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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프랑스 영화 (9)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의 유명한 단편 [방파제]의 기본 전제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였다. 마르케는 어린 시절 우연히 잊지 못한 이미지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남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를 거쳐 시간을 횡단하는 행위라 말했다. 그리고 마르케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진 이미지와 기억, 시간을 한데 모아 몽타주로 이뤄진 꿈을 꿨다. 설정이 자세한 영화는 아니였지만, 이 우울한 단편 영화가 지금까지도 SF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들어가는지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서 마르케는 정지한 사진들 속 살아있는 여인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음의 놀라움을 끌어냈다.

마르케의 실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는 [방파제]에서 뻗어나온 묵상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에서 제목 따온 [태양 없이]는 일종의 기행문 영화다. [태양 없이]에서 시간과 이미지의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여기에 있는 개별 공간을 횡단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제 시간과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은 픽션 속 주인공이 아닌 크리스 마르케의 분신인 사진작가 샌도르 크리스나다. 샌도르는 카메라 한 대와 종이와 펜을 챙긴 채 지구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아이슬란드의 아이들 세 명이다. 샌도르는 이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행복의 이미지를 얘기하지만, 이 행복의 이미지가 쉽게 다른 이미지랑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 그 다른 이미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이 정녕 하나로 연결될 수 없는지, 고민한다. 

제목이 뜨고, 그는 아이슬란드를 떠나 홋카이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북쪽 섬에서 돌아오던 샌도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 순간은 전쟁의 순간이다. [밤과 안개]에서 겪었고 [방파제]의 남자가 살아가야만 했던 그 순간. [밤과 안개]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있었던 전쟁을 상상한 뒤, [방파제]에서 마르케는 도래할 전쟁을 상상하는 것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회고했다면, [태양 없이]의 샌도르는 평화의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전쟁를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산발적인 편지를 보낸다.

마르케는 얼핏 보면 연결되지 않을듯 같은 순간들을 연결한다. 샌도르가 발길을 내딯는 곳은 둘로 나눠진 세계다. 한편엔 섹스 박물관과 산리즈카 투쟁이 이어지는 일본과 제국주의와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낸 미국, 프랑스가 있으며, 한편엔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가 있다. 태양이 있는 세계와 태양이 없는 세계. 마르케는 이 둘로 나눠진 세계를 영화의 몽타쥬를 이용해 하나로 통합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태양 없이]는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의 결합이다. 

하지만 훈련된 르포 작가이기도 한 마르케=샌도르가 선택한 스케치 영상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다. 그는 일본 문화에 깊게 매료되어 인류학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산리즈카와 우익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들을 잡아내고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자연 풍경과 가난한 현실을 끌어온다. 편지를 통해 차분히 전해지는 나레이션에서는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지식인의 결기가 돋보인다. 샌도르의 통찰 일부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을 찌르기도 한다. [태양 없이]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광주 시민들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도쿄 좌파 시위대를 잠시 보여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편린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준다. 

이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에서 통일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샌도르가 보낸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샌도르가 읽지 않는다. 샌도르의 묵상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이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즉 [태양 없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뤄진 기행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왜 이런 형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여기서 [태양 없이]가 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보자.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를 찍으면서 동시 더빙이 아닌, 후시 더빙을 사용했다. 이 후시 더빙은 단순히 독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음향에도 적용되어 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일부는 기술적인 문제기도 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마이크가 달린 ENG 카메라는 그리 흔한게 아니였고, 필름 카메라는 녹음 기사를 동반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대표적이다.) 필시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느라 8-16mm 카메라를 사용했어야 할 크리스 마르케에게 기록과 동시 녹음은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하야오 야마네코가 등장한다. 비디오 게임 개발자인 하야오 야마네코는 현실을 바꿀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테이프로 채집한 전쟁과 시위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조작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야오 야마네코는 그것이 TV에 등장하는 이미지보다 더 진실하며, 대상의 특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하야오의 말은 상당히 궤변처럼 들린다. 어떻게 추상화 된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크리스 마르케는 반대로 추상화되지 않은 이미지조차도 언제든지 풍화되어 소멸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는 [밤과 안개]에 관여한 사람이다.) 하야오는 그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려는 시도보다, 본질을 잡는 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야오는 이 이미지들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구역'이라고 부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은 법칙을 따라 길을 찾아가야 했다. 하야오는 컴퓨터로 왜곡된 이미지로 '구역'을 만들어 전쟁과 투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스스로 다시 생각할 영역을 만들고자 한다. 

하야오의 시도는 [태양 없이]의 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수 있는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현실을 단순히 기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낼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 다.  [아름다운 5월]에서 그는 파리라는 한 공간에 집약된 다양한 영역들을 옮겨다니면서 한 시대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장르 픽션을 정지된 사진으로 재구성한 [방파제]를 거쳐 [태양 없이]에 이르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개별적으로 분리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꾸는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악과 나레이션, 현장 녹음한 소음을 후시 더빙한 음향들... 때문에 별다른 플롯이 없어도 집중력이 높은 영화기도 하다. [태양 없이]를 본다는 것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성한 꿈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소 난해할수도 있는 이 한편이 지독히도 감성을 건드린다면 영화가 가지는 시청각적 매력을 마르케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샌도르가 생각하는 [현기증]은 살인 사건 그 이상으로 은밀하게 시간과 공간의 현기증을 설명하는 영화다. 샌도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겹쳐 생각한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죽은 매들린을 다른 인물인 주디를 통해 재현하려는 시도는 샌도르가 필름과 테이프로 기록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재구성해 꿈, 나아가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로 은유된다. 그리고 샌도르와 하야오가 만든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구역'을 만들어낸다. 필름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즉물적인 기록이 가능한 점)을 인지한 뒤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라는 글에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 이후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케의 구성된 꿈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단순히 영상에 멈추지 않는다. 하야오의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크리스 마르케는 컴퓨터 게임 비평가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 도쿄를 들르던 도중 샌도르는 남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팩맨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샌도르는 이 노란색 구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피력한다. 샌도르의 눈에서 바라본 팩맨은 인간의 운명을 픽셀을 통해 은유한 완벽한 예시다. 그리고 그 은유는 당분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마르케는 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세상을 은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미지와 결합될때 강한 힘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딩시 노년을 바라보는 영화 감독이 태동기에 있던 컴퓨터 게임에게서 가능성과 유효한 통찰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마르케는 단순히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태양 없이]를 만든게 아니다. 오히려 샌도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마르케의 속내는 절박하다. 열렬한 좌파였던 마르케는 다양한 공간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무구할 정도로 순수한, 행복의 이미지로 쉽사리 등장하지 못한다. 기니비사우 프라이아 시장에 만난 여자의 표정을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샌도르의 고민은 마르케의 고민이기도 하다. 마르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태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그는 진심으로 땅에 발을 붙이는 사람들을 염원하고 걱정하고 있다.

친구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샌도르는 [태양 없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샌도르 크리슈나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닌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시를 쓰는 법은 영화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하며 글과 편지이기도 하다. 이제 샌도르는 일본에서도, 기니비사우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껏 쌓여왔던 과거를 바라보고 동시에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호주의 에뮤처럼 샌도르가 길어올린 영상과 편지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지의 수신인이 말한다.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이 기대감이야말로 [태양 없이]가 진정 바라는 소통의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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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Elle] (2016)

(강력한 누설이 있습니다.)

아마 크레딧이 지나가자마자 얼굴이 벌개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파울 페르후번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당당하게 강간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소리를 외화면에서 흩뿌린다. 엉뚱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샷은 강간 장면이 아닌 검은 고양이의 정면 응시 샷이다. 때문에 파울 페르후번이 [엘르]에서 취한 시점이 고양이의 시점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그 착각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두번째 샷에서 이미 강간은 다 끝난 상태다. 하지만 피해자인 미셸은 울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일어나 청소하고 욕조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단 두-세번째 샷을 통해 파울 페르후번과 [엘르]는 장르 관습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이미 네덜란드 영화계와 할리우드를 자기 방식으로 조교시킨 음탕한 네덜란드 애처가이자 정숙하고 침착한 사디스트인 파울 페르후번은 이번엔 뻔뻔하게도 이자벨 위페르를 내세워 프랑스 영화계를 조교하려고 한다. 

