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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제임스 그레이 (5)
[잃어버린 도시 Z] 예고편

현존하는 미국 감독 중에서도 단연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인데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힙니다. 심지어 원작을 읽었는데도 말이죠. 드디어 뉴욕을 떠난 감독이 향한 곳이 머나먼 아마존이라... 차기작은 아예 우주던데 말이죠.

뭐 그래도 감독이니깐 기본 이상은 해줄거라고 믿고 특유의 황갈색 톤의 필름룩은 여전해서 마음에 듭니다. 개봉 시즌이 묘하게 추석 시전과 겹치는 것 같긴 한데 흥행은 기대 안하고 (...) 후딱 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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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의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적 특정성과 '멜로적 감수성'에 대해

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글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 중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멜로적 감수성이 정확히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민족적 특정성과 연관이 되는지를 분석할 예정이다. 분석의 틀로는 프레데릭 제임스의 [정치적 무의식]와 폴 윌레만의 국가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에 대한 간단한 약력을 적어야 이 글을 이해하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 출신으로,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정확히는 증조할아버지가 우크라이나 오스트로폴 출신이며 제임스 그레이의 집안은 예술하고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유대인 중산층 이였다. (이는 후술한 제임스 그레이의 회고하고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가 태어나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낸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는 러시아계 미국인/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이 브라이튼 비치를 중심으로 찍혀지고 있으며 주요 무대 배경이 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는 미국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로컬’과 ‘민족’이라는 특성이 상당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감독으로 손꼽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여러모로 두 가지 프레임으로 흥미로운 분석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가 감독한 영화는 미국 내 러시아 유태계 이민자라는 민족 정체성과 비서사적으로 쌓여온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어떻게 문화 형성체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이끄는 운명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 간의 긴장이 ‘멜로’라는 감수성으로 맺혀 장르 서사를 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법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런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일견 상품화된 문화제국주의를 세계에 팔고 있는 미국 영화의 일반적 흐름하고는 차별화되는 구석이 있다.


이 글이 그의 영화 중 [리틀 오데사]  (혹은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와 [투 러버스]를 분석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꼽히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가 범죄 장르와 가족 드라마로써 제임스 그레이의 맹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투 러버스]는 범죄 장르에서 벗어나 ‘가족 드라마’와 ‘멜로적 감수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준 최초의 제임스 그레이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미그랜트]까지 발표된 2014년 시점에서 그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라면 두 영화를 먼저 접근해야 하기에 선택했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의 특징이라면 그가 구사하는 서사 구조는 매우 기본적이고 간단하며 장르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부터 살펴보자. [리틀 오데사]의 갈등과 드라마는 폭력적인 가부장인 아버지에게 반발하지만 동시에 폭력에 물든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아직 ‘비성인 남성’인 소년, 그리고 ‘모성’으로의 회귀라는 유구한 가족 드라마와 차디차고 비정한 범죄 장르의 서사들에서 빌려 왔다. 이 영화는 가족에게서 탈출하고자 고향을 떠났던 킬러가 암살 의뢰를 실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킬러인 주인공 조슈아가 뉴욕 브라이튼 비치를 떠난 이유를,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만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대로 조슈아는 ‘여성’인 어머니 일리나와 옛 연인 알라, ‘비-남성’인 동생 루벤 에게는 애정을 표한다. 


