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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1950년대영화 (5)
뮤직 룸 [Jalsaghar / The Music Room] (1958)

사티야지트 레이의 데뷔작인 아푸 삼부작은 네오 리얼리즘에 기반한 성장기였다면, 그 이후 영화들은 그 틀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동료들이 그랬듯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붙들려는 영화적 시도와 개성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든 네번째 영화 [뮤직 룸]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쇠락과 닮아간다. 이 영화는 아푸 삼부작처럼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하기엔 형식적인 매혹이 어른거리며, 양식화된 비극이라고 하기엔 인도를 위시한 아시아의 근대화와 구세대의 몰락이라는 현지의 화두를 잡고 있다. 어느쪽이든 사티야지트는 [뮤직 룸]을 통해 평생을 추구할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상징과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음악실이 등장하는 이상,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서민이 아닌 유한계급의 사람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할 것이다. 이야기는 1920년대 인도에서 시작한다. 후주르 로이는 귀족 자제의 후예다. 그는 생활력이 없고 음악실에서 인도 전통 음악가들을 불러 소일한다. 하지만 잘못된 영지 경영과 더불어 서구 문명에 보수적인 후주르의 행태는 그를 점점 몰락의 길로 몰아넣는다. 이웃집 사채업자인 마힘 강굴리는 그 틈을 노려 빠르게 성장하지만, 후주르는 그의 성장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사실 연대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비스콘티에게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아직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고저택에 들어가지 않았던 시절이다.), [위대한 앰버슨가]라던가 영국 고딕 소설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원작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사티야지트와 원작자 타라상카 밴디오파댜아이가 어떤 의도로 이 이야기를 끌어왔는지, 인도 문학에서 이런 주제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애매한 추측에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다만 후주르 로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점들이라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영지의 음습한 분위기, 신화적인 몰락은 식민지 시절 수입된 영국 고딕 문학에 등장하는 몰락한 시골 귀족에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는건 분명하다. 서구 문명에 대해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티야지트 본인 역시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직 룸]의 기이한 매력은 단순히 서구 문학 전통의 충실한 이식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인도 문화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일지도 모르겠지만, 후주르 로이의 몰락은 영국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비논리적인 박력으로 진행된다. 후주르의 아들과 부인이 사망하는 순간 절제된 샷은 되려 불안감을 스멀스멀 퍼트리며, 아무도 없는 음악실을 쓸쓸히 머무르는 후주르를 덩그러니 보여줄때 카메라는 후주르의 절망을 샹들리에와 같이 모조리 퍼올려낸다. 후주르가 음악실에 슨 거미줄을 건져내는 샷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폐허에 대한 매혹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평범해야 할 샷을 환각처럼 만들어버린다. 이 모든 것을 보여줄때 사티야지트는 흑백 영화의 음영을 마치 판화처럼 사용한다. 형식으로 보면 [뮤직 룸]은 예정된 몰락에 대한 공포를 그리는 공포 영화나 다름 없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있다. [뮤직 룸]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사기일 것이다. 사티야지트가 음악실을 채우는 음악은 쉐나이를 비롯한 벵갈 전통 음악이다. 영화 속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타블로와 시타르 소리는 드론 음악 특유의 정적인 흐름과 울림이 있다. 사티야지트는 드론이 가지고 있는 음향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연주 장면을 찍을때 느린 줌인과 고정된 카메라는 마치 연주자가 영원히 연주할것마냥 그 순간을 담아낸다. 그때만큼은 [뮤직 룸]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후주르의 심상에 공감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샹들리에 위에 깔리는 시타르 소리는 그 점에서 [뮤직 룸]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면 추나 다름없다.

그러나 [뮤직 룸]은 후주르의 심상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후주르를 다룰 때 사티야지트는 냉정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3시간이 아닌 100분이다. 간결하다면 간결한 러닝타임이다. 비극적인 몰락을 다루지만, 사티야지트는 후주르를 다룰때 그가 현실적으로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제시한다. 하인, 부인, 심지어 정부나 그가 경멸하는 강굴리 가까지... 하지만 후주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음악실에서 멋진 전통 음악들을 소개하고 향유하는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지주의 운명이라고 자기합리화한다. 그 자기합리화의 허약함이 드러난다는건 명백하다. [뮤직 룸]은 사티야지트는 후주르의 인도 전통 예술에 대한 집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의 몰락을 가차없이 밀어붙인다. 어떨땐 지나치게 혹독하다 싶을 정도다.