강간 사건이 잠깐 물러난 자리에 이어지는 것은 미셸의 일상이다. 미셸의 일상은 (이자벨 위페르가 [다가오는 것들]에서 편안한 연기해냈던) 프랑스 중년 지식인 캐릭터가 누리던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기적이 일어날 자리엔 강간이 일어났다. 자연히 [엘르]는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일탈한다. 페르후번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깔깔 비웃으면서 발기발기 찢는다.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랑 살겠다며 찌질하게 구는 징징거리는 아들, 무례하기 그지 없는 아들의 여친, 안 팔리는 주제에 폭력만 휘두르다 이혼당한 지식인 전 남편, 섹스에 환장한 어머니의 젊은 남친, 낙하산이라고 미셸을 경멸하는 게임 회사 직원... 미셸의 일상은 루이스 부뉴엘과 마르코 페라리의 경박함과 미카엘 하네케의 서늘함을 품고 사정없이 해체된다. 미셸이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모아 만찬을 하는 시퀀스에서 날아다니는 위선과 경박함, 부글거리는 성적 에너지는 페르후번이 부뉴엘이 시전했던 풍요로운 부르주아의 식탁을 작살내는 쇼트들을 존경하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미셸이 게임 회사 사장이라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출판게에서 일하다가 낙하산으로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뒷설정은 미셸의 위치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미셸은 전통 지식인 사회에서도 떨어져 있고, 신세대가 주축이 된 게임 업계에서도 한발짝 떨어져있는 아웃사이더다. 전통 지식인 사회와 이혼했지만, 발 붙이고 싶어하는 게임업계와도 사이가 냉랭한 상태에서 강간이 끼어들게 된다. 슬슬 미셸의 캐릭터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미셸은 강간 사건을 '게임'으로 보고 있다. 미셸은 게임의 NPC를 뛰어넘어 플레이어가 된 뒤, 최종적으로 '프로듀서'가 되고자 한다. 디자이너를 총괄하는 프로듀서.

이때 미셸이 개발하는 게임은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다. 간과하기 쉽지만, 페르후번은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는 고블린이 주인공인 안티 히어로 잠입 게임이다. 이 게임의 비중은 의외로 크다.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건 아니지만 페르후번은 이 게임의 개발 과정과 그에 관련된 소동들을 서브 플롯으로 삽입한다. 심지어 미셸은 게임 모델링을 활용해 만든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은) 포르노 영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강간 사건을 겪은 미셸에게는 이런 모욕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영상을 만든 엔지니어는 미셸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지만, 미셸은 오히려 그 성적 대상화를 역으로 반격한다. 미셸은 그 영상을 보고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는 차분하고 남자의 팬티를 벗겨 성기를 유심하게 관찰한 후 냉정하게 모욕을 준다. 페르후번은 이 서브플롯을 통해 미셸이 강간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강간하는 고블린에 가깝다는걸 명백히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진상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게임의 결말에서 주인공인 복제 고블린은 무도덕한 본체 창조주 오크 마법사를 소멸시키고 본체 스틱스의 정체성을 차지하게 된다. 정체성의 문제라던가 아버지 살해라는 모티프라는 점에서 이 게임의 플롯은 미셸의 과거사나 주변 환경과 묘하게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복제'인 미셸은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가? 미셸이 죽이고 싶어하는 원본은, 경건하고 온화한 중산층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자비한 살인마로 돌변한 아버지다. 미셸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내심 불편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강간 사건은 미셸이 안고 있는 불편함을 수면 위로 올려보낸 셈이다.

[엘르]가 이상한 안티 히어로물이라 할 수 있다면, 중후반부 강간범의 정체가 드러난 뒤 미셸이 취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미셸 앞집에 사는 강간범 파트리크는 묘하게 미셸의 아버지와 닮아있다. 멀쩡한 중산층 부부의 가장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은 미셸 그 이상으로 비틀린 범죄자다. 미셸은 파트리크의 비틀린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닫아달라고 파트리크에게 부탁해 같이 정리하는 미셸의 시퀀스는 사실상 둘의 섹스 시퀀스나 다름없다. 이 장면이 불편하다면 초반부의 강간 시퀀스의 뉘앙스와 행위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미 미셸을 욕망에 충실하고 재주가 많은 고블린이라고 정의내렸다. 고블린은 인간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는 존재다. ("하하하. 당최 알아먹지 못하는구나? 살거나 죽거나... 이제는 더이상 내게 명령할 수 없어.") 무도덕한 지식인에게서 태어난 - [엘르]에서 탄생은 축복이 아니라, 한낱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조시의 흑인 아이는 정숙한 여성상에 대한 빅 뻐큐에 프랑스 백인 지식인 사회가 두려워하는 악몽이며, 또다른 고블린이다. - 고블린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인정하게 되고, 중산층의 위선을 차분하게 까발린다. 미셸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미셸의 입장을 따라갈수 있다면 그건 고블린의 내면이 어떻게 설계되어있는지 알아차린 이자벨 위페르의 공이 크다.

영화 후반부, 미셸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병으로 잃는다. 하지만 어머니 유골은 소동으로 제대로 뿌려지지 못한 채 허겁지겁 막을 내리고, 아버지 시체 앞에서 미셸은 대놓고 비웃고 경멸한다. 미셸에게 부모의 죽음은 차라리 본체로부터 해방에 가깝다. 미셸은 무책임한 창조주를 직접 소멸시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소멸을 애도하지 않고 경멸하는 것으로 복수를 완수한다. 이 순간 미셸이 책임지고 있는 게임이 동시에 완성되는건 당연하다. 미셸은 게임 완성 축하 파티에서 작가 남편과 게임 업계의 뚜쟁이가 된 뒤, 친구 안느에게 안느의 남편과 바람 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안티 히어로 고블린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 잔칫날의 배경 음악으로 '삶에 대한 욕망'과 '고립시키자'가 나오는 건 고블린과 페르후번의 사악한 유머일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강간범 파트리크다. 파티에서 나온 미셸은 파트리크를 불러내 헤어지자고 선언한다.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 선언을 통해 폭압적인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강간하려고 발악하려는 파트리크를 똑바로 응시하는 미셸의 얼굴 샷은 그 점에서 로라 멀비가 지적했던 시선의 권력 관계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다. 미셸은 파트리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음으로써 파트리크를 부끄럽게 만든다. 미셸은 부모를 죽일수는 없었지만, 강간범 파트리크의 존재 이유를 빼앗을수 있었다. ("날 봐라! 스틱스! 내가 네 운명을 선택하는 것을 보라고.") 파트리크는 발악하다가 자멸하고 곧 이어 상황을 모르는 빈센트의 손에 살해된다.

[엘르]의 클라이맥스는 철저한 아이러니다. 어느 누구도 파트리크와 미셸이 이상한 관계를 맺었다는걸 모른다. 빈센트의 살인은 정당방위로 경찰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아내인 레베카 역시 범죄자 파트리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초반부 남성들에게 모욕당한 미셸은 마지막에 게임의 프로듀서로써 성공한다. 그 '게임'은 진짜 '게임'이기도 하고, 강간범과의 파워 게임이기도 한다. 미셸은 파트리크를 죽이면서 법을 비롯한 남성의 장치를 빌리지 않고 빛으로 위장한 "어둠의 주인"이 된다. 미셸이 키우다가 언급 없이 사라진 검은 고양이는 그 게임으로 인도하기 위한 환상이었던 것일까?

