에 나타나는걸 거부하고 있다. 아들을 문명으로 데려갈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대변인인 거북이 데려가게 만든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아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이뤄지는 환상 시퀀스로 처리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된 여자가 허공에서 정을 나누는 순간 남자는 얼마 안 되는 문명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고 자연과 동화된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개인과 자연에서 비롯된 걸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원형의 이미지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아들이 떠나면서 [붉은 거북]은 다시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아들이 떠난 이후 부부는 갑자기 늙기 시작한다. 당연한 순리겠지만 장성한 아이가 자기 세상을 찾아 부부를 떠나는 순간, 부부에게 남은건 노화와 소멸 뿐이다. 두독 드 위트는 이런 세상사의 진리를 노화 이미지의 압축과 대조로 정리해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정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먼저 죽는다.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죽은 남자를 놔두고 다시 붉은 거북이 되어 흐느끼며 바다로 돌아가는 걸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최후엔 붉은 거북이 되는 이 구조를 통해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온전히 인간이 된게 아니라는걸 암시한다. 

여자의 변신은 차라리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쓸쓸히 떠나가는 모습에 가깝다. 간극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영원히 좁힐수 없는 간극이 있었으며, 결국엔 그걸 최후에 인정해야 한다고 두독 드 위트는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두독 드 위트는 애도를 담은 붉은 거북의 눈물을 통해 그런 간극을 좁히지 못했음에도 무위는 아니였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붉은 거북]은 원형적인 가족 관계에서 출발해 이별과 소멸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딸]의 장편 리메이크이기도 하다.

[붉은 거북]은, 단편에서 장편으로 그럴싸하게 넘어오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채워야 할 빈 칸이 많아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다. [붉은 거북]은 움직임과 스케일, 이미지의 원초적인 매력에 대한 두독 드 위트만의 개성을 장편 애니메이션에 이식하는데 성공했지만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이뤄진 단순한 서사는 장편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보기엔 힘들다. 지나치게 단선적인 구조라고 할까. 짧은 러닝타임인데도 리듬이 단조로운 점도 아쉬움을 더한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자체가 원형적인 만큼 고루한 서사의 반복이라고 비판을 가할 구석도 있다. 

하지만 [붉은 거북]은 잃은것보다는 얻은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후반부 같은 경우엔 두독 드 위트 특유의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대조,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이별의 의미를 잘 잡아내고 있다. [붉은 거북]은 그 점에서 데뷔작으로써는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두독 드 위트가 자신의 리듬감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그의 커리어가 결정될듯 하다. 아니면 그냥 단편 작업에서 만족할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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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 [機動警察パトレイバー2 the Movie / Patlabor 2: The Movie] (1993)

1990년대를 수놓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테크노 스릴러적 요소가 가미된, 로봇 활극에 가까운 애니메이션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가 주목을 받고 인기를 받았다면, 그런 활극을 매우 일상적인 설정에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만들어낸 유우키 마사미의 다른 대표작인 [철완 버디]가 우주 스케일을 넘나드는 얘기임에도 지독히도 일상적인 질감을 끌어냈듯이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리얼 로봇의 흐름에서도, 그것을 전쟁 같은 것에 연관짓지 않고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군수산업 얘기가 등장하긴 하지만 도쿄 경시청이라는 '일상적' 요소가 어느새 '비일상적' 요소에 동화되었다고 할까. 이는 단순히 현실적인 질감을 구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장르의 '비일상성'을 '일상성'에 녹여내는 과정. 분명 선례가 있음에도 [패트레이버]는 그걸 인상적으로 성공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극장판 시리즈로 넘어가 보자.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은 그 점에서 아직은 장르의 '비일상성'이 안겨주는 쾌감에 솔직한 작품이였다. 바빌론 프로젝트를 둘러싼 음모와 호바 에이이치의 모호한 정체와 의도, 플랑 세캉스라고 할 만한 풍경 몽타쥬 등은 '파국'의 호러가 어른거리긴 했지만, 적어도 정리가 되는 스토리와 특차2과의 활기와 액션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를 활극으로 볼 여지를 남겨놓았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는 활극으로써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보다는 '일상의 파국'이라는 점에서 [패트레이버]를 만들고 싶어한듯 하다. 1편에서 호바 에이이치의 설정을 '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건 오시이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잘 알려주는 부분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는 오시이가 아쉽게 놓아야 했던 지점을 활극 요소를 성립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밀고가는 희귀한 애니메이션이다. 기본 구조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과 동일하다. 도쿄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악당이 있으며, 주인공들은 그 악당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 이건 다른 [패트레이버] 시리즈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가 1보다 훨씬 나아간 이유는, 그 악당과 파국의 설정이 장르의 안전성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패트레이버 2]는 당시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가 서 있던 현실에 대해 강하게 말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에 볼 수 있는건 '종말'이다. 이건 단순히 거창하게 아포칼립스적 설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 내 시간대로 따지만 가장 후반부에 위치한 이 애니메이션은 특차2과의 종말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특차2과 멤버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했으며 남아있는건 곧 창고행을 기다리고 있는 잉그램과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어른 키이치와 시노부다. 비록 평행세계 개념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 [패트레이버] 프랜차이즈지만 이 작품은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미 시리즈의 완결을 의도한 작품인 셈이다. 아마 평행세계의 특차2과 역시 이런 사건 없어도 [패트레이버 2]에서 묘사했듯이 비슷하게 소멸했을 것이다.

아마 [패트레이버 2]를 보는 관객이라면 잘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에 혼란함을 느낄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는 배배꼬인 필름 느와르 플롯을 [패트레이버 2]에서 확장시키고 발전하고 있다. 츠게의 사상은 본편을 보는 내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그와 관련된 시노부의 심리 역시 중요하게 그려진다. 전작에서도 키이치와 시노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여기서 이 둘은 표면적인 주인공인 아스마와 노아를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그리고 그 활약상은 충분히 주인공으로 인정할만하다.) 닳디 닳은 두 성인남녀가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1950년대 미국 필름 느와르의 후예라 할 수 있다.

