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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영화 (275)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 Mrs. Miller] (1971)

(누설이 있습니다.)

로버트 알트만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시작은 그래도 익숙한 서부극 도입부다. 떠돌아다니던 한 남자가 개척 마을에 당도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전형적인 서부극의 도입부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알트만은 심술궃게도 서부극에서 기대할법한 상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주인공 존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거나 악당과 대치하는게 아니라 카드를 꺼내들어 포커판을 벌인다. 그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맥케이브에 대한 소문 (아이러니하게도 "악당을 잔혹하게 죽인 악랄한 총잡이"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서부식 소문이다.)을 수군거린다. 다음 시퀀스. 맥케이브는 어느새 이 마을 개발에 관여하고 있다. 요컨데 도입부 시퀀스와 다음 시퀀스 간의 격차가 느껴진다.

맥케이브가 어느 정도 기틀을 닦아놓은 마을에 영국인 포주 콘스탄스 밀러가 당도한다. 밀러 부인으로 불리는 이 여자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업가다. 그는 맥케이브에게 마을을 문명화할수 있는 사업을 제안하고, 그들은 계약을 맺는다. 마을 창녀의 구질구질함을 지적하며 투자 비용을 요구하는 밀러 부인의 대사는 알트만이 서부의 야만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하는지 잘 알려주는 대사다. 영국인인 밀러 부인이 보기엔 미국 서부는 문명의 손길이 못한 낙후된 지역에 불과하다. 

사실 고전 서부극에서도 야만성은 미화되지 않고 오히려 거리감을 두고 섬뜩하게 그려졌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접근 방식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다. 이 영화의 관점은 존 포드를 비롯한 서부극 감독들보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가깝다. 자연히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속 서부는 다른 모습을 띌 수 밖에 없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관계는 사업 투자와 개발 계획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며, 인물들 역시 우아함을 찾아볼 수 없다. 섹스 조차도 일종의 상거래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보타이 정장, 털코트를 입은 채 트름을 하며 돌아다니는 맥케이브는 우아하고 고독한 무법자가 아니라 약삭빠른 도박가이자 지방 유지에 가깝다.

자연히 배경이 되는 공간 역시 완전히 다르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일반적인 서부극에게서 기대할 쨍한 햇빛 아래의 사막이 아니다. 오히려 깊숙한 산 속 눈내리는 마을의 질척한 진흙과 더러운 눈더미로 가득한, 척박한 동네다. '눈'과 '비'는 그 점에서 일종의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함과 동시에,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다. 여기다 산으로 둘러쌓여 평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주변 환경은 유폐된듯한 느낌마저 주게 한다.

여기서 촬영 기법에 대해 언급해야 되겠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인 빌모스 지그몬드는 렌즈에 뿌연 느낌을 강조하는 디퓨전 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디퓨전 필터는 극도로 로맨틱한 질감을 강조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대다. 이 영화의 질감은 (고감도 필름을 썼는지) 필름 입자가 강조된, 탁하고 희뿌연 질감이다. 이 거칠거칠한 화면에다가 상술한 눈과 비가 상시 내리는 작중 배경이 겹쳐지면 영화 속 한기는 단순히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한기의 영화다. 그리고 그 한기 속 서부의 정경은 로맨티시즘이 깃들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서서히 꽁꽁 싸맸던 현실주의자의 갑옷을 벗어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알트만이 선택한 '탈의'의 방식은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는 반-서부극으로써 자본주의와 서부극으로써 전통적인 공동체를 오가면서 생긴다. 발단은 지방 유지들의 재산을 탐식하는 기업의 등장이다. 번창하는 맥케이브의 마을에 눈독들이는 해리슨 쇼네시 광산 회사가 맥케이브에게 접근했을때, 맥케이브는 거만을 떨면서 그들의 제안을 거부한다. 자본가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기에 가능했던 행동이다. 여기까지는 이전 장면들처럼 철저히 자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해 있다.

맥케이브가 뒤늦게 마음을 돌려서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을때, 실책은 돌이킬수 없는 파국으로 돌아온다. 회사에서 고용한 킬러 삼인조 (버틀러, 브리드, 키드)을 문명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했던 맥케이브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로 돌아간다. 이 삼인조는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서부극의 사악한 악당들이지만, 동시에 거대 기업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묘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맥케이브의 토착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는 현대화된 기업 앞에서는 사라져야 하는 서부와 동일시된다. 알트만은 여기다 맥케이브가 무법자는 커녕 총조차 제대로 쏘지 못하는 건달이라는걸 폭로하면서, 맥케이브를 강제적으로 서부의 사나이가 되도록 몰아붙인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지금까지 폐기했던 고전 서부극의 가치로 은근슬쩍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일면 자본주의에 찌든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들의 인상이 달라지는 부분도 이 지점부터다. 맥케이브는 자신의 본성이 건달이라는걸 잘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꼬이는 여자는 창녀 밖에 없다고 자조한다. 그의 자조는 그가 왜 밀러 부인이 제시한 매각/이주 제안을 거부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마을 경영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하는 게이머처럼 공동체의 정 따윈 관심없고 이득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답은 간단하다. 이 마을에서 그는 선구자로 존경받기 때문이다.

아마 별 의미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하루하루 살아온 맥케이브에게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었을 것이다. 킬러 삼인조에게 거부 당하고 맥케이브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 비티와 알트만은 자신의 성취감이 부정당해서 화가 났다는걸 명백히 한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는 고전적인 서부 사나이의 모습로 돌아간다. 밀러 부인과 다툰 뒤, 사과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통속적이지만 제대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 맥케이브는 고결함 따윈 없는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사업가지만, 그 이상의 탐욕을 바라지 않고 만족해하는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이며, 거칠고 투박한 로맨티스트다. 이 너저분한 이상주의자가 마침내 모든 외피를 벗어던졌을때, 밀러 부인은 그 진심을 인정하게 된다. 일견 서부극과 어울리지 않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레너드 코헨의 포크곡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때도 이때다.

하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자본주의를 다루는 영화다. 이 말은, 맥케이브의 이상주의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밀러 부인은 그걸 잘 알고 있던게 분명하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결말은 차갑지만 비장미가 느껴지는 서부 사나이의 비극과 살아남을 자들의 단결, 한 개인의 모호한 동선을 통한 애도가 겹쳐져 있다. 같이 섹스를 하고 난 뒤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를 떠나 쓸쓸히 사라진다. 알트만이 밀러 부인이 어디로 갔는지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동안,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들고 킬러 삼인조와 어설프게 싸우다가 눈 속에 파묻혀 죽는다. 맥케이브가 역사 속으로 냉동되는 동안 알트만은 불타오르는 교회를 끄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을 중간중간 보여주면서 아이러니를 강화한다. 그리고 알트만은 맥케이브가 줬던 보석을 바라보는 밀러 부인의 눈을 클로즈업 하는걸로 끝난다.

밀러 부인의 심경이 제대로 표현되진 않지만, 적어도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와 킬러 삼인조간의 대결, 나아가 해리슨 쇼네시의 탐욕을 막을 수 없는 위치다. 그렇기에 밀러 부인은 그저 개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도주를 제안하지만 맥케이브는 거절하고 죽는다. 밀러 부인이 어떻게 살지는 미지수지만, 해리슨 쇼네시 손아귀에 들어간 마을에서 밀러 부인의 입지가 좁아질 것은 분명하다. 이제 맥케이브로 대표되던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는 끝났고 도시에서 온 자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밀러 부인 역시 자신 역시 사라질 것을 예감한다. 알트만은 그런 밀러 부인의 우울하고 허탈한 심정을 줄리 크리스티의 조용한 침묵이 담긴 얼굴과 눈을 통해 모호하지만 근사하게 표현해낸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반서부극/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불리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안티테제는 서부극의 원형을 이해해야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알트만은 반서부적 가치와 서부적 가치 사이를 오가며 아이러니와 쓸쓸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서부극을 반대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소멸의 안타까움과 애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알트만은 중간중간 서사에 복속되지 않거나, 추상적인 샷을 통해 (상술한 결말이 그렇다.) 영화의 주제를 꼬아서 표현하는데 이게 효과적이였는지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차가운 한기의 아름다움으로 한 시대의 종언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절에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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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 The Gleaners and I] (2000)

아네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목을 듣고 그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다룰 것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르다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지점 역시 밀레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는 직접 보거나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 한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이 다큐멘터리는 미술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바르다가 그 그림을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삭을 줍는다'라는 행위다. 버려진 이삭을 줍는다는 행위는 상품 가치를 잃은 잉여 생산물을 주워서 쓰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수도 있을 것이다. 밀레가 살았던 시대는 1차 산업혁명이 완료된 19세기였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체제가 정착한 20세기 이후 현대 사회에도 그런 '이삭줍는 사람들'이 있을까? 바르다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바르다는 이삭으로 대표되는 대량 자본주의의 잉여 생산물이 어떻게 재활용되는가를 추적한다. 불량 판정을 받고 처분되는 감자를 쓸어다 먹는 사람들, 폐품을 주워다 예술품을 만드는 예술가, 파장하는 시장에서 음식을 주워다 먹는 노숙자... 많은 사람들이 바르다의 카메라 앞에서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증언하고, 이에 대한 바르다 자신의 코멘트도 이어진다.

바르다가 좌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실제로 바르다의 영화는 페미니즘과 좌파적 관점을 빼놓으면 분석이 불가능해진다.), 작 중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잉여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윤택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다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잉여 생산물의 가치를 판별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아닌, 당장 먹고 살기에도 절박한 빈민들이나 관점 자체가 다른 아웃사이더들이다. 

바르다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버려지는 잉여 생산물이 과연 사회에 통용될 수 없는 '불량'인지를 묻는다. 이 다큐에서 적당한 가공 과정을 거치고 나면 버려진 잉여 생산물들은 더 이상 잉여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노숙자 보호소에서 거주하며 공부하는 청년은 그 점에서 바르다의 질문과 대답을 구체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그 이후]를 봐야 되겠지만 적어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안에서 이 청년은 지식과 삶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재분배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아네스 바르다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고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이후 영화들처럼,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잠시 불었던 DV 카메라 혁명을 빼놓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이며, 주제 의식하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르다는 DV 카메라가 누벨 바그 세대의 정신을 재해석할 수 있으며, 필름 중심의 기존 영화 제작 체계를 전복시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다큐에서 DV 카메라는 페드로 코스타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다. 바르다는 DV 카메라 하나를 들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정 도중에도, 작업 구상 도중에도 즉흥적이고 자유연상적으로 이미지를 채집하고 선별해 배치한다. 바르다는 이를 통해 카메라와 자신의 몸을 일체화시킨다. 바르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카메라 렌즈도 향하고 반대로 렌즈가 머무는 곳에 바르다의 시선도 머문다. 바르다는 이 과정에서 어느새 노년을 맞이한 여성 감독으로써 자신을 성찰하며, 누벨바그 시절 거리로 나가 생생한 배우들과 풍경을 잡아냈던 성취를 2000년대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디지털 카메라는 그 점에서 바르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도구기도 하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사라지는 과거로 남는걸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바르다는 영화 속에서 주제가와 가까운 랩을 시전하기도 한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를 통해 그림 속 이삭을 줍는 행위를 사회경제학적 관점과 DV 카메라로 대표되는 미학적 관점, 여성의 관점을 결합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원제 Les Glaneurs Et La Glaneuse는 그 점에서 프랑스어 특유의 '명사의 성' (남성형 Le와 여성형 La.)을 이용해 복잡미묘한 통찰을 함축하고 있다. 바르다는 남성형으로 이뤄진 '이삭 줍는 사람'에다 여성형으로 이뤄진 La Glaneuse를 덧붙여 이미지를 줍고 선정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난삽해보이지만 흥미로운 폭풍이다. 경제학적인 성찰을 다루면서도 바르다 자신의 독백과 사소한 일상을 스케치하는 클립들이 튀어나오는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로 보자면 끊임없이 불어나는 눈덩이를 (혹은 게임 [괴혼]에 여러 물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별) 연상케한다. 때문에 정돈되어 있지 않고 마구잡이로 진행된다고 느낄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을 줍는 행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바르다는 이 다큐가 어떤 모양새를 취해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치밀한 사유를 거쳐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바르다는 동료인 크리스 마르케와 피에르 롬의 [아름다운 5월]이 보여줬던, 중심이 없는듯 하면서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인터뷰와 자료화면들 간의 사유를 추구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21세기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20세기의 역사로 사라질듯 보였던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바르다 자신도 예측과 달리 90이 되어서도 신작을 내놓을 정도로 정정한걸 보면 이 다큐가 어떤 활력이 되었던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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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의 첫 장면은 황급하게 노빌의 저택을 빠져나가는 하인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각자 이유를 대면서 저택을 빠져나가지만 그 이유가 알리바이라는건 명백하다. 왜냐하면 저택엔 곧 부르주아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인들의 머릿속엔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마치 모종의 사실을 깨닫고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되겠어라고 외치며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티는 계속되어야 하고, 하인들이 없어도 그들에겐 집사가 있다. 노빌 부부를 위시한 부르주아들은 하인들이 빠져나간것도 모르고 예정된 파티를 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음식, 멋진 음악, 아름다운 그림들... 부뉴엘은 하인들이 알수 없는 이유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잊은 것마냥 이들의 파티를 보여준다.

