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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드라마 (27)
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서 어떤 유사성과 감정을 잡아내느냐이다. 레네는 그 사실을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과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보면서 배웠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여행]과 [스트롬볼리]를 통해 픽션을 연기하는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담긴 이탈리아 시골을 영화 속에 배치하면서 영적인 구원과 낯섬이라는 감각을 이끌어냈다. 한편 바르다는 라 푸앵쿠르트를 여행하는 현대적인 성 규범을 받아들인 젊은 여행자 커플의 픽션적 시점과 가부장적인 삶을 사는 라앵쿠르트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다큐멘터리적 관점을 결합하려고 했다. [밤과 안개]는 네오 리얼리즘과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레네와 마르케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앙드레 바쟁은 크리스 마르케가 '밤과 안개' 이후 1958년 내놓은 데뷔작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기행문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영화에 의해 다큐멘트된' 에세이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바쟁이 지적한 병렬 편집은, '밤과 안개'가 크리스 마르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를 편집하면서 도입한 두 개의 시공간의 병렬적 배치는 특정 공간에 속한 개인이 다른 시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와 [석상 역시 죽는다]에서 도입했던 병렬 편집의 가능성을 픽션의 영역에서 실험했다면, 크리스 마르케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발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이후 크리스 마르케를 주목받게 만든 단편은 바로 [환송대 La Jetee]라는 단편 영화였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든 첫 픽션 영상물인 이 영화는 그러나, 활동사진Motion picture가 아니다. 크리스 마르케는 '포토 로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치 사진 슬라이드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그동안 알고 있던 문명이 멸망한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은 한 남자를 찾아낸다. 이 남자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공항 환송대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시간 여행하는 약을 먹게 된 남자는 이미지의 근원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환송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억 이미지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 전체가 멈춰진 사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영화적 샷 구조처럼 배치한다. 이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크리스 마르케는 말한다: "일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보았던 얼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평화의 모습이었다. (중략) 다가올 광기를 버텨내기 위해 부드러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일까?" 라카프라식으로 말하자면 환송대의 남자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1차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1차 기억 직전에 있던 여인의 얼굴이라는 파생된 1차 기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그 1차 기억을 쫓아가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남자가 시간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의 과거에서 여자는 한 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남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기억은 온전히 보존할수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여자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자는 남자를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는데, 반대로 보자면 여자야말로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가 사는 파괴된 현재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여자를 찾지 않는다. 대신 약과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SF 장르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1차 기억의 순간으로 돌아가 자기 방식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여자로 대표되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려는 남자의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도는 분절적인 순간들로 표출된다. 홀린듯한 만남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조각난 채로 남자의 체내로 흡수된 뒤, 재구성된다.

마르케는 이 디테일이 확장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향성과 겹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 담긴 파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5월]이 그랬듯이)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표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환송대]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횡단면이다. 1960년대가 지나가버린 미래에 살고 있는 관객은 그 시절과 함께 호흡할 수 없지만, 크리스 마르케가 35mm 필름 위에 남긴 사진을 통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박물관 시퀀스는 즉물적으로 남아있던 트라우마의 기억을 스스로의 선택과 만남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남자, 나아가 영화의 의도를 은유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진들은 SF 픽션 장르인 디스토피아라는 틀로써 재구성되고 있다. [환송대]는 1960년대 파리라는 공간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길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는 이전에 있었던 전쟁을 서서히 잊으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현실의 파리, 또 하나는 이미 일어난 가상의 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파리. 이 단편을 보면서 어딘가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를 연상했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마르케는 SF 장르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이 미래의 한 순간이 될수도 있었다고, 혹은 그 역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에 대한 기록이 될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과 관계는 희미해지고,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시적 우울함은 1960년대 파리와 도래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미래를 상상케 한다. 이런 이중화 작업은 후술할 [태양 없이]의 중심이 되는 영상과 음향의 재조립, 기계적 장치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에 큰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결국엔 끊어질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남자는 왜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사에서는 생존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를 조종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겐 의사와 과학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좀 더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생의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다. 연출에서 마르케는 좀 더 흥미로운 이유를 배치해둔다.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이미지의 주인공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자다. 침대에 누워서 미소지으며 카메라/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뤄져 있다.

스틸 샷으로만 이뤄진 영화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남자가 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움직임Motion이 가지고 있는 행복함으로 다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발버둥이다. 파괴된 세상에서 이전에 남아있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집착은, 남자가 여자로 대표되는 과거의 행복함에 어떤 죄책감이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 집착은 영상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광적인 매혹을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마르케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마르크 드 가스틴의 'La Mervilleuse vie de Jeanne d'arc'라는 무성 영화에 출연한 시몬 쥬느비에브라는 배우에 매혹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케의 사진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조선 여인의 얼굴을 담은 사진에 대한 묘사가 있었던 걸 보면, 마르케는 여성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찾았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케는 생에 대한 로맨티시즘적 감상과 낙관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을 담은 생에 대한 발버둥이 좌절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당신 모두 좀비'를 연상케하는 [환송대]의 순환 고리는 우로보로스적 비극이다. 영화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었으며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였다는걸 밝히면서 끝난다. 여인의 움직임이 비극과 파괴의 또다른 1차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때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르케가 생각하는 역사의 비극이란, 결과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과 과정을 바꾸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시간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자는 끝내 미래의 여행자들에 속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지도자들이 보낸 암살자를 통해 과거의 순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라카프라는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순수한 형태로만 이뤄질수 없고 트라우마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2차적일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송대]는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으 이야기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드려는 2차적인 시도를 파괴된 현재가 방해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결말은, 현재에 대한 마르케의 인식이 아도르노적 부정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었던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는 드골 정부의 강력한 우파 정권의 힘 앞에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드골은 표면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우대하고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중요한 자리엔 나치 부역자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했다.

[환송대] 직후 만든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레이션은 "감옥이 있는 한 세상은 행복할 수 없다." 였다.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끝나는 [환송대]의 순환적 비극은 아도르노가 부정성 미학에서 주장했던,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화해되지 않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슬로건과 맞닿아있다. 알제리 전쟁과 과거 인식을 방해하는 내부의 파시즘이라는 당시 프랑스의 부정성은 단 한 순간의 행복에 다가가려고 하는 남자를 암살하는 남자의 시대로 표출되고, 또다른 비극의 순환 고리를 만든다. 마르케는 SF 장르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파괴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떻게 1차 기억과 2차 기억을 재정립하는 시도를 방해하는지 [환송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는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적 틀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으로 기억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그렸으며, [태양 없이]는 기계적 조작을 통한 추상화와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남아있는 시간의 현기증을 포착하려고 했다. 마르케의 시도들은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1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2차 기억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의 찬란한 자유연상적 성과를 이어가려는 시도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유 과정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 동시에 역사/사회적 의미를 잃지 않는 정교한 방법론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1995년 마르케는 역사 게임을 만드는 게임 디자이너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레벨 파이브]라는 작품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또한 말년의 크리스 마르케는 유튜브와 비디오 영상에 관심을 기울여 짧은 클립들을 올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라카프라가 주장했던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며, 이 관계망 전체를 성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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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a La Garde / Custody] (2017)


영화의 시작은 이혼 소송을 위해 출근하는 조정위원들이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면 카메라는 두 인물(과 그들의 변호사)을 병렬로 배치한다. 앙트완과 미리암. 미리암은 앙트완이 가족들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로 앙트완은 미리암이 믿을수 없는 아내였으며, 자식들을 협박해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 다음 부부의 성격에 대한 다른 이들의 증언이 나온 뒤 이야기는 부부의 아들인 줄리앙으로 넘어간다. 줄리앙의 증언은 부부의 소송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증언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기 부족하다고 앙트완은 주장한다.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주장을 하는 두 인물의 숏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둘은 시퀀스가 끝날때까지 서로 마주보지 않고 조정위원만 바라본다.) 주장이 끝났을 무렵 앙트완과 미리암, 조종위원를 동시에 보여준 뒤 묻는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죠?" 이 말은 관객을 향한 말이다. 르그랑 감독은 관객에게 사전 정보를 배제하고 주장 숏을 배치한 뒤, 각자의 숏에 숨어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냐고 물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송의 중간 결과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이다. (앙투안의 친자 접견권을 인정하여 줄리앙에게 2주에 한번 주말을 아버지와 보내게 하라고 판결한다.) 왜냐하면 이 시퀀스의 다른 숏에서도 한 쪽으로 기울어질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결정적이어야 할 조세핀의 부상 역시 앙트완의 알리바이로 반박된다. 요컨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걸 파악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앙트완에 대해 설명하는 동료들의 증언은, 사실인것처럼 보여도 자기 포장적인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리암은 자기 포장적 전술을 거의 쓰지 않고, 실제적인 피해와 대책을 호소한다. 언술의 차이에서 폭력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조정위원회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앙트완의 자기포장과 미리암의 호소는, 사적 언어가 아니라 예의바른 공적 언어를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요컨데 공적 영역에서는 위장이 이뤄지고 있으며, 법 체계는 그에 대한 판단을 미룰수 밖에 없다. 법은 논리적이고 명확한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게 꼬여있다.

이 두 영역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도구와 관찰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르그랑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은, 가정을 세워놓고 전개하는 연구자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이 공적인 (나아가 법) 영역에서 벗어났을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야말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대전제인 셈이다. 그리고 이 대전제는 이전에 르그랑이 만든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서 일부 선험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프리퀄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도입부가 끝나자 르그랑은 인물들을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리암과 아이들이 새로 정착한 곳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공영 아파트다.

미리암은 앙트완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암이 사는 곳은 현 시점의 앙트완에게는 공적인 장소나 다름없다. 이를 증명하듯이 앙트완과 줄리앙의 만남은 미리암 부모의 집 앞에서 이뤄진다. 이미 이혼 소송 중인 앙트완에게 미리암 부모는 남이며, 실제로도 미리암의 가족은 앙트완을 적대한다. 앙트완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여기서 르그랑은, 관계에 대한 부담감이 폭력을 가능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앙트완은 가장 약한 고리인 줄리앙을 건드면서 자신이 빠진 (그러나 있어야 할) 사적 영역으로 진입하려고 한다. 집 문을 나서는 순간, 줄리앙은 앙트완의 뜻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줄리앙에게는 미리암이 있기 때문이다. 줄리앙이 거짓말을 한 이유도 어머니 미리암 때문이었다. 요컨데 르그랑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공간과 폭력, 인간 관계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앙트완은 이 사실을 이용해 미리암과 줄리앙을 괴롭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무시무시함은 사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폭력과 권력 관계가 얼마나 교묘하며, 그것이 공권력의 사각지대에 있다는걸 보여주는데 있다. 보안 요원이라는 설정답게 앙트완은 통제하는 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남들 앞에서는 위협하지 않으며,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줄리앙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줄리앙에게 직접적인 소리나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도망가던 줄리앙이 차량에 치일뻔하자 돌아서는 모습을 보자. 그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서 정신적으로 괴롭힐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줄리앙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조세핀 나아가 미리암에게 접근하려고 한다.