그렇지만 이 모성에 대한 조슈아의 욕망은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어머니는 병으로 끝내 죽고, 알라와 루벤은 조슈아와 갱단의 총격 속에서 사망한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조슈아는, 혼자 남겨진 채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모성에 대한 환상을 꿈꾸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느와르와 가족 드라마의 요소를 빌려 온 [리틀 오데사]에서 그레이는 가부장의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연약한 동생의 변화를 통해 폭력의 유전과 그를 통해 숙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 새로운 전기가 된 [투 러버스]도 기실 살펴보면 로맨스 영화의 기본적인 구조를 빌려오고 있다. 그레이는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고뇌하는 남자라는 평이한 소재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빌려 몽상적이고 우울한 사랑 이야기를 전개한다. 먼저 주인공인 레너드는 유전적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에게 파혼당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하고 동업자인 사업가의 딸인 산드라가 레너드에게 접근한다. 이렇게 산드라와 레너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레너드는 이웃집에 사는 여성인 미셸을 만나게 되고 순식간에 푹 빠지게 된다. 산드라와 미셸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존재로 가정적이고 편안한, 산드라와 달리 미셸은 불안정하고 난잡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미 애인이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레너드는 미셸을 향한 사랑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투 러버스]는 두 개의 사랑을 통해 갈등하는 인물을 통해 ‘안정’과 ‘모험’이라는 두 갈림길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런 일견 간단하고 장르 원형적인 서사들을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미국에 정착한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문화를 상징하는 코드들과 장면들을 집어넣는다. [리틀 오데사]에 등장하는 조슈아와 루벤의 외할머니의 80번째 생신과 어머니 일리나의 장례식,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단성 성가들, ‘러시아’를 연상시키게 하는 인물들의 복장이 그렇고 [투 러버스]의 산드라 남동생의 유대인 성인식과 두 가족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식사 자리, 마지막 엔딩의 유대인들이 모여 벌이는 신년회 등이 그렇다. 이 장면들과 세밀한 설정들은 주인공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긴장감하고는 관계없는, 어찌 보면 지극히 ‘민속학’적인 장면들이다.


 그레이는 영화 내에 그런 코드들과 장면을 집어넣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에 민족이라는 코드를 분명하게 상기시키며 장르 서사에 침윤시키고 작동시킨다. 이런 상기가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위치와 연계 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브라이튼 비치로 돌아와 해야 하는 일은 타 민족인 이란 출신의 사업가를 손봐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조슈아가 알고 있던 러시아계 유대인 갱들이 동원된다. 이 와중에 조슈아를 부끄럽게 여기는 조슈아의 아버지 아르카디는 신세를 지고 있는 러시아 갱인 보리스에게 조슈아를 없는 아들이라 칭하면서 보리스와의 관계를 유지시켜 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고자 한다.

그가 사랑했던 범죄 장르 영화의 틀에서 벗어난 [투 러버스]에 이르면 유대인 커뮤니티의 그림자와 그와 대조되는 타자의 커뮤니티는 더욱더 은밀하고 공고하게 자리매김한다. [리틀 오데사]처럼 [투 러버스]의 유대 커뮤니티는 가족이라는 존재와 맞물려 돌아간다. 레너드가 비유대계 약혼녀와 파혼한 이유가 ‘유전적인 결함’라는 점과 산드라가 가족이 담겨 있기에 뮤지컬인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고 하는 대사에서 유대 커뮤니티와 가족이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레너드는 아버지의 세탁소 사업을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산드라와의 사랑이 유대인 아버지들이 진행하는 사업적인 관계하고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산드라와 레너드의 관계는 미국에 이민 온 레너드의 가족사진 앞에서 시작해 산드라의 남동생이 한 명의 유대인 성인으로써 인정받는 의식의 자리에서 커뮤니티 내에서 선언된다. 이 모든 유대 커뮤니티의 안온한 약속들이 따뜻한 실내에서 진행된다는 것도 주지해야 할 부분이다. 