바보 같은 부르주아. 이게 지옥의 저택인지도 모르고! 부뉴엘과 원작을 쓴 호세 베르가민이 마련한 이 저택은 예삿 저택이 아니다. [절멸의 천사]는 도입부에 등장했던 불가해한 탈출이 가져다주는 카오스를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먼저 피아노 독주회 도중 그 유명한 닭발이 등장하는 샷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이 닭발이 왜 등장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절멸의 천사]는 이유를 대면 지는 초현실주의자가 만드는 영화다. 그러니 닭발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소도구로써 인식하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독주회라는 우아한 상황에서, 고급 레스토랑에도 안 어울릴법한 닭발은 시공을 뒤흔들 폭풍의 전조다. [절멸의 천사]는 그 유명한 설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문명의 보호를 받는 부르주아를 야만으로 퇴화시키는걸 보여주는게 최우선인 영화다. 닭발은 연주회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부뉴엘의 중지 손가락으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런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소품과 거기서 기반한 비논리적인 샷들은 [절멸의 천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닭발을 꺼내는 샷을 기점으로 부뉴엘은 영화의 개연성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첫번째 징조는 의지의 삭제다. 부뉴엘은 아무렇지 않게 파티가 끝나고 나가려는 인물들을 붙잡아 뇌세척을 하고 재운다. 이 과정이 은근슬쩍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의심하지만 그 의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한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 계급은 다양한 공간에서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릴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부르주아 문화의 중심이지만 역설적으로 생존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인 접대실"에다 가둬버린다. 피아노와 소파, 미술품이 밥을 먹여주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한정된 공간 밖에 머물수 없게 된다. 심지어 그들을 보좌해줄 하인들조차 없다. (재미있게도 부뉴엘은 집사장도 부르주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간 관리자도 노동자 계급을 탄압하는 부르주아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본 것일까?)  [절멸의 천사]는 부르주아의 저택이 '생존과 본능의 공간'과 '문명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부르주아를 보살피는 수족이 없으면 무너지는 곳이라는걸 폭로한다.

부뉴엘과 베르가민은 낄낄거리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캐릭터의 이성을 붕괴시킨다. 의지가 삭제된 캐릭터들은 그래도 여기 머무르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갈려고 생각은 하지만, 그 경계선상에 서는 순간 중요한 연결고리를 잊고 '아 그 뭐더라.' 하면서 돌아선다. 등장 인물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악랄하게도 그 해결책은 중요한 '선'을 넘지 못한다. 절박한 갈망은 있되, 의지와 해결책은 원천봉쇄된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초반부에 등장한 하인들의 도주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절멸의 천사]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언제든지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빠져나갈수 있지만 부르주아는 그러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웃는다.

접대실의 물자가 바닥날수록 합리적으로 판단할 이성은 본능 앞에서 초라해진다. 절정인 세번째 단계는 당연하게도 아포칼립스적 생존 투쟁기다. 부르주아는 이 순간부터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근친상간, 유치하지만 무시무시한 투닥거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자, 굴러다니는 동물뼈, 카발라에 심취해버린 부르주아들, 마약, 잘린 손의 호러스러움... 부뉴엘은 중간에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 시퀀스를 삽입하면서 그들을 한껏 비웃는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비슷하게 부르주아의 문명 속 고립극을 다룬 J.G.발라드의 [하이 라이즈]의 선조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난처함은 구경거리가 된다. 

부뉴엘은 이 황당한 문명 속 아포칼립스를 벽에 있는 수도 파이프를 뜯어서 목을 축이는 시퀀스와 갑자기 저택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동선으로 극대화한다. 문명의 화려함을 누리기 위해 벽 뒤에 은폐한 수도 파이프는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기계장치의 베르가민과 부뉴엘이 바깥에서 보낸 양은 자유롭게 '선'을 넘나들며 부르주아를 희롱한다. 그 앞에 선 부르주아들은 굶주린 짐승과 다름없다. 부뉴엘은 은폐된 소도구 (파이프)의 폭로와 두 동선의 대조 (갇혀있는 부르주아와 저택 밖에서 들어온 양)로 부르주아의 허울을 벗겨낸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는 의지만 사라진다면 문명과 가장 멀어져 추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덤으로 이뤄지는 가톨릭 모독은 더욱 노골적이다. [절멸의 천사]에서 가톨릭과 가톨릭 예술은 말그대로 변기통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의 설정이 상당히 인공적이고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 속 부르주아들은 현실에 속해있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창작자의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쥐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 속 캐릭터 설정은 일관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단적으로 이 영화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부르주아 캐릭터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성격보다는 일련의 기행들로 기억된다. 심지어 각 시퀀스 별로 캐릭터들의 설정이 일관성도 없다. 하지만 일관성 없이 캐릭터가 그려짐에도 영화의 카오스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에 더욱 매정하게 다가온다. 부르주아의 캐릭터 따윈 아무런 상관없다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캐릭터들을 그냥 멍청이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들을 모욕하는 법을 알고 있다. 상술했지만 이 부르주아들은 나름 이성적으로 재난을 풀려고 하는데, 이 점 때문에 [절멸의 천사]은 오히려 더 매정해진다. 그들은 똑똑하지만 베르가민과 부뉴엘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여기다 부뉴엘은 갑작스럽고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담은 샷과 몽타주로 서사를 흔들어놓고, 캐릭터의 일관성을 발기발기 찢어가면서 카오스를 만든다. 부뉴엘은 그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던가 데이빗 린치로 이어지는 전후 현대 영화의 비논리적 구성과 후대 "병맛"의 선구주자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절멸의 천사]는 명성과 달리 디씨 막장 만화들처럼 가볍게 즐기면 되는 영화다.

[절멸의 천사]의 결말 부분은 싱거워 보인다. 이 영화는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기대할법한 전멸로 끝나지 않는다. 부뉴엘은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외국인인 레티시아와 피아니스트 실비아에게 준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피아노 독주회를 재현하는 것으로 저택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야만의 끝에서 예술와 문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그들은 간신히 그 공간을 빠져나올 의지를 얻게 된다. 예술에 대한 긍정일까? 그것보다는 상황 자체를 재구성할 논리를 기어이 부여함으로써 탈출했다고 보는게 좋을듯 하다. 결국 부르주아들은 예술과 외부인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올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견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부뉴엘은 그 다음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성당으로 장소를 바꿔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뉴엘은 예정된 아포칼립스를 보여주지 않고 군중에게 발포하는 경찰과 또다시 흘러들어오는 양떼를 보여주면서 좀 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부뉴엘은 부르주아의 꼴불견은 총을 쏴댈 상황까지는 아니였지만, 가톨릭의 꼴불견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풍경이라는걸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스페인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부뉴엘 자신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끝으로 부뉴엘은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데, 부뉴엘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멕시코 시절을 총결산하고 멕시코보다 좀 더 자유로운 영역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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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에드만 [Toni Erdmann] (2016)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때, 약간의 신랄함을 동반한 유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때 그 예감은 완전히 박살났다. 영화의 첫 샷은 문이다. 금방이라도 열릴것 같은 문은 예상과 달리 빨리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드디어 택배 기사가 나타나고 문이 열리지만, 분장하고 나타난 토니 에드만은 생뚱맞다. 유머는 빗나가고, 리듬과 리액션도 그렇게 활기차지 않다. 빈프리트/토니 에드만은 사람들이 웃길 바라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할 뿐이다. 결국 그는 허겁지겁 유머를 접을수 밖에 없다.

차라리 이 영화의 도입부는 초라하게 몰락한 히어로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하고 닮아있다. 빈프리트 몸에 붙어있는 혈압측정기는 그의 육체가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으며, 피아노 강습은 짤린데다 부인과는 이혼한지 오래다. 같이 살고 있는 개 역시 죽어가는 중이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토니 에드만]은 [로건]보다도 훨씬 매정하다. 빈프리트는 자신이 슬프고 지쳐있다는걸 직시하지 못하고 계속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던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토니 에드만]은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세상에 사는, 어느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늙은 피에로의 분장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도입부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히어로의 불가능성'과 연계된다.

[토니 에드만]를 이해하려면, 샷 내 대화와 행동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것이 어떤 뉘앙스를 띄며 맥락을 형성하는지 봐야 한다. 먼저 주목해야 하는 대화는 빈프리트와 어머니의 대화다. 죽어가는 개를 안락사시키지 그러냐라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빈프리트의 대답은 웃기기 보다는 날이 서 있다. "양로원에서 안락사 일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를 안락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것."이라는 빈프리트의 대답은 블랙 유머적 비꼬기에 가깝다.  대체 왜 빈프리트는 어머니를 그런 가시돋힌 말을 내뱉는 것일까? 어떤 멜로드라마적 사연이 있어서?

아니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두 캐릭터의 세대와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주목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영화가 독일 영화라는 것도 주지하길 바라고 있다. 이 부분은 단서가 없으면 독일 바깥 사람들은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행히도 아데가 영화 마지막에 단서를 던져놨기에 놓쳤더라도 그 부분을 본 뒤 이 영화의 도입부를 다시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빈프리트 어머니와 빈프리트는 독일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전후 세대인 빈프리트는 그걸 알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세대가 저지른 나치 범죄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빈프리트의 대사는 죽음은 당신 생각과 달리 간단히 이뤄지는게 아니지만, 어머니와 빌리를 사랑하니 안락사시키진 않겠다라는 복잡미묘한 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그 복잡미묘함과 간극이야말로 [토니 에드만]이 영화 내내 구축하고 있는 이상한 리듬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다.
 
서로 사랑하지만 어쩔수 없이 배어있는 세대의 결점에 충돌하고 밀려나는 [토니 에드만] 속 가족 관계는 빈프리트와 그의 딸 이네스로 이어진다. 그들이 영화에서 처음 만났을때 빈프리트의 분장이 이네스의 옷에 '묻는다'. 이네스는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얼룩을 지워내려고 애쓴다. 얼룩이 묻고 그걸 닦아내려고 애쓰는 행동은 [토니 에드만] 내에서 자주 나오는 행동이며, 상술한 세대론과 겹쳐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네스는 아버지의 얼룩과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워내려고 한다. 그에 대답하듯이 이 시퀀스에서 관계의 어색함은 더욱 증폭된다. 아버지는 딸의 깜짝 생일 파티가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들어왔고, 딸은 이 상황을 의례적인 일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일로 도피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랑 대화를 나누려고 할때 이 불편함과 어색함은 실체화된다. 자신을 일부러 외면하는 딸에게 차라리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는 아버지의 블랙 유머적 비판은 딸의 무덤덤한 환영에 막혀버린다. 소통의 시도였던 유머가 통하지 않는 셈이다.

[토니 에드만]이 놀라운 지점은 애완견 빌리의 죽음 시퀀스와 딸을 찾아가는 첫 장면이다. 빈프리트의 슬프고 지쳐있는 감정이 처음으로 구체화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젠 빈프리트에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는 빌리의 죽음을 애도할줄 모르며, 루마니아로 떠나버린 딸은 빌리를 애도할수도 없다. 아내는 이미 타인이 된지 오래다. 오로지 혼자서 애도를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빌리의 무덤을 판 뒤 마당 한 구석에 빈프리트가 쓰러져 있는 샷은 그 점에서 슬프고 두렵다. 이 샷에서 빈프리트는 빌리의 시체랑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샷이 끝날때까지 그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 장면만 떼놓고 보면 빈프리트는 빌리를 따라 죽어버린것만 같다. 마렌 아데는 이 시퀀스에서 빈프리트를 정물처럼 다루면서 죽음과 애도, 슬픔의 감정을 한 세트로 묶어서 보여준다.
 
[토니 에드만]은 여기서 장면을 끊고 바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있는 이네스가 일하는 직장으로 넘어간다. 아마 어느정도 영화의 언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황했을 것이다. 독일과 루마니아가 아무리 EU로 국경을 열었다고 해도, 물리적인 거리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빈프리트 (나아가 몽타쥬)는 물리적 거리를 무시한 채 집에서 이네스의 직장으로 워프한다. 그가 하는 행동은 더 황당하다. 출근하는 이네스 앞에서 마치 자신이 왔다는걸 시위하듯이 스윽하고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네스는 몇 번 슬쩍 보고 난 뒤 그냥 재빠르게 가버린다. 이네스는 빈프리트가 왔다는걸 알았지만, 거기서 아는체했다면 자신의 커리어가 작살난다는걸 알기에 그 자리에서 빈프리트를 무시한다. 물리적 거리를 무시하고 딸 앞에 나타난 빈프리트의 동선이 슈퍼히어로적 황당함과 비현실성이 묻어나온다면, 이네스의 무시는 현실의 냉엄함을 드러낸다. 영웅 서사에서 영웅은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각성한다면 빈프리트는 빌리의 죽음을 통해 유머의 영웅로써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마렌 아데는 그 탄생마저도 무덤덤한 리액션으로 초라하게 처리한다.

이네스는 대신 자신의 비서 안카를 빈프리트에게 보내 환대한다. 이네스의 이런 행동은 마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처럼 영화 내내 이네스는 누군가의 대리로써 일하거나 대리를 보내 자신의 의사를 대신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네스의 직업은 기업의 아웃소싱과 관련된 상담역이다. 이네스를 극도로 효율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냉혹한 최전선에 있는 것이다. 이네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졸라매고 자신의 가치를 기업에 맞추려고 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를 떠나는 순간까지 이뤄지는 시퀀스들은 이네스 나아가 자본주의의 리듬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있다. 빈프리트의 묵언 시위에 대해 대답하듯이 이네스는 가장 공적인 영역에 가장 사적인 인물인 아버지를 데려가 자신의 리듬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과시하려고 한다. 전후 세대의 투쟁과 낙관주의는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하지만 그런 과시는 좀처럼 이네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고객은 이네스의 제의에 대해 건성으로 넘겨들으며 이네스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객의 부인과 함께 원하지도 않는 쇼핑을 하러 가야 한다. 빈프리트의 블랙 유머는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라는 사적 영역에서 이뤄진 유머를 공공연연하게 공적 영역에 뿌리고 다니며,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독일인들의 시혜적 태도 ("우에카라메센"이 가장 어울리는 단어일것이다.)에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별다른 액션 없이 앉아서 대화하는 샷으로 이뤄지는 [토니 에드만]의 중반부는 가식 아래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정치사회적 혈투다. 하나의 샷 속에서도 대화 샷들은 어색하게 빗나가고 행동과 표정 속에선 냉담한 순간과 수직적인 권력 관계가 비져나온다. 그것은 성차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적 차별이기도 하고 국가간의 관계이기도 하다. 빈프리트의 삶이 죽음과 소멸,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실패의 비극에 갇혀 있다면 이네스의 삶은 효율 중심의 가식적인 관계와 사회적 편견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초라함을 보여줬던 긴 리듬의 샷을 이용해 이네스의 일상을 파헤친다. 그리고 거기서 나치 시절 착취한 뒤 사탕발림이 담긴 독일 자본주의에게 착취당하는 루마니아의 현실부터 시작해 성차별과 신자유주의의 냉엄함을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담아내고 있다.

