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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일본영화 (17)
노비 [野火 / Fires on the Plain] (2014)

시작은 따귀다. 첫 샷에서 츠카모토 신야는 자신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구타한다. 이 폭력이 담긴 샷들은 거칠고 불안정하다.  츠카모토는 이 도입부를 통해 자신의 첫 전쟁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몸에다 새겨넣으려고 애쓴다. 그의 영화가 과잉된 육체와 속도의 에너지를 만화적 과장을 무릎쓰더라도 프레임에 새겨넣으려는 연출로 유명해졌다는걸 생각해보자. 츠카모토에게 전장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장소다. 그 점에서 [노비]의 따귀는 어떤 약함도 허용되지 않는 과잉된 현장을 육체에 체득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하지만 [노비]는 츠카모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노비]의 원작은 오오카와 쇼헤이의 체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원작은 이미 이치가와 곤이 1950년대에 영화화한 적이 있다. 이치카와 곤의 [들불]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는 감상하지 않은 지금 이 순간 적는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가 고전기 스튜디오 시절 감독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츠카모토가 만들었던 것보다는 훨씬 정제된 영화였을 것이다. (실제로 고어 묘사가 삭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체 츠카모토는 원작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만든 것일까?

[노비]가 내세우는 주인공 타무라 일등병은 낙오자다. 폐병에 걸렸다고 항의를 해도, 전쟁을 만들어낸 불합리한 시스템은 그의 병을 모른척 하고 내쫓는다. 그는 계속 전장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군상을 만난다. [노비]의 서사 구조는 한 점이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타무라는 전장에서 빠져나가 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그 이동마저도 쉽지 않다. 퇴각할 수 있다는 정보는 점점 신빙성을 잃어가고 점과 점 사이를 지나가면서 타무라는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다. 극단적인 수직 권력 관계, 폭력, 무의미한 죽음, 식인....

[노비]가 전장을 다루는 방식은 추상화다. 일부는 저예산 독립 제작을 고수하는 츠카모토 특유의 제작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 방식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의도적으로 배경을 추상화시키고 있다. [노비]에 등장하는 동남아의 정글은 문명은 커녕 전장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부조리극처럼 추상화된 곳이다. 샷과 샷 간의 시공간은 명확한 구분이 없이 흘러가며, 인물들의 행동은 의미를 잃고 동물처럼 퇴화해 있다.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원색의 강렬한 자연, 제목의 들불, 병약한 타무라가 정신을 잃고 암전되는 장면, 디졸브와 얼굴 클로즈업 샷을 쪼개는 기법을 오가며 지옥 속 인간의 심리와 육체를 휘갈겨 그려낸다.

하지만 츠카모토는 추상화된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안다. 타무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현지인들을 조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영화의 차가운 응시를 격렬하게 보여준다. 이 시퀀스는 구조상 상당히 초반에 등장하는데, 타무라의 불안한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훔쳐보는 현지인들은 전쟁의 광기가 상관없이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숨어있던 타무라가 등장하는 순간, 이름없는 현지인 커플의 행복은 산산조각 난다. 서로에 대한 의심과 한계에 도달한 이성은 이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간다.

이 시퀀스 말미에 등장하는 현지인 여성의 광기 넘치는 비명은 그 점에서 무시무시하다. 츠카모토는 타무라가 현지인들에겐 무시무시한 가해자에 불과하며, 그 증거로 피해자의 악에 찬 절규를 타무라와 관객 앞에다 가져다놓는다. 이 시퀀스가 그럼에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면 타무라 역시 제국주의의 피해자라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무라는 현지인 여성도 쏴 죽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짓지만, 동시에 피해자 타무라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교회는 결국 구원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고어 묘사가 있다. 전장에서 갈려나가는 병사들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고어 호러 영화와 닮아있으며, 그것들을 표현하는 샷들은 샘 페킨파처럼 파편화되어 흩날린다. 츠카모토 신야의 B급 정신이 전쟁 영화에 이식된 것이다. 얼핏보면 [노비]의 어법은 위험해보인다. 전쟁 영화에서 고어 영화의 피범벅을 빌러, 끔찍함을 영화적 즐길거리로 만드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비]는 전쟁을 쉽사리 스펙터클화하지 않는다. 비슷한 어법을 쓰지만 살짝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듯한 샘 페킨파와 달리, [노비]의 슬로모션과 쪼개진 샷들은 넘쳐나는 고어의 과잉을 차갑게 응시한다. [노비]의 고어 묘사가 무서운 이유는 결국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육은 그 점에서 [노비]의 고어 묘사의 집약판이라 할 수 있다. 츠카모토가 [노비]를 현 시점에서 리메이크한 이유도, 1950년대 당시엔 불가능했던 고어 묘사와 인육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건 원작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노비]에서 인육이 원숭이 고기로 위장되는건 상당히 흥미롭다. 인육이 상징하는 극단적인 생존 본능이, 원숭이의 고기로 포장되면서 잠시나마 본능과 도덕이 양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육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 양립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까발려진다. 줄곳 생존만을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이동하던 타무라가 분노하는 순간 역시 이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 죽어가던 타무라의 양심은 다시 깨어난다. 타무라는 최후의 순간, 인육을 더 이상 먹는걸 거부하면서 무의미한 존재가 되길 거부한다.

그렇게 거부했건만 타무라는 스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포로가 되서야 살아나갈수 있었다. 여기서 원작과 츠카모토판 영화와 차이가 발생한다. 츠카모토는 원작과 달리 타무라 앞에서 나가마츠가 자살하는 것에서 본편을 마무리 지은 뒤, 막간 자막에 게릴라에게 습격 당했다는 디테일을 추가하면서 오오카와가 품고 있던 회의적 시선을 강화시킨다. 당사자인 오오카와가 트라우마로 묘사하지 못했던 순간을 전후 태생인 츠카모토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재현할 수 있기에 가능했던 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노비]는 '들불'을 일본어로 음독한 제목이다. 오오카와 쇼헤이의 원작이 그랬듯이 [노비]에서도 들불은 생존과 죽음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노비]의 마지막 쇼트는 오오카와가 그려냈던 '들불'을 츠카모토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일본으로 돌아온 타무라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경험을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고, 트라우마로 인한 거식증은 그를 괴롭힌다. 잠시 쉬러 나온 타무라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영화 내내 등장했던 불의 이미지가 유리창에 비춰지는 환영을 본다. 이때 타무라는 마치 불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츠카모토는 일본조차도 들불로 대표되는 군국주의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불안에 갇혀있다고 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노비]가 마지막에 보여준 불의 감옥은 무시무시하고 섬뜩하다.

*원작에 대한 정보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74669&cid=41773&categoryId=50387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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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お早よう / Good Morning] (1959)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이나 [동경 이야기]로 대표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즈 야스지로 영화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는 영화다. [동경 이야기]로 스타일의 완성한 오즈는 [이른 봄]부터 초기작들을 다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놓고 [부초이야기]의 리메이크를 자처했던 [부초]랑 동시기인 [안녕하세요]는 전후에 만든 [태어나기는 했으나]에서 다뤘던 아이들로 다시 돌아온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태어나기는 했으나]의 느슨한 리메이크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안녕하세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로써는 최첨단 문물이었던 텔레비전이다. 이웃집 신식 문물을 텔레비전에 환장한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어떻게든 텔레비전을 집에 들여놓고 싶어하지만 엄격한 그들의 부모님은 거부한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침묵하는 것으로 반항하고 이 와중에 미노루와 오사무 주변의 친구들과 어른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우선 다른 오즈 야스지로 영화들도 그렇지만, [안녕하세요]를 보는 관객들이라면 어떤 강력한 구조가 영화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첫 두 컷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으례 그래 왔듯이 지금까지 꾸준히 개척해왔던 필로우 샷과 정물 샷으로 영화의 확고한 구조를 세운다. 두 집의 지붕 처마를 이용한 프레이밍 위에 등교하는 아이들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진행되는 공간과 인물을 모두 설명해낸다. 이 장면의 정교함과 치밀함은 무서울 정도다. 기본적으로 이웃한 집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동선이 많은 영화인데, 오즈는 철저히 다다미 쇼트을 기반으로 문 프레임과 그 곳을 오가며 대화하는 인물의 동선을 맞춰서 프레임을 짜고 있다. 스타일면에서 완숙한 시절의 영화답게 [안녕하세요]는 넉넉한 인심과 달리 치밀하기 그지 없다.

재미있는것은 [안녕하세요]에서는 그 치밀한 구조를 이탈하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정확하게 뭘 지시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도구'에 가까운 존재들이였다. 하라 세츠코나 류 치수 같은 오즈의 대표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들은 오즈 영화 속에서 비슷비슷한 표정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얌전하며 예의바르며, 가끔 감정을 표출한다 해도 단아하게 정리해낼줄 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초인적으로 현명하다. 그렇기에 오즈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친숙한 현명함에 안도감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오즈가 강력하게 믿는 세계 법칙의 일부로써 행동한다.

