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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샘 페킨파 (2)
어둠의 표적 [Straw Dogs] (1971)


2018/01/30 - [Deeper Into Movie/리뷰] -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은 매우 이상하게 시작한다. 잠깐 어딘가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이미지를 흐린 뒤 타이틀을 띄운다. 그 흐릿한 이미지의 정체가 다시 밝혀지는 순간은, 타이틀이 다 뜨고 난 뒤다. 사실 그 이미지는 교회 묘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곧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도착한다. 감독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재빠르고 잘라낸 시선 숏으로만 제시되는 에이미에게서 상당한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노골적인 관음 숏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그 자신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성적인 이미지를 흘리며, 관음은 혐오스러운 순진함과 추잡한 탐닉으로 재빠르게 이뤄진다. 

요컨데 샘 페킨파는 첫 장부터 관객들에게 이걸 견딜수 있겠냐고 도발을 하고 있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에이미의 옛 남자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밀렵꾼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덫 이야기로 마을의 폭력성을 흘러둔 샘 페킨파는 마치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를 거스르듯이 이 장면을 불쾌한 남자들의 위압적이고 건들거리는 제스쳐로 채운다. 그 속에서 데이비드는 무력하다. 안경과 수학이 배경이 되는 영국 시골 노동자 문화의 거칠음과 반대된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동료가 되어야 할 에이미 역시 데이비드 곁에 있지 않고, 찰리 패거리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다. 데이비드는 콘월에서 완벽하게 혼자다. 자기 전에 행하는 줄넘기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면, 데이비드의 왜소한 남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반엔 데이비드는 이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릴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데이비드가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는 시도다.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이 맡았던 숀 역시 옛날에 가족이 살던 집을 수리하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다. 하지만 혼자서 집을 정리하며 친해졌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혼자서 집을 정리하지 못한다. 권투 선수였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본질적으로 도시에 익숙한 부르주아 지식인이다. 파국 직전까지 데이비드가 집에서 하는 행위는 방에 틀어박혀 수학 문제를 풀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부리는 장면 뿐이다. 그런데 데이비드가 집 수리를 위해 고용한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찰리로 대표되는 에이미의 옛 남성 친구들이다. 이 남성 친구들은 거친 일에 능하다. 페킨파는 마치 순박한 아일랜드 시골 커뮤니티의 정의를 믿었던 [말 없는 사나이]에 침을 뱉듯이 사악한 영국 시골 커뮤니티의 불의를 강조한다.

마초 샘 페킨파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은 바로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여자가 아는 다른 남자의 손을 빌어야 하는 부분이다. 페킨파에게 데이비드는 지지리도 못한 쫌팽이 같은 남자다. 이를 대변하듯이 집을 수리하는 찰리 패거리와 데이비드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철저한 경멸의 숏과 리버스 숏으로 이뤄져 있다. 데이비드는 하이 앵글 숏에서 왜소하게 제시된다. 당연히 이 시컨스의 승자는 지붕 위에서 하이 앵글로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찰리 패거리인데, 동물에게 이성적으로 반응해봤자 동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쥐고 있는 유일한 권력은 경제적인 관계인데, 그마저도 찰리 패거리는 연연하지 않는다. 일진에게 화를 내거나 돈을 바쳐도 일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롭힐 구실을 잡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고양이를 죽이고 그 시체를 데이비드의 집에다 던져넣는 장난은 유치하지만 사악하다.