빈프리트는 이 과정을 보면서 딸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심경인지 알게 된다. 이네스를 향해 그러고도 인간이 맞냐는 빈프리트의 일갈은 당연하겠지만 신자유주의를 향한 이상주의의 일갈이며 딸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는 발언이다. 사실 이네스도 자신이 비인간적이며 행복하지 않다는걸 알고 있다.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빈프리트에게 이네스는 대놓고 말한다: "행복이요? 그건 제게 너무 먼 단어에요." 치즈 강판이라는 생일 선물로도 해소되지 않고, 마음껏 푹 잘 수도 없는 이네스의 스트레스는 결국 푹 자다가 전화를 놓치는 사건으로 폭발하고 만다. 아버지의 방문이라는 사건과 클라이언트의 환심 사기라는 사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게 밝혀진 뒤 빈프리트는 물러나기로 한다. 이때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따라다니던 카메라를 이네스에 맞춰놓고 이네스의 심적 고통을 활짝 열어보인다. 이네스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리듬엔 아버지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버렸다. 빈프리트도 그 사실을 깨닫고 사라지는 걸 선택한다. 유머의 히어로는 이렇게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만 했다면 [토니 에드만]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두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려낸 드라마로 끝났겠지만, 마렌 아데는 이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는다. 아버지가 떠난 후 이네스는 아버지를 위해 짐을 싸다가 찧은 발톱을 제거하려다가 옷에 피를 묻힌다. 아버지에 대한 얼룩진 감정을 어떻게든 지우려고 애쓰는 이네스. 그런 이네스 앞에 갑자기 빈프리트는 가발과 틀니를 낀 채 "독일 대사이자 컨설턴트 업무를 하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 이네스와 직장 동료들 앞에 나타난다. 이네스는 반평생 들었던 "시덥잖은" 유머를 신선한 유머인 마냥 받아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부분에서 [토니 에드만]은 비밀 정체성를 다루는 히어로 영화 구조를 뒤집어 영화를 진행한다. 비밀 정체성을 가진 히어로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나는 히어로 영화랑 달리, [토니 에드만]은 진짜 정체성일때 실패하는 히어로가 비밀 정체성을 착용하고 다시 나타나 판을 뒤엎는다.

[토니 에드만]이 이상한 영화라면, 무수한 롱테이크를 골라 선택해 잘라서 붙인 영화의 편집 방식을 비롯해 영화가 리듬을 구축하고 강조하는 방식이, 내러티브 영화의 관습을 인정하면서도 기이하게 뒤틀고 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초라하고 생뚱맞아보이고, 느릿한 페이스로 진행되는 영화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동시에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직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네스의 회의 장면을 길게 묘사하는 시퀀스가 있다. 토니 에드만이 난입하지 않고 이네스의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따분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퀀스가 영화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그 다음 시퀀스들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마렌 아데는 샷 나아가 개별 시퀀스 속에 등장하는 서사적 장치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도록 한 뒤, 토니 에드만이 등장한 이후 그 요소를 계속 패러디하고 모방한다. [토니 에드만]이 웃긴 이유는 이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요소들이 다음 시퀀스에서 기상천외하게 변주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생뚱맞음과 어색함을 모면하려는 인물들의 행동이 더욱 기괴하게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인물의 불가능성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애매하고 너저분한 회색 지대로 떨어진다. 마렌 아데는 이렇게 유기적으로 직조된 리듬을 마음대로 구부러트리며 인물들을 굴러가게 만든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 시퀀스들을 분석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게 황당한 개별 사건들이 개연성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부러짐을 담당하는 토니 에드만은 어떤 캐릭터인가? 그는 이네스처럼 상담역에 종사하고 있으며 유창하지만 나사 빠진 비지니스 영어를 사용한다. 대놓고 이네스를 패러디한 캐릭터인 셈이다. 거기다 인생에 방귀 쿠션 말고 대안이 있냐는 이네스의 비난에 진짜로 방귀 쿠션으로 등장해 성차별적인 직장 상사를 비웃고, 애완견 빌리의 죽음은 45년 된 애완거북의 죽음으로 패러디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치즈 강판에 간 치즈 가루를 연상케하는 가루를 머리에 흩뿌린다. 그야말로 처음은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재현되는 셈이다. 전반부의 서사적 장치들이 황당하게 비틀려서 등장하는 동안 이네스의 대응과 행동도 괴상해진다. 정사를 나누던 도중 애인의 정액을 케이크에 묻혀서 먹는다던가 아버지를 마약 파티로 데려가 마약을 하는 모습을 노출하는 과정은 도무지 상식적인 행위라 볼 수 없다. 이네스의 기행 역시 전반부에 등장했던 서사적 요소의 극단적인 패러디라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런 패러디조차도 생뚱맞고 어색하기 그지 없다. 비밀 정체성은 시작하자마자 딸에게 간파당한지 오래고 빈프리트도 이 게임을 딱히 엄격하게 진행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빈프리트가 이네스 집에 숨어들어 이네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독창회로 끝나는 파트는 그 점에서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구분되었던 토니 에드만과 빈프리트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빈프리트가 가지고 있는 낙관주의가 마냥 긍정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니 에드만의 활기는 차가운 신자유주의적 해고에 가로막히고 애원과 '유머를 잃지 마세요.'라는 진심어린 충고는 공허한 공수표처럼 남발될 뿐이다. 풀이 죽은 토니 에드만에게 이네스는 당신이 믿는 이상주의가 얼마나 공허한지 아냐고 쏘아붙이지만 금세 눈물을 흘리고 만다.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빈프리트의 어머니의 비윤리성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유머와 삶의 지혜는 이네스도 내심 공감하지만 쉽게 성립될 수 없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다시 인물의 불가능성을 끌어들여 분열된 정체성을 지닌 채 세대 간의 깊은 간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피에로의 슬픔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쉽게 가라앉지 않은 서운함을 억지로 누른 채 터져나오는 이네스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은 정말로 굉장하다. 마렌 아데는 지나치게 늘어지는 도입부와 불안한 음정, 노골적으로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 이네스의 표정에서 얼룩과 간극 속에 서 있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리고 곡을 진행하면서 감정을 고조시키며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절창 부분에서 곡이 가지고 있던 달콤한 감상주의와 이상주의를 어떻게든 간극을 좁히고 달라지고 싶어하는 인물의 고통이 시너지를 일으켜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잡아낸다. 행복해보이(지만 이네스를 수족으로 부리는 독일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는 루마니아 대가족 앞에서 벌어지는 독일 핵가족 구성원이 벌이는 복잡한 감정의 전투라는 점에서 이 시퀀스는 [토니 에드만]의 웃픈 순간들과 정치사회적 맥락을 집약한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독창이 끝난 뒤 이네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떠나가고 빈프리트는 또다시 실패했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이네스는 자신의 생일 파티를 희한한 방식으로 일그러트린다. 토니가 방귀 쿠션으로 성차별적인 구실을 대며 단합을 강요하는 강압적인 대화의 리듬을 일그러트렸다면 이네스는 옷을 입다가 다 벗어버린 뒤, 찾아온 사람들에게 황당한 이유를 대며 게임에 참여하라고 한다. 물론 이 게임은 외부자였던 토니와 달리 마냥 공평한 관계로 이뤄지지 않는다. 비서 안카 같은 경우엔 상사인 이네스의 눈치를 보고 있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네스는 자신과 상사 게롤트, 안카의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다 벗겨버리면서 직장 내 관계를 무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이네스는 토니 에드만의 유머를 받아들여 신자유주의를 그럴싸하게 속인 뒤 벗겨버린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채 우스꽝스러워진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태어난 듯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와중에 동료인 슈테프나 남친이 이 놀이에 동참하지 않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이네스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아마 이 시퀀스가 끝난 뒤, 그들은 자연히 이네스랑 멀어졌을 것이다.

이때 털을 뒤집어 쓴 쿠케리가 등장한다. 이 쿠케리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탈을 벗지 않지만 쿠케리의 행동을 보면 그게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인물들이 이 쿠케리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층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걸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흥미롭다. 당혹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는 안카와 꽃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이네스, 그리고 쿠케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놀라는 게롤트의 대조는 이들의 권력 관계를 생각케 한다. 쿠케리가 새해맞이 축제에 등장하는 악귀를 쫓는 불가리아의 탈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왜 마렌 아데가 쿠케리를 누드 파티에 불러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쿠케리와 홀딱 벗은 이네스는 완벽하게 대조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의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하고 만끽한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움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마렌 아데는 쿠케리와 이네스를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이네스의 시점 샷으로 쿠케리를 쫓아가면서 쿠케리가 다정하게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본다. 직후 이네스는 쿠케리를 '아빠'라 부르며 포옹한다. 이네스의 응시를 통해 아파트 내에서는 모호했던 쿠케리의 정체가 확연해지는 순간 이네스와 빈프리트는 마침내 얼룩을 묻히지 않고 포옹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포옹에서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의 행복한 장난 이후, 이네스는 서서히 뒤로 빠지면서 엉거주춤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그들은 가면을 써야 짧은 포옹을 나눌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냉엄한 현실에 어정쩡하게 끝난다. 이네스에겐 끝나지 않은 생일 파티가 있으며, 빈프리트도 그걸 안다. 그 점에서 이 장면은 완벽한 봉합이라기 보다는 짧은 면회에 가깝다. 하지만 빈프리트는 애써 막지 않는다. 이네스도 애써 머물지 않는다. 이전 시퀀스의 눈물과 실망과 달리 그들은 그렇게 끝날 수 있다는걸 인정하면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쇠잔한 육신을 다시 꺼내들어 마지막 파트를 장식한다. 기나긴 접촉 시도 끝에 이뤄진 행복한 포옹. 하지만 빈프리트 역시 자신의 어머니처럼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며 이네스의 셔츠에 튄 피는 끝내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마렌 아데는 그런 그림자와 얼룩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을 담아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낸다.

[토니 에드만]의 결말이 빈프리트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어찌보면 논리적이다. 마렌 아데는 선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는 이제 완전히 죽었다. 부녀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빈프리트일것이다. 하지만 이네스는 여전히 바쁘고 원하던 중국은 가지 못한 채 독일에서 더 멀어진 싱가포르로 간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그걸 알듯이 빈프리트는 이네스를 데리고 어두운 창고로 들어가서 어머니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어둠을 반추한다. 그리고 빛으로 가득찬 바깥으로 나온 부녀는 인생에 대한 상투적인 교훈을 나눈다. 상투적이지만 맞는 말이고, 마렌 아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토니 에드만]의 마지막 놀라움은 그 뒤에 있다. 틀니와 나치 시절 모자를 쓴 이네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빈프리트는 카메라를 찾겠다고 사라지고, 기다리던 이네스는 틀니와 모자를 벗는다. 그리고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기다리며 골똘히 상념에 잠긴 이네스의 얼굴 샷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몇몇 평자들은 이 결말을 상당히 우울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세대의 간극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며, 부모의 소멸만이 예정된 이네스의 현실은 달라진게 없다고.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분명 [토니 에드만]이 도달한 결말은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어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토니 에드만]의 결말은 단순히 비극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회색 지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네스는 더 이상 전화로 도피하지 않으며, 스스로 틀니와 할머니의 모자를 찾아내 쓰고 빈프리트를 향해 웃어보인다. 일단은 마렌 아데는 두 사람의 포옹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프리트가 영화적으로 소멸했을때 (결말 이후 그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영화는 그걸 보여주지 않기에 소멸했다고 봐야 한다.) 이네스는 그걸 벗는다. 윗 세대의 물건은 분명 자신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이 이네스의 개성이 될 수 없다. 이네스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바더 마인호프로 대표되는 독일 68세대가 과거와의 결별 시도는 극렬하기로 유명했다.) 자신도 자신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걸 깨닫고 고민한다.

이네스의 고민은 마렌 아데 본인의 고민이기도 한다. 자신과 부모 세대의 간극을 인정한다는 것. 곧 다가올 부모 세대와의 이별을 받아들인다는 것.할머니 세대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부모 세대의 유머를 가져오면서도 변화한 현실의 벽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마렌 아데는 그 질문에서 영화를 멈춰세운다. [토니 에드만]이 성숙한 영화라면 긍정과 부정을 모두 껴안은채 창작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영화적으로 치열하게 사유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와 마렌 아데 감독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 [토니 에드만]은 어설프고 너저분한, 평범한 관계의 회색성을 포착하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치열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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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빙 [Loving] (2016)

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

2017/01/13 - [Deeper Into Movie/리뷰] - 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나 임신했어." 고요한 어둠 속 여자의 얼굴에 이 대사가 깔리면서 제프 니콜스의 [러빙]은 시작한다. [러빙]이 흥미로운 점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시작 부분이 없이 처음부터 전개 단계에 들어선다고 할까.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그런 이야기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니콜스는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다가 사랑에 빠졌을수도 있고, 동네 학교에서 친해졌을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은 이미 사랑에 빠져있고, 변치 않을 것이다.

