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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41)
서부극에서 총이 발사되기까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블리자드제 FPS 게임 [오버워치]에 등장하는 맥크리라는 캐릭터가 있다. 대놓고 서부극 무법자를 가져온 이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궁극기는 '황야의 무법자Deadeye'다. 무방비가 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화면에 있는 대상을 오랫동안 조준하고 있으면 한 방으로 처치하는 이 궁극기와 "석양이 진다.... It's High Noon."이라는 대사는 곧 인터넷 상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이 대사는 왜 유행어가 되었는가? 그것은 [오버워치]라는 게임이 빠른 스피드의 하이 테크놀로지를 배경으로 한 하이퍼 FPS의 흐름과 반대로 대상을 처치하기 위해 다소간의 뜸을 들어야 하는, 느긋한 호흡 때문이였다.

'황야의 무법자'가 보여주는 이 느긋한 호흡이야말로, 서부극의 리듬을 이해할수 있는 중요한 단서 아닐까? [오버워치]에서 맥크리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석양을 지기까지, 플레이어는 꽤 오랜시간 인고를 하면서 상대의 틈을 빠르게 파고들어야 한다. 즉 적대하는 상대를 향해 총이 발사되는건 한순간이지만, 그 발사되기까지 그 과정엔 어떤 텀이 있다. 

이런 느긋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에 마무리되는 리듬은, 단순히 총이 등장하는 결투 뿐만이 아니라, 서부극 전체의 리듬하고도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오에 이뤄지는 1:1 대결도 대결이지만, 서부극은 총이 발사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총이 발사되기 이전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장르다. 심지어 고전들보다 좀 더 자극적인 재미로 무장한 스파게티 서부극이나, 총이 발사되어 피부와 뼈를 찢는 순간에 천착하는 샘 페킨파의 서부극에서도, 세련된 대사를 온갖 문제에 대해 떠벌이는 요란스러운 쿠엔틴 타란티노의 서부극도 자세히 보면 총이 발사되기까지는 일반적인 액션 영화와 비교해보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총이 발사되는 순간을 묘사하는 컷도 그렇다. 서부극에 등장하는 리볼버나 소총은 현대 액션 영화들의 기관총이나 자동권총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발사되지 않는다. 스피드 클립과 문 클립이 동원되더라도 서부의 사나이들이 들고 다니는 리볼버는 느긋하게 총알이 채워지고 발사된다. 그리고 이런 느긋한 리볼버라는 무기를 묘사할때도 리볼버에서 총알이 떠나는 순간을 과장하거나 극대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부극을 보는 사람은 그 느긋한 호흡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를 보면서 와이어트 어프가 죽은 동생의 복수하기까지 꽤 오랜시간동안 기다려야 하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수색자]에서 에단이 조카 가족을 잃은 뒤 조카를 찾고 복수를 하기 위해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복수심에 불타는걸 바라봐야 한다.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 닥 토빈이 옛 갱단 단원들에게 총을 들이대기까지 우리는 우스꽝스럽지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싸움과 처참한 겁탈을 지켜봐야 한다. 심지어 야심 없어보이는 버드 보티커의 [7인의 무뢰한]에서도 초반부 총격전은 시원스럽게 생략되고 벤이 뭘 하는지 궁금해하며 그의 행적을 뒤쫓는다.

이처럼 서부극은 총이 발사될때까지 왜 인물들이 총을 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납득시키는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왜'는 감독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존 포드의 인물들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과, 버드 보티커의 인물들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은 매우 상이하다. 포드의 [황야의 결투]나 [수색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등장하는 총을 든 사나이는 위태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되찾기 위해 총을 쏜다. 안소니 만의 총을 든 사나이는, 과거에서 탈주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과거 간의 충돌 속에서 총이 발사된다. 버드 보티커의 총을 든 사나이는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저항에서 총을 든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무법자들이 등장하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멕시코인을 착취하는 고용주에게 총구를 돌리는 보안관이 주인공인 [빅 건다운]은 어떠한가?

좋은 서부극은 인물들이 왜 총을 들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고 동시에 그 납득에서 귀결된 액션에서 감흥를 안겨준다. 우리는 존 포드의 영웅들이 왜 공동체를 지키고 싶어하는지, 그 과정을 납득한다. 우리는 버드 보티커의 사나이가 가진 결투의 미학이 어떤 윤리체계로 작동하는지 납득하며, .안소니 만의 인물들이 어두운 과거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한다. 라울 월시나 리처드 플레이셔, 앙드레 드 토스 같은 고전 서부극 감독부터 몬테 헬먼이나 로버트 알트만 같은 수정주의 서부극 감독들까지 필자가 미처 접하지 못한 영화들을 찾아보면 사례는 무수할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서부극은 총이 발사되는 순간만큼이나 그 이전,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나 관계가 안겨주는 드라마도 느긋하지만 성실하게 다룬다. 그 점에서 서부극은 역시 총이 등장하긴 하지만 배배꼬인 상황과 욕망, 그리고 그 위에 드리운 살벌한 철근 콘크리트의 어둠과 씁쓸함에 집중하던 필름 느와르보다도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엮인 액션의 순수함을 맛볼 수 있는 장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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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에서 일본 무사도 문화는 어떤 식으로 접목되는가?

서구권에서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라는 저서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대표적인 리버럴리스트였던 니토베 이나조는 독실한 기독교도로 미국으로 넘어가 1899년 “무사도: 일본의 정신” 이라는 책을 내면서 일약 유명해지게 된다. 니토베는 이 책에서 일본정신의 정수가 무사도라 보면서 무사계급의 도덕적 존재 양상인 의, 용, 감위견인의 정신, 인, 예, 성, 명예, 충의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양의 일본 인식을 바로잡자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토베는 이를 통해 일본이 나름 높은 도덕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군사적으로도 강대한 근대 국가라고 보여주려고 했다.

 이 [무사도]가 저술된 배경에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관련이 있는데 당대 서구제국주의에게서 동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니토베의 [무사도]는 그 점에서기독교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일본 정신을 설명하고자 하고자 했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니토베의 이런 전략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동양인 학자는 오리엔탈리즘의 체계를 <조작>할 수 있게 되므로, 그들이 스스로 미국에서 받은 훈련 받으며” “원주민의 정신을 서구인의 입맛에 맞게 소개한” ‘원주민정보원’ 전략을 취한 것이였으며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1, pp 516-517 이는 곧 서구인들에게 일본이 서구와 동등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걸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서구인들에게 [무사도]는 문명화된 군사강국 이미지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이였는데, 일단은 군사강국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면서 그 비결을 무사도에도 찾았지만, 그 무사도는 차라리 근대국가적이라기 보다는 봉건국가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와 미국의 일본인식] 실제로 연구 자료에 따르면 무사도 출간 이전 미국 언론에서 1900년 이전엔 무사도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았다면, [무사도] 출간 이후 [무사도]는 프랑스, 독일 등 7개 국어로 소개 되었으며 이후 이어질 일본 사무라이 영화 열풍의 기초가 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하지만 이런 무사도 열풍은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그라들었고, 그 이후로 다시 움트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사무라이 무사도 정신이 서구 대중문화에 파급을 미치기까지

 하지만 이런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이 본격적으로 서구권에 정착하게 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정확히는 일본 영화가 서구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일본 영화는 곧 서구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베니스와 베를린, 칸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영화제들은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 신도 가네토 같은 감독들을 모셔해오면서 일본 영화는 곧 동아시아 영화계를 뛰어넘어 글로벌한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영화의 장르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서구 대중들 머릿속에서 자리잡은 영화는 사무라이 영화였다. [7인의 사무라이]는 곧 서부극으로 무대를 바뀌면서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가 되었고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은 조지 루카스를 매혹시켜 [스타워즈]의 모티브가 되었다. 또다른 [요짐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코바야시 마사키가 만든 [할복]이라던가 오카모토 키하치의 [대보살 고개], 고샤 히데오의 [짐승의 검] 같은 영화들도 서구 관객들에 문을 두드리면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구로사와 아키라나 코바야시 마사키가 지식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사무라이 영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면 좀 더 밑바닥에서는 [자토이치 시리즈]라던가 [아들을 동반한 검객] 같은 가볍고 난폭한 사무라이 영화들이 하위 문화 매니아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쌓여온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매혹은 1975년 제임스 크라벨이라는 작가가 [쇼군]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제임스 크라벨은 이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매혹을 “가상의 영국 선원이 일본에 난파해서 사무라이 세계의 일원이 되면서 빠져들게 된다는 기제를 사용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1980년 리처드 체임벌린이 주연하는 미니시리즈로 제작돼 1억2000만명이 시청하는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이는 지금까지 방영된 모든 미니시리즈 중 두 번째로 많은 시청자 수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0907100080

 그리고 [쇼군] 소설이 발표된 2년 뒤 나온 상기한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 역시 사무라이 영화와 문화가 서구인들의 인상에 강하게 남아있게 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루카스는 단순히 영화의 플롯을 베껴오는 정도가 아니라 복식이라던가 제다이의 원형을 사무라이 문화에서 가져온 뒤, 기를 포스로 번역하면서 이런 사무라이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서구 관객들조차 익숙하게 받아들일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점에서 [스타워즈]와 [쇼군]은 일본 사무라이 문화가 이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저변을 확대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쇼군]이 방영되고 [스타워즈] 후속편들이 대히트를 치던 1980년대에 이르면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머물지 않고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어 무시할수 없는 비중으로 올라서게 된다. 때마침 당시 일본 버블 경제의 여파로 떠오르는 해라고 불리면서 주목과 경계를 서구권에서 경계를 받기 시작했고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너도나도 일본 문화에 접하게 된다. 이 시절에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던 더 베이퍼스의 ‘Turing Japanese’라는 곡은 그런 1980년대 일본 열풍을 제대로 보여주는 곡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런 급부상으로 인해 일본은 “경제동물”이라 불리며 경원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기도 했으며 이런 불안감은 기존의 서구 위치를 위협하는 일본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다.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일본 전광판과 야쿠자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온 형사 이야기를 다룬 [블랙 레인]은 이런 열광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198-90년대부터 헐리우드에서는 [스타워즈]처럼 인용 수준이 아니라 사무라이 문화에 매혹되거나 그 룰에 따라 행동하는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나온 알랭 들롱이 주연하고 장 피에르 멜빌이 만든 [사무라이]는 어찌보면 그런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영화였고 [헌티드]라던가 [킬빌], [한니발 라이징], [블레이드], [신 시티] 같은 영화들이 사무라이 문화나 사무라이 이미지를 차용해 지금껏 그려왔던 히어로의 이미지에 사무라이와 무사도 이미지를 덧붙여 고독함을 차용하고자 했다. 

 이렇게 1980년대부터 서구권 내 일본 열풍은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대한 매 지금도 이 유행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킬빌]와 같은 영화로 꾸준히 재생산되고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헐리우드 영화에서 일본 무사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재현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스트 독], [라스트 사무라이]와 [더 울버린]을 통해 헐리우드 영화가 무사도로 대표되는 사무라이 문화를 어떻게 접목시키고 소화했는지 파악해볼 예정이다.

[라스트 사무라이]: 세계화에 저항하는 고독한 전통의 사무라이



라스트 사무라이 (2004)

The Last Samurai 
7.4
감독
에드워드 즈윅
출연
톰 크루즈, 와타나베 켄, 사나다 히로유키, 티모시 스폴, 빌리 코널리
정보
전쟁, 액션 | 미국 | 153 분 | 2004-01-09

에드워드 즈윅의 2003년작 [라스트 사무라이]는 1876년 일본 개항기와 세이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미국이 독립한지 100년. 남북 전쟁과 인디언 전쟁으로 공을 세운 네이든 알그렌은 그러나 화려한 명성과 달리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네이든은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사무라이 반란군을 토벌할 정부군의 군사 고문으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정부군은 대패하게 되고 네이든은 포로로 사무라이 반란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반란군의 본거지에서 네이든은 사무라이 문화를 접하고 그들의 정신에게 감화되어 나중엔 정부군에 저항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라스트 사무라이]은 후일 언급할 [더 울버린]처럼 일본에 건너왔다가 무사도 정신에 매혹되는 서양인 캐릭터를 내세워 무사도 문화를 소개하는 영화다. 하지만 개인적인 드라마에 비중이 쏠린 [더 울버린]과 달리 [라스트 사무라이]는 좀 더 큰 틀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점이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에 영향을 받은 영화지만,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 정신 문화와 서구 정신 문화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던 니토베의 의도와 달리 순순하게 그 두 세계가 별개의 세계라는 걸 인정하고 시작한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영화에서 네이든은 서구화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에 부응해 온 캐릭터로 설정되며 일본의 문화는 영화 초반부엔 네이든의 시각에 맞춰서 이질적이고 불쾌한 무언가로 그려진다. 네이든이 전쟁에서 패한 사무라이의 할복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장면이라던가 사무라이 마을에 도착해 겪는 의식주 문화에 대한 혼돈들은 네이든으로 대표되는 서구인들에게 일본 문화는 동등한 세계가 아니라 처음 접한 다른 세계라는걸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내에서 서구로 대표되는 네이든 캐릭터가 왜 무사도 문화에 매혹되었는가? 이 답은 초반부 네이든이 조국과 명예를 위해 싸웠지만 인디언 학살과 전쟁의 참상으로 고통받는 캐릭터라는 작중 설명에서 해명이 된다. 여기서 에드워드 즈윅과 각본가 존 로건은 서구의 문화가 명예를 잃어가는 문화로 해석하고 일본의 무사도 문화에서 그 답을 찾는다. 그리고 서구와 근대적인 서구 문화를 수입하려는 일본 정부군과 전통적인 무사도 문화를 지키려는 잔존 사무라이들의 대립에서 무사도 문화에서 자신의 생의 의미를 찾게 되어 일본인들에게 ‘불공평한 조약’을 맺지말라고 충언하는 경지에 이르는 서구인 네이든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문화를 세계화하려는 서구 문명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도는 영화 발표 당시인 2004년이라는 연도를 생각해보면 세계화에 대한 회의주의로도 확장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 일본 문화와 무사도 정신은 세계화에 대항하는 문화 상대주의의 상징으로써 기능하고 있다. 그 점에서 [라스트 사무라이]의 무사도는 단순히 멋있다 수준의 겉햝기가 아닌 진지하게 탐구하고 고민해볼만한 타자의 문화로 그려지며 에드워드 즈윅과 존 로건은 그 타자의 문화에서 인류 공통의 가치를 발견해내 관객들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로맨스라는 문제에서도 후술할 [더 울버린]과 [라스트 사무라이]는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데, [라스트 사무라이]의 타카가 네이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계기는 일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네이던의 노력에서 비롯된다면 [더 울버린]의 마리코가 울버린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건 울버린이 실제적인 위협에서 자신을 지켜줬기 때문이다. 즉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무사도 문화로 대표되는 타자의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가 캐릭터 관계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스트 사무라이]의 일본은 SF 소설가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했듯이 “실은 서구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종류의 "잃어버린 미학", 퓨리타니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 케이카쿠는 이어서 이 영화는 그럼에도 ‘익숙해진 일본인의 얼굴을, 외국인의 시선과 필름이란 필터를 거쳐서, 이화한다’면서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http://noobcoela.egloos.com/2451722 이 외에도 이토 케이카쿠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에서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이런 감각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며, 배우가 배우의 이미지로 나오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에드워드 즈윅의 연출과 시선이 어떻게 일본 문화를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한 이 독특한 매력이야말로 [라스트 사무라이]의 장점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토 케이카쿠가 설명한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이화’라는 매력은 김효순의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에서 [라스트 사무라이]를 다룬 부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김효순은 이 논문에서 반란군을 이끄는 영주 가츠모토의 자결장면에 나오는 벚꽃 연출을 설명하면서 이 장면은 “일본문화를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환상에 의해 연출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김효순의 지적은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한 ‘이화’라는 매력은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무사도 문화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그려진 무사도 문화와 일본인들의 세계는 정작 일본인이 만든 일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들로 대표되는 전통 문화가 왜 세계화라는 흐름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야 하는가’라는 대답이 됨과 동시에 변하지 않고 고정된 문화로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고스트 독: 사무라이의 길]: 아이러니와 패러디, 그리고 진심이 담긴 문화적 칵테일

한편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은 지금까지 언급한 미국 영화들이 일본 문화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매우 독특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영화다. 야마모토 츠네모토의 [하가쿠레: 사무라이의 길]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인용을 하는 주체 고스트 독이 포레스트 휘태커라는걸 알게 된 관객들은 당황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도무지 사무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위치만 적자면 그는 ‘흑인’ ‘갱스터’이다. 심지어 그가 섬기는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일본인도 아니고 이탈리아 갱스터다. 하지만 고스트 독은 흑인 갱스터이지만 끊임없이 사무라이 문화를 언급하고 사람들에게 무사도 정신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한다. 심지어 적이 죽이려고 달려드는 장면에서도 고스트 독은 사무라이의 자세로 그들을 대응하고 무사도 문화를 전파하려고 한다.

