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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코미디 (7)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1942)


저 유명한 햄릿의 대사에서 따온 제목을 보면 마치 거창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른스트 루비치의 [사느냐 죽느냐]는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왕실 암투극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의 시대는 1940년대 폴란드 극단, 즉 동시대다. 이 영화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나치 앞에서 이뤄지는 문제다. 그런데 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거창한 레지스탕스 활동이 아니다. 영화는 마치 현재의 암울함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희극적 설정을 깔아둔다. 마리아와 요셉은 반 나치적인 풍자극과 셰익스피어를 연기하는 폴란드 배우 부부다. 요셉이 고뇌에 잠겨 있는 동안, 마리아는 자신의 팬인 소빈스키 중위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는 소빈스키에 푹 빠지게 되고 요셉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질투하게 된다. 문제는 이 뒤다. 소빈스키는 반나치 운동에 가담해 있었고, 나치가 폴란드로 들어오면서 전쟁의 불길로 휩싸이게 된다. 소빈스키는 나치 스파이를 제거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오고, 마리아와 요셉은 소빈스키의 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영화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데, 이 시퀀스는 마치 이후 이어질 기나긴 연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리아와 요셉은 배우로써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땐 그들은 총체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고 둘은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 부분이라면 이 위기와 해결과정이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일반적인 극영화로 위장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이한 연극 두 편이 뒤엉켜있다. 마리아와 요셉, 소빈스키의 개인적 삼각관계, 나치를 상대로 한 스파이 작전으로 대표되는 역사/사회적 관계다. 루비치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합쳐버린다. [사느냐 죽느냐]가 코미디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전혀 들어맞지 않는 두 영역, 세계와 개인이 겪는 위기가 얼렁뚱땅이지만 세련된 임기응변 (혹은 연기)을 통해 전환점이 되거나 전진하기 때문이다. 와중에 도덕적 가치는 불경할 정도로 흐려진다. 소빈스키와 마리아의 통정은 햄릿의 명대사를 방아쇠 삼아 전개되고, 반대로 통정의 디테일에 대한 상대방의 무지는 스파이가 누군지 밝혀내는 장치가 된다. 한편 요셉의 개인적 질투는 안면도 없는 나치 장교를 속이는 행동에 동참해서라도 아내의 사랑을 되찾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파시즘과 애국주의는 아무런 무게를 가지지 못하고 붕붕 날아다닌다.

루비치는 이 모든 상황과 캐릭터를 일종의 가면 놀이처럼 만들어간다. 루비치는 관객에게만 이 가면들 간의 관계를 알려준다. 작중 인물들은 상대가 쓰고 있는 가면이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하거나, 일부분만 알 뿐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가면 속에서 연기하면서 상황이 어떤지 파악해야 한다. 루비치가 써내린 유려한 대사는 상황을 은폐함과 동시에 가면 뒤의 핵심을 찌르는 도구다. 은유와 비유, 예의와 비꼼의 전투가 가면 앞과 뒤에서 이뤄진다. 가면은 단순히 연기에 그치지 않고 문이라는 도구로도 확장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서스펜스와 이완은 문의 열림과 닫힘을 통해 제시된다. 문을 열었을떄 거기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마리아가 실렌츠키 교수의 방문을 받는 장면이 그렇다.), 문이 닫히고 난 숏에서 사람들은 한숨을 돌리거나 직전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쓴다. 문은 그 점에서 등장인물의 분투이자 그 분투의 희극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문은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도구기도 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요셉이 실렌스키 교수로 위장해 나치 앞에서 거짓말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정말 이 소재와 시대배경으로 이런 코미디를 해도 되는 것일까?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프로파간다 영화다. 폴란드 연극인들이 나치 스파이를 잡아내고 연합군으로 탈출하는 내용에서 프로파간다적인 성향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엔 프로파간다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 프로파간다를 내세워야 하는 배우들과 자유 폴란드 군인들은 선전물적으로 용감하기 보다는 루비치 특유의 가벼움을 유지하고 있다. 루비치가 독일 국적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폴란드인에 대한 이런 묘사들은 아슬아슬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루비치 역시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초반부 극단원의 대사를 빌어 제시된다. ‘연극인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건 숨는 것 뿐.’ 현실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배우가 총을 들게 되면, 그것은 배우가 아니라 배우였던 군인일 뿐이다. 배우가 싸우기 위해서는 연기를 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일 뿐이다. 문은 그 점에서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마술이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대사를 반하듯이 나치가 머무는 곳들을 희극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이 권력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게 나치가 아닌 폴란드인이라는 점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명백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있다. 음모의 연극은 현실의 비극을 과장되게 모사한 희극으로 진행되고, 음모의 주체들은 죽지 않고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루비치에게 나치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유머도 없는 사악한 발연기 배우들이다. 그들은 현실과 연극을 파악할 재간이 없으며, 영문도 모른채 죽거나 강제로 퇴장당한다. 중요한 점은 이런 퇴장이 아무런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얻는 것은, 필사적으로 연기를 해서 얻어내는 자들이다. 이 영화의 무례해보일 정도로 경박한 태도는 역사적 비극을 이겨내려는 도피적이면서도 역설적인 페이소스다. 루비치는 현실과 픽션의 접합점을 넘나들며 현재진행적인 역사의 비극 속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점잖게 놀린다. 그는 파시즘에게 심각함과 위압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걸 알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의 영어 대사는 To Be Or Not To Be다. 투 비가 되느냐 낫 투비가 되느냐. 조종당하는 인형이 되느냐 줄을 자르고 달려나가는 자동 인형이 되느냐. 이 순간 경박해보이는 인물들이 벌이는 희극은 역사의 폭압을 저항하는 도구가 된다.

