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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서부극 (11)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가르시아]는 연못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샷은 위태롭다. 한 소녀가 연못 경계에 있는 나무에 누워 있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서서 저택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소녀는 마치 물에 빠질것처럼 누워있다. 왜 하필 물가에서 영화를 시작할까. 아마도 이 영화 감독이 샘 페킨파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헤모글로빈과 슬로모션에 취한 성질머리 더러운 마초. 그 마초는 물의 죽음과 땅의 생명 그 사이에 잉태를 할 수 있는 여자를 배치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제시한다. 죽음과 삶, 그리고 매장의 경계를 여인이 가로지를 것이다. 그리고 슬로 모션은 죽음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며 기록할 것이다.

곧이어 소녀가 위태롭게 누워있었던 이유가 등장한다.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라." 멕시코 갱 제페의 선언으로 [가르시아]는 비틀리고 우울한 여정을 시작한다. 제페에게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허락없는 임신이다. 제페의 딸 테레사는 한량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와 통정을 했고, 그 결과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폭압적인 가부장은 이걸 용서치 않고 자신의 유사 아들들인 갱들을 이용해 알프레도 가르시아를 처벌하려고 한다. 이 처벌을 대리하는 자인 사펜즐리와 퀼이 여성이 배제된 게이 커플이라는 점은 (암시적이지만 그들은 여자를 싫어하고 파트너의 시체를 향해 눈물짓는 모습을 보인다.), 제페 일당이 극단적인 가부장과 남성성에 취해 있다는걸 보여준다.

사펜즐리와 퀼은 곧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를 찾아낸다. 보통 이런 줄거리의 느와르/범죄 영화라면 베니를 좀 더 장르적으로 세공된 과거와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할 것이다. 하지만 페킨파와 고든 도슨이 쓴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베니는 제페 일당의 위압적인 남성상과는 한발짝 떨어져있다. 한때 미군이었지만, 퇴직해 바 주인으로 살고 있는 베니는 위축되어 있다. 가끔 거칠게 굴지만 차라리 상처받은 채 그늘로 숨어든 짐승에 가깝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거친 과거의 일부였던 가르시아의 행적도 잘 알지 못하고 여성인 엘리타를 경유해서 알게 된다. 베니는 골칫거리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애인인 엘리타와 평온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금전적 이득은 그를 파국의 여정으로 향하게 만든다.

[가르시아]의 구조는 서부극 그것도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같은 1970년대 페킨파가 즐겨 만들었던 폭력적인 서부극과 닮아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관계의 종말]에 가깝다. 피에 절어 살았던 마초는 지쳤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이 옛 친구를 팔아야 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종말이다. 다만 페킨파는 이 여정을 평범한 서부극으로 만들지 않고, '카르텔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현대 서부극의 영역에서 만들고 있다. 페킨파의 현대 영화들에서 이런 노선을 취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는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결과는 기묘하다. 이 영화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 홀려 파멸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애도의 완수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머리는 그 점에서 영화가 추구하는 애도의 완수를 그로테스크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는 잘려진채 자루에 담겨 여러 사람을 오간다. 페킨파는 머리의 행방을 통해 인물 간의 갈등과 액션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정작 가르시아의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고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페킨파의 터치는 좀 심술궃은데 있다. 편안하게 매장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제페의 복수심과 금전적 이득 때문에 가르시아의 머리는 주인의 몸을 떠나 무수한 사람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주인인 알프레도 가르시아는 이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 뿐이다. 효수된 머리와 브로맨스라. 페킨파의 악취미 중에서도 최고 악취미라 할 수 있겠다.

이 어처구니없지만 황망한 애도의 여정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영화의 여정을 더욱 불편하고 우울한 감정에 푹 젖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을 꼽으라면 (페킨파가 선호했던 배우 중 하나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바이커로 등장해 베니를 무력화하고 엘리타를 강간하려는 시퀀스가 있다. 일단 이 시퀀스가 그동안 숨어있었던 베니의 남성성과 폭력성을 끌어낸다는건 명백하다. 페킨파는 이 사건을 지금까지 야성을 잃고 안전하고 무력하게 살아온 베니가 가르시아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그런 악한이 못되잖아요") 결국 베니는 그 응답에 답해 바이커들을 쏴 죽여버린다. 여기까지는 으레 있는 페킨파의 악취미려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뒤 흥미로운 연출이 있다. 불쾌한 강간 미수가 바이커의 죽음으로 끝나고 페킨파가 보여주는 시퀀스는 또다른 무기력과 연약한 고백이다. 사건을 수습하고 호텔 화장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엘리타에게 베니는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 페킨파는 문을 열어놓고 욕실 바닥에 앉아있는 엘리타와 그 앞에 앉은 베니를 보여준다. 이 쇼트의 엘리타의 배치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입부 연못의 경계에 서 있던 테레사랑 닮아있다. 욕실이 물과 떼놓을수 없는 장소라는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여자는 물과 땅 경계선상에서 위태롭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페킨파가 생각하는 순정 마초는 경계선상의 위태로운 여자를 감싸준다, 라는 제스처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제스처는 결말과 연결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르시아]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여자다. 엘리타는 처음부터 죽음을 모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지만, 남자의 회유에 어쩔수 없이 여정을 떠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강간 미수 시퀀스에서 가장 현명하면서도 단호히 대처한 자 역시 여성 엘리타다. 그리고 가르시아의 목을 자를 기회가 왔을때도 엘리타는 전 애인의 안식을 모독하는것에 망설인다. 베니는 윽박지르면서도, 엘리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고 사랑을 되뇌이지만 돌아온 것은 또다른 매장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베니는 먼지투성이가 되어가며 제페의 갱단원들을 쏴죽여 머리를 찾아오며, 사펜즐리와 퀼도 죽인다. 사랑했던 여자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엔 옛 친구의 머리가 담기고, 머리를 건네주겠다는 제페의 부하들도 쏴죽인다. 베니는 제페의 저택에 반드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베니가 제페의 저택에 도착했을때, 제페는 새로 태어난 손자의 세례식을 치루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을 죽어갔지만 제페는 아무렇지 않게 탄생을 성수로 축복한다. 제페에게 베니는 묻는다. 16명의 사람이 죽일만큼 이 머리는 가치가 있었냐고. 하지만 제페는 그 머리를 돼지 먹이로 주라고 말한다. 머리의 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베니는 분노한다. 그 분노는 투박하지만 섬세한 사랑을 짓이기고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에 대한 분노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기묘함은 시종일관 마초적인 태도로 밀고가다가 갑자기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과 연대하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자신이 자초한 무의미한 죽음 끝에 마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남성성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여성을 지키고 진정한 악과 동귀어진한다.

사실 결말에 드러나는 '멋진 척'은 다른 페킨파 영화와 비교해봐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이 결말을 마냥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니의 대사엔 테레사를 위로보다는 가르시아를 향한 브로맨스가 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베니는 연대라고 하기엔 자기완결적인 멋에 지나치게 취해 있다. 이 자기완결적 멋이 제페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폭압적인 가부장에게 박해받는 여자를 돕는 카우보이들이 나오는 전작 [라이드 더 하이 컨트리]랑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가르시아]는 창작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게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이 결말이 후련한 카타르시스와 애잔한 감정을 남기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베니가 자기완결적인 미학에 빠져있더라도 방황하던 가르시아의 머리는 마침내 안식을 찾았고, 살아남은 테레사와 아이는 끔찍한 가부장에게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페킨파는 진정으로 무고했던 테레사와 아이야말로, 이 무의미한 폭력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 본다. 여성을 혐오하고 아이를 혐오한다고 악명높았던 페킨파답지 않다고 할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우울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제의화된다. 페킨파는 어찌보면 카르텔 서부극을 빌어 고전 비극을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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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 Mrs. Miller] (1971)

(누설이 있습니다.)

로버트 알트만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시작은 그래도 익숙한 서부극 도입부다. 떠돌아다니던 한 남자가 개척 마을에 당도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전형적인 서부극의 도입부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알트만은 심술궃게도 서부극에서 기대할법한 상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주인공 존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거나 악당과 대치하는게 아니라 카드를 꺼내들어 포커판을 벌인다. 그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맥케이브에 대한 소문 (아이러니하게도 "악당을 잔혹하게 죽인 악랄한 총잡이"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서부식 소문이다.)을 수군거린다. 다음 시퀀스. 맥케이브는 어느새 이 마을 개발에 관여하고 있다. 요컨데 도입부 시퀀스와 다음 시퀀스 간의 격차가 느껴진다.

맥케이브가 어느 정도 기틀을 닦아놓은 마을에 영국인 포주 콘스탄스 밀러가 당도한다. 밀러 부인으로 불리는 이 여자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업가다. 그는 맥케이브에게 마을을 문명화할수 있는 사업을 제안하고, 그들은 계약을 맺는다. 마을 창녀의 구질구질함을 지적하며 투자 비용을 요구하는 밀러 부인의 대사는 알트만이 서부의 야만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하는지 잘 알려주는 대사다. 영국인인 밀러 부인이 보기엔 미국 서부는 문명의 손길이 못한 낙후된 지역에 불과하다. 

사실 고전 서부극에서도 야만성은 미화되지 않고 오히려 거리감을 두고 섬뜩하게 그려졌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접근 방식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다. 이 영화의 관점은 존 포드를 비롯한 서부극 감독들보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가깝다. 자연히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속 서부는 다른 모습을 띌 수 밖에 없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관계는 사업 투자와 개발 계획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며, 인물들 역시 우아함을 찾아볼 수 없다. 섹스 조차도 일종의 상거래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보타이 정장, 털코트를 입은 채 트름을 하며 돌아다니는 맥케이브는 우아하고 고독한 무법자가 아니라 약삭빠른 도박가이자 지방 유지에 가깝다.

자연히 배경이 되는 공간 역시 완전히 다르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일반적인 서부극에게서 기대할 쨍한 햇빛 아래의 사막이 아니다. 오히려 깊숙한 산 속 눈내리는 마을의 질척한 진흙과 더러운 눈더미로 가득한, 척박한 동네다. '눈'과 '비'는 그 점에서 일종의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함과 동시에,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다. 여기다 산으로 둘러쌓여 평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주변 환경은 유폐된듯한 느낌마저 주게 한다.

여기서 촬영 기법에 대해 언급해야 되겠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인 빌모스 지그몬드는 렌즈에 뿌연 느낌을 강조하는 디퓨전 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디퓨전 필터는 극도로 로맨틱한 질감을 강조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대다. 이 영화의 질감은 (고감도 필름을 썼는지) 필름 입자가 강조된, 탁하고 희뿌연 질감이다. 이 거칠거칠한 화면에다가 상술한 눈과 비가 상시 내리는 작중 배경이 겹쳐지면 영화 속 한기는 단순히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한기의 영화다. 그리고 그 한기 속 서부의 정경은 로맨티시즘이 깃들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서서히 꽁꽁 싸맸던 현실주의자의 갑옷을 벗어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알트만이 선택한 '탈의'의 방식은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는 반-서부극으로써 자본주의와 서부극으로써 전통적인 공동체를 오가면서 생긴다. 발단은 지방 유지들의 재산을 탐식하는 기업의 등장이다. 번창하는 맥케이브의 마을에 눈독들이는 해리슨 쇼네시 광산 회사가 맥케이브에게 접근했을때, 맥케이브는 거만을 떨면서 그들의 제안을 거부한다. 자본가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기에 가능했던 행동이다. 여기까지는 이전 장면들처럼 철저히 자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해 있다.

