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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1960년대영화 (8)
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서 어떤 유사성과 감정을 잡아내느냐이다. 레네는 그 사실을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과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보면서 배웠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여행]과 [스트롬볼리]를 통해 픽션을 연기하는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담긴 이탈리아 시골을 영화 속에 배치하면서 영적인 구원과 낯섬이라는 감각을 이끌어냈다. 한편 바르다는 라 푸앵쿠르트를 여행하는 현대적인 성 규범을 받아들인 젊은 여행자 커플의 픽션적 시점과 가부장적인 삶을 사는 라앵쿠르트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다큐멘터리적 관점을 결합하려고 했다. [밤과 안개]는 네오 리얼리즘과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레네와 마르케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앙드레 바쟁은 크리스 마르케가 '밤과 안개' 이후 1958년 내놓은 데뷔작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기행문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영화에 의해 다큐멘트된' 에세이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바쟁이 지적한 병렬 편집은, '밤과 안개'가 크리스 마르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를 편집하면서 도입한 두 개의 시공간의 병렬적 배치는 특정 공간에 속한 개인이 다른 시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와 [석상 역시 죽는다]에서 도입했던 병렬 편집의 가능성을 픽션의 영역에서 실험했다면, 크리스 마르케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발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이후 크리스 마르케를 주목받게 만든 단편은 바로 [환송대 La Jetee]라는 단편 영화였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든 첫 픽션 영상물인 이 영화는 그러나, 활동사진Motion picture가 아니다. 크리스 마르케는 '포토 로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치 사진 슬라이드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그동안 알고 있던 문명이 멸망한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은 한 남자를 찾아낸다. 이 남자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공항 환송대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시간 여행하는 약을 먹게 된 남자는 이미지의 근원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환송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억 이미지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 전체가 멈춰진 사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영화적 샷 구조처럼 배치한다. 이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크리스 마르케는 말한다: "일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보았던 얼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평화의 모습이었다. (중략) 다가올 광기를 버텨내기 위해 부드러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일까?" 라카프라식으로 말하자면 환송대의 남자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1차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1차 기억 직전에 있던 여인의 얼굴이라는 파생된 1차 기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그 1차 기억을 쫓아가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남자가 시간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의 과거에서 여자는 한 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남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기억은 온전히 보존할수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여자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자는 남자를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는데, 반대로 보자면 여자야말로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가 사는 파괴된 현재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여자를 찾지 않는다. 대신 약과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SF 장르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1차 기억의 순간으로 돌아가 자기 방식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여자로 대표되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려는 남자의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도는 분절적인 순간들로 표출된다. 홀린듯한 만남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조각난 채로 남자의 체내로 흡수된 뒤, 재구성된다.

마르케는 이 디테일이 확장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향성과 겹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 담긴 파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5월]이 그랬듯이)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표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환송대]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횡단면이다. 1960년대가 지나가버린 미래에 살고 있는 관객은 그 시절과 함께 호흡할 수 없지만, 크리스 마르케가 35mm 필름 위에 남긴 사진을 통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박물관 시퀀스는 즉물적으로 남아있던 트라우마의 기억을 스스로의 선택과 만남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남자, 나아가 영화의 의도를 은유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진들은 SF 픽션 장르인 디스토피아라는 틀로써 재구성되고 있다. [환송대]는 1960년대 파리라는 공간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길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는 이전에 있었던 전쟁을 서서히 잊으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현실의 파리, 또 하나는 이미 일어난 가상의 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파리. 이 단편을 보면서 어딘가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를 연상했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마르케는 SF 장르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이 미래의 한 순간이 될수도 있었다고, 혹은 그 역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에 대한 기록이 될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과 관계는 희미해지고,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시적 우울함은 1960년대 파리와 도래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미래를 상상케 한다. 이런 이중화 작업은 후술할 [태양 없이]의 중심이 되는 영상과 음향의 재조립, 기계적 장치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에 큰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결국엔 끊어질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남자는 왜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사에서는 생존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를 조종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겐 의사와 과학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좀 더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생의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다. 연출에서 마르케는 좀 더 흥미로운 이유를 배치해둔다.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이미지의 주인공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자다. 침대에 누워서 미소지으며 카메라/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뤄져 있다.

