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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영화리뷰 (148)
자유의 이차선 [Two-Lane Blacktop] (1971)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2017/01/26 - [Deeper Into Movie/리뷰] - 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자유의 이차선]은 이전작처럼 길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길 위에 선 몬테 헬만의 인물들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고,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으로 서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전작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먼저 시대가 현대로 변했고 주인공 자리엔 잭 니콜슨 대신 비치 보이즈의 데니스 윌슨과 싱어송라이터 제임스 테일러가 대신하고 있다. (헬만이 사랑한 워렌 오츠는 계속 나온다.)

또한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길을 잃거나 도주해야 했던 이전작과 달리, [자유의 이차선]의 주인공들은 아예 목표 의식이 희박해져버렸다. 부조리한 상황 역시 훨씬 은밀하게 영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운전수와 정비공은 드래그 레이스를 한다. 그러다가 경찰이 등장해 도망쳐 어디론가 달린다. 대체 얼마나 달렸나 싶을까 잠시 차를 멈춰세웠을때 한 여자가 몰래 차를 탄다. 하지만 운전수와 정비공은 여자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운전수와 정비공이 G.T.O를 만나면서 헬만은 그만의 기이한 실존주의를 슬슬 펼쳐가기 시작한다. 운전수와 정비공과 달리 나이가 많아보이는 G.T.O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캐릭터다. 그는 히치하이킹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다를 떨어대며 끊임없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다. 그는 여자에게 영영 떠돌수 없다고 말하며, 스피드에만 집중하는 주인공 일행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자신에게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주인공 콤비랑 별반 다르지 않은 캐릭터다. 그의 수다는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헬만은 G.T.O.와 주인공 일행을 대조시키면서 캐릭터들이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관객이 재고하도록 한다.

이들이 뉴욕을 향해 경주 내기를 걸면서 [자유의 이차선]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자유의 이차선]은 모든 요소들은 헬만 특유의 완만한 리듬에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장소들은 비슷비슷하기 그지 없다. 저예산의 한계였을수도 있겠지만, 헬만이 선정한 공간들은 유달리 시간이 고여 흐르지 않는 곳들이다. 모텔, 휴게소, 농장, 주유소, 불법 드래그 레이싱, 한적한 시골길... 길과 길 사이엔 아무것도 없거나 무덤덤한 사건들 뿐이다. 가끔 등장하는 불법 드래그 레이싱 역시 그런 무덤덤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질주와 휴식 이 두 개의 행위를 오갈 뿐이며, 그 이상의 요소들은 집어넣지 않는다.

요컨데 [자유의 이차선]은 익명의 영화다. IMDB 가서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캐릭터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워렌 오츠가 맡은 G.T.O처럼 가명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들에게 개성을 부여하는 것은 미국 머슬카 문화와 거기서 파생된 레이싱, 기계 부품들이며 상대방에 대한 관심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자동차와 길 위의 열정을 그려냈던 [길 위에서] 같은 비트 기행 문학을 오마주/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서 그렸던 저항과 흥청망청한 열정은 밋밋한 미국 중서부 풍경 속에서 가라앉아버리고, 프리 섹스의 대안 공동체는 동승객에 대한 덤덤함으로 대체된다. 이 영화에는 섹스는 암시로 처리된다.

헬만은 대신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중음악부터 시작해 자동차 음향이 스크린을 채우고, 음향은 조용한 인물들과 밋밋한 풍경을 대신해 리듬을 그려간다. 기이하게도 이 순간 헬만은 로베르 브레송과 닮아간다. 이 영화의 연기는 제한적이다. 비전문 배우인 제임스 테일러와 데니스 윌슨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며 연기하는 워렌 오츠조차 많은 연기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브레송이 그랬듯이 공허함과 침묵의 공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어둠에 묻혀있다가 점점 밝아오는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클로즈업 쇼트들의 감흥은 쉽사리 잊기 힘들다.

대놓고 코믹한 영화는 아니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은근 무성 코미디스러운 구석이 있는 영화다. 주인공 일행과 G.T.O가 벌이는 경주는 사실상 전 재산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지만, 헬만은 이 경주를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에 은근히 가볍게 다루고 있다. 운전수랑 정비공은 그닥 잃어도 별 상관은 없어보이고, 여자는 애시당초 제 3자다. 심지어 이 경주에 안달복달해야할 G.T.O조차도 종종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정신 팔린 모습을 보인다. 캐리커처화된 히치하이킹 승객들도 그렇고 고작 앞섰다 싶으면 자동차가 고장나 뒤따라온 경쟁 상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헬만은 전지적 작가의 권능을 활용한 뒤 슬쩍 웃는다.

[자유의 이차선]이 작가로써 몬테 헬만을 파악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하면, 은유적이었던 서부극과 달리 좀 더 본격적으로 196-70년대 미국 청년 문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일단 주역 둘 캐스팅이 1960년대 미국 록 음악에 중요한 뮤지션이다. 또한 이 영화에 빼곡히 등장하는 자동차에 대한 디테일들은 히피즘과 결합된 자동차 개조 문화인 커스텀 컬처를 반영하고 있다. 어느 정도 상업적인 고려도 있었겠지만, 헬만은 팝 문화의 아이콘과 당대 로드 무비 장르를 끌어들여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실존적인 침묵 (실제로 헬만은 연극 무대에 있을땐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리기도 했다.)으로 가득찬 여정에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한다. 그들이 서부에서 시작해 뉴욕으로 가는 이유도 헐리우드에 대한 환멸과 뉴욕의 현실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당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성 캐릭터의 활용도 눈에 띈다. 다른 주인공들처럼 이름이 없는 이 여성 캐릭터는 [바람 속의 질주]와 [복수의 총성]에서 밀리 퍼킨스와 함께 발전시킨 도발적인 여성 캐릭터 활용과 맥이 닿아있다. 이 여자는 무심하게 남자들의 경주를 지켜보며 관계를 가지고 차를 바꿔탄다. 그녀는 애초에 어느 남자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캐릭터며, 자기 흥미와 욕망에 따라 여정을 함께 한다. 마지막에 이 여자가 떠나는 것으로 경주가 마무리되는 것도 흥미롭다. 여자는 마치 자동차가 질렸다듯이 휴게소에서 만난 바이크를 탄 남자랑 같이 떠나버리고 두 남자들의 경주는 흐지부지된다. 

G.T.O.는 여느때처럼 다른 손님을 태우며 자신의 차가 방금 전에 있었던 두 남자와의 경주에서 땄다고 거짓말한다. 한편 운전수와 수리공은 드래그 레이싱을 하러 간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에 가지 않고, 서부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그 사이의 황야를 방황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196-70년대 미국 도로를 달린다는 것, 나아가 청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무덤덤한 황야를 떠돌아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방황이 마냥 무기력한건 아니라고 헬만은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드래그 레이싱이 시작하기 전 불타오르는 필름이다. 이 불타오르는 필름이 [바람 속 질주] 마지막에 등장하는 질주하는 말과 주인공의 쇼트에서 확장된 건 명백하다. 헬만에게 196-70년대 미국 청년들의 삶은 과묵한 불꽃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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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The Lost City of Z] (2017)

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2016/05/29 - [Deeper Into Movie/리뷰] - 이민자 [The Immigrant] (2013)

제임스 그레이 팬덤은 갸우뚱했을지도 모른다. [이민자]로 현대와의 작별을 고한 제임스 그레이는 코스튬 드라마에 이어 고색창연한 모험 영화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도시 Z]는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원작을 기반으로 도시 Z를 찾아 아마존 밀림으로 떠났던 탐험가 퍼시 포셋를 다룬다. 영화 타이틀이 뜨는 순간은 의미심장하다. 어둠 속에서 아마존 원주민들이 불꽃을 피울때, 제임스 그레이는 타이틀을 띄워 저 불꽃이 있는 곳이 '잃어버린 도시 Z'이며 이 영화의 종점이라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 제임스 그레이는 사슴 사냥을 떠나는 영국군들을 보여준다. 부감 샷으로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 사슴은 Z이며, 그 Z를 쫓아 샛길로 들어서는 주인공 퍼시 포셋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길을 갈 것이다. 이후 그레이는 마침내 찾아낸 사슴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퍼시의 샷을 길게 보여주면서 그를 끌어당기는 운명의 힘을 예감케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퍼시는 자연을 폭력으로 굴종시킬수 있었으나, 문명 밖 세계인 아마존에서는 그런 행동이 불가능하다는걸 깨달을 것이다. 

그 다음 그레이는 포셋 부부를 사냥 축하 파티장으로 불러들이면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를 인용한다. 잘 차려 입었지만 불편해하는 (니나의 코르셋에 대한 농담이 대표적이다.) 예의바른 남녀들, 노란 색과 붉은 색의 조명과 색감, 그리고 드리워진 상류 사회의 그림자. 그레이는 포셋 가문에 드리워진 방탕함과 추문을 흘리면서 퍼시의 인정 욕구를 설명한다. 퍼시는 그레이의 다른 주인공들처럼 인정 욕구를 갈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이미 영국 사회에 편입된 머레이 경과 퍼시의 첫 만남을 보여줄때 그레이는 높낮이를 이용한 미장센으로 둘의 불화를 암시한다.

