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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애니 (40)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새벽을 부르는 루의 노래] 예고편

갓아사 갓사아키 존경합니다. 그러니 한국 개봉도 하야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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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크롤러 [スカイ・クロラ / The Sky Crawlers] (2008)

오시이 마모루의 [스카이 크롤러]는 극도로 인공적인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 애니 속 세계는 대리전이 실제 전쟁을 대체했다. 그리고 대리전을 담당하는 것은 영원히 늙지 않는 킬드레라는 10대 소년소녀들이다. 10대 소년소녀들은 전투기를 몰아 상대편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안심하면서 평화를 유지한다. 절대로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이 기본전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스카이 크롤러]는 [공각기동대]보다도 훨씬 더 사변적인 세계를 밀어붙이는 애니메이션이다.  이런 분위기는 모리 히로시의 동명 원작의 공이 컸을거라고 본다.

[스카이 크롤러]는 구조의 애니메이션이다.  먼저 오시이 마모루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구축되어 있는지를 파악한 뒤 대립항적인 두 공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원작과 달리 배경을 동유럽 어딘가로 이동시켜버린 것도 이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땅에서 이뤄지는 킬드레의 일상은 위축되어 있다. 색감은 칙칙하며, 등장 인물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욕정의 순간도 짧고 조용히 처리해버리고, 인물들의 시선은 종종 먼 곳을 응시한다. 장소들은 비슷비슷하며 노골적으로 인물과 사건의 반복이 암시된다. 

원작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참조하자면 오시이 마모루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유는, 설정 자체가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앵바드]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지난해 마리앵바드]가 그랬듯이 [스카이 크롤러]도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에 머물고 있는 여자에게, 과거를 상기시키는 남자가 찾아오고 그 남자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서사 자체를 파편화하고 미로를 만드는 식으로 굴레를 보여준 [지난해 마리앵바드]와 달리, [스카이 크롤러]는 사소한 소도구와 언행의 반복, 세계를 작동케하는 법칙의 생략으로 굴레를 보여준다. (이 애니를 보고 난 뒤, 어떤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는지 파악할 관객은 없으리라 본다.)

땅의 세계를 보여줄때 오시이는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게 분명하다. [스카이 크롤러]는 평범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보여주지 않는 정렬된 샷과 몽타쥬를 보여주려고 애쓰는 드문 애니메이션이다. 사실 어느 정도 이름을 얻은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보면 샷과 샷 사이의 흐름을 실사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마음껏 주무르는 방식으로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콘 사토시와 유아사 마사아키, 실벵 쇼메와 얀 츠반크마이어 작품들이 그렇다. 하지만 오시이는 그런 주무름 대신, 시네마토그라프의 군살 없이 집중력 높으면서도, 정직한 이미지를 2D 애니메이션의 평면성에 이식하려고 한다.

그 결과 [스카이 크롤러]는 무드 피스라고 할만한 샷들이 이어진다. 매춘부와 섹스 후 옷 매무새를 다듬는 유이치, 볼링장 시퀀스의 무덤덤한 공기, 갑작스럽게 터져나오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비평, 권태로운 드라이브 시퀀스... 그 중 가장 섬뜩하게 조형된 장면은 킬드레를 관람하러 오는 평범한 사람들과 킬드레를 교차해 보여주는 시퀀스일 것이다. 이 시퀀스에서 오시이는  사회에서 유리될 수 밖에 없는 군상 킬드레와 일반인들 간의 섬뜩한 대조를 보여준다. 오시이 마모루의 힘은 어려운 사상을 중얼중얼 대사로 풀어냈다는데 있지 않고, 그 사상이 어떤 식으로 '영상화'되는지 비롯된다.  [나루토]나 [닌쿠]로 유명한 니시오 테츠야가 제공한 캐릭터 디자인은 일본 분라쿠 인형을 연상시키는 무표정함과 카와이 켄지의 절제된 음악도 여기에 한 몫한다.

반대로 하늘로 넘어가면 다르다. [스카이 크롤러]에서 하늘은 땅과 달리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다. 기술적으로도 흠잡을 때가 없지만, [스카이 크롤러]의 액션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땅의 세계를 지배하던 정렬된 감성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스카이 크롤러]에서 하늘은 말그대로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것이다. 오시이는 이 간극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왜 킬드레가 하늘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그 곳에서만 킬드레들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스카이 크롤러]를 관통하는 중요한 아이러니다. 쿠사나기 스이토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을 전쟁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엔터테인먼트화했지만,  정작 그 엔터테인먼트화된 전쟁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진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곳도 하늘이며, 거기서 죽어도 그들은 기억을 잃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뿐이다. 오시이는 샷을 쌓는 방식의 대조로 그런 운명의 가혹함이 가져다 주는 처연함을 강조한다. 그 점에서 [스카이 크롤러]는 일본 서브컬처의 루프물 흐름을 받아들인 [지난해 마리앵바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카이 크롤러]는 실패한 혁명을 얘기하는 애니기도 하다. 성장하지 못하는 킬드레를 최종 보스인 티처와 싸운다는 후반부 전개는 일본 만화나 애니계에서 자주 우려먹혔던 '어른에게 반항하는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카이 크롤러]의 킬드레가 다른 '어른에게 반항하는 아이들'에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들이 왜 반항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실존의 문제랑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인류사에서 실패한 혁명이 보였던 논리를 체화하고 있다.

그렇기에 클라이맥스에서 등장하는 직설적인 감정 폭발 역시 그렇게 느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앞의 샷과 시퀀스에서 감정의 절제가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시이가 관객들에게 성공적으로 인물을 얽매고 있는 세계의 구조를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에서 모토코가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면서 한없이 가라앉을때도 그 유장한 호흡에 지루함을 느낄지 몰라도 모토코의 감정을 이해할수 있던 것처럼, 우리는 킬드레를 얽메고 있는 억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굴레에서 좌절하면서도 기어이 탈출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킬드레들의 욕망과 사랑은 사뭇 감동적이다.

어쩌면 오시이는 이 애니를 만들때 좀 감상적이었던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결말 뒤에 붙는 쿠키가 대표적인 증거다. 또다른 반복, 그러나 변화를 암시하는 이 쿠키는 꽤나 의견이 분분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일본 만화 특유의 '오카에리나사이'가 가져다 주는 느끼함이 없다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카이 크롤러]가 [공각기동대]처럼 오시이를 언급할때 선두에 나설 수 없는 작품이 된 중요한 이유기도 하고. 하지만 [스카이 크롤러]의 감상적인 맺음은, 쉽사리 내칠수 없다. 그 감상은 어떤 냉소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난 내 개에게만 관심있고 인간 따윈 상관없다'라고 말하며 후배들의 작품을 깎아내리는 "지루한 작품만 만드는격 더러운 영감" 오시이의 숨겨진 의중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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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과 해방으로써 “히어로”: [타이거 앤 버니]와 [핑퐁]을 중심으로 본 히어로論

그러니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정신에 대하여” 중. 


이성의 제3세트에 무한한 사랑을 설치해. 네 영혼을 해방시켜. 찬연한 석양. 
-Supercar, ‘Free Your Soul’ 

히어로란 무엇인가? 물론 이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서브컬처 히어로의 기틀을 세운 캐릭터인 슈퍼맨의 이름이 니체가 주창한 ‘초인Ubermensch’의 영어번역에서 따왔다는 유명한 사실을 주지해보면 대략적인 답은 나올지도 모른다. 니체는 ‘초인’에 대해서 인간의 영역에 머무르지만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에만 얽매이지 않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공의롭고 새로운 법칙과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위해 부단히 행동하는 인간상”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니체는 여기서 나아가 초인의 세 가지 모습을 언급하면서 “낙타에서 올라온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초인의 궁극적인 단계를 ‘아이의 성스러운 긍정’을 놓았다. 왜 그런 것일까? 이번 글은 그 아이의 성스러운 긍정에서 힘을 얻는 ‘히어로’와 그를 동경하는 짝패로 구성된 애니메이션인 [타이거 앤 버니]와 [핑퐁]을 통해 히어로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즐거움에 대해 다뤄볼 생각이다. 

리뷰 특성상 누설이 있습니다. 


1. [타이거 앤 버니]: 단순한 감이 만들어내는 기적

[타이거 앤 버니]는 기본적으로 히어로 버디 액션 장르이기 때문에, 다양한 히어로가 등장한다. 하지만 [타이거 앤 버니]가 지목하는 ‘주인공’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부라기 T. 코테츠다. 히어로TV 랭킹 하위권을 맴돌며 나이를 먹어가며 세파에 찌들어가는 히어로 말이다. 왜 [타이거 앤 버니]는 그를 주인공으로 지목하는가?

우선 코테츠라는 인물을 보자. 그는 현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구시대적인 히어로의 가치에 매료되어 있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기에 갓 파트너가 된 버나비가 스코어와 매체에 노출되는걸 신경쓰자 질책한다. 히어로의 마음가짐이란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말이다. 그가 말하는 내용 자체는 단순하고 원론적인 이야기고 ‘커머셜 히어로’라는 현실에서는 뒷전으로 밀러난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굳게 믿으며 자신의 행동 근거로 삼는다. 그렇기에 1화에서 높으신 분들 연화 자리도 그냥 생까고 나오고 버나비를 유치하게 놀리는 다소 아이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그는 어른의 법칙과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거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아이와 어른이 공존하는 모습이야말로 코테츠 캐릭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코테츠의 이런 아이스러움과 어른스러움의 교차가 만드는 행동방식은 2화에서 버나비가 코테츠를 까면서 “아저씨처럼 감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나랑 맞지 않는다.”와 코테츠 본인이 “시뮬레이션은 별로…”라고 하는 대사로 요약된다. 이 대사를 통해 우리는 코테츠의 행동 양식이 버나비의 시뮬레이션과 대척되는, 어떤 단순한 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시대적 히어로의 가치와 결부되어 순수한 운동감를 만들어낸다.