이 아이러니로 이뤄진 안티 히어로 극을 실제 여성들이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강간의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미셸의 행동은 도무지 현실로 옮길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어떤 여성들에게 [엘르]의 미셀은 결국 남성이 ([엘르]의 원작, 각본, 감독 모두 남성이다.) 만들어낸 기벽증으로 가득한 환상 (까놓고 말해 히토미 꺼라 식의)으로 다가올 것이다. 페르후번은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상된 비판에 대답한다. 미셸은 불명예스럽게 이사가는 레베카를 위로한다. 이때 레베카는 풀이 죽은듯 보여도 이겨낼 기운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안나랑 미셸이 얘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미셸의 인생은 어둠 없이 안나랑 즐거울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당신은 이 고블린이 맞이한 결말에 납득할 수 있는가? 이 연대가 정말로 진실하게 느껴지는가? [엘르]는 강력한 에너지로 밀어붙인 뒤, 관객을 회색 영역에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파울 페르후번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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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 The Gleaners and I] (2000)

아네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목을 듣고 그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다룰 것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르다가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지점 역시 밀레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는 직접 보거나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 한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이 다큐멘터리는 미술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바르다가 그 그림을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삭을 줍는다'라는 행위다. 버려진 이삭을 줍는다는 행위는 상품 가치를 잃은 잉여 생산물을 주워서 쓰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수도 있을 것이다. 밀레가 살았던 시대는 1차 산업혁명이 완료된 19세기였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체제가 정착한 20세기 이후 현대 사회에도 그런 '이삭줍는 사람들'이 있을까? 바르다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바르다는 이삭으로 대표되는 대량 자본주의의 잉여 생산물이 어떻게 재활용되는가를 추적한다. 불량 판정을 받고 처분되는 감자를 쓸어다 먹는 사람들, 폐품을 주워다 예술품을 만드는 예술가, 파장하는 시장에서 음식을 주워다 먹는 노숙자... 많은 사람들이 바르다의 카메라 앞에서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증언하고, 이에 대한 바르다 자신의 코멘트도 이어진다.

바르다가 좌파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실제로 바르다의 영화는 페미니즘과 좌파적 관점을 빼놓으면 분석이 불가능해진다.), 작 중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잉여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이 윤택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이 다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잉여 생산물의 가치를 판별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이 아닌, 당장 먹고 살기에도 절박한 빈민들이나 관점 자체가 다른 아웃사이더들이다. 

바르다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버려지는 잉여 생산물이 과연 사회에 통용될 수 없는 '불량'인지를 묻는다. 이 다큐에서 적당한 가공 과정을 거치고 나면 버려진 잉여 생산물들은 더 이상 잉여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으며 노숙자 보호소에서 거주하며 공부하는 청년은 그 점에서 바르다의 질문과 대답을 구체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속작인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그 이후]를 봐야 되겠지만 적어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안에서 이 청년은 지식과 삶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재분배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아네스 바르다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고 한다.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이후 영화들처럼,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잠시 불었던 DV 카메라 혁명을 빼놓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이며, 주제 의식하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르다는 DV 카메라가 누벨 바그 세대의 정신을 재해석할 수 있으며, 필름 중심의 기존 영화 제작 체계를 전복시킬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다큐에서 DV 카메라는 페드로 코스타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롭다. 바르다는 DV 카메라 하나를 들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정 도중에도, 작업 구상 도중에도 즉흥적이고 자유연상적으로 이미지를 채집하고 선별해 배치한다. 바르다는 이를 통해 카메라와 자신의 몸을 일체화시킨다. 바르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카메라 렌즈도 향하고 반대로 렌즈가 머무는 곳에 바르다의 시선도 머문다. 바르다는 이 과정에서 어느새 노년을 맞이한 여성 감독으로써 자신을 성찰하며, 누벨바그 시절 거리로 나가 생생한 배우들과 풍경을 잡아냈던 성취를 2000년대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디지털 카메라는 그 점에서 바르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도구기도 하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바르다는 사라지는 과거로 남는걸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바르다는 영화 속에서 주제가와 가까운 랩을 시전하기도 한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를 통해 그림 속 이삭을 줍는 행위를 사회경제학적 관점과 DV 카메라로 대표되는 미학적 관점, 여성의 관점을 결합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원제 Les Glaneurs Et La Glaneuse는 그 점에서 프랑스어 특유의 '명사의 성' (남성형 Le와 여성형 La.)을 이용해 복잡미묘한 통찰을 함축하고 있다. 바르다는 남성형으로 이뤄진 '이삭 줍는 사람'에다 여성형으로 이뤄진 La Glaneuse를 덧붙여 이미지를 줍고 선정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난삽해보이지만 흥미로운 폭풍이다. 경제학적인 성찰을 다루면서도 바르다 자신의 독백과 사소한 일상을 스케치하는 클립들이 튀어나오는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로 보자면 끊임없이 불어나는 눈덩이를 (혹은 게임 [괴혼]에 여러 물체들이 덕지덕지 붙은 별) 연상케한다. 때문에 정돈되어 있지 않고 마구잡이로 진행된다고 느낄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을 줍는 행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바르다는 이 다큐가 어떤 모양새를 취해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치밀한 사유를 거쳐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바르다는 동료인 크리스 마르케와 피에르 롬의 [아름다운 5월]이 보여줬던, 중심이 없는듯 하면서도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인터뷰와 자료화면들 간의 사유를 추구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21세기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20세기의 역사로 사라질듯 보였던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재창조하고 있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바르다 자신도 예측과 달리 90이 되어서도 신작을 내놓을 정도로 정정한걸 보면 이 다큐가 어떤 활력이 되었던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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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번의 구타 [Les 400 Coups / The 400 Blows] (1959)

만인이 인정하는 영화사의 고전을 리뷰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발굴도, 동시대적으로 뛰어난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는 다르게 굳건한 비평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비슷비슷한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블로그가 참신한 해석을 노리는 그런 블로그는 아니지만, 그래도 동어반복은 흥업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얘기할때도 비슷한 얘기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시초 중 하나로 감독의 자전적인 성장기를 다뤘으며, 현장 로케이션으로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넣어..." 이런 얘기를 리뷰에다 늘어놓는건 따분한 일이다.

물론 이 영화가 선취한 영화적 테크닉은 그 어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 전후 네오 리얼리즘에서 영화의 길을 발견한 고다르와 트뤼포가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에 배우를 세우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댔을때, 네오 리얼리즘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은 단순히 파괴된 현실에 대한 고찰 이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 젊은 비평가들이 만든 영화가 고전이 된 이유는 그들이 서 있는 현재 (60년대 프랑스)를 재구성하는 허구적 영화가 사운드 스테이지라는 인공적인 세트 바깥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는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랑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비교하자면, 처음부터 그들의 결별은 예정된 것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400번의 구타]는 [네 멋대로 해라]랑 비교하면 작지만 분명한 형식적/내용적 차이가 있으며 이 차이는 후기작으로 갈 수록 명확해진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네멋대로 해라]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고다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고다르의 다른 영화들처럼 [네 멋대로 해라]는 머리와 영화광적인 취향으로 설계된 영화다. 지극히 모범적인 갱스터 영화에서 시작해 자의적으로 자르고 배치된 컷들로 내용 자체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마지막엔 전혀 엉뚱한 감흥으로 마무리짓는 이 영화는, 고다르 자신이 펜과 머리로 줄곳 상상한 영화가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캐릭터는 쉽게 감정이입하기 힘들었고, 그들의 수다는 서사와 관계 없는 부분도 포괄하고 있었다. 이후 고다르는 한동안 서사마저 포기하면서 서구 지성과 영화사에 대한 통찰을 영화의 언어와 구조에 접목시키는 급진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온갖 영화적 실험을 거쳐온 지금 관객들에게 [400번의 구타]는 낯섬보다는 친숙함을 받게 된다. 트뤼포의 자의식과 형식은 신선하고 매력적이지만 영화의 주체인 앙트완 드와넬이 느끼는 감정과 현실에 앞서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순진할 정도로 솔직한 고백이다. 앙트완에게 세상은 고통스럽고 학교 생활은 재미없으며 영화만이 그를 위로해줄 따름이다. 하지만 영화조차 위안해주지 못하는 현실의 엄혹함은 그를 사회 변두리로 내몬다.