하지만 [안녕하세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비교적 자유롭다.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반복되는 인사말로 대표되는 오즈의 세계를 한심하게 여기며, 자신이 욕망하는걸 얻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반항한다. 그들은 명백히 오즈의 우주를 이루는 세계의 법칙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반항한다. 이는 유성 영화에 대한 무성 영화적 반항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좋은 날씨네요' 같은 발화를 우습게 여기며 방귀를 끼는 간단한 행위에 즐거움을 느끼며, 어쩔수 없이 말을 할때조차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유성영화적이기 보다는 무성영화적이다. 찰리 채플린 같은 무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무성영화적 유머는 비단 아이들에게만 발견되는게 아니다. 미츠에가 식칼을 들어 세일즈맨의 연필을 깎는 장면은 아마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장 웃긴 장면일 것이다. 여기엔 오즈 자신의 셀프 패러디도 담겨 있다. 아이들의 이마를 누르면 방귀를 뀐다는 설정 자체가 반복되는 오즈 영화 특유의 반복되는 구조를 연상케하지 않는가? 심지어 오즈는 친절하게 한 아이는 똥을 지리게 한다. 

[안녕하세요]는 다른 오즈 영화들보다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한쪽엔 TV와 서양 잠옷을 입는 부부가 사는 집과,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사는 아파트로 대표되는 서구식 공간이 있으며 다른 한 쪽은 다다미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민의 공간이 있다. [안녕하세요]의 전개 대부분은 미노루와 오사무가 문명의 이기 때문에 두 공간을 왔다갔다하면서 이뤄진다. 흥미롭게도 미노루와 오사무는 설정상 학교를 다니는 연령대의 아이들임에도 이 영화에서 학교는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한다. 두 공간의 대조를 집중해달라는 의도 때문일까?

이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은 세대라는 문제도 반영되어 있다. 아마 [안녕하세요]는 류 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상이 완고한 가부장으로 출연하는 얼마 안되는 영화일 것이다. 류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 케이타로가 미노루와 오사무를 혼내는 장면은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부장성이 드러나는 장면일 것이다. 노리코 삼부작에서 류치수는 온화하고 현명한 노인이라면, [안녕하세요]의 케이타로는 현실에 찌든 모습이 강하다. 이런 찌듬은 케이타로 뿐만 아니라, 해고 뒤 쓸쓸히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는 토미자와라는 캐릭터로 잘 드러나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명백한 균열이 영화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것은 상술한 세대 간의 갈등이기도 하고, 새로운 문물과 그걸 향유하는 자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하고, 시대의 흐름을 못 쫒아가는 자의 낙오이며, 소통의 엇갈림으로 발생하는 오해기도 하다. 때론 그 균열은 비등점까지 치닫는다. 아무것도 모른채 미노루와 오사무가 갉아먹는 주축돌에다 쥐약을 발라놓는 계획을 하는 타미코라던가, 엉뚱한 오해로 이웃들이 뒷담화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오즈 영화답지 않은 아슬아슬함이 있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그 균열을 극한으로 밀고 가지 않는다. [안녕하세요]는 초반부에 세워졌던 세계를 이루는 구조에 대한 강력한 믿음으로 이내 다른 오즈 영화들처럼 그 균열을 금세 메꾼다. 다만 [안녕하세요]는 그 균열을 메꾸는 자는 전작들처럼 현명한 인물이 아니라, 중재자다. 오즈는 이 균열을 메꿀 자로 아이들의 영어교사인 헤이이치로를 내세운다. 그는 서구식 아파트에 살며, 영어라는 신문물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어른이다. 그는 아이들의 방귀 농담을 바보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두 형제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요컨데 헤이이치로는 아이들의 세계를 떠났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줄 아는 사람이다.

헤이이치로의 중재로 소동이 끝난 후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초반부의 안정된 구조로 돌아간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약간의 꾸지람을 듣고 그렇게 원하는 텔레비전을 얻고, 직장에서 밀려난 세일즈맨 토미자와는 새로운 직장을 얻는데 성공한다. 이웃들도 어느새 오해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 역시 그런 일상 속에서 일어난 유아적인 욕구 해소다. 정밀하게 구성된 프레임 속에서 공간과 인물 간의 관계가 강조되는 와중에 정곡을 찌르지만 넉넉한 인심을 품은 유머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안녕하세요]는 자크 타티의 영화랑 닮아있는 영화기도 하다.

대체 그런 균열마저도 품어안을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곳일까? 그 믿음의 단서은 영화의 제목인 '안녕하세요'에서 온다. 아이들의 투덜거림을 인정하면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일견 단순한 인사조차도 분명 의미가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오즈는 그 의미의 아름다움을 헤이이치로를 통해 보여준다. 일련의 소동이 끝난 후 헤이이치로와 미노루 형제의 이모인 세츠코는 승강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그들은 그러나 고백 대신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인삿말을 한다. 하지만 이 인삿말이 무의미한 인사가 아닌 어떤 관계의 시작이라는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이다.

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형제 중 오사무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마무라 쇼헤이의 [니시긴자역 앞에서]에서 출연한 바 있다. 오즈가 그 영화를 보고 오사무에 캐스팅했을지는 전적으로 역사가의 몫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의식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마무라가 반 오즈주의자였다는걸 생각해보면, [안녕하세요]에서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을 품어안는 방식은 후배들이 일으킨 쇼치쿠 뉴웨이브에 대한 답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무의미하다."는 후배들의 도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오즈는 분명 그 안녕하세요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안녕하세요'는 오즈의 성찰과 더불어 오랫동안 구축해온 영화 언어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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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 Journey to the Shore] (2015)

2013/08/26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규 [叫 / Retribution] (2006)

죽은 남편이 돌아와 여행을 제안한다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의 기본 뼈대는 판타지 장르에서는 참신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해안가로의 여행]의 도입부는 신비롭다. 장을 보고 팥죽을 만들던 주인공 미즈키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미즈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남편 유스케가 서 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듯이.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엔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안다. 심지어 친절하게 유스케는 자신이 실종되었다는걸 죽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 장면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이전 프레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당혹감과 경외감을 느낀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영화는 지구의 물리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워즈]나 [그래비티]처럼 무중력을 현실로 가정한 공간에서 영화를 진행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 무중력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중력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관객들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공간에서 영화를 찍던 도중 중력을 거스르는 장면이 등장하면, 우리는 당황하며 이전 컷과 이후 컷을 따로 분리하려고 한다. 그 전까지 강하게 세워져 있던 현실의 프레임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떤 허구의 마술이 일어난다. 그 마술이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의 진짜 매력 중 하나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령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유령은 현실에 속하지 않은 것이기에 인간이 등장하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편집이나 샷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평범한 장르 영화의 유령들은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요시의 유령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를 깨닫게 해준다. 기요시의 유령들이 영화 탄생 후 무수하게 등장한 마술 중에서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면, 그는 숏의 구성과 연결, 사소한 소품들이나 몸짓, 그림자와 색채에서 중력과 무중력을 구성할 줄 아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술을 담당하고 있는 유스케를 보자. [절규]의 여자 귀신이 그랬듯이, 우리는 그의 모습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아사노 타다노부라는 훌륭한 배우가 연기를 했다는 점도 있지만 유스케의 복장이라던가 (실제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유스케의 주황색 코트였다. 옷의 색이 하나의 캐릭터화된다는 느낌이였달까. 같이 다니는 미즈키의 무채색 옷과 대조되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대사 사이에 등장하는 어떤 침묵의 간극, 무심하게 일어날 수 없는 현실을 흘러내보내는 행동거지에서 우리는 그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분명히 죽었을 유스케가 살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 터무니없음에 당혹해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 받아들임은 전작들과 달리 절망이나 묵시록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절박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즈키가 큰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게 유스케의 유령을 받아들이는 것도, 오히려 그 멜로드라마적인 물기에 잠겨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스케가 돌아오길 기대하며 썼다는 기원문은 미즈키가 중력을 거르는, 어떤 영화적 현상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스케의 제안에 미즈키처럼 따라 여행을 떠나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유스케와 미즈키의 여행은 일종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유스케는 자신이 없었던 지난 3년간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사람들을 미즈키가 체험하길 원한다. 유스케가 보여주는 이야기엔 지박령처럼 한 자리에 머물며 죽음을 인지 못하는 유령도 있으며 반대로 유령을 잊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의 얘기도 있다. 즉 유스케가 어떤 영화적인 사건이라면 미즈키는 관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스케와 미즈키가 처음으로 찾아간 신문 배달을 하는 시마카게라는 할아버지를 보자. 중간의 반전으로 시마카게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며 지박령처럼 그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는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마카게가 머무는 장소다. 미즈키가 그 장소에 들어섰을 때, 관객들은 그 장소가 죽은 장소라는걸 쉽게 알아차린다. 혼자서 머물기엔 지나치게 넓은 공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어두운 그림자, 어딘가 빛바랜 가구들... 에피소드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그런 소멸해버린 시간과 공간을 기요시가 호러 장르에서 구축했던 어법을 빌어 서늘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곳은 영화의 마법이 드러나는 최초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시마카게가 만드는 꽃 사진 콜라쥬는 그런 마법의 일부이자 총화라 할 수 있다. 잠든 시마카게를 데려와 침대에 눕히던 미즈키와 유스케를 뒤로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꽃 사진 콜라쥬가 등장한다. 이때 다음 컷에서 카메라는 트랙인을 하면서 콜라쥬를 확대해 보여준다. 벽 한가득 차 있던 꽃 사진 콜라쥬는 화면 가득히 채워진다. 그리고 미즈키의 넋을 잃고 바라보는 리액션 컷이 붙는다.