즉 사람을 구하는게 “히어로로써 본연의 임무”라는 믿음과 단순한 감이, 순수한 운동감이 담긴 액션을 만드는 것이다. 3화에서 폭탄을 처리할때 고민 끝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과 동선, 그리고 ‘타격’감이야말로 [타이거 앤 버니]가 주는 순수한 운동감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토 감독과 니시다 각본가는 코테츠가 탑을 뚫고 버나비가 폭탄을 차서 하늘 위로 날려버리는 동선으로 액션 장르의 기본적인 쾌감을 보여준다. 상황이 종료된 후 버나비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했냐는 질문에 ‘순간적인 판단으로…’라고 말하고 코테츠는 ‘그게 감이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들을 통해 [타이거 앤 버니]는 이 단순하고 즐거운 동선이 만들어낸게 ‘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감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운동감의 결정판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해내는 ‘결정타’인 ‘굿 럭 모드’다. 재미있는게 이 굿 럭 모드는 실제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기술이다. 하지만 굿 럭 모드가 주는 타격과 그 쾌감은 화려하고 즐겁다. 왜냐하면 이 ‘굿 럭 모드’는 히어로로써 난관을 극복하는 ‘상징’으로써 액션이기 때문이다. 그 액션이 ‘실용적’인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타격과 동시에 [타이거 앤 버니]의 ‘순수한 운동감이 담긴 액션’을 만드는 요소로는 ‘기지’가 있다. 1쿨 마지막. 제이크가 불러온 첫번째 위기에서 코테츠는 자신의 불찰로 버나비를 화나게 하고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제이크에게 패한다.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 이 와중에 제이크는 히어로들을 비웃으면서 “생각해봤자 소용없어”라고 하는데, 이 대사가 되려 제이크에게 한방 먹이는 코테츠의 한방이 된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코테츠는 아픈 것을 무릎쓰고 달려가 버나비가 히어로로써 활약할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뒤엎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승리로 이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타격’만큼이나 ‘기지’도 [타이거 앤 버니]의 액션의 쾌감에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코테츠는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든 돌파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 것일까? 3화에서 코테츠는 카리나에게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히어로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마음가짐은 미스터 레전드에서 물러받은거라는건 2화부터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뒤, 코테츠는 “누군가 인정을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한다. 이를 통해 [타이거 앤 버니]는 코테츠의 동력이 인정욕구가 아니라는걸 명백히 한다. 그렇다면 의무일까? 물론 의무도 중요하긴 하지만 단순히 의무라고 단정짓기엔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다. 코테츠는 히어로로써 진심으로 즐기고 있고 그 일에 열심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해답은 3화에서 코테츠가 레전드 상을 보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장면과 16화에서 여러 일들로 상심한 코테츠가 미스터 레전드의 영상을 보는 장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때 레전드를 보는 코테츠의 표정은 천진난만하다. ‘그래 저런 좋은 시절이 있었지…’라는 애잔한 표정이 아니라 아직도 그 시절에 머물러있는듯한 표정이다. ‘그때에 머무른듯한 반짝반짝 빛나는 표정’이야말로, 단순히 의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에 있고 그것이 그만의 히어로의 법칙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코테츠의 천진난만한 표정에 담긴건 아마도 ‘단순하고 순수한, 살아있다는 즐거움’ 아닐까? 미스터 레전드와 코테츠가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자신을 부정하는 코테츠에게 미스터 레전드는 ‘그것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힘이다.’라고 말해준다. 그 말을 들은 코테츠는 웃는다. 그때까지의 코테츠의 태도를 보면 그 웃음은 능력을 얻은 뒤 처음으로 웃었던 순간이였을 것이다. 이 웃음과 웃음에서 파생된 벅차오름이야말로 코테츠의 동력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 레전드로 대표되는 ‘히어로’는 코테츠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긍심을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을 나눠준 처음으로 느꼈던 긍정과 희망, 충만함이 그를 지금까지 이끌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자신이 느꼈고 지금도 믿고 있는 그 충만한 ‘살아있다는’ 감정과 감각을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점들은 코테츠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이는 똑같은 자기 부정에 시달렸지만, 결국 사회를 거부하고 붕괴시키려고 했던 크림하고 완벽하게 대조된 것이다.

물론 그런 자신감은 작중 내내 항상 솟아오르는게 아니며 오히려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예전에도 몇 번 흔들리기도 했지만 코테츠는 이해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넘어오곤 했다. [타이거 앤 버니]의 2쿨은 코테츠의 자기긍정이 흔들리는데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믿었던 미스터 레전드가 감추고 있던 어두운 면과 능력이 1분이 감퇴해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면서 코테츠도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히어로로써 싸울 수 없는 상황이 실제로 등장하게 되자, 코테츠는 낙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가족을 지킬수 없다면 어떻게 히어로가 될 수 있냐고 ‘가족’을 선택하고 히어로로 은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버나비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걸 몰랐기에 코테츠의 선택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게 쓸쓸히 바에 앉아있던 코테츠는 버나비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알게 된다. 어느새 버나비가 코테츠를 ‘히어로’로써 자신을 동경하고 그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와 관련해서 1쿨 마지막에 등장하는 중요한 대사가 있다. 자신이 코테츠의 임기응변을 믿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거냐고 질책하는 버나비에게 코테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나를 믿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이 대사는 ‘히어로’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 버나비는 코테츠를 믿게 된 것일까? 아마도 버나비 역시 어느 순간 ‘히어로 코테츠’를 통해 자기를 긍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복수만을 생각해오고 그것이 히어로의 동력이 되었던 버나비는 자신의 고독과 상처를 철두철미한 계산, 거만함과 쇼맨십으로 가면을 쓰면서 세상을 대해왔다. 하지만 그 가면 속에는 상처받고 주눅든 아이가 있었다. 9화에서 버나비의 이런 숨겨져있던 아이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부모님이 준 장난감을 부서트리지 않으려고 집중해 받아낸다던지 결국 “부모에게 받은 물건은 소중히 해야죠” 하면서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아 온다. 이때 하는 코테츠의 대사는 의표를 찌른다. “의외로 유치하다?”

그렇다. 버나비의 ‘시뮬레이션’과 ‘선배는 비상식적이에요.’라는 대사들 속에는 어린 아이가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버나비는 유년기의 즐거움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돌아가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가면을 쓴다. 그런데 코테츠는 계속 그의 마음을 두들긴다.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코테츠는 ‘즉물적인 본능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즐거움’을 계속 버나비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게 코테츠는 버나비에게 “다른 사람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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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코테츠는 버나비가 위기에 처해있을때 달려와준다. 버나비가 자신을 믿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을 향해 달려와주는 코테츠의 순수한 모습에 버나비는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을 보답받고 즐거워하게 된다. 처음으로 “과거와 가면에서 벗어나 어디론든지 날아갈 수 있겠다는 자기긍정”을 얻게 된 것이다. 허나 코테츠의 자기긍정이 흔들리는 2쿨에서는 이 관계도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여기서 코테츠와 버나비가 싸우다가 헤어지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버나비가 평소와 달리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걸 볼 수 있다. 버나비는 “평생 과거에 사로잡혀 살 거”라고 말하며 두려워한다. 겨우 과거에서 떠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새로운 진실이 자신을 붙잡는걸 두려워하고 있다. 그 와중에 가족을 선택하겠다는 코테츠의 말은 버나비에게는 히어로가 다시 자신을 버리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버나비를 매버릭이 구워삶는것은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코테츠는 결국 본의아니게 자신이 버나비와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걸 깨닫고 반성한다. 결국 그는 다시 그들에게 달려와 히어로로써 다시 어둠과 맞서 싸운다. 그 어둠은 기억을 조작해 영원한 거짓을 만들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그답게 터무니 없다. 쿠소 슈츠와 과거의 장소로 데려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작전.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심지어 오랜 친구인 벤마저도 한탄할 정도니. 하지만 그것이 또다시 기적을 불러일으켜 불가능을 역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리고 최후의 싸움에서 그는 생사의 도박에 자신을 내던진다. 뒤늦게 능력감퇴를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슬퍼하는 버나비에게 죽어가던 코테츠는 이렇게 말한다. "바보. 알면 안 되지. 숨기고 있는 것인데."

왜 코테츠는 능력이 감퇴하는 걸 버나비에게 숨기고 생사의 도박에 자신을 맡긴 것일까? 죽어가면서 코테츠는 버나비랑 함께 다녔던게 즐거웠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분명하게 히어로로써 싸우는 것이 힘들때도 있지만 즐거운 순간이 있다고 긍정한다. 그렇기에 생사마저 아무래도 좋을 만큼, 한계를 뛰어넘어 반드시 즐거움을 지키고 이기겠다는 즉물적이고 순수한 본능이 코테츠를 뛰어들게 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저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더이상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코테츠는 사람을 지키는 히어로로써 믿음을 생각할 틈새도 없이 H-01를 잡아채는 것으로 순수한 운동을로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히어로로써 다시 기적을 일으킨다. 에너지건을 맞고도 코테츠는 또다시 상식을 뒤집어엎고 벌떡 일어나 어둠을 몰아낸다. 그리고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떤다. 그 웃음 속에서 코테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인다.

그렇기에 히어로가 절망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 절망을 주겠다는 매버릭의 궤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절망을 인위적으로 줘서 히어로가 빛나는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적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히어로가 빛난다고 그는 믿고 있다. 능력이 1분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점점 퇴물로 밀려난다고 해도 그는 절망과 싸울 수 있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마지막엔 자신이 동경했던 미스터 레전드마저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타락해버린 미스터 레전드와 달리 그는 정말로 ‘히어로로써’ 즐거워하고 있고 살아있다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기적을 일으킨다. 코테츠의 매력과 힘은 ‘상식을 뒤엎고 단순하면서도 즐겁게 빛나기’ 때문에 있다.

