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전쟁 (2)
이 세상의 한 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 In This Corner of the World] (2016)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의 시작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외화면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상물들은 결국 작품 속 세계 인식을 나레이션에다 기준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의 주인공인 우라노 스즈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평범한 일상물이다. 호감을 가진 남자가 있지만 중매로 구레 시에 사는 공무원 슈사쿠에게 시집간 스즈. 호죠 가의 시집살이는 그리 쉽지 않지만 스즈는 특유의 밝고 느긋함으로 어려움으로 견뎌나간다. 코노 후미요는 스즈와 호죠 가의 일상을 구성할 디테일을 빼곡히 알고 있고, 카타부치 스나오 역시 원작자의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하며, 모든 디테일을 평등하게 다룬다.

하지만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시대를 알리는 자막이 뜨는 순간 관객은 이 이야기를 미시사에만 맞춰 볼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2차 세계 대전 말기 히로시마 현 구레 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미시사를 구성하는 나레이션과 캐릭터하고 거시사를 구성하는 자막과 원경이 서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스즈는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레는 명백히 전시 상태이며, 스즈가 만나는 사람들은 얌전하지만 분명하게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둠을 담아내고 있다.

원작자 코노 후미요는 자신이 그리는 미시사가 미시사로 머물수 없다는걸 알고 있다. 원작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전작 [저녁뜸의 거리]의 피해자 코스프레 또는 가해자로써 일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한 대답도 담았기 때문이다. 코노는 다시 한번 [저녁뜸의 거리]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할머니가 경험했던, 전쟁 이전의 역사를 미시사로 구성하면서, 당시의 디테일이 담고 있는 정치성을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태극기 시퀀스는 일견 작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미시사에서 정치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카타부치 스나오는 코노 후미요와 똑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다. 일단 애니메이션을 보면 알겠지만, 원작은 중심 사건 없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2시간 이내의 통일된 각본을 쓰기 까다롭다. 카타부치 스나오는 원작을 각색하면서 야마다 요지가 200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떠올린 것 같다. 야마다 요지는 일련의 2차 세계 대전 영화에서 일상적인 영역에 어떻게 비일상적인 정치가 개입하는지를 다루었다. 카타부치는 야마다 요지의 성과를 이어받아 풍부한 일상사적 디테일들이 어떻게 거시적인 역사와 연결되는지, 관객이 어떻게 이걸 받아들어야 하는지 나레이션과 후경 간의 대립을 통해 질문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섬뜩한 부분 역시, 일상을 그리는 스즈의 순진한 나레이션과 대사가 아무렇지 않게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적 사상을 담아낼때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스즈에겐 폭탄은 형형색색 폭죽처럼 그려지고, 국가가 주입한 "결전복"이니 "대일본제국의 함"이니, "여자의 장기인 죽창" 같은 슬로건들은 순진한 목소리와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긴장 관계를 이룬다. 외화면에서 흐르는 목소리가 내화면에서 쏟아지는 폭격 소리 같은 부조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을 동화적으로 포장할때 카타부치 스나오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알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긴장 관계를 읽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오직 관객만이 스크린 외부 음향과 내부 음향 간의 대립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긴장 관계가 깨지는 순간, 영화는 스즈의 비정치성을 산산히 깨트린다.

영화의 초반부. 스즈는 어렸을때를 회고하면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후 이어질 현실적인 본편과 뚝 떨어진 이 환상적인 플래시백은 다소 이질적이다. 하지만 이 회고는 스즈의 유아적인 세계를 보여주면서, 스즈의 나레이션이 현실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걸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스즈는 주체적으로 주변 현실을 로맨틱하게 포장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지만, 딱 한번 주체적인 환상을 박탈당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스즈의 실수로 하루미가 죽었을때다. 이 순간 카타부치는 냉정하게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이뤄진 장면들에다 스즈를 밀어넣는다.

