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인도 영화 (1)
뮤직 룸 [Jalsaghar / The Music Room] (1958)

사티야지트 레이의 데뷔작인 아푸 삼부작은 네오 리얼리즘에 기반한 성장기였다면, 그 이후 영화들은 그 틀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동료들이 그랬듯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붙들려는 영화적 시도와 개성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네번째 영화 [뮤직 룸]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쇠락과 닮아간다. 이 영화는 아푸 삼부작처럼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하기엔 형식적인 매혹이 어른거리며, 양식화된 비극이라고 하기엔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의 근대화와 구세대의 몰락이라는 현지의 화두를 잡고 있다. 어느쪽이든 사티야지트는 [뮤직 룸]을 통해 평생을 추구할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상징과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음악실이 등장하는 이상,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서민이 아닌 유한계급의 사람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할 것이다. 이야기는 1920년대 인도에서 시작한다. 후주르 로이는 귀족 자제의 후예다. 그는 생활력이 없고 음악실에서 인도 전통 음악가들을 불러 소일한다. 하지만 잘못된 영지 경영과 더불어 서구 문명에 보수적인 후주르의 행태는 그를 점점 몰락의 길로 몰아넣는다. 이웃집 사채업자인 마힘 강굴리는 그 틈을 노려 빠르게 성장하지만, 후주르는 그의 성장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사실 연대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비스콘티에게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아직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고저택에 들어가지 않았던 시절이다.), [위대한 앰버슨가]라던가 영국 고딕 소설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원작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사티야지트와 원작자 타라상카 밴디오파댜아이가 어떤 의도로 이 이야기를 끌어왔는지, 인도 문학에서 이런 주제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애매한 추측에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다만 후주르 로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점들이라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영지의 음습한 분위기, 신화적인 몰락은 식민지 시절 수입된 영국 고딕 문학에 등장하는 몰락한 시골 귀족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는건 분명하다. 서구 문명에 대해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티야지트 본인 역시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직 룸]의 기이한 매력은 단순히 서구 문학 전통의 충실한 이식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인도 문화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일지도 모르겠지만, 후주르 로이의 몰락은 영국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비논리적인 박력으로 진행된다. 후주르의 아들과 부인이 사망하는 순간 절제된 샷은 되려 불안감을 스멀스멀 퍼트리며, 아무도 없는 음악실을 쓸쓸히 머무르는 후주르를 덩그러니 보여줄때 카메라는 후주르의 절망을 샹들리에와 같이 모조리 퍼올려낸다. 후주르가 음악실에 슨 거미줄을 건져내는 샷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폐허에 대한 매혹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평범해야 할 샷을 환각처럼 만들어버린다. 이 모든 것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흑백 영화의 음영을 마치 판화처럼 사용한다. 형식으로 보면 [뮤직 룸]은 예정된 몰락에 대한 공포를 그리는 공포 영화나 다름 없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사기일 것이다. 사티야지트가 음악실을 채우는 음악은 쉐나이를 비롯한 벵갈 전통 음악이다. 영화 속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타블로와 시타르 소리는 드론 음악 특유의 정적인 흐름과 울림이 있다. 사티야지트는 드론이 가지고 있는 음향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연주 장면을 찍을때 느린 줌인과 고정된 카메라는 마치 연주자가 영원히 연주할것마냥 그 순간을 담아낸다. 그때만큼은 [뮤직 룸]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후주르의 심상에 공감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샹들리에 위에 깔리는 시타르 소리는 그 점에서 [뮤직 룸]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면 추나 다름없다.

그러나 [뮤직 룸]은 후주르의 심상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후주르를 다룰 때 사티야지트는 냉정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3시간이 아닌 100분이다. 간결하다면 간결한 러닝타임이다. 비극적인 몰락을 다루지만, 사티야지트는 후주르를 다룰때 그가 현실적으로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제시한다. 하인, 부인, 심지어 정부나 그가 경멸하는 강굴리 가까지... 하지만 후주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음악실에서 멋진 전통 음악들을 소개하고 향유하는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지주의 운명이라고 자기합리화한다. 그 자기합리화의 허약함이 드러난다는건 명백하다. [뮤직 룸]은 사티야지트는 후주르의 인도 전통 예술에 대한 집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의 몰락을 가차없이 밀어붙인다. 어떨땐 지나치게 혹독하다 싶을 정도다.

자연히 [뮤직 룸]은 양가적일수 밖에 없다. 우리는 후주르의 몰락을 그러게 왜 저런 멍청한 선택을 하나, 싶은 심정으로 보면서도 그가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매혹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은 거부하기 힘든 법. 실상 사티야지트는 강굴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그의 영악한 처세술은 인정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예술엔 공감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강굴리의 음악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뮤직 룸]에서 사티야지트는 근대 문명과 전통 문명 사이에서 상반된 인물들을 배치하고 고민한다. 그 고민은 아시아가 맞이해야 했던 고민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은 구시대의 종말이다. 후주르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고집의 결과이지만, 기이하고도 장엄한 몰락이기도 하다. 그는 예정된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 화려하게 선형적인 몽타주를 흐트러트리고 죽는다. 불꽃처럼 불타오르는 결말을 정리하며 사티야지트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수 없더라도, 후주르는 쉽게 타자화할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후주르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돈키호테적인 사랑은 정녕 가치 없었던 것일까? 그의 비극이 시대와 전혀 연관 없는 것일까? 후주르는 그 점에서 인간적인 결함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캐릭터다. [뮤직 룸]은 그 인간적인 결함과 시대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몰락의 애잔함을 정교한 영화적 형식과 맞물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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