마지막으로 코테츠는 히어로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버나비도 자신을 찾겠다고 떠난다. 히어로업계에서 떠나 잠시 고민하던 버나비는 부모님 무덤을 보다가 1104+728=10313329라는 숫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것은 부모님 생일 그리고 자신의 생일과 탄생 당시 무게였다. 동시에 버나비는 부모님과 함께 했던 짧았지만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다른 사람을 지키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자기긍정과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자신의 과거에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버나비는 히어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엔 "자기 한계는 자기가 단정짓는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평범해진다 해도 언제든지 즐겁게 히어로로써 싸워나가는 코테츠가 있다.

[타이거 앤 버니]의 코테츠가 매력적인 어른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어린아이의 즐거움을 누구보다도 믿고 신뢰하고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하고 즐겁고,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런 코테츠의 행동양식과 거기서 파생되는 액션이야말로 [타이거 앤 버니]가 제공하는 장르적인 쾌감이기도 하다.


2. [핑퐁]: 순수한 가속과 비행으로 자유로워지는 영혼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유아사 마사아키의 [핑퐁]에 등장하는 히어로는 분명 [타이거 앤 버니]의 히어로랑 다르다. 궁극적으로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장르에 속해있기에 히어로의 위치는 상이할 수 밖에 없다. [핑퐁]은 스포츠 만화이기 때문에 정의나 도덕의 문제로 넘어가지 않고, 재능과 노력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렇기에 핑퐁의 히어로는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는 아니며 오히려 은유에 가깝다. 또한 이미 성장이 끝난 [타이거 앤 버니]와 달리 [핑퐁]의 등장인물들은 아직 젊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개념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 두 작품의 히어로가 원동력이 의외로 닮아있으며, 그 원동력이 주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과정이 비슷하다는게 재미있다. 그렇기 때문에 [핑퐁]은 장르적인 도구들에 가려졌던 [타이거 앤 버니]의 ‘히어로’보다 ‘히어로’를 구성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들을 더욱 순수한 밀도로 보여준다.

차이점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구도에서 악을 물리치는데에서 ‘순수한 운동감’이 드러나는 [타이거 앤 버니]와 달리 [핑퐁]은 캐릭터간의 1대 1 대결 구도에서 ‘순수한 운동감’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두번째로는 작품을 지배하는 ‘순수한 운동감’이 어디서 비롯되는가가 있다. [타이거 앤 버니]는 히어로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액션의 동선 (“굿 럭 모드”)에서 구체화된다면, [핑퐁]이 주는 순수한 운동감은 가벼운 탁구공의 ‘비행’, 그걸 쳐내는 선수들의 ‘가속’으로 구체화된다. 특히 ‘가속’과 ‘비행’이야말로 ‘타격’과 ‘기지’로 대표되는 [타이거 앤 버니]의 액션의 쾌감과 차별화되는 [핑퐁]만의 액션의 쾌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타이거 앤 버니]에도 날아다니는 스카이 하이가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 순수한 운동감은 ‘정의와 도덕을 수호하는 자로써 히어로’라는 개념에 얽매여 있지 않기에 어떤 깨달음의 경지로 묘사된다.

또한 [핑퐁]은 스포츠 만화답게 실력이 캐릭터를 분류하고 계급을 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잡고 있다. 그냥 평범하게 재미로 탁구를 치는 사람들, 노력으로 올라온 사람, 원래 재능이 타고 났던 사람, 재능을 숨겨왔다가 드러냈던 사람 등등… 그리고 이 실력은 대결의 승패로 캐릭터의 희비와 행로가 엇갈리기도 한다. 페코가 과신하고 까부는 것도 그 실력이 만들어내는 작중 계급에서 상위 계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핑퐁]과 [타이거 앤 버니]의 큰 차이를 또 하나를 꼽으라면 이 부분이 있다. [타이거 앤 버니]의 코테츠는 상위 계급은 커녕 하위 계급이며, 실력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활약이 얼마나 노출되느냐가 중요한 현실적인 척도로 자리잡는다. 

햐지만 핑퐁의 세계에서 대결의 승패로’만’ 판가름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실력으로만 보자면 콩웬거 (차이나), 스마일이나 카자마 류이치 (드래곤), 페코 모두 출중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스마일이나 차이나, 드래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페코만의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히어로’로써 자신감과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핑퐁]의 히어로는 다시 [타이거 앤 버니]가 보여줬던 히어로에 가까워진다.

당연하겠지만 [핑퐁]의 히어로는 능글능글한 호시노 유타카 (페코)다. 페코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위기일 땐 날 불러! 마음 속으로 세 번 불러!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그럼 내가 달려올께. 핑퐁 별에서 달려올께!”

원작에서나, 애니에서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 대사를 통해 [핑퐁]은 페코를 히어로로 각인시킨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페코도 코테츠만큼이나 철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탁구 훈련이나 학교 시험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고 유유자적 놀러다니거나 내기 탁구를 치고 웃어른에게도 반말을 쓰고 과자를 처묵처묵한다. 때론 ‘나는 탁구로 세계에서 짱 먹을꺼야. 그러면 이 탁구장은 유명해지겠지.’라던가 ‘노력은 재능없는 녀석들이나 하는거야’ 같은 유치한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다만 페코의 경우 나이차 때문인지 코테츠와 달리 훨씬 유치하고 싸가지 없으며 (…)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 곁들어져 있긴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페코를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스마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가 철없긴 하지만 누구보다도 남을 생각하는 아이라는게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화에서 페코는 스마일에게 “너랑 같이 있으면 즐거워”라고 말하며 ‘코이즈미 선생님이 널 생각해서 그런 말 하는거야’라고 진지한 충고를 던진다. 장난스러운 태도지만, 이 대사에서 우리는 페코가 스마일을 진심으로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걸 드러내고 있다.

페코가 추락하는 것은 그 ‘히어로’로써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페코 잘못이 크다. 페코를 좌절시킨 두 대결을 자세히 보면 페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차이나와의 대결은, 자신의 실력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위에는 더 위가 있다는 걸 깨닫게 했고 아쿠마와의 대결은 노력이 없는 재능은 썩기 쉽다는걸 드러냈다. 코테츠의 추락처럼 페코의 추락은 히어로를 기반하고 있는 능력에 대한 불신과 의혹에서 찾아온다. 그리고 끝내는 그 능력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사표 쓰고 낙향 시도=라켓 폐기)

그리고 히어로 각성의 계기 역시 [타이거 앤 버니]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탁구를 포기하려고 했던 페코는 ‘너는 나의 히어로였다’며 탁구를 계속하라는 충고하는 아쿠마와 타무라 탁구장에 걸린 사진을 보면서 알게 된다. “아쿠마가 왜 자신을 질투하면서 그런 충고를 해줬는가”하고 “스마일이 정말로 웃었던 순간”을. 그리고 그 둘을 이끌었던게 자신이였다는 걸 깨달으면서 페코는 다시 탁구를 치기로 한다. 스마일은 “히어로 페코”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고,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써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스마일은 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려왔다. 왜냐하면 페코가 너무 실력에 자만한 나머지 히어로로써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페코는 “그 녀석이 웃지 않는건 내 탁구가 째째해져서야.”라고 자조한다. 버나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자조한 코테츠처럼, 페코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에 취해 스마일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한다. 그렇기에 페코는 자신을 평생토록 부르고 있는 스마일에게 달려가고자 한다.

페코가 달려가려고 하는 스마일이야말로 “히어로 페코”를 통해 사람이 변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일 것이다. 히어로의 극단에 있는 스마일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인데, 흥미롭게도 스마일의 과거는 코테츠나 버나비의 어린시절처럼 자기 부정으로 차 있다. 부모의 이혼과 바쁜 어머니에게서 많은 정을 얻지 못했던 그는 감정을 숨기는 것으로 세상을 대처해나간다. 그렇게 살아가던 스마일은 페코를 만나게 된다. 페코는 자기를 긍정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아는 아이며, 친구를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페코를 통해 탁구를 배우면서 스마일은 ‘웃게’ 된다. 탁구를 하면서 ‘웃어서’ 스마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윽고 스마일에게 탁구는 본능적인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페코의 나태함 때문에 탁구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자 스마일은 다시 혼자가 되고 아무런 열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매사를 방관하는 식으로 세상에 대응하려고 한다. (1화에서 “감정을 표현하는데 지쳤거든요.”)

2화에서 그가 탁구에 각성하는 장면을 보자. 문을 닫고 ‘히어로 등장’을 외치는 스마일에게 로봇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때 로봇이 하는 말이 “히어로는 오지 않아.”다. 히어로의 부정. 이 부정 뒤에 “너는 기계다”라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 순간 스마일의 팔은 로봇의 눈과 팔처럼 변이해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준다. 이 변이야말로 스마일이 세상과 맞서는 새로운 방책에 눈을 떴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페코가 더 이상 그에게 오질 않자, 스마일은 방관자에서 벗어나 철갑옷과 무기를 두르고 세상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 뒤 유별나게 스마일의 태도가 차가워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도 그런 변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버나비가 가면을 써 세상을 대한다면 스마일은 세상에게서 한발짝 멀어짐으로써 세상과 대한다.

