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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드라마 (27)
머드 [Mud] (2012)


머드 (2013)

Mud 
8.2
감독
제프 니콜스
출연
매튜 매커너히, 타이 셰리던, 리즈 위더스푼, 제이콥 로플랜드, 마이클 섀넌
정보
드라마 | 미국 | 131 분 | 201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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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제프 니콜스 감독의 전작 [테이크 쉘터]의 평온하지만 그 아래엔 불길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기대하고 [머드]를 선택했다면 실망할수도 있다. [머드]의 세계는 [테이크 쉘터]의 암울함하고는 거리가 먼, 사랑과 희망에 대한 신화를 들려주는 전통적인 영화이니깐. 하지만 [머드]는 사실주의적인 배경과 캐릭터에 시적인 정념을 섞는 독특한 재능을 통해 남부 촌뜨기들이 펼치는 사랑에 대한 믿음과 드라마를 진솔하면서도 뚝심있게 설득하는 영화다.

제프 니콜스는 매우 미국적인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첫 두 영화에서 그는 주류 미국 영화가 다소 소홀하게 다뤘던 미국 중부와 남부 시골들을 돌아다니며 사실주의와 환상이 섞인 시선으로 거기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을 들어다 봤다. 다시 고향인 아칸소로 돌아와 찍은 [머드]는 마크 트웨인 (실제로 제프 니콜스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마크 트웨인을 꼽아왔다.)의 소년들의 모험물과 [스탠 바이 미]를 인용해 미시시피 강/늪지대 주변을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삶을 담아낸다. 실제로 영화는 미시시피 강이라는 배경과 그 유역의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니콜스 인터뷰에 따르면 사라져가는 미시시피 강 유역의 하층민 문화를 기록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머드]는 [비스트]가 그랬듯이 투박한 진흙 냄새와 주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영화다.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컷 하나는 그런 사라져가는 고향 풍토에 대한 애잔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주술성의 집약체는 주인공인 머드다. 주인공인 엘리스와 넥본에게 머드는 신기한 존재다.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인디언을 만난 이야기와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악마를 쫓는 십자가 징이 박힌 구두와 행운이 를 신고 총을 가진 머드는 아칸소 깡촌에서 이제 막 삶의 비루함을 깨달아가는 엘리스와 넥본에게 못미더운 아버지하고는 다른 신비로운 매력으로 가득찬 존재로 묘사된다. 그를 통해 소년들은 살인과 범죄, 배신과 음모, 폭행이라는 위험한 어른의 세계를 엿볼 기회를 얻게 된다. 

머드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주술성엔 기독교적인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만 (십자가 징이 박힌 구두가 대표적일것이다), 그게 반드시 종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재미있다. 제프 니콜스는 머드를 쫓는, 텍사스에서 넘어온 악당 일당들에게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특징을 부여하면서 대립항을 형성한다. 여기서 니콜스 감독은 소위 제도권 종교의 엄숙함 대신 미국 민중들 사이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적 전통에 대해 애정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애정은 다소 결함이 있는 등장 인물들에 대한 존중심으로도 이어진다. [머드]의 이야기는 신화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캐릭터들은 현실에서 있을법한 결함을 품고 있는 캐릭터들이다. 먼저 현실에 있는 시니어와 갈렌, 마리 리는 현실에 찌들어 팍팍하게 굴며 주니퍼는 보답받을수 없는 사랑의 도피에 겁을 내면서도 내심 머드가 자신의 곁에 영원히 있어주길 원하는 (일부 남성들에게 엉덩이 가벼운 Bitch라고 매도당할수 있는) 이기적인 성격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물론 중심 인물인 머드 역시 허풍과 허세로 가득한 인물이다. 그의 허풍과 허세는 산문처럼 지루한 현실에 시적인 매력을 가지게 하지만 동시에 무책임함도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누구도 그 단점에 매몰되게 놔두지 않는다.

영화는 엘리스와 넥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이들이 현실에 굳어있는 혈연 아버지들 (시니어와 갈렌)과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허풍을 거듭하면서 이상적인 사랑만을 찾아다니는 머드 사이를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엔 머드와 주니퍼를 자신의 사랑에 완벽한 롤모델으로 받아들였던 엘리스는 그러나 머드가 생각만큼 이상적인 인간이 아닌데다 주니퍼의 사랑이 식은데다 자신의 사랑마저 실패하는 좌절을 맛본 후 머드에게 실망과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이 실망과 분노는, 사랑이 현실에 패배하고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감정과 그런 패배에 대해 아무런 답이 없는 머드에 대한 엘리스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담겨 있다. 직후 엘리스가 뱀에게 물리는 장면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함과 주체할수 없는 분노와 실망이라는 감정에 자제를 잃은 엘리스의 심리를 담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실망과 분노의 과정을 통해 [머드]의 사려깊음이 드러나는데 바로 머드와 시니어라는 두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계가 가지고 있는 진심과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균형을 잡아내려고 하는 점에서 그렇다. 머드는 엘리스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위험해지는 걸 무릅쓰고 섬 밖으로 나오는 모험을 펼친다. (이 부분의 구조가 [테이크 쉘터] 마지막을 장식했던 '방공호에서 나가느냐 마느냐'라는 갈등의 구조하고 유사하다는게 재미있다.) 이 모험의 끝에서 머드는 스스로 책임질줄 아는 주니퍼가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감정을 정리하게 된다. 반대로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채 살아가던 시니어 부부와 톰, 주니퍼는 다시 한번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사이에서 사랑과 현실 속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깨닫게 된다.

