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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이마무라 쇼헤이 (2)
신들의 깊은 욕망 [神々の深き欲望 / The Profound Desire of the Gods]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시작은 바다 생물들의 모습이다. 꿈틀거리는 이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해보인다. 이 위험천만한 생물들은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가 그랬듯이 이마무라는 자연 근처에서 영화를 시작할때, 강렬한 생물 이미지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마무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의 이미지를 잘게 쪼개 나열한 뒤 그 위에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배치한다. 그 다음 우마와 네키치로 대표되는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등장시키면서, 도덕률을 어기고 본능에 따라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자연과 근친 상간이라는 두 이미지는 [신들의 깊은 욕망], 나아가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앞에서 신 남매의 근친 관계와 섬의 탄생을 다루는 전래 민요를 부르는 가객의 모습이다. 인류 문화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예술 양태를 꼽으라면 노래와 그림, 연극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깊은 욕망]을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다. 가객의 노래는 [신들의 깊은 욕망]을 휘감는 원초적인 자연과 근친상간적인 관계가 신화적 기반에 바탕에 두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마무라는 영화라는 매체가 문명에 기반한 것이며, 이 서사를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선 신화적인 화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입부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섬에 사는 우마와 네키치는 근친상간적 관계이며 네키치에겐 전 부인에게 얻은 카메타로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토리코라는 자식이 있다. 네키치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바다에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낚시를 하는 바람에, 바위를 떨어트릴 구멍을 만들라는 벌을 받는다. 한편 우마는 류 류겐이라는 지역 유지의 첩으로 무녀일을 하고 있으며, 카메타로는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때 카리야라는 측량 기사가 제당 공장 개발건으로 도쿄에서 내려온다. 전임 시마지리를 찾아온 카리야는 어떻게든 공장 개발을 하고 싶어하고 카메타로는 카리야를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네키치의 방해와 더불어 카리야는 토리코에게 빠져버린다. 하지만 개발의 손길은 서서히 쿠라게 섬으로 다가오고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맞는다.

[신들의 깊은 욕망]의 절반은 기가 약한 문명인이 쿠라게 섬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끌려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리야는 개발을 위해 섬으로 찾아오지만, 옛 동료는 섬에 동화해버렸다는걸 발견한다. 카리야는 측량을 위해 섬의 숲으로 들어가지만, 마을 사람들과 문명의 연계를 담당하는 류는 그 영역이 신성한 무녀들의 영역이라고 뜯어말린다. 카리야의 눈에는 쿠라게 마을은 알 수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지만, 그는 혼자 왔기에 마을 전체의 규칙을 깨부술 수 없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카리야의 의지는 점점 시들어가고 때마침 끼어든 네키치의 계략과 토리코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버린다. 카리야는 후토리 가에 편입되어 있는 동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반면 후토리 가는 복잡하다. 이미 [인류학 입문] 같은 영화에서 근친상간적 관계와 기괴한 욕망에 탐닉하며 광기에 빠져드는 인물을 차분히 보여줬던 이마무라 쇼헤이는 후토리 가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댄다. 후토리 가의 부자 네키치와 카메타로는 둘 다 쿠라게 마을의 아웃사이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며 마을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탈주의 방법은 차이가 난다. 네키치 부자가 무인도로 건너와 섬 밖을 빠져나가는 걸 얘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네키치는 폭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지만, 실상은 마을에 내려오는 미신에 매혹되어 있다. 그는 근친상간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돌이 떨어질 구멍을 파며, 개발 계획에 대해 마뜩치 않아한다. 구멍에 돌이 들어가는 순간 네키치는 우마와 함께 신화에 등장하는 무인도에 정착할 생각이다. 네키치는 그 점에서 신화적인 욕망과 탈주를 꿈꾸는 자다.

