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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범죄 (3)
굿타임 [Good Time] (2017)

(누설이 있습니다.)

[굿타임]의 시작은 뉴욕 상공이다. 사프디 형제는 그 상공에서 한 건물로 쭉 확대해 들어가다가 한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바꿔치기 한다. 이 도입부는 당혹스럽다. 뉴욕이라는 배경이 제시되자마자 마스터 샷 없이 한 인물의 내밀한 표정이 곧바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인물은 정상이 아니다. 닉이라 불리는 인물과 상담사와의 대화는 제대로 된 샷-리버스 샷 구조를 구축하지 못하고 계속 빗나간다. 부조리극 같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폐소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굿타임]을 보는건 그리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굿타임]은 이 장면 이후로도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클로즈 업의 미로로 관객을 인도하는 영화기 떄문이다.

이 불편한 대화 시퀀스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형 코니에게 방해받는다. 상담사에게 욕을 하고 닉을 끌고 나가는 코니. 이쯤되면 코니가 닉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코니는 닉를 데리고 은행으로 털기로 한다. 코니는 지옥같은 뉴욕이 싫고, 버지니아로 대표되는 남부로 동생과 떠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범죄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어설프다. 사프디 형제가 그들의 은행 털이를 묘사하는 부분도 비장르적이다. 대체 어느 강도가 무기 없이 협박문 하나로 은행을 턴단 말인가? 코니는 득의양양해하지만, 곧 그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는게 드러난다. [굿타임]의 도입부는 장르의 실패를 다루는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다.

곧 닉은 잡혀가고 코니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코니의 바뀐 목표는 닉의 보석금 획득이다. 하지만 브로커 (아이러니하게도 사프디 형제처럼 유대인이다.)에게 바칠 지폐는 손상되어 쓸 수 없고, 애인의 어머니 신용카드를 이용해 카드깡할 기회도 사라진다. 코니는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몰래 꺼내기로 하지만, 정작 데려왔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와중에 코니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코니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게 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랬듯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의와 관계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쯤되면 [굿타임]의 부조리가 단순히 장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성체처럼 주인공을 가지고 논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코니는 뭘 해도 사프디 형제와 로널드 브론스틴이 만든 미로를 뛰어넘을 수 없다. 코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뉴욕의 밤을 해메는 것 뿐이다. 하지만 코니는 오디세우스와 달리 영웅 서사가 될 수 없다. 대도시의 익명성과 대중 문화의 아이콘들은 여정을 CCTV 영상 기록처럼 만들어버리고, 코니의 덜떨어짐과 후술할 성격적 결함은 인물의 헤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분명 필름 느와르스러운 구조에도 코니는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조차 되지 못한다. '굿타임'은 '운수 좋은 날'이나 다름없다.

[굿타임]을 구성하는 클로즈업과 부감은 그 점에서 영화 속 미로를 대하는 사프디 형제의 관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 특히 코니는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처럼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혀 얘기를 늘어놓고 이는 끊임없이 다른 이의 클로즈업과 충돌을 일으킨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을때도 사프디 형제는 전경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미장센을 조밀하게 잡는다. 때문에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임에도 길을 못 찾고 해메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탈의 집 시퀀스는 [굿타임]의 동선이 어떤 식으로 혼돈을 주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클로즈업들은 시퀀스 사이에 배치된 롱 샷과 부감 샷 앞에서 그 절박함을 잃어버린다. 반대로 너무 넓어져서 인물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굿타임]은 클로즈업의 절박함과 롱 샷/부감의 하찮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물을 초라하게 만든다.

