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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드라마 (16)
말 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

꿈결같다.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현란한 초원의 초록색과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 푸른 하늘, 돌담... 어떤 평론가는 굶주리고 추운 여행 끝에 도달한 낙원이라고 말했는데, 테크니컬러에 담긴 아일랜드 이니스프리를 보노라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여기엔 어떤 한치의 황량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 포드는 그 황홀한 전원에 도착한 사나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그는 숀 손튼이며 동시에 서부 사나이로 유명한 존 웨인이다. 서부극의 거목인 두 존은 이렇게 아일랜드로 왔다. 포드와 웨인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는 뿌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맞이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덕목으로 생각할법한 무덤덤한 익명성 따윈 없는 사람들이다. 활짝 웃으며 새로 도착한 손님에게 떠들썩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어찌보면 주책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박력에 숀은 살짝 정신이 혼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숀은 그게 마냥 싫지 않다. 이 도입부는 [말 없는 사나이]의 중요한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 없는 사나이]를 이끌고 가는건, 작지만 분명한 사람들의 흐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숀을 관광객으로 생각하지만, 숀은 이 이니스프리에 살려고 도착했다는건 명박하다. 숀은 역을 떠나 앞으로 살 집으로 간다. 이때 [말 없는 사나이]는 매우 아름다운 첫 만남 시퀀스를 준비한다. 양 떼를 끌고 가다가 시선을 돌리는 마치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는 평이하면서도 독특한 흐름을 구체화해내고 있다. 숀이 메리를 바라보자 샐쭉한 인상의 메리가 고개를 휙 돌린다. 둘은 이내 제 갈길을 가지만 숀의 샷과 메리의 샷이 만들어내는 몽타주는 신비로우면서도 유쾌한 활기를 띈다. 

숀은 수다스러운 아일랜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메리와 그 오빠인 레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숀 가문의 옛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레드는 숀이 들어와 사는 상황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사사건건 숀에게 시비를 걸며, 아일랜드식으로 일대 일 격투를 벌이자고 한다. 한편 메리는 결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져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긴다. 이를 보듯이 알 수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일랜드의 느긋한 마음씨를 대변한다면, 메리와 레드는 미국인인 숀이 알아야 하는 아일랜드의 풍습이다. 메리와 숀의 결합은 이 아일랜드의 풍습을 거쳐야 이뤄질 수 있다.

[말 없는 사나이]는 큰 서사 없이 일련의 유쾌한 소동극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숀과 메리의 결합이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포드는 그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다. 포드는 서부극의 전제를 가져와 아일랜드라는 지역에서 익살스럽게 패러디한다. 총잡이의 대결은, 마을 축제와 술이 끼얹어진 주먹다짐으로 넘어가고 근심이 가득찬 마을 사람들은 이제 신이 나서 주먹다짐을 지켜본다. 수줍지만 이뤄질수 없었던 서부 사나이와 마을 처녀의 연정은 휘몰아치는 바람 안에서 격정적인 몸언어로 표출된다. 바람이 불어닥치는 숀의 집에서 메리과 숀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말 없는 사나이]의 격한 바람과도 같은 영화적 매력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플롯이 없는 [말 없는 사나이]를 일관성 있게 묶는 건 군중의 힘이다. 킹 비더의 [군중]이 그랬듯이, [말 없는 사나이]는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의 힘이 매력적인 영화다.  하지만 [군중]에 등장하는 군중이 도시의 익명적인 흐름을 담아냈다면, [말 없는 사나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시골 커뮤니티의 매력이 크다. 이 커뮤니티는 뿌리로 돌아온 미국인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가 낯설어하는 풍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 미국인이 어떻게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건을 만드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본다. 이 미국 영화의 절정을 이끌고 가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쇼트가 장소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뻔뻔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활기다. 이 부분에 이르면 [말 없는 사나이]는 버스터 키튼과 같은 무성 활극 영화와 같은 매력을 태연히 과시한다.

[말 없는 사나이]가 흥미로운 점은, 그런 소탈하면서도 낙천적인 풍습과 이상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히로인인 메리가 그렇다. 얼핏보면 서사의 흐름에 따라 숀이라던가 레드의 가부장적 체제에 순종적으로 편입될 것 같은 메리는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메리는 자신의 재산을 숀의 집으로 가져오는걸 상당히 중요히 여긴다. 그리고 메리의 고집을 숀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격하게 화를 낸다. 메리에게 그 풍습은 자신의 존재 의의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숀은 메리와 이어지기 위해서는 순종시키는게 아니라, 이해와 설득을 거쳐야 한다. 아일랜드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으로써는 추측의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커뮤니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 관심을 가졌던 포드다운 전개라 할 수 있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서 페미니즘적인 묘사를 읽어낸 평론가도 있다는 것도 첨언하고 싶다.)

물론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드는 은근슬쩍 서부극의 어둠을 영화 속에 이끌어온다. 숀이 레드랑 싸우길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할때 포드는 단발적인 플래시백으로, 숀이 왜 아일랜드로 와야만 했는지 설명한다. 미국에 오기 전 권투 선수로 활동하던 숀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룰이 있는 스포츠였지만, 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폭력에 이골이 난 사나이며, 폭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를 느낀다. 숀의 과거는 존 포드의 내심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포드는 숀을 아일랜드로 데려와 백인 사회에서도 천민 취급 받았던 아일랜드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긍정성으로 치유한다. 레드와 싸움을 통해 숀은 자신의 주먹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커뮤니티에 포함될 수 있다는걸 확인한다.

[말 없는 사나이]는 황야 너머로 사라진 서부 사나이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다. 존 포드는 숀을 거기다 내려다 놓고 더 이상 총질은 필요없고 이젠 정말 행복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이니스프리 커뮤니티가 말이 되는가를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냉소를 신경쓰지 않는다. 말이 되던 말던,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고 때론 납득이 잘 안 될지도 몰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선량함을 포드는 믿는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숀과 메리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의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길 기원하게 된다. 그동안 서부극을 통해 울적하게 서부 총잡이의 소멸을 얘기했던 존 포드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는 정말 기적과도 같다. 그 점에서 [말 없는 사나이]는 포드 영화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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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Elle] (2016)

(강력한 누설이 있습니다.)

아마 크레딧이 지나가자마자 얼굴이 벌개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파울 페르후번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당당하게 강간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소리를 외화면에서 흩뿌린다. 엉뚱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샷은 강간 장면이 아닌 검은 고양이의 정면 응시 샷이다. 때문에 파울 페르후번이 [엘르]에서 취한 시점이 고양이의 시점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그 착각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두번째 샷에서 이미 강간은 다 끝난 상태다. 하지만 피해자인 미셸은 울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일어나 청소하고 욕조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단 두-세번째 샷을 통해 파울 페르후번과 [엘르]는 장르 관습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이미 네덜란드 영화계와 할리우드를 자기 방식으로 조교시킨 음탕한 네덜란드 애처가이자 정숙하고 침착한 사디스트인 파울 페르후번은 이번엔 뻔뻔하게도 이자벨 위페르를 내세워 프랑스 영화계를 조교하려고 한다. 

강간 사건이 잠깐 물러난 자리에 이어지는 것은 미셸의 일상이다. 미셸의 일상은 (이자벨 위페르가 [다가오는 것들]에서 편안한 연기해냈던) 프랑스 중년 지식인 캐릭터가 누리던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기적이 일어날 자리엔 강간이 일어났다. 자연히 [엘르]는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일탈한다. 페르후번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깔깔 비웃으면서 발기발기 찢는다.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랑 살겠다며 찌질하게 구는 징징거리는 아들, 무례하기 그지 없는 아들의 여친, 안 팔리는 주제에 폭력만 휘두르다 이혼당한 지식인 전 남편, 섹스에 환장한 어머니의 젊은 남친, 낙하산이라고 미셸을 경멸하는 게임 회사 직원... 미셸의 일상은 루이스 부뉴엘과 마르코 페라리의 경박함과 미카엘 하네케의 서늘함을 품고 사정없이 해체된다. 미셸이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모아 만찬을 하는 시퀀스에서 날아다니는 위선과 경박함, 부글거리는 성적 에너지는 페르후번이 부뉴엘이 시전했던 풍요로운 부르주아의 식탁을 작살내는 쇼트들을 존경하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미셸이 게임 회사 사장이라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출판게에서 일하다가 낙하산으로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뒷설정은 미셸의 위치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미셸은 전통 지식인 사회에서도 떨어져 있고, 신세대가 주축이 된 게임 업계에서도 한발짝 떨어져있는 아웃사이더다. 전통 지식인 사회와 이혼했지만, 발 붙이고 싶어하는 게임업계와도 사이가 냉랭한 상태에서 강간이 끼어들게 된다. 슬슬 미셸의 캐릭터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미셸은 강간 사건을 '게임'으로 보고 있다. 미셸은 게임의 NPC를 뛰어넘어 플레이어가 된 뒤, 최종적으로 '프로듀서'가 되고자 한다. 디자이너를 총괄하는 프로듀서.