도입부로 퍼시의 캐릭터를 설명한 그레이는 퍼시를 런던으로 데려오면서 Z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당연히 퍼시의 첫 여정은 영국 제국주의의 첨병로써 수행한다.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써 퍼시 포셋은 두 나라 간의 국경을 정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영국 제국주의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퍼시는 여정 도중, 단순해보였던 아마존에 문명과 관련된 비밀이 있다는걸 알고 매혹된다. 퍼시가 느끼는 매혹은 장소의 물성에 대한 영화적 매혹이기도 하다. 그린 스크린과 CG의 시대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정말로 아마존으로 가서 배우를 고생시키면서 아마존이라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담아내고자 한다.

동시에 그레이는 아마존 밀림을 향한 퍼시의 도전을 좌절시키면서, 출발과 귀환의 구조를 만든다. 이 구조를 반복하면서 시간은 흘러가고 영국 제국주의와 상류층 사회에 대한 환멸과 미지의 도시 Z에 대한 동경은 더욱더 커져간다. [잃어버린 도시 Z]는 20세기 초입 유럽이 겪어야 했던 격렬한 변화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퍼시의 실패는 잭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료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1차 세계 대전으로 대표되는 19세기적 가치관의 몰락과 무지비한 현대 문명의 등장이기도 하다. 밀림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사람과 사회는 달라진다. 그레이는 그 변화에 애잔함을 느낀다. 영화 후반부에 퍼시가 자신은 늙었다고 장성한 아들에게 한탄하는 장면이 무게감이 느껴진다면, 그레이 특유의 인과율적인 작법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퍼시는 이 인과율 속에서 영국 사회가 바라는 세속적인 가치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Z와 아마존 문화를 존중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퍼시의 Z에 대한 매혹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퍼시 혼자의 것이 아니라는게 명백해진다. 먼저 퍼시의 아내 니나가 있다. 비록 퍼시의 여정에 동행하지 않지만, 그레이는 니나의 업적과 좌절을 통해 19세기 서구 문명의 여성 억압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 어떻게 여성들이 저항했는지 보여준다. 니나는 행복해지고자 발버둥쳤던 [이민자]의 에바에서 발전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한편 잭 같은 경우, 좀 더 복잡한 그레이의 가족 묘사에 맞닿아있다. 아직 어렸던 잭은 아버지의 부재에 상처받으면서도 그와 같이 있길 원한다.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동시에 부상당해 앞을 보지 못한 채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무력감과 씁쓸합을 느낀다. 퍼시의 가족들은 Z라는 궁극적인 목표 앞에서 고뇌하고 갈등한다.

포셋 가문의 사람들이 제임스 그레이 영화 주인공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커뮤니티의 편입 이외의 다른 길이 열려있다는 점이다. [잃어버린 도시 Z]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국에서 아마존으로 떠나는 과정을 간략화한다. 그러면서 한 인물이 갈망하는 공간을 현재 시공간에 서서히 겹쳐놓기 시작한다. 제 1차 세계 대전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 시퀀스를 앙상한 전장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철저하게 파괴된 공간 속에서 퍼시는 현대 문명에 염증을 느낀다. 동료를 잃고 염소 가스에 쓰러지는 이 시퀀스의 결말은 그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이때 그레이는 갑자기 영적인 순간을 마련한다. 부하들의 손에 이끌린 퍼시는 집시 점쟁이를 만나게 되고, 점쟁이는 퍼시에게 당신은 아마존과 도시 Z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순간 퍼시와 점쟁이는 전장이 아닌 아마존 숲 속에 있다. 

이 갑작스러운 뛰어넘음은 그레이의 인물들을 결말로 이끄는 운명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 Z는 변해가는 세상에 변치 않는 가치관이며, 그레이가 만들어냈던 등장인물들이 바라던 평화와 안식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던 그들은 Z로 가야만 하고, 기어이 영화 속 여정의 과정을 생략/단축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투 러버스]의 레너드가 그랬듯이 Z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가족에게서 떠나가야만 한다. 그레이는 가족과 이상향 사이에 있는 간극과 고뇌를 산발적인 플래시백으로 형상화한다. 퍼시는 여정 도중 고난을 겪을때마다 플래시백을 빌어 가족을 생각하며, 잭이 아버지 퍼시를 설득해 마지막 여정을 떠날때 등장하는 플래시백 역시 영국에 남겨진 가족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Z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을때, 운명은 그들을 미지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잃어버린 도시 Z]의 후반부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묵상이다. Z 근처에 있는 족장은 그들을 보고 '이 곳도 저 곳도 속하지 않은 영혼'이라며 머물 집을 찾으라고 말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잭과 퍼시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두려워하면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임을 보여줄때 영화는 정중한 침묵으로 가득찬 쇼트를 이어가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서구 문명에서 떨어져 나온 포셋 부자는 Z를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플래시백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린다. 마지막 플래시백에서 퍼시는 자신의 과거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행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거리감을 느낀다. 그는 결국 가족이라는 커뮤니티에서 관찰자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짧았던 순간을 결코 잊지 않으려고 한다.

실제 퍼시 포셋은 사기꾼이었다고 한다. 데이비드 그랜의 원작 역시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영화 [잃어버린 도시 Z]의 결말은 자기완결적이다. 결말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그들의 영혼이 머물 집을 상상하지 않고, 남겨진 니나에게 돌아간다. Z에 대한 열망이 퍼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고 말하는 니나는, 남편과 아들이 남긴 물건을 가지고 지리학회장에게 보여준다. 미심쩍어하는 지리학회장을 남겨두고 니나는 떠난다. 하지만 니나가 향하는 곳은 런던이 아닌 밀림이다. [이민자]의 결말과 같은 구도지만, 여자와 남자는 분리되지 않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뉴욕을 떠난 제임스 그레이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 곳에서 인물들은 함께 할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레이는 이상을 쫓는 행위는 분명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잃어버린 도시 Z]는 그 점에서 우주로 갈 그레이의 차기작 [에드 아스트라]를 예측해볼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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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2017/04/02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2017/09/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멀리서 마차가 다가온다. 제목 타이틀이 뜬 뒤 마차는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숲 속으로 들어온다. 두 남녀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만 다음 샷에서 갑자기 상황은 반전된다. “부드러움이 무슨 소용이죠?”라는 질문을 한 여자는 곧 모욕을 들으며 옷이 벗겨지고 남자는 여자를 벌하라고 마부들에게 명한다. 묶여있는 여자는 맞으면서 애원한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질것 같은 다음 샷에서 여자, 세브린느는 남자 피에르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우리 생각이요.”

조셉 케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루이스 부뉴엘의 [세브린느]의 도입부는 마치 농담처럼 시작한다. 피학적인 상상으로 사랑하는 남편과의 지고지순한 부부 관계를 전복하려는 세브린느의 속내를 피에르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멀쩡한 부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딘가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둘의 대화는 진심으로 위장하면서 문제의 근원에 닿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부뉴엘은 완벽하고 순종적인 부르주아 부부라는 정형적인 관계가 서로를 질식시키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부부는 다음 시퀀스에서 겨울 산으로 놀러간다. 보통 사람들은 겨울 산에서 소복히 쌓인 눈을 생각하지만, 부뉴엘은 한번도 하얀 눈으로 덮인 산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세브린느와 피에르는 눈 내린 마을을 걸어간다. 이때 바닥에 깔린 눈들은 더러워져 있다. 부뉴엘은 흰색의 순결함을 믿지 않는다. 후술할 세브린느의 하얀 옷과 연결해보면 이 눈 내린 마을은 캐릭터가 내세우는 순결함이 세속적인 욕망을 숨기는 커튼에 불과하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 잇송 씨를 만나게 된다. 이때 세브린느는 잇송을 불편해 하며, 잇송은 피에르를 보고 '자네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잇송이 식당을 떠나면서 한 말은 '밤을 맞으러 가봐야 되겠다'다. 그 시퀀스 직후 세브린느는 잇송과 동행했던 친구랑 (의미심장하게도 그 친구는 잇송을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택시를 타면서 앙리에트를 둘러싼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잇송이 보낸 꽃을 꽃고 이동하다가 꽃병을 깨트린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간 세브린느 화장수 병을 다시 깨트린다. "내가 왜 이러지?" 부뉴엘은 이 순간 최면을 건다. 부뉴엘은 무언가 깨지는 행위를 세브린느의 무의식에 등장하는 더러운 배관공에 대한 플래시백과 조응시키면서 이후 이어질 부르주아의 도덕률의 붕괴를 은유한다. 심지어 자신처럼 정숙했으리라 생각했던 피에르조차도 결혼 전에 창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린다.

