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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데이빗 크로넨버그 (10)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2014)



맵 투 더 스타 (2014)

Maps to the Stars 
6.1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줄리안 무어, 미아 와시코브스카, 사라 가돈, 존 쿠색, 로버트 패틴슨
정보
미스터리, 스릴러 | 캐나다, 미국, 독일, 프랑스 | 112 분 | 201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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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를 다루고 있는 미국 영화는 이미 많이 나왔다. 그 유명한 [스타 탄생], [선셋 대로]라던가 [이브의 모든 것] 같은 걸작들이 있었고 최근으로 가면 [플레이어]라던가 [헐리우드 엔딩] 등등이 있다. 어느쪽이든 이 화려한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멜로드라마거나 건조한 풍자극이였다. 화려함에 빠진 사람들의 과잉된 감정을 그리거나 아니면 그 화려함에서 한 발 떨어져 조롱하거나. [코스모폴리스]에서 자본주의의 지옥도를 유랑하던 크로넨버그가 [맵 투 더 스타]에서 도착한 곳은 바로 헐리우드다.

영화의 시작이 한 인물의 '도착'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전작 [코스모폴리스]를 파멸 직전의 영원한 방황으로 마무리했던 크로넨버그는 [맵 투 더 스타]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꿀맛을 대변하는 헐리우드를 한 인물의 종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 온  인물, 애거서는 화상을 입은 소녀다. 어디서 왔냐는 리무진 기사 제롬(재미있게도 이 역은 [코스모폴리스]에서 리무진을 타며 유랑하던 에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에게 돌아간다)의 대답에 애거서는 '목성'이라고 대답한다. 목성의 영어명이 제우스의 이름에서 왔다는걸 생각해보면 이 생뚱맞은 애거서의 대답은 영화 제목 '별을 향한 지도'와 연관됨과 동시에 이야기가 신화적인 메타포를 가지고 진행될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것이다. 크로넨버그는 이 두 사람이 대화할때 컷과 시선을 서로 마주보지 않게 배치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있다는걸 보여준다. 그게 어떤 영역인지는 나중에 밝혀진다.

그렇게 애거서가 도착한 헐리우드는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과거의 망령에게 시달리고 있는 인물들이 모여서 화려하지만 썩어가는 삶을 구가하는 곳이다. 우리는 두 스타를 중심으로 헐리우드에 모여든 군상을 보게 된다. 먼저 아역 스타인 벤지가 있다. 거만하게 자신의 스타성을 과시하며 살아가는 벤지는 그러나 실상은 약물 중독에 빠져서 서서히 가치가 하락하면서 엑스트라 소년에게도 질투를 불태우는 불안정한 정신상태의 소유자다. 또 한쪽에 있는 하바나는 늙은 퇴물 스타다. 어머니 클라리스로 대표되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면서도 어머니에게 강간당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하바나는 여러모로 떠오르는 벤지하고 다른 존재다. 그러나 자신을 망가트리고 있다는 점에서 하바나는 여러모로 벤지의 거울쌍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남자-여자, 소년-성인 여성) 이 거울쌍 관계는 이후 맵 투 더 스타의 전개와 미적 방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애거서의 도착은 곧 화약고의 심지에 불을 던져놓은 꼴이 된다. 지저분한 화상을 크게 가리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애거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화려함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애거서의 '소박한 당당함'은 헐리우드의 화려함 아래에 묻혀있는 지저분함을 드러내는 불꽃이 된다. 그렇기에 애거서는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팜 파탈이 된다. 애거서의 도착 다음에 등장하는 벤지의 첫 등장 시퀀스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벤지는 병으로 죽어가는 소녀 캐미에게 병문안을 간다. 이 병들어 죽어가는 캐미의 모습은 분장부터 시작해 퀭한 눈빛 등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우리가 크로넨버그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병의 이미지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그런 캐미에게 벤지는 여러가지 호의를  베풀어주겠노라고 입발린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캐미에게 '에이즈에 걸렸냐'라고 물어본다. 소녀는 어이없다듯이 자신은 매우 희귀한 병에 걸렸다고 대답한다. 감독과 각본가의 악의마저 느껴지는 이 시퀀스는 표면적으로는 헐리우드 스타에 대한 풍자기도 하지만, 이후 캐미가 사망하고 벤지의 환영으로 등장하면서 좀 더 복합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 이 소녀는 매우 크로넨버그적으로 이미지의 확대 재생산이 이뤄지는 단초기도 하다.

[맵 투 더 스타]의 이런 병에 대한 이미지는 종종 매우 지저분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바로 똥에 대한 문제다. 의외로 [맵 투 더 스타]는 똥과 오줌에 대한 대화가 인물들 입에서 자주 오르며 (벤지는 자신의 똥을 팔아버린 한 사생팬에 대해 동료 배우랑 잡담을 나눈다.) 심지어 하바나는 설사로 변기에 앉아서 방귀까지 끼며 애거서를 부려먹는, 배우로써는 보여주기 싫은 꼴불견도 보여준다. 하지만 크로넨버그와 훌륭하게 캐스팅된 배우들은 항상 그래왔듯이 이 직설적이고 지저분한 이미지와 대사들을 어떤 망설임이나 쭈뻣거림 없이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대화는 단순한 화장실 유머가 아닌 스타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지저분함에 대한 상징으로 작동하게 된다. 병균과 지저분함이 스타 이미지와 결합되어 상품화되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아들인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를 흥미롭게 보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실제로 두 영화에는  사라 게이던이 스타 이미지를 병적으로 확대생산하는 스타로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브랜든 크로넨버그가 아직 장르 문법에서 이미지의 변이와 돌출을 탐구하고 있다면,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후기작들이 그렇듯이 은밀한 방식으로 이 화두를 다루고 있다. [맵 투 더 스타]는 그래도 [데인저러스 메소드]나 [코스모폴리스]보다는 훨씬 그 이미지의 변이와 돌출을 찾아보기 쉬운 편이다. 그래서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이 글 초반에 헐리우드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이 과잉된 멜로드라마나 건조한 풍자로 간다고 언급했다는걸 생각해보자. [맵 투 더 스타]가 두 전략을 모두 취하고 있다는걸 떠올리면 간단하다. 바로 과잉된 멜로드라마에서 이 이미지의 변이와 돌출이 등장한다. [맵 투 더 스타]는 이미지의 변이와 재생산, 돌출에 막장 드라마적인 요소인 근친상간을 끌여들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초반에 이미 드러난 하바나의 근친상간적 강간 (사실 이 강간은 누가 주체가 되었는지 조차도 모호하다. 세상은 하바나의 말에 따라 엄마인 클라리스가 하바나를 강간했다고 믿지만 클라리스가 지적하듯이 새 아버지가 하바나를 강간했는데 트라우마로 책임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벤지와 애거서 사이에 있었던 일이 뭔지를 알기 시작한다. 그것은 부모대에서 시작한 어처구니 없는 우연과 감정의 끌림으로 발생한 장엄한 가족 비극이자 막장 드라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에게 다시 끌렸다가 파괴되어간다.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애거서와 제롬의 분리된듯한 미장센 내 배치도 제롬이 '근친상간'의 자식이 아니라는걸 보여주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바나와 제롬이 만나 섹스하는 장면도 자세히 보면 섹스를 하기 전까지 하바나와 제롬이 미장센 내에서 분리되서 그려지고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근친상간이 인물간의 관계가 아니라 영화 내 이미지 생산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벤지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프랜차이즈의 후속작에 출연하기로 한다. 마약에 중독되어 사고만 치고 다니던 벤지의 재기작이 새로운 영화도 아니고 후속작이라는 점에서 벤지가 아닌 척 해도 그 근친상간적인 프랜차이즈 후속작에 얼마나 집착하고 의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하다. 가장 흥미로운 대사가 엑스트라 소년에게 돌아가자 벤지는 미쳐서 그 소년을 공격하러 든다. 한편 하바나도 그 근친상간적인 이미지 재생산 과정에 중독되어 있다. 하바나가 가장 원하는 것은 클라리스가 출연했던 영화의 리메이크에 자신이 클라리스가 맡았던 역으로 출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얻기 위해 하바나는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 하바나는 아주 운좋게 그 역을 얻는데 성공하긴 하나, 이 역시 파멸을 낳게 된다. 벤지와 달리 그 파멸이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게서 온다는게 다르지만 말이다. 기실 둘의 차이는 근친상간적인 자식 (벤지)이나 아니면 부모의 자가 분열 (하바나)이냐 밖에 없다. [맵 투 더 스타]에서 진정으로 '독립된 새로운 이미지'라는 것은 없다. 그걸 만들어가는 배우들이나 제작자들은 모두 화면 밖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 점에서 [맵 투 더 스타]는 헐리우드가 숨기고 싶어했던 가장 더럽고 추악한 면을 그대로 까발려 보여준다. 그리고 이 폭로가 사회적인 금기와 거울쌍 이미지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맵 투 더 스타]는 샴쌍둥이의 이중적인 사랑과 분열을 담고 있던 걸작 [데드 링거]의 훌륭한 변주곡이 된다.

