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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미국영화 (9)
자유의 이차선 [Two-Lane Blacktop] (1971)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2017/01/26 - [Deeper Into Movie/리뷰] - 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자유의 이차선]은 이전작처럼 길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길 위에 선 몬테 헬만의 인물들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고,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으로 서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전작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먼저 시대가 현대로 변했고 주인공 자리엔 잭 니콜슨 대신 비치 보이즈의 데니스 윌슨과 싱어송라이터 제임스 테일러가 대신하고 있다. (헬만이 사랑한 워렌 오츠는 계속 나온다.)

또한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길을 잃거나 도주해야 했던 이전작과 달리, [자유의 이차선]의 주인공들은 아예 목표 의식이 희박해져버렸다. 부조리한 상황 역시 훨씬 은밀하게 영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운전수와 정비공은 드래그 레이스를 한다. 그러다가 경찰이 등장해 도망쳐 어디론가 달린다. 대체 얼마나 달렸나 싶을까 잠시 차를 멈춰세웠을때 한 여자가 몰래 차를 탄다. 하지만 운전수와 정비공은 여자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운전수와 정비공이 G.T.O를 만나면서 헬만은 그만의 기이한 실존주의를 슬슬 펼쳐가기 시작한다. 운전수와 정비공과 달리 나이가 많아보이는 G.T.O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캐릭터다. 그는 히치하이킹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다를 떨어대며 끊임없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다. 그는 여자에게 영영 떠돌수 없다고 말하며, 스피드에만 집중하는 주인공 일행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자신에게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주인공 콤비랑 별반 다르지 않은 캐릭터다. 그의 수다는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헬만은 G.T.O.와 주인공 일행을 대조시키면서 캐릭터들이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관객이 재고하도록 한다.

이들이 뉴욕을 향해 경주 내기를 걸면서 [자유의 이차선]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자유의 이차선]은 모든 요소들은 헬만 특유의 완만한 리듬에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장소들은 비슷비슷하기 그지 없다. 저예산의 한계였을수도 있겠지만, 헬만이 선정한 공간들은 유달리 시간이 고여 흐르지 않는 곳들이다. 모텔, 휴게소, 농장, 주유소, 불법 드래그 레이싱, 한적한 시골길... 길과 길 사이엔 아무것도 없거나 무덤덤한 사건들 뿐이다. 가끔 등장하는 불법 드래그 레이싱 역시 그런 무덤덤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질주와 휴식 이 두 개의 행위를 오갈 뿐이며, 그 이상의 요소들은 집어넣지 않는다.

요컨데 [자유의 이차선]은 익명의 영화다. IMDB 가서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캐릭터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워렌 오츠가 맡은 G.T.O처럼 가명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들에게 개성을 부여하는 것은 미국 머슬카 문화와 거기서 파생된 레이싱, 기계 부품들이며 상대방에 대한 관심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자동차와 길 위의 열정을 그려냈던 [길 위에서] 같은 비트 기행 문학을 오마주/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서 그렸던 저항과 흥청망청한 열정은 밋밋한 미국 중서부 풍경 속에서 가라앉아버리고, 프리 섹스의 대안 공동체는 동승객에 대한 덤덤함으로 대체된다. 이 영화에는 섹스는 암시로 처리된다.

헬만은 대신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중음악부터 시작해 자동차 음향이 스크린을 채우고, 음향은 조용한 인물들과 밋밋한 풍경을 대신해 리듬을 그려간다. 기이하게도 이 순간 헬만은 로베르 브레송과 닮아간다. 이 영화의 연기는 제한적이다. 비전문 배우인 제임스 테일러와 데니스 윌슨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며 연기하는 워렌 오츠조차 많은 연기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브레송이 그랬듯이 공허함과 침묵의 공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어둠에 묻혀있다가 점점 밝아오는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클로즈업 쇼트들의 감흥은 쉽사리 잊기 힘들다.

대놓고 코믹한 영화는 아니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은근 무성 코미디스러운 구석이 있는 영화다. 주인공 일행과 G.T.O가 벌이는 경주는 사실상 전 재산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지만, 헬만은 이 경주를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에 은근히 가볍게 다루고 있다. 운전수랑 정비공은 그닥 잃어도 별 상관은 없어보이고, 여자는 애시당초 제 3자다. 심지어 이 경주에 안달복달해야할 G.T.O조차도 종종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정신 팔린 모습을 보인다. 캐리커처화된 히치하이킹 승객들도 그렇고 고작 앞섰다 싶으면 자동차가 고장나 뒤따라온 경쟁 상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헬만은 전지적 작가의 권능을 활용한 뒤 슬쩍 웃는다.

[자유의 이차선]이 작가로써 몬테 헬만을 파악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하면, 은유적이었던 서부극과 달리 좀 더 본격적으로 196-70년대 미국 청년 문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일단 주역 둘 캐스팅이 1960년대 미국 록 음악에 중요한 뮤지션이다. 또한 이 영화에 빼곡히 등장하는 자동차에 대한 디테일들은 히피즘과 결합된 자동차 개조 문화인 커스텀 컬처를 반영하고 있다. 어느 정도 상업적인 고려도 있었겠지만, 헬만은 팝 문화의 아이콘과 당대 로드 무비 장르를 끌어들여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실존적인 침묵 (실제로 헬만은 연극 무대에 있을땐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리기도 했다.)으로 가득찬 여정에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한다. 그들이 서부에서 시작해 뉴욕으로 가는 이유도 헐리우드에 대한 환멸과 뉴욕의 현실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당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성 캐릭터의 활용도 눈에 띈다. 다른 주인공들처럼 이름이 없는 이 여성 캐릭터는 [바람 속의 질주]와 [복수의 총성]에서 밀리 퍼킨스와 함께 발전시킨 도발적인 여성 캐릭터 활용과 맥이 닿아있다. 이 여자는 무심하게 남자들의 경주를 지켜보며 관계를 가지고 차를 바꿔탄다. 그녀는 애초에 어느 남자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캐릭터며, 자기 흥미와 욕망에 따라 여정을 함께 한다. 마지막에 이 여자가 떠나는 것으로 경주가 마무리되는 것도 흥미롭다. 여자는 마치 자동차가 질렸다듯이 휴게소에서 만난 바이크를 탄 남자랑 같이 떠나버리고 두 남자들의 경주는 흐지부지된다. 

G.T.O.는 여느때처럼 다른 손님을 태우며 자신의 차가 방금 전에 있었던 두 남자와의 경주에서 땄다고 거짓말한다. 한편 운전수와 수리공은 드래그 레이싱을 하러 간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에 가지 않고, 서부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그 사이의 황야를 방황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196-70년대 미국 도로를 달린다는 것, 나아가 청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무덤덤한 황야를 떠돌아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방황이 마냥 무기력한건 아니라고 헬만은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드래그 레이싱이 시작하기 전 불타오르는 필름이다. 이 불타오르는 필름이 [바람 속 질주] 마지막에 등장하는 질주하는 말과 주인공의 쇼트에서 확장된 건 명백하다. 헬만에게 196-70년대 미국 청년들의 삶은 과묵한 불꽃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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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The Lost City of Z] (2017)

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2016/05/29 - [Deeper Into Movie/리뷰] - 이민자 [The Immigrant] (2013)

제임스 그레이 팬덤은 갸우뚱했을지도 모른다. [이민자]로 현대와의 작별을 고한 제임스 그레이는 코스튬 드라마에 이어 고색창연한 모험 영화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도시 Z]는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원작을 기반으로 도시 Z를 찾아 아마존 밀림으로 떠났던 탐험가 퍼시 포셋를 다룬다. 영화 타이틀이 뜨는 순간은 의미심장하다. 어둠 속에서 아마존 원주민들이 불꽃을 피울때, 제임스 그레이는 타이틀을 띄워 저 불꽃이 있는 곳이 '잃어버린 도시 Z'이며 이 영화의 종점이라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 제임스 그레이는 사슴 사냥을 떠나는 영국군들을 보여준다. 부감 샷으로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 사슴은 Z이며, 그 Z를 쫓아 샛길로 들어서는 주인공 퍼시 포셋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길을 갈 것이다. 이후 그레이는 마침내 찾아낸 사슴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퍼시의 샷을 길게 보여주면서 그를 끌어당기는 운명의 힘을 예감케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퍼시는 자연을 폭력으로 굴종시킬수 있었으나, 문명 밖 세계인 아마존에서는 그런 행동이 불가능하다는걸 깨달을 것이다. 

그 다음 그레이는 포셋 부부를 사냥 축하 파티장으로 불러들이면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를 인용한다. 잘 차려 입었지만 불편해하는 (니나의 코르셋에 대한 농담이 대표적이다.) 예의바른 남녀들, 노란 색과 붉은 색의 조명과 색감, 그리고 드리워진 상류 사회의 그림자. 그레이는 포셋 가문에 드리워진 방탕함과 추문을 흘리면서 퍼시의 인정 욕구를 설명한다. 퍼시는 그레이의 다른 주인공들처럼 인정 욕구를 갈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이미 영국 사회에 편입된 머레이 경과 퍼시의 첫 만남을 보여줄때 그레이는 높낮이를 이용한 미장센으로 둘의 불화를 암시한다.

도입부로 퍼시의 캐릭터를 설명한 그레이는 퍼시를 런던으로 데려오면서 Z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당연히 퍼시의 첫 여정은 영국 제국주의의 첨병로써 수행한다.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써 퍼시 포셋은 두 나라 간의 국경을 정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영국 제국주의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퍼시는 여정 도중, 단순해보였던 아마존에 문명과 관련된 비밀이 있다는걸 알고 매혹된다. 퍼시가 느끼는 매혹은 장소의 물성에 대한 영화적 매혹이기도 하다. 그린 스크린과 CG의 시대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정말로 아마존으로 가서 배우를 고생시키면서 아마존이라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담아내고자 한다.

