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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애니메이션 (75)
이 세상의 한 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 In This Corner of the World] (2016)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의 시작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외화면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상물들은 결국 작품 속 세계 인식을 나레이션에다 기준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의 주인공인 우라노 스즈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평범한 일상물이다. 호감을 가진 남자가 있지만 중매로 구레 시에 사는 공무원 슈사쿠에게 시집간 스즈. 호죠 가의 시집살이는 그리 쉽지 않지만 스즈는 특유의 밝고 느긋함으로 어려움으로 견뎌나간다. 코노 후미요는 스즈와 호죠 가의 일상을 구성할 디테일을 빼곡히 알고 있고, 카타부치 스나오 역시 원작자의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하며, 모든 디테일을 평등하게 다룬다.

하지만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시대를 알리는 자막이 뜨는 순간 관객은 이 이야기를 미시사에만 맞춰 볼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2차 세계 대전 말기 히로시마 현 구레 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미시사를 구성하는 나레이션과 캐릭터하고 거시사를 구성하는 자막과 원경이 서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스즈는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레는 명백히 전시 상태이며, 스즈가 만나는 사람들은 얌전하지만 분명하게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둠을 담아내고 있다.

원작자 코노 후미요는 자신이 그리는 미시사가 미시사로 머물수 없다는걸 알고 있다. 원작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전작 [저녁뜸의 거리]의 피해자 코스프레 또는 가해자로써 일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한 대답도 담았기 때문이다. 코노는 다시 한번 [저녁뜸의 거리]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할머니가 경험했던, 전쟁 이전의 역사를 미시사로 구성하면서, 당시의 디테일이 담고 있는 정치성을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태극기 시퀀스는 일견 작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미시사에서 정치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카타부치 스나오는 코노 후미요와 똑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다. 일단 애니메이션을 보면 알겠지만, 원작은 중심 사건 없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2시간 이내의 통일된 각본을 쓰기 까다롭다. 카타부치 스나오는 원작을 각색하면서 야마다 요지가 200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떠올린 것 같다. 야마다 요지는 일련의 2차 세계 대전 영화에서 일상적인 영역에 어떻게 비일상적인 정치가 개입하는지를 다루었다. 카타부치는 야마다 요지의 성과를 이어받아 풍부한 일상사적 디테일들이 어떻게 거시적인 역사와 연결되는지, 관객이 어떻게 이걸 받아들어야 하는지 나레이션과 후경 간의 대립을 통해 질문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섬뜩한 부분 역시, 일상을 그리는 스즈의 순진한 나레이션과 대사가 아무렇지 않게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적 사상을 담아낼때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스즈에겐 폭탄은 형형색색 폭죽처럼 그려지고, 국가가 주입한 "결전복"이니 "대일본제국의 함"이니, "여자의 장기인 죽창" 같은 슬로건들은 순진한 목소리와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긴장 관계를 이룬다. 외화면에서 흐르는 목소리가 내화면에서 쏟아지는 폭격 소리 같은 부조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을 동화적으로 포장할때 카타부치 스나오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알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긴장 관계를 읽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오직 관객만이 스크린 외부 음향과 내부 음향 간의 대립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긴장 관계가 깨지는 순간, 영화는 스즈의 비정치성을 산산히 깨트린다.

영화의 초반부. 스즈는 어렸을때를 회고하면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후 이어질 현실적인 본편과 뚝 떨어진 이 환상적인 플래시백은 다소 이질적이다. 하지만 이 회고는 스즈의 유아적인 세계를 보여주면서, 스즈의 나레이션이 현실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걸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스즈는 주체적으로 주변 현실을 로맨틱하게 포장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지만, 딱 한번 주체적인 환상을 박탈당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스즈의 실수로 하루미가 죽었을때다. 이 순간 카타부치는 냉정하게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이뤄진 장면들에다 스즈를 밀어넣는다.

더 이상 일상의 안온함은 스즈를 보호해주지도, 포근하게 상상할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잘려나간 팔처럼, 전쟁과 군국주의는 스즈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이 상흔이 어떤 의미인지 펄럭이는 깃발 앞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에서 세상 한 구석 역시 세상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한다. 어떤 지점에서 스즈의 울부짖음과 눈물어린 대사는 직접적으로 정치성을 담은 원작보다도 훨씬 통렬한 구석이 있다.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이뤄진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조. 그 회의와 자조가 한 인물의 유아적인 세계 인식을 깨트리면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정치 애니메이션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선언한다. 단지 작위적일 정도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담았던 원작과 달리 애니판에서는 이 부분의 연출이 평상시와 다를바 없이 그려지는게 아쉽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일본인들에게 원체험처럼 남아있는 원폭의 이미지인 하얀 빛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보여줄때 카타부치 스나오가 인용하는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비]다. 두 영화 모두 한 개인이 가족에 편입되려고 할때 핵폭탄이 터지고, 인물들은 하얀 빛을 맞이한다. 마치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을 전부 삭제 혹은 정화하려는 것처럼. 어쩌면 당신은 [이 세상의 한 구석에]를 [검은 비]의 프리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 비]가 핵폭탄 이전의 세계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는 것처럼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결국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일상을 유지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 시대가 끝난 자리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으로 부모가 죽은 고아 소녀를 입양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하루미와 팔은 돌아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스즈는 호죠 가로 대표되는 '세상의 한 구석'에 입양되고 입양함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반대로 친가족이었던 우라노 가는 전부 죽거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스즈가 알고 있던 두 세계 중 예전부터 알고 있던 (구)세계가 멸망하리라는 암시.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상흔을 안고 살아갈 스즈 부부. 카타부치 스나오는 후반부를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으로 설정한 뒤,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고아가 된 일본인들이 서로를 입양하는 것에서 살아갈 힘을 찾아낸다. 

영화의 결말은 다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다. 하지만 그 요괴는 더 이상 아이를 납치하지 않는다. 바구니는 텅 비어있고, 스즈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즈는 어른이 되어 정화된 (것처럼 보이는) 신세계를 살아간다. 영화는 거기서 마무리짓는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으로 그 시대를 돌아보는 작품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포근하면서도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은,  [검은 비]를 감싸고 있던 필사적인 삶을 행한 의지라던가 [유레카]에서 꿈꾸었던 대안 가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요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물었던 나와 세계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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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새벽을 부르는 루의 노래] 예고편

갓아사 갓사아키 존경합니다. 그러니 한국 개봉도 하야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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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북 [La tortue rouge / The Red Turtle] (2016)

(누설이 있습니다.)

미카엘 두독 드 위트의 [아버지와 딸]은 그 자체로 걸작이었다. 삶과 죽음, 이별의 순환을 마음 아프게 그려낸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그전까지 조용하게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두독 드 위트의 명성을 단숨에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준 작품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쪽 사람들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구애가 여러차례 이어졌지만 이번에 리뷰할 [붉은 거북]이 나오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늦은 나이에 장편 데뷔하게 된 두독 드 위트의 장편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

두독 드 위트는 그동안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그의 드라마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인물들의 디테일은 최소화되어 있고, 어떤 행위 ([아버지와 딸]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기다림이었다.)의 반복이나 강조, 변주로 극을 꾸려간다. 그 와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이미지가 영화 내내 이어지는 액션을 보조하며 의미를 불어넣는다. 두독 드 위트는 대사를 비롯한 디테일이 영상의 기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감독이다. 단편에서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였다. 어차피 짧은 길이에서 복잡한 서사를 다룰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줄이는게 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편에서는 이 전략은 항상 성공적일수 없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이외에 채워야하는게 많기 때문이다.

우선 밝혀두자면 [붉은 거북]은 그의 단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장편은 아니다. 캐릭터 설정과 대사가 없다는 점, 서정적인 생로병사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 간결한 작화가 그렇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단편들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서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두독 드 위트가 장편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달라져야고 생각했던 것은, 풍경의 스케일이였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소박한 스케일이였던 그의 단편들과 달리 [붉은 거북]은 장편의 자유를 확실히 누리겠다듯이 광활한 하늘과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의 스펙터클에서 애니메이션을 꾸려간다. 그 점에서 보자면 [붉은 거북]은 [아버지와 딸]의 해변가와 언덕을 확장시킨 영화라 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식 난파극을 자처하는 [붉은 거북]이 재미있는 점은, 난파 이전 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부터 물에 빠져 있는 남자를 보여주며 시작한다는 점이다. 당연하겠지만 두독 드 위트는 그의 이름이 무엇이고, 이전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즉 이 남자에게는 그동안의 과거나 뿌리가 없다. 심지어 환영에서도 당연히 등장해야 할 가족이나 친구는 등장하지 않으며, 생뚱맞게 현악단만이 그가 육지하고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암시할 뿐이다. 

[붉은 거북]이 감독의 단편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세워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사실을 비틀자면, 두독 드 위트는 디테일이 필수적인 공동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초기 단편 두 개는 지극히 우화적인 액션만을 그렸고, 관계로 시선을 확장한 [아버지와 딸]에서도 딸은 분명 가정을 이뤘지만 딸의 가족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딸은 아버지라는 원형적인 상징에 매달려 행동을 반복한다. [붉은 거북]의 남자 역시 공동체와의 고리를 끊은 채 바다로 향하다가 지극히 개인적인 장소인 무인도에 표류한다.

[붉은 거북] 초반부는 섬을 나가려는 남자의 시도를 꾸준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계속 좌절된다. 전형적인 난파극 전개지만 상술했듯이 이 남자에게 어떠한 과거나 뿌리가 없다는걸 생각해보면 섬 밖을 나가려고 하는 의도는 조금 복잡하다. 이 남자는 가족보다는 막연한 문명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뭔가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들보다는 그것이 안겨주는 편안함을 먼저 떠올리고 그리워한다고 할까. 그에 답하듯이 두독 드 위트는 남자의 탈출을 방해하는 캐릭터로 붉은 거북을 등장시킨다. 

어쩌면 남자가 무인도에서 탈출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있는 육지로 돌아가려는게 아닌, 자연인 무인도에 정착을 거부하려는 제스처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니가 제시하는 변곡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남자는 자신을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가 붉은 거북이라는걸 알게 된 뒤 우연히 해변가로 온 붉은 거북을 죽인다. 그리고 후회하던 와중 붉은 거북이 여성으로 변한걸 알게 된다.