맥케이브가 뒤늦게 마음을 돌려서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을때, 실책은 돌이킬수 없는 파국으로 돌아온다. 회사에서 고용한 킬러 삼인조 (버틀러, 브리드, 키드)을 문명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했던 맥케이브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로 돌아간다. 이 삼인조는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서부극의 사악한 악당들이지만, 동시에 거대 기업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묘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맥케이브의 토착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는 현대화된 기업 앞에서는 사라져야 하는 서부와 동일시된다. 알트만은 여기다 맥케이브가 무법자는 커녕 총조차 제대로 쏘지 못하는 건달이라는걸 폭로하면서, 맥케이브를 강제적으로 서부의 사나이가 되도록 몰아붙인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지금까지 폐기했던 고전 서부극의 가치로 은근슬쩍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일면 자본주의에 찌든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들의 인상이 달라지는 부분도 이 지점부터다. 맥케이브는 자신의 본성이 건달이라는걸 잘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꼬이는 여자는 창녀 밖에 없다고 자조한다. 그의 자조는 그가 왜 밀러 부인이 제시한 매각/이주 제안을 거부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마을 경영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하는 게이머처럼 공동체의 정 따윈 관심없고 이득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답은 간단하다. 이 마을에서 그는 선구자로 존경받기 때문이다.

아마 별 의미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하루하루 살아온 맥케이브에게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었을 것이다. 킬러 삼인조에게 거부 당하고 맥케이브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 비티와 알트만은 자신의 성취감이 부정당해서 화가 났다는걸 명백히 한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는 고전적인 서부 사나이의 모습로 돌아간다. 밀러 부인과 다툰 뒤, 사과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통속적이지만 제대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 맥케이브는 고결함 따윈 없는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사업가지만, 그 이상의 탐욕을 바라지 않고 만족해하는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이며, 거칠고 투박한 로맨티스트다. 이 너저분한 이상주의자가 마침내 모든 외피를 벗어던졌을때, 밀러 부인은 그 진심을 인정하게 된다. 일견 서부극과 어울리지 않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레너드 코헨의 포크곡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때도 이때다.

하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자본주의를 다루는 영화다. 이 말은, 맥케이브의 이상주의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밀러 부인은 그걸 잘 알고 있던게 분명하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결말은 차갑지만 비장미가 느껴지는 서부 사나이의 비극과 살아남을 자들의 단결, 한 개인의 모호한 동선을 통한 애도가 겹쳐져 있다. 같이 섹스를 하고 난 뒤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를 떠나 쓸쓸히 사라진다. 알트만이 밀러 부인이 어디로 갔는지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동안,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들고 킬러 삼인조와 어설프게 싸우다가 눈 속에 파묻혀 죽는다. 맥케이브가 역사 속으로 냉동되는 동안 알트만은 불타오르는 교회를 끄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을 중간중간 보여주면서 아이러니를 강화한다. 그리고 알트만은 맥케이브가 줬던 보석을 바라보는 밀러 부인의 눈을 클로즈업 하는걸로 끝난다.

밀러 부인의 심경이 제대로 표현되진 않지만, 적어도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와 킬러 삼인조간의 대결, 나아가 해리슨 쇼네시의 탐욕을 막을 수 없는 위치다. 그렇기에 밀러 부인은 그저 개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도주를 제안하지만 맥케이브는 거절하고 죽는다. 밀러 부인이 어떻게 살지는 미지수지만, 해리슨 쇼네시 손아귀에 들어간 마을에서 밀러 부인의 입지가 좁아질 것은 분명하다. 이제 맥케이브로 대표되던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는 끝났고 도시에서 온 자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밀러 부인 역시 자신 역시 사라질 것을 예감한다. 알트만은 그런 밀러 부인의 우울하고 허탈한 심정을 줄리 크리스티의 조용한 침묵이 담긴 얼굴과 눈을 통해 모호하지만 근사하게 표현해낸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반서부극/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불리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안티테제는 서부극의 원형을 이해해야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알트만은 반서부적 가치와 서부적 가치 사이를 오가며 아이러니와 쓸쓸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서부극을 반대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소멸의 안타까움과 애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알트만은 중간중간 서사에 복속되지 않거나, 추상적인 샷을 통해 (상술한 결말이 그렇다.) 영화의 주제를 꼬아서 표현하는데 이게 효과적이였는지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차가운 한기의 아름다움으로 한 시대의 종언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절에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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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Logan] (2017)

이정표가 될 가지를 들고 그 발밑에 떨어뜨리자. 맞은편 언덕에 있는 아이가 헤매지 않도록. 
작은 둥지를 만드는 이 날개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연결하기 위해 살아가자.

-이시카와 치아키, 'Little Bird'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건]의 첫 샷은 차 안에 누워있는 로건의 얼굴을 하강하면서 보여준다. 이 샷은 밀폐 공간에 클로즈업으로 이뤄져 있기에 로건이 무언가에 짓눌듯한 인상을 준다. 가히 질식할듯한 이 미장센을 흔들어깨우는 건 외화면에서 깡패들이 때려부수는 소리다. 제임스 맨골드는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 때려부수는 소리를 암전 크레딧에 올리면서, 공포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나오는 피곤에 쩔어있는 로건의 등장 샷은 두 다리 클로즈업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여기엔 활기참이 없다. 밀폐공간에서 겨우 밖으로 나왔지만 로건은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 머니처럼 비틀거린다. 그리고 뒤이어 살짝 과잉되었지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폭력이 이어진다. 제임스 맨골드는 이 도입부를 통해 [로건]의 영화적 공기와 그가 겪을 여정을 설명해낸다. 

많은 사람들이 [로건]의 도입부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건 [엑스맨]이나 슈퍼히어로 영화의 도입부가 아니다. 차라리 1970년대 도회적이고 삭막하게 돌아버린 미국 액션 영화의 도입부에 가깝다. 이 시작에서 맨골드의 관심사는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있지 않다는걸 알려준다. 심지어 그는 전작에서 분명 이어져야 할 시간대나 사건의 인과관계마저 모호하게 처리한다. 살아남은 자는 동료들이나 악당, 멋진 사건이나 끔찍한 비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맨골드는 이 영화가 다른 세계관과 이어진다고 얘기했지만 차라리 완전히 평행세계라는 휴 잭맨의 발언이 더 솔직하게 이 영화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로건]은 울버린 코믹스에서 끔찍하고 비참한 에피소드 (원작이 된 [올드맨 로건], [웨폰 X], [울버린의 죽음], [레드 라이트 핸드])에 담겨있는 비관주의와 그 속에서 피어나오는 희망을 영화사 전통을 연결시키려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되는 장애물은 가차없이 치워버린다. 그래도 의문이 있다면 "대체 이 꼴이 나도록 전지전능한 진 그레이는 뭐하고 있나?"라는걸 생각해보자.

[로건]이 출발점으로 삼은 곳은 놀랍게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다뤘던 종말로 향하는 리무진이다. 다만 [코스모폴리스]의 에릭과 달리 로건은 뒷좌석에 앉아 폼을 취하지 않는다. 뒷좌석에서는 [코스모폴리스]처럼 이어지는 향락으로 부패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맨골드는 버림받은 영웅의 왜소한 샷과 자본주의의 비대한 향략을 한 공간에 압축하는 것으로 질식할것만 같은 부패의 순간을 담아낸다. 하지만 [로건]은 [코스모폴리스]보다 더 끔찍하다. 어떻게든 리무진 안에 침투하려는 바깥 사람들의 발악을 보여준 [코스모폴리스]와 달리, [로건]의 리무진 바깥은 아무도 안쪽을 공격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코스모폴리스] 결말에서 열어젖힌 끝날것 같지 않은 자본주의 지옥의 이미지가 [로건]의 세계를 잡아먹어버렸다. 

맨골드가 이 영역에서 들여오는 것은 서부극이다. 먼지로 가득한 리무진이 찰스 교수가 사는 은신처로 들어오는걸 롱 샷으로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로건]이 [매드 맥스]와 맨골드 자신의 [3:10 투 유마]를 거쳐 서부극의 세계로 들어설거라는 징조를 받는다. 맨골드는 뒤이어 아예 작심하고 온갖 서부극적인 도상을 차용한다. 멀리서 지나가는 기차, 옥수수밭, 농장, 서부 복장.... 그 중에서는 그 유명한 [셰인]도 있다. 이런 맨골드가 인용하는 서부극적 도상과 연계된, 인상적인 샷이 하나 있다. 도주중이던 로건 일행은 무인 트럭에 휘말려 꼼짝도 못한채 말을 농부 먼슨 가족을 만난다. 먼슨 가족을 도와주는 과정을 그리는 동안 맨골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들이 휘적거리며 고속도로를 방해하는 모습을 집어넣는다. 문명을 잠시나마 방해하며 자유로워지는 말의 이미지에서 맨골드는 숨기지 않고 서부극 장르에 대한 강한 애정과 로맨티시즘을 표출한다. 서부를 향한 맨골드의 로맨티시즘은 자본주의 지옥에 저항하는 도구다.

과격하긴 해도 맨골드의 비전은 상당히 정확하다.  울버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캐릭터는 19세기 서부 개척 끝물에 '캐나다'에서 태어나 현대와 미래까지 살아남은 캐릭터였다. 서부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수 있는 존재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서부극의 징조는 더 명확해진다. 로건에게 양부로써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를 추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보안관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상처주고 받으며 살아온 그는 찰스 자비에 교수를 만나 구원받은 뒤, 찰스의 뒤를 따라 양부의 길을 걷는다. 상처 따윈 아무렇지 않게 회복하며 살아왔지만, 상처의 깊이를 알기에 아이들의 침묵과 고통에 동참하고 지켜주려는 양부.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가 초반부에 동생 무덤 앞에서 했던 대사를 그대로 가져와도 될 정도다. 

하지만 역사를 헤쳐나오기 위해 체득해버린 폭력성은 그런 그의 양부로써 사랑과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복잡한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무수한 전쟁과 살육의 현장에서 의미없는 죽음에 익숙해져버린 지친 남자. 여기다 코믹스 울버린은 심지어 몰랐다지만 자기 양아들마저 죽여버리고, 친아들의 오해로 가득찬 경멸어린 저주과 독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 캐릭터였다. 여기서 그의 어둠이 서부 무법자 특유의 야만적 폭력성이 히어로 만화에 접목되어 나온 거라는걸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맨골드의 서부극에 대한 애정은 울버린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그는 울버린이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울버린은 1970년대에 나왔던, 좀 더 과격하고 극도의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신화의 종말에서 멜랑콜리를 끌어내는 서부극 영화의 아들이다. 여기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회고적 서부극과 페킨파의 마초적 애도의 서부극이 따라나서는건 당연하다.