자연히 [뮤직 룸]은 양가적일수 밖에 없다. 우리는 후주르의 몰락을 그러게 왜 저런 멍청한 선택을 하나, 싶은 심정으로 보면서도 그가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매혹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은 거부하기 힘든 법. 실상 사티야지트는 강굴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그의 영악한 처세술은 인정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예술엔 공감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강굴리의 음악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뮤직 룸]에서 사티야지트는 근대 문명과 전통 문명 사이에서 상반된 인물들을 배치하고 고민한다. 그 고민은 아시아가 맞이해야 했던 고민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은 구시대의 종말이다. 후주르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고집의 결과이지만, 기이하고도 장엄한 몰락이기도 하다. 그는 예정된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 화려하게 선형적인 몽타주를 흐트러트리고 죽는다. 불꽃처럼 불타오르는 결말을 정리하며 사티야지트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수 없더라도, 후주르는 쉽게 타자화할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후주르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돈키호테적인 사랑은 정녕 가치 없었던 것일까? 그의 비극이 시대와 전혀 연관 없는 것일까? 후주르는 그 점에서 인간적인 결함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캐릭터다. [뮤직 룸]은 그 인간적인 결함과 시대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몰락의 애잔함을 정교한 영화적 형식과 맞물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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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

꿈결같다.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절로 터져나올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현란한 초원의 초록색과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 푸른 하늘, 돌담... 어떤 평론가는 굶주리고 추운 여행 끝에 도달한 낙원이라고 말했는데, 테크니컬러에 담긴 아일랜드 이니스프리를 보노라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여기엔 어떤 한치의 황량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존 포드는 그 황홀한 전원에 도착한 사나이를 보여준다. 그렇다. 그는 숀 손튼이며 동시에 서부 사나이로 유명한 존 웨인이다. 서부극의 거목인 두 존은 이렇게 아일랜드로 왔다. 포드와 웨인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는 뿌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맞이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덕목으로 생각할법한 무덤덤한 익명성 따윈 없는 사람들이다. 활짝 웃으며 새로 도착한 손님에게 떠들썩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어찌보면 주책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박력에 숀은 살짝 정신이 혼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숀은 그게 마냥 싫지 않다. 이 도입부는 [말 없는 사나이]의 중요한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 없는 사나이]를 이끌고 가는건, 작지만 분명한 사람들의 흐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숀을 관광객으로 생각하지만, 숀은 이 이니스프리에 살려고 도착했다는건 명박하다. 숀은 역을 떠나 앞으로 살 집으로 간다. 이때 [말 없는 사나이]는 매우 아름다운 첫 만남 시퀀스를 준비한다. 양 떼를 끌고 가다가 시선을 돌리는 마치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는 평이하면서도 독특한 흐름을 구체화해내고 있다. 숀이 메리를 바라보자 샐쭉한 인상의 메리가 고개를 휙 돌린다. 둘은 이내 제 갈길을 가지만 숀의 샷과 메리의 샷이 만들어내는 몽타주는 신비로우면서도 유쾌한 활기를 띈다. 

숀은 수다스러운 아일랜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메리와 그 오빠인 레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숀 가문의 옛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레드는 숀이 들어와 사는 상황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사사건건 숀에게 시비를 걸며, 아일랜드식으로 일대 일 격투를 벌이자고 한다. 한편 메리는 결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재산을 가져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긴다. 이를 보듯이 알 수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일랜드의 느긋한 마음씨를 대변한다면, 메리와 레드는 미국인인 숀이 알아야 하는 아일랜드의 풍습이다. 메리와 숀의 결합은 이 아일랜드의 풍습을 거쳐야 이뤄질 수 있다.