이처럼 [머드]는 너무나 로맨틱하게 사랑의 믿음과 애잔함을 풀어내는 영화이여서 되려 평가절하당할 구석이 있는 영화다.  특히 [테이크 쉘터]에 끝없이 물이 새어들어오는 조각배를 바라보는듯한 절망감을 사랑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보였던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사실주의적인 배경과 캐릭터에 배합하는 능력과, 일견 성기면서도 어느 순간에 등장 인물들과 사건을 움직여 긴장감을 유지하는지를 아는 제프 니콜스의 재능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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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이즈 로스트 [All is Lost] (2013)


올 이즈 로스트 (2013)

All is Lost 
8.7
감독
J.C. 챈더
출연
로버트 레드포드
정보
액션 | 미국 | 106 분 | 2013-11-07

[마진 콜] 감독 J.C.챈더의 신작 [올 이즈 로스트]는 극도로 [마진 콜]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영화다. 우선 대도시 증권회사였던 무대가 바다로 옮겨졌고 앙상블 극에서 1인극으로 변해 사실상 로버트 레드포드가 혼자서 이끌고 간다. 하루 정도로 집약되었던 시간은 제법 길어졌으며 금융 상품을 놓고 다루던 유식한 대화들은 생존의 투쟁을 향한 개인의 말없는 투쟁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장르 역시 느와르에서 모험물로 바뀌었다. 냉소적으로 보면 자신의 능력을 제작자들에게 확인시켜주는 쇼케이스용 작품이라 폄하할 수도 있을텐데 막상 영화를 보면 [올 이즈 로스트]는 그런 냉소마저 날려버린 작지만 강력한, 고전적인 모험물이다.

자연 앞에 선 한 사람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그래비티]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건데, 단적으로 보면 장르적인 구성은 같으나 그것을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다. 먼저 챈더는 언급했다시피 캐릭터와 서사에 대한 설명을 극도로 줄인다. 우리가 이 주인공 남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육지에 남겨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정도며 당연하게도 주인공을 도와주는 캐릭터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전문가들의 생존 투쟁기를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 [그래비티]와 [올 이즈 로스트]는 방향이 달라진다. 구체적인 캐릭터 드라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풍경화의 일부처럼 추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올 이즈 로스트]의 추상적이고 단순한 필치로 묘사된 생존에 대한 의지는 인간 스스로 감내하고 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그래비티]랑 다르게 [올 이즈 로스트]에 등장하는 생존을 향한 투쟁은 철저히 이름 없는 주인공의 혼자만의 것이 된다. 다행히도 이 이름 없는 주인공의 투쟁은 재미있는데, 주인공이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하는지 잘 아는 전문가이며 동시에 그 전문가가 저지를수 있는 실수들도 빼곡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비티]의 삶에 대한 의지는, 인간의 영역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전지적 작가=신적 존재의 격려를 통해 이뤄진다면 [올 이즈 로스트]의 삶에 대한 의지는 그런 격려 없이 온전히 홀로 서고 실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마지막의 좌절 끝에 사람의 형상으로 찾아온다. 즉슨 [그래비티]의 힘겨움이 구체화된 라이언 박사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상처에서 비롯된다면, [올 이즈 로스트]의 힘겨움은 최소한의 드라마만 주어진 이름 없는 남자를 연기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늙고 허약한 얼굴 그 자체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어찌보면 [그래비티]보다 훨씬 추상화되어있고 훨씬 연기하기 어려운 타입의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레드포드의 연기는 그렇게 추상화된 드라마도 맛깔난 연기를 뽑아낸다. 

그 점에서 [올 이즈 로스트]는 [마진 콜]에서도 언뜻 보였던, 모호하고 추상적인 가치 보다 구체적인 실천에 대한 선호라는 J.C.챈더 특유의 가치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마진 콜]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증권 상품의 문제점이 방치되면서 실제 세계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통해 비관적인 전망과 현 세태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내놨다면 [올 이즈 로스트]는 생존을 향한 인간의 구체적인 행동들이 어떻게 실수를 만들고 실제적인 구원에 이르는가를 보여주면서 삶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방향성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휴머니즘적인 터치가 강해졌다고 할까.

