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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짐 자무시 (2)
패터슨 [Paterson] (2016)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구 10만명 정도 되는 이 소도시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제외하면 흔한 교외 지역이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눈에 이 평범함은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강점이다. [패터슨]은 일종의 농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드라이버이자 시인 패터슨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코미디 영화인가 싶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유머기도 하다. 자무시가 유머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A-B-A 구조가 문학의 운율이나 리듬을 연상케하는걸 주의해보면, [패터슨]의 반복된 유머는 영화의 구조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 이후에 데뷔한 영화 감독답게 구조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감독이긴 했지만, [패터슨]은 여타 자무시 영화 중에서도 그 구조가 뚜렷하게 보이는 영화다.

[패터슨]은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개별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별 장으로 구성된 영화들은 대체로 장마다 다른 상황과 샷, 몽타주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패터슨]은 장이 넘어가도 비슷한 상황과 샷을 반복한다. 전제를 살펴보자. 패터슨은 아내 로라와 함께 사는 아마추어 시인이며, 버스 운전사다. 매일 아침 일어나 프레이크로 아침을 먹고, 버스 운전을 한 뒤 퇴근해 바에 가서 술을 마신다. 전개로 보자면, [패터슨]은 같은 순간을 반복하는 영화다. 도입부인 월요일은 영화 전체의 구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화요일이 되었을때 영화는 패터슨의 삶, 나아가 영화의 리듬을 깨닫게 하고 수요일부터 변주에 들어간다. 이렇게 시작한 변주는 주말이 되면서, 변화를 맞이하고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자무시는 [패터슨]을 만들면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뼈대로만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운 바이 로]의 숲 속에서 헤매는 시퀀스라던가 [고스트 독]의 아이스크림 장수 시퀀스에서 드러나듯이, 자무시는 같은 요소의 반복과 변주로 최면을 걸 줄 아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까운 [패터슨]는 패터슨의 심리 변화를 일상을 구성하는 개별 쇼트에 섬세하게 깔아두고 관객이 파악하도록 만들었다. 첫번째 날을 통해 관객은 패터슨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두번째 날부터 관객은 패터슨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알게 된다. 버스, 폭포, 골목길, 도시락, 불독, 바, 성냥갑 그리고 시 노트....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디테일은 늘어나거나 달라지거나, 심지어 사라진다. [패터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쇼트를 차지하는 삶의 요소가 패터슨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감지해야 한다. 로라가 만든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고 다시 도시락 통에 집어넣는 패터슨의 쇼트라던가 각 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주잔을 들여다보는 쇼트의 유무가 대표적이다. 가끔 자무시는 패터슨의 심리를 반영한 오버랩과 음향 몽타주로 일상의 순간을 채색하기도 하다.

자무시가 보는 패터슨 시는 웃기면서도 어둠을 간직한 도시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종/사회 서브텍스트다. 패터슨은 백인이지만, 패터슨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흑인이나 인도인이 많다. 생활에 찌든 인도인 버스 기사 동료,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메소드 맨부터 시작해 패터슨 시는 백인보다는 흑인이나 인도인 같은 인종들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패터슨의 아내인 로라조차 이란계라는 암시가 들어간다. 허리케인 카터와 아나키즘에 대한 언급부터 차를 탄 채 흥청망청 노는 건달들, 금요일에 등장하는 에버렛의 가짜 총격전 소동은 패터슨 시의 불안과 어둠이 어떤 식인지 편린을 살짝 보여준다. 패터슨은 그 불안과 어둠에서 한발 짝 떨어져 평화롭게 살지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안과 어둠은 패터슨이 겪는 창작의 난항과 맞물려간다. 