이 사이엔 에이미가 있다. 박찬욱 감독이 지적했듯이 에이미는 데이비드와 찰리 패거리에서 이중 스파이와 같은 존재다. 에이미는 데이비드를 사랑하지만, 그의 부족한 남성성에 큰 실망을 품고 있다. -를 +로 바꾸는 장면은, -된 욕망을 +로 바꾸고 싶어하는 에이미의 욕망을 드러낸다. 에이미 자신이 발산하는 성적 이미지라던가, 그런 이미지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관음증적 시선 숏을 생각해보면 이 욕망이 성적인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심지어 에이미는 데이비드 보고 대놓고 ‘비겁하다’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하다. 이 비겁함은 남성성의 부족함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주체적인 묘사로 표출되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당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여성혐오적이다. 에이미는 남자들에게 먼저 유혹하려는 태도는 취하지 않은 채 성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다가 강간당한다. 소위 말하는 수동적으로 성적 이미지를 표출하고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1970년대 초기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서 비판을 받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원작자 고든 M. 윌리엄스와 페킨파, 각본가 데이비드 젤리그 굿맨은 에이미 캐릭터에 복잡한 생각을 할 두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이 이런 여성혐오적인 캐릭터 설정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에이미는 이 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찰리 가문이 일종의 법도 도덕도 없는 흉악한 짐승 집단처럼 그려지는 걸 생각해보면 에이미의 성적인 방종함은 배경이 되는 콘월 지역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들의 관점의 일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종의 에밀 졸라풍 자연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졸라가 만들어낸 나나가 그랬듯이 에이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본능을 뛰어넘는 복잡한 셈이나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물론 데이비드의 지성에 맞추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잠자리에 등장하는 체스 대결 역시 입문서를 읽으면서 둬야지 간신히 진행되고, 그나마도 정정당당한 대결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데이비드의 수학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데이비드의 짜증어린 반응을 고양이하고 놀면서 회피하거나 1차원적인 단순한 리액션으로 받아칠 뿐이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부부싸움을 하는 숏과 반응 숏을 자세히 보면 찰리 패거리의 무시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라면, 에이미의 동물적 반응 숏은 경멸보다는 짜증과 갈망에 가깝다는 것이다.  

도시에서였다면, 에이미의 방종한 성격은 백치미로 안전하게 가부장 관계에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에이미가 태어난 시골 마을이다. 안전한 백치미는, 시골에서는 통제불가능한 가부장 남성의 야수성을 자극하는 스위치가 되버린다. 그 점에서 에이미가 강간당하는 시퀀스와 데이비드가 마을 남자들에게 꼬여 사냥을 가는 시퀀스랑 교차 진행되는 전개는 서사상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시골 마을이 요구하는 남성적 행위를 수행하면서 마을에 편입되려고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내부인들 앞에서 역할 수행을 하는 동안, 에이미는 집에 침입한 옛 남자친구 찰리에게 강간당하다가 화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악명높은 강간 장면은, 두가지 점에서 이중적이다. 하나는 에이미의 야만적인 남성성에 대한 욕망이 폭력으로 부서진다는 점이다. 강간으로 생긴 에이미의 트라우마는 직후 등장하는 교회 파티 시퀀스를 통해 드러난다. 이때 에이미는 갑자기 브라를 착용하는 정숙한 여인이 된 것처럼 보이고, 삽입 숏으로 제시되는 노골적인 성적 상징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에이미가 후반부로 갈수록 찰리의 강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인정해야 한다. 찰리가 에이미의 옛 애인이었다는 설정은, 끔찍한 강간 판타지에 기반한 에이미의 심리적 변화를 그려내기 위한 밑밥인 셈이다. 이 강간 판타지가 완성되는 순간 샘 페킨파는 데이비드가 사냥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두 장면의 교차 편집은 동일하게 짧게 쏘아붙이는 숏으로 대비된다. 데이비드는 새 사냥에 성공하면서 남성성을 인정받지만, 동시에 옛 애인 찰리에게 성적으로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 폭력을 능숙하게 다루는 동안, 성적으로 되려 더 무능해지는 것이다. 