맨골드의 전작이기도 한 [더 울버린]은 그런 서부극적 도상이 PG-13적 수위에 수용되어 일본 찬바라물과 결합된 독특하지만 일정한 선이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로건]은 다르다. 차라리 이 영화는 국경수비대와 카르텔 서부극의 살벌함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여기다 마이클 만 특유의 프로페셔널들이 또렷한 콘트라스트 아래서 벌이는 건조하고 서늘한 긴장감도 녹아있다. 심지어 맨골드는 4K 카메라를 마치 마이클 만이 디지털 카메라를 쓸때 썼던 특유의 빠른 프레임으로 그려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맨골드는 고전 서부극의 품위있는 도상을 1970년대 이후 장르 영화가 끌어왔던 건조한 콘크리트를 연상케하는 어법과 만나게 하고 있다.

그 만남 사이엔 ‘죽음’이 있다. [로건]이 왜 [엑스맨] 영화를 대부분 치워버리고 [코스모폴리스]를 끌어왔는지에 대한 답도 여기서 나온다. 맨골드와 각본가가 바라보는 미국은 정말 끔찍하고 살맛 안 나는 곳이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은 무의미한 것으로 그려진다. 캐나다로 대표되는 목적지까지 거쳐야 하는 미국은 멕시코를 착취하며, ‘우리는 가난하지만 바보는 아니다’라는 절규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다. 숭고하지만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한 시체는 자본주의의 재료로 사용된다. 종말이 일상을 대체한 풍경. 여기엔 무의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간신히 힘을 모아 바깥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있다. 맨골드가 그려내는 미국은 몬테 헬먼의 실존주의 서부극의 무기력함이 묻어나온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품을 내어줄 양부 히어로들은 무력하다. 찰스로 대표되는 리버럴 지식인은 옛날의 총기를 잃고 양자 로건과 칼리번의 도움에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지식인들에게 감화받았던 로건과 칼리번은 찰스의 믿음이 실패한것 아닌지, 자신들 역시 초라한 소멸을 맞이할지 회의하고 번민한다. 이 과정이 너무 아프고 괴롭게 그려지기에, [로건]은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못했던 영역에 들어선다. 맨골드가 근심하고 잇는 영역은 아오야마 신지가 기타큐슈 삼부작에서 근심하던 영역과 비슷하다. 그들은 다만 맨골드는 아오야마가 두려워했던 친부 친자의 실패와-원작 로건이 그런 실패가 그려지는 캐릭터임에도-어머니의 불가해함을 꺼내지 않는다. 아오야마와 달리 과거와 혈연에 대한 불신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많아진다고 생각해서일까.

대신 맨골드는 양부들 자신의 어둠에 집중한다. [로건]의 여정은 심리 서부극 그 자체다. 영화는 로건을 이뤄왔던 죄악과 분노, 고통과 사랑을 모조리 끄집어내 안소니 만이 [서부의 사나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 비극처럼 확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확장은 로건뿐만이 아니라 칼리번이라던가 찰스에게도 적용된다. 범죄를 저지르며 자신을 용서해준 동료를 팔아치웠다는 절망감에 자폭하는 칼리번이라던가 공동체 붕괴의 원흉이였음에도 살아남아 죄책감에 빠져드는 찰스 역시 심리 서부극의 그림자에서 어른거린다. 당신을 죽인게 내가 아니라는 로건의 애절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맨골드는 X-24를 휴 잭맨의 1인 2역으로 맡기면서 결국 그 역시 자신의 일부였다고 못을 박는다. 여기엔 분명한 죄악이 있으며, 등장인물들은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로건]은 그 그림자 속에서 이뤄지는 회의와 번민, 죽음을 육체의 이미지로 표출한다. 로건의 사라진 힐링 팩터는 심각하게 베어진 살점들과 엉망이 된 다리로 나타난다. 초반부 몸에 박힌 총알을 스스로 뽑아내며 멍하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건의 샷에서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수 밖에 없다. 로건/울버린은 누구보다도 하드 바디가 자신의 정체성이던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에게 하드 바디 이미지가 사라지는 순간 거기엔 자크 오디아르가 선호했던 피로와 우울에 젖은 남성 영웅이 드러난다. (아마도 [디판]과 [러스트 앤 본]이 이번 로건에게서 제일 가까울 것이다.)  아들의 도움이 필요한 찰스의 무기력한 육체는 그 점에서 더 비참하다. 칼리번은 뱀파이어처럼 햇빛 아래에서 피부가 불타고 괴로워한다. 심지어 이런 쇠잔함과 거리가 먼 로라 역시 자신의 분노를 온 몸에 담아 표현한다. 이들의 반대에 있는 캐릭터인 도널드 피어슨이 기계 육체를 과시하는 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로건]의 액션이 에너지와 피와 눈물이 흘러넘치는 것도 이상한건 아니다. 과격한 수위로 묘사된 이 영화의 액션은 멜로드라마적 먹먹함과 피곤함이 인물들을 적시고 있다. 로건이나 로라, 그리고 후반에 등장하는 뮤턴트 아이들의 액션은 그야말로 살고 싶다는 처절한 악에 받쳐 육체를 잘게 조각낸다. 이 영화의 액션은 그 몰아붙이는 듯한 카타르시스에도, 너무나도 육중하고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픔은 삶의 버거움에 죽음조차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는 흐느낌이 담겨 있다. 무서울 정도로 팽팽한 영화적 공기를 내세운 영화를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들수 있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로건]은 살벌하고 팽팽하게 건조된 공기에서 놀랍게도 모든 것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영화다. 시작은 다시 가족이다. 맨골드 본인은 귀엽지만 현실의 아픔과 무게를 무시하지 않은 가족 드라마 [페이퍼 문]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예로 들었고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의 정경은 차라리 수평적인 공동체에 가깝다.  육체적 능력과 물질적 능력을 소진했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을 보호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려는 양아버지들의 쓸쓸한 모습과 더불어 황폐하고 버려지고 공간, 말없지만 아직 생명력이 있는 소녀를 죽어가는 몸을 이끌며 쫓아가는 ‘오해받는 무법자’의 이미지는 [유레카]를 (나아가 존 포드의 [수색자]) 떠올리게 하고, 특수한 능력을 지닌 아이를 데리고 도주하면서 수평적인 신뢰와 믿음으로 구성된 미국적 가족상을 구축하는 과정은 [미드나잇 스페셜]이나 [퍼펙트 월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절박하고 단단하게 ‘이 땅’에 매여있으려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언급한 영화들이 서부극의 영향이 강한 작품이라 생각해보면, [로건]의 수평적인 공동체는 서부극의 일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조차도 [로건]에서는 버겁게 그려진다. 양아들의 양부는 죄를 양아들의 그림자에게 고백하고 초라하고 비통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로라를 내보낸 양모 가브리엘라와 친절을 베푼 먼슨 가족은 모조리 죽어나간다. 엑스맨으로 대표되던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강한 믿음이 사라진 세계에서 무엇을 할것인가? 아이인 로라는 답을 원하지만 로건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얻을 공동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두 사람 역시 죽어버렸고 공동체에 대한 대답은 픽션인 만화책과 자신으로만 가능하다. 로건이 그렇게 열심히 엑스맨 만화책을 부정했던 이유는 거기 있다. 불로불사가 가져오는 피로함과 유일한 증인으로써 죄책감, 자학심이 ‘이 땅’에 매여있고자 하는 시도에 회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면, 조용히 있다가 사라지는게 낫지 않을까 ?

여기서 접촉의 문제가 개입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접촉의 금지, 그리고 떨어져 있을 것에 대한 요청, 그것은 이야기를 시동케 하는 능동적인 기호”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말을 [로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엑스맨] 세계관에서 로건이 처음 만난 뮤턴트가 접촉 금지를 요청하는 소녀 로그 (마리)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맨골드는 [엑스맨 1]의 초반부 구도를 다시 뒤집어 만들고 있다. 이 영화에서 로건은 계속 다른 인물들에게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유사) 부녀 지간을 다루면서도 로라와 로건 사이엔 신기할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로라가 로건에게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기도 하고, 맹렬한 위험함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혈육이지만 혈육이 아닌 서로의 거울쌍이다.

그렇기에 로건은 직접적으로 접촉 금지를 요청하지 않지만 어떤 거리감을 두고 로라를 대한다.  이제 접촉을 요청하는 사람은 사내가 아니라 소녀이며 사내는 소녀의 접촉을 밀어내려고 한다. 이 거리감과 접촉 거부 때문에 이 영화는 비슷한 내용의 액션 영화하고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그것이 매정하기 보다는 슬프게 다가온다면, 로건의 비극과 피로함, 그럼에도 숨길수 없는 사랑을 맨골드는 이해하고 있고 관객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거리를 두면서도 절박하기에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간다. 후반에 등장하는 로라의 무릎에 평온하게 잠든 로건의 샷과 악몽에 대한 로건과 로라의 대화가 그렇다. 맨골드는 늙고 지친 미국 무법자 윌리엄 머니를 닮아있는 휴 잭맨의 얼굴과 슬픈 무표정을 지닌 스페인 소녀 아역들의 매력을 간직한 다프네 킨의 얼굴, 꺼져가는 총명함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하는 영국 신사 패트릭 스튜어트의 얼굴에서 많은 질료들을 빌려온다. 그리고 그들이 한 프레임에 있는 순간들은 매우 훌륭하다.

[로건]의 먼슨 가족의 죽음은 로건이 왜 접촉을 거부하는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다. 그들은 접촉의 평안함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들은 소수자이자 약자며 매우 허약한 존재다. 맨골드는 로건 일행이 오지 않았더라도 구조적으로 이 가족은 파국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절대적인 파국에서 히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먼슨 가의 가장이 총부리를 대는 순간, 로건은 다시 상처받는다. 로건은 자신의 존재가 저 평범함에 스며들수 없다는걸 안다. 그렇기에 그는 떠돌아다녔다. 오히려 로건이 자주 접촉하는 대상은 찰스 자비에다. 유머가 섞이긴 했지만 찰스와 로건의 화장실 시퀀스는 둘의 접촉이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찰스가 엑스맨이라는 공동체를 파괴했다는걸 알았음에도, 그는 찰스를 돌본다. X-24이 학살한 자리에서 로건이 로라를 찾아가지 않고 찰스를 먼저 찾아가는 과정은 매정하지만 지극히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찰스는 엑스맨의 이상인 '양가족' 그 자체이며, 진정한 첫번째 '양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찰스가 죽은 이후로, 로건 역시 죽어간다.

[로건]이 놀랍고 슬픈 이유는 파국을 내재한 접촉과 무법자가 그걸 두려워해 접촉을 거부함에도 공동체 내 일상과 사랑을 존중하고 그려내는 신중한 흐름의 샷과 대화로 로건과 로라, 찰스의 영혼에 접촉하는 과정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로건이 가족을 연기하는 장면의 샷과 리버스 샷을 보라. 우리는 그게 유머를 담은 연기라는걸 알면서도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다. 거짓이지만 가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에 가려졌지만, [로건]에서 로건이 지난 시리즈동안 느껴왔던 공동체의 사랑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고 말한다. 접촉은 필연적으로 파국을 낳지만, 그 접촉이 남긴 위대함은 심지어 파국이 지나간 이후에도 명징하다. 찰스의 회한에 찬 넋두리는 그 양가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로건]은 무의미와 접촉 거부 속에서도 공동체와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계속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메타픽션'으로 그려낸다. 로건은 픽션은 현실에서 성립될 수 없다고 줄곳 주장하지만 정작 그 역시 썬시커라는 이뤄질 수 없는 공동체 공간에 집착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공간'이 아닌, '사람'이 가족을 이룬다는걸 알고 마침내 그걸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힘겹고 간신히 이뤄진다. 이뤄질수 없다는걸 알면서 부정하면서도 그 ‘완벽한 순간’을 찾으려고 하는 이 시도들은 울버린 자신의 캐릭터성과 들어맞는다.