[붉은 거북]의 흥미로운 부분은 살해와 죽음의 모티브다. 첫번째로 살해와 죽음 모티브가 행해지는 이 시퀀스에서 남자의 동기를 이해하긴 어렵진 않다. 섬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가 좌절해 분풀이했다는게 선명히 명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왜 살해당한 붉은 거북은 인간 여성으로 변하는가? 이는 소통의 벽에 대한 붉은 거북의 답이라 생각한다. 붉은 거북과 남자는 '다른 종'이다. 그렇기에 두 존재는 통하지 않고, 결국 소통의 시도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남자는 문득 후회하고, 그 후회에 답하듯이 판타지적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두독 드 위트는 소통의 파국이 결국 타자였기에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지닌 간극을 줄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주체가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붉은 거북]은 어떤 선을 그어두고 있는데, 이는 결말의 정서하고도 연결된다고 본다.

여자와 남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붉은 거북은 가족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 부분부터 남자는 문명과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는 모습을 보인다. 관계가 형성되면서 문명과 땅은 남자에게 머나먼 무언가로 다가온다. 와중에 아들은 남자가 갔던 길을 반복한다. 남자가 빠진 절벽 아래 바다에 떨어져 빠져나오는 장면은 두말할것도 없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아들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림에도 부부가 늙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애니의 3분의 2가 흘렀음에도 젊은 시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아들이 장성한 성인이 됬을때에도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 역시 약간의 시간만 흐른 것처럼 보인다.

여기다 스포일러가 되는걸 각오하고 적자면, 이 순간 두독 드 위트는 아들이 섬을 떠나는 계기를 준비한다. 두독 드 위트는 바다에서 건너온 유리병에 아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것에서 아들과 아버지, 문명 간의 고리를 마련한다. 시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는 문명의 부산물에서 아들은 매혹을 느낀다. 그 매혹이 실체화되는 계기는 또 파괴와 죽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두독 드 위트는 이 시퀀스에서 무수히 쓰러진 나무들을 보여주면서 파괴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이 이미지의 강렬함 때문에 우리는 아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와 여자를 찾아다니는걸 보는 동안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빠져든다. 다행히도 기우로 밝혀지만, 남자와 여자가 성치않은 몸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분명 죽음의 기운이 묻어나온다. 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 섬이 아닌, 저 너머 문명만이 자신을 보호해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해일이 밀려오는 장면에서 3.11 도호쿠 대지진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3.11이 다뤄야 할 죽음과 공동체의 붕괴가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연결에 그쳐야 할듯 하다.

아들이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첫 징후는 다시 바다 속 거북 무리를 만나면서 이뤄진다. 자연을 연상케하는 붉은 거북과 문명을 연상케하는 계단이 아들 앞에 나타나는 환영 장면은 작중 상징을 함축한 시적 표현이라 쳐도, 아들이 떠나는 날 남자와 여자가 마치 구조 신호를 보내듯이 연기를 피우는 샷은 좀 이상하다. 정작 아들은 배를 타고 사라지지 않고, 헤엄쳐 붉은 거북들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샷 연결만 보자면 부부가 준비한 신호는 아들을 데려갈 붉은 거북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두독 드 위트는 유리병을 제외한 문명적 요소가 이 섬에 나타나는걸 거부하고 있다. 아들을 문명으로 데려갈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대변인인 거북이 데려가게 만든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아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이뤄지는 환상 시퀀스로 처리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된 여자가 허공에서 정을 나누는 순간 남자는 얼마 안 되는 문명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고 자연과 동화된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개인과 자연에서 비롯된 걸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원형의 이미지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아들이 떠나면서 [붉은 거북]은 다시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아들이 떠난 이후 부부는 갑자기 늙기 시작한다. 당연한 순리겠지만 장성한 아이가 자기 세상을 찾아 부부를 떠나는 순간, 부부에게 남은건 노화와 소멸 뿐이다. 두독 드 위트는 이런 세상사의 진리를 노화 이미지의 압축과 대조로 정리해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정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먼저 죽는다.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죽은 남자를 놔두고 다시 붉은 거북이 되어 흐느끼며 바다로 돌아가는 걸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최후엔 붉은 거북이 되는 이 구조를 통해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온전히 인간이 된게 아니라는걸 암시한다. 

여자의 변신은 차라리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쓸쓸히 떠나가는 모습에 가깝다. 간극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영원히 좁힐수 없는 간극이 있었으며, 결국엔 그걸 최후에 인정해야 한다고 두독 드 위트는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두독 드 위트는 애도를 담은 붉은 거북의 눈물을 통해 그런 간극을 좁히지 못했음에도 무위는 아니였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붉은 거북]은 원형적인 가족 관계에서 출발해 이별과 소멸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딸]의 장편 리메이크이기도 하다.

[붉은 거북]은, 단편에서 장편으로 그럴싸하게 넘어오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채워야 할 빈 칸이 많아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다. [붉은 거북]은 움직임과 스케일, 이미지의 원초적인 매력에 대한 두독 드 위트만의 개성을 장편 애니메이션에 이식하는데 성공했지만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이뤄진 단순한 서사는 장편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보기엔 힘들다. 지나치게 단선적인 구조라고 할까. 짧은 러닝타임인데도 리듬이 단조로운 점도 아쉬움을 더한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자체가 원형적인 만큼 고루한 서사의 반복이라고 비판을 가할 구석도 있다. 

하지만 [붉은 거북]은 잃은것보다는 얻은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후반부 같은 경우엔 두독 드 위트 특유의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대조,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이별의 의미를 잘 잡아내고 있다. [붉은 거북]은 그 점에서 데뷔작으로써는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두독 드 위트가 자신의 리듬감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그의 커리어가 결정될듯 하다. 아니면 그냥 단편 작업에서 만족할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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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 [機動警察パトレイバー2 the Movie / Patlabor 2: The Movie] (1993)

1990년대를 수놓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테크노 스릴러적 요소가 가미된, 로봇 활극에 가까운 애니메이션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가 주목을 받고 인기를 받았다면, 그런 활극을 매우 일상적인 설정에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만들어낸 유우키 마사미의 다른 대표작인 [철완 버디]가 우주 스케일을 넘나드는 얘기임에도 지독히도 일상적인 질감을 끌어냈듯이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리얼 로봇의 흐름에서도, 그것을 전쟁 같은 것에 연관짓지 않고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군수산업 얘기가 등장하긴 하지만 도쿄 경시청이라는 '일상적' 요소가 어느새 '비일상적' 요소에 동화되었다고 할까. 이는 단순히 현실적인 질감을 구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장르의 '비일상성'을 '일상성'에 녹여내는 과정. 분명 선례가 있음에도 [패트레이버]는 그걸 인상적으로 성공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극장판 시리즈로 넘어가 보자.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은 그 점에서 아직은 장르의 '비일상성'이 안겨주는 쾌감에 솔직한 작품이였다. 바빌론 프로젝트를 둘러싼 음모와 호바 에이이치의 모호한 정체와 의도, 플랑 세캉스라고 할 만한 풍경 몽타쥬 등은 '파국'의 호러가 어른거리긴 했지만, 적어도 정리가 되는 스토리와 특차2과의 활기와 액션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를 활극으로 볼 여지를 남겨놓았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는 활극으로써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보다는 '일상의 파국'이라는 점에서 [패트레이버]를 만들고 싶어한듯 하다. 1편에서 호바 에이이치의 설정을 '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건 오시이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잘 알려주는 부분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는 오시이가 아쉽게 놓아야 했던 지점을 활극 요소를 성립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밀고가는 희귀한 애니메이션이다. 기본 구조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과 동일하다. 도쿄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악당이 있으며, 주인공들은 그 악당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 이건 다른 [패트레이버] 시리즈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가 1보다 훨씬 나아간 이유는, 그 악당과 파국의 설정이 장르의 안전성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패트레이버 2]는 당시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가 서 있던 현실에 대해 강하게 말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에 볼 수 있는건 '종말'이다. 이건 단순히 거창하게 아포칼립스적 설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 내 시간대로 따지만 가장 후반부에 위치한 이 애니메이션은 특차2과의 종말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특차2과 멤버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했으며 남아있는건 곧 창고행을 기다리고 있는 잉그램과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어른 키이치와 시노부다. 비록 평행세계 개념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 [패트레이버] 프랜차이즈지만 이 작품은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미 시리즈의 완결을 의도한 작품인 셈이다. 아마 평행세계의 특차2과 역시 이런 사건 없어도 [패트레이버 2]에서 묘사했듯이 비슷하게 소멸했을 것이다.

아마 [패트레이버 2]를 보는 관객이라면 잘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에 혼란함을 느낄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는 배배꼬인 필름 느와르 플롯을 [패트레이버 2]에서 확장시키고 발전하고 있다. 츠게의 사상은 본편을 보는 내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그와 관련된 시노부의 심리 역시 중요하게 그려진다. 전작에서도 키이치와 시노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여기서 이 둘은 표면적인 주인공인 아스마와 노아를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그리고 그 활약상은 충분히 주인공으로 인정할만하다.) 닳디 닳은 두 성인남녀가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1950년대 미국 필름 느와르의 후예라 할 수 있다.

하워드 혹스의 [빅 슬립]이 그랬듯이, [패트레이버 2]의 이야기는 전체 그림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복잡한 얘기가 아님에도 모호한 인물들과 단서, 심리를 점진적으로 배치한 구불구불한 미로를 구성하면서 그 속으로 따라가야 하는 키이치와 시노부의 심리를 구축한다. [패트레이버 2]의 도입부는 그 점에서 그 미로로 안내하는 단서인 셈이다. 분명 츠게 유키히토의 과거를 그리고 있지만, 그가 겪었던 전쟁의 기억에 대한 몽환적인 파편이 서사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도입부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츠게라는 사실을 좀 지나서야 알 수 있다. 또한 츠게 역시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정리하기 때문에 관객은 끊임없이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렇다면 대체 [패트레이버 2]가 필름 느와르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체제의 존속에 대한 질문이다. 이미 [패트레이버 1]에서 오시이는 호바 에이이치가 겪었던 사회적 계급과 차별을 설명하면서, 그 소외가 어떻게 체제를 위협하는지를 그려냈다. [패트레이버 2]에서 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먼저 한국인이 쉽게 알기 힘든 일본의 기형적인 경찰 권력과 자위대 권력의 대립이 있다. 패전국 일본이 받아들여야 했던 체제는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수동적으로 살아야 하는 군대와 그 역할을 넘겨받은 경찰 간의 대립이 이뤄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 체제가 어떻게 이뤄졌으며 어떤 비정상을 은폐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1990년대 CNN이 마련한 비디오 전쟁의 문제가 개입된다. 전쟁이 엔터테인먼트적이고 비현실적인 영상으로 대체하는 사회. 그 와중에 일본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패트레이버 2]가 이 체제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역에서 이뤄진다. 초반부 시노부가 영상을 확대해 이상한 증거를 발견하는 부분은 명백히 안토니오니의 [확대] (혹은 [욕망])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대]에서 토마스가 사진을 확대해 평온한 공원 정경 뒤에 숨겨진 살인 사건을 발견해내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파악하지 못한채 끝끝내 은폐되었다면 [패트레이버 2]에서 시노부와 키이치는 가라오케 영상과 TV 영상을 확대해 전투기를 발견해내지만, 그것조차도 조작된 거짓이라는걸 나아가라는걸 알아차린다.  안토니오니가 기록된 이미지와 기억 간의 불일치를 통해 이미지의 신뢰성에 대해 질문한다면, 오시이는 동시간에 기록된 이미지 간에도 언제든지 거짓이 스며들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다 오시이는 도쿄를 공격하려는 전투기가 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군 간 전투를 유도하려고 했다는 전개로 그렇게 스며든 거짓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표현한다. 결말에 등장하는 도쿄를 바라보는 츠게의 시점 샷이 마치 HUD 디스플레이처럼 묘사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상당히 직접적으로 오시이의 질문을 담고 있다.