더 무서운 점은 이때 페킨파는 강간범인 찰리는 물론이고, 데이비드와 에이미 그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의 기쁨이 강간의 고통과 동일시 되는 편집 기법에서 사냥의 성취는, 불쾌한 강간 판타지 앞에서 산산조각난다. 남은 건 공포와 낯설음, 그리고 역겨움이다. 페킨파에겐 강간과 사냥 모두 약한 자를 짓누르는 행위기 때문이다. 사냥에 돌아온 데이비드와 강간당한 에이미가 (당연하겠지만 에이미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싸우는 장면의 숏 연결 역시 시선 회피와 의도적인 어긋남으로 이뤄져 있다.  여성 혐오적 상황이 슬슬 인간 혐오적인 상황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둠의 표적]은 명백한 여성 혐오적 설정을 품고 있음에도, 여성 혐오적 상황을 안전하게 소비할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인다. 영화의 원제는 그 점에서 노자가 세상사의 하찮음을 관조하는 자세를 악의적으로 뒤틀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외양과 달리 샘 페킨파가 지독히도 서부극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서부가 개발된 현대에서 야만의 영역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등장하며, 문명의 본류라 믿었던 영국이야말로 야만을 방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지점에서는 미국의 서부극보다도 훨씬 끔찍한데 이 영화에서는 야만을 통제할 아버지의 법이 전혀 동작하지 않고 있기 떄문이다. 이 영화에서 정상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자는 퇴역 장군 존 스콧이지만, 영화의 파국은 그가 찰리 패거리의 우발적인 총격으로 맞아죽으면서 시작된다. 법이 통하지 않지만, 법을 집행할 자는 무력하다. 그렇기에 외부인의 활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집행을 대신할 외부인은 폭력을 한번도 써본적이 없는 수학자다. 페킨파는 이 아이러니에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이를 위해 페킨파와 각본가들은 데이비드가 멀쩡히 잘 있다가 뒤집어진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초반부에 에이미와의 대화를 보면 알겠지만 데이비드가 모종의 문제로 도시에서 쫓겨나 정착했다고 정보를 흘린다. 데이비드는 보기만큼 안전한 인물도, 이입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의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인 헨리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헨리는 마을 사람들의 희생양, 호모 사케르나 다름 없다. 그는 핍박받으면서 마을의 규율을 유지하는 존재다. 영화의 파국 역시 헨리가 찰리의 사촌 재니스와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이유로 폭발한다. 하지만 헨리는 완벽하게 무고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야수성을 뒤집어 드러내는, 어린아이 같은 캐릭터다. 단적으로 파국의 상황에서 헨리는 발작하며 에이미랑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도망가려고 한다. [어둠의 표적]의 아이러니는 무고하지만 순수하지는 않은 희생양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폭발한다. 폭발은 공적 영역을 상징하는 교회를 벗어난, 사적 영역인 데이비드의 집에서 (그것도 밤에) 이뤄진다. 조명은 꺼져 있고, 무도덕한 짐승의 패악로 무장한 찰리 패거리는 총을 쏘아대며 짐승 소리를 흉내낸다. 가장 안전한 집이 가장 위험해지는 아이러니를 통해 페킨파는 호러 영화의 어법을 빌려온다. 찰리 패거리는 더 이상 이성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자 좀비다.  제약된 시선 바깥의 불쾌한 음향과 위협적인 액션을 통해 긴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존 카펜터의 [13번가의 습격]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찰리 패거리의 논리는 간단하지만 (“우리 여자를 건드린 병신 새끼를 족치자!”), 법 나아가 당연한 상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약자를 향한 가부장의 패악질을 농축한 집단이다. 어떤 점에서 찰리 패거리는 [라이드 온 하이 컨트리]에 등장했던 엘사를 뒤쫓는 불쾌한 오빠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성 대신 지적 장애인이 핍박받는 자로 변했을 뿐이다. 데이비드는 그 점에서 상술한 서부극의 외부에서 온 보안관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술했지만 여기는 신화가 끝난 영국이다. 자신의 일을 하려는 데이비드의 폭력은 극단적이고 지저분한 수단으로 표출된다. [어둠의 표적]의 후반부가 무시무시하다면, 데이비드가 휘두르는 정의의 폭력과 찰리 패거리의 사악한 폭력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데이비드의 분노는, 헨리를 지킨다기보다는 일진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도 그렇다.) 자신의 의무를 강조하다가 도망가려는 헨리를 쥐어패고 다락에 가두는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틈틈히 찰리 패거리를 옹호하면서 데이비드를 막다가 얻어맞는 에이미 같은 여성혐오적 묘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페킨파는 폭력의 동인을 계속 겹쳐놓으면서, 폭력의 명료성을 일부러 흐려버린다. [어둠의 표적]은 설정을 통해 폭력의 장르적 쾌감을 약속하지만 그 역치를 넘어버리는 수준까지 밀고가면서 그로테스크함을 구축한다. [가르시아]가 선악 구분이 명확한 대신, 자기도취성에 빠져있다면 [어둠의 표적]은 그런 자기도취성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결말 역시 묵시록적이다. 우선 찰리 패거리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동시에 찰리에게 총을 쏜 이중 스파이 에이미는 파괴된 집에 남는다. 하지만 에이미 역시 고향 마을에 더 이상 정착할 수 없는건 분명하다. 그것은 데이비드와의 파국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파국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데이비드와 헨리다. 어둠 속에서 차를 타고 집을 빠져나오는 데이비드 옆에 앉은 헨리는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다. 데이비드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데이비드와 헨리 역시 어디로 갈지 모른다. 이 곳이 고향인 에이미는 집에서나마 머물수 있었지만, 데이비드와 헨리는 시골 공동체를 움직이던 구성원들을 살해함으로써 완벽한 외부자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영원히 아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공동체를 박살내고 영원하고도 비현실적인 어둠에 갇힌 인물들. [어둠의 표적]이 섬뜩하다면, 그 감금된 인물들에게 아무런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잠재된 괴물적인 본성을 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는 이 영화에게서 폭력의 동인과 쾌감이 지루한 시골 마을에서 반전되어 제시되는 섬뜩함을 배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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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가르시아]는 연못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샷은 위태롭다. 한 소녀가 연못 경계에 있는 나무에 누워 있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서서 저택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소녀는 마치 물에 빠질것처럼 누워있다. 왜 하필 물가에서 영화를 시작할까. 아마도 이 영화 감독이 샘 페킨파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헤모글로빈과 슬로모션에 취한 성질머리 더러운 마초. 그 마초는 물의 죽음과 땅의 생명 그 사이에 잉태를 할 수 있는 여자를 배치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제시한다. 죽음과 삶, 그리고 매장의 경계를 여인이 가로지를 것이다. 그리고 슬로 모션은 죽음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며 기록할 것이다.

