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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다큐멘터리 (7)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의 유명한 단편 [방파제]의 기본 전제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였다. 마르케는 어린 시절 우연히 잊지 못한 이미지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남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를 거쳐 시간을 횡단하는 행위라 말했다. 그리고 마르케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진 이미지와 기억, 시간을 한데 모아 몽타주로 이뤄진 꿈을 꿨다. 설정이 자세한 영화는 아니였지만, 이 우울한 단편 영화가 지금까지도 SF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들어가는지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서 마르케는 정지한 사진들 속 살아있는 여인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음의 놀라움을 끌어냈다.

마르케의 실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는 [방파제]에서 뻗어나온 묵상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에서 제목 따온 [태양 없이]는 일종의 기행문 영화다. [태양 없이]에서 시간과 이미지의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여기에 있는 개별 공간을 횡단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제 시간과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은 픽션 속 주인공이 아닌 크리스 마르케의 분신인 사진작가 샌도르 크리스나다. 샌도르는 카메라 한 대와 종이와 펜을 챙긴 채 지구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아이슬란드의 아이들 세 명이다. 샌도르는 이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행복의 이미지를 얘기하지만, 이 행복의 이미지가 쉽게 다른 이미지랑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 그 다른 이미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이 정녕 하나로 연결될 수 없는지, 고민한다. 

제목이 뜨고, 그는 아이슬란드를 떠나 홋카이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북쪽 섬에서 돌아오던 샌도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 순간은 전쟁의 순간이다. [밤과 안개]에서 겪었고 [방파제]의 남자가 살아가야만 했던 그 순간. [밤과 안개]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있었던 전쟁을 상상한 뒤, [방파제]에서 마르케는 도래할 전쟁을 상상하는 것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회고했다면, [태양 없이]의 샌도르는 평화의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전쟁를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산발적인 편지를 보낸다.

마르케는 얼핏 보면 연결되지 않을듯 같은 순간들을 연결한다. 샌도르가 발길을 내딯는 곳은 둘로 나눠진 세계다. 한편엔 섹스 박물관과 산리즈카 투쟁이 이어지는 일본과 제국주의와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낸 미국, 프랑스가 있으며, 한편엔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가 있다. 태양이 있는 세계와 태양이 없는 세계. 마르케는 이 둘로 나눠진 세계를 영화의 몽타쥬를 이용해 하나로 통합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태양 없이]는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의 결합이다. 

하지만 훈련된 르포 작가이기도 한 마르케=샌도르가 선택한 스케치 영상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다. 그는 일본 문화에 깊게 매료되어 인류학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산리즈카와 우익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들을 잡아내고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자연 풍경과 가난한 현실을 끌어온다. 편지를 통해 차분히 전해지는 나레이션에서는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지식인의 결기가 돋보인다. 샌도르의 통찰 일부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을 찌르기도 한다. [태양 없이]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광주 시민들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도쿄 좌파 시위대를 잠시 보여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편린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준다. 

이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에서 통일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샌도르가 보낸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샌도르가 읽지 않는다. 샌도르의 묵상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이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즉 [태양 없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뤄진 기행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왜 이런 형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여기서 [태양 없이]가 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보자.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를 찍으면서 동시 더빙이 아닌, 후시 더빙을 사용했다. 이 후시 더빙은 단순히 독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음향에도 적용되어 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일부는 기술적인 문제기도 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마이크가 달린 ENG 카메라는 그리 흔한게 아니였고, 필름 카메라는 녹음 기사를 동반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대표적이다.) 필시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느라 8-16mm 카메라를 사용했어야 할 크리스 마르케에게 기록과 동시 녹음은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하야오 야마네코가 등장한다. 비디오 게임 개발자인 하야오 야마네코는 현실을 바꿀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테이프로 채집한 전쟁과 시위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조작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야오 야마네코는 그것이 TV에 등장하는 이미지보다 더 진실하며, 대상의 특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하야오의 말은 상당히 궤변처럼 들린다. 어떻게 추상화 된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크리스 마르케는 반대로 추상화되지 않은 이미지조차도 언제든지 풍화되어 소멸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는 [밤과 안개]에 관여한 사람이다.) 하야오는 그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려는 시도보다, 본질을 잡는 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야오는 이 이미지들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구역'이라고 부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은 법칙을 따라 길을 찾아가야 했다. 하야오는 컴퓨터로 왜곡된 이미지로 '구역'을 만들어 전쟁과 투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스스로 다시 생각할 영역을 만들고자 한다. 