결말은 어떤 지점에서 양가적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명백한 해피 엔딩이다. 하지만 그 해피 엔딩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향은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발표된 해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이다. 망명객인 루비치의 입지를 반영하듯이 폴란드 배우들과 군인들은 고국에 남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영국으로 도망친다. 영국에서 마무리짓는 결말은 셰익스피어의 고향에서 햄릿을 연기한다는 배우로써 성취를 보여주는 결말이면서도, 동시에 가면놀이의 유희가 궁극적으로 폴란드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전후 이어지는 폴란드의 수난사와 망명 폴란드인들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더욱 비극적이다.) 정리되지 않은 채 남은 소빈스키와 부부 간의 삼각 관계은 그 자체로 웃기기도 하지만, 극 초에 생겼던 긴장 관계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걸 명백히 보여준다. 오로지 루비치가 만들어낸 픽션 속에서만 그들은 파시즘의 폭압을 이겨내고, 어정쩡한 삼각관계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자체를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듯 하다. 소빈스키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나치즘의 뻣뻣한 폭압하고 거리가 먼 불경하지만 즐거운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불경할 정도로 경계 흐리기와 경쾌한 폭소로 파시즘을 하찮게 만들면서도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을 같이 제시하는 것으로 동시대의 그림자를 포착했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알 수 없었던 루비치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반복’으로 마무리짓는다. 그 찡긋거림이야말로, 어두운 현실에서도 유머의 힘을 믿었던 자의 제스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년뒤 역사는 루비치와 영화의 손을 들었다. 루비치는 짧긴 해도 나치가 패망하는걸 보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한 자도 있었다. 영화의 주연이었던 캐롤 롬바드는 영화 촬영 후 전쟁 채권 독려 집회에 참여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렇게 [사느냐 죽느냐]는 어두웠던 한 시대의 증언이자 희극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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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달려가는 차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옷차림과 멋진 저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제목이 지칭하는 부르주아라는걸 알게 된다. 부르주아들은 저택의 주인 부부 앨리스와 앙리 세네샬이랑 같이 밥을 먹으러 왔다. 하지만 앙리는 일하느라 바쁘고 결국 앨리스가 그들과 함께 만찬을 하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 뒤부터는 조금 이상해진다. 앨리스와 부르주아들은 고오급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식당의 주인이 죽는 바람에 밥을 먹지 못한다. 부뉴엘은 시침 뚝 떼고 평이한 어법으로 부르주아의 일상을 그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비일상적인 사건을 등장시키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뒤집는다.

첫번째 좌절 시퀀스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식당을 나오는 이유가 예의와 체면이라는 이유가 강하게 대두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짐짓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약속이 파토난 시퀀스 다음에 라파엘이 대사로 있는 미란다 공화국 대사관에서 앙리와 프랑소와, 라파엘이 모인다.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가던 도중 라파엘은 개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반정부주의자 여성을 발견한다. 라파엘의 선택은? 옆에 있던 저격총을 들어 인형을 쓰러트린다. 이 황당무계한 라파엘의 행동은, 그 자체로 훌륭한 블랙 유머이면서도 부르주아의 가치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예의와 체면은 상대와 마주하지 않으면 쉽게 벗겨지는 가면이다.

사실상 [절멸의 천사]의 리메이크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하지만 구성 면에서는 훨씬 대담한 영화다. [절멸의 천사]가 집 밖을 나가려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고 난파된 상황을 서서히 비틀어갔다면,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만찬을 벌인다는 행위를 중심에 두고 사방팔방 에피소드가 뻗어나가는 영화로 만든다. 몇몇 장면은 순전히 만찬을 기다리다가 끼어든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 멕시코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면서 부뉴엘의 영화는 서사 형식이 대담해지는 구석이 있는데 (로드 무비 구성만 세워둔 뒤 온갖 상징/풍자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은하수]가 대표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그 대담해진 서사 구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파악하기 편하게 구성된 편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시도와 좌절이라는 두 축을 오가는 시지프스와 같은 영화다. 그들에게 만찬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는 행위이며, 그 항유는 식탁 뒤쪽에서 노동자들을 부려먹어야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식탁과 부엌은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저택의 식탁과 부엌을 연상케 한다. 등장 인물들은 그런 계급적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품위없다고 비웃는다. 코냑 마시는 법을 모르는 운전 기사를 데려다 놓고 마시게 한 뒤, 저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대목은 부르주아의 교양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런 예의범절과 교양을 내세우면서도 성욕과 식욕에 주체를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원초적인 욕망들은 세네샬 부부 머리에 달려있는 풀잎처럼 집요하고 너저분하게 매달려 그들을 까발리고 모욕한다. 이 위선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조롱이 이중성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부뉴엘과 카리에 칼끝은 부르주아에 머물지 않는다. 미셸 피콜리가 연기하는 주교 역은 부뉴엘의 가톨릭을 향한 조롱을 압축한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 결말 이후 이 캐릭터가 아무 언급없이 사라지는 부분은 한이 서린 악의가 느껴진다. 부뉴엘에게 종교란 세속적인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소멸해버리는 하찮은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미란다 공화국에 이르면 할 말은 더 없을 것이다. 부뉴엘과 카리에의 조롱은 딱히 숨기는 부분 없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부뉴엘 영화가 된 것도, 그 대담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에 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부뉴엘과 카리에의 징벌이 떨어진다. 부르주아들은 영화 내내 계속 만찬을 방해받은 뒤, 좌절한다. 그리고 이 뒤엔 부뉴엘과 카리에가 있다. 특히 부뉴엘이 만찬을 방해하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어이없는 자유연상으로 이뤄진다.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하기도 하며, 젊은 장교의 넊두리를 듣다가 식당의 음식이 모조리 사라졌다는걸 알아차리기도 하며, 갱단이 총을 쏴 죽기도 한다. 부뉴엘이 꾸려가는 자유연상은 파시스트의 폭력과 종교의 엄숙주의을 풍자하는 것이기도 하며, 유령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별다른 개연성 없이 서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유연상이 계속 이어질수록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유령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은근슬쩍 튀어나온다. 부뉴엘과 카리에는 서사상에서 가능할것 같지 않은 상황을 기어이 이끌어내 진행시키면서 영화 자체의 현실성을 파괴한다. 델 토로를 비롯한 라틴 환상 영화들의 대가가 부뉴엘의 어떤 지점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부뉴엘은 이런 자유연상을 도구 삼아 환몽 구조를 통해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들은 이 환몽을 통해, 욕망 때문에 도래할 파국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피는 도피일뿐. 부르주아는 도피한 곳에서도 끊임없이 욕망과 파국을 만나야 한다. 개연성 없는 자유 연상과 환몽 구조 속에서 부르주아들의 캐릭터들은 얄팍해져 가고 자신의 죽음 역시 한낱 개꿈으로 취급된다. 심지어 그 개꿈엔 전혀 관련없는 경찰들도 포함된다. 부르주아들이 들어간 장군의 저택이 아무런 복선없이 연극 무대로 돌변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꿈과 풍자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준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저택은 언제든지 갈아치울수 있는 무대 장치에 불과하며, 부르주아와 만찬은 연기의 재료로 격하된다.