[말 없는 사나이]는 큰 서사 없이 일련의 유쾌한 소동극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숀과 메리의 결합이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포드는 그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다. 포드는 서부극의 전제를 가져와 아일랜드라는 지역에서 익살스럽게 패러디한다. 총잡이의 대결은, 마을 축제와 술이 끼얹어진 주먹다짐으로 넘어가고 근심이 가득찬 마을 사람들은 이제 신이 나서 주먹다짐을 지켜본다. 수줍지만 이뤄질수 없었던 서부 사나이와 마을 처녀의 연정은 휘몰아치는 바람 안에서 격정적인 몸언어로 표출된다. 바람이 불어닥치는 숀의 집에서 메리과 숀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말 없는 사나이]의 격한 바람과도 같은 영화적 매력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플롯이 없는 [말 없는 사나이]를 일관성 있게 묶는 건 군중의 힘이다. 킹 비더의 [군중]이 그랬듯이, [말 없는 사나이]는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의 힘이 매력적인 영화다.  하지만 [군중]에 등장하는 군중이 도시의 익명적인 흐름을 담아냈다면, [말 없는 사나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시골 커뮤니티의 매력이 크다. 이 커뮤니티는 뿌리로 돌아온 미국인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가 낯설어하는 풍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 미국인이 어떻게 조용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건을 만드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본다. 이 미국 영화의 절정을 이끌고 가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쇼트가 장소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뻔뻔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활기다. 이 부분에 이르면 [말 없는 사나이]는 버스터 키튼과 같은 무성 활극 영화와 같은 매력을 태연히 과시한다.

[말 없는 사나이]가 흥미로운 점은, 그런 소탈하면서도 낙천적인 풍습과 이상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히로인인 메리가 그렇다. 얼핏보면 서사의 흐름에 따라 숀이라던가 레드의 가부장적 체제에 순종적으로 편입될 것 같은 메리는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메리는 자신의 재산을 숀의 집으로 가져오는걸 상당히 중요히 여긴다. 그리고 메리의 고집을 숀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격하게 화를 낸다. 메리에게 그 풍습은 자신의 존재 의의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숀은 메리와 이어지기 위해서는 순종시키는게 아니라, 이해와 설득을 거쳐야 한다. 아일랜드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으로써는 추측의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커뮤니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 관심을 가졌던 포드다운 전개라 할 수 있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서 페미니즘적인 묘사를 읽어낸 평론가도 있다는 것도 첨언하고 싶다.)

물론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드는 은근슬쩍 서부극의 어둠을 영화 속에 이끌어온다. 숀이 레드랑 싸우길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할때 포드는 단발적인 플래시백으로, 숀이 왜 아일랜드로 와야만 했는지 설명한다. 미국에 오기 전 권투 선수로 활동하던 숀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룰이 있는 스포츠였지만, 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폭력에 이골이 난 사나이며, 폭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를 느낀다. 숀의 과거는 존 포드의 내심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포드는 숀을 아일랜드로 데려와 백인 사회에서도 천민 취급 받았던 아일랜드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긍정성으로 치유한다. 레드와 싸움을 통해 숀은 자신의 주먹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커뮤니티에 포함될 수 있다는걸 확인한다.

[말 없는 사나이]는 황야 너머로 사라진 서부 사나이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다. 존 포드는 숀을 거기다 내려다 놓고 더 이상 총질은 필요없고 이젠 정말 행복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이니스프리 커뮤니티가 말이 되는가를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냉소를 신경쓰지 않는다. 말이 되던 말던,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고 때론 납득이 잘 안 될지도 몰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선량함을 포드는 믿는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숀과 메리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의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길 기원하게 된다. 그동안 서부극을 통해 울적하게 서부 총잡이의 소멸을 얘기했던 존 포드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는 정말 기적과도 같다. 그 점에서 [말 없는 사나이]는 포드 영화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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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 / Night and Fog] (1956)