반대로 카메타로는 처음에 카리야 기사의 조수로 배치되는 장면도 그렇지만, 쿠라게 마을 자체를 지긋지긋해한다. 카메타로는 문명화된 술집과 카리야 기사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 문명 사회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카메타로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탈주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지만, 그가 선택한 탈주 방법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런 식으로는 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카리야 기사로 대표되는 본토의 문명만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카메타로는 가문에 내려오는 근친상간 관계를 거부하는 자다. 영화 초반 토리코의 유혹에도 카메타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짜증만 낼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남자들 사이엔 여자들이 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끌어가는 기괴한 에너지는 근친상간 관계의 목표이자, 주체인 여성들에게서 비롯된다. 이 둘이 마을의 샤머니즘 전통과 연계되어있는 캐릭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지역 유지의 집에 강제로 머물며 성적인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오빠 네키치와의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마도 인상적이지만 토리코는 이마무라가 만들어낸 여성상 중에서도 강렬하기 그지 없다. 정신박약을 앓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인 토리코 앞에서 전통과 문명은 일시적으로 대립이 무화된다. 토리코가 미국에서 온 속옷을 입고 좋아하는 장면과 신내림을 받는 장면은 토리코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두 세계를 포섭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토리코의 불가해함은, [신들의 깊은 욕망] 전체를 이끌어가는 우연과 초자연적 전개와 맞물려 들어가며 영화의 신화적 성격을 강화한다.

이마무라는 [인류학 입문]에서도 그랬듯이 근친상간을, 문명의 도덕률을 반하는 행위며 자연과 가깝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매혹을 보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이 문명과 자연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서사를 진행했던 [인류학 입문]과 달리 자연에서 진행되는 영화인지라 이런 대비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리야와 토리코의 관계가 있다. 카리야는 토리코랑 사랑을 나눌때도 마치 여동생 다루듯이 다루고, 주변 사람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진짜 근친상간 관계인 네키치와 우마에 이르면 더 할말이 없다. 네키치와 우마의 관계는 어떤 사랑보다도 순수하기에 더욱 기괴하다. 네키치가 구멍을 파는 행위는, 지극히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기괴한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국엔 승자는 현대 문명이다. 역설적으로 그 문명이 들어서는 과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쿠라게의 미신에 속해있던 후토리 가의 가장 야마모리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뒤 죽는다. 그리고 돌이 구멍 속으로 들어간 뒤 인물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우마는 노로로써 힘을 잃고, 토리코가 대신 우마를 잇는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토리코가 노로의 힘과 의무를 이해하기 만무하다. 카리야는 도쿄로 돌아가버리고 노로로 대표되는 마을의 샤머니즘적 전통은 몰락한다. 여기서 이마무라는 미신을 지탱하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미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때 어떻게 사람들은 스스로 전통과 미신을 폐기처분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네키치와 우마의 파멸 시퀀스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신화/제의적 속성을 밀어붙이는 시퀀스다. 이마무라는 여기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망망대해에서 도망가려는 네키치와 우마, 그리고 그들을 쫓는 마을 사람들의 동선을 서스펜스를 빌어 쉴새없이 밀어붙인다. 특히 말 없이 가면을 쓴 채 네키치와 우마를 쫓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호러 영화 속 살인마와 다름없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 자체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증오와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은 작은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이 와중에 카메타로는 문명 사회로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와 고모를 살해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폭력을 받아들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과거의 복수다.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쿠라게 마을은 비행장과 코카콜라가 자연스러운 곳이 된다. 영화 후반부에 사라진 카리야는 아무렇지 않게 본처와 외가 사람들을 끌고 자본가 계급 행사를 한다. 카리야 앞에 나타난 건 얼마 전 고향으로 돌아와 기관사가 된 카메타로다. 카리야는 변해버린 쿠라게 마을을 둘러보며 미신을 믿었던 마을은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한다. 하지만 고민에 잠겨 있는 카메타로는 카리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쿄에 있을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그 날 있었던 일이 마을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이에 대답하듯이 이마무라는 기차를 운전하는 카메타로 시점 샷으로 수풀 사이로 뛰어가는 토리코를 툭 던져놓는다. 문명의 아이콘인 기차는 갑자기 멈춰서고 카메타로는 극도의 충격과 흥분 상태에 빠진다. 카메타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카메타로 다음에 우마를 묶었던 붉은 돛을 단 빈 배가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분명한 것은 토리코와 붉은 돛의 샷은 유령처럼 홀연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쿠라게를 상징하는 토리코와 우마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리야 기사는 토리코 얘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즉슨 카리야는 토리코랑 이 섬 자체를 백일몽처럼 여기고 있다.)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토리코는 무녀의 춤을 추듯이 격렬하게 등장해 기차를 신경쓰지 않고 달려가다가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토리코로 대표되는 대자연은 자신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킨 쿠라게 마을과 본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이마무라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쿠라게 마을은 과거의 미신을 벗어던진 곳인가? 이마무라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쿠라게 마을의 근대화는 결국엔 제물이 필요했고, 이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다시 폭력적인 신화적 제의를 거쳐야 했다. 이마무라는 문명은 쿠라게 마을에서 또다른 이름의 미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마무라는 그 과정을 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하는 문명과 작은 사회의 폐쇄성을 경멸한다. 그리고 언젠가 대자연과 대자연에서 비롯된 전통은 유령처럼 돌아와 근대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이 결말은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과 비슷하면서도 더 복잡한 인류학적 화두를 찌르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불러일으켰지만 [신들의 깊은 욕망]은 그 점에서 쇼치쿠/닛카츠 뉴웨이브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희대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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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버지, 다시 살아나는 아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과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비교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Nameless Gangster] (2012)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2012)