 이렇게 짐 자무시는 시침떼듯이 갱스터 장르에 무사도 문화를 접붙여놓고 서로 충돌하는 부분에 대해서 별다른 봉합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스트 독]엔 “진정한 무사도 정신을 지닌 일본인 캐릭터”는 영화에서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쿵푸 마스터가 등장하긴 한다.) 오히려 자무시는 고스트 독에 대한 다른 갱스터들이 어떻게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장면을 넣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루이가 고스트 독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그런 충돌을 노렸다는걸 선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 인용은 코미디에 가까운 모양새를 띄게 된다. 본인은 진지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스트 독의 사무라이 추종은 혼자 붕 떠 있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영어 밖에 모르는 고스트 독과 프랑스어 밖에 모르는 아이스크림 장수 레이몬드와의 괴상한 대화들은 그런 붕떠 있는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의 위치를 은유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무사도 문화 뿐만이 아니라 [고스트 독]은 베티 붑을 비롯한 고전 영화나 만화를 위시해 다양한 문화들의 인용들로 가득차 있는 영화인데, 그 인용들이 노골적이여서 원본을 신경쓰지 않을수 없게 된다. 적어도 짐 자무시는 ‘타자’가 ‘이국의 문화’를 인용하는게 코미디로 보일 수 있다는걸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유머 소재로 삼는 모습조차 보인다. 이 점에서 [고스트 독]은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작하지만 정작 사무라이 캐릭터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를 아이러니하게 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허나 재미있는 것은 이런 안 어울리는 것끼리 아무런 붙어서 생기는 코미디가 실은 매우 강한 존중과 사랑에 담겨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짐 자무시는 코미디 만큼이나 [고스트 독]에서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사무라이 영화들이나 야쿠자 영화들을 인용을 어떤 아이러니 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가장 명백한 예로는, 스즈키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을 흉내낸 하수구 살인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고스트 독이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감정 이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웃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지함과 성실함은 [하가쿠레]로 대표되는 무사도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가 매번 인용하는 무사도 문화는 갱스터 세계의 지저분하고 각박한 인물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빛나며 그의 가치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앞서 말한 무사도와 고스트 독의 관계를 은유한듯한 레이몬드와의 관계 역시 자세히 보지만 웃기지만 그들의 관계 자체도 코미디만으로 남지 않는다. 그들은 엉뚱한 말을 늘어놓지만 감정의 방향 자체가 엇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스트 독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무사도 문화 인용이 동시에 그를 진지하고 위엄 넘치는 ‘히어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결말에 등장하는 고스트 독의 죽음과 고스트 독이 남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은 그 점에서 이 영화를 단순히 유머가 아니라 다른 면모로 볼 수 있게 유도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또 사실을 지적하자면 ‘흑인’ ‘갱스터’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 인용은 짐 자무시 머릿속에서 뜬금없이 진행된 사고 실험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힙합 그룹 우탱 클랜 중국 호북성 무당산에 자리잡은 무당파에서 이름을 따온 이스트코스트 힙합 그룹으로 데뷔작 [Enter the Wu-Tang : 36 Chambers]에서 중국 무술 영화에서 샘플을 따와 곡을 만들면서 유명해졌다.

으로 대표되는 흑인들의 동아시아 무술 영화 (쿵푸/사무라이 등등) 애정은 상당히 깊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 영화 [화산고]가 미국에서 래퍼들이 더빙에 참여해 개봉해 반향을 이뤄냈다는 점도 그런 흑인들의 동아시아 무술 영화에 대한 매혹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자무시는 친절하게 우탱 클랜의 멤버인 RZA를 영화 음악 감독으로 기용하고 “변장을 한 사무라이”라는 이름으로 카메오 출연시키기도 한다. 그 점에서 [고스트 독]은 흑인 문화와 일본 문화 간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주류 백인 문화와 대비되는 성채를 만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고스트 독]은 그 점에서 이중적으로 무사도 문화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무시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코미디 소재로 삼고 있지만, 동시에 그 무사도 문화가 돈키호테의 이상만큼이나 현실에서 이뤄질수 없는 존재라는걸 보여주면서 감독 역시 무사도 문화에 매료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그 점에서 [고스트 독]는 위에서 언급된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매혹된 서구인들에 대한 위트넘치는 헌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로 촉발된 무사도 문화에 대한 서구권의 관심은 전후 일본 문화와 사무라이 영화가 서구권에 수입되면서 촉발되었고 이는 곧 서구권 영화가 자기 식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언급한 세 영화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일본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존중받아야 할 타자의 문화와 서구 문화가 근대화 되면서 잃어버린 새로운 이상향으로 일본의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고 있다면, [더 울버린]은 캐릭터의 내면과 그 캐릭터가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고결한 가치관을 묘사하기 위해서 무사도 정신과 문화를 인용하고 있다. [고스트 독]은 이런 무사도 문화 인용에 대한 농담과 진심이 섞인 코멘터리를 통해 고전과 현대, 인종을 넘나드는 문화적 칵테일을 만들어내는데 주목하고 있다.


참고 문헌 

박수형,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자포니즘의 신화적 의미 연구] (2008, 홍익대학교)

김효순, [일본의 전통전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2005, 고려대학교)

함동주,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와 미국의 일본인식] (2012, 이화여자대학교)

(*참고로 울버린에 대한 분석은 2015/07/20 - [Deeper Into Movie/리뷰] - 더 울버린 [The Wolverine] (2013)에다 올려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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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의 미메시스 이론의 비판적 재구성: 비행 모델

일관성 있는 이야기란 무질서하게 지나가는 시간에 일련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하기가 뇌의 운동이 곧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이러한 이해 방식은 이야기는 어떻게 될 수 있는가?

 이야기란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주시하면서 그에 일련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 3부작을 통해 서술성과 시간성의 순환이 악순환이 아니라, 그 양쪽이 서로를 보강하는 건실한 순환성임을 입증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시간성과 서술성의 상호 보강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양자가 선순환을 이루기 보다는 통상 두 가지 상반된 형태로 나뉘어져 고찰되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이 대립을 심리적 시간과 우주적 시간으로 보며 이 둘의 측면만을 바라봤기 때문에 아포리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런 아포리아를 넘어서기 위해 리쾨르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 심리적 시간론과 우주론적 시간론이 서로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시간의 형상화로서의 이야기 하기를 제안하고 있다. 리쾨르는 이 해결책을 세가지로 나눈다.

 1) 심리적 시간과 우주적 시간 사이에 벌어지는 시간성의 첫 번째 아포리아의 해결책은 서술적 정체성이다.

 이야기 된 시간은 현상학적 시간과 우주론적 시간의 틈새 위에 던져진 다리와 같은데, 이 다리를 리쾨르는 제3의 시간을 만드는 <이야기의 재현활동>이라고 부른다. 이 시간은 나름의 고유한 변증법인 역사와 허구의 상호교배적 통합에서 솟아나는 새싹을 가지고 있다. 리쾨르는 동일성과 자기성의 차이를 말하면서 실체적 혹은 형식적 정체성과 서술적 정체성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역사적이거나 허구적인 이야기들이 갖는 카타르시스적 효과로 정화되고 정제된 삶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 분석학은 서술적 정체성 개념에 대한 철학적 탐색을 위한 교육적 실험이 된다. 주체는 자기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하는 스토리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며 역사적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생산했던 텍스트들을 수용함으로써 정체성을 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런 해결책에 대해 한계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서술적 정체성은 일관되어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것이다. 또한 주체의 자기성에 대한 물음을 완전히 규명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행동의 범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보다는 상상력을 구사한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는 윤리적으로 올바름을 주장한다는 데서 이미 윤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2) 단수의 시간과 복수의 시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간성의 두 번째 아포리아의 해결책은 총체성과 총체화이다. 

 두 번째 아포리아는 단수 집합명사로 이해된 비켜갈 수 없는 시간 개념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언제나 미래, 과거, 현재의 세 가지 탈자태로 분리되는데서 생겨난다. 총체화라는 절차는 역사에 대한 사유를 실천적인 차원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이런 불완전한 매개 때문에 두 번 째 아포리아에 대한 이야기의 해결책은 첫 번째 만큼이나 적절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3)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시간의 세 번째 아포리아와 이야기의 한계

시간의 측정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야기를 통한 시간의 재형상화 그 자체의 한계가 있다. 전자의 내적한계는 이야기하는 기술이 고갈될 정도까지 넘어서서 가늠할수 없는 것에 근접하는 것을 뜻한다면, 후자의 외적 한계는 나름대로 시간을 말하려고 애쓰는 다른 종류의 담론들로 인해 이야기 장르가 넘쳐나는 것을 뜻한다.

 리콰르는 이 세 가지 아포리아를 이야기를 통해 해결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들 각각의 서술적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요구한다고 주장해야 한다”면서 긍정적으로 결말을 짓고 있다.

 리콰르의 이야기의 철학과 미학은 이렇듯 이야기의 시간의 모순성 간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를 풍부하게 포착하고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데 줄거리의 다양한 분기, 개념적인 총체화와 우발적인 현재 사이의 불완전한 매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불확정성과 멈추지 않는 재형상화의 넘쳐남과 같은 한계들이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한 형상화와 고차의식의 이야기가 비록 일정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 이야기 하기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뇌 자체가 무의미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고 투명한 의식 장치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뇌 자체가 무의미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고 투명한 의식 장치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환경과 몸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조절하고 매개하는, 환경 생태학과 몸의 생리학에 의해 이종적으로 제약 받고 있는, 한계를 내포한 중개자라는 이유와도 합치할 것이다.

 이렇게 인지과학적으로 재핵석된 이야기의 시학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뇌의 이야기-하기와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이야기-하기를 하나의 통합된 틀 속에서 이해하는데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등장한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예시로 든다. 미메시스는 ‘고귀한 행동의 재현’으로 서술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극의 작중 인물들에 수행된다.

 하지만 리쾨르는 이 비극 모델을 불협화음으로 간주하며 화음적으로 보이는 것도 실은 불협화음이 모여서 이뤄진 것으로 본다. 화음 안에 불협화음을, 인과적인 논리를 가진 줄거리 안에서 예기치 않게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적인 것을 포함하게 한다는 것, 윤리학에서 대립되는 개념들이 시에서는 겹합된다는 것은 “행동의 재현”이라는 미메시스가 다중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슨 리쾨르가 보기엔 미메시스는 허구적인 공간을 여는 단절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메시스 (1)은 시작 창조가 출발해야 할 상류로서, 모든 인간의 행동 중에서 재현의 대상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 실천에 관한 윤리학의 영역으로 “전-형상화 단계”로 볼 수 있다. 즉는 행동의 뜻을 체험된 시간의 층위에서 풀어보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주목할 가치 있는 행동의 사슬인 뮈토스를 구성하는 창조적인 재현 행위가 바로 미메시스 (2)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뮈토스는 온갖 기대에 반해 행동이 가치 있는 사람을 불행 속에 던지는 방법들에 대한 탐험으로서 행동이 어떻게 미덕의 실천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가를 가르치는 윤리학과 대위법을 이루지만, 동시에 행동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그 윤리적인 특징만을 빌려온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형상화 단계”로 지칭되며 미메시스 (1)에서 이해된 행동의 뜻을 줄거리고 꾸며, 실제로 이야기를 옮기는 과정이다. 형상화와 뮈토스는 이때 일치한다.

 한편 미메시스 (3)은 설득력 있는 사실임직함에서 비롯되는, 선택의 선택의 선택이라는 3차선택에 의한, “배우는 즐거움”과 관계되어 있다. 이는 “재형상화 단계”로서 텍스트의 세계와 독자 세계의 교차지점의 형성이다. 즉, 독자가 이야기의 뜻을 풀어 삶의 뜻을 찾아가는 작업이 이뤄지는 단계이다.

 이렇게 미메시스 (1)이 가리키는 현실 세계가 미메시스(2)를 통해서 형상을 갖추고 미메시스(3)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재형상화를 통핸 우리의 체험은 그 깊이를 드러내고 방향성을 변형시킨다.

 리쾨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재해석하여 시간의 형상화를 통해 불협화음을 내표한 화음을 만드는 이야기 하기의 행위를 <윤리적 행동(프락시스)의 선별 -> 예술적 창작->작품-관객이 공동 구성한 문화의 세계>라는 절차로 압축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 하기의 일반 이론은 그 점에서 상류미메시스 (1)->시간의 형상화를 미메시스(2)->포이에시스통한 <삼중의 미메시스>를 통해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일반이론이라고 함은 단지 허구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역사 서술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이야기 일반에 대한 이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역사 서술에 대한 일반 이론을 미메시스적인 관점으로 따라가보자면 역사가의 역사 서술은 재현할 가치가 있는 행동들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일정한 줄거리로 다시 엮는 선택의 선택, 마지막으로는 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이 그로부터 어떤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의미를 다시 해석해내는 선택의 선택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삼중의 미메시스라는 이야기의 일반이론은 인지생태학적인 이야기 이론과 비교해보면, 시간성과 서술성의 순환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이야기의 일반 이론은 인지생태학적인 이야기 이론과 달리 불협화음을 내는 화음을 만드는 반전을 가진 줄거리의 구성을 통해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현실과의 일시적인 단절을 통한 현실과의 재연결이라는 이중의 측면이 잘 드러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지생태학적 설명을 능가 하지만 동시에 단절의 측면을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삼중의 미메시스는 물줄기보다는 비행의 모델로 인식해야할 필요가 있다. 비행 모델은 단절과 연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비행과 착륙이라는 과정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단절, 즉, 비행의 목적 역시 명확하게 해주며 단절의 위험을 잘 보여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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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기호와 가독 기호: 이미지와 사유, 보기와 소리

시간 기호는 또한 정신 기호와 가독 기호인데 사유의 이미지와 독해되어야만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정신 기호의 개념을 통해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하는데 이 질문엔 시네마와 사유 간의 관계라던가 이미지가 어떻게 정신을 감화하는가, 정신은 무엇이고 사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담겨 있다. 들뢰즈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이미지를 읽고, 보고, 들어야 하는가를 위시한 몇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고 보그는 보고 있다.