여기다 패터슨의 과거는 의외로 밝지 않다. 침대 근처 놓여진 사진들을 추측해보면 패터슨은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다. 패터슨이 (실제 미군으로 복역했던) 애덤 드라이버의 자전적인 캐릭터일리는 없겠지만, 나이가 애덤 드라이버랑 비슷하고 2010년대가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패터슨은 9/11 테러 이후 입대한 미군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패터슨]의 인종 설정은 조금 특별해진다. 험악했던 21세기 미국-중동 간 정세에 관련되어 있던 폭력 전문가가 제대 후 이란계 아내과 다양한 인종의 동료들을 두고 시를 쓰며 평온하게 살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설정을 통해 반 이민주의 시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폭력 전문가가 어떻게 현실로 돌아올수 있었는지 한번 곱씹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창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패터슨]의 창작은 더블 이미지와 연계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 로라는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로라는 만약 낳는다면 자신과 패터슨을 닮은 쌍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직후 밥을 먹던 패터슨은 오하이오 블루 매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창작 과정을 일상 속에 배치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창작물은 대상을 반영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더블 이미지로 남게 된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다. 스크린 위에 새겨지는 패터슨의 시어를 담은 자막은 실재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패터슨 뿐만이 아니라 로라에게도 해당되는데, 로라는 그것이 매우 기술친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패터슨이 반복한다면 로라는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로라는 기타 연주와 컵케이크 만들기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체득한다. 자무시는 부부가 서로 존중하듯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존중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원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봉 후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음반을 모으고 연필로 시나리오 작업하는 자신의 삶에 자식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창작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바 있는데 패터슨은 그 점에서 자무시의 지론이 반영된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들어서면 재능의 문제는 영화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로라와 패터슨의 포물선이 다르다. 로라는 모든 창작에 대해 초보자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로라는 처음 창작을 했을때 느끼는 신선함에 매혹된 사람이다. 당연히 로라의 시도는 어딘가 어설프기 그지 없다. 꾸준히 축적되어 있는 상태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어설픔을 도로 도시락통에 들어가는 한 입 베어문 컵케이크라는 필로우 쇼트로 압축해 보여준다. 로라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눈빛이 약간 걱정을 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로라는 꾸준한 자세로 자신의 어설픔을 극복하고 소기의 성과를 낸다. 주말에 이르면 판 컵케이크는 대성공을 거두고 기타 연주 역시 그럴싸해진다. 

반대로 패터슨은 이전부터 꾸준히 쓰고 있는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를 발표할 생각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겸손함이다. 패터슨은 시에 엄청난 자부심 같은 것은 없고 명성에 대한 욕심도 없다. 패터슨은 자신의 시를 로라와 같이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패터슨은 내심 자신이 쓰는 시가 뛰어나길 바란다.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패터슨의 좌절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시를 쓰는 소녀를 만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시어가 쓰여진 시 노트를 본다. 이내 무표정으로 묻히지만 패터슨의 감정에 동요가 일어났다는걸 눈치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무시의 태도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만큼이나 현실적이고 명확하게 말한다. 세상 어딘가엔 범인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 패터슨의 재능은 노력으로 갈고 닦은 재능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의 재능은 아니다. 계속 반복될 것만 같은 패터슨의 일상을 흔들리는 순간도 천재를 만났을때 이뤄진다. 다소 생뚱맞은 [잃어버린 영혼의 섬] 인용은 외친다. "사람을 해부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을 조각 낸다고요! 원주민이 이상한 이유를 알았어요 그들은 희생자들이에요!"