르그랑이 생각하는 권력의 근원은 거리감이다. 르그랑은 앙트완이 어떻게 줄리앙과 미리암을 가두는지 프레이밍 기법으로 인물들을 불안정하게 배치한다. 앙트완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퀀스에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없으며,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앙트완을 거북스러워할때 앙트완은 거구로 프레임 속 두 사람을 가리거나 짓누른다. 끊임없이 회유하는 앙트완의 입은 줄리앙의 도망칠수 없는 감옥이며 미리암은 앙트완의 폭력적인 포옹을 받아줘야 한다. 당연하겠지만 앙트완/미리암,줄리앙의 시선은 서로 닿지 않는다. 심지어 사적인 공간인 집안으로 이동했을때도 이런 권력 관계는 더욱더 강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물의 거리와 시선 제약을 통해 폭력의 구조화에 매달린다. 가끔 집요하다 못해 어깨에 힘이 들어간 구조적인 숏들이 보이긴 하지만, 르그랑의 야심이 단단한 뿌리가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앙트완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르그랑는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하지 않는다. (프리퀄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르그랑은 중요한 힌트를 앙트완의 친정집 시퀀스에 배치해뒀다. 먼저 앙트완과 앙트완의 아버지 조엘이 처음 만나서 하는 대사는 사냥에 대한 것이다. 매우 폭력적인 행위를 함께하는 남성성의 확인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 다음 소동을 일으킨 앙트완을 내쫓을때 조엘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이 집의 왕이다"라고 말한다. 조엘의 대사는 사적 공간의 주인으로써 선언이다. 그 선언이 매우 가부장적인 폭력으로 이뤄져있다는 건 앙트완을 대하는 조엘의 폭력적인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앙트완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진 것은 조엘의 실책이 크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이 생길 것이다. 왜 조엘과 아내 마들레인은 앙트완과 같은 파국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이는 조엘을 대하는 마들레인의 태도로 설명된다. 기성 세대인 마들레인은 미리암과 달리 조엘이 보이는 폭력적인 태도에 대항할 방법을 쓰지 못한다. 요컨데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젠더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앙트완이 줄리앙을 건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앙트완의 장녀인 조세핀은 자기결정권이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정위원회에서도 언급되는 사실이며, 르그랑 역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을 통해 이미 성년에 들어선 캐릭터라는걸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 내내 앙트완은 조세핀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재미있는건 조세핀의 설정엔, 미묘한 계급적 욕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조세핀은 음악 학교를 다니고 있고, 직장을 관둔 미리암이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학비라고 언급된다. 여기서 조세핀이 배우는 음악이 클래식 같은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한 음악이라는걸 유추해볼수 있을 것이다. 조세핀의 음악 학교는 어떤 계급 상승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에게 연애를 통해 조세핀의 학교 생활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미리암의 말은, 조세핀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하는 의중이 깔려 있다.

조세핀의 생일 파티는 그 점에서 여러모로 이상한 시퀀스다. 파티장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조세핀의 생일은 마치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 열리는 것 같다. 대체 누구인가? 답은 파티장에 오지 못한 '그 사람'이다. 실제로 앙트완이 미리암을 만나서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인데 딸의 생일을 축하하지도 못하냐, 다. 조세핀의 성대한 생일 파티는 앙트완을 향한 선전포고다. "더 이상 날 때리지 못할 것." 이 파티장을 빌리라고 돈을 낸 사람이 앙트완을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미리암의 아버지라는걸 생각해보면 더 명백해진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르그랑은 파티장 시퀀스 중 일부에서 대화를 빼버리고 배경 음향만 남긴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의 벨소리가 음향 몽타주로 불편함과 긴장감을 유도한다는걸 생각해보면 파티장의 소음이 앙트완의 벨소리를 차단하는 안전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즉슨 미리암과 남매는 공적 영역에서 타인들의 소음을 통해 보호받는다.

그런데 이 뒤 등장하는 시퀀스에게 밖으로 불려나가 앙트완에게 위협받는 미리암과, 조세핀과 남자친구 사뮤엘의 축가 연주 장면이다. 두 시퀀스가 동시에 전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세핀과 사무엘의 연주 장면을 분석해보자. 조세핀과 사무엘이 무대에 올라와서 연주하는 곡은 클래식이 아닌 록이다. 심지어 연주하는 곡은 C.C.R.의 Proud Mary다. 이 곡은 일상을 떠나 미국을 방랑하는 내용의 곡이다. 원곡은 남성이 불렀지만, 이 곡을 커버해서 유명해진 가수 중엔 여성인 티나 터너가 있다. 그런데 티나 터너는 가정 폭력을 당한 경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조세핀과 사뮤엘은 모든 불을 끄고 인사를 하듯이 쪽지를 남기고 퇴장하는 장면을 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모든 행동과 상징은 마치 미리암의 상황을 은유함과 동시에, 계급 상승의 바람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은 임신으로 인한 도주다. 임신이라는 사건은 어떻게 조용하게 수습될만한 사건이 아니다. 조세핀은 앙트완이 개입하는게 싫어서 계급 상승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고 도주를 선택한다. 요컨데 더 이상 쫓아올수 없을 정도로 자신과 아버지 간의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하지만 조세핀의 도주엔 상황의 회피 뿐만이 아니라 공황으로 인한 판단력의 마비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한 순간 보이는 반응은, 기쁨이 아닌 공포과 충격에 질린 숨소리다. 조세핀은 가정의 파탄을 지켜본 아이다.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가정이 생긴다는 얘기고, 자신의 부모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주하는 일이다. (작년 말 개봉한 [초행]이 그랬다.) 조세핀은 이런 현실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연륜을 쌓지 못했다. 그런걸 쌓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기도 했고. 조세핀과 사무엘의 도주에 어둠이 깔려있다는 점은 그 점에서 불길하기 그지 없다. 남은 희망은 사뮤엘이 앙트완과 달리 조세핀의 공황을 얼마나 진정시킬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한 뒤 남은 어둠이 미리암과 줄리앙으로 이어지면, 불길한 예감을 할 수 밖에 없다. 미리암은 대체 왜 앙트완에게 들통난 공용 아파트로 돌아오는가? 그것은 일종의 자기 위로일것이다. 그 정도로 했으면 앙트완이 자신의 영역에 접근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은 현관을 두들기는 앙트완의 음향을 통해 박살난다. 여기서부터 르그랑은 명백히 호러 영화로 만든다. 줄리앙이 앙트완이 총을 발사하면서 일시적으로 청각을 상실하는 장면은, 앙트완에게서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던 벨소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 더 이상 줄리앙은 앙트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들을 가치도 잃어버렸다. 상황은 연쇄살인마에게서 도주하려는 모자로 변모한다. 미리암과 줄리앙이 숨어든 장소가 화장실이라는 점은 [샤이닝]을 의식한 것일까?

이때 미리암과 줄리앙을 구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두 얼굴이다. 하나는 경찰서 오퍼레이터고, 또다른 하나는 앞집에 사는 할머니다. 이들은 앙트완 시야 바깥에서 앙트완의 행동을 제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퍼레이터의 정면 숏과 욕조 안에 숨은 미리암과 줄리앙의 숏이 붙는 순간 긴장과 동시에 어떤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면, 공권력이 마침내 사적 영역의 폭력을 파악헀기 때문이다. 이제 오퍼레이터는 앙트완/미리암, 줄리앙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앙트완이 제압당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이상하게 연출되었다. 우선 샷건을 들고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앙트완의 숏은, 가정폭력범의 모습이 호러 영화의 공식을 통해 구체화된 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앙트완은 연쇄살인마나 다름없다. 이때 경찰들이 등장해 앙트완을 제압한다. 

르그랑은 이 상황의 전후 숏과 동선을 이상하게 붙였다: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경찰 기동대가 갑자기 나타나 앙트완의 뒤에 순간이동해 제압하는 것처럼 붙였다. 이때 경찰 기동대의 음향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상식적인 답은 '앙트완 몰래 현관문을 열고 숨어든 경찰 기동대가 덮쳤다'가 답일 것이다. (상황 자체도 그것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기습과 국면 전환의 숏이 앙트완의 시점에 맞춰 갑작스럽기 때문에 전후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동선을 상식적인 숏과 편집으로 붙이지 않았다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공간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편집을 이렇게 구상했다, 라고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미리암의 공영 아파트는 앙트완과 공포에 떠는 미리암과 줄리앙 밖에 없었다. 앙트완은 한때 자신에게 공적이었던 영역을 밀고 들어왔고 사적인 지옥으로 화하기 직전이다. 하지만 미리암과 줄리앙, 앞집 할머니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앙트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무지로 인해 앙트완은 공간의 권력을 잃고 경찰에게 제압당한다. 앙트완의 단말마가 "내 아내"라는 소유격적인 대사라는 점은 공간의 권력을 잃은 자의 발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적 영역 속 폭력에 대한 시민 사회의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영화일까?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이 미리암이나 줄리앙이 아닌, 앞집 할머니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전화를 걸고, 불을 끄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을 피하는 상식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앞집 할머니가 보이는 극도의 조심스러움은 흥미롭다. 앙트완은 할머니, 나아가 앞집에 누가 사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앞집에 할머니가 산다는 걸 아는 사람은 미리암과 줄리앙 뿐이다. 할머니의 행동이 보이는 조심스러움과 시점 숏으로 제시된 미리암과의 시선 교환, 총격전으로 부서진 문 이미지는 익명의 선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암시를 남기고 있다.이 부분을 설명하면 내용을 넘어서는 상상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확언을 하지 않겠다. 다만 할머니의 시점 숏에서 사건 이후의 삶과 상처를 걱정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건 확실하다. 그리고 이 걱정은 냉철한 연구자의 태도로 서사를 전개했던 자비에 르그랑의 연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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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Le lion est mort ce soir / The Lion Sleeps Tonight] (2017)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카메라가 돌아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배우는 테라스에 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때 카메라는 늙은 배우의 얼굴로 다가간다. 스와 노부히로는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시작하면서, 의도적인 기만을 부린다. 사전정보 없이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보게 된다면, 시퀀스 배치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위화감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다니. 당연하겠지만 이 장면은 극중극이다. 컷 소리와 함께 배우는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다음 시퀀스인 분장실로 넘어간다.

촬영을 종료하고 장은 스태프에게 말한다. 옛날 독립 영화는 원 신 원 컷으로 찍었고 다음이 없었다고. 스와는 여기에 동조하듯이 도입부를 원 신 원 컷으로 찍었다. 시간 이미지가 타임코드의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에서 스와와 장은 시간을 기록하는 매개체라는 개념으로써 영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동조와 별개로 장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사실 영화에서 죽음을 연기한다는 것만큼이나 기묘한 영역도 없을 것이다. 생물이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사다르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죽음을 재현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다. 스와는 이 지점에서 서사의 모티브를 얻는다. 대체 경험없는 재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촬영 현장은 잠시 중단된다.