Nameless Gangster : Rules of Time 
8.2
감독
윤종빈
출연
최민식, 하정우, 조진웅, 마동석, 곽도원
정보
범죄, 드라마 | 한국 | 133 분 | 201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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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0000)

Vengeance Is Mine 
8.3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출연
미야코 초초, 바이쇼 미츠코, 오가타 켄, 오가와 마유미, 키요카와 니지코
정보
드라마, 스릴러 | 일본 | 139 분 | 0000-00-00


*과제용으로 제출한 글을 조금 다듬어서 낸 글이라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두 영화의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과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이하 [범죄와의 전쟁])은 내용 자체로 보면 다른 장르에 속해있다. [범죄와의 전쟁]이 깡패로써 성장해가고 몰락하는 과정을 띄고 있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쫓아가는 영화다. 그러나 일견 관계 없어보이는 두 영화지만 결말의 구조는 서로 닮아 있다는게 흥미롭다. 이 글에서는 이 둘에 담겨있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립에 다루면서 정치사회적인 맥락을 발견하고 동시에 두 영화 속의 세세한 점들의 차이가 어떻게 궁극적으로 질문의 깊이가 가지는 차이로 이뤄지는지 다뤄볼 생각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은 혈연적인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게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범죄와의 전쟁]은 이 관계가 조금 복잡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익현은 자식이 있는 가장으로 묘사되지만 정작 영화 속에서 이 자식들은 익현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동기로써 제시될 뿐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한다. 형배 역시 아버지가 있지만 이 아버지는 먼 친척인 대부님의 말을 잘 들어라라고 훈계하고는 극에서 빠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이 실제적인 부자 관계는 형배와 익현 쪽이 훨씬 강하게 제시된다. 이들은 실제 부자 지간은 아니지만 점점 ‘대부님’과 ‘형배야’라는 호칭으로 집약되는 끈끈한 관계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이제 두 영화의 결말을 보자. [범죄와의 전쟁]의 결말은 이렇다. 먼 친척인 최형배에게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여 최형배를 사법 거래로 넘겨준 최익현은 형배가 증오어린 시선을 받으며 퇴장하는 것을 그저 멍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익현은 자신의 아들을 검사로 키워 “반달”에서 벗어나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손주 돌잔치에서 앞으로 탄탄대로로 나갈 자신의 가족에 대한 미래에 승리를 자축하던 익현을 향해 갑자기 카메라가 그를 천천히 트랙 인 하더니 형배의 목소리로 “대부님”이라는 말이 나오고 익현이 힘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끝난다. 