고전적 사유의 이미지

예술사가인 엘리 포르의 시네마 예찬은 진화하는 사회의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시네마는 운동과 지속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카메라의 비인간적인 눈을 통해 지각되지 않은 세계의 특징들을 우리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포르의 시네마에 대한 신념은 기계적으로 생산된 움직이는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정신에 충격을 주고, 비반성적인 정신적 습관의 지적 자동 작용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추긴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런 관점이 고전적 시네마의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정신적 자동 기계”라는 개념을 차용하고 있는데-스피노자는 정신도 인과성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관념들의 고유한 형성과 접속은 물리적 법칙의 필연성과 동등한 필연성을 따라야 한다라고 보고 있다-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의 반응이 지닌 비자발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더 나아가 현대 시네마와 시간-이미지로 전환할 때, 그 용어를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사유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에이젠슈타인의 글로 돌아간다.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글에서 개별적인 쇼트들 속에는 충돌과 갈등, 도표의 방향들 척도 부피 크기의 충돌들이 있고, 몽타주 속에는 쇼트들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몽타주 충돌에 의해 생성된 개념은 전체의 개념, 즉 각각의 폭발적인 쇼트들을 결합하는 유기적 전체성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사유에 대한 충격 효과를 가지고, 사유가 전체를 생각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생각하도록 한다.” (IT 206; 158)

 하지만 이미지에서의 사유로의 이런 운동 외에 또한 사유에서 이미지로의 보완적인 운동이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에서의 파토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에이젠슈테인이 감각적 사고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은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 상호간의 결합적인 친화력을 통한 사유이다. 예술은 논리적 사유를 이미지들과 형상들의 감각적 사고와 조합한다.

 만약 영화의 유기적 전체라는 개념이 개별적인 폭발적인 쇼트들과 쇼트에서 쇼트로의 도약의 파토스에 의해 생성된다면, 전체에 대한 부분들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개별적 부분들은 전체의 실존을 전제한다. 하나의 폭발적인 쇼트로부터 다음의 폭발적 쇼트로의 도약은 파토스를 생성시키고 관객에게 충격을 주입하지만, 이런 형상으로 보기 위해서는 감각적 사고의 무의식적인 과정들을 통한 결합을 필요로 한다. 두 이미지의 이러한 형상적 결합의 형성과 함께 두 이미지의 감화적인 힘은 증가된다.

 첫 번째 과정은 이미지에서 개념으로의, 부분들에서 전체로의, 충격-파토스에서 사유로의 운동과 관련이 있다. 서로 두 이미지의 상호간의 결합을 통해 각 이미지의 감화적 추동력은 증가된다. 두 번째 과정에서 운동은 개념에서 이미지로, 전체에서 부분들로, 감각적 사유에서 배가된 파토스-충격으로 이동하며 발생한다.

 모든 영화는 “우리를 이미지들로부터 의식적 사유로 끌어올리는 감각적 충격”을 포함하고, “그 다음 우리를 다시 이미지로 되돌려 보내고 다시 감화적인 충격을 우리에게 주는 형상을 통한 사유”를 포함하는 회로를 확립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성공적인 영화는 강력한 감정과 비판적 인식의 유기적 통일성 속에서 이미지에서 사유로의, 사유에서 이미지로의 두 가지 상반된 운동을 혼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영화는 행동을 고취해야 하고, 비평적 인식은 혁명적 의식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들뢰즈는 여기서 이미지와 사유 사이의 세 번째 관계를 보는데, 이미지에서 사유로의 운동의 관계가 아니라 전자와 후자의 동일성의 관계를 본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대응을 설정해 인간의 행동에 따라 새로운 특질들을 얻고 변하는 걸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와 이미지의 동일성,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감각-운동 도식의 기본이 되는 통일성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유기적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결합하는 감화적인 충돌과 도약으로 된 변증법적 시네마를 주창했지만 들뢰즈는 그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에이젠슈타인의 이론이 고전 시네마에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네마 전체에서 우리는 “탁월한 의식화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전체와의 관계, 이미지들의 무의식적 펼침 속에서만 형상화할수 있는 사유와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 인간 사이, 자연과 사유 사이의 감각-운동 도식적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외부의 사유

고전 시네마의 사유 이미지에서 중심적인 것은 감각-운동 도식의 통합적인 현존인데, 감각-운동 도식은 사유와 이미지 사이의, 인간과 세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가능케 한다. 현대 시네마에서의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가 세계와 우리 사이의 관계의 단절을 선호한다. 

 탈접속된 이미지들에 의해 제기되는 분명한 의문은 “어ᄄᅠᇂ게 그것들이 재접속 될 수 있는가?” 인데 고전 시네마에서는 이미지들의 자연적인 조화, 극성, 대조를 통해 연결된다. 그 안에서 이미지들은 선행하는 이미지와의 일정한 친화성에 따라 다음 이미지를 뒤따른다. 하지만 감각-운동 도식과 함께 이러한 내적 독백은 붕괴되고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고전 시네마에서 이미지들 간의 틈새는 그 이미지들의 기능이고, 하나의 이미지가 종결하는 지점, 혹은 한 이미지가 시작하는 지점이지만 현대 시네마에서 그 틈새는 근본적이다. 하나의 일정한 이미지와 더불어 현대 시네마의 도전은 시작되고 둘 사이의 틈새를 유발할 다른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현대 시네마에서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는 직접적으로 흑색 스크린과 백색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 틈새는 표준적인 할리우드 편집의 전형을 위반하는 현대 시네마의 거짓 연속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각 이미지들과 청각 이미지들 간의 불연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현대 이미지는 자의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접속은 상식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틈새, 즉 무리수적 절단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이의 간격이라는 개념이 이미지들과 사유 간의 현대적 관련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전적인 사유의 이미지는 개념과 이미지의 동일성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서 개념으로 그리고 개념에서 이미지로의 복합적인 운동을 수반한다. 고전 이미지들은 “연합, 근접성, 유사성, 대조 혹은 대립의 법칙들”에 의해 수평축을 따라 연결되는데, 통합하는 감각-운동 도식 속에서 이미지들의 자연적인 친화성이 내적 독백의 형상적 언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즉 고전 시네마에서 전체는 열린 전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시네마에서는 전체는 외부다. 외부는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 즉 틈 혹은 간격 속에서 표명된다. 들뢰즈의 이런 선언은 외부와 틈새 사이의 대립이라는 면에서 현대 이미지의 수직축과 수평축을 분명하게 구별한다는 점에서 일견 모순되어 보일수도 있다고 보그는 설명하면서도 틈새가 현대 이미지의 수평축과 수직축에 공통점이 있다는게 들뢰즈의 요점이라고 설명한다. 즉 슴새는 이미지들을 수평적으로 접속하고, 수직적으로 그것은 외부를 표명한다. ‘외부’는 고전적 전체의 현대적 대응물, 다시 말해 틈 혹은 간격이지만 또한 생성적인 힘으로, 즉 구성적인 “이미들의 둘 가운데”로서 역설적으로 착상된 전체다. 현대적 전체는 “블랑쇼가 ‘외부의 분산’의 힘 혹은 ‘거리 두기의 현기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현대 시네마에서 ”전체는 틈새 속으로 통과하는 외부의 역량“인 것이다.

 이런 틈새 속으로의 외부의 역량 혹은 힘의 이행은 사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전 시네마에서 이미지들의 충돌은 사유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취하게 하면서 전체를 사고하고 사유에 충격을 준다면 현대 시네마는 사유가 일련의 연접적인 유리수적 좌표 속에 그 충격을 동화시킬 수 없는 채로 그렇게 한다. 현대 시네마가 사유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외부에 대해서, 즉 틈새 속으로 이행하는 분산적인 거리 두기의 힘에 대해서다.

 정신적 자동 기계

“외부의 사유 그 자체” “비사유 혹은 사유 내부의 사유 불가능한 것” “사유자 속의 이질적인 사유자”, 이 모두가 비 개인적이고 탈 실재화된 ‘다른’ 사유, 다시 말해 정신적 자동 기계의 사유를 증명한다. 들뢰즈는 이런 모티프에 대한 확장된 탐험으로서 드레이어의 영화를 해석하면서 미라를 선택한다. 미라와 같은 정신적 자동 기계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현대 영화에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의 재현이 아니라 사유의 양식으로서의 그것의 활성화이다.

 이때 일견 미라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단순히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장소 혹은 어떤 내부 세계보다 더욱더 내부인 어느 지대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그들은 특정한 화자 혹은 관점으로부터 탈접속된 언어, 즉 일종의 자유 간접 화법을 언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자유 간접 화법은 현대 시네가 열망하는 일반적인 “자유 간접 비전”의 언어적 상응물이다. 고전 시네마의 상식적인 시퀀스들 속에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내적 독백의 부재는 안정된 관점으로부터 탈접속되며 생각하기의 다른 방식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현대 시네마의 이미지들은 정신적 자동 기계의 자유 간접 생각하기의 이미지라 할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자동장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일단 정신적 자동 기계는 “사유를 넘어서는 사유”라는 점에서 관객 속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적 자동장치의 자유 간접 보기와 생각하기는 이미지 속에, 스크린 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정신적 자동 기계는 내부와 외부이고, 관객 내부뿐만 아니라 이미지들의 외부 양쪽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지 세계 속에서는 그런 내외부의 분명한 차이가 없을뿐더러 분리되어 확인할 수 있는 정신에 결코 속하지 않는다.

 이미지 세계는 정신적 자동 기계의 뇌 세계이다. 들뢰즈가 현대 이미지의 “두뇌적 구성 요소들”을 열거할 때 그는 단순히 틈새의 세 가지 외관들, 즉 점-절단, 재-연쇄,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이라는 목록을 작성하는데, 그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이 뇌와 스크린의 동일성을 명백하게 만든다. 점-절단, 혹은 무리수적 절단은 외부의 표명으로서의 틈새이다. 그것은 무리수처럼 둘 중 하나에도 속하지 않고 두 실체를 분리한다는 점에서 ‘무리수적’이다. 재-연쇄는 “그리고”로서의, 차이의 비-자의적이지만 특별히 지정하지 않은 관계들에 따른 이미지들의 수평적인 접속으로서의 틈새이다. 마지막으로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은 가시적으로 되는 틈새이며 위상적이다. 왜냐하면 그것 속에서 외부와 내부가 통합되기 때문이다.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와 함께 인간과 세계의 결합은 와해된다. 에이젠슈테인의 도식에서 사유와 이미지는 행동-사유에서 통합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궁극적으로 비무관심적이고,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통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시키는 감각-운동 도식의 부재 속에서 세계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며 세계에 대한 믿음조차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대 시네마의 목표들 중 하나는 세계에 대한, 어떤 다른 세계 혹은 이 세계의 어떤 미래의 유토피아적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현대 영화감독들은 세계와 인간을 과거의 시트들, 현재의 첨점들, 거짓의 역량들의 시간 기호들을 통해 접속한다. 각 영화의 시간 기호들은 일종의 문제를 구성하는데 들뢰즈는 이 문제를 정리와 구별한다. 정리는 공리적인 체계화가 가능한 닫힌 집합의 요소들이고, 문제는 외부에서부터 간섭하는 사건, 그리고 그것에 의해 후속의 분석의 조건이 구성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선택을 모든 문제의 기본적인 요소라 보며 나아가 믿음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고, 믿는다는 것은 매 순간 선택하는 자유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각 집합의 시간 기호들은 선택과 관련이 있고, 그 선택의 긍정은 믿음의 행동이다. 그러나 시간 기호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문제들은 아니다. 시간 기호들은 사유와 이미지들 사이에의, 정신과 세계 사이의 접속을 설정하지만, 단지 정신적 자동 기계의 자유 간접 시각을 통해 창안된 접속만을 설정한다. 그것들은 이 세계에 대한, 그러나 다르게 보이고 생각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한다.

 만약 우리가 들뢰즈가 사유의 이미지들에 대해 다루는 방법을 요약하려고 한다면 1) 이미지-사유 관계들, 2) 정신 기호들, 3) 정신계, 그리고 4) 정신 기호들과 시간 기호들 사이의 관계로 나눌수 있을 것이다.

 1) 이미지와 사유 관계들: 고전 시네마는 이미지와 사유의 세 가지 관계들을 설정한다. 첫 번째 운동에서 이미지들의 충격은 통합하는 전체의 개념을 생성시키고 두 번째 운동에서 감각적 사고의 내적 독백은 각 이미지가 전제하는 전체로서 역할과 표현으로 출연하며 세 번째 운동에서 세계와 정신은 감각-운동 도식의 통합하는 힘을 통해 합쳐진다. 대조적으로 현대 시네마는 사유에 대한 세 가지 새로운 관계들을 발전시킨다.

 2) 두개의 축은 사유의 고전적 이미지를 조직화하며 두 종류의 고전적 정신 기호가 있다. 첫 번째 종류에 따라 이미지들은 유리수적 절단들을 통해 연결되었고, 이런 조건하에서 확장 가능한 세계를 형성했다. 다른 종류의 정신 기호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의 시퀀스들의 적분을 표식하고, 뿐만 아니라 확장된 시퀀스들 속에서의 전체의 미분을 표식했다. 또한 현대 시네마의 정신 기호들은 두 분류로 구분되는데, 정신 기호들로서 비연쇄적 이미지들을 가진다.

 3) 현대 정신 기호들은 단일한 정신계, 세 가지 대뇌적 구성 요소들을 가지는 뇌의 세계를 형성한다. 점-절단은 ‘무리수적’이고 재-연쇄는 ‘확률적’이며, 백색 혹은 흑색 스크린은 ‘위상적’이다.

 4) 정신계의 기호들은 또한 시간 기호들이다. 외부의 수직축과는 일반적인 문제로서의 일정한 시간-이미지가 상응한다. 들뢰즈가 연속적인 것과 불연속적인 것을 조정하는 고전과 현대 시네마의 방법들을 대조할 때, 그는 “전체가 틈새 안으로 이행하는 외부의 역량이 될 때, 그것은 시간의 비-연대기적 관계들에 따라서 무리수적 점들의 시퀀스와 일치하는 시간 혹은 연속성의 직접적 제시”라고 말한다. 외부의 역량이 틈새 속으로 이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비- 연대기적 시간의 주어진 형식의 설명 불가능하고 결정 불가능하며, 혹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문제라는 사건이다. 그리고 틈새들의 재연쇄는 파손된 연대기적 시간의 분산된 점들을 상호간의 소통 속에 설정하는 역설적인 연속성이다. 

 무언의 가독 기호와 가청적 가독 기호

 모든 시간 기호는 정신 기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가독 기호이다. 들뢰즈가 가독 기호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모호하다고 보고 있다. 그 용어는 ‘’표현 가능한‘ 것의 비유형성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용어인 렉톤에서 차용한 것이다. 하나의 명제의 렉톤이 그것의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가독 기호는 추정상 외부적 대상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내재적으로 파악될 때의 이미지를 지칭한다. 이미지를 내재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시지각 기호로, 즉 감각-운동 도식과 그것의 외부적 결합들로부터 탈접속된 이미지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들뢰즈가 이미지를 읽어야만 한다고 말할 때 이미지 해석 뿐만이 아니라 보기와 소리의 내적 관계를 통해 생산된 시간-이미지의 차원 혹은 역량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 ‘가독 기호’는 이미지가 렉톤처럼 그것의 외적 대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보기와 소리에 대한 그것의 내적 관계들에 의해 독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고전 시네마에 가독 기호가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 고전 가독 기호에 대해 무성 영화의 자막과 유성 영화의 소리와 연계시켜 보고 있다. 무성 영화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세계의 자연성의 무엇인가를 보유하는데 그 자연성은 작용과 반작용의 영역으로서, 상호 작용하는 힘들간의 물질적인 접속들의 영역으로서 그것의 물리적 존재에 의해 특성화된다. 단어는 자막 뿐만이 아니라 이미지들 속에서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무성 영화들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은 보여지고 읽혀지는데, 가시적 세계는 그것의 자연성을 보유하고, 화법은 간접적 양식으로 그 자체를 표명하게 된다.