[올 이즈 로스트] 정도만 되면 J.C.챈더는 소포모어 컴플렉스는 일거에 날렸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물론 서사 부분에서 극도로 추상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J.C.챈더는 해양조난물의 법칙을 잘 알고 배치하고 있으며 레드포드는 그에 걸맞는 강한 추진력을 영화에 부여하고 있다. 고전적인 오락물의 감각으로 맵시있게 빚어진 이 영화가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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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비티 [Gravity] (2013)


그래비티 (2013)

Gravity 
8.1
감독
알폰소 쿠아론
출연
산드라 블록, 조지 클루니, 에드 해리스, 오르토 이그나티우센, 폴 샤마
정보
SF, 드라마 | 미국 | 90 분 | 2013-10-17


[그래비티]의 시작은 우주에서 생존은 불가능하다는 자막이다. 그리고 그 생존이 불가능한 공간을 활보하는 라이언과 맷, 샤리프, 관제소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떤 캐릭터인지 설명한 뒤 곧바로 그들을 처절한 생존의 장으로 밀어넣는다. 생존이 불가능한 공간에서 생존을 한다는 점에서 [그래비티]는 공간이 캐릭터와 대립하는 유형의 영화다. 그 점에서 영화는 우주라는 공간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가라는 화두에 대답해야 하는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그 대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먼저 [그래비티]가 다루는 우주라는 공간은 세밀한 상상력으로 빼곡히 차 있는 공간이다. 한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그래비티]는 SF라기 보다는 모험 드라마에 가깝다는 점이다. 물론 케슬러 현상을 바탕으로 실제 일어날법한 일을 상상했다는 점에서 SF적인 접근이 보이긴 하지만 [그래비티]의 세계는 그런 '상상력'보다는 실제 자연의 법칙이 만드는 위기와 난제를 드라마의 기제로 썼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해양 어드벤처의 변주에 가깝다. (실제로 케슬러 효과와 비슷한 사례들이 제법 목격되곤 했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런 자연의 법칙이 인간을 공격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피하는 과정들을 롱테이크로 긴 체감 시간과 깊은 공간을 일치시키는 연출을 통해 무한히 이어진 우주를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 롱테이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긴장감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서사상의 정보와 이미지적 쾌감을 안겨주는데 성공했다. [샤이닝]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비티]는 공간을 극도로 확장시키는 것으로 폐소공포증을 유발시키는 영화이다.

[그래비티]는 설득력 있는 중력 묘사와 음향 없음과 우주 데브리와 구조물의 섬세한 배치와 충돌 계산을 이용한 서스펜스 연출은 굉장한 수준이며 한순간도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완벽하게 사실적이라 할 순 없지만 우주라는 공간에 대한 논리가 서 있으며 이는 와이드스크린이 등장했던 1950년대 관객들이 맛보았던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로 입봉한 스티브 프라이스의 음악도 상당한 공력을 발휘하고 있다.

생존이 불가능한 공간에서 생존을 하기 위해 투쟁을 한다는 점에서 [그래비티]는 돌아가기 위한 투쟁이며 동시에 잃어버렸던 삶의 영성을 찾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성의 투쟁은 무한으로 이뤄진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가려는 투쟁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이는 알폰소 쿠아론 개인의 '인본주의적인 리버럴 카톨릭'이라는 점에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P.D. 제임스의 원작을 거의 뜯어고치다시피했던 [칠드런 오브 맨]에서 드러났듯이 알폰소 쿠아론은 영성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무시하지 않지만 동시에 이런 영성을 신의 위치에서 놓는게 아닌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볼 수 있을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헀듯이 영화는 우주를 보여주면서도 정작 인물들이 매료되는 것은 공空과 미지의 공간인 우주가 아닌, 지구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은 맷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라이언이 지구에 있었던 상처와 그가 삶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 공과 미지의 공간이 본격적으로 그 경계를 침범하면서 등장 인물들은 갈등을 겪는다. 지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던 맷은 어쨌든 흔들리지 않고 경계에서 인간의 공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라이언은 그 동력에서 애를 먹고, 이 와중에 맷은 라이언만을 살려보내기 위해 무의 공간으로 자신을 보내는 걸로 희생한다. 이렇게 영화는 인간의 공간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어떤 신적인 개입 없이 자연적 현상과 인간만의 투쟁으로 인간의 공간으로 돌아가려는 걸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영성이 개입한다. 라이언이 간신히 돌파하고 탈출선에 도착하지만 자신의 뜻으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절망과 죽음의 유혹에 빠진다. 아난강과의 대화도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사실은 실패하지 않았지만), 죽음만을 기다리던 도중 맷이 귀환한다. 이 귀환이 어떤 위화감 없이 연출되어 있어서 우리는 진짜 맷이 살아돌아왔는가, 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다음 컷에서 맷은 사실 환상이였다는게 밝혀지고 라이언은 간신히 탈출선을 작동시키게 된다.