 다음은 [복수는 나의 것].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인과 사기를 저지르던 에노키즈 이와오가 잡히고, 이와오는 아버지인 에노키즈 시즈오에게 “죽어도 당신과 난 남남이야. 당신도 날 용서하지 않겠지만 나도 당신을 용서 못해.”라고 말한다. 5년 뒤 사형당한 이와오의 유골을 시즈오와 이와오의 아내인 카즈코가 수습해 산에 간다. 케이블카에서 이와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저런 미래를 상상하던 시즈오와 카즈코는 산에 도착해 유골을 뿌리지만, 유골은 갑자기 프리즈 프레임으로 정지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몇 번이나 유골을 뿌리려는 시도는 프리즈 프레임으로 저지되고 끝내 유골은 허공에 멈춘 채로 영화는 끝이 난다.


먼저 이 두 영화의 결말이 어떤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어떻게 비슷한지 보자. 이 결말들은 본편의 후일담 형식으로 결말이 놓여져 있다. 이 공간은 본편의 사건에서 살아남은 캐릭터들이 앞으로 그들이 나아갈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축복하는 자리로 그려진다. [범죄와의 전쟁]은 익현의 아들이 검사로 임명 된 뒤 돌잔치에서 끝을 맺고 [복수는 나의 것]은 5년 후 유골을 받아 재를 뿌리면서 시즈오와 카즈코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복수는 나의 것]은 여기에다 죽은 자의 추모라는 의미가 덧붙여진다. 


두 영화 모두 과거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현재를 축복하지만 어떤 유령적인 존재가 그 행복함을 방해받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는 아버지이고 프레임 밖으로 퇴장하거나 죽는 존재는 아들이나 아들같은 존재이며 이 퇴장당한 아들들은 아버지들에게 배반당해 정부/사법 기관에게 넘겨져 처벌받은 후 후일담에서는 은근슬쩍 그 존재가 무시된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익현은 형배를 사법 기관에 팔아버린 후 익현은 단 한마디도 형배를 언급하지 않으며 오직 혈연으로 이어진 자신의 아들에 대한 자랑만을 늘어놓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에서 시즈오와 카즈코는 “우릴 천국의 사원으로 데려가달라”라고 말하면서 이와오의 유골을 받아 뿌린다. 이 행위에는 이와오에 대한 추모가 보이질 않고 오히려 미래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두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아들 간의 관계가 어떤 유사한 정치적인 함의를 띄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살아남은 자들인 아버지를 보자. 두 영화에서 이 아버지들은 후술한 ‘아들’과는 반대로 실제로는 욕망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권력에 비굴한 이중적인 인물상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큰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이중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두 영화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범죄와의 재구성]의 익현은 ‘반달’이라는 말에서 들어나듯이 완전한 건달도 그렇다고 일반인도 아닌 위치에서 탐욕스럽게 자신의 이득을 챙기면서도 힘의 논리에는 비굴하고 이중적인 캐릭터다. 또한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법으로 대표되는 공식적인 권력에 대해 친화적이며-그는 항상 수첩에 담긴 수많은 인맥을 통해 법망을 피해다니며, 자신의 아들이 검사가 되길 원하며 실제로 마지막엔 그 소망을 이룬다.-‘아들을 호로 자식으로 만들 수 없다’라고 말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이런 익현은 이중적인 모습은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폭력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익현이 얻어터지는 장면은 상당히 자주 나오지만, 반대로 익현이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은 얼마 되지도 않고 그것조차 형배나 그의 부하들이 행사한 실재적인 폭력 뒤에 소심하게 휘두르거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악다구니하는 수준에 그친다. 이런 그의 비굴함은 그가 초반에 애국애족이라는 이유를 갖다대며 경멸했던 일본인 (그것도 야쿠자)에게서 받은 총알이 없는 리볼버로 구체화된다.