[로건]은 무의미 속에서도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찾고자 하는 인물들의 애처로운 갈망과 헛발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애도와 치유의 여정을 결합한다. 줄곳 표류하고 있던 캐릭터가 무의미와 소멸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한 뒤 정착과 안식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이번작의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의 유스케를 닮아있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는 유령은 여행을 하며 정착하면 사라진다, 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대사는 어딘가 서부의 무법자를 닮지 않았는가. 로건은 계속 여행을 하고, 정착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표했다. 맨골드 역시 영화 속 로건이 망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즉 처음부터 로건은 상징적으로 죽어있다. 상술한 영화의 시작이 깨어남이라는 걸 주지해보자. 리무진 운전 시퀀스의 생기없음부터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로건의 영화적 여정은 기면증적인 컷과 장소 점핑, 생략과 암전, 깨어남과 같은 비약으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해안가로의 여행]과 달리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을 떠나려다가 '호숫가로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맨골드가 바다로 향하지 않고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을 종국의 물가에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로건 일행이 원하는 요트 썬시커를 보자. 엑스맨은 재건될 수 없고 상술했듯이 남아있는 뮤턴트들 역시 왜소하고 초라한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아마 로건이 예정한 죽음은 찰스와 칼리번이 소멸한 뒤, 애도해줄 사람 없이 조용하고 쓸쓸하게 과다한 물 이미지에 스며드는 것였을 것이다. 썬시커는 그 점에서 평온한 죽음이지만, 애도하는 이 없는 쓸쓸한 소멸 그 자체다. 하지만 그가 꿈꾼 소멸의 여정은 로라의 등장으로 사라지고 반대로 그는 사막과 들판, 도시를 거쳐 캐나다 국경의 산맥으로 향한다.  

맨골드가 호숫가로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땅에 뿌리박고 살았던 공동체의 소멸을 지켜본 뒤 애도를 완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은 그 점에서 [엑스맨] 시리즈에서 엑스맨들이 거쳐야만 했던 지난하고 고된 여정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남은 엑스맨 멤버들은 아이들을 조금씩 더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면서 소멸한다. 첫 징후는 "호수도 있는 곳"에 묻힌 찰스다. 찰스의 죽음은 곧 닥쳐올 로건 자신의 죽음을 예견게 한다. 여기서 로건과 로라는 호수가 있던 자비에 학교로 대표되던 이상주의의 끝을 애도한다. 그리고 로건이 묻히는 공간 역시 호숫가 근처 숲이다.

그렇기에 덤덤하게 이뤄지는 로건의 죽음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난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지극히 평범한 숲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뤄지는 접촉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프레임 속 모든 존재를 빛나게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다시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접촉의 거부에서 시작한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분명한 접촉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미즈키와 유스케가 그랬듯이 로건과 로라는 여정을 통해 서로에게 동화되었고 끝내 접촉으로 충만한 사랑을 나눠가지게 된다. 그 순간 로건은 저주받았다고 믿었던 기나긴 시간 속에도 이런 접촉이 있었으며, 상실의 고통과 애도 역시 하나의 접촉이였음을 깨닫는다. 다만 어떻게 설명해야지 몰랐을 뿐. 무의식적으로 사랑을 나눠주면서도 자신은 접촉할 수 없는 존재라 자학했던 영웅에게 정말로 다정하고 따뜻한 결말 아닌가. 찰스-로건-로라로 이어지는 연속된 애도의 완수가 역설적으로 엑스맨과 사랑으로 이뤄진 이상적 공동체를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이들에겐 ‘분노’가 부족하다고 비웃는 악당들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순다.
 
[로건]은 마지막에 본성은 이길수 없고 총소리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영웅은 사라져야 한다는 [셰인]의 추도사를 인용한다. 하지만 맨골드는 픽션과 풍경들, 공동체의 아름다움, 접촉의 숭고함을 통해 영웅에 대한 애도를 완수해 빛나게 만든다. 로건의 애도가 찰스를 영원하게 만들었듯이, 로라의 애도는 로건을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0의 순간에서 바다가 아닌 육지로 향하는 미즈키가 그랬듯이 로라 역시 애도를 완수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로건과 찰스, 칼리번, 가브리엘라의 본성이 부당한 세상에서도 순진하게도 따뜻한 집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꿈꿨던 작고 조용한 사람들에 가까웠노라고 확언할 수 있다.

당신은 그 이름에게서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붙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언은 매우 벅차오르는 눈물을 동반한다. 로라가 만든 X가 역설적으로 O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 영화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후발 히어로 영화들에 종속되겠지만 (울버린은 최고 인기 캐릭터고, 휴 잭맨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이어갈 것이다. 게다가 아직 로라에게도 할 얘기가 남아있다.) 제임스 맨골드는 몹시도 감동적인 인본주의 서부극 영화를 극우 포퓰리즘 시대의 세상에 가져왔고,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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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복수의 총성]에서 주인공 윌렛은 모래에 흔적을 남기면서 등장한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복수의 총성]에서는 무의미하다 윌렛이 친구 콜리를 만나는 순간 미스터리가 윌렛을 포박하기 때문이다. 공포에 떨고 있는 콜리는 윌렛에게 윌렛의 형이자 동행인이였던 코인과 리랜드가 마을에서 어떤 가족을 쏴 죽였으며, 코인이 볼일을 보러 떠난 뒤 리랜드가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한다. 앞뒤를 살펴보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의 복수인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리랜드를 쏴죽였단 말인가?

도입부의 미스터리가 제공하는 [복수의 총성]을 진행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그렇듯이 몬테 헬만은 주인공들을 부조리한 카오스로 밀어넣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만 [바람 속의 질주]가 대항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낸 부조리와 무기력함으로 주인공들을 밀어넣고 거기서 탈출하려는 인물들의 액션에 집중한다면, [복수의 총성]은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가 윌렛과 콜리를 이끈다. 이 미스터리의 중심이 여성 캐릭터라는 점도 흥미롭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소녀 애비게일를 연기했던 밀리 퍼킨스가 다시 맡은) 윌렛 일행 앞에 나타난 이름 없는 여자는 윌렛과 콜리에게 킹스턴으로 데려달라고 말하지만, 윌렛은 곧 이 여자에게 다른 목표가 있다는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캐릭터를 살펴보자. 먼저 윌렛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소시민적 카우보이이다. 윌렛과 여자의 대화에서 윌렛이 한땐 현상금 사냥꾼이였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를 부정하고 소시민적인 삶을 누리길 원하는 인물이라는게 밝혀진다. 이 점에서 난폭하게 사람을 쏴죽이고 도망가버린 윌렛의 형 코인과는 대조된다. 윌렛은 여자에게 적당한 보수를 받고 아무 탈 없이 헤어지길 원한다. 반대로 여자는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캐릭터인데, 때문에 윌렛과 여자 간에는 불편한 긴장이 흐른다. 윌렛은 여자의 목적을 집요하게 의심하고 여자는 그의 의심에 짜증을 낸다.

반대로 콜리는 미성숙한 소년이다. 콜리는 여자를 보는 순간 홀딱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윌렛과 달리 소년다운 아직 무법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버리지 못했다는걸 보여준다. 그가 미성숙한 남성이라는 부분은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하다가 적당한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엄마의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여성은 어머니 밖에 없다. 그런데 각본을 맡은 캐롤 이스트먼이 여성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뒤이어 이어지는 여자의 거절은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이 무명의 여자는 모성으로 환원되는걸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콜리)는 내가 보는 걸 보지 못해요"라는 대사는 이스트먼과 헬만이 콜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자가 어떤 캐릭터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여자가 복수하려고 하는 대상이 누군지 결말 전까지 보여주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여자의 심리가 어떤지 간신히 파악만 가능할 것이다. 이스트먼과 헬먼은 여자의 동기와 심리 묘사에 크게 관심이 없다. 남아있는 단서들을 긁어모아 추리를 해도, 이 여자는 끝끝내 이성적인 이해는 할수 있되 공감할 수는 없는 '타자'로 남는다. 그렇기에 여자의 집요한 집념은 더욱 무서워진다. 여자를 향한 "당신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안내할게야. 자신 마저도 말이오."라는 윌렛의 대사는 영화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윌렛의 이 대사는 후술할 결말하고도 맞닿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엔 잭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 스피어스가 끼어든다. 빌리가 끼어들면서 [복수의 총성]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번은 반항아이긴 했지만 그 속내를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복수의 총성]에서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는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공격성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그의 첫 등장은 줄곳 숨어있다가 윌렛이 도발하면서 이뤄진다. 마치 야생동물이 서로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끌어내는걸 연상케 한달까. 윌렛은 여기서 빌리가 문명의 소통방식으로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걸 알아채지만 콜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반항하다가 파국으로 이어진다. 

빌리가 등장하면서 [복수의 총성]은 표면적 의도 아래에 있는 이해할수 없는 가학적이고 불온한 흐름으로 인물들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인물의 감성은 바가지를 긁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부터 시작해 광활하지만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사막만이 소통이 사라진 인물들의 대화를 보조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서부극의 대가들이 그랬듯이, 자연 풍광에서 영화적 매력을 이끌어낼줄 아는 감독인데 그의 세계에서 자연은 인물의 실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돌멩이가 푸석한 흙먼지 산이 고립되고 힘겨운 여정에 나선 인물들을 강조했다면 [복수의 총성]에서 등장하는 말라붙은 사막은 점점 삭막해지고 신경을 긁는듯한 인물 간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서부극 장르가 구축해온 언어들은 산산조각난다. 복수를 하려던 콜리가 죽는 장면이라던가 빌리와 윌렛의 다툼은 서부극적 전통에서 기반해있지만, 이 장면들엔 품위나 공동체의 신념과 믿음 대신 메마르고 야만적인 악독함이 줄줄 배어나고 있다. 어느 순간 가히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파멸의 여정이 되버린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 영화가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서 링크와 콜리가 몸싸움을 벌이다가 링크가 콜리를 죽이고 전율하는 장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악독함은 촬영 당시 헬만과 워렌 오츠, 니콜슨 사이에 있었던 충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샷과 컷의 변화가 평이하고 단조로운 대신, 톤과 무드를 비틀어놓는 타입의 영화라면, [복수의 총성]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샷과 컷을 이상하게 밀고 간다. 리랜드가 죽을 당시를 보여주는 시퀀스의 연출을 돌아가보자. 콜리의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아무런 대사가 없다. 그런데 리랜드가 누구랑 대화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의 시점 샷들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콜리의 회고에 따르면 총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콜리는 텐트에 누워 바깥에 있는 리랜드랑 눈을 마주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헬만이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콜리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진 않다. 이상한 장면은 그 다음 경악에 찬 눈빛으로 쓰러지는 리랜드를 보여주는 샷이다. 이 샷이 이상한 이유는, 지금까지 콜리의 시점이라 못 박아둔 샷 다음에 거리상으로 불가능한 풀 샷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몽타쥬 배치상 이 샷은 콜리의 주관적인 샷의 연장선상이라는건 명백하다. 이 샷이 이상하고 낯선 이유는 죽음의 순간이 갑자기 확대된 채 정지한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샷 속에서 리랜드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에 머물러 있다. 헬만은 이를 통해 콜리가 왜 미친듯이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리랜드가 맞이한 이해할수 없는 죽음이 언제든지 자신을 덮칠수 있다는 공포가 콜리를 사로잡은 것이다. 

