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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스릴러 (3)
어둠의 표적 [Straw Dogs] (1971)


2018/01/30 - [Deeper Into Movie/리뷰] -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은 매우 이상하게 시작한다. 잠깐 어딘가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이미지를 흐린 뒤 타이틀을 띄운다. 그 흐릿한 이미지의 정체가 다시 밝혀지는 순간은, 타이틀이 다 뜨고 난 뒤다. 사실 그 이미지는 교회 묘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곧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도착한다. 감독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재빠르고 잘라낸 시선 숏으로만 제시되는 에이미에게서 상당한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노골적인 관음 숏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그 자신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성적인 이미지를 흘리며, 관음은 혐오스러운 순진함과 추잡한 탐닉으로 재빠르게 이뤄진다. 

요컨데 샘 페킨파는 첫 장부터 관객들에게 이걸 견딜수 있겠냐고 도발을 하고 있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에이미의 옛 남자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밀렵꾼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덫 이야기로 마을의 폭력성을 흘러둔 샘 페킨파는 마치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를 거스르듯이 이 장면을 불쾌한 남자들의 위압적이고 건들거리는 제스쳐로 채운다. 그 속에서 데이비드는 무력하다. 안경과 수학이 배경이 되는 영국 시골 노동자 문화의 거칠음과 반대된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동료가 되어야 할 에이미 역시 데이비드 곁에 있지 않고, 찰리 패거리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다. 데이비드는 콘월에서 완벽하게 혼자다. 자기 전에 행하는 줄넘기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면, 데이비드의 왜소한 남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반엔 데이비드는 이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릴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데이비드가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는 시도다.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이 맡았던 숀 역시 옛날에 가족이 살던 집을 수리하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다. 하지만 혼자서 집을 정리하며 친해졌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혼자서 집을 정리하지 못한다. 권투 선수였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본질적으로 도시에 익숙한 부르주아 지식인이다. 파국 직전까지 데이비드가 집에서 하는 행위는 방에 틀어박혀 수학 문제를 풀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부리는 장면 뿐이다. 그런데 데이비드가 집 수리를 위해 고용한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찰리로 대표되는 에이미의 옛 남성 친구들이다. 이 남성 친구들은 거친 일에 능하다. 페킨파는 마치 순박한 아일랜드 시골 커뮤니티의 정의를 믿었던 [말 없는 사나이]에 침을 뱉듯이 사악한 영국 시골 커뮤니티의 불의를 강조한다.

마초 샘 페킨파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은 바로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여자가 아는 다른 남자의 손을 빌어야 하는 부분이다. 페킨파에게 데이비드는 지지리도 못한 쫌팽이 같은 남자다. 이를 대변하듯이 집을 수리하는 찰리 패거리와 데이비드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철저한 경멸의 숏과 리버스 숏으로 이뤄져 있다. 데이비드는 하이 앵글 숏에서 왜소하게 제시된다. 당연히 이 시컨스의 승자는 지붕 위에서 하이 앵글로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찰리 패거리인데, 동물에게 이성적으로 반응해봤자 동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쥐고 있는 유일한 권력은 경제적인 관계인데, 그마저도 찰리 패거리는 연연하지 않는다. 일진에게 화를 내거나 돈을 바쳐도 일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롭힐 구실을 잡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고양이를 죽이고 그 시체를 데이비드의 집에다 던져넣는 장난은 유치하지만 사악하다.