그런데 [패트레이버 2]가 흥미로운 부분은 안토니오니의 이미지에 대한 불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끌어온다는 것이다. 조작된 이미지로 츠게 일당의 자위대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도쿄로 입성한다. 그런데 자위대가 도쿄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여줄때 오시이는 자위대가 도쿄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태양은 외로워]식의 인물이 부재한 기나긴 몽타쥬 연출로 묘사한다. 이 시퀀스가 너무나 천진하고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으로써는 순간적으로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설마 오시이는 현 평화 체제를 가짜라 규정하고, 자위대가 보통 군대화되는 세계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규정하는건가? 키토 모히로는 자신의 만화 [나루타루]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어, "적어도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보통군대화에 대한 소망을 말한 바 있는데 오시이 역시 비슷한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키토 모히로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이상의 전체주의를 부정했듯이, [패트레이버 2] 후반부는 그 군대가 느끼는 천진한 아름다움 역시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 부정은 키이치에게서 이뤄진다. 키이치는 처음부터 군경 간의 권력 투쟁에 대해 냉소적이며, '아무것도 하지 말자'라는 사보타주로 비정상적인 체제 내 암투를 부정한다. 그리고 지금 이 세계를 이루는 평화는 거짓이라 말하는 아라카와에게 그런 거짓된 평화라도 있는게 낫지 않냐고 말한다.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일상의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물들의 활약상을 다뤘던 걸 생각하면, 진짜 파국은 거짓 평화로 1대 1로 대체할 수 없다는 오시이의 시선이 [패트레이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오시이는 여기다가 '패트레이버' (나아가 과거로 밀려난 알폰스)라는 히어로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을 서브플롯으로 추가해 설명한다. 작전을 수행하러 가기 전, 위험하니깐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는 아스마에게 패트레이버를 영웅처럼 동경하고 사랑했던 노아는 '로봇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어른이 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스마와 노아 일행은 죽지 않고 도쿄를 구한 영웅이 된다. [패트레이버 2]가 어른스러운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면, 진실과 거짓조차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순화된 대립을 거부하고 희망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트레이버 2]의 결말은 선언이다. 눈 앞의 도쿄 나아가 현실조차 조작된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인간 츠게 앞에서 시노부는 눈 앞에 있는 자신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점에서 시노부는 [패트레이버 2]에서 가장 크게 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노부는 일련의 모험을 통해 파국으로 끝난 관계조차도 부정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자는 사람이 된다. 특차2과는 그렇게 소멸되었고, 평화는 조작된 이미지 앞에서 허약하지만 여기엔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간이 있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오시이는 말한다. 그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영웅 서사를 부정하는듯 하면서도, 다시 영웅 서사에서 현실을 근심하고 바꿀 힘을 찾아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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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과 해방으로써 “히어로”: [타이거 앤 버니]와 [핑퐁]을 중심으로 본 히어로論

그러니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정신에 대하여” 중. 


이성의 제3세트에 무한한 사랑을 설치해. 네 영혼을 해방시켜. 찬연한 석양. 
-Supercar, ‘Free Your Soul’ 

히어로란 무엇인가? 물론 이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서브컬처 히어로의 기틀을 세운 캐릭터인 슈퍼맨의 이름이 니체가 주창한 ‘초인Ubermensch’의 영어번역에서 따왔다는 유명한 사실을 주지해보면 대략적인 답은 나올지도 모른다. 니체는 ‘초인’에 대해서 인간의 영역에 머무르지만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에만 얽매이지 않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공의롭고 새로운 법칙과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위해 부단히 행동하는 인간상”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니체는 여기서 나아가 초인의 세 가지 모습을 언급하면서 “낙타에서 올라온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초인의 궁극적인 단계를 ‘아이의 성스러운 긍정’을 놓았다. 왜 그런 것일까? 이번 글은 그 아이의 성스러운 긍정에서 힘을 얻는 ‘히어로’와 그를 동경하는 짝패로 구성된 애니메이션인 [타이거 앤 버니]와 [핑퐁]을 통해 히어로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즐거움에 대해 다뤄볼 생각이다. 

리뷰 특성상 누설이 있습니다. 


1. [타이거 앤 버니]: 단순한 감이 만들어내는 기적

[타이거 앤 버니]는 기본적으로 히어로 버디 액션 장르이기 때문에, 다양한 히어로가 등장한다. 하지만 [타이거 앤 버니]가 지목하는 ‘주인공’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부라기 T. 코테츠다. 히어로TV 랭킹 하위권을 맴돌며 나이를 먹어가며 세파에 찌들어가는 히어로 말이다. 왜 [타이거 앤 버니]는 그를 주인공으로 지목하는가?

우선 코테츠라는 인물을 보자. 그는 현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구시대적인 히어로의 가치에 매료되어 있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기에 갓 파트너가 된 버나비가 스코어와 매체에 노출되는걸 신경쓰자 질책한다. 히어로의 마음가짐이란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말이다. 그가 말하는 내용 자체는 단순하고 원론적인 이야기고 ‘커머셜 히어로’라는 현실에서는 뒷전으로 밀러난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굳게 믿으며 자신의 행동 근거로 삼는다. 그렇기에 1화에서 높으신 분들 연화 자리도 그냥 생까고 나오고 버나비를 유치하게 놀리는 다소 아이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그는 어른의 법칙과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거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아이와 어른이 공존하는 모습이야말로 코테츠 캐릭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코테츠의 이런 아이스러움과 어른스러움의 교차가 만드는 행동방식은 2화에서 버나비가 코테츠를 까면서 “아저씨처럼 감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나랑 맞지 않는다.”와 코테츠 본인이 “시뮬레이션은 별로…”라고 하는 대사로 요약된다. 이 대사를 통해 우리는 코테츠의 행동 양식이 버나비의 시뮬레이션과 대척되는, 어떤 단순한 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시대적 히어로의 가치와 결부되어 순수한 운동감를 만들어낸다.

즉 사람을 구하는게 “히어로로써 본연의 임무”라는 믿음과 단순한 감이, 순수한 운동감이 담긴 액션을 만드는 것이다. 3화에서 폭탄을 처리할때 고민 끝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과 동선, 그리고 ‘타격’감이야말로 [타이거 앤 버니]가 주는 순수한 운동감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토 감독과 니시다 각본가는 코테츠가 탑을 뚫고 버나비가 폭탄을 차서 하늘 위로 날려버리는 동선으로 액션 장르의 기본적인 쾌감을 보여준다. 상황이 종료된 후 버나비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했냐는 질문에 ‘순간적인 판단으로…’라고 말하고 코테츠는 ‘그게 감이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들을 통해 [타이거 앤 버니]는 이 단순하고 즐거운 동선이 만들어낸게 ‘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감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운동감의 결정판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해내는 ‘결정타’인 ‘굿 럭 모드’다. 재미있는게 이 굿 럭 모드는 실제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기술이다. 하지만 굿 럭 모드가 주는 타격과 그 쾌감은 화려하고 즐겁다. 왜냐하면 이 ‘굿 럭 모드’는 히어로로써 난관을 극복하는 ‘상징’으로써 액션이기 때문이다. 그 액션이 ‘실용적’인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타격과 동시에 [타이거 앤 버니]의 ‘순수한 운동감이 담긴 액션’을 만드는 요소로는 ‘기지’가 있다. 1쿨 마지막. 제이크가 불러온 첫번째 위기에서 코테츠는 자신의 불찰로 버나비를 화나게 하고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제이크에게 패한다.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 이 와중에 제이크는 히어로들을 비웃으면서 “생각해봤자 소용없어”라고 하는데, 이 대사가 되려 제이크에게 한방 먹이는 코테츠의 한방이 된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코테츠는 아픈 것을 무릎쓰고 달려가 버나비가 히어로로써 활약할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뒤엎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승리로 이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타격’만큼이나 ‘기지’도 [타이거 앤 버니]의 액션의 쾌감에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코테츠는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든 돌파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 것일까? 3화에서 코테츠는 카리나에게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히어로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 마음가짐은 미스터 레전드에서 물러받은거라는건 2화부터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뒤, 코테츠는 “누군가 인정을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한다. 이를 통해 [타이거 앤 버니]는 코테츠의 동력이 인정욕구가 아니라는걸 명백히 한다. 그렇다면 의무일까? 물론 의무도 중요하긴 하지만 단순히 의무라고 단정짓기엔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다. 코테츠는 히어로로써 진심으로 즐기고 있고 그 일에 열심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해답은 3화에서 코테츠가 레전드 상을 보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장면과 16화에서 여러 일들로 상심한 코테츠가 미스터 레전드의 영상을 보는 장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때 레전드를 보는 코테츠의 표정은 천진난만하다. ‘그래 저런 좋은 시절이 있었지…’라는 애잔한 표정이 아니라 아직도 그 시절에 머물러있는듯한 표정이다. ‘그때에 머무른듯한 반짝반짝 빛나는 표정’이야말로, 단순히 의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에 있고 그것이 그만의 히어로의 법칙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코테츠의 천진난만한 표정에 담긴건 아마도 ‘단순하고 순수한, 살아있다는 즐거움’ 아닐까? 미스터 레전드와 코테츠가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자신을 부정하는 코테츠에게 미스터 레전드는 ‘그것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힘이다.’라고 말해준다. 그 말을 들은 코테츠는 웃는다. 그때까지의 코테츠의 태도를 보면 그 웃음은 능력을 얻은 뒤 처음으로 웃었던 순간이였을 것이다. 이 웃음과 웃음에서 파생된 벅차오름이야말로 코테츠의 동력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터 레전드로 대표되는 ‘히어로’는 코테츠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긍심을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을 나눠준 처음으로 느꼈던 긍정과 희망, 충만함이 그를 지금까지 이끌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자신이 느꼈고 지금도 믿고 있는 그 충만한 ‘살아있다는’ 감정과 감각을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점들은 코테츠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이는 똑같은 자기 부정에 시달렸지만, 결국 사회를 거부하고 붕괴시키려고 했던 크림하고 완벽하게 대조된 것이다.