 이렇게 구축되어왔던 자막과 시각적 이미지의 세계는 유성 영화의 음향의 출현과 함께 달라졌다. 발화를 들을 뿐만 아니라 읽게 된 것이다. 음향은 “시각적 이미지의 새로운 차원, 새로운 구성 요소”가 되며 시각적 이미지는 어느정도 탈자연화된다. 무성 영화에서 언어는 행동에 종속적이며 구두 교환은 간접적으로 결과적인 상황까지 이동하는 행동을 통해 단지 암시될 뿐이다. 하지만 유성 영화에서는 화법의 특유한 특징인 사회성과 인간적 상호 작용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단계에서 화법은 전제 조건적인 정황들과 결과적인 상황에 의해 상대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유한 리듬과 형식을 가진다.

 이런 화법적인 사회성의 모델은 상호 교환, 화제 개시, 그리고 교환 종결을 위한 제한 없는 규칙들을 가지는 대화, 때로는 논리적으로 서로 연관되고 서로 연관되고 또 어떤 때는 서로 아무런 분명한 관련이 없는 자유-형식의 연속적인 토픽들을 가지는 대화이다. 영화에서 음향의 도입과 함꼐, 대화와 같은 그러한 기초적인 사회성의 형식은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더 이상 발화는 선행하는 조건들과 후속 결과들의 간접적인 기능으로서만 표현되지 않는다. 지금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지닌다. 결과적으로 발화 행동은 “자율적인 순환, 확대, 그리고 진전을 통해, 상화간에 냉담하거나 분산되거나 혹은 무관심하거나간에, 개인들 혹은 그룹들 간의 상호작용을 창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시각적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인물들의 의도들, 동기들, 암시들의 시각적 기호들은 그들의 얼굴들과 몸짓들 속에 독해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음향의 도래와 더불어 인물들은 거짓말할수 있고, 속일 수 있고, 왜곡할 수 있으며, 잘못 말할 수 있고, 빗대어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음향은 시각적 이미지를 카메라가 잡히지 않는 곳에서의 음성으로 팽창하고, 주변 환경의 소음은 프레임 너머로 그리고 화면 밖 영역으로의 공간의 연속을 나타낸다. 

 들뢰즈에 따르면 음악은 열린 전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고전 운동-이미지에 특별한 영향을 미친다. 들뢰즈는 한편으로 소리 연속체는 시각 이미지를,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화면 밖 영역에 대화, 음향 효과, 음악을 포함하는 연속체를 수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은 ‘이질적인 신체’의 ‘특수한 자율적인 역량’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의 관계는 기능 면에서 화면 위 장면의 음향적 구성 요소에서부터 영화의 리듬들에 대한 조화로운 강화를 거쳐, 자율적인 ‘이질적 신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친 가능한 영역들의 전영역을 포괄한다. 이런 관계들의 연속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열린 전체와 개별적 이미지들을 연관시키는 접는 적분과 펼치는 미분의 표현적 상호 작용에 음악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음악은 시각적 운동-이미지와는 구별되는데, 왜냐하면 운동-이미지와 달리 음악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즉각적 이미지 속에서 열린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시각적 이미지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디오니소스적이고 음악적이며, 운동보다 측량할 수 없는 의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음악의 추상적이면서도 지각 가능한 “즉각적 이미지”는 열린 전체의 직접적인 제시인데, 그 자격으로 그것은 하나의 자율적 실체로서 시각적 이미지들과 반응하고, 그 이미지들을 반향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공통된 구조와도 무관하게” 그 이미지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현대의 가독 기호

 따라서 무성 영화에서 발화는 삽입 자막에서 읽혀진다. 그리고 화법은 언제나 간접적이다. 고전 유성 영화에서 화법은 직접적이고, 시각적 이미지에 기여하는 구성 요소가 된다. 무성 영화들의 시각적 이미지는 그것의 자연성을, 그 결과로 읽혀져야 하는 것이 된다. 고전 유성 영화는 음악 속에서 잠재태적으로 자율적인 요소, 즉 전체와 일치하지 않고 그 전체에 대한 간접적인 시각적 제시를 동반하는 직접적인 음향적 제시를 확인한다. 하지만 이런 자율성은 오직 상대적인데 음악은 시각 이미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오직 현대 시네마에서만 시각과 음향은 자율적인 요소들이 된다. 그런 시네마에서 화법은 직접적이지도 또한 간접적이지도 않으며, 자유 간접적이다.

 현대 감독들이 자유 간접 화법을 창안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시네마의 자유 간접 화법은 순수 발화 행동이고, 표준 어구로부터 그리고 상식적인 세계의 시각적 이미지들과의 연쇄로부터 ‘탈연쇄한’ 화법이다. 동시에 화법이 고립적으로 되고, 그것의 일상적인 가시적 좌표들로부터 분리될 때 시각적 이미지는 고유한 낯섦에 도달한다.

 현대 시각적 이미지들과 소리 이미지들은 ‘읽혀져야만’ 하는데, 표준적인 맥락들로부터 벗어나고 탈접속된 이 이미지들이, 일정한 이미지들의 출현에 앞서서는 예상될 수 없는 방식으로, 재접속되고 재연쇄화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들뢰즈는 현대 시각적 이미지의 “고고학적, 층위학적, 구조학적인” 본성을 풍경의 감각을 물질화하면서 생기는 거라 보면서 진부한 시각적 표현들을 벗어나는 이미지를 창안하고, 그것에 의해 “지질학적 지질구조학적 역량”에 의해 구체화한 이미지들 속에서 감각을 물질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현대 시각적 이미지가 감각을 물질화하는, 그리고 다른 이미지들과 다양한 재연쇄화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다층화된 힘들의 지대라는 점에서 그것은 고고학적 층위학적 지질구조학적이다. 그리고 각 이미지의 접속은 관객이 이미지들의 특정한 계열 속에서 현실태화 하는 재연쇄화에 의해 이미지들을 읽도록 한다. 시각과 언어의 분리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지질학적 층 혹은 토대들을 드러내는 반면, 발화 행동 혹은 심지어 음악의 동작은 영묘한 창시자의 역할을 지니게 한다.

 현대 시네마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은 무리수적 절단의 틈새들을 통해 재연쇄화되고, 음향 역시 이러한 절들과 관계가 있다. 현대적 시각 이미지들은 언제나 하나의 극한, 즉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이 보는 것, 그리고 이미지들의 재연쇄화가 가시화하는 것의 극한을 향한다. 마찬가지로 순수 발화 행동의 자유 간접 화법은 통레적인 코드들이 분절하는 것의 극한을 향한다. 이야기 꾸미기는 되기이고, 극한을 넘어서는 변형적인 운동이다. 그것은 음성학 통사론 의미론과 같은 언어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변주 속에 설정하는 언어의 용례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현대적 시각 이미지들 속에서 비전은 “지가시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오직 보여질수 있는 극한으로 이르게 된다.”

 비전과 발화는 내부적으로 한정된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또한 그 둘 사이의 극한, 즉 보기가 말하기와 다른, 그리고 말하기가 보기와 다른 지점으로 밀어붙인다. 그 극한은 두 가지를 분리하지만 그렇게 행할 때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맹인, 티레시아스적인 비전과 실어증 환자 혹은 기억상실증 환자의 그것인 목소리 사이엔 통약 가능성은 없고 오로지 둘 사이에는 상보성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보적인 관계를 비 자의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각 영화가 하나의 특정한 문제 혹은 하나의 집합적 문제에 중심을 두는 것, 즉 시각적 이미지들의 재연쇄화, 발화 행동의 재연쇄화, 그리고 둘 사이의 재연쇄하는 통래를 생산하는 생성적인 차이이다. 

 만약 고전 시네마에서 소리 연속체가 화면 위의 사건들, 화면 밖 영역의 음향 그리고 반사적인 보이스-오버와 음악의 절대적인 화면 밖 영역을 접속한다면, 그 연속체는 현대 시네마에서는 다른 형식을 취한다. 현대 시네마들에서 발화 행동의 생소함은 말하기를 흥얼거리기 혹은 노래하기의 음악적 차원으로, 혹은 형성되지 않은 음향과 소음의 소리 영역으로 이행하도록 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 시네마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발화의 분리가 단지 시각과 모든 소리의 보다 더 큰 분리의 한 양상이라 볼 수 있을것인데, 모든 현대 영화가 화면 이미지들의 시각적인 영화와 발화 음악 소음의 소리적 연속체에서 형성된 소리의 음향적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가독 기호들은 음향과 시각의 이접의 역량을 개발하는데 이는 둘 사이의 생성적인 이접으로부터 발생하는, 상보적이고 전체화할 수 없고 비대칭적인 통래 속에서 다시 속박되어야 한다.

 시네마, 연극, 텔레비전에 관한 각서

 연극과 텔레비전은 시네마와 분명한 관계를 가지는 두 가지 매체인데, 들뢰즈는 보기와 소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연극과 텔레비전을 상호 비교하는 하나의 방법을 찾는다. 바로 대화를 포착하는 방법이다. 시네마는 연극 무대에서는 이용할수 없는 방식들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말을 제시하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고 화면 밖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카메라 쇼트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음향 효과를 통해 주위 공간을 연장해 대화의 공기를 보여주거나 통합시킨다.

 한편 영화와 텔레비전은 훨씬 미묘한 관계라 할 수 있는데, 텔레비전의 주요한 특징들 중 하나는 그것의 청각적 시각적 구성 요소들의 분리 가능성이라 본다. 들뢰즈는 텔레비전의 발달이 현대 시네마의 자율적인 요소들로서 소리와 보기를 처리하는 법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텔레비전 이미지는 전자 이미지이고, 진정한 화면 밖 영역을 가지지 않지만 대신에 그것들을 회전시키는 역량과 같이, 가역적이고 이중으로 인화가 불가능한 오른쪽 면과 반대쪽 면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영속적인 재조직화의 대상인데, 그것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는 선행하는 이미지의 어떤 지점에서든지 그 지점에서 발생할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텔레비전 이미지와 현대 시네마 이미지는 다르다고 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위시한 정보 기술은 창조성을 위한 가능성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제공하지만 시네마적인 관심은 최종적으로 감독들을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기술보다는 미학에 의존한다. 즉 텔레비전은 그 특성으로 시네마에게 창조적인 자극을 가하지만 시네마는 궁극적으로 텔레비전 이미지의 ‘성격’을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깊은 차이가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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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시네마]: 3장 열여덞 개의 기호들

들뢰즈는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법에 대한 시도라고 보았다. 실제로 [시네마 1]의 많은 부분이 운동-이미지와 관련된 기호들이 등장한다. 보그느는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정-이미지로 나눠지는 운동-이미지들은 들뢰즈의 시네마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고자 한다.

퍼스와 기호

들뢰즈가 지목한 학자는 베르그송과 찰스 샌더슨 퍼스다. 퍼스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이미지들의 체계적인 분류를 가장 철저히 시도한 기호론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보그는 들뢰즈가 정확히는 기호의 비언어적 이론에 대한 헌신을 높게 산다고 보고 있다. 소쉬르와 퍼스는 각자가 독립적으로 기호들에 대한 일반 이론의 개념을 개발했는데, 프랑스 시네마 이론가들은 기의와 기표 사이의 언어적 대립에 그것의 기초를 두는 소쉬르적인 접근 방법을 선택했지만 들뢰즈는 언어적 기호로부터 시각적 기호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대안을 제안했다. 들뢰즈는 이 와중에 서사를 시간과 공간 구조의 부차적인 산물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서사의 규칙성과 계속성의 가능성의 조건은 인간 행동의 유효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조직된 상식적 공간-시간의 규칙성과 계속성이다. 우리의 실용적인 세계는 우리의 필요, 욕망, 의도, 계획에 의해 조작된다. 그러므로 ‘감각-운동 도식’은 ‘경로적 공간’이라는 상식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이것을 서사를 만들어낸다. 들뢰즈는 감각-운동 도식을 폐기한다는 점에서 고전 시네마하고 현대 시네마의 차이를 찾아내며 비서사적과 비언어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퍼스의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들뢰즈는 퍼스의 기호학 이론에서 두 가지의 한계성을 발견하는데 첫 번째로는 퍼스가 궁극적으로 비언어적 기호를 언어적 기호의 하위를 둔다는 점과 두 번째로는 세 가지 근본적인 이미지들의 기원에 대해서도, 모든 다른 이미지들을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로서의 지각-이미지가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들뢰즈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퍼스가 아니라 베르그송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들뢰즈는 퍼스의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의 범주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는데, 순서대로 “단지 그 자체만을 지칭하는 것, 특질 혹은 잠세력, 순수한 가능성”, “단지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서만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 존재, 작용-반작용, 노력-저항”이며, 삼차성은 “단지 한 사물을 다른 것과 관련시킴으로써만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 관계, 법칙, 필연성”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들뢰즈는 퍼스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며 베르그송의 세 가지 형태의 운동-이미지들을 개발하고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일차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감정-이미지와 퍼스의 일차성 사이의 평행을, 행동-이미지와 이차성 사이의 평행을 관찰한다. 지각-이미지를 삼처성과 연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들뢰즈는 삼처성의 범주와 상응하는 네 번째 운동-이미지, 관계-이미지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가정한다. 그리고나서 들뢰즈는 퍼스의 분류 도식 밖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종류로서 지각-이미지를 다룬다. 들뢰즈는 이렇게 나눠놓은 영도성,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에다 두가지 추가적인 유형들을 확인한다. 감정-이미지와 행동-이미지 사이의 중간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이미지와 관계-이미지 사이의 중간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그것들의 연역이 지각의 분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들뢰즈는 퍼스의 개념이 아니라 지각에 대한 베르그송의 설명을 여섯 가지 유형의 운동 이미지와 연결한다. 지각 이미지, 즉 살아 있는 존재의 지각의 특징이 되는 그 이미지는 그것의 발생과 우선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각 이미지는 세 가지 방식으로, 즉 그것의 발생에 의해, 간격의 기능으로서의 그것의 구성에 의해, 그리고 전체의 기능으로서의 그것의 구성에 의해 분화될 수 있다. 