이런 쓸쓸하고 처량한 감수성은 개별 샷들에서도 감지된다.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서 눈을 반짝이는 앙트완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여주는 샷부터 거리에서 엄마가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걸 목격하는 샷, 전설이 된 마지막 결말의 프리즈 프레임까지 모든 샷의 주체는 앙트완이며 트뤼포는 고다르와 달리 감정과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 영화적 기교를 활용한다. 트뤼포가 꽤 솔직한 감독이고 앙트완 역시 숨기는게 없는 캐릭터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앙트완을 통해 드러난 트뤼포의 불우한 시절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400번의 구타]의 공간을 살펴보면 크게 몇가지 부류로 나눠지는걸 확인할 수 있다. 집, 학교, 청소년 보호소로 대표되는 억압의 공간, 도시로 대표되는 해방의 공간, 그리고 마지막 축 쳐진 얼굴로 돌아서는 해변가. 이 공간들을 오가며 트뤼포는 우울했던 과거 속에서 해방감을 찾아낸다. 초창기 트뤼포나 고다르는 달리기라는 행위에 매료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는데,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국외자들]이 그랬고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역시 달리기의 해방감이 가득한 영화다. 앙트완이 친구랑 학교를 땡땡이 칠때 신나는 템포로 질주를 담는 부분을 통해 트뤼포는 억압의 공간에서 해방의 공간으로 이동할 때 생기는 특유의 운동감을 주목한다. 그 점에서 오프닝에 등장하는 차를 타고 찍은 파리 정경은 영화의 해방감을 암시하고 있다.

트뤼포는 이후 자기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이 영화를 보고 열심히 토론하는 서사랑 하등 상관없는 장면을 굳이 집어넣는 연출을 보이는데, [400번의 구타]는 그런 트뤼포의 영화광적 고백의 첫 머리에 있는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트뤼포가 [400번의 구타]에서 주인공들에게 보여준 영화는 고전 영화가 아닌, 훗날 나오게 될 자크 리베트의 데뷔작 [파리는 우리의 것]이다. 이후 트뤼포 영화들의 영화 인용이 고전 영화에 치중해있다면 [400번의 구타]에서 선택한, [파리는 우리의 것]은 여러모로 누벨바그 세대의 자신만만함을 선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작 리베트의 [파리는 우리의 것]이 그리 희망적인 내용은 아니였다는걸 생각해보면, '파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제목은 [400번의 구타]에 어울릴법한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400번의 구타]는 지금 봐도 당혹스러운 구석이 있는 차기작 [피아니스트를 쏴라]처럼 장르 실험에 몰두한 영화도 아니고, [아델 H.의 이야기]나 [미시시피의 인어]처럼 중후기작들처럼 고전적이다 싶을 정도로 안정된 서사와 연출이 정신나간듯한 로맨틱한 감정과 대조로 이루며 기이한 순간을 만드는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400번의 구타]는 소박한 성장 영화의 고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영화적 언어를 막 완성한 자의 기쁨과 희열을 맛볼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런 작품은 인생에서 한 순간 밖에 만들지 못한다. 아마 앙트완을 주인공을 내세우며 차기작을 만들어댄 트뤼포도 알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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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Van Gogh] (1991)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는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첫 피알라의 영화다. 196-70년대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정작 당대 누벨바그하고는 약간 한 발자국 떨어져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든 모리스 피알라는 1989년 [사탄의 태양 아래서]로 프랑스 영화계의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불러온 이단아였다. 그가 [사탄의 태양 아래서] 직후 만든 [반 고흐]는 오베르라는 마을에 정착한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다룬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빈센트의 말년이라 할 수 있는 시절이지만, 피알라는 이 시절을 멜로드라마적으로 과잉해서 그릴 생각은 없어보인다. 영화엔 스타 배우라고 할만한 캐스팅도 드러나지 않으며, 15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장면 없이 반 고흐의 후반부 인생을 다룬다.

영화의 시작은 푸른 캔버스에 채워진 화면에 빈센트의 붓질이 더해지는 장면이다. 강렬한 푸른 캔버스에 물감 질감이 더해지는 이 장면을 통해 피알라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해야하는 일상적인 행위에 반복 집중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반 고흐]는 기행과 광인으로써 빈센트 반 고흐가 아닌,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예술가와 주변인들의 일상을 다룬 초상으로써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화면에 가득채워진 붓질과 캔버스는 그렇기에 예술가의 천재성이 아니라 예술가가 일상적인 노동과 그 행위에 방점을 맞췄다고 선언하는 장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스 피알라가 담아낸 빈센트 반 고흐의 파멸적인 일상과 그 붕괴는 음악도 거의 삽입되지 않고 건조한 분위기 속에서 느린 템포로 이뤄진다. 영화 초반에 빈센트의 삶은 초라하고 지쳐보이지만 희망이 있어보인다. 가셰와 테오 같은 조력자라던가 마그리트 같은 사모하는 사람도 있고 휴식을 제공하는 오베르의 전원 풍경 등 주변 환경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빈센트의 불안정한 현실과 정신은 시퀀스 별로 천천히 발산되면서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다. 예술적으로 그닥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빈센트는 이해할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충동적인 욕망와 간헐적인 분노를 조금씩 분출한다. 그런 빈센트의 모습에 사람들은 점점 떠나가기 시작한다.

피알라는 그런 파국을 치장하거나 극적으로 과장하기 보다는 모든 사건들을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나 정신병을 앓는 장면만큼이나, 가셰가 빈센트나 테오랑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라던가 마그리트가 피아노를 배우거나, 테오가 그림을 팔려고 시도하는 장면, 테오와 조안나가 부부 싸움을 하는 장면, 연회 장면 모두 동등한 비중을 가진다. 

때문에 [반 고흐]는 에밀 졸라 같은 자연주의 소설과 매우 맞닿아있으며, 19세기라는 시대 상황에 대한 인류학적인 고증도 상당히 꼼꼼하게 묘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런 민주적으로 구성된 사건들은 후반부 고흐가 마그리트와 함께 환락의 공간 물랭 갈래트에 가서 노는 시퀀스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긴 시퀀스이지만 모든 사건을 공평하고 건조하게 다루는 피알라 특유의 어법 때문에 덤덤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빈센트 반 고흐의 파멸적인 삶의 형태의 양면성 (저속함/성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피알라가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계급 문제도 담겨있다. [반 고흐]의 캐릭터들은 룸펜 프롤레테리아인 천재 빈센트와 그 룸펜 프롤레테리아의 천재성을 동경하지만 동시에 천재에 대한 파멸적인 삶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는 중산층으로 나눌 수 있다. 빈센트의 그림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마그리트를 빈센트에게서 떨어트려놓으려는 중산층 의사 가셰와 남편 테오의 붕괴를 두려워하는 아내 조안나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영화 마지막에 이르면 자본가 계급은 룸펜 프롤레테리아를 이해하지 못한채 점점 멀어지며 룸펜 프롤레테리아는 노동자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죽어간다.

이런 피알라의 자연주의적인 시선은 빈센트의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피알라는 빈센트는 면도를 하는 모습과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 사이에 아무런 컷도 배치하지 않고 이어두기만 한다. 즉 피알라는 분명히 일어났지만 추측으로 밖에 머물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허구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되려 간극을 명백하게 드러냄으로써 증언을 거부한다. 