물론 그런 자신감은 작중 내내 항상 솟아오르는게 아니며 오히려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예전에도 몇 번 흔들리기도 했지만 코테츠는 이해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넘어오곤 했다. [타이거 앤 버니]의 2쿨은 코테츠의 자기긍정이 흔들리는데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믿었던 미스터 레전드가 감추고 있던 어두운 면과 능력이 1분이 감퇴해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면서 코테츠도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히어로로써 싸울 수 없는 상황이 실제로 등장하게 되자, 코테츠는 낙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가족을 지킬수 없다면 어떻게 히어로가 될 수 있냐고 ‘가족’을 선택하고 히어로로 은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버나비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걸 몰랐기에 코테츠의 선택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게 쓸쓸히 바에 앉아있던 코테츠는 버나비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알게 된다. 어느새 버나비가 코테츠를 ‘히어로’로써 자신을 동경하고 그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와 관련해서 1쿨 마지막에 등장하는 중요한 대사가 있다. 자신이 코테츠의 임기응변을 믿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거냐고 질책하는 버나비에게 코테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나를 믿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이 대사는 ‘히어로’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 버나비는 코테츠를 믿게 된 것일까? 아마도 버나비 역시 어느 순간 ‘히어로 코테츠’를 통해 자기를 긍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복수만을 생각해오고 그것이 히어로의 동력이 되었던 버나비는 자신의 고독과 상처를 철두철미한 계산, 거만함과 쇼맨십으로 가면을 쓰면서 세상을 대해왔다. 하지만 그 가면 속에는 상처받고 주눅든 아이가 있었다. 9화에서 버나비의 이런 숨겨져있던 아이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부모님이 준 장난감을 부서트리지 않으려고 집중해 받아낸다던지 결국 “부모에게 받은 물건은 소중히 해야죠” 하면서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아 온다. 이때 하는 코테츠의 대사는 의표를 찌른다. “의외로 유치하다?”

그렇다. 버나비의 ‘시뮬레이션’과 ‘선배는 비상식적이에요.’라는 대사들 속에는 어린 아이가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버나비는 유년기의 즐거움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돌아가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가면을 쓴다. 그런데 코테츠는 계속 그의 마음을 두들긴다.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코테츠는 ‘즉물적인 본능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즐거움’을 계속 버나비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게 코테츠는 버나비에게 “다른 사람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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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코테츠는 버나비가 위기에 처해있을때 달려와준다. 버나비가 자신을 믿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을 향해 달려와주는 코테츠의 순수한 모습에 버나비는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을 보답받고 즐거워하게 된다. 처음으로 “과거와 가면에서 벗어나 어디론든지 날아갈 수 있겠다는 자기긍정”을 얻게 된 것이다. 허나 코테츠의 자기긍정이 흔들리는 2쿨에서는 이 관계도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여기서 코테츠와 버나비가 싸우다가 헤어지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버나비가 평소와 달리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걸 볼 수 있다. 버나비는 “평생 과거에 사로잡혀 살 거”라고 말하며 두려워한다. 겨우 과거에서 떠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새로운 진실이 자신을 붙잡는걸 두려워하고 있다. 그 와중에 가족을 선택하겠다는 코테츠의 말은 버나비에게는 히어로가 다시 자신을 버리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버나비를 매버릭이 구워삶는것은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코테츠는 결국 본의아니게 자신이 버나비와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걸 깨닫고 반성한다. 결국 그는 다시 그들에게 달려와 히어로로써 다시 어둠과 맞서 싸운다. 그 어둠은 기억을 조작해 영원한 거짓을 만들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그답게 터무니 없다. 쿠소 슈츠와 과거의 장소로 데려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작전.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심지어 오랜 친구인 벤마저도 한탄할 정도니. 하지만 그것이 또다시 기적을 불러일으켜 불가능을 역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리고 최후의 싸움에서 그는 생사의 도박에 자신을 내던진다. 뒤늦게 능력감퇴를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슬퍼하는 버나비에게 죽어가던 코테츠는 이렇게 말한다. "바보. 알면 안 되지. 숨기고 있는 것인데."

왜 코테츠는 능력이 감퇴하는 걸 버나비에게 숨기고 생사의 도박에 자신을 맡긴 것일까? 죽어가면서 코테츠는 버나비랑 함께 다녔던게 즐거웠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분명하게 히어로로써 싸우는 것이 힘들때도 있지만 즐거운 순간이 있다고 긍정한다. 그렇기에 생사마저 아무래도 좋을 만큼, 한계를 뛰어넘어 반드시 즐거움을 지키고 이기겠다는 즉물적이고 순수한 본능이 코테츠를 뛰어들게 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저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더이상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코테츠는 사람을 지키는 히어로로써 믿음을 생각할 틈새도 없이 H-01를 잡아채는 것으로 순수한 운동을로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히어로로써 다시 기적을 일으킨다. 에너지건을 맞고도 코테츠는 또다시 상식을 뒤집어엎고 벌떡 일어나 어둠을 몰아낸다. 그리고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떤다. 그 웃음 속에서 코테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인다.

그렇기에 히어로가 절망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 절망을 주겠다는 매버릭의 궤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절망을 인위적으로 줘서 히어로가 빛나는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적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히어로가 빛난다고 그는 믿고 있다. 능력이 1분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점점 퇴물로 밀려난다고 해도 그는 절망과 싸울 수 있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마지막엔 자신이 동경했던 미스터 레전드마저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타락해버린 미스터 레전드와 달리 그는 정말로 ‘히어로로써’ 즐거워하고 있고 살아있다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기적을 일으킨다. 코테츠의 매력과 힘은 ‘상식을 뒤엎고 단순하면서도 즐겁게 빛나기’ 때문에 있다.

마지막으로 코테츠는 히어로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버나비도 자신을 찾겠다고 떠난다. 히어로업계에서 떠나 잠시 고민하던 버나비는 부모님 무덤을 보다가 1104+728=10313329라는 숫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것은 부모님 생일 그리고 자신의 생일과 탄생 당시 무게였다. 동시에 버나비는 부모님과 함께 했던 짧았지만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다른 사람을 지키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자기긍정과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자신의 과거에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버나비는 히어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엔 "자기 한계는 자기가 단정짓는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평범해진다 해도 언제든지 즐겁게 히어로로써 싸워나가는 코테츠가 있다.

[타이거 앤 버니]의 코테츠가 매력적인 어른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어린아이의 즐거움을 누구보다도 믿고 신뢰하고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하고 즐겁고,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런 코테츠의 행동양식과 거기서 파생되는 액션이야말로 [타이거 앤 버니]가 제공하는 장르적인 쾌감이기도 하다.


2. [핑퐁]: 순수한 가속과 비행으로 자유로워지는 영혼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유아사 마사아키의 [핑퐁]에 등장하는 히어로는 분명 [타이거 앤 버니]의 히어로랑 다르다. 궁극적으로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장르에 속해있기에 히어로의 위치는 상이할 수 밖에 없다. [핑퐁]은 스포츠 만화이기 때문에 정의나 도덕의 문제로 넘어가지 않고, 재능과 노력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렇기에 핑퐁의 히어로는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는 아니며 오히려 은유에 가깝다. 또한 이미 성장이 끝난 [타이거 앤 버니]와 달리 [핑퐁]의 등장인물들은 아직 젊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개념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 두 작품의 히어로가 원동력이 의외로 닮아있으며, 그 원동력이 주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과정이 비슷하다는게 재미있다. 그렇기 때문에 [핑퐁]은 장르적인 도구들에 가려졌던 [타이거 앤 버니]의 ‘히어로’보다 ‘히어로’를 구성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들을 더욱 순수한 밀도로 보여준다.

차이점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구도에서 악을 물리치는데에서 ‘순수한 운동감’이 드러나는 [타이거 앤 버니]와 달리 [핑퐁]은 캐릭터간의 1대 1 대결 구도에서 ‘순수한 운동감’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두번째로는 작품을 지배하는 ‘순수한 운동감’이 어디서 비롯되는가가 있다. [타이거 앤 버니]는 히어로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액션의 동선 (“굿 럭 모드”)에서 구체화된다면, [핑퐁]이 주는 순수한 운동감은 가벼운 탁구공의 ‘비행’, 그걸 쳐내는 선수들의 ‘가속’으로 구체화된다. 특히 ‘가속’과 ‘비행’이야말로 ‘타격’과 ‘기지’로 대표되는 [타이거 앤 버니]의 액션의 쾌감과 차별화되는 [핑퐁]만의 액션의 쾌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타이거 앤 버니]에도 날아다니는 스카이 하이가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 순수한 운동감은 ‘정의와 도덕을 수호하는 자로써 히어로’라는 개념에 얽매여 있지 않기에 어떤 깨달음의 경지로 묘사된다.

또한 [핑퐁]은 스포츠 만화답게 실력이 캐릭터를 분류하고 계급을 정하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잡고 있다. 그냥 평범하게 재미로 탁구를 치는 사람들, 노력으로 올라온 사람, 원래 재능이 타고 났던 사람, 재능을 숨겨왔다가 드러냈던 사람 등등… 그리고 이 실력은 대결의 승패로 캐릭터의 희비와 행로가 엇갈리기도 한다. 페코가 과신하고 까부는 것도 그 실력이 만들어내는 작중 계급에서 상위 계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핑퐁]과 [타이거 앤 버니]의 큰 차이를 또 하나를 꼽으라면 이 부분이 있다. [타이거 앤 버니]의 코테츠는 상위 계급은 커녕 하위 계급이며, 실력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활약이 얼마나 노출되느냐가 중요한 현실적인 척도로 자리잡는다. 

햐지만 핑퐁의 세계에서 대결의 승패로’만’ 판가름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실력으로만 보자면 콩웬거 (차이나), 스마일이나 카자마 류이치 (드래곤), 페코 모두 출중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스마일이나 차이나, 드래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페코만의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히어로’로써 자신감과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핑퐁]의 히어로는 다시 [타이거 앤 버니]가 보여줬던 히어로에 가까워진다.