재미있는건 다음날 윌렛은 리랜드가 죽은 그 자리에 우연히 비슷한 자세로 앉을 뻔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영화의 결말에 나오는 반전과 연출은 이 사소한 행동을 다시 재고하게 된다. [복수의 총성]의 결말은 정말 난해하고 당혹스럽고, 매우 인상적이다. 마침내 여자가 복수 대상을 발견해 달려가고 여자를 쫓아간 윌렛은 여자의 복수 대상이 자신의 형제인 코인이라는걸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몬테 헬만은 코인 역으로 윌렛을 맡은 워렌 오츠를 기용한다. 그리고 슬로우 모션을 이용한 클로즈 업 샷으로 코인의 죽음을 보여준 뒤, 좀비처럼 살아와 걸어오는 빌리를 롱 샷으로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내버린다. 

이는 로저 코먼 밑에서 영화 경력을 시작한 헬만 특유의 B 무비의 뻔뻔함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헬만은 주인공 형제를 등장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 배우를 캐스팅해 B무비의 뻔뻔함과 제작비 절감을 성립시키지만,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복수의 총성]은 무의미하게 모든걸 파괴해버리는 서부의 야만성과 그 속에서 파멸할수 밖에 없는 인물들을 신화적인 제의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다. 가장 중요한 단서로는 여자는 윌렛을 보면서 당신은 광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현상금 사냥꾼이던 윌렛의 과거 역시 그리 깨끗하지 않았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 점에서 형제로 설정된 코인은 윌렛의 이면이라 볼 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될수록 윌렛은 코인처럼 점점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이처럼 헬만과 이스트먼은 코인의 야만성은 윌렛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서부 그 자체라 보고 있다. 일견 모호해보였던 여자의 캐릭터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부의 야만성에 복수하려고 하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여자가 사건의 휘말린 계기라던가 인간적인 면모는 끝끝내 묘사되지 않기에, 여자의 복수심은 당위성이 있다기 보다는 막연하고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모성을 거부하고 복수에 나선 여자 역시 코인과 다를게 없어진다. 아예 초자연적 재해처럼 그려지는 야수 빌리는 말할것도 없다. 헬만은 그 야만성이 이끄는 신화적 여정의 끝은 '죽음'이라 본다. 초반부 리랜드의 죽음을 강조한 이유도 그 죽음의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윌렛의 이면인, 코인의 죽음은 리랜드의 죽음처럼 영원히 정지한듯한 슬로 모션 샷으로 보여진다. 헬만은 파국의 절정을 박제한 뒤, 야만의 화신인 빌리가 부활해 다가오는걸로 끝내버린다. 이 결말이 두려운 이유는, 상당히 낯선 화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그랬듯이 파국 이후를 전혀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코인의 죽음은 윌렛의 죽음이며, 여자의 복수는 윌렛에게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남은 건 죽여도 죽지 않는 악마와 같은 빌리가 가져올 궁극적인 종말이다. 엄청나게 묵시록적인 비전을 담은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복수의 총성]은 그렇기에 정통 서부극에서 그려왔던 신화의 이면과 그것이 인간들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상당히 이상하게 그려내고 있는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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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시작은 이렇다: 황야 저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고 일련의 도적 무리들이 튀어나와 돈을 요구한다. 카우보이 세 명이 멀리서 그 과정을 지켜본다. 익숙한 서부극의 설정이다. 하지만 다음 샷. 도적들은 마차에 있던 승객과 마부의 호주머니를 털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도적들은 짜증내며 그들을 내보내고 지켜보던 카우보이 세 명은 다시 길을 떠난다.

서부극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뭔가 기대가 어긋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영화의 악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카우보이들은 악행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바람 속의 질주]는 무언가 중요한 동기와 열정 자체가 배제되어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바람 속의 질주]는 하지도 않은 일을 오해받은 사람들의 얘기다. 번과 웨스, 오티스는 어떤 대단한 사명감이나 정의감을 지닌 인물들이 아니다. 초반부에 만났던 도적 무리랑 같이 오두막을 쓸때도 약간의 경계심을 제외하면 그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든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카우보이 자체는 엄청나게 특이한 인물상은 아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가 이상한 이유는, [자니 기타]가 그랬듯이 정통 서부극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징후는 갑자기 등장한 자경대가 도적떼들을 쏴죽이고 번과 웨스, 오티스를 도적 패거리로 오해했을때 생긴다. 갑자기 이 세 명은 공권력에 반항한 악당이 되고, 오티스는 죽는다. 남은 번과 웨스는 살기 위해 도망간다.

사실 수동적인 쪽은 웨스와 오티스만 해당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잭 니콜슨이 맡은 번은 반항적이고 행동적인 캐릭터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도적떼를 다시 만났을때 웨스와 오티스는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하는 반면, 번은 반발한다. 심지어 무기력한 상황들이 이어질때도 번은 계속 불만을 표출하고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저돌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저돌성은 각본과 연기를 모두 맡은 잭 니콜슨의 연기에서 비롯된다. 후일 [샤이닝]이나 [배트맨]에서 널리 알려지게 될 특유의 오버액팅은 아니지만, 이미 여기서 완성된 니콜슨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 연기는 여전하다. 오히려 과시 없이 다른 연기자와의 조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샤이닝]이나 [배트맨]보다도 훨씬 뛰어난 구석이 있다.

번과 웨스가 한 민가에 숨어들면서 이야기는 다시 한번 다른 방향으로 꺾는다. 번과 웨스가 들어선 민가는 에반과 캐서린 부부와 10대로 보이는 딸 아비게일로 구성된 가족이 사는데, 이들 역시 다른 의미로 짓눌려있는 캐릭터들이다. 번과 웨스, 오티스가 부조리한 시스템의 희생양이라면, 이들은 단조로운 현실에 찌들어 있다. 무성의하게 반복되는 도끼질과 삭막한 식탁은 그런 단조로운 현실의 체화다. 이들의 단조로운 일상은 번과 웨스라는 비일상이 끼어들면서 흔들린다.

하지만 이 흔들림에도 어떤 짜릿함이 결여되어있다. 번과 웨스는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생각이 없고 (웨스가 별 일 없을거라고 강조하는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들 역시 그들의 단조로움을 끼어든 불청객을 불편해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가족은 개성조차 희미하다. 번이 아비게일을 데리고 나가면서 "멀리서는 내가 애비의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는 대사는 이 가족이 얼마나 몰개성한 존재인지 아이러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바람 속의 질주]은 어떤 짓누름에 대한 반발이 영화적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짓누름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압적이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거의 실존적인 경지로 주인공들을 밀고 간다.  주인공들은 한번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자신을 변론하지 못한다. 캐서린이 그들에게 무고를 어떻게 증명할거냐고 물어보자, 그들도 증명할 수 없는 방법이 없다고 시인해버린다. 남은 건 그저 생존 뿐이다. 소통의 순간조차 이어지지 못하고 파탄으로 끝난다.

여기까지 오면 알 수 있겠지만 고전기 서부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체념의 정서가 [바람 속의 질주]를 감싸고 있다. 결국 태생적으로 도주극이 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에센셜 킬링]에겐 먼 선조뻘 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을 짓누르고 있는 건 무엇인가? 말을 보면서 번과 애비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딸이 이방인과 얘길 나누기 싫어하는 에반, 치안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번의 혐오, 단조로운 삶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당신들이 하는 일이 더 외로워 보인다'라고 반문하는 애비... 이 영화가 1960년대 서구 청년 문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에 발표된 영화라는걸 유념하자. [바람 속의 질주]는 서부극의 영역에서 1960년대의 공기를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조금 더 나아가 베트남전에 대한 서브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바람 속의 질주]는 해석보다도 그 시대를 안고 돌파하려는 독특한 영화적 에너지가 매력적인 영화다. [바람 속의 질주]의 샷을 정의하자면 단조로움의 샷이다. 단적으로 몬테 헬만은 총격전을 찍을때도 긴장감을 노릴 생각이 없다. 단적으로 총격전 시퀀스에서 샷과 리버스 샷 길이는 느긋하기 그지없고, 주인공 일행은 싸우기는 커녕 도망가기 급급하다. 배우들의 연기 언어 역시 최소화되어 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의 단조로움은 통제가 안 된 방만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단조로움은 확실한 리듬이 있다. 삭막하고 건조하기 그지 없는 황무지를 담아낸 촬영, 절제되어 있지만 핵심을 찌르는 배우들의 뛰어난 앙상블 연기를 통해 몬테 헬만은 관객들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 관객들은 최면에 빠진 채 단조로움 속에 담긴 꿈틀거리는 리듬을 쫓아간다. 샘 페킨파가 죽음의 순간을 파편화하고 늘리는 방식으로 허무주의의 아름다움을 설파한다면 몬테 헬만은 삭막할 정도로 이질적인 황무지를 배경으로 삼고 샷과 컷, 시퀀스들의 흐름을 단조로 편곡해 반복하는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생경하고 느슨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집중력이 높은 영화다. 
 
영화의 결말이 폭발적인 질주로 끝나는 점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행동하던 웨스는 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번은 웨스를 버려둔 채 말을 타고 도주한다. 마치 지금까지 쌓여왔던 억압과 단조로움의 샷을 깨트리려고 하듯이 이 승마 장면은 박력이 넘친다. 고전기 서부극를 연상케하는 질주의 쾌감이 담겨있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번은 마침내 허무주의의 늪에서 탈출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번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번이 도망갈 수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 점에서 [바람 속의 질주]의 결말은 상당히 양가적이다. 영화는 억압에서 탈주를 꿈꾸면서도 '그 뒤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엔 대답을 아낀다. 어쩌면 정직한 답일 것이다. 이 영화를 발표할 당시 몬테 헬만이나 잭 니콜슨 모두 한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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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에서 총이 발사되기까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블리자드제 FPS 게임 [오버워치]에 등장하는 맥크리라는 캐릭터가 있다. 대놓고 서부극 무법자를 가져온 이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궁극기는 '황야의 무법자Deadeye'다. 무방비가 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화면에 있는 대상을 오랫동안 조준하고 있으면 한 방으로 처치하는 이 궁극기와 "석양이 진다.... It's High Noon."이라는 대사는 곧 인터넷 상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이 대사는 왜 유행어가 되었는가? 그것은 [오버워치]라는 게임이 빠른 스피드의 하이 테크놀로지를 배경으로 한 하이퍼 FPS의 흐름과 반대로 대상을 처치하기 위해 다소간의 뜸을 들어야 하는, 느긋한 호흡 때문이였다.

'황야의 무법자'가 보여주는 이 느긋한 호흡이야말로, 서부극의 리듬을 이해할수 있는 중요한 단서 아닐까? [오버워치]에서 맥크리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석양을 지기까지, 플레이어는 꽤 오랜시간 인고를 하면서 상대의 틈을 빠르게 파고들어야 한다. 즉 적대하는 상대를 향해 총이 발사되는건 한순간이지만, 그 발사되기까지 그 과정엔 어떤 텀이 있다. 