결국 빈센트가 죽음을 맞게 된 계기인 총상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일어난 인과관계로 빈센트의 죽음을 만들어내게 되고, 치료마저 거부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그저 그 죽음 이전에 꾸준히 쌓여왔던 빈센트의 삶 속에서 그가 느껴야 했던 좌절감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지 않았나, 라고 추측할 뿐이다. 피알라의 자연주의적 매정함은 빈센트의 죽음 이후로도 (심지어 피알라는 장례 장면도 빼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는걸로 마무리된다. 결국 빈센트는 모호한 동기가 만들어낸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세상은 그 없이도 돌아간다.

냉정하고 건조한 피알라의 서사 구조와 달리 [반 고흐]의 미장센은 정갈하지만 분명하게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았던 19세기 미술 사조에 대한 분명한 헌사를 담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본디 프랑스 미술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모리스 피알라는 22살 때 촉망받는 화가로써 경력을 중단하고 긴 세월 끝에 1960년대 중반부 프랑소와 트뤼포의 후원하에 뒤늦게 영화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반 고흐]는 그의 화가로써 경력과 회화적인 구성에 대한 매료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다만 피알라가 미장센으로 구현하는 미술 사조는 반 고흐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평생동안 추구해왔던 햇빛과 연회 장면의 질감이라던가 세잔의 정물화에 영감을 받은듯한 소품들의 배치, 로트렉의 퇴폐적인 향략가를 재현하는 쪽에 가깝다. 이런 정갈하지만 유미적인 미장센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자연주의적 서사랑 대비되어 미적인 쾌락과 동시에 한 시대의 미적 사조를 가로지르며 재배치하고 한시대에 대한 통합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 냉철한 시도가 담겨 있다. 즉슨 피알라는 단순히 그 화가가 추구했던 미적 사조를 재현해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그 화가가 속해있던 시대의 미적 사조를 미장센에 배치하고 가공해 영화를 만든다.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는 격정적인 삶을 살아온 예술가의 자화상을 다루면서도 매우 냉철하고 건조한 자연주의적 시선으로 본 사소한 순간을 당대의 회화적 사조와 결합시킨 영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피알라가 냉정함을 버리는 순간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빈센트가 죽고 난 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마그리트는 한 젊은 화가를 만난다. 젊은 화가는 마그리트에게 반 고흐랑 아는 사이였냐고 물어보고, 마그리트는 덤덤하게 긍정한다. 

빈센트의 죽음 이후로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세상에도 그의 몸부림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피알라는 본 것일까? 적어도 이 결말에는 매정한 죽음 이후의 삶에도, 죽음 이전의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는 자가 등장하며 그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걸 명시하고 있다. 평생을 프랑스 영화계 주류와 불화하며 살아온 피알라는, 이 장면을 만들면서 피알라는 얼마 안 남은 자신의 영화 인생을 반추하면서 자신 또한 반 고흐처럼 끝내 실패하고 잊혀지겠지만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길 원했던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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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판 [Dheepan] (2015)

2009/11/05 - [Deeper Into Movie/리뷰] - 예언자 [Un Prophete / A Prophet] (2009)

2013/05/21 - [Deeper Into Movie/리뷰] - 러스트 앤 본 [De rouille et d'os / Rust and Bone] (2012)

2014/02/19 - [Deeper Into Movie/리뷰] -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De battre mon coeur s'est arrêté / The Beat That My Heart Skipped] (2005)

스리랑카 내전과 타밀 타이거라는 반군 단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의 도입부에서 어떤 절망감을 읽어내긴 어렵지 않다. 자크 오디아르는 저널리즘적인 설명은 일부러 배제한 채, 그저 패배라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어야 하는 (2000년대 중반, 기나긴 스리랑카 내전은 타밀족의 패배로 끝났고 그들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사람들의 절망감만을 담아낸다. 하지만 이 절망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불타오르는 시체의 산에다 지금까지 자신을 구성해왔던 타밀 타이거로써 증거들을 던져넣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다음 시퀀스의 주인공은, 주인공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여자는 미친듯이 난민촌에서 어린 소녀를 찾아다닌다. 마침내 부모를 잃은 고아 소녀를 발견한 이 여자는 소녀를 데리고 한 텐트로 가는데, 이때 오디아르는 소녀와 여성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배재한다. 그들이 모녀로 위장해, 첫 컷에 등장한 남자를 만나 '가족'으로 위장하는 순간 오디아르는 이 두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보여준다. [디판]이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담겨 있다. 영화는 주인공들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미스터리로 남겨둔 채, 그들이 처한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제스처를 보여주다가 그들이 디판, 얄리니, 일라얄이라는 가짜지만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한 순간에야 서사를 전개시키기 시작한다.

[디판]을 만들고 나서 오디아르는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잘 표현해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디테일에 굳이 주목하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왠지 변명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디판]은 역사와 정치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개인과 개인과 사회 간의 추상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는 특이한 영화다. 초반부가 지나면 영화는 잽싸게 프랑스로 옮겨가며 전쟁의 상흔은 가끔 등장하는 코끼리 몽타쥬 연출처럼 주인공을 압박하는 보조적인 장치로 머문다. 오히려 [디판]은 스리랑카 내전보다는 그 내전으로 어쩔수 없이 프랑스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디판 가족이 중간 기착지로 선택한 프랑스 교외의 공공 아파트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디판]의 허름한 공공 아파트는 이미 정착한 이민자와 막 도착한 이민자 사이에 계급적 격차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디판에게 일을 소개하는 사람은 흑인이며,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백인들조차도 가난과 범죄로 인해 유색 인종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인다. 디판 가족은 그런 바닥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그들의 법칙을 배워나간다. [예언자]가 그랬듯이, 오디아르는 이 과정을 일견 사실적이면서도 강한 심리적인 이미지들을 이용해 응축시키고 터트리는 연출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아파트를 쥐고 있는 갱단 두목 브라힘에게선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에서 찾아볼수 있었던 늙고 지친 프랑스와 이민자랑 부대끼며 살아가는 젊은 프랑스라는 구도도 찾아볼 수 있다. 브라힘은 톰처럼 흑인들과 아랍인들을 상대하며, 반대로 브라힘의 아버지는 사실상 죽은거나 다름없이 제대로 소통도 못하고 이민자 얄리니의 손길에 받으며 살아간다.

다만 [디판]은 [위선적 영웅]에서 비롯된 '만들어진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종 기착지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 불시착한 디판 가족은 진짜 가족이 되고자 발버둥을 치고, 현재의 차별과 과거의 상흔이 수시로 그들을 엄습해온다. 이 부분에서 [디판]은 명백하게 디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물론 얄리니와 일라얄 역시 이야기의 주체이며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드러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디판의 불안감과 긴장보다 깊게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일라얄이 교실을 뛰쳐나와 울먹이는지, 얄리니와 브라힘이 어째서 서로 공명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는지 알 수 없다. 그것들은 추상화된 컷 연결에서 암시될 뿐이다.

반면 디판은 본명부터 시작해 얄리니와 일라얄보다 많은 뒷얘기가 공개된다. [디판]에서 제일 인상깊은 장면 역시 디판이 중심이 된 장면이다.. 프랑스에 은거중인 타밀 타이거 대장을 만나는 시퀀스에서 디판은 이전까지 묵묵하고 터프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무력하고 슬픔에 젖어있다. 그가 대장에게 폭행 당한 직후 강한 저항가를 부르는 장면은 그 표현주의적인 어둠과 연기의 (디판을 맡은 제수타산 안토니타산는 타밀 타이거 출신 작가로, 연기 경력은 한 편밖에 없는 비전문 배우다. 얄리니와 일라얄 역시 비전문 배우다.) 박력에도 불구하고 먹먹한 슬픔에 갇혀 있다. 