스틸 샷으로만 이뤄진 영화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남자가 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움직임Motion이 가지고 있는 행복함으로 다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발버둥이다. 파괴된 세상에서 이전에 남아있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집착은, 남자가 여자로 대표되는 과거의 행복함에 어떤 죄책감이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 집착은 영상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광적인 매혹을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마르케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마르크 드 가스틴의 'La Mervilleuse vie de Jeanne d'arc'라는 무성 영화에 출연한 시몬 쥬느비에브라는 배우에 매혹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케의 사진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조선 여인의 얼굴을 담은 사진에 대한 묘사가 있었던 걸 보면, 마르케는 여성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찾았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케는 생에 대한 로맨티시즘적 감상과 낙관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을 담은 생에 대한 발버둥이 좌절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당신 모두 좀비'를 연상케하는 [환송대]의 순환 고리는 우로보로스적 비극이다. 영화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었으며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였다는걸 밝히면서 끝난다. 여인의 움직임이 비극과 파괴의 또다른 1차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때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르케가 생각하는 역사의 비극이란, 결과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과 과정을 바꾸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시간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자는 끝내 미래의 여행자들에 속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지도자들이 보낸 암살자를 통해 과거의 순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라카프라는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순수한 형태로만 이뤄질수 없고 트라우마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2차적일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송대]는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으 이야기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드려는 2차적인 시도를 파괴된 현재가 방해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결말은, 현재에 대한 마르케의 인식이 아도르노적 부정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었던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는 드골 정부의 강력한 우파 정권의 힘 앞에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드골은 표면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우대하고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중요한 자리엔 나치 부역자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했다.

[환송대] 직후 만든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레이션은 "감옥이 있는 한 세상은 행복할 수 없다." 였다.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끝나는 [환송대]의 순환적 비극은 아도르노가 부정성 미학에서 주장했던,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화해되지 않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슬로건과 맞닿아있다. 알제리 전쟁과 과거 인식을 방해하는 내부의 파시즘이라는 당시 프랑스의 부정성은 단 한 순간의 행복에 다가가려고 하는 남자를 암살하는 남자의 시대로 표출되고, 또다른 비극의 순환 고리를 만든다. 마르케는 SF 장르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파괴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떻게 1차 기억과 2차 기억을 재정립하는 시도를 방해하는지 [환송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는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적 틀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으로 기억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그렸으며, [태양 없이]는 기계적 조작을 통한 추상화와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남아있는 시간의 현기증을 포착하려고 했다. 마르케의 시도들은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1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2차 기억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의 찬란한 자유연상적 성과를 이어가려는 시도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유 과정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 동시에 역사/사회적 의미를 잃지 않는 정교한 방법론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1995년 마르케는 역사 게임을 만드는 게임 디자이너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레벨 파이브]라는 작품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또한 말년의 크리스 마르케는 유튜브와 비디오 영상에 관심을 기울여 짧은 클립들을 올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라카프라가 주장했던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며, 이 관계망 전체를 성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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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2017/04/02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2017/09/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멀리서 마차가 다가온다. 제목 타이틀이 뜬 뒤 마차는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숲 속으로 들어온다. 두 남녀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만 다음 샷에서 갑자기 상황은 반전된다. “부드러움이 무슨 소용이죠?”라는 질문을 한 여자는 곧 모욕을 들으며 옷이 벗겨지고 남자는 여자를 벌하라고 마부들에게 명한다. 묶여있는 여자는 맞으면서 애원한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질것 같은 다음 샷에서 여자, 세브린느는 남자 피에르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우리 생각이요.”