동시에 그레이는 아마존 밀림을 향한 퍼시의 도전을 좌절시키면서, 출발과 귀환의 구조를 만든다. 이 구조를 반복하면서 시간은 흘러가고 영국 제국주의와 상류층 사회에 대한 환멸과 미지의 도시 Z에 대한 동경은 더욱더 커져간다. [잃어버린 도시 Z]는 20세기 초입 유럽이 겪어야 했던 격렬한 변화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퍼시의 실패는 잭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료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1차 세계 대전으로 대표되는 19세기적 가치관의 몰락과 무지비한 현대 문명의 등장이기도 하다. 밀림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사람과 사회는 달라진다. 그레이는 그 변화에 애잔함을 느낀다. 영화 후반부에 퍼시가 자신은 늙었다고 장성한 아들에게 한탄하는 장면이 무게감이 느껴진다면, 그레이 특유의 인과율적인 작법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퍼시는 이 인과율 속에서 영국 사회가 바라는 세속적인 가치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Z와 아마존 문화를 존중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퍼시의 Z에 대한 매혹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퍼시 혼자의 것이 아니라는게 명백해진다. 먼저 퍼시의 아내 니나가 있다. 비록 퍼시의 여정에 동행하지 않지만, 그레이는 니나의 업적과 좌절을 통해 19세기 서구 문명의 여성 억압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 어떻게 여성들이 저항했는지 보여준다. 니나는 행복해지고자 발버둥쳤던 [이민자]의 에바에서 발전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한편 잭 같은 경우, 좀 더 복잡한 그레이의 가족 묘사에 맞닿아있다. 아직 어렸던 잭은 아버지의 부재에 상처받으면서도 그와 같이 있길 원한다.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동시에 부상당해 앞을 보지 못한 채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무력감과 씁쓸합을 느낀다. 퍼시의 가족들은 Z라는 궁극적인 목표 앞에서 고뇌하고 갈등한다.

포셋 가문의 사람들이 제임스 그레이 영화 주인공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커뮤니티의 편입 이외의 다른 길이 열려있다는 점이다. [잃어버린 도시 Z]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국에서 아마존으로 떠나는 과정을 간략화한다. 그러면서 한 인물이 갈망하는 공간을 현재 시공간에 서서히 겹쳐놓기 시작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 시퀀스를 앙상한 전장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철저하게 파괴된 공간 속에서 퍼시는 현대 문명에 염증을 느낀다. 동료를 잃고 염소 가스에 쓰러지는 이 시퀀스의 결말은 그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이때 그레이는 갑자기 영적인 순간을 마련한다. 부하들의 손에 이끌린 퍼시는 집시 점쟁이를 만나게 되고, 점쟁이는 퍼시에게 당신은 아마존과 도시 Z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순간 퍼시와 점쟁이는 전장이 아닌 아마존 숲 속에 있다. 

이 갑작스러운 뛰어넘음은 그레이의 인물들을 결말로 이끄는 운명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 Z는 변해가는 세상에 변치 않는 가치관이며, 그레이가 만들어냈던 등장인물들이 바라던 평화와 안식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던 그들은 Z로 가야만 하고, 기어이 영화 속 여정의 과정을 생략/단축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투 러버스]의 레너드가 그랬듯이 Z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가족에게서 떠나가야만 한다. 그레이는 가족과 이상향 사이에 있는 간극과 고뇌를 산발적인 플래시백으로 형상화한다. 퍼시는 여정 도중 고난을 겪을때마다 플래시백을 빌어 가족을 생각하며, 잭이 아버지 퍼시를 설득해 마지막 여정을 떠날때 등장하는 플래시백 역시 영국에 남겨진 가족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Z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을때, 운명은 그들을 미지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잃어버린 도시 Z]의 후반부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묵상이다. Z 근처에 있는 족장은 그들을 보고 '이 곳도 저 곳도 속하지 않은 영혼'이라며 머물 집을 찾으라고 말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잭과 퍼시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두려워하면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임을 보여줄때 영화는 정중한 침묵으로 가득찬 쇼트를 이어가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서구 문명에서 떨어져 나온 포셋 부자는 Z를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플래시백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린다. 마지막 플래시백에서 퍼시는 자신의 과거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행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거리감을 느낀다. 그는 결국 가족이라는 커뮤니티에서 관찰자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짧았던 순간을 결코 잊지 않으려고 한다.

실제 퍼시 포셋은 사기꾼이었다고 한다. 데이비드 그랜의 원작 역시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영화 [잃어버린 도시 Z]의 결말은 자기완결적이다. 결말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그들의 영혼이 머물 집을 상상하지 않고, 남겨진 니나에게 돌아간다. Z에 대한 열망이 퍼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고 말하는 니나는, 남편과 아들이 남긴 물건을 가지고 지리학회장에게 보여준다. 미심쩍어하는 지리학회장을 남겨두고 니나는 떠난다. 하지만 니나가 향하는 곳은 런던이 아닌 밀림이다. [이민자]의 결말과 같은 구도지만, 여자와 남자는 분리되지 않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뉴욕을 떠난 제임스 그레이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 곳에서 인물들은 함께 할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레이는 이상을 쫓는 행위는 분명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잃어버린 도시 Z]는 그 점에서 우주로 갈 그레이의 차기작 [에드 아스트라]를 예측해볼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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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 피어스 [Mildred Pierce] (1945)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밀드레드 피어스]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미스터리다. 시작하자마자 총을 맞은 남자의 입에서 밀드레드 피어스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다음에 한 여자가 위태하게 바닷가를 바라보다가 식당으로 간다. 여자의 이름은 밀드레드. 밀드레드는 식당에서 사업 동료이자 관심을 보이는 남자 윌리를 데리고 나간다. 달콤한 환상에 빠진 남자가 목격한건 사라진 밀드레드와 살인 현장. 한편 집에 돌아온 밀드레드는 두번째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불러가게 된다. 그러나 경찰은 범인을 전 남편인 알버트 피어스로 단정지은 상태. 대체 알버트랑 이혼한 이유가 뭔지 물어보는 경찰들에게 밀드레드는 과거를 얘기하게 된다.

[밀드레드 피어스]는 한마디로 여성 수난사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밀드레드 피어스는, 젊었을 적 남편 알버트와 열렬히 사랑해 결혼했지만 남편의 부동산 사업 실패로 부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알버트는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고, 화가 난 밀드레드는 알버트를 내쫒는다. 케이와 비다라는 두 딸을 데리고 밀드레드는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전부터 밀드레드를 짝사랑했던 윌리는 이 참에 고백을 해오지만, 밀드레드는 거절하고 식당 웨이트리스로 삶을 시작한다. 부지런한 밀드레드는 웨이트리스로서 성공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딸에게 웨이트리스로써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래서 윌리랑 같이 레스토랑을 차리고 성공하나, 허영심 많은 딸 비다는 밀드레드를 부끄러워하고 비난한다. 마음에 없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던 밀드레드는 신분 상승을 위해 유럽 귀족 출신인 몬테 바라건과 결혼하지만 그것은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밀드레드 피어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남자들이 아닌 여자라는 점이다. (이는 영화에도 적용되는데, 영화의 회상을 이끌어가는 것도 밀드레드의 보이스오버다.) 처음엔 안락한 가정 주부로 시작한 밀드레드 피어스는 파탄난 가정 상황을 보고 도무지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남편을 내쫓는다. 작품 속 밀드레드의 선택은 철저히 경제적 자립에 맞춰져 있다. 윌리랑 결혼하면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딸들은 말하지만 밀드레드는 거절하고 직장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업을 꾸릴 계획을 구상한다.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은 그 점에서 1930년대 이후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 현상을 궤뚫고 있다. 또한 밀드레드의 사업이 식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의 욕망과 음모의 근원이었던 그리스 식당과 연계되어 있다.

하지만 밀드레드의 욕망과 선택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게 아니다. 웨이트리스 취직까지는 그래도 살기 위해서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식당을 차리는 부분부터 조금씩 다르다. 케인은 밀드레드가 웨이트리스 일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변모하는 당위성을 외부에 둔다. 밀드레드가 식당을 차리는 이유는 비다가 웨이트리스 일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다의 욕망이 가속될수록, 밀드레드 역시 자신의 연애조차 귀족적 가치를 위해 팔아넘겨버린다. 밀드레드는 딸 비다의 욕망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파국이다. [밀드레드 피어스]의 멜로드라마는 자신이 현재 있는 위치와,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랑 불일치하면서 발생한다. 밀드레드는 그 간격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그 불일치는 어머니로써 딸에 대한 애정,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심이라는 기혼 직장인 여성들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어찌보면 매우 경제학적인 필름 느와르-멜로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케인의 주제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 마이클 커티즈는 공간를 비정상적으로 확장시킨다.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는 비정상으로 넓고 깊은 영화다. 배우 머리 위는 비정상적으로 높으며, 인물 주변의 공간들 역시 필요한 가구나 장식물을 제외하면 여백이 많다. 대화를 위해 투 샷이나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도, 채워지지 않는 여백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필름 느와르 특유의 흑백 그림자도 스며든다.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의 그림자 연출은 일급 필름 느와르 연출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감옥과도 같다. 밀드레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화 속 공간들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으며, 밀드레드가 체념하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액자 밖 경찰소 취조실은 밀드레드를 그림자로 압박한다. 커티즈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여성들의 불안과 불일치, 멜로드라마적 상황을 공간감으로 표현한다.