하야오의 시도는 [태양 없이]의 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수 있는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현실을 단순히 기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낼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 다.  [아름다운 5월]에서 그는 파리라는 한 공간에 집약된 다양한 영역들을 옮겨다니면서 한 시대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장르 픽션을 정지된 사진으로 재구성한 [방파제]를 거쳐 [태양 없이]에 이르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개별적으로 분리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꾸는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악과 나레이션, 현장 녹음한 소음을 후시 더빙한 음향들... 때문에 별다른 플롯이 없어도 집중력이 높은 영화기도 하다. [태양 없이]를 본다는 것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성한 꿈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소 난해할수도 있는 이 한편이 지독히도 감성을 건드린다면 영화가 가지는 시청각적 매력을 마르케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샌도르가 생각하는 [현기증]은 살인 사건 그 이상으로 은밀하게 시간과 공간의 현기증을 설명하는 영화다. 샌도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겹쳐 생각한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죽은 매들린을 다른 인물인 주디를 통해 재현하려는 시도는 샌도르가 필름과 테이프로 기록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재구성해 꿈, 나아가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로 은유된다. 그리고 샌도르와 하야오가 만든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구역'을 만들어낸다. 필름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즉물적인 기록이 가능한 점)을 인지한 뒤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라는 글에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 이후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케의 구성된 꿈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단순히 영상에 멈추지 않는다. 하야오의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크리스 마르케는 컴퓨터 게임 비평가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 도쿄를 들르던 도중 샌도르는 남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팩맨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샌도르는 이 노란색 구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피력한다. 샌도르의 눈에서 바라본 팩맨은 인간의 운명을 픽셀을 통해 은유한 완벽한 예시다. 그리고 그 은유는 당분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마르케는 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세상을 은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미지와 결합될때 강한 힘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딩시 노년을 바라보는 영화 감독이 태동기에 있던 컴퓨터 게임에게서 가능성과 유효한 통찰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마르케는 단순히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태양 없이]를 만든게 아니다. 오히려 샌도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마르케의 속내는 절박하다. 열렬한 좌파였던 마르케는 다양한 공간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무구할 정도로 순수한, 행복의 이미지로 쉽사리 등장하지 못한다. 기니비사우 프라이아 시장에 만난 여자의 표정을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샌도르의 고민은 마르케의 고민이기도 하다. 마르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태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그는 진심으로 땅에 발을 붙이는 사람들을 염원하고 걱정하고 있다.

친구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샌도르는 [태양 없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샌도르 크리슈나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닌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시를 쓰는 법은 영화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하며 글과 편지이기도 하다. 이제 샌도르는 일본에서도, 기니비사우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껏 쌓여왔던 과거를 바라보고 동시에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호주의 에뮤처럼 샌도르가 길어올린 영상과 편지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지의 수신인이 말한다.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이 기대감이야말로 [태양 없이]가 진정 바라는 소통의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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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 The Gleaners and I] (2000)

아네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목을 듣고 그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다룰 것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르다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지점 역시 밀레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는 직접 보거나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 한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이 다큐멘터리는 미술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바르다가 그 그림을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삭을 줍는다'라는 행위다. 버려진 이삭을 줍는다는 행위는 상품 가치를 잃은 잉여 생산물을 주워서 쓰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수도 있을 것이다. 밀레가 살았던 시대는 1차 산업혁명이 완료된 19세기였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체제가 정착한 20세기 이후 현대 사회에도 그런 '이삭줍는 사람들'이 있을까? 바르다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바르다는 이삭으로 대표되는 대량 자본주의의 잉여 생산물이 어떻게 재활용되는가를 추적한다. 불량 판정을 받고 처분되는 감자를 쓸어다 먹는 사람들, 폐품을 주워다 예술품을 만드는 예술가, 파장하는 시장에서 음식을 주워다 먹는 노숙자... 많은 사람들이 바르다의 카메라 앞에서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증언하고, 이에 대한 바르다 자신의 코멘트도 이어진다.