그리고 그 가족 비극엔 헐리우드에 희생된 사람들이 환영으로 등장해 그들을 괴롭힌다. 이 환영들이 매우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이미지 변주가 이뤄지고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유령은 세 명이다. 병으로 죽은 캐미나 사고로 죽은 아지타의 아들 미카, 그리고 하바나의 엄마 클라리스. 캐미나 미카는 조금 생뚱맞긴 해도-도대체 미카는 왜 연관되어 있는 하바나가 아니라 벤지에게 나타나는가?-전형적인 호러 영화적인 유령으로 볼 수 있다고 해도 클라리스 같은 경우 '클라리스 본인'이 아니라 클라리스가 주연한 영화의 주인공이 유령으로 나온다는게 흥미롭다. 본인이 아니라 본인이 연기한 이미지가 유령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클라리스의 유령은 [나이트메어 3]라는 호러 영화 각본을 쓰기도 했고 신비 사상가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랑 연관되기도 했던 브루스 와그너와 무신론자이자 귀신 같은 현상을 그닥 믿지 않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미적인 관심사가 서로 섞여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근친상간과 근친상간적인 이미지로 뒤덮인 헐리우드에서 인물들은 주박처럼 끌려다니며 서서히 파멸로 치닫는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들은 급속도로 분열하는 욕망의 이미지에 허우적대다가 최소한의 양심마저 잡아먹어버린다. 이 와중에 애거서는 사람들에게 팜 파탈로 비난받지만 애거서는 사실 [데드 링거]의 클레어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 마지막을 제외하면 별다른 걸 하지 않았다는걸 알아야 할 것이다. 애거서는 불안정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등장 인물 중에서 가장 순수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싶어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싶어하는 애거서의 욕망이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오물과 같은 과거를 드러내는 트리거가 되었을 뿐. 그렇기에 영화에서 제일 위선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가장인 스태포드다. 그는 백인 남성으로 정상과 이성의 대변인처럼 굴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제일 비틀려 있으며 마지막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망쳐 영화 마지막의 파국에 불씨를 던지는 존재다. 크로넨버그는 스태포드가 하바나를 마사지로 정신치료하는 장면을 마치 섹스 장면처럼 묘사해서 스태포드와 하바나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마저 만든다. 하바나의 마사지 정신치료는 여러모로 정신의 물화라는 크로넨버그 특유의 관심사가 잘 드러나고 있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정신분석이라는 행위이 자체의 한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스태포드와 하바나는 둘 다 근친상간의 저주에 사로잡혀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의사와 환자를 '연기'하면서 정신인과 병이 호전되어가는 환자라 믿고 있다.

이는 후반부 하바나가 충동적으로 제롬을 유혹해 섹스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하바나는 애거서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질투를 토로하며 애거서와 미묘한 감정에 빠져 있는 제롬을 유혹한다. 근친상간의 트라우마로 허우적대던 하바나에게 애거서는 그야말로 창조적이며 편안하게 다가오는 사람이다. 창조적이지만 트라우마와 집착을 자극하는 어머니 클라리스하고는 다른 존재인것이다. 하지만 애거서는 반대로 그렇기에 하바나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다. 애거서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화상이 있음에도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반대로 하바나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애거서랑 달리 늙고 시들어가고 있다는걸 본인도 잘 안다. 그렇기에 하바나는 제롬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는 애거서에게 집착하고 질투한다. 

그렇다면 제롬은 어떤가? 제롬이 각본가이라는걸 알면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는 예술가다. 그는 과거의 상처를 가졌음에도 자유로운 애거서에게 애정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하바나의 유혹도 떨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과거라는 대상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예술적인 영감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바나와 제롬의 섹스는 창조성을 얻지 못해 어떻게든 갈취하고 싶어하는 과거의 피해자와 창조성을 얻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 예술가가 시도하는 가열찬 오쟁이질이라 할 수 있다. 얄궃게도 그 오쟁이는 애거서에게 들키고 곧 하바나 자신의 파멸로 이어지고 만다.

그럼 애거서의 창조성이 진정 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엉뚱하게도 애거서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인용하는걸 보여준다. 애거서가 항상 언급하는 이 '자유'라는 시는 그동안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저항 과정에서 나온 나치즘에 '저항'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왔다. 표면적으로는 영화의 배경과 전혀 상관없는 이 '자유'는 그러나 애거서가 언급하면서 새로운 맥락을 부여받는다. 바로 근친상간적인 시스템에 대해 자유를 찾으려는 시도다. 한 예술작품이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맥락을 찾아가는 이 과정에서 크로넨버그는 애거서를 통해 근친상간적인 이미지 생산 과정을 거부하려고 들고 이내 벤지도 감화받아 언급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크로넨버그는 아이들이 얼마나 그 근친상간적인 생산 과정에 물들어있는지, 그리고 근친상간에서 벗어나 있는 창조성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자유와 창조성을 찾으려는 애거서의 시도는 결국 굳건한 시스템를 부수지 못한 채 비극으로 끝난다. 폭로된 과거로 근친상간으로 맺어진 가족의 어머니는 분신 자살을 택하고 아들은 모든 영예를 잃는다. 딸은 자신을 모욕하는 또다른 딸을 죽여서 죄인이 되고 자신을 사랑했던 아들과 함께 자살을 택한다. [코스모폴리스] 결말에서 영원히 유예된 지옥이 마침내 [맵 투 더 스타]엔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이 지옥에 파멸을 택한 근친상간의 병자들을 비웃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동정한다. 결말을 다시 보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사소한 감정과 무지에서 시작된 근친상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남매는 부모가 가진 죄의 증거를 모조리 들고와 옛 집 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부모의 근친상간이 무지로 비롯되었다면 남매의 근친상간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는걸 짐작할 수 있다.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애거서와 그 창조성에 감화받은 벤지는 부모와 자신의 죄를 기꺼이 짊어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진 그들은 악순환을 끊기 위해 자살한다.