한편 [복수는 나의 것]의 시즈오는 자신의 재산인 배를 빼앗으려는 일본군에게 소심하게 저항하다가 결국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해, 병든 아내를 버려두고 며느리인 카즈코와 묘한 욕망에 빠지면서도 이와오의 비난과 범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려는 이중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특히 시즈오가 야스다에게 부탁해 야스다가 카즈코하고 관계를 맺는 장면은 이런 시즈오의 이중적인 면모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카즈코는 그런 시즈오를 보고 “아버님은 교활한 사람이라고 이와오가 그랬다”라고 말하면서 그 이중성을 확실하게 못 박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이중성은 [범죄와의 전쟁]처럼 폭력보다는 성의 문제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와오가 현지처를 여기저기 만들며 성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분출하는 것과 반대로 시즈오는 카즈코를 향한 성적 욕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서로 관계를 지속시키기 보다는 다른 남자에게 카즈코를 넘겨주는 행위를 통해 변태적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으로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제엔 신앙심의 문제가 개입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설정상 시즈오와 그의 가족은 카톨릭이고 시즈오는 독실한 신자처럼 나온다. 하지만 정작 시즈오는 그 카톨릭 교리에 완전히 따르지도 (카즈코하고 묘한 관계를 이어가는 장면.) 그렇다고 그것을 버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냐, 난 짐승 같은 마음을 억눌렀다. 신을 배신할 순 없었어.”)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에서 종교와 신앙심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익현이 가지고 있는 인맥 네트워크라는 점으로 강조된다.


두 영화 모두 그런 아버지 (혹은 유사 아버지)의 반대쪽에 아들(이나 혹은 유사 아들)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이 두 영화에 나오는 아들들은 아버지의 그런 위선적이고 강한 권력에 대해 비굴한 면모에 대해 냉소하거나 혹은 반항한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가 이중성을 보이는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실천하는데서 드러난다.


먼저 [범죄와의 전쟁]에서 아들 포지션을 맡고 있는 형배를 보자. 처음부터 깡패였던 형배는 익현과 달리 영화 내내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데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빈 총’으로 협박하는 익현과 달리 별로 흉기로 보이지 않는 ‘마이크’를 통해 살벌하게 후려치는 형배의 모습은 완력적으로 익현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리고 폭력성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는걸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형배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유사 아버지인 익현의 어정쩡한 경계선상에 있는 윤리와 행동에 대해 회의감을 품는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중반부에 형배가 건달들의 일에 끼어드려는 익현 앞에서 거울을 깨는 장면인데, 여기서 그는 대부님은 건달도 아닌데 그러면 뭐냐고 물어본다. 익현은 이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깨진 거울을 바라본다. 당연히 거기에 비친 익현의 얼굴상은 일그려져 나타난다. 형배에게 익현은 자신처럼 건달의 욕망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범적인 시민도 아닌 자신보다 더 추하게 일그러진 인간이며 이런 비판적인 시간은 영화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구체화되어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배반을 하게 된다.


한편 [복수는 나의 것]의 이와오의 반항과 갈등은 형배보다 훨씬 더 질긴데다 자멸적인 기운이 강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저지르거나 현지처를 만들고 대학 교수로 위장해 여자를 불러달라고 말하며 섹스에 탐닉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와오는 형배와 달리 어느 한 구석에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욕망에 충실하게 방종하고 잔인한 행동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반항을 한다. 