잇송의 밤을 맞으러 간다는 대사는,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탈피하러 간다는 얘기며 세브린느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세브린느 역시 일탈하고 싶어한다. 이 순간 잇송이 다시 등장하는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순결해 오히려 페티시적인 (눈처럼) 흰 테니스 복장을 한 세브린느 앞에 잇송은, 은근슬쩍 암시했던 자신의 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불편해하는 세브린느에게 잇송은 아나이스의 창관을 알려준다. 남은 건 세브린느 자신의 선택 뿐이다. 물론 부르주아 룰에 순종적인 세브린느는 타락을 거부하려고 한다. 세브린느가 창관 근처에서 서성거릴때 드러나는 망설임은 다시 얘기치않은 플래시백을 불러오게끔 한다. 영성체을 거부하는 세브린느의 플래시백은 가톨릭을 향한 부뉴엘의 세속적인 저항이며, 동시에 보수적인 도덕률을 거부하기 힘들다는걸 드러낸다.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만나게 되고, 매춘을 하기로 결정한다. 아니아스는 세브린느에게 억지로 키스를 하는 것으로 욕망의 문을 여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세브린느가 만난 손님들은 낯설고 두렵기 그지없다. 악랄하게도 첫 매춘이 이뤄지는 시퀀스에서 부뉴엘은 아돌프라는 무례한 부르주아 남성 캐릭터를 데려온 뒤, 남성기와 사정을 암시하는 샴페인을 배치해 얌전하게 살아온 세브린느에게 충격 효과를 가한다. 어렵게 매춘을 마친 세브린느는 앓아누워 부르주아를 만나는걸 거부하고 한동안 매춘업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브린느는 결국 매춘업소로 돌아온다. 어째서일까?

부뉴엘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의 욕망이 영화 전체의 구조를 흔드는데 있다. [세브린느] 역시 루이스 부뉴엘의 뻔뻔스러운 욕망과 서사 구조에 대한 풍자적인 도발이 잘 드러나 있다. [세브린느]는 일단 시공간을 흐트러트린다. 이 영화의 소품들이나 배경은 분명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19세기적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마차라던가, 호화롭지만 공허해보이는 귀족 저택, 세브린느의 집은 이야기의 시공간을 의심케한다.반면 부뉴엘은 텔레비전을 아니아스의 창관에만 배치하면서 현대 문명을 매춘과 동일시시킨다. 19세기적 엄숙한 도덕에 갇힌 현대의 부르주아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창관에서 기괴한 욕망을 배출한다. 

부뉴엘은 매춘과 자본주의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부르주아의 허울과 위선을 조롱한다. 아니아스는 매춘부들에게 매번 예절과 교양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아니아스의 창관이 어떤 가치관으로 움직이는지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의 매춘부들은 처음엔 부르주아에 걸맞는 예절과 교양으로 맞이하지만, 그 예절과 교양은 이내 섹스라는 동물적인 행위 앞에서 벗겨진다. 교수와 샤를로트가 벌이는 SM극 도중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중단과 지속은 부르주아에 내재된 사회적 페르소나와 동물적 욕망의 기괴한 진자 운동을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와 부뉴엘은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이중성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이중성을 지켜보면서 세브린느의 비틀린 욕망은 분절적인 플래시백으로 분출된다. 이 플래시백에서 세브린느의 위치는 상당히 복잡하다. 어떤 플래시백에선 과감히 유리병을 깨는 잇송과 함께 피에르 앞에서 섹스하기도 하며 (NTR!), 어떤 플래시백에선 잇송 씨를 이기고 남성성을 뽐내는 (잇송은 '피에르에게 초콜릿이나 선물하라'고 세브린느에게 돈을 준다. 절대로 독립된 성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다.) 피에르에게 구출받는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명백한 점은 환상 속 세브린느가 아무리 피학적인 위치에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이 플래시백들은 세브린느의 주체적 욕망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플래시백은 중간중간 영화 서사를 가로막고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의 재구성을 유도하게 한다.

앓아누웠던 세브린느가 다시 매춘업소로 돌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춘을 한 세브린느를 묶어두고 피에르가 진흙을 던지면서 매도하는 환상은 여러모로 이중적이다. 이 환상은 순결을 포기하고 세속적으로 군 여성에 대한 징벌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세브린느 자신의 주체적인 피학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에르는 현실에선 세브린느의 피학 욕망을 충족해줄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세브린느는 매춘을 통해 자본가의 이면과 마주해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세브린느는 변한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세브린느는 환상 밖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고 매춘할때 입던 옷을 입고 피에르와 데이트를 할 정도로 변해간다.

[세브린느]의 전환점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모든 점에서 완벽한 피에르의 안티테제다. 아무런 직업 없이 아버지뻘인 히폴리테 (부뉴엘은 이 캐릭터에 은연중에 스페인 망명객이라는 암시를 남긴다.)와 함께 퍽치기 범죄를 저지르며, 등에 새겨진 상처와 빠진 이를 드러내며 여성에게 폭력적인 마르셀은 야성적인 청년 무산자이다. 세브린느의 피학적인 정열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남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마르셀을 묘사할때 부뉴엘은 명백히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셀이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는 개선문 근처며 그 주변에서는 엑스트라가 진 세버그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잘 될 것만 같았던 마르셀과 세브린느의 관계는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메꽃, 오후의 미녀, Belle De Jour. 세브린느는 오후에만 욕망에 충실해질수 있는 불완전한 부르주아의 죄수다. 세브린느에게 매춘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폭력적이고 여자를 소유하려는 마르셀에게 매춘부 세브린느는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존재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아닌 매일의 미녀 Belle de Chaque jour가 되야 한다. 하지만 마르셀의 욕망은 내려치려는 허리띠 앞에서 당당한 세브린느 앞에서 좌절된다. 마르셀이 있는 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될수 없다는 걸 안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떠난다. 아니아스의 억지 키스로 열어젖힌 욕망의 문은 세브린느가 아니아스에게 키스하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기어이 세브린느의 사적 영역에 들어선 마르셀은 진실을 폭로하겠다고 세브린느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던 마르셀은 피에르의 사진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한다. 세브린느가 선택한 욕망의 충족과 통제는 궁극적으로 피에르를 사랑하기 위해서였고, 세브린느와 피에르 사이에서 자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걸 마르셀은 알아버린다. 좌절한 마르셀은 모든 관계를 파탄내고 피에르를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고 마르셀은 마치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미셸 푸가드처럼 롱 숏 속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는다. 부뉴엘은 마르셀을 통해 [네 멋대로 해라]를 패러디하면서 프랑스 누벨바그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남기고 있다. 아마 부뉴엘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프랑스 청년 세대의 좌절과 기득권을 향한 파괴 본능을 잡아냈던 걸지도 모른다.

남은 건 반신불수가 된 피에르와 정숙한 부인으로 돌아온 세브린느다. 이때 잇송 씨가 다시 등장한다. 피에르를 은연중에 깔보고 있었던 잇송은 안타까움을 보이면서 동시에 세브린느에게 대신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한다. 왜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것일까? 잇송은 피에르는 자신에게 헌신하는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자면 세브린느 역시 자신에게 여전히 다정한 피에르에 대해 사랑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되는 것으로 사랑을 유지하면서도 욕망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아냈지만, 결국 엇나가버렸다. 당신이 총에 맞은 이후 꿈을 꾸지 않는다는 세브린느의 고백은 기괴한 순정을 담고 있다.

부뉴엘은 서로를 향한 이 기괴한 헌신을 비웃지 않는다. 잇송에게 사실을 들은 후 눈물을 흘리던 피에르가 일어나는 샷은, 부뉴엘식 현실 파괴지만 조롱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일어난 피에르는 세브린느를 비난하지 않고 대신 휴가를 떠나자고 말한다. 이때 마차 방울 소리가 울리고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말한다. "저 소리 들려요?" 소리를 따라 발코니로 나간 세브린느의 시점 샷 뒤에 이어진 반응 샷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마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마차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세브린느를 향한 반응 샷임에도 가상선이 파괴된 이 샷은, 더 이상 굴절된 욕망과 조응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라진다. 부뉴엘은 세브린느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일탈은 큰 죄가 아니였으며, 그저 왜곡된 부르주아 체제 하에 세속적인 해소 행위에 불과했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세브린느는 욕망의 소리를 피에르와 공유하면서 행복해진다. 이상한 꿈은 끝났고 남은 것은 달콤한 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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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룸 [Jalsaghar / The Music Room] (1958)