제프 니콜스는 러빙 부부가 가진 사랑의 견고함의 증거로 임신을 제시하면서, 관객이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니콜스의 의도에 화답하듯이 다소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과 말이 나온다. "그거 잘 됐네." 도래한 사건과 사건에 대한 긍정, 조엘 에저튼과 루스 네가의 표정과 간단한 샷/리버스 샷, 짧은 대사를 통해 [러빙]은 시작하자마자 평범하지만 중요한 변곡점을 그려낸다. 그들은 어둠 속 고요에 있지만, 기쁨의 순간을 맞이했다.

어떤 평자들은 이 영화의 도입부가 니콜라스 스파크 소설이나 다름없다는걸 인정하자고 했는데 절반은 맞는 말이다. [러빙]은 일상의 통속성을 영화적이지 않다고 내치지 않고, 그걸 끌어안으면서도 새로운 각도로 보여주려고 하는 영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러빙]에서 식사 장면이라던가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장면들의 비중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러빙 부부를 불멸로 만들어 준 [라이프] 지의 사진을 찍는 그레이 빌렛이 러빙 가족을 방문하는 시퀀스는 일상의 통속성에서 아름다움을 꺼내고자 하는 니콜스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빌렛은 자신이 겪었던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아이들과 러빙 부부에게 들려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서 잠깐의 틈을 빌어 특별한 순간을 잡아낸다. 고요하지만 분명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의 순간을 잡아내는 이 시퀀스는, 오히려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통속성의 개념이 얼마나 게으른지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자동차 경주 장면, 미장이 일을 하는 리처드의 일상, 밀드레드 가족과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는 리처드의 장면이 지나가고 [러빙]은 두번째 변곡점에 들어선다. 공터에서, 리처드는 밀드레드를 데려다 놓고 여기다 당신, 나아가 우리들의 위한 집을 지을거라고 말한다. 이때 니콜스의 카메라는 버지니아 캐롤라인 카운티의 드넓은 땅을 보여준다. 땅에서 비롯된 잉태에 대해 그 잉태에 걸맞는 기둥과 벽돌을 쌓겠다는 다짐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니콜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이 존 포드에서 기원한 "땅과 거기에 뿌리박은 공동체에 물리적으로 정박"하는 샷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러빙]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빙]의 도입부에는 의미심장한 샷이 있다. 자동차 경주를 즐겁게 관람하는 리처드와 밀드레드 부부를 바라보는 익명의 청년들을 담은 샷이다. 이들은 익명적 존재로 머물지만 그렇기에 이 샷은 어딘가 불길함을 안겨준다. 러빙 부부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백인 집단의 응시가 절대로 축복이나 인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러빙 부부가 그들의 관계를 공적으로 인정받으러 워싱턴 D.C.에 갔다온 뒤 일이 터지고 만다. 버지니아 주가 연방 정부는 인정해도 우리 주는 인정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관계를 훼방놓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러빙 부부는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금기시되었던 흑백 커플이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서 비롯된 차별에서, [러빙]은 행복한 부부의 이야기에서 집으로 대표되는 행복이 이 땅 위에서 뿌리박기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화두로 넘어간다. 만약 당신이 [로건]을 거쳐 이 영화로 왔거나 그 반대라면 [러빙]을 [로건]에 등장하는 먼슨 부부의 프리퀄이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두 영화에서 집은 언제나 파괴될 위기에 놓여있으며 어른인 부부는 힘겹게 그 집을 지키거나 돌아가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니콜스 역시 맨골드처럼 도회적 요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중에서 밀드레드가 버지니아 주 정부랑 싸우기로 결심한 계기가 지극히 도회적인 자동차와 콘크리트라는 위협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제프 니콜스가 이 실화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를 수락한 이유는, 남부 백인 지식인으로써 부채 의식과 더불어 그만의 관심사를 풀어낼 기회라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항상 불안 위에 서 있으면서도 신뢰와 사랑으로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하지만 이전까지 불안의 근원이 모호하게 설정되었다면 (코스믹 호러였던 [테이크 셸터], 장르화된 메타포로 다뤄졌던 [머드]와 [미드나잇 스페셜]) [러빙]은 그 불안이 어디서 오는가를 응시하고 그려내는 영화다. 

[러빙]에 땅에 정착하려는 부부를 거부하는 것은 부당한 공권력이며, 나아가 익명의 시선에 숨어있는 차별이다. [러빙]이 현명한 부분은, 그런 일상을 엄습하는 차별을 형상화하는데 멜로드라마틱한 묘사를 배제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이 있다. [러빙]에서 이뤄지는 인종 차별은 마치 잡히지 않는 기체 또는 공기처럼 그려진다. 러빙 부부는 다른 인종차별 영화에 나오는 피해자들처럼 극단적인 폭력이나 수난은 당하지 않는다. 밀드레드가 소송을 걸기로 마음 먹은 뒤, 인터뷰에서 '저희를 비난하는 분들도 많지만'이라고 언급하긴 하지만 [러빙]은 그 비난하는 얼굴들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무표정한 익명의 사람들의 응시 샷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러빙 부부가 사랑을 나눌때에도, 평범한 일상을 그릴때에도 그 익명의 응시 샷들은 갑작스럽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러빙]에서 무표정한 응시 샷들은 [테이크 셸터]의 불길한 멸망의 징조 샷처럼 어떤 영화적 공기다.

이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러빙 부부의 일상에 침입하지 않지만, 분명히 위협적이다. 그것은 백인 청년들이나 카운티 경찰처럼 경멸을 담은 응시기도 하며, 임신한 밀드레드의 배를 바라보는 흑인 점원처럼 '앞날이 걱정된다'라는 식의 체념의 응시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진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버지니아 주 정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을 통해 악의적으로 실체화된다. [러빙]이 관객을 눈물짓게 만든다면 작위적이지만 무서운 폭력 앞에 단단한 개인들이 힘없이 수그리는 순간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빙 부부가 버지니아 주 법정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추방 명령을 언도받을때 니콜스는 흰색으로 이뤄진 빛과 색감을 강조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백인 중심주의/차별이 그때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공기'였던지, 그 공기로써 악의가 쉽게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니콜스는 인물들의 불가능성이 사건이 아닌 어떤 공기에 짓눌려 나타는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다.

[러빙]은 그 기체처럼 그려지는 차별을 그리면서, 거기에도 상대적인 격차가 있다는 점도 명시한다. 이 격차는 백인인 리처드와 흑인인 밀드레드가 겪는 수난의 강도에서 먼저 제시된다. 니콜스는 같이 차별받는 두 사람이 같은 시간 속에서 어떤 액션과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지 대조하면서 격차를 제시한다. 리처드는 얼마 안 있어 환한 바깥에 서게 되지만, 밀드레드는 감옥 구석에 웅크려서 언제 올지 모르는 해방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니콜스는 그 상대적인 격차 속에서 백인이 겪어야 하는건, 일종의 훈육이라고 말한다. 직후 경관이 리처드를 불러놓고 "너같은 무지렁이는 모르겠지. 울새는 울새끼리, 종달새는 종달새끼리 살아야 한다는 건."라고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때 그의 표정과 몸짓은 마치 법칙을 모르며 까부는 철없는 아이를 혼내는 어른의 모습이다. 이 훈육의 제스쳐야말로, 니콜스가 생각하는 차별의 작동방식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며 사회가 제공하는 기초 교육만 받았던게 분명한 리처드와 밀드레드는 차별 구조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견식은 가지지 않았다. 러빙 부부는 차별에 본능적인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걸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소수자 커뮤니티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밀드레드랑 달리, 리처드의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리처드는 그 커뮤니티가 겪는 차별의 부차적인 존재에 가깝다. 설정상 리처드는 밀드레드와 같은 흑인들과 같이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흑인 밑에서 일을 하면서 한번도 그들을 혐오하지 않았다. 리처드의 아버지는 작중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리처드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물러받았을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렇게 리처드가 믿었던 당연하다고 생각한 가치관이 흔들리는 순간, 상술한 기체로써 위협의 샷들이 리처드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영화에서 리처드의 불안이 드러나는 시퀀스가 몇 군데 있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밀드레드랑 같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시퀀스를 보자. 이 시퀀스를 찍으면서 니콜스는 [러빙]보다 먼저 찍은 [미드나잇 스페셜]을 의식했던게 분명하다. 한밤중 도로라는 시공간 설정과 조심스럽고 신중한 배우의 연기, 자동차라는 수단이 그렇기도 하지만 이 장면엔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언제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로이 일행의 불안함이 그대로 옮겨와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엘 에저튼도 그대로 옮겨왔다.) 두번째는 소송 때문에 대중에 노출된 이후로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다가 해코지한다고 쫓아온다고 착각한 채 미친듯이 돌아오는 리처드의 귀갓길이다. 니콜스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이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긴장감이 [테이크 쉘터]와 [머드],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알 수 있다. 기체/공기로써 불안감이 남성 주체에게 들이닥치는 순간, 남성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무너질 공포에 휩싸인다. 제프 니콜스는 그 명제에 관심을 가지고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러빙]은 그럼에도 리처드가 차별에 싸우기로 마음먹은 밀드레드처럼 위대해질수 있었던 이유를, 기체/공기로써 내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감수하면서도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리처드의 흑인 친구가 답을 내놓지 않았는가. 리처드가 밀드레드랑 헤어졌다면 리처드는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리처드는 그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지만, 그는 돌아와서 밀드레드에게 "나는 당신을 지켜줄수 있어."라고 말한다. 헤어진다는게 쉬운 답이라는걸 알면서도, 그 구조를 전문적으로 분석할 두뇌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는 포기하지 못한다. 그저 가장 단순한 말과 행위을 되뇌이면서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며 밀드레드와 함께 나아가고자 한다. 그 장면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와 접촉을 각인시키고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를 방해하는 기체로써 차별을 명징하고 물리적인 '행동'으로 반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부부를 도와주는 변호사 필 허시콥의 첫 등장 샷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발과 다리라는 점은 흥미롭다. 물리적으로 걷는 샷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변호사가 (버지니아 주 변호사와 달리) 러빙 부부와 같이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과 버니 코헨은 성공하고 싶다는 야심이 넘치지만, 분명한 선의로 갑갑했던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레이처럼 러빙 부부에게 없었던 객관적으로 문제을 분석할줄 아는 지성으로 부부와 함께 그걸 넘어설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하지만 [러빙]은 그들에게 과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최종 변론을 펼치는 감동의 순간. 니콜스는 러빙 부부를 법정에 참석시키지 않고, 변호사에게도 두 샷 정도만 할애한다. 그리고 교차 편집으로 두 샷을 평온한 러빙 부부의 일상 위에 사운드 몽타주로 겹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 접촉의 아름다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행위의 숭고함. 법정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끌어올 수 있었으면서도 니콜스는 단호히 일상으로 향한다. 프랭크 카프라와 존 포드를 위시한 미국 영화의 대가들이 그렇게 믿었던 가치관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 단순한 사랑을 부당하게 탄압하는 공기에 저항하고 같이 걷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러빙]은 법정 영화로써 안티 클라이맥스적 모양새임에도 강력한 울림을 안겨준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응시다. 마지막으로 대법관들에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는 변호사 듀오에게 리처드는 잠깐 먼 곳을 응시한다. 대체 그는 뭘 응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다음 대답과 눈빛이 모든 걸 대답하고 있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리처드의 응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땅의 리듬과 단순한 방식을 믿으며 기체로써 불안과 차별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마침내 집을 짓는데서 마무리 짓는다. 비록 마지막은 짧았지만 그저 사랑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고, 그 사랑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쑥스러워하고 침묵했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랑은 영원한 무언가가 된다.

그 점에서 버지니아 주 정부가 후레자식을 만든 죄를 범했다고 러빙 부부를 비난하는 순간 패배는 정해졌다. 그들의 성명은 지금까지 쌓여온 땅의 리듬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 나아가 영화를 이루는 샷과 몽타쥬의 연쇄와 리듬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니콜스에게 땅의 리듬은 영화적 리듬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이 언급은 의도적이다. 이미 니콜스는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그런 울타리 없는 땅 위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이어오며 대부분의 관객들이 소망하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샷과 몽타주의 연쇄로 쌓아오는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러빙]을 통해 지금 이 시대, 나아가 미래 세대를 위해 믿음을 가져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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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Logan] (2017)

이정표가 될 가지를 들고 그 발밑에 떨어뜨리자. 맞은편 언덕에 있는 아이가 헤매지 않도록. 
작은 둥지를 만드는 이 날개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연결하기 위해 살아가자.

-이시카와 치아키, 'Little Bird'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건]의 첫 샷은 차 안에 누워있는 로건의 얼굴을 하강하면서 보여준다. 이 샷은 밀폐 공간에 클로즈업으로 이뤄져 있기에 로건이 무언가에 짓눌듯한 인상을 준다. 가히 질식할듯한 이 미장센을 흔들어깨우는 건 외화면에서 깡패들이 때려부수는 소리다. 제임스 맨골드는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 때려부수는 소리를 암전 크레딧에 올리면서, 공포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나오는 피곤에 쩔어있는 로건의 등장 샷은 두 다리 클로즈업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여기엔 활기참이 없다. 밀폐공간에서 겨우 밖으로 나왔지만 로건은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 머니처럼 비틀거린다. 그리고 뒤이어 살짝 과잉되었지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폭력이 이어진다. 제임스 맨골드는 이 도입부를 통해 [로건]의 영화적 공기와 그가 겪을 여정을 설명해낸다. 