그렇지만 스마일은 끝내 드래곤처럼 냉정해지지 못한다. 아쿠마가 퇴출 당한 뒤, 스마일은 이적을 권유하는 카이오 학원를 거부한다. 그리고 죠에게 말한다. “저도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결국 이 대사를 통해 스마일은 자신이 로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6화에서 아이들이 “로봇은 폭주했지만 사실은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라는 대사는 그런 스마일의 철갑 아래에 있는 꿈틀거리는 감정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히어로를 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페코는 스마일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순수할정도로 ‘즐거움’과 ‘자기긍정’의 감정이 인물들을 변화하게 하는 촉매가 된다는 점에서 [핑퐁]은 [타이거 앤 버니]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두번째 인터하이에서 페코와 드래곤의 경기를 보자. 여기서 페코는 무릎 부상으로 움직이는 것에 제약을 받게 된다. 수세에 몰리며 드래곤에게 ‘히어로’로써 자격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던 페코에게 스마일은 말한다. “페코라면 즐겁게 칠 수 있어. 놀 상대가 강할 수록 높이 날 수 있다고.” 그리고 페코는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있던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킨다. 이때 차이나는 이 경기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탁구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는 느낌이야."

페코의 이런 단순한 즐거움은 두 인물을 변화하게 한다. 먼저 드래곤. 그의 세계는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제왕적인 카자마 가에서 자라난 그는 새처럼 날고 싶었지만 날 수 없고 좌절하다 죽은 아버지를 보고 자유롭게 날고 즐기는 즐거움과 해방의 감정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믿고, 오로지 ‘자신의 힘’만을 믿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드래곤의 탁구는 외롭고 고독하다. 스마일의 고독이 예민한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라면 드래곤의 고독은 최정상으로 올라가야지만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받을 수 있다는 불안함과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가혹하게 페코를 밀어붙인다. “히어로는 사람을 구해야 되는것 아니냐”고. 하지만 이는 히어로를 증오해서가 아니다. 애니판에서만 추가된 유리에의 “류짱은 누구보다도 히어로를 기다려왔으니깐.”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 머무를것 같은 두려움 말이다.

그 대답에 응하듯이 자신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게 된 페코는 마음껏 가속하면서 ‘히어로’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러버나, 무릎 부상, 신발 같은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좋아지고 날아다닐수 있다는 순수한 운동감이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신기하게도 그 ‘히어로’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 드래곤과는 달리 매우 천진난만하다는 것이다. “탁구라는 건 엄청나게 재미있는거라고!” 그 천진난만함은 드래곤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탁구 때문에 즐거워했던 유년 시절을 깨우고 마침내 산을 타고 고통스럽게 가던 드래곤조차 날게 한다. 드래곤은 이렇게 말한다. “전신의 세포가 미칠듯이 좋아하고 있어. 가속하라고 명령하고 있어. 가속해. 가속해.”

이 신체마저 떨리게 하는 가속이야말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운동감의 극한이다. 그리고 가속은 비행에 도달하고자 하는 움직임 중 하나라는걸 생각해보면 . 그 가속 끝에서 드래곤은 “히어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여긴 정말 좋구나.”라고 말한다. 이제 이 순간부터는 승패조차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 가속 자체가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궤뚫는 기제가 된다. 더 이상 날아오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도 드래곤은 더이상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아올랐다는 것과 그 기회를 제공해준 히어로를 기뻐한다. 코테츠가 번잡한것들에서 해방되어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하고 히어로로써 가치를 통해 버나비와 동료들을 자유롭게 해준 것처럼, 페코도 드래곤에게 자유로워질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날아오르게 한다. 그리고 페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한다고 드래곤.”

이 사랑은 아가페적인 것이다. 생의 즐거움을 함께 나눠가지는 것. 그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자는 것. 그렇기에 페코는 코테츠처럼 자신의 아픔과 한계을 무릅쓰고, 아니 그것을 초월하고 가속한다. 그리고 드래곤에게 사랑을 준 뒤 날아올라 스마일을 향해 간다. 히어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스마일에게. 이 순수할 정도로 긍정적인 에너지. 즐거움의 감정. 그것이 발생시키는 엄청난 속도와 비행. 이 모든 것이 페코한테서 흘러넘친다. 그 와중에 스마일은 페코의 공을 받으려고 하다가 상처 입는다.

이때 스마일을 둘러싸고 있는 철갑옷은 깨져 나가고, 핏줄이 흐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참고로 이 로봇 연출은 유아사 마사아키의 오리지널이다. 매우 [케모노즈메]스럽다고 할까.) 무채색의 화면 속에서 스마일은 붉게 빛나는 자신의 피의 맛을 느끼면서 “밖의 쇠를 부술 수 있는 안의 쇠,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에 원래부터 있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페코와 스마일은 상처와 아픔마저도 아무렇지 않다. 그리고 최초의 즐거움으로 돌아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마지막에 스마일이 흘리는 눈물은 그 살아있음에 대한 희열과 그걸 깨우쳐 준 히어로 페코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리고 스마일이 숨어있던 창고에 문을 열고 손을 내밀는 어린 페코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 희열의 순간이 끝나고 난 뒤에도 등장 인물들은 히어로가 준 ‘살아있음을 느낄수 있는 힘’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탁구 선수를 그만두었지만 스마일은 이제 페코의 활약상을 보며 스스로 웃고, 뭘 할지 몰라서 꺼려했던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모두들 자기 길을 달려가고 한때 길을 잃고 헤매던 아쿠마와 에가미도 즐겁게 살아간다. 그리고 슬럼프에 빠져 이대로 끝날까 두려워하는 드래곤에게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선수 저 의외로 좋아해요.”

그렇다. 코테츠가 능력 1분이라는 한계 때문에 점점 평범해진다 해도, 버나비는 그를 내치지 않는다. 왜냐면 즐거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즐거움을 알게 된 스마일은 재능도, 노력도 결국 지금을 즐겁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걸 알게 된다. 평범해진다고 해도, 지금의 즐거움을 느낄수 있다면 괜찮노라고 스마일은 드래곤에게 말한다. 그리고 스마일은 페코가 버렸던 라켓을 발견해 바다를 향해 던진다. 한때 꿈을 포기할뻔했지만 이젠 훨훨 날아가는 페코를 스마일은 응원한다.

3. 결말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는 글에서 지성을 시각으로 묘사하면서 “언제나 재구성하려 하며,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기에 창조를 배척한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베르그송은 지성이 “무생물이나 물체를 다루는데는 능하지만 생물을 다를때는 곤란을 겪는다”고 보았다. 반대로 본능에 대해서는 촉각으로 묘사하며 “생명의 형식 그 자체를 본떠 만들어진 것”이며 “유기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본능은 생명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가르쳐줄수 있는 존재”라 보았다. 이런 베르그송의 지성과 본능에 대한 통찰이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히어로 알렉시스 조르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조르바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들은 ‘펜대 운전사’인 주인공을 해방시킨다.

그렇게 본다면 ‘히어로’라는 것은 결국에 본능이라는 생명의 형식이 가지고 있는 가치, 나아가 본능이 가장 1차적으로 느끼는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존재 아닐까? 코테츠가 ‘히어로’의 가치에 집착하는 것도, 버나비와 그의 동료들이 그가 추구하는 히어로상에 매료를 느끼는 것도, 스마일이 그토록 애타게 히어로를 기다렸던 이유도, 페코가 아픔을 뛰어넘고 히어로가 되겠다고 각오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달려올 수 있는, 살아있다라는 은밀하고도 위대한 즐거움. 이것이야말로 ‘히어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쾌락 아닐까?

돌아온 히어로를 반기면서 스마일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이야말로 이 글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히어로는 상식을 뒤엎고, 어둠을 몰아낸다. 무엇보다 단순하고 밝고 즐겁고 빛나고 있어.”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쾌락을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로부터 격리된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정신에 대하여” 중.

P.S.

[킬라킬]에서도 마코와 류코 역시 그런 히어로와 그를 동경하는 평범한 짝패라는 구성을 이루고 있지만 마코는 위에 언급한 안경잽이들과 다르게 긍정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일치하진 않는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키려는 류코를 향해 ‘달려가는’ 마코의 즐거운 표정은 분명 히어로를 동경하는 자가 달려가면서 느끼는 순수한 운동감의 쾌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 류코가 센케츠를 완벽하게 입고 펄펄 날아다니며 누이를 공격하는 부분에서 센케츠가 기분이 최고라고 하는데 이것도 본문과 연계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에가미 우는 톤이 딱 파이어 엠블렘이여서 뿜었다. 참고로 성우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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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콩그레스 [The Congrass] (2013)



더 콩그레스

The Congress 
8
감독
아리 폴먼
출연
로빈 라이트, 하비 키이텔, 존 햄, 폴 지아마티, 코디 스미스 맥피
정보
애니메이션, SF | 이스라엘, 독일, 폴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벨기에 | 120 분 | -


아리 풀먼의 [더 콩그레스]는 풀먼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혼돈스러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던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와 달리 혼돈스러운 미래로 향하는 애니다. 아니 애니라 하기에도 미묘한게, 영화의 50% 정도는 실사로 구성되어 있다. [솔라리스]로 유명한 스타니스와프 렘의 [미래학적 회의]를 느슨하게 각색한 이 영화는 원작과 다르게 (원작이 번역되지 않아서 뭐라 말할순 없지만 적어도 욘 티키라는 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며 배경도 코스타리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끌어오고 있다. 

그 결과 영화는 '환각'과 '환영'을 제외하고는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 로빈 라이트라는 헐리웃 여배우가 있다. 그렇다. 그 로빈 라이트다. 하지만 영화 속 로빈 라이트는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이는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한때 잘 나가는 배우였지만 이젠 하락세에 접어든 로빈 라이트는 파라마운트를 패러디한 미라마운트에서 자신의 이미지와 연기를 디지털화하자는 계약을 제안받는다. 대신 이 계약을 하면 이후로 평생동안 연기를 못한다는 조건이 달리고 로빈은 고민 끝에 수락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나이를 먹은 로빈은 미라마운트에서 진행하는 미래학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구역'으로 들어간다.