사티야지트 레이의 데뷔작인 아푸 삼부작은 네오 리얼리즘에 기반한 성장기였다면, 그 이후 영화들은 그 틀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동료들이 그랬듯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붙들려는 영화적 시도와 개성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네번째 영화 [뮤직 룸]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쇠락과 닮아간다. 이 영화는 아푸 삼부작처럼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하기엔 형식적인 매혹이 어른거리며, 양식화된 비극이라고 하기엔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의 근대화와 구세대의 몰락이라는 현지의 화두를 잡고 있다. 어느쪽이든 사티야지트는 [뮤직 룸]을 통해 평생을 추구할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상징과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음악실이 등장하는 이상,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서민이 아닌 유한계급의 사람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할 것이다. 이야기는 1920년대 인도에서 시작한다. 후주르 로이는 귀족 자제의 후예다. 그는 생활력이 없고 음악실에서 인도 전통 음악가들을 불러 소일한다. 하지만 잘못된 영지 경영과 더불어 서구 문명에 보수적인 후주르의 행태는 그를 점점 몰락의 길로 몰아넣는다. 이웃집 사채업자인 마힘 강굴리는 그 틈을 노려 빠르게 성장하지만, 후주르는 그의 성장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사실 연대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비스콘티에게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아직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고저택에 들어가지 않았던 시절이다.), [위대한 앰버슨가]라던가 영국 고딕 소설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원작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사티야지트와 원작자 타라상카 밴디오파댜아이가 어떤 의도로 이 이야기를 끌어왔는지, 인도 문학에서 이런 주제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애매한 추측에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다만 후주르 로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점들이라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영지의 음습한 분위기, 신화적인 몰락은 식민지 시절 수입된 영국 고딕 문학에 등장하는 몰락한 시골 귀족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는건 분명하다. 서구 문명에 대해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티야지트 본인 역시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직 룸]의 기이한 매력은 단순히 서구 문학 전통의 충실한 이식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인도 문화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일지도 모르겠지만, 후주르 로이의 몰락은 영국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비논리적인 박력으로 진행된다. 후주르의 아들과 부인이 사망하는 순간 절제된 샷은 되려 불안감을 스멀스멀 퍼트리며, 아무도 없는 음악실을 쓸쓸히 머무르는 후주르를 덩그러니 보여줄때 카메라는 후주르의 절망을 샹들리에와 같이 모조리 퍼올려낸다. 후주르가 음악실에 슨 거미줄을 건져내는 샷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폐허에 대한 매혹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평범해야 할 샷을 환각처럼 만들어버린다. 이 모든 것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흑백 영화의 음영을 마치 판화처럼 사용한다. 형식으로 보면 [뮤직 룸]은 예정된 몰락에 대한 공포를 그리는 공포 영화나 다름 없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사기일 것이다. 사티야지트가 음악실을 채우는 음악은 쉐나이를 비롯한 벵갈 전통 음악이다. 영화 속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타블로와 시타르 소리는 드론 음악 특유의 정적인 흐름과 울림이 있다. 사티야지트는 드론이 가지고 있는 음향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연주 장면을 찍을때 느린 줌인과 고정된 카메라는 마치 연주자가 영원히 연주할것마냥 그 순간을 담아낸다. 그때만큼은 [뮤직 룸]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후주르의 심상에 공감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샹들리에 위에 깔리는 시타르 소리는 그 점에서 [뮤직 룸]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면 추나 다름없다.

그러나 [뮤직 룸]은 후주르의 심상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후주르를 다룰 때 사티야지트는 냉정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3시간이 아닌 100분이다. 간결하다면 간결한 러닝타임이다. 비극적인 몰락을 다루지만, 사티야지트는 후주르를 다룰때 그가 현실적으로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제시한다. 하인, 부인, 심지어 정부나 그가 경멸하는 강굴리 가까지... 하지만 후주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음악실에서 멋진 전통 음악들을 소개하고 향유하는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지주의 운명이라고 자기합리화한다. 그 자기합리화의 허약함이 드러난다는건 명백하다. [뮤직 룸]은 사티야지트는 후주르의 인도 전통 예술에 대한 집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의 몰락을 가차없이 밀어붙인다. 어떨땐 지나치게 혹독하다 싶을 정도다.

자연히 [뮤직 룸]은 양가적일수 밖에 없다. 우리는 후주르의 몰락을 그러게 왜 저런 멍청한 선택을 하나, 싶은 심정으로 보면서도 그가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매혹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은 거부하기 힘든 법. 실상 사티야지트는 강굴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그의 영악한 처세술은 인정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예술엔 공감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강굴리의 음악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뮤직 룸]에서 사티야지트는 근대 문명과 전통 문명 사이에서 상반된 인물들을 배치하고 고민한다. 그 고민은 아시아가 맞이해야 했던 고민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은 구시대의 종말이다. 후주르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고집의 결과이지만, 기이하고도 장엄한 몰락이기도 하다. 그는 예정된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 화려하게 선형적인 몽타주를 흐트러트리고 죽는다. 불꽃처럼 불타오르는 결말을 정리하며 사티야지트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수 없더라도, 후주르는 쉽게 타자화할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후주르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돈키호테적인 사랑은 정녕 가치 없었던 것일까? 그의 비극이 시대와 전혀 연관 없는 것일까? 후주르는 그 점에서 인간적인 결함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캐릭터다. [뮤직 룸]은 그 인간적인 결함과 시대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몰락의 애잔함을 정교한 영화적 형식과 맞물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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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깊은 욕망 [神々の深き欲望 / The Profound Desire of the Gods]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시작은 바다 생물들의 모습이다. 꿈틀거리는 이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해보인다. 이 위험천만한 생물들은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가 그랬듯이 이마무라는 자연 근처에서 영화를 시작할때, 강렬한 생물 이미지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마무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의 이미지를 잘게 쪼개 나열한 뒤 그 위에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배치한다. 그 다음 우마와 네키치로 대표되는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등장시키면서, 도덕률을 어기고 본능에 따라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자연과 근친 상간이라는 두 이미지는 [신들의 깊은 욕망], 나아가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앞에서 신 남매의 근친 관계와 섬의 탄생을 다루는 전래 민요를 부르는 가객의 모습이다. 인류 문화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예술 양태를 꼽으라면 노래와 그림, 연극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깊은 욕망]을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다. 가객의 노래는 [신들의 깊은 욕망]을 휘감는 원초적인 자연과 근친상간적인 관계가 신화적 기반에 바탕에 두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마무라는 영화라는 매체가 문명에 기반한 것이며, 이 서사를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선 신화적인 화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입부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섬에 사는 우마와 네키치는 근친상간적 관계이며 네키치에겐 전 부인에게 얻은 카메타로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토리코라는 자식이 있다. 네키치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바다에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낚시를 하는 바람에, 바위를 떨어트릴 구멍을 만들라는 벌을 받는다. 한편 우마는 류 류겐이라는 지역 유지의 첩으로 무녀일을 하고 있으며, 카메타로는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때 카리야라는 측량 기사가 제당 공장 개발건으로 도쿄에서 내려온다. 전임 시마지리를 찾아온 카리야는 어떻게든 공장 개발을 하고 싶어하고 카메타로는 카리야를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네키치의 방해와 더불어 카리야는 토리코에게 빠져버린다. 하지만 개발의 손길은 서서히 쿠라게 섬으로 다가오고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맞는다.

[신들의 깊은 욕망]의 절반은 기가 약한 문명인이 쿠라게 섬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끌려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리야는 개발을 위해 섬으로 찾아오지만, 옛 동료는 섬에 동화해버렸다는걸 발견한다. 카리야는 측량을 위해 섬의 숲으로 들어가지만, 마을 사람들과 문명의 연계를 담당하는 류는 그 영역이 신성한 무녀들의 영역이라고 뜯어말린다. 카리야의 눈에는 쿠라게 마을은 알 수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지만, 그는 혼자 왔기에 마을 전체의 규칙을 깨부술 수 없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카리야의 의지는 점점 시들어가고 때마침 끼어든 네키치의 계략과 토리코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버린다. 카리야는 후토리 가에 편입되어 있는 동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반면 후토리 가는 복잡하다. 이미 [인류학 입문] 같은 영화에서 근친상간적 관계와 기괴한 욕망에 탐닉하며 광기에 빠져드는 인물을 차분히 보여줬던 이마무라 쇼헤이는 후토리 가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댄다. 후토리 가의 부자 네키치와 카메타로는 둘 다 쿠라게 마을의 아웃사이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며 마을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탈주의 방법은 차이가 난다. 네키치 부자가 무인도로 건너와 섬 밖을 빠져나가는 걸 얘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네키치는 폭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지만, 실상은 마을에 내려오는 미신에 매혹되어 있다. 그는 근친상간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돌이 떨어질 구멍을 파며, 개발 계획에 대해 마뜩치 않아한다. 구멍에 돌이 들어가는 순간 네키치는 우마와 함께 신화에 등장하는 무인도에 정착할 생각이다. 네키치는 그 점에서 신화적인 욕망과 탈주를 꿈꾸는 자다.

반대로 카메타로는 처음에 카리야 기사의 조수로 배치되는 장면도 그렇지만, 쿠라게 마을 자체를 지긋지긋해한다. 카메타로는 문명화된 술집과 카리야 기사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 문명 사회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카메타로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탈주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지만, 그가 선택한 탈주 방법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런 식으로는 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카리야 기사로 대표되는 본토의 문명만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카메타로는 가문에 내려오는 근친상간 관계를 거부하는 자다. 영화 초반 토리코의 유혹에도 카메타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짜증만 낼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남자들 사이엔 여자들이 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끌어가는 기괴한 에너지는 근친상간 관계의 목표이자, 주체인 여성들에게서 비롯된다. 이 둘이 마을의 샤머니즘 전통과 연계되어있는 캐릭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지역 유지의 집에 강제로 머물며 성적인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오빠 네키치와의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마도 인상적이지만 토리코는 이마무라가 만들어낸 여성상 중에서도 강렬하기 그지 없다. 정신박약을 앓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인 토리코 앞에서 전통과 문명은 일시적으로 대립이 무화된다. 토리코가 미국에서 온 속옷을 입고 좋아하는 장면과 신내림을 받는 장면은 토리코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두 세계를 포섭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토리코의 불가해함은, [신들의 깊은 욕망] 전체를 이끌어가는 우연과 초자연적 전개와 맞물려 들어가며 영화의 신화적 성격을 강화한다.

