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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에머릭 프레스버거 (2)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1943)

얼마 전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회고전에서 만난 영화들은, 그간 이 감독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호프만 이야기]를 보고 리뷰를 쓰면서 막연히 지적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영화들은 고전기 영화들의 간결한 우아함과 더불어 영화라는 매체의 즉물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즉물성의 허망함을 역사 인식과 철학의 경지로 이끌어올린 걸작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미룬채 조각난 샷들을 이어 호기심을 이어간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훈련을 하다가 전쟁 훈련을 위한 포로를 잡기 위해 터키탕을 찾아간다. 거기엔 늙은 군인 윈 캔디가 있다. 어느때처럼 꼰대질을 하다가 졸고 있는 윈 캔디는 현실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훈련을 시작하려는 젊은 장교 스피더에게 예의범절을 훈계하다가 망신을 당한다.

이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화사에서 손꼽힐 우아하고 아름다운 플래시백 도입부를 보여준다. 스피더에게 망신을 당하는 늙은 윈 캔디를 뒤로 한 채 카메라는 쭉 앞으로 트랙 인 하다가 냉탕에서 수영하다가 맵시있게 나온 젊은 윈 캔디를 보여준다. 볼품없고 추레한 육신이 카메라의 전진으로 이뤄지는 영화의 마술을 통해 젊은 육신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영화적으로 젊어졌다가 늙어가는 과정은 볼품없어지는 윈 캔디의 여정과 발맞춤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새로 태어난 젊은 윈 캔디가 도입부의 윈 캔디가 되기까지 단 한번도 현재으로 돌아가지 않고, 플래시백의 이야기를 따라가길 고집한다. 따라서 우리는 늙은 윈 캔디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가 '늙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초적인 정보만 쥔 상태에서 윈 캔디의 캐릭터를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꼰대 캐리커처를 확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늙고 별볼일 없는 꼰대라는 첫인상과 달리 도입부 이후 젊은 윈 캔디는 그야말로 캡틴 잉글랜드나 다름없다. 어쩜 저렇게 티끌없이 해맑고 순수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젊은 윈 캔디는 기사도와 이상을 숭상하는 혈기방장한 군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화의 초반부는 수정주의적 관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구식 모험담이다. 인물들의 가치관은 명확하고, 실제 현실의 논리는 흑백에 따라 단순하게 재단된다.

스타일 면에서도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도입부의 비교적 절제된 톤을 벗어던진 극도로 인공적인 세트와 미술로 뛰어든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시각적 성찬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양복들,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인물들, 숨막힐 정도로 프레임을 수놓는 소도구들과 세트... 심지어 영화가 점점 냉정해질때에도 카메라는 영국 전원의 아름다움과 미로 같은 대저택의 웅장함을 빼어나게 뽑아낸다. 초기 컬러 영화 특유의 독특한 원색 역시 이런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관객들에게도 이런 묘사는 '비현실적'이었을것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묘사하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은 현실의 구질구질함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는 인형놀이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공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윈 캔디가 대영제국을 모욕한 독일 신문기사를 읽고 결투를 벌이기 위해 독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두 인물을 보여준다. 테오 크레치마르 슐도프와 이디스 헌터는 영화 내 윈 캔디의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다. 대결 상대로 나온 슐도프는 영국과 반대되는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사상 영국의 라이벌로 그려지는 대상은 프랑스일텐데, 왜 이 영화는 프랑스인이 아닌 독일인을 영국인의 라이벌로 내세웠을까? 답은 영화 외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는 막바지긴 해도,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시절이었다. 이 영화는 전시 선전 영화로 기획되었다. 슐도프는 그 점에서 전시 유럽 대륙을 체화한 캐릭터다.

하지만 전시 선전 영화의 관점에서 봐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는 좀 이상하다. 파웰과의 다른 전시 선전 영화인 [침입자들]이나 [콘트라밴드]와 달리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의 슐도프는 응징이나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럴수도 없는게, 윈 캔디와 슐도프가 처음 만난 시기는 양국 관계가 험악하지 않았던 1차 세계 대전 이전 얘기다. 아직 전쟁이 덜 크고 끔찍했던 시절, 조금이나마 19세기 신사도 문화가 남아있던 시절. 이쯤되면 알 수 있겠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국과 유럽이라는 테마를 좀 더 큰 캔버스로 옮겨서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잡해져만 가는 영국과 유럽의 관계를 윈 캔디가 물려받은 미로 같은 저택처럼 확장해간다.

우아한 신사의 결투로 포장하긴 했지만 윈 캔디와 슐도프의 관계는 불알친구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제의 격한 결투는 멋진 상처를 남겨주고 신문에서의 국가 간 설전은 우정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이디스 역시 그런 징검다리 중 하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삼각관계로 이어질수 있는 관계를 신사적인 양보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윈 캔디는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접어버리고, 슐도프와 헌터의 행복을 빌어주며 떠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초반부의 모든 사건들을 명쾌하고 긍정적인 논리로 정리하면서, 영화의 순진함과 구식 모험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공적인 세트를 강조한다. 