이 감수성은 분명 화장실에서 피떡이 된 채 덜덜 떠는 톰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이라던가 첫 살인을 저지르고 혼돈에 빠진 말릭 ([예언자]), 아들을 꺼내기 위해 미친듯이 주먹으로 얼음을 내려치던 알리 ([러스트 앤 본])에게서 찾아볼수 있는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이다. 디판 역시 다른 오디아르 주인공들처럼 비극으로 끝났지만 불현듯 엄습해오는 과거와 각박한 현재, 안정감과 애정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가 후반부에 보이는 일련의 저들은, 그런 방황을 조금이나마 인간적인 방향으로 끌어오려는, 현실이라는 중력을 향한 저항이다. 오디아르는 그런 안정감과 애정을 얄리니의 육체와 따뜻한 공원 들판로 대표되는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이미지로, 현실이라는 중력과 그에 대한 저항을 필름 느와르와 액션 영화에서 비롯된 시끄럽고 콘트라스트가 뚜렷한 표현주의적 이미지로 나눈뒤 이를 배치하고 연결하는 방식으로 영화적인 에너지를 구성한다. 

이를 보듯 [디판], 나아가 오디아르가 끄집어내는 영화적 에너지는 과거에서 비롯된 시궁창같은 삶을 거칠게 뚫고 나가면서도 종종 어찌할수 없는 멜랑콜리와 탐미에 침잠하는 모습에서 비롯된다. 죽은 어머니로 대표되는 피아노 음악의 아름다움과 산 아버지로 대표되는 불법 부동산 세계의 지저분함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은채 살아가던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의 톰, 순수함을 품은 채 예리하고 냉정한 암흑가의 알 무알림으로 성장하는 [예언자]의 말릭, [러스트 앤 본]의 다리가 잘리고 난 뒤 오히려 관능적인 에너지를 얻어 불법 격투 시합에 관여하게 되는 스테파니와 순수한 사랑과 지저분한 정욕과 분노를 품고 살아가던 알리가 그랬다. 디판은 어둠 속에서 디판이 파는 싸구려 머리띠의 불빛이 켜지다가, 경찰에게 추격받는 장면으로 끝나는 [디판]의 타이틀 시퀀스는 그 점에서 매우 오디아르 특유의 강렬하면서도 멜랑콜리한 이미지의 집약적 폭격이라 할 수 있다.

[디판]이 선택한 폭력적인 클라이맥스는 어찌보면 지금까지 쌓여온 유약함과 불안을 터트리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프랑스 하층민의 삶을 보여주던 다큐멘리적 카메라는 [칠드런 오브 맨]을 연상시키게 하는 거친 질감과 박력으로 연기로 둘러쌓인 아파트로 진입하는 디판의 동선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오디아르는 이 장면을 총소리와 연기, 쓰러지는 사람들, 계단을 오르는 디판의 운동 에너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로 배치해 표현주의적인 아름다움과 박력을 표현해낸다. 그리고 그 폭력을 절규와 껴안기라는 멜로드라마적 제스처로 마무리짓는다.

오디아르 영화들은 명확한 서사적 인과 없이 멜로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모호하지만 에너지로 들끓는 상황에 인물들을 던져놓고 끝내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는데, [디판] 역시 그렇다. 좀 더 자세히 분류하자면 소원성취적 결말이라는 점에서 [디판]의 결말은 [러스트 앤 본]에 가까운 편이다. 최종 목적지인 영국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옷을 차려입고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디판은, 과연 현실인가, 환상인가? 오디아르는 그저 디판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얄리니의 손을 클로즈업하는걸로 결말을 마무리 짓는다. 이 제스처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거라고 믿는다. 즉 아름다움이 서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실제로는 그 인과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도.) 믿게 되는 것이다.

[디판]이 지금까지 나온 오디아르 영화 중 박한 평을 받고 있는데, 아마도 이 멜로드라마적인 제스처와 폭력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유약하지만 터질것만 같은 영화적 에너지의 결합이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져서 아닐까 생각한다. 심지어 결말 부분도 그렇다. 남녀간의 애정과 가족애를 원동력으로 삼는건 이미 [러스트 앤 본]과 [내 심장이 건너 뛴 박동] 등에서 이뤄낸 것이며, 이민자의 불안한 심리를 범죄물이라는 장르에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예언자]에서 해낸 것이다. 또한 사회역사적 맥락을 배재하고 어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의 진폭을 쫓는 오디아르의 태도는 솔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겉햛기여도 좋으니 디판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역사적 디테일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디판 가족은 말릭이랑 달리 프랑스 내에서도 친숙한 사람들이 아니니깐 말이다.

아마 [디판]은 지금까지 만든 오디아르 영화의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영화일것이다. 하지만 그런 도식성에도 [디판]은 종종 잊기 힘든 아름다움을 뽑아낸다. 오디아르가 이런 작법을 고수할지 아니면 다른 단계로 넘어갈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오디아르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디판]은 나쁘지 않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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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나의 아저씨

My Uncle 
9
감독
자크 타티
출연
자크 타티, 장 피에르 졸라, 아드리안느 세르반티, 루시엥 프레지스, 베티 슈나이더
정보
코미디 | 프랑스, 이탈리아 | 117 분 | -


자크 타티의 [나의 아저씨]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것은 개다. 우리는 별다른 설명 없이 개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놀고 있는동안 한 남자가 등장해 그들과 놀아주는걸 보게 된다. 타티는 이 장면에 대사를 넣지 않는다. 대신 키가 큰 멀대같은 남자가 자전거를 출근을 하고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넣는다. 그러면서도 귀신같이 프레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타이밍들을 조절해 어떤 이완과 수축으로 이뤄진 하나의 장관을 만들어낸다. 느긋할 정도로 헐렁하고 순진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조밀하게 짜여진 [나의 아저씨] 도입부는 곧 영화와 자크 타티의 매력을 설명하는데 중요 포인트가 된다.

윌로 씨의 일상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프랑스 어드메에 있는 동네에서 이뤄진다. 쓰레기도 제대로 치우지 않는 이 동네를 배경으로 타티는 시장과 카페를 위시한 낡은 장소들에 조밀한 사람들의 군상을 배치해 프레임 바깥에도 세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평등하게 프레임과 미장센을 구성한다. 마치 윌리를 찾아라 같은 느낌이랄까. 윌로 씨는 이 속에서 딱히 튀어보거나 두드러보이지 않은채 자연스럽게 그 속에 있는 엑스트라들과 교류한다. 윌로 씨를 위해 세상을 존재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있고 윌로 씨가 거기에 있다는 느낌일까. 이런 타티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윌로 씨의 집일것이다. 한창을 꼬불꼬불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윌로 씨의 집은 척 봐도 불편해 보이지만 윌로 씨는 그런 불편함과 상관없이 나름의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간다. 창문을 이용해 카나리아랑 소통하는 장면 같은게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윌로 씨의 누나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50년대 말 프랑스 중산층의 삶은 더욱 기괴해보인다. 이 세계는 윌로 씨의 세계랑 대조되는 방식으로 세워져 있다. 우선 아르펠 부부의 세계에서는 부부 가족과 그 지인들을 제외하면 집 주변엔 사람들은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쓰레기 같은 이물질 같은건 전혀 없는 진공포장된 세계의 화룡정점은 바로 아르펠 부부의 집이다. 아마 영화사에 등장한 집 중에서 강렬한 집 베스트에 꼽으라면 꼽힐 아르펠 부부의 집은 한마디로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주의적 건축관을 극단적으로 반영한 집이다. 모든 공간은 열려 있으며, 방에 놓여진 가구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최첨단 기기들이 부부의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배치되어 있다.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절대로 편하지 않다는건 처음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방문객이 오면 문을 열여줘야 하는 현관문을 지나면 인물들은 지나칠정도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불편하게 배치된 디딤돌을 철저히 따라 움직인다. 기계들은 가끔 오작동을 일으켜 주인들을 가둬버리거나 윌로 씨랑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한다. 이런 아르펠 부부의 초현대적인 삶이 가지고 있는 괴상함은 영화 사상 괴이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는 설치조각을 꼽으라면 분명 꼽힐 푸른 물을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죽은 고등어 분수대로 나타난다. 이 고등어 분수대는 부부의 삶을 비출때마다 등장해 엉뚱한 리듬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관객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은 아르펠 씨의 직장에서도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전반적으로 아르펠 부부의 삶을 묘사할때 타티의 초현실적인 심미안과 유머 감각이 강렬해져 거의 이말년 병맛 만화 수준의 괴랄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다. 그 중 압권은 아르펠 부부의 집들이 장면일것이다. 사소한 오해와 실수,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직적인 권력 관계, 윌로 씨의 엉뚱함이 겹쳐져 만들어내는 이 황당할 정도로 웃긴 시퀀스에서 타티는 거의 흥겨울 정도로 치밀한 난장판을 유도하고 엉망이 되버린 집과 인물들을 모른체 하며 관객에게 은근슬쩍 윙크한다.