바르다가 좌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실제로 바르다의 영화는 페미니즘과 좌파적 관점을 빼놓으면 분석이 불가능해진다.), 작 중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잉여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윤택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다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잉여 생산물의 가치를 판별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아닌, 당장 먹고 살기에도 절박한 빈민들이나 관점 자체가 다른 아웃사이더들이다. 

바르다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버려지는 잉여 생산물이 과연 사회에 통용될 수 없는 '불량'인지를 묻는다. 이 다큐에서 적당한 가공 과정을 거치고 나면 버려진 잉여 생산물들은 더 이상 잉여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노숙자 보호소에서 거주하며 공부하는 청년은 그 점에서 바르다의 질문과 대답을 구체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그 이후]를 봐야 되겠지만 적어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안에서 이 청년은 지식과 삶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재분배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아네스 바르다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고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이후 영화들처럼,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잠시 불었던 DV 카메라 혁명을 빼놓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이며, 주제 의식하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르다는 DV 카메라가 누벨 바그 세대의 정신을 재해석할 수 있으며, 필름 중심의 기존 영화 제작 체계를 전복시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다큐에서 DV 카메라는 페드로 코스타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다. 바르다는 DV 카메라 하나를 들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정 도중에도, 작업 구상 도중에도 즉흥적이고 자유연상적으로 이미지를 채집하고 선별해 배치한다. 바르다는 이를 통해 카메라와 자신의 몸을 일체화시킨다. 바르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카메라 렌즈도 향하고 반대로 렌즈가 머무는 곳에 바르다의 시선도 머문다. 바르다는 이 과정에서 어느새 노년을 맞이한 여성 감독으로써 자신을 성찰하며, 누벨바그 시절 거리로 나가 생생한 배우들과 풍경을 잡아냈던 성취를 2000년대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디지털 카메라는 그 점에서 바르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도구기도 하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사라지는 과거로 남는걸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바르다는 영화 속에서 주제가와 가까운 랩을 시전하기도 한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를 통해 그림 속 이삭을 줍는 행위를 사회경제학적 관점과 DV 카메라로 대표되는 미학적 관점, 여성의 관점을 결합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원제 Les Glaneurs Et La Glaneuse는 그 점에서 프랑스어 특유의 '명사의 성' (남성형 Le와 여성형 La.)을 이용해 복잡미묘한 통찰을 함축하고 있다. 바르다는 남성형으로 이뤄진 '이삭 줍는 사람'에다 여성형으로 이뤄진 La Glaneuse를 덧붙여 이미지를 줍고 선정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난삽해보이지만 흥미로운 폭풍이다. 경제학적인 성찰을 다루면서도 바르다 자신의 독백과 사소한 일상을 스케치하는 클립들이 튀어나오는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로 보자면 끊임없이 불어나는 눈덩이를 (혹은 게임 [괴혼]에 여러 물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별) 연상케한다. 때문에 정돈되어 있지 않고 마구잡이로 진행된다고 느낄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을 줍는 행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바르다는 이 다큐가 어떤 모양새를 취해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치밀한 사유를 거쳐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바르다는 동료인 크리스 마르케와 피에르 롬의 [아름다운 5월]이 보여줬던, 중심이 없는듯 하면서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인터뷰와 자료화면들 간의 사유를 추구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21세기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20세기의 역사로 사라질듯 보였던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바르다 자신도 예측과 달리 90이 되어서도 신작을 내놓을 정도로 정정한걸 보면 이 다큐가 어떤 활력이 되었던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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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 / Night and Fog] (1956)

알랭 레네는 경력의 시작을 몇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했다. [밤과 안개]는 그 시절 레네에겐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초창기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 중에서 논쟁적이고 도발적으로 역사와 기억을 물었고 그를 주목받게 만들었다. [밤과 안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했는지 얘기해야 할듯 하다. [밤과 안개]는 1955년 프랑스 및 강제수용소 해방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전시 [저항, 해방, 추방] 기획에서 출발했다. 전우회는 영웅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원했지만, 기획 주최자들은 그보다 더 급진적인 형태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였다. 제작자들도 물론이고 당시 갓 다큐멘터리 몇 개로 이름을 알린 레네 자신도 유대인이나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아니였기에 이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처음엔 감이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진짜 생존자인 장 카이롤이 이 기획에 참여하고 예상치 못한 폴란드측 기록 자료의 등장으로 [밤과 안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무시무시한 이유는 중심이 되는 두 이미지 사이에 어떤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밤과 안개]는 비극이 이미 끝난 장소에서 시작한다.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고 간 아우슈비츠엔 버려진 건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사건. 레네와 마르케, 카이롤은 사건이 끝나고 없는, 현실에서 영화를 출발한다. 너무나도 평온한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관객에게 질문한다. 여기가 우리가 봤던/알고 있는 그 끔찍한 아우슈비츠를 맞습니까?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엔 기획 도중 홀로코스트 10주년 기념 행사에 갔다가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두 기획자 올가 보름스-미고와 앙리 미셸의 시선도 담지된다. 