[밀드레드 피어스]의 결말은 소설과 영화가 상이한 비전을 보여준다. 원작 소설에서 비다는 훨씬 사악하고 악랄했으며, 마지막엔 밀드레드를 배반하고 바라건과 함께 성공의 길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직 헤이즈 코드가 남아있던 시절의 할리우드에서 비다가 맞이한 결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각본가 라날드 맥도널과 캐서린 터니가 새로이 선택한 결말은 좀 더 권선징악적이다. 바라건은 비다의 손에 죽고, 모든 것이 탄로난 비다는 잡혀간다. 원작파들은 영화판 [밀드레드 피어스]가 타협의 결과물이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판에서 새로 선택한 결말은 원작의 그 결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비다와 밀드레드에 거대한 골이 있다고 못 박는다. 범죄를 고백할때도 비다는 끝내 엄마 탓만 한다. 때문에 밀드레드가 자수하는 장면도, 비다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라는 인상을 준다. ("제 잘못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밀드레드는 그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경찰로 대표되는 남성 시스템은 밀드레드가 비다에 대한 속죄를 할 수 없도록 밀드레드와 비다를 법적으로 분리한다. 그 점에서 영화판의 결말은 밀드레드의 주체성이 모두 박탈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업도 가족도 속죄도 모든 것을 잃은 밀드레드에게 돌아갈 곳은 전 남편 버트다. 기존의 가부장 질서로 복귀하는 밀드레드 앞에 펼쳐진 것은 해가 뜬 도시의 풍경이다. 하지만 햇빛을 비웃듯이 결말 샷에서 밀드레드는 이전보다도 더 왜소해진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이 결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밀드레드는 채울 수 없는 걸 채우려다가 끝내 존재 자체가 부서져버렸다. 햇빛조차도 밀드레드를 감싸지 못하며, 그녀는 홀로 걸을수 조차 없다.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는 그 점에서 여성 주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이룰 수 없는지 탁월하게 보여준 뒤, 멜로드라마를 이끌어내는 느와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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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Logan] (2017)

이정표가 될 가지를 들고 그 발밑에 떨어뜨리자. 맞은편 언덕에 있는 아이가 헤매지 않도록. 
작은 둥지를 만드는 이 날개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연결하기 위해 살아가자.

-이시카와 치아키, 'Little Bird'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건]의 첫 샷은 차 안에 누워있는 로건의 얼굴을 하강하면서 보여준다. 이 샷은 밀폐 공간에 클로즈업으로 이뤄져 있기에 로건이 무언가에 짓눌듯한 인상을 준다. 가히 질식할듯한 이 미장센을 흔들어깨우는 건 외화면에서 깡패들이 때려부수는 소리다. 제임스 맨골드는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 때려부수는 소리를 암전 크레딧에 올리면서, 공포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나오는 피곤에 쩔어있는 로건의 등장 샷은 두 다리 클로즈업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여기엔 활기참이 없다. 밀폐공간에서 겨우 밖으로 나왔지만 로건은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 머니처럼 비틀거린다. 그리고 뒤이어 살짝 과잉되었지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폭력이 이어진다. 제임스 맨골드는 이 도입부를 통해 [로건]의 영화적 공기와 그가 겪을 여정을 설명해낸다. 

많은 사람들이 [로건]의 도입부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건 [엑스맨]이나 슈퍼히어로 영화의 도입부가 아니다. 차라리 1970년대 도회적이고 삭막하게 돌아버린 미국 액션 영화의 도입부에 가깝다. 이 시작에서 맨골드의 관심사는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있지 않다는걸 알려준다. 심지어 그는 전작에서 분명 이어져야 할 시간대나 사건의 인과관계마저 모호하게 처리한다. 살아남은 자는 동료들이나 악당, 멋진 사건이나 끔찍한 비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맨골드는 이 영화가 다른 세계관과 이어진다고 얘기했지만 차라리 완전히 평행세계라는 휴 잭맨의 발언이 더 솔직하게 이 영화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로건]은 울버린 코믹스에서 끔찍하고 비참한 에피소드 (원작이 된 [올드맨 로건], [웨폰 X], [울버린의 죽음], [레드 라이트 핸드])에 담겨있는 비관주의와 그 속에서 피어나오는 희망을 영화사 전통을 연결시키려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되는 장애물은 가차없이 치워버린다. 그래도 의문이 있다면 "대체 이 꼴이 나도록 전지전능한 진 그레이는 뭐하고 있나?"라는걸 생각해보자.

[로건]이 출발점으로 삼은 곳은 놀랍게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다뤘던 종말로 향하는 리무진이다. 다만 [코스모폴리스]의 에릭과 달리 로건은 뒷좌석에 앉아 폼을 취하지 않는다. 뒷좌석에서는 [코스모폴리스]처럼 이어지는 향락으로 부패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맨골드는 버림받은 영웅의 왜소한 샷과 자본주의의 비대한 향략을 한 공간에 압축하는 것으로 질식할것만 같은 부패의 순간을 담아낸다. 하지만 [로건]은 [코스모폴리스]보다 더 끔찍하다. 어떻게든 리무진 안에 침투하려는 바깥 사람들의 발악을 보여준 [코스모폴리스]와 달리, [로건]의 리무진 바깥은 아무도 안쪽을 공격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코스모폴리스] 결말에서 열어젖힌 끝날것 같지 않은 자본주의 지옥의 이미지가 [로건]의 세계를 잡아먹어버렸다. 

맨골드가 이 영역에서 들여오는 것은 서부극이다. 먼지로 가득한 리무진이 찰스 교수가 사는 은신처로 들어오는걸 롱 샷으로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로건]이 [매드 맥스]와 맨골드 자신의 [3:10 투 유마]를 거쳐 서부극의 세계로 들어설거라는 징조를 받는다. 맨골드는 뒤이어 아예 작심하고 온갖 서부극적인 도상을 차용한다. 멀리서 지나가는 기차, 옥수수밭, 농장, 서부 복장.... 그 중에서는 그 유명한 [셰인]도 있다. 이런 맨골드가 인용하는 서부극적 도상과 연계된, 인상적인 샷이 하나 있다. 도주중이던 로건 일행은 무인 트럭에 휘말려 꼼짝도 못한채 말을 농부 먼슨 가족을 만난다. 먼슨 가족을 도와주는 과정을 그리는 동안 맨골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들이 휘적거리며 고속도로를 방해하는 모습을 집어넣는다. 문명을 잠시나마 방해하며 자유로워지는 말의 이미지에서 맨골드는 숨기지 않고 서부극 장르에 대한 강한 애정과 로맨티시즘을 표출한다. 서부를 향한 맨골드의 로맨티시즘은 자본주의 지옥에 저항하는 도구다.

과격하긴 해도 맨골드의 비전은 상당히 정확하다.  울버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캐릭터는 19세기 서부 개척 끝물에 '캐나다'에서 태어나 현대와 미래까지 살아남은 캐릭터였다. 서부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수 있는 존재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서부극의 징조는 더 명확해진다. 로건에게 양부로써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를 추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보안관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상처주고 받으며 살아온 그는 찰스 자비에 교수를 만나 구원받은 뒤, 찰스의 뒤를 따라 양부의 길을 걷는다. 상처 따윈 아무렇지 않게 회복하며 살아왔지만, 상처의 깊이를 알기에 아이들의 침묵과 고통에 동참하고 지켜주려는 양부.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가 초반부에 동생 무덤 앞에서 했던 대사를 그대로 가져와도 될 정도다. 

하지만 역사를 헤쳐나오기 위해 체득해버린 폭력성은 그런 그의 양부로써 사랑과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복잡한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무수한 전쟁과 살육의 현장에서 의미없는 죽음에 익숙해져버린 지친 남자. 여기다 코믹스 울버린은 심지어 몰랐다지만 자기 양아들마저 죽여버리고, 친아들의 오해로 가득찬 경멸어린 저주과 독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 캐릭터였다. 여기서 그의 어둠이 서부 무법자 특유의 야만적 폭력성이 히어로 만화에 접목되어 나온 거라는걸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맨골드의 서부극에 대한 애정은 울버린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그는 울버린이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울버린은 1970년대에 나왔던, 좀 더 과격하고 극도의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신화의 종말에서 멜랑콜리를 끌어내는 서부극 영화의 아들이다. 여기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회고적 서부극과 페킨파의 마초적 애도의 서부극이 따라나서는건 당연하다.

맨골드의 전작이기도 한 [더 울버린]은 그런 서부극적 도상이 PG-13적 수위에 수용되어 일본 찬바라물과 결합된 독특하지만 일정한 선이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로건]은 다르다. 차라리 이 영화는 국경수비대와 카르텔 서부극의 살벌함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여기다 마이클 만 특유의 프로페셔널들이 또렷한 콘트라스트 아래서 벌이는 건조하고 서늘한 긴장감도 녹아있다. 심지어 맨골드는 4K 카메라를 마치 마이클 만이 디지털 카메라를 쓸때 썼던 특유의 빠른 프레임으로 그려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맨골드는 고전 서부극의 품위있는 도상을 1970년대 이후 장르 영화가 끌어왔던 건조한 콘크리트를 연상케하는 어법과 만나게 하고 있다.

그 만남 사이엔 ‘죽음’이 있다. [로건]이 왜 [엑스맨] 영화를 대부분 치워버리고 [코스모폴리스]를 끌어왔는지에 대한 답도 여기서 나온다. 맨골드와 각본가가 바라보는 미국은 정말 끔찍하고 살맛 안 나는 곳이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은 무의미한 것으로 그려진다. 캐나다로 대표되는 목적지까지 거쳐야 하는 미국은 멕시코를 착취하며, ‘우리는 가난하지만 바보는 아니다’라는 절규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다. 숭고하지만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한 시체는 자본주의의 재료로 사용된다. 종말이 일상을 대체한 풍경. 여기엔 무의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간신히 힘을 모아 바깥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있다. 맨골드가 그려내는 미국은 몬테 헬먼의 실존주의 서부극의 무기력함이 묻어나온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품을 내어줄 양부 히어로들은 무력하다. 찰스로 대표되는 리버럴 지식인은 옛날의 총기를 잃고 양자 로건과 칼리번의 도움에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지식인들에게 감화받았던 로건과 칼리번은 찰스의 믿음이 실패한것 아닌지, 자신들 역시 초라한 소멸을 맞이할지 회의하고 번민한다. 이 과정이 너무 아프고 괴롭게 그려지기에, [로건]은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못했던 영역에 들어선다. 맨골드가 근심하고 잇는 영역은 아오야마 신지가 기타큐슈 삼부작에서 근심하던 영역과 비슷하다. 그들은 다만 맨골드는 아오야마가 두려워했던 친부 친자의 실패와-원작 로건이 그런 실패가 그려지는 캐릭터임에도-어머니의 불가해함을 꺼내지 않는다. 아오야마와 달리 과거와 혈연에 대한 불신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많아진다고 생각해서일까.