이 영화의 결론은 죽음이 다시 꿈으로 무화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부뉴엘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경멸스럽게 여겼던 캐릭터는 라파엘인것 같다. 착취가 은밀하고 비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부르주아랑 달리 그는 정말로 국민들을 쥐어짜고 경멸하는 파시스트 권력자다. 심지어 라파엘은 자신을 암살하러 온 반정부주의자 여성에게 성희롱적 모욕과 동시에 비밀 경찰을 시켜 잡아가게 만든다. 그 점에서 (꿈 속 식탁 아래에서도, 꿈 밖에서도)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든 게걸스럽게 집어먹으려는 라파엘의 샷은 부뉴엘의 블랙 코미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부뉴엘은 파시스트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음에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찌질스럽게 표출해대는 파시스트를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다시, 시지포스의 반복이다. 부뉴엘이 선택한 결말은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했던 부르주아들의 행진 샷이다. 처음엔 만찬을 즐기러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샷은, 온갖 환몽 구조를 거치고 나서 결말에 등장했을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대체 저 길은 만찬이 있을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이어지는게 맞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건가? 확실한건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은 다시 시작될 만찬을 고대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부뉴엘은 끊임없이 부르주아의 만찬을 방해할것이다. 어둠 속 길이 마침내 환하게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걷는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벗어날수 없는 림보다. 정말이지 악랄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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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 컷 [Short Cuts] (1993)

2017/04/19 - [Deeper Into Movie/리뷰] -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 Mrs. Miller] (1971)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의 시작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살충제 헬리콥터다. 중요한 점은 이 헬리콥터에 대한 정보가 보이스 오버 형식을 통해 인물들이 보는 뉴스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도입부의 의도는 명백하다. 알트만은 불특정 다수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파편화된 사건들을 조합해서 그릴 예정이다. 몇몇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만나겠지만 몇몇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만나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LA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 알트만은 이렇게 분절된 개별 캐릭터들을 하나의 영화로 묶는 과정을 헬리콥터-살충제-뉴스를 거쳐 도식화하고 암시한다.

조각나고 분절된 상황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엮어지는 [숏 컷]의 서사 구조 자체는 알트만 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알트만은 이미 [내시빌]에서 이 도식을 완성시킨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소 느슨하게 구성되어있던 [내시빌]과 달리, [숏 컷]은 훨씬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레이먼드 카버가 쓴 단편 소설들을 엮어낸 [숏 컷]의 캐릭터들과 상황들은 하나하나가 인상적이기에 도입부의 교통정리가 끝나면 그들이 누군지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웨이트리스가 일으킨 교통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 돌아다니며 불륜을 저지르는 경찰, 시체를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낚시에 집중하는 사내들, 어릿광대 일을 하는 여자....