이 결말에서 크로넨버그와 촬영감독인 피터 서스키치는 마지막 컷을 부감으로 찍어서 운명에 갇혀 파멸을 택한 가련한 피조물들을 바라보는 전능자의 시선처럼 처리한다. 이 마지막 부감 컷이 가져다 주는 허무함과 슬픔은 [데드 링거], 박찬욱의 [박쥐],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결말과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다.이 허무함과 슬픔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상투적이지만 절절한 고백 대사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들이 죄를 대속하는 동안 아버지는 불타 죽어가는 어머니를 물 속에 던져 살린다. 결국 부모는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고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바나의 죽음도 어찌보면 구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속할 부모가 없는 하바나는 결국 애거서를 통해 끝나지 않을 지옥에서 해방된 걸지도 모른다. [맵 투 더 스타]의 파국에는 이처럼 잔인하지만 그래도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이상한 희망을 찾아볼수 있다는 점에서 기묘한 감동마저 있다. 마치 [공포의 계단]에 나오는 계단 밑 괴물들이 해방되는 장면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맵 투 더 스타]는 몇몇 캐릭터가 생각보다 깊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아쉬운 점도 없잖아 있지만, [코스모폴리스]보다 새롭지만 익숙하게 데이빗 크로넨버그 특유의 관심사와 비틀린 사람들에 대한 씁쓸한 이해를 품고 있는 성숙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영역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크로넨버그가 꾸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나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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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저러스 메소드 [A Dangerous Method] (2011)



데인저러스 메소드 (2012)

A Dangerous Method 
7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키이라 나이틀리, 비고 모르텐슨, 마이클 패스벤더, 뱅상 카셀, 사라 가돈
정보
드라마, 스릴러 | 영국, 독일, 캐나다, 스위스 | 99 분 | 201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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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크로넨버그의 새로운 전환기라면 [스파이더]를 들곤 한다. [데드 링거]나 [크래쉬], [네이키드 런치]가 비록 드라마로 방향전환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호러 크로넨버그의 기괴한 상상력 (자동차 페티시, 이란성 쌍둥이의 분열적인 자아, 비트 시인의 혼돈스러운 머릿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스파이더]의 놀랍도록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톤의 (하지만 여전히 기괴함이 남아있는) 심리 드라마는 분명 호러 크로넨버그하고는 선을 긋고 있었다. 이후 서부극-느와르-액션의 도구을 빌려 장르 틀과 미국사를 고찰한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를 거쳐 크로넨버그가 도달한 [데인저러스 메소드]은 놀랍게도 시대극이다.


[캐링턴]으로 유명한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인 크리스토퍼 햄튼의 연극을 영화화한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한마디로 정신 분석의 시초를 찾아가는 영화다. 영화는 정신병에 걸려있는 사비나 슈필라인이 당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정신과 분석의인 융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다. 융은 사비나에게 대화 치유를 이용해 정신병을 치유하려고 하고 이는 곧 중산층 엘리트로 흔들림없이 살아온 융에게 큰 전환점이 되게 된다. 그 와중에 프로이트도 얽혀들어간다.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평이한 전기물의 형식을 띄고 있다. 물론 크로넨버그가 서사를 꼬거나 과장된 연출 스타일로 유명한 감독은 아니지만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크로넨버그 색채가 전작들에 비해 더욱 은밀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좀 더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면모로 파고들었다고 할까. 즉물적이면서도 동시에 젠체하지 않는 지성미가 돋보이는 크로넨버그 특유의 연출 감각이 이번에 노리는 부분은 인간의 정신과 사상의 변화라는 부분이다.


그 결과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위대한 사상가가 개인적이고 내밀한 외적인 '육체'의 체험을 거치면서 어떤 식으로 내적인 심리와 사상이 '변이'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물론 이런 변화는 대사에서도 충분히 감지되지만 크로넨버그는 더 나아가 유달리 툭 불거지는 이미지들을 심어놓고 의미망들을 촘촘히 엮어내는 연출을 보인다. 예를 들어 사비나가 융과 섹스한 후 처녀혈을 이불에 흘리는 장면 후 등장하는 붉은 돛대를 단 요트라던가, 심리 테스트때 꺼끌꺼끌하게 자국이 남는 가죽 종이라던가. 이런 이미지들은 단아하고 덤덤한 서사에 묘한 틈을 만들고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점자를 읽는듯한 오묘한 감각을 느끼는 영화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도 그런 외부의 자극과 경험이 어떻게 내적으로 체화되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려는 융과 사비나의 시도를 높게 사고 독려하지만 묘하게 장벽을 치고 권위적인 "높으신 분"의 모습을 잘 소화해낸 비고 모텐슨이라던가 직접적인 경험에서 한 사상에서 다른 사상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정치하게 묘사한 마이클 파스벤더는 이견이 없으니 논쟁적이였던 사비나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를 보자.


척 보기에 사비나는 덤덤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연기자들과 달리 나이틀리는 혼자서 튀게 거북한 오버액팅을 해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에서 키이라의 연기 실력이 뽀록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핀트에 어긋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애시당초 이런 연기를 하도록 크로넨버그가 일부러 시켰다, 라고 보는게 맞다. 물론 크로넨버그의 모든 행동이 무조건 옳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가 육체의 경험이 어떻게 내면의 생각과 사상을 변이시키는가라는걸 생각해보면 '정신병자'인 사비나의 광기어린 캐릭터가 융이나 프로이트처럼 똑같이 덤덤한 톤으로 다뤄졌다면 완전히 잘못된 접근이였을것이다.


게다가 나이틀리의 연기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긴 하지만 19세기말의 낭만주의 (라보엠이라던지)처럼 어떻게 극적인 로맨티시즘으로 포장할 용의는 없다고 본다. 그 아름다움은 차라리 분라쿠 인형극이라던가 러브크래프트나 호러 영화의 괴물들처럼 우리가 이해할수 없지만 숨도 쉴 수 없는 기괴한 압도감에 가깝다. 그리고 치유후 보여주는 어딘가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한 모습도 그렇다. 나이틀리는 그 점에서 제대로 연기했다고 생각한다. 


세세한 연결망들을 느끼지 않아도 연구서를 모태로 크리스토퍼 햄튼이 써내린 훌륭한 캐릭터들의 우아하고 지적인 대사들을 명백히 영상으로 풀어내는 과정에도 지극히 크로넨버그의 터치가 묻어나오고 있다. 자기는 처녀여서 성에 대해 무지하니 선생과 섹스를 해야 되겠다는 '육체적 욕망을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하고 실천하는' 사비나를 보면서 [데드 링거]의 베벌리 형제를 떠올리지 않는건 불가능하며 인간의 심리와 내면이라는 '안'의 영역에 발을 딛어보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융, 프로이트, 사비나는 분명 크로넨버그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의 노선은 분명한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폭력이나 섹스, 호러로 과격하게 그 감각과 사유들을 드러내던 초기 크로넨버그와 달리 2000년대 크로넨버그 영화들은 여전히 평이한 어투를 쓰고 있지만 더욱더 의미망을 파악하는게 어려워졌다. [데인저러스 메소드]도 그 섬세하게 깔아놓은 촉들을 알아보지 못하면 잘못하면 그저그런 역사극으로 인식될 위험성이 있다. 물론 그렇게 봐도 말이 되긴 하지만 온전하게 영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크로넨버그 미학의 심화는 [코스모폴리스]는 그 극단에 다다르게 되고 호불호로 나뉘게 된다. 하지만 의미망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쾌감은 예전 영화들보다 강해졌다. 그 점에서 아직 공력을 잃지 않은게 눈에 보인다.

여튼 크로넨버그가 융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사상의 변이을 관찰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놀랍게도, 계몽이다. 영화 초반부부터 프로이트에 대해 마뜩찮음을 표현하던 융은 오토 그로스를 만나고 사비나와 관계를 이어가며 자신의 체질을 변화해가는 과정에 왜 그렇게 느꼈는지 답을 찾게 된다. 프로이트가 안전에 치중한 나머지 변화를 원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는 것에 만족하며, 모든 것을 성에 연결하고 있는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인종적, 지역계급적 텍스트도 있다. 융은 스위스 촌뜨기 비유대인이고 프로이트는 비엔나의 시크한 유대인이다.) 결국 미국 여행 끝에 (이 부분이 쏙 빠져 있어서 아쉬웠다. 너무 늘어져서 뺀 것일까?)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한다. 결국 융은 탐사보다는 계몽을 선택한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비나는 두 거인 간의 통섭을 시도한다. 사비나가 프로이트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는 프로이트와 융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만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적인 여인의 풍모가 드러난다. 융과 사비나의 결별은 어쩌면 이 장면에서 예견된걸지도 모른다. 영화 마지막에 사비나를 떠나고서도 여전히 불륜을 저지르며 정신쇠약에 걸린 '변모한' 융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비나에게 하는 대사는 그가 사비나랑 사귀면서 육체적인 경험이 정신과 사상으로 전이되고 변모한 과정과 결과를 모두 감내하고 나아가 자신이 선택한 계몽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선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무척이나 덤덤하지만 묘하게 가슴을 구석이 있다.