이 질문에 이어 세 사람은 폴란드에 운좋게 남아있었던 홀로코스트 자료 화면들을 끌어올린다. 그 자료들은 매우 끔찍하다. 아마 보다가 충격받고 울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자료 화면들은 날 것 그대로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준다. 실제로 카이롤 역시 영화를 만들던 도중 이 영상들을 보고 PTSD가 재발해 괴로워하며 편집실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이미지들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연출이나 조작이라는 알리바이 없이 무의미한 죽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도망칠 구멍이 없다. 화면 위에 일어난 죽음은 화면 밖에서 정말로 일어났고, 다시 돌이킬수도 없다. 엔터테인먼트로써 죽음을 한창 넘어서버린, 스너프 필름이나 범죄 현장 사진이나 다름없다. [밤과 안개]는 고통과 무의미로써 폭력과 죽음이 넘쳐난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그 무의미한 죽음을 지시한 사람들의 얼굴과 광기 역시 장르화나 허구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감정적 사도마조히즘이나 포르노로 빠질수 있는 자극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레네를 비롯한 제작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미지를 선정하고 배열하는데 앞장섰던 레네는 그 이미지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록'이다. 흩어져있던 자료들을 하나의 몽타쥬로 구성한다는 것. 영상 구성을 담당한 레네는 이 영상들이 언젠가 사라질까봐 근심하면서 몽타쥬를 짠 게 분명하다. 레네는 [밤과 안개]라는 제목으로 절박하게 자칫하면 사라질뻔한 끔찍하지만 귀중한 이미지를 하나의 영화로써 포섭하고 기록한다. [밤과 안개]는 현실에서 카메라를 들이대 이미지를 채집한다는 다큐멘터리적 행위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홀로코스트를 기록한 이미지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등치되고 있다. [밤과 안개]는 아직 전쟁이 잊혀지지 않은 그 시절, 잊으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영화의 몸에다 자신을 새겨넣고 있다.

레네는 이 이미지들을 평온한 수용소 유적지 촬영 현장과 배치한다. 그 순간 평온한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는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우리는 영화 속 자료 화면 속에서 그 현장을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화면이 레네가 가져온 이미지와 겹쳐지는걸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고통과 무의미로 가득한 폭력을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되며, 동시에 그 자료 이미지의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남아있는 유적 이미지들은 더욱 끔찍하게 인류사가 낳은 비극의 순간을 장식하는 증인이 된다.  [밤과 안개]는 변증법적 논리를 통해 사건이 지나간 자리와 사건을 기록한 이미지 간에 만남을 추구하면서 그 이미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밤과 안개]에서 두 이미지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여기서부터는 장 카이롤과 크리스 마르케의 공이 크다. 이 둘이 참여한 나레이션이 두 이미지를 묶고 있다. 카이롤과 마르케의 나레이션은 상술했던 부재의 풍경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그 부재의 풍경이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죽음과 폭력이 있다는걸 주지시킨다.  시적인 언어로 구사된 나레이션은 그 점에서 은폐된 폭력과 공포를 부재하는 공간에서 길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냉정한 시적 언어로 두 이미지 간에 존재하는 '부재'와 '존재'를 채워가며, 그 당시 있었던 상황과 생존자의 기억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시적 언어를 읽는 미셸 부케의 나레이션은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5월], [환송대]나 [태양 없이]로 이어지는 마르케의 이후작에 등장하는 기억과 이미지, 장소 간의 사유는 이미 [밤과 안개]에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 말은 알랭 레네에게도 적용된다.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과 [지난해 마리앵바드] 등에서 찾고자 했던  '기억'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그걸 영화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역시 여기서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이 냉정하게 쓰여진 시는 동시에 불의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격렬한 고통, 더 이상은 이런 비극은 안 된다는 절박한 꿈틀거림을 품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선언이다. 당신들은 정말로 이 비극이 없었다고, 비극 전날처럼 살아갈 것인가? 그 없음을 비극 이전의 없음처럼 기만하며 살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피해자는 뭐가 되는가? [밤과 안개]는 어떻게든 과거를 잊은 척 살고자 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통렬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밤과 안개]에서 가장 먼저 호명되는 이들이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 ("독일의 노동자, 뷔르거 암스테르담의 유태계 학생 슈테른 크라코우의 상인, 슈믈스키 보르도의 여학생 아네트 등은 각자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수천 마일 거리에 그들을 수용할 곳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라는건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 피해자들이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분노, 고통에 대한 이해와 연대, 반복하지 말자는 결기가 [밤과 안개]를 위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인류는 [밤과 안개]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고,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고 울 수 있다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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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Leviathan] (2012)