이 유령적인 존재로 드러나는 영성이 영화의 주제와 미학을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쿠아론은 종교에서 말하는 어떤 천당이나 신이 기거하는 완벽한 공간을 믿지 않는다. 그랬다면 영화는 무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아름답게 묘사해야 했다. 쿠아론은 그곳을 죽음의 공간으로 묘사하면서 거기서 돌아가려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공간에 대해 역설한다. 하지만 동시에 쿠아론은 그 무와 미지의 공간에서 오는 어떤 '무언가'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가능성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무언가'를 쿠아론은 에피파니적인 현상으로 묘사한다.

이는 AIDS 양성 검사 결과 조작과 그에 따른 오해라는 인간적인 재앙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러브 앤드 히스테리]에서 시작해 비참하고 살기 힘든 근미래의 현실에서 인간의 아이라는 즉물적이지만 숭고한 존재가 가져다주는 위대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칠드런 오브 맨]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캐릭터와 배경이 극도로 단순화되다보니 [칠드런 오브 맨]처럼 정치 사회적인 맥락과 풍성함은 없다. 대신 날렵하게 치고 빠지는 매력이 있긴 하다.

이 영성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몰입도와 동질감에 대한 차이가 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산드라 블록이 그 영성과 인간 세계 사이에서 번뇌하는 캐릭터를 끌고 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조지 클루니도 좋은 연기를 펼쳐보이긴 하지만 사정상 혼자서 영화를 끌고 가야하는 산드라 블록은 현실적인 여성상을 단단히 뿌리 박은채 아난강의 통신을 듣고 절망과 안도 같은 미묘한 감정들을 소화해내는 모습들은 그간 로맨틱 코미디의 여제로 소모되어왔던 산드라 블록의 연기에 대한 일말의 의혹을 (사실 [스피드]나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입증된거긴 하지만) 없애버린다.

[그래비티]는 삶의 뜻을 찾아가는 여정에 영성의 개입이라는 점에서 무신론자들을 몰입을 방해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쿠아론의 시선은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보며, 동시에 그 영성이 감성적으로 울렸다는 것도 순순히 인정하고 싶다. [칠드런 오브 맨]의 풍성한 정치/사회적인 텍스트와 과학적인 텍스트를 병치하는 쾌감은 없지만 [그래비티]는 우주 공간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전환과 삶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는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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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드 배케이션 [サッド ヴァケイション / Sad Vacation] (2007)


새드 배케이션 (2008)

Sad Vacation 
7.2
감독
아오야마 신지
출연
아사노 타다노부, 이시다 에리,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조, 이타야 유카
정보
드라마 | 일본 | 136 분 | 200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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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신지의 [새드 배케이션]은 짧게 [헬프리스]의 사건을 뉴스 기사처럼 건조하고 딱딱하게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는 어둠 속에서 사내들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곧이어 켄지는 중국인 아이인 아춘을 데리고 도망친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때 우리는 그가 자막에 등장했던 켄지와 유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때 아오야마는 키타큐슈 삼부작의 또다른 주인공인 [유레카]의 타무라 코즈에를 데려온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끔찍한 시간을 마주해야만 했던 그 소녀다. 다행히도 그 시간을 극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부 사와이 마코토도 떠나보낸 코즈에는 세상에 나설 준비를 하기 위해 '마미야 운수'라는 회사에 도착한다. 이 마미야 운수는 상처받고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기묘한 공동체이며 코즈에는 그 속에서 천천히 동화되어간다.

얽히지 않을 것만 같았던 켄지와 코즈에는 어쩌다보니 켄지가 자신을 떠난 어머니 치요코가 마미야 운수 사장과 결혼해 새로운 가정을 이뤄 살고 있는걸 발견하게 되면서 서로 엮이기 시작한다. 치요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마미야 운수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 켄지는 치요코의 반항적인 아들인 유스케에 접근을 하게 되고 이는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새드 배케이션]은 전작에서 정처없이 방황했던 사람들이 '마미야 운수'라는 한 장소에 모여들면서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만 개인과 커뮤니티, 그리고 그 경계를 떠돌아다니며 침잠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가족은 스케일이 커져 국가와 민족의 문제로 확장된다. "일본은 흘러온 섬들이 모여와 만들어진 곳"이라는 고토의 대사처럼, 아오야마는 일반적인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개인과 개인이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국가와 민족, 성별 간의 경계를 넘은 초월적인 가족을 만들고자 한다. 중국인 소년 아춘과 일본인 남성 켄지, 지적 장애인 여성 유리의 관계가 그렇다