패터슨은 자신의 창작 과정이 천재의 그것과 달리 살아있는 일상을 조각내면서 만든 키메라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의심이 커졌을때, 일상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좌절감은 지속된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가짜 총격전 소동을 일으키는 에버렛과 시 노트를 아작낸 부부의 개 마빈은 그 점에서 패터슨의 심리에 반응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자무시는 여기서 물질 매체의 유한함을 언급하면서 패터슨이 그동안 만들어왔던 창작물 대부분을 무로 만들어버린다. 발표되지 않은 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백업하지 않은 문서는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다. 심지어 기술조차도 일어나버린 소멸을 막지 못한다. 일순간에 패터슨의 시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시는 사라지고 패터슨은 창작을 지속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창작의 상징이었던 폭포 앞에서 패터슨은 패터슨 시로 여행 온 일본인 시인을 만난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 정보를 꺼내며, 패터슨이 좋아하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 얘기를 꺼낸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에게, 몇 가지 사실을 가르쳐준다. 어떤 예술가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훌륭한 작품을 써냈다는 걸. 그리고 "때때로 빈 종이가 가장 큰 가능성을 보여주지요."라는 말을 남긴다. 일본인 시인이 떠난 뒤, 패터슨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이 일본인 시인을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매혹과 더불어 노자/장자부터 시작해 세이 쇼나곤의 오카시로 이어지는 관찰과 깨달음의 경지를 영화로 끌어온다.  아하, 라는 대사는 그 점에서 새로운 깨달음이자 시작이다.

창작물이 파괴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일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패터슨 시의 패터슨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빈 종이의 가능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패터슨은 로라의 깨달음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인 셈이다. 매번 새로운 것을 접근하고 만들어내는 로라의 접근방식은 패터슨에게도 적용되고 교훈을 남긴다. 결말은 새로운 공책과 일주일의 시작이다. 패터슨 시는 그렇게 하루를 살 것이고, 패터슨은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시를 계속 쓸 것이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은 그 점에서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인 정보에서, 미국의 일상을 찾아낸 뒤 일상의 신비로움과 창작의 회노애락을 사람들에게 깨우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그는 창작의 과정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존재한다고, 시의 문장을 마무리짓는다.

우리는 뮤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뮤즈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김목인, '뮤즈가 다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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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에서 일본 무사도 문화는 어떤 식으로 접목되는가?

서구권에서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라는 저서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대표적인 리버럴리스트였던 니토베 이나조는 독실한 기독교도로 미국으로 넘어가 1899년 “무사도: 일본의 정신” 이라는 책을 내면서 일약 유명해지게 된다. 니토베는 이 책에서 일본정신의 정수가 무사도라 보면서 무사계급의 도덕적 존재 양상인 의, 용, 감위견인의 정신, 인, 예, 성, 명예, 충의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양의 일본 인식을 바로잡자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토베는 이를 통해 일본이 나름 높은 도덕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군사적으로도 강대한 근대 국가라고 보여주려고 했다.

 이 [무사도]가 저술된 배경에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관련이 있는데 당대 서구제국주의에게서 동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니토베의 [무사도]는 그 점에서기독교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일본 정신을 설명하고자 하고자 했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니토베의 이런 전략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동양인 학자는 오리엔탈리즘의 체계를 <조작>할 수 있게 되므로, 그들이 스스로 미국에서 받은 훈련 받으며” “원주민의 정신을 서구인의 입맛에 맞게 소개한” ‘원주민정보원’ 전략을 취한 것이였으며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1, pp 516-517 이는 곧 서구인들에게 일본이 서구와 동등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걸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서구인들에게 [무사도]는 문명화된 군사강국 이미지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이였는데, 일단은 군사강국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면서 그 비결을 무사도에도 찾았지만, 그 무사도는 차라리 근대국가적이라기 보다는 봉건국가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와 미국의 일본인식] 실제로 연구 자료에 따르면 무사도 출간 이전 미국 언론에서 1900년 이전엔 무사도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았다면, [무사도] 출간 이후 [무사도]는 프랑스, 독일 등 7개 국어로 소개 되었으며 이후 이어질 일본 사무라이 영화 열풍의 기초가 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하지만 이런 무사도 열풍은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그라들었고, 그 이후로 다시 움트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사무라이 무사도 정신이 서구 대중문화에 파급을 미치기까지