당연하겠지만 [핑퐁]의 히어로는 능글능글한 호시노 유타카 (페코)다. 페코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위기일 땐 날 불러! 마음 속으로 세 번 불러!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그럼 내가 달려올께. 핑퐁 별에서 달려올께!”

원작에서나, 애니에서나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 대사를 통해 [핑퐁]은 페코를 히어로로 각인시킨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페코도 코테츠만큼이나 철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탁구 훈련이나 학교 시험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고 유유자적 놀러다니거나 내기 탁구를 치고 웃어른에게도 반말을 쓰고 과자를 처묵처묵한다. 때론 ‘나는 탁구로 세계에서 짱 먹을꺼야. 그러면 이 탁구장은 유명해지겠지.’라던가 ‘노력은 재능없는 녀석들이나 하는거야’ 같은 유치한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다만 페코의 경우 나이차 때문인지 코테츠와 달리 훨씬 유치하고 싸가지 없으며 (…)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 곁들어져 있긴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페코를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스마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가 철없긴 하지만 누구보다도 남을 생각하는 아이라는게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화에서 페코는 스마일에게 “너랑 같이 있으면 즐거워”라고 말하며 ‘코이즈미 선생님이 널 생각해서 그런 말 하는거야’라고 진지한 충고를 던진다. 장난스러운 태도지만, 이 대사에서 우리는 페코가 스마일을 진심으로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걸 드러내고 있다.

페코가 추락하는 것은 그 ‘히어로’로써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페코 잘못이 크다. 페코를 좌절시킨 두 대결을 자세히 보면 페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차이나와의 대결은, 자신의 실력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위에는 더 위가 있다는 걸 깨닫게 했고 아쿠마와의 대결은 노력이 없는 재능은 썩기 쉽다는걸 드러냈다. 코테츠의 추락처럼 페코의 추락은 히어로를 기반하고 있는 능력에 대한 불신과 의혹에서 찾아온다. 그리고 끝내는 그 능력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사표 쓰고 낙향 시도=라켓 폐기)

그리고 히어로 각성의 계기 역시 [타이거 앤 버니]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탁구를 포기하려고 했던 페코는 ‘너는 나의 히어로였다’며 탁구를 계속하라는 충고하는 아쿠마와 타무라 탁구장에 걸린 사진을 보면서 알게 된다. “아쿠마가 왜 자신을 질투하면서 그런 충고를 해줬는가”하고 “스마일이 정말로 웃었던 순간”을. 그리고 그 둘을 이끌었던게 자신이였다는 걸 깨달으면서 페코는 다시 탁구를 치기로 한다. 스마일은 “히어로 페코”를 통해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고,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써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스마일은 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려왔다. 왜냐하면 페코가 너무 실력에 자만한 나머지 히어로로써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페코는 “그 녀석이 웃지 않는건 내 탁구가 째째해져서야.”라고 자조한다. 버나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자조한 코테츠처럼, 페코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에 취해 스마일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한다. 그렇기에 페코는 자신을 평생토록 부르고 있는 스마일에게 달려가고자 한다.

페코가 달려가려고 하는 스마일이야말로 “히어로 페코”를 통해 사람이 변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일 것이다. 히어로의 극단에 있는 스마일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인데, 흥미롭게도 스마일의 과거는 코테츠나 버나비의 어린시절처럼 자기 부정으로 차 있다. 부모의 이혼과 바쁜 어머니에게서 많은 정을 얻지 못했던 그는 감정을 숨기는 것으로 세상을 대처해나간다. 그렇게 살아가던 스마일은 페코를 만나게 된다. 페코는 자기를 긍정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아는 아이며, 친구를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페코를 통해 탁구를 배우면서 스마일은 ‘웃게’ 된다. 탁구를 하면서 ‘웃어서’ 스마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윽고 스마일에게 탁구는 본능적인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페코의 나태함 때문에 탁구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자 스마일은 다시 혼자가 되고 아무런 열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매사를 방관하는 식으로 세상에 대응하려고 한다. (1화에서 “감정을 표현하는데 지쳤거든요.”)

2화에서 그가 탁구에 각성하는 장면을 보자. 문을 닫고 ‘히어로 등장’을 외치는 스마일에게 로봇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때 로봇이 하는 말이 “히어로는 오지 않아.”다. 히어로의 부정. 이 부정 뒤에 “너는 기계다”라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 순간 스마일의 팔은 로봇의 눈과 팔처럼 변이해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준다. 이 변이야말로 스마일이 세상과 맞서는 새로운 방책에 눈을 떴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페코가 더 이상 그에게 오질 않자, 스마일은 방관자에서 벗어나 철갑옷과 무기를 두르고 세상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 뒤 유별나게 스마일의 태도가 차가워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도 그런 변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버나비가 가면을 써 세상을 대한다면 스마일은 세상에게서 한발짝 멀어짐으로써 세상과 대한다.

그렇지만 스마일은 끝내 드래곤처럼 냉정해지지 못한다. 아쿠마가 퇴출 당한 뒤, 스마일은 이적을 권유하는 카이오 학원를 거부한다. 그리고 죠에게 말한다. “저도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결국 이 대사를 통해 스마일은 자신이 로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6화에서 아이들이 “로봇은 폭주했지만 사실은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라는 대사는 그런 스마일의 철갑 아래에 있는 꿈틀거리는 감정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히어로를 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페코는 스마일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순수할정도로 ‘즐거움’과 ‘자기긍정’의 감정이 인물들을 변화하게 하는 촉매가 된다는 점에서 [핑퐁]은 [타이거 앤 버니]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두번째 인터하이에서 페코와 드래곤의 경기를 보자. 여기서 페코는 무릎 부상으로 움직이는 것에 제약을 받게 된다. 수세에 몰리며 드래곤에게 ‘히어로’로써 자격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던 페코에게 스마일은 말한다. “페코라면 즐겁게 칠 수 있어. 놀 상대가 강할 수록 높이 날 수 있다고.” 그리고 페코는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있던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킨다. 이때 차이나는 이 경기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탁구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는 느낌이야."

페코의 이런 단순한 즐거움은 두 인물을 변화하게 한다. 먼저 드래곤. 그의 세계는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제왕적인 카자마 가에서 자라난 그는 새처럼 날고 싶었지만 날 수 없고 좌절하다 죽은 아버지를 보고 자유롭게 날고 즐기는 즐거움과 해방의 감정이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믿고, 오로지 ‘자신의 힘’만을 믿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드래곤의 탁구는 외롭고 고독하다. 스마일의 고독이 예민한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라면 드래곤의 고독은 최정상으로 올라가야지만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받을 수 있다는 불안함과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가혹하게 페코를 밀어붙인다. “히어로는 사람을 구해야 되는것 아니냐”고. 하지만 이는 히어로를 증오해서가 아니다. 애니판에서만 추가된 유리에의 “류짱은 누구보다도 히어로를 기다려왔으니깐.”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 머무를것 같은 두려움 말이다.

그 대답에 응하듯이 자신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게 된 페코는 마음껏 가속하면서 ‘히어로’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러버나, 무릎 부상, 신발 같은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좋아지고 날아다닐수 있다는 순수한 운동감이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신기하게도 그 ‘히어로’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 드래곤과는 달리 매우 천진난만하다는 것이다. “탁구라는 건 엄청나게 재미있는거라고!” 그 천진난만함은 드래곤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탁구 때문에 즐거워했던 유년 시절을 깨우고 마침내 산을 타고 고통스럽게 가던 드래곤조차 날게 한다. 드래곤은 이렇게 말한다. “전신의 세포가 미칠듯이 좋아하고 있어. 가속하라고 명령하고 있어. 가속해. 가속해.”

이 신체마저 떨리게 하는 가속이야말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운동감의 극한이다. 그리고 가속은 비행에 도달하고자 하는 움직임 중 하나라는걸 생각해보면 . 그 가속 끝에서 드래곤은 “히어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여긴 정말 좋구나.”라고 말한다. 이제 이 순간부터는 승패조차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 가속 자체가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궤뚫는 기제가 된다. 더 이상 날아오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도 드래곤은 더이상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아올랐다는 것과 그 기회를 제공해준 히어로를 기뻐한다. 코테츠가 번잡한것들에서 해방되어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하고 히어로로써 가치를 통해 버나비와 동료들을 자유롭게 해준 것처럼, 페코도 드래곤에게 자유로워질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날아오르게 한다. 그리고 페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한다고 드래곤.”

이 사랑은 아가페적인 것이다. 생의 즐거움을 함께 나눠가지는 것. 그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자는 것. 그렇기에 페코는 코테츠처럼 자신의 아픔과 한계을 무릅쓰고, 아니 그것을 초월하고 가속한다. 그리고 드래곤에게 사랑을 준 뒤 날아올라 스마일을 향해 간다. 히어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스마일에게. 이 순수할 정도로 긍정적인 에너지. 즐거움의 감정. 그것이 발생시키는 엄청난 속도와 비행. 이 모든 것이 페코한테서 흘러넘친다. 그 와중에 스마일은 페코의 공을 받으려고 하다가 상처 입는다.

이때 스마일을 둘러싸고 있는 철갑옷은 깨져 나가고, 핏줄이 흐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참고로 이 로봇 연출은 유아사 마사아키의 오리지널이다. 매우 [케모노즈메]스럽다고 할까.) 무채색의 화면 속에서 스마일은 붉게 빛나는 자신의 피의 맛을 느끼면서 “밖의 쇠를 부술 수 있는 안의 쇠,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에 원래부터 있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페코와 스마일은 상처와 아픔마저도 아무렇지 않다. 그리고 최초의 즐거움으로 돌아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마지막에 스마일이 흘리는 눈물은 그 살아있음에 대한 희열과 그걸 깨우쳐 준 히어로 페코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리고 스마일이 숨어있던 창고에 문을 열고 손을 내밀는 어린 페코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 희열의 순간이 끝나고 난 뒤에도 등장 인물들은 히어로가 준 ‘살아있음을 느낄수 있는 힘’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탁구 선수를 그만두었지만 스마일은 이제 페코의 활약상을 보며 스스로 웃고, 뭘 할지 몰라서 꺼려했던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모두들 자기 길을 달려가고 한때 길을 잃고 헤매던 아쿠마와 에가미도 즐겁게 살아간다. 그리고 슬럼프에 빠져 이대로 끝날까 두려워하는 드래곤에게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선수 저 의외로 좋아해요.”