하워드 혹스의 [빅 슬립]이 그랬듯이, [패트레이버 2]의 이야기는 전체 그림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복잡한 얘기가 아님에도 모호한 인물들과 단서, 심리를 점진적으로 배치한 구불구불한 미로를 구성하면서 그 속으로 따라가야 하는 키이치와 시노부의 심리를 구축한다. [패트레이버 2]의 도입부는 그 점에서 그 미로로 안내하는 단서인 셈이다. 분명 츠게 유키히토의 과거를 그리고 있지만, 그가 겪었던 전쟁의 기억에 대한 몽환적인 파편이 서사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도입부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츠게라는 사실을 좀 지나서야 알 수 있다. 또한 츠게 역시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정리하기 때문에 관객은 끊임없이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렇다면 대체 [패트레이버 2]가 필름 느와르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체제의 존속에 대한 질문이다. 이미 [패트레이버 1]에서 오시이는 호바 에이이치가 겪었던 사회적 계급과 차별을 설명하면서, 그 소외가 어떻게 체제를 위협하는지를 그려냈다. [패트레이버 2]에서 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먼저 한국인이 쉽게 알기 힘든 일본의 기형적인 경찰 권력과 자위대 권력의 대립이 있다. 패전국 일본이 받아들여야 했던 체제는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수동적으로 살아야 하는 군대와 그 역할을 넘겨받은 경찰 간의 대립이 이뤄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 체제가 어떻게 이뤄졌으며 어떤 비정상을 은폐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1990년대 CNN이 마련한 비디오 전쟁의 문제가 개입된다. 전쟁이 엔터테인먼트적이고 비현실적인 영상으로 대체하는 사회. 그 와중에 일본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패트레이버 2]가 이 체제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역에서 이뤄진다. 초반부 시노부가 영상을 확대해 이상한 증거를 발견하는 부분은 명백히 안토니오니의 [확대] (혹은 [욕망])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대]에서 토마스가 사진을 확대해 평온한 공원 정경 뒤에 숨겨진 살인 사건을 발견해내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파악하지 못한채 끝끝내 은폐되었다면 [패트레이버 2]에서 시노부와 키이치는 가라오케 영상과 TV 영상을 확대해 전투기를 발견해내지만, 그것조차도 조작된 거짓이라는걸 나아가라는걸 알아차린다.  안토니오니가 기록된 이미지와 기억 간의 불일치를 통해 이미지의 신뢰성에 대해 질문한다면, 오시이는 동시간에 기록된 이미지 간에도 언제든지 거짓이 스며들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다 오시이는 도쿄를 공격하려는 전투기가 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군 간 전투를 유도하려고 했다는 전개로 그렇게 스며든 거짓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표현한다. 결말에 등장하는 도쿄를 바라보는 츠게의 시점 샷이 마치 HUD 디스플레이처럼 묘사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상당히 직접적으로 오시이의 질문을 담고 있다.

그런데 [패트레이버 2]가 흥미로운 부분은 안토니오니의 이미지에 대한 불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끌어온다는 것이다. 조작된 이미지로 츠게 일당의 자위대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도쿄로 입성한다. 그런데 자위대가 도쿄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여줄때 오시이는 자위대가 도쿄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태양은 외로워]식의 인물이 부재한 기나긴 몽타쥬 연출로 묘사한다. 이 시퀀스가 너무나 천진하고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으로써는 순간적으로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설마 오시이는 현 평화 체제를 가짜라 규정하고, 자위대가 보통 군대화되는 세계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규정하는건가? 키토 모히로는 자신의 만화 [나루타루]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어, "적어도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보통군대화에 대한 소망을 말한 바 있는데 오시이 역시 비슷한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키토 모히로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이상의 전체주의를 부정했듯이, [패트레이버 2] 후반부는 그 군대가 느끼는 천진한 아름다움 역시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 부정은 키이치에게서 이뤄진다. 키이치는 처음부터 군경 간의 권력 투쟁에 대해 냉소적이며, '아무것도 하지 말자'라는 사보타주로 비정상적인 체제 내 암투를 부정한다. 그리고 지금 이 세계를 이루는 평화는 거짓이라 말하는 아라카와에게 그런 거짓된 평화라도 있는게 낫지 않냐고 말한다.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일상의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물들의 활약상을 다뤘던 걸 생각하면, 진짜 파국은 거짓 평화로 1대 1로 대체할 수 없다는 오시이의 시선이 [패트레이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오시이는 여기다가 '패트레이버' (나아가 과거로 밀려난 알폰스)라는 히어로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을 서브플롯으로 추가해 설명한다. 작전을 수행하러 가기 전, 위험하니깐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는 아스마에게 패트레이버를 영웅처럼 동경하고 사랑했던 노아는 '로봇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어른이 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스마와 노아 일행은 죽지 않고 도쿄를 구한 영웅이 된다. [패트레이버 2]가 어른스러운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면, 진실과 거짓조차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순화된 대립을 거부하고 희망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트레이버 2]의 결말은 선언이다. 눈 앞의 도쿄 나아가 현실조차 조작된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인간 츠게 앞에서 시노부는 눈 앞에 있는 자신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점에서 시노부는 [패트레이버 2]에서 가장 크게 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노부는 일련의 모험을 통해 파국으로 끝난 관계조차도 부정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자는 사람이 된다. 특차2과는 그렇게 소멸되었고, 평화는 조작된 이미지 앞에서 허약하지만 여기엔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간이 있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오시이는 말한다. 그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영웅 서사를 부정하는듯 하면서도, 다시 영웅 서사에서 현실을 근심하고 바꿀 힘을 찾아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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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크롤러 [スカイ・クロラ / The Sky Crawlers] (2008)

오시이 마모루의 [스카이 크롤러]는 극도로 인공적인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 애니 속 세계는 대리전이 실제 전쟁을 대체했다. 그리고 대리전을 담당하는 것은 영원히 늙지 않는 킬드레라는 10대 소년소녀들이다. 10대 소년소녀들은 전투기를 몰아 상대편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안심하면서 평화를 유지한다. 절대로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이 기본전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스카이 크롤러]는 [공각기동대]보다도 훨씬 더 사변적인 세계를 밀어붙이는 애니메이션이다.  이런 분위기는 모리 히로시의 동명 원작의 공이 컸을거라고 본다.

[스카이 크롤러]는 구조의 애니메이션이다.  먼저 오시이 마모루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구축되어 있는지를 파악한 뒤 대립항적인 두 공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원작과 달리 배경을 동유럽 어딘가로 이동시켜버린 것도 이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땅에서 이뤄지는 킬드레의 일상은 위축되어 있다. 색감은 칙칙하며, 등장 인물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욕정의 순간도 짧고 조용히 처리해버리고, 인물들의 시선은 종종 먼 곳을 응시한다. 장소들은 비슷비슷하며 노골적으로 인물과 사건의 반복이 암시된다. 

원작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참조하자면 오시이 마모루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유는, 설정 자체가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앵바드]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지난해 마리앵바드]가 그랬듯이 [스카이 크롤러]도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에 머물고 있는 여자에게, 과거를 상기시키는 남자가 찾아오고 그 남자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서사 자체를 파편화하고 미로를 만드는 식으로 굴레를 보여준 [지난해 마리앵바드]와 달리, [스카이 크롤러]는 사소한 소도구와 언행의 반복, 세계를 작동케하는 법칙의 생략으로 굴레를 보여준다. (이 애니를 보고 난 뒤, 어떤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는지 파악할 관객은 없으리라 본다.)

땅의 세계를 보여줄때 오시이는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게 분명하다. [스카이 크롤러]는 평범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보여주지 않는 정렬된 샷과 몽타쥬를 보여주려고 애쓰는 드문 애니메이션이다. 사실 어느 정도 이름을 얻은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보면 샷과 샷 사이의 흐름을 실사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마음껏 주무르는 방식으로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콘 사토시와 유아사 마사아키, 실벵 쇼메와 얀 츠반크마이어 작품들이 그렇다. 하지만 오시이는 그런 주무름 대신, 시네마토그라프의 군살 없이 집중력 높으면서도, 정직한 이미지를 2D 애니메이션의 평면성에 이식하려고 한다.