사프디 형제가 보여주는 미로의 세부 묘사들은 팝 아트에 기반한 표현주의로 세공되어 있다. 마리오 바바나 마이클 만을 컬러리스트로 초빙한듯한 형광빛 색채, 대중문화 아이콘과 르포식 영상 기법, 실험적인 일렉트로닉 뮤지션으로 유명한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가 제공한 1980년대 풍 사운드트랙 속에서 사프디 형제의 카메라는 춤을 추듯이 절박하게 목표를 향하는 인물과 혼돈스러운 공간을 오간다. 전반적으로 샷과 편집의 리듬은 감정과 혼돈에 맡기고 있다. 그 점에서 마약과 섹스, 우연으로 점철된 레이의 혼돈스러운 플래시백은 [굿타임]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당신은 이 영화를 [핫라인 마이애미] 세계에 떨어진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라고 부를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코니가 이 부조리한 미로에서 벗어나 동생을 구하려는 시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맥거핀화된다는 것이다. 초반부 닉이 구치소에서 두들겨맞는 시퀀스는 코니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하지만, 정작 영화는 그 동기에서 코니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중후반부가 되면 닉의 행보와 존재감은 사라지고 코니는 완전히 닉을 잊어버린듯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다.

닉이 코니에게 의지하고 있다는건 명백하다. 하지만 코니가 닉을 생각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그 이상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코니가 레이를 닉으로 착각하고 데려오는 시퀀스다. 아무리 그래도 코니와 닉은 20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을 것이다. 단순히 붕대를 감고 있다고 해서 남을 동생으로 착각한다는건 도무지 정상적인 판단력이라 할 수 없다. [굿타임]의 가장 중요한 의문점은 코니의 '착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코니의 부주의함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어쩌면 코니가 닉을 사랑하는건 마약을 향한 마약 중독자의 심정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코니는 닉이 없으면 우월해질수도, 자신감을 얻을수 없다. '네가 있어서 나는 훌륭하다.'는 반대로 말하자면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코니가 닉을 상담사에게 보내려는 할머니의 팔을 부수고 가출한 것도, 중독자의 독점욕에서 비롯된 저항에 가깝다. 코니는 닉을 마약처럼 사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매우 허약한 존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니의 사랑은 닉을 위기로 밀어넣는다. 닉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으며 그저 엉뚱한 말을 뱉으며 끌려다니는 인물이다. 닉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인물이다. 코니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굿타임]의 초라한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다. 코니는 닉을 어떻게 대할지 정상적인 방식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엇나간다. 이 와중에 마약이 들어간 스프라이트와 닉은 코니에게 그닥 다를 바 없어진다. 혈육 닉이 마약을 팔려는 레이로 바뀌는 과정은 마약 중독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혈육은 마약으로 대체될 수 없다. 코니에게 남은 것은 광폭하지만 왜소한 종말이다.

버지니아로 가자는 코니의 말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코니가 생각하는 뉴욕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상담사와 할머니가 있고, 춥고 외로운 곳이다. 코니는 뉴욕에서 빠져나가야지 형제가 행복해질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그게 다른 남부도 아니고 미국의 시발점 중 하나인 버지니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뉴욕의 군상들은 그 점에서 버지니아와 대비되는 현대 미국의 사회/정치적 텍스트를 함유하고 있다. 코니의 발버둥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흑인들이다. 유대인 브로커는 법망을 넘나들며 알트 라이트의 상징이 되버린 개구리 페페가 무분별한 향락과 범죄를 장식한다. 한편 코니의 체포와 마약상 레이의 추락사는 마치 유튜브 충격 범죄 실황처럼 부감 샷과 로우 앵글/롱 샷을 빌어 연출된다. 코니는 춥고 싸늘한 광란의 이미지로 점철된 현대 미국과 뉴욕이 싫고 동생을 데리고 미국의 개척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코니의 마지막 클로즈업이 일종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면 뉴욕 탈주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프디 형제는 코니가 실패한 이유를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프디 형제의 마지막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코니를 바라보는 사프디 형제의 시선이 어떤 건지 보여주고 있다. 코니를 가두고 있던 경찰차 창살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줌 인에 흐려져 사라진다. 이미지를 광폭하게 확대하는 것으로 뉴욕의 창살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연출로 창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걸 코니나, 사프디 형제나, 관객 모두 알고 있다. 코니는 그 실패를 끝으로 영화 속에서 퇴장한다.