동시에 이 장면은 유령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연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스케의 등장이 그랬듯이, 꽃 콜라쥬 역시 유스케와 미즈키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침대에서 잠들었을 때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벽에 붙은 꽃들을 비추는 인공적인 조명 연출은, 마치 그가 사라지기 전에 남기는 유언처럼 조용하고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비록 시마카게는 외롭게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했지만, 그가 살아있던 흔적은 그렇게 현계에 남아 관객들의 멜랑콜리를 자극한다.

이렇게 빛을 조절해 다른 시공간에 속한 것 (유령)을 불러와 어떤 아름다움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은 유스케가 두 번째로 데려가는 곳인 중년 부부의 음식점 에피소드에서도 이어진다. 음식점에서 일을 돕던 미즈키는 우연히 집안에서 피아노를 발견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미즈키는 후지에에게 갑작스러운 제지를 받게 되고, 후지에와 후지에 여동생 마코의 사연을 듣게 된다. 후지에가 괴로운 과거를 얘기할 때 영화는 관객이 알아차리기 힘든 속도로 조명을 서서히 어둡게 한다. 후지에가 사과하고 싶다고 털어놓는 순간, 미즈키와 관객 눈 앞에 마코가 나타난다. 이제는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다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마코는 유스케와 같은 시공간에 속해있다가 불현듯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미즈키는 놀라지 않는다. 미즈키는 마코에게 피아노를 쳐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템포에 맞게, 천천히”. 마코가 피아노를 칠 때, 어두웠던 방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함께 서서히 다시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코는 환하게 웃는다. 마코가 환하게 웃는 순간 우리는 소녀가 원하던 것을 이뤘다는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컷에 후지에의 마코는 사라지고 없다. 마코가 떠난 방엔 빛과 두 사람의 눈물로 채워진다.

상기했듯이 기요시는 유스케의 등장을 평범하면서도 낯설게 처리하면서 유령이 어디서 왔는지를 상기하게 했다. 그렇다면 유령이 자신의 얘기를 마무리한 뒤엔 어떻게 사라져야 하는가? 먼저 전에 등장한 시마카게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고 있다. 시마카게의 아내는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사라지는 장면은 평범한 일상을 마무리하듯이 어느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채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 마코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코는 후지에의 고백 속에서 뭘 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 공간에 계속 머물며 죽은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시마카게와 달리, 마코는 후지에의 염원이 불러낸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원하는걸 이룬 마코는 환한 웃음과 함께 밝은 빛이 채워지면서 불현듯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기요시는 각 유령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을 파악하고, 어떻게 사라질지 연출하고 있다.

후지에와 마코 에피소드가 끝나고 기요시는 문득 여행을 갑자기 중단한다. 유스케가 토모코라는 애인이 있다는걸 안 미즈키는 유스케와 다투던 도중 돌아가서 물어보겠다고 뛰쳐나온다. 그 다음 샷에서  미즈키는 자신의 집에서 잠이 깬다. 이때 기요시는 시마카게가 사라진 이후의 공간을 보여주던 방식으로 미즈키의 집을 보여준다. 이 시퀀스 자체는 현실과 비현실간의 간극을 환몽 구조로 보여주는 흔한 시퀀스이지만, 신문들과 고지서가 보여주는 물질성과 현실성은 영화 내 맥락에서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유령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헛된게 아니라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무언의 주장이랄까. 

토모코와의 대화 끝에 미즈키가 유스케를 부르는 장면은, 미즈키가 유스케의 유령이 절대로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결론 끝에 나왔던 거 아닐까. 그 점에서 미즈키의 집에 등장했던 죽은 식물들과 고지서들은 시마카게의 낡은 꽃처럼 유령과 얽혀있던 시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같은 어조임에도 이전에 쌓인 성찰에서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의심을 품고 있던 관객들조차 이 영화의 세계가 유령이 어떤식으로 살아가는지 받아들이게 된다. 유스케가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유스케와 함께 마을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던 미즈키는 마을 아이에게 영계로 이어지는 폭포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행방불명된 타카시와 남아있는 카오루의 사연이 등장한 이후, 미즈키는 다시 폭포로 갔다가 죽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여전히 영화 속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등장하지만 이전 장면들과 달리 긴장감으로 차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딸과 비슷하거나 어린 배우가 아버지를 연기하는 부조화도 그렇지만, 유스케를 원망하며 미즈키를 다그치는 미즈키의 아버지는 [절규]나 [회로]에 나왔던 유령처럼 무언가 서늘하고 냉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그동안 미즈키가 만나왔던 유령들과 달리 유스케처럼 온전히 미즈키에게만 속한 유령이기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어쩌면 인간인 네가 이 여행을 올 필요가 없었다고 현실을 재차 각인시켜준 존재일지도 모른다. 바람을 피우며 소중한 딸인 미즈키에게 상처를 주는 남편 따윈 잊어버리고 출발하라는 유혹이랄까.

하지만 미즈키는 기요시의 남자들과 달리, 그 유령을 달래는데 성공한다. 미즈키는 이미 여러 명의 귀신과 토모코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여행이 3년 동안 비어 있었던 어떤 순간을 채우고 떠나보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다음 컷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언급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음 시퀀스에서 우리는 미즈키가 맞이해야할 유스케와의 기나긴 이별 준비 시퀀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사하고도 큰 연관관계도 없는 시퀀스임에도 기요시는 풀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감상적인 음악을 깔면서 유스케와 미즈키가 시골 마을에서 일상을 보내는 과정들을 몽타쥬로 연결해 보여준다. 직전에 등장하는 유스케가 빵 봉지를 잘 못 뜯는 신은, 유스케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암시로 받아들일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신은 직전 신과 이후 신과도 전혀 연관이 없고 의미도 언뜻 파악하기 힘들다. 기요시는 놀이터에서 유스케가 멀리 어딘가를 보는 걸 미즈키가 그걸 바라보게 세팅을 한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리 촬영을 한다. 음악이 고조되며 두 사람이 거의 일직선이 되었을 때, 기요시는 미즈키의 바스트 샷으로 넘어간다. 미즈키가 유스케를 바라보고 있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을때, 기요시는 달에 구름이 스쳐지나가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이 끝날 때, 앞 뒤 신과 연결되어있다는걸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 기요시는 인간인 미즈키와 유령인 유스케 간의 어떤 간극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여행이 끝나야만 하는 것임을 드러내게 한다.

그렇기에 후회를 안고 원념이 되어가는 타카시를 성불 시키고, 우주와 시간, 사랑에 대한 다소 장황하고 직설적인 고백이 이어진 뒤 미즈키와 유스케는 섹스를 하게 된다. 실종 직전 부부관계가 그렇게 원만했다고 할 수 없었음에도, 이 시퀀스에서 미즈키와 유스케는 마치 신혼여행에 온 부부처럼 몸을 섞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 여행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걸 증명하듯이 그들은 마지막 행선지인 유스케가 사라졌던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닷가는 솔직히 절경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다. 동아시아 (한국이라면 강원도) 어딘가에 내려서 해변가로 가는 버스 티켓 한 장 얻으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어업 도구들과 배들이 널려있는 그런 곳. 기요시는 그런 일상적인 풍경을 애써 지우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대신 한적한 풀밭에 배우들을 앉혀놓고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는 햇빛과 풀들을 묘사한다. 거기서 유스케는 덤덤히 아름다운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상기했듯이 [해안가로의 여행]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도 볼 수 있다고 적은 바 있다. 

어찌보면 미즈키가 떠나지 말고 여기 계속 있어달라는 지극히 신파적인 고백은, 이야기와 서사가 끝난다는 사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이야기가 끝나고 무언가를 얻거나 잃은 캐릭터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 어딘가는 서사마다 다르다.) 우리는 그곳을 따라갈수 없다. 작가 혹은 절대자가 서술하지 않기 떄문이다. 그저 우리는 상상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 결말은 스파이크 리의 [그녀]에서 사만다가 시어도어에게 더 넓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난다고 고백하며 떠나가는 결말과 닮아있다.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실에서 비롯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듯이 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더이상 약하지 않다. 어떻게 사과할줄 몰랐다고 말하는 유스케의 말에 "원하는건 이뤘어."라고 대답하는 미즈키의 말이 그렇다. 무언가 원하고 있었기에, 불현듯 등장했다는걸 깨닫고 그것과의 여행에서 원하는걸 찾아냈기 때문이다. 유스케가 사라지는 장면은, 상술했던 마코나 타카시가 불현듯 사라지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서 충만한 감정을 발견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미즈키는 유령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방식을 이미 충분히 체득했기에, 그 사라짐을 아파하지 않는다. 그저 밝은 햇빛을 잠시 만끽할 뿐이다. 