그 결과 [스카이 크롤러]는 무드 피스라고 할만한 샷들이 이어진다. 매춘부와 섹스 후 옷 매무새를 다듬는 유이치, 볼링장 시퀀스의 무덤덤한 공기, 갑작스럽게 터져나오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비평, 권태로운 드라이브 시퀀스... 그 중 가장 섬뜩하게 조형된 장면은 킬드레를 관람하러 오는 평범한 사람들과 킬드레를 교차해 보여주는 시퀀스일 것이다. 이 시퀀스에서 오시이는  사회에서 유리될 수 밖에 없는 군상 킬드레와 일반인들 간의 섬뜩한 대조를 보여준다. 오시이 마모루의 힘은 어려운 사상을 중얼중얼 대사로 풀어냈다는데 있지 않고, 그 사상이 어떤 식으로 '영상화'되는지 비롯된다.  [나루토]나 [닌쿠]로 유명한 니시오 테츠야가 제공한 캐릭터 디자인은 일본 분라쿠 인형을 연상시키는 무표정함과 카와이 켄지의 절제된 음악도 여기에 한 몫한다.

반대로 하늘로 넘어가면 다르다. [스카이 크롤러]에서 하늘은 땅과 달리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다. 기술적으로도 흠잡을 때가 없지만, [스카이 크롤러]의 액션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땅의 세계를 지배하던 정렬된 감성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스카이 크롤러]에서 하늘은 말그대로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것이다. 오시이는 이 간극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왜 킬드레가 하늘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그 곳에서만 킬드레들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스카이 크롤러]를 관통하는 중요한 아이러니다. 쿠사나기 스이토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을 전쟁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엔터테인먼트화했지만,  정작 그 엔터테인먼트화된 전쟁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진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곳도 하늘이며, 거기서 죽어도 그들은 기억을 잃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뿐이다. 오시이는 샷을 쌓는 방식의 대조로 그런 운명의 가혹함이 가져다 주는 처연함을 강조한다. 그 점에서 [스카이 크롤러]는 일본 서브컬처의 루프물 흐름을 받아들인 [지난해 마리앵바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카이 크롤러]는 실패한 혁명을 얘기하는 애니기도 하다. 성장하지 못하는 킬드레를 최종 보스인 티처와 싸운다는 후반부 전개는 일본 만화나 애니계에서 자주 우려먹혔던 '어른에게 반항하는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카이 크롤러]의 킬드레가 다른 '어른에게 반항하는 아이들'에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들이 왜 반항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실존의 문제랑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인류사에서 실패한 혁명이 보였던 논리를 체화하고 있다.

그렇기에 클라이맥스에서 등장하는 직설적인 감정 폭발 역시 그렇게 느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앞의 샷과 시퀀스에서 감정의 절제가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시이가 관객들에게 성공적으로 인물을 얽매고 있는 세계의 구조를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에서 모토코가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면서 한없이 가라앉을때도 그 유장한 호흡에 지루함을 느낄지 몰라도 모토코의 감정을 이해할수 있던 것처럼, 우리는 킬드레를 얽메고 있는 억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굴레에서 좌절하면서도 기어이 탈출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킬드레들의 욕망과 사랑은 사뭇 감동적이다.

어쩌면 오시이는 이 애니를 만들때 좀 감상적이었던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결말 뒤에 붙는 쿠키가 대표적인 증거다. 또다른 반복, 그러나 변화를 암시하는 이 쿠키는 꽤나 의견이 분분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일본 만화 특유의 '오카에리나사이'가 가져다 주는 느끼함이 없다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카이 크롤러]가 [공각기동대]처럼 오시이를 언급할때 선두에 나설 수 없는 작품이 된 중요한 이유기도 하고. 하지만 [스카이 크롤러]의 감상적인 맺음은, 쉽사리 내칠수 없다. 그 감상은 어떤 냉소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난 내 개에게만 관심있고 인간 따윈 상관없다'라고 말하며 후배들의 작품을 깎아내리는 "지루한 작품만 만드는격 더러운 영감" 오시이의 숨겨진 의중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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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라이징 [劇場版 TIGER & BUNNY -The Rising-] (2014)

2011/11/13 - [Real Motion/리뷰] - 타이거 앤 버니 [TIGER & BUNNY] (2011)

2013/03/11 - [Real Motion/리뷰] - 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 [劇場版 TIGER & BUNNY -The Beginning-] (2012)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라이징]은 TVA의 편집 추가판이여서 그렇게까지 독립되어 있지 않았던 비기닝과 달리 TVA에서 독립되어 있다. 물론 이 세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TVA 선행감상이 필요하긴 하지만, 적어도 비기닝을 볼때와 달리 극이 뚝 끊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라이징은 모든 복선과 캐릭터들이 자기 완결적인 이야기를 띄고 있는 한 편이다. 좀 더 극장판의 포맷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라이징을 보기 전에 TVA [타이거 앤 버니]의 끝이 일견 안정적인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안한 상태로 끝났다는 걸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라이징의 시작은 그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코테츠가 TVA 마지막에 결론지어진 자기 상황에서 만족하면서 여전히 히어로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균열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없으며 정체되어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추동력이 사라져가고 있다. 코테츠의 낙관은 TV판과 달리 무거운 현실을 변화할만한 힘을 잃어버린 상태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넉살좋게 후배들과 이야기하는 코테츠의 대사에서는 차라리 체념의 무게마저 느껴진다. 거기에 아직 미래가 창창한 버나비가 거기에 얽매여 있다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 불안함은 곧 새로운 사장인 마크 슈나이더가 데리고 온 라이언 골드스미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구체화된다. 재미있는게 이 라이언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묘사가 코테츠랑 대치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대치되는 부분이라면 중력을 조종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라이언이 처음으로 출동해 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은 그래서 상당히 흥미롭다. 위기의 상황에서 라이언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능력을 쓰지만 반대로 다른 히어로들은 그 능력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재미있게도 [라이징]의 흑막인 비르갈 역시 능력 면에서 라이언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비르갈의 능력은 고철들을 모아 로봇을 만드는 것인데 모양새가 이 모양새가 영락없이 고철을 비르갈을 감싸는 형태다. 그 점에서 라이언과 비르갈은 동전의 양면처럼 [라이징]에 드러나는 구속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라이언이 가지고 있는 구속의 이미지는 히어로들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정지시켜 히어로들에게 해결할 틈을 만들어준다면 (발산), 비르갈의 구속의 이미지는 악당의 악행과 그걸 묵과한 사회에 대한 분노이자 상처받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다. (수렴)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구속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라이언과 비르갈은 반동인물이긴 하지만 "악당"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버나비는 타이밍 좋게 전입해온 라이언을 의심하지만, 곧 사실이 아니라는게 밝혀진다. 라이언은 재수없이 굴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지만 그 나름대로 히어로로써 의무에 충실한 캐릭터다. 이는 사건의 흑막인 비르갈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그는 분명 방법론이 잘못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사기를 당해 피해를 입고 복수하려는 자라는 점에서 진짜 악당이라 보기엔 미묘하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한다기 보다는 복수를 하다가 악한 행위마저 손댔다는게 정확할 것이다. 