리바이어던

Leviathan 
6
감독
루시엔 카스탱 타일러, 베레나 파라벨
출연
데클란 코닐리, 조니 갓콤브, 아드리안 귈레트, 브라이언 자넬, 클라이드 리
정보
다큐멘터리 | 프랑스, 영국, 미국 | 87 분 | -

고프로에서 만든 히어로라는 카메라가 있다. 몸이나 다른 곳에 부착할수 있는 소형 카메라로 극단적인 광각을 통해 얻은 시야폭과 극한의 상황에서도 작동할수 있는 카메라인데, 발매 이후 스포츠/액션 캠코더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볼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카메라들은 인간의 지각 체계에 맞춰 대상과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촬영해왔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인다 해도 기본적으로 '대상'을 인지할수 있을 정도였거나 짧게 만들어져 다음 컷의 지각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만약 고프로 히어로의 기동성을 이용해 인간의 '정상적'인 지각 체계를 넘어선 영상물을 만든다면 관객들에겐 어떤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리바이어던]의 상상력은 여기서 출발한다. 미국 원양어선의 일상을 다루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나 첫 장면에서 그런 내용이라는걸 바로 인지하기엔 너무나도 어렵다. 거친 화면으로 일그러진 검은 색의 스크린을 응시하면서 가끔 들려오는 바닷소리와 소음을 통해 우리가 있는 곳이 바다라는걸 겨우 알수 있을 정도다. 한창 뒤에 나오는 것도 구체적인 상황을 인지하기엔 곤란한, 왜곡되고 찌그러진 바다의 이미지다. 그것도 1080p라는 2k에도 못 미치는 콘트라스트가 높은 HD 화면 말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 이미지를 뒤덮은 조잡한 음질로 녹음된 소음은 관객의 집중력을 계속 방해한다.

한창 후에야 우리는 건져올려지는 고기들을 통해 어업 작업을 이어가는 어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이내 연관성 없어 보이는 컷 연결에 방해받는다. 각각의 시퀀스 간에는 아주 희미한 연결 고리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두 감독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카메라의 내구도를 테스트하듯이 온갖 상황에 넣어대고 마구 찍어댄다. 생선 버리는 통에다 카메라를 집어넣거나 물이 빠지는 곳 같이 도무지 찍을수 없을것 같은 곳까지 찍어낸다. 그 결과 지금까지 원양어선을 다루면서 지켜져왔던 안전한 거리감은 사라지고 스크린엔 질척한 바다냄새와 죽은 생선들의 이미지로 가득차게 된다. [리바이어던]이 보여주는 원양어선 세계는 까놓고 얘기하면 위생하고는 거리가 먼 곳이다.

사람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리바이어던]은 일반적인 다큐멘터리하고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우선 이 영화에서는 유의미한 대사가 등장하질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의미있는 대화로 이어지지 않고 프레임 내부의 인간들이 소통하기 위해서 내는 음향적 효과에 그친다. 한술 더 떠 두 감독은 종종 사람들을 생선과 마찬가지로 일그러트려 찍기도 한다. 배 밖을 벗어나 바다로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감독들은 바다에다가 카메라를 던져 차가운 바닷물과 날아드는 새들과 녹슨 배의 모습을 찍어내서 광폭한 몽타쥬를 만들어내는데, 이 몽타쥬들은 디지털 화면 특유의 날아가버린 표현 (스크린으로 보면 이 차이는 확연하게 나타난다)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추상적인 무언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극단적인 광각에 담겨진 바다의 이미지들은 밤이나 낮이나 기괴하기 그지 없다.