이때 미셸이 개발하는 게임은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다. 간과하기 쉽지만, 페르후번은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는 고블린이 주인공인 안티 히어로 잠입 게임이다. 이 게임의 비중은 의외로 크다.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건 아니지만 페르후번은 이 게임의 개발 과정과 그에 관련된 소동들을 서브 플롯으로 삽입한다. 심지어 미셸은 게임 모델링을 활용해 만든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은) 포르노 영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강간 사건을 겪은 미셸에게는 이런 모욕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영상을 만든 엔지니어는 미셸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지만, 미셸은 오히려 그 성적 대상화를 역으로 반격한다. 미셸은 그 영상을 보고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는 차분하고 남자의 팬티를 벗겨 성기를 유심하게 관찰한 후 냉정하게 모욕을 준다. 페르후번은 이 서브플롯을 통해 미셸이 강간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강간하는 고블린에 가깝다는걸 명백히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진상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게임의 결말에서 주인공인 복제 고블린은 무도덕한 본체 창조주 오크 마법사를 소멸시키고 본체 스틱스의 정체성을 차지하게 된다. 정체성의 문제라던가 아버지 살해라는 모티프라는 점에서 이 게임의 플롯은 미셸의 과거사나 주변 환경과 묘하게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복제'인 미셸은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가? 미셸이 죽이고 싶어하는 원본은, 경건하고 온화한 중산층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자비한 살인마로 돌변한 아버지다. 미셸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내심 불편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강간 사건은 미셸이 안고 있는 불편함을 수면 위로 올려보낸 셈이다.

[엘르]가 이상한 안티 히어로물이라 할 수 있다면, 중후반부 강간범의 정체가 드러난 뒤 미셸이 취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미셸 앞집에 사는 강간범 파트리크는 묘하게 미셸의 아버지와 닮아있다. 멀쩡한 중산층 부부의 가장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은 미셸 그 이상으로 비틀린 범죄자다. 미셸은 파트리크의 비틀린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닫아달라고 파트리크에게 부탁해 같이 정리하는 미셸의 시퀀스는 사실상 둘의 섹스 시퀀스나 다름없다. 이 장면이 불편하다면 초반부의 강간 시퀀스의 뉘앙스와 행위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미 미셸을 욕망에 충실하고 재주가 많은 고블린이라고 정의내렸다. 고블린은 인간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는 존재다. ("하하하. 당최 알아먹지 못하는구나? 살거나 죽거나... 이제는 더이상 내게 명령할 수 없어.") 무도덕한 지식인에게서 태어난 - [엘르]에서 탄생은 축복이 아니라, 한낱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조시의 흑인 아이는 정숙한 여성상에 대한 빅 뻐큐에 프랑스 백인 지식인 사회가 두려워하는 악몽이며, 또다른 고블린이다. - 고블린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인정하게 되고, 중산층의 위선을 차분하게 까발린다. 미셸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미셸의 입장을 따라갈수 있다면 그건 고블린의 내면이 어떻게 설계되어있는지 알아차린 이자벨 위페르의 공이 크다.

영화 후반부, 미셸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병으로 잃는다. 하지만 어머니 유골은 소동으로 제대로 뿌려지지 못한 채 허겁지겁 막을 내리고, 아버지 시체 앞에서 미셸은 대놓고 비웃고 경멸한다. 미셸에게 부모의 죽음은 차라리 본체로부터 해방에 가깝다. 미셸은 무책임한 창조주를 직접 소멸시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소멸을 애도하지 않고 경멸하는 것으로 복수를 완수한다. 이 순간 미셸이 책임지고 있는 게임이 동시에 완성되는건 당연하다. 미셸은 게임 완성 축하 파티에서 작가 남편과 게임 업계의 뚜쟁이가 된 뒤, 친구 안느에게 안느의 남편과 바람 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안티 히어로 고블린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 잔칫날의 배경 음악으로 '삶에 대한 욕망'과 '고립시키자'가 나오는 건 고블린과 페르후번의 사악한 유머일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강간범 파트리크다. 파티에서 나온 미셸은 파트리크를 불러내 헤어지자고 선언한다.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 선언을 통해 폭압적인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강간하려고 발악하려는 파트리크를 똑바로 응시하는 미셸의 얼굴 샷은 그 점에서 로라 멀비가 지적했던 시선의 권력 관계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다. 미셸은 파트리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음으로써 파트리크를 부끄럽게 만든다. 미셸은 부모를 죽일수는 없었지만, 강간범 파트리크의 존재 이유를 빼앗을수 있었다. ("날 봐라! 스틱스! 내가 네 운명을 선택하는 것을 보라고.") 파트리크는 발악하다가 자멸하고 곧 이어 상황을 모르는 빈센트의 손에 살해된다.

[엘르]의 클라이맥스는 철저한 아이러니다. 어느 누구도 파트리크와 미셸이 이상한 관계를 맺었다는걸 모른다. 빈센트의 살인은 정당방위로 경찰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아내인 레베카 역시 범죄자 파트리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초반부 남성들에게 모욕당한 미셸은 마지막에 게임의 프로듀서로써 성공한다. 그 '게임'은 진짜 '게임'이기도 하고, 강간범과의 파워 게임이기도 한다. 미셸은 파트리크를 죽이면서 법을 비롯한 남성의 장치를 빌리지 않고 빛으로 위장한 "어둠의 주인"이 된다. 미셸이 키우다가 언급 없이 사라진 검은 고양이는 그 게임으로 인도하기 위한 환상이었던 것일까?

이 아이러니로 이뤄진 안티 히어로 극을 실제 여성들이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강간의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미셸의 행동은 도무지 현실로 옮길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어떤 여성들에게 [엘르]의 미셀은 결국 남성이 ([엘르]의 원작, 각본, 감독 모두 남성이다.) 만들어낸 기벽증으로 가득한 환상 (까놓고 말해 히토미 꺼라 식의)으로 다가올 것이다. 페르후번은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상된 비판에 대답한다. 미셸은 불명예스럽게 이사가는 레베카를 위로한다. 이때 레베카는 풀이 죽은듯 보여도 이겨낼 기운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안나랑 미셸이 얘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미셸의 인생은 어둠 없이 안나랑 즐거울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당신은 이 고블린이 맞이한 결말에 납득할 수 있는가? 이 연대가 정말로 진실하게 느껴지는가? [엘르]는 강력한 에너지로 밀어붙인 뒤, 관객을 회색 영역에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파울 페르후번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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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러버스 앤 베어 [Two Lovers and a Bear] (2016)

킴 누옌의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도입부는 광활한 설원이다. 두 남녀가 제트스키를 타면서 나아가는 장면에서 설원이 가져다 주는 원초적인 쾌감이 느껴진다. 그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얼음을 뚫어 낚시를 한다. 아 이 도입부는, [투 러버스 앤 베어]의 감수성이 얼음에 기반해 있으며 내용과 구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암시하고 있다. '부모의 구속력은 지대하다'는 대사는 그들이 부모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단단한 얼음을 뚫는 행위는 영화 내내 이어질 두 사람의 사투를 예감케 한다.

그걸 증명하듯이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차가운 영화적 공기 속에서 끊임없는 하강 곡선을 그리는 영화다. 킴 누옌은 벡터의 충돌을 통해 전제를 세운다. 주인공 로만은 남쪽에서 북쪽 알래스카로 도주해왔다. 로만에게 남쪽은 부모로 대표되는 고통이며, 오직 설원에서만 자신의 고통을 삭일 수 있다. 하지만 로만의 연인인 루시는 알래스카는 끊임없는 고통이며 남쪽 이야말로 도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벡터는 어긋나 있으며, 이는 영화 내내 끊임없는 충돌과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섹스는 도무지 '들어가지지' 않고, 로만은 술에 취해 자신을 집 안에 유폐 시킨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은 번번히 좌절되며,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사랑은 어쩔수 없는 하강 곡선을 그린다. 이 고전적인 전제는 [투 러버스 앤 베어]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투 러버스 앤 베어]가 이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전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비 전형적인 구석이 있다.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차가운 영화적 공기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두 사람의 사투를 서서히 추상화 한다. 두 연인과 곰에 대한 사변조의 농담은 그렇다 쳐도, 로만과 루시의 눈에만 보이는 불쑥 내습하는 루시 아버지는 영화의 멜로드라마에 또다른 층위를 형성한다. 킴 누옌은 멜로 드라마를 유령, 판타지적 존재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합하는 누옌의 연출은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전후 현대 영화의 기조와 맞닿아 있다. 