레이먼드 카버가 제공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질척하기 그지 없다. 원작 소설도 그렇지만, 카버의 세계는 침이나 땀으로 범벅이 된 원초적인 본능이 구질구질한 감정들과 계급 양태랑 얽혀있는 리얼리즘의 세계다. 시체가 잠긴 강에서 남편이 건져올린 생선을 먹었다가 역겨워하는 아내, 술과 담배로 쩌든 집에 앉아 기계적인 폰섹스를 나누는 여자, 아들을 잃은 슬픔을 생일 케이크를 먹으면서 해결하는 부부... 카버의 세계에서 욕망과 감정은 날것으로 내던져지고, 인물들은 그 폭풍 속에서 끙끙 머리를 앓으며 욕설을 내뱉는다. 알트만은 그 영역에 발을 내딯으며 생생하게 그 폭풍을 잡아낸다. 그 점에서 [숏 컷]은 존 카사베티스의 세계에 가까운 알트만 영화일것이다. 비슷한 알트만 군상극이였던 [내시빌]이 기본적으로 학자의 시점을 견지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관객은 알지만, 작중 인물들은 모르는 정보의 차이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개별 시퀀스 내에서도 꾸준히 등장인물들을 마주치게 하고 심지어 중대한 사건까지 일으키지만, 그 인과관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웨이트리스 도린은 자신이 친 아이가 죽어버린걸 끝내 알지 못한채 괜찮을거라고 믿으며, 메리안과 랄프가 꼴불견으로 싸웠던 것을 클레어와 스튜어트는 알지 못한다. 이렇듯 [숏 컷]은 인물들은 단선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을 관객이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면서 감정적인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긴장은 안타까움이기도 하고, 블랙 코미디적 조소이기도 하고 허무함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는 얄밉고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숏 컷]은 독립적이었던 카버의 단편들이 하나의 세계에서 서로 얽히고 섥히게 한 뒤, 조감하면서 생기는 거리감이 있다. 주인공들의 고민과 감정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영화가 취하고 있는 헬리콥터의 시점에서는 일부에 불과하다. 단일 구조에서는 진지했을 감정들과 행동이 각각의 상이한 구조가 얽히고 파편화되면서 전체적인 인상은 가벼워지는 것이다. 알트만의 이런 태도는 상이한 음표들을 모아서 통일된 곡으로 만들어내는 작곡 과정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실제로 [내시빌]이 그렇듯이 [숏 컷] 역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샷을 집어넣어 영화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숏 컷]의 마지막은 카버의 리얼리즘을 흔드는듯 하면서, 동시에 카버가 추구했던 인생의 깨달음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지진과 살해는 뜬금없고 당황스럽다. 노골적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표방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그러나 상당히 일관된 이해의 결과물이다. 먼저 지진은 도입부에 등장한 살충제와 수미상관적 댓구를 이루는 도구다. 살충제가 모기를 죽이는 유독한 물질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시점을 제시했다면 지진은 그 시점의 존재감과 죽음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키며 파편화되어있던 사건들을 일시적으로 하나로 묶는다. 지진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며, 동시에 살충제의 유독성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지진은 궁극적으로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알트만은 끝없이 지리하게 이어질것만 같은 개별 일상의 리듬에 격렬한 충격을 가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아이러니를 끌어낸다. 극단적인 욕망이 살해라는 행위로 폭발하지만, 그 극단 역시 자연스럽게 일상의 리듬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 심지어 알트만은 짜증나서 유기했던 개를 다시 찾아와 데려오는 서브플롯을 집어넣으면서 그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이 아이러니는 도덕적으로 쉽게 판별될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숏 컷]은 군상극 이외의 알트만적 인장인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숏 컷]은 그런 아이러니에서 긍정과 부정 어느 쪽으로 떨어지지 않는 독특한 영화다. [내시빌]에서 있었던 얄밉고 냉소적인 태도는 여전하지만, 알트만은 카버가 담아냈던 '인생에서 일어나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기이한 깨달음'이라는 테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성공했다. 이 영화의 무지막지한 길이는 그 파편화된 긍정과 부정을 하나의 영화로써 조각모음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숏 컷]은 후기 알트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영화이며, 단편의 흐름을 공시성을 가지고 조직했다는 점에서 서사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밀어붙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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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의 첫 장면은 황급하게 노빌의 저택을 빠져나가는 하인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각자 이유를 대면서 저택을 빠져나가지만 그 이유가 알리바이라는건 명백하다. 왜냐하면 저택엔 곧 부르주아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인들의 머릿속엔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마치 모종의 사실을 깨닫고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되겠어라고 외치며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티는 계속되어야 하고, 하인들이 없어도 그들에겐 집사가 있다. 노빌 부부를 위시한 부르주아들은 하인들이 빠져나간것도 모르고 예정된 파티를 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음식, 멋진 음악, 아름다운 그림들... 부뉴엘은 하인들이 알수 없는 이유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잊은 것마냥 이들의 파티를 보여준다.

바보 같은 부르주아. 이게 지옥의 저택인지도 모르고! 부뉴엘과 원작을 쓴 호세 베르가민이 마련한 이 저택은 예삿 저택이 아니다. [절멸의 천사]는 도입부에 등장했던 불가해한 탈출이 가져다주는 카오스를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먼저 피아노 독주회 도중 그 유명한 닭발이 등장하는 샷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이 닭발이 왜 등장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절멸의 천사]는 이유를 대면 지는 초현실주의자가 만드는 영화다. 그러니 닭발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소도구로써 인식하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독주회라는 우아한 상황에서, 고급 레스토랑에도 안 어울릴법한 닭발은 시공을 뒤흔들 폭풍의 전조다. [절멸의 천사]는 그 유명한 설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문명의 보호를 받는 부르주아를 야만으로 퇴화시키는걸 보여주는게 최우선인 영화다. 닭발은 연주회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부뉴엘의 중지 손가락으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런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소품과 거기서 기반한 비논리적인 샷들은 [절멸의 천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닭발을 꺼내는 샷을 기점으로 부뉴엘은 영화의 개연성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첫번째 징조는 의지의 삭제다. 부뉴엘은 아무렇지 않게 파티가 끝나고 나가려는 인물들을 붙잡아 뇌세척을 하고 재운다. 이 과정이 은근슬쩍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의심하지만 그 의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한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 계급은 다양한 공간에서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릴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부르주아 문화의 중심이지만 역설적으로 생존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인 접대실"에다 가둬버린다. 피아노와 소파, 미술품이 밥을 먹여주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한정된 공간 밖에 머물수 없게 된다. 심지어 그들을 보좌해줄 하인들조차 없다. (재미있게도 부뉴엘은 집사장도 부르주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간 관리자도 노동자 계급을 탄압하는 부르주아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본 것일까?)  [절멸의 천사]는 부르주아의 저택이 '생존과 본능의 공간'과 '문명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부르주아를 보살피는 수족이 없으면 무너지는 곳이라는걸 폭로한다.

부뉴엘과 베르가민은 낄낄거리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캐릭터의 이성을 붕괴시킨다. 의지가 삭제된 캐릭터들은 그래도 여기 머무르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갈려고 생각은 하지만, 그 경계선상에 서는 순간 중요한 연결고리를 잊고 '아 그 뭐더라.' 하면서 돌아선다. 등장 인물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악랄하게도 그 해결책은 중요한 '선'을 넘지 못한다. 절박한 갈망은 있되, 의지와 해결책은 원천봉쇄된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초반부에 등장한 하인들의 도주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절멸의 천사]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언제든지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빠져나갈수 있지만 부르주아는 그러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웃는다.