물론 영화 속 로빈 라이트는 실제 로빈 라이트하고는 다르다. 이혼 경력에 딸과 아들이 있는건 맞지만 딸과 아들 이름도 모두 다르고 (배우도 요새 아역으로 인지도를 얻고 있는 코디 스밋 맥피가 맡았다.) 결정적으로 [포레스트 검프] (와 그를 패러디한 영화]가 최고의 절정기였던건 맞지만 영화 속 로빈과 달리 인기가 사그라든 이후로도 주조연도 간간히 맡았고 좋은 연기력으로 괜찮은 커리어를 유지해왔다. 얼굴도 품위있게 늙어가는 편에 속하고. 심지어 사그라든 지금도 한국에서도 포스터에 이름을 걸만한 배우 정도는 된다. 슬프게도 로빈 라이트보다도 더 커리어가 쪼그라든 헐리웃 배우도 많다. 멕 라이언이라던가.

하지만 영화 속 로빈이 실제 로빈를 반영하고 있다라는 얘기가 틀린 것도 아니다. 모션 캡처를 두번이나 맡기도 했고 무엇보다 2010년대 기준으로는 핫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헐리웃의 화제에서는 벗어난 배우라는건 확실하다. 애시당초 여배우들은 나이와 소모 속도가 빠르기도 했고. 물론 외모와 달리 딱히 대작이나 예쁜 역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영화에 나오며 연기력 항상을 도모한 실제 로빈 라이트 커리어 선택도 대중에서 멀어지게 한 감도 있다. 이런 점에서 로빈 라이트의 캐스팅은 제법 그럴싸하다.

[더 콩그레스]가 펼치는 디스토피아은 벤야민적인 디스토피아라 할 만하다. 발터 벤야민은 영화나 사진의 복제가 어떻게 예술을 변화시켰는지를 최초로 밝혀낸 학자다. 그 점에서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를 첨단기술으로 복제해 지적 재산권으로 다룬다는 영화의 설정은 분명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경고했던 거짓 아우라-그 예술작품과 동일한 공간과 시간대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무언가'-인 스타 아우라와 연관 관계가 있다.

즉 [더 콩그레스]는 거짓 아우라인 스타 아우라가 만약 상품화되고 나아가 그 아우라로 자기 정체성을 변하게 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진화 가능성과 디지털화를 언급하면서 시작한 이 변화는 작중 영화사는 그 스타 아우라를 가지고 애니메이션 구역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고 무한한 문화상품을 찍어내기 시작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사람들이 거짓 아우라 그 자체로 변할 수 있게하는 약까지 개발해 팔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 거짓 아우라에 매혹된 세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게 제법 매혹적이다. 실사 세계 어딘가에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그곳은 환각의 제의를 거쳐 들어갈 수 있으며 실사는 일종의 거짓 아우라로 등장한다. 모션 캡처 애니메이터들과 감독들은 하나의 공장처럼 운영된다. 그리고 그 세계를 그려내는 애니메이션은 [렌과 스팀피]나 [비비스와 버트헤드] 같은 MTV 애니메이션 혹은 1960년대 로버트 크럼이나 랄프 바크시나 미국 사이키델릭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게 하는 현란한 매력이 있다. 

동시에 이 애니메이션은 거짓 아우라에 취해 살아가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하고 있다. 이런 대기업이 생산해 파는 거짓 아우라와 정체성에 매료된 로빈의 딸 사라는 더이상 로빈을 알아보지 못하며, 20년동안 로빈 라이트 부서에서 애니메이터으로 일해온 딜런은 외려 '살아있는' 진짜 로빈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엔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처럼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는 초췌해진 실사 파트는 직전 애니메이션 파트의 현란함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거짓 아우라로 피폐해진 인간 현실을 강렬한 고발을 이뤄내고 있다.

하지만 [더 콩그레스]가 그 매혹과 비판을 온전히 이뤄냈는지는 모르겠다. 먼저 헐리웃을 다루는 실사 부분이 다소 도식적이고 안이하다는 몇몇 평자의 비판은 타당하다. 로빈은 분명 있을법한 헐리웃 배우들의 현실이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 뻔하다. 마지막 실사 연기를 하며 회한에 찬 로빈이나 연날리기와 비행을 통한 은유은 매력적이였지만 전반적으로 덜 도식적인 방식이 있었을건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극의 주체가 되는 로빈도 냉동 전후론 다소 맥없이 설명을 들으며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있다. 주제를 담당하고 있던 딜런 캐릭터도 슬그머니 퇴장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배우 이미지 장사에서 시작한 벤야민적인 디스토피아가 카멜레온처럼 휙휙 바뀌는 자기 정체성이 모호한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다소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말은 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중간 과정이 휙하고 빠진 것 같다. 애니메이션 구역이 어떻게 실사 구역(현실)로 퍼져 나갔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필요했다.

그래도 마지막 결말은 제법 감동적이고 성숙해서 좋았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아들조차 거짓 아우라에 넘어가버린 로빈은 자신도 거짓 아우라의 세계로 다시 넘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로빈의 선택은 바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로빈은 거짓 아우라를 역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애런의 생을 경험한 로빈은 마침내 아들과 마주하게 된다.  

[더 콩그레스]가 [바시르와 왈츠]를 뛰어넘을 역대급 걸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엔 결함들이 많고 헛발질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고 욕심이 과하긴 했지만 강렬한 비주얼과 야심은 충분히 인정할만하며 결말의 감흥은 제법 좋았다고 생각한다. 천생 호불호가 갈릴 컬트로 될 운명을 타고난 애니메이션이지만 아리 풀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P.S.1 퍼블릭 이미지의 'That's Not Love Song'과 OMD의 'Enola Gay'를 멋지게 써먹었던 [바시르와 왈츠를] 감독답게 음악의 질이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맥스 리히터의 사운드트랙도 좋다.
P.S.2 장안의 화제(?)인 돌비 ATMOS를 적용한 작품이라고 한다. 프로듀서 왈. 공짜로 믹싱하게 해줬어요라고....
P.S.3. 중간에 작화를 갈아엎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런 느낌이였다고... http://www.animationmagazine.net/wordpress/wp-content/uploads/the-congress-post-3.jpg
P.S.4.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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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 [劇場版 TIGER & BUNNY -The Beginning-] (2012)

2011/11/13 - [Real Motion/리뷰] - 타이거 앤 버니 [TIGER & BUNNY] (2011)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TVA 본편 종영 이후 극장판 계획이 발표되고 첫번째 극장판입니다. 기본적으로 TVA 1,2화를 기본으로 새로운 전개가 이어지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크게 비평할 거리는 없습니다. 다만 1,2화 재탕이라고 해도 재활용으로만 끝나는 몇몇 총집편 극장판과 다르게 처음부터 다시 흐름을 재구성한 티가 납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극장판에서 잘린 TVA 부분도 있습니다. 변한 부분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입니다. 워낙 기본이 좋았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장면들도 제법 좋거든요. 단적인 예가 코테츠가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부분인데 설득력이 확 붙어 코테츠라는 캐릭터의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남은건 새로운 전개인데 새로운 전개도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보통 극장판 하면 대단한 스케일의 사건들이 뻥뻥 터지지 않습니까.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소박합니다. 냉정하게 보면 절도범 잡는 이야기니깐요. 하지만 이 소박한 설정만으로 당위성을 부여하고 극장판에 걸맞는 긴장감과 여분의 미스터리를 끌어내는게 탁월합니다. 게다가 이런 소박한 전개는 TVA와 연개시켜보면 오히려 균형이 맞는다는 점에서 현명하죠. TVA가 그랬듯이 [타이거 앤 버니]는 활극의 정석을 충실히 숙지하고 있는 애니입니다.


이런 식의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은 팬심에만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팬심 빼고 봐도 잘 뽑혀져 나온 극장판입니다. 보통 스크린으로 옮겨진 TV 시리즈들이 그 스케일에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은 그 스케일에서 헤매지 않고 착실하게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대타로 들어온 요네타니 요시토모 감독이 잘해줬습니다. 라이징도 이 기세만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P.S.코테츠 턱시도가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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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앤 버니 극장판 한국 개봉

인데.. 



폰트하고 태그라인 저게 뭐야!!!!!!!!!


하지만 저는 여자들 사이에서 보겠죠 그런겁니다....

2월 28일 개봉이라고 하는군요. 그 전에 더 헌트, 문라이즈 킹덤, 비스트를 봐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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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Něco z Alenky / Alice] (1988)



앨리스

Alice 
9
감독
얀 슈반크마이에르
출연
크리스티나 코호토바, 카밀라 파워
정보
애니메이션, 판타지, 스릴러 | 스위스, 영국, 서독 | 91 분 | -


체코 스톱 애니메이션 거장 얀 츠반크마이어의 장편 데뷔작 [앨리스]는 "당신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서문을 연다. 하지만 곧 애매하게 "아마도."라고 덧붙인다. 그 아마도를 의심하는게 좋을것이다. 이 애니는 절대로 아이들에게 친절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니깐. 스토리는 모두가 아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개작을 거치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앨리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지로 넘어가면 다르다.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그야말로 기괴함의 향연이다. 영화 대사가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나마 그 대사도 나레이션으로 처리해버린다)  정교하게 구성된 미장센으로 구성된-특히 앨리스의 방은 정말 미장센이 환상적이다-이미지가 두드려져 보이게 되는데, 츠반크마이어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그리는 이상한 나라는 낡은 폐건물 같은 곳에 빵에서 못이 자라고 깡통에서 압정이 섞여있는 마멀레이드와 벌레가 발견되며 눈알과 뼈가 강조된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손잡이가 빠지는 서랍이 통로인 그런 생기없는 장소다. 유일한 인간인 앨리스조차 가끔 자기 인형 같은 섬뜩한 모습으로 변하곤 한다. 전반적으로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환상의 세계이지만 죽어있는 느낌으로 가득하다.