이런 느긋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에 마무리되는 리듬은, 단순히 총이 등장하는 결투 뿐만이 아니라, 서부극 전체의 리듬하고도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오에 이뤄지는 1:1 대결도 대결이지만, 서부극은 총이 발사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총이 발사되기 이전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장르다. 심지어 고전들보다 좀 더 자극적인 재미로 무장한 스파게티 서부극이나, 총이 발사되어 피부와 뼈를 찢는 순간에 천착하는 샘 페킨파의 서부극에서도, 세련된 대사를 온갖 문제에 대해 떠벌이는 요란스러운 쿠엔틴 타란티노의 서부극도 자세히 보면 총이 발사되기까지는 일반적인 액션 영화와 비교해보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총이 발사되는 순간을 묘사하는 컷도 그렇다. 서부극에 등장하는 리볼버나 소총은 현대 액션 영화들의 기관총이나 자동권총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발사되지 않는다. 스피드 클립과 문 클립이 동원되더라도 서부의 사나이들이 들고 다니는 리볼버는 느긋하게 총알이 채워지고 발사된다. 그리고 이런 느긋한 리볼버라는 무기를 묘사할때도 리볼버에서 총알이 떠나는 순간을 과장하거나 극대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부극을 보는 사람은 그 느긋한 호흡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를 보면서 와이어트 어프가 죽은 동생의 복수하기까지 꽤 오랜시간동안 기다려야 하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수색자]에서 에단이 조카 가족을 잃은 뒤 조카를 찾고 복수를 하기 위해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복수심에 불타는걸 바라봐야 한다.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 닥 토빈이 옛 갱단 단원들에게 총을 들이대기까지 우리는 우스꽝스럽지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싸움과 처참한 겁탈을 지켜봐야 한다. 심지어 야심 없어보이는 버드 보티커의 [7인의 무뢰한]에서도 초반부 총격전은 시원스럽게 생략되고 벤이 뭘 하는지 궁금해하며 그의 행적을 뒤쫓는다.

이처럼 서부극은 총이 발사될때까지 왜 인물들이 총을 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납득시키는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왜'는 감독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존 포드의 인물들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과, 버드 보티커의 인물들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은 매우 상이하다. 포드의 [황야의 결투]나 [수색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등장하는 총을 든 사나이는 위태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되찾기 위해 총을 쏜다. 안소니 만의 총을 든 사나이는, 과거에서 탈주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과거 간의 충돌 속에서 총이 발사된다. 버드 보티커의 총을 든 사나이는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저항에서 총을 든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무법자들이 등장하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멕시코인을 착취하는 고용주에게 총구를 돌리는 보안관이 주인공인 [빅 건다운]은 어떠한가?

좋은 서부극은 인물들이 왜 총을 들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고 동시에 그 납득에서 귀결된 액션에서 감흥를 안겨준다. 우리는 존 포드의 영웅들이 왜 공동체를 지키고 싶어하는지, 그 과정을 납득한다. 우리는 버드 보티커의 사나이가 가진 결투의 미학이 어떤 윤리체계로 작동하는지 납득하며, .안소니 만의 인물들이 어두운 과거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한다. 라울 월시나 리처드 플레이셔, 앙드레 드 토스 같은 고전 서부극 감독부터 몬테 헬먼이나 로버트 알트만 같은 수정주의 서부극 감독들까지 필자가 미처 접하지 못한 영화들을 찾아보면 사례는 무수할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서부극은 총이 발사되는 순간만큼이나 그 이전,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나 관계가 안겨주는 드라마도 느긋하지만 성실하게 다룬다. 그 점에서 서부극은 역시 총이 등장하긴 하지만 배배꼬인 상황과 욕망, 그리고 그 위에 드리운 살벌한 철근 콘크리트의 어둠과 씁쓸함에 집중하던 필름 느와르보다도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엮인 액션의 순수함을 맛볼 수 있는 장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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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홈즈맨 [The Homesman] (2014)

(누설이 있습니다.) 

배우 토미 리 존스의 감독 생활은 현재까지 서부극의 영역에 천착해 있다. 엘머 크레튼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한 감독 데뷔작 [라스트 카우보이]는 늙어가는 카우보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였고, 감독으로써 재능을 확인시켜준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은 [바벨]과 [21그램]으로 유명한 기예르모 아리아가가 써내리고 죽은 멕시코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텍사스 보안관을 주인공으로 삼은, 현대에 이식된 서부극이었다. 본인이 텍사스 출신이기도 한 토미 리 존슨은 자신의 연출작에서도 그 강건하면서도 내적으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사는 '미국인'의 전형을 연기해왔다.

그 점에서 [더 홈즈맨]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와 같은 영화다. 글렌던 스와트와웃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더 홈즈맨]은 서부 개척 시절, 네브라스카에 살아가는 메리 비 커디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어떤 남성들보다 강한 생활력으로 목장을 운영하던 메리는 어느날 정신병력이 있는 여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여자들을 데리고 목적지를 향해가던 메리는 길에서 목이 매달린 채 죽어가던 총잡이 조지 브릭스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호송 임무를 맡기게 된다.

[더 홈즈맨]은 시기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의 서부극들에게 영향을 받은 영화다. 이는 토미 리 존스가 본인이 연기하는 조지 브릭스를 봐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조지는 못난 캐릭터다. 첫 등장도 그렇게 멋있지 않으며, 그가 영화 내내 보이는 행태는 "주접 좀 그만 떨어라..." 싶을 정도로 속물적이며, 자기 안위에만 신경을 쓴다. 

물론 이런 유형의 "멋있지 않고 약간 주접스러운 무법자" 캐릭터들은 고전 서부극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지만 (원작이 1988년에 발매된 걸 생각해보면 좀 더 수정적인 흐름에 연관을 지어야 되겠지만.), 그런 주접스럽고 못난 행동가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연출과 연기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의 말도 제대로 못타는 늙은 카우보이의 그림자를 찾아보긴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캐릭터들과 다소 다른 타입이지만 그의 연기는 예상 이상으로 훌륭하다. 코믹 릴리프에 그치지 않는, 자신만의 생존방법이 남들에게 주접스러움이라는걸 잘 알면서도 그걸 고수하다가 변화를 겪는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할까.

이런 못남의 강조는 힐러리 스왱크가 체감온도보다 높게 열연한 메리라는 캐릭터하고도 대조된다. 결혼 적령기가 지나 마을 공동체에서는 잉여 취급 당하면서도 못난 사람들에게 일갈을 날리며,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메리는 어찌보면 조지보다도 훨씬 고전적인 품위를 지닌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리없이 메리의 입장에서 영화를 따라가게 된다.

메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더 홈즈맨]이 주목하는 대상들은 여성이다. 메리가 바라본 서부 개척 시대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 없다. 아리벨라, 테올라인, 스벤슨로 대표되는 세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채 살아가며 메리는 그런 여성들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그 머나먼 길을 떠나지만, 정작 자신도 어떤 공허함을 지우지 못한다. 각각의 사연들은 꽤나 멜로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지만, 토미 리 존스는 이 영화의 승패가 이런 멜로드라마틱한 사건에 어떤 디테일과 연기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리벨라, 테올라인, 스벤슨 이 세 여성의 고통과 참담함은 단순하게 소모되지 않고 관객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켈리 레이차드의 [믹의 지름길]처럼 완전히 여성의 눈에 맞춰져 전개되는 서부극은 아니다. 오히려 조지의 시점에서 바라본 서부 여성 수난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토미 리 존스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망가졌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여성들과 그 여성들과의 교류를 통해 변해가는 캐릭터들을 통해, 존 포드의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보였던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으며, 충분히 페미니즘적 시각을 존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를 향한 존중은 영화 중후반부에 이뤄지는 반전에서 강력하게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인공의 교체라는 꽤나 위험한 수를 뒀음에도 우리는 메리가 조지에게 마음을 열였음에도 왜 그런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결국 메리 역시 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이 마음 속의 고뇌와 고통을 안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나 우직한 태도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 먹히는 연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조지를 주인공 삼아 이뤄지는 후반부 이야기는 토미 리 존스의 전작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처럼 무법자가 바치는 애도와 추모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여전히 조지는 호텔에 불을 지르고, 병든 여자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무뢰한이지만 일련의 행동들에 이전의 비굴함과 다른 어떤 고전적인 품위가 깃든 모습을 보여준다. 그 품위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와 자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건 자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비루한 몰골로 출발한 [더 홈즈맨]은 결말로 갈수록 고전 서부극이 가지고 있던 위엄과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문명과의 화해로 이뤄지지 않는다. 여관 종업원을 향한 조지의 뜬금없는 청혼과 종업원의 유보는 문명과 그의 관계를 압축하면서도 결국 그가 문명에 머물지 못할것을 암시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제시된 프레이밍은 그 점에서 인상적이다. 소실점 너머로 사라져가는 무법자를 담고 있으면서도, 강이라는 경계를 통해 서부와 문명, 애도하는 자와 애도하지 않는 자 간의 경계를 긋고 있기 때문이다. 서부를 "저주받을 악마"라 부르면서도 조지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이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조지는 메리의 묘비명을 잃어버리지만, 우리는 그가 추도를 멈추지 않을거라고 믿게 된다. 왜냐하면 결말을 통해 조지는 위엄을 잃지 않은 서부의 증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존 포드의 무법자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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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9.5
감독
존 포드
출연
헨리 폰다, 린다 다넬, 빅터 매추어, 캐시 다운스, 월터 브레넌
정보
서부, 드라마 | 미국 | 97 분 | -


[황야의 결투]는 [역마차]와 [수색자],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와 더불어 존 포드 서부극을 이야기할때 빠지지 않는 영화다. 그리고 실제로도 [황야의 결투]는 [역마차]로 열어젖힌 황금기 서부극 영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수색자]와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만가에 가깝다면 [황야의 결투]는 아직 만가에 이르기 전 나름 성숙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는 영화기도 하다. 물론 [황야의 결투]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서부극의 편견에 대해 재고할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볼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서부사를 다룰때 반드시 등장하곤 하는 실존 인물 와이어트 어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황야의 결투]는 와이어트와 형제들이 소를 팔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초반부 와이어트와 세 형제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공동체로 그려진다. 미래를 꿈꾸는 아직 연약하고 어린 동생 제임스를 보호하며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에서 존 포드는 인간의 한 구석에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그림을 초반부에 집어넣는다. 어찌보면 이 도입부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 등장하는 말없이 나열되는 이상적인 가족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존 포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임스를 죽이고 소가 도난당하는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이상적인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형제들은 복수를 위해툼스톤에 들러 보안관이 되고 그들은 그 범인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처럼 서부극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것은 지속되지 못하는 존재로 나타나는데, 이미 붕괴되어 있거나 아니면 붕괴되어야 극이 진행된다. 와이어트가 죽어버린 동생 무덤에 찾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너희들이 살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슬픔을 남긴다. 약자들이 희생되거나 위험에 처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공동체를 재건하거나 지키기 위해서 다짐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향한 존 포드의 시선이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지 알 수 있다.