지각 이미지

고전 시네마에서 우리는 어떤 시각적 이미지가 주관적 관점의 재현으로 취급될 때 그 시각적 이미지를 하나의 지각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주관적 이미지를 주목할만 하게 만드는 것은 상응하는 ‘객관적’ 이미지, 즉 ‘정상적으로’ 보여질 때의 샹들리에 혹은 복도와 그 주관적 이미지의 차이라고 모두가 믿어왔다. 하지만 이는 카메라의 시점이 쇼트마다 변화되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보그는 지적하고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자유 간접 화법’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직관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 자유화법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두 상호 연관적 주체들의 분화”이며 “주체화의 두 가지 분리할 수 없는 행동들을 동시에 수행하는 언표 행위의 배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주체화 과정, 혹은 하나의 이질적인 체계 속에서의 두 주체 입장들의 생성을 통해 파졸리니는 ‘주관성’과 ‘객관성’의 개념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어내고 들뢰즈는 이 대립에 주목한다. 객관적 ‘사물들 속의 지각’ 안에서 ‘물질 속의 눈’은 단일한 진동적 유동의 탈중심화된 파동을 따라가는데, 들뢰즈는 이런 흐르는 지각 이미지를 유상체 (레움)이라고 불렀다. 이 유상체는 사물들 속에서의 지각을 향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그 지각이 충분히 표명되는 것은 단지 세 번쨰 지각-이미지, 즉 그램 속에서이다. “즉 물질 속에서의 기체적 지각으로서 물질의 작용과 반작용이 얼마나 멀리 확장되든지 간에, 그것이 작용을 가하는 모든 지점들을 공간 자체 속에 있는 그 어떤 지점도 다 지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정도” (IM 117; 81) 인 발생 기호인 것이다. 이렇게 단일하고 고정된 비결정성의 중심에 의해 결정된 지각과 사물들 속에서 보편적 지각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와 키노 아이를 다루는 글에서 잘 나타나는데, 어ᄄᅠᆫ 시간적 질서든지 그것으로 우주의 모든 지점들을 비교하고 연결하는 수단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그 이상으로 “이미지의 발생적 요소, 즉 운동의 분화적 요소”와 이를 통한 운동의 생성적 세포라는 베르토프의 발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시네마가 다른 지각을 향해 인간 각을 초월한다면 지각의 미분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그것을 모든 가능한 지각의 발생적 요소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지각이 변호사키게 하는 지점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그램은 “사물 속에서의‘ 지각, 즉 어ᄄᅠᆫ 다른 지점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며, 각 지점 그 자체는 발생적/미분적 운동의 진동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미지

 감정 이미지는 지각과 나가는 행동 사이의 간격을 점유하는데 인간에게서 고정된 수용체들의 주요한 집결은 얼굴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양한 감정들이 등록된다. 들뢰즈는 초상화 속에서 두 가지 경향들을 주목하는데, 하나는 얼굴의 통합하는 윤곽을 강조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각각의 얼굴 생김새들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들뢰즈는 이런 통합하는 표면과 강밀한 특성 사이의 대립과 감탄과 욕망이라는 열정들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통합하는 표면과 강밀한 특성이 각각 순수 특질과 순수 역량이라는 서로 대조되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들뢰즈는 “감정-이미지야말로 시네마에서 클로즈업이고, 클로즈업이 얼굴이다”라고까지 표현하면서 그것이 모든 공간-시간의 좌표들로부터 얼굴을 추상화하고 그것으로 얼굴을 변용태를 표현하는 완전한 실체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클로즈 업 된 얼굴은 차라리 자율적인 대상, 운동의 경향들을 가진 고정된 표면이며 하나의 감정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 이미지는 하나의 표현된 것으로 독립적으로 고려되는 역량 혹은 특질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성 도성과 윤곽 도상은 감정 이미지들의 두 가지 구성의 기호들이라 할수 있는데 하나는 운동의 개별적 간격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 다른 하나는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감정 이미지는 퍼스가 일차성이라고 부르는 것, 즉 특수한 상황에서의 그것의 현실태적 표명과 상관없는 채로 고려될 때의 특질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클로즈업은 얼굴에서 순수한 특질을 추출해내지만 들뢰즈는 얼굴 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서도 그런 특질을 추출해낼수 있다고 보고 있다. 클로즈업 자체가 구체적 실체를 변화니켜 감정적인 특질/역량을 표현하는, 운동 경향이 있지만 탈맥락화된 고정된 표면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로즈업만이 감정-이미지를 창조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 드레이어와 브레송의 영화들에서 들뢰즈는 클로즈업 이외의 샷들에서 원근법적 좌표를 허용하지 않고 클로즈 업 샷들처럼 감정-이미지를 창출해내는 과정을 찾아낸다. 보그는 이를 “ 도상이 특질-역량을 얼굴 혹은 그것의 상응물에 의해 표현하게 하는 기호라면, 특질 기호 혹은 능력 기호는 특질 역량을 임의의 공간에 의해 표현하게 하는 기호”라고 설명한다. 들뢰즈는 이런 임의의 공간을 구현케 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는 그림자, 서정적 추상, 색채로 구분 했으며 이를 통해 좌표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잠재력과 역량들, 특질들을 표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충동 이미지

 변용태의 잠재태적 임의의 공간과 행동의 현실태적 환경 사이에서 들뢰즈는 그 어느 쪽에도 분명하게 속하지 않는 한 영역, 즉 ‘본원적 세계들’과 ‘충돌들’의 영역을 충동 이미지가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자연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루이스 브뉘엘, 조셉 로지 같은 감독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영화들이 구체적인 세목들로 된 실재하는 세계에 내재적이면서 그 세계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충동들과 힘들의 원초적인 세계를 보는 비전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고 있다. 이 감독들의 세계는 본원적 세계라 불리는 세계가 따라다니는데 형성되지 않은 질료로 구성되고 구성된 주체들과 관련조차 없는 비-형태적 기능들, 행동들, 혹은 에너지 역동력에 의해 횡단되는 세계다. 

 본원적인 세계는 임의의 공간과 현실태적 환경 사이의 중간 지점에 존재한다. 그것은 임의의 공간처럼 파편화되고 탈접속되었지만 현실태적인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충동 역시 정서들과 행동들의 중간에 있다. 그것들은 다양한 정황들 속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 형식들을 취할 수 있는 원형적 행동들이다.

 들뢰즈는 충동-이미지의 두 가지 기호를 확인하는데, 징후와 물신(혹은 우상)이다. 징후들은 파생된 세계 속의 충동들의 현존이고, 우상들 혹은 물신들은 파편들의 재현이다. 충동 이미지들은 선과 악의 물신들로 구성되는데, 이것들은 파생된 환경에서부터 떼어낸 파편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발생적으로, 환경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본원적 세계의 징후들을 포착한다. 여기서 물신은 실재하는 환경으로부터 충동을 떼어낸 것으로서 본원적 세계와 일치하는 파편들이며 징후는 본원적 세계와 연관된 특질들과 역량들을 지정하고 있다. 들뢰즈는 그럼에도 본원적 세계는 충동-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발생적 요소라고 정리한다.

행동-이미지

행동-이미지야말로 서사와 가장 큰 근친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허나 이 부분에서 들뢰즈의 논의는 서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운동-이미지들의 배열을 전제하고 그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보그는 주장하고 있다. 행동-이미지는 리얼리즘의 영역, 즉 구체적이고 특정한 공간-시간 속에서 현실태한 특질들과 역량들의 영역이고, 분리된 행동들 속에서 구체화한 정서들과 충동들의 영역이다.

 행동 이미지는 언제나 힘들이 포위하는 환경과 개체 혹은 개체들의 연관된 작용들/반작용들을 수반하는데 그런 점에서 퍼스의 이차성의 범주를 예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위 환경의 중심에서 행동은 환경과의 다른 것들과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단일 기호라고 부르는 환경과 연관되는 기호를 그는 “환경 속에서, 즉 사물들의 상태 혹은 한정된 공간-시간 속에서 현실태화하는 것으로서의 특질-역량의 앙상블”로 규정한다. 이항식이라고 붙인 특정한 행동과 연관된 기호는 “모든 싸움, 말하자면 행동-이미지의 구성 기호들이다.” 통합 기호와 이항식은 큰 형식 행동-이미지의 구성 기호이다.

 들뢰즈는 장르들 속에서 작동하면서 큰 형식 행동-이미지의 일종의 물리학을 구성한다. 다섯 가지 법칙을 발견한다. 첫 번쨰는 구조적인 것인데, 하나의 유기적 전체의 구성 요소들로서의 환경적 힘들의 필수적인 성질과 관련된다. 두 번쨰 법칙은 환경에서 행동으로의 이행과 관련이 있다. 세 번째는 수렴하는 힘들이 결국에는 단일한 쇼트에서 마주칠 것을 그리고 분리된 행동들의 교대가 충돌하는 힘들이 서로 동시적으로 현존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질 것을 요구한다. 네 번째는 다른 것들 속으로 차례로 끼워 넣는, 싸움의 세트화 규칙이다. 다섯 번째는 포괄하는 환경과 정적의 행동 사이의 “거대한 틈”의 법칙이다.

 이런 다섯 가지 법칙들은 주위 환경의 통합 기호와 포괄화한 행동들의 이항성들을 구성하지만 그것들의 구조적의 관계들의 발생은 세 번째 기호에 의해 표식되는데, 들뢰즈는 그걸 각인이라고 명명한다. 주입하는 상황과 폭발하는 행동이 동시에 나오는 것은 바로 특정의 “정서적 대상들” 속에서다. 그러한 대상들에서 우리는 환경과 인물 사이의 내적인 발생적 접속의 외적 기호를 본다. 

 보그는 여기서 범죄 영화 장르와 탐정 영화 장르의 차이에서 큰 형식과 작은 형식의 차이를 찾아낸다. 보그에 따르면 범죄 영화는 “지하 세계 환경에 범죄자들을 설정하고 나서 그들의 행동을 추적”하는 반면 탐정 영화는 “신비롭고 단편화된 행동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 행동들이 일어나는 상황을 폭로하는 단서들을 추적”한다. 이런 식으로 다른 큰 형식 장르들도 마찬가지로 작은 형식 대응물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는 작은 형식의 발생적 기호를 벡터라고 부른다. 그리고 큰 형식의 호흡-공간과 작은 형식의 골격-공간을 대조함으로써 그것을 소개한다. ‘나타남’과 ‘현존으로 오는 것’을 통해 이런 호흡의 운동을 현현하는 것이다. 이는 골격과 사라짐이라는 형태로 나오는데, 들뢰즌 그것들 속에서 공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대조적인 수단들을 본다. 첫 번째는 개별적 요소들이 이미 설정되고 구조화 되어 있는 포위하며 에워싼 전체에 대한 하나의 구형적 착상을 통한 것이고, 두 번째는 연관되면서도 이질적인 요소들의 열린 공간이 구성되는 것과 같이 개별적인 요소를 인접하는 요소와 연결되게 하고, 그러고 나서 계속 또 다른 요소와 연결되게 하는 국부적 작용을 통한 것이다. 국부적인 골격-공간은 파편들 나타남들 사라짐들로 구성되는데, 그러나 그것들은 곧잘 서로 연결된다.

 큰 형식의 발생적 기호인 각인은 정서적인 대상을 통해 외부 환경과 내부 행동을 결속한다. 그리고 그 자체의 방식으로 벡터도 같은 일을 한다. 들뢰즈는 주로 골격-공간을 횡단하는 우주의 선이라는 관점에서 벡터를 묘사하면서도 “특이점들 혹은 그것들의 강밀도적 절정에서의 주목할 만한 순간들을 통일시키는 톱니 같은 선”으로 벡터를 규정한다. 즉 벡터는 우주의 톱니 같은 선에 의해 횡단하는 골격-공간을 생성하면서, 행동과 상황을 조합한다는 점에서 작은 형식의 발생적 기호이다.

반성-이미지

반성 이미지는 행동 이미지와 관계 이미지 사이에 설정된다. 반성 이미지는 큰 형식에서 작은 형식으로의 이행, “형식들의 변형”을 허용하는데 들뢰즈는 반영-이미지의 기호들을 형상이라고 부르고, 형상을 행동-이미지의 “이러한 기형, 변형, 변질의 기호”로 정의한다. 들뢰즈는 관계-이미지를“관계들을 그것의 대상으로 보는 이미지”로 다룬다. 그러나 관계-이미지와는 달리 반성-이미지는 행동 이미지의 기형, 변형, 변질로서의 그 행동-이미지와 결속된 채로 있기에 반성-이미지는 “행동과 관계 사이의 매개체이다.”

 들뢰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에이젠슈타인의 두 영화를 인용하면서 조각적/조형적 그리고 연극적/배경화법적인 형상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도치의 형상과 화법적 형상 혹은 화법의 형상을 확인한다. 화법적 형상은 그것이 행동 이미지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작은 형식과 큰 형식을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반성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발생적 기호인가? 반성-이미지는 “행동과 상황이 간접적인 관계들 속으로 진입할” 때 생기는데, 행동과 상황 사이의 간접적인 관계의 직접적인 반성, 말하자면 반성-이미지의 모든 형상들 속에서 내표되고, 전제된 것의 명시적 제시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들뢰즈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행동-이미지들을 그것들의 극한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변형의 일반적인 과정, 즉 몇 가지 경우들에서는 큰 형식과 작은 형식의 전환을 초래하지만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 두 형식들의 계속적인 분리를 허용하는 과정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 영화를 다루면서 이 영화들이 감각 운동 도식의 붕괴의 징조를 다루고 있고, 따라서 운동 이미지 일반의 소멸의 징조라 보고 있다.

관계-이미지

들뢰즈는 관계-이미지를 퍼스의 연속성, 규칙성, 습관, 규정, 법칙, 해석, 재현, 사유를 다루는 삼차성의 범주와 동일시한다. 퍼스에게서 우주 속의 모든 것은 습관들을 형성하는, 즉 순전한 우연성과 불확정성으로부터 규칙성, 연속성, 일반성으로 이전하는 경향을 지닌다. 틀뢰즈는 퍼스에게서 삼차성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들뢰즈가 삼차성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확인하는 것은 관계의 개념이다. 관계 이미지는 정신적 이미지, 즉 정신적인 것이 이미지 속으로 도입되는 사유의 형상이다. 들뢰즈는 어느 정도 정신적인 것이 다른 이미지들 속에, 즉 감정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의식 속에 말하자면 행동 이미지에 고유한 목표들 선택들 계산들 속에 내포된다고 지적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런 관계-이미지의 시네마를 드러낸 감독으로는 히치콕을 꼽는다. 들뢰즈는 나르보니의 “해석적 열정과 해독의 열망”이 관계 이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며, 삼차성의 뚜렷한 현존이라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제 삼자라는 항목의 중재가 하나의 관계로서 행동을 구조화하며 그 속에 개입한다. 그리고 행동을 구성하는 관계들을 카메라와 쇼트들을 통해 관객들이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히치콕은 정신적 이미지의 시네마를 창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계-이미지 구성의 기호들은 표식이고 탈표식이다. 표식은 자연적인 관계의 기호이며 “관습적인 계열 속에서 다른 항목들을 지칭하는 항목인데, 각 항목이 다른 항목들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것과 같다. 탈표식은 그러한 계열로부터 벗어나는 용어, 즉 하나의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가는 정신의 습관적 운동을 붕괴시키는 불안한 변칙적 요소다. 관계-이미지의 발생 기호는 상징인데, 그것은 하나의 전체를 구상하는 추상적 관계의 기호다. 따라서 관계 이미지의 기호들에 대한 들뢰즈의 요약적 특성화는 구성의 두 가지 기혹들은 표식, 즉 습관(‘자연적인’ 관계)에 따라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합하는 경우, 그리고 탈표식, 즉 이미지가 그것의 관계 또는 자연적인 계열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발생적 기호는 상징, 즉 우리가 두 가지 이미지들을 비록 자의적으로 일치되는 것이라고 해도, 비교하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결론

들뢰즈는 평범한 체계 수립자가 아니며 그의 분류법은 새로운 보기의 방식에 대해 말하는 새로운 용어들을 창안하기 위한 생성적 장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그는 그 개념들과 그것들의 형성의 논리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것들은 분석 대상들과 그것들의 상호 관계들을 분절하기 때문이다. 또한 들뢰즈는 관습적인 기호학자라 할 수는 없는데, 들뢰즈 자체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기호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분류법은 단지 그 조각들과 그것들을 생성하는 창조적 과정들에 적합한 언어를 창안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여섯가지 운동 이미지들은 각자는 그 자체의 기호적 질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경우에는 들뢰즈의 노력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기를 착상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보기의 다른 방식, 즉 상식이 보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즉 정서 에너지 리듬 벡터 관념 정신적 관계를 가시적 세계 안에서 인지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을 상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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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부치 고이치의 [전지구적 프리즘: 트랜스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위해서]

이와부치 고이치의 [전지구적 프리즘: 트랜스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내 문화 교류를 다루고 있는 글이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내의 문화 교류의 폭발적인 증진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대중 문화는 동아시아권 국가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열풍들 속에 일본의 미디어들의 반응과 달리 이와부치는 역사적인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국수적인 시각’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화를 촉진하는 대중 문화의 잠재력을 쉽게 무시하면 안되지만 동시에 그 대중문화가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고 단순화되어서 수용되서도 안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수출은 전지구화가 가속되었던 시기에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데, 이는 단순히 미국화를 넘어서 전지구화와 문화권력의 탈중심화라는 점에서 독특한 현상을 낳게 되었다. 이와부치는 이런 권력의 탈중심화로써 비서구 국가들의 다국적 기업의 출현을 든다. 미국의 자리를 차지한다기보다는 미국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차이를 육성하면서 ‘균질화의 특정한 형식’을 만들어냈는데, 이 균질화는 결국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일본 대중 문화의 유행은 그런 점에서 미국 문화의 상상계에 깊이 각인된 대중문화의 한 형식을 빌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부치의 논의는 특정한 문화적 의미들과 감정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대중 문화를 통해 재현되는 젊은이의 고뇌, 꿈, 로맨스는 특정 양식과 현재적 근대의 의미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그 양식과 의미는 일본적 맥락에서 지구적인 균질화와 이질화가 서로 뒤섞인 구성을 분명하게 결합한다. 그렇기에 일본의 대중문화는 다른 동아시아 문화들과 달리, 더욱 친밀하게 다가오며 이는 대만 시청자들에 미국 TV 드라마와 일본 TV 드라마에 대한 의견으로도 잘 드러난다. 