 하지만 이런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이 본격적으로 서구권에 정착하게 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정확히는 일본 영화가 서구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일본 영화는 곧 서구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베니스와 베를린, 칸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영화제들은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 신도 가네토 같은 감독들을 모셔해오면서 일본 영화는 곧 동아시아 영화계를 뛰어넘어 글로벌한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영화의 장르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서구 대중들 머릿속에서 자리잡은 영화는 사무라이 영화였다. [7인의 사무라이]는 곧 서부극으로 무대를 바뀌면서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가 되었고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은 조지 루카스를 매혹시켜 [스타워즈]의 모티브가 되었다. 또다른 [요짐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코바야시 마사키가 만든 [할복]이라던가 오카모토 키하치의 [대보살 고개], 고샤 히데오의 [짐승의 검] 같은 영화들도 서구 관객들에 문을 두드리면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구로사와 아키라나 코바야시 마사키가 지식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사무라이 영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면 좀 더 밑바닥에서는 [자토이치 시리즈]라던가 [아들을 동반한 검객] 같은 가볍고 난폭한 사무라이 영화들이 하위 문화 매니아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쌓여온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매혹은 1975년 제임스 크라벨이라는 작가가 [쇼군]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제임스 크라벨은 이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매혹을 “가상의 영국 선원이 일본에 난파해서 사무라이 세계의 일원이 되면서 빠져들게 된다는 기제를 사용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1980년 리처드 체임벌린이 주연하는 미니시리즈로 제작돼 1억2000만명이 시청하는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이는 지금까지 방영된 모든 미니시리즈 중 두 번째로 많은 시청자 수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0907100080

 그리고 [쇼군] 소설이 발표된 2년 뒤 나온 상기한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 역시 사무라이 영화와 문화가 서구인들의 인상에 강하게 남아있게 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루카스는 단순히 영화의 플롯을 베껴오는 정도가 아니라 복식이라던가 제다이의 원형을 사무라이 문화에서 가져온 뒤, 기를 포스로 번역하면서 이런 사무라이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서구 관객들조차 익숙하게 받아들일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점에서 [스타워즈]와 [쇼군]은 일본 사무라이 문화가 이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저변을 확대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쇼군]이 방영되고 [스타워즈] 후속편들이 대히트를 치던 1980년대에 이르면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머물지 않고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어 무시할수 없는 비중으로 올라서게 된다. 때마침 당시 일본 버블 경제의 여파로 떠오르는 해라고 불리면서 주목과 경계를 서구권에서 경계를 받기 시작했고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너도나도 일본 문화에 접하게 된다. 이 시절에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던 더 베이퍼스의 ‘Turing Japanese’라는 곡은 그런 1980년대 일본 열풍을 제대로 보여주는 곡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런 급부상으로 인해 일본은 “경제동물”이라 불리며 경원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기도 했으며 이런 불안감은 기존의 서구 위치를 위협하는 일본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다.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일본 전광판과 야쿠자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온 형사 이야기를 다룬 [블랙 레인]은 이런 열광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198-90년대부터 헐리우드에서는 [스타워즈]처럼 인용 수준이 아니라 사무라이 문화에 매혹되거나 그 룰에 따라 행동하는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나온 알랭 들롱이 주연하고 장 피에르 멜빌이 만든 [사무라이]는 어찌보면 그런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영화였고 [헌티드]라던가 [킬빌], [한니발 라이징], [블레이드], [신 시티] 같은 영화들이 사무라이 문화나 사무라이 이미지를 차용해 지금껏 그려왔던 히어로의 이미지에 사무라이와 무사도 이미지를 덧붙여 고독함을 차용하고자 했다. 

 이렇게 1980년대부터 서구권 내 일본 열풍은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대한 매 지금도 이 유행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킬빌]와 같은 영화로 꾸준히 재생산되고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헐리우드 영화에서 일본 무사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재현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스트 독], [라스트 사무라이]와 [더 울버린]을 통해 헐리우드 영화가 무사도로 대표되는 사무라이 문화를 어떻게 접목시키고 소화했는지 파악해볼 예정이다.