[코스모폴리스]를 보고 [데인저러스 메소드]를 보고 생각한건데, 두 영화는 새로운 크로넨버그의 양면을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코스모폴리스]가 급진적으로 '안'과 '밖'의 단순화하고 피로할 정도로 대화 중심의 극 구성으로 자본주의의 기괴한 풍경을 드러냈다면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반대로 은밀하게 안과 밖에 새겨둔 감촉들을 관객들이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는 영화다. 새로운 크로넨버그의 시작을 알리는 [데인저러스 메소드]를 보니 이제 [맵스 투 더 스타즈]는 어떤 방식을 택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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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 [Cosmopolis] (2012)



코스모폴리스 (2013)

Cosmopolis 
7.1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로버트 패틴슨, 줄리엣 비노쉬, 폴 지아마티, 사라 가돈, 마티유 아말릭
정보
드라마 | 캐나다,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 109 분 | 201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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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점령 시위가 있은지도 벌써 2년이나 지났다. 여전히 미국 월가는 세계 금융의 중심이고 월가를 따라하고 싶은 세계의 모든 금융권들은 굳건하다. 그렇다면 월가 점령 시위가 지적했던 월가의 문제점들은 해결됬는가?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미국발 불황은 영원하다. 자본주의는 병들었지만 대체할만한 새로운 체제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때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로버트 패틴슨과 명배우들을 태우고 유유히 [코스모폴리스]라는 이름의 리무진을 뉴욕으로 끌고 왔다. 돈 드릴로의 설계도를 토대로 만든 크로넨버그의 리무진은 지금 현재 뉴욕이라는 코스모폴리스를 가로지르며 그 안에서 펼쳐지는 또다른 코스모폴리스를 보여준다. [코스모폴리스]는 말 그대로 마트료시카처럼 몇 겹으로 이뤄진 세계와 세계 간의 관계와 긴장을 다루고 있다.


그 안 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에릭 패커다. "부자고 젊고 매력적"인 그는 아내 엘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정보를 끌어모아 끔찍한 짓을 저지르며" 사는 사람이다. 월가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금융자본가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 자본가는 오늘 뉴욕을 가로지를 생각이다. 왜나하면 머리를 깎아야 하니깐. 이 불균질적인 상황은 곧 영화의 원동력이 된다. 뉴욕 내에도 이발소가 있다는 걸 에릭은 안다. 하지만 절대로 그곳엔 가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그가 투자한 위안화가 폭락하고 그는 모든 돈을 잃지만 그는 여전히 머리를 깎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가의 오디세이아라고 볼 수 있는 [코스모폴리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안과 밖의 극단적인 대조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발소로 가는 에릭의 리무진에 밖의 사람들이 들어와 에릭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할애되어 있다. 그 대화들이 던지는 화두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지만 [네이키드]가 그렇듯이 [코스모폴리스]의 모든 대화들은 유려하지만 어딘가 어긋나있고 자기 자신에 함몰되어 있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에릭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차 밖을 나가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리무진 안의 대화가 날카롭지만 공허하다면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랬듯이 '리무진 밖'은 아예 추상화되어 있다. 밖은 후반을 제외하면 (하지만 그 짧은 순간조차도 베노의 아지트로 들어가면서 안에 들어가게 된다.) 찔끔찔끔 나올 뿐이다. 밖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리무진 안에 에릭이 있는지 모르지만 밖의 상황은 여전히 에릭의 안에서 간단한 손놀림 하나로 뒤바뀐다. 결국 미래에게 박탈당하고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밖의 사람들은 안을 공격하려고 하지만 에릭의 리무진은 굳건하다. 리무진 창문을 두드리며 에릭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못 알아보는 시위자와 태연히 대화를 나누는 에릭을 보여주는 방면은 현 시대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심술궃고 악랄한 블랙유머라 생각한다. (동시에  그의 독특한 미학이 고집스럽게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안과 밖의 경계를 서서히 허물며 죽음의 그림자를 불러들인다. 먼저 에릭은 보디가드를 우발적 살해한다. 그는 항시 옆에 붙어서 에릭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자이기 때문에 죽음에 다가가기 위해선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두번째는 그토록 원하던 머리 깎기를 그만두고 뛰쳐나온다. 이로써 모든 것을 망가트리면서까지 가고자했던 목적지마저 일탈해버린다. 직후 에릭은 퇴근하고 집으로 떠나는 운전수를 쫓아가지 않고 내버려둔다. 이 모든 제의를 마친 크로넨버그는 에릭을 "밖"을 대변하는 베노 레빈의 집으로 불러들인다. 그는 에릭을 죽이길 욕망하는 실패자며 성기가 배안으로 말려들어간 성적 불구자다. 


이런 성적 모티브는 사실 베노를 만나기 전부터 내내 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에릭은 내내 아내에게 섹스를 요구하고 여러 여자들과 만나 섹스를 벌인다. 그 결정타는 "전립선이 짝짝이입니다."라는 쌩뚱맞게 웃기는 의사의 대사다. 이 대사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웃음기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비대해져 엉망진창이 되지만 쾌락에 빠져버린 지금을 비유하는 말이 된다. 이처럼 차와 기형적인 섹스, 여유있는 자들의 냉담하고 차가운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코스모폴리스]는 [크래쉬]하고 비슷한 선상에 놓고 볼 수 있을것이다.


영화는 20분동안 실패자 베노와 성공자 에릭의 팽팽한 대화 대결을 보여준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베노의 아지트는 또다른 코스모폴리스가 된다. 하지만 형식적이나마 출입구가 있던 에릭의 리무진과 달리 이 코스모폴리스는 에릭에게도 베노에게도 출구 자체가 아예 없는, 단 둘 밖에 없는 극도로 추상화된 세계다. 파국 직전 영원한 휴지기에서 끝나는 결말은 그래서 더욱 무시무시해진다. 크로넨버그는 이 세계의 긴장은 어느 쪽이든 결판이 나지 않거나 혹은 모두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걸 확실히 못 박아두고 있다. 베노의 말을 들어보면 에릭이 죽더라도 오로지 에릭을 죽이는 것에 인생을 건 베노에게 에릭의 죽음 이후 살아갈 방향이나 목적은 없어보인다. 모두의 파멸인것이다. 새 자본엔 새 삶을.


[코스모폴리스]가 크로넨버그 커리어 최고작이 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엔 이 영화의 미학은 불친절하고 과격하다. (적어도 [데인저러스 메소드]나 [맵스 투 더 스타즈]를 봐야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를 알 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화와 꾸준하지만 날카로운 극도의 미니멀리즘, 기존 이미지를 야비하게 활용한 패틴슨의 냉담하지만 뛰어난 연기 (물론 사만사 모튼, 줄리엣 비노쉬, 폴 지아미티 등 명배우들의 앙상블 연기도 상당히 뛰어나다.)만으로도 놀랍도록 생생하게 지금 이 순간 '대안'이 없는 지옥도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고 본다. 나이가 먹을수록 크로넨버그는 오히려 더욱더 진취적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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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드 [The Brood] (1979)

2008/06/07 - [Deeper Into Movie/리뷰] - 크래쉬 [Crash] (1996)

2008/07/31 - [Deeper Into Movie/리뷰] -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2009/01/28 - [Deeper Into Movie/리뷰] - 비디오드롬 [Videodrome] (1983)

2009/03/22 - [Deeper Into Movie/리뷰] - 데드 링거 [Dead Ringers] (1988)




브루드

The Brood 
8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올리버 리드, 사만다 에가, 아트 힌들, 헨리 벡맨, 누알라 피츠제럴드
정보
공포, SF | 캐나다 | 92 분 | -


(누설이 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브루드]는 아직 크로넨버그가 공포 영화의 자장에 있던 시절, 그것도 제법 초기에 만들어진 영화다. 샴쌍둥이에 대한 기괴한 사이코드라마 걸작 [데드 링거]로 점점 호러 장르에서 벗어나는 크로넨버그지만 [브루드] 같은 걸 보면 이런 [데드 링거] 같은 영화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게 아니라 나름대로 꾸준한 흐름을 만들며 온게 눈에 보인다.