곧이어 소녀가 위태롭게 누워있었던 이유가 등장한다.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라." 멕시코 갱 제페의 선언으로 [가르시아]는 비틀리고 우울한 여정을 시작한다. 제페에게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허락없는 임신이다. 제페의 딸 테레사는 한량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와 통정을 했고, 그 결과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폭압적인 가부장은 이걸 용서치 않고 자신의 유사 아들들인 갱들을 이용해 알프레도 가르시아를 처벌하려고 한다. 이 처벌을 대리하는 자인 사펜즐리와 퀼이 여성이 배제된 게이 커플이라는 점은 (암시적이지만 그들은 여자를 싫어하고 파트너의 시체를 향해 눈물짓는 모습을 보인다.), 제페 일당이 극단적인 가부장과 남성성에 취해 있다는걸 보여준다.

사펜즐리와 퀼은 곧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를 찾아낸다. 보통 이런 줄거리의 느와르/범죄 영화라면 베니를 좀 더 장르적으로 세공된 과거와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할 것이다. 하지만 페킨파와 고든 도슨이 쓴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베니는 제페 일당의 위압적인 남성상과는 한발짝 떨어져있다. 한때 미군이었지만, 퇴직해 바 주인으로 살고 있는 베니는 위축되어 있다. 가끔 거칠게 굴지만 차라리 상처받은 채 그늘로 숨어든 짐승에 가깝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거친 과거의 일부였던 가르시아의 행적도 잘 알지 못하고 여성인 엘리타를 경유해서 알게 된다. 베니는 골칫거리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애인인 엘리타와 평온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금전적 이득은 그를 파국의 여정으로 향하게 만든다.

[가르시아]의 구조는 서부극 그것도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같은 1970년대 페킨파가 즐겨 만들었던 폭력적인 서부극과 닮아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관계의 종말]에 가깝다. 피에 절어 살았던 마초는 지쳤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이 옛 친구를 팔아야 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종말이다. 다만 페킨파는 이 여정을 평범한 서부극으로 만들지 않고, '카르텔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현대 서부극의 영역에서 만들고 있다. 페킨파의 현대 영화들에서 이런 노선을 취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는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결과는 기묘하다. 이 영화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 홀려 파멸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애도의 완수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머리는 그 점에서 영화가 추구하는 애도의 완수를 그로테스크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는 잘려진채 자루에 담겨 여러 사람을 오간다. 페킨파는 머리의 행방을 통해 인물 간의 갈등과 액션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정작 가르시아의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고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페킨파의 터치는 좀 심술궃은데 있다. 편안하게 매장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제페의 복수심과 금전적 이득 때문에 가르시아의 머리는 주인의 몸을 떠나 무수한 사람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주인인 알프레도 가르시아는 이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 뿐이다. 효수된 머리와 브로맨스라. 페킨파의 악취미 중에서도 최고 악취미라 할 수 있겠다.