 반대로 레너드를 유혹하는 비유대계인 미셸의 삶은 가족하고 거리가 먼 존재들로 이뤄져 있다. 미셸은 아버지와 싸우면서 등장하고 그녀의 삶은 클럽과 마약, 춤, 오페라로 상징된다. 또 미셸이 유부남 로날드 (물론 그는 비유대계 백인이다.)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며, 중반부에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유산한다는 점 역시 그녀가 유대 커뮤니티의 가족적인 삶하고 거리가 멀다는 걸 방증해준다. 또한 따뜻한 방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이뤄졌던 산드라와 달리, 미셸을 향한 레너드의 사랑은 창밖으로 훔쳐보기와 사진 찍기라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시작해 실외 옥상의 차갑고 우울한 공기와 빛에서 섹스와 고백, 포옹이 이뤄진다. 그나마 간신히 미셸의 실내로 들어온 레너드는 미셸을 사랑하는 사이인 로날드를 숨어서 지켜봐야 하고, 로날드가 떠난 뒤에도 미셸에게 키스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돌아선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는 그런 민족 커뮤니티에 대한 묘사와 세팅들이 ‘장르 서사’ 자체를 진행시키는데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감행한다. 그런데 그런 감행이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에 깊게 침윤되어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이 감행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이다.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민족 커뮤니티에 소속되길 원하거나 아니면 탈주하길 욕망하며, 그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욕망들이 얽히면서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를 작동시키는 장치가 된다. (후술하겠지만 이 욕망은 유태 문화의 민족주의하고 거리가 멀다. 차라리 커뮤니티를 향한 지극히 개인의 욕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렇게 집어넣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들과 그것의 서사적인 위치는 폴 윌레만이 주창했던 민족적 특정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족적 특정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폴 윌레만은 민족적 특정성과 민족주의 담론을 이야기하면서 ‘흑인 영국 필름’에 대한 예시를 들었다. 흑인 영국 필름은 분명 영국적이지만 민족주의인 것은 아니다, 라는 윌레만의 지적은 흑인 영국 필름이 영국 흑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경우에는 그 영화에서 흑인 문화를 재발견하고 재배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윌레만은 그런 재발견과 재해석을 비판하며 그것과 다른 대안적인 방법론을 찾고자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나오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민족적 특정성이, 캐릭터를 설명하진 않고 그것이 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그것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다는 것이다. 즉슨 유태 문화가 어떤 서사의 방아쇠가 되진 않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서사의 방아쇠는 유대 문화라는 로컬리티를 지워내도 전개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다곤 부정할 수 없다,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시선과 달리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인 캐릭터들은 이미 자신이 유대인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먼 ‘미국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유대인임을 자긍심을 가지고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유대 민족의 삶이 자연스럽게 미국적인 삶에 침윤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위에서 언급한 [리틀 오데사]에서 나오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며 흐르는 유대교 단성 성가 음악과 아버지 아르카디의 어머니 생신을 기념해 벌어지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가 그렇다. 전자의 경우, 결말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고 조슈아가 멍하게 앉아 있는 장면에서 단성 성가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존재하며 ‘중력’을 구성한다. 이 중력은 서사 속에 있는 조슈아를 끌어당기며 안착시키려고 한다. 이런 단성 성가의 케이스처럼 영화가 유대 문화에 침윤되어 있으며 조슈아를 끊임없이 끌어당기려고 하고 조슈아는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증오하는 아버지를 밀어내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여성과 비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에 대한 애정이 중력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중력은 후자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 같은 장면들에서 비서사적으로 드러나면서 그것이 ‘디아스포라의 역사’하고 연계되어 있다는 걸 분명하게 한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 커뮤니티에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결말에 이르러선 그 커뮤니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박살났기 때문이다.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중력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서 언급한 역사론 하고 언급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슨은 “역사는 텍스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근본적으로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덧붙여야 할 것은 역사는 텍스트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슨은 그렇게 텍스트 화된 역사가 하나의 상처로써 작동한다고 보고 있으며, 그것이 ‘욕망을 거부하고 집단적 실천뿐만 아니라 개인적 실천에도 거침없는 한계들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을 끌어당기는 중력은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인 역사에서 잉태된 존재이며 그것은 영화 내의 구체적인 텍스트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서사와 텍스트 주변에 분명하게 존재하며 서사 속에 있는 인물을 끌어당겨 개인적인 실천에 한계를 부여하고 개인을 커뮤니티에 안착시키게 하려고 한다.


 이 와중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은 그 중력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음’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멜로의 감수성이 드러나고 있다. 즉 비서사적으로 구축된 ‘민족적인 정체성’이 서사 속으로 침윤해 커뮤니티 내의 안착을 유도하는 중력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캐릭터를 젖어 들어가게 해 캐릭터를 무겁게 한다. 그렇게 축축해진 캐릭터는 침묵과 슬픔이라는 감정 속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것은 곧 멜로의 감수성으로 귀결된다. 요약하자면 제임스 그레이의 멜로는 침윤 혹은 젖어 들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서사적인 역사가 만들어내는 멜로적 감수성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적과 달리 정치적 한계로 연결되지 않는다. 창작자로써 그레이는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사랑’한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폭압적인 가부장 아래에 있는 혈연적으로 연결된, 비-성인, 비-남성 유대인들(동생 루벤, 어머니 일리나, 옛 연인 알라)에게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유대 커뮤니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조슈아는 처음 의뢰를 받고 고향과 거기에 있는 유대 커뮤니티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며, 그 수장인 아버지와 불화한다.