접대실의 물자가 바닥날수록 합리적으로 판단할 이성은 본능 앞에서 초라해진다. 절정인 세번째 단계는 당연하게도 아포칼립스적 생존 투쟁기다. 부르주아는 이 순간부터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근친상간, 유치하지만 무시무시한 투닥거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자, 굴러다니는 동물뼈, 카발라에 심취해버린 부르주아들, 마약, 잘린 손의 호러스러움... 부뉴엘은 중간에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 시퀀스를 삽입하면서 그들을 한껏 비웃는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비슷하게 부르주아의 문명 속 고립극을 다룬 J.G.발라드의 [하이 라이즈]의 선조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난처함은 구경거리가 된다. 

부뉴엘은 이 황당한 문명 속 아포칼립스를 벽에 있는 수도 파이프를 뜯어서 목을 축이는 시퀀스와 갑자기 저택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동선으로 극대화한다. 문명의 화려함을 누리기 위해 벽 뒤에 은폐한 수도 파이프는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기계장치의 베르가민과 부뉴엘이 바깥에서 보낸 양은 자유롭게 '선'을 넘나들며 부르주아를 희롱한다. 그 앞에 선 부르주아들은 굶주린 짐승과 다름없다. 부뉴엘은 은폐된 소도구 (파이프)의 폭로와 두 동선의 대조 (갇혀있는 부르주아와 저택 밖에서 들어온 양)로 부르주아의 허울을 벗겨낸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는 의지만 사라진다면 문명과 가장 멀어져 추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덤으로 이뤄지는 가톨릭 모독은 더욱 노골적이다. [절멸의 천사]에서 가톨릭과 가톨릭 예술은 말그대로 변기통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의 설정이 상당히 인공적이고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 속 부르주아들은 현실에 속해있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창작자의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쥐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 속 캐릭터 설정은 일관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단적으로 이 영화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부르주아 캐릭터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성격보다는 일련의 기행들로 기억된다. 심지어 각 시퀀스 별로 캐릭터들의 설정이 일관성도 없다. 하지만 일관성 없이 캐릭터가 그려짐에도 영화의 카오스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에 더욱 매정하게 다가온다. 부르주아의 캐릭터 따윈 아무런 상관없다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캐릭터들을 그냥 멍청이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들을 모욕하는 법을 알고 있다. 상술했지만 이 부르주아들은 나름 이성적으로 재난을 풀려고 하는데, 이 점 때문에 [절멸의 천사]은 오히려 더 매정해진다. 그들은 똑똑하지만 베르가민과 부뉴엘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여기다 부뉴엘은 갑작스럽고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담은 샷과 몽타주로 서사를 흔들어놓고, 캐릭터의 일관성을 발기발기 찢어가면서 카오스를 만든다. 부뉴엘은 그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던가 데이빗 린치로 이어지는 전후 현대 영화의 비논리적 구성과 후대 "병맛"의 선구주자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절멸의 천사]는 명성과 달리 디씨 막장 만화들처럼 가볍게 즐기면 되는 영화다.

[절멸의 천사]의 결말 부분은 싱거워 보인다. 이 영화는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기대할법한 전멸로 끝나지 않는다. 부뉴엘은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외국인인 레티시아와 피아니스트 실비아에게 준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피아노 독주회를 재현하는 것으로 저택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야만의 끝에서 예술와 문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그들은 간신히 그 공간을 빠져나올 의지를 얻게 된다. 예술에 대한 긍정일까? 그것보다는 상황 자체를 재구성할 논리를 기어이 부여함으로써 탈출했다고 보는게 좋을듯 하다. 결국 부르주아들은 예술과 외부인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올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견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부뉴엘은 그 다음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성당으로 장소를 바꿔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뉴엘은 예정된 아포칼립스를 보여주지 않고 군중에게 발포하는 경찰과 또다시 흘러들어오는 양떼를 보여주면서 좀 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부뉴엘은 부르주아의 꼴불견은 총을 쏴댈 상황까지는 아니였지만, 가톨릭의 꼴불견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풍경이라는걸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스페인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부뉴엘 자신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끝으로 부뉴엘은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데, 부뉴엘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멕시코 시절을 총결산하고 멕시코보다 좀 더 자유로운 영역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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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나의 아저씨

My Uncle 
9
감독
자크 타티
출연
자크 타티, 장 피에르 졸라, 아드리안느 세르반티, 루시엥 프레지스, 베티 슈나이더
정보
코미디 | 프랑스, 이탈리아 | 117 분 | -


자크 타티의 [나의 아저씨]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것은 개다. 우리는 별다른 설명 없이 개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놀고 있는동안 한 남자가 등장해 그들과 놀아주는걸 보게 된다. 타티는 이 장면에 대사를 넣지 않는다. 대신 키가 큰 멀대같은 남자가 자전거를 출근을 하고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넣는다. 그러면서도 귀신같이 프레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타이밍들을 조절해 어떤 이완과 수축으로 이뤄진 하나의 장관을 만들어낸다. 느긋할 정도로 헐렁하고 순진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조밀하게 짜여진 [나의 아저씨] 도입부는 곧 영화와 자크 타티의 매력을 설명하는데 중요 포인트가 된다.