어느 지점에서는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상처받은 연인들의 사랑 얘기가 아닌, 전장에서 살아남은 소년병들의 트라우마를 형상화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로만과 루시는 과거에 부모와 지독한 전쟁을 치뤘으며,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상처는 공유되지 않으며, 사랑으로 버티는 것도 두 연인에게는 버겁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두 연인의 선택은 자살에 가까운 무모한 여정이다.

킴 누옌은 지극히 추상적인 액션이나 무드를 지속시키면서 심리적 불안을 구축한 뒤, 일거에 해소하는 방식으로 쾌감을 구축하기도 한다. 로만이 얼음 틈에 끼어서 탈출하는 신을 보자. 이 신은 서사와 무관하게 길게 찍혀 있기에, 해소되지 않은 불안함을 안고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로만이 힘겹게 탈출에 성공했을 때 누옌은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Seven Nation Army'를 설원 화면과 함께 틀어주면서 그 쾌감을 관객과 공유케 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벙커 폭파 장면도 그렇다. 혹한에 유일한 피난처를 부수고 나간다는, 상당히 개연성 없고 답답한 장면이지만, 막상 영화 속에서는 루시의 공포와 로만의 결단에 압도되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물론 이는 데인 드한과 타티아나 마슬라니라는 훌륭한 두 배우의 호연 때문에 가능한 마법이기도 한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모든 장면들이 킴 누옌의 의도대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두 연인과 곰에 대한 농담은 문학적 상징과 영상 언어와 충돌해 어색하며, 곰이 등장해 로만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생뚱 맞은 유머에도 불구하고 전개하고 잘 엮여 있지 않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단점은 관념적인 주제 의식이 로맨스가 디디고 있는 현실과 충돌하는 부분에 있다. 누옌은 지속적으로 멜로 드라마의 통속성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지만, 아직 그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종종 통제를 잃고 관념적으로 흘러가더라도 하더라도 [투 러버스 앤 베어]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귀중한 가치가 있다. 캐릭터의 어리석음 마저 받아들이는 성숙함이다. 킴 누옌은 전작 [르벨]처럼 매정한 세상에 상처받고 미숙한 미성년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특히 잊기 힘든 엔딩은 더욱 그렇다. 로만과 루시는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는 커플이었고,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킴 누옌은 저 멀리 날아가는 헬리콥터와 두 연인이 잠든 얼음 덩어리 쇼트를 통해 로만과 루시의 지난한 사랑과 투쟁이 의미 없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길 기원한다. 적어도 이 순간 누옌이 지닌 간절함과 아름다움은 그 누구보다도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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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1943)

얼마 전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회고전에서 만난 영화들은, 그간 이 감독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호프만 이야기]를 보고 리뷰를 쓰면서 막연히 지적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영화들은 고전기 영화들의 간결한 우아함과 더불어 영화라는 매체의 즉물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즉물성의 허망함을 역사 인식과 철학의 경지로 이끌어올린 걸작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미룬채 조각난 샷들을 이어 호기심을 이어간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훈련을 하다가 전쟁 훈련을 위한 포로를 잡기 위해 터키탕을 찾아간다. 거기엔 늙은 군인 윈 캔디가 있다. 어느때처럼 꼰대질을 하다가 졸고 있는 윈 캔디는 현실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훈련을 시작하려는 젊은 장교 스피더에게 예의범절을 훈계하다가 망신을 당한다.

이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화사에서 손꼽힐 우아하고 아름다운 플래시백 도입부를 보여준다. 스피더에게 망신을 당하는 늙은 윈 캔디를 뒤로 한 채 카메라는 쭉 앞으로 트랙 인 하다가 냉탕에서 수영하다가 맵시있게 나온 젊은 윈 캔디를 보여준다. 볼품없고 추레한 육신이 카메라의 전진으로 이뤄지는 영화의 마술을 통해 젊은 육신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영화적으로 젊어졌다가 늙어가는 과정은 볼품없어지는 윈 캔디의 여정과 발맞춤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새로 태어난 젊은 윈 캔디가 도입부의 윈 캔디가 되기까지 단 한번도 현재으로 돌아가지 않고, 플래시백의 이야기를 따라가길 고집한다. 따라서 우리는 늙은 윈 캔디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가 '늙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초적인 정보만 쥔 상태에서 윈 캔디의 캐릭터를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꼰대 캐리커처를 확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늙고 별볼일 없는 꼰대라는 첫인상과 달리 도입부 이후 젊은 윈 캔디는 그야말로 캡틴 잉글랜드나 다름없다. 어쩜 저렇게 티끌없이 해맑고 순수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젊은 윈 캔디는 기사도와 이상을 숭상하는 혈기방장한 군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화의 초반부는 수정주의적 관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구식 모험담이다. 인물들의 가치관은 명확하고, 실제 현실의 논리는 흑백에 따라 단순하게 재단된다.

스타일 면에서도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도입부의 비교적 절제된 톤을 벗어던진 극도로 인공적인 세트와 미술로 뛰어든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시각적 성찬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양복들,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인물들, 숨막힐 정도로 프레임을 수놓는 소도구들과 세트... 심지어 영화가 점점 냉정해질때에도 카메라는 영국 전원의 아름다움과 미로 같은 대저택의 웅장함을 빼어나게 뽑아낸다. 초기 컬러 영화 특유의 독특한 원색 역시 이런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관객들에게도 이런 묘사는 '비현실적'이었을것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묘사하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은 현실의 구질구질함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는 인형놀이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공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윈 캔디가 대영제국을 모욕한 독일 신문기사를 읽고 결투를 벌이기 위해 독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두 인물을 보여준다. 테오 크레치마르 슐도프와 이디스 헌터는 영화 내 윈 캔디의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다. 대결 상대로 나온 슐도프는 영국과 반대되는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사상 영국의 라이벌로 그려지는 대상은 프랑스일텐데, 왜 이 영화는 프랑스인이 아닌 독일인을 영국인의 라이벌로 내세웠을까? 답은 영화 외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는 막바지긴 해도,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시절이었다. 이 영화는 전시 선전 영화로 기획되었다. 슐도프는 그 점에서 전시 유럽 대륙을 체화한 캐릭터다.

하지만 전시 선전 영화의 관점에서 봐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는 좀 이상하다. 파웰과의 다른 전시 선전 영화인 [침입자들]이나 [콘트라밴드]와 달리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의 슐도프는 응징이나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럴수도 없는게, 윈 캔디와 슐도프가 처음 만난 시기는 양국 관계가 험악하지 않았던 1차 세계 대전 이전 얘기다. 아직 전쟁이 덜 크고 끔찍했던 시절, 조금이나마 19세기 신사도 문화가 남아있던 시절. 이쯤되면 알 수 있겠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국과 유럽이라는 테마를 좀 더 큰 캔버스로 옮겨서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잡해져만 가는 영국과 유럽의 관계를 윈 캔디가 물려받은 미로 같은 저택처럼 확장해간다.

우아한 신사의 결투로 포장하긴 했지만 윈 캔디와 슐도프의 관계는 불알친구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제의 격한 결투는 멋진 상처를 남겨주고 신문에서의 국가 간 설전은 우정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이디스 역시 그런 징검다리 중 하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삼각관계로 이어질수 있는 관계를 신사적인 양보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윈 캔디는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접어버리고, 슐도프와 헌터의 행복을 빌어주며 떠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초반부의 모든 사건들을 명쾌하고 긍정적인 논리로 정리하면서, 영화의 순진함과 구식 모험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공적인 세트를 강조한다. 

역설적으로 도입부에 제시된 순진한 아름다움은 영화가 이어질수록 조금씩 빛을 바래간다. 이 영화가 대영제국주의의 로맨틱한 회상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의혹을 대부분 지울수 있다면, 윈 캔디와 슐도프가 겪는 인생여정을 통해 초반부를 재구성할 여지와 동시에 안쓰러움을 전하기 때문이다. 괜한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상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의 행복을 위해 쉽게 이디스를 포기했던 윈 캔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댓가를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기사들의 소꿉장난과 같았던 군인을 현실의 위치에 되돌려놓고, 새로이 등장한 신병기들은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 신대륙 미국 장교들은 무례하기 그지없고 언제라도 쉽게 화해할수만 있었던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깊은 골이 패지기 시작한다. 현실은 처음부터 조금씩 복잡했지만 윈 캔디는 파악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복잡해진다.