많은 사람들이 [로건]의 도입부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건 [엑스맨]이나 슈퍼히어로 영화의 도입부가 아니다. 차라리 1970년대 도회적이고 삭막하게 돌아버린 미국 액션 영화의 도입부에 가깝다. 이 시작에서 맨골드의 관심사는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있지 않다는걸 알려준다. 심지어 그는 전작에서 분명 이어져야 할 시간대나 사건의 인과관계마저 모호하게 처리한다. 살아남은 자는 동료들이나 악당, 멋진 사건이나 끔찍한 비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맨골드는 이 영화가 다른 세계관과 이어진다고 얘기했지만 차라리 완전히 평행세계라는 휴 잭맨의 발언이 더 솔직하게 이 영화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로건]은 울버린 코믹스에서 끔찍하고 비참한 에피소드 (원작이 된 [올드맨 로건], [웨폰 X], [울버린의 죽음], [레드 라이트 핸드])에 담겨있는 비관주의와 그 속에서 피어나오는 희망을 영화사 전통을 연결시키려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되는 장애물은 가차없이 치워버린다. 그래도 의문이 있다면 "대체 이 꼴이 나도록 전지전능한 진 그레이는 뭐하고 있나?"라는걸 생각해보자.

[로건]이 출발점으로 삼은 곳은 놀랍게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다뤘던 종말로 향하는 리무진이다. 다만 [코스모폴리스]의 에릭과 달리 로건은 뒷좌석에 앉아 폼을 취하지 않는다. 뒷좌석에서는 [코스모폴리스]처럼 이어지는 향락으로 부패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맨골드는 버림받은 영웅의 왜소한 샷과 자본주의의 비대한 향략을 한 공간에 압축하는 것으로 질식할것만 같은 부패의 순간을 담아낸다. 하지만 [로건]은 [코스모폴리스]보다 더 끔찍하다. 어떻게든 리무진 안에 침투하려는 바깥 사람들의 발악을 보여준 [코스모폴리스]와 달리, [로건]의 리무진 바깥은 아무도 안쪽을 공격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코스모폴리스] 결말에서 열어젖힌 끝날것 같지 않은 자본주의 지옥의 이미지가 [로건]의 세계를 잡아먹어버렸다. 

맨골드가 이 영역에서 들여오는 것은 서부극이다. 먼지로 가득한 리무진이 찰스 교수가 사는 은신처로 들어오는걸 롱 샷으로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로건]이 [매드 맥스]와 맨골드 자신의 [3:10 투 유마]를 거쳐 서부극의 세계로 들어설거라는 징조를 받는다. 맨골드는 뒤이어 아예 작심하고 온갖 서부극적인 도상을 차용한다. 멀리서 지나가는 기차, 옥수수밭, 농장, 서부 복장.... 그 중에서는 그 유명한 [셰인]도 있다. 이런 맨골드가 인용하는 서부극적 도상과 연계된, 인상적인 샷이 하나 있다. 도주중이던 로건 일행은 무인 트럭에 휘말려 꼼짝도 못한채 말을 농부 먼슨 가족을 만난다. 먼슨 가족을 도와주는 과정을 그리는 동안 맨골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들이 휘적거리며 고속도로를 방해하는 모습을 집어넣는다. 문명을 잠시나마 방해하며 자유로워지는 말의 이미지에서 맨골드는 숨기지 않고 서부극 장르에 대한 강한 애정과 로맨티시즘을 표출한다. 서부를 향한 맨골드의 로맨티시즘은 자본주의 지옥에 저항하는 도구다.

과격하긴 해도 맨골드의 비전은 상당히 정확하다.  울버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캐릭터는 19세기 서부 개척 끝물에 '캐나다'에서 태어나 현대와 미래까지 살아남은 캐릭터였다. 서부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수 있는 존재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서부극의 징조는 더 명확해진다. 로건에게 양부로써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를 추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보안관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상처주고 받으며 살아온 그는 찰스 자비에 교수를 만나 구원받은 뒤, 찰스의 뒤를 따라 양부의 길을 걷는다. 상처 따윈 아무렇지 않게 회복하며 살아왔지만, 상처의 깊이를 알기에 아이들의 침묵과 고통에 동참하고 지켜주려는 양부.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가 초반부에 동생 무덤 앞에서 했던 대사를 그대로 가져와도 될 정도다. 

하지만 역사를 헤쳐나오기 위해 체득해버린 폭력성은 그런 그의 양부로써 사랑과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복잡한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무수한 전쟁과 살육의 현장에서 의미없는 죽음에 익숙해져버린 지친 남자. 여기다 코믹스 울버린은 심지어 몰랐다지만 자기 양아들마저 죽여버리고, 친아들의 오해로 가득찬 경멸어린 저주과 독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 캐릭터였다. 여기서 그의 어둠이 서부 무법자 특유의 야만적 폭력성이 히어로 만화에 접목되어 나온 거라는걸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맨골드의 서부극에 대한 애정은 울버린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그는 울버린이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울버린은 1970년대에 나왔던, 좀 더 과격하고 극도의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신화의 종말에서 멜랑콜리를 끌어내는 서부극 영화의 아들이다. 여기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회고적 서부극과 페킨파의 마초적 애도의 서부극이 따라나서는건 당연하다.

맨골드의 전작이기도 한 [더 울버린]은 그런 서부극적 도상이 PG-13적 수위에 수용되어 일본 찬바라물과 결합된 독특하지만 일정한 선이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로건]은 다르다. 차라리 이 영화는 국경수비대와 카르텔 서부극의 살벌함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여기다 마이클 만 특유의 프로페셔널들이 또렷한 콘트라스트 아래서 벌이는 건조하고 서늘한 긴장감도 녹아있다. 심지어 맨골드는 4K 카메라를 마치 마이클 만이 디지털 카메라를 쓸때 썼던 특유의 빠른 프레임으로 그려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맨골드는 고전 서부극의 품위있는 도상을 1970년대 이후 장르 영화가 끌어왔던 건조한 콘크리트를 연상케하는 어법과 만나게 하고 있다.

그 만남 사이엔 ‘죽음’이 있다. [로건]이 왜 [엑스맨] 영화를 대부분 치워버리고 [코스모폴리스]를 끌어왔는지에 대한 답도 여기서 나온다. 맨골드와 각본가가 바라보는 미국은 정말 끔찍하고 살맛 안 나는 곳이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은 무의미한 것으로 그려진다. 캐나다로 대표되는 목적지까지 거쳐야 하는 미국은 멕시코를 착취하며, ‘우리는 가난하지만 바보는 아니다’라는 절규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다. 숭고하지만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한 시체는 자본주의의 재료로 사용된다. 종말이 일상을 대체한 풍경. 여기엔 무의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간신히 힘을 모아 바깥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있다. 맨골드가 그려내는 미국은 몬테 헬먼의 실존주의 서부극의 무기력함이 묻어나온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품을 내어줄 양부 히어로들은 무력하다. 찰스로 대표되는 리버럴 지식인은 옛날의 총기를 잃고 양자 로건과 칼리번의 도움에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지식인들에게 감화받았던 로건과 칼리번은 찰스의 믿음이 실패한것 아닌지, 자신들 역시 초라한 소멸을 맞이할지 회의하고 번민한다. 이 과정이 너무 아프고 괴롭게 그려지기에, [로건]은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못했던 영역에 들어선다. 맨골드가 근심하고 잇는 영역은 아오야마 신지가 기타큐슈 삼부작에서 근심하던 영역과 비슷하다. 그들은 다만 맨골드는 아오야마가 두려워했던 친부 친자의 실패와-원작 로건이 그런 실패가 그려지는 캐릭터임에도-어머니의 불가해함을 꺼내지 않는다. 아오야마와 달리 과거와 혈연에 대한 불신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많아진다고 생각해서일까.

대신 맨골드는 양부들 자신의 어둠에 집중한다. [로건]의 여정은 심리 서부극 그 자체다. 영화는 로건을 이뤄왔던 죄악과 분노, 고통과 사랑을 모조리 끄집어내 안소니 만이 [서부의 사나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 비극처럼 확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확장은 로건뿐만이 아니라 칼리번이라던가 찰스에게도 적용된다. 범죄를 저지르며 자신을 용서해준 동료를 팔아치웠다는 절망감에 자폭하는 칼리번이라던가 공동체 붕괴의 원흉이였음에도 살아남아 죄책감에 빠져드는 찰스 역시 심리 서부극의 그림자에서 어른거린다. 당신을 죽인게 내가 아니라는 로건의 애절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맨골드는 X-24를 휴 잭맨의 1인 2역으로 맡기면서 결국 그 역시 자신의 일부였다고 못을 박는다. 여기엔 분명한 죄악이 있으며, 등장인물들은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로건]은 그 그림자 속에서 이뤄지는 회의와 번민, 죽음을 육체의 이미지로 표출한다. 로건의 사라진 힐링 팩터는 심각하게 베어진 살점들과 엉망이 된 다리로 나타난다. 초반부 몸에 박힌 총알을 스스로 뽑아내며 멍하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건의 샷에서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수 밖에 없다. 로건/울버린은 누구보다도 하드 바디가 자신의 정체성이던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에게 하드 바디 이미지가 사라지는 순간 거기엔 자크 오디아르가 선호했던 피로와 우울에 젖은 남성 영웅이 드러난다. (아마도 [디판]과 [러스트 앤 본]이 이번 로건에게서 제일 가까울 것이다.)  아들의 도움이 필요한 찰스의 무기력한 육체는 그 점에서 더 비참하다. 칼리번은 뱀파이어처럼 햇빛 아래에서 피부가 불타고 괴로워한다. 심지어 이런 쇠잔함과 거리가 먼 로라 역시 자신의 분노를 온 몸에 담아 표현한다. 이들의 반대에 있는 캐릭터인 도널드 피어슨이 기계 육체를 과시하는 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로건]의 액션이 에너지와 피와 눈물이 흘러넘치는 것도 이상한건 아니다. 과격한 수위로 묘사된 이 영화의 액션은 멜로드라마적 먹먹함과 피곤함이 인물들을 적시고 있다. 로건이나 로라, 그리고 후반에 등장하는 뮤턴트 아이들의 액션은 그야말로 살고 싶다는 처절한 악에 받쳐 육체를 잘게 조각낸다. 이 영화의 액션은 그 몰아붙이는 듯한 카타르시스에도, 너무나도 육중하고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픔은 삶의 버거움에 죽음조차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는 흐느낌이 담겨 있다. 무서울 정도로 팽팽한 영화적 공기를 내세운 영화를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들수 있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로건]은 살벌하고 팽팽하게 건조된 공기에서 놀랍게도 모든 것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영화다. 시작은 다시 가족이다. 맨골드 본인은 귀엽지만 현실의 아픔과 무게를 무시하지 않은 가족 드라마 [페이퍼 문]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예로 들었고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의 정경은 차라리 수평적인 공동체에 가깝다.  육체적 능력과 물질적 능력을 소진했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을 보호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려는 양아버지들의 쓸쓸한 모습과 더불어 황폐하고 버려지고 공간, 말없지만 아직 생명력이 있는 소녀를 죽어가는 몸을 이끌며 쫓아가는 ‘오해받는 무법자’의 이미지는 [유레카]를 (나아가 존 포드의 [수색자]) 떠올리게 하고, 특수한 능력을 지닌 아이를 데리고 도주하면서 수평적인 신뢰와 믿음으로 구성된 미국적 가족상을 구축하는 과정은 [미드나잇 스페셜]이나 [퍼펙트 월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절박하고 단단하게 ‘이 땅’에 매여있으려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언급한 영화들이 서부극의 영향이 강한 작품이라 생각해보면, [로건]의 수평적인 공동체는 서부극의 일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조차도 [로건]에서는 버겁게 그려진다. 양아들의 양부는 죄를 양아들의 그림자에게 고백하고 초라하고 비통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로라를 내보낸 양모 가브리엘라와 친절을 베푼 먼슨 가족은 모조리 죽어나간다. 엑스맨으로 대표되던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강한 믿음이 사라진 세계에서 무엇을 할것인가? 아이인 로라는 답을 원하지만 로건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얻을 공동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두 사람 역시 죽어버렸고 공동체에 대한 대답은 픽션인 만화책과 자신으로만 가능하다. 로건이 그렇게 열심히 엑스맨 만화책을 부정했던 이유는 거기 있다. 불로불사가 가져오는 피로함과 유일한 증인으로써 죄책감, 자학심이 ‘이 땅’에 매여있고자 하는 시도에 회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면, 조용히 있다가 사라지는게 낫지 않을까 ?

여기서 접촉의 문제가 개입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접촉의 금지, 그리고 떨어져 있을 것에 대한 요청, 그것은 이야기를 시동케 하는 능동적인 기호”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말을 [로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엑스맨] 세계관에서 로건이 처음 만난 뮤턴트가 접촉 금지를 요청하는 소녀 로그 (마리)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맨골드는 [엑스맨 1]의 초반부 구도를 다시 뒤집어 만들고 있다. 이 영화에서 로건은 계속 다른 인물들에게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유사) 부녀 지간을 다루면서도 로라와 로건 사이엔 신기할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로라가 로건에게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기도 하고, 맹렬한 위험함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혈육이지만 혈육이 아닌 서로의 거울쌍이다.