알랭 레네는 경력의 시작을 몇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했다. [밤과 안개]는 그 시절 레네에겐 가장 중요한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초창기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 중에서 논쟁적이고 도발적으로 역사와 기억을 물었고 그를 주목받게 만들었다. [밤과 안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했는지 얘기해야 할듯 하다. [밤과 안개]는 1955년 프랑스 및 강제수용소 해방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전시 [저항, 해방, 추방] 기획에서 출발했다. 전우회는 영웅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원했지만, 기획 주최자들은 그보다 더 급진적인 형태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였다. 제작자들도 물론이고 당시 갓 다큐멘터리 몇 개로 이름을 알린 레네 자신도 유대인이나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아니였기에 이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처음엔 감이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진짜 생존자인 장 카이롤이 이 기획에 참여하고 예상치 못한 폴란드측 기록 자료의 등장으로 [밤과 안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무시무시한 이유는 중심이 되는 두 이미지 사이에 어떤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밤과 안개]는 비극이 이미 끝난 장소에서 시작한다. 제작진이 카메라를 들고 간 아우슈비츠엔 버려진 건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사건. 레네와 마르케, 카이롤은 사건이 끝나고 없는, 현실에서 영화를 출발한다. 너무나도 평온한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관객에게 질문한다. 여기가 우리가 봤던/알고 있는 그 끔찍한 아우슈비츠를 맞습니까?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엔 기획 도중 홀로코스트 10주년 기념 행사에 갔다가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두 기획자 올가 보름스-미고와 앙리 미셸의 시선도 담지된다. 

이 질문에 이어 세 사람은 폴란드에 운좋게 남아있었던 홀로코스트 자료 화면들을 끌어올린다. 그 자료들은 매우 끔찍하다. 아마 보다가 충격받고 울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자료 화면들은 날 것 그대로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준다. 실제로 카이롤 역시 영화를 만들던 도중 이 영상들을 보고 PTSD가 재발해 괴로워하며 편집실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이미지들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연출이나 조작이라는 알리바이 없이 무의미한 죽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도망칠 구멍이 없다. 화면 위에 일어난 죽음은 화면 밖에서 정말로 일어났고, 다시 돌이킬수도 없다. 엔터테인먼트로써 죽음을 한창 넘어서버린, 스너프 필름이나 범죄 현장 사진이나 다름없다. [밤과 안개]는 고통과 무의미로써 폭력과 죽음이 넘쳐난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그 무의미한 죽음을 지시한 사람들의 얼굴과 광기 역시 장르화나 허구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감정적 사도마조히즘이나 포르노로 빠질수 있는 자극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레네를 비롯한 제작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미지를 선정하고 배열하는데 앞장섰던 레네는 그 이미지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록'이다. 흩어져있던 자료들을 하나의 몽타쥬로 구성한다는 것. 영상 구성을 담당한 레네는 이 영상들이 언젠가 사라질까봐 근심하면서 몽타쥬를 짠 게 분명하다. 레네는 [밤과 안개]라는 제목으로 절박하게 자칫하면 사라질뻔한 끔찍하지만 귀중한 이미지를 하나의 영화로써 포섭하고 기록한다. [밤과 안개]는 현실에서 카메라를 들이대 이미지를 채집한다는 다큐멘터리적 행위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홀로코스트를 기록한 이미지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등치되고 있다. [밤과 안개]는 아직 전쟁이 잊혀지지 않은 그 시절, 잊으려고 하는 현실 속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영화의 몸에다 자신을 새겨넣고 있다.