윌로 씨의 일상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프랑스 어드메에 있는 동네에서 이뤄진다. 쓰레기도 제대로 치우지 않는 이 동네를 배경으로 타티는 시장과 카페를 위시한 낡은 장소들에 조밀한 사람들의 군상을 배치해 프레임 바깥에도 세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평등하게 프레임과 미장센을 구성한다. 마치 윌리를 찾아라 같은 느낌이랄까. 윌로 씨는 이 속에서 딱히 튀어보거나 두드러보이지 않은채 자연스럽게 그 속에 있는 엑스트라들과 교류한다. 윌로 씨를 위해 세상을 존재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있고 윌로 씨가 거기에 있다는 느낌일까. 이런 타티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윌로 씨의 집일것이다. 한창을 꼬불꼬불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윌로 씨의 집은 척 봐도 불편해 보이지만 윌로 씨는 그런 불편함과 상관없이 나름의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간다. 창문을 이용해 카나리아랑 소통하는 장면 같은게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윌로 씨의 누나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50년대 말 프랑스 중산층의 삶은 더욱 기괴해보인다. 이 세계는 윌로 씨의 세계랑 대조되는 방식으로 세워져 있다. 우선 아르펠 부부의 세계에서는 부부 가족과 그 지인들을 제외하면 집 주변엔 사람들은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쓰레기 같은 이물질 같은건 전혀 없는 진공포장된 세계의 화룡정점은 바로 아르펠 부부의 집이다. 아마 영화사에 등장한 집 중에서 강렬한 집 베스트에 꼽으라면 꼽힐 아르펠 부부의 집은 한마디로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주의적 건축관을 극단적으로 반영한 집이다. 모든 공간은 열려 있으며, 방에 놓여진 가구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최첨단 기기들이 부부의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배치되어 있다.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절대로 편하지 않다는건 처음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방문객이 오면 문을 열여줘야 하는 현관문을 지나면 인물들은 지나칠정도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불편하게 배치된 디딤돌을 철저히 따라 움직인다. 기계들은 가끔 오작동을 일으켜 주인들을 가둬버리거나 윌로 씨랑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한다. 이런 아르펠 부부의 초현대적인 삶이 가지고 있는 괴상함은 영화 사상 괴이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는 설치조각을 꼽으라면 분명 꼽힐 푸른 물을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죽은 고등어 분수대로 나타난다. 이 고등어 분수대는 부부의 삶을 비출때마다 등장해 엉뚱한 리듬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관객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은 아르펠 씨의 직장에서도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전반적으로 아르펠 부부의 삶을 묘사할때 타티의 초현실적인 심미안과 유머 감각이 강렬해져 거의 이말년 병맛 만화 수준의 괴랄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다. 그 중 압권은 아르펠 부부의 집들이 장면일것이다. 사소한 오해와 실수,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직적인 권력 관계, 윌로 씨의 엉뚱함이 겹쳐져 만들어내는 이 황당할 정도로 웃긴 시퀀스에서 타티는 거의 흥겨울 정도로 치밀한 난장판을 유도하고 엉망이 되버린 집과 인물들을 모른체 하며 관객에게 은근슬쩍 윙크한다.

그렇지만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긴 해도 배척되야할 대상은 아니다. 타티의 시각은 종종 강렬해지긴 해도 날카롭진 않다. 차라리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지고 논다고 해야할까? 우선 윌로 씨와 아르펠 가족과의 관계가 나름 좋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제라드야 윌로랑 거의 동급인 캐릭터이니깐 넘어가자. 아르펠 부인은 현대적인 삶을 매우 추종하긴 하지만 아들 제라드가 윌로랑 나가서 노는것에 대해 별로 걱정하거나 말리지 않으며 (물론 먼지 투성이의 아들에 대해서는 질겁하긴 한다.) 심지어 그것에 대해 투덜거리는 남편에게 질투하는거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르펠 가족은 무시무시한 자본가의 대리인 이런 느낌보다는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른채 윌로 씨가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소시민에 가깝다. 물론 그 와중에 그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아르펠 씨가 유독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건 어쩔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의 시선은 차라리 제라드에게 맞춰져 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제라드가 영화 내내 자신의 집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고 투정부리는데 나오는데 이 [나의 아저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윌로 씨가 만드는 혼돈은 이 투정하고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영화의 주인공이자 거대한 아이인 윌로 씨는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에 대해서는 그닥 불만이 없다. 그냥 거기에 있으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윌로 씨의 삶은 도무지 현대 사회와 잘 맞춰지지 않고 윌로 씨가 생리적인 불편함에 몸을 비틀다가 카오스가 발생한다. 그 카오스는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치는 장난과 유사한 수준에서 이뤄진다. 이 카오스는 가끔 재치있는 발명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불편한 소파를 눕혀서 침대처럼 사용한다던가) 대부분은 우스꽝스러운 폭발로 이뤄진다. 타티는 그런 자신의 유희 감각을 꺼내 스크린에 흩뿌려대고 영화는 흥겨운 난장이 뿜어내는 느슨하면서도 헐거운 휴식으로 가득차게 된다. 물론 그렇게 느슨하고 헐거워보이는 모든 요소들이 모두 타티의 치밀한 계산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결말은 그렇기에 타협과 화합의 기묘한 이중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윌로 씨는 아르펠 씨의 소개를 받아 지방에 있는 세일즈맨으로 취직하게 된다. 적어도 윌로 씨가 [나의 아저씨]에서 누렸던 기묘한 자유는 영화의 끝에서 종결된다. 하지만 윌로 씨가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장소는 아르펠 부부의 미학으로 뒤덮인 곳이 아닌, 자신처럼 느긋하고 시끌벅적한 유머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버스 정류장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윌로 씨가 못마땅해왔던 아르펠 씨가 마지막에 제라드와 함께 장난을 치고 웃는다. 적어도 윌로 씨가 영화 내내 벌였던 소동이 완전히 무의미 하지 않았단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며 사라지는 아르펠 씨와 제라드를 뒤로 개가 장식한다. 인간이 프레임이 퇴장한 자리에 개들이 즐겁게 논다. 타티는 이런 수미일관을 통해 자신의 영화가 진지한거나 심각한 것이 아닌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아저씨]는 긴 말보다는 그냥 즐기는게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자크 타티는 훌륭한 영상 작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희극인이자 삶의 진리를 체득한 현인이였고 그 체득한 깊은 유머를 어떻게 영상에 녹여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현실의 자크 타티가 윌로 씨랑 달리 과묵하고 경제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나의 아저씨]를 비롯한 그가 남긴 영화들이 담고 있는 내공 깊은 유머는 절대로 거짓으로 만들어낸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보이는 통찰력은 온전히 그의 삶에서 나온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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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맨 [Simple Men] (1992)