차라리 [라이징]이 지목하는 악당은 새로 부임한 사장인 마크다. 그의 모습은 악덕 사장으로 하지만 마크는 교묘하게 그 악을 행함으로써 주인공들하고는 표면적으로는 대립하지 않는다. 차라리 애니 끝에 가면 구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된다. 이 구속의 이미지를 구사하는 반동인물과 악당과의 구별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온도차 때문에 [라이징]은 생각보다 복잡한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주인공들과 대립하는 반동인물은 악을 행한다고 보기에 미묘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주인공과 대립하지 않는다. 즉 마크는 앨버트나 제이크하고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악이며, 주인공이 처벌할 수 없는 존재다.

다시 라이언의 능력이 발동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라이언이 만들어내는 구속을 끊고 유일하게 행동하는 캐릭터는 버나비라는게 흥미롭다. 주지하다시피 버나비의 능력은 코테츠랑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에서 극적인 쾌감을 만들어내는 버나비의 모습은 TVA에서 상황을 돌파해 극적인 쾌감을 만들어내는 코테츠의 모습하고 겹쳐보인다. TVA의 버나비는 코테츠와의 관계를 통해 히어로로써 성장하는 캐릭터였다는 걸 생각하면 속박 속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운동의 쾌감은 그가 TVA동안 성장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코테츠를 닮아가는걸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라이징]의 버나비는 라이언에게 '코테츠처럼 시시한 소리 한다고.'라고 지적받는다.

그렇기에 속박을 뚫고 나가는 버나비와 이를 텔레비전에 투영된 영상으로 지켜보는 코테츠를 보여주는 장면은 묘한 댓구를 이루고 있다. 히어로의 미덕을 실제로 행하는 자와 그 실제를 투영된 이미지로 지켜보는 자. 코테츠는 버나비의 활약을 보면서 자신에게는 더이상 그런 힘이 없다는 걸 직감하게 된다. 직후 코테츠가 2부 리그의 폐지로 실업자가 되는 것도 그런 직감에 힘을 더해준다. 하지만 내심 그동안 추구해왔던 히어로로써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어정어정거리게 된다. 어떤 목적지가 있는게 아니라 손님을 찾아 모시고 다른 손님을 찾아가는 택시 기사라는 직업도 묘하게 그런 코테츠의 어정거리는 상황과 어울린다. 이 코테츠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어정어정거리는 부분이야말로 [라이징]의 백미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타이거 앤 버니]가 추구해왔던 커머셜 히어로로써 애환이 가장 심도있게 그려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황하던 코테츠는 카리나와 카에데를 통해 두가지를 깨우친다. 버나비가 돈을 그렇게 모았던게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는 것과 아빠가 진정으로 하는 걸 하는게 보기 좋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둔감해진 낙관을 깨트릴 히어로로써 감각을 되찾게 된다. 코테츠가 각성한 뒤 버나비를 찾아가다가 라이언과 함께 출동하는 장면을 보고 돌아서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버나비는 코테츠의 어시스트없이도 히어로로써 자신을 믿고 나가고 있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라이징]은 자신이 전파했던 신념을 한떄 신념을 믿지 않았던 (하지만 이젠 열심히 추종하게 된) 자에게 역으로 감화받는 기묘한 형태의 구원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라이징]의 결말은 라이언이 스스로 파트너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코테츠가 버나비의 파트너로 복귀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라이언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의 퇴장은 아쉽긴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구속의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주인공들과 대립되는 존재였다는걸 생각해보면 그가 코테츠에게 파트너 자리를 넘겨주고 퇴장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였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이렇게 해서 TVA에서 이뤄졌던 영웅의 귀환이 다시 한 번 [라이징]에서 변주된다. 

그런데 귀환를 축하하는 동료들 사이에 있는 코테츠의 표정이 밝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버나비에게 묻는다. 이래도 괜찮은거냐고. 코테츠의 밝지 않은 표정과 물음이야말로 [라이징]의 결말이 주는 감흥을 풍성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TVA에서 이어졌던 우로보로스와 유리 판사의 비뚤어진 정의관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코테츠의 능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이징]에 보이는 일견 자기완결적으로 보이는 구원극은 언제든지 무너질수 있다는 암시를 남긴다. 

이 암시가 어른의 사정으로 나올 2기에 대한 예고든, 아니면 코테츠의 히어로로써 완성되는 과정의 일부로 보든 상당히 그럴싸하다. [라이징]은 그렇기에 다시 일어서는데Rising는 성공했지만 그 일어섬이 서사와 캐릭터의 완성이 아니라는 묘한 상태에서 극을 끝맺는다는 점에서 묘한 감흥을 안겨주는 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감흥이 극장판이라는 포맷에 부합하기 위해 들인 예산과 그로 비롯된 박력있는 액션과 자칫하면 뻣뻣해지기 쉬웠을 드라마를 ([라이징]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물게 성 소수자 문제를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는 애니기도 하다.) 능숙하게 다루는 각본에서 비롯됬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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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콩그레스 [The Congrass] (2013)



더 콩그레스

The Congress 
8
감독
아리 폴먼
출연
로빈 라이트, 하비 키이텔, 존 햄, 폴 지아마티, 코디 스미스 맥피
정보
애니메이션, SF | 이스라엘, 독일, 폴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벨기에 | 120 분 | -


아리 풀먼의 [더 콩그레스]는 풀먼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혼돈스러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던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와 달리 혼돈스러운 미래로 향하는 애니다. 아니 애니라 하기에도 미묘한게, 영화의 50% 정도는 실사로 구성되어 있다. [솔라리스]로 유명한 스타니스와프 렘의 [미래학적 회의]를 느슨하게 각색한 이 영화는 원작과 다르게 (원작이 번역되지 않아서 뭐라 말할순 없지만 적어도 욘 티키라는 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며 배경도 코스타리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끌어오고 있다. 

그 결과 영화는 '환각'과 '환영'을 제외하고는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 로빈 라이트라는 헐리웃 여배우가 있다. 그렇다. 그 로빈 라이트다. 하지만 영화 속 로빈 라이트는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이는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한때 잘 나가는 배우였지만 이젠 하락세에 접어든 로빈 라이트는 파라마운트를 패러디한 미라마운트에서 자신의 이미지와 연기를 디지털화하자는 계약을 제안받는다. 대신 이 계약을 하면 이후로 평생동안 연기를 못한다는 조건이 달리고 로빈은 고민 끝에 수락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나이를 먹은 로빈은 미라마운트에서 진행하는 미래학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구역'으로 들어간다.

물론 영화 속 로빈 라이트는 실제 로빈 라이트하고는 다르다. 이혼 경력에 딸과 아들이 있는건 맞지만 딸과 아들 이름도 모두 다르고 (배우도 요새 아역으로 인지도를 얻고 있는 코디 스밋 맥피가 맡았다.) 결정적으로 [포레스트 검프] (와 그를 패러디한 영화]가 최고의 절정기였던건 맞지만 영화 속 로빈과 달리 인기가 사그라든 이후로도 주조연도 간간히 맡았고 좋은 연기력으로 괜찮은 커리어를 유지해왔다. 얼굴도 품위있게 늙어가는 편에 속하고. 심지어 사그라든 지금도 한국에서도 포스터에 이름을 걸만한 배우 정도는 된다. 슬프게도 로빈 라이트보다도 더 커리어가 쪼그라든 헐리웃 배우도 많다. 멕 라이언이라던가.