그렇기에 로건은 직접적으로 접촉 금지를 요청하지 않지만 어떤 거리감을 두고 로라를 대한다.  이제 접촉을 요청하는 사람은 사내가 아니라 소녀이며 사내는 소녀의 접촉을 밀어내려고 한다. 이 거리감과 접촉 거부 때문에 이 영화는 비슷한 내용의 액션 영화하고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그것이 매정하기 보다는 슬프게 다가온다면, 로건의 비극과 피로함, 그럼에도 숨길수 없는 사랑을 맨골드는 이해하고 있고 관객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거리를 두면서도 절박하기에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간다. 후반에 등장하는 로라의 무릎에 평온하게 잠든 로건의 샷과 악몽에 대한 로건과 로라의 대화가 그렇다. 맨골드는 늙고 지친 미국 무법자 윌리엄 머니를 닮아있는 휴 잭맨의 얼굴과 슬픈 무표정을 지닌 스페인 소녀 아역들의 매력을 간직한 다프네 킨의 얼굴, 꺼져가는 총명함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하는 영국 신사 패트릭 스튜어트의 얼굴에서 많은 질료들을 빌려온다. 그리고 그들이 한 프레임에 있는 순간들은 매우 훌륭하다.

[로건]의 먼슨 가족의 죽음은 로건이 왜 접촉을 거부하는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다. 그들은 접촉의 평안함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들은 소수자이자 약자며 매우 허약한 존재다. 맨골드는 로건 일행이 오지 않았더라도 구조적으로 이 가족은 파국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절대적인 파국에서 히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먼슨 가의 가장이 총부리를 대는 순간, 로건은 다시 상처받는다. 로건은 자신의 존재가 저 평범함에 스며들수 없다는걸 안다. 그렇기에 그는 떠돌아다녔다. 오히려 로건이 자주 접촉하는 대상은 찰스 자비에다. 유머가 섞이긴 했지만 찰스와 로건의 화장실 시퀀스는 둘의 접촉이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찰스가 엑스맨이라는 공동체를 파괴했다는걸 알았음에도, 그는 찰스를 돌본다. X-24이 학살한 자리에서 로건이 로라를 찾아가지 않고 찰스를 먼저 찾아가는 과정은 매정하지만 지극히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찰스는 엑스맨의 이상인 '양가족' 그 자체이며, 진정한 첫번째 '양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찰스가 죽은 이후로, 로건 역시 죽어간다.

[로건]이 놀랍고 슬픈 이유는 파국을 내재한 접촉과 무법자가 그걸 두려워해 접촉을 거부함에도 공동체 내 일상과 사랑을 존중하고 그려내는 신중한 흐름의 샷과 대화로 로건과 로라, 찰스의 영혼에 접촉하는 과정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로건이 가족을 연기하는 장면의 샷과 리버스 샷을 보라. 우리는 그게 유머를 담은 연기라는걸 알면서도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다. 거짓이지만 가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에 가려졌지만, [로건]에서 로건이 지난 시리즈동안 느껴왔던 공동체의 사랑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고 말한다. 접촉은 필연적으로 파국을 낳지만, 그 접촉이 남긴 위대함은 심지어 파국이 지나간 이후에도 명징하다. 찰스의 회한에 찬 넋두리는 그 양가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로건]은 무의미와 접촉 거부 속에서도 공동체와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계속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메타픽션'으로 그려낸다. 로건은 픽션은 현실에서 성립될 수 없다고 줄곳 주장하지만 정작 그 역시 썬시커라는 이뤄질 수 없는 공동체 공간에 집착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공간'이 아닌, '사람'이 가족을 이룬다는걸 알고 마침내 그걸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힘겹고 간신히 이뤄진다. 이뤄질수 없다는걸 알면서 부정하면서도 그 ‘완벽한 순간’을 찾으려고 하는 이 시도들은 울버린 자신의 캐릭터성과 들어맞는다.

[로건]은 무의미 속에서도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찾고자 하는 인물들의 애처로운 갈망과 헛발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애도와 치유의 여정을 결합한다. 줄곳 표류하고 있던 캐릭터가 무의미와 소멸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한 뒤 정착과 안식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이번작의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의 유스케를 닮아있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는 유령은 여행을 하며 정착하면 사라진다, 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대사는 어딘가 서부의 무법자를 닮지 않았는가. 로건은 계속 여행을 하고, 정착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표했다. 맨골드 역시 영화 속 로건이 망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즉 처음부터 로건은 상징적으로 죽어있다. 상술한 영화의 시작이 깨어남이라는 걸 주지해보자. 리무진 운전 시퀀스의 생기없음부터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로건의 영화적 여정은 기면증적인 컷과 장소 점핑, 생략과 암전, 깨어남과 같은 비약으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해안가로의 여행]과 달리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을 떠나려다가 '호숫가로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맨골드가 바다로 향하지 않고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을 종국의 물가에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로건 일행이 원하는 요트 썬시커를 보자. 엑스맨은 재건될 수 없고 상술했듯이 남아있는 뮤턴트들 역시 왜소하고 초라한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아마 로건이 예정한 죽음은 찰스와 칼리번이 소멸한 뒤, 애도해줄 사람 없이 조용하고 쓸쓸하게 과다한 물 이미지에 스며드는 것였을 것이다. 썬시커는 그 점에서 평온한 죽음이지만, 애도하는 이 없는 쓸쓸한 소멸 그 자체다. 하지만 그가 꿈꾼 소멸의 여정은 로라의 등장으로 사라지고 반대로 그는 사막과 들판, 도시를 거쳐 캐나다 국경의 산맥으로 향한다.  

맨골드가 호숫가로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땅에 뿌리박고 살았던 공동체의 소멸을 지켜본 뒤 애도를 완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은 그 점에서 [엑스맨] 시리즈에서 엑스맨들이 거쳐야만 했던 지난하고 고된 여정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남은 엑스맨 멤버들은 아이들을 조금씩 더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면서 소멸한다. 첫 징후는 "호수도 있는 곳"에 묻힌 찰스다. 찰스의 죽음은 곧 닥쳐올 로건 자신의 죽음을 예견게 한다. 여기서 로건과 로라는 호수가 있던 자비에 학교로 대표되던 이상주의의 끝을 애도한다. 그리고 로건이 묻히는 공간 역시 호숫가 근처 숲이다.

그렇기에 덤덤하게 이뤄지는 로건의 죽음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난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지극히 평범한 숲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뤄지는 접촉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프레임 속 모든 존재를 빛나게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다시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접촉의 거부에서 시작한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분명한 접촉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미즈키와 유스케가 그랬듯이 로건과 로라는 여정을 통해 서로에게 동화되었고 끝내 접촉으로 충만한 사랑을 나눠가지게 된다. 그 순간 로건은 저주받았다고 믿었던 기나긴 시간 속에도 이런 접촉이 있었으며, 상실의 고통과 애도 역시 하나의 접촉이였음을 깨닫는다. 다만 어떻게 설명해야지 몰랐을 뿐. 무의식적으로 사랑을 나눠주면서도 자신은 접촉할 수 없는 존재라 자학했던 영웅에게 정말로 다정하고 따뜻한 결말 아닌가. 찰스-로건-로라로 이어지는 연속된 애도의 완수가 역설적으로 엑스맨과 사랑으로 이뤄진 이상적 공동체를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이들에겐 ‘분노’가 부족하다고 비웃는 악당들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순다.
 
[로건]은 마지막에 본성은 이길수 없고 총소리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영웅은 사라져야 한다는 [셰인]의 추도사를 인용한다. 하지만 맨골드는 픽션과 풍경들, 공동체의 아름다움, 접촉의 숭고함을 통해 영웅에 대한 애도를 완수해 빛나게 만든다. 로건의 애도가 찰스를 영원하게 만들었듯이, 로라의 애도는 로건을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0의 순간에서 바다가 아닌 육지로 향하는 미즈키가 그랬듯이 로라 역시 애도를 완수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로건과 찰스, 칼리번, 가브리엘라의 본성이 부당한 세상에서도 순진하게도 따뜻한 집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꿈꿨던 작고 조용한 사람들에 가까웠노라고 확언할 수 있다.

당신은 그 이름에게서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붙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언은 매우 벅차오르는 눈물을 동반한다. 로라가 만든 X가 역설적으로 O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 영화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후발 히어로 영화들에 종속되겠지만 (울버린은 최고 인기 캐릭터고, 휴 잭맨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이어갈 것이다. 게다가 아직 로라에게도 할 얘기가 남아있다.) 제임스 맨골드는 몹시도 감동적인 인본주의 서부극 영화를 극우 포퓰리즘 시대의 세상에 가져왔고,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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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 / Night and Fog] (1956)

알랭 레네는 경력의 시작을 몇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했다. [밤과 안개]는 그 시절 레네에겐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초창기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 중에서 논쟁적이고 도발적으로 역사와 기억을 물었고 그를 주목받게 만들었다. [밤과 안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했는지 얘기해야 할듯 하다. [밤과 안개]는 1955년 프랑스 및 강제수용소 해방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전시 [저항, 해방, 추방] 기획에서 출발했다. 전우회는 영웅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원했지만, 기획 주최자들은 그보다 더 급진적인 형태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였다. 제작자들도 물론이고 당시 갓 다큐멘터리 몇 개로 이름을 알린 레네 자신도 유대인이나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아니였기에 이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처음엔 감이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진짜 생존자인 장 카이롤이 이 기획에 참여하고 예상치 못한 폴란드측 기록 자료의 등장으로 [밤과 안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무시무시한 이유는 중심이 되는 두 이미지 사이에 어떤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밤과 안개]는 비극이 이미 끝난 장소에서 시작한다.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고 간 아우슈비츠엔 버려진 건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사건. 레네와 마르케, 카이롤은 사건이 끝나고 없는, 현실에서 영화를 출발한다. 너무나도 평온한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관객에게 질문한다. 여기가 우리가 봤던/알고 있는 그 끔찍한 아우슈비츠를 맞습니까?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엔 기획 도중 홀로코스트 10주년 기념 행사에 갔다가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두 기획자 올가 보름스-미고와 앙리 미셸의 시선도 담지된다. 

이 질문에 이어 세 사람은 폴란드에 운좋게 남아있었던 홀로코스트 자료 화면들을 끌어올린다. 그 자료들은 매우 끔찍하다. 아마 보다가 충격받고 울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자료 화면들은 날 것 그대로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준다. 실제로 카이롤 역시 영화를 만들던 도중 이 영상들을 보고 PTSD가 재발해 괴로워하며 편집실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이미지들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연출이나 조작이라는 알리바이 없이 무의미한 죽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도망칠 구멍이 없다. 화면 위에 일어난 죽음은 화면 밖에서 정말로 일어났고, 다시 돌이킬수도 없다. 엔터테인먼트로써 죽음을 한창 넘어서버린, 스너프 필름이나 범죄 현장 사진이나 다름없다. [밤과 안개]는 고통과 무의미로써 폭력과 죽음이 넘쳐난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그 무의미한 죽음을 지시한 사람들의 얼굴과 광기 역시 장르화나 허구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감정적 사도마조히즘이나 포르노로 빠질수 있는 자극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레네를 비롯한 제작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미지를 선정하고 배열하는데 앞장섰던 레네는 그 이미지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록'이다. 흩어져있던 자료들을 하나의 몽타쥬로 구성한다는 것. 영상 구성을 담당한 레네는 이 영상들이 언젠가 사라질까봐 근심하면서 몽타쥬를 짠 게 분명하다. 레네는 [밤과 안개]라는 제목으로 절박하게 자칫하면 사라질뻔한 끔찍하지만 귀중한 이미지를 하나의 영화로써 포섭하고 기록한다. [밤과 안개]는 현실에서 카메라를 들이대 이미지를 채집한다는 다큐멘터리적 행위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홀로코스트를 기록한 이미지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등치되고 있다. [밤과 안개]는 아직 전쟁이 잊혀지지 않은 그 시절, 잊으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영화의 몸에다 자신을 새겨넣고 있다.

레네는 이 이미지들을 평온한 수용소 유적지 촬영 현장과 배치한다. 그 순간 평온한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는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우리는 영화 속 자료 화면 속에서 그 현장을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화면이 레네가 가져온 이미지와 겹쳐지는걸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고통과 무의미로 가득한 폭력을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되며, 동시에 그 자료 이미지의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남아있는 유적 이미지들은 더욱 끔찍하게 인류사가 낳은 비극의 순간을 장식하는 증인이 된다.  [밤과 안개]는 변증법적 논리를 통해 사건이 지나간 자리와 사건을 기록한 이미지 간에 만남을 추구하면서 그 이미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밤과 안개]에서 두 이미지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여기서부터는 장 카이롤과 크리스 마르케의 공이 크다. 이 둘이 참여한 나레이션이 두 이미지를 묶고 있다. 카이롤과 마르케의 나레이션은 상술했던 부재의 풍경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그 부재의 풍경이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죽음과 폭력이 있다는걸 주지시킨다.  시적인 언어로 구사된 나레이션은 그 점에서 은폐된 폭력과 공포를 부재하는 공간에서 길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냉정한 시적 언어로 두 이미지 간에 존재하는 '부재'와 '존재'를 채워가며, 그 당시 있었던 상황과 생존자의 기억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시적 언어를 읽는 미셸 부케의 나레이션은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5월], [환송대]나 [태양 없이]로 이어지는 마르케의 이후작에 등장하는 기억과 이미지, 장소 간의 사유는 이미 [밤과 안개]에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 말은 알랭 레네에게도 적용된다.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과 [지난해 마리앵바드] 등에서 찾고자 했던  '기억'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그걸 영화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역시 여기서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이 냉정하게 쓰여진 시는 동시에 불의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격렬한 고통, 더 이상은 이런 비극은 안 된다는 절박한 꿈틀거림을 품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선언이다. 당신들은 정말로 이 비극이 없었다고, 비극 전날처럼 살아갈 것인가? 그 없음을 비극 이전의 없음처럼 기만하며 살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피해자는 뭐가 되는가? [밤과 안개]는 어떻게든 과거를 잊은 척 살고자 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통렬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밤과 안개]에서 가장 먼저 호명되는 이들이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 ("독일의 노동자, 뷔르거 암스테르담의 유태계 학생 슈테른 크라코우의 상인, 슈믈스키 보르도의 여학생 아네트 등은 각자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수천 마일 거리에 그들을 수용할 곳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라는건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 피해자들이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분노, 고통에 대한 이해와 연대, 반복하지 말자는 결기가 [밤과 안개]를 위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인류는 [밤과 안개]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고,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고 울 수 있다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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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타임 [Playtime] (1967)

2015/01/18 - [Deeper Into Movie/리뷰] - 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그 자체로 완결된 전설로 남은 작품이다. 왜 타티는 성공적이였던 [나의 아저씨] 후속작을 만들지 않고 8년동안 이 영화를 만들며 침묵을 지켜왔는가? 적어도 그가 반복하는걸 싫어했다는건 명백했다. 그래도 [플레이타임]은 성공을 믿고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너무나 무모한 영화다. 타티가 [플레이타임]를 위해 만들려고 했던 장소는 건물 몇 개가 아닌, 그 자체로 완성된 도시였다. 하나의 세계를 그대로 담은 세트로 만든다는 시도는 도무지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비물질인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를 설계해 담아야 하는 매체다. 그렇기에 편법이 동원되는데 타티는 그걸 거부한 것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처음부터 실패가 내정되있는 선택이다. 실제로 타티는 영화의 실패로 몰락했고 평생 거기서 못 벗어났다.