조셉 케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루이스 부뉴엘의 [세브린느]의 도입부는 마치 농담처럼 시작한다. 피학적인 상상으로 사랑하는 남편과의 지고지순한 부부 관계를 전복하려는 세브린느의 속내를 피에르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멀쩡한 부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딘가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둘의 대화는 진심으로 위장하면서 문제의 근원에 닿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부뉴엘은 완벽하고 순종적인 부르주아 부부라는 정형적인 관계가 서로를 질식시키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부부는 다음 시퀀스에서 겨울 산으로 놀러간다. 보통 사람들은 겨울 산에서 소복히 쌓인 눈을 생각하지만, 부뉴엘은 한번도 하얀 눈으로 덮인 산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세브린느와 피에르는 눈 내린 마을을 걸어간다. 이때 바닥에 깔린 눈들은 더러워져 있다. 부뉴엘은 흰색의 순결함을 믿지 않는다. 후술할 세브린느의 하얀 옷과 연결해보면 이 눈 내린 마을은 캐릭터가 내세우는 순결함이 세속적인 욕망을 숨기는 커튼에 불과하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 잇송 씨를 만나게 된다. 이때 세브린느는 잇송을 불편해 하며, 잇송은 피에르를 보고 '자네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잇송이 식당을 떠나면서 한 말은 '밤을 맞으러 가봐야 되겠다'다. 그 시퀀스 직후 세브린느는 잇송과 동행했던 친구랑 (의미심장하게도 그 친구는 잇송을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택시를 타면서 앙리에트를 둘러싼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잇송이 보낸 꽃을 꽃고 이동하다가 꽃병을 깨트린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간 세브린느 화장수 병을 다시 깨트린다. "내가 왜 이러지?" 부뉴엘은 이 순간 최면을 건다. 부뉴엘은 무언가 깨지는 행위를 세브린느의 무의식에 등장하는 더러운 배관공에 대한 플래시백과 조응시키면서 이후 이어질 부르주아의 도덕률의 붕괴를 은유한다. 심지어 자신처럼 정숙했으리라 생각했던 피에르조차도 결혼 전에 창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린다.

잇송의 밤을 맞으러 간다는 대사는,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탈피하러 간다는 얘기며 세브린느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세브린느 역시 일탈하고 싶어한다. 이 순간 잇송이 다시 등장하는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순결해 오히려 페티시적인 (눈처럼) 흰 테니스 복장을 한 세브린느 앞에 잇송은, 은근슬쩍 암시했던 자신의 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불편해하는 세브린느에게 잇송은 아나이스의 창관을 알려준다. 남은 건 세브린느 자신의 선택 뿐이다. 물론 부르주아 룰에 순종적인 세브린느는 타락을 거부하려고 한다. 세브린느가 창관 근처에서 서성거릴때 드러나는 망설임은 다시 얘기치않은 플래시백을 불러오게끔 한다. 영성체을 거부하는 세브린느의 플래시백은 가톨릭을 향한 부뉴엘의 세속적인 저항이며, 동시에 보수적인 도덕률을 거부하기 힘들다는걸 드러낸다.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만나게 되고, 매춘을 하기로 결정한다. 아니아스는 세브린느에게 억지로 키스를 하는 것으로 욕망의 문을 여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세브린느가 만난 손님들은 낯설고 두렵기 그지없다. 악랄하게도 첫 매춘이 이뤄지는 시퀀스에서 부뉴엘은 아돌프라는 무례한 부르주아 남성 캐릭터를 데려온 뒤, 남성기와 사정을 암시하는 샴페인을 배치해 얌전하게 살아온 세브린느에게 충격 효과를 가한다. 어렵게 매춘을 마친 세브린느는 앓아누워 부르주아를 만나는걸 거부하고 한동안 매춘업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브린느는 결국 매춘업소로 돌아온다. 어째서일까?

부뉴엘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의 욕망이 영화 전체의 구조를 흔드는데 있다. [세브린느] 역시 루이스 부뉴엘의 뻔뻔스러운 욕망과 서사 구조에 대한 풍자적인 도발이 잘 드러나 있다. [세브린느]는 일단 시공간을 흐트러트린다. 이 영화의 소품들이나 배경은 분명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19세기적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마차라던가, 호화롭지만 공허해보이는 귀족 저택, 세브린느의 집은 이야기의 시공간을 의심케한다.반면 부뉴엘은 텔레비전을 아니아스의 창관에만 배치하면서 현대 문명을 매춘과 동일시시킨다. 19세기적 엄숙한 도덕에 갇힌 현대의 부르주아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창관에서 기괴한 욕망을 배출한다. 