스와는 실마리를 유령 영화에서 찾는다. 영화 제작은 중단되고 장은 근처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런데 그 저택은 장의 옛 여자친구 쥘리에트가 살던 집이다. 그 집에 머물면서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유령 들린 저택 영화지만, 호러 영화는 아니다. 쥘리에트의 유령은 별다른 원한도 해결해야할 숙원도 없다. 그들은 산책을 하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이 둘이 나란히 놓였을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육체적인 대조일것이다. 이미 죽어서 실체 없는 과거의 이미지로만 남은 쥘리에트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지만, 장은 늙었다. 그 대비에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을 맡은 장 피에르 레오는 팔팔한 소년의 얼굴로 은막에 데뷔했다. 소년에서 시작해 청춘, 장년까지 인생 전부를 은막에 맡긴 사람이다. 그런 그가 늙고 노쇠한 육신으로 앉아있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그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처럼 스타의 노쇠한 육체 이미지가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영화다.

쥘리에트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진리를 상징한다면, 쥘을 비롯한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아이들의 시점에서 본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귀신 들린 저택 영화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도 막연한 소문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과 장의 만남은 어딘가 어색한 거리감이 감돈다. 장은 과거의 회고에 젖어 조용히 있고 싶지만, 이 저택의 내막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장을 유령이라 착각한다.  그런데 이 착각은 어느정도 뼈가 있는 착각이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모르는 것 이상으로 장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장은 영화를 찍고 있지만, 아이들은 장이 나왔던 영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데 그들은 스타로써 장이 아닌, 평범한 배우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이를 위해 스와 노부히로는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어른의 비중을 확 빼버린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 이후로 등장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를 돕는 영사 기사와 쥘의 어머니 뿐이다. 그런데 영사 기사는 장을 아는 체 하지 않고, 쥘의 어머니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장과 만나지 않는다. 요컨데 장은 현재에 뚝 떨어진 과거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체 뭘 하러 저택에 왔단 말인가? 장이 배우라는걸 생각해보면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아이들이 영화를 찍으려고 온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장은 촬영을 쉬러 왔음에도 영화를 찍어야 하는 신세다. 물론 아이들의 영화 촬영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 호러 영화를 자처하지만, 돈도 없고 특수 효과비도 없는 아이들도 뭔가 거창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아이들에게 영화 만들기는 놀이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가 디지털 캠코더라는 점 역시 그 유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 만들기는 놀이 이상으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정작 아이들은 딱히 계획이 없다. 그저 장이 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캐스팅을 시도하려는 정도다. 상술했던 필름 시절 원 신 원 컷의 정신에 대한 초반부 대사랑 스와 노부히로가 디지털 삼인삼색으로 DV 영화를 찍었던 걸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노련한 배우 장은 아이들에게 영화 만드는 법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미덕은 이 가르침이 고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장은 실제 장 피에르 레오의 성격을 반영한듯한 퉁명스러운 노인네지만 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주려고 한다. 다소 실소가 나오는 호러 코메디 시나리오도 진지하게 받아준다. 물론 시행착오는 있다. 장과 아이들이 한 시퀀스를 반복해 찍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언제 들어와서 어떤 대사를 하고 어떻게 나가는지 모른채 끊임없이 실수한다. 마지막 테이크에서 장이 제멋대로 대사를 치고 나가버리는 것도 그의 짓궃은 유머가 반영되어 있다. 어찌보면 영화의 중반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젊음과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 간의 희극적인 줄다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영화는 기어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쥘의 고백이 큰 공헌을 했을지도 모른다. 쥘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상실과 그 이후의 삶이 뭔지 아는 아이다. 쥘은 아버지를 잃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어머니에게 혼란을 느낀다. 쥘의 고백을 통해 장은 쥘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쥘은 그 점에서 쥘리에트의 거울쌍적인 변주라 할 수 있는 캐릭터다. 쥘리에트를 잃은 장은 이제 막 상실을 경험한 쥘을 위로하기 위해 영화에 조금 더 진지해진다. 아이들과 장이 찍기로 한 마지막 장면은 호수에서 이뤄진다. 호수로 가는 버스에서 아이들은 The Lion Sleeps Tonight이라는 노래를 듣고 들어본적이 있다며 알아차린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세대 간에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순간, 즐거운 합창이 영화 속 영화의 결말로 인도한다. 이 즐거운 합창은 스와 노부히로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이다. 그리고 장은 처음으로 쥘리에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아이들에게 털어놓는다.

장이 잠시 혼자 남아있을때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해후와 애끓는 안타까움의 고백 뒤에 쥘리에트는 장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다시 만날수 있냐는 장의 말에 쥘리에트는 모호하지만 긍정의 뜻을 남긴다. 쥘리에트는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사라지는데, 이 쇼트는 아이들이 찍던 영화의 결말과 비슷하다. 장의 기억을 반영한 아이들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쥘리에트는 장 앞에서 현존했고, 반대로 아이들의 영화가 완성되자 쥘리에트는 완전하게 영점으로 돌아갔다. 쥘리에트는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적 또는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장은 죽지 않는다. 또는 자살하지 않는다. 로건이 죽은 이들을 거쳐 로라와 아이들에게 마지막 생의 의지를 되찾었던 것처럼, 장은 아이들과의 영화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일이 있다는걸 알게 된다. 바로 죽음을 연기하는 일이다. 짧은 휴가는 그렇게 끝나고 장은 마치 백일몽처럼 아이들앞에서 사라진다. 아이들의 반응 역시 신기루를 놓친듯한 아쉬움과 묘한 깨어남을 보인다.

하지만 쥘이 남아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쉬움을 품고 마을을 거닐던 쥘은 골목에서 사자를 발견한다. 뜬금없는 환상 시퀀스지만, 쥘만이 볼수 있다는 점에서 스와 노부히로의 의도는 명백하다. 쥘은 장과의 짧은 만남이 결코 신기루가 아니라는걸 알고 있다. 쥘과 장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장은 쥘을 통해 버스에 흘러나오던 노래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는데 성공했다. 스와 감독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누군가 기억되는 것이며,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와 배우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죽음을 연기하는 장이다. 하지만 망설였던 초반부와 달리, 마지막의 장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죽음과 소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였다는걸 알게 된 것이다. 이 망설이지 않음은, 이제 말년에 접어든 장 피에르 레오 자신의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그 다짐을 노사자의 뜬 눈을 강조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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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Paterson] (2016)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구 10만명 정도 되는 이 소도시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제외하면 흔한 교외 지역이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눈에 이 평범함은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강점이다. [패터슨]은 일종의 농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드라이버이자 시인 패터슨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코미디 영화인가 싶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유머기도 하다. 자무시가 유머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A-B-A 구조가 문학의 운율이나 리듬을 연상케하는걸 주의해보면, [패터슨]의 반복된 유머는 영화의 구조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 이후에 데뷔한 영화 감독답게 구조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감독이긴 했지만, [패터슨]은 여타 자무시 영화 중에서도 그 구조가 뚜렷하게 보이는 영화다.

[패터슨]은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개별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별 장으로 구성된 영화들은 대체로 장마다 다른 상황과 샷, 몽타주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패터슨]은 장이 넘어가도 비슷한 상황과 샷을 반복한다. 전제를 살펴보자. 패터슨은 아내 로라와 함께 사는 아마추어 시인이며, 버스 운전사다. 매일 아침 일어나 프레이크로 아침을 먹고, 버스 운전을 한 뒤 퇴근해 바에 가서 술을 마신다. 전개로 보자면, [패터슨]은 같은 순간을 반복하는 영화다. 도입부인 월요일은 영화 전체의 구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화요일이 되었을때 영화는 패터슨의 삶, 나아가 영화의 리듬을 깨닫게 하고 수요일부터 변주에 들어간다. 이렇게 시작한 변주는 주말이 되면서, 변화를 맞이하고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자무시는 [패터슨]을 만들면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뼈대로만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운 바이 로]의 숲 속에서 헤매는 시퀀스라던가 [고스트 독]의 아이스크림 장수 시퀀스에서 드러나듯이, 자무시는 같은 요소의 반복과 변주로 최면을 걸 줄 아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까운 [패터슨]는 패터슨의 심리 변화를 일상을 구성하는 개별 쇼트에 섬세하게 깔아두고 관객이 파악하도록 만들었다. 첫번째 날을 통해 관객은 패터슨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두번째 날부터 관객은 패터슨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알게 된다. 버스, 폭포, 골목길, 도시락, 불독, 바, 성냥갑 그리고 시 노트....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디테일은 늘어나거나 달라지거나, 심지어 사라진다. [패터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쇼트를 차지하는 삶의 요소가 패터슨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감지해야 한다. 로라가 만든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고 다시 도시락 통에 집어넣는 패터슨의 쇼트라던가 각 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주잔을 들여다보는 쇼트의 유무가 대표적이다. 가끔 자무시는 패터슨의 심리를 반영한 오버랩과 음향 몽타주로 일상의 순간을 채색하기도 하다.

자무시가 보는 패터슨 시는 웃기면서도 어둠을 간직한 도시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종/사회 서브텍스트다. 패터슨은 백인이지만, 패터슨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흑인이나 인도인이 많다. 생활에 찌든 인도인 버스 기사 동료,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메소드 맨부터 시작해 패터슨 시는 백인보다는 흑인이나 인도인 같은 인종들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패터슨의 아내인 로라조차 이란계라는 암시가 들어간다. 허리케인 카터와 아나키즘에 대한 언급부터 차를 탄 채 흥청망청 노는 건달들, 금요일에 등장하는 에버렛의 가짜 총격전 소동은 패터슨 시의 불안과 어둠이 어떤 식인지 편린을 살짝 보여준다. 패터슨은 그 불안과 어둠에서 한발 짝 떨어져 평화롭게 살지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안과 어둠은 패터슨이 겪는 창작의 난항과 맞물려간다. 