생기없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동물들도 무섭다. 가끔 구식 스톱모션의 향취의 정겨움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조차 기계적인 강박관념으로 가득찬 행동으로 싹 지워버린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매드 해터와 3월 토끼의 다과회다. 고목나무 장승 같은 매드 해터와 눈알이 빠져나오는 3월 토끼가 미친듯이 같은 대사를 지껄이고 자리를 바꾸고 시계에 버터를 바르는 해괴한 짓을 하는데 이게 굉장한 포스를 자랑한다. [모던 타임즈]의 강박관념을 연상시키게 한다고 할까. 물론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잘라대는 실밥 터진 하얀 토끼와 틀니와 의안을 가진 양말 지렁이도 만만치 않다.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원작이 품고 있던 기분 나쁜 부분들을 츠반크마이어식 해석을 거쳐 만든 순수한 악몽덩어리다. 꿈이 그렇듯 해석은 재미없긴 하지만, 이 애니에 묻어있는 '기계적이고 죽어있는' 분위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속해있는 서유럽 문학하고는 거리가 멀다는건 지적하고 싶다. 오히려 카프카의 [심판], 고골리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게오르규의 [25시]같은 '끝내 도구화되는 인간들'을 다뤘던 동유럽 문학 고전들의 향취가 느껴진다. 물론 '아이의 눈으로 본 어른 세계의 부조리성'라던가 '아이의 무의식과 본능' 같은 보편적인 해석을 내릴수 있는 가능성들도 포진해 있다. 어느 쪽이든 츠반크마이어의 이상한 나라의 악몽은 풍부하고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곳이다. 


츠반크마이어의 [앨리스]는 원작을 따라가면서도 결국엔 원작이 가지고 있던 이면을 정확하고 제대로 파헤쳐 풍성한 결과를 일궈낸 애니다. 결국엔 이런 원작이 있는 작품을 만들때 중요한 것은 만드는 사람의 '예술적인 감각과 방향'에 대한 확신감인듯 하다. 애니를 사랑한다면 꼭 봐야할 애니다.


P.S.1 엔딩의 앨리스 대사가 무척이나 섬뜩해서 해석할 거리가 많아진다. 결국엔 앨리스는 토끼(로 대표되는 아버지)를 죽이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P.S.2 맥기의 앨리스하고는 미묘하게 다르다. 이면을 탐구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맥기의 앨리스는 서유럽 전통에 머물지만 21세기적인 팝아트/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감수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츠반크마이어는 그에 비하면 감수성은 다르지만 정파다.

P.S.3 아주 어린 애들은 무리겠지만 12세 이상 정도 되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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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아이 [おおかみこどもの雨と雪 / Wolf Children] (2012)




늑대아이 (2012)

The Wolf Children Ame and Yuki 
9.1
감독
호소다 마모루
출연
미야자키 아오이, 오오사와 타카오, 쿠로키 하루, 니시 유키토, 오오노 모모카
정보
애니메이션, 판타지, 로맨스/멜로 | 일본 | 117 분 | 2012-09-13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는 어머니 하나의 연애사를 회고하는 딸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딸의 목소리가 인도하는 하나와 그이의 이야기는 평범한 캠퍼스 로맨스 물로 같아보이지만 사실 '그이'가 늑대인간이라는 설정이 등장하면서 애니는 순식간에 판타지의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그렇게 결혼한 두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지만 곧 아이 둘만 남기고 남자가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인간도 늑대도 아닌 아이들이 태어나고 하나는 그들이 선택할 미래를 위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늑대아이]의 초반부는 기존 호소다 애니들하고는 굉장히 색다른 맛을 보여주고 있는데다 탁월합니다. '늑대아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재를 가지고 현실적으로 생길수 있는 고뇌를 섞어 풀어내는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데, 동물병원과 소아병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하나라던가 동물 키우냐고 의심받는 장면들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런 터치는 영화 내내 죽 이어집니다. 냉정하게 보면 하나는 입체적인 캐릭터라긴보다는 부정할수 없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케빈에 대하여]를 보시면 그런 이상적인 엄마가 되는것도 진짜 힘들다는걸 알수 있죠.-이상적인 엄마' 캐릭터이긴 하지만 이런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전개 속에서 하나는 조금씩 인간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후반부 들어서면 조금씩 관습적인 가족/성장 드라마 루트를 타긴 하지만 [늑대아이]는 자기가 뭘 말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고 있고 차분히 리듬을 놓치지 않고 하나와 아이들의 성장과 갈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이용해 [늑대아이]만의 독특한 터치를 더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메 부분보다는 유키 부분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성장하는 소녀가 겪는 불안한 심리와 늑대아이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공포심 같은게 적절하게 드러나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이 캐릭터가 소헤이와 함께 맞는 결말도 상당히 좋습니다.


호소다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늑대아이] 역시 '떠나야만 하는 자들과 '떠남'을 끝내 받아들이게 되는, 남은 사람들의 통과의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자신의 아이들-이 계속 곁에 남아있길 내심 바라지만, 자식들이 성장해가는 걸 보면서 선택한 길을 막을 수 없다는걸 후반부에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는 웃으면서 그들을 떠나보냅니다. 이는 상당히 보편적인 이야기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 강한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죽을때까지 헤어짐을 겪고 성장을 하는 존재여서일지도 모릅니다.


[늑대아이]는 시골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썸머 워즈]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지만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소재를 가지고 점점 시골집이라는 공간에서 뻗어나와 확장해갔던 [썸머 워즈]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애니는 판타지나 그런 쪽에 크게 눈을 돌리지 않고 적은 인물과 한정된 장소로 이뤄진 소우주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늑대아이]에는 [디지몬 우리들의 워게임], [시간을 달리는 소녀], [썸머 워즈] 같은 이전 호소다 애니들같은 거대한 스케일로 밀어붙이는 클라이맥스는 없습니다. [늑대아이]의 결말은 상당히 개인적입니다.


그래서 [늑대아이]는 전작들과 달리 전개가 상당히 차분하고 조곤조곤합니다. 이건 단점이 될수도 있고 장점이 될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썸머 워즈]의 단점으로 느껴졌던 거대한 스케일에 대한 집착과 거기에 맞는 폭풍같은 감정 폭발이 사라져 한결 편안해 보여요.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 코레에다 히로카즈나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일본 영화사에 도도히 흐르는 미적 전통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캐릭터들의 감정과 심리를 잡아내는 단아하지만 세심한 터치의 연출들은 확실히 플러스 요소입니다. (최소 몇몇 장면은 오즈 감독에게서 영감을 받은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유머와 풍부한 감정도 잃지 않고 있고요.


[늑대아이]는 확실히 지금까지 나온 호소다 마모루 애니 중에서 가장 좋다고 말할수 있는 애니입니다.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백분 활용하면서도 담담한 터치로 감정을 그려내는 테크닉은 거의 안정되어 있고, 감정통제도 전작들에 비해 발전한게 눈에 보입니다. 조금씩 감독이 다룰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게 눈에 보인다고 할까요. 호소다 마모루가 만약 차세대 지브리가 된다면 이 작품은 하나의 도약으로 남을것 같습니다.


P.S.그래도 하나의 철인적인 체력은 진짜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

P.S.2 이상하게 지향하는 방향성은 다른 [케빈에 대하여]하고 겹처보이는 장면들이 몇몇 있더라고요. 아메가 늑대의 눈빛을 하며 하나를 보는 장면과 케빈이 자위하면서 에바를 처다보는 장면은 제법 유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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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펭귄 드럼 [輪るピングドラム / Mawaru-Penguindrum] (2011)


브레인즈 베이스, 킹 레코드, 마이니치 방송. 총 24화x25분. 화면비 1.78:1
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幾原邦彦 시리즈 구성/각본: 이쿠하라 쿠니히코幾原邦彦, 이카미 타카요伊神貴世 캐릭터 원안: 호시노 릴리星野リリィ 캐릭터 디자인: 니시이 테루미西位輝実
컨셉 디자이너: 나카무라 쇼코中村章子, 시바타 카츠키柴田勝紀  아이콘 디자인: 오사카베 와타루越阪部ワタル 음향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幾原邦彦, 야마다 요우山田陽 음악: 하시모토 유카리橋本由香利
프로듀서: 이케다 신이치池田慎一, 마루야마 히로오 丸山博雄 

캐스트:  키무라 스바루木村昴 (타카쿠라 칸바 / 펭귄 1호), 키무라 료헤이木村良平 (타카쿠라 쇼마 / 펭귄 2호), 아라카와 미호荒川美穂 (타카쿠라 히마리 / 크리스탈의 공주 / 펭귄 3호), 미야케 마리에三宅麻理恵 (오기노메 링고 / 우타다 히카리), 노토 마미코能登麻美子 (토키카고 유리), 이시다 아키라石田彰 (타부키 케이주), 호리에 유이堀江由衣 (나츠메 마사코), 코이즈미 유타카小泉豊 (와타세 사네토시), 토요사키 아키豊崎愛生 (오기노메 모모카), 아리나미 카즈사荒浪和沙 (나츠메 마리오), 와타나베 유이渡部優衣 (이소라 히바리)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종이접기 살인마, [헤비 레인]

(전략)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에서 떼어버리지 못했네.