윈 캔디가 더욱더 비극적인 어릿광대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실과 자식 세대의 과오를 지켜보며 성장하는 슐도프랑 달리 그 현실을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슐도프가 반가워하는 윈 캔디를 외면하는 반응 샷은 그 점에서 가슴은 찢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대영제국의 환상을 반영한 초반부가 순진맹충하다는걸 분명하게 인식하지만, 그 순진맹충함 속에서 쌓인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슐도프의 처량한 모습은 결국 거대한 역사에 속해있지만 그 엄혹함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개인의 슬픔을 보여준다. 포로 수용소에서 풀러나 낙관론에 젖어있는 윈 캔디와 친구들 앞에서 보이는 슐도프의 무표정한 눈빛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의 현실 인식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독일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제공한다.

이런 변화는 데보라 카가 멋지게 연기해낸 세 사람의 '그녀'하고도 관련이 있다. 두 남자 주인공과 달리, 데보라 카의 '그녀'는 환상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개성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다. 윈 캔디의 '그녀'들은 매번 현실에 발맞춰 나타나지만, 윈 캔디에게 '그녀'들은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윈 캔디는 이디스를 사랑하지만, 젊은날 우정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고 이디스의 환영 바바라를 찾아내 사랑했지만 다시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럼에도 윈 캔디는 이 세상에 없는 이디스 근처를 맴돈다. 정작 두 이디스의 환영들은 분명한 직업과 자기 삶을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특히 조니는 윈 캔디를 현실로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해낸다.) 윈 캔디는 환영에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바쳐버렸다.

친구를 외면했던 슐도프가 영국으로 넘어와 경찰들 앞에서 덤덤하게 인생역전을 설명하는 롱테이크 샷은 그 점에서 슬프다. 슐도프는 어려운 독일의 상황에서 자신이 믿었던 가치가 환상이라는걸 깨달았고, 현실에 맞춰 발빠르게 타락해버린 아들들에게서 떠나야만 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화려함을 벗겨낸 경찰서에다 상처입은 유럽의 영혼을 앉혀놓고 그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탄식한다. 우리 유럽에겐 (비록 환상이었더라도) 고결한 나날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고결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런 쓸쓸한 인식에 기반한 탄식은 파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프레스버거의 입김이 강하기도 하다. 프레스버거는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윈스턴 처칠이 바랄법한 전시 선전용 메시지로는 부적합해져버린다. 이 영화가 독려하는 나치에 대한 항전 의지는 선악 논리보다는 인간의 삶 그 자체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점에서 전쟁 이후의 복잡해질 도덕과 미덕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외부에서 나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된 슐도프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명료한 가치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다. 슐도프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순 없어도, 남아있는 삶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있다고 믿는다. 그걸 말하려고 독일을 떠나 윈 캔디 앞에 나타난 것이다.

군대에서 밀려난 윈 캔디는 처음엔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계속 현역으로 있을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조니와 슐도프의 독려로 순순히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긴 하지만, 그 역시 완고한 윈 캔디의 고집에 일련의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윈 캔디를 동정하거나, 적어도 이해할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군인인 스피더는 그 점에서 윈 캔디의 거울상 같은 캐릭터다. 고집 세고 어른 말은 잘 안 들으려는 모습은 초반부 윈 캔디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 모습에서 윈 캔디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이 때 윈 캔디의 시점 샷으로 등장하는 물 위에 뜬 낙엽은, 가히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을 연상케하는 심원한 통찰과 서정미를 지니고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를 설명하는 또다른 요소인 영국 전원에 대한 시적 예찬이 (윈 캔디와 바바라의 별장과 슐도프의 포로 수용소 시퀀스에서도 간간히 드러난다), 응축된 쇼트라고 할 수 있다. 저물어가는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지긴 했어도,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한때 윈 캔디와 바바라가 살았던 집이 부셔졌더라도, 우리는 살아갈거라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말하며 영화를 끝낸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불멸의 영화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면,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들이 어떻게 꼰대가 되었는가를 보여준 뒤 그것이 인간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기 때문이다. 실로 영국 영화가 자랑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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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 컷 [Short Cuts] (1993)

2017/04/19 - [Deeper Into Movie/리뷰] -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 Mrs. Miller] (1971)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의 시작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살충제 헬리콥터다. 중요한 점은 이 헬리콥터에 대한 정보가 보이스 오버 형식을 통해 인물들이 보는 뉴스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도입부의 의도는 명백하다. 알트만은 불특정 다수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파편화된 사건들을 조합해서 그릴 예정이다. 몇몇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만나겠지만 몇몇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만나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LA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 알트만은 이렇게 분절된 개별 캐릭터들을 하나의 영화로 묶는 과정을 헬리콥터-살충제-뉴스를 거쳐 도식화하고 암시한다.

조각나고 분절된 상황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엮어지는 [숏 컷]의 서사 구조 자체는 알트만 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알트만은 이미 [내시빌]에서 이 도식을 완성시킨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소 느슨하게 구성되어있던 [내시빌]과 달리, [숏 컷]은 훨씬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레이먼드 카버가 쓴 단편 소설들을 엮어낸 [숏 컷]의 캐릭터들과 상황들은 하나하나가 인상적이기에 도입부의 교통정리가 끝나면 그들이 누군지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웨이트리스가 일으킨 교통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 돌아다니며 불륜을 저지르는 경찰, 시체를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낚시에 집중하는 사내들, 어릿광대 일을 하는 여자....

레이먼드 카버가 제공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질척하기 그지 없다. 원작 소설도 그렇지만, 카버의 세계는 침이나 땀으로 범벅이 된 원초적인 본능이 구질구질한 감정들과 계급 양태랑 얽혀있는 리얼리즘의 세계다. 시체가 잠긴 강에서 남편이 건져올린 생선을 먹었다가 역겨워하는 아내, 술과 담배로 쩌든 집에 앉아 기계적인 폰섹스를 나누는 여자, 아들을 잃은 슬픔을 생일 케이크를 먹으면서 해결하는 부부... 카버의 세계에서 욕망과 감정은 날것으로 내던져지고, 인물들은 그 폭풍 속에서 끙끙 머리를 앓으며 욕설을 내뱉는다. 알트만은 그 영역에 발을 내딯으며 생생하게 그 폭풍을 잡아낸다. 그 점에서 [숏 컷]은 존 카사베티스의 세계에 가까운 알트만 영화일것이다. 비슷한 알트만 군상극이였던 [내시빌]이 기본적으로 학자의 시점을 견지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관객은 알지만, 작중 인물들은 모르는 정보의 차이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개별 시퀀스 내에서도 꾸준히 등장인물들을 마주치게 하고 심지어 중대한 사건까지 일으키지만, 그 인과관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웨이트리스 도린은 자신이 친 아이가 죽어버린걸 끝내 알지 못한채 괜찮을거라고 믿으며, 메리안과 랄프가 꼴불견으로 싸웠던 것을 클레어와 스튜어트는 알지 못한다. 이렇듯 [숏 컷]은 인물들은 단선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을 관객이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면서 감정적인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긴장은 안타까움이기도 하고, 블랙 코미디적 조소이기도 하고 허무함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는 얄밉고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숏 컷]은 독립적이었던 카버의 단편들이 하나의 세계에서 서로 얽히고 섥히게 한 뒤, 조감하면서 생기는 거리감이 있다. 주인공들의 고민과 감정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영화가 취하고 있는 헬리콥터의 시점에서는 일부에 불과하다. 단일 구조에서는 진지했을 감정들과 행동이 각각의 상이한 구조가 얽히고 파편화되면서 전체적인 인상은 가벼워지는 것이다. 알트만의 이런 태도는 상이한 음표들을 모아서 통일된 곡으로 만들어내는 작곡 과정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실제로 [내시빌]이 그렇듯이 [숏 컷] 역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샷을 집어넣어 영화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숏 컷]의 마지막은 카버의 리얼리즘을 흔드는듯 하면서, 동시에 카버가 추구했던 인생의 깨달음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지진과 살해는 뜬금없고 당황스럽다. 노골적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표방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그러나 상당히 일관된 이해의 결과물이다. 먼저 지진은 도입부에 등장한 살충제와 수미상관적 댓구를 이루는 도구다. 살충제가 모기를 죽이는 유독한 물질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시점을 제시했다면 지진은 그 시점의 존재감과 죽음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키며 파편화되어있던 사건들을 일시적으로 하나로 묶는다. 지진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며, 동시에 살충제의 유독성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지진은 궁극적으로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알트만은 끝없이 지리하게 이어질것만 같은 개별 일상의 리듬에 격렬한 충격을 가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아이러니를 끌어낸다. 극단적인 욕망이 살해라는 행위로 폭발하지만, 그 극단 역시 자연스럽게 일상의 리듬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 심지어 알트만은 짜증나서 유기했던 개를 다시 찾아와 데려오는 서브플롯을 집어넣으면서 그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이 아이러니는 도덕적으로 쉽게 판별될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숏 컷]은 군상극 이외의 알트만적 인장인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숏 컷]은 그런 아이러니에서 긍정과 부정 어느 쪽으로 떨어지지 않는 독특한 영화다. [내시빌]에서 있었던 얄밉고 냉소적인 태도는 여전하지만, 알트만은 카버가 담아냈던 '인생에서 일어나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기이한 깨달음'이라는 테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성공했다. 이 영화의 무지막지한 길이는 그 파편화된 긍정과 부정을 하나의 영화로써 조각모음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숏 컷]은 후기 알트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영화이며, 단편의 흐름을 공시성을 가지고 조직했다는 점에서 서사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밀어붙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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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친구 [L'amico di famiglia / The Family Friend] (2006)