여기다 패터슨의 과거는 의외로 밝지 않다. 침대 근처 놓여진 사진들을 추측해보면 패터슨은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다. 패터슨이 (실제 미군으로 복역했던) 애덤 드라이버의 자전적인 캐릭터일리는 없겠지만, 나이가 애덤 드라이버랑 비슷하고 2010년대가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패터슨은 9/11 테러 이후 입대한 미군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패터슨]의 인종 설정은 조금 특별해진다. 험악했던 21세기 미국-중동 간 정세에 관련되어 있던 폭력 전문가가 제대 후 이란계 아내과 다양한 인종의 동료들을 두고 시를 쓰며 평온하게 살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설정을 통해 반 이민주의 시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폭력 전문가가 어떻게 현실로 돌아올수 있었는지 한번 곱씹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창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패터슨]의 창작은 더블 이미지와 연계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 로라는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로라는 만약 낳는다면 자신과 패터슨을 닮은 쌍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직후 밥을 먹던 패터슨은 오하이오 블루 매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창작 과정을 일상 속에 배치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창작물은 대상을 반영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더블 이미지로 남게 된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다. 스크린 위에 새겨지는 패터슨의 시어를 담은 자막은 실재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패터슨 뿐만이 아니라 로라에게도 해당되는데, 로라는 그것이 매우 기술친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패터슨이 반복한다면 로라는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로라는 기타 연주와 컵케이크 만들기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체득한다. 자무시는 부부가 서로 존중하듯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존중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원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봉 후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음반을 모으고 연필로 시나리오 작업하는 자신의 삶에 자식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창작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바 있는데 패터슨은 그 점에서 자무시의 지론이 반영된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들어서면 재능의 문제는 영화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로라와 패터슨의 포물선이 다르다. 로라는 모든 창작에 대해 초보자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로라는 처음 창작을 했을때 느끼는 신선함에 매혹된 사람이다. 당연히 로라의 시도는 어딘가 어설프기 그지 없다. 꾸준히 축적되어 있는 상태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어설픔을 도로 도시락통에 들어가는 한 입 베어문 컵케이크라는 필로우 쇼트로 압축해 보여준다. 로라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눈빛이 약간 걱정을 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로라는 꾸준한 자세로 자신의 어설픔을 극복하고 소기의 성과를 낸다. 주말에 이르면 판 컵케이크는 대성공을 거두고 기타 연주 역시 그럴싸해진다. 

반대로 패터슨은 이전부터 꾸준히 쓰고 있는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를 발표할 생각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겸손함이다. 패터슨은 시에 엄청난 자부심 같은 것은 없고 명성에 대한 욕심도 없다. 패터슨은 자신의 시를 로라와 같이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패터슨은 내심 자신이 쓰는 시가 뛰어나길 바란다.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패터슨의 좌절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시를 쓰는 소녀를 만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시어가 쓰여진 시 노트를 본다. 이내 무표정으로 묻히지만 패터슨의 감정에 동요가 일어났다는걸 눈치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무시의 태도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만큼이나 현실적이고 명확하게 말한다. 세상 어딘가엔 범인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 패터슨의 재능은 노력으로 갈고 닦은 재능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의 재능은 아니다. 계속 반복될 것만 같은 패터슨의 일상을 흔들리는 순간도 천재를 만났을때 이뤄진다. 다소 생뚱맞은 [잃어버린 영혼의 섬] 인용은 외친다. "사람을 해부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을 조각 낸다고요! 원주민이 이상한 이유를 알았어요 그들은 희생자들이에요!"

패터슨은 자신의 창작 과정이 천재의 그것과 달리 살아있는 일상을 조각내면서 만든 키메라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의심이 커졌을때, 일상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좌절감은 지속된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가짜 총격전 소동을 일으키는 에버렛과 시 노트를 아작낸 부부의 개 마빈은 그 점에서 패터슨의 심리에 반응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자무시는 여기서 물질 매체의 유한함을 언급하면서 패터슨이 그동안 만들어왔던 창작물 대부분을 무로 만들어버린다. 발표되지 않은 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백업하지 않은 문서는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다. 심지어 기술조차도 일어나버린 소멸을 막지 못한다. 일순간에 패터슨의 시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시는 사라지고 패터슨은 창작을 지속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창작의 상징이었던 폭포 앞에서 패터슨은 패터슨 시로 여행 온 일본인 시인을 만난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 정보를 꺼내며, 패터슨이 좋아하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 얘기를 꺼낸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에게, 몇 가지 사실을 가르쳐준다. 어떤 예술가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훌륭한 작품을 써냈다는 걸. 그리고 "때때로 빈 종이가 가장 큰 가능성을 보여주지요."라는 말을 남긴다. 일본인 시인이 떠난 뒤, 패터슨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이 일본인 시인을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매혹과 더불어 노자/장자부터 시작해 세이 쇼나곤의 오카시로 이어지는 관찰과 깨달음의 경지를 영화로 끌어온다.  아하, 라는 대사는 그 점에서 새로운 깨달음이자 시작이다.

창작물이 파괴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일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패터슨 시의 패터슨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빈 종이의 가능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패터슨은 로라의 깨달음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인 셈이다. 매번 새로운 것을 접근하고 만들어내는 로라의 접근방식은 패터슨에게도 적용되고 교훈을 남긴다. 결말은 새로운 공책과 일주일의 시작이다. 패터슨 시는 그렇게 하루를 살 것이고, 패터슨은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시를 계속 쓸 것이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은 그 점에서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인 정보에서, 미국의 일상을 찾아낸 뒤 일상의 신비로움과 창작의 회노애락을 사람들에게 깨우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그는 창작의 과정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존재한다고, 시의 문장을 마무리짓는다.

우리는 뮤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뮤즈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김목인, '뮤즈가 다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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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 / The Silence of the Sea] (1949)

장 피에르 멜빌은 이전까지 없는 길을 만들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멜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고 존 카사베티스가 그랬듯이 개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멜빌은 장편 데뷔작으로 베르코르 (본명 장 브륄레)의 소설 [바다의 침묵]을 점찍었다. 멜빌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도중, 런던 공습 아래에서 마음을 빼앗겼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가 그랬듯이 조합에 소속된 멜빌이 판권과 영화 제작 권리를 얻는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긴 투쟁 끝에 베르코르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영화화하는데 허락했다. 그 조건은 바로 24명의 레지스탕스 멤버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투표를 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말이 결정이었지, 24명 중 1명이라도 반대했다면 감독 멜빌은 다른 데뷔작을 들고와야 할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난 시기인데다 멜빌 역시 레지스탕스 출신이니 이 조건을 거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멜빌의 데뷔작은 어렵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프닝은 그 점에서 갓 장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짜 감독 멜빌의 조심스러움과 끝나버린 한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바다의 침묵] 도입부는 단순히 액자식 구조라 하기 힘들다. 멜빌은 책을 주고받는 과정을 익명화된 얼굴과 은밀한 행동, 장식 없는 하얀 표지의 책이라는 이미지로 일종의 범죄 거래처럼 묘사한 뒤, 책을 펼치면서 관객을 이야기로 인도한다. 이 이상한 오프닝은 어딘가 간절하다. 이후 대두될 범죄 장르적 묘사는 차치하더라도, 이 은밀한 행동과 이미지들은 억압되어 있다. 멜빌은 마치 얼마전까지 있었던 비시 프랑스 시절의 생활 양태가 어땠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사족같이 보일지 몰라도, 멜빌은 [바다의 침묵]을 만들면서 자신이 겪었던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억압은 [바다의 침묵]의 기이한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나치 군대가 주둔하고, 나치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한 노인과 노인의 질녀가 머물고 있는 집에 하숙하게 된다. 프랑스를 좋아하는 베르너는 친절하고 정중하게 노인과 노인의 질녀에게 말을 건다. 그 주제는 베르너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프랑스 문화에 대한 매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베르너는 두 사람이 있는 거실로 찾아와 말을 걸고 베르너의 대화 시도는 독백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침묵은 그 점에서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침묵은 매우 수동적인 저항이다. 침묵은 사람을 죽일수도, 바꿀수도 없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하는 강제된 상황을 거부할수는 있다.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살고 싶으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베르너는 그걸 알고 있다. 그가 계속 말을 걸러 오는 이유도, 그 침묵을 깨고 나치 독일로써 프랑스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도다. 베르코르는 그 긴장 관계를 서술 방식을 통해 구축한다. 원작 소설은 노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노인은 주변을 관찰하거나 최소한의 행동만 할뿐 끝나기 직전까지 베르너한테 말을 걸지 않기에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이내 질녀와 진주인공 베르너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버린다. 베르코르는 침묵을 이용해 시점을 교묘하게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소설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서술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레이션을 이용할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원작의 문장 일부가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시각적인 매체이기에 보이지 않는 나레이션은 보이는 이미지에게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간의 충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멜빌은 끊임없이 시선을 맞추려는 베르너와 노력과 아예 베르너에게 등진 두 사람을 프레임에 배치하면서 침묵의 권력 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대사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클로즈업를 배치하면서 침묵하는 얼굴의 부동성을 강조한다. 무수한 클로즈업은 베르너의 유창한 대사에 대항해 베르너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떤 지점에서 [바다의 침묵]은 정기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날마다 인물들은 위치가 배정받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원작과 영화 모두 권력을 쥐고 있는 베르너를 타자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술을 담당하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사실 '침묵'외는 다른 부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끔 베르너가 등장하지 않을때, 얘기를 나누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무거운 침묵 자체가 캐릭터화된 것처럼 보인다. 자연히 우리는 서술의 대상이 되는 베르너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베르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살짝 도취된듯 하면서 교양과 인류애, 잔혹한 현실 간의 괴리에 좌절감을 느끼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질녀는 베르너의 입체적인 모습에 망국의 치욕과 성적 긴장감을 동시에 느낀다. 

영화로 옮겨지면서 이 경향은 더 심화된다. 전반적으로 멜빌의 카메라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보다는 베르너를 따라다니는데 더 관심이 많아보인다. 영화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베르너가 파리로 가는 시퀀스에 있다. 이 시퀀스 도입부에서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파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는 베르너의 클로즈업과 파리의 화려함이 교차편집된다. 개선문과 역사적인 동상들을 올려다 보면서 기웃기웃거리는 베르너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로 프랑스 문화에 존경을 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베르너는 진심으로 나치 장교로써 권위와 이웃 국가 간의 교류라는 상반된 요소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시퀀스에서 멜빌은 전쟁이 막 끝난 파리에 서서 나치 시점에서 파리는 어떻게 다가왔을지 고민한다.

[바다의 침묵]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베르너가 침묵의 클로즈업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는 순간에 있다. 장교 클럽 시퀀스는 그 점에서 노인의 집 시퀀스를 뒤집어놓으면서 각성을 유도케한다. 베르너는 나치즘으로 찌든 동생과 장교들에게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베르너를 둘러싼 나치 장교들은 베르너를 조롱하며 아리아 우월주의와 파시즘의 파괴 욕구를 외친다. 같은 장소와 같은 샷, 같은 행동과 대사의 반복과 변주에서 벗어났을때 베르너는 자신이 얼마나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이상주의자며 자신을 향한 노인 가족의 '바다의 침묵'이 강제적으로 지워진 굴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멜빌은 실내극을 통풍시키면서 역사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무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인물은 자신들의 역할이 실로 하찮지만 폭력적인 걸 깨닫는다. 멜빌의 침묵의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베르코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하찮지만 폭압적인 족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베르너는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자신에게 주워진 위치를 알아버린 베르너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동부 전선으로 가기로 한다. 안락한 후방에서 허위와 기만에 갇혀 있기 보다는 실제로 행동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동부 전선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들에게 베르너의 선택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베르너는 다른 나치과 달리 순수하지만 열성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믿고 회의하고 말을 걸었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처럼 역사가 만들어버린 무대의 굴레를 부수지 못한다. 선함을 믿을수록 죽음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운명. 