이 사이엔 에이미가 있다. 박찬욱 감독이 지적했듯이 에이미는 데이비드와 찰리 패거리에서 이중 스파이와 같은 존재다. 에이미는 데이비드를 사랑하지만, 그의 부족한 남성성에 큰 실망을 품고 있다. -를 +로 바꾸는 장면은, -된 욕망을 +로 바꾸고 싶어하는 에이미의 욕망을 드러낸다. 에이미 자신이 발산하는 성적 이미지라던가, 그런 이미지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관음증적 시선 숏을 생각해보면 이 욕망이 성적인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심지어 에이미는 데이비드 보고 대놓고 ‘비겁하다’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하다. 이 비겁함은 남성성의 부족함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주체적인 묘사로 표출되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당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여성혐오적이다. 에이미는 남자들에게 먼저 유혹하려는 태도는 취하지 않은 채 성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다가 강간당한다. 소위 말하는 수동적으로 성적 이미지를 표출하고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1970년대 초기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서 비판을 받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원작자 고든 M. 윌리엄스와 페킨파, 각본가 데이비드 젤리그 굿맨은 에이미 캐릭터에 복잡한 생각을 할 두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이 이런 여성혐오적인 캐릭터 설정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에이미는 이 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찰리 가문이 일종의 법도 도덕도 없는 흉악한 짐승 집단처럼 그려지는 걸 생각해보면 에이미의 성적인 방종함은 배경이 되는 콘월 지역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들의 관점의 일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종의 에밀 졸라풍 자연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졸라가 만들어낸 나나가 그랬듯이 에이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본능을 뛰어넘는 복잡한 셈이나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물론 데이비드의 지성에 맞추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잠자리에 등장하는 체스 대결 역시 입문서를 읽으면서 둬야지 간신히 진행되고, 그나마도 정정당당한 대결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데이비드의 수학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데이비드의 짜증어린 반응을 고양이하고 놀면서 회피하거나 1차원적인 단순한 리액션으로 받아칠 뿐이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부부싸움을 하는 숏과 반응 숏을 자세히 보면 찰리 패거리의 무시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라면, 에이미의 동물적 반응 숏은 경멸보다는 짜증과 갈망에 가깝다는 것이다.  

도시에서였다면, 에이미의 방종한 성격은 백치미로 안전하게 가부장 관계에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에이미가 태어난 시골 마을이다. 안전한 백치미는, 시골에서는 통제불가능한 가부장 남성의 야수성을 자극하는 스위치가 되버린다. 그 점에서 에이미가 강간당하는 시퀀스와 데이비드가 마을 남자들에게 꼬여 사냥을 가는 시퀀스랑 교차 진행되는 전개는 서사상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시골 마을이 요구하는 남성적 행위를 수행하면서 마을에 편입되려고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내부인들 앞에서 역할 수행을 하는 동안, 에이미는 집에 침입한 옛 남자친구 찰리에게 강간당하다가 화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악명높은 강간 장면은, 두가지 점에서 이중적이다. 하나는 에이미의 야만적인 남성성에 대한 욕망이 폭력으로 부서진다는 점이다. 강간으로 생긴 에이미의 트라우마는 직후 등장하는 교회 파티 시퀀스를 통해 드러난다. 이때 에이미는 갑자기 브라를 착용하는 정숙한 여인이 된 것처럼 보이고, 삽입 숏으로 제시되는 노골적인 성적 상징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에이미가 후반부로 갈수록 찰리의 강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인정해야 한다. 찰리가 에이미의 옛 애인이었다는 설정은, 끔찍한 강간 판타지에 기반한 에이미의 심리적 변화를 그려내기 위한 밑밥인 셈이다. 이 강간 판타지가 완성되는 순간 샘 페킨파는 데이비드가 사냥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두 장면의 교차 편집은 동일하게 짧게 쏘아붙이는 숏으로 대비된다. 데이비드는 새 사냥에 성공하면서 남성성을 인정받지만, 동시에 옛 애인 찰리에게 성적으로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 폭력을 능숙하게 다루는 동안, 성적으로 되려 더 무능해지는 것이다. 