심플맨

Simple Men 
6
감독
할 하틀리
출연
로버트 존 버크, 빌 세이지, 카렌 실라스, 엘리나 뢰벤존, 마틴 도노반
정보
드라마, 공포, 코미디 | 영국, 이탈리아, 미국 | 105 분 | -

할 하틀리은 왜 몰락했을까? 물론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감독에게 몰락이라고 단어를 붙여주는 건 굉장한 모욕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자벨 위페르를 비롯한 괜찮은 배우과 작업하며 미국 영화를 이끌고 갈 거라고 기대받은 감독의 현재는 그렇게 밝질 못하다.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헨리 풀]의 정점으로 할 하틀리는 위트 스틸먼과 함께 제임스 그레이, 폴 토마스 앤더슨, 웨스 앤더슨, 소피아 코폴라, 데이비드 O. 러셀 같은 이름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처럼 주류에 투신한 것도 아니였다. 그는 점점 변방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영화를 만들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 시도들은 비평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젠 그를 그토록 사랑했던 칸 영화제에서도 그를 부르지 않는다.   

그가 왜 몰락했는지는 조금 미뤄두고 먼저 창작의 절정기에 만들었던 [심플 맨]을 보자. [심플 맨]의 시작은 바로 '움직이지 마Don't Move'다. 눈을 가린 경비원은 여자가 한 치 앞도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빌은 경비원이 가지고 있는 성모 마리아 목걸이를 보는데, 경비원은 '이건 절 보호하는 부적이에요.'라고 말한다. 빌은 그 부적을 빼앗으면서 '당신은 보호가 필요없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경비원은 화를 내거나 반항하지 않고 '당신이 그녀에게 잘해준다면, 당신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할 하틀리는 이 대사들을 통해 90년대 미국 청춘들의 현 위치를 정립한다. 그들은 움직일수도 없고, 보호같은건 필요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당신은 보호가 필요없다'는 선언은 어찌보면 빌과 데니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 빌이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세상에 배신당하고 범죄자가 되어 절망한 빌이 데니스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전개는 비슷한 '탈선' (그들의 아버지는 야구 선수이자 극좌 테러리스트다.) 의 길을 걸었던 베이비 부머-히피 세대이자 아버지 세대를 찾아가는 정신적인 여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할 하틀리는 히피 세대에 대해선 그리 믿음을 보내지 않는다. 롱아일랜드로 들어서기 직전 빌은 " 모험과 로맨스는 없어. 오직 고통과 욕망 뿐이야."라고 선언한다. 빌의 선언은 베이비 부머 히피에 대한 믿음보다는  이미 "모험과 로맨스"를 추구했던 히피 혁명은 실패로 끝난채, 속물적이고 안락한 여피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퇴락적인 반동만으로 가득차버렸다라는 감독 자신의 선언에 가깝다. 그를 입증하듯이 아버지의 집에 가봤을때 남아있는 건 잿더미가 된 잔해 뿐이라는건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즉슨 모험과 로맨스의 시대는 한창 전에 끝난 반동의 시대에 살아가는 1990년대 청춘들의 표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 역시 계속 미뤄질 수 밖에 없다. 데니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고있는 엘리나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려고 하지만 엘리나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숨어다니다가 '나도 같이 도망가기로 했으나 잘 모른다. 그러니 나에게 부탁하지 마라. 아마 나 역시 버리고 벌써 여길 떠났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엘리나의 말은 아버지 세대가 미래에 대한 아들 세대의 질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재미있게도 엘리나는 아버지 윌리엄을 아들의 이름인 빌으로 부른다. 둘은 도망가고 있는 범죄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다르다. 아버지는 계속 이상주의적인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 도피한다면 아들은 거기에 냉소하고 이상을 버리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되려고 한다.

그렇기에 마침내 아버지가 등장했을때도 우리는 그 초라함에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은채 새로운 여자와 함께 배를 떠날 준비를 하며, 아들들에게 그 모험조차 거짓이였노라고 (아버지는 테러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성공하지 못하고 죄를 뒤집어 썼을 뿐이다.) 고백한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엄숙한 좌파적인 선언조차 추레한 롱아일랜드 시골 부둣가에서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프레임 속에서 허겁지겁 진행된다. 할 하틀리는 이를 통해 극적이고 이상화된 혁명의 환상을 부정한다.

대신 할 하틀리는 엉뚱하게도 1990년대 청춘의 "모험과 로맨스"를 아버지로 가는 여정 '도중'에 등장시킨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사랑을 부정하려고 했던 빌은 우연히 들른 케이트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때도 빌은 그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움직일수도 보호받지도 못하는 그는 자신의 감정에도 확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이어지는 케이트와 빌의 로맨스는 거칠거나 화끈하지 않다. 심지어 터질만한 사건이 (옛 남편의 등장, 케이트를 짝사랑하는 남자 등등) 등장하는데도 하틀리는 재빠르게 그 싹을 잘라버리고 다시 일상의 무덤덤함에 밀어넣는다. [국외자들]을 패러디한, 소닉 유스의 'Kool Thing'이 흘러나오는 유명한 댄스 씬이 그렇다.  하틀리는 로맨스의 열정 대신 덤덤한 톤으로 세상사의 복잡함과 그에 대한 시니컬함을 쿨하게 늘어놓는 방식으로 로맨스를 전개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젠체하는 태도가 막상 영화를 보면 그리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틀리는 태도는 그렇게 취하고 있어도 나름대로 드라마를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정해놓고 있다. [심플 맨]의 식어빠진듯한 로맨스 묘사는, 혁명이 끝난 뒤를 살아가는 슬랙커 청년들에게 사랑도 뜨거운 혁명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지루함에 파묻힌 놀랍지 않은 일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에도 가치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빌이 마지막에 아버지를 선택하지 않고 케이트를 선택하는 것에서 귀결된다. 로맨스와 모험을 믿지 않는, 단순한 남자이더라도 '그녀에게 잘해준다면, 당신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위안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할 하틀리의 [심플 맨]은 슬랙커 세대의 영화다. 만약 그가 1990년대 미국 인디 영화의 기수로 자리잡을 수 있다면 초기 고다르를 연상시키게 하는 자의식 넘치는 연출과 현학적인 대화들과 달리, 그 속에 담긴 소박한 진심이 슬랙커 세대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9.11 테러가 터지고 슬랙커 세대들도 사회에 들어서면서 할 하틀리 역시 방향을 잃은 것 같다. 테러와의 전쟁 시대에서, 그의 단순하고도 낙천적인 무덤덤함은 공포 속에 잊혀져 버렸다. 테러리스트가 농담으로 받아들여질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는 과연 슬랙커 세대의 시간축에 멈춰선 화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움직일 것인가. 나로써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슬랙커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단초가 될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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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없는 남자 [Mies Vailla Menneisyytta / The Man Without A Past] (2002)