그 어찌할수 없는 엄숙한 비극의 순간에서 베르너는 드디어 침묵의 클로즈업과 대화하게 된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 역시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불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 두마디만큼 처절하게 가슴을 찢는 대사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다소 단조로울수도 있는 젊은 감독의 연출을 불멸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도 침묵의 클로즈업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통해 영화는 역사의 폭력을 이해하고 끊을 단초를 제공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막 끝난 역사의 비극과 얘기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고, 거기서 영원히 남을 자신의 영화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르코르는 그 의도를 이해하고 이 영화를 세상에 공개했다. [바다의 침묵]은 가장 멜빌답거나 가장 완숙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간절한 멜빌의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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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타임 [Good Time] (2017)

(누설이 있습니다.)

[굿타임]의 시작은 뉴욕 상공이다. 사프디 형제는 그 상공에서 한 건물로 쭉 확대해 들어가다가 한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바꿔치기 한다. 이 도입부는 당혹스럽다. 뉴욕이라는 배경이 제시되자마자 마스터 샷 없이 한 인물의 내밀한 표정이 곧바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인물은 정상이 아니다. 닉이라 불리는 인물과 상담사와의 대화는 제대로 된 샷-리버스 샷 구조를 구축하지 못하고 계속 빗나간다. 부조리극 같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폐소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굿타임]을 보는건 그리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굿타임]은 이 장면 이후로도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클로즈 업의 미로로 관객을 인도하는 영화기 떄문이다.

이 불편한 대화 시퀀스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형 코니에게 방해받는다. 상담사에게 욕을 하고 닉을 끌고 나가는 코니. 이쯤되면 코니가 닉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코니는 닉를 데리고 은행으로 털기로 한다. 코니는 지옥같은 뉴욕이 싫고, 버지니아로 대표되는 남부로 동생과 떠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범죄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어설프다. 사프디 형제가 그들의 은행 털이를 묘사하는 부분도 비장르적이다. 대체 어느 강도가 무기 없이 협박문 하나로 은행을 턴단 말인가? 코니는 득의양양해하지만, 곧 그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는게 드러난다. [굿타임]의 도입부는 장르의 실패를 다루는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다.

곧 닉은 잡혀가고 코니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코니의 바뀐 목표는 닉의 보석금 획득이다. 하지만 브로커 (아이러니하게도 사프디 형제처럼 유대인이다.)에게 바칠 지폐는 손상되어 쓸 수 없고, 애인의 어머니 신용카드를 이용해 카드깡할 기회도 사라진다. 코니는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몰래 꺼내기로 하지만, 정작 데려왔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와중에 코니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코니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게 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랬듯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의와 관계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쯤되면 [굿타임]의 부조리가 단순히 장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성체처럼 주인공을 가지고 논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코니는 뭘 해도 사프디 형제와 로널드 브론스틴이 만든 미로를 뛰어넘을 수 없다. 코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뉴욕의 밤을 해메는 것 뿐이다. 하지만 코니는 오디세우스와 달리 영웅 서사가 될 수 없다. 대도시의 익명성과 대중 문화의 아이콘들은 여정을 CCTV 영상 기록처럼 만들어버리고, 코니의 덜떨어짐과 후술할 성격적 결함은 인물의 헤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분명 필름 느와르스러운 구조에도 코니는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조차 되지 못한다. '굿타임'은 '운수 좋은 날'이나 다름없다.

[굿타임]을 구성하는 클로즈업과 부감은 그 점에서 영화 속 미로를 대하는 사프디 형제의 관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 특히 코니는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처럼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혀 얘기를 늘어놓고 이는 끊임없이 다른 이의 클로즈업과 충돌을 일으킨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을때도 사프디 형제는 전경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미장센을 조밀하게 잡는다. 때문에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임에도 길을 못 찾고 해메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탈의 집 시퀀스는 [굿타임]의 동선이 어떤 식으로 혼돈을 주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클로즈업들은 시퀀스 사이에 배치된 롱 샷과 부감 샷 앞에서 그 절박함을 잃어버린다. 반대로 너무 넓어져서 인물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굿타임]은 클로즈업의 절박함과 롱 샷/부감의 하찮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물을 초라하게 만든다.

사프디 형제가 보여주는 미로의 세부 묘사들은 팝 아트에 기반한 표현주의로 세공되어 있다. 마리오 바바나 마이클 만을 컬러리스트로 초빙한듯한 형광빛 색채, 대중문화 아이콘과 르포식 영상 기법, 실험적인 일렉트로닉 뮤지션으로 유명한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가 제공한 1980년대 풍 사운드트랙 속에서 사프디 형제의 카메라는 춤을 추듯이 절박하게 목표를 향하는 인물과 혼돈스러운 공간을 오간다. 전반적으로 샷과 편집의 리듬은 감정과 혼돈에 맡기고 있다. 그 점에서 마약과 섹스, 우연으로 점철된 레이의 혼돈스러운 플래시백은 [굿타임]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당신은 이 영화를 [핫라인 마이애미] 세계에 떨어진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라고 부를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코니가 이 부조리한 미로에서 벗어나 동생을 구하려는 시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맥거핀화된다는 것이다. 초반부 닉이 구치소에서 두들겨맞는 시퀀스는 코니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하지만, 정작 영화는 그 동기에서 코니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중후반부가 되면 닉의 행보와 존재감은 사라지고 코니는 완전히 닉을 잊어버린듯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다.

닉이 코니에게 의지하고 있다는건 명백하다. 하지만 코니가 닉을 생각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그 이상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코니가 레이를 닉으로 착각하고 데려오는 시퀀스다. 아무리 그래도 코니와 닉은 20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을 것이다. 단순히 붕대를 감고 있다고 해서 남을 동생으로 착각한다는건 도무지 정상적인 판단력이라 할 수 없다. [굿타임]의 가장 중요한 의문점은 코니의 '착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코니의 부주의함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어쩌면 코니가 닉을 사랑하는건 마약을 향한 마약 중독자의 심정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코니는 닉이 없으면 우월해질수도, 자신감을 얻을수 없다. '네가 있어서 나는 훌륭하다.'는 반대로 말하자면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코니가 닉을 상담사에게 보내려는 할머니의 팔을 부수고 가출한 것도, 중독자의 독점욕에서 비롯된 저항에 가깝다. 코니는 닉을 마약처럼 사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매우 허약한 존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니의 사랑은 닉을 위기로 밀어넣는다. 닉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으며 그저 엉뚱한 말을 뱉으며 끌려다니는 인물이다. 닉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인물이다. 코니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굿타임]의 초라한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다. 코니는 닉을 어떻게 대할지 정상적인 방식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엇나간다. 이 와중에 마약이 들어간 스프라이트와 닉은 코니에게 그닥 다를 바 없어진다. 혈육 닉이 마약을 팔려는 레이로 바뀌는 과정은 마약 중독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혈육은 마약으로 대체될 수 없다. 코니에게 남은 것은 광폭하지만 왜소한 종말이다.

버지니아로 가자는 코니의 말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코니가 생각하는 뉴욕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상담사와 할머니가 있고, 춥고 외로운 곳이다. 코니는 뉴욕에서 빠져나가야지 형제가 행복해질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그게 다른 남부도 아니고 미국의 시발점 중 하나인 버지니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뉴욕의 군상들은 그 점에서 버지니아와 대비되는 현대 미국의 사회/정치적 텍스트를 함유하고 있다. 코니의 발버둥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흑인들이다. 유대인 브로커는 법망을 넘나들며 알트 라이트의 상징이 되버린 개구리 페페가 무분별한 향락과 범죄를 장식한다. 한편 코니의 체포와 마약상 레이의 추락사는 마치 유튜브 충격 범죄 실황처럼 부감 샷과 로우 앵글/롱 샷을 빌어 연출된다. 코니는 춥고 싸늘한 광란의 이미지로 점철된 현대 미국과 뉴욕이 싫고 동생을 데리고 미국의 개척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코니의 마지막 클로즈업이 일종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면 뉴욕 탈주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프디 형제는 코니가 실패한 이유를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프디 형제의 마지막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코니를 바라보는 사프디 형제의 시선이 어떤 건지 보여주고 있다. 코니를 가두고 있던 경찰차 창살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줌 인에 흐려져 사라진다. 이미지를 광폭하게 확대하는 것으로 뉴욕의 창살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연출로 창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걸 코니나, 사프디 형제나, 관객 모두 알고 있다. 코니는 그 실패를 끝으로 영화 속에서 퇴장한다.

남은 것은 닉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닉은 상담사를 따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들의 방으로 이동한다. 영화의 결말은 갑작스럽다. 환자들을 모아놓고 상담사는 물어본다. "무언가 좋아하는게 있으면 지나가세요."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들. "사탕을 좋아하시나요?" "사랑에 빠져본적 있나요?" "거짓말을 해본적이 있나요?" 환자들은 지나가고 당황해하던 닉 역시 그 질문에 대답하듯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는 군중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계속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그게 어떤 형태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사프디 형제는 어느 부분에서 편집되었는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한다. 이 시퀀스의 인물 동선은 마치 영화 내내 이어졌던 클로즈업을 은유하는것처럼 보인다.

다시 질문. "친구가 있으면 지나가세요." 닉이 지나간다.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 갑자기 카메라는 방 밖으로 나가 방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환자들을 보여준다. 이 카메라 위치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닉이 지나가던 지나가지 않던 상관없다. 닉은 형을 친구로 생각했고, 그 어설픈 은행 강도짓을 형제로써 우애를 다지는 과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닉은 코니와 함께 타락한 뉴욕을 떠나 태초의 버지니아에서 행복하게 지낼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니는 닉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고 파멸에 치달았다. 닉은 퀸스에 홀로 남겨졌다. 방 밖에서 닉은 다른 환자들, 나아가 영화 내내 부감 쇼트로 보여졌던 도시 풍경 속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과거 시제의 질문이었지만, 닉은 현재 시제로 외롭고 외로울 것이다. 홀로 남겨진 닉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한채 외로이 군중 속에서 휩쓸려 다닐 것이다. 이때 사프디 형제는 닉에게 연민을 금치 못한다. 이기 팝의 엔딩 주제곡은 그 연민의 감정을 외화면에서 '순수한 녀석과 망할 녀석은 하나였다', 라며 체화한다. 분명 사프디 형제는 [굿타임]에서 더 나아간 영화를 만들겠지만, 이 연민의 감정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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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이차선 [Two-Lane Blacktop] (1971)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2017/01/26 - [Deeper Into Movie/리뷰] - 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자유의 이차선]은 이전작처럼 길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길 위에 선 몬테 헬만의 인물들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고,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으로 서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전작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먼저 시대가 현대로 변했고 주인공 자리엔 잭 니콜슨 대신 비치 보이즈의 데니스 윌슨과 싱어송라이터 제임스 테일러가 대신하고 있다. (헬만이 사랑한 워렌 오츠는 계속 나온다.)