 이런 두 감정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제임스 그레이는 인터뷰 할 때마다 자신의 가족사를 자주 언급하는 편인데 이런 유대 커뮤니티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과 관련해 흥미로운 인터뷰가 있다. 실은 그레이의 가족들은 처음 그가 영화감독이 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은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연줄도 없다. 할리우드 출신도 아니다. 넌 절대 감독이 되지 못할 거다."라고 말하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레이는 이렇게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 있다.”라고 정리한다. 이 발언은 그레이 영화를 휘감고 있는 민족과 가족, 그리고 멜로적 감수성 간의 관계를 접근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결국 유대인 커뮤니티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혈연 가족의 양면적인 모습에서 그레이는 애정과 동시에 그런 양면성이 만들어내는 중력에 얽매여 있음에 슬픔과 동시에 떠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두 개의 모순된 감정은 그의 영화 내에서 단죄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머물러 있으며 그레이의 인물들을 침윤시키고 멜로의 감수성에 젖게 할 뿐이다.


 이 멜로의 감수성은 [투 러버스]에 이르면 완연해진다. [투 러버스]에 이르면 주인공이 소속된 유대 커뮤니티는 [리틀 오데사]와 달리 파괴되지 않는다. 레너드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도, 총격전으로 가족을 잃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인 레너드를 옭아매어 잡아 담기는 중력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레너드는 그 속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레너드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인 비유대계 여성 미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겐 매몰차게 대하지 못한다. 그렇게 정리하고 미셸을 찾지만 정작 미셸은 ‘사랑을 주는’ 비유대계 남성을 선택해 레너드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실연당하고 해변에 고통스럽게 머물러 있던 레너드는 미셸에게 주려고 했던 반지를 주워 새해를 맞이하며 유대인 커뮤니티의 편안함 속에 있는 산드라에게 선물해준다. 그렇게 중력에 안착하려는 순간, 산드라를 껴안고 있는 레너드의 눈빛은 흔들린다. 이 흔들리는 눈빛에서 관객들은 두 개의 모순되고 상반된 개념과 감정들인. 떠남과 안착, 슬픔과 기쁨. 변화와 안정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미셸과 함께 떠나려고 해도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매정하게 버리지 못하는 레너드의 모습과,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산드라 품 안에서 행복해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안고 싶어 했던 미셸을 잊지 못하는 레너드가 동시에 등장하는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제임스 그레이의 축축한 멜로적 감수성의 총화이며 동시에 그 감수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결말은 영화 중반부에서 슬쩍 흘러나왔던 지하철을 타고 가며 사랑을 나누는 타 인종 간의 커플을 (유대인 커뮤니티 바깥에 있는) 타자와의 사랑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너드하고 연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기존의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로 해석될 수 없는 영역에서 멜로적 감수성을 띈 중력을 통해 비서사적으로 축적되어온 민족 커뮤니티와 그 커뮤니티하고 갈등하는 캐릭터를 이야기하고자 하며, 이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미국 바깥의 ‘내셔널 영화’와 대척되는 ‘미국 영화’라는 일반적인 공식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드러나는 비서사적인 역사성과 유대인 커뮤니티의 민족적 특정성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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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투 러버스 (2014)

Two Lovers 
8
감독
제임스 그레이
출연
호아킨 피닉스, 기네스 팰트로, 비네사 쇼, 이사벨라 로셀리니, 엘리어스 코티스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미국 | 109 분 | 201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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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러버스]의 시작은 연못에 뛰어드는 남자다. 'We Love Our Customers'라는 문구가 달린 옷 다발을 떨어트린채 남자는 자살을 시도한다. 거기서 이별을 고하는 여자의 환영은, 물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과 죽음을 모두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곧 실패로 돌아간다. 정확히는 스스로 포기한다는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에 올라온 남자는 절대로 자신이 뛰어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그의 완강하게 부인하는 태도는 그가 이별로 인한 슬픔에 푹 젖어있으며 죽음에 뛰어든 행동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떤 저항할수 없는 힘에 떠밀렸다는 걸 알게 한다. 