그렇지만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긴 해도 배척되야할 대상은 아니다. 타티의 시각은 종종 강렬해지긴 해도 날카롭진 않다. 차라리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지고 논다고 해야할까? 우선 윌로 씨와 아르펠 가족과의 관계가 나름 좋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제라드야 윌로랑 거의 동급인 캐릭터이니깐 넘어가자. 아르펠 부인은 현대적인 삶을 매우 추종하긴 하지만 아들 제라드가 윌로랑 나가서 노는것에 대해 별로 걱정하거나 말리지 않으며 (물론 먼지 투성이의 아들에 대해서는 질겁하긴 한다.) 심지어 그것에 대해 투덜거리는 남편에게 질투하는거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르펠 가족은 무시무시한 자본가의 대리인 이런 느낌보다는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른채 윌로 씨가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소시민에 가깝다. 물론 그 와중에 그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아르펠 씨가 유독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건 어쩔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의 시선은 차라리 제라드에게 맞춰져 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제라드가 영화 내내 자신의 집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고 투정부리는데 나오는데 이 [나의 아저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윌로 씨가 만드는 혼돈은 이 투정하고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영화의 주인공이자 거대한 아이인 윌로 씨는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에 대해서는 그닥 불만이 없다. 그냥 거기에 있으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윌로 씨의 삶은 도무지 현대 사회와 잘 맞춰지지 않고 윌로 씨가 생리적인 불편함에 몸을 비틀다가 카오스가 발생한다. 그 카오스는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치는 장난과 유사한 수준에서 이뤄진다. 이 카오스는 가끔 재치있는 발명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불편한 소파를 눕혀서 침대처럼 사용한다던가) 대부분은 우스꽝스러운 폭발로 이뤄진다. 타티는 그런 자신의 유희 감각을 꺼내 스크린에 흩뿌려대고 영화는 흥겨운 난장이 뿜어내는 느슨하면서도 헐거운 휴식으로 가득차게 된다. 물론 그렇게 느슨하고 헐거워보이는 모든 요소들이 모두 타티의 치밀한 계산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결말은 그렇기에 타협과 화합의 기묘한 이중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윌로 씨는 아르펠 씨의 소개를 받아 지방에 있는 세일즈맨으로 취직하게 된다. 적어도 윌로 씨가 [나의 아저씨]에서 누렸던 기묘한 자유는 영화의 끝에서 종결된다. 하지만 윌로 씨가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장소는 아르펠 부부의 미학으로 뒤덮인 곳이 아닌, 자신처럼 느긋하고 시끌벅적한 유머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버스 정류장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윌로 씨가 못마땅해왔던 아르펠 씨가 마지막에 제라드와 함께 장난을 치고 웃는다. 적어도 윌로 씨가 영화 내내 벌였던 소동이 완전히 무의미 하지 않았단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며 사라지는 아르펠 씨와 제라드를 뒤로 개가 장식한다. 인간이 프레임이 퇴장한 자리에 개들이 즐겁게 논다. 타티는 이런 수미일관을 통해 자신의 영화가 진지한거나 심각한 것이 아닌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아저씨]는 긴 말보다는 그냥 즐기는게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자크 타티는 훌륭한 영상 작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희극인이자 삶의 진리를 체득한 현인이였고 그 체득한 깊은 유머를 어떻게 영상에 녹여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현실의 자크 타티가 윌로 씨랑 달리 과묵하고 경제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나의 아저씨]를 비롯한 그가 남긴 영화들이 담고 있는 내공 깊은 유머는 절대로 거짓으로 만들어낸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보이는 통찰력은 온전히 그의 삶에서 나온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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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Vous n'avez encore rien vu /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2012)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2012)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8.8
감독
알랭 레네
출연
사빈느 아제마, 마티유 아말릭, 안느 콩시니, 랑베르 윌슨, 삐에르 아르디티
정보
드라마 | 프랑스 | 115 분 | 2012-11-22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때 유령을 찍는 요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다. 영화가 그런 오해를 사게 만든 이유는 다른 흐름을 가지고 흘러가는 시공간을 현실의 시공간에 불러들인 첫번째 매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가 누려왔던 매체(활자나 그림)엔 그런 유동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시공간을 기록하는 매체'는 '마법'이나 '사후세계'처럼 이성 너머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영화는 이성 너머에 있던 가능성을 실현해버렸고 당대 사람들은 문화 충격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영화와 관련된 여러 소동들은 그 현기증의 잔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노스페라투]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같은 무성 공포 영화엔 아직 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현기증이 가시지 않았던 당대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어떤가? 영화가 처음으로 문을 열어젖힌 다층적인 시공간은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았다. 인터넷, 멀티 태스킹, 스마트 폰, PIP... 다른 시간과 공간을 통채로 이 곳으로 가져다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 시간에 우리가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상화된 나머지 외려 '다른 시공간이 이 곳에 불려오면서 갖는 마술적인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어떨까?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은 그 마술적인 매력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영화적 굿판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는 전작에 비해 그리 복잡하진 않다. 장 이누이가 쓴 희곡 [에우리디스]에 출연한 배우들이 연출가의 죽음을 계기로 모여들고 새로 만들어지는 [에우리디스] 테이프를 보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장 이누이의 연극 두 편에 느슨하게 기대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다.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나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머리를 끙끙 싸매게 했던 난해한 대사들과 느릿한 템포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와 [히로시마 내 사랑]처럼 여전히 구조가 중심인 영화다. 다만 그 구조의 중심이 바뀌었다고 할까. 저 두 영화엔 기억이 중심에 버티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구조 중심엔 재현이 있다.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에우리디스] 테이프를 보는 베테랑 배우들은 자신들의 [에우리디스]를 재현하고 재현을 할수록 그들이 있는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고 변형된다. 저택 문을 열고 나가니 역과 숲이 보이고 인물이 손을 내미니 갑자기 물과 옷이 휙하고 등장하고 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레네판 [아바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CG가 상당히 많이 동원된 영화다. 농담이 아니다. 


그 확장과 변형은 단순히 공간에만 멈추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 되면 베테랑 배우들의 재현을 젊은 배우들의 영상이 받아친다! 분명히 시차가 있는 영상이 분명한데도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장면은 경이롭기 그지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레네는 녹화 영상은 다른 감독에게 전권 이양하고 '내가 찍는 영상과 완벽하게 달라져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처럼 스크린과 현실 사이 경계가 무너지는 희귀한 풍경을 연출해낸다.


후반부 [에우리디스]가 끝나고 나오는 전개는 조금 당혹스럽다. 냉큼 망자가 살아돌아오는 희극적인 전환을 제시한 뒤 그것을 다시 뒤집는 비극적인 전환이 또 이어진다. 레네는 그 뒤 새로운 에우리디스 역의 배우와 베테랑 배우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걸 보여주고 새로운 연극이 막을 올리는 걸로 영화를 끝내버린다. 