형배가 그렇듯이 이와오는 아래에서 언급할 모종의 사건으로 아버지에 대해 실망한 뒤 아버지의 이중적인 윤리관과 비굴한 태도를 비웃으며 반항적이고 비판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벳푸 여관에 돌아온 이와오가 진사을 알고 카즈코에게 매춘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게 했다고 따지고 시즈오와 카즈코가 이를 반박하자 내숭떨지 말라며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부분이다. 이와오가 보기에 아버지 시즈오는 욕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욕망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것이며 자신은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둘에게 선언한다. 또 카즈코에게 “아들은 낳지 말라”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이와오 자신이 이 반항을 질긴 무언가 (혈연)로 보고 있으며 그것을 궁극적으로 끊으려는 의지를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와 갈등이 캐릭터의 동선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데 벳부의 여관이라는 고정된 장소에 머무르며 살아가는 아버지 시즈오와 달리, 이와오는 일본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사기를 치고 살인을 하고 섹스를 한다. 즉 캐릭터의 이동과 정체가 캐릭터를 설명하고 대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가 아버지를 향해 ‘난 내 다리로 자유롭게 도망다녔어’라고 말하는 부분은 그가 가지고 있는 반항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들이 있지만 두 영화는 이중적이고 비굴한 아버지와 권력에 반하며 욕망에 충실한 아들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두 영화에 등장하는 이중적이고 부정적인 아버지들과 반대로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아들이라는 대립 구도가 궁극적으로 시대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지점이 극적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서 또다른 공통점이 생긴다. 그 점에서 두 영화에서 다룬 아들과 아버지의 대립은 곧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립의 끝에서 아들은 끝내 아버지를 몰아내지 못하고 패해 스크린 밖으로 사라지고 아버지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복수는 나의 것 [復讐するは我にあり / Vengence is Mine] (1979)


먼저 [복수는 나의 것]은 사건의 배경인 1963년을 기점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와오가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 시즈오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천황의 어명을 받들어 제국주의적 침략을 기획하는 군국주의적 권력이 휘두르는 횡포에 대해 소심하게 반항을 하다가 이와오가 ‘폭력’이라는 실재적인 반항을 하자 겁을 먹고 무력한 반항마저 취소하고 군대를 “일본 제국을 위해 배를 바치겠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이와오는 전후에도 비굴한 방식으로 살아남고도 윤리에 반하는 욕망을 품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윤리에 반하는 욕망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킨다. 


 여기에는 역사가 잉태한 국가 간의 정치권력 문제도 끼어드는데 초반부에 이와오가 미군복을 입고 영어를 하며 방종한 생활을 이어가는 부분은 그가 아버지-일본에 대한 반항의 도구로써 일본을 굴종시킨 나라인 미국을 이용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틀에서 벗어난 뒤에도 이어져 이와오가 궁극적인 탈주의 공간으로 대만이나 오키나와라는 여기 일본이 아닌 타자의 공간을 선택하려고 하는데서 드러난다. 한편 [복수는 나의 것]에서 아버지를 굴종시키게 한 더 큰 아버지-국가는 명확한 캐릭터로 드러나지 않고 ‘천황의 명’이라던지 ‘배를 강탈하려는 일본 해군’, ‘경찰’이라는 모호한 대상으로 지칭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마무라 쇼헤이는 전쟁에서 패한 후로도 여전히 일본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더 큰 아버지-국가”인 군국주의의 망령이 "실제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한편 [범죄와의 전쟁]의 시대적 배경은 제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 범죄와의 전쟁은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정권 시절에 행해졌던 공권력의 특별 단속을 지칭하고 있으며 실제로 초반에 그 여파를 보여준 후 익현과 형배의 성장과정을 묘사한 후 시대가 1990년대로 넘어가는 후반부부터 그 정책이 본격적으로 깡패 개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과정을 통해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있다.