또한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길을 잃거나 도주해야 했던 이전작과 달리, [자유의 이차선]의 주인공들은 아예 목표 의식이 희박해져버렸다. 부조리한 상황 역시 훨씬 은밀하게 영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운전수와 정비공은 드래그 레이스를 한다. 그러다가 경찰이 등장해 도망쳐 어디론가 달린다. 대체 얼마나 달렸나 싶을까 잠시 차를 멈춰세웠을때 한 여자가 몰래 차를 탄다. 하지만 운전수와 정비공은 여자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운전수와 정비공이 G.T.O를 만나면서 헬만은 그만의 기이한 실존주의를 슬슬 펼쳐가기 시작한다. 운전수와 정비공과 달리 나이가 많아보이는 G.T.O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캐릭터다. 그는 히치하이킹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다를 떨어대며 끊임없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다. 그는 여자에게 영영 떠돌수 없다고 말하며, 스피드에만 집중하는 주인공 일행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자신에게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주인공 콤비랑 별반 다르지 않은 캐릭터다. 그의 수다는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헬만은 G.T.O.와 주인공 일행을 대조시키면서 캐릭터들이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관객이 재고하도록 한다.

이들이 뉴욕을 향해 경주 내기를 걸면서 [자유의 이차선]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자유의 이차선]은 모든 요소들은 헬만 특유의 완만한 리듬에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장소들은 비슷비슷하기 그지 없다. 저예산의 한계였을수도 있겠지만, 헬만이 선정한 공간들은 유달리 시간이 고여 흐르지 않는 곳들이다. 모텔, 휴게소, 농장, 주유소, 불법 드래그 레이싱, 한적한 시골길... 길과 길 사이엔 아무것도 없거나 무덤덤한 사건들 뿐이다. 가끔 등장하는 불법 드래그 레이싱 역시 그런 무덤덤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질주와 휴식 이 두 개의 행위를 오갈 뿐이며, 그 이상의 요소들은 집어넣지 않는다.

요컨데 [자유의 이차선]은 익명의 영화다. IMDB 가서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캐릭터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워렌 오츠가 맡은 G.T.O처럼 가명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들에게 개성을 부여하는 것은 미국 머슬카 문화와 거기서 파생된 레이싱, 기계 부품들이며 상대방에 대한 관심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자동차와 길 위의 열정을 그려냈던 [길 위에서] 같은 비트 기행 문학을 오마주/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서 그렸던 저항과 흥청망청한 열정은 밋밋한 미국 중서부 풍경 속에서 가라앉아버리고, 프리 섹스의 대안 공동체는 동승객에 대한 덤덤함으로 대체된다. 이 영화에는 섹스는 암시로 처리된다.

헬만은 대신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중음악부터 시작해 자동차 음향이 스크린을 채우고, 음향은 조용한 인물들과 밋밋한 풍경을 대신해 리듬을 그려간다. 기이하게도 이 순간 헬만은 로베르 브레송과 닮아간다. 이 영화의 연기는 제한적이다. 비전문 배우인 제임스 테일러와 데니스 윌슨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며 연기하는 워렌 오츠조차 많은 연기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브레송이 그랬듯이 공허함과 침묵의 공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어둠에 묻혀있다가 점점 밝아오는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클로즈업 쇼트들의 감흥은 쉽사리 잊기 힘들다.

대놓고 코믹한 영화는 아니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은근 무성 코미디스러운 구석이 있는 영화다. 주인공 일행과 G.T.O가 벌이는 경주는 사실상 전 재산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지만, 헬만은 이 경주를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에 은근히 가볍게 다루고 있다. 운전수랑 정비공은 그닥 잃어도 별 상관은 없어보이고, 여자는 애시당초 제 3자다. 심지어 이 경주에 안달복달해야할 G.T.O조차도 종종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정신 팔린 모습을 보인다. 캐리커처화된 히치하이킹 승객들도 그렇고 고작 앞섰다 싶으면 자동차가 고장나 뒤따라온 경쟁 상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헬만은 전지적 작가의 권능을 활용한 뒤 슬쩍 웃는다.

[자유의 이차선]이 작가로써 몬테 헬만을 파악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하면, 은유적이었던 서부극과 달리 좀 더 본격적으로 196-70년대 미국 청년 문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일단 주역 둘 캐스팅이 1960년대 미국 록 음악에 중요한 뮤지션이다. 또한 이 영화에 빼곡히 등장하는 자동차에 대한 디테일들은 히피즘과 결합된 자동차 개조 문화인 커스텀 컬처를 반영하고 있다. 어느 정도 상업적인 고려도 있었겠지만, 헬만은 팝 문화의 아이콘과 당대 로드 무비 장르를 끌어들여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실존적인 침묵 (실제로 헬만은 연극 무대에 있을땐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리기도 했다.)으로 가득찬 여정에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한다. 그들이 서부에서 시작해 뉴욕으로 가는 이유도 헐리우드에 대한 환멸과 뉴욕의 현실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당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성 캐릭터의 활용도 눈에 띈다. 다른 주인공들처럼 이름이 없는 이 여성 캐릭터는 [바람 속의 질주]와 [복수의 총성]에서 밀리 퍼킨스와 함께 발전시킨 도발적인 여성 캐릭터 활용과 맥이 닿아있다. 이 여자는 무심하게 남자들의 경주를 지켜보며 관계를 가지고 차를 바꿔탄다. 그녀는 애초에 어느 남자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캐릭터며, 자기 흥미와 욕망에 따라 여정을 함께 한다. 마지막에 이 여자가 떠나는 것으로 경주가 마무리되는 것도 흥미롭다. 여자는 마치 자동차가 질렸다듯이 휴게소에서 만난 바이크를 탄 남자랑 같이 떠나버리고 두 남자들의 경주는 흐지부지된다. 

G.T.O.는 여느때처럼 다른 손님을 태우며 자신의 차가 방금 전에 있었던 두 남자와의 경주에서 땄다고 거짓말한다. 한편 운전수와 수리공은 드래그 레이싱을 하러 간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에 가지 않고, 서부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그 사이의 황야를 방황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196-70년대 미국 도로를 달린다는 것, 나아가 청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무덤덤한 황야를 떠돌아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방황이 마냥 무기력한건 아니라고 헬만은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드래그 레이싱이 시작하기 전 불타오르는 필름이다. 이 불타오르는 필름이 [바람 속 질주] 마지막에 등장하는 질주하는 말과 주인공의 쇼트에서 확장된 건 명백하다. 헬만에게 196-70년대 미국 청년들의 삶은 과묵한 불꽃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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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2017/04/02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2017/09/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멀리서 마차가 다가온다. 제목 타이틀이 뜬 뒤 마차는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숲 속으로 들어온다. 두 남녀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만 다음 샷에서 갑자기 상황은 반전된다. “부드러움이 무슨 소용이죠?”라는 질문을 한 여자는 곧 모욕을 들으며 옷이 벗겨지고 남자는 여자를 벌하라고 마부들에게 명한다. 묶여있는 여자는 맞으면서 애원한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질것 같은 다음 샷에서 여자, 세브린느는 남자 피에르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우리 생각이요.”

조셉 케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루이스 부뉴엘의 [세브린느]의 도입부는 마치 농담처럼 시작한다. 피학적인 상상으로 사랑하는 남편과의 지고지순한 부부 관계를 전복하려는 세브린느의 속내를 피에르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멀쩡한 부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딘가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둘의 대화는 진심으로 위장하면서 문제의 근원에 닿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부뉴엘은 완벽하고 순종적인 부르주아 부부라는 정형적인 관계가 서로를 질식시키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부부는 다음 시퀀스에서 겨울 산으로 놀러간다. 보통 사람들은 겨울 산에서 소복히 쌓인 눈을 생각하지만, 부뉴엘은 한번도 하얀 눈으로 덮인 산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세브린느와 피에르는 눈 내린 마을을 걸어간다. 이때 바닥에 깔린 눈들은 더러워져 있다. 부뉴엘은 흰색의 순결함을 믿지 않는다. 후술할 세브린느의 하얀 옷과 연결해보면 이 눈 내린 마을은 캐릭터가 내세우는 순결함이 세속적인 욕망을 숨기는 커튼에 불과하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 잇송 씨를 만나게 된다. 이때 세브린느는 잇송을 불편해 하며, 잇송은 피에르를 보고 '자네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잇송이 식당을 떠나면서 한 말은 '밤을 맞으러 가봐야 되겠다'다. 그 시퀀스 직후 세브린느는 잇송과 동행했던 친구랑 (의미심장하게도 그 친구는 잇송을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택시를 타면서 앙리에트를 둘러싼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잇송이 보낸 꽃을 꽃고 이동하다가 꽃병을 깨트린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간 세브린느 화장수 병을 다시 깨트린다. "내가 왜 이러지?" 부뉴엘은 이 순간 최면을 건다. 부뉴엘은 무언가 깨지는 행위를 세브린느의 무의식에 등장하는 더러운 배관공에 대한 플래시백과 조응시키면서 이후 이어질 부르주아의 도덕률의 붕괴를 은유한다. 심지어 자신처럼 정숙했으리라 생각했던 피에르조차도 결혼 전에 창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린다.

잇송의 밤을 맞으러 간다는 대사는,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탈피하러 간다는 얘기며 세브린느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세브린느 역시 일탈하고 싶어한다. 이 순간 잇송이 다시 등장하는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순결해 오히려 페티시적인 (눈처럼) 흰 테니스 복장을 한 세브린느 앞에 잇송은, 은근슬쩍 암시했던 자신의 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불편해하는 세브린느에게 잇송은 아나이스의 창관을 알려준다. 남은 건 세브린느 자신의 선택 뿐이다. 물론 부르주아 룰에 순종적인 세브린느는 타락을 거부하려고 한다. 세브린느가 창관 근처에서 서성거릴때 드러나는 망설임은 다시 얘기치않은 플래시백을 불러오게끔 한다. 영성체을 거부하는 세브린느의 플래시백은 가톨릭을 향한 부뉴엘의 세속적인 저항이며, 동시에 보수적인 도덕률을 거부하기 힘들다는걸 드러낸다.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만나게 되고, 매춘을 하기로 결정한다. 아니아스는 세브린느에게 억지로 키스를 하는 것으로 욕망의 문을 여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세브린느가 만난 손님들은 낯설고 두렵기 그지없다. 악랄하게도 첫 매춘이 이뤄지는 시퀀스에서 부뉴엘은 아돌프라는 무례한 부르주아 남성 캐릭터를 데려온 뒤, 남성기와 사정을 암시하는 샴페인을 배치해 얌전하게 살아온 세브린느에게 충격 효과를 가한다. 어렵게 매춘을 마친 세브린느는 앓아누워 부르주아를 만나는걸 거부하고 한동안 매춘업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브린느는 결국 매춘업소로 돌아온다. 어째서일까?