남은 것은 닉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닉은 상담사를 따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들의 방으로 이동한다. 영화의 결말은 갑작스럽다. 환자들을 모아놓고 상담사는 물어본다. "무언가 좋아하는게 있으면 지나가세요."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들. "사탕을 좋아하시나요?" "사랑에 빠져본적 있나요?" "거짓말을 해본적이 있나요?" 환자들은 지나가고 당황해하던 닉 역시 그 질문에 대답하듯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는 군중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계속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그게 어떤 형태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사프디 형제는 어느 부분에서 편집되었는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한다. 이 시퀀스의 인물 동선은 마치 영화 내내 이어졌던 클로즈업을 은유하는것처럼 보인다.

다시 질문. "친구가 있으면 지나가세요." 닉이 지나간다.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 갑자기 카메라는 방 밖으로 나가 방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환자들을 보여준다. 이 카메라 위치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닉이 지나가던 지나가지 않던 상관없다. 닉은 형을 친구로 생각했고, 그 어설픈 은행 강도짓을 형제로써 우애를 다지는 과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닉은 코니와 함께 타락한 뉴욕을 떠나 태초의 버지니아에서 행복하게 지낼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니는 닉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고 파멸에 치달았다. 닉은 퀸스에 홀로 남겨졌다. 방 밖에서 닉은 다른 환자들, 나아가 영화 내내 부감 쇼트로 보여졌던 도시 풍경 속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과거 시제의 질문이었지만, 닉은 현재 시제로 외롭고 외로울 것이다. 홀로 남겨진 닉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한채 외로이 군중 속에서 휩쓸려 다닐 것이다. 이때 사프디 형제는 닉에게 연민을 금치 못한다. 이기 팝의 엔딩 주제곡은 그 연민의 감정을 외화면에서 '순수한 녀석과 망할 녀석은 하나였다', 라며 체화한다. 분명 사프디 형제는 [굿타임]에서 더 나아간 영화를 만들겠지만, 이 연민의 감정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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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판 [Dheepan] (2015)

2009/11/05 - [Deeper Into Movie/리뷰] - 예언자 [Un Prophete / A Prophet] (2009)

2013/05/21 - [Deeper Into Movie/리뷰] - 러스트 앤 본 [De rouille et d'os / Rust and Bone] (2012)

2014/02/19 - [Deeper Into Movie/리뷰] -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De battre mon coeur s'est arrêté / The Beat That My Heart Skipped] (2005)

스리랑카 내전과 타밀 타이거라는 반군 단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의 도입부에서 어떤 절망감을 읽어내긴 어렵지 않다. 자크 오디아르는 저널리즘적인 설명은 일부러 배제한 채, 그저 패배라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어야 하는 (2000년대 중반, 기나긴 스리랑카 내전은 타밀족의 패배로 끝났고 그들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사람들의 절망감만을 담아낸다. 하지만 이 절망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불타오르는 시체의 산에다 지금까지 자신을 구성해왔던 타밀 타이거로써 증거들을 던져넣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다음 시퀀스의 주인공은, 주인공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여자는 미친듯이 난민촌에서 어린 소녀를 찾아다닌다. 마침내 부모를 잃은 고아 소녀를 발견한 이 여자는 소녀를 데리고 한 텐트로 가는데, 이때 오디아르는 소녀와 여성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배재한다. 그들이 모녀로 위장해, 첫 컷에 등장한 남자를 만나 '가족'으로 위장하는 순간 오디아르는 이 두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보여준다. [디판]이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담겨 있다. 영화는 주인공들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미스터리로 남겨둔 채, 그들이 처한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제스처를 보여주다가 그들이 디판, 얄리니, 일라얄이라는 가짜지만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한 순간에야 서사를 전개시키기 시작한다.