더 무서운 점은 이때 페킨파는 강간범인 찰리는 물론이고, 데이비드와 에이미 그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의 기쁨이 강간의 고통과 동일시 되는 편집 기법에서 사냥의 성취는, 불쾌한 강간 판타지 앞에서 산산조각난다. 남은 건 공포와 낯설음, 그리고 역겨움이다. 페킨파에겐 강간과 사냥 모두 약한 자를 짓누르는 행위기 때문이다. 사냥에 돌아온 데이비드와 강간당한 에이미가 (당연하겠지만 에이미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싸우는 장면의 숏 연결 역시 시선 회피와 의도적인 어긋남으로 이뤄져 있다.  여성 혐오적 상황이 슬슬 인간 혐오적인 상황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둠의 표적]은 명백한 여성 혐오적 설정을 품고 있음에도, 여성 혐오적 상황을 안전하게 소비할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인다. 영화의 원제는 그 점에서 노자가 세상사의 하찮음을 관조하는 자세를 악의적으로 뒤틀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외양과 달리 샘 페킨파가 지독히도 서부극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서부가 개발된 현대에서 야만의 영역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등장하며, 문명의 본류라 믿었던 영국이야말로 야만을 방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지점에서는 미국의 서부극보다도 훨씬 끔찍한데 이 영화에서는 야만을 통제할 아버지의 법이 전혀 동작하지 않고 있기 떄문이다. 이 영화에서 정상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자는 퇴역 장군 존 스콧이지만, 영화의 파국은 그가 찰리 패거리의 우발적인 총격으로 맞아죽으면서 시작된다. 법이 통하지 않지만, 법을 집행할 자는 무력하다. 그렇기에 외부인의 활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집행을 대신할 외부인은 폭력을 한번도 써본적이 없는 수학자다. 페킨파는 이 아이러니에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이를 위해 페킨파와 각본가들은 데이비드가 멀쩡히 잘 있다가 뒤집어진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초반부에 에이미와의 대화를 보면 알겠지만 데이비드가 모종의 문제로 도시에서 쫓겨나 정착했다고 정보를 흘린다. 데이비드는 보기만큼 안전한 인물도, 이입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의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인 헨리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헨리는 마을 사람들의 희생양, 호모 사케르나 다름 없다. 그는 핍박받으면서 마을의 규율을 유지하는 존재다. 영화의 파국 역시 헨리가 찰리의 사촌 재니스와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이유로 폭발한다. 하지만 헨리는 완벽하게 무고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야수성을 뒤집어 드러내는, 어린아이 같은 캐릭터다. 단적으로 파국의 상황에서 헨리는 발작하며 에이미랑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도망가려고 한다. [어둠의 표적]의 아이러니는 무고하지만 순수하지는 않은 희생양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폭발한다. 폭발은 공적 영역을 상징하는 교회를 벗어난, 사적 영역인 데이비드의 집에서 (그것도 밤에) 이뤄진다. 조명은 꺼져 있고, 무도덕한 짐승의 패악로 무장한 찰리 패거리는 총을 쏘아대며 짐승 소리를 흉내낸다. 가장 안전한 집이 가장 위험해지는 아이러니를 통해 페킨파는 호러 영화의 어법을 빌려온다. 찰리 패거리는 더 이상 이성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자 좀비다.  