하지만 영화 속 로빈이 실제 로빈를 반영하고 있다라는 얘기가 틀린 것도 아니다. 모션 캡처를 두번이나 맡기도 했고 무엇보다 2010년대 기준으로는 핫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헐리웃의 화제에서는 벗어난 배우라는건 확실하다. 애시당초 여배우들은 나이와 소모 속도가 빠르기도 했고. 물론 외모와 달리 딱히 대작이나 예쁜 역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영화에 나오며 연기력 항상을 도모한 실제 로빈 라이트 커리어 선택도 대중에서 멀어지게 한 감도 있다. 이런 점에서 로빈 라이트의 캐스팅은 제법 그럴싸하다.

[더 콩그레스]가 펼치는 디스토피아은 벤야민적인 디스토피아라 할 만하다. 발터 벤야민은 영화나 사진의 복제가 어떻게 예술을 변화시켰는지를 최초로 밝혀낸 학자다. 그 점에서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를 첨단기술으로 복제해 지적 재산권으로 다룬다는 영화의 설정은 분명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경고했던 거짓 아우라-그 예술작품과 동일한 공간과 시간대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무언가'-인 스타 아우라와 연관 관계가 있다.

즉 [더 콩그레스]는 거짓 아우라인 스타 아우라가 만약 상품화되고 나아가 그 아우라로 자기 정체성을 변하게 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진화 가능성과 디지털화를 언급하면서 시작한 이 변화는 작중 영화사는 그 스타 아우라를 가지고 애니메이션 구역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고 무한한 문화상품을 찍어내기 시작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사람들이 거짓 아우라 그 자체로 변할 수 있게하는 약까지 개발해 팔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 거짓 아우라에 매혹된 세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게 제법 매혹적이다. 실사 세계 어딘가에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그곳은 환각의 제의를 거쳐 들어갈 수 있으며 실사는 일종의 거짓 아우라로 등장한다. 모션 캡처 애니메이터들과 감독들은 하나의 공장처럼 운영된다. 그리고 그 세계를 그려내는 애니메이션은 [렌과 스팀피]나 [비비스와 버트헤드] 같은 MTV 애니메이션 혹은 1960년대 로버트 크럼이나 랄프 바크시나 미국 사이키델릭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게 하는 현란한 매력이 있다. 

동시에 이 애니메이션은 거짓 아우라에 취해 살아가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하고 있다. 이런 대기업이 생산해 파는 거짓 아우라와 정체성에 매료된 로빈의 딸 사라는 더이상 로빈을 알아보지 못하며, 20년동안 로빈 라이트 부서에서 애니메이터으로 일해온 딜런은 외려 '살아있는' 진짜 로빈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엔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처럼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는 초췌해진 실사 파트는 직전 애니메이션 파트의 현란함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거짓 아우라로 피폐해진 인간 현실을 강렬한 고발을 이뤄내고 있다.

하지만 [더 콩그레스]가 그 매혹과 비판을 온전히 이뤄냈는지는 모르겠다. 먼저 헐리웃을 다루는 실사 부분이 다소 도식적이고 안이하다는 몇몇 평자의 비판은 타당하다. 로빈은 분명 있을법한 헐리웃 배우들의 현실이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 뻔하다. 마지막 실사 연기를 하며 회한에 찬 로빈이나 연날리기와 비행을 통한 은유은 매력적이였지만 전반적으로 덜 도식적인 방식이 있었을건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극의 주체가 되는 로빈도 냉동 전후론 다소 맥없이 설명을 들으며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있다. 주제를 담당하고 있던 딜런 캐릭터도 슬그머니 퇴장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배우 이미지 장사에서 시작한 벤야민적인 디스토피아가 카멜레온처럼 휙휙 바뀌는 자기 정체성이 모호한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다소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말은 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중간 과정이 휙하고 빠진 것 같다. 애니메이션 구역이 어떻게 실사 구역(현실)로 퍼져 나갔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필요했다.

그래도 마지막 결말은 제법 감동적이고 성숙해서 좋았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아들조차 거짓 아우라에 넘어가버린 로빈은 자신도 거짓 아우라의 세계로 다시 넘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로빈의 선택은 바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로빈은 거짓 아우라를 역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애런의 생을 경험한 로빈은 마침내 아들과 마주하게 된다.  

[더 콩그레스]가 [바시르와 왈츠]를 뛰어넘을 역대급 걸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엔 결함들이 많고 헛발질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고 욕심이 과하긴 했지만 강렬한 비주얼과 야심은 충분히 인정할만하며 결말의 감흥은 제법 좋았다고 생각한다. 천생 호불호가 갈릴 컬트로 될 운명을 타고난 애니메이션이지만 아리 풀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P.S.1 퍼블릭 이미지의 'That's Not Love Song'과 OMD의 'Enola Gay'를 멋지게 써먹었던 [바시르와 왈츠를] 감독답게 음악의 질이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맥스 리히터의 사운드트랙도 좋다.
P.S.2 장안의 화제(?)인 돌비 ATMOS를 적용한 작품이라고 한다. 프로듀서 왈. 공짜로 믹싱하게 해줬어요라고....
P.S.3. 중간에 작화를 갈아엎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런 느낌이였다고... http://www.animationmagazine.net/wordpress/wp-content/uploads/the-congress-post-3.jpg
P.S.4.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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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 [劇場版 TIGER & BUNNY -The Beginning-] (2012)

2011/11/13 - [Real Motion/리뷰] - 타이거 앤 버니 [TIGER & BUNNY] (2011)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TVA 본편 종영 이후 극장판 계획이 발표되고 첫번째 극장판입니다. 기본적으로 TVA 1,2화를 기본으로 새로운 전개가 이어지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크게 비평할 거리는 없습니다. 다만 1,2화 재탕이라고 해도 재활용으로만 끝나는 몇몇 총집편 극장판과 다르게 처음부터 다시 흐름을 재구성한 티가 납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극장판에서 잘린 TVA 부분도 있습니다. 변한 부분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입니다. 워낙 기본이 좋았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장면들도 제법 좋거든요. 단적인 예가 코테츠가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부분인데 설득력이 확 붙어 코테츠라는 캐릭터의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남은건 새로운 전개인데 새로운 전개도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보통 극장판 하면 대단한 스케일의 사건들이 뻥뻥 터지지 않습니까.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소박합니다. 냉정하게 보면 절도범 잡는 이야기니깐요. 하지만 이 소박한 설정만으로 당위성을 부여하고 극장판에 걸맞는 긴장감과 여분의 미스터리를 끌어내는게 탁월합니다. 게다가 이런 소박한 전개는 TVA와 연개시켜보면 오히려 균형이 맞는다는 점에서 현명하죠. TVA가 그랬듯이 [타이거 앤 버니]는 활극의 정석을 충실히 숙지하고 있는 애니입니다.