파올로 소렌티노의 [가족의 친구]는 제목부터 하나의 은유다.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 분', '높으신 그 분', '어른의 사정' 같은 뉘앙스를 띄고 있는 관용구라고 할까. 소렌티노는 제목부터 관용구를 말하는 발화자와의 관용구 간의 묘한 관계를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영화는 어떤 묘한 관계를 말하려고 하는가? 시놉시스와 제목을 읽어본 사람이면, 이게 뭘 은유하고 있는지를 쉽게 알아차릴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도입부에서 그 은유가 뭔지 명백하게 드러내고 시작한다. 머리만 파묻힌 수녀와 수녀를 지켜보고 있는 두 남자. 익숙한 풍경이지 않는가. [가족의 친구]는 마피아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무엇을 은유하는지 안다고 해도, 도입부를 통해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를 추정하기 힘든 편이다. 소렌티노는 도입부에서 시퀀스와 시퀀스 간의 관계를 느슨하게 해체해놓고 퍼즐처럼 서서히 짜맞추는 형식의 서사 전개를 쓴다. 머리만 파묻힌 수녀-방에 앉아있는 늙은 남자-버스에서 내리는 소녀-말을 지켜보는 카우보이 차림의 남자-미녀 대회에 나온 여자-배구하는 여자들 이런 식으로 툭툭 튀어나와 기묘한 미스터리를 만든다. 물론 아예 컷 하나 하나를 잘근잘근 잘라내 전시하던 [리바이어던] 같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는 아니지만, 소렌티노가 컷을 구성하는 방식은 이상할 정도로 느슨하다. 우리는 배구하는 여자들이 대체 무슨 관계로 오프닝에 등장하는지 한창 지나야 알수 있다.

그 개별 시퀀스의 캐릭터가 다른 시퀀스에 등장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서사와 관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도입부의 시퀀스들을 조합해보자. 못생기고 늙은 남자인 제레미아는 카우보이 차림을 한 지노랑 같이 고리대금업자다. 수녀는 아마도 제레미아의 사업 문제로 끌려온 여자일것이다. 제레미아와 지노의 고객 중에는 미녀 대회에 나온 여성 로잘바의 아버지가 있다. 로잘바의 결혼식을 위해 아버지는 이들에게 돈을 빌리고, 제레미아는 로잘바를 탐한다. 로잘바는 제레미아를 경멸한다. 그리고 이런 중심 플롯 사이에 제레미아가 돈을 빌린 고객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가족의 친구]가 이들을 엮고 캐릭터를 구성하는 방식은 지극히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다. 마피아 영화에서 등장할법한 사채업자 제레미아는 그야말로 돈에 환장한 늙은이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죽어가는 병든 어머니와 퀴퀴한 분위기로 가득한 곳이며, 제레미아 자신도 매우 추레한 차림새와 부상을 입은 불완전한 육체가 강조된다. 그것과 대조되게 제레미아는 늘상 아파트 창문으로 배구를 하는 여자를 훔쳐보고 이민자 여성을 더듬고 미녀들에게 집적거린다. 제레미아에게 아름다움은 자신이 가질수 없지만 꼭 있어야 하는 무언가다. 

제레미아 주변 캐릭터들도 미의 관점에서 구성되어 있다. 지노는 가질수 없는 타자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흉내내는 자고 (소렌티노는 분명 지노를 통해 스파게티 웨스턴에 대해 고찰을 하고 있다.) 미녀 대회 로잘바는 반대로 제레미아가 그렇게 원하던 아름다움을 소유한 자다.  소렌티노는 이런 탐미적인 관점을 영화 전반에 뿌리는데, LCD 사운드시스템과 랄라 푸니, 안토니 앤 더 존슨즈부터 클래식 음악까지 이어지는 감각적인 삽입곡과 극도로 스타일을 강조한 미장센으로 드러낸다. 소렌티노는 컷과 컷의 연결보다는 컷 하나의 세공에 극도로 관심을 기울이는 감독이다. 도입부의 컷들을 보라. 부감과 클로즈업, 롱 샷 등 소렌티노가 배치하는 컷들은 안토니 앤 더 존슨즈의 'My Lady Story'의 음률을 따르고 있다. 소렌티노는 오프닝을 마치 자기가 대신 'My Lady Story' 뮤직 비디오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만든듯 하다.

소렌티노는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을 캐릭터와 행동 동기를 구성하는 요소로 삼으면서 그것의 권력 관계를 그려낸다. 소렌티노가 보기에 이탈리아,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움은 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표적으로 제레미아가 빚을 탕감해주는 대신 여자를 추행하는걸 허락하는 장면에서 소렌티노는 자본가의 폭력적인 착취와 구조를 구체화시킨다. 그리고 그 구조는 은밀하게 배어들어 있다는걸 제레미아가 만나는 캐릭터들을 통해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그들은 돈을 빌리기 위해 제레미아를 경멸하면서도 그에게 굴종한다. 제레미아는 그런 그들에게 자신이 '가족의 친구'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마치 마피아 대부처럼 말이다. 물론 그 돈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은 제레미아를 배반하거나 무시한다. 소렌티노는 이 시절 자신의 영화가 매우 정치적이라 주장했는데, 일상의 정치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많은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소렌티노의 영화는 아름다움에 탐닉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둘러싼 현실의 추한 면모를 드러내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렌티노는 제레미아에게 매정하지 않다. 영화 중반부 소렌티노는 회사에 돈을 빌리기 위해 방문하는 제레미아와 지노가 창녀의 대접을 거절하는 부분에서 제레미아가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모습의 이면을 보여준다.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방법은 잘못되더라도 진실한 것이다. 그리고 로잘바가 결혼 생활에 실망해 제레미아를 찾아오는 순간부터 제레미아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돈키호테적인 열정였다는걸 숨김없이 드러낸다. 거의 강간에 가까울 정도로 불편하게 시작한 로잘바와 제레미아의 관계가 역전되는 이 순간에서, 소렌티노는 자신의 시선이 어느정도 제레미아와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 인정해버린다. 제레미아는 추한 늙은이지만 그가 아름다움을 탐하는 열정 자체는 진실하며 소렌티노는 종종 그 열정에 공명한다. 이때 소렌티노는 느끼한 삶과 죽음, 아름다움에 대한 경구를 집어넣는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렌티노는 다시 한번 그 공명을 뒤집어 엎는다. 최후에 로잘바가 도피를 위해 선택하는 사람은 제레미아가 아니라 지노다. 지노와 제레미아가 다른 부분은 제레미아는 여전히 이탈리아 안에 머물러 있다면, 지노의 탐미는 이탈리아 밖으로 향해 있다는 점일것인데, 로잘바가 도피를 위해서는 제레미아보다는 지노가 자신에게 맞았다고 생각해볼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잘바의 선택 이후 소렌티노는 이상할정도로 결론 내리는걸 주저한다. 대신 그가 선택하는건 도피다. 인물들의 종적과 심리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처럼 애매한 컷들 사이에서 흐지부지 사라지고, 소렌티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장면은 금속탐지기를 들고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서 무언가를 찾는 제레미아다. 이 장면이 제레미아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이 결국 자기만족적이라는걸 명백히 한다. 소렌티노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제레미아에 대한 인물을 쉽게 단죄하지 못하겠다고 은근슬쩍 털어놓는다. 