[라스트 사무라이]: 세계화에 저항하는 고독한 전통의 사무라이



라스트 사무라이 (2004)

The Last Samurai 
7.4
감독
에드워드 즈윅
출연
톰 크루즈, 와타나베 켄, 사나다 히로유키, 티모시 스폴, 빌리 코널리
정보
전쟁, 액션 | 미국 | 153 분 | 2004-01-09

에드워드 즈윅의 2003년작 [라스트 사무라이]는 1876년 일본 개항기와 세이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미국이 독립한지 100년. 남북 전쟁과 인디언 전쟁으로 공을 세운 네이든 알그렌은 그러나 화려한 명성과 달리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네이든은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사무라이 반란군을 토벌할 정부군의 군사 고문으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정부군은 대패하게 되고 네이든은 포로로 사무라이 반란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반란군의 본거지에서 네이든은 사무라이 문화를 접하고 그들의 정신에게 감화되어 나중엔 정부군에 저항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라스트 사무라이]은 후일 언급할 [더 울버린]처럼 일본에 건너왔다가 무사도 정신에 매혹되는 서양인 캐릭터를 내세워 무사도 문화를 소개하는 영화다. 하지만 개인적인 드라마에 비중이 쏠린 [더 울버린]과 달리 [라스트 사무라이]는 좀 더 큰 틀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점이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에 영향을 받은 영화지만,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 정신 문화와 서구 정신 문화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던 니토베의 의도와 달리 순순하게 그 두 세계가 별개의 세계라는 걸 인정하고 시작한다.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영화에서 네이든은 서구화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에 부응해 온 캐릭터로 설정되며 일본의 문화는 영화 초반부엔 네이든의 시각에 맞춰서 이질적이고 불쾌한 무언가로 그려진다. 네이든이 전쟁에서 패한 사무라이의 할복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장면이라던가 사무라이 마을에 도착해 겪는 의식주 문화에 대한 혼돈들은 네이든으로 대표되는 서구인들에게 일본 문화는 동등한 세계가 아니라 처음 접한 다른 세계라는걸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내에서 서구로 대표되는 네이든 캐릭터가 왜 무사도 문화에 매혹되었는가? 이 답은 초반부 네이든이 조국과 명예를 위해 싸웠지만 인디언 학살과 전쟁의 참상으로 고통받는 캐릭터라는 작중 설명에서 해명이 된다. 여기서 에드워드 즈윅과 각본가 존 로건은 서구의 문화가 명예를 잃어가는 문화로 해석하고 일본의 무사도 문화에서 그 답을 찾는다. 그리고 서구와 근대적인 서구 문화를 수입하려는 일본 정부군과 전통적인 무사도 문화를 지키려는 잔존 사무라이들의 대립에서 무사도 문화에서 자신의 생의 의미를 찾게 되어 일본인들에게 ‘불공평한 조약’을 맺지말라고 충언하는 경지에 이르는 서구인 네이든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문화를 세계화하려는 서구 문명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도는 영화 발표 당시인 2004년이라는 연도를 생각해보면 세계화에 대한 회의주의로도 확장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 일본 문화와 무사도 정신은 세계화에 대항하는 문화 상대주의의 상징으로써 기능하고 있다. 그 점에서 [라스트 사무라이]의 무사도는 단순히 멋있다 수준의 겉햝기가 아닌 진지하게 탐구하고 고민해볼만한 타자의 문화로 그려지며 에드워드 즈윅과 존 로건은 그 타자의 문화에서 인류 공통의 가치를 발견해내 관객들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로맨스라는 문제에서도 후술할 [더 울버린]과 [라스트 사무라이]는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데, [라스트 사무라이]의 타카가 네이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계기는 일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네이던의 노력에서 비롯된다면 [더 울버린]의 마리코가 울버린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건 울버린이 실제적인 위협에서 자신을 지켜줬기 때문이다. 즉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무사도 문화로 대표되는 타자의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가 캐릭터 관계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스트 사무라이]의 일본은 SF 소설가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했듯이 “실은 서구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종류의 "잃어버린 미학", 퓨리타니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 케이카쿠는 이어서 이 영화는 그럼에도 ‘익숙해진 일본인의 얼굴을, 외국인의 시선과 필름이란 필터를 거쳐서, 이화한다’면서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http://noobcoela.egloos.com/2451722 이 외에도 이토 케이카쿠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에서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이런 감각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며, 배우가 배우의 이미지로 나오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에드워드 즈윅의 연출과 시선이 어떻게 일본 문화를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한 이 독특한 매력이야말로 [라스트 사무라이]의 장점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토 케이카쿠가 설명한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이화’라는 매력은 김효순의 [일본의 전통정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에서 [라스트 사무라이]를 다룬 부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김효순은 이 논문에서 반란군을 이끄는 영주 가츠모토의 자결장면에 나오는 벚꽃 연출을 설명하면서 이 장면은 “일본문화를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환상에 의해 연출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김효순의 지적은 이토 케이카쿠가 지적한 ‘이화’라는 매력은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무사도 문화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그려진 무사도 문화와 일본인들의 세계는 정작 일본인이 만든 일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들로 대표되는 전통 문화가 왜 세계화라는 흐름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야 하는가’라는 대답이 됨과 동시에 변하지 않고 고정된 문화로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고스트 독: 사무라이의 길]: 아이러니와 패러디, 그리고 진심이 담긴 문화적 칵테일