대신 맨골드는 양부들 자신의 어둠에 집중한다. [로건]의 여정은 심리 서부극 그 자체다. 영화는 로건을 이뤄왔던 죄악과 분노, 고통과 사랑을 모조리 끄집어내 안소니 만이 [서부의 사나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 비극처럼 확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확장은 로건뿐만이 아니라 칼리번이라던가 찰스에게도 적용된다. 범죄를 저지르며 자신을 용서해준 동료를 팔아치웠다는 절망감에 자폭하는 칼리번이라던가 공동체 붕괴의 원흉이였음에도 살아남아 죄책감에 빠져드는 찰스 역시 심리 서부극의 그림자에서 어른거린다. 당신을 죽인게 내가 아니라는 로건의 애절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맨골드는 X-24를 휴 잭맨의 1인 2역으로 맡기면서 결국 그 역시 자신의 일부였다고 못을 박는다. 여기엔 분명한 죄악이 있으며, 등장인물들은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로건]은 그 그림자 속에서 이뤄지는 회의와 번민, 죽음을 육체의 이미지로 표출한다. 로건의 사라진 힐링 팩터는 심각하게 베어진 살점들과 엉망이 된 다리로 나타난다. 초반부 몸에 박힌 총알을 스스로 뽑아내며 멍하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건의 샷에서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수 밖에 없다. 로건/울버린은 누구보다도 하드 바디가 자신의 정체성이던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에게 하드 바디 이미지가 사라지는 순간 거기엔 자크 오디아르가 선호했던 피로와 우울에 젖은 남성 영웅이 드러난다. (아마도 [디판]과 [러스트 앤 본]이 이번 로건에게서 제일 가까울 것이다.)  아들의 도움이 필요한 찰스의 무기력한 육체는 그 점에서 더 비참하다. 칼리번은 뱀파이어처럼 햇빛 아래에서 피부가 불타고 괴로워한다. 심지어 이런 쇠잔함과 거리가 먼 로라 역시 자신의 분노를 온 몸에 담아 표현한다. 이들의 반대에 있는 캐릭터인 도널드 피어슨이 기계 육체를 과시하는 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로건]의 액션이 에너지와 피와 눈물이 흘러넘치는 것도 이상한건 아니다. 과격한 수위로 묘사된 이 영화의 액션은 멜로드라마적 먹먹함과 피곤함이 인물들을 적시고 있다. 로건이나 로라, 그리고 후반에 등장하는 뮤턴트 아이들의 액션은 그야말로 살고 싶다는 처절한 악에 받쳐 육체를 잘게 조각낸다. 이 영화의 액션은 그 몰아붙이는 듯한 카타르시스에도, 너무나도 육중하고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픔은 삶의 버거움에 죽음조차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는 흐느낌이 담겨 있다. 무서울 정도로 팽팽한 영화적 공기를 내세운 영화를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들수 있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로건]은 살벌하고 팽팽하게 건조된 공기에서 놀랍게도 모든 것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영화다. 시작은 다시 가족이다. 맨골드 본인은 귀엽지만 현실의 아픔과 무게를 무시하지 않은 가족 드라마 [페이퍼 문]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예로 들었고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의 정경은 차라리 수평적인 공동체에 가깝다.  육체적 능력과 물질적 능력을 소진했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을 보호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려는 양아버지들의 쓸쓸한 모습과 더불어 황폐하고 버려지고 공간, 말없지만 아직 생명력이 있는 소녀를 죽어가는 몸을 이끌며 쫓아가는 ‘오해받는 무법자’의 이미지는 [유레카]를 (나아가 존 포드의 [수색자]) 떠올리게 하고, 특수한 능력을 지닌 아이를 데리고 도주하면서 수평적인 신뢰와 믿음으로 구성된 미국적 가족상을 구축하는 과정은 [미드나잇 스페셜]이나 [퍼펙트 월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절박하고 단단하게 ‘이 땅’에 매여있으려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언급한 영화들이 서부극의 영향이 강한 작품이라 생각해보면, [로건]의 수평적인 공동체는 서부극의 일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조차도 [로건]에서는 버겁게 그려진다. 양아들의 양부는 죄를 양아들의 그림자에게 고백하고 초라하고 비통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로라를 내보낸 양모 가브리엘라와 친절을 베푼 먼슨 가족은 모조리 죽어나간다. 엑스맨으로 대표되던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강한 믿음이 사라진 세계에서 무엇을 할것인가? 아이인 로라는 답을 원하지만 로건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얻을 공동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두 사람 역시 죽어버렸고 공동체에 대한 대답은 픽션인 만화책과 자신으로만 가능하다. 로건이 그렇게 열심히 엑스맨 만화책을 부정했던 이유는 거기 있다. 불로불사가 가져오는 피로함과 유일한 증인으로써 죄책감, 자학심이 ‘이 땅’에 매여있고자 하는 시도에 회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면, 조용히 있다가 사라지는게 낫지 않을까 ?

여기서 접촉의 문제가 개입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접촉의 금지, 그리고 떨어져 있을 것에 대한 요청, 그것은 이야기를 시동케 하는 능동적인 기호”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말을 [로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엑스맨] 세계관에서 로건이 처음 만난 뮤턴트가 접촉 금지를 요청하는 소녀 로그 (마리)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맨골드는 [엑스맨 1]의 초반부 구도를 다시 뒤집어 만들고 있다. 이 영화에서 로건은 계속 다른 인물들에게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유사) 부녀 지간을 다루면서도 로라와 로건 사이엔 신기할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로라가 로건에게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기도 하고, 맹렬한 위험함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혈육이지만 혈육이 아닌 서로의 거울쌍이다.

그렇기에 로건은 직접적으로 접촉 금지를 요청하지 않지만 어떤 거리감을 두고 로라를 대한다.  이제 접촉을 요청하는 사람은 사내가 아니라 소녀이며 사내는 소녀의 접촉을 밀어내려고 한다. 이 거리감과 접촉 거부 때문에 이 영화는 비슷한 내용의 액션 영화하고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그것이 매정하기 보다는 슬프게 다가온다면, 로건의 비극과 피로함, 그럼에도 숨길수 없는 사랑을 맨골드는 이해하고 있고 관객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거리를 두면서도 절박하기에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간다. 후반에 등장하는 로라의 무릎에 평온하게 잠든 로건의 샷과 악몽에 대한 로건과 로라의 대화가 그렇다. 맨골드는 늙고 지친 미국 무법자 윌리엄 머니를 닮아있는 휴 잭맨의 얼굴과 슬픈 무표정을 지닌 스페인 소녀 아역들의 매력을 간직한 다프네 킨의 얼굴, 꺼져가는 총명함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하는 영국 신사 패트릭 스튜어트의 얼굴에서 많은 질료들을 빌려온다. 그리고 그들이 한 프레임에 있는 순간들은 매우 훌륭하다.

[로건]의 먼슨 가족의 죽음은 로건이 왜 접촉을 거부하는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다. 그들은 접촉의 평안함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들은 소수자이자 약자며 매우 허약한 존재다. 맨골드는 로건 일행이 오지 않았더라도 구조적으로 이 가족은 파국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절대적인 파국에서 히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먼슨 가의 가장이 총부리를 대는 순간, 로건은 다시 상처받는다. 로건은 자신의 존재가 저 평범함에 스며들수 없다는걸 안다. 그렇기에 그는 떠돌아다녔다. 오히려 로건이 자주 접촉하는 대상은 찰스 자비에다. 유머가 섞이긴 했지만 찰스와 로건의 화장실 시퀀스는 둘의 접촉이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찰스가 엑스맨이라는 공동체를 파괴했다는걸 알았음에도, 그는 찰스를 돌본다. X-24이 학살한 자리에서 로건이 로라를 찾아가지 않고 찰스를 먼저 찾아가는 과정은 매정하지만 지극히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찰스는 엑스맨의 이상인 '양가족' 그 자체이며, 진정한 첫번째 '양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찰스가 죽은 이후로, 로건 역시 죽어간다.

[로건]이 놀랍고 슬픈 이유는 파국을 내재한 접촉과 무법자가 그걸 두려워해 접촉을 거부함에도 공동체 내 일상과 사랑을 존중하고 그려내는 신중한 흐름의 샷과 대화로 로건과 로라, 찰스의 영혼에 접촉하는 과정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로건이 가족을 연기하는 장면의 샷과 리버스 샷을 보라. 우리는 그게 유머를 담은 연기라는걸 알면서도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다. 거짓이지만 가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에 가려졌지만, [로건]에서 로건이 지난 시리즈동안 느껴왔던 공동체의 사랑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고 말한다. 접촉은 필연적으로 파국을 낳지만, 그 접촉이 남긴 위대함은 심지어 파국이 지나간 이후에도 명징하다. 찰스의 회한에 찬 넋두리는 그 양가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로건]은 무의미와 접촉 거부 속에서도 공동체와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계속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메타픽션'으로 그려낸다. 로건은 픽션은 현실에서 성립될 수 없다고 줄곳 주장하지만 정작 그 역시 썬시커라는 이뤄질 수 없는 공동체 공간에 집착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공간'이 아닌, '사람'이 가족을 이룬다는걸 알고 마침내 그걸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힘겹고 간신히 이뤄진다. 이뤄질수 없다는걸 알면서 부정하면서도 그 ‘완벽한 순간’을 찾으려고 하는 이 시도들은 울버린 자신의 캐릭터성과 들어맞는다.