혁신적인 치료 방법으로 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정신과 의사 할 라글란 박사에겐 노라 카베스라는 환자가 있다. 노라의 남편 프랭크는 이런 치료 방법을 못마땅해하고 있다. 그 와중 노라가 아이 캔디스를 학대하는게 눈에 보이자 프랭크는 소송을 걸어 캔디스를 찾아오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프랭크의 시도는 곧 이상한 살인 사건들로 가로막히게 된다.


[브루드]의 초반부는 평범한 정신과 치료를 소재로 한 가족 드라마로 보인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영화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절대로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영화는 아니다!) 정신분석학과 여러 이론들을 깔아놓음과 동시에 아이의 상처들과 광기가 넘치는 노라를 통해 불길한 복선들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세 건의 살인을 통해 평온한 일상 아래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존재가 만드는 미스테리를 서서히 폭로하고 동시에 가족 드라마 이미지를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저예산이여서 그런지 약간 티가 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런 살인 장면들의 쇼크 효과와 서스펜스, 리듬 감각은 능수능란하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폭로되는 "진상"에 가선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브루드]는 처음과 끝의 인상이 상당히 다르다.


그 사이에 [브루드]는 크로넨버그적인 '신체의 변형'을 통한 상상력과 표현을 뽐내기도 한다. 정신병 환자의 목에 난 종양, '브루드Brood' 즉 '족속들'의 기괴한 이미지와 SF적인 설정,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상"과 노라가 보이는 행동... 크로넨버그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과 파격은 그야말로 독특하기 그지 없다. 어찌보면 [브루드]는 후기 크로넨버그보다 훨씬 크로넨버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짚어내기 쉬운 영화기도 한데, 그것은 아마도 크로넨버그의 꾸준한 철학적 관심사가 훨씬 직설적인 장르적인 장치로 드러나 있어서 그럴것이다. (그렇다고 후기 크로넨버그가 직설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다. 크로넨버그는 다른 "예술 영화" 감독들에 비해 상당히 직설적으로 말하는 바를 던지는 영화 감독이다. 아마 이런 파워는 B급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거리라.)


크로넨버그는 노라의 분노를 먹고 행동하는 "족속들"의 알고리즘을 통해 '무형'의 정신이 만드는 변형이 '유형'의 '족속들'로 드러나는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신은 (육체로 대표되는) 물질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물질 세계의 변화 역시 정신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크로넨버그에게 이 관계는 우로보로스적인 관계로 단순히 한쪽이 한쪽에게 종속된게 아니다. 그의 장기인 '신체 변형'은 그런 관계가 극에 달했을때 생기는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크로넨버그는 거기서 한발짝 더 나간다. "족속들"이 캔디스를 닮았다는 설정과 탄생 과정은 생식에 대한 터부를 마구 깨트리고 있으며 노라가 "족속들"에게 보이는 애정(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반응)과 "가족"이란 개념에 대한 집착, 그런 원동력엔 노라의 과거사가 엉켜있다는 점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해석을 해볼수 있을것 같다. 결국 노라는 학대받은 과거와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로 대표되던 '전통적인 가족'을 거부하고 족속들로 이뤄진 '새로운 가족'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 행동하는 '숙주'로 이뤄진 가족. 클라이맥스 돌입 직전 라글란이 프랭크에게 '당신이 새로운 발전의 징검다리가 되야 한다' 식으로 말한 것도 의미심장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그 집착의 결과는 과히 예쁘지 않았고 결국 라글란은 죽고 노라는 딸을 찾으려는 '가부장' 프랭크의 단죄를 받게 된다. (아내에 대한 사적인 분노에서 나온 결말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크로넨버그가 겪었던 이혼 소송을 뺴놓는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의 행복'을 옹호하는 결말은 절대 아니다. 외려 폭력의 대물림이 만들어낸 비극이 이어지며 그것을 이해하고 끊으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는 비관적인 시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노라는 괴물이긴 했지만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고 영화 내내 보여줬던 분노들은 개연성이 있었다. 결국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자의 분노가 비극을 만든 것일까.


[브루드]는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그만의 독특한 철학들이 드러나고 올리버 리드와 사만다 에거 등 배우들의 잊을수 없는 명연이 영화에 박혀 있지만 공포 장르에서 벗어나 액션과 느와르, 역사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신출귀몰하는 중후기 크로넨버그와 달리 아직 공포 영화의 자장 속에서 머무르며 자기만의 말하는 방식을 찾고자 하는 물색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하지만 B급 영화의 "돌직구"와 젠체하지 않는 지성이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이 합쳐 만들어내는 귀기는 왠만한 최신 공포 영화들을 박살내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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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Antiviral 예고편

저희 형의 지론 중 하나가 '유명 감독 2세의 영화들은 대체로 기대하면 안된다.'입니다. 본인들에게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일리 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부정할수 없이 후진 작품들도 있었기도 했고요. (미야자키 고로의 [게드 전기];;;;) 


그래서 이번에 소개하는 2세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아드님이신 브랜든 크로넨버그입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제가 숭배해마지 않는 감독님인지라 형의 지론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관심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공개된 사진 분위기들이 묘하기도 했고... 근데 주연을 맡을 배우 케일럽 랜드리 존스 이력을 살펴보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왔던 자전거 소년1;;;; 그 영화 5년밖에 안 됬는데 그 사이에 단역에서 주역으로 뛰어오르다니 좀 무섭기도 합니다. 아무튼 참 기묘한 마스크를 가진 배우입니다. 호러 배우로는 잇점이 많은 마스크라고 할까요.


유명인의 병원균을 팬들에게 파는 의료원을 배경으로 한 메디컬 호러물이라고 하는데, '흐익 이게 뭐냐' 하게 만드는 뜨악한 상상력을 극도로 밀어붙여 사유와 통찰을 하게 만드는 호러라는 점에서 초기 호러에 매진하던 아버지 크로넨버그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습니다.


다만 평은 그렇게까지 좋은건 아닌데... 뭐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초사이어인 아버지를 둔 사이어인에게 처음부터 초사이어인을 뛰어넘으라고 요구하는건 좀 무리죠;; 여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매진도 되고 관객 반응은 좋은데 국내 개봉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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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즈 코스폴리스 킹덤



요번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가게된 두 편입니다.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은 '뻘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영화도 복고적인 뻘한 유머로 가득한듯 합니다. 근데 이 사람 영화가 과거 동경에 다소 조숙한 애 같이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작정하고 과거로 돌아가 애들 눈높이에서 영화를 찍는군요. 뭔가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찍고 변화를 시도하고 싶었던걸까 생각해봅니다. 

한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는 돈 드릴로 (한국에는 화이트 노이즈와 마오2, 바디 아티스트가 소개되어 있습니다.)의 소설 원작 영화인데 크선생 영화중에서는 [크래쉬]에 가까워보이는 인상입니다. 자동차, 섹스, 여피, 총, 파충류처럼 차갑게 번들거리는 화면의 질감들... 다만 크래쉬에 비해서 시선이 좀 더 넓어지고 (크래쉬는 철저히 개인의 내면에 맞춰져있는 일작이였죠.) 묵시록적인 느낌이 강해졌습니다. 변태적이고 뻔뻔하지만 동시에 아주 폐부를 푹푹 찔러버리는 그런 일작이 나올것 같네요. 여튼 삽질을 거의 안하고 달려온 크선생 최근 커리어를 생각해보면 기대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연이 짝퉁 뱀파이어의 그 분;;; 뭐 패틴슨 군이 의외로 기량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배우 연기를 잘 뽑아내는 크로넨버그 선생님이니 잘할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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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링거 [Dead Ringer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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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 데드 링어스, 데드 링어즈


마음과 영혼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드 링거] 엘리엇와 베벌리 두 쌍둥이 형제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성공적인 산부인과 의사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클레어라는 여성이 나타나게 되고, 그들은 점점 자신의 삶이 균열되어가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파멸로 향한다.