[가족의 친구]는 상당히 아름다운 영화며 그 아름다움을 추함을 대비시켜 현대 이탈리아를 살아가는 인물들간의 권력 관계를 그려내는데 탁월하다. 기질적으로 파올로 소렌티노는 '힙스터'며 그 힙스터적인 탐미와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의 정치성 간의 간극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영화 감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족의 친구]에서 소렌티노는 미를 탐하는 추한 권력자에 대한 가치 판단을 주저하고 은근히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정치 의식이 미의식에서 주춤거리고 있는거 아닐까라는 인상을 준다. 그가 [일 디보]를 끝으로 정치적인 내용을 줄이고 생로병사와 아름다움에 대한 경구를 채워넣기 시작한 것도 그런 한계를 알아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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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1988)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9.5
감독
시드니 루멧
출연
리버 피닉스, 크리스틴 라티, 주드 허쉬, 조나스 애브리, 마사 플림튼
정보
범죄, 드라마 | 미국 | 115 분 | -


시드니 루멧의 [허공의 질주]의 도입부는 로버트 맥기가 정석적인 시나리오라고 할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소년의 평범한 일상에서 출발한 이 장면은 컷을 넘길수록 정보를 제한하고 인물들의 행동에 여분의 모호함을 더해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미스터리가 극에 달했을 무렵, 영화는 재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긴장감과 흥미를 만들어낸다. 평범한 소년의 일상에서 1960년대 신좌익 테러리스트의 후일담과 연결되는 도입부는 간결하면서도 매혹적인 터치로 그려지고 있으며 시드니 루멧의 연출 역시 그 시나리오를 무리하게 뛰어넘지 않는다. 그 점에서 [허공에의 질주]는 우리가 '미국 영화'를 기대할때 바라는 모범적인 연출론이 담겨 있는 영화기도 하다.

하지만 모범적이고 정석적이라고 해서 맥빠지는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시드니 루멧이 놀라운 점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태동부터 경력을 시작해 1990년대 미국 영화의 새로운 세대들이 경배해 마지 않는 조상이 되고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완고한 매서움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소위 시드니 루멧의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꼽으라면 [네트워크]라던지 [12인의 성난 사람들], [뜨거운 오후], [형사 서피코] 같은 비타협적이다 싶을 정도로 선연한 독기가 어려있는 영화들이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루멧은 뉴욕이라는 대도시 출신답게 도회적이고 냉철한 감독이다.

다만 [허공에의 질주]는 [네트워크]에서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패디 체예프스키의 비타협적인 각본을 그대로 밀고가던 독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다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이 강한 물렁한 군의 루멧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허공에의 질주]의 물렁한 분위기는 각본가인 나오미 포너의 공이 크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나오미가 쓴 다른 유명한 각본들 ([다섯번째 계절]이나 [베리 굿 걸], [모정])을 살펴보면 이 추측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높아보이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자식이 가족 관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전개는 나오미의 다른 각본을 영화화한 [다섯번째 계절]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사실 [허공에의 질주]는 진짜 루멧의 걸작이 되기엔 이 멜로드라마적인 물렁한 분위기가 발목을 잡는 부분이 없잖아 있기도 하다. 단적으로 대니의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 실력은 극의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해 넣은 장르적 장치라는 느낌이 매우 강해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쉽게 들고 다닐수 없는 악기라는 점도 매우 상징적이다.) 루멧의 냉정한 터치하고는 충돌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지만 루멧은 자신이 장기를 발휘하는 부분이 아닌 물렁하고 감성적인 재료들도 의외로 진솔하게 다뤄내면서 그가 왜 '장인'이라고 불리는지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허공에의 질주]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인물들이 서 있는 배경과 정치사회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좁게는 1960년대 히피들이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던 현실부터 시작해 넓게는 사랑과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자들이 변하지 않는 현실과 뜻하지 않은 희생감에서 나오는 죄책감 초라해져버린 자신을 보며 쓸쓸하게 반추하고 있다고 할까. 이쁘지 않게 매우 미국 아저씨 아줌마처럼 나오는 주드 허시와 크리스틴 라티는 그 점에서 매우 적확한 캐스팅이며 연기도 훌륭하다. 

그런 반추와 동시에 [허공에의 질주]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정치사회적인 관계로 엮여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루멧과 포너는 그토록 불합리한 권력에 반발하며 이상적인 가치관을 내걸었던 좌파 지식인들도 부모자식이라는 권력관계의 주를 차지하고 있다는걸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묘사들은 포프 부부를 향한 거스의 '결국엔 자본주의 체제에 또다른 투항자일뿐'라는 비난과 더불어 좌파 이상론자들이 그렇게 기존 사회에서 분리해 만들고 싶어했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뭐가 다른지에 대한 고뇌로 이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허공에의 질주]는 서부극이나 [보니와 클라이드]를 뒤집어놓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불의 저항해 공동체에 총을 갈기고 떠난 무법자들이 자신들이 만들려고 했던 새로운 공동체가 기실 기존 공동체랑 다른게 무엇인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기 떄문이다. 하지만 루멧은 그 기존 공동체에서 탈주한 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캐릭터의 주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니가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그런데, 한 치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되었을까 씁쓸해하는 장면이야말로 그런 루멧의 어른스러운 시선을 확인할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 식으로 [허공에의 질주]는 캐릭터가 처한 정치사회적인 현실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기 때문에 일견 장르적이고 인공적으로 보였던 장치들조차 그 속에서 합당한 위치를 찾아가게 된다. 냉정할 정도로 탈출하기 힘겨보이는 현실과 꿈결같이 아름다운 로맨스와 예술에 대한 매료가 충돌하면서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절절한 진실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대니의 연애 대상으로 나오는 로나라는 캐릭터 역시 그런 점에서 상당한 깊이와 계급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는 대니와 달리 충실한 중상류층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로나는 반대로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반대되는 '자유'를 꿈꾼다. 그렇기에 로나는 대니에게서 해방감을 발견하고 대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안정된 삶으로써 로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그 안정된 삶을 파괴할까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 양가적인 감정 때문에 [허공에의 질주]에 일견 장르적일수도 있던 로맨스에 계급 텍스트를 부여하면서 영화의 드라마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허공에의 질주]는 대니의 정착으로 결말이 난다. 계속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한 사람의 미래를 방해할수 없기에 가족은 대니가 어른으로써 공동체에 편입되는걸 선택한다. 이는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이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한다고,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영화의 첫 장면과 결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댓구를 이루고 있다. 첫 장면이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없는 일자 도로를 질주한다면, 결말에서는 환한 낮에 여러 길로 나눠진 도로에서 가족이 작별을 하고 세 가족를 태운 차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영화 내내 어둑어둑한 길을 해메고 있던 인물들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해방감과 씁쓸함을 느끼는 이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대구에서 [허공에의 질주]는 가족에 대한 멜로 시드니 루멧의 냉철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은 시선을 담은 영화라는걸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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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톨러런스 [Intolerance] (1916)


인톨러런스

Intolerance 
6.8
감독
D.W. 그리피스
출연
샘 드 그라세, 베시 러브, 툴리 마샬, 도널드 크리스프, 랄프 루이스
정보
드라마 | 미국 | 163 분 | -

D.W.그리피스는 여러모로 원죄같은 이름이다. [대열차강도]와 [달나라 여행]에서 태어난 내러티브 영화의 예술은 D.W.그리피스에서 본격적으로 마술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리피스는 한 장면에 한 씬이 아니라, 다양한 컷으로 장소와 시간을 줄였다 늘리는걸 본격적으로 영화에 도입했다. [대열차강도]나 [달나라 여행]가 컷 하나에서 자기완결되어 다음 장면의 시퀀스로 넘어가는 수준이였다면 [국가의 탄생]에서 D.W.그리피스는 한 컷이 다른 컷과 연계되어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하게 되는 혁명을 선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D.W.그리피스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던 세상 인식에 대한 무지함은 [국가의 탄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기엔 곤란한 영화로 만들었다. [인톨러런스]는 한동안 그리피스가 [국가의 탄생]에 대한 반동으로 알려져온 영화다. 