[로건]은 무의미 속에서도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찾고자 하는 인물들의 애처로운 갈망과 헛발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애도와 치유의 여정을 결합한다. 줄곳 표류하고 있던 캐릭터가 무의미와 소멸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한 뒤 정착과 안식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이번작의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의 유스케를 닮아있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는 유령은 여행을 하며 정착하면 사라진다, 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대사는 어딘가 서부의 무법자를 닮지 않았는가. 로건은 계속 여행을 하고, 정착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표했다. 맨골드 역시 영화 속 로건이 망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즉 처음부터 로건은 상징적으로 죽어있다. 상술한 영화의 시작이 깨어남이라는 걸 주지해보자. 리무진 운전 시퀀스의 생기없음부터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로건의 영화적 여정은 기면증적인 컷과 장소 점핑, 생략과 암전, 깨어남과 같은 비약으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해안가로의 여행]과 달리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을 떠나려다가 '호숫가로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맨골드가 바다로 향하지 않고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을 종국의 물가에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로건 일행이 원하는 요트 썬시커를 보자. 엑스맨은 재건될 수 없고 상술했듯이 남아있는 뮤턴트들 역시 왜소하고 초라한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아마 로건이 예정한 죽음은 찰스와 칼리번이 소멸한 뒤, 애도해줄 사람 없이 조용하고 쓸쓸하게 과다한 물 이미지에 스며드는 것였을 것이다. 썬시커는 그 점에서 평온한 죽음이지만, 애도하는 이 없는 쓸쓸한 소멸 그 자체다. 하지만 그가 꿈꾼 소멸의 여정은 로라의 등장으로 사라지고 반대로 그는 사막과 들판, 도시를 거쳐 캐나다 국경의 산맥으로 향한다.  

맨골드가 호숫가로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땅에 뿌리박고 살았던 공동체의 소멸을 지켜본 뒤 애도를 완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은 그 점에서 [엑스맨] 시리즈에서 엑스맨들이 거쳐야만 했던 지난하고 고된 여정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남은 엑스맨 멤버들은 아이들을 조금씩 더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면서 소멸한다. 첫 징후는 "호수도 있는 곳"에 묻힌 찰스다. 찰스의 죽음은 곧 닥쳐올 로건 자신의 죽음을 예견게 한다. 여기서 로건과 로라는 호수가 있던 자비에 학교로 대표되던 이상주의의 끝을 애도한다. 그리고 로건이 묻히는 공간 역시 호숫가 근처 숲이다.

그렇기에 덤덤하게 이뤄지는 로건의 죽음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난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지극히 평범한 숲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뤄지는 접촉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프레임 속 모든 존재를 빛나게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다시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접촉의 거부에서 시작한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분명한 접촉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미즈키와 유스케가 그랬듯이 로건과 로라는 여정을 통해 서로에게 동화되었고 끝내 접촉으로 충만한 사랑을 나눠가지게 된다. 그 순간 로건은 저주받았다고 믿었던 기나긴 시간 속에도 이런 접촉이 있었으며, 상실의 고통과 애도 역시 하나의 접촉이였음을 깨닫는다. 다만 어떻게 설명해야지 몰랐을 뿐. 무의식적으로 사랑을 나눠주면서도 자신은 접촉할 수 없는 존재라 자학했던 영웅에게 정말로 다정하고 따뜻한 결말 아닌가. 찰스-로건-로라로 이어지는 연속된 애도의 완수가 역설적으로 엑스맨과 사랑으로 이뤄진 이상적 공동체를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이들에겐 ‘분노’가 부족하다고 비웃는 악당들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순다.
 
[로건]은 마지막에 본성은 이길수 없고 총소리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영웅은 사라져야 한다는 [셰인]의 추도사를 인용한다. 하지만 맨골드는 픽션과 풍경들, 공동체의 아름다움, 접촉의 숭고함을 통해 영웅에 대한 애도를 완수해 빛나게 만든다. 로건의 애도가 찰스를 영원하게 만들었듯이, 로라의 애도는 로건을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0의 순간에서 바다가 아닌 육지로 향하는 미즈키가 그랬듯이 로라 역시 애도를 완수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로건과 찰스, 칼리번, 가브리엘라의 본성이 부당한 세상에서도 순진하게도 따뜻한 집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꿈꿨던 작고 조용한 사람들에 가까웠노라고 확언할 수 있다.

당신은 그 이름에게서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붙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언은 매우 벅차오르는 눈물을 동반한다. 로라가 만든 X가 역설적으로 O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 영화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후발 히어로 영화들에 종속되겠지만 (울버린은 최고 인기 캐릭터고, 휴 잭맨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이어갈 것이다. 게다가 아직 로라에게도 할 얘기가 남아있다.) 제임스 맨골드는 몹시도 감동적인 인본주의 서부극 영화를 극우 포퓰리즘 시대의 세상에 가져왔고,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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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복수의 총성]에서 주인공 윌렛은 모래에 흔적을 남기면서 등장한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복수의 총성]에서는 무의미하다 윌렛이 친구 콜리를 만나는 순간 미스터리가 윌렛을 포박하기 때문이다. 공포에 떨고 있는 콜리는 윌렛에게 윌렛의 형이자 동행인이였던 코인과 리랜드가 마을에서 어떤 가족을 쏴 죽였으며, 코인이 볼일을 보러 떠난 뒤 리랜드가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한다. 앞뒤를 살펴보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의 복수인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리랜드를 쏴죽였단 말인가?

도입부의 미스터리가 제공하는 [복수의 총성]을 진행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그렇듯이 몬테 헬만은 주인공들을 부조리한 카오스로 밀어넣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만 [바람 속의 질주]가 대항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낸 부조리와 무기력함으로 주인공들을 밀어넣고 거기서 탈출하려는 인물들의 액션에 집중한다면, [복수의 총성]은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가 윌렛과 콜리를 이끈다. 이 미스터리의 중심이 여성 캐릭터라는 점도 흥미롭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소녀 애비게일를 연기했던 밀리 퍼킨스가 다시 맡은) 윌렛 일행 앞에 나타난 이름 없는 여자는 윌렛과 콜리에게 킹스턴으로 데려달라고 말하지만, 윌렛은 곧 이 여자에게 다른 목표가 있다는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캐릭터를 살펴보자. 먼저 윌렛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소시민적 카우보이이다. 윌렛과 여자의 대화에서 윌렛이 한땐 현상금 사냥꾼이였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를 부정하고 소시민적인 삶을 누리길 원하는 인물이라는게 밝혀진다. 이 점에서 난폭하게 사람을 쏴죽이고 도망가버린 윌렛의 형 코인과는 대조된다. 윌렛은 여자에게 적당한 보수를 받고 아무 탈 없이 헤어지길 원한다. 반대로 여자는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캐릭터인데, 때문에 윌렛과 여자 간에는 불편한 긴장이 흐른다. 윌렛은 여자의 목적을 집요하게 의심하고 여자는 그의 의심에 짜증을 낸다.

반대로 콜리는 미성숙한 소년이다. 콜리는 여자를 보는 순간 홀딱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윌렛과 달리 소년다운 아직 무법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버리지 못했다는걸 보여준다. 그가 미성숙한 남성이라는 부분은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하다가 적당한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엄마의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여성은 어머니 밖에 없다. 그런데 각본을 맡은 캐롤 이스트먼이 여성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뒤이어 이어지는 여자의 거절은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이 무명의 여자는 모성으로 환원되는걸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콜리)는 내가 보는 걸 보지 못해요"라는 대사는 이스트먼과 헬만이 콜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자가 어떤 캐릭터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여자가 복수하려고 하는 대상이 누군지 결말 전까지 보여주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여자의 심리가 어떤지 간신히 파악만 가능할 것이다. 이스트먼과 헬먼은 여자의 동기와 심리 묘사에 크게 관심이 없다. 남아있는 단서들을 긁어모아 추리를 해도, 이 여자는 끝끝내 이성적인 이해는 할수 있되 공감할 수는 없는 '타자'로 남는다. 그렇기에 여자의 집요한 집념은 더욱 무서워진다. 여자를 향한 "당신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안내할게야. 자신 마저도 말이오."라는 윌렛의 대사는 영화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윌렛의 이 대사는 후술할 결말하고도 맞닿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엔 잭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 스피어스가 끼어든다. 빌리가 끼어들면서 [복수의 총성]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번은 반항아이긴 했지만 그 속내를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복수의 총성]에서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는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공격성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그의 첫 등장은 줄곳 숨어있다가 윌렛이 도발하면서 이뤄진다. 마치 야생동물이 서로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끌어내는걸 연상케 한달까. 윌렛은 여기서 빌리가 문명의 소통방식으로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걸 알아채지만 콜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반항하다가 파국으로 이어진다. 

빌리가 등장하면서 [복수의 총성]은 표면적 의도 아래에 있는 이해할수 없는 가학적이고 불온한 흐름으로 인물들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인물의 감성은 바가지를 긁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부터 시작해 광활하지만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사막만이 소통이 사라진 인물들의 대화를 보조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서부극의 대가들이 그랬듯이, 자연 풍광에서 영화적 매력을 이끌어낼줄 아는 감독인데 그의 세계에서 자연은 인물의 실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돌멩이가 푸석한 흙먼지 산이 고립되고 힘겨운 여정에 나선 인물들을 강조했다면 [복수의 총성]에서 등장하는 말라붙은 사막은 점점 삭막해지고 신경을 긁는듯한 인물 간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서부극 장르가 구축해온 언어들은 산산조각난다. 복수를 하려던 콜리가 죽는 장면이라던가 빌리와 윌렛의 다툼은 서부극적 전통에서 기반해있지만, 이 장면들엔 품위나 공동체의 신념과 믿음 대신 메마르고 야만적인 악독함이 줄줄 배어나고 있다. 어느 순간 가히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파멸의 여정이 되버린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 영화가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서 링크와 콜리가 몸싸움을 벌이다가 링크가 콜리를 죽이고 전율하는 장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악독함은 촬영 당시 헬만과 워렌 오츠, 니콜슨 사이에 있었던 충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샷과 컷의 변화가 평이하고 단조로운 대신, 톤과 무드를 비틀어놓는 타입의 영화라면, [복수의 총성]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샷과 컷을 이상하게 밀고 간다. 리랜드가 죽을 당시를 보여주는 시퀀스의 연출을 돌아가보자. 콜리의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아무런 대사가 없다. 그런데 리랜드가 누구랑 대화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의 시점 샷들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콜리의 회고에 따르면 총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콜리는 텐트에 누워 바깥에 있는 리랜드랑 눈을 마주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헬만이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콜리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진 않다. 이상한 장면은 그 다음 경악에 찬 눈빛으로 쓰러지는 리랜드를 보여주는 샷이다. 이 샷이 이상한 이유는, 지금까지 콜리의 시점이라 못 박아둔 샷 다음에 거리상으로 불가능한 풀 샷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몽타쥬 배치상 이 샷은 콜리의 주관적인 샷의 연장선상이라는건 명백하다. 이 샷이 이상하고 낯선 이유는 죽음의 순간이 갑자기 확대된 채 정지한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샷 속에서 리랜드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에 머물러 있다. 헬만은 이를 통해 콜리가 왜 미친듯이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리랜드가 맞이한 이해할수 없는 죽음이 언제든지 자신을 덮칠수 있다는 공포가 콜리를 사로잡은 것이다. 