엘리엇과 베벌리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사생활과 감정들을 서로 공유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며,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사생활은 개인의 영역이노라고 사회에서 학습한 보통 관객들에게는 도무지 친숙해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영화 끝에 도달하면, 적어도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왜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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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그 원인이 무척이나 진실하고 처절하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남매가 있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형제/자매/남매의 관계는 운명 공동체라 할 정도로 서로간의 애정과 신뢰로 얽혀 있다. "설마, 우리 형/언니/누나/오빠는 저한테 마구 욕을 퍼붓는데요."라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는 왠만한 악연으로 꼬이지 않았다면, 그건 츤츤대는 거라 봐도 무관하다.

대부분의 형제는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인격체로 분리가 된다. 나의 형과 나는 분명 형제이지만 서로의 관심 분야는 무척 다르며,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애정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의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엇과 베벌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를 바꾸는 장난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바꾸던 바꾸지 않던 그들은 그렇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들은 다른 이의 정체성을 연기하는게 직업인 클레어가 정작 자신의 존재는 확고하게 서 있다는 것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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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이에서 비극은 싹을 틔우게 된다. 즉 그들은 육체와 욕망은 나눠져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정신은 나눠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1) 그렇다고 해서 클레어가 제안한 것처럼 서로 다른 개체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늦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을 파괴하는 방법을 해결책으로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은 무척 슬프고도 섬뜩하다.

[데드 링거]는 명확한 장르로 구분가능했던 [비디오드롬]나 [플라이]와 달리 확실하게 "이 장르다!"라고 규정하기엔 미묘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하우스 풍의 메디컬 드라마이기도 하고, 약한 신체 훼손과 섬뜩한 살인도구가 등장하는 호러물이기도 하고, 우울한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다루는 미스테리 물이기도 하다. 크로넨버그는 이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들을 차갑고 클리니컬한 터치로 다룬다.

좋은 예술품이 그렇듯, [데드 링거]는 '오묘하다'. 그 오묘함은 절대로 뭐라 말로 분석할 수 없다. 보고 느껴야지 알 수 있는 오묘함이다. 사실 크로넨버그 영화들 리뷰에서 항상 언급했듯이, 크로넨버그는 나 같은 엉터리 리뷰어를 끙끙거리게 하는 고약한 사람이다. 보고 있으면 머리속에 주제와 감정들이 강렬하게 파고드는데, 정작 리뷰를 쓸때는 어떻게 써야 할지 막히는 것이다. 이런 젠장! 하지만 그렇기에 크로넨버그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그는 진정 똑똑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 수술 도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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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넨버그가 그동안 B급 영화를 만들면서 쌓아온 "에둘러 말하지 않고 관객의 뇌와 지성을 헤집어버리는, 하지만 절대 싸보이지 않는" 연출로 멍석을 깔아놓는 동안, 제레미 아이언스는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아니 멋진 수준이 아니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연기는 진정 문화 유산급에 들 만한 연기다. 엘리엇과 베벌리라는 두 존재를 하나의 존재처럼 연기했다가, 다른 면모를 보여주다가, 그 사이를 방황하다가... 남들 리뷰 표현 따라갈까봐 여기서 컷. 하지만 보면 안다.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제레미 아이언스의 원맨쇼가 중심인 연기 배정이긴 하지만, 히로인 격인 쥬느비에브 비졸드의 연기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비록 역은 작은 편이지만, 현실의 여성을 훌륭하게 살려낸 연기라 할까.

개인적으로 크로넨버그의 걸작은 아직도 [폭력의 역사]라 생각한다. 짧고 강렬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폭력의 역사]에 비해 템포가 살짝 느리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 없이 [폭력의 역사]가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그만큼 인상적이다. [데드 링어스]는 그를 진정한 의미의 거장이 되게 만들어 준 첫번째 작품이다.

*1 그런 점에서 영화 포스터의 카피는 영화의 핵심을 잘 건드린 편이다.

P.S.1 리뷰를 꼭 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쓴 리뷰다. 조금 덜 딱딱하게 쓰고 싶었지만 글쎄...
P.S.2 부제는 조이 디비전의 'Hearts and Soul'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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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드롬 [Videodrome]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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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어렸을때, TV에서 영화를 소개시켜주는 프로그램를 열심히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소개해 준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이였던게 무엇이였냐 물으면, [비디오드롬]을 들 수 있다. 뭣도 모르는 초등학교 꼬마 남자애에게 살아 숨쉬는 비디오나 얼굴에 TV를 갖다대는 장면은 쇼킹했다. 그 후 영화에 눈 뜨면서 이 영화와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일종의 금기 및 신비로운 존재로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감상한 바로는 그런 금기와 신비로움이 절대로 허투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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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인공 맥스는 평범하지만 자신만만한 인물이다. 그는 자극을 팔아 장사를 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합리화한다. 그 합리화에는 나름대로 자기 논리가 서있는데, 그가 운영하는 유선 방송은 자극적인 포르노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에게 선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이 그의 방송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스는 시청자들을 보며 그들이 자기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그들을 관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비디오드롬에 집착한 이유는 장사가 될 줄 알아서이며, 그 잔인함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비디오드롬을 접하면서 그는 자극에 빠져들어가고 결국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그의 신체와 정신은 기괴하게 변형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그의 자신감도 끔찍하게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의 자신만만함은 결국 착각이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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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의 변형은 일종의 제의 같다. 처음엔 환각을 보는 등, 정신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지만 점점 배가 비디오 데크처럼 갈라지고, 총과 손이 결합된다. 자극이 강해질 수록 그의 변형은 가속화 된다. 그리고 그 결말은 파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비디오드롬과 관련된 인물은 맥스와 비슷하게 파멸을 맞이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처럼 인류를 새로운 종으로 진화시키고자 하는 할란과 베리는 결국 맥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순수하게 중독되었던 브라이언과 닉키 역시 비디오드롬 속에서 죽는다. 결국 미디어에 중독된 인간의 결말은 파멸뿐이다. 맥스의 진화 역시 파멸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크래쉬]의 등장 인물들이 자동차 충돌에 매달리지만 진정한 소통 없는 상태에서 어정쩡한 결말을 맞듯이, 새로운 자극과 신체는 인간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이 영화가 무척 잔인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보니 잔인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소화 가능했다. 2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러서 일까? 하지만 이 영화의 잔인함은 무언가 달랐다. 불쾌하면서도 음산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애니매트로닉스 기술로 찍힌 H.R.기거 풍의 특수 효과들은 뚜렷한 부피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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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주제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의 불쾌함과 잔인함에는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다. 생체병기처럼 뒤틀린 비디오 테이프와 권총, 신체 절단 및 변형, SM와 페티쉬의 향취가 느껴지는 섹스 신... 하나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절대로 허투로 삽입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

그들이 비디오드롬에 중독된 이유도 바로 이런 의미와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내용에 면역되었다고 자부하는 맥스가 비디오드롬에 중독된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그가 보던 이전의 영상물보다 화끈해서? 절대 아니다. 비디오드롬은 자기 논리 체계와 주장이 있다. 그 논리와 주장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을 찾아보자면 논리 체계와 주장은 이상하게 종교의 그것와 많이 닮아있다. 중독된 사람들이 비디오드롬에 대해 찬양하고(ex.닉키) 그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신도들과 닮아있다. 특히 맥스가 환상 속 계시를 듣고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에서는 노골적이다. 즉 비디오드롬은 새 시대의 종교인 것이다.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라면 이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구원 따윈 없다는 것이다. 결국 공포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 이 영화의 본질은 새로운 종교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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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극단을 탐하지만, 그의 시선을 반대로 차분하고 정교하다. 비교적 초창기 작품인 이 작품은 종종 야심이 통제를 벗어나는 부분도 있지만(종종 2% 넘친 듯한 설명 컷) B급 호러의 잔혹함과 서스펜스를 주제 의식과 뒤틀린 미학을 연결시킨 그의 상상력과 야심은 충분히 대가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전혀 허세나 과장이 없이 간결하지만, 사람들을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그의 영화를 글로 풀어내기란 의외로 힘들다.)