"세탁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물에는 왜?"라는 사람의 말처럼, 주인공 레너드가 푹 빠져있는 슬픔은 (옷을 세척해 말린 뒤 깔끔하게 내놓는) 세탁소를 하는 주인공 레너드의 가족하고는 상치되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레너드를 말리는 것은 부모가 아닌, 자기 방에 있는 라지에이터며 레너드 부모님은 방 밖에서 애만 태울 뿐이다. 그렇기에 바로 이어지는 산드라의 방문은 어떤 전환점이 된다. 산드라가 레너드의 방으로 들어오게 됨과 동시에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레너드의 심리가 공개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레너드가 이별해야만 했던 과거에 DNA 결함을 집어넣어 레너드가 앓고 있는 우울증을 혈연과 연결시키며 어찌 헤어나올수 없는 내적인 문제로 발전시킨다. 레너드와 전 애인은 아이를 낳으면 모두 죽는다는, 혈연이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졌고 그렇기에 헤어질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과거는 산드라의 첫 등장이 혼자가 아닌 화목한 가족들과 함께이며, 인종 적으로도 레너드랑 같은 유대인이라는 점,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고 하는 대사들하고 서로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감이 둔한 관객이더라도 [사운드 오브 뮤직]엔 가족이 담겨 있노라고 산드라가 고백하는 장면에 이르면 산드라가 가족적인 가치를 대변하며 레너드의 상처를 덮을만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산드라가 제약회사에 근무한다는 설정은 어찌보면 그런 상징을 알아차린 관객을 위한 감독의 윙크 아닐까? 그렇기에 이 두 만남은 일견 순조로워 보인다.


그렇지만 그레이는 산드라와 레너드를 바로 이어주지 않고 미셸을 등장시킨다. 미셸의 등장은 여러모로 산드라랑 정반대다. 가족들과 사이좋게 등장한 산드라랑 달리 미셸은 등장하지도 않는 아버지랑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가 등장하고, 초대도 없이 불쑥 집으로 들어오며 거실 주변을 맴돌지 레너드 방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또한 멀리서 찾아오는 산드라와 달리, 미셸은 바로 옆 집에 산다고 한다. 조금 뒤에서야 밝혀지는 거긴 하지만 편안해보이는 산드라랑 달리 미셸은 화려하지만 마약과 우울증에 빠져있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결정적으로 미셸은 산드라랑 달리 비 유대인이 다. 그러나 레너드는 그런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미셸에게 푹 빠져버린다.


[투 러버스]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레너드는 미셸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산드라도 사랑한다. 그렇다고 그 두가지 감정에 우선 순위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말에서야 정해지긴 하지만, 적어도 레너드는 산드라를 사랑하는 만큼 미셸도 사랑한다. 왜 그럴까? 단순한 양다리인것일까? 그것은 미셸과 산드라를 향한 각각의 레너드의 두 감정의 성질이 서로 다르지만 비슷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성질이야말로 [투 러버스]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의 성질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는 레너드의 사진 찍기로 나온다. 두 여자가 등장하기 전 레너드는 풍경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그 풍경 사진엔 제목이 없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의 제목 짓기를 인용하자면 "사진에 있어서 제목짓기가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현장의 사진처럼 모든 요소와 맥락들이 그 사진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통해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목을 짓지 않은 레너드의 풍경 사진들은 옛 연인과 헤어진 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물 사진 역시 그 옛 약혼자다.) 구체화되지도, 헤아릴수 없는 그의 슬픔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풍경 사진들이 황량하기 그지 없다는 것은 일종의 주석일 것이다.