재미있는건 다음날 윌렛은 리랜드가 죽은 그 자리에 우연히 비슷한 자세로 앉을 뻔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영화의 결말에 나오는 반전과 연출은 이 사소한 행동을 다시 재고하게 된다. [복수의 총성]의 결말은 정말 난해하고 당혹스럽고, 매우 인상적이다. 마침내 여자가 복수 대상을 발견해 달려가고 여자를 쫓아간 윌렛은 여자의 복수 대상이 자신의 형제인 코인이라는걸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몬테 헬만은 코인 역으로 윌렛을 맡은 워렌 오츠를 기용한다. 그리고 슬로우 모션을 이용한 클로즈 업 샷으로 코인의 죽음을 보여준 뒤, 좀비처럼 살아와 걸어오는 빌리를 롱 샷으로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내버린다. 

이는 로저 코먼 밑에서 영화 경력을 시작한 헬만 특유의 B 무비의 뻔뻔함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헬만은 주인공 형제를 등장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 배우를 캐스팅해 B무비의 뻔뻔함과 제작비 절감을 성립시키지만,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복수의 총성]은 무의미하게 모든걸 파괴해버리는 서부의 야만성과 그 속에서 파멸할수 밖에 없는 인물들을 신화적인 제의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다. 가장 중요한 단서로는 여자는 윌렛을 보면서 당신은 광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현상금 사냥꾼이던 윌렛의 과거 역시 그리 깨끗하지 않았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 점에서 형제로 설정된 코인은 윌렛의 이면이라 볼 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될수록 윌렛은 코인처럼 점점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이처럼 헬만과 이스트먼은 코인의 야만성은 윌렛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서부 그 자체라 보고 있다. 일견 모호해보였던 여자의 캐릭터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부의 야만성에 복수하려고 하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여자가 사건의 휘말린 계기라던가 인간적인 면모는 끝끝내 묘사되지 않기에, 여자의 복수심은 당위성이 있다기 보다는 막연하고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모성을 거부하고 복수에 나선 여자 역시 코인과 다를게 없어진다. 아예 초자연적 재해처럼 그려지는 야수 빌리는 말할것도 없다. 헬만은 그 야만성이 이끄는 신화적 여정의 끝은 '죽음'이라 본다. 초반부 리랜드의 죽음을 강조한 이유도 그 죽음의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윌렛의 이면인, 코인의 죽음은 리랜드의 죽음처럼 영원히 정지한듯한 슬로 모션 샷으로 보여진다. 헬만은 파국의 절정을 박제한 뒤, 야만의 화신인 빌리가 부활해 다가오는걸로 끝내버린다. 이 결말이 두려운 이유는, 상당히 낯선 화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그랬듯이 파국 이후를 전혀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코인의 죽음은 윌렛의 죽음이며, 여자의 복수는 윌렛에게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남은 건 죽여도 죽지 않는 악마와 같은 빌리가 가져올 궁극적인 종말이다. 엄청나게 묵시록적인 비전을 담은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복수의 총성]은 그렇기에 정통 서부극에서 그려왔던 신화의 이면과 그것이 인간들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상당히 이상하게 그려내고 있는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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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2013/05/10 - [Deeper Into Movie/리뷰] - 테이크 쉘터 [Take Shelter] (2012)

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

제프 니콜스의 SF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미드나잇 스페셜]이 어떤 영화가 될지 조금 상상이 안 가긴 했다. 2007년 [샷건 스토리즈]에서 출발한 제프 니콜스는 기본적으로 지역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카와세 나오미나 스와 노부히로, 아오야마 신지처럼 어떤 지역을 떠나면 성립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스는 테렌스 맬릭이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같은 희귀한 사례를 제외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미국 중남부 서민-화이트 트래시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고 거기서 출발한다. (심지어 아칸소는 맬릭이나 링클레이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영역이다.) 아칸소 백인 하층민들을 소재로 삼았던 [샷건 스토리즈]와 [머드]. 오하이오와 버지니아라는 남부라는 문화적 친연성을 지닌 곳에서 영화를 만든 [테이크 쉘터]와 리뷰 예정인 [러빙]...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영화는 영화 언어에 미처 포섭되지 않았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동시대 감독 중에서도 미국에서만 성립 가능한, 가장 미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장르의 세계에 들어선다니 기대와 걱정이 앞설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드나잇 스페셜]은 생각보다 멀리가지 않았지만 상당히 넓어진 영화다. [미드나잇 스페셜]의 배경인 루이지애나 주는 전작들과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나 연출 면에서 니콜스는 장 르누아르부터 시작해 테렌스 맬릭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자연주의 영화의 전통과 스티븐 스필버그와 존 카펜터 같은 장르 영화의 거장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즉 지역 영화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을 품고 탈지역적인 장르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전작을 보지 못했거나 평범한 관객들이라면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장르로 대표되는 탈지역적 요소를 먼저 발견하고 심심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 [미드나잇 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장르적인 요소들은 너무나 구닥다리기 때문이다. 아니 시대가 언제인데 [E.T.]나 [스타맨]에 기독교 구세주 SF 설화를 도입하나? 비주얼은 왜 이렇게 안 멋져? 모름지기 SF 영화란 삐까번쩍 해야지! 이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상술했듯이 니콜스는 아직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떠날 생각이 없이, 자신의 땅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즉 장르를 생각하고 지역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지역에서 장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드나잇 스페셜]은 지역이 품고 있는 문화를 장르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장르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지역은 바이블 벨트와 늪지대, 황량한 모텔과 주유소, 신흥종교단체로 가득차 있다. [미드나잇 스페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 영화보다는 지역 영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니콜스는 장르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지역 영화를 만든다는걸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미드나잇 스페셜]은 심심한 장르 설정과 익숙한 추격전 플롯에서 불구하고 단단하게 뿌리박은 영화 언어 속에서 생경할 정도로 낯섬과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그것은 대부분의 장르 영화들이 가볍게 여겼던 '공간'의 특성 (이는 지역적인 특성이기도 하며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와 같은 영화적 특성이기도 하다.) 이 강하게 대두되어서 생기는 부분도 있으며 (이 부분은 분명 존 카펜터에게 배운 것이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미국 남부 고딕의 전통이 새로운 활력을 얻었기에 생기는 부분이 있다.

사실 이런 "공상과학"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비주얼 설계라는걸 생각해보면, [미드나잇 스페셜]이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비주얼은 어떤걸 접하고 생각했기에 저런 리듬의 저런 비주얼이 가능한지 묻고 싶을 정도다. 어떤 부분은 바이블 벨트에서 자란 지식인이라는 이점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있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특정 종족의 묘사는 분명 성경에서 비롯된 천사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어떤 장면은 단순히 문화적 이점이라고 넘길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주유소 시퀀스에서 알튼이 기적을 부리는 장면이 그렇다. 느긋하면서도 갑자기 비현실적인 상황이 관객 앞에 툭 떨어지는 이 시퀀스는 경이롭다.

이런 태도는 영화 속 샷과 몽타주를 구성하는 방식하고도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제프 니콜스는 서사에 따라 차곡차곡 누적되는 샷과 몽타주의 구조를 믿는 고전적인 부류의 영화 감독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뉴욕 감독'이였던 제임스 그레이랑 달리 니콜스는 미국 남부 영화인이기에 가능한 느긋한 리듬이 있다.  도입부는 니콜스만의 느긋한 리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드니 루멧의 [허공에의 질주]가 그랬듯이 우리는 로이와 알튼 일행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지를 알려면 기다려야 한다.

이는 속도를 중시하는 장르 영화로써는 그렇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미덕이 있다. 니콜스는 자신만의 샷과 몽타쥬 방식으로 천천히 쌓아올리면서 인물들의 불안과 상실, 기쁨과 긴장 같은 감정들은 신중하게 끌어낸다. 그렇기에 니콜스가 선택한 샷엔 신기할 정도로 헤아릴수 없는 인간을 위시한 피사체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가득하다. 마이클 섀넌을 비롯한 연기진들의 연기는 그런 확고한 믿음으로 세워진 샷에서 시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F.W.무르나우의 [선라이즈]와 장 르누아르에서 발원한 자연주의/휴머니즘 영화의 충실한 후예기도 하다. 우직한듯 보여도 [미드나잇 스페셜]의 인물 관계나 묘사는 어떤 위악이나 아이러니가 담겨있지 않다. 알튼, 로이와 사라의 가족 관계라던가 어딘가 어벙해 보이는 연구원 폴 세비어, 회의주의자 루카스 모두 단단한 존재들이다. 제프 니콜스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강점 중 하나가 바로 위악이나 비극으로 빠질 수 있는 캐릭터에게 단단한 뿌리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미드나잇 스페셜]은 아마도 니콜스의 바이블 벨트적인 성향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영화기도 할 것이다. 상술하기도 했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알튼과 알튼이 속한 특정 종족은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와 사도, 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 점에서 무신론자에게 [미드나잇 스페셜]은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니콜스는 지식인으로써 현실을 근심하면서도 미국 남부인 특유의 독실하게 뿌리박힌 어떤 '믿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는걸 잊으면 안된다. 