[비디오드롬]은 상당히 불쾌하면서도 강렬한 힘을 가진 영화이다. 그 동안 강도가 쎈 영화가 나타나면서 잔혹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크로넨버그의 의도는 잔혹함의 강도가 아닌 주제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제는 거의 앞으로 다가올 묵시룩처럼 보이는데, 영화가 보여준 세상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PS1. 영화의 명장면이라면 악역이라 할 수 있는 베리가 뒤에서 죽어가고 있는 동안 맥스가 "Long Live With New Flesh!"라고 참석자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단말마를 외치고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퇴장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 날 선 듯한 연기와 장면 편집(마이크 컷이 유달리 인상 깊었다.)이 훌륭했다.
PS2. 부모님하고 같이 봤는데, 아버지는 안 좋아하셨다.
PS3. 여담인데 크라이테리언 컬렉션(*DVD 제작 회사)의 센스는 절륜에 도달해 콸콸 넘칠 지경이다. 아 그 비짜 테이프의 센스를 DVD 커버로 그대로 재현하다니! 전집으로 질려줄만한 물건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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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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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의 폭력: 폭력,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전에 리뷰를 썼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는 영화가 주는 감정적 충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인공적이다라는 느낌을 지우긴 힘들었다. 그게 단점이라는 건 아니지만(차에 하악하악 해대는 인간들에게 사실성을 바라는 것은 웃기는 일 아닌가!), 여튼 '아 이 영화 내 하트를 자연발화시키네'라고 감동하기엔 거리가 먼건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내놓은 [스파이더] (아이러니컬 하게도 제대로 본 첫 크로넨버그 영화였다.)는 굉장히 달랐다. 비록 금기된 성적 소재를 다루고 있었지만, 영화의 묘사는 놀랄 만큼 차분했으며 마지막에 안겨주는 충격도 [크래쉬]때와 다른 느낌이였다. 여전히 쉽게 받아들이기엔 거리감이 있었지만, 적어도 [크래쉬]때 처럼 인공적인 느낌은 아니였다. 랄프 파인즈가 열연한 실제로 있을법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오늘 그 여세를 몰아 본 [폭력의 역사]는 그런 변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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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의 평범한 소도시. 톰 스톨이라는 평범한 남자가 자기 식당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을 해결하게 되고, 그는 그 일로 주목받게 된다. 하지만 그 일이 전국에 보도 되면서 낯선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게 되고, 그의 평온한 일상은 무너지게 되는데...

미국 슈퍼 히어로 만화 팬들은 저 플롯에서 뭔가 느낀 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슈퍼 히어로 물이다! 한번 이야기 구성요소들을 살펴보자. 평범한 남자, 초인적인 능력, 숨겨진 정체, 그 정체가 불러오는 위기... 실제로 이 영화는 슈퍼 히어로 물로 유명한 DC 코믹스사의 그래픽 노벨을 원작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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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슈퍼 히어로 물 언급은 여기까지다. 오히려 이 영화는 슈퍼 히어로 공식을 받아들인 갱스터 영화에 가깝다. 특히 후반부에 들어서면 이야기는 대부식의 '개인과 범죄 조직간의 암투'로 나아간다. 여기까지 오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영화가 그냥 단순한 상업적인 영화인가, 궁금해질 것이다. 저 거창한 제목은 유식한 관객들을 낚기 위한 제목이였던 것일까? 이 영화는 그냥 평범한 액션 스릴러 였던 것일까?

답은 '아니다'다. 이 영화는 제목과 걸맞는 주제를 관객에게 선사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제목에 담겨 있듯이, '폭력'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상 속 폭력이 어떻게 생산되는가와 그것에 대한 감독(및 원작자)의 비판적 논평이다. 그럼 이 영화의 폭력을 한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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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폭력은 양면적이다. 분명 이 영화의 폭력은 쾌락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크로넨버그 영화의 한 부분이였던 악취미적인 요소는 없지만, 피가 꽤 튀는 편이며, 폭력을 다루는 터치 역시 사실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 폭력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럼 실패한 것인가?

이 역시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의도된 것이다. 바로 일상의 폭력의 메커니즘과 관객이 그 폭력에 열광하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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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에서 톰의 폭력을 생각해보자. 톰의 첫 폭력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정당방위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상당히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 이후 기자가 자랑스럽지 않냐고 물어보자 톰은 "아니요, 전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태도는 그 뒤로도 이어지는데, 그 이후 갱단이 몰려와 그에게 상당히 심한 정신적 폭력을 가하고 그의 폭력적 자아인 조이가 다시 깨어나지만, 그가 대처한 방법은 놀랍게도 '비폭력'이다! 후반부에 두 번 그 원칙이 깨지긴 하지만, 그것 역시 첫 폭력처럼 정당방위 수준에 머무른다. 정리하자면, 온순한 톰이던 공격적인 조이던 톰은 굉장히 철저하고 자기 통제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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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태도는 톰의 아들 잭에게도 나타난다. 잭은 영화 초반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그가 취하는 행동은 아버지 톰과 마찬가지로 비폭력이다. 그는 그 불량배들을 철저히 경멸하며(정학 받은 뒤, 아버지와 대화 중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걘 또라이에요" 아 간단 명쾌하다!),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중반부에 그 역시 그 불량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불량배들 처럼 힘 쓸때 없다 터트리자 식의 폭력이 아닌, 그동안 쌓여 왔던 감정을 분출하는 수준에서 멈춘다.

이와 반대로 학교 불량배 및 필라델피아 갱들의 폭력은 참 찌질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위신을 갉아 먹었다고 괴롭힌다. 그리고 그것을 멋지다고 생각한다. 가히 꼴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폭력을 행사한 그 결과는? 절대로 좋은 결말은 아니라는 정도만 밝혀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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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법들을 통해 영화가 면밀히 밝혀낸 과정과 결론은 이렇다. 세상엔 두가지 종류의 폭력이 있다. 톰과 잭처럼 자기 방어적인 폭력과 학교 불량배 및 필라델피아 갱 처럼 자기 과시적 및 자신의 이익을 위한 폭력.

후자의 폭력은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폭력의 무게에 짓눌려 아무런 대항도 못한다. 하지만 종종 그 폭력에 맞서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전자다. 관객이 전자의 폭력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저런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크로넨버그가 생각하는 폭력 메카니즘의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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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이런 폭력의 메카니즘을 설명하고 논평하는데 그치지 않고 폭력이 평범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침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톰의 숨겨진 자아, 조이와 그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을 통해 드러난다. 비록 톰과 조이의 차이점이 거의 없으며 조이를 통해 드러나는 폭력이 철저히 통제되어 있더라도, 톰의 모습을 진짜라고 믿고 살아왔던 가족들은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스파이더] 이전의 크로넨버그 전작이 즐겨 다루었던 변형에 따른 공포라는 점과 이어진다. 다만 직접적인 변형을 이야기 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의 변형은 지극히 정신적인 부분에 머물러, 전작 보다 보기 수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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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폭력성에 따른 성격 변화는 곧 크로넨버그 특유의 성적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초반부 섹스와 후반부 조이의 정체가 드러난 뒤 이어지는 섹스를 살펴보자. 초반부 섹스는 아내 에디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온화한 편이다.(주류 영화치고 과격한 69체위이긴 하지만) 하지만 후반부 계단에서 이뤄지는 섹스는 폭력적이고 격렬하다. 에디가 화를 내며 톰의 따귀를 때리고 계단으로 올라가자 톰은 에디를 확 잡아 땡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톰 주도의 섹스는 동물적 폭력성을 물씬 풍긴다.