 일본 대중 문화의 이런 전지구화와 문화적 근접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전략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먼저 문화적 근접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는게 중요하다. 경제 발전의 일정한 수준을 획득했던 자본주의 사회 국민들의 공통적인 경험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우호적인 수용을 지지하는 동시성을 생기게 했다. 따라서 문화적 근접성의 경험은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되는지를 묘사하는 역동적인 것, 다시 말해 시간적 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1980년대 서구권의 일본 붐과 달리 동아시아의 일본 붐은 동아시아의 경제적 발전과 그에 따른 문화적 생산 능력의 증진과 관계가 있다.

 두 번쨰로 일본이라는 무대 안에서 일본의 대중문화는 미국 문화의 자장 안에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는 지구화된 소비 대중 문화의 핵심 형태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표출된다. 전 지구화는 서구의 근대적 세계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냈고, 미국에서 구성된 근대성의 영향은 전 세계에 퍼졌다. 하지만 근대적 경험이 강제된 비서구 국가들은 토착화된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형식들을 만들어왔고 이는 같으면서 다른 복잡한 인식을 만들어왔다. 이런 같으면서 다른 문화적인 인식은 아시아 시청자들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통해 느끼는 복합적인 인식과 동일하며 이는 일본 대중문화를 재창작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부치는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를 대만에서 만들어낸 [유성화원]과 [도쿄 러브 스토리]가 한국 드라마 제작에 끼친 영향과 이로 인해 탄생하게 된 한류 열풍을 들면서 새로운 문화적 유대가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부치는 이런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아시아 대중들의 복합적인 문화 인식의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일본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구조적인 불평등이라는 어두운 면도 낳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슨  트랜스적 흐름과 연결들이 탈식민 정치와 다중문화적 정치학과 반드시 교차하고 있는게 아니라, 외려 소수자가 사는 사회에서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는 방법에도 무관심할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는 지구화한 소비주의에 기반했기 때문에 특정 그룹을 더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다국적기업들과 자본의 권력은 기본적인 소비주의 교의와 조화하면서 국가적 틀의 한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한편, 다수가 아닌 행운의 몇몇에게만 이익을 준다. 

 글의 결론에서 이와부치는 ‘진부한 세계주의’의 시대에 필요한 대화체적 상상력을 글로벌리제이션 과정에 생긴 사회 간이나 사회 내부의 다양한 모순들과 연동하게 해야 하면서 대중문화를 통해 위장된 경계를 가로지르는 교섭의 중요성을 수용하고 세상을 진짜로 다르게 만들기 위해 다중면을 가진 교섭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하는 협동적인 트랜스 아시아 미디어 연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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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명의 전통: 초기 문화연구에 대한 고찰

(이 글은 존 스토리의 [대중문화와 문화이론]를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다수의 대중문화는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소수 권력층의 정치적 관심거리였지만 그 이후로는 신호나 징후로서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변화는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비롯되었는데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산업자본주의의 새로운 노동관계로 인해 일어난 주거분리하고 연관관계가 있다. 이 때 피지배층만이 갖는 문화가 등장했고 문화의 융합과 회 안정이라는 개념은 도전받기 시작했다.

 매튜 아놀드는 근대 대중문화의 연구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그는 직접적으로 대중 문화를 언급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일반적인 문화 영역 안에 대중문화의 위치를 규정했던 점 때문이였다. 아놀드에게 문화는 두 가지 의미로 시작하는데 지식체계로써 문화와 도덕적/사회적 이득을 주는 문화로 나눠진다. 아놀드는 “인간의 생각과 표현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이성과 신의 의지를 널리 퍼지도록 하게 하는 것”라고 문화를 정의하면서 그것들이 ‘읽고 관찰하고 생각함으로써 알수 있는 최선의 것을 알려는 열망으로 활기차게 객관적으로’ 얻을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놀드는 거기다가 “고상한 무위”를 추구하려고 하는게 대중문화라고 보고 있다. 

일견 정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놀드의 이런 고찰을 읽어보면 무정부 상태야말로 대중문화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아놀드가 이런 고찰을 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도시 남성 노동계급이 정식으로 정치에 진입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동반되었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놀드가 1866-7년에 발표한 참정권에 대한 문제를 다룬 글을 읽어보면 그의 논의가 계급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놀드는 마르크스와 달리 결국 중산층과 귀족을 노동자 계급보다 우위에 두면서 영원한 정신이 상황의 도움을 받아 ‘이겨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즉슨 교육이 노동계급의 위험한 노동계급적인 문화를 거부하고 이겨내는 문화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권위의 중심 역할을 하던 귀족층이 쇠퇴한데다 민주주의가 출현하면서 노동 계급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욕구를 조절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법적 절차를 밟은 혁명’이라고 불리는 교육과 문명화에 대한 이론으로  그렇기에 아놀드는 대중문화에 대한 최초의 이론가로 불리지만 정작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정치적 무질서의 징후 정도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놀드의 이런 시설은 산업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특히 콜러릿지의 ‘문명의 발달을 이끄는 것은 교화된 지식인 계층의 기능’이라는 인식에서 비롯하고 있다.

 이런 아놀드에게 영향을 받은 리비스는 1930년대를 문화적 위기의 시대로 규명했다. 리비스의 연구는 40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리비스주의는 “문화를 지켜 온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다”라고 보고 있다. 변천해온 것은 저 소수의 위상이다. 그런 소수의 위상이 상반되어 대량 문명과 대문화는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이끌 것처럼 위협하고 있다. 리비스주의는 이런 대항능력을 학교에서 훈련시키도록 선언하고 그것에 대한 저항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리비스는 대중 소설과 광고로 대표되는 현재의 돌이킬수 없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리비스와 리비스주의는 전원적인 신화적 과거를 호명하며 권위와 위계질서에 기반을 두면서 지적 자극과 감정적 즐거움을 주는 일반 문화를 찾기 시작했다. 리비스주의는 엘리티시즘으로 비판을 받지만 그가 문화 연구에 큰 역할을 했다는건 부정할수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5여년간 미국의 지식인들은 대량문화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는데 앤드류 로스는 대량이란 요소를 미국적/비미국적인 것의 공식적 차이를 밝히는 주요한 용어들 중 하나로 보았다. 로스는 그의 연구 대부분을 봉쇄라는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랑 연관시켰는데 이 논의에서 로스는 다수가 저급한 문화를 택한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미학적 자유주의, 대중문화 친절한 사회화 기능을 한다는 진보적 진화론의 태도, 사회통제 형식으로 보는 사회주의적 태도로 나눈다.

 버나드 로젠버그는 미국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복지가 대량 문화의 비인간적 영향으로 위협받는다고 보고 있으며 대량문화는 그 태생이나 표본 어느 쪽으로 보아도 미국의 고유의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화이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현재를 혹평하기 위해 과거를 낭만화한다고 비판하면서 또한 미국에서 고급문화가 얼마나 융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드와이트 맥도날드의 대량문화에 대한 비판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다. 그가 보기에 대량문화는 고급문화의 생명을 위협하고 정치적 지배의 도구로 만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맥도날드의 전망은 매우 비관적인데, 문화적 엘리트가 없는 미국은 유치한 군중으로 득시글거리는 대량문화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맥도날드의 전-트로츠키주의는 반 덴 하그의 자유주의로 옮겨감에 따라 분석은 다시 변한다. 반 덴 하그에게 대량문화는 대중사회의 대량생산의 불가피한 결과다. 고급문화에 대한 대량문화의 유혹은 하나는 대량문화에서 나오는 재정적 보답이고 다른 하나는 잠재적으로 엄청난 수를 차지하는 관중이다. 이는 군중이 취향이 전보다 저하되었다기보다는 서구사회에서 문화 제작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미국에서 소비된 문화 텍스트와 그 산물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 역시 대량문화가 마약과 같은 것이라는 최종적인 귀결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대량 문화는 궁극적으로 결핍의 상징이며 이는 대리만족과 대리 인생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다. 반 덴 하그는 대량문화의 공허한 텍스트와 생산물들을 소비하면 할수록 결국 공허감만 더 커지고 그에 따라 대량문화의 소비는 더 늘어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기본욕구의 억압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만족의 경험이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반 덴 허그는 대량 문화의 소비 방법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낭만적인 시각을 동원하는 ‘문화적 향수병자’하고는 다른 비판적인 시선을 획득하게 되는데, 대량생산기술을 없앤다고 더 만족하게 될지 모를지 알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에드워즈 실즈는 이런 반 덴 하그의 시선을 비판하면서 산업이 삶을 빈곤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대량 문화에 있는게 아니라, 대량문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응이다. 레슬리 피들러는 반대로 대량문화를 ‘분수를 모른다’라는 대중문화라 말하면서 미국의 대량문화를 동질적이고 평준화 된 것이 아닌 위계적이며 다원적인 것으로 보았다. 쉴즈도 비슷한 유형을 제시하면서 꼭대기의 우월한 문화, 중간의 평범한 문화, 바닥의 거친 문화가로 나누면서 평범하고 거친 문화가 우월하고 세련된 문화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변화를 나쁘게 보지 않으면서 미학적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대량문화에 대한 이런 논쟁들은 문화적 선택과 소비는 이제 소속계급의 징표이자 계급차이의 표시이며 소비자의 선택의 다양성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볼수 있다.

 문화이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발전적 성과를 보면 문화와 문명의 전통에서 입각한 접근방식은 다소 고루해보일수 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영국의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걸 잊으면 안 된다. 한 세기 이상 문화분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였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문화와 문명이 지닌 걱정거리는 한마디로 사회적 문화적 배타성과 범위의 확장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근대화로 인해 확장되어가는 대중과 대중 문화에 대해 기존 지식인계층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문제에 대해 시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민했다는 점에서 탐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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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사건에 대해
(션 큐빗의 'The Cinematic Effect' 일부분을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The Cinematic Event

영화적 사건의 시간은 분산된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구성의 분열은 시간의 분산을 생산하고 있으며, 빛에 민감한 은염의 난반사되어 흩뿌려짐과 단속적 시선에 모두 걸릴 수 없다는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참석하지만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움직임을 경고하고 있다.

영화의 첫 순간에는, 분석적인 눈이 빛의 작은 구멍과 작은 구멍, 절반정도 보이는 움직임을 주변부처럼 주변 인식을 흐리게 하며, 그 세부는 탈출하지만 순수한 운동처럼 존속을 도약하게 한다. 

영화적 이미지는 의미에서 동일하지 않은 프레임 속의 각각의 사건이 시간에 완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각 표상으로 단편적이며, 때문에 각각의 투사의 사건은 초점 맞추기와 한계 이미지의 새로운 조립을 불러 일으킨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동시에 움직임, 한순간, 그리고 산만한 시선, 미세 광학 구분의 궤적 모두 포함하고 있다. 

매력으로써 시네마토그래프는 19 세기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도시 문화에 속한다. 도시들을 향한 인구 흡수가 의 상태에 대한 이유를 소통을 경제적 혹은 경관을 중심에 맞춘 것처럼, 모두 영향과 이유가 되었다. 도시의 매력은 특히 스펙터클의 사회적 존재가 되었던 19 세기의 마지막 10 년 동안의 주요한 에너지였다. 이런 사회는 다시 같은 유행을 타는 산보자와 소통 할뿐만 아니라 전달 될 소비자로 개별화하기 위해선 대량의 인구가 필요하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여유 있는 최신 유형, 움직임 등 소비자의 본 발명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런 매력과 힘들은 노동자들이 초췌한 집으로 돌아오거나, 닭을 키우거나, 그들의 작은 지분, 터무니없는 양말, 야채를 재배하는 같은 순간들이 실종된 것에서 비롯된다. 농민 경제의 자급자족의 잔여는 카메라의 돌림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현대의 리옹, 프랑스에서 여기있는 사람들 모두는, 찍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드보르가 주장한 것처럼, 소비자가 된다는 건, 우리가 소비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소통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는 소통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이 초상화를 민주화 하면, 모두가 극적인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시네마토그래프에서, 관객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비전은 형성 과정에서 기계적 지각과 함께 동기화된다. 카메라, 프린터, 프로젝터가 하나의 장치로 설계된 것은, 시네마토그래프는 현 단계에서 가시적인 표현을 위한 도구에 있었으며 따라서 뿌리깊은 군중의 가시성에 영향을 주기 위해 계측기로써 만들어졌다. 한편 마리의 전통은 인간의 지각으로 포착하기 위한 이벤트의 분석을 위한 영화의 과학적 사용을 인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메를로퐁티의 낙관적인 현상학과 감시의 푸코의 비관적인 이론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범투시의 영역를 만든다. 이 "객관적인" 비전이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시네마토그래프는 "인식에 대한 믿음의 붕괴"로 관객을 제시했다. 하나는 지각 자체의 파편화된 개체, 다른 하나는 지각 그 자체로 말이다. Marey 전통에서, 시각의 분석은 개체의 세계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연결된다;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인간과 기계 지각은, 기계에 의해 재구성된 인간, 그것의 실현을 위해 새로이 편심된 인간의 감각 기관의 기계적인 의존에 상호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필수적인 인간-기계 인식의 가능성을 만드는 동안, 시네마토그래프도 버치와 바쟁에 의해 정밀한 불멸의 신화를 생성한다. 그런 반응에 우리는 러시아에서 첫 시네마토그래프회에 참석한 고리키가 남긴 감상문에서 그림자, 유령, 그리고 유골의 무성과 무색의 영역에 대해 언급한, 잘 알려진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고리키는 영화의 장소와 외설적 미래의 부도덕함을 혹평했던 것처럼, 꿈에 대한 첫 번째 시간적 시스템과 영화의 감각 역시 예지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은 잊고 있다. 이상한 상상은 당신의 마음을 공격하고 의식은 약해지고 희미해져 가기 시작한다 ...." 