레네는 이 이미지들을 평온한 수용소 유적지 촬영 현장과 배치한다. 그 순간 평온한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는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우리는 영화 속 자료 화면 속에서 그 현장을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화면이 레네가 가져온 이미지와 겹쳐지는걸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고통과 무의미로 가득한 폭력을 홀로코스트 유적 이미지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되며, 동시에 그 자료 이미지의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남아있는 유적 이미지들은 더욱 끔찍하게 인류사가 낳은 비극의 순간을 장식하는 증인이 된다.  [밤과 안개]는 변증법적 논리를 통해 사건이 지나간 자리와 사건을 기록한 이미지 간에 만남을 추구하면서 그 이미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밤과 안개]에서 두 이미지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여기서부터는 장 카이롤과 크리스 마르케의 공이 크다. 이 둘이 참여한 나레이션이 두 이미지를 묶고 있다. 카이롤과 마르케의 나레이션은 상술했던 부재의 풍경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그 부재의 풍경이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죽음과 폭력이 있다는걸 주지시킨다.  시적인 언어로 구사된 나레이션은 그 점에서 은폐된 폭력과 공포를 부재하는 공간에서 길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냉정한 시적 언어로 두 이미지 간에 존재하는 '부재'와 '존재'를 채워가며, 그 당시 있었던 상황과 생존자의 기억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시적 언어를 읽는 미셸 부케의 나레이션은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5월], [환송대]나 [태양 없이]로 이어지는 마르케의 이후작에 등장하는 기억과 이미지, 장소 간의 사유는 이미 [밤과 안개]에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 말은 알랭 레네에게도 적용된다.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과 [지난해 마리앵바드] 등에서 찾고자 했던  '기억'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그걸 영화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역시 여기서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이 냉정하게 쓰여진 시는 동시에 불의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격렬한 고통, 더 이상은 이런 비극은 안 된다는 절박한 꿈틀거림을 품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선언이다. 당신들은 정말로 이 비극이 없었다고, 비극 전날처럼 살아갈 것인가? 그 없음을 비극 이전의 없음처럼 기만하며 살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피해자는 뭐가 되는가? [밤과 안개]는 어떻게든 과거를 잊은 척 살고자 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통렬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밤과 안개]에서 가장 먼저 호명되는 이들이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 ("독일의 노동자, 뷔르거 암스테르담의 유태계 학생 슈테른 크라코우의 상인, 슈믈스키 보르도의 여학생 아네트 등은 각자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수천 마일 거리에 그들을 수용할 곳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라는건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 피해자들이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분노, 고통에 대한 이해와 연대, 반복하지 말자는 결기가 [밤과 안개]를 위대한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인류는 [밤과 안개]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고,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고 울 수 있다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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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お早よう / Good Morning] (1959)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이나 [동경 이야기]로 대표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즈 야스지로 영화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는 영화다. [동경 이야기]로 스타일의 완성한 오즈는 [이른 봄]부터 초기작들을 다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놓고 [부초이야기]의 리메이크를 자처했던 [부초]랑 동시기인 [안녕하세요]는 전후에 만든 [태어나기는 했으나]에서 다뤘던 아이들로 다시 돌아온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를 [태어나기는 했으나]의 느슨한 리메이크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안녕하세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로써는 최첨단 문물이었던 텔레비전이다. 이웃집 신식 문물을 텔레비전에 환장한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어떻게든 텔레비전을 집에 들여놓고 싶어하지만 엄격한 그들의 부모님은 거부한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침묵하는 것으로 반항하고 이 와중에 미노루와 오사무 주변의 친구들과 어른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우선 다른 오즈 야스지로 영화들도 그렇지만, [안녕하세요]를 보는 관객들이라면 어떤 강력한 구조가 영화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첫 두 컷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으례 그래 왔듯이 지금까지 꾸준히 개척해왔던 필로우 샷과 정물 샷으로 영화의 확고한 구조를 세운다. 두 집의 지붕 처마를 이용한 프레이밍 위에 등교하는 아이들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진행되는 공간과 인물을 모두 설명해낸다. 이 장면의 정교함과 치밀함은 무서울 정도다. 기본적으로 이웃한 집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동선이 많은 영화인데, 오즈는 철저히 다다미 쇼트을 기반으로 문 프레임과 그 곳을 오가며 대화하는 인물의 동선을 맞춰서 프레임을 짜고 있다. 스타일면에서 완숙한 시절의 영화답게 [안녕하세요]는 넉넉한 인심과 달리 치밀하기 그지 없다.