마미야 운수는 그 점에서 영화가 지향하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유레카]의 사와이 마코토처럼, 마미야 운수의 사장인 마미야 시게키는 운수업을 하면서 뿌리가 없는 타자들을 끌어안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다. 그렇게 떠나거나 정박하거나 아니면 방황하는 사람들을 시게키는 아내인 치요코와 함께 커뮤니티를 이끌며 그들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준다. 어느 쪽이든 마미야 운수는 [유레카]의 마코토의 커뮤니티가 확장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어찌보면 아오야마가 그렇게 사랑했던 서부극의 역마차를 생각나게 하는 공간인데 상처받고 고아가 된 전작 등장 인물들이 마미야 운수로 온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시게키 역시 나중에 찾아온 켄지의 친구이자 코즈에의 사촌인 아키히코에게 그런 의도가 담긴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드 배케이션]의 정작 비혈연 가족과 공존하고 있는 혈연 가족에 대해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묘사한다. 어머니에게 복수하려는 켄지와 치요코의 관계가 그렇고 부모에게 반항하는 마미야 부부의 아들 유스케가 그렇다. 영화가 국가와 민족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개념을 들먹이는 중국인들이 '일본인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다'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관계를 파탄내는 인물들로 묘사하는 걸 보면 영화 속에서 혈연 가족이 민족, 국가하고 동일한 선상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아오야마는 이런 대안적 커뮤니티와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키타큐슈라는 지역적인 장소를 다루면서도 그 지역성가 나아가 국가의 경계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려고 한다. 이는 켄지가 유스케를 이용해 치요코에게 복수하려고 하다가 막판에 유스케를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그 발버둥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실패는 양가적이다. 대안적인 관계의 실패기도 하고 혈연가족을 파괴하려는 시도의 실패기도 하다. 전자의 실패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되었지만 견고한 공동체"가 만드는 거대한 벽에 좌절한 개인의 무기력함이라면, 후자의 실패는 어떤 거대한 가능성에 대한 수긍에 가깝다. 그 가능성을 영화는 모성으로 표현한다. [새드 배케이션]은 남자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국가나 민족이 강요한 여성상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켄지의 버팀목이 되며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사에코는 호스티스이며 유리는 지적 장애인이며 코즈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 전선에 뛰어든 여성이다. 어느 쪽이든 이 여성들은 일본 남성들이 원하는 순종적인 여성상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여성상은 일본적인 여성상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함과, 긍정성 나아가 생산성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동시에 켄지가 복수하려고 하는) 치요코는 여러모로 그 두 가지 가능성이 극화된 재미있는 캐릭터다. 얼핏보면 사근사근하고 항상 희망과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치요코는 전통적인 일본 여성의 희망과 국가가 가지고 있는 혈연성을 대표하는 여성상으로 보인다. 이를 대변하듯이 치요코는 갑자기 불쑥 나타난 친아들 켄지의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못미더운 유스케 대신 그가 시게키의 일을 잇길 원하며 "믿을건 혈연 밖에 없잖니."라고 말을 꺼낸다. 하지만 동시에 치요코는 혈연에 대한 신뢰를 보이면서도 새로운 커뮤니티를 긍정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단적으로 치요코는 오즈나 미조구치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전통을 대변하던 여성들과 달리 기모노를 입지 않고 나이를 잊은듯한 화사한 옷차림으로 회사를 이끌며 아춘과 유리를 비롯한 마미야 운수의 사람들을 통솔하고 이끄는 역할을 한다. 비교적 안전했던 오즈나 미조구치와 달리 치요코의 세계는 폭력과 강간이라는, 위협이 드러난다는 점도 그렇다.

허문영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치요코의 이런 모습은 매우 모순적이지만 동시에 흥미롭다. 때때로 영화 속 치요코의 모순성은 무서워보일때가 있는데, 이는 영화와 아오야마의 시점이 켄지에게 맞춰져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공존이 가능할까? 아오야마도 그렇고 나 역시 짐작이 가질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치요코는 괴물이 아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반전을 밝혀 치요코가 왜 켄지를 떠날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한다. 치요코는 켄지의 아버지에게 배반당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를 버린 치요코를 불행하게 하고자 했던 켄지의 복수는 결국 헛되고도 방법과 대상을 잘못 찾은 것으로 판명난다. 그런데 [헬프리스]에 따르면 켄지의 아버지는 인터내셔널 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켄지의 아버지와 치요코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일본 좌파의 실패를 상징했던 것일까? 어찌되었든 [새드 배케이션]의 여성들은 혈연과 비혈연 간의 대립을 무화시켜버리는 어떤 지점이 있는건 분명하다. 

그렇게 본다면 남자들은 아버지의 길을 (어찌보면 아오야마 신지에 등장하는 대안 가족적 커뮤니티는 상당히 좌파 코뮨적인 구석이 있다.) 따라가는 것으로 실패한 방법을 계속 시도해 성공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여자들은 그 실패를 거름삼아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개척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달의 사막]에서 카아이와 아키라가 버려진 시즈오카 고향집으로 돌아가 개척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아오야마는 무의식적으로 서부극에 등장하는 개척자들의 행동과 정신을 영화 인물들, 특히 여성 캐릭터들에게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여성이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인 탐색 대신 애매한 판타지가 담긴 결말로 대답을 유보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아오야마 신지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영화적인 언어를 찾지 못해서인듯 하다.