전반적으로 [리바이어던]은 완고하게 '드라마'의 자장에 들어가는걸 거부하며 집요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한다. 카메라는 인간의 지각을 넘어선 위치에서 이미지들을 채집해 배치하며 그렇기에 [리바이어던]의 지각 세계는 지금까지 다큐멘터리하고는 달라질수 밖에 없다. 이 지각의 세계는 지독하게 파편화되어 있으며, 탈인간화되어있다. [리바이어던]의 이런 기술의 발전과 에롤 모리스나 스턴 브래키지, 고드프리 레지오에서 이어진, 플래허티적인 사실 재현의 다큐멘터리로써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조류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의 세계는 정말로 죽은게 아니다. 차라리 자연의 생명력이라는 이름에 은근슬쩍 무시되어왔던 죽음과 피로가 담긴 이미지를 꺼내면서도 그것에게도 어떤 힘을 불어놓고자 하는, 일견 모순된 시도를 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고프로 히어로에 담긴 디지털 특유의 거친 화면은 그렇기에 오히려 이 죽음과 피로를 미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생동감을 불어넣어준다. 그렇기에 [리바이어던]은 어느 순간 들어서면 모든 의미나 맥락을 잃어버리고 광폭한 시청각 공격으로 가득찬 바다에 대한 초현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시가 되어버린다. 콘트라스트 강한 어두운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얀 새들, 물 빠지는데 들어와서 생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새, TV를 보면서 곯아떨어지는 선원, 비릿한 생선들, 녹슨 배... 어둠이 짙게 깔린 이 이미지들에서 의외로 낭만주의와 고딕의 영향력을 느낄수 있다. 삶의 투쟁 속에서 나타나는 피로함과 죽음이 시적 감수성이 디지털을 통해 재발견되었다고 할까. 그 점에서 [리바이어던]은 조르쥬 프랑주가 만든 [짐승의 피]의 적통을 이었다고 볼수 있는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이 시적 감수성이 그저 고프로 히어로라는 기술의 힘과 편집을 빌린 우연의 산물인지 아니면 감독들이 정교하게 계산해서 얻은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리바이어던]은 영화 제목처럼 인간의 지각과 운동을 넘어선 영역에 카메라를 설치해 바다에 사는 광폭한 괴물처럼 이미지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희귀한 영역을 탐구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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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노운 [The Unknown Known] (2013)



언노운 노운

The Unknown Known 
6.5
감독
에롤 모리스
출연
에롤 모리스, 도널드 럼스펠드, 켄 메데이로스
정보
다큐멘터리 | 미국 | 103 분 | -


에롤 모리스의 [언노운 노운]은 말장난으로 시작한다. Known Known, Known Unknown, Unknown Unknown. 그리고 영화의 제목인 모르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 Unknown Known. 이 말장난 나레이션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언노운 노운]이 곧 무수한 언어적 기만의 바다를 보여주는데 주력할 거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이어진 눈송이와 무수한 메모에 대한 언급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언노운 노운]가 끌고 온 도널드 럼즈펠드라는 인물은 화술에 도통한 노회한 정치인이다.

기본적으로 [언노운 노운]은 2001년 9월 11일 테러와 그 이후 있었던 테러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인들은 그 중심에 조지 W. 부시와 럼즈펠드 일당들이 있었다는걸 안다. 에롤 모리스는 그를 카메라 앞에 앉혀놓고 그가 경력을 시작했던 순간부터 시작한다. 196-70년대 닉슨과 일하면서 경력을 쌓던 럼즈펠드는, 닉슨의 눈밖에 벗어나 해임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되려 닉슨의 워터게이트가 터지면서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럼즈펠드의 감각이나 말은 노련해지고 몇 번의 굴곡을 거쳐 마침내 2001년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다.