[황야의 결투]는 미리 그 범인을 설정해놓고 어떻게 형제들이 툼스톤이라는 마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천천히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툼스톤이라는 마을에 끼어든 와이어트는 세 명의 사람과 얽히게 된다. 하나는 존 할러데이라고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온 의사, 클레멘타인이라고 존을 사랑하지만 보답받지 못하는 여자, 치와와라고 존의 애인을 자처하지만 댄서로 천대받는 멕시코 여인. 재미있게도 이 셋 모두 인간 관계에 실패했거나 (존과 클레멘타인) 사회에서 낙오된 존재 (존과 치와와)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존은 동부에서 쫓겨나듯이 서부에서 술과 도박으로 자신의 생을 망치고 있고, 치와와는 처음부터 손가락질 받고 존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클레멘타인은 동부로 대표되는 법과 질서를 대표되지만 존과 치와와에게 냉담한 반응을 받고 쓸쓸하게 호텔 근방을 배회한다.

재미있는 시퀀스가 하나 있다. 와이어트가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으로 나가는 툼스톤 사람들을 지켜보는 장면인데, 이 장면의 미장센은 간결하면서도 멋있게 구성되어 있다. 존 포드는 와이어트를 호텔 바깥 대기장소에 배치시키는데 이때 프레임은 호텔 건물 대기장소와 도로를 분리시켜놓는다. 와이어트는 그늘이 진 프레임 안쪽에서 빛이 비추는 바깥쪽의 사람들의 흐름을 관망한다. 이 구도야말로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가 극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가 결국엔 이 툼스톤에 섞이진 못할것을 분명하게 한다. 그가 클레멘타인에게 끌리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클레멘타인은 외부인이며 툼스톤의 일원인 존과 치와와에게 냉담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클레멘타인은 교사라는 직업으로 동부의 문명을 대변한다. 마을 무도회장을 방문한 와이어트가 어색하게 구경하다가 클레멘타인과 얽혀 춤을 추는 장면에서 우리는 외부인 둘이 잠시나마 공동체에 속해 안정을 누리는걸 발견한다.

그렇기에 치와와가 죽어갈때 등장하는 와이어트의 컷 하나는 매우 인상적이다. 작중에서 치와와는 존과 와이어트와 악연으로 얽혀있는 클랜튼 가족 손에 죽는다. 정확히는 클랜튼 가족이 존에게 쏘려고 했던게 치와와가 총을 맞는다고 할까. 밑바닥을 전전하면서도 존에 대한 애정을 갈구했던 치와와는 클레멘타인의 도움을 받아 존이 집도를 하지만 결국 과다출혈으로 죽는다. 이때 이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지켜보는 와이어트의 표정은 어두운 조명과 어둠으로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독일 표현주의의 영감을 받은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공동체의 평화를 해치는 클랜튼 가족에 대한 분노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자의 쓸쓸한 심정이 담겨있다. 존 포드는 이 단순해보이는 연출을 영화의 흐름에 안배되게 만들어서 잊을 수 없는 정념을 만들어낸다. 사실 [황야의 결투]는 생각보다 '자연' 풍경이 많이 등장하진 않는 서부극이다. (물론 가끔 등장할때마다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포드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던 방법을 실내로 옮겨와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낸다.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굵직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심상은 후일 아오야마 신지의 기타큐슈와 페드로 코스타의 리스본 빈민가의 정경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치와와-존-클레멘타인로 이어지는 이 사랑의 삼각관계와 가들이 치와와의 죽음 앞에서 하나로 봉합될때 우리는 영화의 끝이 존의 퇴장으로 끝날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클레멘타인이 동부로 돌아가지 않고 이 곳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게 된다. 하나의 사건이 남긴 상흔이 사람들은 실패한 채 방황하고 있는 동부의 지식인이였던 존은 서부의 생명력으로 대표되는 치와와가 죽으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어디 있는지 확신하게 되고 클레멘타인은 교사가 되어 툼스톤에 동화되어간다. 이때도 와이어트는 그들을 지켜보고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어찌보면 존 포드는 이 구도를 통해 [황야의 무법자]에서 공동체가 단순히 고리타분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무언가라고 역설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와이어트는 형제 하나를 또 클랜튼 가족에게 잃고 [황야의 결투]를 감싸고 있는 숙명적인 분위기가 '결투'로 이어지게 한다. 이 결투 구도 자체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또다른 존 포드 서부극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와 같지만, 대결 구도에 약간 변칙이 가해진 [리버티 벨런스]랑 달리 [황야의 결투]는 온전히 무법자와 악인의 몫이다. 


그리고 이 전투는 혼돈스러운 다수 대 다수라는 난파전으로 이어진다. 존 포드는 여기서 인물들의 동선을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진행시킨다. 흙먼지는 무법자와 악인을 감싸고 사람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총을 쏘면서 인물들의 시야를 가린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는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저지른 클랜튼 가의 가장과 대치했을때, 와이어트는 마침내 자신의 정의를 실현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포드와 와이어트는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황야의 결투]의 결투 끝에는 피로함이 남는다. 흙먼지 속 싸운 사람들은 당연한 가치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지만 많은 것을 잃은 뒤다.


결국 결투는 또다시 상실로 끝나게 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리를 하고 공동체를 떠나거나 남는다. 그리고 결말은 우리가 서부극을 떠올릴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다. 클레멘타인은 툼스톤에 남아 살아남은 와이어트 형제를 떠나보내는 이 장면은 서부극의 정경을 이야기할때 항상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실은 존 포드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제작자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사실 존 포드 자신은 절대로 작가라 생각하지 않고 시스템 하에 일하는 장인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작가라는 말을 매우 혐오했고 자신을 소처럼 일하는 장인이라 불러주길 원했다.) 제작자의 아이디어 정도는 쉽게 받아들였을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태그 갤러거 평론가가 지적했던대로 누군가가 개입한게 아닌, 처음부터 존 포드의 아이디어였던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페드로 코스타가 존 포드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을 인용해볼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존 포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광활한 대지, 웅장한 산맥의 풍경처럼 누구나 좋아할 법한 것들이 거기에 있다.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삶이 주는 아름다움. 반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존 포드의 영화에는 그런 단순한 것들의 가치가 담겨 있다. 몬테이로의 말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단순해질 것인가'다." 어찌보면 존 포드의 방식은 그런 제작자의 아이디어마저 받아들일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가치를 녹일 줄 알았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타인의 아이디어마저도 존중되면서 존 포드의 인장이 확고하게 남는다. 그 점에서 [황야의 결투]는 다른 정파 서부극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편견이 아닌,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것을 재고하는 영화다. 물론 무엇보다도 존 포드가 주창했던 것처럼 "재미있는" 영화라는 걸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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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962)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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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존 포드
출연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 리 마빈, 베라 마일스,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정보
로맨스/멜로, 서부 | 미국 | 123 분 | -


존 포드의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보통 서부극의 종언을 알리는 작품으로 자주 꼽히는 작품이다. 물론 포드가 이전에 만든 [아파치 요새]나 [수색자]에서도 서부 세계를 정리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적어도 도로시 M. 존스턴의 단편을 영화화한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를 보면 어떤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나 회고하고 있다는 걸 누구나 눈치챌 수 있다. 당장 이 영화의 시작은 기차를 타고 등장하는 정장의 상원의원 부부니깐 말이다. 서부극에서 문명의 상징으로 등장했던 기차를 타고 등장하는 것부터 이미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의 서부는 문명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는걸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남녀는 '추모'를 하기 위해 서부로 왔다는게 서사에서 제시된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플래시백의 형태를 취할수 밖에 없다. 서부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플래시백은 처음부터 이 추모가 이상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젊은이여 서부로 가서 꿈을 찾으라'는 말이 있었다는 현재 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가 볼 수 있는 장면은 서부에 왔다가 강도떼인 리버티 일당들에게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 된 동부 법조인 랜스다. 이 간단하지만 극명한 대비를 통해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고전 서부극이 그동안 즐겨 다뤄왔던 법이 없는 무법천지인 서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랜스는 자기 상식에 맞춰 신본에 법을 가져오려고 한다. 여기서 랜스는 두 명의 인물을 만나는데, 하나는 그의 아내가 될 할리고 또 하나는 추모의 대상인 톰 도니폰이다. 신본 주민인 이 둘은 둘 다 서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할리가 서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한다면 톰은 서부의 무법자를 상징한다는 건 쉽게 알아차릴수 있을 것이다. [리버티 벨런스]에는 여기에 교육의 문제를 개입시킨다. 초반에 랜스는 할리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고 이에 할리는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한다. 이에 랜스는 할리에게 사과하며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하고 할리는 이를 받아들인다.

글이 필요없다고 말하던 할리가 글 읽는 걸 받아들인다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계몽의 과정이 서부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계몽이 매우 '여성적'이라는 사실도 적시한다. 여성인 할리는 말할것도 없고 랜스는 총실력도 어설프고 앞치마를 두르거나 서부와 어울리지 않는 양복 차림을 나타나 무법자에게 계집아이 같다고 놀림받는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예민한 연기도 한 몫한다.) 그리고 신문사 사장 역시 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서부 남성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 교육이 마을 전체로 퍼져나가고 투표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사의 동력원으로 삼으면서 마을의 '계몽'이 동부의 문명과 여성성에서 비롯됬다는걸 보여준다. 그리고 문명과 여성성은 곧 서부의 무법 세계에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끌어모으는데, 포드는 이를 미국의 건국 이념을 설명하는 교실에 멕시코인, 흑인, 여자, 아이를 배치함으로써 구체화시킨다.

이 계몽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 둘이 무법자라는건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둘이 왜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지는 다르다. 리버티는 매우 명백하다. 그 자신이 서부의 무법이며 그 무법을 통해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서사 속에서 리버티는 마을 저 너머의 목장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렇기에 마을이 계몽되어 투표를 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렇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랜스와 대적할 수 밖에 없는 아치 에너미가 된다. 리버티 벨런스라는 이름도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말장난이라 볼수도 있다. 발음만 놓고 보면 이 이름은 Liberty Balance와 비슷한데, 각각 '자유'와 '균형'을 의미한다. 자유는 그렇다치고 균형이라니 랜스의 반대쪽에 있기에 '균형'을 이룬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톰은 복잡하다. 톰은 분명 마을 바깥에 사는 무법자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방탕과 악행만이 법이며 그걸 공동체 모두에게 강요하는 리버티와 달리 차라리 방관한다. 그는 랜스와 할리가 뭘 하는 동안 휙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리버티의 악행에 대해서도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톰은 진짜로 공동체에 흥미가 없는게 아니다. 단적으로 톰은 할리에게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와 결혼해 자신의 세계에 그녀를 편입시키고 (집 옆에 공사중인 창고) 싶어한다. 또 어떻게든 법과 질서를 부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랜스에게도 '이 마을은 자네가 온 동부와는 다르다'고 못박으면서도 은근슬쩍 랜스가 하는 일에 얼굴을 들이민다. (물론 거기엔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는다.) 그리고 리버티의 악행를 나서서 막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끼어들어 선을 긋는다. 차라리 그는 보이지 않게 공동체의 균형을 조정하는 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랜스의 계몽이 마침내 그를 신본을 대표하는 자로 선출하자는데까지 나가게 되고 랜스와 리버티 간의 갈등은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결국 랜스와 더불어 지성과 계몽을 대표했던 신문사 사장 호레이스가 리버티 일당의 린치로 사망하고 둘의 갈등은 한 쪽이 없어져야지 진정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른다. 참을데까지 참았던 랜스는 리버티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물론 그 도전에서 랜스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영화 내내 랜스는 서부의 법으로 대표되는 총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총조차 제대로 손질조차 안 되어 있다. 그렇지만 랜스는 리버티를 총으로 쏴서 죽이는데 성공하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로 영웅이 된다.