제약된 시선 바깥의 불쾌한 음향과 위협적인 액션을 통해 긴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존 카펜터의 [13번가의 습격]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찰리 패거리의 논리는 간단하지만 (“우리 여자를 건드린 병신 새끼를 족치자!”), 법 나아가 당연한 상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약자를 향한 가부장의 패악질을 농축한 집단이다. 어떤 점에서 찰리 패거리는 [라이드 온 하이 컨트리]에 등장했던 엘사를 뒤쫓는 불쾌한 오빠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성 대신 지적 장애인이 핍박받는 자로 변했을 뿐이다. 데이비드는 그 점에서 상술한 서부극의 외부에서 온 보안관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술했지만 여기는 신화가 끝난 영국이다. 자신의 일을 하려는 데이비드의 폭력은 극단적이고 지저분한 수단으로 표출된다. [어둠의 표적]의 후반부가 무시무시하다면, 데이비드가 휘두르는 정의의 폭력과 찰리 패거리의 사악한 폭력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데이비드의 분노는, 헨리를 지킨다기보다는 일진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도 그렇다.) 자신의 의무를 강조하다가 도망가려는 헨리를 쥐어패고 다락에 가두는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틈틈히 찰리 패거리를 옹호하면서 데이비드를 막다가 얻어맞는 에이미 같은 여성혐오적 묘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페킨파는 폭력의 동인을 계속 겹쳐놓으면서, 폭력의 명료성을 일부러 흐려버린다. [어둠의 표적]은 설정을 통해 폭력의 장르적 쾌감을 약속하지만 그 역치를 넘어버리는 수준까지 밀고가면서 그로테스크함을 구축한다. [가르시아]가 선악 구분이 명확한 대신, 자기도취성에 빠져있다면 [어둠의 표적]은 그런 자기도취성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결말 역시 묵시록적이다. 우선 찰리 패거리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동시에 찰리에게 총을 쏜 이중 스파이 에이미는 파괴된 집에 남는다. 하지만 에이미 역시 고향 마을에 더 이상 정착할 수 없는건 분명하다. 그것은 데이비드와의 파국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파국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데이비드와 헨리다. 어둠 속에서 차를 타고 집을 빠져나오는 데이비드 옆에 앉은 헨리는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다. 데이비드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데이비드와 헨리 역시 어디로 갈지 모른다. 이 곳이 고향인 에이미는 집에서나마 머물수 있었지만, 데이비드와 헨리는 시골 공동체를 움직이던 구성원들을 살해함으로써 완벽한 외부자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영원히 아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공동체를 박살내고 영원하고도 비현실적인 어둠에 갇힌 인물들. [어둠의 표적]이 섬뜩하다면, 그 감금된 인물들에게 아무런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잠재된 괴물적인 본성을 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는 이 영화에게서 폭력의 동인과 쾌감이 지루한 시골 마을에서 반전되어 제시되는 섬뜩함을 배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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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Elle] (2016)