[디판]을 만들고 나서 오디아르는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잘 표현해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디테일에 굳이 주목하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왠지 변명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디판]은 역사와 정치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개인과 개인과 사회 간의 추상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는 특이한 영화다. 초반부가 지나면 영화는 잽싸게 프랑스로 옮겨가며 전쟁의 상흔은 가끔 등장하는 코끼리 몽타쥬 연출처럼 주인공을 압박하는 보조적인 장치로 머문다. 오히려 [디판]은 스리랑카 내전보다는 그 내전으로 어쩔수 없이 프랑스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디판 가족이 중간 기착지로 선택한 프랑스 교외의 공공 아파트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디판]의 허름한 공공 아파트는 이미 정착한 이민자와 막 도착한 이민자 사이에 계급적 격차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디판에게 일을 소개하는 사람은 흑인이며,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백인들조차도 가난과 범죄로 인해 유색 인종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인다. 디판 가족은 그런 바닥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그들의 법칙을 배워나간다. [예언자]가 그랬듯이, 오디아르는 이 과정을 일견 사실적이면서도 강한 심리적인 이미지들을 이용해 응축시키고 터트리는 연출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아파트를 쥐고 있는 갱단 두목 브라힘에게선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에서 찾아볼수 있었던 늙고 지친 프랑스와 이민자랑 부대끼며 살아가는 젊은 프랑스라는 구도도 찾아볼 수 있다. 브라힘은 톰처럼 흑인들과 아랍인들을 상대하며, 반대로 브라힘의 아버지는 사실상 죽은거나 다름없이 제대로 소통도 못하고 이민자 얄리니의 손길에 받으며 살아간다.

다만 [디판]은 [위선적 영웅]에서 비롯된 '만들어진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종 기착지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 불시착한 디판 가족은 진짜 가족이 되고자 발버둥을 치고, 현재의 차별과 과거의 상흔이 수시로 그들을 엄습해온다. 이 부분에서 [디판]은 명백하게 디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물론 얄리니와 일라얄 역시 이야기의 주체이며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드러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디판의 불안감과 긴장보다 깊게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일라얄이 교실을 뛰쳐나와 울먹이는지, 얄리니와 브라힘이 어째서 서로 공명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는지 알 수 없다. 그것들은 추상화된 컷 연결에서 암시될 뿐이다.

반면 디판은 본명부터 시작해 얄리니와 일라얄보다 많은 뒷얘기가 공개된다. [디판]에서 제일 인상깊은 장면 역시 디판이 중심이 된 장면이다.. 프랑스에 은거중인 타밀 타이거 대장을 만나는 시퀀스에서 디판은 이전까지 묵묵하고 터프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무력하고 슬픔에 젖어있다. 그가 대장에게 폭행 당한 직후 강한 저항가를 부르는 장면은 그 표현주의적인 어둠과 연기의 (디판을 맡은 제수타산 안토니타산는 타밀 타이거 출신 작가로, 연기 경력은 한 편밖에 없는 비전문 배우다. 얄리니와 일라얄 역시 비전문 배우다.) 박력에도 불구하고 먹먹한 슬픔에 갇혀 있다. 

이 감수성은 분명 화장실에서 피떡이 된 채 덜덜 떠는 톰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이라던가 첫 살인을 저지르고 혼돈에 빠진 말릭 ([예언자]), 아들을 꺼내기 위해 미친듯이 주먹으로 얼음을 내려치던 알리 ([러스트 앤 본])에게서 찾아볼수 있는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이다. 디판 역시 다른 오디아르 주인공들처럼 비극으로 끝났지만 불현듯 엄습해오는 과거와 각박한 현재, 안정감과 애정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가 후반부에 보이는 일련의 저들은, 그런 방황을 조금이나마 인간적인 방향으로 끌어오려는, 현실이라는 중력을 향한 저항이다. 오디아르는 그런 안정감과 애정을 얄리니의 육체와 따뜻한 공원 들판로 대표되는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이미지로, 현실이라는 중력과 그에 대한 저항을 필름 느와르와 액션 영화에서 비롯된 시끄럽고 콘트라스트가 뚜렷한 표현주의적 이미지로 나눈뒤 이를 배치하고 연결하는 방식으로 영화적인 에너지를 구성한다. 