스파이크 리는 비물질계로 떠나는 자들을 배웅한 물질계의 두 남녀가 밝아오는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서 영화를 마무리지었다. 기요시는 거기서 조금 더 보여준다. 미즈키는 남편이 돌아오길 고대하며 쓴 기원문을 태운다. 그때 카메라가 보여주는 성냥곽은 두 개의 시계가 그려져있다. 마치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며 움직여 온 미즈키와 유스케의 여행을 상징하듯이. 그리고 미즈키는 짐을 들고 프레임 오른켠 앞으로 전진해 사라진다. 

미즈키가 사라지는 방식은 유령이 사라지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미즈키는 프레임 안에서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프레임을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난다. 그것이 인간이 사라지는 방식이라고 기요시는 생각했던 것일까. 음악이 흐를때 우리가 볼 수 있는건 이별을 맞이하며 바라봤던 해안가다. 그 순간 이 해안가는 한 유령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프레임 밖의 '더 아름다운 곳'을 찾아 떠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증언자가 된다. 이때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은 너무나 우아하다. 마치 지금까지의 여행을 정리하는듯한 움직임이라고 할까. 거기서 기요시는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 전작들에서 편린으로 등장했던 유미주의가 완연하게 꽃을 피운다. 이 영화가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를 의심없이 그대로 가져온다고 꼬투리 잡을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큐어]나 [회로], [절규]에 내세울 정도로 좋아한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삶과 영화를 좀 더 사랑하는 방식을 배울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령이 어떤 시공간에 속하는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극적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영화 언어로 배치하는 과정에서 정서적인 힘이 나온다고 할까. 그런 부분에 설득당했기에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겨둔 해안가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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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움 [淵に立つ / Harmonium] (2016)

[하모니움]의 도입부를 장식하는건 스즈오카 부부의 딸 호타루의 풍금에 맞춰 울러퍼지는 메트로놈의 음이다. 그리고 음에 맞춰 조각조각난 타이틀 '늪에 서다'라는 타이틀이 붙어졌다가 다시 사라진다. 마치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산산조각나 사라지는 것처럼 맞춰진 오프닝 시퀀스는 불길함을 안기기 충분하다.

후카다 코지는 당돌하게도 다음 시퀀스로 오즈 야스지로가 세계 영화계에 남긴 유산 중 하나인, '가족이 밥을 먹는 장면'을 이어간다. 하지만 [하모니움]의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불편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밥상에서 나누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죄에 관한 대사도 그렇지만, 침침한 조명과 다소 스산한 기운이 스며든 스즈오카 가족의 식탁엔 활기참이나 친밀함은 없다. 

오즈의 밥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려고 드는 후카다 코지의 악의는, 곧 토시오라는 캐릭터로 연결된다. 점잖고 친절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토시오는 속내를 쉬이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이 점은 곧 후반부에 드러나는 토시오의 죄와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당연한 벌이라 생각하는 뒤틀린 심리하고도 연결된다. 그 점에서 토시오의 침묵은 균열의 징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한 야사카 소타로가 등장하는 샷은 후카다 코지가 선배 감독 중 누굴 존경하고 인용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바로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다. 소타로의 첫 등장 샷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유스케가 처음 등장하는 샷처럼 낯설고 음기로 가득차 있다. 이 샷에서 소타로는 표정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데다 그를 감싸고 있는 빛은 지나치게 환한 나머지 위화감이 든다.

다만 유스케가 이내 친밀함을 드러내며 미즈키에게 과거를 환기시킨다면, 소타로는 친밀함을 극도로 인위적으로 표출하면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킨다. 그 인위적인 친밀함을 걷어내보면 소타로는 무도덕한 짐승이다. 그리고 이런 짐승성은 종종 성적인 긴장감이나 서스펜스로 드러나기도 한다. 소타로가 목욕하고 나오던 도중 풍금 연습하던 아키에와 호타루를 마주치는 장면이라던지 물놀이 도중 토시오를 협박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점에서 소타로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의 에노키즈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후카다 코지가 다음으로 꺼내든 카드는 바로 종교다. 한국 영화와 달리 현대 일본 영화에서 기독교인을 다룬 영화를 찾아보기는 꽤 힘든 편인데, [하모니움]은 그 희귀한 케이스에 속한다. 오프닝에 슬쩍 대두된 종교적 죄의 개념은 이내 교인인 아키에와 소타로의 관계를 통해 회개와 속죄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처음엔 소타로를 낯설어하던 아키에는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소타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는 애정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은 곧 죄의 경계를 위태하게 배회하게 되고 그 결과는 파국이다. 후카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공을 들인 캐릭터가 아키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키에의 감정은 열려있다.

소타로가 아키에에게 죄를 털어넣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인상적이다. 클로즈 업을 많이 쓰는 영화는 아니지만, 이 시퀀스는 유달리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를 활용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소타로의 클로즈업 샷이 압도적이고, 아키에의 리버스 샷은 비중이 적다. 하지만 아키에의 표정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늘 열려있기에 안정감을 주지만 소타로의 고백은 미심쩍음을 남긴다. 심지어 그의 고백과 참회가 진짜인가? 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 점에서 후카다 코지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이 영화의 성패는 캐릭터의 투명성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츠츠이 마리코, 아사노 타다노부, 후루타치 칸지 등 세 배우의 인상적인 연기도 빼놓지 말아야 되겠지만.

[하모니움]은 이처럼 소타로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고 보이는 순간조차도 소타로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우리는 소타로가 호타루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소타로는 호타루가 장애인이 되버리는 첫번째 파국 이후 사라진 뒤 영화가 끝날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후카다 코지는 첫번째 파국 직후, 시간을 뛰어넘어 구조를 반복한다. 낯선 자가 철공소에 도착하고 그 낯선 자가 다시 한번 파국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타카시가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두번째 파트는 소타로가 등장하는 첫번째 파트하고는 거울쌍을 이루고 있다. 타카시가 소타로의 아들이라는 점, 악기에 능한 소타로와 그림에 능한 타카시가 호타루에게 접근하는 점, 진상 폭로 시퀀스 등이 그렇다. 하지만 첫번째 파트에 남아있는 상흔과 이상 심리는 두번째 파트를 서서히 파국으로 밀어넣는다. [하모니움]이 인상적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이런 죄의식과 불안을 조금씩 꺼내서 비정형적인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에 있다. 반복과 대칭을 이루는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후카다 코지는 고조되어야 할 폭로의 순간을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게 처리한다던가, 평범한 일상을 아슬아슬한 서스펜스와 욕정으로 채워넣는 식으로 엇박자를 놓는다. 

롱 샷으로 정욕이 끓어오르는 소타로와 무심히 던져진 야외 섹스하는 커플의 신음 소리, 흰 옷을 벗고 붉은 셔츠로 돌아가는 소타로, 식물인간이 된 호타루를 감시 카메라로 살피며 밥을 먹는 토시오, 갑자기 토시오에게 뺨을 맞고 당황해하면서도 화를 내지 않는 타카시가 그렇다. 토시오가 소타로와 타카시에게 프레스기로 구멍을 뚫는 과정을 가르쳐주는 장면은 그 점에서 영화 전체의 리듬감을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멍이 점진적으로 커져가듯이, [하모니움]의 영화적 리듬은 점진적이지만 낯설게 반복되며 죄의식으로 빠져든다.

두번째 파국이자 호타루의 진짜 죽음을 다루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영화는 아예 환영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아키에와 토시오는 마침내 소타로가 사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소타로를 찾아가던 도중 아키에는 타카시에게 복수를 위해 그를 도구로 쓰겠다는 의도를 거리낌 없이 나타낸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건 풍금을 연주하는 아이와 흰 옷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다. 이 샷 자체는 그동안 쌓여왔던 비틀린 상황과 달리 불현듯 등장해, 마치 유령이 다시 도래한 느낌마저 줄 정도다. 하지만 후카다 코지는 잔인하게도 그 평온을 깨트려버린다. 이제 남은건 진짜 파국 밖에 없는 것이다.