(강력한 누설이 있습니다.)

아마 크레딧이 지나가자마자 얼굴이 벌개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파울 페르후번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당당하게 강간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소리를 외화면에서 흩뿌린다. 엉뚱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샷은 강간 장면이 아닌 검은 고양이의 정면 응시 샷이다. 때문에 파울 페르후번이 [엘르]에서 취한 시점이 고양이의 시점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그 착각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두번째 샷에서 이미 강간은 다 끝난 상태다. 하지만 피해자인 미셸은 울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일어나 청소하고 욕조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단 두-세번째 샷을 통해 파울 페르후번과 [엘르]는 장르 관습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이미 네덜란드 영화계와 할리우드를 자기 방식으로 조교시킨 음탕한 네덜란드 애처가이자 정숙하고 침착한 사디스트인 파울 페르후번은 이번엔 뻔뻔하게도 이자벨 위페르를 내세워 프랑스 영화계를 조교하려고 한다. 

강간 사건이 잠깐 물러난 자리에 이어지는 것은 미셸의 일상이다. 미셸의 일상은 (이자벨 위페르가 [다가오는 것들]에서 편안한 연기해냈던) 프랑스 중년 지식인 캐릭터가 누리던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기적이 일어날 자리엔 강간이 일어났다. 자연히 [엘르]는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일탈한다. 페르후번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깔깔 비웃으면서 발기발기 찢는다.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랑 살겠다며 찌질하게 구는 징징거리는 아들, 무례하기 그지 없는 아들의 여친, 안 팔리는 주제에 폭력만 휘두르다 이혼당한 지식인 전 남편, 섹스에 환장한 어머니의 젊은 남친, 낙하산이라고 미셸을 경멸하는 게임 회사 직원... 미셸의 일상은 루이스 부뉴엘과 마르코 페라리의 경박함과 미카엘 하네케의 서늘함을 품고 사정없이 해체된다. 미셸이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모아 만찬을 하는 시퀀스에서 날아다니는 위선과 경박함, 부글거리는 성적 에너지는 페르후번이 부뉴엘이 시전했던 풍요로운 부르주아의 식탁을 작살내는 쇼트들을 존경하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미셸이 게임 회사 사장이라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출판게에서 일하다가 낙하산으로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뒷설정은 미셸의 위치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미셸은 전통 지식인 사회에서도 떨어져 있고, 신세대가 주축이 된 게임 업계에서도 한발짝 떨어져있는 아웃사이더다. 전통 지식인 사회와 이혼했지만, 발 붙이고 싶어하는 게임업계와도 사이가 냉랭한 상태에서 강간이 끼어들게 된다. 슬슬 미셸의 캐릭터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미셸은 강간 사건을 '게임'으로 보고 있다. 미셸은 게임의 NPC를 뛰어넘어 플레이어가 된 뒤, 최종적으로 '프로듀서'가 되고자 한다. 디자이너를 총괄하는 프로듀서.

이때 미셸이 개발하는 게임은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다. 간과하기 쉽지만, 페르후번은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는 고블린이 주인공인 안티 히어로 잠입 게임이다. 이 게임의 비중은 의외로 크다.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건 아니지만 페르후번은 이 게임의 개발 과정과 그에 관련된 소동들을 서브 플롯으로 삽입한다. 심지어 미셸은 게임 모델링을 활용해 만든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은) 포르노 영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강간 사건을 겪은 미셸에게는 이런 모욕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영상을 만든 엔지니어는 미셸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지만, 미셸은 오히려 그 성적 대상화를 역으로 반격한다. 미셸은 그 영상을 보고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는 차분하고 남자의 팬티를 벗겨 성기를 유심하게 관찰한 후 냉정하게 모욕을 준다. 페르후번은 이 서브플롯을 통해 미셸이 강간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강간하는 고블린에 가깝다는걸 명백히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진상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게임의 결말에서 주인공인 복제 고블린은 무도덕한 본체 창조주 오크 마법사를 소멸시키고 본체 스틱스의 정체성을 차지하게 된다. 정체성의 문제라던가 아버지 살해라는 모티프라는 점에서 이 게임의 플롯은 미셸의 과거사나 주변 환경과 묘하게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복제'인 미셸은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가? 미셸이 죽이고 싶어하는 원본은, 경건하고 온화한 중산층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자비한 살인마로 돌변한 아버지다. 미셸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내심 불편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강간 사건은 미셸이 안고 있는 불편함을 수면 위로 올려보낸 셈이다.

[엘르]가 이상한 안티 히어로물이라 할 수 있다면, 중후반부 강간범의 정체가 드러난 뒤 미셸이 취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미셸 앞집에 사는 강간범 파트리크는 묘하게 미셸의 아버지와 닮아있다. 멀쩡한 중산층 부부의 가장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은 미셸 그 이상으로 비틀린 범죄자다. 미셸은 파트리크의 비틀린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닫아달라고 파트리크에게 부탁해 같이 정리하는 미셸의 시퀀스는 사실상 둘의 섹스 시퀀스나 다름없다. 이 장면이 불편하다면 초반부의 강간 시퀀스의 뉘앙스와 행위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미 미셸을 욕망에 충실하고 재주가 많은 고블린이라고 정의내렸다. 고블린은 인간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는 존재다. ("하하하. 당최 알아먹지 못하는구나? 살거나 죽거나... 이제는 더이상 내게 명령할 수 없어.") 무도덕한 지식인에게서 태어난 - [엘르]에서 탄생은 축복이 아니라, 한낱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조시의 흑인 아이는 정숙한 여성상에 대한 빅 뻐큐에 프랑스 백인 지식인 사회가 두려워하는 악몽이며, 또다른 고블린이다. - 고블린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인정하게 되고, 중산층의 위선을 차분하게 까발린다. 미셸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미셸의 입장을 따라갈수 있다면 그건 고블린의 내면이 어떻게 설계되어있는지 알아차린 이자벨 위페르의 공이 크다.