재미있는것은 [안녕하세요]에서는 그 치밀한 구조를 이탈하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정확하게 뭘 지시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도구'에 가까운 존재들이였다. 하라 세츠코나 류 치수 같은 오즈의 대표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들은 오즈 영화 속에서 비슷비슷한 표정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얌전하며 예의바르며, 가끔 감정을 표출한다 해도 단아하게 정리해낼줄 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초인적으로 현명하다. 그렇기에 오즈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친숙한 현명함에 안도감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오즈가 강력하게 믿는 세계 법칙의 일부로써 행동한다.

하지만 [안녕하세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비교적 자유롭다. 미노루와 오사무 형제는 반복되는 인사말로 대표되는 오즈의 세계를 한심하게 여기며, 자신이 욕망하는걸 얻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반항한다. 그들은 명백히 오즈의 우주를 이루는 세계의 법칙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반항한다. 이는 유성 영화에 대한 무성 영화적 반항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좋은 날씨네요' 같은 발화를 우습게 여기며 방귀를 끼는 간단한 행위에 즐거움을 느끼며, 어쩔수 없이 말을 할때조차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유성영화적이기 보다는 무성영화적이다. 찰리 채플린 같은 무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무성영화적 유머는 비단 아이들에게만 발견되는게 아니다. 미츠에가 식칼을 들어 세일즈맨의 연필을 깎는 장면은 아마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장 웃긴 장면일 것이다. 여기엔 오즈 자신의 셀프 패러디도 담겨 있다. 아이들의 이마를 누르면 방귀를 뀐다는 설정 자체가 반복되는 오즈 영화 특유의 반복되는 구조를 연상케하지 않는가? 심지어 오즈는 친절하게 한 아이는 똥을 지리게 한다. 

[안녕하세요]는 다른 오즈 영화들보다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한쪽엔 TV와 서양 잠옷을 입는 부부가 사는 집과,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사는 아파트로 대표되는 서구식 공간이 있으며 다른 한 쪽은 다다미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서민의 공간이 있다. [안녕하세요]의 전개 대부분은 미노루와 오사무가 문명의 이기 때문에 두 공간을 왔다갔다하면서 이뤄진다. 흥미롭게도 미노루와 오사무는 설정상 학교를 다니는 연령대의 아이들임에도 이 영화에서 학교는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한다. 두 공간의 대조를 집중해달라는 의도 때문일까?

이 대극을 이루는 두 축은 세대라는 문제도 반영되어 있다. 아마 [안녕하세요]는 류 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상이 완고한 가부장으로 출연하는 얼마 안되는 영화일 것이다. 류치수가 연기하는 아버지 케이타로가 미노루와 오사무를 혼내는 장면은 오즈 영화 중에서도 가부장성이 드러나는 장면일 것이다. 노리코 삼부작에서 류치수는 온화하고 현명한 노인이라면, [안녕하세요]의 케이타로는 현실에 찌든 모습이 강하다. 이런 찌듬은 케이타로 뿐만 아니라, 해고 뒤 쓸쓸히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는 토미자와라는 캐릭터로 잘 드러나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녕하세요]는 노리코 삼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명백한 균열이 영화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것은 상술한 세대 간의 갈등이기도 하고, 새로운 문물과 그걸 향유하는 자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하고, 시대의 흐름을 못 쫒아가는 자의 낙오이며, 소통의 엇갈림으로 발생하는 오해기도 하다. 때론 그 균열은 비등점까지 치닫는다. 아무것도 모른채 미노루와 오사무가 갉아먹는 주축돌에다 쥐약을 발라놓는 계획을 하는 타미코라던가, 엉뚱한 오해로 이웃들이 뒷담화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오즈 영화답지 않은 아슬아슬함이 있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그 균열을 극한으로 밀고 가지 않는다. [안녕하세요]는 초반부에 세워졌던 세계를 이루는 구조에 대한 강력한 믿음으로 이내 다른 오즈 영화들처럼 그 균열을 금세 메꾼다. 다만 [안녕하세요]는 그 균열을 메꾸는 자는 전작들처럼 현명한 인물이 아니라, 중재자다. 오즈는 이 균열을 메꿀 자로 아이들의 영어교사인 헤이이치로를 내세운다. 그는 서구식 아파트에 살며, 영어라는 신문물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어른이다. 그는 아이들의 방귀 농담을 바보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두 형제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요컨데 헤이이치로는 아이들의 세계를 떠났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줄 아는 사람이다.