이 장면은 극히 크로넨버그 답다. 전작 [크래쉬]의 섹스 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 섹스 신은 그러나, [크래쉬]보다 인간적이고 중후하다. [크래쉬]의 섹스신들이 "난 단지 섹스하는 기계에 불과해!!"라고 울부짖는 관념적인 인간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면, [폭력의 역사]의 섹스신은 관계의 폭력과 성 권력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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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 모든 것을 끝마친 톰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이 있는 식탁에 앉는다. 하지만 전 같은 단란한 평화는 없다.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긴장과 침묵만이 남아 있다. 철저히 통제된 폭력 역시 주변 인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안겨 줬을 뿐이다.

[폭력의 역사]는 새로운 크로넨버그의 걸작이다. 짧고 간결하지만, 중후하고 놀랍게도 재미있다(!!). 사이버펑크와 SF를 넘나들며 기발한 충격을 던져 주었던 크로넨버그가 그리울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를 보고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상업 스릴러 영화의 재미와 폐부를 찌르는 시각이 결합된 놀라운 영화다.

PS.한 달(2008/6/22) 묵혀놓은 글을 정리해 올린다. 쓸때는 왜 이렇게 정리가 안되던지;;;;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맞먹을 정도였다. 크로넨버그 영화는 보면 명쾌한데, 쓰면 상당히 힘들어지는 케이스다.
PS2.부제는 소닉 유스의 곡과 마크로스 극장판 제목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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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 [Crash]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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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돌한다. 고로 존재한다.


*2004년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가 아닙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하면 즉각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변태적이다. [플라이], [네이키드 런치]의 신체와 관련된 상상력, [비디오드롬], [엑시스턴즈]의 생체적인 도구들, [스파이더], [엠 버터플라이]의 금기된 성적 소재 등 그의 영화는 불온한 상상력들로 넘쳐난다. 이 중 [스파이더], [플라이]만 제대로 봤지만, 그의 영화는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류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번에 본 [크래쉬]는 그 중 '신체와 관련된 상상력'과 '금기된 성적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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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PD인 제임스 발라드와 그의 아내 캐서린은 서로의 성적 욕구를 괴상한 방식으로 푼다. 바로 외도 사실을 서로에게 알려줘 성적 만족을 얻는 것이다. 어느 날 제임스는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게 되고 거기서 의사인 헬렌을 만나게 된다. 헬렌은 그와 캐서린을 본을 소개하고, 그들은 자동차 충돌과 그에 관련된 성적 관계로 빨려들어가는데...

이 영화의 성적 관계는 다양하다. 일반적인 성생활부터 시작해서 동성애, 페티시즘, 사디즘, 마조히즘, 항문 성교, 관음증 등 인간사의 성 관계를 총 망라한 듯한 느낌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런 성적 관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부분에 불과한데, 이 영화의 궁극은 바로 자동차 충돌로 인한 성 에너지 분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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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속된 말로 말하자면 '교통사고에 하악하악'거리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왜 굳이 자동차인가? 왜 등장인물들은 자동차 충돌에 성적 분출을 느끼는가?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는 주지하다시피, 제 2의 발이며, 자신을 상징한다. 자동차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며, 그 사람이 어떤 자동차를 가졌느냐에 따라 다시 계급화된다. 서점을 가보면 다양한 차량 잡지가 쌓여있으며, 운전 면허를 얻을 수 없는 청소년들(특히 남자) 조차 차를 가지길 원한다. 이렇게 따지자면 [트랜스포머]는 차에 관한 남성(특히 미국 아해들) 판타지다. 중고차 뽑았는데 그 차가 세계를 구하는 정의의 영웅이며, 멋진 스포츠카로 변신해 잘 생긴 여자도 따라온다니! 이거야말로 남자의 로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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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그런 점들을 확장시켜 차를 제 2의 신체로 은유한다. 이 영화에서 딱 한 장면만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신체 변형 및 훼손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지만, 여전히 변태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도 그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차는 아까도 적었듯이 신체나 다름없으며 그 차들이 충돌하는 것은 신체의 충돌과 그로 파생되는 성관계나 다름 없다. 충돌의 강도는 섹스의 강도이며, 속도는 오르가즘이다.
 
등장인물들이 먹고 사는데 별 지장 없는 여피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롤링 스톤즈 노래 처럼 부유하고 한량한 이들은 '만족할 수 없는' 헌 육체를 버리고 새 육체인 차에 집착하는 것이다. 결국 크로넨버그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테크놀러지는 인간에게 낡은 육체 대신 새로운 육체를 부여했다. 그러니 새로운 육체엔 새 삶의 방식을. 이렇게 적고 보니 사이버펑크 작가의 주장하고 비슷한 것 같다.

이런 불온한 상상력 속에서 나타나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은 불쾌하다. 이 영화의 섹스 신은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뉴라인에서 제작했다.)했다는 점을 감안 할때 꽤 과격한 편이다.  신체 흔적에 대한 페티시즘과 사도-마조히즘 요소로 가득찬 그들의 섹스는 관객에게 성적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 '이 XX들 뭐야?'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의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이유도 그 점일 듯 싶다. 절대로 관객의 쾌락이나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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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제임스가 남기는 "다음번엔 될꺼야 다음번엔"라는 대사는 상당히 씁쓸한 맛을 남긴다. 돌이켜 보면 이 영화 속 성적 관계는 절대로 만족스러운 느낌이 아니였다. 어딘가 뒤틀리고 불쾌하며, 소통이란 느낌은 없는 만족과는 거리가 먼 성적 관계였다. 제임스의 이 대사는 새 육체로도 소통이 되지 않는 고독한 사람의 울부짖음이나 다름없다. 얼마나 강도를 세게 해야지 진정으로 만족에 도달 할 수 있냐라고. 이를 통해 감독은 '새로운 육체'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을 나타내고 있다.

[크래쉬]는 차가운 영화다. 크롬 위주의 색감, 강박적인 카메라 세팅 및 편집(촬영감독이 [록키 호러 픽쳐 쇼] 출신이다.), 배우들의 훌륭하지만 감동하기엔 거리가 있는 연기, 하워드 쇼어의 음울한 영화음악 등 관객의 감정 이입을 끊임 없이 배제하며 시종일관 냉랭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전반적으로 느긋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좀 낭비되었다 하는 캐릭터나 스토리도 있었다.(헬렌과 가브리엘은 할 얘기가 더 있는데 그냥 끝나버린듯한 느낌이였다.) 사실 이 영화는 드라마 구조보다 그 과정에 담겨있는 캐릭터들의 대사와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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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내리자면 남에게 추천하기에는 뭣한 영화다. 일단 상업적 재미는 거의 없다. (있다면 섹스 정도일까. 하지만 아까도 적었듯이 음란함보다 불쾌함이 압도한다.) 솔직히 영화 마지막엔 '이거 뭥미'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세우는 주제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데, 테크놀러지 시대의 성과 인간관계 대한 고찰은 지독히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야마모토 히데오의 만화 [호문쿨루스]를 괜찮게 읽었다면 보고 후회하진 않을듯 싶다. 둘다 변태적인 씁쓸함이라는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PS. 부제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따왔다.
PS2. 뉴라인 진짜 DVD 하나는 잘 만든다. 10년 됬는데도 영상의 선명도 및 색감이 상당하다. 향후 HD로 나오면 어떨지 궁금하다.
PS3. 한때 이 영화 때문에 난리 났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 쯤이면 소개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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