가끔 결혼 사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되려 이 때문에 튀어보인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언노운 노운]은 메피스토텔레스적인 웃음을 흘리며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인물의 주장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그의 언어 속에 숨어있는 무심한 폭력을 끌어내려고 한다. [가늘고 푸른 선] 등으로 몽타쥬와 시청각적인 결합으로 다큐멘터리에 혁신을 가하자고 했던 에롤 모리스는 [언노운 노운]에서는 자막과 그래픽을 이용한 연출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럼즈펠드가 남긴 메모들과 사용하는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영상 위에 노출시킨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신보 아키유키의 [바케모노가타리]를 생각하면 딱 좋다. 물론 신경증적인 분위기를 표현주의 허세로 드러내는데 그치는 신보하고는 비교가 불가하다. 이런 모리스의 연출이 조롱을 담고 있다는 건 말할바도 없을 것이다. 언어의 원래 정의를 담고 있는 이미지와 실제 말 간의 불일치야말로 [언노운 노운]의 기본 골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하이라이트라면 역시 2003년 테러와의 전쟁 이후 있었던 관타나모에 있었던 일련의 포로 학대 사건이다. 모리스의 질문에 대해 럼즈펠드는 그런 일은 없었으며 잘 관리된 곳이였노라고 극력 주장하지만 실은 포로학대가 있었다는 걸 모리스도 알고 있으며 (그의 2008년작 [관리 운용 규정]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심지어 럼즈펠드도 알고 있다. 모리스는 메모와 보고서에 있었던 문구들을 들려주고 이에 그는 "어느 전쟁이나 진행되면서 계획에 없고 예기치 않았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일어나요"라면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이런 과정은 다큐멘터리 내내 이어진다. 럼즈펠드는 지금도 줄곳 같은 주장을 내세우지만 그 주장들은 매우 허약한 기만에 기반하고 있다. '있지도 않은 서류'에 대해선 질문받을 여지를 차단해버리고 '미국은 중동에서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를 추구한다'라는 판에 박힌 문구만을 반복한다. 이는 그가 자신이 쓴 메모를 언급할때 본격적으로 두드러진다. 럼즈펠드는 퇴임할때까지 남기 무수한 메모 덩어리와 발언들을 남기고 그것이 하나의 사실을 구성하고 있지만 럼즈펠드는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메모를 써왔다는 사실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메모를 읽으면서 "어떤 건 내가 쓴 건지 못 믿어요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고"라고 하는 럼즈펠드의 발언이야말로 그 태도의 총화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럼즈펠드의 태도가 바로 말장난같은 영화의 제목을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럼즈펠드는 꾸준히 자신과 부시는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그 당시에 있었던 파고 속에서 무수한 증거들을 기록했음에도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언노운 노운]은 달변가의 애매함과 웃음으로 점철된 변명극과 그것과 어긋나는 (모리스가 세심하게 깔아둔) 언어의 본디 뜻을 드러내는 이미지간의 이중극이 될 수 밖에 없다. 몇몇 평론가들은 이 점을 들어 혹평했는데, 그건 에롤 모리스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리스는 그저 럼즈펠드가 내뱉는 무수한 변명들을 마치 스노우글로브에 떠다니는 눈입자들처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을 즐기느냐 아니면 짜증을 내며 떠나느냐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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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향한 그리움 [Nostalgia de la Luz / Nostalgia For The Light] (2010)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 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경주, '주저흔'


[칠레 전투] 삼부작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2010년 다큐멘터리 [빛을 위한 그리움]은 관객들을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으로 데려간다. 구즈만은 어렸을때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아타카마 사막에 세워진 천문 관측소에 관측하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하지만 아티카마 사막은 과거 피노체트 정권이 저지른 학살의 증거들이 땅에 묻혀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찾을 수 없는 가족의 시체들과 피노체트 정권이 저지른 악행들을 찾으러 사막을 헤멘다. 