이야기는 옴니버스 식으로 네 파트로 나눠진다. 첫번째로는 1920년대에 살아가는 가난한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두번째는 익히 알고 있는 예수 이야기를 꺼내며, 세번째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을, 네번째는 바빌로니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국가의 탄생]과 달리 [인톨러런스]의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다. 각각의 파트들은 따로 따로 이어져 있으며 영화가 끝날때까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요람을 흔드는 여성이라는 컷을 통해 공통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움직인다. 바로 사랑과 평화에 대한 찬가다. 영화 자체가 일종의 공시성(싱크로니시티)을 가지고 움직인다고도 볼 수가 있는데 이 때문에 [인톨러런스]는 어찌보면 그리피스가 평생 완성하고자 했던 영화 언어를 서사에 반영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즉 그리피스는 개별적인 이야기/샷은 독립되어 있지만 붙여놓으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된다는걸 주장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른다. [인톨러런스]에서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에서 만개한 영상 언어를 마음껏 주무르며 관객을 희롱하는데, 이는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피스는 어느 순간에 어떤 장면을 보여줘야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킬것인지, 영화 속 인물들이 내뿜는 운동 에너지를 어떤 컷으로 잡아 보여줘야 효과적일지 (산골 소녀의 마차와 현대 파트의 기차 컷 간의 조합은 지금봐도 경탄스럽다.) 잘 알고 있다.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톨러런스]는 '불관용'이 극의 주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영화다. 영화가 나왔던 1920년부터 예수의 탄생 이전 바빌로니아까지 다양한 시간축을 횡단하면서 그리피스는 불관용에 고통받고 저항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재미있게도 그리피스가 그려내는 '불관용'으로 대표되는 적들은 철저히 계급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장장들이라던가 위그노 학살을 지시하는 카트린 왕비, 바리새인들, 벨 마르독이 이런 계급 의식을 기반한 악역들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 악역을 그릴떄 그리피스는 누구보다도 불관용을 주창하고 있다. 특히 1920년대 파트에 나오는 여성권리 운동가들이나 성 바르톨로메오 파트에 나오는 카트린 왕비에 대한 묘사와 자막은 창작자의 악의가 담겨 있다. 심지어 카트린 왕비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의 탄생]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인톨러런스]에 등장하는 그리피스의 시선은 거칠게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불편한 순진함은 사라졌지만 자본가들은 나쁜 놈들이고 노동자는 착하다라는 단순한 구도는 여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다. 이 단순굵직하고 순진한 악의에 가득찬 선악 구도는 영화의 멜로드라마적인 감수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동시에 훗날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그리피스의 작품들을 찬양하게 되는 강렬한 선동성도 획득하게 된다. 과거 파트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지만 현대 파트의 선한 부부가 승리하는 결말 역시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와 불관용의 부르주아 세대를 뛰어넘겠다는 프로파간다적인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순 굵직한 선악 묘사로 얻는 이점도 있다. 일단 한쪽의 캐릭터가 단순해지자 영화는 악역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선역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지금 봐도 상당히 인상적인데 특히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는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이름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지만 바빌로니아의 산골소녀라던가 현대의 보스의 여자친구 역 같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이라던가 생생한 갈등은 지금봐도 놀라울 정도다. 그렇기에 [인톨러런스]는 페미니즘 운동을 혐오하는듯 하면서도 정작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를 걷어차지 않는 기묘한 형태의 캐릭터 메이킹을 보이고 있는 영화가 된다. 이런 D.W.그리피스의 캐릭터 메이킹은 분명 논쟁적인 캐릭터 메이킹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적어도 그리피스는 이 캐릭터들에게 존중심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생생한 선한 캐릭터들의 매력 때문에 그 불균형적인 사상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영화가 주창하는 선과 사랑을 찾아나서려는 자들의 멜로드라마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적어도 그리피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거기에 속한 사람에겐 정직하고 선의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건 [인톨러런스] 내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인톨러런스]는 [국가의 탄생]으로 자신감에 찬 그리피스의 비전이 극한에 다다른 시각적 성찬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다. 헐리우드 영화의 화려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평을 가해왔지만 적어도 [인톨러런스]를 보면서 그들이 만들어왔던 '스펙타클'이 함부로 폄하될수 없는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인톨러런스]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지금봐도 놀랍다. 다른 부분들의 완성도도 상당하지만 흥행이 실패하자 그리피스는 바빌로니아 파트만 따로 빼 개봉하려고 했다는데 그 말대로 영화의 제일 놀라운 부분은 바빌로니아 파트에 담겨 있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에 무지막지한 물량으로 쏟아부은 엑스트라의 숫자라던가 바빌로니아 공성전의 무모할 정도로 치밀한 묘사에 담긴 박력은 '스펙타클'의 극한을 보여주겠다는 한 예술가의 광기마저 느껴져서 무서울 정도다. 제작 과정에 대한 책도 나왔을 정도로 [인톨러런스]는 무성 영화가 단순히 낡은 영화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복잡한 감정이 들수 밖에 없는 영화가 된다. 이야기의 구조와 영화의 구조를 실험하면서도 '스펙타클'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고자 했던 위대한 영화감독의 집념과 불관용을 이겨낼 사랑의 힘을 역설하고 있는 담겨있는 걸작이면서도 그 사상의 순진함과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느껴지는 시대의 한계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사상이 오롯이 투영되어 있기에 지금 관점에서는 곧이 받아들여지기 힘든 영화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톨러런스]는 더욱더 생명력을 얻은 걸지도 모른다. 불관용의 극복을 다루는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불관용이 묻어나온다는 흥미로운 아이러니야말로 두 번의 세계 대전 이전 일그러진줄도 모르고 순진함과 진지함마저 느껴지는 낙관주의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인톨러런스]의 민중이 승리하는 낙관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서글픈 감정마저 들게 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되는 유산을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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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맨 [Simple Men] (1992)


심플맨

Simple Men 
6
감독
할 하틀리
출연
로버트 존 버크, 빌 세이지, 카렌 실라스, 엘리나 뢰벤존, 마틴 도노반
정보
드라마, 공포, 코미디 | 영국, 이탈리아, 미국 | 105 분 | -

할 하틀리은 왜 몰락했을까? 물론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감독에게 몰락이라고 단어를 붙여주는 건 굉장한 모욕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자벨 위페르를 비롯한 괜찮은 배우과 작업하며 미국 영화를 이끌고 갈 거라고 기대받은 감독의 현재는 그렇게 밝질 못하다.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헨리 풀]의 정점으로 할 하틀리는 위트 스틸먼과 함께 제임스 그레이, 폴 토마스 앤더슨, 웨스 앤더슨, 소피아 코폴라, 데이비드 O. 러셀 같은 이름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처럼 주류에 투신한 것도 아니였다. 그는 점점 변방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영화를 만들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 시도들은 비평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젠 그를 그토록 사랑했던 칸 영화제에서도 그를 부르지 않는다.   

그가 왜 몰락했는지는 조금 미뤄두고 먼저 창작의 절정기에 만들었던 [심플 맨]을 보자. [심플 맨]의 시작은 바로 '움직이지 마Don't Move'다. 눈을 가린 경비원은 여자가 한 치 앞도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빌은 경비원이 가지고 있는 성모 마리아 목걸이를 보는데, 경비원은 '이건 절 보호하는 부적이에요.'라고 말한다. 빌은 그 부적을 빼앗으면서 '당신은 보호가 필요없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경비원은 화를 내거나 반항하지 않고 '당신이 그녀에게 잘해준다면, 당신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할 하틀리는 이 대사들을 통해 90년대 미국 청춘들의 현 위치를 정립한다. 그들은 움직일수도 없고, 보호같은건 필요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당신은 보호가 필요없다'는 선언은 어찌보면 빌과 데니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 빌이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세상에 배신당하고 범죄자가 되어 절망한 빌이 데니스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전개는 비슷한 '탈선' (그들의 아버지는 야구 선수이자 극좌 테러리스트다.) 의 길을 걸었던 베이비 부머-히피 세대이자 아버지 세대를 찾아가는 정신적인 여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할 하틀리는 히피 세대에 대해선 그리 믿음을 보내지 않는다. 롱아일랜드로 들어서기 직전 빌은 " 모험과 로맨스는 없어. 오직 고통과 욕망 뿐이야."라고 선언한다. 빌의 선언은 베이비 부머 히피에 대한 믿음보다는  이미 "모험과 로맨스"를 추구했던 히피 혁명은 실패로 끝난채, 속물적이고 안락한 여피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퇴락적인 반동만으로 가득차버렸다라는 감독 자신의 선언에 가깝다. 그를 입증하듯이 아버지의 집에 가봤을때 남아있는 건 잿더미가 된 잔해 뿐이라는건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즉슨 모험과 로맨스의 시대는 한창 전에 끝난 반동의 시대에 살아가는 1990년대 청춘들의 표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 역시 계속 미뤄질 수 밖에 없다. 데니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고있는 엘리나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려고 하지만 엘리나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숨어다니다가 '나도 같이 도망가기로 했으나 잘 모른다. 그러니 나에게 부탁하지 마라. 아마 나 역시 버리고 벌써 여길 떠났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엘리나의 말은 아버지 세대가 미래에 대한 아들 세대의 질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재미있게도 엘리나는 아버지 윌리엄을 아들의 이름인 빌으로 부른다. 둘은 도망가고 있는 범죄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다르다. 아버지는 계속 이상주의적인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 도피한다면 아들은 거기에 냉소하고 이상을 버리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되려고 한다.

그렇기에 마침내 아버지가 등장했을때도 우리는 그 초라함에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은채 새로운 여자와 함께 배를 떠날 준비를 하며, 아들들에게 그 모험조차 거짓이였노라고 (아버지는 테러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성공하지 못하고 죄를 뒤집어 썼을 뿐이다.) 고백한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엄숙한 좌파적인 선언조차 추레한 롱아일랜드 시골 부둣가에서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프레임 속에서 허겁지겁 진행된다. 할 하틀리는 이를 통해 극적이고 이상화된 혁명의 환상을 부정한다.