이마무라는 [인류학 입문]에서도 그랬듯이 근친상간을, 문명의 도덕률을 반하는 행위며 자연과 가깝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매혹을 보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이 문명과 자연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서사를 진행했던 [인류학 입문]과 달리 자연에서 진행되는 영화인지라 이런 대비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리야와 토리코의 관계가 있다. 카리야는 토리코랑 사랑을 나눌때도 마치 여동생 다루듯이 다루고, 주변 사람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진짜 근친상간 관계인 네키치와 우마에 이르면 더 할말이 없다. 네키치와 우마의 관계는 어떤 사랑보다도 순수하기에 더욱 기괴하다. 네키치가 구멍을 파는 행위는, 지극히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기괴한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국엔 승자는 현대 문명이다. 역설적으로 그 문명이 들어서는 과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쿠라게의 미신에 속해있던 후토리 가의 가장 야마모리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뒤 죽는다. 그리고 돌이 구멍 속으로 들어간 뒤 인물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우마는 노로로써 힘을 잃고, 토리코가 대신 우마를 잇는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토리코가 노로의 힘과 의무를 이해하기 만무하다. 카리야는 도쿄로 돌아가버리고 노로로 대표되는 마을의 샤머니즘적 전통은 몰락한다. 여기서 이마무라는 미신을 지탱하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미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때 어떻게 사람들은 스스로 전통과 미신을 폐기처분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네키치와 우마의 파멸 시퀀스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신화/제의적 속성을 밀어붙이는 시퀀스다. 이마무라는 여기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망망대해에서 도망가려는 네키치와 우마, 그리고 그들을 쫓는 마을 사람들의 동선을 서스펜스를 빌어 쉴새없이 밀어붙인다. 특히 말 없이 가면을 쓴 채 네키치와 우마를 쫓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호러 영화 속 살인마와 다름없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 자체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증오와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은 작은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이 와중에 카메타로는 문명 사회로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와 고모를 살해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폭력을 받아들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과거의 복수다.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쿠라게 마을은 비행장과 코카콜라가 자연스러운 곳이 된다. 영화 후반부에 사라진 카리야는 아무렇지 않게 본처와 외가 사람들을 끌고 자본가 계급 행사를 한다. 카리야 앞에 나타난 건 얼마 전 고향으로 돌아와 기관사가 된 카메타로다. 카리야는 변해버린 쿠라게 마을을 둘러보며 미신을 믿었던 마을은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한다. 하지만 고민에 잠겨 있는 카메타로는 카리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쿄에 있을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그 날 있었던 일이 마을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이에 대답하듯이 이마무라는 기차를 운전하는 카메타로 시점 샷으로 수풀 사이로 뛰어가는 토리코를 툭 던져놓는다. 문명의 아이콘인 기차는 갑자기 멈춰서고 카메타로는 극도의 충격과 흥분 상태에 빠진다. 카메타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카메타로 다음에 우마를 묶었던 붉은 돛을 단 빈 배가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분명한 것은 토리코와 붉은 돛의 샷은 유령처럼 홀연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쿠라게를 상징하는 토리코와 우마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리야 기사는 토리코 얘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즉슨 카리야는 토리코랑 이 섬 자체를 백일몽처럼 여기고 있다.)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토리코는 무녀의 춤을 추듯이 격렬하게 등장해 기차를 신경쓰지 않고 달려가다가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토리코로 대표되는 대자연은 자신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킨 쿠라게 마을과 본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이마무라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쿠라게 마을은 과거의 미신을 벗어던진 곳인가? 이마무라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쿠라게 마을의 근대화는 결국엔 제물이 필요했고, 이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다시 폭력적인 신화적 제의를 거쳐야 했다. 이마무라는 문명은 쿠라게 마을에서 또다른 이름의 미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마무라는 그 과정을 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하는 문명과 작은 사회의 폐쇄성을 경멸한다. 그리고 언젠가 대자연과 대자연에서 비롯된 전통은 유령처럼 돌아와 근대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이 결말은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과 비슷하면서도 더 복잡한 인류학적 화두를 찌르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불러일으켰지만 [신들의 깊은 욕망]은 그 점에서 쇼치쿠/닛카츠 뉴웨이브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희대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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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 [Ο Θίασος / The Travelling Players] (1975)

한 사람이 등장해 [양 치는 처녀 골포]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선언한다. 다음 샷.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역에 도착한다. 카메라는 그들이 역 앞에 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멈춰 섰을때 카메라는 그들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이 프레임이 친숙하다고 생각하다면, 정확하게 봤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이 등장인물들을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다룬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뜬다. 1952년. "고참들이 있었고 젊은 배우가 있는" 이 유랑 극단은 옛날에 들렀던 마을 에이온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는 유랑극단이 건물로 들어가고 난 뒤, 갑자기 유세 방송을 바꿔버린다. 파파고스 (로 위장한 그리스 독재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는 괴벨스와 메탁사스로 바뀌고, 국가소년단원들이 단복을 입고 그들을 맞이해야 한다.

[유랑극단]은 [양 치는 처녀 골포]를 올리려는 극단의 시도와 좌절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시작해 전후 독재 정권에서 끝난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극단을 떠나가고 아이가 태어나고, 새로운 단원이 들어온다. 그들을 좌절로 밀어넣는 것은, 그리스 독재 권력이다. 파파고스와 괴벨스, 메탁사스가 하나의 시퀀스에서 음향 몽타주로 얽히는 장면은 [유랑극단]의 정치적 지형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앙겔로풀로스에겐 2차 세계 대전 파시즘과 전후 파시즘이 하나의 흐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하나의 몽타주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민중들은 다르다. 사실 [유랑극단]의 서사를 복기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듯 하면서도, 헷갈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설명 대신 앙겔로풀로스가 이끌어오는 이름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다. [유랑극단]의 시퀀스는 단일한 시간이 아닌 여러 개의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형적으로 흐르는듯 하다가 긴 독백을 빌어 과거를 회고하거나 반대로 기나긴 롱테이크 속에 돌연 시간을 뛰어넘는다. 배우들은 카메라를 보면서 당시 시대를 설명하거나, 현실과 연극 무대의 연출이 겹쳐저 아이러니한 신화적 비극을 만들어내거나, 사람들이 사라진 텅 빈 화면 위에 울려퍼지는 전쟁을 암시하는 음향들은 끊임없이 화면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둔다. [유랑극단]은 하나의 몽타주로 이뤄진 파시즘이 어떻게 역사를 난도질했는지, 의도적인 분절을 통해 관객들이 인식하길 유도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 민중을 다룰때 [유랑극단]은 그리스 신화를 빌어온다. [유랑극단]의 등장 인물들은 엘렉트라, 오레스테스, 아가멤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원형적 비극을 그리스 현대사와 연결시킨다. 한국인들이 [유랑극단]를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 비극이 어떻게 재해석되어 있는지는 완벽하게 이해하긴 쉽지 않을것이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비극적인 관계에서 유추할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유랑극단]의 서사가 퇴장과 이별을 통해 전진한다는 점은, 허우샤오셴의 [비정성시]만큼이나 한국인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한국사를 닮아있다. [유랑극단]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폭력적인 흐름에 자유롭지 못하고 숙명론적인 퇴장을 받아들어야 한다. [유랑극단]을 만들면서 앙겔로풀로스가 자크 리베트의 영화를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세계를 무대처럼 다루고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서사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랑극단]은 리베트 영화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 폭력적인 흐름은, 상술했던 음향 몽타주와 파시즘과의 관계랑 연계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음향 몽타주는 총소리다. 총소리가 들릴때마다 모여있던 민중들은 그 소리에 놀라 도망간다.)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는 그 큰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 빨치산이 되지만, 그들은 영화 말미에 패배한다. 심지어 오레스테스는 밀고자였던 후임 단장을 처벌했음에도, 유랑극단의 일그러짐 나아가 그리스사를 정화하지 못한다. 와중에 남아있던 엘렉트라는 강간당한다. 이들의 싸움과 패배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조각나버린 영화적 시간에서 탈출하려는 시도와 실패를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을 가로지르며 행진할 수 있는 건 나치-왕당파-파시스트 뿐이다.

영화 속 [양 치는 처녀 골포]가 지극히 통속적인 희극임에도 비극으로 다가온다면, 끊임없이 일관된 파시즘에게 짓눌림에도 극을 올리려는 시도가 정치적 저항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희생양이 되던 영국과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매력에 이끌려 그리스를 떠나더라도, 좌파 투쟁 끝에 처형당하더라도 유랑극단은 끊임없이 [양 치는 처녀 골포]를 올리려고 한다. 그것은 픽션이기에 가능한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전향 선언을 한 필라데스와 반대로 옥사한 오레스테스를 목도한 엘렉트라가 떠나버린 여동생 크리소테미스의 아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슬프다. 허우샤오셴의 가족들이 그 비극 속에서도 식탁으로 돌아온다면, 앙겔로풀로스의 극단원들은 희극을 올린다. 한마디로 [유랑극단]은 시지포스적인 비극이다.