그렇다. 코테츠가 능력 1분이라는 한계 때문에 점점 평범해진다 해도, 버나비는 그를 내치지 않는다. 왜냐면 즐거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즐거움을 알게 된 스마일은 재능도, 노력도 결국 지금을 즐겁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걸 알게 된다. 평범해진다고 해도, 지금의 즐거움을 느낄수 있다면 괜찮노라고 스마일은 드래곤에게 말한다. 그리고 스마일은 페코가 버렸던 라켓을 발견해 바다를 향해 던진다. 한때 꿈을 포기할뻔했지만 이젠 훨훨 날아가는 페코를 스마일은 응원한다.

3. 결말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는 글에서 지성을 시각으로 묘사하면서 “언제나 재구성하려 하며,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기에 창조를 배척한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베르그송은 지성이 “무생물이나 물체를 다루는데는 능하지만 생물을 다를때는 곤란을 겪는다”고 보았다. 반대로 본능에 대해서는 촉각으로 묘사하며 “생명의 형식 그 자체를 본떠 만들어진 것”이며 “유기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본능은 생명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가르쳐줄수 있는 존재”라 보았다. 이런 베르그송의 지성과 본능에 대한 통찰이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히어로 알렉시스 조르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조르바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들은 ‘펜대 운전사’인 주인공을 해방시킨다.

그렇게 본다면 ‘히어로’라는 것은 결국에 본능이라는 생명의 형식이 가지고 있는 가치, 나아가 본능이 가장 1차적으로 느끼는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존재 아닐까? 코테츠가 ‘히어로’의 가치에 집착하는 것도, 버나비와 그의 동료들이 그가 추구하는 히어로상에 매료를 느끼는 것도, 스마일이 그토록 애타게 히어로를 기다렸던 이유도, 페코가 아픔을 뛰어넘고 히어로가 되겠다고 각오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고 달려올 수 있는, 살아있다라는 은밀하고도 위대한 즐거움. 이것이야말로 ‘히어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쾌락 아닐까?

돌아온 히어로를 반기면서 스마일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이야말로 이 글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히어로는 상식을 뒤엎고, 어둠을 몰아낸다. 무엇보다 단순하고 밝고 즐겁고 빛나고 있어.”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쾌락을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로부터 격리된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정신에 대하여” 중.

P.S.

[킬라킬]에서도 마코와 류코 역시 그런 히어로와 그를 동경하는 평범한 짝패라는 구성을 이루고 있지만 마코는 위에 언급한 안경잽이들과 다르게 긍정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일치하진 않는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키려는 류코를 향해 ‘달려가는’ 마코의 즐거운 표정은 분명 히어로를 동경하는 자가 달려가면서 느끼는 순수한 운동감의 쾌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 류코가 센케츠를 완벽하게 입고 펄펄 날아다니며 누이를 공격하는 부분에서 센케츠가 기분이 최고라고 하는데 이것도 본문과 연계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에가미 우는 톤이 딱 파이어 엠블렘이여서 뿜었다. 참고로 성우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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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라이징 [劇場版 TIGER & BUNNY -The Rising-] (2014)

2011/11/13 - [Real Motion/리뷰] - 타이거 앤 버니 [TIGER & BUNNY] (2011)

2013/03/11 - [Real Motion/리뷰] - 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비기닝 [劇場版 TIGER & BUNNY -The Beginning-] (2012)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장판 타이거 앤 버니 라이징]은 TVA의 편집 추가판이여서 그렇게까지 독립되어 있지 않았던 비기닝과 달리 TVA에서 독립되어 있다. 물론 이 세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TVA 선행감상이 필요하긴 하지만, 적어도 비기닝을 볼때와 달리 극이 뚝 끊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라이징은 모든 복선과 캐릭터들이 자기 완결적인 이야기를 띄고 있는 한 편이다. 좀 더 극장판의 포맷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라이징을 보기 전에 TVA [타이거 앤 버니]의 끝이 일견 안정적인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안한 상태로 끝났다는 걸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라이징의 시작은 그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코테츠가 TVA 마지막에 결론지어진 자기 상황에서 만족하면서 여전히 히어로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균열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없으며 정체되어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추동력이 사라져가고 있다. 코테츠의 낙관은 TV판과 달리 무거운 현실을 변화할만한 힘을 잃어버린 상태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넉살좋게 후배들과 이야기하는 코테츠의 대사에서는 차라리 체념의 무게마저 느껴진다. 거기에 아직 미래가 창창한 버나비가 거기에 얽매여 있다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 불안함은 곧 새로운 사장인 마크 슈나이더가 데리고 온 라이언 골드스미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구체화된다. 재미있는게 이 라이언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묘사가 코테츠랑 대치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대치되는 부분이라면 중력을 조종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라이언이 처음으로 출동해 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은 그래서 상당히 흥미롭다. 위기의 상황에서 라이언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능력을 쓰지만 반대로 다른 히어로들은 그 능력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재미있게도 [라이징]의 흑막인 비르갈 역시 능력 면에서 라이언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비르갈의 능력은 고철들을 모아 로봇을 만드는 것인데 모양새가 이 모양새가 영락없이 고철을 비르갈을 감싸는 형태다. 그 점에서 라이언과 비르갈은 동전의 양면처럼 [라이징]에 드러나는 구속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라이언이 가지고 있는 구속의 이미지는 히어로들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정지시켜 히어로들에게 해결할 틈을 만들어준다면 (발산), 비르갈의 구속의 이미지는 악당의 악행과 그걸 묵과한 사회에 대한 분노이자 상처받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다. (수렴)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구속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라이언과 비르갈은 반동인물이긴 하지만 "악당"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버나비는 타이밍 좋게 전입해온 라이언을 의심하지만, 곧 사실이 아니라는게 밝혀진다. 라이언은 재수없이 굴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지만 그 나름대로 히어로로써 의무에 충실한 캐릭터다. 이는 사건의 흑막인 비르갈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그는 분명 방법론이 잘못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사기를 당해 피해를 입고 복수하려는 자라는 점에서 진짜 악당이라 보기엔 미묘하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한다기 보다는 복수를 하다가 악한 행위마저 손댔다는게 정확할 것이다. 

차라리 [라이징]이 지목하는 악당은 새로 부임한 사장인 마크다. 그의 모습은 악덕 사장으로 하지만 마크는 교묘하게 그 악을 행함으로써 주인공들하고는 표면적으로는 대립하지 않는다. 차라리 애니 끝에 가면 구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된다. 이 구속의 이미지를 구사하는 반동인물과 악당과의 구별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온도차 때문에 [라이징]은 생각보다 복잡한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주인공들과 대립하는 반동인물은 악을 행한다고 보기에 미묘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주인공과 대립하지 않는다. 즉 마크는 앨버트나 제이크하고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악이며, 주인공이 처벌할 수 없는 존재다.

다시 라이언의 능력이 발동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라이언이 만들어내는 구속을 끊고 유일하게 행동하는 캐릭터는 버나비라는게 흥미롭다. 주지하다시피 버나비의 능력은 코테츠랑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에서 극적인 쾌감을 만들어내는 버나비의 모습은 TVA에서 상황을 돌파해 극적인 쾌감을 만들어내는 코테츠의 모습하고 겹쳐보인다. TVA의 버나비는 코테츠와의 관계를 통해 히어로로써 성장하는 캐릭터였다는 걸 생각하면 속박 속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운동의 쾌감은 그가 TVA동안 성장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코테츠를 닮아가는걸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라이징]의 버나비는 라이언에게 '코테츠처럼 시시한 소리 한다고.'라고 지적받는다.

그렇기에 속박을 뚫고 나가는 버나비와 이를 텔레비전에 투영된 영상으로 지켜보는 코테츠를 보여주는 장면은 묘한 댓구를 이루고 있다. 히어로의 미덕을 실제로 행하는 자와 그 실제를 투영된 이미지로 지켜보는 자. 코테츠는 버나비의 활약을 보면서 자신에게는 더이상 그런 힘이 없다는 걸 직감하게 된다. 직후 코테츠가 2부 리그의 폐지로 실업자가 되는 것도 그런 직감에 힘을 더해준다. 하지만 내심 그동안 추구해왔던 히어로로써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어정어정거리게 된다. 어떤 목적지가 있는게 아니라 손님을 찾아 모시고 다른 손님을 찾아가는 택시 기사라는 직업도 묘하게 그런 코테츠의 어정거리는 상황과 어울린다. 이 코테츠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어정어정거리는 부분이야말로 [라이징]의 백미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타이거 앤 버니]가 추구해왔던 커머셜 히어로로써 애환이 가장 심도있게 그려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황하던 코테츠는 카리나와 카에데를 통해 두가지를 깨우친다. 버나비가 돈을 그렇게 모았던게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는 것과 아빠가 진정으로 하는 걸 하는게 보기 좋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둔감해진 낙관을 깨트릴 히어로로써 감각을 되찾게 된다. 코테츠가 각성한 뒤 버나비를 찾아가다가 라이언과 함께 출동하는 장면을 보고 돌아서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버나비는 코테츠의 어시스트없이도 히어로로써 자신을 믿고 나가고 있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코테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라이징]은 자신이 전파했던 신념을 한떄 신념을 믿지 않았던 (하지만 이젠 열심히 추종하게 된) 자에게 역으로 감화받는 기묘한 형태의 구원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라이징]의 결말은 라이언이 스스로 파트너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코테츠가 버나비의 파트너로 복귀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라이언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의 퇴장은 아쉽긴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구속의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주인공들과 대립되는 존재였다는걸 생각해보면 그가 코테츠에게 파트너 자리를 넘겨주고 퇴장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였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이렇게 해서 TVA에서 이뤄졌던 영웅의 귀환이 다시 한 번 [라이징]에서 변주된다. 

그런데 귀환를 축하하는 동료들 사이에 있는 코테츠의 표정이 밝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버나비에게 묻는다. 이래도 괜찮은거냐고. 코테츠의 밝지 않은 표정과 물음이야말로 [라이징]의 결말이 주는 감흥을 풍성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TVA에서 이어졌던 우로보로스와 유리 판사의 비뚤어진 정의관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코테츠의 능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이징]에 보이는 일견 자기완결적으로 보이는 구원극은 언제든지 무너질수 있다는 암시를 남긴다. 