키타큐슈 삼부작이 그렇듯 [새드 배케이션]의 세계도 파탄난 캐릭터들의 방황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여기에 다른 지점이 개입한다. 우선 말보다 침묵이 많았던 [헬프리스]와 [유레카]와 달리 [새드 배케이션]은 상당히 말이 많아졌으며, 캐릭터들도 많이 등장한다. 테크닉적으로도 컷들 길이가 상당히 짧아지고 심지어 점프 컷까지 구사하는 현란한 기법을 동원한다. 다만 이 현란한 테크닉이 생각보다 먹히진 않고, [달의 사막]과 달리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는 있긴 하지만 캐릭터들이 잡다해져서 그 흐름들을 전부 따라잡다가 영화가 산만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코즈에가 투탑으로 나오고 있긴 하지만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에 가까운 역할을 취하고 있어서 역할 분배가 모호하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유레카] 이후 아오야마 신지는 자신이 만든 [유레카]를 넘어설 영화적 방법에 골몰하다가 조금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서부극에서 시작해 SF, 추리 스릴러, 호러 같은 어법들을 무차별로 끌어다 쓰는 것이 그렇다. [새드 배케이션]은 여전히 방법론을 정돈하지 못해 난삽하긴 하지만 그동안 친숙하게 다가왔던 키타큐슈 삼부작 주인공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과 동시에 이전작들과 다른 다소 우울하긴 해도 따뜻한 감수성이 어느 정도 신선한 구석이 있다. 이후 아오야마가 4년간의 공백 끝에 타무라 마사키와 헤어지고 새로운 촬영 감독과 함께 [도쿄 공원]을 내놓은 걸 보면 [새드 배케이션]은 지난 아오야마 신지 영화를 총합하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것이다. 한마디로 [새드 배케이션]은 슈퍼아오야마대전이라 할만하며 아오야마 신지를 사랑했던 팬이라면 체크할 필요는 있는 영화다.

P.S. 이 리뷰는 사실 허문영 평론가의 새드 배케이션 평론을 많이 베낀 글이다. 면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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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사막 [月の砂漠 / Desert Moon] (2001)


달의 사막 (0000)

Desert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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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아오야마 신지
출연
미카미 히로시, 나츠야기 이사오, 카시와바라 슈지, 아키요시 쿠미코, 하기와라 켄이치
정보
드라마 | 일본 | 128 분 | 0000-00-00

아오야마 신지의 [달의 사막]은 도입부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인물들을 보여 준 뒤 달을 아래로 수직 이동하면서 찍은 샷에 타이틀이 뜨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비치 보이즈의 'Caroline No.'가 깔리는 와중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장면들은 뉴스 클립들과 주인공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 주인공 가족의 개인사들을 담은 영상과 사진들을 엮은 몽타주들이다. 첫 두 샷이야 그렇다쳐도 영화 내용을 생각해보면 뉴스 클립들의 등장은 조금 이례적이다 할 수 있는데, 아오야마 감독은 이 뉴스클립이라는 거시적인 역사를 담은 영상과 홈비디오와 사진이라는 미시적인 역사를 담은 기록매체들을 엮어서 이 이야기를 일본 사회와 일본인 간의 관계를 그려내려고 하고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다. 그렇게보면 무력하게 누워있는 두 인물은 영화의 어떤 정서적 상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달의 사막]이 내세우는 주인공 나가이 쿄지는 일본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IT업계의 사장이다. 홍콩에서 온 사업가랑 영어랑 나누는 첫 장면부터 시작해 TV 방송에서 IT 벤처 신화로 소개되는 장면은 그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분명 쿄지는 물질적으로 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상태지만 인성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닮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한마디로 쿄지는 싸늘하고 냉정한 신자본주의 자본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가 사장 기대에 따르는 건 무리라고 하면서 그만두는 부하 직원에게 하는 "내가 필요한 인간은 일을 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부분과 '컴퓨터는 나같은 시니컬한 히피들이 만들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쿄지의 삭막하고도 즉물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부유하지만 삭막한 쿄지의 상태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쿄지의 집은 가정을 이룬 집이지만 중요한 가족 구성원(아내 아키라와 아이 카아이)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쿄지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멍하게 앉아서 가족이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룬 비디오를 보는 것으로 소일한다. 집은 이제 호텔이나 다름없어진 것이다. 쿄지의 집을 떠난 아키라와 카아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호텔이라는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호텔에서 밥을 먹고 카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남창 키이치를 불러 섹스를 나누며 남편 살해 의뢰를 하는 아키라와 그런 모습을 담고 있는 호텔은 쿄지의 집처럼 낯설고도 메말라있다.