그리고 카메라가 있다. [유랑극단]의 카메라는 처연하고 아름답게 그 분절된 시공간과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 앙겔로풀로스의 카메라는 프레임 속 그리스 민중들을 군무처럼 다룬다. 하지만 그들은 1940년대에서 50년대로 넘어온 파시스트들처럼 분절된 시공간을 넘지 못한다.그들은 오직 서사를 찢고 등장하는 소격 효과 시퀀스에서만 자신의 비극을 토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격 효과가 끝나면 다시 역사의 비극에 투신해야만 한다. 단체이면서도 뿔뿔이 흩어져만 가는 유랑극단은 그 점에서 지극히 앙겔로풀로스적인 피사체다. 어떤 지점에서 [유랑극단]은 30년 이상을 이어갈 앙겔로풀로스만의 인물 동선을 완성시킨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끝은 다시 에이온에 도착한 유랑극단이다. 하지만 이 결말 시퀀스의 시간대는 1952년 이후가 아니라 1939년이다. 이 결말이 당혹스럽다면, 시작 (1939년)과 끝(1952년)이 뒤집어져 있기 때문이다. 앙겔로풀로스는 수미상관적인 미장센을 이용해 루프물마냥 결말을 짓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두 쇼트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뒤집혀진 결말은 영화의 정치적 지향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며, 1970년대 중반 그리스 현실에 대한 앙겔로풀로스의 대답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1970년대에 만들어졌음에도 끝내 1952년을 넘지 못하고 30년대에 50년대 사이를 계속 헤맨다. 그리고 헤멤의 끝에서 [양 치는 처녀 골포]는 겨우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는 [유랑극단]을 만들면서 막 파파도풀로스 독재 정권에서 해방된 그리스가 어디로 가야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유랑극단]은 그 점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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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 피어스 [Mildred Pierce] (1945)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밀드레드 피어스]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미스터리다. 시작하자마자 총을 맞은 남자의 입에서 밀드레드 피어스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다음에 한 여자가 위태하게 바닷가를 바라보다가 식당으로 간다. 여자의 이름은 밀드레드. 밀드레드는 식당에서 사업 동료이자 관심을 보이는 남자 윌리를 데리고 나간다. 달콤한 환상에 빠진 남자가 목격한건 사라진 밀드레드와 살인 현장. 한편 집에 돌아온 밀드레드는 두번째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불러가게 된다. 그러나 경찰은 범인을 전 남편인 알버트 피어스로 단정지은 상태. 대체 알버트랑 이혼한 이유가 뭔지 물어보는 경찰들에게 밀드레드는 과거를 얘기하게 된다.

[밀드레드 피어스]는 한마디로 여성 수난사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밀드레드 피어스는, 젊었을 적 남편 알버트와 열렬히 사랑해 결혼했지만 남편의 부동산 사업 실패로 부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알버트는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고, 화가 난 밀드레드는 알버트를 내쫒는다. 케이와 비다라는 두 딸을 데리고 밀드레드는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전부터 밀드레드를 짝사랑했던 윌리는 이 참에 고백을 해오지만, 밀드레드는 거절하고 식당 웨이트리스로 삶을 시작한다. 부지런한 밀드레드는 웨이트리스로서 성공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딸에게 웨이트리스로써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래서 윌리랑 같이 레스토랑을 차리고 성공하나, 허영심 많은 딸 비다는 밀드레드를 부끄러워하고 비난한다. 마음에 없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던 밀드레드는 신분 상승을 위해 유럽 귀족 출신인 몬테 바라건과 결혼하지만 그것은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밀드레드 피어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남자들이 아닌 여자라는 점이다. (이는 영화에도 적용되는데, 영화의 회상을 이끌어가는 것도 밀드레드의 보이스오버다.) 처음엔 안락한 가정 주부로 시작한 밀드레드 피어스는 파탄난 가정 상황을 보고 도무지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남편을 내쫓는다. 작품 속 밀드레드의 선택은 철저히 경제적 자립에 맞춰져 있다. 윌리랑 결혼하면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딸들은 말하지만 밀드레드는 거절하고 직장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업을 꾸릴 계획을 구상한다.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은 그 점에서 1930년대 이후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 현상을 궤뚫고 있다. 또한 밀드레드의 사업이 식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의 욕망과 음모의 근원이었던 그리스 식당과 연계되어 있다.

하지만 밀드레드의 욕망과 선택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게 아니다. 웨이트리스 취직까지는 그래도 살기 위해서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식당을 차리는 부분부터 조금씩 다르다. 케인은 밀드레드가 웨이트리스 일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변모하는 당위성을 외부에 둔다. 밀드레드가 식당을 차리는 이유는 비다가 웨이트리스 일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다의 욕망이 가속될수록, 밀드레드 역시 자신의 연애조차 귀족적 가치를 위해 팔아넘겨버린다. 밀드레드는 딸 비다의 욕망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파국이다. [밀드레드 피어스]의 멜로드라마는 자신이 현재 있는 위치와,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랑 불일치하면서 발생한다. 밀드레드는 그 간격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그 불일치는 어머니로써 딸에 대한 애정,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심이라는 기혼 직장인 여성들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어찌보면 매우 경제학적인 필름 느와르-멜로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케인의 주제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 마이클 커티즈는 공간를 비정상적으로 확장시킨다.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는 비정상으로 넓고 깊은 영화다. 배우 머리 위는 비정상적으로 높으며, 인물 주변의 공간들 역시 필요한 가구나 장식물을 제외하면 여백이 많다. 대화를 위해 투 샷이나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도, 채워지지 않는 여백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에 필름 느와르 특유의 흑백 그림자도 스며든다.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의 그림자 연출은 일급 필름 느와르 연출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감옥과도 같다. 밀드레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화 속 공간들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으며, 밀드레드가 체념하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액자 밖 경찰소 취조실은 밀드레드를 그림자로 압박한다. 커티즈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여성들의 불안과 불일치, 멜로드라마적 상황을 공간감으로 표현한다.

[밀드레드 피어스]의 결말은 소설과 영화가 상이한 비전을 보여준다. 원작 소설에서 비다는 훨씬 사악하고 악랄했으며, 마지막엔 밀드레드를 배반하고 바라건과 함께 성공의 길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직 헤이즈 코드가 남아있던 시절의 할리우드에서 비다가 맞이한 결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각본가 라날드 맥도널과 캐서린 터니가 새로이 선택한 결말은 좀 더 권선징악적이다. 바라건은 비다의 손에 죽고, 모든 것이 탄로난 비다는 잡혀간다. 원작파들은 영화판 [밀드레드 피어스]가 타협의 결과물이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판에서 새로 선택한 결말은 원작의 그 결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비다와 밀드레드에 거대한 골이 있다고 못 박는다. 범죄를 고백할때도 비다는 끝내 엄마 탓만 한다. 때문에 밀드레드가 자수하는 장면도, 비다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라는 인상을 준다. ("제 잘못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밀드레드는 그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경찰로 대표되는 남성 시스템은 밀드레드가 비다에 대한 속죄를 할 수 없도록 밀드레드와 비다를 법적으로 분리한다. 그 점에서 영화판의 결말은 밀드레드의 주체성이 모두 박탈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업도 가족도 속죄도 모든 것을 잃은 밀드레드에게 돌아갈 곳은 전 남편 버트다. 기존의 가부장 질서로 복귀하는 밀드레드 앞에 펼쳐진 것은 해가 뜬 도시의 풍경이다. 하지만 햇빛을 비웃듯이 결말 샷에서 밀드레드는 이전보다도 더 왜소해진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이 결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밀드레드는 채울 수 없는 걸 채우려다가 끝내 존재 자체가 부서져버렸다. 햇빛조차도 밀드레드를 감싸지 못하며, 그녀는 홀로 걸을수 조차 없다.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는 그 점에서 여성 주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이룰 수 없는지 탁월하게 보여준 뒤, 멜로드라마를 이끌어내는 느와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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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달려가는 차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옷차림과 멋진 저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제목이 지칭하는 부르주아라는걸 알게 된다. 부르주아들은 저택의 주인 부부 앨리스와 앙리 세네샬이랑 같이 밥을 먹으러 왔다. 하지만 앙리는 일하느라 바쁘고 결국 앨리스가 그들과 함께 만찬을 하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 뒤부터는 조금 이상해진다. 앨리스와 부르주아들은 고오급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식당의 주인이 죽는 바람에 밥을 먹지 못한다. 부뉴엘은 시침 뚝 떼고 평이한 어법으로 부르주아의 일상을 그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비일상적인 사건을 등장시키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뒤집는다.

첫번째 좌절 시퀀스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식당을 나오는 이유가 예의와 체면이라는 이유가 강하게 대두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짐짓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약속이 파토난 시퀀스 다음에 라파엘이 대사로 있는 미란다 공화국 대사관에서 앙리와 프랑소와, 라파엘이 모인다.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가던 도중 라파엘은 개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반정부주의자 여성을 발견한다. 라파엘의 선택은? 옆에 있던 저격총을 들어 인형을 쓰러트린다. 이 황당무계한 라파엘의 행동은, 그 자체로 훌륭한 블랙 유머이면서도 부르주아의 가치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예의와 체면은 상대와 마주하지 않으면 쉽게 벗겨지는 가면이다.