헤이이치로의 중재로 소동이 끝난 후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초반부의 안정된 구조로 돌아간다. 미노루와 오사무는 약간의 꾸지람을 듣고 그렇게 원하는 텔레비전을 얻고, 직장에서 밀려난 세일즈맨 토미자와는 새로운 직장을 얻는데 성공한다. 이웃들도 어느새 오해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 역시 그런 일상 속에서 일어난 유아적인 욕구 해소다. 정밀하게 구성된 프레임 속에서 공간과 인물 간의 관계가 강조되는 와중에 정곡을 찌르지만 넉넉한 인심을 품은 유머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안녕하세요]는 자크 타티의 영화랑 닮아있는 영화기도 하다.

대체 그런 균열마저도 품어안을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곳일까? 그 믿음의 단서은 영화의 제목인 '안녕하세요'에서 온다. 아이들의 투덜거림을 인정하면서도 오즈는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일견 단순한 인사조차도 분명 의미가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오즈는 그 의미의 아름다움을 헤이이치로를 통해 보여준다. 일련의 소동이 끝난 후 헤이이치로와 미노루 형제의 이모인 세츠코는 승강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그들은 그러나 고백 대신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인삿말을 한다. 하지만 이 인삿말이 무의미한 인사가 아닌 어떤 관계의 시작이라는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이다.

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형제 중 오사무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마무라 쇼헤이의 [니시긴자역 앞에서]에서 출연한 바 있다. 오즈가 그 영화를 보고 오사무에 캐스팅했을지는 전적으로 역사가의 몫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의식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마무라가 반 오즈주의자였다는걸 생각해보면, [안녕하세요]에서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을 품어안는 방식은 후배들이 일으킨 쇼치쿠 뉴웨이브에 대한 답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즈는 "'안녕하세요'가 무의미하다."는 후배들의 도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오즈는 분명 그 안녕하세요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안녕하세요'는 오즈의 성찰과 더불어 오랫동안 구축해온 영화 언어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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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번의 구타 [Les 400 Coups / The 400 Blows] (1959)

만인이 인정하는 영화사의 고전을 리뷰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발굴도, 동시대적으로 뛰어난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는 다르게 굳건한 비평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비슷비슷한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블로그가 참신한 해석을 노리는 그런 블로그는 아니지만, 그래도 동어반복은 흥업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얘기할때도 비슷한 얘기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시초 중 하나로 감독의 자전적인 성장기를 다뤘으며, 현장 로케이션으로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넣어..." 이런 얘기를 리뷰에다 늘어놓는건 따분한 일이다.

물론 이 영화가 선취한 영화적 테크닉은 그 어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 전후 네오 리얼리즘에서 영화의 길을 발견한 고다르와 트뤼포가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벗어나 현실 공간에 배우를 세우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댔을때, 네오 리얼리즘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은 단순히 파괴된 현실에 대한 고찰 이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 젊은 비평가들이 만든 영화가 고전이 된 이유는 그들이 서 있는 현재 (60년대 프랑스)를 재구성하는 허구적 영화가 사운드 스테이지라는 인공적인 세트 바깥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는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랑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비교하자면, 처음부터 그들의 결별은 예정된 것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400번의 구타]는 [네 멋대로 해라]랑 비교하면 작지만 분명한 형식적/내용적 차이가 있으며 이 차이는 후기작으로 갈 수록 명확해진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네멋대로 해라]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고다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고다르의 다른 영화들처럼 [네 멋대로 해라]는 머리와 영화광적인 취향으로 설계된 영화다. 지극히 모범적인 갱스터 영화에서 시작해 자의적으로 자르고 배치된 컷들로 내용 자체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마지막엔 전혀 엉뚱한 감흥으로 마무리짓는 이 영화는, 고다르 자신이 펜과 머리로 줄곳 상상한 영화가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캐릭터는 쉽게 감정이입하기 힘들었고, 그들의 수다는 서사와 관계 없는 부분도 포괄하고 있었다. 이후 고다르는 한동안 서사마저 포기하면서 서구 지성과 영화사에 대한 통찰을 영화의 언어와 구조에 접목시키는 급진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온갖 영화적 실험을 거쳐온 지금 관객들에게 [400번의 구타]는 낯섬보다는 친숙함을 받게 된다. 트뤼포의 자의식과 형식은 신선하고 매력적이지만 영화의 주체인 앙트완 드와넬이 느끼는 감정과 현실에 앞서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순진할 정도로 솔직한 고백이다. 앙트완에게 세상은 고통스럽고 학교 생활은 재미없으며 영화만이 그를 위로해줄 따름이다. 하지만 영화조차 위안해주지 못하는 현실의 엄혹함은 그를 사회 변두리로 내몬다.