물론 이 정책은 깡패와 별다른 윤리적 도덕적 차이가 없는 공권력이 (이는 법령이 시행되자마자 깡패들과 내통하고 있던 경찰들이 연락을 취해 알리는 장면과 깡패들을 때려잡는 형사들의 모습이 지금까지 묘사해왔던 영화 속 깡패들의 폭력 장면과 그렇게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준법과 건전한 사회라는 명목 하에 초법적이고 강제적인 폭력을 써서 민주화의 여파로 끝나지 않은 혼란을 뒤덮으려 한다는 점에서 적인 성격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정책을 실현한 노태우 정권이 전두환과 함께 군부 출신인데다 전두환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교묘한 정책으로 민주화를 갈라놓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이 발생한다.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범죄와의 전쟁]은 그 더 큰 아버지-국가의 얼굴이 검사 조범석이라는 분명한 캐릭터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범석은 깡패와 다를 것 없는 행동을 보이는데다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제외하면 형배에겐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익현을 윽박지르고 갈구는 장면이 훨씬 더 나온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정책에 대한 형배의 선택도 이 범죄와의 전쟁에서 형배는 대적하는걸 포기하고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도피조차 공권력과 내통한 익현이 팔아넘기는 것으로 좌절된다. [복수는 나의 것]의 이와오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자랑하듯이 범죄를 저지르다 우연한 신고로 잡히는 걸 생각해보면 [범죄와의 전쟁]의 형배는 더 큰 아버지인 공권력에게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잡히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차이점은 두 영화 초반부에도 잘 드러난다. 사실 이 장면도 둘 다 주인공들이 경찰에 구속되고 그가 어떻게 범죄의 길에 빠졌는가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잡혀들어가 회상하는 건 아들인 이와오고, [범죄와의 전쟁]에서 잡혀들어가 회상하는 것은 익현이다. 즉 비슷한 주제와 타락, 대립 구도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서술하는 주체가 다른 것이다. 


 여기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들이 법과 공권력에 반항하려고 빠져나가려고 하는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법에 반항하며 빠져나가 이익을 챙기려는 것은 아들보다는 외려 아버지 쪽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공권력에서 탈주하는 것은 공권력에 굴종했던 아버지의 이중적인 삶의 행태를 폭로하고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자멸적인 방식이라면 [범죄와의 전쟁]에서 공권력에서 탈주하는 것은 탐욕스럽게 이득을 취하면서도 정상적인 삶과 가족을 유지하려는 아버지의 이중적인 행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차이는 “나는 짐승이다”라고 선언하는 이와오의 대사와 “호로자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형배의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다시 결말로 돌아가보자. 이 유령이 된 아들들이 살아남은 아버지들의 축복과 행복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궁극적으로 이 방해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나는 본다. 즉 유령으로써 아들이 드러내는 기법과 거기에 담긴 주제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유령이 된 형배는 목소리로 드러나 대부님을 호명하지만 그는 목소리에만 머물며 영화의 이미지에서 강하게 차지하고 있는건 익현의 피로하고 초췌한 얼굴이다. 반대로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령이 된 이와오는 프리즈 프레임을 통해 자신의 유골이 날아가는 걸 집요하게 방해하고 끝내 프리즈 프레임 된 유골 이미지로 영화가 끝나게 된다. 


이 때문에 나는 [범죄와의 전쟁]와 [복수는 나의 것]은 아들의 유령이 비정상적인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국가 권력에 굴복하면서 살아온 아버지들의 비굴한 생존방식을 따져 묻지만 궁극적으로 질문의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범죄와의 전쟁]에 등장하는 아들 형배의 유령은 끝내 혈연-아들의 성공을 축복하는 아버지 익현의 이미지에 깊숙이 침범하지 못하고 이미지가 아닌 익명의 시선과 음향으로 현현해 질문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리고 그 혈연-아들은 영화 내내 아무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에서야 드러나는데 아버지에 대해 복수하거나 그것을 단죄하려는 행동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결국 영화의 주체성은 형배에게 넘어가지 않고 익현에게 머문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아들 이와오는 자신을 망각하고 새 미래로 나가려는 아버지 시즈오와 아내 카즈코의 행동을 프리즈 프레임이라는 실재적인 이미지 조작을 통해 방해하고 끝내 성공해버린다. 비록 유골은 실제 세계의 법칙에 따른 중력에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겠지만 픽션인 영화에서는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영화의 주체성마저 바꿔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두 영화는 유령적인 주체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갈라진다. [범죄와의 전쟁]은 한 시대를 비굴하게 살아남은 아버지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그에 대한 부채 의식과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말 그대로 비굴하게 살아남은 아버지를 영화적인 언어로 복수하려고 달려들고 있다. 아버지를 향한 두 영화가 보여주는 시선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이고 의미가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복수는 나의 것]은 아버지 세대의 죄악과 비굴함에 대해 철저하게 따지며 냉정하게 묻고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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