대체 뭘 했길래 타티는 그렇게 파산했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던가. 영화의 시작을 보자. 재즈 음악과 하늘이다. 처음부터 타티가 왜 그런 세계가 필요했는지 명징하게 설명된다. 재즈 음악의 복잡한 임프로바이제이션과 거대한 70mm 스크린과의 결합. 타티는 복잡하지만 자유롭게 요동치는 에너지를 영화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내린 다음 타티가 시작하는 곳은 공항이다. 어찌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스크린을 통해 영화 내 세계로 관객이 초청받는 것이다. 그것이 배우의 얼굴이든, 풍경이든 영화의 시작은 어떤 대상을 다룰지를 보여주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플레이타임]은 그 전통을 공항과 관광객으로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타임]의 도입부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윌로 씨가 아닌, 윌로 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장소에 배치된 무수한 사람들이다. 관객은 윌로 씨가 언제 나타날지 기다리면서, 거기 배치된 사람들의 행동과 대사를 유심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그 행동들과 대화들은 사실 그렇게 큰 의미가 없으며, 오직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지문들이다. [플레이타임]은 처음부터 타티는 왜 자신에게 그런 무모한 짓이 필요했는지 설명해낸다. [나의 아저씨]에서 팬터마임과 무언극, 무성 코미디 영화의 결과물을 총결산한 타티는 그 총결산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영화적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사가 아니라 윌로 씨가 만들어내는 행동이였던걸 생각해보라. [플레이타임]은 그런 행동의 업그레이드라 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업그레이드는 범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플레이타임]은 정말 아무도 가지 않았고, 쉽게 갈 수 없는 아름다움에 훌쩍 도달한 영화다. 윌로 씨와 바바라라는 미국 관광객이 표면적인 주인공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 큰 스크린에서 그들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타티빌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소우주에서 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타티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플레이타임]에 이르면 이야기는 몇 단어로 축소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른다. 윌로 씨가 우연히 만난 바바라에게 여러 소동 끝에 꽃을 준다. 이게 전부다. [플레이타임]은 [윌리를 찾아라]가 그랬듯이 의미도 맥락도 거의 없어진 거대한 흐름이 만드는 리듬에 동참하고 발견해야지 영화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서 서브플롯은 슬그머니 등장하고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씬스틸러 역할을 한다.

자크 타티는 분명 이 영화에서 장 르누아르가 [게임의 규칙]에서 만들었던 흐름의 영화을 명백히 인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로 대표되는 유동적인 카메라와 끊임없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통해 영화의 흐름을 잡아냈다. 타티는 거기서 더 나아가 기어이 인물을 삭제하고 도시 속 거대한 흐름에 주목한다. [플레이타임]의 코미디는 그런 거대한 흐름이 엉키는 순간에서 드러난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초자연적으로 사랑스러운 재해인 윌로 씨가 중심이 되어 주변을 돌아다니며 흐름을 만들어냈다면, [플레이타임]에서 흐름은 이제 윌로 씨에 머물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정부적 카오스로 넘어간다.
 
타티는 다양한 도시의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그 역동적인 에너지와 흐름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길을 잃거나 엉뚱한 슬랩스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아저씨]에 등장했던 (현대 건축의 창시자 르 코르뷔지에가 흡족해할만한) 아르펠 씨의 집이 확장된 타티빌은 그렇게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데다, 타티의 카메라조차 그들을 위해 움직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타티는 약간 짗궃게 '르 코르뷔지에 씨 보고 계신가요.... 당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철근과 유리의 도시에선 인간들이 이렇게 산답니다 (에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타티가 바라보는 관광객과 도시인들은 강박적인 목적을 위해 우스꽝스럽게 바둥바둥거리는 사람들이기에 이 우스꽝스러움은 강해진다. 

반대로 바바라와 윌로 씨는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다. 바바라는 줄곳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사진에 담을 기회를 노리려고 하고, 윌로 씨는 [나의 아저씨]에서 그랬듯이 어리숙한 표정으로 휩쓸리면서 선의에 가득찬 행동을 한다. 물론 그런 선의도 하나의 카오스를 일으키는건 자명하다. 그 점에서 [플레이타임]은 샤를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바라보았던 '근대적 산보자로써의 대도시' 파리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근현대인인 윌로 씨와 바바라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도시를 거닐며 자신이 포함된 많은 사람들과 흐름을 관찰하고 동시에 휩쓸린다. 때문에 이 영화가 [심시티]가 나왔던 시대에 나왔다면 좀 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웠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 영화의 비전은 소름끼칠 정도로 거대한 도시 문명이나 사람들의 공시성을 현미경으로 들어다보는 [심시티]나 [심즈]의 비전을 닮았다.

종종 타티는 그런 엄청난 흐름 속에서 어처구니 없는 장면을 잡아내곤 한다. 윌로 씨가 군대 동기를 만나러 아파트에 들어가는 시퀀스이 그렇다. 여기서 타티는 음향마저 빼버린 채 아파트 하나를 만화 패널처럼 그려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타티는 창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고정하고 창틀로 구성된 두 프레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무성영화적으로 구성한다. 두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이 동시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걸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인물이 개를 끌고 지나가는걸 볼 수 있다. 카메라가 위치한 곳에서 좌석이 되고, 그 앞에서 일어나는 서로 무관한 두 개의 흐름이 하나의 프레임에서 움직인다. 타티는 그게 바로 영화라고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타티의 이런 생각은 고전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카메라의 자의식을 생각했던 현대 영화에 가깝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레스토랑의 재난은 타티빌의 미학을 한번에 압축하고 그걸 뛰어넘는 장면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레스토랑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들어오고 밴드는 연주를 하고 주문은 계속 들어오고 종업원의 옷은 끊임없이 더러워지고, 대화는 넘쳐나고, 몇몇 사람들은 떠나고.... 타티는 이 시퀀스에서 몇몇 상황을 정한 뒤 그것을 꾸준하게 반복/변주해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유머를 만들어낸다. 그 장관의 몰입도가 엄청나고  길이도 제법 되는지라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영화적 임프로바이제이션에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은근 폐소공포증을 자극하게 한달까. 그렇기에 이 시퀀스 말미에 윌로 씨와 바바라가 거리로 나올때 해방감을 느끼는 거겠지만.

하지만 그 임프로바이제이션에 관객이 점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타티가 카메라를 윌로 씨와 바바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바바라가 무대에 올라와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에 타티는 클로즈업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알려준다. 그는 도시 문명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윌로 씨나 바바라, 미국인 부자 같이 그 카오스를 느긋하고 유머러스하게 즐길수 있는 인물들이 있는 한 괜찮을거라고 말한다. 영화 도중 히피를 연상케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타티가 히피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카오스에서 히피는 자연스럽게 양복 입은 신사숙녀들 사이에서 잘 어울린다. 윌로 씨가 바바라에게 꽃을 건네주고 (그나마도 대신 부탁하기 때문에 만나지는 못하지만) 바바라가 행복해하는 결말은 그 점에서 타티의 낙천주의가 발하는 멋진 결말이다.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의 종말은 비참했지만, 타티는 적어도 어렵게 살긴 해도 불행하지는 않았을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평생 꿈꿨던 영화를 완성했고 아마 고생은 했어도 만든 사실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윌로 씨의 익살스러움과 반대로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자크 타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머에 솔직하고 거기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길 바라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큰 스크린에서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에 방문하길 바란다. 이 영화는 진정으로 영화가 무엇인지, 성숙하지만 낙천적인 긍정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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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 [機動警察パトレイバー2 the Movie / Patlabor 2: The Movie] (1993)

1990년대를 수놓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테크노 스릴러적 요소가 가미된, 로봇 활극에 가까운 애니메이션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가 주목을 받고 인기를 받았다면, 그런 활극을 매우 일상적인 설정에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만들어낸 유우키 마사미의 다른 대표작인 [철완 버디]가 우주 스케일을 넘나드는 얘기임에도 지독히도 일상적인 질감을 끌어냈듯이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리얼 로봇의 흐름에서도, 그것을 전쟁 같은 것에 연관짓지 않고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군수산업 얘기가 등장하긴 하지만 도쿄 경시청이라는 '일상적' 요소가 어느새 '비일상적' 요소에 동화되었다고 할까. 이는 단순히 현실적인 질감을 구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장르의 '비일상성'을 '일상성'에 녹여내는 과정. 분명 선례가 있음에도 [패트레이버]는 그걸 인상적으로 성공해낸 애니메이션이였다.

극장판 시리즈로 넘어가 보자.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은 그 점에서 아직은 장르의 '비일상성'이 안겨주는 쾌감에 솔직한 작품이였다. 바빌론 프로젝트를 둘러싼 음모와 호바 에이이치의 모호한 정체와 의도, 플랑 세캉스라고 할 만한 풍경 몽타쥬 등은 '파국'의 호러가 어른거리긴 했지만, 적어도 정리가 되는 스토리와 특차2과의 활기와 액션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를 활극으로 볼 여지를 남겨놓았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는 활극으로써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보다는 '일상의 파국'이라는 점에서 [패트레이버]를 만들고 싶어한듯 하다. 1편에서 호바 에이이치의 설정을 '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건 오시이의 관심사가 어디있는지 잘 알려주는 부분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는 오시이가 아쉽게 놓아야 했던 지점을 활극 요소를 성립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밀고가는 희귀한 애니메이션이다. 기본 구조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과 동일하다. 도쿄의 평화를 방해하려는 악당이 있으며, 주인공들은 그 악당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 이건 다른 [패트레이버] 시리즈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가 1보다 훨씬 나아간 이유는, 그 악당과 파국의 설정이 장르의 안전성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패트레이버 2]는 당시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가 서 있던 현실에 대해 강하게 말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에 볼 수 있는건 '종말'이다. 이건 단순히 거창하게 아포칼립스적 설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 내 시간대로 따지만 가장 후반부에 위치한 이 애니메이션은 특차2과의 종말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특차2과 멤버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했으며 남아있는건 곧 창고행을 기다리고 있는 잉그램과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어른 키이치와 시노부다. 비록 평행세계 개념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 [패트레이버] 프랜차이즈지만 이 작품은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미 시리즈의 완결을 의도한 작품인 셈이다. 아마 평행세계의 특차2과 역시 이런 사건 없어도 [패트레이버 2]에서 묘사했듯이 비슷하게 소멸했을 것이다.

아마 [패트레이버 2]를 보는 관객이라면 잘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에 혼란함을 느낄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와 이토 카즈노리는 배배꼬인 필름 느와르 플롯을 [패트레이버 2]에서 확장시키고 발전하고 있다. 츠게의 사상은 본편을 보는 내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그와 관련된 시노부의 심리 역시 중요하게 그려진다. 전작에서도 키이치와 시노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여기서 이 둘은 표면적인 주인공인 아스마와 노아를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그리고 그 활약상은 충분히 주인공으로 인정할만하다.) 닳디 닳은 두 성인남녀가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1950년대 미국 필름 느와르의 후예라 할 수 있다.

하워드 혹스의 [빅 슬립]이 그랬듯이, [패트레이버 2]의 이야기는 전체 그림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복잡한 얘기가 아님에도 모호한 인물들과 단서, 심리를 점진적으로 배치한 구불구불한 미로를 구성하면서 그 속으로 따라가야 하는 키이치와 시노부의 심리를 구축한다. [패트레이버 2]의 도입부는 그 점에서 그 미로로 안내하는 단서인 셈이다. 분명 츠게 유키히토의 과거를 그리고 있지만, 그가 겪었던 전쟁의 기억에 대한 몽환적인 파편이 서사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도입부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츠게라는 사실을 좀 지나서야 알 수 있다. 또한 츠게 역시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정리하기 때문에 관객은 끊임없이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렇다면 대체 [패트레이버 2]가 필름 느와르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체제의 존속에 대한 질문이다. 이미 [패트레이버 1]에서 오시이는 호바 에이이치가 겪었던 사회적 계급과 차별을 설명하면서, 그 소외가 어떻게 체제를 위협하는지를 그려냈다. [패트레이버 2]에서 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먼저 한국인이 쉽게 알기 힘든 일본의 기형적인 경찰 권력과 자위대 권력의 대립이 있다. 패전국 일본이 받아들여야 했던 체제는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수동적으로 살아야 하는 군대와 그 역할을 넘겨받은 경찰 간의 대립이 이뤄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이 체제가 어떻게 이뤄졌으며 어떤 비정상을 은폐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1990년대 CNN이 마련한 비디오 전쟁의 문제가 개입된다. 전쟁이 엔터테인먼트적이고 비현실적인 영상으로 대체하는 사회. 그 와중에 일본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패트레이버 2]가 이 체제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역에서 이뤄진다. 초반부 시노부가 영상을 확대해 이상한 증거를 발견하는 부분은 명백히 안토니오니의 [확대] (혹은 [욕망])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대]에서 토마스가 사진을 확대해 평온한 공원 정경 뒤에 숨겨진 살인 사건을 발견해내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파악하지 못한채 끝끝내 은폐되었다면 [패트레이버 2]에서 시노부와 키이치는 가라오케 영상과 TV 영상을 확대해 전투기를 발견해내지만, 그것조차도 조작된 거짓이라는걸 나아가라는걸 알아차린다.  안토니오니가 기록된 이미지와 기억 간의 불일치를 통해 이미지의 신뢰성에 대해 질문한다면, 오시이는 동시간에 기록된 이미지 간에도 언제든지 거짓이 스며들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다 오시이는 도쿄를 공격하려는 전투기가 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군 간 전투를 유도하려고 했다는 전개로 그렇게 스며든 거짓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표현한다. 결말에 등장하는 도쿄를 바라보는 츠게의 시점 샷이 마치 HUD 디스플레이처럼 묘사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상당히 직접적으로 오시이의 질문을 담고 있다.