영화 후반부, 미셸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병으로 잃는다. 하지만 어머니 유골은 소동으로 제대로 뿌려지지 못한 채 허겁지겁 막을 내리고, 아버지 시체 앞에서 미셸은 대놓고 비웃고 경멸한다. 미셸에게 부모의 죽음은 차라리 본체로부터 해방에 가깝다. 미셸은 무책임한 창조주를 직접 소멸시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소멸을 애도하지 않고 경멸하는 것으로 복수를 완수한다. 이 순간 미셸이 책임지고 있는 게임이 동시에 완성되는건 당연하다. 미셸은 게임 완성 축하 파티에서 작가 남편과 게임 업계의 뚜쟁이가 된 뒤, 친구 안느에게 안느의 남편과 바람 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안티 히어로 고블린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 잔칫날의 배경 음악으로 '삶에 대한 욕망'과 '고립시키자'가 나오는 건 고블린과 페르후번의 사악한 유머일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강간범 파트리크다. 파티에서 나온 미셸은 파트리크를 불러내 헤어지자고 선언한다.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 선언을 통해 폭압적인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강간하려고 발악하려는 파트리크를 똑바로 응시하는 미셸의 얼굴 샷은 그 점에서 로라 멀비가 지적했던 시선의 권력 관계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다. 미셸은 파트리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음으로써 파트리크를 부끄럽게 만든다. 미셸은 부모를 죽일수는 없었지만, 강간범 파트리크의 존재 이유를 빼앗을수 있었다. ("날 봐라! 스틱스! 내가 네 운명을 선택하는 것을 보라고.") 파트리크는 발악하다가 자멸하고 곧 이어 상황을 모르는 빈센트의 손에 살해된다.

[엘르]의 클라이맥스는 철저한 아이러니다. 어느 누구도 파트리크와 미셸이 이상한 관계를 맺었다는걸 모른다. 빈센트의 살인은 정당방위로 경찰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아내인 레베카 역시 범죄자 파트리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초반부 남성들에게 모욕당한 미셸은 마지막에 게임의 프로듀서로써 성공한다. 그 '게임'은 진짜 '게임'이기도 하고, 강간범과의 파워 게임이기도 한다. 미셸은 파트리크를 죽이면서 법을 비롯한 남성의 장치를 빌리지 않고 빛으로 위장한 "어둠의 주인"이 된다. 미셸이 키우다가 언급 없이 사라진 검은 고양이는 그 게임으로 인도하기 위한 환상이었던 것일까?

이 아이러니로 이뤄진 안티 히어로 극을 실제 여성들이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강간의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미셸의 행동은 도무지 현실로 옮길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어떤 여성들에게 [엘르]의 미셀은 결국 남성이 ([엘르]의 원작, 각본, 감독 모두 남성이다.) 만들어낸 기벽증으로 가득한 환상 (까놓고 말해 히토미 꺼라 식의)으로 다가올 것이다. 페르후번은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상된 비판에 대답한다. 미셸은 불명예스럽게 이사가는 레베카를 위로한다. 이때 레베카는 풀이 죽은듯 보여도 이겨낼 기운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안나랑 미셸이 얘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미셸의 인생은 어둠 없이 안나랑 즐거울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당신은 이 고블린이 맞이한 결말에 납득할 수 있는가? 이 연대가 정말로 진실하게 느껴지는가? [엘르]는 강력한 에너지로 밀어붙인 뒤, 관객을 회색 영역에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파울 페르후번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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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자 [Le Boucher / The Butcher] (1970)