아키에와 호타루가 자살을 시도하는 결말 역시 그런 불현듯 등장하는 환영과 그 환영을 깨트리는 잔인한 현실의 대조로 이어져 있다. 후카다 코지는 이 순간부터 거의 시적 이미지로 영화를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좀 진부한 이미지를 과하게 밀어붙인거 아닐까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 자체로는 꽤나 허망한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다. 죄 없는 아이들이 죄를 대속하고 죄 있는 어른만 남아버린 현실. 여기서 후카다는 매정하게 영화의 막을 내린다. 마치 진짜 파국 '이후'를 상상해본적이 없다듯이. 과연 후카다 코지는 그 파국 이후를 다룰 것인가? 알 수 없다. 다만 [하모니움]의 비정한 결말은 요사이 일본 영화에서 보기 드문 진득한 독기를 지니고 있다는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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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계단을 오를때 [女が階段を上る時 / When A Woman Ascends The Stairs] (1960)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살펴보면 소위 물장사하는 여성들 (게이샤나 마담)을 다루는 영화들의 비중이 꽤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이 생각보다 포괄하는 폭이 다양하다는걸 생각해보면 (이전에 리뷰했던 [가을이 오다]라던가.) 물장사하는 여자들을 다루는 영화의 비중이 높다는건 나루세 미키오가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곧장 말해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과 관련된 멜로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며, 물장사 연작들은 그런 관심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도쿄 뒷골목 시대에 뒤떨어진 게이샤들의 쓸쓸한 모습을 보여줬던 [만국]이나 [흐르다]랑 달리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의 배경은 도쿄 긴자 '라일락'이라는 바다. 다카미네 히데코가 맡은 케이코는 남편을 잃고 긴자 바에서 마담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성기는 지나간데다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후배 마담은 자신의 손님을 가로채 승승장구하고, 바 주인은 케이코를 닦달한다. 케이코의 꿈은 자신의 바를 차리는 것이지만 그것조차도 자신만을 바라보는 가족들 때문에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케이코를 바라보는 매니저 코마츠가 있다.

편의상 물장사 여인 연작으로 분류하긴 했지만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은 여러모로 [만국]이나 [흐르다]랑 차별점들이 많다. 먼저 이 영화는 2.35:1 화면비를 사용한 영화다. 나루세 미키오는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처럼 테크닉을 과시하는 타입은 아니였지만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나 이후 찍은 시네마스코프 비율 영화들을 ([가을이 오다], [흐트러진 구름]) 보면 그가 영화적 테크닉을 교활하게 활용할줄 아는 감독이라는걸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이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진 도입부는 그 점에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걸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자조적인 나레이션 위로 일본 건물 계단 특유의 좁디좁은 계단에서 케이코는 양옆의 벽에 짓눌려 탈출할 구석을 찾지 못하고 오르락 내리락하는걸 반복한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 시네마스코프 비율은 그야말로 탈출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케이코라는 인물 자체도 [만국]이나 [흐르다]의 게이샤들하고는 다르다. 물론 한 물 갔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마담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케이코에겐 [만국]이나 [흐르다]의 게이샤들과 달리 동지들이 보이지 않는다. 케이코 주변의 마담들은 케이코를 이용할 생각을 품고 있거나 시스템의 피해자가 되어 퇴장하거나,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 배경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 케이코가 겪어야 하는 수난은 오로지 케이코 혼자 겪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수난의 끝은, 돈을 위해 정조를 포기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손님과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것에서 극에 달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가정은 개인을 얽매는 굴레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애증의 존재로 그려질때가 있는데,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도 그 부분은 여전하다. 케이코가 냑향해 요양하는 시퀀스가 그렇다. 서사상으로는 긴자로 대표되는 중심 서사와 한발 짝 떨어진 시퀀스지만, 케이코는 긴자로 대표되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다가 이 집에서조차 케이코는 소아마비 조카를 위해 자신의 가게를 차리겠다는 꿈을 일부 포기해야만 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애정으로 묶여있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가족이라는 관계를 이 시퀀스에서 낱낱이 해부한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에서 연대의 대상을 이성인 매니저 코마츠 켄이치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코마츠는 케이코가 자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연대엔 연정도 있지만, 영화는 코마츠가 케이코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이유를 세상을 헤쳐나가면서도 어떤 품위를 잃지 않는 당당한 태도라 설명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연대가 파탄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는 상당히 매몰찬 편이다. 결국 코마츠조차도 케이코의 변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로 남는 셈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는 그 점에서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속하지 못하는 여성 수난사를 일종의 시지포스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의 결말은 답답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긍정의 힘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결말이라 할 수 있다. 케이코가 그 수렁에서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겠지만, 그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코마츠를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에게서 어떤 긍정의 힘을 발견했던 것 아닐까. 그렇기에 영화를 끝맺는 케이코의 영업용 웃음은 그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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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강 [泥の河 / Muddy River] (1981)

오구리 코헤이는 기본적으로 과작의 영화작가다. [진흙강]과 [가야코를 위하여] 이후 그는 6년-9년 텀을 두고 조심스럽게 영화를 내놓고 있다. 그가 등장했던 1980년대 일본 영화계는 산업 기반의 붕괴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와중에 이타미 주조는 경박하기까지 한 템포의 풍자 코미디 영화로 흥행을 이끌고 있었고, 신인 감독들은 로망 포르노를 통해 색정적인 얘기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연출론을 조심스럽게 숨겨넣고 있었다. 하지만 오구리 코헤이는 [진흙강]을 통해 그런 흐름과 상관없다듯이, 마치 네오 리얼리즘이나 고전기 일본 영화들을 연상케하는 1.33:1 흑백 화면의 전후 일본 배경 성장물을 들고 나타났다. 

당연히 저예산에 흑백 화면으로 제작된 [진흙강]은 가히 페드로 코스타의 [피]만큼이나 불시착한 영화였지만 [진흙강]은 그런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국제적으로 먹히는데 성공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탄하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 부문까지 나가는 등 오구리 코헤이는 이 영화를 통해 꽤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감독한 [환상의 빛]으로도 유명한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진흙강]은 성장물이다. 1955년 오사카 하천에 사는 우동집 아들 이타쿠라 노부오는 어느날 하천 보트하우스에 사는 마츠모토 키이치와 긴코 남매를 알게 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타쿠라와 달리 마츠모토 남매는 어머니 쇼코와 함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노부오와 마츠모토 남매는 금세 친해지게 된다. 그러던 중 노부오는 쇼코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죽음의 가시] 이후의 고도로 형식화된 오구리 코헤이 영화를 경유해 온 관객들이라면 [진흙강]의 소박한 모양새에 놀랄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네오 리얼리즘의 유령을 불러내듯이 인공성을 배재한 캐릭터에게 사실적인 배경을 배정하고 서사를 진행해나간다. 전반적으로 [진흙강]은 나루세 미키오의 [가을이 오다]에 영감을 받은듯한, 순수하면서도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가득찬 아이들의 우정을 그려내고 있다. 고레에다 팬들이라면 오구리가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방식이 이후 고레에다에게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걸 확인 할 수 있다.

하지만 [진흙강]에는 [가을이 오다]엔 없는 어떤 그림자가 있다. [가을이 오다]은 기본적으로 역사/사회적 맥락이 희박했고, 히데오와 준코의 우정은 어른들과는 무관한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흙강]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의 우정을 그릴때도 패전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할까. 영화는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와중에 참전용사였던 노부오의 아버지 신페이는 그런 영화 내 드리운 상흔을 집약해 보여준다. 미야모토와 오구리는 신페이를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으로 그리면서도, 어딘가 전후의 허무함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내는데, 이 때문에 [진흙강]의 성장담을 어떤 사회/역사적 맥락으로 재구성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런 상실과 허무감 같은 부분은 미야모토 테루의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환상의 빛]에서도 쉬이 드러났던 부분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미야모토 테루의 개성이 오구리의 연출에 자연스럽게 접합되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이런 상실감과 허무감이 단순히 배경으로 머물지 않고 아이들의 우정에도 스며드는 걸 포착한다는 점에서 [진흙강]은 [가을이 오다]와 다른 방식으로 놀라운 영화적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 전체의 반전으로 준비된 쇼코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 그렇다. 이 장면은 그렇게 '반전'을 노리고 만든 장면은 아니지만 (복선 자체가 무수하기 때문에 파악하기 쉬운 편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의 서늘함은 도무지 잊기 힘들다. 차분히 쌓여왔던 순진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어떤 엄혹한 현실 앞에서 한방에 박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구리는 모든 관계가 파탄난 이후에도 뒤늦게 마츠모토 남매를 쫓아가는 노부오를 결말로 선택하면서 아이들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루세가 [가을이 오다]에서 그랬듯이, 오구리 역시 아이들의 선의를 믿고 존중해주지만, 그 선의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는 약하다는 것도 같이 보여준다.

오구리 코헤이의 연출법도 영화의 내용처럼 단순해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복잡하다. 오구리 감독은 일견 네오 리얼리즘 특유의 손이 덜 간듯한 외양과 달리, 신인 감독답지 않게 상당히 고도의 테크닉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누나와 함께 이타쿠라 집으로 저녁 먹으러 온 키이치가 신페이의 부탁을 받아 옛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라. 단순한 시퀀스 설정과 달리 이 장면에서 오구리 코헤이는 아웃포커스와 트래킹, 인물의 배치를 통해 아이들의 우정과 어른들의 상흔 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어떤 공력을 발휘하고 있다. 상술했던 반전의 순간 역시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나 마이클 파웰의 [저주의 카메라]가 정립한 관음증적인 시선을 역으로 활용해 관객에게 서늘함을 안겨주고 있다. 결말 시퀀스의 흐름도 상당히 세련되게 통제되어 있다.