사실상 [절멸의 천사]의 리메이크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하지만 구성 면에서는 훨씬 대담한 영화다. [절멸의 천사]가 집 밖을 나가려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고 난파된 상황을 서서히 비틀어갔다면,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만찬을 벌인다는 행위를 중심에 두고 사방팔방 에피소드가 뻗어나가는 영화로 만든다. 몇몇 장면은 순전히 만찬을 기다리다가 끼어든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 멕시코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면서 부뉴엘의 영화는 서사 형식이 대담해지는 구석이 있는데 (로드 무비 구성만 세워둔 뒤 온갖 상징/풍자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은하수]가 대표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그 대담해진 서사 구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파악하기 편하게 구성된 편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시도와 좌절이라는 두 축을 오가는 시지프스와 같은 영화다. 그들에게 만찬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는 행위이며, 그 항유는 식탁 뒤쪽에서 노동자들을 부려먹어야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식탁과 부엌은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저택의 식탁과 부엌을 연상케 한다. 등장 인물들은 그런 계급적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품위없다고 비웃는다. 코냑 마시는 법을 모르는 운전 기사를 데려다 놓고 마시게 한 뒤, 저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대목은 부르주아의 교양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런 예의범절과 교양을 내세우면서도 성욕과 식욕에 주체를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원초적인 욕망들은 세네샬 부부 머리에 달려있는 풀잎처럼 집요하고 너저분하게 매달려 그들을 까발리고 모욕한다. 이 위선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조롱이 이중성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부뉴엘과 카리에 칼끝은 부르주아에 머물지 않는다. 미셸 피콜리가 연기하는 주교 역은 부뉴엘의 가톨릭을 향한 조롱을 압축한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 결말 이후 이 캐릭터가 아무 언급없이 사라지는 부분은 한이 서린 악의가 느껴진다. 부뉴엘에게 종교란 세속적인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소멸해버리는 하찮은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미란다 공화국에 이르면 할 말은 더 없을 것이다. 부뉴엘과 카리에의 조롱은 딱히 숨기는 부분 없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부뉴엘 영화가 된 것도, 그 대담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에 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부뉴엘과 카리에의 징벌이 떨어진다. 부르주아들은 영화 내내 계속 만찬을 방해받은 뒤, 좌절한다. 그리고 이 뒤엔 부뉴엘과 카리에가 있다. 특히 부뉴엘이 만찬을 방해하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어이없는 자유연상으로 이뤄진다.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하기도 하며, 젊은 장교의 넊두리를 듣다가 식당의 음식이 모조리 사라졌다는걸 알아차리기도 하며, 갱단이 총을 쏴 죽기도 한다. 부뉴엘이 꾸려가는 자유연상은 파시스트의 폭력과 종교의 엄숙주의을 풍자하는 것이기도 하며, 유령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별다른 개연성 없이 서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유연상이 계속 이어질수록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유령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은근슬쩍 튀어나온다. 부뉴엘과 카리에는 서사상에서 가능할것 같지 않은 상황을 기어이 이끌어내 진행시키면서 영화 자체의 현실성을 파괴한다. 델 토로를 비롯한 라틴 환상 영화들의 대가가 부뉴엘의 어떤 지점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부뉴엘은 이런 자유연상을 도구 삼아 환몽 구조를 통해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들은 이 환몽을 통해, 욕망 때문에 도래할 파국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피는 도피일뿐. 부르주아는 도피한 곳에서도 끊임없이 욕망과 파국을 만나야 한다. 개연성 없는 자유 연상과 환몽 구조 속에서 부르주아들의 캐릭터들은 얄팍해져 가고 자신의 죽음 역시 한낱 개꿈으로 취급된다. 심지어 그 개꿈엔 전혀 관련없는 경찰들도 포함된다. 부르주아들이 들어간 장군의 저택이 아무런 복선없이 연극 무대로 돌변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꿈과 풍자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준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저택은 언제든지 갈아치울수 있는 무대 장치에 불과하며, 부르주아와 만찬은 연기의 재료로 격하된다.

이 영화의 결론은 죽음이 다시 꿈으로 무화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부뉴엘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경멸스럽게 여겼던 캐릭터는 라파엘인것 같다. 착취가 은밀하고 비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부르주아랑 달리 그는 정말로 국민들을 쥐어짜고 경멸하는 파시스트 권력자다. 심지어 라파엘은 자신을 암살하러 온 반정부주의자 여성에게 성희롱적 모욕과 동시에 비밀 경찰을 시켜 잡아가게 만든다. 그 점에서 (꿈 속 식탁 아래에서도, 꿈 밖에서도)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든 게걸스럽게 집어먹으려는 라파엘의 샷은 부뉴엘의 블랙 코미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부뉴엘은 파시스트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음에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찌질스럽게 표출해대는 파시스트를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다시, 시지포스의 반복이다. 부뉴엘이 선택한 결말은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했던 부르주아들의 행진 샷이다. 처음엔 만찬을 즐기러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샷은, 온갖 환몽 구조를 거치고 나서 결말에 등장했을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대체 저 길은 만찬이 있을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이어지는게 맞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건가? 확실한건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은 다시 시작될 만찬을 고대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부뉴엘은 끊임없이 부르주아의 만찬을 방해할것이다. 어둠 속 길이 마침내 환하게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걷는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벗어날수 없는 림보다. 정말이지 악랄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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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

꿈결같다.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현란한 초원의 초록색과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 푸른 하늘, 돌담... 어떤 평론가는 굶주리고 추운 여행 끝에 도달한 낙원이라고 말했는데, 테크니컬러에 담긴 아일랜드 이니스프리를 보노라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여기엔 어떤 한치의 황량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 포드는 그 황홀한 전원에 도착한 사나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그는 숀 손튼이며 동시에 서부 사나이로 유명한 존 웨인이다. 서부극의 거목인 두 존은 이렇게 아일랜드로 왔다. 포드와 웨인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는 뿌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맞이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덕목으로 생각할법한 무덤덤한 익명성 따윈 없는 사람들이다. 활짝 웃으며 새로 도착한 손님에게 떠들썩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어찌보면 주책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박력에 숀은 살짝 정신이 혼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숀은 그게 마냥 싫지 않다. 이 도입부는 [말 없는 사나이]의 중요한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 없는 사나이]를 이끌고 가는건, 작지만 분명한 사람들의 흐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숀을 관광객으로 생각하지만, 숀은 이 이니스프리에 살려고 도착했다는건 명박하다. 숀은 역을 떠나 앞으로 살 집으로 간다. 이때 [말 없는 사나이]는 매우 아름다운 첫 만남 시퀀스를 준비한다. 양 떼를 끌고 가다가 시선을 돌리는 마치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는 평이하면서도 독특한 흐름을 구체화해내고 있다. 숀이 메리를 바라보자 샐쭉한 인상의 메리가 고개를 휙 돌린다. 둘은 이내 제 갈길을 가지만 숀의 샷과 메리의 샷이 만들어내는 몽타주는 신비로우면서도 유쾌한 활기를 띈다. 

숀은 수다스러운 아일랜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메리와 그 오빠인 레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숀 가문의 옛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레드는 숀이 들어와 사는 상황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사사건건 숀에게 시비를 걸며, 아일랜드식으로 일대 일 격투를 벌이자고 한다. 한편 메리는 결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져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긴다. 이를 보듯이 알 수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일랜드의 느긋한 마음씨를 대변한다면, 메리와 레드는 미국인인 숀이 알아야 하는 아일랜드의 풍습이다. 메리와 숀의 결합은 이 아일랜드의 풍습을 거쳐야 이뤄질 수 있다.

[말 없는 사나이]는 큰 서사 없이 일련의 유쾌한 소동극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숀과 메리의 결합이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포드는 그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다. 포드는 서부극의 전제를 가져와 아일랜드라는 지역에서 익살스럽게 패러디한다. 총잡이의 대결은, 마을 축제와 술이 끼얹어진 주먹다짐으로 넘어가고 근심이 가득찬 마을 사람들은 이제 신이 나서 주먹다짐을 지켜본다. 수줍지만 이뤄질수 없었던 서부 사나이와 마을 처녀의 연정은 휘몰아치는 바람 안에서 격정적인 몸언어로 표출된다. 바람이 불어닥치는 숀의 집에서 메리과 숀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말 없는 사나이]의 격한 바람과도 같은 영화적 매력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플롯이 없는 [말 없는 사나이]를 일관성 있게 묶는 건 군중의 힘이다. 킹 비더의 [군중]이 그랬듯이, [말 없는 사나이]는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의 힘이 매력적인 영화다.  하지만 [군중]에 등장하는 군중이 도시의 익명적인 흐름을 담아냈다면, [말 없는 사나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시골 커뮤니티의 매력이 크다. 이 커뮤니티는 뿌리로 돌아온 미국인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가 낯설어하는 풍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 미국인이 어떻게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건을 만드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본다. 이 미국 영화의 절정을 이끌고 가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쇼트가 장소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뻔뻔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활기다. 이 부분에 이르면 [말 없는 사나이]는 버스터 키튼과 같은 무성 활극 영화와 같은 매력을 태연히 과시한다.