더 이상 일상의 안온함은 스즈를 보호해주지도, 포근하게 상상할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잘려나간 팔처럼, 전쟁과 군국주의는 스즈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이 상흔이 어떤 의미인지 펄럭이는 깃발 앞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에서 세상 한 구석 역시 세상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한다. 어떤 지점에서 스즈의 울부짖음과 눈물어린 대사는 직접적으로 정치성을 담은 원작보다도 훨씬 통렬한 구석이 있다.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이뤄진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조. 그 회의와 자조가 한 인물의 유아적인 세계 인식을 깨트리면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정치 애니메이션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선언한다. 단지 작위적일 정도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담았던 원작과 달리 애니판에서는 이 부분의 연출이 평상시와 다를바 없이 그려지는게 아쉽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일본인들에게 원체험처럼 남아있는 원폭의 이미지인 하얀 빛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보여줄때 카타부치 스나오가 인용하는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비]다. 두 영화 모두 한 개인이 가족에 편입되려고 할때 핵폭탄이 터지고, 인물들은 하얀 빛을 맞이한다. 마치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을 전부 삭제 혹은 정화하려는 것처럼. 어쩌면 당신은 [이 세상의 한 구석에]를 [검은 비]의 프리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 비]가 핵폭탄 이전의 세계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는 것처럼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결국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일상을 유지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 시대가 끝난 자리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으로 부모가 죽은 고아 소녀를 입양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하루미와 팔은 돌아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스즈는 호죠 가로 대표되는 '세상의 한 구석'에 입양되고 입양함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반대로 친가족이었던 우라노 가는 전부 죽거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스즈가 알고 있던 두 세계 중 예전부터 알고 있던 (구)세계가 멸망하리라는 암시.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상흔을 안고 살아갈 스즈 부부. 카타부치 스나오는 후반부를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으로 설정한 뒤,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고아가 된 일본인들이 서로를 입양하는 것에서 살아갈 힘을 찾아낸다. 

영화의 결말은 다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다. 하지만 그 요괴는 더 이상 아이를 납치하지 않는다. 바구니는 텅 비어있고, 스즈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즈는 어른이 되어 정화된 (것처럼 보이는) 신세계를 살아간다. 영화는 거기서 마무리짓는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으로 그 시대를 돌아보는 작품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포근하면서도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은,  [검은 비]를 감싸고 있던 필사적인 삶을 행한 의지라던가 [유레카]에서 꿈꾸었던 대안 가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요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물었던 나와 세계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0  Comments,   0  Trackbacks
노비 [野火 / Fires on the Plain] (2014)

시작은 따귀다. 첫 샷에서 츠카모토 신야는 자신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구타한다. 이 폭력이 담긴 샷들은 거칠고 불안정하다.  츠카모토는 이 도입부를 통해 자신의 첫 전쟁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몸에다 새겨넣으려고 애쓴다. 그의 영화가 과잉된 육체와 속도의 에너지를 만화적 과장을 무릎쓰더라도 프레임에 새겨넣으려는 연출로 유명해졌다는걸 생각해보자. 츠카모토에게 전장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장소다. 그 점에서 [노비]의 따귀는 어떤 약함도 허용되지 않는 과잉된 현장을 육체에 체득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하지만 [노비]는 츠카모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노비]의 원작은 오오카와 쇼헤이의 체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원작은 이미 이치가와 곤이 1950년대에 영화화한 적이 있다. 이치카와 곤의 [들불]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는 감상하지 않은 지금 이 순간 적는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가 고전기 스튜디오 시절 감독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츠카모토가 만들었던 것보다는 훨씬 정제된 영화였을 것이다. (실제로 고어 묘사가 삭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체 츠카모토는 원작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만든 것일까?

[노비]가 내세우는 주인공 타무라 일등병은 낙오자다. 폐병에 걸렸다고 항의를 해도, 전쟁을 만들어낸 불합리한 시스템은 그의 병을 모른척 하고 내쫓는다. 그는 계속 전장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군상을 만난다. [노비]의 서사 구조는 한 점이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타무라는 전장에서 빠져나가 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그 이동마저도 쉽지 않다. 퇴각할 수 있다는 정보는 점점 신빙성을 잃어가고 점과 점 사이를 지나가면서 타무라는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다. 극단적인 수직 권력 관계, 폭력, 무의미한 죽음, 식인....

[노비]가 전장을 다루는 방식은 추상화다. 일부는 저예산 독립 제작을 고수하는 츠카모토 특유의 제작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 방식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의도적으로 배경을 추상화시키고 있다. [노비]에 등장하는 동남아의 정글은 문명은 커녕 전장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부조리극처럼 추상화된 곳이다. 샷과 샷 간의 시공간은 명확한 구분이 없이 흘러가며, 인물들의 행동은 의미를 잃고 동물처럼 퇴화해 있다. 이외에도 츠카모토는 원색의 강렬한 자연, 제목의 들불, 병약한 타무라가 정신을 잃고 암전되는 장면, 디졸브와 얼굴 클로즈업 샷을 쪼개는 기법을 오가며 지옥 속 인간의 심리와 육체를 휘갈겨 그려낸다.