오구리 코헤이는 이 다음 영화인 [가야코를 위하여]까지는 이런 고도로 다듬어진 네오 리얼리즘적인 기조를 꾸준히 유지했다. 하지만 그가 [가야코를 위하여] 이후 6년동안 침묵한 뒤 내놓은 [죽음의 가시]는 오즈와 미조구치를 흠모한 영화적 기교로 무장한 서늘한 기운의 사적 심리극이라는, 전혀 다른 영화로 탈바꿈했다. 자신의 관심사가 어린 아이들의 순수함이 아닌, 그 순수함 뒤에 서린 어떤 서늘한 분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것은 [죽음의 가시]를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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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다 [秋立ちぬ / The Approach of Autumn] (1960)

[가을이 오다]는 나루세 미키오 필모그래피를 봐도 매우 희귀한 축에 속하는 영화다. 성인 남녀간의 애정이라던가 여성, 특히 게이샤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그간 나루세 미키오의 작풍과 달리 어린 아이, 그것도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나쁜 놈일수록 더 잘 잔다]랑 동시상영했다는 점, 이후 나루세가 잘 다루던 게이샤나 성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다시 이어진걸 보면, 나루세 자신도 이 세계가 자신이 계속 머물 세계는 아니라는건 인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점 때문에 [가을이 오다]는 나루세 커리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가을이 오다]의 각본은 카사하라 료조가 쓴 [도회지의 아이]를 원작으로 나루세 자신이 개작해 만들어졌다. 이야기는 시골에서 도쿄로 올라온 후카야 모자를 주인공으로 이뤄진다. (나루세 영화에 종종 출연했던 오토와 노부코가 맡은) 어머니 시게코는 도쿄 여관에 취직해 일을 하기 시작하지만 이내 친척에게 히데오를 맡기고 야반도주를 해버리고, 히데오는 어머니에게 방치당한 채로 삼촌이랑 살아가다가, 미시마 준코라는 동갑내기 소녀랑 친해지게 된다.

상영시간을 보면 알수 있겠지만, [가을이 오다]는 상당히 소품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시네마스코프를 사용한 영화를 소품이라 볼 수 있다면) 우선 이 영화에는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라던가 [흐르다], [만국], [흐트러진 구름]에서 볼 수 있었던 심각하고 쓸쓸한 감정의 저류는 찾아보기 힘들며 두 아이의 모험은 다소 철없지만 귀여운 감정 교류와 일상의 모험이 중심이 된다. 이야기 구조는 일상 에피소드 위주지만, 나루세와 카사하라는 이런 간단한 서사에 딱정벌레를 잡아 준코에게 주려는 히데오의 모험을 통해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가을이 오다]는 여전히 나루세 식으로 애잔한 영화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어찌할수 없는 환경이나 관계를 세팅해놓고 그 상황이나 관계를 타개하려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멜로드라마를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가을이 오다]는 심각함이 없음에도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다른 나루세 영화 못지 않게 애잔한 영화다. 주인공 소년소녀들은 부모와 어른이라는 존재들 때문에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며, 조그마한 저항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철부지 같은 행동으로 치부된다.

[번개]를 필두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은 오즈의 가족보다 훨씬 세파에 찌튼, 비틀린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가을이 오다]에서도 그런 나루세 미키오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시게코는 아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훨씬 중요시하며 끝내 오빠에게 아들을 맏기고 떠나버리는 가벼운 모습을 보이며, 준코의 어머니는 딸을 사랑하면서도, 속물적인 잣대로 후카야 모자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작 그런 준코의 어머니 역시 오사카 부자의 현지처로 살아가는 모순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어른들이 어떤 인습에 모습을 보일수록, [가을이 오다]에 등장하는 준코와 히데오는 더욱 의연하게 그려진다. 물론 그들도 아이들답게 삐치고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어떤 인습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순수한 관계를 이뤄나간다. 준코를 위해 딱정벌레를 찾으러 나서는 히데오의 모험과 동선은 어딘가 돈키호테적인 귀여움과 쓸쓸함을 품고 있다. 

결국 [가을이 오다]는 예정된 이별로 끝난다는 점에서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진 구름]와 가까이 있는 영화기도 하다. 떠나가는 트럭을 쫓아가려고 하지만 결국엔 홀로 남겨지는 결말부 히데오의 컷에서 나루세 감독의 사적인 감정이 느껴진다면 과잉된 해석일까? 다만 나루세의 유년 시절이 이 영화의 히데오랑 비슷했다는걸 생각해보면, 각본까지 참여한 [가을이 오다]는 다른 의미로 나루세 미키오 본인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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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종이풍선 [人情紙風船 / Humanity and Paper Balloons] (1937)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은 일본 외에는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원래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 영화들은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영역이긴 하지만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이 알려지지 않은데에는 역사적 비극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은 젊은 나이에 중일전쟁 때문에 징집되었고, 전사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 27편의 영화 중 지금 볼 수 있는 건 3편뿐이다. 

[인정 종이풍선]은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이 마지막으로 남긴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대극 영화다. 야마나카 사다오는 이 영화 이전에도 외팔이 무사 탄게 사젠을 주인공으로 삼은 [백만냥의 항아리]라는 사무라이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리고 사라진 영화들 중에서도 사무라이 영화는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믹했던 전작과 달리 [인정 종이풍선]은 틈틈히 집어넣은 유머를 제외하면 놀랄만큼 쓸쓸하고 비장한 영화다. 

카와타케 모쿠후미의 가부키 [츠유코소데무카시하치죠]를 원작으로 한 [인정 종이풍선]은 사무라이의 죽음으로 막을 연다. 쪽방에서 살던 사무라이가 가난을 못 이기고 자살한다. 마을이 술렁이긴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애도보다는 술을 마실 수 있을거라는 흥분감에 사로잡혀 있다.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무라이 운노 마타쥬로는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고위 사무라이인 모리 산자에몬에게 승진할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정작 산자에몬는 그를 귀찮아한다. 한편 마타쥬로 옆집에 사는 이발사 신자는 도박을 좋아하지만 야쿠자 두목인 야다고로 켄시치에게 찍혀 돈 문제로 쩔쩔매고 있었다. 어느날 신자는 켄시치가 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모리의 딸 오코마를 발견하고 무작정 오코마를 집으로 데려와버린다.

납치극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정작 [인정 종이풍선]에서 납치극은 의외로 후반부가 되서야 나온다. [인정 종이풍선]에서 중요한 것은 마타쥬로와 신자의 일상이다. 야마나카 사다오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 따윈 모른다듯이 마타쥬로와 신자의 일상을 나열한다. 이 두 사람은 너무나도 대조되기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나아가 [인정 종이풍선]이 지지하는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먼저 사무라이인 마타쥬로를 살펴보자. 마타쥬로는 비루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같은 건 없다듯이 오로지 상급 사무라이에게 인정 받기 위해 굽신굽신거린다. 마타쥬로는 생계를 위해 종이풍선을 만들며 현실을 살아가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품위와 명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마타쥬로의 한심하게 쩔쩔매면서도 위신을 찾아대는 모습은 분명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쿄 소나타]에서 그렸던 류헤이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리고 그는 그 체면을 버리지 못한다. 

오누키가 만드는 종이풍선은 그 점에서 매우 인상적인 소품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마타쥬로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던 종이풍선은, 체면 밖에 남아있지 않는 마타쥬로의 공허한 삶과 더불어 후반부 오누키의 절망감을 드러내는 상징적 도구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으로 종이풍선에 둘러쌓인채 다다미에 앉아있는 마타쥬로를 담은 컷은, 훗날 오즈가 정립한 다다미 샷에서 느껴지던 정갈하면서도 초탈한 일본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분명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반대로 신자는 그런 체면이나 위신 따윈 모른다듯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첫 등장은 잠에서 막 깨어나 지주인 스케조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다. 그는 음주가무와 도박을 즐기며 하루하루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어쩔 수 없이 지주인 스케조와 야쿠자 켄시치에 고개를 숙이며 살지만, 그런 자신에 대해 자격지심은 커녕 훌훌 잊어버리고 긍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신자의 삶은 신자와 신자 친구들로 대표되는 서민들의 삶이기도 하다. 방식 심지어 영화의 기둥이 되는 오코마 납치 사건 역시 신자에게는 저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저질렀다는걸 분명히 하고 넘어간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야마나카 사다오는 납치 사건도 매우 가벼운 희극조로 처리함으로써 신자의 캐릭터에 쓸때없는 무게를 부여하지 않는다. 