한편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은 지금까지 언급한 미국 영화들이 일본 문화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매우 독특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영화다. 야마모토 츠네모토의 [하가쿠레: 사무라이의 길]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인용을 하는 주체 고스트 독이 포레스트 휘태커라는걸 알게 된 관객들은 당황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도무지 사무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위치만 적자면 그는 ‘흑인’ ‘갱스터’이다. 심지어 그가 섬기는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일본인도 아니고 이탈리아 갱스터다. 하지만 고스트 독은 흑인 갱스터이지만 끊임없이 사무라이 문화를 언급하고 사람들에게 무사도 정신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한다. 심지어 적이 죽이려고 달려드는 장면에서도 고스트 독은 사무라이의 자세로 그들을 대응하고 무사도 문화를 전파하려고 한다.

 이렇게 짐 자무시는 시침떼듯이 갱스터 장르에 무사도 문화를 접붙여놓고 서로 충돌하는 부분에 대해서 별다른 봉합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스트 독]엔 “진정한 무사도 정신을 지닌 일본인 캐릭터”는 영화에서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쿵푸 마스터가 등장하긴 한다.) 오히려 자무시는 고스트 독에 대한 다른 갱스터들이 어떻게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장면을 넣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루이가 고스트 독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그런 충돌을 노렸다는걸 선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 인용은 코미디에 가까운 모양새를 띄게 된다. 본인은 진지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스트 독의 사무라이 추종은 혼자 붕 떠 있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영어 밖에 모르는 고스트 독과 프랑스어 밖에 모르는 아이스크림 장수 레이몬드와의 괴상한 대화들은 그런 붕떠 있는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의 위치를 은유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무사도 문화 뿐만이 아니라 [고스트 독]은 베티 붑을 비롯한 고전 영화나 만화를 위시해 다양한 문화들의 인용들로 가득차 있는 영화인데, 그 인용들이 노골적이여서 원본을 신경쓰지 않을수 없게 된다. 적어도 짐 자무시는 ‘타자’가 ‘이국의 문화’를 인용하는게 코미디로 보일 수 있다는걸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유머 소재로 삼는 모습조차 보인다. 이 점에서 [고스트 독]은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작하지만 정작 사무라이 캐릭터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를 아이러니하게 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허나 재미있는 것은 이런 안 어울리는 것끼리 아무런 붙어서 생기는 코미디가 실은 매우 강한 존중과 사랑에 담겨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짐 자무시는 코미디 만큼이나 [고스트 독]에서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사무라이 영화들이나 야쿠자 영화들을 인용을 어떤 아이러니 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가장 명백한 예로는, 스즈키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을 흉내낸 하수구 살인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고스트 독이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감정 이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웃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지함과 성실함은 [하가쿠레]로 대표되는 무사도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가 매번 인용하는 무사도 문화는 갱스터 세계의 지저분하고 각박한 인물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빛나며 그의 가치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앞서 말한 무사도와 고스트 독의 관계를 은유한듯한 레이몬드와의 관계 역시 자세히 보지만 웃기지만 그들의 관계 자체도 코미디만으로 남지 않는다. 그들은 엉뚱한 말을 늘어놓지만 감정의 방향 자체가 엇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스트 독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무사도 문화 인용이 동시에 그를 진지하고 위엄 넘치는 ‘히어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결말에 등장하는 고스트 독의 죽음과 고스트 독이 남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은 그 점에서 이 영화를 단순히 유머가 아니라 다른 면모로 볼 수 있게 유도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또 사실을 지적하자면 ‘흑인’ ‘갱스터’ 고스트 독의 무사도 문화 인용은 짐 자무시 머릿속에서 뜬금없이 진행된 사고 실험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힙합 그룹 우탱 클랜 중국 호북성 무당산에 자리잡은 무당파에서 이름을 따온 이스트코스트 힙합 그룹으로 데뷔작 [Enter the Wu-Tang : 36 Chambers]에서 중국 무술 영화에서 샘플을 따와 곡을 만들면서 유명해졌다.