이를 보듯 [디판], 나아가 오디아르가 끄집어내는 영화적 에너지는 과거에서 비롯된 시궁창같은 삶을 거칠게 뚫고 나가면서도 종종 어찌할수 없는 멜랑콜리와 탐미에 침잠하는 모습에서 비롯된다. 죽은 어머니로 대표되는 피아노 음악의 아름다움과 산 아버지로 대표되는 불법 부동산 세계의 지저분함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은채 살아가던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의 톰, 순수함을 품은 채 예리하고 냉정한 암흑가의 알 무알림으로 성장하는 [예언자]의 말릭, [러스트 앤 본]의 다리가 잘리고 난 뒤 오히려 관능적인 에너지를 얻어 불법 격투 시합에 관여하게 되는 스테파니와 순수한 사랑과 지저분한 정욕과 분노를 품고 살아가던 알리가 그랬다. 디판은 어둠 속에서 디판이 파는 싸구려 머리띠의 불빛이 켜지다가, 경찰에게 추격받는 장면으로 끝나는 [디판]의 타이틀 시퀀스는 그 점에서 매우 오디아르 특유의 강렬하면서도 멜랑콜리한 이미지의 집약적 폭격이라 할 수 있다.

[디판]이 선택한 폭력적인 클라이맥스는 어찌보면 지금까지 쌓여온 유약함과 불안을 터트리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프랑스 하층민의 삶을 보여주던 다큐멘리적 카메라는 [칠드런 오브 맨]을 연상시키게 하는 거친 질감과 박력으로 연기로 둘러쌓인 아파트로 진입하는 디판의 동선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오디아르는 이 장면을 총소리와 연기, 쓰러지는 사람들, 계단을 오르는 디판의 운동 에너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로 배치해 표현주의적인 아름다움과 박력을 표현해낸다. 그리고 그 폭력을 절규와 껴안기라는 멜로드라마적 제스처로 마무리짓는다.

오디아르 영화들은 명확한 서사적 인과 없이 멜로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모호하지만 에너지로 들끓는 상황에 인물들을 던져놓고 끝내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는데, [디판] 역시 그렇다. 좀 더 자세히 분류하자면 소원성취적 결말이라는 점에서 [디판]의 결말은 [러스트 앤 본]에 가까운 편이다. 최종 목적지인 영국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옷을 차려입고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디판은, 과연 현실인가, 환상인가? 오디아르는 그저 디판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얄리니의 손을 클로즈업하는걸로 결말을 마무리 짓는다. 이 제스처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거라고 믿는다. 즉 아름다움이 서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실제로는 그 인과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도.) 믿게 되는 것이다.

[디판]이 지금까지 나온 오디아르 영화 중 박한 평을 받고 있는데, 아마도 이 멜로드라마적인 제스처와 폭력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유약하지만 터질것만 같은 영화적 에너지의 결합이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져서 아닐까 생각한다. 심지어 결말 부분도 그렇다. 남녀간의 애정과 가족애를 원동력으로 삼는건 이미 [러스트 앤 본]과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 등에서 이뤄낸 것이며, 이민자의 불안한 심리를 범죄물이라는 장르에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예언자]에서 해낸 것이다. 또한 사회역사적 맥락을 배재하고 어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의 진폭을 쫓는 오디아르의 태도는 솔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겉햛기여도 좋으니 디판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역사적 디테일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디판 가족은 말릭이랑 달리 프랑스 내에서도 친숙한 사람들이 아니니깐 말이다.