이 암시가 어른의 사정으로 나올 2기에 대한 예고든, 아니면 코테츠의 히어로로써 완성되는 과정의 일부로 보든 상당히 그럴싸하다. [라이징]은 그렇기에 다시 일어서는데Rising는 성공했지만 그 일어섬이 서사와 캐릭터의 완성이 아니라는 묘한 상태에서 극을 끝맺는다는 점에서 묘한 감흥을 안겨주는 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감흥이 극장판이라는 포맷에 부합하기 위해 들인 예산과 그로 비롯된 박력있는 액션과 자칫하면 뻣뻣해지기 쉬웠을 드라마를 ([라이징]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물게 성 소수자 문제를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는 애니기도 하다.) 능숙하게 다루는 각본에서 비롯됬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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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콩그레스 [The Congrass] (2013)



더 콩그레스

The Congress 
8
감독
아리 폴먼
출연
로빈 라이트, 하비 키이텔, 존 햄, 폴 지아마티, 코디 스미스 맥피
정보
애니메이션, SF | 이스라엘, 독일, 폴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벨기에 | 120 분 | -


아리 풀먼의 [더 콩그레스]는 풀먼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혼돈스러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던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와 달리 혼돈스러운 미래로 향하는 애니다. 아니 애니라 하기에도 미묘한게, 영화의 50% 정도는 실사로 구성되어 있다. [솔라리스]로 유명한 스타니스와프 렘의 [미래학적 회의]를 느슨하게 각색한 이 영화는 원작과 다르게 (원작이 번역되지 않아서 뭐라 말할순 없지만 적어도 욘 티키라는 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며 배경도 코스타리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끌어오고 있다. 

그 결과 영화는 '환각'과 '환영'을 제외하고는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 로빈 라이트라는 헐리웃 여배우가 있다. 그렇다. 그 로빈 라이트다. 하지만 영화 속 로빈 라이트는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이는 나중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한때 잘 나가는 배우였지만 이젠 하락세에 접어든 로빈 라이트는 파라마운트를 패러디한 미라마운트에서 자신의 이미지와 연기를 디지털화하자는 계약을 제안받는다. 대신 이 계약을 하면 이후로 평생동안 연기를 못한다는 조건이 달리고 로빈은 고민 끝에 수락한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나이를 먹은 로빈은 미라마운트에서 진행하는 미래학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구역'으로 들어간다.

물론 영화 속 로빈 라이트는 실제 로빈 라이트하고는 다르다. 이혼 경력에 딸과 아들이 있는건 맞지만 딸과 아들 이름도 모두 다르고 (배우도 요새 아역으로 인지도를 얻고 있는 코디 스밋 맥피가 맡았다.) 결정적으로 [포레스트 검프] (와 그를 패러디한 영화]가 최고의 절정기였던건 맞지만 영화 속 로빈과 달리 인기가 사그라든 이후로도 주조연도 간간히 맡았고 좋은 연기력으로 괜찮은 커리어를 유지해왔다. 얼굴도 품위있게 늙어가는 편에 속하고. 심지어 사그라든 지금도 한국에서도 포스터에 이름을 걸만한 배우 정도는 된다. 슬프게도 로빈 라이트보다도 더 커리어가 쪼그라든 헐리웃 배우도 많다. 멕 라이언이라던가.

하지만 영화 속 로빈이 실제 로빈를 반영하고 있다라는 얘기가 틀린 것도 아니다. 모션 캡처를 두번이나 맡기도 했고 무엇보다 2010년대 기준으로는 핫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헐리웃의 화제에서는 벗어난 배우라는건 확실하다. 애시당초 여배우들은 나이와 소모 속도가 빠르기도 했고. 물론 외모와 달리 딱히 대작이나 예쁜 역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영화에 나오며 연기력 항상을 도모한 실제 로빈 라이트 커리어 선택도 대중에서 멀어지게 한 감도 있다. 이런 점에서 로빈 라이트의 캐스팅은 제법 그럴싸하다.

[더 콩그레스]가 펼치는 디스토피아은 벤야민적인 디스토피아라 할 만하다. 발터 벤야민은 영화나 사진의 복제가 어떻게 예술을 변화시켰는지를 최초로 밝혀낸 학자다. 그 점에서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를 첨단기술으로 복제해 지적 재산권으로 다룬다는 영화의 설정은 분명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경고했던 거짓 아우라-그 예술작품과 동일한 공간과 시간대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무언가'-인 스타 아우라와 연관 관계가 있다.

즉 [더 콩그레스]는 거짓 아우라인 스타 아우라가 만약 상품화되고 나아가 그 아우라로 자기 정체성을 변하게 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진화 가능성과 디지털화를 언급하면서 시작한 이 변화는 작중 영화사는 그 스타 아우라를 가지고 애니메이션 구역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고 무한한 문화상품을 찍어내기 시작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사람들이 거짓 아우라 그 자체로 변할 수 있게하는 약까지 개발해 팔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 거짓 아우라에 매혹된 세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게 제법 매혹적이다. 실사 세계 어딘가에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그곳은 환각의 제의를 거쳐 들어갈 수 있으며 실사는 일종의 거짓 아우라로 등장한다. 모션 캡처 애니메이터들과 감독들은 하나의 공장처럼 운영된다. 그리고 그 세계를 그려내는 애니메이션은 [렌과 스팀피]나 [비비스와 버트헤드] 같은 MTV 애니메이션 혹은 1960년대 로버트 크럼이나 랄프 바크시나 미국 사이키델릭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게 하는 현란한 매력이 있다. 

동시에 이 애니메이션은 거짓 아우라에 취해 살아가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하고 있다. 이런 대기업이 생산해 파는 거짓 아우라와 정체성에 매료된 로빈의 딸 사라는 더이상 로빈을 알아보지 못하며, 20년동안 로빈 라이트 부서에서 애니메이터으로 일해온 딜런은 외려 '살아있는' 진짜 로빈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영화 후반부엔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처럼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는 초췌해진 실사 파트는 직전 애니메이션 파트의 현란함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거짓 아우라로 피폐해진 인간 현실을 강렬한 고발을 이뤄내고 있다.

하지만 [더 콩그레스]가 그 매혹과 비판을 온전히 이뤄냈는지는 모르겠다. 먼저 헐리웃을 다루는 실사 부분이 다소 도식적이고 안이하다는 몇몇 평자의 비판은 타당하다. 로빈은 분명 있을법한 헐리웃 배우들의 현실이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 뻔하다. 마지막 실사 연기를 하며 회한에 찬 로빈이나 연날리기와 비행을 통한 은유은 매력적이였지만 전반적으로 덜 도식적인 방식이 있었을건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극의 주체가 되는 로빈도 냉동 전후론 다소 맥없이 설명을 들으며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있다. 주제를 담당하고 있던 딜런 캐릭터도 슬그머니 퇴장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배우 이미지 장사에서 시작한 벤야민적인 디스토피아가 카멜레온처럼 휙휙 바뀌는 자기 정체성이 모호한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다소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말은 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중간 과정이 휙하고 빠진 것 같다. 애니메이션 구역이 어떻게 실사 구역(현실)로 퍼져 나갔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필요했다.

그래도 마지막 결말은 제법 감동적이고 성숙해서 좋았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아들조차 거짓 아우라에 넘어가버린 로빈은 자신도 거짓 아우라의 세계로 다시 넘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로빈의 선택은 바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로빈은 거짓 아우라를 역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애런의 생을 경험한 로빈은 마침내 아들과 마주하게 된다.  

[더 콩그레스]가 [바시르와 왈츠]를 뛰어넘을 역대급 걸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엔 결함들이 많고 헛발질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고 욕심이 과하긴 했지만 강렬한 비주얼과 야심은 충분히 인정할만하며 결말의 감흥은 제법 좋았다고 생각한다. 천생 호불호가 갈릴 컬트로 될 운명을 타고난 애니메이션이지만 아리 풀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P.S.1 퍼블릭 이미지의 'That's Not Love Song'과 OMD의 'Enola Gay'를 멋지게 써먹었던 [바시르와 왈츠를] 감독답게 음악의 질이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맥스 리히터의 사운드트랙도 좋다.
P.S.2 장안의 화제(?)인 돌비 ATMOS를 적용한 작품이라고 한다. 프로듀서 왈. 공짜로 믹싱하게 해줬어요라고....
P.S.3. 중간에 작화를 갈아엎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런 느낌이였다고... http://www.animationmagazine.net/wordpress/wp-content/uploads/the-congress-post-3.jpg
P.S.4.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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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앤 버니 극장판 한국 개봉

인데.. 



폰트하고 태그라인 저게 뭐야!!!!!!!!!


하지만 저는 여자들 사이에서 보겠죠 그런겁니다....

2월 28일 개봉이라고 하는군요. 그 전에 더 헌트, 문라이즈 킹덤, 비스트를 봐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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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앤 버니 [TIGER & BUNNY] (2011)


일본, 2011

선라이즈, 반다이 비주얼, 마이니치 방송. 총 25화x25분. 화면비 1.78:1

감독: 사토 케이이치さとうけいいち
시리즈 구성/각본: 니시다 마사후미西田征史
캐릭터 원안/히어로 디자인: 카츠라 마사카즈桂正和 
캐릭터 디자인: 하야마 켄지羽山賢二/야마다 마사키山田正樹 
메카 디자인: 안도 켄지安藤賢司 
음향감독: 키무라 에리코木村絵理子 
음악: 이케 요시히로池頼広 

캐스트: 히라타 히로아키平田広明 (와일드 타이거 / 카부라기 T. 코테츠) 모리타 마사카즈 森田成一 (버나비 브룩스 Jr.) , 코토부키 미나코寿美菜子 (블루 로즈 / 카리나 라일), 오카모토 노부히코岡本信彦 (오리가미 사이클론 / 이반 카레린), 쿠스노키 타이텐楠大典 (록 바이슨 / 안토니오 로페즈), 이세 마리야伊瀬茉莉也 (드래곤 키드 / 황 파오링), 이노우에 고우井上剛 (스카이 하이/ 키스 굿맨), 츠다 켄지로津田健次郎 (파이어 엠블렘 / 네이선 시모어) 카이다 유코甲斐田裕子 (아니에스 쥬베르), 후쿠다 노부아키福田信昭 (앨버트 매버릭), 히다카 리나日高里菜 (카부라기 카에데)


[TIGER & BUNNY]는 요새 '보기 드문' 일본제 아니메이긴 하지만, 장르 전체 역사에서 보자면 흔해 빠진 축에 속합니다. 당장 가까운데서 찾아보자면 커머셜/셀레브레티 히어로라는 같은 소재를 공유하고 있는 [초인동맹에 어서오세요!] 같은 한국제 라이트 노벨도 있으며, 멀리 가면 마블이나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화두화시킨 앨런 무어의 [왓치맨], 2000년대 들어 헐리우드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현실의 무게에 고뇌하는 히어로물’-2000년대 들어서 진행된 실사판 [스파이더맨], [배트맨] 시리즈, 이보다 조금 말랑한 느낌의 [인크레더블] (개인적으로 초인동맹보다는 이쪽하고 훨씬 가깝다고 생각합니다.)의 영역에 속해 있는 애니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가능성은 파지도 않는 작품들이 꽤 있는데 [TIGER & BUNNY]는 그런 몰상식한 작품은 아닙니다.