과거가 없는 남자 (2005)

The Man Without a Past 
8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출연
마르쿠 펠톨라, 카티 오우티넨, 후아니 니에멜라, 카이하 파카리넨, 사카리 쿠오스마넨
정보
코미디, 드라마 | 핀란드, 독일, 프랑스 | 97 분 |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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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카우라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는 시작하자마자 캐릭터의 소개 대신 캐릭터의 정체를 지워버리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내내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끌고 간다. 허나 영화는 그 대답을 계속 유보하면서 이 정체 없는 남자가 어떻게 밑바닥 생활에서 살아남는지를 주목하게 한다. 먹고 살기 위해 막노동부터 시작한 이 남자는 구세군에 속한 노처녀 이르마를 만나 연애 비스무리한 것을 시작하게 되고, 여러 일들을 거치며 다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먹는다.

아키 카우라스마키 영화들이 그렇듯이 [과거가 없는 남자]에 담긴 하층민 세계는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을 빌어온 부조리 코미디에 가깝다. 모든 사람들이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말 대신 음성학적인 흉내를 내는 그런 세계다. 물론 그 세계의 캐릭터들은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과장된 톤으로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악당인것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착한 관리인 캐릭터라던지 은행 강도 에피소드들이 그렇다. 이 외에도 정갈할 정도로 1950년대 풍의 색감과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떠올리게 하는 약간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쓸쓸한 연기 지도와 인물 배치, 구식 로큰롤과 엔카들이 예전부터 쌓여져온 아키의 세계를 확고하게 하고 있다.

다만 [과거가 없는 남자]는 다른 카우라스마키 영화들과 달리 정체성의 문제를 개입시켜 역설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있다. 과거가 없는 남자가 찾는 과거가 마냥 행복하거나 정당한 것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극중 반전으로 통해 던지고 있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후반부에 이르러서 허탈할 정도로 쉽게 과거를 찾아내는데, 그 과거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박 중독에 옛 아내에게 불친절하고 때론 폭언을 퍼부었던 못난 남자였던 것이다. 그런 과거를 뒤로 하고 옛 아내는 새로운 애인과 함께 새 출발을 준비하려고 하고 있다. 이때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놀랍게도 그는 그렇게 원하던 과거를 선택하지 않는다. 옛 아내의 행복을 빌면서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해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게 찾던 과거로부터 내려온 자신의 정체성 대신 지금까지 새로이 만들어진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함은 곧 영화의 주제 의식하고도 관계가 있는데 카우라스마키는 정체성이라는 것도 결국에 유동적인 것이며 그런 확고한 과거에 대한 집착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0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구원은 구세군 설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가 없는 남자]의 이런 갱생 과정은 예수의 부활을 비롯한 기독교에 나오는 고난, 부활과 구원에서 상당히 많이 빌려오고 있다. 하지만 [과거가 없는 남자]의 고난, 부활과 구원은 인간의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다. 재물을 빼앗으려는 악인들에게 고통받은 뒤 신분마저 삭제당해 '호모 사케르'가 된 결함많은 남자는, 거렁뱅이들로 대표되는 무표정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선한 사마리아인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심지어 신의 위치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르마조차도 인간이 외로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 이르마에게 과거가 없고, 자신도 모르는 0의 존재인 M을 선사해 관계 맺기를 통한 구원을 추구한다. 이런 신성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과정은 M이 구세군 밴드를 로큰롤 밴드로 개조시켜 거렁뱅이들의 찬사를 받는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 밴드가 무표정하게 로큰롤과 종교적 메시지를 결합하는 부분은 웃기지만 동시에 거룩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신성과 기적은 더 이상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근현대적으로 규정되어 옥죄는 시민으로써 정체성과 그것이 만들어낸 호모 사케르적인 재난을 뛰어넘는 연대의 가능성으로 묘사된다. 이 점에서 [과거가 없는 남자]는 [망념의 잠드] 중반부에 다뤘던 기억을 잃은 아키유키가 겪는 치유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키 카우라스마키의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다양하다기 보다는 한 우물을 파내려가면서 거기서 주제를 담아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이후에 찍은 [황혼의 빛]과 비교해보자면 [황혼의 빛]은 좀 더 느와르 영화를 비롯한 고전 영화광적인 시선을 기반으로 쓰러지지 않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영화였다. [황혼의 빛]이 보여주는 고전 영화에 대한 독특한 변주도 인상깊긴 하지만 고통과 고난이 다소 인위적으로 조작됬다는 점이 호불호가 갈릴수 있다면, [과거가 없는 남자]의 근대 시민의 정체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그것을 감싸는 인간적인 가능성에 대한 우스꽝스럽지만 따뜻한 고찰은 이견이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조작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의 대표작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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