그런데 [패트레이버 2]가 흥미로운 부분은 안토니오니의 이미지에 대한 불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끌어온다는 것이다. 조작된 이미지로 츠게 일당의 자위대가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도쿄로 입성한다. 그런데 자위대가 도쿄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여줄때 오시이는 자위대가 도쿄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태양은 외로워]식의 인물이 부재한 기나긴 몽타쥬 연출로 묘사한다. 이 시퀀스가 너무나 천진하고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으로써는 순간적으로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설마 오시이는 현 평화 체제를 가짜라 규정하고, 자위대가 보통 군대화되는 세계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규정하는건가? 키토 모히로는 자신의 만화 [나루타루]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어, "적어도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보통군대화에 대한 소망을 말한 바 있는데 오시이 역시 비슷한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키토 모히로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이상의 전체주의를 부정했듯이, [패트레이버 2] 후반부는 그 군대가 느끼는 천진한 아름다움 역시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 부정은 키이치에게서 이뤄진다. 키이치는 처음부터 군경 간의 권력 투쟁에 대해 냉소적이며, '아무것도 하지 말자'라는 사보타주로 비정상적인 체제 내 암투를 부정한다. 그리고 지금 이 세계를 이루는 평화는 거짓이라 말하는 아라카와에게 그런 거짓된 평화라도 있는게 낫지 않냐고 말한다.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일상의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물들의 활약상을 다뤘던 걸 생각하면, 진짜 파국은 거짓 평화로 1대 1로 대체할 수 없다는 오시이의 시선이 [패트레이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오시이는 여기다가 '패트레이버' (나아가 과거로 밀려난 알폰스)라는 히어로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을 서브플롯으로 추가해 설명한다. 작전을 수행하러 가기 전, 위험하니깐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는 아스마에게 패트레이버를 영웅처럼 동경하고 사랑했던 노아는 '로봇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어른이 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스마와 노아 일행은 죽지 않고 도쿄를 구한 영웅이 된다. [패트레이버 2]가 어른스러운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면, 진실과 거짓조차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단순화된 대립을 거부하고 희망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트레이버 2]의 결말은 선언이다. 눈 앞의 도쿄 나아가 현실조차 조작된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인간 츠게 앞에서 시노부는 눈 앞에 있는 자신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점에서 시노부는 [패트레이버 2]에서 가장 크게 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노부는 일련의 모험을 통해 파국으로 끝난 관계조차도 부정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자는 사람이 된다. 특차2과는 그렇게 소멸되었고, 평화는 조작된 이미지 앞에서 허약하지만 여기엔 파국을 막고자 하는 인간이 있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오시이는 말한다. 그 점에서 [패트레이버 2]는 영웅 서사를 부정하는듯 하면서도, 다시 영웅 서사에서 현실을 근심하고 바꿀 힘을 찾아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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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복수의 총성]에서 주인공 윌렛은 모래에 흔적을 남기면서 등장한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복수의 총성]에서는 무의미하다 윌렛이 친구 콜리를 만나는 순간 미스터리가 윌렛을 포박하기 때문이다. 공포에 떨고 있는 콜리는 윌렛에게 윌렛의 형이자 동행인이였던 코인과 리랜드가 마을에서 어떤 가족을 쏴 죽였으며, 코인이 볼일을 보러 떠난 뒤 리랜드가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한다. 앞뒤를 살펴보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의 복수인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리랜드를 쏴죽였단 말인가?

도입부의 미스터리가 제공하는 [복수의 총성]을 진행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그렇듯이 몬테 헬만은 주인공들을 부조리한 카오스로 밀어넣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만 [바람 속의 질주]가 대항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낸 부조리와 무기력함으로 주인공들을 밀어넣고 거기서 탈출하려는 인물들의 액션에 집중한다면, [복수의 총성]은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가 윌렛과 콜리를 이끈다. 이 미스터리의 중심이 여성 캐릭터라는 점도 흥미롭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소녀 애비게일를 연기했던 밀리 퍼킨스가 다시 맡은) 윌렛 일행 앞에 나타난 이름 없는 여자는 윌렛과 콜리에게 킹스턴으로 데려달라고 말하지만, 윌렛은 곧 이 여자에게 다른 목표가 있다는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캐릭터를 살펴보자. 먼저 윌렛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소시민적 카우보이이다. 윌렛과 여자의 대화에서 윌렛이 한땐 현상금 사냥꾼이였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를 부정하고 소시민적인 삶을 누리길 원하는 인물이라는게 밝혀진다. 이 점에서 난폭하게 사람을 쏴죽이고 도망가버린 윌렛의 형 코인과는 대조된다. 윌렛은 여자에게 적당한 보수를 받고 아무 탈 없이 헤어지길 원한다. 반대로 여자는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캐릭터인데, 때문에 윌렛과 여자 간에는 불편한 긴장이 흐른다. 윌렛은 여자의 목적을 집요하게 의심하고 여자는 그의 의심에 짜증을 낸다.

반대로 콜리는 미성숙한 소년이다. 콜리는 여자를 보는 순간 홀딱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윌렛과 달리 소년다운 아직 무법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버리지 못했다는걸 보여준다. 그가 미성숙한 남성이라는 부분은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하다가 적당한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엄마의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여성은 어머니 밖에 없다. 그런데 각본을 맡은 캐롤 이스트먼이 여성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뒤이어 이어지는 여자의 거절은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이 무명의 여자는 모성으로 환원되는걸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콜리)는 내가 보는 걸 보지 못해요"라는 대사는 이스트먼과 헬만이 콜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자가 어떤 캐릭터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여자가 복수하려고 하는 대상이 누군지 결말 전까지 보여주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여자의 심리가 어떤지 간신히 파악만 가능할 것이다. 이스트먼과 헬먼은 여자의 동기와 심리 묘사에 크게 관심이 없다. 남아있는 단서들을 긁어모아 추리를 해도, 이 여자는 끝끝내 이성적인 이해는 할수 있되 공감할 수는 없는 '타자'로 남는다. 그렇기에 여자의 집요한 집념은 더욱 무서워진다. 여자를 향한 "당신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안내할게야. 자신 마저도 말이오."라는 윌렛의 대사는 영화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윌렛의 이 대사는 후술할 결말하고도 맞닿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엔 잭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 스피어스가 끼어든다. 빌리가 끼어들면서 [복수의 총성]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번은 반항아이긴 했지만 그 속내를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복수의 총성]에서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는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공격성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그의 첫 등장은 줄곳 숨어있다가 윌렛이 도발하면서 이뤄진다. 마치 야생동물이 서로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끌어내는걸 연상케 한달까. 윌렛은 여기서 빌리가 문명의 소통방식으로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걸 알아채지만 콜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반항하다가 파국으로 이어진다. 

빌리가 등장하면서 [복수의 총성]은 표면적 의도 아래에 있는 이해할수 없는 가학적이고 불온한 흐름으로 인물들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인물의 감성은 바가지를 긁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부터 시작해 광활하지만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사막만이 소통이 사라진 인물들의 대화를 보조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서부극의 대가들이 그랬듯이, 자연 풍광에서 영화적 매력을 이끌어낼줄 아는 감독인데 그의 세계에서 자연은 인물의 실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돌멩이가 푸석한 흙먼지 산이 고립되고 힘겨운 여정에 나선 인물들을 강조했다면 [복수의 총성]에서 등장하는 말라붙은 사막은 점점 삭막해지고 신경을 긁는듯한 인물 간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서부극 장르가 구축해온 언어들은 산산조각난다. 복수를 하려던 콜리가 죽는 장면이라던가 빌리와 윌렛의 다툼은 서부극적 전통에서 기반해있지만, 이 장면들엔 품위나 공동체의 신념과 믿음 대신 메마르고 야만적인 악독함이 줄줄 배어나고 있다. 어느 순간 가히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파멸의 여정이 되버린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 영화가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서 링크와 콜리가 몸싸움을 벌이다가 링크가 콜리를 죽이고 전율하는 장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악독함은 촬영 당시 헬만과 워렌 오츠, 니콜슨 사이에 있었던 충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샷과 컷의 변화가 평이하고 단조로운 대신, 톤과 무드를 비틀어놓는 타입의 영화라면, [복수의 총성]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샷과 컷을 이상하게 밀고 간다. 리랜드가 죽을 당시를 보여주는 시퀀스의 연출을 돌아가보자. 콜리의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아무런 대사가 없다. 그런데 리랜드가 누구랑 대화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의 시점 샷들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콜리의 회고에 따르면 총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콜리는 텐트에 누워 바깥에 있는 리랜드랑 눈을 마주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헬만이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콜리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진 않다. 이상한 장면은 그 다음 경악에 찬 눈빛으로 쓰러지는 리랜드를 보여주는 샷이다. 이 샷이 이상한 이유는, 지금까지 콜리의 시점이라 못 박아둔 샷 다음에 거리상으로 불가능한 풀 샷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몽타쥬 배치상 이 샷은 콜리의 주관적인 샷의 연장선상이라는건 명백하다. 이 샷이 이상하고 낯선 이유는 죽음의 순간이 갑자기 확대된 채 정지한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샷 속에서 리랜드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에 머물러 있다. 헬만은 이를 통해 콜리가 왜 미친듯이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리랜드가 맞이한 이해할수 없는 죽음이 언제든지 자신을 덮칠수 있다는 공포가 콜리를 사로잡은 것이다. 

재미있는건 다음날 윌렛은 리랜드가 죽은 그 자리에 우연히 비슷한 자세로 앉을 뻔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영화의 결말에 나오는 반전과 연출은 이 사소한 행동을 다시 재고하게 된다. [복수의 총성]의 결말은 정말 난해하고 당혹스럽고, 매우 인상적이다. 마침내 여자가 복수 대상을 발견해 달려가고 여자를 쫓아간 윌렛은 여자의 복수 대상이 자신의 형제인 코인이라는걸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몬테 헬만은 코인 역으로 윌렛을 맡은 워렌 오츠를 기용한다. 그리고 슬로우 모션을 이용한 클로즈 업 샷으로 코인의 죽음을 보여준 뒤, 좀비처럼 살아와 걸어오는 빌리를 롱 샷으로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내버린다. 

이는 로저 코먼 밑에서 영화 경력을 시작한 헬만 특유의 B 무비의 뻔뻔함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헬만은 주인공 형제를 등장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 배우를 캐스팅해 B무비의 뻔뻔함과 제작비 절감을 성립시키지만,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복수의 총성]은 무의미하게 모든걸 파괴해버리는 서부의 야만성과 그 속에서 파멸할수 밖에 없는 인물들을 신화적인 제의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다. 가장 중요한 단서로는 여자는 윌렛을 보면서 당신은 광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현상금 사냥꾼이던 윌렛의 과거 역시 그리 깨끗하지 않았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 점에서 형제로 설정된 코인은 윌렛의 이면이라 볼 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될수록 윌렛은 코인처럼 점점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이처럼 헬만과 이스트먼은 코인의 야만성은 윌렛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서부 그 자체라 보고 있다. 일견 모호해보였던 여자의 캐릭터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부의 야만성에 복수하려고 하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여자가 사건의 휘말린 계기라던가 인간적인 면모는 끝끝내 묘사되지 않기에, 여자의 복수심은 당위성이 있다기 보다는 막연하고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모성을 거부하고 복수에 나선 여자 역시 코인과 다를게 없어진다. 아예 초자연적 재해처럼 그려지는 야수 빌리는 말할것도 없다. 헬만은 그 야만성이 이끄는 신화적 여정의 끝은 '죽음'이라 본다. 초반부 리랜드의 죽음을 강조한 이유도 그 죽음의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윌렛의 이면인, 코인의 죽음은 리랜드의 죽음처럼 영원히 정지한듯한 슬로 모션 샷으로 보여진다. 헬만은 파국의 절정을 박제한 뒤, 야만의 화신인 빌리가 부활해 다가오는걸로 끝내버린다. 이 결말이 두려운 이유는, 상당히 낯선 화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그랬듯이 파국 이후를 전혀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코인의 죽음은 윌렛의 죽음이며, 여자의 복수는 윌렛에게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남은 건 죽여도 죽지 않는 악마와 같은 빌리가 가져올 궁극적인 종말이다. 엄청나게 묵시록적인 비전을 담은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복수의 총성]은 그렇기에 정통 서부극에서 그려왔던 신화의 이면과 그것이 인간들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상당히 이상하게 그려내고 있는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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