이런 식의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은 팬심에만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팬심 빼고 봐도 잘 뽑혀져 나온 극장판입니다. 보통 스크린으로 옮겨진 TV 시리즈들이 그 스케일에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그 스케일에서 헤매지 않고 착실하게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대타로 들어온 요네타니 요시토모 감독이 잘해줬습니다. 라이징도 이 기세만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P.S.코테츠 턱시도가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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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Něco z Alenky / Alice] (1988)



앨리스

Alice 
9
감독
얀 슈반크마이에르
출연
크리스티나 코호토바, 카밀라 파워
정보
애니메이션, 판타지, 스릴러 | 스위스, 영국, 서독 | 91 분 | -


체코 스톱 애니메이션 거장 얀 츠반크마이어의 장편 데뷔작 [앨리스]는 "당신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서문을 연다. 하지만 곧 애매하게 "아마도."라고 덧붙인다. 그 아마도를 의심하는게 좋을것이다. 이 애니는 절대로 아이들에게 친절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니깐. 스토리는 모두가 아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개작을 거치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앨리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지로 넘어가면 다르다.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그야말로 기괴함의 향연이다. 영화 대사가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나마 그 대사도 나레이션으로 처리해버린다)  정교하게 구성된 미장센으로 구성된-특히 앨리스의 방은 정말 미장센이 환상적이다-이미지가 두드려져 보이게 되는데, 츠반크마이어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그리는 이상한 나라는 낡은 폐건물 같은 곳에 빵에서 못이 자라고 깡통에서 압정이 섞여있는 마멀레이드와 벌레가 발견되며 눈알과 뼈가 강조된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손잡이가 빠지는 서랍이 통로인 그런 생기없는 장소다. 유일한 인간인 앨리스조차 가끔 자기 인형 같은 섬뜩한 모습으로 변하곤 한다. 전반적으로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환상의 세계이지만 죽어있는 느낌으로 가득하다.


생기없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동물들도 무섭다. 가끔 구식 스톱모션의 향취의 정겨움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조차 기계적인 강박관념으로 가득찬 행동으로 싹 지워버린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매드 해터와 3월 토끼의 다과회다. 고목나무 장승 같은 매드 해터와 눈알이 빠져나오는 3월 토끼가 미친듯이 같은 대사를 지껄이고 자리를 바꾸고 시계에 버터를 바르는 해괴한 짓을 하는데 이게 굉장한 포스를 자랑한다. [모던 타임즈]의 강박관념을 연상시키게 한다고 할까. 물론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잘라대는 실밥 터진 하얀 토끼와 틀니와 의안을 가진 양말 지렁이도 만만치 않다.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원작이 품고 있던 기분 나쁜 부분들을 츠반크마이어식 해석을 거쳐 만든 순수한 악몽덩어리다. 꿈이 그렇듯 해석은 재미없긴 하지만, 이 애니에 묻어있는 '기계적이고 죽어있는' 분위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속해있는 서유럽 문학하고는 거리가 멀다는건 지적하고 싶다. 오히려 카프카의 [심판], 고골리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게오르규의 [25시]같은 '끝내 도구화되는 인간들'을 다뤘던 동유럽 문학 고전들의 향취가 느껴진다. 물론 '아이의 눈으로 본 어른 세계의 부조리성'라던가 '아이의 무의식과 본능' 같은 보편적인 해석을 내릴수 있는 가능성들도 포진해 있다. 어느 쪽이든 츠반크마이어의 이상한 나라의 악몽은 풍부하고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곳이다.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원작을 따라가면서도 결국엔 원작이 가지고 있던 이면을 정확하고 제대로 파헤쳐 풍성한 결과를 일궈낸 애니다. 결국엔 이런 원작이 있는 작품을 만들때 중요한 것은 만드는 사람의 '예술적인 감각과 방향'에 대한 확신감인듯 하다. 애니를 사랑한다면 꼭 봐야할 애니다.


P.S.1 엔딩의 앨리스 대사가 무척이나 섬뜩해서 해석할 거리가 많아진다. 결국엔 앨리스는 토끼(로 대표되는 아버지)를 죽이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P.S.2 맥기의 앨리스하고는 미묘하게 다르다. 이면을 탐구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맥기의 앨리스는 서유럽 전통에 머물지만 21세기적인 팝아트/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감수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츠반크마이어는 그에 비하면 감수성은 다르지만 정파다.

P.S.3 아주 어린 애들은 무리겠지만 12세 이상 정도 되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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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아이 [おおかみこどもの雨と雪 / Wolf Children] (2012)




늑대아이 (2012)

The Wolf Children Ame and Yuki 
9.1
감독
호소다 마모루
출연
미야자키 아오이, 오오사와 타카오, 쿠로키 하루, 니시 유키토, 오오노 모모카
정보
애니메이션, 판타지, 로맨스/멜로 | 일본 | 117 분 | 2012-09-13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는 어머니 하나의 연애사를 회고하는 딸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딸의 목소리가 인도하는 하나와 그이의 이야기는 평범한 캠퍼스 로맨스 물로 같아보이지만 사실 '그이'가 늑대인간이라는 설정이 등장하면서 애니는 순식간에 판타지의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그렇게 결혼한 두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지만 곧 아이 둘만 남기고 남자가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인간도 늑대도 아닌 아이들이 태어나고 하나는 그들이 선택할 미래를 위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늑대아이]의 초반부는 기존 호소다 애니들하고는 굉장히 색다른 맛을 보여주고 있는데다 탁월합니다. '늑대아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재를 가지고 현실적으로 생길수 있는 고뇌를 섞어 풀어내는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데, 동물병원과 소아병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하나라던가 동물 키우냐고 의심받는 장면들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런 터치는 영화 내내 죽 이어집니다. 냉정하게 보면 하나는 입체적인 캐릭터라긴보다는 부정할수 없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케빈에 대하여]를 보시면 그런 이상적인 엄마가 되는것도 진짜 힘들다는걸 알수 있죠.-이상적인 엄마' 캐릭터이긴 하지만 이런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전개 속에서 하나는 조금씩 인간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후반부 들어서면 조금씩 관습적인 가족/성장 드라마 루트를 타긴 하지만 [늑대아이]는 자기가 뭘 말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고 있고 차분히 리듬을 놓치지 않고 하나와 아이들의 성장과 갈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이용해 [늑대아이]만의 독특한 터치를 더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메 부분보다는 유키 부분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성장하는 소녀가 겪는 불안한 심리와 늑대아이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공포심 같은게 적절하게 드러나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이 캐릭터가 소헤이와 함께 맞는 결말도 상당히 좋습니다.


호소다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늑대아이] 역시 '떠나야만 하는 자들과 '떠남'을 끝내 받아들이게 되는, 남은 사람들의 통과의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자신의 아이들-이 계속 곁에 남아있길 내심 바라지만, 자식들이 성장해가는 걸 보면서 선택한 길을 막을 수 없다는걸 후반부에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는 웃으면서 그들을 떠나보냅니다. 이는 상당히 보편적인 이야기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 강한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죽을때까지 헤어짐을 겪고 성장을 하는 존재여서일지도 모릅니다.