산드라랑 미셸이 등장하면서 그는 인물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화에서 레너드의 카메라에 제일 먼저 찍히는 여자는 산드라가 아니라 미셸이라는 점이다. 산드라가 레너드'에게' 다가온다면 미셸은 레너드'가' 접근한다. 그렇기에 카메라와 시선의 주도권을 쥔 레너드가 가장 먼저 찍는 사진은 미셸일수 밖에 없다.


알프레도 히치콕의 [이창]처럼 창을 마주한 레너드와 미셸의 시선의 관계는 일단은 카메라를 쥔 레너드 위주로 돌아간다. 먼저 레너드와 미셸의 두번째 만남은, 미셸을 우연히 발견한 레너드가 미행하다가 우연한 만남인 척 하면서 시작된다. 돌아온 레너드는 화장을 하던 미셸을 향해 플래시를 터트리고 미셸은 뒤돌아본 뒤 그를 자신의 공간 (클럽)으로 초대한다. 거기서 레너드는 불륜남 로날드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미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미셸이 레너드에게 걱정을 털어놓는동안 레너드가 몰래 너머로 훔쳐보는 장면은, 관음증적이지만 동시에 저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미셸이 가지고 있는 상처에 대한 공감에 가깝다.


미셸하고 함께 해주고 싶다는 욕망엔 유대 혈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레너드의 심리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손님을 사랑한다'라는 문구에 담긴 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인 커뮤니티에 속한 레너드네 가족이 운영하는 세탁소는 단순히 고객 친절 이상으로, 다른 사업체들과 제휴적인 '사랑'를 맺고 싶어한다. 미셸과 떠나기 직전 레너드는 산드라의 아버지를 만나고 산드라와의 결합이 단순히 사랑이 아닌 서로 간의 사업적 이득이 따라온다는걸 알게 된다. 물론 산드라는 절대로 불순한 의도로 레너드에게 접근하는건 아니지만, 이 장면은 뉴욕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과 관계 성립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며 그것이 개인을 어떻게 탈주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걸 반증하듯이 레너드 방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는 사투 끝에 우주의 끝에서 외계인과 접촉한 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그러나 정작 레너드가 찍은 미셸의 사진은 영화 내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사진은 제대로 사진 찍는 장면이 없는 산드라다. 물론 산드라의 사진은 딱 한 컷 제외하곤 항상 누군가를 동반하고 있으며  (레너드나 자기 가족들)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웃음은 레너드를 향한 안정감과 상처를 덮어줄수 있는 모성적인 따스함이 담겨 있다. 즉 미셸이 카메라에 찍혀진다면 산드라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투 러버스]에서는 그 숙명적인 유대 커뮤니티의 총화로 어머니 루스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서사 속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로지 걱정하고 바라만 볼 뿐이다. 심지어 아들이 떠난다고 할때도 루스는 마음 아파하지만 그를 보내준다. 그리고 결말에서 지치고 외로운 아들을 보듬어 안아준다. [리틀 오데사]에서 유대 커뮤니티의 축제는 따뜻하고 흥겹지만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고독과 슬픔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걸 생각해보면, 그레이는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미래와 감정을 속박하는 면모도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연줄도 없으니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감독이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민족이 만들어내는 질긴 끈이 인물을 휘감고 있기에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도 상이하게 달라질수 밖에 없다. 아이를 유산한 사건으 로 고통스러워 하며 이렇게 불안정하고 어두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미셸의 말에 레너드는 화를 내면서 자신도 불안정하고 상처투성이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옷을 벗지 않고 옥상의 추위를 견디며 섹스를 한다. 반대로 산드라는 레너드의 리스트컷을 보고 '걱정할 필요도 무안해할 필요도 없다. 곁에 있어주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대화가 나왔을때 둘은 이미 한창 전에 따뜻한 방에서 섹스를 한 상태다.


그 점에서 산드라와 레너드의 섹스 장면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는 미셸의 존재가 암암리에 등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미셸과 산드라 간의 공유점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보자. 불륜남 로날드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미셸은 레너드에게 만나서 판단해달라고 말한다. 거기서 레너드는 로날드와 미셸의 감정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날드는 미셸을 데리고 오페라를 보러갈거라 말하고 레너드는 오페라 CD를 사들고 돌아와 듣는다. 