신자 뿐만이 아니라, [인정 종이풍선]은 사무라이 계급을 일구고 있는 체통과 위신에 대해 상당히 풍자적인 태도로 거리를 두고 있다. 산자에몬의 딸 오코마는 이미 산자에몬의 의중과 전혀 상관없이 산자에몬의 부하 사무라이에게 눈이 꽃힌 상태이며, 모리는 체통에 매달리는 쪼잔하게 쩔쩔매는 속좁은 사무라이로 그려진다. 야다고로 일파에 이르면 말이 필요없을 정도다. 

마타쥬로는 어떤가? 그 역시 사다오의 풍자적인 시선에서 벗어날수 없지만, 저들보다는 좀 더 복합적으로 그려진다. 먼저 신자랑 되도록 얽히지 않으려고 하고 승진에 목을 걸때 사다오 감독은 시침 뚝 떼고 마타쥬로의 한심함을 부각시킨다. (4대 카와라사키 쵸쥬로의 추레해보이는 연기도 한 몪한다.) 하지만 승진이 좌절된 뒤, 납치 소동을 거하게 벌인 신자가 어울려 술을 마시던 마타쥬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체통과 위신을 벗고 마음껏 모리를 비웃는다. 이때 마타쥬로의 표정은 신자조차 당황할 정도로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다. 강요된 체통과 의무에서 벗어났을때 비로소 인간다워보이는 아이러니는 분명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과 야마나카가 고수하고 있던 좌파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정 종이풍선]은 후반부 술집 장면을 기점으로 소극으로 끝날 수 있던 이야기를 급작스러운 비극으로 선회한다. 신자에게 한방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켄시치는 신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마타쥬로는 거짓말을 알아챈 아내 오타키에게 칼을 찔려 죽는다. 우리는 마타쥬로가 왜 죽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술집에서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던 마타쥬로는 평소 마타쥬로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며, 집에 돌아가자마자 평상시 거짓말만 하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은 들통나버렸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도피하던 현실에게 허무하게 죽는다.

마타쥬로의 죽음이 허무함과 사무라이 계급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다면, 신자의 죽음은 놀라울 정도로 울컥하는 비극과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납치 사건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준의 문제가 아니였다는 점이 비애와 비장미를 한층 더 한다. 오코마는 마타쥬로가 잘 보호하고 있었고, 집에 돌아온 오코마는 아무런 문제없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신자의 죽음은 단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도중 신자가 이전처럼 비굴하게 머리를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면'과 '위신'을 깎아먹어서다. 

비겁하고 치졸한 이유지만, 신자는 그 비겁함과 치졸함에 대해 절대로 머리를 굽히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그들에게 한방 먹일수 있다는 객기일수도 있지만, 그에게 돈 받고 합의하라는 스케조와 켄시치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객기 그 이상의 분명한 지조가 담겨 있다. 특히 결말의 신자의 눈빛은 잊기 힘들다. 야마나카 사다오가 분명히 닥쳐올 죽음을 생략하기에 이 비장함은 더욱더 처절해진다. 그것은 일본 제국 시절의 오만은 절대 아니며 오히려 그 오만에 저항하는 평범한 사람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분노이다. 

마타쥬로의 죽음으로 떠들썩한 (하지만 신자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거리 뒤로 보이지 않는 수로에 종이 풍선이 떨어져 흘러간다. 좁고 어둡고 지저분해보이는 수로로 흘러가는 이 종이 풍선의 모습은 마타쥬로인가? 아님 신자인가? 아니,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다. 어찌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감독 자신일수도 있다. 확실한 건 이 컷은 마음이 아플 정도로 슬프다. 감독의 유언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만약 <인정 종이풍선>이 이 야마나카 사다오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면 다소 애석할 듯하다. 그것은 패배자의 슬픔은 아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말한다. 부디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십시오. -야마나카 사다오, 1938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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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そして父になる / Like Father, Like Son] (201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

Like Father, Like Son 
8.4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후쿠야마 마사하루, 오노 마치코, 마키 요코, 릴리 프랭키, 니노미야 케이타
정보
드라마 | 일본 | 121 분 | 2013-12-19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극히 정갈하고도 고도의 양식미를 보였던 [환상의 빛] 이후 반대로 다큐멘터리적인 뿌리로 회귀해 즉흥적인 구조를 취해 영화를 만들어왔으며 [아무도 모른다]까지 그 기조를 유지해왔다. 그런 그가 [걸어도 걸어도]로 한번의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즉흥성은 줄어든 대신 그가 항상 존경을 표해왔던 나루세 미키오나 야마다 요지 같은 선배 영화 감독들의 홈드라마에 대한 존경심이 드러난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그런 [걸어도 걸어도]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물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는 고레에다의 또다른 화두였던 기억이 중요한 원동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의 상흔 그 이후 왜 그랬나라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거나 ([환상의 빛], [디스턴스], [아무도 모른다]) 무의 존재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기억이 생기고 채워가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공기인형]) 아예 죽음 이후 행복했던 생전 기억으로 영화를 만들어 왜 기억이 필요한지를 역설하기도 ([원더풀 라이프])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혈연이라는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믿음이 가족으로써 만들어지는 시간과 기억하고 어긋날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은 대부분 주인공인 노노미야 료타에게 향하고 있다. 성공한 직장인인 료타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신의 아이가 뒤바뀌었다'라는 불일치는 도무지 쉬이 받아들일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키 가족은 물론이고 료타의 아내인 미도리조차 그 불일치를 다소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비교적 빠르게 정리해가지만 료타는 이 불일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영화 내내 쩔쩔 맨다. 영화의 모든 갈등과 사건 전개는 료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먼저 그는 사이키 가족을 배제하려고 한다. 그의 눈에 사이키 가족은 부족하고 성급한 사람들일 뿐이고 자신의 아이와 그들의 아이를 모두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미도리와 사이키 부부의 반발로 실패한다. 어쩔수 없이 그들의 친권을 인정하게 된 료타는 두번째로 자신의 혈연인 류세이에게 자신의 법칙을 강요하는 것으로 류세이를 케이타처럼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류세이의 가출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충돌과 갈등 속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스타 이미지를 교활하게 활용한다. 이 영화에서 평소 후쿠야마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이고 빈틈없는 이미지는 료타의 다소 엄격하고도 거만한 캐릭터에 역으로 흡수된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캐릭터는 서서히 허물어지면서 그동안 후쿠야마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나도록 유도하게 한다. 이는 아역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할수 있을 것이다. 고레에다 영화들이 그렇듯이, 아역의 연기가 상당히 좋다.

고레에다 감독은 료타의 실패를 그가 기억의 무게와 가치를 인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는다. 분명 혈연이 갖는 무게라는 것도 있지만 함께 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기억은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그 존재들은 씹어놓은 빨대라던지 이 닦기 버릇 같은 소소하지만 분명한 증거들로 드러난다. 종종 기록 매체를 인용해 (디스턴스에서 가짜 가족 사진 만들기라던가 원더풀 라이프의 영화 만들기) 기억과 기록의 연관 관계를 보여줬던 고레에다 감독답게, 영화는 이런 소소한 증거들이 만들어지고 쌓이는 과정을 사진 찍기와 다시 확인하는 행위를 통해 물화된 기억과 시간의 현존성을 보여준다.

이런 기억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는 집이라는 공간의 대조와 그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으로도 드러내는데 유쾌한 물장난과 난잡한 사이키네 집에 익숙해진 류세이가 노노미야네 집에 들어서면서 하는 말은 다름 아닌 "마치 호텔같다"다. 이는 [달의 사막]에서도 드러났듯이 현대 일본의 가정이 잠만 자는 공간이 되버렸다는 감독의 꼬집음이 드러나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호텔' 같은, 호화스러운 도쿄 노노미야네 아파트와 관동 지방 중에서도 낙후하기로 유명한 군마 현의 허름하고 난잡한 전파상 사이키네의 대조는 일본내 사회경제 서브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는 여기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목림에서 자라나는 매미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이런 시간의 흔적들이 만든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고 역설한다. 인위적인 자연에서 자라난 매미를 쉽사리 가짜라 할 수 없듯이, 설사 인위적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서로 함께 지나왔던 시간은 부정할 수 없는 단단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료타가 겪는 실패는 그 형태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결말은, 새로운 가족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으로 귀결된다. 뒤바뀌어버린 시간과 엉켜버린 실타를 공유하고 있는 두 가족은 그 시간을 단절하고 출발하는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료타가 과거에 한순간의 감정으로 새어머니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뒤늦게나마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 깨달음이 단순히 현재와 미래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케이타나 류세이나 모두 사랑스러운 자식들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양극에 있는 두 존재의 화합과 중재를 하면서 새로운 추억의 탄생을 약속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어찌보면 그동안 고레에다가 천착해왔던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일본 홈드라마 영화 전통에 대중적인 어법으로 풀어낸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었는가 (혹은 어떻게 재구축해야 하는가),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문제 의식이 확장되었다고 말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 영화의 양기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써 꾸준히 전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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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것처럼 [Like Someone in Love] (2012)


사랑에 빠진 것처럼 (2013)

Like Someone in Love 
6.6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출연
타카나시 린, 오쿠노 타다시, 카세 료, 덴덴
정보
드라마 | 프랑스, 일본 | 109 분 |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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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사람들로 가득한 도쿄의 바를 보여주면서 누군가가 전화로 다투는 소리가 깔리면서 시작한다. 자연스레 우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화면을 탐색하게 되는데 키아로스타미는 관객들이 소리의 주인공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고 화면 밖에 있는 캐릭터가 말한다는걸 알아차리고, 대화에서 언급한 나기사가 카메라 앞에 앉는 그 순간 컷을 전환해 목소리의 주인공, 아키코를 보여준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화면과 소리의 불일치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섬세하게 짜여진 영화의 층위를 주목하도록 강조한다.