아마 [디판]은 지금까지 만든 오디아르 영화의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영화일것이다. 하지만 그런 도식성에도 [디판]은 종종 잊기 힘든 아름다움을 뽑아낸다. 오디아르가 이런 작법을 고수할지 아니면 다른 단계로 넘어갈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오디아르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디판]은 나쁘지 않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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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복수 [復仇 / Vengeance] (2009)


피의 복수 (2014)

Vengeance 
5.5
감독
두기봉
출연
조니 할리데이, 임달화, 황추생, 실비 테스튀, 임가동
정보
액션, 범죄 | 홍콩, 프랑스 | 108 분 | 2014-04-24

두기봉의 [피의 복수]를 보게 된 관객들은 기시감이 든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였는데, 라고. 홍콩 영화니깐 홍콩 느와르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윽고 자니 홀리데이가 연기한 코스텔로가 등장하면서 두기봉은 그 기시감의 정체를 분명히 한다. 두기봉은 [피의 복수]를 통해 홍콩 느와르와 장 피에르 멜빌를 비롯한 프렌치 느와르의 세계로 올라가겠다고 선언한다. 내용으로 보자면 [피의 복수]는 [더 울버린]처럼 서양인이 동양에서 고생하는 하부 장르에 속해 있지만, [더 울버린]과 달리 두기봉은 처음부터 자신이 그 장르에 속해있다는걸 명백히하고 그걸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피의 복수]를 진지하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것은 두기봉이 [피의 복수]에서 장르를 구현하는 방식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먼저 두기봉과 각본가 위가휘는 코스텔로에게 기억 상실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리고 코스텔로를 돕는 홍콩인 동료들 콰이, 페이 록, 추가 복수의 대상 아래에서 일하는 부하라고 정해놓는다. 그렇기에 영화의 복수엔 묘한 서스펜스가 작용한다. 두기봉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1. 코스텔로가 기억을 잃기 전에 복수를 행할수 있는가? 2. 콰이 일행은 복수 대상인 조지 펑에게 충성을 다할 것인가?

2.에 대해서는 두기봉은 망설임없이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두기봉이 암흑 세계를 그려내는 법칙은 명확하다. 아무리 암흑가에 있다고 해도, 그들의 보스 조지 펑은 암흑가에서도 하지 말아야 하는 잘못을 저질러버렸다. 성문화된 법이 아니라 어떤 규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부하 관계라도 그들은 서로 전쟁을 치르게 된다. 반대로 코스텔로와의 관계는 처음엔 분명 계약으로 시작했지만 뒤로 갈수록 그 관계가 훨씬 친밀한 쪽으로 변해간다. 두기봉은 분명히 이 부분에서 무수히 명멸했던 무협지에 등장하는 강호의 도를 논하고 있다. 조지 펑은 한마디로 강호의 도를 어지럽힌 사람이기에 가까워도 처단해야 하며, 반대로 외부인이자 타자인 코스텔로의 복수는 그 강호의 도에 따라 정당화된다.

초반부 코스텔로가 콰이 일행이 청부살인을 하다가 만나고 묵인하는 장면은 어찌보면 그 강호의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코스텔로는 그 낯선 세계에 대해 예의를 표했기 때문에 (물론 그가 그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자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강호의 세계에 존중받을 권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일본의 무사도에 매혹되어 있었다는걸 숨김없이 보여주면서도 인물 관계와 무사도를 수행하는 방법론 자체는 외부인이 가진 현대적인 도덕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던 [더 울버린]과 달리 [피의 복수]의 세계에 적용되는 윤리는 내부인들에게 이미 익숙한 가치고 외부인들도 인식하고 따라야하는 곳이다. 현대적인 법이나 계약관계조차 그 윤리에서 고개를 숙인다. (경찰들이 초반부에 등장했다가 존재감이 아예 없어지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이처럼 두기봉은 익숙하게 지나쳤던 장르를 관객들이 다시 재점검하도록 이야기와 미장센을 구성한다.  코스텔로는 그 점에서 복수의 주체면서 동시에 그 세계의 관찰자/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강호의 세계가 현대적인 법률 문제로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코스텔로와 홍콩인 동료들이 코스텔로 사위와 손자들을 죽인 해결사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두기봉은 이상할 정도로 정중하다. 두기봉은 해결사에게도 캐릭터와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이 강호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걸 보여주고, 그렇게 서로 당위성을 지닌 두 집단 간의 긴장감을 그려낸다. 요컨데 무림 고수들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려한 총격 장면은 그런 무림 고수들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1.이 던진 질문을 상기해보자. 이 경우 문제는 미묘해진다. 두기봉은 계속 코스텔로의 복수가 이 기억상실로 망가질거라는걸 분명히 상기시키면서 전개하다가 절반 정도 왔을때 코스텔로의 기억을 빼앗아버린다. 이때 [피의 복수]는 단순히 복수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기억와 죽음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복수를 하고자 하는 자가 복수를 잃어버렸다면, 남은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로 돌아가는가? 두기봉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코스텔로는 잠시 주역에서 물러나게 되고, 콰이, 페이 록, 추가 복수의 주체로 올라서게 된다. 그런데  콰이, 페이 록, 추가 복수를 하게 된 이유는 2.하고 밀접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들은 계약준수를 얘기하지 않는다. 코스텔로가 가지고 있던 유지를 그들이 대신 이어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마치 코스텔로가 죽은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복수를 하려고 하다가 그대로 죽고 만다. 