구즈만 감독은 관계없어보이던 이 두 개를 하나로 묶는다. 물론 아주 꼼꼼하고 치밀하게 묶는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다큐멘터리의 방점은 천문학이 아닌 역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니깐. 하지만 천문학과 고고학에 대해 구즈만 감독이 가지고 있는 존중심과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를 넘나드는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 그리고 전문가들에게 던지는 성실하고도 날카로운 인터뷰는 단순한 겉핣기 이상의 단단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단단한 기반을 가진 통찰과 구성을 통해 구즈만 감독은 '우주와 자연이 안겨주는 경외스러운 아름다움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학자들의 분투'라는 층위와 '역사의 참혹함에 희생된, 소중했던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이라는 다른 층위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겹치게 한다. 그 결과 [빛을 향한 그리움]은 희귀할 정도로 시적인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 아타카마 사막과 그 하늘들은 곧 '삶'라는 하나의 우주로 재탄생하게 되고 해독되지 않은 무수한 별들과 아직도 찾을수 없는 희생된 사람들은 동일시되며 그것들을 찾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진다. 영화의 제목인 빛을 향한 그리움은 곧 한 생을 살아내기 위한 투쟁을 향한 그리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두 층위에 속해있던 사람들의 경계는 서서히 허물어진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을 별에 비유해 설명하는 천문학자, 자기에게도 전파망원경 같은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유족, 비록 부모님을 피노체트에게 잃었지만 꿋꿋히 살면서 천문학자가 되고 어머니가 된 소녀... 그 겹쳐짐의 절정은 전파 망원경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유족들일것이다. 그 순간 영화 중간중간 조용히 내리던 먼지의 빛들이 그들에게 겹쳐진다. 탁월한 미적 메타포라 할만하다. 


[칠레 전투]가 공산주의적이고 민중을 위한 정부를 주창했지만 실패한 아옌데 정부의 시작과 끝을 다루고 있었고 [피노체트 재판]가 그 아옌데를 쓰러트린 독재자 피노체트의 몰락을 다루고 있었고 [살바도르 아옌데]는 아옌데에 대한 회고를 다뤘다고 하면 [빛을 향한 그리움]은 아옌데와 피노체트라는 두 격랑을 헤쳐가야 했던 칠레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어찌보면 이 다큐는 그 잔혹한 시대에도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아 '멸종'한 자들을 잊지 않는 자들에게 바치는 시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드물도록 슬프고 아름답게 잔혹하고 잊혀지지 않는 상처와 그래도 꿋꿋히 나가는 삶과 우주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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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from Abby Road 1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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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감상문은 프로그램에 등장한 뮤지션 순대로 입니다.)

어제 1부를 감상했습니다.

1.Snow Patrol

냉정하게 말해서 좀 재미가 없었습니다. 원래부터 별 관심이 없던 밴드였기도 했지만, 음악 스타일이 아버지 말씀대로 자기 색깔이 없는 듯. 뭔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음악이였습니다. 멜로디들은 괜찮았지만.([Chasing Car])

...뭐 원래 콜드플레이니 라됴헤드 카피 밴드들이 다 그렇고 그렇지요.

인터뷰도 평범했습니다. 꽤 괜찮은 멘트도 날려주고, 성실하게 했지만 범상한 기운은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건질 만 했던 것은 게스트 뮤지션으로 나온 마샤 웨인라이트. 인터뷰 할때와 노래 부를때의 목소리가 갭이 십해 깜짝 놀랬습니다.

2.Madeleine Peyroux

음... 이 분도 스노우 패트롤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전 이 분 이 프로그램 볼때까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_-;; 거기에다가 인터뷰가 스노우 패트롤보다 좀 재미있었다는 점? 이분도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음악을 들려주더군요.

이 분 편의 키포인트는 바로

드럼 브러쉬는 저렇게 생겼구나!

였습니다.(뭐)

3.Red Hot Chili Pep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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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베이스)가 늙었어!!!!!!!!!!!!!!!!!!


제가 아는 플리는 절대로 저렇지 않단 말입니다.(버럭)

이번 편에서 인터뷰를 재미있게 한 뮤지션이였습니다. 그런데 음악은 노쇠한 느낌이 나서 안습. 특히 2번째 곡은 이들도 힘이 딸리는 구나... 라는 생각이 팍팍 들게 했습니다. 아무리 플리가 윗도리 벗고 방방 뛰어도 열기 대신 힘들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얌전해진거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나마 마지막 곡에서 옛 명성이 돌아오는 듯해서 나았음.

전체적으로 1부는

-별 관심 없는 뮤지션
-평범한 인터뷰
-인상적이지 못한 라이브 (한명은 어쩔수 없다 쳐도)

로 그저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음 화는 제가 좋아하는 Paul Simon과 Primal Scream이 출연하니깐, 왠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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