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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일본 영화 (2)
신들의 깊은 욕망 [神々の深き欲望 / The Profound Desire of the Gods]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시작은 바다 생물들의 모습이다. 꿈틀거리는 이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해보인다. 이 위험천만한 생물들은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가 그랬듯이 이마무라는 자연 근처에서 영화를 시작할때, 강렬한 생물 이미지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마무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의 이미지를 잘게 쪼개 나열한 뒤 그 위에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배치한다. 그 다음 우마와 네키치로 대표되는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등장시키면서, 도덕률을 어기고 본능에 따라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자연과 근친 상간이라는 두 이미지는 [신들의 깊은 욕망], 나아가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앞에서 신 남매의 근친 관계와 섬의 탄생을 다루는 전래 민요를 부르는 가객의 모습이다. 인류 문화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예술 양태를 꼽으라면 노래와 그림, 연극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깊은 욕망]을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다. 가객의 노래는 [신들의 깊은 욕망]을 휘감는 원초적인 자연과 근친상간적인 관계가 신화적 기반에 바탕에 두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마무라는 영화라는 매체가 문명에 기반한 것이며, 이 서사를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선 신화적인 화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입부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섬에 사는 우마와 네키치는 근친상간적 관계이며 네키치에겐 전 부인에게 얻은 카메타로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토리코라는 자식이 있다. 네키치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바다에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낚시를 하는 바람에, 바위를 떨어트릴 구멍을 만들라는 벌을 받는다. 한편 우마는 류 류겐이라는 지역 유지의 첩으로 무녀일을 하고 있으며, 카메타로는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때 카리야라는 측량 기사가 제당 공장 개발건으로 도쿄에서 내려온다. 전임 시마지리를 찾아온 카리야는 어떻게든 공장 개발을 하고 싶어하고 카메타로는 카리야를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네키치의 방해와 더불어 카리야는 토리코에게 빠져버린다. 하지만 개발의 손길은 서서히 쿠라게 섬으로 다가오고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맞는다.

[신들의 깊은 욕망]의 절반은 기가 약한 문명인이 쿠라게 섬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끌려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리야는 개발을 위해 섬으로 찾아오지만, 옛 동료는 섬에 동화해버렸다는걸 발견한다. 카리야는 측량을 위해 섬의 숲으로 들어가지만, 마을 사람들과 문명의 연계를 담당하는 류는 그 영역이 신성한 무녀들의 영역이라고 뜯어말린다. 카리야의 눈에는 쿠라게 마을은 알 수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지만, 그는 혼자 왔기에 마을 전체의 규칙을 깨부술 수 없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카리야의 의지는 점점 시들어가고 때마침 끼어든 네키치의 계략과 토리코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버린다. 카리야는 후토리 가에 편입되어 있는 동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반면 후토리 가는 복잡하다. 이미 [인류학 입문] 같은 영화에서 근친상간적 관계와 기괴한 욕망에 탐닉하며 광기에 빠져드는 인물을 차분히 보여줬던 이마무라 쇼헤이는 후토리 가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댄다. 후토리 가의 부자 네키치와 카메타로는 둘 다 쿠라게 마을의 아웃사이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며 마을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탈주의 방법은 차이가 난다. 네키치 부자가 무인도로 건너와 섬 밖을 빠져나가는 걸 얘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네키치는 폭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지만, 실상은 마을에 내려오는 미신에 매혹되어 있다. 그는 근친상간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돌이 떨어질 구멍을 파며, 개발 계획에 대해 마뜩치 않아한다. 구멍에 돌이 들어가는 순간 네키치는 우마와 함께 신화에 등장하는 무인도에 정착할 생각이다. 네키치는 그 점에서 신화적인 욕망과 탈주를 꿈꾸는 자다.

반대로 카메타로는 처음에 카리야 기사의 조수로 배치되는 장면도 그렇지만, 쿠라게 마을 자체를 지긋지긋해한다. 카메타로는 문명화된 술집과 카리야 기사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 문명 사회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카메타로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탈주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지만, 그가 선택한 탈주 방법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런 식으로는 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카리야 기사로 대표되는 본토의 문명만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카메타로는 가문에 내려오는 근친상간 관계를 거부하는 자다. 영화 초반 토리코의 유혹에도 카메타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짜증만 낼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남자들 사이엔 여자들이 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끌어가는 기괴한 에너지는 근친상간 관계의 목표이자, 주체인 여성들에게서 비롯된다. 이 둘이 마을의 샤머니즘 전통과 연계되어있는 캐릭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지역 유지의 집에 강제로 머물며 성적인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오빠 네키치와의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마도 인상적이지만 토리코는 이마무라가 만들어낸 여성상 중에서도 강렬하기 그지 없다. 정신박약을 앓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인 토리코 앞에서 전통과 문명은 일시적으로 대립이 무화된다. 토리코가 미국에서 온 속옷을 입고 좋아하는 장면과 신내림을 받는 장면은 토리코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두 세계를 포섭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토리코의 불가해함은, [신들의 깊은 욕망] 전체를 이끌어가는 우연과 초자연적 전개와 맞물려 들어가며 영화의 신화적 성격을 강화한다.