그 순간에, 시네마토그래프의 표상적인 힘은 질문을 받게 된다; 개체와 대상은 영화에게 인간과 기계 고유의 인식 영역을 제공받음과 동시에 용해된 전망 속에 용해된다. 분석적인, Marey 전통은, 인지 또는 인식의 과정보다는 "차이에 종속된 동일의 개념적인 형태를 의미" "재인지"에 대해 주장한 길 들뢰즈가 주장한 의미에서 표현적이다. 한편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우리는 Vaughan이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발견했던 대상 및 주제 영역 모두에서 정체성의 상실의 가능성과 자기 표현의 손실과 함께 인식의 모든 순간의 고유성의 감각을 얻음에 직면하게 된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모든 개체, 모든 일이, 차이 속에서 삼켜지고 자신의 정체성, 각각의 차이 사이의 차이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는 다름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현대 미술은 이러한 조건을 실현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변형과 치환의 진정한 대가가 된다.’”

고르키의 오몽의 니즈니 노브고로드시 연구에서 밝혀지 것처럼, 차이의 확산은 의식의 퇴색과 생각이 다름에 속하는 것으로 경험됨이 발생하는 산만한 상태를 제공한다. 이 산만한 시선, 동일하지 않음의 깜박거림에 매료된 관객을 유도했던 최면적인 황홀경이란 현상은 여전히 텔레비전, 콘솔 게임 및 인터넷에 대한 비판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의 출현은, 조나단 Crary가 주장했던, 순수하고 세심한 의식에서부터 소설의 분리가 아니다. 반대로 산만함은 주의력을 고정하려고 하는 시네마토그래프처럼 정밀하게 그 고안되어 있다.: “산만함을 19세기 후반의 문제로 보려고 하면 세심한 관찰자의 병렬 구조에서 분리 될 수 없다." 세심함을 생성하도록 구성 된 조각화은 또한 꿈꾸는 듯한 황홀경을 생성한다.

황홀경은 시간 속에서 구성된 영원한 형식이다. 이 모순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를 집중하게 한다: 시작과 중단의 문제. Elsaesser는 "항구를 떠나는 배"의 릴 프레임에 의한 갑작스러운 끝뿐만 아니라 구성된 서스펜스의 순간을 닫는 프레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남자를 본다. 하지만 이야기의 긴장감은 다음에 일어날 것에 대한 우려를 생성하는 반면, 산만한 시청자에게는 액션이 중단 이유에 대한 표현의 동기나 어떠한 신호없이 찾아오는 서스펜스에 대한 정지 경험의 총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처음의 영향은 비교적 용이하게 카메라와 프로젝터 모두 제어된다. 그러나 필름스트립의 끝은 대부분 분명히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뿐만 아니라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확실히 확인할 수 있듯이 액션의 끝의 효용성이 아니다. 그런 다음, 뭐가 문제인지는 결말의 긴장감 다음에 무슨 일이 아니라 무슨 일이 지금 벌어졌다, 다. 

그 경험의 전부는 어땠는가? 고르키에겐 경험은 빛이 “나갔을 때“ 시작된다: 어둠을 제외한 움직이는 이미지는 존재의 정적에서 움직임이 되어감에서 빛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상영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각각의 프레임은 프레임 라인이 렌즈 앞에 구멍을 가로 질러 이동하는 동안은 프로젝터의 빛을 차단하는 셔터의 움직임에 의해 중복 되어, 두 번 노출된다. 그래서 프레임라인은, 두 배로 보이지 않는, 환등기의 반복되는 꺼짐 뒤에 숨겨진 어둠이다. 사진 이미지와 1895년과 1896 년 뤼미에르의 쇼 시작 부분에 상영된 싱글 프레임은 빛에 민감한 분자들의 임의적으로 튄 자국이다. 스틸 이미지는 래스터 이미지의 발명 전까지는 격자 이미지가 없었으며, 그 발명은 일반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의 레이더 모니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에 움직이는 이미지는, 뤼미에르 시네마토그래프의 카메라 프린터 프로젝터 렌즈의 전면 프레임의 정확한 촬영에 종속되어 격자 이미지로서 삶을 시작한다. 

프레임라인은 과거와 현재, 네거티브와 영화 운동의 순간을 나타나도록 구별한 프레임에서 프레임을 분리하며, 현재를 그들의 순수한 차이처럼 영화적 순간으로 구분한다. 

하나의 축이 시간을 표시하는 그래프에서 원점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것도 그렇다고 그 구별도 아닌, 0으로 표시된다. 우리는 이미지를 수학적으로 부호화 된 시대를 다시 돌아보고,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은 더 이상 수학에 대한 문외한으로 남지 않으며, 영화적 현재와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는 프레임은 보이지 않도록 머무르는 프레임라인에 대한 분리 대신, 공간적이며, 일시적이지 않은 중대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픽셀로 간주 될 수 있다.

0이란 관계나 수량이 아니다. 우리는 “4” 자체를 4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0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반면에 0은 형용사로서 사용할 수 있다:“숫자 0은, 그렇기에, 모든 개념들이 예시화되는 것의 부정의 연장선상으로서 확인될 수 있다.”(Zalta, 2000)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의 명사로서 0 자체는 예시화의 실패 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그 어떠한 것도 ‘자신 이외에는 특징적이지 않은’이라는 개념에 복속되지 않기에, 나는 0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0이란 그 자신 이외에는 동일하지 않다는 개념에 속해있다”(Frege 1974: 87) 동일하지 않음이라는 개념은 0의 내부적인 다름, 차별성이라는 특질을 드러낸다. 0은 어떠한 사물이나 개념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관계’인데, 이는 그자체로 언제라도 비동질적인, 차별성인 것이기 때문이다. 0은 행동한다,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봐야하는데 그 자치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또한 0은 다른 정수들(1,2,3,4...)과의 관계속에서 행동하는데, 이는 그 정수들의 반대 존재가 바로 0이기 때문이다. 그 아무것도 영화의 시작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0은 이미지-차이점들, 환경이나 지지기반들, 그리고 분명한 행위를 유발하는 기제들-가 시작되기 전의 비동일함(비특질적인), 혹은 움직이지 않은 것의 불안정성들(현재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될것인가 사이에서 발생하는)이다. 0은 좌표공간에 있어서 원점, 모든 좌표의 축들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원점으로서, 0은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이는 차이의 척도로서의 특권이다. 점묘화 방식으로 구성된 이미지에서, 원점-(0,0)으로 표시되는-은 스크린 맨 위 왼쪽에 위치하며, 이를 통해서 컴퓨터 화면상의 모든 화소들은 그 지점을 원점으로 삼아 자신의 좌표를 끌어낸다. 각각 5 픽셀 단위 좌표들은 0이란 구별불가능한 차이점(비어있는 좌표인 0,0)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있느냐에 따라서 상징화된다. 그리고 최초의 ‘차이점’으로서 이 텅 비어있는 좌표이자 기원인 (0,0)은 필수적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것의 불안정한 속성의 결과는 끊임없는 움직임의 기원으로서 작용한다.

0은 또한 최저선이자, 14세기 복식 부기의 발명 이후로 모든 회계장부의 총합으로서 기능해왔다. 빛과 신용의 관계 사이에서(낙천주의자의 행복으로), 0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평등이었다. 이는 단순한 돈의 부재가 아닌, 지출과 소비가 일치하는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열역학 1법칙-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있어서도 0은 똑같은 지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하나의 안정된 시스템으로서, 시간에 걸쳐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모든 총합과 총손실은 원 에너지의 0의 총합인 것이며, 만들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에너지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0의 개념은 20세기 세속주의를 특징짓는, “끝내주는 것과 소름끼치는 것들은 더 이상 가장 완벽한 존재의 외피를 뒤집어 쓰지 않는다;그 대신에 공허를 향한 믿음으로서, 우리의 패배를 위한 열망으로써 작용한다. 부정적인 이론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영화에 있어서 숫자 0은 비어있거나 비활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다:모든 행위의 총합. 이러한 0의 개념은 원점으로서의 0의 개념을 보완한다. 역학적인 평등으로서의 최종 결과물이자 보존물인 0과 모든 좌표평면의 원점으로서의 0개념이 혼합되면서, 0은 모든 평등계와 함께 데카르트적 사상 영역에 그 존재를 확장한다. 그렇기에 0은 행위가 일어나는 지점의 순수한 관계적인 지점인 것이다. 원점으로서의 0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좌표평면에서의 표현은 모두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복식부기에 있어서 0에서부터, 그리고 0으로부터의 방황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영화 제작을 향한 어떠한 현금의 흐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이질적인 프레임들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는 영사 슬라이드의 보이지 않으며, 인지불가능한 계속됨이란, 그럼으로 역설적인 지점에서, 차이의 계속됨, 0이란 공허가 아닌 모든 다름의 총합임을 드러낸다. 일시적인 차원으로서, 0이란 형용사도, 명사도 아닌 하나의 ‘동사’이다. 간헐적인 이미지의 깜빡임이 행위를 구성하지 않는 지점들을 제외한 아무 가치 없는 행위. 버릴리오는 우리가 신의 0의 시간으로부터 반기를 들은 것이 아닌가 라고 두려워하였다:“신에게 있어서, 역사란 사건들의 경관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어떠한 것을 이어받지 아니한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Virilio, 1996, 9) 이 동시성은 우리 인간들은 오로지 통시성에서만 인지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들은 특히 겔러리에서, 하얀 라이트박스에 위치한 영사 슬라이드에 걸려서 전시된다. 이러한 형태의 전시들이 보여주는 역설이란, 움직이는 이미지란 현존하지 않지만-반면 영사 슬라이드는 실존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영사 중에서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동시에 이는 영상의 움직임을 희생함으로서 그것이 현존하게 된다. 버릴리오의 신은 필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영사 슬라이드를 인지할 뿐이다. 성스러우면서 변함없는 현실로서, 라이트 박스를 통해서 보여지는 영화 필름의 테두리는 오로지 존재할뿐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아니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의 전시는 박물관에 박제된 나비와도 같다;사랑스럽지만, 그것은 죽어 있다. 성스러운 현존에서, 그들의 시간은 정지해있으며 동시에 0은 공허가 된다. 그러나 0의 시간은, 신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모든 시대에 동시에 현존하는 듯하지만, 하나의 신은 인지할 수 없는 인간의 원리이다. 그리고 신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신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의 존재가 불완전하고 타자화된 존재들만이, 오로지 객체가 된 자들만이, 다른 의미로는 비구분적인 것이, 그것이 바로 0이다, 그리고 그 0만이 시간 속에서 시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살아갈 수 있다.

영화의 시간을 만드는 필름 테두리의 0의 시간은 인간이란 존재를 구성하는 별난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를 성스러움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은 성스러움 자체가 스스로 자체 충족 가능하다는 점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이라는 표현에 익숙하기는 하지만-솔직히 우리는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와 그 표현 사이의 내적인 차이를 찾아내지 못하는데-이 불안정한 전체성과 평등함의 부재는 우리를 집에 혼자 묶어두지 않게 하며, 우리를 사회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초기 순간들은 이런 지점들에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정지되어 있는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뤼미에르 시절의 영화들은, 모든 이미지들은 고정되지 않고 사회적인 이미지를 이용해서 비구분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였다. 정적인 사진의 이미지들을 원용하기 보다는, 영화는 자기 자신으로 완결된 하나의 이미지의 원용을-콜드리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영화가 왜 영화인가? 라는 지점들이 여기서 드러난다-끝낸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은, 항상 다르다. 영화의 가장 급진적인 불안정성은, 인간의 자율성으로부터 얻어낸 테크놀로지의 성취이며 동일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객체성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영화의 발명 이후로 몇십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통치적인 개념과 의사소통 네트워크의 종결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관계적인 원칙-기술에서 이미지, 이미지에서 이미지, 객체에서 객체, 이미지에서 객체, 객체에서 테크놀로지-이 모든 영화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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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의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적 특정성과 '멜로적 감수성'에 대해

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글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 중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멜로적 감수성이 정확히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민족적 특정성과 연관이 되는지를 분석할 예정이다. 분석의 틀로는 프레데릭 제임스의 [정치적 무의식]와 폴 윌레만의 국가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에 대한 간단한 약력을 적어야 이 글을 이해하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 출신으로,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정확히는 증조할아버지가 우크라이나 오스트로폴 출신이며 제임스 그레이의 집안은 예술하고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유대인 중산층 이였다. (이는 후술한 제임스 그레이의 회고하고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가 태어나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낸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는 러시아계 미국인/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이 브라이튼 비치를 중심으로 찍혀지고 있으며 주요 무대 배경이 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는 미국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로컬’과 ‘민족’이라는 특성이 상당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감독으로 손꼽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여러모로 두 가지 프레임으로 흥미로운 분석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가 감독한 영화는 미국 내 러시아 유태계 이민자라는 민족 정체성과 비서사적으로 쌓여온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어떻게 문화 형성체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이끄는 운명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 간의 긴장이 ‘멜로’라는 감수성으로 맺혀 장르 서사를 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법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런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일견 상품화된 문화제국주의를 세계에 팔고 있는 미국 영화의 일반적 흐름하고는 차별화되는 구석이 있다.


이 글이 그의 영화 중 [리틀 오데사]  (혹은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와 [투 러버스]를 분석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꼽히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가 범죄 장르와 가족 드라마로써 제임스 그레이의 맹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투 러버스]는 범죄 장르에서 벗어나 ‘가족 드라마’와 ‘멜로적 감수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준 최초의 제임스 그레이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미그랜트]까지 발표된 2014년 시점에서 그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라면 두 영화를 먼저 접근해야 하기에 선택했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의 특징이라면 그가 구사하는 서사 구조는 매우 기본적이고 간단하며 장르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부터 살펴보자. [리틀 오데사]의 갈등과 드라마는 폭력적인 가부장인 아버지에게 반발하지만 동시에 폭력에 물든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아직 ‘비성인 남성’인 소년, 그리고 ‘모성’으로의 회귀라는 유구한 가족 드라마와 차디차고 비정한 범죄 장르의 서사들에서 빌려 왔다. 이 영화는 가족에게서 탈출하고자 고향을 떠났던 킬러가 암살 의뢰를 실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킬러인 주인공 조슈아가 뉴욕 브라이튼 비치를 떠난 이유를,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만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대로 조슈아는 ‘여성’인 어머니 일리나와 옛 연인 알라, ‘비-남성’인 동생 루벤 에게는 애정을 표한다. 


그렇지만 이 모성에 대한 조슈아의 욕망은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어머니는 병으로 끝내 죽고, 알라와 루벤은 조슈아와 갱단의 총격 속에서 사망한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조슈아는, 혼자 남겨진 채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모성에 대한 환상을 꿈꾸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느와르와 가족 드라마의 요소를 빌려 온 [리틀 오데사]에서 그레이는 가부장의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연약한 동생의 변화를 통해 폭력의 유전과 그를 통해 숙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 새로운 전기가 된 [투 러버스]도 기실 살펴보면 로맨스 영화의 기본적인 구조를 빌려오고 있다. 그레이는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고뇌하는 남자라는 평이한 소재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빌려 몽상적이고 우울한 사랑 이야기를 전개한다. 먼저 주인공인 레너드는 유전적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에게 파혼당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하고 동업자인 사업가의 딸인 산드라가 레너드에게 접근한다. 이렇게 산드라와 레너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레너드는 이웃집에 사는 여성인 미셸을 만나게 되고 순식간에 푹 빠지게 된다. 산드라와 미셸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존재로 가정적이고 편안한, 산드라와 달리 미셸은 불안정하고 난잡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미 애인이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레너드는 미셸을 향한 사랑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투 러버스]는 두 개의 사랑을 통해 갈등하는 인물을 통해 ‘안정’과 ‘모험’이라는 두 갈림길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런 일견 간단하고 장르 원형적인 서사들을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미국에 정착한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문화를 상징하는 코드들과 장면들을 집어넣는다. [리틀 오데사]에 등장하는 조슈아와 루벤의 외할머니의 80번째 생신과 어머니 일리나의 장례식,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단성 성가들, ‘러시아’를 연상시키게 하는 인물들의 복장이 그렇고 [투 러버스]의 산드라 남동생의 유대인 성인식과 두 가족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식사 자리, 마지막 엔딩의 유대인들이 모여 벌이는 신년회 등이 그렇다. 이 장면들과 세밀한 설정들은 주인공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긴장감하고는 관계없는, 어찌 보면 지극히 ‘민속학’적인 장면들이다.