[늑대아이]는 시골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썸머 워즈]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소재를 가지고 점점 시골집이라는 공간에서 뻗어나와 확장해갔던 [썸머 워즈]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애니는 판타지나 그런 쪽에 크게 눈을 돌리지 않고 적은 인물과 한정된 장소로 이뤄진 소우주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늑대아이]에는 [디지몬 우리들의 워게임], [시간을 달리는 소녀], [썸머 워즈] 같은 이전 호소다 애니들같은 거대한 스케일로 밀어붙이는 클라이맥스는 없습니다. [늑대아이]의 결말은 상당히 개인적입니다.


그래서 [늑대아이]는 전작들과 달리 전개가 상당히 차분하고 조곤조곤합니다. 이건 단점이 될수도 있고 장점이 될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썸머 워즈]의 단점으로 느껴졌던 거대한 스케일에 대한 집착과 거기에 맞는 폭풍같은 감정 폭발이 사라져 한결 편안해 보여요.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 코레에다 히로카즈나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일본 영화사에 도도히 흐르는 미적 전통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캐릭터들의 감정과 심리를 잡아내는 단아하지만 세심한 터치의 연출들은 확실히 플러스 요소입니다. (최소 몇몇 장면은 오즈 감독에게서 영감을 받은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유머와 풍부한 감정도 잃지 않고 있고요.


[늑대아이]는 확실히 지금까지 나온 호소다 마모루 애니 중에서 가장 좋다고 말할수 있는 애니입니다.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백분 활용하면서도 담담한 터치로 감정을 그려내는 테크닉은 거의 안정되어 있고, 감정통제도 전작들에 비해 발전한게 눈에 보입니다. 조금씩 감독이 다룰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게 눈에 보인다고 할까요. 호소다 마모루가 만약 차세대 지브리가 된다면 이 작품은 하나의 도약으로 남을것 같습니다.


P.S.그래도 하나의 철인적인 체력은 진짜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

P.S.2 이상하게 지향하는 방향성은 다른 [케빈에 대하여]하고 겹처보이는 장면들이 몇몇 있더라고요. 아메가 늑대의 눈빛을 하며 하나를 보는 장면과 케빈이 자위하면서 에바를 처다보는 장면은 제법 유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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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펭귄 드럼 [輪るピングドラム / Mawaru-Penguindrum] (2011)


브레인즈 베이스, 킹 레코드, 마이니치 방송. 총 24화x25분. 화면비 1.78:1
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幾原邦彦 시리즈 구성/각본: 이쿠하라 쿠니히코幾原邦彦, 이카미 타카요伊神貴世 캐릭터 원안: 호시노 릴리星野リリィ 캐릭터 디자인: 니시이 테루미西位輝実
컨셉 디자이너: 나카무라 쇼코中村章子, 시바타 카츠키柴田勝紀  아이콘 디자인: 오사카베 와타루越阪部ワタル 음향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幾原邦彦, 야마다 요우山田陽 음악: 하시모토 유카리橋本由香利
프로듀서: 이케다 신이치池田慎一, 마루야마 히로오 丸山博雄 

캐스트:  키무라 스바루木村昴 (타카쿠라 칸바 / 펭귄 1호), 키무라 료헤이木村良平 (타카쿠라 쇼마 / 펭귄 2호), 아라카와 미호荒川美穂 (타카쿠라 히마리 / 크리스탈의 공주 / 펭귄 3호), 미야케 마리에三宅麻理恵 (오기노메 링고 / 우타다 히카리), 노토 마미코能登麻美子 (토키카고 유리), 이시다 아키라石田彰 (타부키 케이주), 호리에 유이堀江由衣 (나츠메 마사코), 코이즈미 유타카小泉豊 (와타세 사네토시), 토요사키 아키豊崎愛生 (오기노메 모모카), 아리나미 카즈사荒浪和沙 (나츠메 마리오), 와타나베 유이渡部優衣 (이소라 히바리)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종이접기 살인마, [헤비 레인]

(전략)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에서 떼어버리지 못했네.

-에드가 앨런 포우, ‘애너벨 리Annabel Lee’

공주가 다녀간 후 나무가 되살아나니 꽃을 보는 인간은 이 얼마나 기쁜가.
그녀가 지상에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 

-나레이션, [판의 미로]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복귀작 [돌아가는 펭귄 드럼] (이하 펭귄드럼)의 도입부는 평범한 편입니다. 아예 학원-배틀만화 장르 클리쉐로 시작했던 우테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평범한 판타지 미스테리물 도입부라 할만합니다. 병약한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여동생의 운명을 바꿀수 있는 핑드럼이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두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런 명쾌한 미스테리는 3화만에 곧 미궁 속으로 빠집니다. 핑드럼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주변 인물들의 음모와 비밀, 꿈이 마구 펼쳐지면서 이야기는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펭귄드럼의 이야기 전개는 데이빗 린치 영화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나름 현실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는 척하곤 있지만 잘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은 모호한데다 과거의 망령들은 현재에 간섭하고 말도 안되는 설정들이 튀어나옵니다. 막판엔 아예 대놓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부숴버리고요. 이 부숴버림은 어느정도 주제하고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증오로 가득찬 과거의 망령이 현재의 사람들을 조종해 자신이 싫어하는 현실을 공격하고자 하는거니깐요. 이런 점은 일본의 과거사나 지금 현실하고 묘하게 맞물려서 흥미로운 해석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이 점을 보자면 펭귄드럼은 쿠로사와 키요시 같은 일본 호러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파괴하는 망령'이란 화두하고도 연결되어 있는걸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펭귄드럼은 각본이 좋은 애니는 아닙니다. 논리는 종종 어처구나 없이 비약하고, 스토리 배분이나 템포는 문외한이 봐도 이상한데다 (초반 링고 비중이 지나치게 좀... 많은데다 짜증나죠. 하나하나가 나중에 다 도움이 되기 때문에 쉽게 빼긴 뭣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맥거핀 난무에, 시퀀스 간의 연결고리는 덜컹거리고 (타부키와 유리는 아무리 꿈의 논리로 봐도 조금 더 심리/장면 묘사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캐릭터가 살아있긴 하지만.), 몇몇 등장 인물들의 심리는 다소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려러니...하고 짚고 넘겨야 할 부분도 많아요. 대사들도 무척이나 인공적이고요. 절대로 영화학교 극작술 시간에서 다룰만한 이상적인 각본은 아니며, 이쿠하라 자신도 좋은 각본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우테나를 보고 있는데 에노키도 요우지가 얼마나 좋은 작가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완벽한 균형을 찾지 못하고 실패했지만, 펭귄드럼이 풀어내는 꿈들은 이 때문에 오히려 더욱 강해집니다. 펭귄드럼이 펼치는 꿈은 그야말로 질보다는 양과 비논리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꿈들입니다. 우테나처럼 질서정연한 조각 같은 꿈이라긴 보다는 괴상하게 흐트러져 불쾌하지만 기묘한 매력을 안겨주는 불균질한 꿈인거죠. 거기에 [은하철도의 밤] 같은 일본 애들 특유의 동화적이고 시적인 슬픔과 아련함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이를 위해 동원하는 장치들은 인상적입니다. [은하철도의 밤]의 모티브를 따온 동화적인 분위기와 그 뒤에 숨겨진 금기들이 겹처 만들어내는 잔혹동화적 무드, 부셔저 흩날리는 어린이 브로일러의 조각들,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한 과장된 움직임 (생존전략 시퀀스가 그렇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과 액팅, 뜨악하고 캠피한 막장 유머, 픽토그램으로 단순화된 무채색의 엑스트라들과 그와 대비되는 호시노 릴리와 캐릭터 디자이너 니시이 테루미가 제공하는 쁘띠하면서도 탐미적인 캐릭터 작화, 원색과 무채색이 기묘하게 배합된 색채 디자인, 꽉 짜여진 초현실적인 미장센, 다재다능한 편집 기법과 이미지 배치, 얀 띠에르상(특히 [아멜리에] 사운드트랙에 영감을 받은 부분이 많습니다.)과 칸노 요코을 벤치마킹한게 분명하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주제를 제공해주는 하시모토 유카리(+일본 글램 록 밴드 ARB 커버) 의 음악 등... 개별 요소들도 훌륭하고 그걸 조합해내는 이쿠하라의 센스도 상당한 편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설명이 부족하고 개별 요소가 이상한 각본이라도 펭귄드럼의 각본은 나름 꿈과 시적 논리가 서게 도와주고 주제가 뭔지 알 수 있도록 캐릭터 설정이나 감정선 같은 요소들이 교통정리가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적어도 뭔소리인지 모르고 막 씨부리며 '이건 시란다, 시 발싸! 켈켈켈' 거리는 애니는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보다 그 환상들이 조잡하거나 민망하진 않습니다. 대신 초반엔 환상의 패턴이 다소 단순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뭐 초반의 링고가 그만큼 단순했다는 반증으로 볼수도 있겠지만요.