이마무라는 [인류학 입문]에서도 그랬듯이 근친상간을, 문명의 도덕률을 반하는 행위며 자연과 가깝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매혹을 보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이 문명과 자연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서사를 진행했던 [인류학 입문]과 달리 자연에서 진행되는 영화인지라 이런 대비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리야와 토리코의 관계가 있다. 카리야는 토리코랑 사랑을 나눌때도 마치 여동생 다루듯이 다루고, 주변 사람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진짜 근친상간 관계인 네키치와 우마에 이르면 더 할말이 없다. 네키치와 우마의 관계는 어떤 사랑보다도 순수하기에 더욱 기괴하다. 네키치가 구멍을 파는 행위는, 지극히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기괴한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국엔 승자는 현대 문명이다. 역설적으로 그 문명이 들어서는 과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쿠라게의 미신에 속해있던 후토리 가의 가장 야마모리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뒤 죽는다. 그리고 돌이 구멍 속으로 들어간 뒤 인물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우마는 노로로써 힘을 잃고, 토리코가 대신 우마를 잇는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토리코가 노로의 힘과 의무를 이해하기 만무하다. 카리야는 도쿄로 돌아가버리고 노로로 대표되는 마을의 샤머니즘적 전통은 몰락한다. 여기서 이마무라는 미신을 지탱하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미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때 어떻게 사람들은 스스로 전통과 미신을 폐기처분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네키치와 우마의 파멸 시퀀스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신화/제의적 속성을 밀어붙이는 시퀀스다. 이마무라는 여기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망망대해에서 도망가려는 네키치와 우마, 그리고 그들을 쫓는 마을 사람들의 동선을 서스펜스를 빌어 쉴새없이 밀어붙인다. 특히 말 없이 가면을 쓴 채 네키치와 우마를 쫓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호러 영화 속 살인마와 다름없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 자체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증오와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은 작은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이 와중에 카메타로는 문명 사회로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와 고모를 살해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폭력을 받아들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과거의 복수다.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쿠라게 마을은 비행장과 코카콜라가 자연스러운 곳이 된다. 영화 후반부에 사라진 카리야는 아무렇지 않게 본처와 외가 사람들을 끌고 자본가 계급 행사를 한다. 카리야 앞에 나타난 건 얼마 전 고향으로 돌아와 기관사가 된 카메타로다. 카리야는 변해버린 쿠라게 마을을 둘러보며 미신을 믿었던 마을은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한다. 하지만 고민에 잠겨 있는 카메타로는 카리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쿄에 있을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그 날 있었던 일이 마을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이에 대답하듯이 이마무라는 기차를 운전하는 카메타로 시점 샷으로 수풀 사이로 뛰어가는 토리코를 툭 던져놓는다. 문명의 아이콘인 기차는 갑자기 멈춰서고 카메타로는 극도의 충격과 흥분 상태에 빠진다. 카메타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카메타로 다음에 우마를 묶었던 붉은 돛을 단 빈 배가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분명한 것은 토리코와 붉은 돛의 샷은 유령처럼 홀연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쿠라게를 상징하는 토리코와 우마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리야 기사는 토리코 얘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즉슨 카리야는 토리코랑 이 섬 자체를 백일몽처럼 여기고 있다.)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토리코는 무녀의 춤을 추듯이 격렬하게 등장해 기차를 신경쓰지 않고 달려가다가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토리코로 대표되는 대자연은 자신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킨 쿠라게 마을과 본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이마무라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쿠라게 마을은 과거의 미신을 벗어던진 곳인가? 이마무라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쿠라게 마을의 근대화는 결국엔 제물이 필요했고, 이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다시 폭력적인 신화적 제의를 거쳐야 했다. 이마무라는 문명은 쿠라게 마을에서 또다른 이름의 미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마무라는 그 과정을 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하는 문명과 작은 사회의 폐쇄성을 경멸한다. 그리고 언젠가 대자연과 대자연에서 비롯된 전통은 유령처럼 돌아와 근대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이 결말은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과 비슷하면서도 더 복잡한 인류학적 화두를 찌르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불러일으켰지만 [신들의 깊은 욕망]은 그 점에서 쇼치쿠/닛카츠 뉴웨이브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희대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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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국화 이야기 [殘菊物語 / The Story Of The Last Chrysanthemums] (1939)

*잔국물어

미조구치 겐지의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우게츠 이야기]와 [산쇼다유] 시절로 대표되는 전후 미조구치 걸작들과 달리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 하나다. 하지만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기온의 자매]와 더불어 1920년대 중후반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한 미조구치의 커리어가 어떤 정점에 달했다는걸 보여주는 영화기도 하다. 동시에 우리가 미조구치 영화를 생각할때 떠올립법한 사회적 인습에서 만들어지는 멜로드라마를 만끽할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무라마츠 쇼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때는 메이지 시대. 도쿄 가부키 명문가 후예인 키쿠노스케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연기 실력은 형편없다. 본인도 내심 그걸 알기에 고민하던 와중, 동생의 유모인 오토쿠의 조언을 듣고 오토쿠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오토쿠는 신분상 키쿠노스케랑 어울릴 수 없는 처지였기에 내쫓기게 되고, 키쿠노스케는 이에 집안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연기 실력을 키우겠다는 의지로 무작정 오사카로 향해 오토쿠랑 살림을 차린다. 세월이 지나고 키쿠노스케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연기에 대한 애정을 잃게 되고 폐인처럼 살아가지만, 오토쿠는 끊임없는 내조를 한다. 그러던 중 오토쿠는 키쿠노스케 집안을 찾아게 되는데...