이런 쓸쓸하고 처량한 감수성은 개별 샷들에서도 감지된다.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서 눈을 반짝이는 앙트완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여주는 샷부터 거리에서 엄마가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걸 목격하는 샷, 전설이 된 마지막 결말의 프리즈 프레임까지 모든 샷의 주체는 앙트완이며 트뤼포는 고다르와 달리 감정과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 영화적 기교를 활용한다. 트뤼포가 꽤 솔직한 감독이고 앙트완 역시 숨기는게 없는 캐릭터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앙트완을 통해 드러난 트뤼포의 불우한 시절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400번의 구타]의 공간을 살펴보면 크게 몇가지 부류로 나눠지는걸 확인할 수 있다. 집, 학교, 청소년 보호소로 대표되는 억압의 공간, 도시로 대표되는 해방의 공간, 그리고 마지막 축 쳐진 얼굴로 돌아서는 해변가. 이 공간들을 오가며 트뤼포는 우울했던 과거 속에서 해방감을 찾아낸다. 초창기 트뤼포나 고다르는 달리기라는 행위에 매료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는데,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국외자들]이 그랬고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역시 달리기의 해방감이 가득한 영화다. 앙트완이 친구랑 학교를 땡땡이 칠때 신나는 템포로 질주를 담는 부분을 통해 트뤼포는 억압의 공간에서 해방의 공간으로 이동할 때 생기는 특유의 운동감을 주목한다. 그 점에서 오프닝에 등장하는 차를 타고 찍은 파리 정경은 영화의 해방감을 암시하고 있다.

트뤼포는 이후 자기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이 영화를 보고 열심히 토론하는 서사랑 하등 상관없는 장면을 굳이 집어넣는 연출을 보이는데, [400번의 구타]는 그런 트뤼포의 영화광적 고백의 첫 머리에 있는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트뤼포가 [400번의 구타]에서 주인공들에게 보여준 영화는 고전 영화가 아닌, 훗날 나오게 될 자크 리베트의 데뷔작 [파리는 우리의 것]이다. 이후 트뤼포 영화들의 영화 인용이 고전 영화에 치중해있다면 [400번의 구타]에서 선택한, [파리는 우리의 것]은 여러모로 누벨바그 세대의 자신만만함을 선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작 리베트의 [파리는 우리의 것]이 그리 희망적인 내용은 아니였다는걸 생각해보면, '파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제목은 [400번의 구타]에 어울릴법한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400번의 구타]는 지금 봐도 당혹스러운 구석이 있는 차기작 [피아니스트를 쏴라]처럼 장르 실험에 몰두한 영화도 아니고, [아델 H.의 이야기]나 [미시시피의 인어]처럼 중후기작들처럼 고전적이다 싶을 정도로 안정된 서사와 연출이 정신나간듯한 로맨틱한 감정과 대조로 이루며 기이한 순간을 만드는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400번의 구타]는 소박한 성장 영화의 고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영화적 언어를 막 완성한 자의 기쁨과 희열을 맛볼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런 작품은 인생에서 한 순간 밖에 만들지 못한다. 아마 앙트완을 주인공을 내세우며 차기작을 만들어댄 트뤼포도 알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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