남겨진 코스텔로가 마치 어린 아이 같은 상태로 묘사된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바닷가의 아이들이 모여있는 식당에서 천진난만하게 놀면서 밥을 먹는 코스텔로의 모습은 영화의 장르마저 달라진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콰이 일당이 죽고 난 뒤 영화는 다시 복수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두기봉은 코스텔로가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이 코스텔로를 찾아오는 환상 장면을 풀 샷으로 집어넣는데, 이 장면은 영화 내내 이어졌던 비정한 전개와 달리 유달리 시적이고 우울한 로맨티시즘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외적으로 보면 이 유령들은 프렌츠 느와르와 홍콩 느와르에 대한 애정과 바램이 강력하게 들어가 있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정이야말로 [피의 복수]를 만드는 창작자 두기봉의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아이들과 식당 주인의 도움을 받아 이뤄지는 코스텔로의 복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세트 피스로 이뤄져 있다. 스티커와 좁은 골목, 극명한 명암으로 이뤄진 조명 설계 등 코스텔로가 복수하는 장면은 쓰레기 더미를 굴려가지고 싸우는 콰이 일행의 총격전과 더불어 두기봉 특유의 스타일이 만개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두기봉은 페킨파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걸 명백히 한다. 두기봉은 복수가 코스텔로에서, 콰이 일당으로, 다시 아이들과 식당 주인들의 도움을 받은 코스텔로로 넘어가는 과정을 구조화하면서 독특한 운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복수가 끝난 뒤 영화는 다시 그 동심과 평화의 세계에 코스텔로를 배치하는걸로 그 운동을 마무리짓는다. 살아남았지만 친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코스텔로는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고 평안을 찾게 된다. 혈연으로 이어진 친가족 대신 비혈연적이고 수평적인 트랜스내셔널리즘적인 대안가족에 대한 긍정인가? 두기봉은 이런 의문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거기다가 배치하는걸로 만족할 뿐이다.

[피의 복수]는 두기봉의 걸작이라고 하기엔 종종 과잉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스패로우]처럼 하늘하늘 가벼우면서도 할말 다 하는 영화는 아니고 두기봉 자신의 야망과 덕심이 제대로 폭주한 영화라고 할까. 하지만 두기봉은 이런 영화를 만들면서도 홍콩 내 흥행 영화를 만들어내는 자의식이라곤 거의 없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피의 복수]에 보이는 독특한 구조와 이미지들은 다시 생각해보면 두기봉이 만들어내는 자의식 없는 흥행 영화들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걸 알 수 있다. 단지 그는 그 자의식 없는 흥행 영화들을 보면서 놓칠수 있는 의미들과 이미지들을 섬세하게 배치해 관객들이 이 장르를 즐기면서도 이 장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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