라는 내용은 사실 흔하디 흔한 예술가와 그를 내조하는 아내라는 평범한 멜로드라마적 세팅이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마지막 국화 이야기]의 뻔하디 뻔한 구조를 비웃을 것이다. 보나마나 마지막엔 비극적인 결말을 통한 카타르시스로 끝나겠지. 그리고 실제로 영화는 그런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전개로만 보자면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고풍스럽다 못해 구닥다리식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하지만 [마지막 국화 이야기]를 보는 현대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감정을 표현하는데에서는 생각보다 냉정하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감정을 이입하기엔 미조구치의 카메라가 담는 '공간'과 '관계'가 먼저 인상깊게 들어온다고 할까. 미조구치는 영화 내내 신기할 정도로 배우 얼굴에 카메라를 자주 들이밀지 않는다. 심지어 들이미는 순간에도 미조구치는 이 컷이 무엇을 표현하고 다음 컷을 생각하고 있다는걸 명백히 보여준다. 오히려 미조구치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캐릭터들이 배치된 '공간'이다. 

이런 연출을 통해 만들어진,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오토쿠랑 키쿠노스케가 산책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며 친해지는 장면이다. 미조구치의 엄격한 풀 샷과 롱테이크로만 이뤄진 이 장면은 오토쿠와 키쿠노스케의 평면적인 동선과 카메라가 일치하면서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쌓이는 과정을 한 컷만으로 설명해낸다. 또한 스승의 죽음 이후 밑바닥 극단에서라도 활동하기로 마음먹은 키쿠노스케와 그를 지지하는 오토쿠 다음에 4년 후 자막과 함께 비루하게 길가에 앉아서 비를 피하는 키쿠노스케와 오토쿠를 보여주는, 너무할 정도로 냉정한 컷 연결과 설계는 어떠한가? 미조구치가 동원하는 모든 영상 언어들은 등장인물들의 멜로드라마틱한 감정을 확대하기 보다는, 그들이 멜로드라마틱해질수 밖에 없는 '과정'과 '시스템'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미조구치 영화를 얘기할때 '초췌해진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곤 한다. 우리는 [게이샤]에서 구세대 인습에서 동생을 지켜내기 위해 정절을 포기하는 선배 게이샤를 치겨봐야 하고, [수치의 거리]에서는 차례차례 비극을 겪어야 하는 매춘부들을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초췌함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로는 도통 연결되지 않는다. 인물들 역시 쉽게 고꾸라질듯 하면서 그 시스템에 고꾸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고꾸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미조구치는 재빠르게 그 비극을 다른 방향으로 환기시키도록 유도한다.  

오히려 미조구치의 영화에서 멜로드라마적 물기와 카타르시스는 인물의 추락이 패배와 다른 방향으로 환기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에서 관객을 울게 만드는 순간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오토쿠의 모습이 아니다. 오토쿠와 키쿠노스케가 마침내 사회의 시선을 견뎌내고 인정받았을때다. 오토쿠와 키쿠노스케가 마지막에 재회했을때 시퀀스는 클라이맥스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길게 묘사되는데, 그 클라이맥스에서 그들은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가 아니라, 마침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물론 멜로드라마적 관습은 그 인정이 얼마 안가 스러질 것이라는걸 예감케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들의 긍지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는걸 확인하고 안도하게 된다. 또한 이런 긍지를 상대적으로 끝까지 지킨 사람은 바로 오토쿠이다. (미조구치 영화의 주인공들이 주로 여자였던 이유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인습에 따라 헤어져야 했지만 그들은 잠시나마 다시 함께하고 인정 받는다. 그렇기에 미조구치 영화의 패자들은 절대로 비굴하지 않다.   

그렇기에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단순히 신분 차를 뛰어넘은 로맨스에 그치지 않고 어떤 냉엄한 구조에 저항하는 긍지의 멜로드라마를 담은 영화가 된다. 등장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사회의 굴레에 핍박받고 눈물짓지만 그럼에도 자기 자신엔 당당하고 결말에 이르면 어떤 숭고함으로 승화된다. 그렇기에 당당하지 못한 우리는 숭고한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이런 긍지의 멜로드라마는 전후 미조구치가 만들게 될 [게이샤]나 [치카마츠 이야기] 같은 영화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가 미조구치 첫 걸작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가 그동안 만들어왔던 영화 어법이 일관되게 정립된 첫 영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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