하지만 츠카모토는 추상화된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안다. 타무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현지인들을 조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영화의 차가운 응시를 격렬하게 보여준다. 이 시퀀스는 구조상 상당히 초반에 등장하는데, 타무라의 불안한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훔쳐보는 현지인들은 전쟁의 광기가 상관없이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숨어있던 타무라가 등장하는 순간, 이름없는 현지인 커플의 행복은 산산조각 난다. 서로에 대한 의심과 한계에 도달한 이성은 이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간다.

이 시퀀스 말미에 등장하는 현지인 여성의 광기 넘치는 비명은 그 점에서 무시무시하다. 츠카모토는 타무라가 현지인들에겐 무시무시한 가해자에 불과하며, 그 증거로 피해자의 악에 찬 절규를 타무라와 관객 앞에다 가져다놓는다. 이 시퀀스가 그럼에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면 타무라 역시 제국주의의 피해자라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무라는 현지인 여성도 쏴 죽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짓지만, 동시에 피해자 타무라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교회는 결국 구원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고어 묘사가 있다. 전장에서 갈려나가는 병사들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고어 호러 영화와 닮아있으며, 그것들을 표현하는 샷들은 샘 페킨파처럼 파편화되어 흩날린다. 츠카모토 신야의 B급 정신이 전쟁 영화에 이식된 것이다. 얼핏보면 [노비]의 어법은 위험해보인다. 전쟁 영화에서 고어 영화의 피범벅을 빌러, 끔찍함을 영화적 즐길거리로 만드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비]는 전쟁을 쉽사리 스펙터클화하지 않는다. 비슷한 어법을 쓰지만 살짝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듯한 샘 페킨파와 달리, [노비]의 슬로모션과 쪼개진 샷들은 넘쳐나는 고어의 과잉을 차갑게 응시한다. [노비]의 고어 묘사가 무서운 이유는 결국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육은 그 점에서 [노비]의 고어 묘사의 집약판이라 할 수 있다. 츠카모토가 [노비]를 현 시점에서 리메이크한 이유도, 1950년대 당시엔 불가능했던 고어 묘사와 인육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건 원작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노비]에서 인육이 원숭이 고기로 위장되는건 상당히 흥미롭다. 인육이 상징하는 극단적인 생존 본능이, 원숭이의 고기로 포장되면서 잠시나마 본능과 도덕이 양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육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 양립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까발려진다. 줄곳 생존만을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이동하던 타무라가 분노하는 순간 역시 이 순간이다. 그리고 이 순간 죽어가던 타무라의 양심은 다시 깨어난다. 타무라는 최후의 순간, 인육을 더 이상 먹는걸 거부하면서 무의미한 존재가 되길 거부한다.

그렇게 거부했건만 타무라는 스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포로가 되서야 살아나갈수 있었다. 여기서 원작과 츠카모토판 영화와 차이가 발생한다. 츠카모토는 원작과 달리 타무라 앞에서 나가마츠가 자살하는 것에서 본편을 마무리 지은 뒤, 막간 자막에 게릴라에게 습격 당했다는 디테일을 추가하면서 오오카와가 품고 있던 회의적 시선을 강화시킨다. 당사자인 오오카와가 트라우마로 묘사하지 못했던 순간을 전후 태생인 츠카모토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재현할 수 있기에 가능했던 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노비]는 '들불'을 일본어로 음독한 제목이다. 오오카와 쇼헤이의 원작이 그랬듯이 [노비]에서도 들불은 생존과 죽음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노비]의 마지막 쇼트는 오오카와가 그려냈던 '들불'을 츠카모토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일본으로 돌아온 타무라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경험을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고, 트라우마로 인한 거식증은 그를 괴롭힌다. 잠시 쉬러 나온 타무라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영화 내내 등장했던 불의 이미지가 유리창에 비춰지는 환영을 본다. 이때 타무라는 마치 불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츠카모토는 일본조차도 들불로 대표되는 군국주의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불안에 갇혀있다고 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노비]가 마지막에 보여준 불의 감옥은 무시무시하고 섬뜩하다.

*원작에 대한 정보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74669&cid=41773&categoryId=50387 참조했습니다.


0  Comments,   0  Trackback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