으로 대표되는 흑인들의 동아시아 무술 영화 (쿵푸/사무라이 등등) 애정은 상당히 깊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 영화 [화산고]가 미국에서 래퍼들이 더빙에 참여해 개봉해 반향을 이뤄냈다는 점도 그런 흑인들의 동아시아 무술 영화에 대한 매혹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자무시는 친절하게 우탱 클랜의 멤버인 RZA를 영화 음악 감독으로 기용하고 “변장을 한 사무라이”라는 이름으로 카메오 출연시키기도 한다. 그 점에서 [고스트 독]은 흑인 문화와 일본 문화 간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주류 백인 문화와 대비되는 성채를 만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고스트 독]은 그 점에서 이중적으로 무사도 문화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무시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코미디 소재로 삼고 있지만, 동시에 그 무사도 문화가 돈키호테의 이상만큼이나 현실에서 이뤄질수 없는 존재라는걸 보여주면서 감독 역시 무사도 문화에 매료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그 점에서 [고스트 독]는 위에서 언급된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에 매혹된 서구인들에 대한 위트넘치는 헌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로 촉발된 무사도 문화에 대한 서구권의 관심은 전후 일본 문화와 사무라이 영화가 서구권에 수입되면서 촉발되었고 이는 곧 서구권 영화가 자기 식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언급한 세 영화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일본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존중받아야 할 타자의 문화와 서구 문화가 근대화 되면서 잃어버린 새로운 이상향으로 일본의 사무라이와 무사도 문화를 인용하고 있다면, [더 울버린]은 캐릭터의 내면과 그 캐릭터가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고결한 가치관을 묘사하기 위해서 무사도 정신과 문화를 인용하고 있다. [고스트 독]은 이런 무사도 문화 인용에 대한 농담과 진심이 섞인 코멘터리를 통해 고전과 현대, 인종을 넘나드는 문화적 칵테일을 만들어내는데 주목하고 있다.


참고 문헌 

박수형,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자포니즘의 신화적 의미 연구] (2008, 홍익대학교)

김효순, [일본의 전통전신으로서의 무사도와 오리엔탈리즘] (2005, 고려대학교)

함동주,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와 미국의 일본인식] (2012, 이화여자대학교)

(*참고로 울버린에 대한 분석은 2015/07/20 - [Deeper Into Movie/리뷰] - 더 울버린 [The Wolverine] (2013)에다 올려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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