[TIGER & BUNNY]가 이 장르를 이용하는 방식은 정석적이지만 상당히 영리합니다. 이야기 자체는 장르 원형을 따르긴 하지만, 사토 케이이치 감독과 각본가 니시다 마사후미가 그려내는 주인공 히어로들은 평범한 회사원들입니다. 다소 셀러브레티 면모가 있는 회사원들이죠. 이 부분에서 타이거 앤 버니는 [오피스]나 [IT 크라우드] 같은 풍자적인 직장 코메디 장르를 끌어옵니다.

애니가 주로 코메디로 삼는 것은 커머셜 히어로와 거기에 관계된 업계인들의 캐리커처, 코테츠로 대표되는 그 나이 또래 아저씨들의 너절한 태도 (거기엔 오지랖과 다소간의 허세도 포함됩니다.), 버나비로 대표되는 뻣뻣할정도로 ‘히어로물 주인공’ 특유의 진지한 태도입니다. 이런 전략은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각자의 장르에선 익숙한 이야기들이 다른 장르의 화법을 통하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화학 작용이 일어나게 된겁니다. [인크레더블] 수준의 풍성한 텍스트까진 아니지만 히어로 장르에 대한 흥미로운 주석이라 할 부분도 존재합니다. 애초에 사토 케이이치 감독도 특촬물/히어로 덕후인데다, [시티 헌터], [빅오], [얏타맨], [마징카이저], [슈퍼 레인저] 시리즈 같은 특촬물이나 액션 장르 애니들을 만든 사람이니깐요. 적임자라 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토 케이이치와 각본가 니시다 마사후미가 이를 위해 동원하는 다양한 소품들과 슬랩스틱 코메디들은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특히 2쿨 후반에 등장하는 코테츠의 커피 장면은 유머가 풍부한데다 서스펜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토 케이이치의 전작들이 한없이 무겁고 시리어스했던 걸 생각해보면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검은색 덕후를 가지고 개그를 치던 [빅오]가 있긴 하지만 직접 감독한 것은 아니니 제외합니다.)

하지만 타이거 앤 버니의 유머는 풍자적이긴 하지만 블랙 유머이거나 매섭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패기많고 날카로운 20대를 보내고 사회에 안착한 성숙한 30-40대 장르 예술가가 자신과 자신의 환경들을 관찰하고 훗훗하며 웃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애니는 코테츠처럼 허당이지만 성실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일과 가치관에 임하는 로맨틱한 이상주의자들에게 동정적인 편입니다. 이 애니의 악당들은 그 이상주의자들을 비웃는 사람들이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니시다 씨가 캐릭터 메이킹과 그것을 굴리는 과정, 써내려가는 대사가 상당히 능숙합니다. 우선 단순한 섹시 어필 캐릭터로 끝났을 법한 블루 로즈가 자신의 만들어진 캐릭터에 불만을 표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상사와 계약 문제로 다투거나 찝쩍대는 오카마 캐릭터로 끝났을법한 파이어 엠블렘도 코믹 릴리프가 다소 과도하긴 하지만 꽤 유능한 경영인이자 조력자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실한 어른으로 묘사됩니다. 아니에스도 단순한 훼방놓는 여성 상사 캐릭터를 넘어서 '자기 관리에 신경쓰는 프로 방송인'의 모습을 적지만 알차게 보여주고 있고요.
 


주인공 코테츠도 상당히 입체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단순히 오지랖이 넓고 고지식한 캐릭터 에서 머무르지 않고 오지랖이 깨알같은 코메디로 치환되기도 하고, 자신이 던진 오지랖이 역으로 돌아와 상처받고 고민하기도 하며 반대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 있지만 남들을 위해 애써 숨기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코테츠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이 진리인줄 알며 턱에 힘만 주는데도 다들 어맛! 멋져! 하고 따르는 평면적이고 재수 없는 돌대가리 꼰대 캐릭터가 아니라 유머 감각이 있으며 나이스한 인물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점이 코테츠에 대한 시청자들의 감정 이입을 높이고 있거든요. 게다가 그에 대해 별로 알리바이를 주지 않고, 필요하다면 주저없이 여러 고난에 빠트리고 유머꺼리로 만드는 각본의 태도도 그 나이스함을 배가하고 있습니다.

담당 성우인 히라타 히로아키도 그 점에서 꽤 좋은 캐스팅입니다. 그 나이대에 있을법한 아저씨의 모습과 허세, 고민을 잡아내 그 속에 슬랩스틱 코메디부터 진지함 모두 담아내고 있거든요. 연륜에서 나오는 느긋하지만 성실한 목소리엔 어른의 매력이 묻어나옵니다. 연기할 건덕지가 많은 캐릭터라 녹음하면서 굉장히 즐기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다른 주인공인 버나비는 덜 재미있습니다. 사실 얘는 무척이나 정통적인 '히어로물 주인공' 타입의 캐릭터거든요. 하지만 이 캐릭터의 고민은 상당한 당위성과 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점에서 코테츠의 좋은 상대이기도 합니다. 코메디 상대역으로도 좋고요. 특히 각본이 저 ‘히어로물 주인공’이 으레 보이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코메디를 만드는 부분이 상당히 뛰어납니다. (유명한 ‘네놈 반격인가!’이나 너무나 뻔뻔하게 그라비아 아이돌 촬영에 임하는 장면들은 정말 본인은 진지하지만 빵 터지는 부분이죠.) 모리타 마사카즈는 이 역을 맡을 수 있었던 또래 다른 남자 성우들보다 딱히 특출나게 잘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최소한 캐릭터를 잘못 해석해 뻣뻣하게 캐릭터와 겉돌거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무게를 허세로 추락시키거나 반대로 너무 무겁게 만들거나 그렇진 않습니다. 아마 모리타 마사카즈 커리어에서 얼마 안 되는 빛나는 역일겁니다.

전반적으로 ‘늙다리’ 스러운 캐스팅이 돋보이는 애니인데, 다들 연륜답게 안정적으로 극의 연기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사이사이에 배치된 신인들도 기능적으로 알맞은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요. 성우 간의 화학 작용도 좋습니다. 아마 이런 훌륭한 앙상블 연기는 작년 가장 인상적인 성우 연기를 들려줬던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의 음향감독의 공이 클 것입니다. 물론 장르 특성상 코테츠를 제외하면 주인공 일행보다는 악역 쪽이 훨씬 인상적인 연기들을 들려주긴 합니다.
배경이 되는 슈테른빌트도 재미있는 곳입니다. 빅오의 패러다임 시티처럼 구식 미국 아니메의 모노톤의 묵직함과 전작 [카라스]와 [C]의 불야성의 대도시,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다양한 인종들과 사람들 묘사, 축음기나 [메트로폴리스] 같은 구식 SF의 향취와 스마트폰이나 화상통화 같은 현실 세계에 깊숙히 침투한 문명의 이기들이 공존하는 슈테른빌트 시의 묘사 는 매력적입니다.


아무래도 히어로물인지라 액션 액팅을 이야기해야 될 듯 합니다. 기본적으로 타이거 앤 버니의 액션은 서로 치고 받는 타격감과 무게감, 땀냄새를 강조하는 편입니다. (굿 럭 모드 연출만 봐도 알 수 있죠.) 전작 [카라스]에서 보았던 카라스장갑이 만들어내는 육중한 느낌과 타격, 그것과 대조되는 빠른 속도와 합이 만들어내는 장중한 느낌의 액션 연출에서 속도의 비중이 줄어든 느낌입니다. (예외라면 버나비 VS. 루나틱과 25화 막판 액션인데 이 장면들은 상당히 속도감이 있습니다. 스카이 하이도 예외에 속하는데 이 캐릭터도 상당히 빠른 액션을 선보입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심심하다 할 수 있는 액션 연출으로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무와 액션의 합을 자세히 뜯어보면 상당히 리드미컬하게 잘 짜여져 있으며, 이를 통해 꽤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13화 연막 작전, 16화 시스 전의 처절하게 퍽퍽 치고 받는 부분이라던가, 23화에서 버나비와 코테츠가 도개교에서 싸우는 부분, 25화 마지막 전투 씬은 아날로그 액션 특유의 육중함과 장중함이 배어 있습니다. 이런 느낌의 느릿하고 합의 리듬과 타격감을 중시하는 연출은 솔직히 요새 ‘아니메’ 액션 연출에서 보기 드문 연출이라 신기하기까지 해요. (*요새 아니메의 액션 연출들은 타격감 보다는 작화를 왜곡하면서까지 과장되고 현란한 액션 연출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심지어 아날로그 향취의 땀내나는 액션과 타격감을 아니메로 가장 잘 재현해내기로 유명한 제작사 본즈조차도 여러 가지 작화 기교를 이용해 양념을 뿌리고 있죠.) 다만 히어로 간의 연계 작전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는 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이야기 전개상 서로 연계할 기회가 적었던 게 큰 이유겠죠.

가끔 너무 정석적인 전개를 한다던가- 조금 더 영악하게 굴어도 괜찮지 않았나 싶네요.-능력자물 특유의 매력이 적다는 등 소소한 단점들 때문에 소위 괴물같은 걸작은 못되지만 [TIGER & BUNNY]는 요새 본 활극 활동사진 중에서는 최고급이라 할만합니다. 정말 이만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애니는 오래간만이여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나 [그 날 본 꽃의 이름을... (아노하나)]도 이 경지까진 못 갔습니다.) 단점이 있더라도 전 관대하게 보고 싶습니다. 재기발랄하고 유머가 넘치고 아이디어도 잘 써먹는 장르 애니입니다.

P.S.1 리뷰 시스템을 바꿔봤습니다. 캐스트/크레딧을 추가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왠지 귀찮아서 다시 원래대로 복귀할것 같기도 하고 음 (...)
P.S.2 그런데 솔직히 좋은 애니라 생각하지만 이 엄청난 인기는 팬인 저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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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 PV
*경고.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소리 낮춘 뒤에 재생을 누르시오.




여러분 가이낙스는 톱을 노려라! 때부터 그런 놈들였습니다.
"나으 가이낙스는 이렇지 않아!"라고 점잔 떨지 말고 이 막장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기대나 합시다.

아 정말 이렇게 나오면 기대할 수 밖에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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