여기에 남창 키이치가 개입한다. 그는 심지어 호텔에도 머물지 않고, 손님을 만나 몸을 팔고 돈을 받기 위해 아키라의 호텔과 집을 방문한다. 골판지 상자에서 잠을 자는 키이치는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쿄지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쿄지의 뒤틀린 듯한 속물적인 출세지향적인 가치관에 대해선 적대감을 표현한다. 단적으로 키이치는 쿄지가 자신에게 돈을 주며 아내랑 자달라고 부탁할때 "당신 변탭니까?"라고 대꾸하며 "가족을 위해 울어본적 있냐"고 힐난하듯이 묻는다.

키이치에게 돈은 아버지 세대들에게 기생해 살아가기 위한 도구이지 그 부를 쌓아 미래를 사려는 쿄지로 대표되는 사회 주류적 가치관에 대해 오히려 혐오하는 기색마저 보인다. 키이치가 자신의 골판지 상자를 태워버리고 미친듯이 웃는 장면은 그런 키이치의 '재물'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점에서 [달의 사막]은 공간의 묘사가 인물의 심리와 나아가 일본인의 심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그런 삭막하고 메말라버린 공간 속에서 이뤄지는 관계들은 키이치의 고객이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본주의의 관계 역시 쿄지의 회사처럼 쉽게 붕괴하고 있다.

[헬프리스]와 [유레카]에서도 다뤄졌듯이 아오야마의 가족은 소위 정상적인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해체된 상태며 개개인은 거기서 무력감과 공허함을 느낀다. 가족은 키이치의 보스 말마따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지만 작중 인물 대부분은 그 최소한의 조건조차 이루지 못한다. 이런 붕괴의 징조들은 카아이 엄마를 평소에도 아키라쨩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대는 사소한 대사부터 시작해 장인을 비웃는 쿄지에게 염증을 내며 떠나는 쿄지의 동료들, 총으로 아버지 세대에 속하는 쿄지를 굴복시키며 조롱하는 키이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쿄지의 회사가 붕괴하고 츠요시가 자신을 조롱하는 아버지를 죽이는데서 붕괴는 극에 달하게 된다. [달의 사막]에서는 이 붕괴의 풍경에 기록 매체를 중요한 장치로 다루면서 가족이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담고 있는 이미지들에 집착하는 개인들을 통해 과거에 집착하고 일본인들의 헛헛한 심정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가족의 분열 속에서 부모 세대는 종종 유령처럼 등장해 사람들을 괴롭히곤 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런 부모 세대를 디앤 아버스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를 인용해 유령처럼 묘사한다. 동시에 중반부에 이 유령들을 오즈 야스지로가 즐겨 다뤘던 일본 전원 공간과 다다미 샷에 밀어넣고 은밀하게 붕괴를 조장하고 있다. 이 영화가 오즈가 사랑했던 1.33:1이라는 스탠더드 사이즈로 찍힌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키라가 시골집 마루에 기대서서 바깥을 보는 동안 유려하게 날아올라 패닝해 들어왔을때 부모의 유령이 은근슬쩍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면은 아름다우면서도 오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이전과 달리 아키라가 그 유령들을 마주보면서 영화는 붕괴된 잔해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바로 신자본주의 붕괴 이후의 새로운 경제 체제와 가0족의 재건에 대한 문제다. 아키라와 카아이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을 치우고 닭을 키워 팔면서 아키라와 카아이는 기존 금융자본주의의 생태나 혜택에서 벗어난 경제 활동을 하는데 집은 더 이상 호텔도, 폐허도 아닌 새로운 생기와 빛이 스며든다. 하지만 이런 삶을 꾸려가는 과정은 부모 세대로 회귀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삶을 꿈꾸는 행태에 가깝다. 

그러나 아키라는 여전히 이 가정을 복원하는데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카아이랑 둘이서 살기로 했다'라고 거절하는 아키라의 모습은 쿄지의 선례처럼 가정이 실패할것이라는 주저함이 담겨있다. 반대로 쿄지와 키이치는 그 가정에 들어가고 싶어서 초조해한다. 이런 주저함과 초조함은 결국 마지막에 쿄지를 죽이려고 하는 키이치로 폭발하게 되는데 여기서 아키라는 쿄지에게 '같이 살면 안되냐'라는 질문을 던져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키라가 쿄지를 마지막에 '타인'으로써 받아들인다는게 재미있다. 결국엔 아오야마는 혈연으로써 가족 복구가 아닌, '타인들끼리 유대로써'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것일까?