역설적으로 도입부에 제시된 순진한 아름다움은 영화가 이어질수록 조금씩 빛을 바래간다. 이 영화가 대영제국주의의 로맨틱한 회상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의혹을 대부분 지울수 있다면, 윈 캔디와 슐도프가 겪는 인생여정을 통해 초반부를 재구성할 여지와 동시에 안쓰러움을 전하기 때문이다. 괜한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상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의 행복을 위해 쉽게 이디스를 포기했던 윈 캔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댓가를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기사들의 소꿉장난과 같았던 군인을 현실의 위치에 되돌려놓고, 새로이 등장한 신병기들은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 신대륙 미국 장교들은 무례하기 그지없고 언제라도 쉽게 화해할수만 있었던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깊은 골이 패지기 시작한다. 현실은 처음부터 조금씩 복잡했지만 윈 캔디는 파악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복잡해진다.

윈 캔디가 더욱더 비극적인 어릿광대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실과 자식 세대의 과오를 지켜보며 성장하는 슐도프랑 달리 그 현실을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슐도프가 반가워하는 윈 캔디를 외면하는 반응 샷은 그 점에서 가슴은 찢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대영제국의 환상을 반영한 초반부가 순진맹충하다는걸 분명하게 인식하지만, 그 순진맹충함 속에서 쌓인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슐도프의 처량한 모습은 결국 거대한 역사에 속해있지만 그 엄혹함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개인의 슬픔을 보여준다. 포로 수용소에서 풀러나 낙관론에 젖어있는 윈 캔디와 친구들 앞에서 보이는 슐도프의 무표정한 눈빛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의 현실 인식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독일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제공한다.

이런 변화는 데보라 카가 멋지게 연기해낸 세 사람의 '그녀'하고도 관련이 있다. 두 남자 주인공과 달리, 데보라 카의 '그녀'는 환상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개성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다. 윈 캔디의 '그녀'들은 매번 현실에 발맞춰 나타나지만, 윈 캔디에게 '그녀'들은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윈 캔디는 이디스를 사랑하지만, 젊은날 우정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고 이디스의 환영 바바라를 찾아내 사랑했지만 다시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럼에도 윈 캔디는 이 세상에 없는 이디스 근처를 맴돈다. 정작 두 이디스의 환영들은 분명한 직업과 자기 삶을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특히 조니는 윈 캔디를 현실로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해낸다.) 윈 캔디는 환영에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바쳐버렸다.

친구를 외면했던 슐도프가 영국으로 넘어와 경찰들 앞에서 덤덤하게 인생역전을 설명하는 롱테이크 샷은 그 점에서 슬프다. 슐도프는 어려운 독일의 상황에서 자신이 믿었던 가치가 환상이라는걸 깨달았고, 현실에 맞춰 발빠르게 타락해버린 아들들에게서 떠나야만 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화려함을 벗겨낸 경찰서에다 상처입은 유럽의 영혼을 앉혀놓고 그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탄식한다. 우리 유럽에겐 (비록 환상이었더라도) 고결한 나날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고결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런 쓸쓸한 인식에 기반한 탄식은 파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프레스버거의 입김이 강하기도 하다. 프레스버거는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윈스턴 처칠이 바랄법한 전시 선전용 메시지로는 부적합해져버린다. 이 영화가 독려하는 나치에 대한 항전 의지는 선악 논리보다는 인간의 삶 그 자체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점에서 전쟁 이후의 복잡해질 도덕과 미덕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외부에서 나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된 슐도프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명료한 가치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다. 슐도프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순 없어도, 남아있는 삶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있다고 믿는다. 그걸 말하려고 독일을 떠나 윈 캔디 앞에 나타난 것이다.

군대에서 밀려난 윈 캔디는 처음엔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계속 현역으로 있을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조니와 슐도프의 독려로 순순히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긴 하지만, 그 역시 완고한 윈 캔디의 고집에 일련의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윈 캔디를 동정하거나, 적어도 이해할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군인인 스피더는 그 점에서 윈 캔디의 거울상 같은 캐릭터다. 고집 세고 어른 말은 잘 안 들으려는 모습은 초반부 윈 캔디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 모습에서 윈 캔디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이 때 윈 캔디의 시점 샷으로 등장하는 물 위에 뜬 낙엽은, 가히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을 연상케하는 심원한 통찰과 서정미를 지니고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를 설명하는 또다른 요소인 영국 전원에 대한 시적 예찬이 (윈 캔디와 바바라의 별장과 슐도프의 포로 수용소 시퀀스에서도 간간히 드러난다), 응축된 쇼트라고 할 수 있다. 저물어가는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지긴 했어도,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한때 윈 캔디와 바바라가 살았던 집이 부셔졌더라도, 우리는 살아갈거라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말하며 영화를 끝낸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불멸의 영화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면,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들이 어떻게 꼰대가 되었는가를 보여준 뒤 그것이 인간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기 때문이다. 실로 영국 영화가 자랑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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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 이야기 [The Tales of Hoffmann] (1951)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는 그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감독에 속한다. 그 얼마 안 되는 인지도도 [분홍신]에 집중되어 있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지만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는 앨프리드 히치콕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영국에 남아서 훌륭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호프만 이야기]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분홍신]의 성공에 고무되어 만든 영화라는게 분명한데, 발레나 오페라 같은 무대 예술을 스크린에 올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요정낭만주의의 대표주자 E.T.A 호프만이 원작을 쓰고 자크 오펜바흐가 오페라로 각색한 [호프만 이야기]는 몇가지 각색에 불구하고 꽤나 충실하게 이식되어 있다. 독일 뉘른베르크. 호프만은 린돌프와 사귀고 있는 스텔라라는 발레리나를 짝사랑하고 그걸 눈치챈 스텔라는 호프만에게 만나자고 한다. 발레 공연이 끝난 뒤, 한 선술집에서 호프만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노래를 부르고 그가 겪은 세가지 사랑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기계인형 올림피아, 베니스의 고급 창부 줄리에타, 소프라노 안토니아. 