[도살자]의 시작은 평온한 마을 전경 쇼트 직후 사소한 실수를 배치한다. 행복한 결혼식을 위해 준비하던 일꾼들 중 한 사람이 실수로 음식을 엎지른다. 이윽고 바삐 일하는 주방에 들어가면서 샤브롤은 삼각형으로 세워진 케이크 위의 신랑 신부와 진짜 신랑 신부를 매치 컷으로 이어붙인다. 고기에 대한 수다가 이어진 뒤, 관객들은 고기를 준비한 포폴이라는 남자를 소개받는다. 그런데 이 남자 앞으로 오는 건 따로 준비된 식칼과 포크에 푹 찔린 고기다. 심지어 그 다음 샷에서 샤브롤은 잘려지는 고기의 질감이 보일 정도로 클로즈업한다. 사전 정보 없이 들어온 관객이더라도 이 장면에서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샷에서 고기는 맛있다기 보다는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브롤은 아무렇지 않게 그 식칼과 고기를 치워두고 행복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작지만 불길한 메아리처럼 남는다.

그래도 주인공 엘렌에게는 별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시골로 내려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엘렌 앞에 등장한 정육점 주인 포폴은 수줍고 친절한 남자다. 결혼에 관심없고, 군대 시절이 즐겁지 않다고 회상하지만 그래도 연애하기엔 무리없는 배려심을 지니고 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서스펜스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도살자]의 초반 전개는 심심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샤브롤은 초중반를 트뤼포나 로메르의 영화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중산층 커플의 이야기로 끌어간다. 놀랍게도 그는 그들의 사랑을 이죽거리지 않는다. 엘렌이나 포폴은 많은걸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 이입하기엔 무리 없는 캐릭터고, 샤브롤 역시 그들의 사랑를 그릴때 어떤 블랙 유머 따윈 집어넣지 않는다.

하지만 엘렌과 포폴의 수줍은 사랑이 진행되는 동안 [도살자]는 도입부에서 제시되었던 이물적인 샷을 스멀스멀 퍼트린다. 처음은 비가시적인 소문이다. 엘렌은 학생들에게서 우체부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엘렌은 무심하게 넘기려고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저번주까지 멀쩡하게 춤추던 여자라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낀다. 대도시였다면 피해자는 익명의 존재로 남았겠지만 [도살자]의 배경은 얼굴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시골이다. 이 영화의 불안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상의 순간이 사라지거나 흐트러지면서 발생한다. 샤브롤은 그 불안을 점점 키워나가면서 미심쩍은 단서와 쇼트들을 엘렌 주변에 흩뿌린다. 

여기서 흥미로운 시퀀스가 등장한다. 포폴을 학교로 데려온 엘렌은 학생들에게 왈츠를 가르치는데, 이때 학생들과 포폴은 프랑스 귀족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여기서 다시 이상한 쇼트를 집어넣는다. 포폴이 잠시 벽에 기대서 엘렌과 학생들을 보는 도중, 포폴의 시점에서 엘렌의 뒷머리를 줌 인하는 쇼트가 갑자기 끼어든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관객들은 재고를 할수 밖에 없다. 대체 샤브롤은 왜 엘렌의 뒷머리를 극단적으로 클로즈업 해서 담아냈을까? 만약 포폴이 엘렌에 대한 상념을 지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면 엘렌의 뒷 모습을 중간 크기의 쇼트에서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했을건데 말이다. 게다가 직후 이어지는 포폴의 반응 쇼트 역시 어딘가 불편해보인다.
 
대체 '무엇이' 포폴을 불편하게 했던 것일까?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이 쇼트에 담긴 엘렌의 붉은 뒷머리가 포폴이 다루던 생고기랑 비슷하게 보여서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물론 머리카락과 생고기는 완전히 다른 물체지만, 적어도 이 쇼트에서 붉은 뒷머리는 지나치게 확대된 나머지, 본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수 없을 정도다. 마치 조지아 오키프의 대상을 확대시켜 추상적으로 찍은 사진들처럼 말이다. 극단적으로 확대된 이미지는 본 의미를 잃고 생경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추상화된 붉은 이미지는 고기의 색감을 떠올리기 충분하다. 샤브롤은 우아함을 중시했던 프랑스 귀족을 분장한 인물들 사이에 극단적으로 확대된 뒷머리 쇼트를 집어넣으면서 이물감을 발생시킨다.