누설 때문에 적을 수 없지만 [미드나잇 스페셜]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인간 관계에서 이뤄지는 믿음과 사랑에서 출발해 '믿으면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천당간다' 식의 구약식 죄의식과 맹목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이 지구가 그렇게 나쁜 공간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점에서 [미드나잇 스페셜]은 '백인의 의무식 구원주의'에 빠진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다르다. 제프 니콜스의 지역 영화적 특색은 여기서 다시 한번 발휘한다. 이 땅을 떠나지 않더라도 행복해질수 있다고,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라고. 니콜스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루카스 같은 회의주의자/무신론자인 글쓴이마저도 긍지를 가지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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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시작은 이렇다: 황야 저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고 일련의 도적 무리들이 튀어나와 돈을 요구한다. 카우보이 세 명이 멀리서 그 과정을 지켜본다. 익숙한 서부극의 설정이다. 하지만 다음 샷. 도적들은 마차에 있던 승객과 마부의 호주머니를 털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도적들은 짜증내며 그들을 내보내고 지켜보던 카우보이 세 명은 다시 길을 떠난다.

서부극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뭔가 기대가 어긋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영화의 악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카우보이들은 악행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바람 속의 질주]는 무언가 중요한 동기와 열정 자체가 배제되어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바람 속의 질주]는 하지도 않은 일을 오해받은 사람들의 얘기다. 번과 웨스, 오티스는 어떤 대단한 사명감이나 정의감을 지닌 인물들이 아니다. 초반부에 만났던 도적 무리랑 같이 오두막을 쓸때도 약간의 경계심을 제외하면 그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든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카우보이 자체는 엄청나게 특이한 인물상은 아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가 이상한 이유는, [자니 기타]가 그랬듯이 정통 서부극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징후는 갑자기 등장한 자경대가 도적떼들을 쏴죽이고 번과 웨스, 오티스를 도적 패거리로 오해했을때 생긴다. 갑자기 이 세 명은 공권력에 반항한 악당이 되고, 오티스는 죽는다. 남은 번과 웨스는 살기 위해 도망간다.

사실 수동적인 쪽은 웨스와 오티스만 해당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잭 니콜슨이 맡은 번은 반항적이고 행동적인 캐릭터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도적떼를 다시 만났을때 웨스와 오티스는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하는 반면, 번은 반발한다. 심지어 무기력한 상황들이 이어질때도 번은 계속 불만을 표출하고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저돌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저돌성은 각본과 연기를 모두 맡은 잭 니콜슨의 연기에서 비롯된다. 후일 [샤이닝]이나 [배트맨]에서 널리 알려지게 될 특유의 오버액팅은 아니지만, 이미 여기서 완성된 니콜슨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 연기는 여전하다. 오히려 과시 없이 다른 연기자와의 조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샤이닝]이나 [배트맨]보다도 훨씬 뛰어난 구석이 있다.

번과 웨스가 한 민가에 숨어들면서 이야기는 다시 한번 다른 방향으로 꺾는다. 번과 웨스가 들어선 민가는 에반과 캐서린 부부와 10대로 보이는 딸 아비게일로 구성된 가족이 사는데, 이들 역시 다른 의미로 짓눌려있는 캐릭터들이다. 번과 웨스, 오티스가 부조리한 시스템의 희생양이라면, 이들은 단조로운 현실에 찌들어 있다. 무성의하게 반복되는 도끼질과 삭막한 식탁은 그런 단조로운 현실의 체화다. 이들의 단조로운 일상은 번과 웨스라는 비일상이 끼어들면서 흔들린다.

하지만 이 흔들림에도 어떤 짜릿함이 결여되어있다. 번과 웨스는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생각이 없고 (웨스가 별 일 없을거라고 강조하는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들 역시 그들의 단조로움을 끼어든 불청객을 불편해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가족은 개성조차 희미하다. 번이 아비게일을 데리고 나가면서 "멀리서는 내가 애비의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는 대사는 이 가족이 얼마나 몰개성한 존재인지 아이러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바람 속의 질주]은 어떤 짓누름에 대한 반발이 영화적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짓누름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압적이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거의 실존적인 경지로 주인공들을 밀고 간다.  주인공들은 한번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자신을 변론하지 못한다. 캐서린이 그들에게 무고를 어떻게 증명할거냐고 물어보자, 그들도 증명할 수 없는 방법이 없다고 시인해버린다. 남은 건 그저 생존 뿐이다. 소통의 순간조차 이어지지 못하고 파탄으로 끝난다.

여기까지 오면 알 수 있겠지만 고전기 서부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체념의 정서가 [바람 속의 질주]를 감싸고 있다. 결국 태생적으로 도주극이 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에센셜 킬링]에겐 먼 선조뻘 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을 짓누르고 있는 건 무엇인가? 말을 보면서 번과 애비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딸이 이방인과 얘길 나누기 싫어하는 에반, 치안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번의 혐오, 단조로운 삶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당신들이 하는 일이 더 외로워 보인다'라고 반문하는 애비... 이 영화가 1960년대 서구 청년 문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에 발표된 영화라는걸 유념하자. [바람 속의 질주]는 서부극의 영역에서 1960년대의 공기를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조금 더 나아가 베트남전에 대한 서브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바람 속의 질주]는 해석보다도 그 시대를 안고 돌파하려는 독특한 영화적 에너지가 매력적인 영화다. [바람 속의 질주]의 샷을 정의하자면 단조로움의 샷이다. 단적으로 몬테 헬만은 총격전을 찍을때도 긴장감을 노릴 생각이 없다. 단적으로 총격전 시퀀스에서 샷과 리버스 샷 길이는 느긋하기 그지없고, 주인공 일행은 싸우기는 커녕 도망가기 급급하다. 배우들의 연기 언어 역시 최소화되어 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의 단조로움은 통제가 안 된 방만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단조로움은 확실한 리듬이 있다. 삭막하고 건조하기 그지 없는 황무지를 담아낸 촬영, 절제되어 있지만 핵심을 찌르는 배우들의 뛰어난 앙상블 연기를 통해 몬테 헬만은 관객들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 관객들은 최면에 빠진 채 단조로움 속에 담긴 꿈틀거리는 리듬을 쫓아간다. 샘 페킨파가 죽음의 순간을 파편화하고 늘리는 방식으로 허무주의의 아름다움을 설파한다면 몬테 헬만은 삭막할 정도로 이질적인 황무지를 배경으로 삼고 샷과 컷, 시퀀스들의 흐름을 단조로 편곡해 반복하는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생경하고 느슨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집중력이 높은 영화다. 
 
영화의 결말이 폭발적인 질주로 끝나는 점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행동하던 웨스는 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번은 웨스를 버려둔 채 말을 타고 도주한다. 마치 지금까지 쌓여왔던 억압과 단조로움의 샷을 깨트리려고 하듯이 이 승마 장면은 박력이 넘친다. 고전기 서부극를 연상케하는 질주의 쾌감이 담겨있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번은 마침내 허무주의의 늪에서 탈출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번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번이 도망갈 수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 점에서 [바람 속의 질주]의 결말은 상당히 양가적이다. 영화는 억압에서 탈주를 꿈꾸면서도 '그 뒤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엔 대답을 아낀다. 어쩌면 정직한 답일 것이다. 이 영화를 발표할 당시 몬테 헬만이나 잭 니콜슨 모두 한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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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홈즈맨 [The Homesman] (2014)

(누설이 있습니다.) 

배우 토미 리 존스의 감독 생활은 현재까지 서부극의 영역에 천착해 있다. 엘머 크레튼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한 감독 데뷔작 [라스트 카우보이]는 늙어가는 카우보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였고, 감독으로써 재능을 확인시켜준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은 [바벨]과 [21그램]으로 유명한 기예르모 아리아가가 써내리고 죽은 멕시코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텍사스 보안관을 주인공으로 삼은, 현대에 이식된 서부극이었다. 본인이 텍사스 출신이기도 한 토미 리 존슨은 자신의 연출작에서도 그 강건하면서도 내적으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사는 '미국인'의 전형을 연기해왔다.

그 점에서 [더 홈즈맨]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와 같은 영화다. 글렌던 스와트와웃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더 홈즈맨]은 서부 개척 시절, 네브라스카에 살아가는 메리 비 커디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어떤 남성들보다 강한 생활력으로 목장을 운영하던 메리는 어느날 정신병력이 있는 여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여자들을 데리고 목적지를 향해가던 메리는 길에서 목이 매달린 채 죽어가던 총잡이 조지 브릭스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호송 임무를 맡기게 된다.

[더 홈즈맨]은 시기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의 서부극들에게 영향을 받은 영화다. 이는 토미 리 존스가 본인이 연기하는 조지 브릭스를 봐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조지는 못난 캐릭터다. 첫 등장도 그렇게 멋있지 않으며, 그가 영화 내내 보이는 행태는 "주접 좀 그만 떨어라..." 싶을 정도로 속물적이며, 자기 안위에만 신경을 쓴다. 

물론 이런 유형의 "멋있지 않고 약간 주접스러운 무법자" 캐릭터들은 고전 서부극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지만 (원작이 1988년에 발매된 걸 생각해보면 좀 더 수정적인 흐름에 연관을 지어야 되겠지만.), 그런 주접스럽고 못난 행동가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연출과 연기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의 말도 제대로 못타는 늙은 카우보이의 그림자를 찾아보긴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캐릭터들과 다소 다른 타입이지만 그의 연기는 예상 이상으로 훌륭하다. 코믹 릴리프에 그치지 않는, 자신만의 생존방법이 남들에게 주접스러움이라는걸 잘 알면서도 그걸 고수하다가 변화를 겪는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할까.