그때 산드라가 들어오고 오페라를 듣고는 '오페라는 본 적이 없다.'라고 고백하다가 키스를 한 뒤 섹스로 넘어간다.  레너드와 산드라가 섹스를 나눌 때 그레이는 (미셸의 영역에 있는) 오페라 음악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오페라는 끈질기게 남아서 레너드 방 저 편에 있는, 불꺼진 미셸의 방과 함께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을 감싼다. 이 때문에 두 남녀가 가장 개인적인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다른 여자가 주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불온한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속되게 말하자면 이 연출은 플라토닉한 오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너드에게 이 오쟁이는 결코 산드라에 대한 기만이나 내치는 것이 아니다. 미셸을 통해 산드라를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하면 억측일까? 적어도 두 사랑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레너드가 찍은 산드라의 사진이 등장하는 시점이, 미셸을 한 번 거부한 다음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미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산드라에게 사랑을 받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너드는 유대인 산드라에게 상처를 덮을 사랑을 받지만 반대로 비 유대인 미셸에게는 상처를 덮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일견 모순되보이는 두 감정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런 점에서 [투 러버스]의 사랑과 그것의 성질은 차라리 상처에 대한 디아스포라적인 공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는게 좋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그레이가 이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걸 떠올리게 한다. 먼저 이 장면이 관음증적인 시선의 역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하지만 미셸은 옥상에서 섹스를 한 후 돌아와서 대화를 나누다가 레너드(와 관객)을 향해 자기 가슴을 드러내 보인다. 분명히 이 장면의 시선의 주체는 전과 달리 미셸에게 있다. 레너드가 자신의 상처를 솔직히 보여준 만큼, 자신도 자신의 내밀한 속살을 솔직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에 레너드가 주체였던 관음증적인 시선 권력은 여기서 붕괴한다. 둘이 그 다음 함께 떠나기로 한 것도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산드라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이 때 레너드는 산드라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미셸에 대한 공감과 함께 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내려와 미셸을 한창을 기다리던 레너드는,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레이는 그 모습을 어둡게 처리해 제대로 알 수 없게 한다. 마치 남이 다가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미셸이라는게 밝혀지면서 관객들은 미셸이 결국 레너드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미셸은 레너드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가족을 버린 로날드를 선택하겠다고 한다. 레너드가 그랬듯이 미셸 역시 모든 것을 포기한 로날드에 대한 공감과 함께 해주고 싶다는 감정 때문에 레너드를 포기한다. 레너드는 고통스러워하지만 결국엔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가 잠든 미셸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가 포기했을때 그 역시 그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백야]처럼 이 모든 것은 한낱 꿈이였을지도 모른다. 커뮤니티로부터 탈주, 새로운 사랑, 상처를 감싸안아주는 디아스포라적인 사랑 모두.


그렇게 바닷가로 간 레너드는 미셸을 위해 사 온 반지를 모래사장에 던진다. 그러더니 천천히 바다로 다가간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레너드는 바다를 물끄러미 보다가 떨어진 반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산드라에게 그 반지를 끼워준다. 아무런 사실을 모르는 산드라는 기뻐하며 사실을 아는 레너드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레너드와 산드라를 남기고 카메라는 뒤로 빠지면서 끝난다. 


이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카메라야말로 [투 러버스]의 모든 것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엔 남자는 자신의 상처를 안아주고 디아스포라적인 사랑을 '해주는' 가족같은 사람을 선택하고 행복해하지만 잔향처럼 남아있는, 디아스포라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과 있었던 덧없지만 꿈결같은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축축한 감정에 젖어드는 것이다. 그 모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간극에서 발생하는 한없이 슬프지만 동시에 강하게 응축되어 관객을 적시는 감정이야말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매력인 것이다. [투 러버스]는 그 매력을 알기에 충분한 영화다.