 그레이는 영화 내에 그런 코드들과 장면을 집어넣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에 민족이라는 코드를 분명하게 상기시키며 장르 서사에 침윤시키고 작동시킨다. 이런 상기가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위치와 연계 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브라이튼 비치로 돌아와 해야 하는 일은 타 민족인 이란 출신의 사업가를 손봐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조슈아가 알고 있던 러시아계 유대인 갱들이 동원된다. 이 와중에 조슈아를 부끄럽게 여기는 조슈아의 아버지 아르카디는 신세를 지고 있는 러시아 갱인 보리스에게 조슈아를 없는 아들이라 칭하면서 보리스와의 관계를 유지시켜 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고자 한다.

그가 사랑했던 범죄 장르 영화의 틀에서 벗어난 [투 러버스]에 이르면 유대인 커뮤니티의 그림자와 그와 대조되는 타자의 커뮤니티는 더욱더 은밀하고 공고하게 자리매김한다. [리틀 오데사]처럼 [투 러버스]의 유대 커뮤니티는 가족이라는 존재와 맞물려 돌아간다. 레너드가 비유대계 약혼녀와 파혼한 이유가 ‘유전적인 결함’라는 점과 산드라가 가족이 담겨 있기에 뮤지컬인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고 하는 대사에서 유대 커뮤니티와 가족이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레너드는 아버지의 세탁소 사업을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산드라와의 사랑이 유대인 아버지들이 진행하는 사업적인 관계하고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산드라와 레너드의 관계는 미국에 이민 온 레너드의 가족사진 앞에서 시작해 산드라의 남동생이 한 명의 유대인 성인으로써 인정받는 의식의 자리에서 커뮤니티 내에서 선언된다. 이 모든 유대 커뮤니티의 안온한 약속들이 따뜻한 실내에서 진행된다는 것도 주지해야 할 부분이다. 


 반대로 레너드를 유혹하는 비유대계인 미셸의 삶은 가족하고 거리가 먼 존재들로 이뤄져 있다. 미셸은 아버지와 싸우면서 등장하고 그녀의 삶은 클럽과 마약, 춤, 오페라로 상징된다. 또 미셸이 유부남 로날드 (물론 그는 비유대계 백인이다.)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며, 중반부에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유산한다는 점 역시 그녀가 유대 커뮤니티의 가족적인 삶하고 거리가 멀다는 걸 방증해준다. 또한 따뜻한 방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이뤄졌던 산드라와 달리, 미셸을 향한 레너드의 사랑은 창밖으로 훔쳐보기와 사진 찍기라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시작해 실외 옥상의 차갑고 우울한 공기와 빛에서 섹스와 고백, 포옹이 이뤄진다. 그나마 간신히 미셸의 실내로 들어온 레너드는 미셸을 사랑하는 사이인 로날드를 숨어서 지켜봐야 하고, 로날드가 떠난 뒤에도 미셸에게 키스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돌아선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는 그런 민족 커뮤니티에 대한 묘사와 세팅들이 ‘장르 서사’ 자체를 진행시키는데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감행한다. 그런데 그런 감행이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에 깊게 침윤되어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이 감행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이다.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민족 커뮤니티에 소속되길 원하거나 아니면 탈주하길 욕망하며, 그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욕망들이 얽히면서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를 작동시키는 장치가 된다. (후술하겠지만 이 욕망은 유태 문화의 민족주의하고 거리가 멀다. 차라리 커뮤니티를 향한 지극히 개인의 욕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렇게 집어넣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들과 그것의 서사적인 위치는 폴 윌레만이 주창했던 민족적 특정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족적 특정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폴 윌레만은 민족적 특정성과 민족주의 담론을 이야기하면서 ‘흑인 영국 필름’에 대한 예시를 들었다. 흑인 영국 필름은 분명 영국적이지만 민족주의인 것은 아니다, 라는 윌레만의 지적은 흑인 영국 필름이 영국 흑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경우에는 그 영화에서 흑인 문화를 재발견하고 재배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윌레만은 그런 재발견과 재해석을 비판하며 그것과 다른 대안적인 방법론을 찾고자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나오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민족적 특정성이, 캐릭터를 설명하진 않고 그것이 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그것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다는 것이다. 즉슨 유태 문화가 어떤 서사의 방아쇠가 되진 않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서사의 방아쇠는 유대 문화라는 로컬리티를 지워내도 전개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다곤 부정할 수 없다,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시선과 달리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인 캐릭터들은 이미 자신이 유대인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먼 ‘미국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유대인임을 자긍심을 가지고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유대 민족의 삶이 자연스럽게 미국적인 삶에 침윤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위에서 언급한 [리틀 오데사]에서 나오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며 흐르는 유대교 단성 성가 음악과 아버지 아르카디의 어머니 생신을 기념해 벌어지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가 그렇다. 전자의 경우, 결말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고 조슈아가 멍하게 앉아 있는 장면에서 단성 성가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존재하며 ‘중력’을 구성한다. 이 중력은 서사 속에 있는 조슈아를 끌어당기며 안착시키려고 한다. 이런 단성 성가의 케이스처럼 영화가 유대 문화에 침윤되어 있으며 조슈아를 끊임없이 끌어당기려고 하고 조슈아는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증오하는 아버지를 밀어내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여성과 비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에 대한 애정이 중력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중력은 후자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 같은 장면들에서 비서사적으로 드러나면서 그것이 ‘디아스포라의 역사’하고 연계되어 있다는 걸 분명하게 한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 커뮤니티에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결말에 이르러선 그 커뮤니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박살났기 때문이다.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중력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서 언급한 역사론 하고 언급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슨은 “역사는 텍스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근본적으로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덧붙여야 할 것은 역사는 텍스트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슨은 그렇게 텍스트 화된 역사가 하나의 상처로써 작동한다고 보고 있으며, 그것이 ‘욕망을 거부하고 집단적 실천뿐만 아니라 개인적 실천에도 거침없는 한계들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을 끌어당기는 중력은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인 역사에서 잉태된 존재이며 그것은 영화 내의 구체적인 텍스트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서사와 텍스트 주변에 분명하게 존재하며 서사 속에 있는 인물을 끌어당겨 개인적인 실천에 한계를 부여하고 개인을 커뮤니티에 안착시키게 하려고 한다.


 이 와중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은 그 중력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음’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멜로의 감수성이 드러나고 있다. 즉 비서사적으로 구축된 ‘민족적인 정체성’이 서사 속으로 침윤해 커뮤니티 내의 안착을 유도하는 중력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캐릭터를 젖어 들어가게 해 캐릭터를 무겁게 한다. 그렇게 축축해진 캐릭터는 침묵과 슬픔이라는 감정 속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것은 곧 멜로의 감수성으로 귀결된다. 요약하자면 제임스 그레이의 멜로는 침윤 혹은 젖어 들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서사적인 역사가 만들어내는 멜로적 감수성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적과 달리 정치적 한계로 연결되지 않는다. 창작자로써 그레이는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사랑’한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폭압적인 가부장 아래에 있는 혈연적으로 연결된, 비-성인, 비-남성 유대인들(동생 루벤, 어머니 일리나, 옛 연인 알라)에게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유대 커뮤니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조슈아는 처음 의뢰를 받고 고향과 거기에 있는 유대 커뮤니티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며, 그 수장인 아버지와 불화한다.


 이런 두 감정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제임스 그레이는 인터뷰 할 때마다 자신의 가족사를 자주 언급하는 편인데 이런 유대 커뮤니티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과 관련해 흥미로운 인터뷰가 있다. 실은 그레이의 가족들은 처음 그가 영화감독이 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은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연줄도 없다. 할리우드 출신도 아니다. 넌 절대 감독이 되지 못할 거다."라고 말하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레이는 이렇게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 있다.”라고 정리한다. 이 발언은 그레이 영화를 휘감고 있는 민족과 가족, 그리고 멜로적 감수성 간의 관계를 접근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결국 유대인 커뮤니티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혈연 가족의 양면적인 모습에서 그레이는 애정과 동시에 그런 양면성이 만들어내는 중력에 얽매여 있음에 슬픔과 동시에 떠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두 개의 모순된 감정은 그의 영화 내에서 단죄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머물러 있으며 그레이의 인물들을 침윤시키고 멜로의 감수성에 젖게 할 뿐이다.


 이 멜로의 감수성은 [투 러버스]에 이르면 완연해진다. [투 러버스]에 이르면 주인공이 소속된 유대 커뮤니티는 [리틀 오데사]와 달리 파괴되지 않는다. 레너드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도, 총격전으로 가족을 잃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인 레너드를 옭아매어 잡아 담기는 중력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레너드는 그 속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레너드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인 비유대계 여성 미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겐 매몰차게 대하지 못한다. 그렇게 정리하고 미셸을 찾지만 정작 미셸은 ‘사랑을 주는’ 비유대계 남성을 선택해 레너드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실연당하고 해변에 고통스럽게 머물러 있던 레너드는 미셸에게 주려고 했던 반지를 주워 새해를 맞이하며 유대인 커뮤니티의 편안함 속에 있는 산드라에게 선물해준다. 그렇게 중력에 안착하려는 순간, 산드라를 껴안고 있는 레너드의 눈빛은 흔들린다. 이 흔들리는 눈빛에서 관객들은 두 개의 모순되고 상반된 개념과 감정들인. 떠남과 안착, 슬픔과 기쁨. 변화와 안정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미셸과 함께 떠나려고 해도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매정하게 버리지 못하는 레너드의 모습과,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산드라 품 안에서 행복해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안고 싶어 했던 미셸을 잊지 못하는 레너드가 동시에 등장하는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제임스 그레이의 축축한 멜로적 감수성의 총화이며 동시에 그 감수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결말은 영화 중반부에서 슬쩍 흘러나왔던 지하철을 타고 가며 사랑을 나누는 타 인종 간의 커플을 (유대인 커뮤니티 바깥에 있는) 타자와의 사랑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너드하고 연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기존의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로 해석될 수 없는 영역에서 멜로적 감수성을 띈 중력을 통해 비서사적으로 축적되어온 민족 커뮤니티와 그 커뮤니티하고 갈등하는 캐릭터를 이야기하고자 하며, 이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미국 바깥의 ‘내셔널 영화’와 대척되는 ‘미국 영화’라는 일반적인 공식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드러나는 비서사적인 역사성과 유대인 커뮤니티의 민족적 특정성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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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객잔]과 [안녕, 용문객잔]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장르적 구조과 감정

(과제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호금전의 [용문객잔]과 이를 인용한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은 동일한 결말의 구조와 샷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사라짐이라는 샷이다. 그리고 이 사라짐이라는 샷에는 공통적으로 애잔함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애잔함의 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게 흥미롭다.


[용문객잔]의 결말에선 영화 내내 조소겸으로부터 충신 우겸의 자식들을 지키던 협객들이 동료의 희생을 겪으면서까지 조소겸을 물리치는 컷이 나온 직후 살아남은 협객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이 나온다. 여기엔 어떤 내러티브적인 설명이나 이별의 대사도 없다. 심지어 그전까지 중요한 인물들이였던 우겸의 자식들을 비롯한 생존자들도 제대로 된 대사 없이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뿐이다. 살아남은 협객들은 왼쪽으로 향해 걸어가 사라진다.


 이런 [용문객잔]의 결말 구조는 미국 서부극의 구조에서 자주 사용하던 결말을 차용한 것이다. 존 포드의 [수색자]이나 [셰인]의 결말에서 집약되듯이, 서부극에서 커뮤니티의 위기를 해결한 영웅은 구원을 원했던 커뮤니티를 벗어나 자신이 왔던 자연 (예를 들면 모뉴먼트 밸리)과 그것이 제공하는 풍광으로 걸어들어가 천천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이런 지평선 쪽으로 사라짐은 곧 서부극의 영웅을 자연이 가지고 있는 원초성과 자유와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자연=영웅과 문명 이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문명의 전경에서 출발해 광활한 자연의 후경으로 사라져 가는 서부극 영화의 미장센은 곧 신화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어졌다.  


다시 [용문객잔]의 결말로 돌아가면 이 장면은 와이드 샷으로 찍혔기에 인물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오로지 형태로만 등장한다. 그리고 이 장면엔 아무런 건물들도 등장하지 않고 강만 나온다. 협객들은 카메라와 멈춰서서 배웅하는 인물들이 있는 화면 오른쪽=전경에서 멀어져 화면 왼쪽에 있는 후경인, 아무도 없는 지평선으로 향해 사라진다. 이렇듯 [용문객잔]은 서부극의 결말 샷을 인용하면서 중국 무협의 신화성을 영화 속에서 만들어낸다.  [용문객잔]은 이를 통해 신화화된 무협의 세계 속에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과 예를 지키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사라지는 강인한 영웅들을 찬양하고 동시에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다만 [용문객잔]의 신화성은 커뮤니티 자체보다는 충절 쪽 (무고하게 죽은 충신 우겸의 의지)에 방점이 맞춰져 있다.) 


[안녕, 용문객잔]에서도 얼핏 보면 이런 비슷한 구조의, 신화화된 공간과 사라진다는 결말을 취하고 있다. 문을 닫는 영화관을 뒤로 하고 일을 마친 영사 기사가 빗 속으로 사라지고 그 뒤로 절름발이 여자 역시 빗속으로 나서서 집으로 절뚝절뚝거리며 돌아간다.  그러나 [안녕, 용문객잔]은 [용문객잔] (나아가 서부극)의 어법을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 배치나 미장센, 나아가 그 의미는 인용의 대상이 된 [용문객잔]하고는 전혀 다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절름발이 여자는 [용문객잔]처럼 카메라에서 멀어지는게 아닌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화면 오른쪽 끝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빠져나간다. 그렇게 빠져 나간 후 화면의 후경에 남아있는 것은 내일이면 사라질 영화관이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용문객잔]과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먼저 문명과 생존자들에게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던 용문객잔의 협객들과 달리, [안녕, 용문객잔]의 절름발이 여자는 자연=후경=영화관에서 벗어나 도시=프레임 바깥으로 편입되어 간다. (혹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영화 속 절름발이 여자, 나아가 먼저 퇴장한 영사 기사는 협객이나 카우보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영웅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문명에 속한 개인들이다. 따라서 자연히 영화 끝까지 프레임에 남아 있는건 ‘신화’ 정확히는 ‘신화의 공간’이다.


 즉슨 신화가 문명을 떠나는게 아니라, 문명이 신화를 스스로 떠나는 것이다. 이 영화 내용이 한때 신화를 상영하며 사람들을 기쁘게 했던 공간이 마침내 신화로 화하며 사라지는 걸 다루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안녕, 용문객잔]의 결말의 미장센은 저물어가는 신화를 뒤로 하고 현실/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녕, 용문객잔]은 신화인 용문객잔의 장면과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고 그것을 보는 관객들을 보여주는 메타픽션적인 전개와 연출과 더불어 원작 결말의 미장센을 뒤집어놓으면서 [용문객잔]에 담겨있는 신화적인 퇴장과 고유의 가치관을 거꾸로 전유해 [용문객잔]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영화사 내의 신화성과 아우라, 그리고 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구식 단관 영화관에 대한 메타픽션적인 추모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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