-에드가 앨런 포우, ‘애너벨 리Annabel Lee’

공주가 다녀간 후 나무가 되살아나니 꽃을 보는 인간은 이 얼마나 기쁜가.
그녀가 지상에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 

-나레이션, [판의 미로]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복귀작 [돌아가는 펭귄 드럼] (이하 펭귄드럼)의 도입부는 평범한 편입니다. 아예 학원-배틀만화 장르 클리쉐로 시작했던 우테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평범한 판타지 미스테리물 도입부라 할만합니다. 병약한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여동생의 운명을 바꿀수 있는 핑드럼이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두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런 명쾌한 미스테리는 3화만에 곧 미궁 속으로 빠집니다. 핑드럼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주변 인물들의 음모와 비밀, 꿈이 마구 펼쳐지면서 이야기는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펭귄드럼의 이야기 전개는 데이빗 린치 영화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나름 현실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는 척하곤 있지만 잘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은 모호한데다 과거의 망령들은 현재에 간섭하고 말도 안되는 설정들이 튀어나옵니다. 막판엔 아예 대놓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부숴버리고요. 이 부숴버림은 어느정도 주제하고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증오로 가득찬 과거의 망령이 현재의 사람들을 조종해 자신이 싫어하는 현실을 공격하고자 하는거니깐요. 이런 점은 일본의 과거사나 지금 현실하고 묘하게 맞물려서 흥미로운 해석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이 점을 보자면 펭귄드럼은 쿠로사와 키요시 같은 일본 호러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파괴하는 망령'이란 화두하고도 연결되어 있는걸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펭귄드럼은 각본이 좋은 애니는 아닙니다. 논리는 종종 어처구나 없이 비약하고, 스토리 배분이나 템포는 문외한이 봐도 이상한데다 (초반 링고 비중이 지나치게 좀... 많은데다 짜증나죠. 하나하나가 나중에 다 도움이 되기 때문에 쉽게 빼긴 뭣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맥거핀 난무에, 시퀀스 간의 연결고리는 덜컹거리고 (타부키와 유리는 아무리 꿈의 논리로 봐도 조금 더 심리/장면 묘사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캐릭터가 살아있긴 하지만.), 몇몇 등장 인물들의 심리는 다소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려러니...하고 짚고 넘겨야 할 부분도 많아요. 대사들도 무척이나 인공적이고요. 절대로 영화학교 극작술 시간에서 다룰만한 이상적인 각본은 아니며, 이쿠하라 자신도 좋은 각본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우테나를 보고 있는데 에노키도 요우지가 얼마나 좋은 작가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완벽한 균형을 찾지 못하고 실패했지만, 펭귄드럼이 풀어내는 꿈들은 이 때문에 오히려 더욱 강해집니다. 펭귄드럼이 펼치는 꿈은 그야말로 질보다는 양과 비논리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꿈들입니다. 우테나처럼 질서정연한 조각 같은 꿈이라긴 보다는 괴상하게 흐트러져 불쾌하지만 기묘한 매력을 안겨주는 불균질한 꿈인거죠. 거기에 [은하철도의 밤] 같은 일본 애들 특유의 동화적이고 시적인 슬픔과 아련함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이를 위해 동원하는 장치들은 인상적입니다. [은하철도의 밤]의 모티브를 따온 동화적인 분위기와 그 뒤에 숨겨진 금기들이 겹처 만들어내는 잔혹동화적 무드, 부셔저 흩날리는 어린이 브로일러의 조각들,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한 과장된 움직임 (생존전략 시퀀스가 그렇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과 액팅, 뜨악하고 캠피한 막장 유머, 픽토그램으로 단순화된 무채색의 엑스트라들과 그와 대비되는 호시노 릴리와 캐릭터 디자이너 니시이 테루미가 제공하는 쁘띠하면서도 탐미적인 캐릭터 작화, 원색과 무채색이 기묘하게 배합된 색채 디자인, 꽉 짜여진 초현실적인 미장센, 다재다능한 편집 기법과 이미지 배치, 얀 띠에르상(특히 [아멜리에] 사운드트랙에 영감을 받은 부분이 많습니다.)과 칸노 요코을 벤치마킹한게 분명하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주제를 제공해주는 하시모토 유카리(+일본 글램 록 밴드 ARB 커버) 의 음악 등... 개별 요소들도 훌륭하고 그걸 조합해내는 이쿠하라의 센스도 상당한 편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설명이 부족하고 개별 요소가 이상한 각본이라도 펭귄드럼의 각본은 나름 꿈과 시적 논리가 서게 도와주고 주제가 뭔지 알 수 있도록 캐릭터 설정이나 감정선 같은 요소들이 교통정리가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적어도 뭔소리인지 모르고 막 씨부리며 '이건 시란다, 시 발싸! 켈켈켈' 거리는 애니는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보다 그 환상들이 조잡하거나 민망하진 않습니다. 대신 초반엔 환상의 패턴이 다소 단순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뭐 초반의 링고가 그만큼 단순했다는 반증으로 볼수도 있겠지만요.

펭귄드럼이 뭘 말하고 싶은가는 의외로 단순한 편입니다. 바로 1화에도 못박듯이 사랑 이야기죠. 하지만 펭귄드럼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에서 벗어난 박애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없어지고 인도하는 가치관이 없어지고 증오와 테러리즘, 광기가 난무하고 과거에 망령에 사로잡힌 21세기에서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죠. 링고가 일기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던가, 막판에 밝혀지는 핑드럼의 정체도 그렇습니다. 이 점에서 펭귄드럼은 [하이바네 연맹]이라던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미야자와 켄지같은 일본 '환상' 문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저 둘은 이 애니의 주제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메세지가 단순강렬한 편이기 때문에 꿈의 힘이 조금 반감되는 효과도 있지만 (주제 묘사도 조금 손해보는 면도 있습니다.) 대신 이 메세지가 굉장히 강한 정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지라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주역 성우진들은 그냥 그렇습니다. 칸바 역의 키무라 스바루는 연기 자체는 그냥저냥인데 억양이 너무 강해서 깎이는 것 같고 (본토에선 놀림거리...), 히마리 역의 아라카와 미호는 확실히 어색해요. 묘하게 캐릭터하고 맞아떨어져 귀엽긴 합니다만. 주역 중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쇼마 역의 키무라 료헤이와 링고 역의 미야케 마리에입니다. 그 중 경력이 있어 안정적인 연기를 들려주는 키무라 료헤이보다는 단역을 전전하다 이번에 발탁된 미야케 마리에가 가장 인상깊습니다. 얄밉고 짜증나는 캐릭터에서 극적으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캐릭터로 변해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 할까요. 심지어 1인 2역도 꽤 능숙하게 소화해냈습니다. 물론 녹음 테크닉이 좀 동원됬겠지만...

오히려 조역들이 뽕을 잘 뽑은 편입니다. 타부키 역의 이시다 아키라가 들려주는 부드러움 뒤에 감춘 광기는 이 성우가 역시 찐득한 광기 연기엔 탁월하다는 걸 느끼게 하고, 유리 역의 노토 마미코 역시 좋은 앙상블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는 좀 깼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으니...) 그리고 마사코 역의 호리에 유이는 커리어 사상 가장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보여줍니다. 평소 쓰는 톤하곤 다른데다 엄청나게 망가지는 연기인데 상당히 노련하게 그걸 통제하고 있습니다. 한때 연기 못했다고 까였던 걸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죠. 이쿠하라가 쉬고 있던 사이 데뷔했던 성우들이 캐스팅 되어 이쿠하라 극 연기를 들려주는 재미와 우테나 주역들의 카메오를 찾는 재미도 있습니다. 특히 토요사키 아키와 박로미, (위에도 적었지만) 호리에 유이는 꽤나 깨는 캐스팅였는데 의외로 극에 잘 녹아들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쿠하라는 말하고 싶은 주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 이미지를 맞춰가면서 이야기를 만든 것 같습니다. 적당히 자신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이 주제와 말이 되게 연결한 느낌이랄까요. 적어도 펭귄드럼을 통해 뭔가 이치에 맞거나 논리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려는 강박관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주어진 예산 내에서 즐겁게 장면을 만들고 사람들과 다양한 피드백을 하면서 이야기를 꾸려나간것 같습니다. 작업 현장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쿠하라 자신은 재미있게 만들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펭귄드럼은 2010년대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상당히 불친절한 애니에요. 명확한 논리가 완전히 파괴된 채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이미지들과 미스테리들, 동성애나 근친, 스토킹 같은 금기 파괴를 받아들이는건 꽤 힘든 일이며 우테나가 추구한 차근차근하게 쌓아가며 만들어진 카오스와 구성미, 주제를 사랑했더라면 펭귄드럼의 (의도한건지 아닌지 잘 모를) 불균질한 카오스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테나 팬들 사이에선 꽤나 까이는 편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마치 [올드보이]나 [복수는 나의 것]을 기대하고 보러갔다가 [박쥐]를 보고 나온 관객들 같은 심정일것이니.

하지만 펭귄드럼이 선사하는 꿈들과 이미지의 향연들은 신보 아키유키나 콘 사토시하고는 완전히 다른 테이스트를 제공하기 때문에 쉽사리 무시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쿠하라가 연극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곤 했지만 펭귄드럼은 연극이라긴 보다는 영상이 할 수 있는 특색을 잘 알고 있는 애니입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모든 매력을 드러내기엔 다소 투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애니라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전 이 애니를 2011년의 일본 TV 아니메를 뽑아줄 용의가 있습니다.  2011년 일본 TVA계에서 불었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열풍 중에서 가장 '이단적'이고 '문제적'인 애니라 할만합니다.

P.S.1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데이빗 린치와 작업하고 싶어했다는 인터뷰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펭귄드럼은 상당히 '데이빗 린치'스러운 애니거든요. 데이빗 린치보다는 훨씬 명확한 편이지만.