P.S. 한가지 적어놓자면 [투 러버스]는 한국에 개봉한 적이 없이 IPTV 시장으로 직행했다. 고로 영화 사이트의 정보는 믿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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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비열한 거리 (0000)

Little Odessa 
8.5
감독
제임스 그레이
출연
에드워드 펄롱, 팀 로스, 론 브라이스, 모이라 켈리,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정보
스릴러 | 미국 | 98 분 | 0000-00-00


AKA.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


제임스 그레이의 [리틀 오데사] (혹은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의 도입부는 간결하지만 인상적이다. 주인공 조슈아는 아무런 설명 없이 불쑥 나타나 목표를 제거하고 브라이튼 비치에 가서 아랍계 보석상인을 처리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조슈아는 꺼려하지만 그 의뢰를 승낙한다. 충격적일 정도로 압축적이고 간결한 장면을 통해 그레이는 구구한 대사 없이 조슈아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성공해내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리틀 오데사]는 전형적인 느와르다. 뒷세계에서 벌어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범죄, 고독한 킬러, 어두운 분위기. 익숙한 소재들이고 각본까지 맡은 그레이 감독은 요리조리 캐릭터들/배우 간의 감정과 행동들을 통제하며 안정되게 영화를 통솔하고 있다. 하지만 [리틀 오데사]는 여기에 한가지 요소를 끌어들여 뭔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바로 가족사다. 물론 가족사를 중심으로 드라마를 풀어가는거 역시 장르 영화에서는 전개이긴 하지만 [리틀 오데사]의 가족사 드라마는 훨씬 질기고 끈질긴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리틀 오데사]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어떻길래 이런 독특한 분위기가 자리잡게 된 것일까? 조슈아의 가족들은 전형적인 미국 WASP 가족하고는 거리가 있는 러시아계 유대인 가족이다. 곳곳에 영어가 아닌 이디시어가 등장하고 유대교/러시아 전통 행사들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루벤 같은 가족 구성원들이나 친구들은 주변 인물들의 이름들은 미국적이라기 보다는 유럽적이다. 이때문에 [리틀 오데사]의 가족은 미국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아온 존재같아 보인다.


이 지극히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요소들은 끊임없이 영화에 등장해 조슈아와 장르가 안주하는 걸 방해한다. [리틀 오데사]에서 장르의 법칙과 서사들은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질긴 인연들이 만들어내는 피곤하고 축축한 감정에 전염되고 마침내 주제의식마저 바꿔버린다. 애시당초 조슈아가 브라이튼 비치에 가지 않으려고 했던 큰 이유가 바로 이런 가족으로 대표되는 유대인 커뮤니티로 포섭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시도는 '어머니 일리나가 아프다'라는 소식에 한방에 무너진다. 결국 조슈아는 폭압적인 아버지 폴과 타협한다. 조슈아 체내에 자리잡고 있는 모성에 대한 그리움은 연인 알라와 동생 루벤에 대한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다시 변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타협과 갈구에도 불구하고 조슈아의 정체성과 민족적인 문제는 결국 불협화음을 일으키다 비극으로 추락하게 된다. 일리나는 끝내 병으로 죽고 아버지 폴은 새로운 여인과 함께 떠날 기세다. 그토록 지키고 보호하고 싶어했던 루벤과 알라는 허무하게 총에 맞아 죽는다. 결말에 짧은 소망/드림 시퀀스 같은 장면 후 조슈아에게 남겨진 건 공허함 뿐이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그리스 비극처럼 신중하면서도 장중하게 표현하는데 거기에 깔리는 느리고 묵직한 성가 스타일의 음악은 처연함을 더욱더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질긴 혈연이 만들어내는 숙명과 인생의 피로함과 고독함을 그려내고 있다.


[리틀 오데사]는 70년대 미국 고전 범죄영화들을 인용하고 있지만 재기보다는 차가우면서도 눅진한 감정들로 사람들을 꼼짝없이 사로잡게 하는 영화다. 분명 거친 구석도 있지만 이렇게 절제된 톤으로 이끌어가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성공했다. 물론 그의 영화 세계가 좀 더 구체화되기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루벤이 처음 등장할때 보고 있던 타버린 영화 필름처럼 [리틀 오데사]는 신중하고 예리하게 강렬한 흠집을 남기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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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Lovers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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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뮤지션의 길을 가버린 호아킨 피닉스의 마지막 영화이라 하고,

이런 분위기의 드라마를 좋아해서 그런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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