펭귄드럼이 뭘 말하고 싶은가는 의외로 단순한 편입니다. 바로 1화에도 못박듯이 사랑 이야기죠. 하지만 펭귄드럼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에서 벗어난 박애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없어지고 인도하는 가치관이 없어지고 증오와 테러리즘, 광기가 난무하고 과거에 망령에 사로잡힌 21세기에서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죠. 링고가 일기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던가, 막판에 밝혀지는 핑드럼의 정체도 그렇습니다. 이 점에서 펭귄드럼은 [하이바네 연맹]이라던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미야자와 켄지같은 일본 '환상' 문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저 둘은 이 애니의 주제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메세지가 단순강렬한 편이기 때문에 꿈의 힘이 조금 반감되는 효과도 있지만 (주제 묘사도 조금 손해보는 면도 있습니다.) 대신 이 메세지가 굉장히 강한 정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지라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주역 성우진들은 그냥 그렇습니다. 칸바 역의 키무라 스바루는 연기 자체는 그냥저냥인데 억양이 너무 강해서 깎이는 것 같고 (본토에선 놀림거리...), 히마리 역의 아라카와 미호는 확실히 어색해요. 묘하게 캐릭터하고 맞아떨어져 귀엽긴 합니다만. 주역 중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쇼마 역의 키무라 료헤이와 링고 역의 미야케 마리에입니다. 그 중 경력이 있어 안정적인 연기를 들려주는 키무라 료헤이보다는 단역을 전전하다 이번에 발탁된 미야케 마리에가 가장 인상깊습니다. 얄밉고 짜증나는 캐릭터에서 극적으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캐릭터로 변해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 할까요. 심지어 1인 2역도 꽤 능숙하게 소화해냈습니다. 물론 녹음 테크닉이 좀 동원됬겠지만...

오히려 조역들이 뽕을 잘 뽑은 편입니다. 타부키 역의 이시다 아키라가 들려주는 부드러움 뒤에 감춘 광기는 이 성우가 역시 찐득한 광기 연기엔 탁월하다는 걸 느끼게 하고, 유리 역의 노토 마미코 역시 좋은 앙상블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는 좀 깼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으니...) 그리고 마사코 역의 호리에 유이는 커리어 사상 가장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보여줍니다. 평소 쓰는 톤하곤 다른데다 엄청나게 망가지는 연기인데 상당히 노련하게 그걸 통제하고 있습니다. 한때 연기 못했다고 까였던 걸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죠. 이쿠하라가 쉬고 있던 사이 데뷔했던 성우들이 캐스팅 되어 이쿠하라 극 연기를 들려주는 재미와 우테나 주역들의 카메오를 찾는 재미도 있습니다. 특히 토요사키 아키와 박로미, (위에도 적었지만) 호리에 유이는 꽤나 깨는 캐스팅였는데 의외로 극에 잘 녹아들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쿠하라는 말하고 싶은 주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 이미지를 맞춰가면서 이야기를 만든 것 같습니다. 적당히 자신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이 주제와 말이 되게 연결한 느낌이랄까요. 적어도 펭귄드럼을 통해 뭔가 이치에 맞거나 논리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려는 강박관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주어진 예산 내에서 즐겁게 장면을 만들고 사람들과 다양한 피드백을 하면서 이야기를 꾸려나간것 같습니다. 작업 현장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쿠하라 자신은 재미있게 만들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펭귄드럼은 2010년대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상당히 불친절한 애니에요. 명확한 논리가 완전히 파괴된 채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이미지들과 미스테리들, 동성애나 근친, 스토킹 같은 금기 파괴를 받아들이는건 꽤 힘든 일이며 우테나가 추구한 차근차근하게 쌓아가며 만들어진 카오스와 구성미, 주제를 사랑했더라면 펭귄드럼의 (의도한건지 아닌지 잘 모를) 불균질한 카오스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테나 팬들 사이에선 꽤나 까이는 편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마치 [올드보이]나 [복수는 나의 것]을 기대하고 보러갔다가 [박쥐]를 보고 나온 관객들 같은 심정일것이니.

하지만 펭귄드럼이 선사하는 꿈들과 이미지의 향연들은 신보 아키유키나 콘 사토시하고는 완전히 다른 테이스트를 제공하기 때문에 쉽사리 무시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쿠하라가 연극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곤 했지만 펭귄드럼은 연극이라긴 보다는 영상이 할 수 있는 특색을 잘 알고 있는 애니입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모든 매력을 드러내기엔 다소 투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애니라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전 이 애니를 2011년의 일본 TV 아니메를 뽑아줄 용의가 있습니다.  2011년 일본 TVA계에서 불었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열풍 중에서 가장 '이단적'이고 '문제적'인 애니라 할만합니다.

P.S.1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데이빗 린치와 작업하고 싶어했다는 인터뷰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펭귄드럼은 상당히 '데이빗 린치'스러운 애니거든요. 데이빗 린치보다는 훨씬 명확한 편이지만.

P.S.2 요새 우테나를 보고 있습니다. 근데 초반만 봐도 확실히 펭귄드럼하고 비교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살짝 추가해놨습니다. 리뷰 쓸 것 같지만 여기엔 안 올릴듯 합니다. 이 리뷰를 여기에 올리는 것은 펭귄드럼 감상글을 연재하는 것을 마무리 짓는 글이기 때문이여서... 참고로 새벽에 삘받아서 막 써서 글이 난잡합니다. 지적 허영심스러운 부분도 있고 (...) 블로그에 올라가는 글은 아마 더 다듬어지고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볼 사람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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