P.S.2 요새 우테나를 보고 있습니다. 근데 초반만 봐도 확실히 펭귄드럼하고 비교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살짝 추가해놨습니다. 리뷰 쓸 것 같지만 여기엔 안 올릴듯 합니다. 이 리뷰를 여기에 올리는 것은 펭귄드럼 감상글을 연재하는 것을 마무리 짓는 글이기 때문이여서... 참고로 새벽에 삘받아서 막 써서 글이 난잡합니다. 지적 허영심스러운 부분도 있고 (...) 블로그에 올라가는 글은 아마 더 다듬어지고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볼 사람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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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The Money of Soul and Possibility Control (2011)


[모노노케]로 유명한 나카무라 켄지가 감독하고 [독수리 오형제]로 유명한 타츠노코 프로덕션이 제작해 일본 후지TV 노이타미나 시간대에서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C]는 기본 설정과 도입부으로 보자면 이능력 배틀물, 특히 보이 미츠 걸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던 평범한 10-20대 남자 주인공이 어느날 비일상으로 도배된 세계에 초대되어 비일상을 대표하는 히로인을 만나 배틀물를 벌인다는 도입부 말이죠.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 정립되어 수없이 반복되어온 클리쉐입니다. 심지어 어셋이라는 소환수라는 존재와 그것을 받치고 있는 설정은 노골적으로 죠죠가 세웠던 스탠드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주인의 특성을 반영한 소환수라는 점이 그렇죠.

여기까지 하면 그냥 흔한 능배물처럼 보이겠지만, [C]는 '경제' 능배물입니다. 이런 거 상상해본 적 있으십니까. 그나마 프로덕션 IG가 만들어 같은 시간대에 방영한 [동쪽의 에덴]-이것도 사실 능배물입니다. 능배물의 요소가 거의 해체되고 히치콕 풍(특히 [북북서로로 진로를 돌려라]) '오인된 남자를 중심으로 한 서스펜스'가 덧붙여져 뼈대만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지만...-이 비슷하다면 비슷하겠지만, 그것으로도 설명하기엔 부족합니다. [C]는 [동쪽의 에덴]보다 훨씬 자신의 장르인 능배물에 충실한 애니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금융가를 지탱하는 논리는 의외로 현실 경제 논리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종종 노골적으로 현실 경제의 논리가 드러나 은유의 힘이 약해지는 부분도 있고, 직관적인 설득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전반전으로 실제 경제에서 일어날법한 사건들과 여파들을 제대로 포착해 장르적 도구로 잘 풀어내고 있어요. 애니는 경제와 자본주의의 본질인 '돈'을 놓고 돌아가는 경쟁을 능력자 배틀로 은유하기도 하고, 그 경쟁의 결과가 현실, 나아가 미래에 미치는 여파와 과정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며,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자본과 경제를 다룬 심도 있게 다룬 걸작들에 미치진 못하지만 (이 분야의 무시무시한 걸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비교해보시면 쉽게 감이 잡히실겁니다.) 적어도 경제에 대해 겉햛기로 아는 척하고 넘기는 애니는 아닙니다. 

전 이 애니의 세계관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C]의 세계는 철저히 음모론과 느와르의 가치관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세상을 진짜로 움직이는 세력이 따로 있으며, 그 세력이 거주하는 세계, 금융가는 (필름 느와르에 자주 등장하는) 암흑가처럼 그리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방법과 자기만의 논리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세계의 상위층인 무쿠도리 길드 (미쿠니 일당들)의 묘사도 재미있어집니다. 이들은 약간의 신비주의가 첨가된 거대 갱스터라는 느낌이 강해요. 그래서인지 본격적으로 이들이 움직이는 후반부는 거의 오션스 일레븐 같은 케이퍼 물처럼 흘러갑니다.


이런 독특한 요소들 때문에 [C]는 보통 이능력 배틀물과 많이 다릅니다. [드래곤볼]이나 [원피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어떤 마법의 금서목록]을 생각해보십시오. 분명히 제거되야 할 악이 존재하고, 거기에 맞서는 주인공들은 생기가 넘치지 않았습니까. [C]는 선악이 모호한 애니입니다. 또한 생기가 없고 우울한 애니이기도 해요. 매력적인 어셋 히로인 마슈가 그에 맞서 생기를 채워넣긴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그것도 확 죽어버립니다.

물론 배틀물이니 분명한 라이벌-대결 구조가 있긴 합니다. 오프닝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요가 키미마로의 대척점에 서 있는 미쿠니 소이치로가 그 대결 구도에 서 있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미쿠니는 다수에게 피해를 저지르는 선택을 하는 '악역' 포지션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꽤나 열심히 일하는 자본가이며, 나름 논리가 있는 속이 깊은 캐릭터입니다. 요가 키미마로 역시 전형적인 능배물의 주인공하고 거리가 멉니다. 일단 현실의 무게가 상당한 캐릭터이며, 에너지 역시 그리 넘치지 않습니다. 종종 찌질하다 싶을 정도로 우유부단하지만 혼란스러워하지만 결국 막판에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캐릭터죠. 다행히 이 찌질함은 대책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생기없음과 우울함은 종종 호러로 방향을 틀기도 합니다. 그것도 [영혼의 카니발]이나 데이빗 린치, 쿠로사와 키요시 같은, 인간 존재의 허약함을 공격하는 쪽입니다. 물리 법칙과 시공간을 무시하는 초월적인 존재 마사카키와 기본적인 설정 하나가 그 공격을 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그 공격은 위의 경제라는 소재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거대한 힘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공포심이라고 할까요. 이를 위해 동원하는 나카무라 켄지 감독의 테크닉도 정확한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불쾌한 이미지와 (특히 ([시귀]의 시귀처럼) 눈자위가 모두 검은 색으로 덮혀버려 날뛰는 폭주 오로루나 순수함과 잔혹함을 모두 지닌 Q, 일부 어셋의 흉측함은 꽤나 강렬합니다.) 리듬감을 인상적으로 배합하고 있어요. 이 때문에 본격적인 파국이 진행되는 후반부는 케이퍼 물과 코즈믹 호러의 기묘한 혼합처럼 보입니다.

[TIGER & BUNNY] 감독인 사토 케이이치가 제공한 붉은 톤의 금융가의 비주얼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특촬물 특유의 강렬한 보색 대비와 미국 히어로 코믹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불야성의 대도시, 그로테스크한 초현실주의의 이미지를 빌려와 표현된 금융가는 작 중 현실 세계의 무채색하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mebae의 적당히 모에 그림을 따르는 것 같지만 은근히 광기 넘치는 캐릭터 디자인과 각인각색의 스태프 (여기엔 [라제폰] 감독이자 뉴 건담 디자인으로 유명한 이즈부치 유타카도 있습니다.)가 참여한 소환수 어셋들의 디자인도 충분히 매력적이고요. 불협화음, 기이한 멜로디를 장중한 스케일의 오케스트라로 표현한 이와사키 타쿠의 음악도 좋습니다.

성우 연기는 기본적으로 다들 역에 맞는 기능적이고 안정된 연기를 펼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질주하는 성우가 바로 마사카키 역의 사쿠라이 타카히로입니다. 그는 유들유들하고 과장된 어릿광대같은 목소리로 여러 사람을 농락하고 여기저기 막 뛰어다녀서 헛웃음을 짓게 만들다가 슬쩍 광기를 표출해 사람을 으슬으슬하게 만듭니다. 당연히 이 애니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마사카키입니다. 그 다음은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톤으로 광기를 표현한 Q 역의 고토 사오리고요.


불행히도 [C]는 훌륭한 재료와 그걸 잘 살려낸 연출에 비해 최종적인 합은 약한 편입니다. 우선 이야기 전개에 여유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입니다. 전반적인 템포는 좋은 편이지만, 그 템포를 위해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간신히 11화라는 사이즈에 우겨넣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파면 흥미로웠던 지점을 헐레벌떡 전개하느라 지나치기도 합니다. 정보상 타케타자키 시게오미가 가장 큰 피해자인데 굉장히 재미있는 캐릭터가 될 뻔했는데 그냥 독특한 철학을 가진 전개용 캐릭터가 되버렸습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축인 센노자 코우도 급하게 자신의 사상을 던져놓고 가버리는 느낌이 강합니다. 막화에 가면 중요한 부분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요. 전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한계 속에서 목표에 무리하게 도달하려고 하다가 파편화되버렸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럼에도 결말은 괜찮은 편입니다. 어찌보면 '주인공이 운명론적으로 현실의 무게를 인정해버리는' 필름 느와르스러운 결말인데, 꽤 논리적이기도 하고 (다만 그 논리를 친절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고 봅니다.) 적어도 '경제 따윈 상관없어! 내가 생각하는 세계가 유토피아야!' 혹은 '이딴 더러운 세계는 없어져야 해...' 따위의 찌질하고 허접한 주장을 하는 결론은 아닙니다. 거기다가 서브 플롯으로 진행되었던 로맨스에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비장하면서도 로맨틱한 결말이기도 해요.

아무리 봐도 [C]는 11화에 담아낼 내용이 아니였습니다. 차라리 [프랙탈]을 버리고 이 작품에 좀 더 투자했어야 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지금 부서진 모습도 나쁘지 않고,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P.S. [TIGER & BUNNY]와 같이 보시면 이 애니의 금융가와 타이거 앤 버니의 배경인 슈테른빌트가 꽤나 겹쳐보이실겁니다. 실제로 나카무라 켄지는 사토 케이이치 감독의 [카라스]의 1화 콘티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카라스 1화를 보면서 호러 테이스트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실 안 뒤에 납득했습니다.
P.S.2 아무리봐도 현 노이타미나는 전통적인 드라마 계열 애니외 SF/판타지 계열 애니을 분리해서 제작하는 것 같습니다.
P.S.3 애니플러스에서 정식 감상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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