대신 할 하틀리는 엉뚱하게도 1990년대 청춘의 "모험과 로맨스"를 아버지로 가는 여정 '도중'에 등장시킨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사랑을 부정하려고 했던 빌은 우연히 들른 케이트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때도 빌은 그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움직일수도 보호받지도 못하는 그는 자신의 감정에도 확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이어지는 케이트와 빌의 로맨스는 거칠거나 화끈하지 않다. 심지어 터질만한 사건이 (옛 남편의 등장, 케이트를 짝사랑하는 남자 등등) 등장하는데도 하틀리는 재빠르게 그 싹을 잘라버리고 다시 일상의 무덤덤함에 밀어넣는다. [국외자들]을 패러디한, 소닉 유스의 'Kool Thing'이 흘러나오는 유명한 댄스 씬이 그렇다.  하틀리는 로맨스의 열정 대신 덤덤한 톤으로 세상사의 복잡함과 그에 대한 시니컬함을 쿨하게 늘어놓는 방식으로 로맨스를 전개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젠체하는 태도가 막상 영화를 보면 그리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틀리는 태도는 그렇게 취하고 있어도 나름대로 드라마를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정해놓고 있다. [심플 맨]의 식어빠진듯한 로맨스 묘사는, 혁명이 끝난 뒤를 살아가는 슬랙커 청년들에게 사랑도 뜨거운 혁명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지루함에 파묻힌 놀랍지 않은 일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에도 가치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빌이 마지막에 아버지를 선택하지 않고 케이트를 선택하는 것에서 귀결된다. 로맨스와 모험을 믿지 않는, 단순한 남자이더라도 '그녀에게 잘해준다면, 당신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위안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할 하틀리의 [심플 맨]은 슬랙커 세대의 영화다. 만약 그가 1990년대 미국 인디 영화의 기수로 자리잡을 수 있다면 초기 고다르를 연상시키게 하는 자의식 넘치는 연출과 현학적인 대화들과 달리, 그 속에 담긴 소박한 진심이 슬랙커 세대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9.11 테러가 터지고 슬랙커 세대들도 사회에 들어서면서 할 하틀리 역시 방향을 잃은 것 같다. 테러와의 전쟁 시대에서, 그의 단순하고도 낙천적인 무덤덤함은 공포 속에 잊혀져 버렸다. 테러리스트가 농담으로 받아들여질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는 과연 슬랙커 세대의 시간축에 멈춰선 화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움직일 것인가. 나로써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슬랙커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단초가 될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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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드 [Mud] (2012)


머드 (2013)

Mud 
8.2
감독
제프 니콜스
출연
매튜 매커너히, 타이 셰리던, 리즈 위더스푼, 제이콥 로플랜드, 마이클 섀넌
정보
드라마 | 미국 | 131 분 | 201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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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제프 니콜스 감독의 전작 [테이크 쉘터]의 평온하지만 그 아래엔 불길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기대하고 [머드]를 선택했다면 실망할수도 있다. [머드]의 세계는 [테이크 쉘터]의 암울함하고는 거리가 먼, 사랑과 희망에 대한 신화를 들려주는 전통적인 영화이니깐. 하지만 [머드]는 사실주의적인 배경과 캐릭터에 시적인 정념을 섞는 독특한 재능을 통해 남부 촌뜨기들이 펼치는 사랑에 대한 믿음과 드라마를 진솔하면서도 뚝심있게 설득하는 영화다.

제프 니콜스는 매우 미국적인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첫 두 영화에서 그는 주류 미국 영화가 다소 소홀하게 다뤘던 미국 중부와 남부 시골들을 돌아다니며 사실주의와 환상이 섞인 시선으로 거기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을 들어다 봤다. 다시 고향인 아칸소로 돌아와 찍은 [머드]는 마크 트웨인 (실제로 제프 니콜스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마크 트웨인을 꼽아왔다.)의 소년들의 모험물과 [스탠 바이 미]를 인용해 미시시피 강/늪지대 주변을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삶을 담아낸다. 실제로 영화는 미시시피 강이라는 배경과 그 유역의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니콜스 인터뷰에 따르면 사라져가는 미시시피 강 유역의 하층민 문화를 기록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머드]는 [비스트]가 그랬듯이 투박한 진흙 냄새와 주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영화다.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컷 하나는 그런 사라져가는 고향 풍토에 대한 애잔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주술성의 집약체는 주인공인 머드다. 주인공인 엘리스와 넥본에게 머드는 신기한 존재다.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인디언을 만난 이야기와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악마를 쫓는 십자가 징이 박힌 구두와 행운이 를 신고 총을 가진 머드는 아칸소 깡촌에서 이제 막 삶의 비루함을 깨달아가는 엘리스와 넥본에게 못미더운 아버지하고는 다른 신비로운 매력으로 가득찬 존재로 묘사된다. 그를 통해 소년들은 살인과 범죄, 배신과 음모, 폭행이라는 위험한 어른의 세계를 엿볼 기회를 얻게 된다. 

머드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주술성엔 기독교적인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만 (십자가 징이 박힌 구두가 대표적일것이다), 그게 반드시 종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재미있다. 제프 니콜스는 머드를 쫓는, 텍사스에서 넘어온 악당 일당들에게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특징을 부여하면서 대립항을 형성한다. 여기서 니콜스 감독은 소위 제도권 종교의 엄숙함 대신 미국 민중들 사이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적 전통에 대해 애정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애정은 다소 결함이 있는 등장 인물들에 대한 존중심으로도 이어진다. [머드]의 이야기는 신화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캐릭터들은 현실에서 있을법한 결함을 품고 있는 캐릭터들이다. 먼저 현실에 있는 시니어와 갈렌, 마리 리는 현실에 찌들어 팍팍하게 굴며 주니퍼는 보답받을수 없는 사랑의 도피에 겁을 내면서도 내심 머드가 자신의 곁에 영원히 있어주길 원하는 (일부 남성들에게 엉덩이 가벼운 Bitch라고 매도당할수 있는) 이기적인 성격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물론 중심 인물인 머드 역시 허풍과 허세로 가득한 인물이다. 그의 허풍과 허세는 산문처럼 지루한 현실에 시적인 매력을 가지게 하지만 동시에 무책임함도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누구도 그 단점에 매몰되게 놔두지 않는다.

영화는 엘리스와 넥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이들이 현실에 굳어있는 혈연 아버지들 (시니어와 갈렌)과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허풍을 거듭하면서 이상적인 사랑만을 찾아다니는 머드 사이를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엔 머드와 주니퍼를 자신의 사랑에 완벽한 롤모델으로 받아들였던 엘리스는 그러나 머드가 생각만큼 이상적인 인간이 아닌데다 주니퍼의 사랑이 식은데다 자신의 사랑마저 실패하는 좌절을 맛본 후 머드에게 실망과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이 실망과 분노는, 사랑이 현실에 패배하고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감정과 그런 패배에 대해 아무런 답이 없는 머드에 대한 엘리스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담겨 있다. 직후 엘리스가 뱀에게 물리는 장면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함과 주체할수 없는 분노와 실망이라는 감정에 자제를 잃은 엘리스의 심리를 담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실망과 분노의 과정을 통해 [머드]의 사려깊음이 드러나는데 바로 머드와 시니어라는 두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계가 가지고 있는 진심과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균형을 잡아내려고 하는 점에서 그렇다. 머드는 엘리스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위험해지는 걸 무릅쓰고 섬 밖으로 나오는 모험을 펼친다. (이 부분의 구조가 [테이크 쉘터] 마지막을 장식했던 '방공호에서 나가느냐 마느냐'라는 갈등의 구조하고 유사하다는게 재미있다.) 이 모험의 끝에서 머드는 스스로 책임질줄 아는 주니퍼가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감정을 정리하게 된다. 반대로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채 살아가던 시니어 부부와 톰, 주니퍼는 다시 한번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사이에서 사랑과 현실 속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깨닫게 된다.

이처럼 [머드]는 너무나 로맨틱하게 사랑의 믿음과 애잔함을 풀어내는 영화이여서 되려 평가절하당할 구석이 있는 영화다.  특히 [테이크 쉘터]에 끝없이 물이 새어들어오는 조각배를 바라보는듯한 절망감을 사랑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보였던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사실주의적인 배경과 캐릭터에 배합하는 능력과, 일견 성기면서도 어느 순간에 등장 인물들과 사건을 움직여 긴장감을 유지하는지를 아는 제프 니콜스의 재능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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