그리고 결국 이 다툼이 '나기사의 목소리를 믿지 못하고 화장실 바닥 수를 세라는 (그리고 나중에 확인하려는)' 기상천외한 요구로 번진다는게 재미있다. 결국 이 과정에 아키코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히로시의 존재를 소리로 노출시키는 바람에 들키고 만다. '소리를 불신하며, 실제(를 담은) 이미지를 증명/확인'하려는 노리아키의 집요함은 그 자체로도 우스꽝스럽고, 앞으로 이어질 서스펜스 스릴러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리아키 캐릭터의 찌질한 묘사와 겹쳐 생각해보면 영화에서 '이미지'에만 집착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는 관객/평론가들에 대한 일침이라고도 볼 수 있을것이다.

이 이미지에 대한 고찰은 아키코가 매춘을 하러 가기 위해 택시를 타면서 변주된다. 아키코는 할머니가 자기 휴대 전화로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들으면서 할머니가 도쿄로 올라와 자신을 찾다가 자신의 접대용 스티커 사진을 발견했다는 걸 알게된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사진을 믿지 않고 아키코가 조신하게 있을거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할머니의 기대와 달리 매춘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윽고 아키코는 역 근처에서 할머니를 발견하지만 실제적인 이미지에 접근하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를 뱅뱅 맴도는 것에 만족한다. 그나마도 관객들은 자세히 뚫어지게 보지 않으면 할머니가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런 밖에 나오지 못하고 안에 갇혀있는 아키코 위로 도시의 파편적인 풍경이 비쳐 흘러내린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부분에서 이미지 아래에 있는 실제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아키코가 고객인 교수 타카시를 만나면서 이미지에 대한 고찰은 흉내라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아키코는 옛날에 자기가 알던 사람들이 자신이 [교무]라는 그림에 나오는 여자를 닮았다고 했다고 말하면서 [교무]의 여자를 흉내낸다. 타카시는 둘이 닮았다고 말하지만 아키코는 다시 자신은 [교무]의 여자하고 닮지 않았다고 말하며, 타카시의 가족들의 사진들을 들고와 자신과 닮았다고 말한다. 거기에 타카시는 애매하게 수긍할 뿐이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지만 그들이 원하는 실제적인 행위인 '식사'나 '섹스'에 도달하지 못하고 말만 나누다가 결국 아키코가 잠이 들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둘은 서로의 개인적인 영역 (옛 추억이라던지 혈연)에 있는 분명한 이미지를 흉내내거나 닮았다 하면서 서로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결국 다가가지 못한 채 기만으로 끝나버린다. 이해하지도 못한 지네 이야기를 들려준 후 웃으며 그런데 왜 웃냐고 물어보는 아키코에게 "네가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니깐" 타카시가 대답하는 부분이라던가 타카시와 헐벗은 아키코랑 대화할때 아키코의 존재가 비친 이미지만 등장하는 장면이 그렇다.

다음날 아키코와 타카시가 차타고 집 밖을 나올때 키아로스타미는 차창에 반사된 하늘과 도시를 인물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하늘의 이미지는 아키코와 타카시에 침입하지 못하고 그 위를 덮듯이 포개진다. 이 모습은 영화 내내 암시하고 있는 이미지와 실제 간의 간극과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일견 차와 창문이라는 실제를 감싸는 이미지의 껍질 안에서 평화로운듯 보이는 아키코와 타카시의 관계는 그러나 노리아키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차에 들어오면서 히치콕 풍의 서스펜스 영화로 돌변해 옥죈다. 분명 노리아키는 아키코와 타카시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고, 확인하기 위해 타카시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렇기에 노리아키와 타카시의 평행선처럼 이어지는 대화는 부조리극에 가까우며, 실제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서 비롯되는 관계의 폭력성과 정조로 대표되는 '순결함'이 가지는 정치적인 의미(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을 드러내고 있다.

노리아키가 아키코와 타카시를 자신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로 데려가는 과정은 노리아키가 아키코와 타카시를 은연중에 이미지를 파헤쳐 실제적인 자신의 손아귀에 놓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이 때문에 차 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세 사람의 대화는 유도심문, 거짓과 위장, 눈치, 방어라는 전개가 이어지고 관객들은 조마조마한 감정으로 그 전개를 지켜보게 된다. 이 점에서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서스펜스/스릴러 영화를 방불케하는 초조함과 불편함, 예측 불가능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렇게 노리아키가 물러나면 아키코와 타카시는 작전 회의를 해 어떻게 방어를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역설적이게도, 키아로스타미는 아키코와 타카시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결에 가족 관계로 오해받고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물질적인 이득관계 때문에 '흉내내기' 관계가 본격적으로 소통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가짜와 흉내내기로 시작된 관계에 대한 긍정은 전작 [사랑을 카피하다]하고 연계된다고 할 수 있을것이지만[사랑을 카피한다]와 달리 이런 소통을 향하려는 시도는 클라이맥스에서 파탄난다. 진상을 알아차리고 발광해 날뛰는 노리아키가 '밖'에서 타카시의 집 '안'으로 침입하려는, 슬래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개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 클라이맥스에서 노리아키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고, 이중적인 프레임 이미지인 인터콤 화상 화면에서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곧 광기어린 음향으로만 등장해 둘을 압박한다. 실제와 그 실제를 증명할 수 있는 이미지에 집착했던 노리아키가 중요한 순간에 오로지 간접적인 이미지와 소리로만 드러난다는 점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악의어린 농담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 데운 우유라는 실체를 향할 수 있는 길은 삐삐 소리를 내며 외려 관객과 인물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아키코는 질겁해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다. 결국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왔다갔다 하던 타카시는 노리아키가 던진 돌에 맞고 쓰러진다.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실제와 흉내냄으로 만들어진 이미지 간의 경계가 깨지는 그 순간 키아로스타미는 짗궃게도 끝을 선언한다. 엘라 피츠제랄드의 'Like Someone in Love'가 깔린 채.

이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결말은 그러나 원래 영화 제목이 끝The End였다는 정보를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경계가 깨진 이후에 어떻게 갈지는 아무도 모르며 감독도 이 이후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알지만 끝낸다. 다른 흉내내기와 기만이 이어질지, 아니면 파국 이후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키아로스타미는 하지만 그 이후로도 지금과 비슷한 과정이 이어질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난데없지만 경쾌한 (클라이맥스 이전까지 영화의 흐름은 전반적으로 조금 느릿한 편이다.) 충격으로 킬킬대며 지금까지 안온하게 있었던 기만의 경계를 흐트려놓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키아로스타미가 생각했던 첫 제목 그대로 했다면 정말 악의적인 영화가 되었을것이다. 영화 시작부터 The End가 뜨는, 시작부터 클라이맥스인 괴상한 구조.

영화 외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영화 자체가 흉내로 이뤄져 있다. 이란 감독이 일본 영화를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내내 일본과 일본인이 중심이고 일본 문화의 언급이 드러나는데다 일본어가 중심 언어로 쓰이고 있지만 크레딧에 등장하는 언어는 감독의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도, 일본어도 아닌 프랑스어이다. 심지어 제목은 그 어느 언어도 아닌 영어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했던 대로, [퍼시픽 림]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다룬 일본'인 일본3을 다루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한 것처럼Like'이라는 제목의 절는 그 점에서 매우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퍼시픽 림]처럼 만화나 애니 같은 서브컬처에 대한 동인지적 흉내를 내는게 아니라 고급 문화와 정신을 차용하고 고도로 쌓아올려 교활하고 은밀하게 일본3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의 모든 부분들을 실체에 대한 흉내로 채워 그 관계들을 관객에게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유들을 즉흥적으로 만든 흐름에 맞긴 채 유들유들한 손놀림으로 음흉하게 관객들을 농락하고 있으며 그 농락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이미지를 흉내내고 동시에 기만하다가 정말로 관계로 발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트하우스적인 고찰을 서스펜스 호러 영화로 만든, 이상한 영화다. 그리고 그게 정말 잘 먹히는게 더 이상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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