부뉴엘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의 욕망이 영화 전체의 구조를 흔드는데 있다. [세브린느] 역시 루이스 부뉴엘의 뻔뻔스러운 욕망과 서사 구조에 대한 풍자적인 도발이 잘 드러나 있다. [세브린느]는 일단 시공간을 흐트러트린다. 이 영화의 소품들이나 배경은 분명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19세기적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마차라던가, 호화롭지만 공허해보이는 귀족 저택, 세브린느의 집은 이야기의 시공간을 의심케한다.반면 부뉴엘은 텔레비전을 아니아스의 창관에만 배치하면서 현대 문명을 매춘과 동일시시킨다. 19세기적 엄숙한 도덕에 갇힌 현대의 부르주아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창관에서 기괴한 욕망을 배출한다. 

부뉴엘은 매춘과 자본주의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부르주아의 허울과 위선을 조롱한다. 아니아스는 매춘부들에게 매번 예절과 교양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아니아스의 창관이 어떤 가치관으로 움직이는지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의 매춘부들은 처음엔 부르주아에 걸맞는 예절과 교양으로 맞이하지만, 그 예절과 교양은 이내 섹스라는 동물적인 행위 앞에서 벗겨진다. 교수와 샤를로트가 벌이는 SM극 도중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중단과 지속은 부르주아에 내재된 사회적 페르소나와 동물적 욕망의 기괴한 진자 운동을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와 부뉴엘은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이중성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이중성을 지켜보면서 세브린느의 비틀린 욕망은 분절적인 플래시백으로 분출된다. 이 플래시백에서 세브린느의 위치는 상당히 복잡하다. 어떤 플래시백에선 과감히 유리병을 깨는 잇송과 함께 피에르 앞에서 섹스하기도 하며 (NTR!), 어떤 플래시백에선 잇송 씨를 이기고 남성성을 뽐내는 (잇송은 '피에르에게 초콜릿이나 선물하라'고 세브린느에게 돈을 준다. 절대로 독립된 성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다.) 피에르에게 구출받는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명백한 점은 환상 속 세브린느가 아무리 피학적인 위치에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이 플래시백들은 세브린느의 주체적 욕망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플래시백은 중간중간 영화 서사를 가로막고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의 재구성을 유도하게 한다.

앓아누웠던 세브린느가 다시 매춘업소로 돌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춘을 한 세브린느를 묶어두고 피에르가 진흙을 던지면서 매도하는 환상은 여러모로 이중적이다. 이 환상은 순결을 포기하고 세속적으로 군 여성에 대한 징벌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세브린느 자신의 주체적인 피학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에르는 현실에선 세브린느의 피학 욕망을 충족해줄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세브린느는 매춘을 통해 자본가의 이면과 마주해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세브린느는 변한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세브린느는 환상 밖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고 매춘할때 입던 옷을 입고 피에르와 데이트를 할 정도로 변해간다.

[세브린느]의 전환점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모든 점에서 완벽한 피에르의 안티테제다. 아무런 직업 없이 아버지뻘인 히폴리테 (부뉴엘은 이 캐릭터에 은연중에 스페인 망명객이라는 암시를 남긴다.)와 함께 퍽치기 범죄를 저지르며, 등에 새겨진 상처와 빠진 이를 드러내며 여성에게 폭력적인 마르셀은 야성적인 청년 무산자이다. 세브린느의 피학적인 정열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남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마르셀을 묘사할때 부뉴엘은 명백히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셀이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는 개선문 근처며 그 주변에서는 엑스트라가 진 세버그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잘 될 것만 같았던 마르셀과 세브린느의 관계는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메꽃, 오후의 미녀, Belle De Jour. 세브린느는 오후에만 욕망에 충실해질수 있는 불완전한 부르주아의 죄수다. 세브린느에게 매춘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폭력적이고 여자를 소유하려는 마르셀에게 매춘부 세브린느는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존재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아닌 매일의 미녀 Belle de Chaque jour가 되야 한다. 하지만 마르셀의 욕망은 내려치려는 허리띠 앞에서 당당한 세브린느 앞에서 좌절된다. 마르셀이 있는 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될수 없다는 걸 안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떠난다. 아니아스의 억지 키스로 열어젖힌 욕망의 문은 세브린느가 아니아스에게 키스하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기어이 세브린느의 사적 영역에 들어선 마르셀은 진실을 폭로하겠다고 세브린느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던 마르셀은 피에르의 사진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한다. 세브린느가 선택한 욕망의 충족과 통제는 궁극적으로 피에르를 사랑하기 위해서였고, 세브린느와 피에르 사이에서 자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걸 마르셀은 알아버린다. 좌절한 마르셀은 모든 관계를 파탄내고 피에르를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고 마르셀은 마치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미셸 푸가드처럼 롱 숏 속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는다. 부뉴엘은 마르셀을 통해 [네 멋대로 해라]를 패러디하면서 프랑스 누벨바그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남기고 있다. 아마 부뉴엘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프랑스 청년 세대의 좌절과 기득권을 향한 파괴 본능을 잡아냈던 걸지도 모른다.

남은 건 반신불수가 된 피에르와 정숙한 부인으로 돌아온 세브린느다. 이때 잇송 씨가 다시 등장한다. 피에르를 은연중에 깔보고 있었던 잇송은 안타까움을 보이면서 동시에 세브린느에게 대신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한다. 왜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것일까? 잇송은 피에르는 자신에게 헌신하는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자면 세브린느 역시 자신에게 여전히 다정한 피에르에 대해 사랑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되는 것으로 사랑을 유지하면서도 욕망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아냈지만, 결국 엇나가버렸다. 당신이 총에 맞은 이후 꿈을 꾸지 않는다는 세브린느의 고백은 기괴한 순정을 담고 있다.

부뉴엘은 서로를 향한 이 기괴한 헌신을 비웃지 않는다. 잇송에게 사실을 들은 후 눈물을 흘리던 피에르가 일어나는 샷은, 부뉴엘식 현실 파괴지만 조롱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일어난 피에르는 세브린느를 비난하지 않고 대신 휴가를 떠나자고 말한다. 이때 마차 방울 소리가 울리고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말한다. "저 소리 들려요?" 소리를 따라 발코니로 나간 세브린느의 시점 샷 뒤에 이어진 반응 샷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마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마차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세브린느를 향한 반응 샷임에도 가상선이 파괴된 이 샷은, 더 이상 굴절된 욕망과 조응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라진다. 부뉴엘은 세브린느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일탈은 큰 죄가 아니였으며, 그저 왜곡된 부르주아 체제 하에 세속적인 해소 행위에 불과했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세브린느는 욕망의 소리를 피에르와 공유하면서 행복해진다. 이상한 꿈은 끝났고 남은 것은 달콤한 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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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룸 [Jalsaghar / The Music Room] (1958)

사티야지트 레이의 데뷔작인 아푸 삼부작은 네오 리얼리즘에 기반한 성장기였다면, 그 이후 영화들은 그 틀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동료들이 그랬듯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붙들려는 영화적 시도와 개성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네번째 영화 [뮤직 룸]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쇠락과 닮아간다. 이 영화는 아푸 삼부작처럼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하기엔 형식적인 매혹이 어른거리며, 양식화된 비극이라고 하기엔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의 근대화와 구세대의 몰락이라는 현지의 화두를 잡고 있다. 어느쪽이든 사티야지트는 [뮤직 룸]을 통해 평생을 추구할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상징과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음악실이 등장하는 이상,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서민이 아닌 유한계급의 사람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할 것이다. 이야기는 1920년대 인도에서 시작한다. 후주르 로이는 귀족 자제의 후예다. 그는 생활력이 없고 음악실에서 인도 전통 음악가들을 불러 소일한다. 하지만 잘못된 영지 경영과 더불어 서구 문명에 보수적인 후주르의 행태는 그를 점점 몰락의 길로 몰아넣는다. 이웃집 사채업자인 마힘 강굴리는 그 틈을 노려 빠르게 성장하지만, 후주르는 그의 성장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사실 연대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비스콘티에게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아직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고저택에 들어가지 않았던 시절이다.), [위대한 앰버슨가]라던가 영국 고딕 소설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원작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사티야지트와 원작자 타라상카 밴디오파댜아이가 어떤 의도로 이 이야기를 끌어왔는지, 인도 문학에서 이런 주제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애매한 추측에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다만 후주르 로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점들이라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영지의 음습한 분위기, 신화적인 몰락은 식민지 시절 수입된 영국 고딕 문학에 등장하는 몰락한 시골 귀족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는건 분명하다. 서구 문명에 대해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티야지트 본인 역시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직 룸]의 기이한 매력은 단순히 서구 문학 전통의 충실한 이식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인도 문화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일지도 모르겠지만, 후주르 로이의 몰락은 영국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비논리적인 박력으로 진행된다. 후주르의 아들과 부인이 사망하는 순간 절제된 샷은 되려 불안감을 스멀스멀 퍼트리며, 아무도 없는 음악실을 쓸쓸히 머무르는 후주르를 덩그러니 보여줄때 카메라는 후주르의 절망을 샹들리에와 같이 모조리 퍼올려낸다. 후주르가 음악실에 슨 거미줄을 건져내는 샷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폐허에 대한 매혹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평범해야 할 샷을 환각처럼 만들어버린다. 이 모든 것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흑백 영화의 음영을 마치 판화처럼 사용한다. 형식으로 보면 [뮤직 룸]은 예정된 몰락에 대한 공포를 그리는 공포 영화나 다름 없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사기일 것이다. 사티야지트가 음악실을 채우는 음악은 쉐나이를 비롯한 벵갈 전통 음악이다. 영화 속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타블로와 시타르 소리는 드론 음악 특유의 정적인 흐름과 울림이 있다. 사티야지트는 드론이 가지고 있는 음향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연주 장면을 찍을때 느린 줌인과 고정된 카메라는 마치 연주자가 영원히 연주할것마냥 그 순간을 담아낸다. 그때만큼은 [뮤직 룸]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후주르의 심상에 공감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샹들리에 위에 깔리는 시타르 소리는 그 점에서 [뮤직 룸]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면 추나 다름없다.