[말 없는 사나이]가 흥미로운 점은, 그런 소탈하면서도 낙천적인 풍습과 이상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히로인인 메리가 그렇다. 얼핏보면 서사의 흐름에 따라 숀이라던가 레드의 가부장적 체제에 순종적으로 편입될 것 같은 메리는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메리는 자신의 재산을 숀의 집으로 가져오는걸 상당히 중요히 여긴다. 그리고 메리의 고집을 숀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격하게 화를 낸다. 메리에게 그 풍습은 자신의 존재 의의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숀은 메리와 이어지기 위해서는 순종시키는게 아니라, 이해와 설득을 거쳐야 한다. 아일랜드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으로써는 추측의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커뮤니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 관심을 가졌던 포드다운 전개라 할 수 있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서 페미니즘적인 묘사를 읽어낸 평론가도 있다는 것도 첨언하고 싶다.)

물론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드는 은근슬쩍 서부극의 어둠을 영화 속에 이끌어온다. 숀이 레드랑 싸우길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할때 포드는 단발적인 플래시백으로, 숀이 왜 아일랜드로 와야만 했는지 설명한다. 미국에 오기 전 권투 선수로 활동하던 숀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룰이 있는 스포츠였지만, 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폭력에 이골이 난 사나이며, 폭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를 느낀다. 숀의 과거는 존 포드의 내심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포드는 숀을 아일랜드로 데려와 백인 사회에서도 천민 취급 받았던 아일랜드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긍정성으로 치유한다. 레드와 싸움을 통해 숀은 자신의 주먹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커뮤니티에 포함될 수 있다는걸 확인한다.

[말 없는 사나이]는 황야 너머로 사라진 서부 사나이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다. 존 포드는 숀을 거기다 내려다 놓고 더 이상 총질은 필요없고 이젠 정말 행복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이니스프리 커뮤니티가 말이 되는가를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냉소를 신경쓰지 않는다. 말이 되던 말던,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고 때론 납득이 잘 안 될지도 몰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선량함을 포드는 믿는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숀과 메리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의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길 기원하게 된다. 그동안 서부극을 통해 울적하게 서부 총잡이의 소멸을 얘기했던 존 포드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는 정말 기적과도 같다. 그 점에서 [말 없는 사나이]는 포드 영화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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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의 유명한 단편 [방파제]의 기본 전제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였다. 마르케는 어린 시절 우연히 잊지 못한 이미지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남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를 거쳐 시간을 횡단하는 행위라 말했다. 그리고 마르케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진 이미지와 기억, 시간을 한데 모아 몽타주로 이뤄진 꿈을 꿨다. 설정이 자세한 영화는 아니였지만, 이 우울한 단편 영화가 지금까지도 SF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들어가는지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서 마르케는 정지한 사진들 속 살아있는 여인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음의 놀라움을 끌어냈다.

마르케의 실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는 [방파제]에서 뻗어나온 묵상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에서 제목 따온 [태양 없이]는 일종의 기행문 영화다. [태양 없이]에서 시간과 이미지의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여기에 있는 개별 공간을 횡단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제 시간과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은 픽션 속 주인공이 아닌 크리스 마르케의 분신인 사진작가 샌도르 크리스나다. 샌도르는 카메라 한 대와 종이와 펜을 챙긴 채 지구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아이슬란드의 아이들 세 명이다. 샌도르는 이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행복의 이미지를 얘기하지만, 이 행복의 이미지가 쉽게 다른 이미지랑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 그 다른 이미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이 정녕 하나로 연결될 수 없는지, 고민한다. 

제목이 뜨고, 그는 아이슬란드를 떠나 홋카이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북쪽 섬에서 돌아오던 샌도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 순간은 전쟁의 순간이다. [밤과 안개]에서 겪었고 [방파제]의 남자가 살아가야만 했던 그 순간. [밤과 안개]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있었던 전쟁을 상상한 뒤, [방파제]에서 마르케는 도래할 전쟁을 상상하는 것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회고했다면, [태양 없이]의 샌도르는 평화의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전쟁를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산발적인 편지를 보낸다.

마르케는 얼핏 보면 연결되지 않을듯 같은 순간들을 연결한다. 샌도르가 발길을 내딯는 곳은 둘로 나눠진 세계다. 한편엔 섹스 박물관과 산리즈카 투쟁이 이어지는 일본과 제국주의와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낸 미국, 프랑스가 있으며, 한편엔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가 있다. 태양이 있는 세계와 태양이 없는 세계. 마르케는 이 둘로 나눠진 세계를 영화의 몽타쥬를 이용해 하나로 통합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태양 없이]는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의 결합이다. 

하지만 훈련된 르포 작가이기도 한 마르케=샌도르가 선택한 스케치 영상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다. 그는 일본 문화에 깊게 매료되어 인류학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산리즈카와 우익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들을 잡아내고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자연 풍경과 가난한 현실을 끌어온다. 편지를 통해 차분히 전해지는 나레이션에서는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지식인의 결기가 돋보인다. 샌도르의 통찰 일부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을 찌르기도 한다. [태양 없이]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광주 시민들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도쿄 좌파 시위대를 잠시 보여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편린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준다. 

이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에서 통일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샌도르가 보낸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샌도르가 읽지 않는다. 샌도르의 묵상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이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즉 [태양 없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뤄진 기행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왜 이런 형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여기서 [태양 없이]가 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보자.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를 찍으면서 동시 더빙이 아닌, 후시 더빙을 사용했다. 이 후시 더빙은 단순히 독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음향에도 적용되어 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일부는 기술적인 문제기도 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마이크가 달린 ENG 카메라는 그리 흔한게 아니였고, 필름 카메라는 녹음 기사를 동반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대표적이다.) 필시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느라 8-16mm 카메라를 사용했어야 할 크리스 마르케에게 기록과 동시 녹음은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하야오 야마네코가 등장한다. 비디오 게임 개발자인 하야오 야마네코는 현실을 바꿀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테이프로 채집한 전쟁과 시위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조작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야오 야마네코는 그것이 TV에 등장하는 이미지보다 더 진실하며, 대상의 특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하야오의 말은 상당히 궤변처럼 들린다. 어떻게 추상화 된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크리스 마르케는 반대로 추상화되지 않은 이미지조차도 언제든지 풍화되어 소멸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는 [밤과 안개]에 관여한 사람이다.) 하야오는 그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려는 시도보다, 본질을 잡는 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야오는 이 이미지들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구역'이라고 부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은 법칙을 따라 길을 찾아가야 했다. 하야오는 컴퓨터로 왜곡된 이미지로 '구역'을 만들어 전쟁과 투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스스로 다시 생각할 영역을 만들고자 한다. 

하야오의 시도는 [태양 없이]의 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수 있는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현실을 단순히 기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낼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 다.  [아름다운 5월]에서 그는 파리라는 한 공간에 집약된 다양한 영역들을 옮겨다니면서 한 시대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장르 픽션을 정지된 사진으로 재구성한 [방파제]를 거쳐 [태양 없이]에 이르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개별적으로 분리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꾸는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악과 나레이션, 현장 녹음한 소음을 후시 더빙한 음향들... 때문에 별다른 플롯이 없어도 집중력이 높은 영화기도 하다. [태양 없이]를 본다는 것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성한 꿈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소 난해할수도 있는 이 한편이 지독히도 감성을 건드린다면 영화가 가지는 시청각적 매력을 마르케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샌도르가 생각하는 [현기증]은 살인 사건 그 이상으로 은밀하게 시간과 공간의 현기증을 설명하는 영화다. 샌도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겹쳐 생각한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죽은 매들린을 다른 인물인 주디를 통해 재현하려는 시도는 샌도르가 필름과 테이프로 기록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재구성해 꿈, 나아가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로 은유된다. 그리고 샌도르와 하야오가 만든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구역'을 만들어낸다. 필름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즉물적인 기록이 가능한 점)을 인지한 뒤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라는 글에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 이후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케의 구성된 꿈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단순히 영상에 멈추지 않는다. 하야오의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크리스 마르케는 컴퓨터 게임 비평가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 도쿄를 들르던 도중 샌도르는 남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팩맨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샌도르는 이 노란색 구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피력한다. 샌도르의 눈에서 바라본 팩맨은 인간의 운명을 픽셀을 통해 은유한 완벽한 예시다. 그리고 그 은유는 당분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마르케는 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세상을 은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미지와 결합될때 강한 힘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딩시 노년을 바라보는 영화 감독이 태동기에 있던 컴퓨터 게임에게서 가능성과 유효한 통찰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마르케는 단순히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태양 없이]를 만든게 아니다. 오히려 샌도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마르케의 속내는 절박하다. 열렬한 좌파였던 마르케는 다양한 공간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무구할 정도로 순수한, 행복의 이미지로 쉽사리 등장하지 못한다. 기니비사우 프라이아 시장에 만난 여자의 표정을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샌도르의 고민은 마르케의 고민이기도 하다. 마르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태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그는 진심으로 땅에 발을 붙이는 사람들을 염원하고 걱정하고 있다.

친구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샌도르는 [태양 없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샌도르 크리슈나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닌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시를 쓰는 법은 영화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하며 글과 편지이기도 하다. 이제 샌도르는 일본에서도, 기니비사우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껏 쌓여왔던 과거를 바라보고 동시에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호주의 에뮤처럼 샌도르가 길어올린 영상과 편지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지의 수신인이 말한다.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이 기대감이야말로 [태양 없이]가 진정 바라는 소통의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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