[달의 사막]의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들을 풀어가는 서사들과 장면들 간의 합이 지나치게 느슨하고 평탄하게 흘러간다는 점이 있다. 전작 [유레카]도 다소 성긴 구성이였지만 한 곳에 고여있는 상처의 시간과 풍경을 질기게 관찰하면서 생기는 강력한 정서적 힘이 관객을 단단히 얽어매었다면 [달의 사막]은 정서적 힘을 대부분을 포기하고 건조하고 날 선 느낌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그 건조함이 생각보다 효과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아키라 부분과 쿄지와 키이치 부분이 그렇게 잘 엮여 있진 않고 조금 투박하고 주제에서 벗어난 현학적인 대사도 눈에 보인다. 때문에 영화는 아오야마가 의도한 바와 달리 그저그런 홈드라마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이 점이 칸 영화제에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던 것 아닐까. 걸작이나 수작이 되기엔 부족한 점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의 전통을 공포 영화의 요소로 재전유하고자 하는 아오야마 신지의 야심이라던지 그 야심을 실현시키는 타무라 마사키의 유려한 카메라에 담긴 도쿄와 시즈오카 두 공간, 특유의 건조하고 메마른 분위기에 담긴 날카로운 통찰는 여전히 즐길만한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게 좀 더 꼼꼼히 엮였더라면 좋았을건데, 라는 아쉬움이 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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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T Crowd DVD 메뉴 영상

시즌 1

시즌 2

시즌 3은 영상이 없더라고요.

정신 나간 오덕 패러디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군요. 과연 양덕후는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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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크라우드The IT Crowd 시즌 1 간단감상

-간단히 말해서 영국판 빅뱅 이론입니다. 너드들이 벌이는 코메디라고 할까요.

-하지만 빅뱅 이론과 다른 점도 꽤 많습니다. 우선 빅뱅 이론의 코메디 대부분이 '전문적인 삼가 말하기'로 이뤄져있다면 IT 크라우드는 삼가 말하기가 거의 없는 대신-덕한 패러디도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DVD엔 많지만.-전통적인 시추에이션 코메디에 가깝습니다. 배우들 망가지는 것도 빅뱅 이론보다 한층 셉니다. 배우들 대부분이 멀쩡한 선남선녀들인데 괴상한 특수 분장과 괴성을 마구 질러대고 얼굴도 팍팍 구겨댑니다.

-게다가 이 세계에는 페니가 없습니다. (...) 다들 은혼 수준의 막장력-사장조차도!-에 휘말려 있는데 그나마 로이와 젠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 인물들을 꼬집는 역할을 하지만 미약하죠. 어찌보면 좀 과격한 캐릭터 설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과격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막장 행각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IT 크라우드는 [오피스](실제로 당 프로듀서가 참여했다고 그러더라고요.)에서 비롯된 브리티시 사무실 코메디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사무실을 배경으로 진행되며, 농담들도 거기에 맞춰져있습니다. 일단 배경이 되는 IT 부서를 설명하자면... 대략 플라네테스 애니판의 데브리 부서하고 묘사가 비슷합니다. 회사에서 왕따 당하는데다 지원은 안습하고 직원들도 그다지 의욕이 없어보이죠. 게다가 데브리 과와 마찬가지로 사무실이 지하 써름한 창고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경과 근무하는 세 멤버들 특성들 잘 살펴보면 어떤 상징이 있다는 걸 찾아내실수 있을 겁니다. 흑인/백인 혼혈, 여성, 아일랜드인, 고스족... 아무리 봐도 영국 사회 주류들은 아니죠. 이 점에서 IT 크라우드는 영국적인 풍자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IT 부서와 그 직원들은 화려하고 현대적인 대기업 지하에서 자신의 직종에서 죽어라 노력하지만 별다른 대접도 못받고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중하류층 화이트칼라 영국인들에 대한 캐리커처입니다. (너드 너드 그러지만 앞날이 짱짱한-심지어 쉘든도 버젓한 직장이 있죠.-빅뱅 이론과는 차원이 다르죠.) 그 외에도 은근히 현재 영국을 까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보면 그렇게 구질구질하지 않습니다. 활기차게 떠들어대고 괴상한 행동을 즐겨하는 이 인간들은 정말 재미있어요. 특히 젠이 하는 행동들은 황당하지만 정말 재미있습니다 (스타일 좋으시더라고요.). 은근히 귀엽기도 하고요. 데이트했던 남자에게 귀신으로 오해받는 에피소드에 거의 데굴데굴 굴려다녔습니다.

-전반적으로 짧습니다. 하루만에 1시즌을 완파했을 정도니깐요. (총 6화입니다.) 그 때문에 날렵하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조금 화수를 늘려서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을 늘렸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워낙이 날렵한지라 별 불만은 없습니다.

-아무튼 영국 코메디가 좋아하신다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배꼽을 확실히 책임져 드릴겁니다.

-참고로 음덕들을 위한 정보 두 가지. 오프닝 테마는 디바인 코메디의 닐 해넌이 맡았습니다. (닐 해넌하면 보통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전자 음악 스타일의 테마곡이여서 좀 놀랬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잘 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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