이 세 사랑의 이야기는 좌절과 실연으로 가득차 있다. 기계인형 올림피아는 그 완벽한 외견으로 호프만을 사랑에 빠지게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으로 표현된 고장 끝에 결국 부서지며, 고급 창부 줄리에타는 처음부터 호프만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따라 호프만을 농락한 끝에 그의 진짜 모습을 빼앗어버린다. 한편 소프라노 안토니아는 호프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재능을 소진한 끝에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액자 밖 호프만과 스텔라 (원작에서는 오페라 가수로 나오지만 영화판에서는 발레리나로 나온다.)의 사랑도 호프만의 좌절로 끝난다. [호프만 이야기]는 그 점에서 문학이 만들어진 이래로 유구히 내려온 남성의 시점에서 바라본 팜 파탈 혹은 대상화된 여성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물론 [호프만 이야기]가 소위 호러나 SF 문학에서도 시조격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유명한 조지 로메로가 이 영화를 사랑했다는 얘기도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계인형 올림피아는 그동안 쌓여왔던 고색창연한 근세 기계인형 이미지를 정리해, 이후 등장할 여성 안드로이드와 사이보그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으며 ([꼭두각시 서커스]에 등장하는 인형 올림피아는 여기서 따온 것일까?)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뤄질 미지의 영역을 상상하고 탐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SF라 볼 수 있다. 또한 흑마술과 저주, 유령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줄리에타와 안토니아의 이야기는 오컬트 장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를 감상한다는 것은, SF와 호러 장르의 근원에 있는 예스러운 전통을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가 이런 환상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실연담을 음악으로 형상화하는데 골몰하는 동안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비주얼 폭격이라 불릴만한 시각적인 양식을 구축한다. 이 양식은 단순히 무대 미술 뿐만이 아니라, 영화적 연출에도 녹아있는데 [호프만 이야기]가 단순히 오페라 녹화 영상으로 그치지 않고, 영화적인 매력으로 승화된 것도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공이 크다. 그들은 무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공간의 확장과 거기서 비롯된 동선 배치, 시야각의 변화 같은걸 마음껏 누리며 원작의 상상력을 확장한다. 세번째 안토니아 에피소드 도입부에서 안토니아가 사는 섬으로 향하는 호프만 시퀀스를 보면 알겠지만 이 장면의 공간 연출은 무대보다는 영화에 가깝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는 꽤나 호사스러운 영화기도 하다. 애시당초 리얼리즘은 쌈싸먹은 얘기가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분홍신]으로 구축한 초창기 컬러 영화 특유의 색감이 입혀진 화려한 세트와 엄청난 혹사를 했을게 분명한 배우들의 연기가 디졸브와 이중 노출, 클로즈 업, 몽타쥬 등 다양한 영화적 기법과 만나면서 호화스러운 시각적 성찬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프만 이야기]는 좋은 소스로 필히 감상해야 하는 영화기도 하다.

어찌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시대를 제대로 타고난 영화일지도 모른다. 1950년대 인공적인 스튜디오 세트 제작 체계가 영화계 트렌드는 [호프만 이야기]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무대적인 요소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영화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가능했다고 할까. 이후 영국 영화가 키친 싱크와 성난 청년 흐름으로 소박한 모양새로 돌아섰던걸 생각해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정말 영국 영화가 가능했던 한 시기가 응축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파웰은 이런 환상적인 모양새를 대부분 버리고 냉정하고 살벌한 톤으로 그린 [저주의 카메라] 감독이기도 하니깐 단순화시킬수 없겠지만.)

물론 파웰과 프레스버거 스타일의 발전상으로 따지자면 [호프만 이야기]는 파웰과 프레스버거 다른 영화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때문에 이 부분은 차후 이뤄질 파웰과 프레스버거가 만든 컬러 영화 대표작 [분홍신]이라던가 [흑수선] 리뷰로 미룰수 밖에 없다.) [호프만 이야기]가 영화사에 남을 시각적 성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들 커리어 후반기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호프만 이야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두 감독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빛낸 만가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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