이런 못남의 강조는 힐러리 스왱크가 체감온도보다 높게 열연한 메리라는 캐릭터하고도 대조된다. 결혼 적령기가 지나 마을 공동체에서는 잉여 취급 당하면서도 못난 사람들에게 일갈을 날리며,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메리는 어찌보면 조지보다도 훨씬 고전적인 품위를 지닌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리없이 메리의 입장에서 영화를 따라가게 된다.

메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더 홈즈맨]이 주목하는 대상들은 여성이다. 메리가 바라본 서부 개척 시대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 없다. 아리벨라, 테올라인, 스벤슨로 대표되는 세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채 살아가며 메리는 그런 여성들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그 머나먼 길을 떠나지만, 정작 자신도 어떤 공허함을 지우지 못한다. 각각의 사연들은 꽤나 멜로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지만, 토미 리 존스는 이 영화의 승패가 이런 멜로드라마틱한 사건에 어떤 디테일과 연기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리벨라, 테올라인, 스벤슨 이 세 여성의 고통과 참담함은 단순하게 소모되지 않고 관객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켈리 레이차드의 [믹의 지름길]처럼 완전히 여성의 눈에 맞춰져 전개되는 서부극은 아니다. 오히려 조지의 시점에서 바라본 서부 여성 수난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토미 리 존스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망가졌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여성들과 그 여성들과의 교류를 통해 변해가는 캐릭터들을 통해, 존 포드의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보였던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으며, 충분히 페미니즘적 시각을 존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를 향한 존중은 영화 중후반부에 이뤄지는 반전에서 강력하게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인공의 교체라는 꽤나 위험한 수를 뒀음에도 우리는 메리가 조지에게 마음을 열였음에도 왜 그런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결국 메리 역시 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이 마음 속의 고뇌와 고통을 안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나 우직한 태도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 먹히는 연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조지를 주인공 삼아 이뤄지는 후반부 이야기는 토미 리 존스의 전작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처럼 무법자가 바치는 애도와 추모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여전히 조지는 호텔에 불을 지르고, 병든 여자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무뢰한이지만 일련의 행동들에 이전의 비굴함과 다른 어떤 고전적인 품위가 깃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 품위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와 자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건 자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비루한 몰골로 출발한 [더 홈즈맨]은 결말로 갈수록 고전 서부극이 가지고 있던 위엄과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문명과의 화해로 이뤄지지 않는다. 여관 종업원을 향한 조지의 뜬금없는 청혼과 종업원의 유보는 문명과 그의 관계를 압축하면서도 결국 그가 문명에 머물지 못할것을 암시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제시된 프레이밍은 그 점에서 인상적이다. 소실점 너머로 사라져가는 무법자를 담고 있으면서도, 강이라는 경계를 통해 서부와 문명, 애도하는 자와 애도하지 않는 자 간의 경계를 긋고 있기 때문이다. 서부를 "저주받을 악마"라 부르면서도 조지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이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조지는 메리의 묘비명을 잃어버리지만, 우리는 그가 추도를 멈추지 않을거라고 믿게 된다. 왜냐하면 결말을 통해 조지는 위엄을 잃지 않은 서부의 증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존 포드의 무법자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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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톨러런스 [Intolerance] (1916)


인톨러런스

Intolerance 
6.8
감독
D.W. 그리피스
출연
샘 드 그라세, 베시 러브, 툴리 마샬, 도널드 크리스프, 랄프 루이스
정보
드라마 | 미국 | 163 분 | -

D.W.그리피스는 여러모로 원죄같은 이름이다. [대열차강도]와 [달나라 여행]에서 태어난 내러티브 영화의 예술은 D.W.그리피스에서 본격적으로 마술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리피스는 한 장면에 한 씬이 아니라, 다양한 컷으로 장소와 시간을 줄였다 늘리는걸 본격적으로 영화에 도입했다. [대열차강도]나 [달나라 여행]가 컷 하나에서 자기완결되어 다음 장면의 시퀀스로 넘어가는 수준이였다면 [국가의 탄생]에서 D.W.그리피스는 한 컷이 다른 컷과 연계되어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하게 되는 혁명을 선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D.W.그리피스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던 세상 인식에 대한 무지함은 [국가의 탄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기엔 곤란한 영화로 만들었다. [인톨러런스]는 한동안 그리피스가 [국가의 탄생]에 대한 반동으로 알려져온 영화다. 

이야기는 옴니버스 식으로 네 파트로 나눠진다. 첫번째로는 1920년대에 살아가는 가난한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두번째는 익히 알고 있는 예수 이야기를 꺼내며, 세번째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을, 네번째는 바빌로니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국가의 탄생]과 달리 [인톨러런스]의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다. 각각의 파트들은 따로 따로 이어져 있으며 영화가 끝날때까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요람을 흔드는 여성이라는 컷을 통해 공통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움직인다. 바로 사랑과 평화에 대한 찬가다. 영화 자체가 일종의 공시성(싱크로니시티)을 가지고 움직인다고도 볼 수가 있는데 이 때문에 [인톨러런스]는 어찌보면 그리피스가 평생 완성하고자 했던 영화 언어를 서사에 반영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즉 그리피스는 개별적인 이야기/샷은 독립되어 있지만 붙여놓으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된다는걸 주장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른다. [인톨러런스]에서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에서 만개한 영상 언어를 마음껏 주무르며 관객을 희롱하는데, 이는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피스는 어느 순간에 어떤 장면을 보여줘야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킬것인지, 영화 속 인물들이 내뿜는 운동 에너지를 어떤 컷으로 잡아 보여줘야 효과적일지 (산골 소녀의 마차와 현대 파트의 기차 컷 간의 조합은 지금봐도 경탄스럽다.) 잘 알고 있다.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톨러런스]는 '불관용'이 극의 주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영화다. 영화가 나왔던 1920년부터 예수의 탄생 이전 바빌로니아까지 다양한 시간축을 횡단하면서 그리피스는 불관용에 고통받고 저항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재미있게도 그리피스가 그려내는 '불관용'으로 대표되는 적들은 철저히 계급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장장들이라던가 위그노 학살을 지시하는 카트린 왕비, 바리새인들, 벨 마르독이 이런 계급 의식을 기반한 악역들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 악역을 그릴떄 그리피스는 누구보다도 불관용을 주창하고 있다. 특히 1920년대 파트에 나오는 여성권리 운동가들이나 성 바르톨로메오 파트에 나오는 카트린 왕비에 대한 묘사와 자막은 창작자의 악의가 담겨 있다. 심지어 카트린 왕비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의 탄생]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인톨러런스]에 등장하는 그리피스의 시선은 거칠게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불편한 순진함은 사라졌지만 자본가들은 나쁜 놈들이고 노동자는 착하다라는 단순한 구도는 여전히 포기하고 있지 않다. 이 단순굵직하고 순진한 악의에 가득찬 선악 구도는 영화의 멜로드라마적인 감수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동시에 훗날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그리피스의 작품들을 찬양하게 되는 강렬한 선동성도 획득하게 된다. 과거 파트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지만 현대 파트의 선한 부부가 승리하는 결말 역시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와 불관용의 부르주아 세대를 뛰어넘겠다는 프로파간다적인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순 굵직한 선악 묘사로 얻는 이점도 있다. 일단 한쪽의 캐릭터가 단순해지자 영화는 악역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선역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지금 봐도 상당히 인상적인데 특히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는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이름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지만 바빌로니아의 산골소녀라던가 현대의 보스의 여자친구 역 같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이라던가 생생한 갈등은 지금봐도 놀라울 정도다. 그렇기에 [인톨러런스]는 페미니즘 운동을 혐오하는듯 하면서도 정작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를 걷어차지 않는 기묘한 형태의 캐릭터 메이킹을 보이고 있는 영화가 된다. 이런 D.W.그리피스의 캐릭터 메이킹은 분명 논쟁적인 캐릭터 메이킹이긴 하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적어도 그리피스는 이 캐릭터들에게 존중심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생생한 선한 캐릭터들의 매력 때문에 그 불균형적인 사상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영화가 주창하는 선과 사랑을 찾아나서려는 자들의 멜로드라마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적어도 그리피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거기에 속한 사람에겐 정직하고 선의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건 [인톨러런스] 내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인톨러런스]는 [국가의 탄생]으로 자신감에 찬 그리피스의 비전이 극한에 다다른 시각적 성찬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다. 헐리우드 영화의 화려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평을 가해왔지만 적어도 [인톨러런스]를 보면서 그들이 만들어왔던 '스펙타클'이 함부로 폄하될수 없는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인톨러런스]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지금봐도 놀랍다. 다른 부분들의 완성도도 상당하지만 흥행이 실패하자 그리피스는 바빌로니아 파트만 따로 빼 개봉하려고 했다는데 그 말대로 영화의 제일 놀라운 부분은 바빌로니아 파트에 담겨 있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에 무지막지한 물량으로 쏟아부은 엑스트라의 숫자라던가 바빌로니아 공성전의 무모할 정도로 치밀한 묘사에 담긴 박력은 '스펙타클'의 극한을 보여주겠다는 한 예술가의 광기마저 느껴져서 무서울 정도다. 제작 과정에 대한 책도 나왔을 정도로 [인톨러런스]는 무성 영화가 단순히 낡은 영화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복잡한 감정이 들수 밖에 없는 영화가 된다. 이야기의 구조와 영화의 구조를 실험하면서도 '스펙타클'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고자 했던 위대한 영화감독의 집념과 불관용을 이겨낼 사랑의 힘을 역설하고 있는 담겨있는 걸작이면서도 그 사상의 순진함과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 느껴지는 시대의 한계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사상이 오롯이 투영되어 있기에 지금 관점에서는 곧이 받아들여지기 힘든 영화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톨러런스]는 더욱더 생명력을 얻은 걸지도 모른다. 불관용의 극복을 다루는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불관용이 묻어나온다는 흥미로운 아이러니야말로 두 번의 세계 대전 이전 일그러진줄도 모르고 순진함과 진지함마저 느껴지는 낙관주의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인톨러런스]의 민중이 승리하는 낙관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서글픈 감정마저 들게 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되는 유산을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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