서사적으로 보면 뜬금없는 전개다. 하지만 아까 '굿판'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실제로 망자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재현의 굿판이 유령을 여기로 불러들였다고 하면 어떨까?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그들이 일단 다리를 건너자, 그때 유령들이 다가왔다" (이 대사는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 자막 인용이다.)라는 자막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제 현실의 시공간을 떠나서 다른 공간으로 진입하겠다는 선언인것이다. 그렇게 현실의 시공간을 떠난 베테랑 배우들은 망자를 추억하고 잠시나마 이 시공간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현실의 시공간을 떠나 다른 시공간을 넘나들며 연기=굿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유령을 다시 '다리 너머로 불러들이는' 굿은 성공했다. 죽었던 자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작중 [에우리디스]가 그랬듯이 그 부활은 실패로 돌아간다. (혹은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가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다시 진짜 죽음을 맞이 한다. 그리고 과거의 배우들은 스크린 밖으로 퇴장하고 새로운 연극=삶이 오른다. 그렇게 보면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마술은 단순히 시공간을 허무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그 경계를 뛰어넘어 불멸을 보장받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마술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어떻게 이 전개를 받아들이든 자유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마술이 생각 외로 재미있다는건 밝혀야 되겠다. 해석 같은 건 잠시 젖혀두고 약간 으스스하지만 로맨틱한 이 마술에 푹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끝에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Vous n'avez encore rien vu는 걸.


P.S. 아까 [아바타] 비유를 들었는데, 카메론 감독은 극도의 하이퍼리얼리즘을 통해 여기와 다른 시공간을 불러냈다면 레네 감독은 이미 있던 것의 다층적인 재현을 통해 여기와 다른 시공간을 불러내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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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Un Prophete / A Prophet] (2009)
예언자
감독 자크 오디아르 (2009 / 프랑스)
출연 타라 라힘, 닐스 아레스트러프, 아델 벤체리프, 레다 카텝
상세보기

예언자 출옥하다: 감옥이라는 이름의 학교 A School Named Prison 


자크 오디아드 감독의 [예언자]를 본다는 것은 마하 3으로 얻어터지는 것과 거의 비슷한 경험입니다. 건조하지만 강렬한 폭력 묘사도 그렇지만, 이 영화의 파워와 포스는 정말 '후덜덜'합니다.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자 제 머리는 풀파워로 너덜너덜해진것 같았습니다.

만약 캐릭터 만들기를 공부하기 위해서 프랑스 영화 한 편을 골라야 한다면, [예언자]는 훌륭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캐릭터의 입체적인 변화를 굉장히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주인공 말릭은 뭐 가지고 있는 것은 돈 쪼가리와 단벌 옷 밖에 없는 별다른 빽이나 연이 없는 사람이고 실제로 생각하는 것도 미숙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미숙한 생각과 행동과 달리 노력도 하고 성실한 면모도 있기도 하죠. 그런 사람이 감옥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을 타라 라힘이라는 배우가 잘 연기하고 있습니다. 치기 어려보이는 모습에서 대담한 마피아지만, 어딘가 소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복잡한 과정을 타라 라힘 연기자분께서는 섬세하지만 육중한 표현으로 소화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초반부하고 후반부의 변화가 거의 괴리감 수준입니다.)

 
비단 타라 라힘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는 좋은 연기자들의 좋은 연기가 많습니다. 아마 가장 잊지 못할 캐릭터라면 코르시카 마피아 두목인 세자르 루치아니일 것인데, 이웃집 노인의 인자한 외모지만 거기서 뿜어져나오는 카리스마와 악, 말릭에게 폭력적인 가부장와 보호자라는 다중적인 역할을 거침없이 표현하는게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어가 "아이고 항복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허윽 숟가락;;;) 그 외 다른 조연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습니다.

사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데다, 이야기도 상당히 복잡한 편인지라 결말 부분에 '엥?' 싶었던 감도 있었습니다.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니(+해석) 이 영화는 별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채 버려진 인간이 어떻게 험난한 세상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지에 대한 영화이더라고요. 영화의 대부분이 감옥에서 벌어지는 코르시카인과 타 인종들 간의 파워 게임을 집중되어 있는데, 그 비중 때문에 [예언자]의 감옥은 하나의 소우주처럼 보입니다. [더 클래스]의 학교처럼 치열한 다툼과 암약, 협잡이 난무하는 곳이죠. 말릭은 그 소우주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 낸 뒤 거기서 승리합니다. 이 때문에 말릭의 성공은 하나의 신화처럼 보입니다.


물론 말릭의 성공은 감옥이라는 이름의 사회를 학교로 영리하게 이용한 사람의 신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민자들에게 별다른 기회를 주지 않고 범죄의 길로 내모는 사회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초반에 사르코지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물론 거기서 그는 이민자를 탄압하는 행동를 저지르고 계십니다. 이런 점들에서 이 영화는 [대부]나 [아메리칸 갱스터]하고 비슷한 테제를 지니고 있지만, 이 영화는 좀 더 싸늘하고 냉철합니다. 프랑스 영화스럽다고 할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의외로 프랑스 영화의 한계점이였던 장광설이나 피로함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재미있습니다. 거친 욕설과 사근사근함을 넘나드는 대사도 잘 쓰여졌고, 관객을 마하 펀치를 두들겨대는 박력도 리드미컬합니다. 영화적 자의식이라는 부분도 좀 있긴 하지만, 꽤 효과적으로 써먹고 있습니다. 페이스 조절도 잘 되어 있고 이야기의 매력도 상당합니다. 한마디로 빈틈 없는 날렵함과 고급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꽤나 독하게 관객을 밀어붙이는 영화지만 안식처같은 순간들도 있습니다. 말릭이 죄책감의 괴로워하는 환상 장면, 예언의 능력이 드러나는 부분, 비행기를 타며 창 밖을 보는 말릭의 표정, 바다를 거니며 신발의 모래를 터는 장면, 의형 아이의 대부가 되어 아이와 함께 놀기... 이 장면들은 말릭이라는 캐릭터의 순수함과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관객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줍니다. 오디아드는 이 장면들을 통해 프랑스 영화의 시적 리얼리즘 전통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알렉상드르 데스쁠랑 슨샘은 개인적으로 참 존경하는 음악 감독 중 한 분인데... 이 영화에선 브라이언 이노나 맥스 리히터 같은 앰비언트 신시사이저와 몽롱한 현악 같은 재료들을 적은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시규어 로스나 토크 토크(어떤 장면인지는 기억은 안나는데 썼다고 합니다.) 같은 기존 음악들을 활용한 장면의 음악 구성도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시규어 로스 음악이 등장하는 부분의 편곡은 정말 절묘하더라고요.

[예언자]는 여러분들이 상상할수 있는 최상급의 범죄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대부]나 [이스턴 프라미스],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같은 지방 하나 없는 다크 포스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위대한 범죄 영화가 세상과 삶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다면, [예언자]는 그 위대한 범죄 영화 계보에 들만한 영화입니다. 비록 감동과는 살짝 거리가 멀지만 숨 멎는듯한 순간들은 그 거리를 채우기에 충분합니다. 2009년 칸느의 선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여지없는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입니다.

P.S.1 meff에서 봤습니다. 극장 환경이 썩 좋지 않은지라(스크린은 존내 거대했을 뿐이고, 맨 앞 자리였을 뿐이고, 극장 안이 더웠을 뿐이고), 마지막에 가서는 꽤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영화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몰입하기 힘들더라고요. 개봉하면 다시 보러갈 생각입니다.
P.S.2 자크 오디아드 감독의 음악 취향은 포스트락 쪽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레딧 보니 토크 토크가 두 곡씩이나 들어가 있더라고요. 토크 토크 팬인가?
P.S.3 정식 수입됬습니다. 다만 자막 번역이 홍주희였던걸로... 아 망했어요.
P.S.4 모티브가 프리즌 브레이크라고 하더라고요. 오홍... 오디아드 감독님은 미드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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