[도살자]의 오프닝 크레딧은 동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그 오프닝을 잊지 않았다듯이 영화 속에서 동굴을 등장시킨다. 체험학습을 위해 아이들을 데려간 엘렌은 이 동굴이 원시인이 살던 동굴이라 설명하고, 이에 아이들은 잠들어있던 원시인이 깨어난다면 분명 착할거라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 직후 엘렌과 아이들은 시체를 발견한다. 살인 현장의 피가 하얀 샌드위치 위로 떨어지는 장면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문명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샌드위치의 깔끔한 하얀 이미지 위에 원시적인 피가 떨어지면서 얼룩지기 때문이다. 동굴과 식빵은 서로 화해할 수 없어보인다.

사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후반부터 명백해진다. 바로 끊임없이 야만과 폭력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포폴이 범인이었다. [도살자]가 흥미로운 점은 엘렌의 일상에 비일상적인 살인과 폭력이 끼어들면서도, 엘렌과 살인마 포폴의 연애담을 장르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은 이 사실을 눈치채는 순간 포폴이 엘렌을 죽일지 모른다고 긴장하게 된다. 서스펜스의 공식에서 남성 연쇄살인마와 여성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연쇄살인마가 여성을 착취하면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브롤이 두 캐릭터를 존중하면서 신중하게 감정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도살자]는 쉽게 착취적인 태도로 빠지지 않는다.

모든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는 그 점에서 [도살자]의 섬뜩하면서도 애절한 매력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늘거리는 커튼을 보여준 다음, 어둠 속 교실에 홀로 있는 엘렌 앞에 불쑥 나타나는 포폴의 샷은 히치콕에 대한 존경심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순간 포폴은 부정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인마다. 샤브롤은 포폴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더욱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도 포폴과 엘렌의 로맨스는 일상이 끝난 오후에서 밤에 이뤄졌지만, 살인이 등장한 순간 샤브롤은 포폴과 엘렌의 로맨스는 빛 아래에서 이뤄질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하지만 포폴은 쉽게 단죄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도 샤브롤은 명백히한다. 때문에 [도살자]의 멜로 드라마는 도피적인 면모가 강하다. 이런 도피적인 멜로 드라마는 자해한 뒤 죽어가는 포폴을 싣고 엘렌이 밤의 도로를 질주할때 극한에 달한다. 이 순간 관객은 포폴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동정하고 그가 엘렌과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 포폴은 깨어났지만 환대받지 못하는 착한 원시인이며, PTSD를 앓는 군인이다. 구체적인 정치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포폴의 캐릭터는 알제리 전쟁의 맥락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 들어갔을때 샤브롤은 병원 의사들이나 병원 풍경을 보여주지 않고 포폴과 엘렌의 샷-리버스 샷만을 고집하면서 둘만의 감정을 기어이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 완성은 동시에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고, 엘렌의 마음을 간직한 채 포폴은 쓸쓸히 죽는다. 샤브롤은 이제 홀로 남은 엘렌의 모습을 보여준다. 엘렌을 보여주는 마지막 쇼트야말로 [도살자]의 무표정한 쓸쓸함을 집약하고 있다. 다시 찾아온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뒤, 엘렌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때 샤브롤은 엘렌 뒤에 물안개와 불이 켜진 차 전조등을 보여준다. 엘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남겨진 엘렌이 이어갈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샤브롤은 그저 물안개라는 흐릿한 상황 속에 등대처럼 켜진 전조등을 통해 엘렌과 포폴의 사랑을 집약한다. 파국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무의미하지 않았다듯이. [도살자]가 만약 샤브롤의 대표작으로 불릴 수 있다면 샤브롤의 무표정함이 상당히 절절하게 메아리치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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