그러나 [뮤직 룸]은 후주르의 심상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후주르를 다룰 때 사티야지트는 냉정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3시간이 아닌 100분이다. 간결하다면 간결한 러닝타임이다. 비극적인 몰락을 다루지만, 사티야지트는 후주르를 다룰때 그가 현실적으로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제시한다. 하인, 부인, 심지어 정부나 그가 경멸하는 강굴리 가까지... 하지만 후주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음악실에서 멋진 전통 음악들을 소개하고 향유하는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지주의 운명이라고 자기합리화한다. 그 자기합리화의 허약함이 드러난다는건 명백하다. [뮤직 룸]은 사티야지트는 후주르의 인도 전통 예술에 대한 집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의 몰락을 가차없이 밀어붙인다. 어떨땐 지나치게 혹독하다 싶을 정도다.

자연히 [뮤직 룸]은 양가적일수 밖에 없다. 우리는 후주르의 몰락을 그러게 왜 저런 멍청한 선택을 하나, 싶은 심정으로 보면서도 그가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매혹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은 거부하기 힘든 법. 실상 사티야지트는 강굴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그의 영악한 처세술은 인정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예술엔 공감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강굴리의 음악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뮤직 룸]에서 사티야지트는 근대 문명과 전통 문명 사이에서 상반된 인물들을 배치하고 고민한다. 그 고민은 아시아가 맞이해야 했던 고민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은 구시대의 종말이다. 후주르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고집의 결과이지만, 기이하고도 장엄한 몰락이기도 하다. 그는 예정된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 화려하게 선형적인 몽타주를 흐트러트리고 죽는다. 불꽃처럼 불타오르는 결말을 정리하며 사티야지트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수 없더라도, 후주르는 쉽게 타자화할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후주르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돈키호테적인 사랑은 정녕 가치 없었던 것일까? 그의 비극이 시대와 전혀 연관 없는 것일까? 후주르는 그 점에서 인간적인 결함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캐릭터다. [뮤직 룸]은 그 인간적인 결함과 시대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몰락의 애잔함을 정교한 영화적 형식과 맞물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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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깊은 욕망 [神々の深き欲望 / The Profound Desire of the Gods]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시작은 바다 생물들의 모습이다. 꿈틀거리는 이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해보인다. 이 위험천만한 생물들은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가 그랬듯이 이마무라는 자연 근처에서 영화를 시작할때, 강렬한 생물 이미지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마무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의 이미지를 잘게 쪼개 나열한 뒤 그 위에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배치한다. 그 다음 우마와 네키치로 대표되는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등장시키면서, 도덕률을 어기고 본능에 따라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자연과 근친 상간이라는 두 이미지는 [신들의 깊은 욕망], 나아가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앞에서 신 남매의 근친 관계와 섬의 탄생을 다루는 전래 민요를 부르는 가객의 모습이다. 인류 문화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예술 양태를 꼽으라면 노래와 그림, 연극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깊은 욕망]을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다. 가객의 노래는 [신들의 깊은 욕망]을 휘감는 원초적인 자연과 근친상간적인 관계가 신화적 기반에 바탕에 두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마무라는 영화라는 매체가 문명에 기반한 것이며, 이 서사를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선 신화적인 화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입부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섬에 사는 우마와 네키치는 근친상간적 관계이며 네키치에겐 전 부인에게 얻은 카메타로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토리코라는 자식이 있다. 네키치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바다에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낚시를 하는 바람에, 바위를 떨어트릴 구멍을 만들라는 벌을 받는다. 한편 우마는 류 류겐이라는 지역 유지의 첩으로 무녀일을 하고 있으며, 카메타로는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때 카리야라는 측량 기사가 제당 공장 개발건으로 도쿄에서 내려온다. 전임 시마지리를 찾아온 카리야는 어떻게든 공장 개발을 하고 싶어하고 카메타로는 카리야를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네키치의 방해와 더불어 카리야는 토리코에게 빠져버린다. 하지만 개발의 손길은 서서히 쿠라게 섬으로 다가오고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맞는다.

[신들의 깊은 욕망]의 절반은 기가 약한 문명인이 쿠라게 섬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끌려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리야는 개발을 위해 섬으로 찾아오지만, 옛 동료는 섬에 동화해버렸다는걸 발견한다. 카리야는 측량을 위해 섬의 숲으로 들어가지만, 마을 사람들과 문명의 연계를 담당하는 류는 그 영역이 신성한 무녀들의 영역이라고 뜯어말린다. 카리야의 눈에는 쿠라게 마을은 알 수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지만, 그는 혼자 왔기에 마을 전체의 규칙을 깨부술 수 없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카리야의 의지는 점점 시들어가고 때마침 끼어든 네키치의 계략과 토리코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버린다. 카리야는 후토리 가에 편입되어 있는 동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반면 후토리 가는 복잡하다. 이미 [인류학 입문] 같은 영화에서 근친상간적 관계와 기괴한 욕망에 탐닉하며 광기에 빠져드는 인물을 차분히 보여줬던 이마무라 쇼헤이는 후토리 가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댄다. 후토리 가의 부자 네키치와 카메타로는 둘 다 쿠라게 마을의 아웃사이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며 마을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탈주의 방법은 차이가 난다. 네키치 부자가 무인도로 건너와 섬 밖을 빠져나가는 걸 얘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네키치는 폭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지만, 실상은 마을에 내려오는 미신에 매혹되어 있다. 그는 근친상간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돌이 떨어질 구멍을 파며, 개발 계획에 대해 마뜩치 않아한다. 구멍에 돌이 들어가는 순간 네키치는 우마와 함께 신화에 등장하는 무인도에 정착할 생각이다. 네키치는 그 점에서 신화적인 욕망과 탈주를 꿈꾸는 자다.

반대로 카메타로는 처음에 카리야 기사의 조수로 배치되는 장면도 그렇지만, 쿠라게 마을 자체를 지긋지긋해한다. 카메타로는 문명화된 술집과 카리야 기사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 문명 사회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카메타로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탈주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지만, 그가 선택한 탈주 방법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런 식으로는 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카리야 기사로 대표되는 본토의 문명만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카메타로는 가문에 내려오는 근친상간 관계를 거부하는 자다. 영화 초반 토리코의 유혹에도 카메타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짜증만 낼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남자들 사이엔 여자들이 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끌어가는 기괴한 에너지는 근친상간 관계의 목표이자, 주체인 여성들에게서 비롯된다. 이 둘이 마을의 샤머니즘 전통과 연계되어있는 캐릭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지역 유지의 집에 강제로 머물며 성적인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오빠 네키치와의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마도 인상적이지만 토리코는 이마무라가 만들어낸 여성상 중에서도 강렬하기 그지 없다. 정신박약을 앓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인 토리코 앞에서 전통과 문명은 일시적으로 대립이 무화된다. 토리코가 미국에서 온 속옷을 입고 좋아하는 장면과 신내림을 받는 장면은 토리코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두 세계를 포섭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토리코의 불가해함은, [신들의 깊은 욕망] 전체를 이끌어가는 우연과 초자연적 전개와 맞물려 들어가며 영화의 신화적 성격을 강화한다.

이마무라는 [인류학 입문]에서도 그랬듯이 근친상간을, 문명의 도덕률을 반하는 행위며 자연과 가깝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매혹을 보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이 문명과 자연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서사를 진행했던 [인류학 입문]과 달리 자연에서 진행되는 영화인지라 이런 대비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리야와 토리코의 관계가 있다. 카리야는 토리코랑 사랑을 나눌때도 마치 여동생 다루듯이 다루고, 주변 사람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진짜 근친상간 관계인 네키치와 우마에 이르면 더 할말이 없다. 네키치와 우마의 관계는 어떤 사랑보다도 순수하기에 더욱 기괴하다. 네키치가 구멍을 파는 행위는, 지극히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기괴한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국엔 승자는 현대 문명이다. 역설적으로 그 문명이 들어서는 과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쿠라게의 미신에 속해있던 후토리 가의 가장 야마모리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뒤 죽는다. 그리고 돌이 구멍 속으로 들어간 뒤 인물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우마는 노로로써 힘을 잃고, 토리코가 대신 우마를 잇는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토리코가 노로의 힘과 의무를 이해하기 만무하다. 카리야는 도쿄로 돌아가버리고 노로로 대표되는 마을의 샤머니즘적 전통은 몰락한다. 여기서 이마무라는 미신을 지탱하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미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때 어떻게 사람들은 스스로 전통과 미신을 폐기처분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네키치와 우마의 파멸 시퀀스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신화/제의적 속성을 밀어붙이는 시퀀스다. 이마무라는 여기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망망대해에서 도망가려는 네키치와 우마, 그리고 그들을 쫓는 마을 사람들의 동선을 서스펜스를 빌어 쉴새없이 밀어붙인다. 특히 말 없이 가면을 쓴 채 네키치와 우마를 쫓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호러 영화 속 살인마와 다름없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 자체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증오와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은 작은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이 와중에 카메타로는 문명 사회로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와 고모를 살해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폭력을 받아들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과거의 복수다.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쿠라게 마을은 비행장과 코카콜라가 자연스러운 곳이 된다. 영화 후반부에 사라진 카리야는 아무렇지 않게 본처와 외가 사람들을 끌고 자본가 계급 행사를 한다. 카리야 앞에 나타난 건 얼마 전 고향으로 돌아와 기관사가 된 카메타로다. 카리야는 변해버린 쿠라게 마을을 둘러보며 미신을 믿었던 마을은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한다. 하지만 고민에 잠겨 있는 카메타로는 카리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쿄에 있을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그 날 있었던 일이 마을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이에 대답하듯이 이마무라는 기차를 운전하는 카메타로 시점 샷으로 수풀 사이로 뛰어가는 토리코를 툭 던져놓는다. 문명의 아이콘인 기차는 갑자기 멈춰서고 카메타로는 극도의 충격과 흥분 상태에 빠진다. 카메타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카메타로 다음에 우마를 묶었던 붉은 돛을 단 빈 배가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분명한 것은 토리코와 붉은 돛의 샷은 유령처럼 홀연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쿠라게를 상징하는 토리코와 우마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리야 기사는 토리코 얘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즉슨 카리야는 토리코랑 이 섬 자체를 백일몽처럼 여기고 있다.)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토리코는 무녀의 춤을 추듯이 격렬하게 등장해 기차를 신경쓰지 않고 달려가다가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토리코로 대표되는 대자연은 자신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킨 쿠라게 마을과 본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이마무라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쿠라게 마을은 과거의 미신을 벗어던진 곳인가? 이마무라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쿠라게 마을의 근대화는 결국엔 제물이 필요했고, 이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다시 폭력적인 신화적 제의를 거쳐야 했다. 이마무라는 문명은 쿠라게 마을에서 또다른 이름의 미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마무라는 그 과정을 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하는 문명과 작은 사회의 폐쇄성을 경멸한다. 그리고 언젠가 대자연과 대자연에서 비롯된 전통은 유령처럼 돌아와 근대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이 결말은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과 비슷하면서도 더 복잡한 인류학적 화두를 찌르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불러일으켰지만 [신들의 깊은 욕망]은 그 점에서 쇼치쿠/닛카츠 뉴웨이브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희대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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