이 어처구니없지만 황망한 애도의 여정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영화의 여정을 더욱 불편하고 우울한 감정에 푹 젖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을 꼽으라면 (페킨파가 선호했던 배우 중 하나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바이커로 등장해 베니를 무력화하고 엘리타를 강간하려는 시퀀스가 있다. 일단 이 시퀀스가 그동안 숨어있었던 베니의 남성성과 폭력성을 끌어낸다는건 명백하다. 페킨파는 이 사건을 지금까지 야성을 잃고 안전하고 무력하게 살아온 베니가 가르시아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그런 악한이 못되잖아요") 결국 베니는 그 응답에 답해 바이커들을 쏴 죽여버린다. 여기까지는 으레 있는 페킨파의 악취미려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뒤 흥미로운 연출이 있다. 불쾌한 강간 미수가 바이커의 죽음으로 끝나고 페킨파가 보여주는 시퀀스는 또다른 무기력과 연약한 고백이다. 사건을 수습하고 호텔 화장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엘리타에게 베니는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 페킨파는 문을 열어놓고 욕실 바닥에 앉아있는 엘리타와 그 앞에 앉은 베니를 보여준다. 이 쇼트의 엘리타의 배치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입부 연못의 경계에 서 있던 테레사랑 닮아있다. 욕실이 물과 떼놓을수 없는 장소라는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여자는 물과 땅 경계선상에서 위태롭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페킨파가 생각하는 순정 마초는 경계선상의 위태로운 여자를 감싸준다, 라는 제스처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제스처는 결말과 연결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르시아]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여자다. 엘리타는 처음부터 죽음을 모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지만, 남자의 회유에 어쩔수 없이 여정을 떠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강간 미수 시퀀스에서 가장 현명하면서도 단호히 대처한 자 역시 여성 엘리타다. 그리고 가르시아의 목을 자를 기회가 왔을때도 엘리타는 전 애인의 안식을 모독하는것에 망설인다. 베니는 윽박지르면서도, 엘리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고 사랑을 되뇌이지만 돌아온 것은 또다른 매장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베니는 먼지투성이가 되어가며 제페의 갱단원들을 쏴죽여 머리를 찾아오며, 사펜즐리와 퀼도 죽인다. 사랑했던 여자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엔 옛 친구의 머리가 담기고, 머리를 건네주겠다는 제페의 부하들도 쏴죽인다. 베니는 제페의 저택에 반드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베니가 제페의 저택에 도착했을때, 제페는 새로 태어난 손자의 세례식을 치루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을 죽어갔지만 제페는 아무렇지 않게 탄생을 성수로 축복한다. 제페에게 베니는 묻는다. 16명의 사람이 죽일만큼 이 머리는 가치가 있었냐고. 하지만 제페는 그 머리를 돼지 먹이로 주라고 말한다. 머리의 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베니는 분노한다. 그 분노는 투박하지만 섬세한 사랑을 짓이기고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에 대한 분노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기묘함은 시종일관 마초적인 태도로 밀고가다가 갑자기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과 연대하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자신이 자초한 무의미한 죽음 끝에 마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남성성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여성을 지키고 진정한 악과 동귀어진한다.

사실 결말에 드러나는 '멋진 척'은 다른 페킨파 영화와 비교해봐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이 결말을 마냥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니의 대사엔 테레사를 위로보다는 가르시아를 향한 브로맨스가 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베니는 연대라고 하기엔 자기완결적인 멋에 지나치게 취해 있다. 이 자기완결적 멋이 제페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폭압적인 가부장에게 박해받는 여자를 돕는 카우보이들이 나오는 전작 [라이드 더 하이 컨트리]랑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가르시아]는 창작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게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이 결말이 후련한 카타르시스와 애잔한 감정을 남기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베니가 자기완결적인 미학에 빠져있더라도 방황하던 가르시아의 머리는 마침내 안식을 찾았고, 살아남은 테레사와 아이는 끔찍한 가부장에게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페킨파는 진정으로 무고했던 테레사와 아이야말로, 이 무의미한 폭력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 본다. 여성을 혐오하고 아이를 혐오한다고 악명높았던 페킨파답지 않다고 할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우울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제의화된다. 페킨파는 어찌보면 카르텔 서부극을 빌어 고전 비극을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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