영화는 그 뒤로 랜스가 할리를 마을의 영웅으로 의원직 선출 자리까지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랜스는 여기서 이제 서부는 성실한 근면한 시민들을 위한 땅이 되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리버티를 지원했던 자들은 랜스에게 살인자가 어떻게 마을, 나아가 한 카운티를 대표하는 의원이 될 수 있냐고 힐난한다. 이에 수긍하고 서부를 포기하고 원래 있던 동부로 떠나려는 랜스에게 톰은 충격적인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랜스가 리버티를 쏘는 장면으로 돌아가 톰이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였다는걸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톰의 얼굴과 총 쏘는 장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물 배치를 놓고 보면 톰은 랜스와 리버티의 1대1 대치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 서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랜스와 리버티라는 두 개의 점으로 만들어진 선의 구도는 진상이 밝히지면서 톰이 추가되고 면의 구도가 된다. 이 장면이 가지고 있는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강렬한 미장센은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왜 서부극의 역사에 남을수 밖에 없는 명작이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랜스와 리버티의 대결은 분명한 조명과 단순한 배치도 아래에서 이뤄지지만 그 톰은 어둠 속에 있다. 그리고 영화는 표면과 이면을 두 번 제시함으로써 그 구도를 관객이 재인식할수 밖에 없게 만든다.

뜻밖에 사실에 어안이벙벙하는 랜스에게 톰은 다시 돌아가라고 말한다. 다시 돌아가 그들이 원하는 지도자가 되라고 말한다. 결국 랜스는 그걸 수긍하고 다시 돌아가는데 이때 존 포드는 다시 한번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를 만들어낸다. 랜스는 다시 회장으로 돌아가 자신을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고 톰은 쓸쓸히 떠나간다. 그 자리엔 열렸다 닫히는 문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문의 잔상은 단순하지만 이상할정도로 길고 오래 프레임에 남아서 관객의 정서를 자극하는데, 아마 그 뒤로 이어지는 불타는 로 대표되는 톰의 좌절과 체념하고 연계되어 서부 무법자의 종언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순간으로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서부 (할리)도 문명 (랜스)과 함께 떠나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에 긴장을 이룰 악당 (리버티 벨런스)도 죽은 서부의 공간에서 톰이 있을 자리는 남아있지 않다.

모든 회상이 끝난 뒤, 기자가 기사를 폐기함과 동시에 톰의 죽은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것이다. 존 포드는 무법자의 죽음을 언급하거나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대신 포드는 그저 거기에 남은 흔적들만 (톰의 장화라던가 홀로 남아 슬퍼하는 흑인 하인이라던가)을 보여주면서 어떤 정서를 환기시킨다. 포드는 죽음을 영화 속에서 감춤으로써 서부의 신화가 문자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숭고함이 어려있다고 선언한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문명의 후예들은 무법자를 추모하지만 그걸 기록하지 못한 채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래서 여러모로 애잔함을 남긴다. 문명의 이기인 열차를 타고 다시 문명으로 돌아가는 랜스와 할리는 신본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는 랜스와 할리의 표정은 영 개운치 않다. 이미 신본은 그들이 알고 있었던 서부가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된 서부에서 남은 자들이 죽은 자를 추모하고 원하지만 절대로 돌아갈수 없는 이 풍경이야말로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가지고 있는 향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향수는 강력하고 근원적인 슬픔을 만든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풍화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현실의 벽은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난 뒤 끝없이 이어져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그렇게 마지막 신화가 저물어가는 광경을 정리하는 마지막 만가로써 어울리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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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이 달리다 [Ride Lonesome] (1959)




라이드 론섬

Ride Lones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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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버드 베티커
출연
랜돌프 스콧, 카렌 스틸, 퍼넬 로버츠, 제임스 베스트, 리 반 클리프
정보
서부 | 미국 | 73 분 | -


[외로이 달리다]에서 인상깊은 것이라면, 벤의 동선이다. 영화 내 인물들이 지적하듯이 벤은 일부러 프랭크 일당에게 자신의 행적을 노출하면서 산타 크루즈로 향한다. 아니 향한다고 보기에도 문제가 있다. 벤의 동선은 급박하지 않고 느긋하다. 왜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 물론 [선다운의 결전]이나 [투우사와 숙녀]를 위시한 보티커 영화를 지나온 관객들이라면 알겠지만 벤의 행적은 ‘도주’가 아닌, 결투 장소로 이끌기 위한 행동이다.

영화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이 장면이 재미있는게, 벤과 빌리 사이엔 도망치는 자와 쫓는 자의 긴장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빌리는 마치 벤을 기다리고 있는것처럼 숨어있고 반대로 벤은 빌리가 거기에 있을것이라고 예상한 것처럼 행동한다. 왜냐하면 빌리는 벤의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순순히 끌려가는것처럼 보이던 빌리는 갑자기 큰 소리로 자신의 형인 프랭크 (후일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유명해지는 리 반 클리프가 이 역을 맡았다.) 에게 도움을 요청해 영화 전체의 서스펜스를 작동시킨다.

[외로이 달리다]는 그 점에서 공간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대립이 중요한 [선다운의 결전]이나 공간의 높낮이와 거리감이 중요한 시점의 차이로 작용했던 [투우사와 숙녀]와 달리, 공간과 공간 사이를 향하는 운동의 방향성이 중요한 영화다. 그리고 그 운동의 뱡향성 때문에 이 영화는 서부극이 안겨주는 풍경의 쾌감을 맛볼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황폐해진 풀들과 선인장 사이로 난 샛길, 사구 사이에 흔적만 남은 집터, 무성한 숲과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섬뜩한 나무 등. 이 모든 풍경들은 2.35:1 이라는 넓찍한 화면에 새겨진다.

이 사이를 헤쳐 지나가는 벤과 빌리의 여정은 도덕에 관한 여정이다. 영화 중반에 캐리는 나이가 어린 빌리를 왜 산타크루즈로 데려가 사형하려고 하는지를 벤에게 물어본다. 벤은 ‘어리지만 사람을 쏴 죽였기 때문에’ 그를 처벌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벤의 말보다 더 깊은 내적 논리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도덕의 여정이긴 하지만 그 도덕의 논리가 단순한 선악의 논리가 아닌, 복잡한 무언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왜 벤이 빌리를 미끼로 프랭크 일당을 유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벤이 프랭크 일당을 유인하는 이유는, 프랭크 일당이 벤의 아내를 끔찍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단죄다. 그런데 프랭크 일당이 저지른 살인이 비겁한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걸 지적해야 되겠다. 프랭크 일당을 벤의 아내는 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급습한 프랭크 일당에게 살해당했다고 나온다. 또한 영화 초반부에 빌리가 순순히 끌려가는 척하다가 프랭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는 컷에서 우리는 이 일당들이 게임의 법칙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벤과는 대치되는 부도덕한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징벌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그려진다.

보티커는 벤과 빌리 사이에 샘 분과 위트, 캐리를 놓는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은 샘 분과 위트인데, 벤과 빌리는 이들을 회유 또는 유혹하는 형식으로 영화의 도덕추를 가지고 게임을 벌인다. 먼저 정착에 대한 의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 벤과 달리 이들은 정착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이지만 범죄를 저질렀기에 쉽사리 정착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이들은 필요하다면 벤의 뒤통수를 치고 빌리를 데리고 도망갈 선택을 할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빌리는 샘과 위트에게 자신을 도망가게 해준다면, 이득을 얻게 해줄수 있게 하겠다고 이들을 유혹한다. 물론 그 유혹은 번번히 벤의 등장으로 좌절되지만 미국 원주민과의 대결이나 도주 과정 같은 인물들이 하나로 단결된 상황 사이에서도 틈틈히 등장해 긴장을 잃지 않고 결말까지 인물들을 몰고 가게 한다.

그 와중에 캐리는 관찰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벤과 묘한 동질감을 형성한다. 캐리가 벤과 죽은 남편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캐리가 은연중에 자신의 남편을 겹쳐보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캐리는 자신에게 매료되어 접근하는 샘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다. 이는 캐리의 이성적인 관심이 성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도덕이나 태도의 문제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더 넓게 보자면 벤의 '결투의 예절'이 개척자의 정신하고 맥이 닿아있지 않나, 라는 추론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선다운의 결전]이 그랬던것처럼 [외로이 달리다]에서도 랜돌프 스콧의 캐릭터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자신의 법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그 법칙을 고수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접근하는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편린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벤과 빌리로 대표되는 품위와 불의 사이에서 인물들이 갈등하는 동안, 보티커는 인물들을 말라붙어버린 나무로 인도한다. 이 말라붙은 나무의 존재감은 굉장한데, 훗날 구로사와 기요시의 [카리스마]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정서적인 에너지를 영화 속에 부여하고 있다. 벤이 왜 이 나무로 프랭크 일당들을 끌여들였는지에 대한 이유가 (그의 아내는 벤이 없는 사이에 프랭크 일당에게 잡혀 나무에 목이 매달렸다.) 밝혀지고, 벤은 프랭크 일당이 보는 앞에서 프랭크의 죄를 밝힌 후 빌리를 나무에 목을 매단다. 벤의 이런 행동은 선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의에 대한 가차없는 징벌과 그 징벌이 프랭크 일당과 달리 정정당당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선언. 이런 벤의 한결같은 ‘결투의 예의’는 [외로이 달리다]를 관통하고 있는 미학이기도 하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샘이 벤을 도와주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물론 그의 선택이 실리적인 이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가 샘을 도와준 뒤 하는 대사들을 보면 샘이 벤의 가치관에 대해 완전히 반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의 성질로 보자면 캐리가 벤에게 품는 감정하고 샘이 벤에게 품는 감정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착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방랑자지만 자신의 법칙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사람에게 매료된다는 [외로이 달리다]의 캐릭터의 발전상은 흥미로운데 결국 묵묵히 예절을 추구하는 자에 대한 매료가 주인공 벤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티커는 모든 것이 끝난 뒤 또 동선을 엇갈리게 배치한다. 벤은 산타 크루즈로 가지 않는다. 산타크루즈로 가는 일행들을 떠나보낸 후, 벤은 혼자서 문제의 나무를 불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행위는 분명 과거의 청산이라는 점과 무법자가 가지고 있는 ‘결투의 예절’이 사회엔 적용되기 힘들다는걸 씁쓸하게 반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다운의 결전]을 떠오르게 하지만 [선다운의 결전]은 죽은 자의 유언를 귀기울이고 적대자의 정정당당함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공동체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면, [외로이 달리다]는 좀 더 단순한 행동인 '소멸'로 과거를 청산하고 공동체가 영화 속 피안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점에서 [외로이 달리다]는 매력적인 풍경 이미지와 단순한(듯 보여도 미묘한 구조를 띄고 있는) 선악이라는 점에서 [선다운의 결전]보다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단순한 쾌감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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