부뉴엘은 매춘과 자본주의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부르주아의 허울과 위선을 조롱한다. 아니아스는 매춘부들에게 매번 예절과 교양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아니아스의 창관이 어떤 가치관으로 움직이는지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의 매춘부들은 처음엔 부르주아에 걸맞는 예절과 교양으로 맞이하지만, 그 예절과 교양은 이내 섹스라는 동물적인 행위 앞에서 벗겨진다. 교수와 샤를로트가 벌이는 SM극 도중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중단과 지속은 부르주아에 내재된 사회적 페르소나와 동물적 욕망의 기괴한 진자 운동을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와 부뉴엘은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이중성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이중성을 지켜보면서 세브린느의 비틀린 욕망은 분절적인 플래시백으로 분출된다. 이 플래시백에서 세브린느의 위치는 상당히 복잡하다. 어떤 플래시백에선 과감히 유리병을 깨는 잇송과 함께 피에르 앞에서 섹스하기도 하며 (NTR!), 어떤 플래시백에선 잇송 씨를 이기고 남성성을 뽐내는 (잇송은 '피에르에게 초콜릿이나 선물하라'고 세브린느에게 돈을 준다. 절대로 독립된 성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다.) 피에르에게 구출받는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명백한 점은 환상 속 세브린느가 아무리 피학적인 위치에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이 플래시백들은 세브린느의 주체적 욕망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플래시백은 중간중간 영화 서사를 가로막고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의 재구성을 유도하게 한다.

앓아누웠던 세브린느가 다시 매춘업소로 돌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춘을 한 세브린느를 묶어두고 피에르가 진흙을 던지면서 매도하는 환상은 여러모로 이중적이다. 이 환상은 순결을 포기하고 세속적으로 군 여성에 대한 징벌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세브린느 자신의 주체적인 피학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에르는 현실에선 세브린느의 피학 욕망을 충족해줄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세브린느는 매춘을 통해 자본가의 이면과 마주해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세브린느는 변한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세브린느는 환상 밖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고 매춘할때 입던 옷을 입고 피에르와 데이트를 할 정도로 변해간다.

[세브린느]의 전환점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모든 점에서 완벽한 피에르의 안티테제다. 아무런 직업 없이 아버지뻘인 히폴리테 (부뉴엘은 이 캐릭터에 은연중에 스페인 망명객이라는 암시를 남긴다.)와 함께 퍽치기 범죄를 저지르며, 등에 새겨진 상처와 빠진 이를 드러내며 여성에게 폭력적인 마르셀은 야성적인 청년 무산자이다. 세브린느의 피학적인 정열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남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마르셀을 묘사할때 부뉴엘은 명백히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셀이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는 개선문 근처며 그 주변에서는 엑스트라가 진 세버그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잘 될 것만 같았던 마르셀과 세브린느의 관계는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메꽃, 오후의 미녀, Belle De Jour. 세브린느는 오후에만 욕망에 충실해질수 있는 불완전한 부르주아의 죄수다. 세브린느에게 매춘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폭력적이고 여자를 소유하려는 마르셀에게 매춘부 세브린느는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존재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아닌 매일의 미녀 Belle de Chaque jour가 되야 한다. 하지만 마르셀의 욕망은 내려치려는 허리띠 앞에서 당당한 세브린느 앞에서 좌절된다. 마르셀이 있는 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될수 없다는 걸 안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떠난다. 아니아스의 억지 키스로 열어젖힌 욕망의 문은 세브린느가 아니아스에게 키스하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기어이 세브린느의 사적 영역에 들어선 마르셀은 진실을 폭로하겠다고 세브린느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던 마르셀은 피에르의 사진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한다. 세브린느가 선택한 욕망의 충족과 통제는 궁극적으로 피에르를 사랑하기 위해서였고, 세브린느와 피에르 사이에서 자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걸 마르셀은 알아버린다. 좌절한 마르셀은 모든 관계를 파탄내고 피에르를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고 마르셀은 마치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미셸 푸가드처럼 롱 숏 속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는다. 부뉴엘은 마르셀을 통해 [네 멋대로 해라]를 패러디하면서 프랑스 누벨바그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남기고 있다. 아마 부뉴엘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프랑스 청년 세대의 좌절과 기득권을 향한 파괴 본능을 잡아냈던 걸지도 모른다.

남은 건 반신불수가 된 피에르와 정숙한 부인으로 돌아온 세브린느다. 이때 잇송 씨가 다시 등장한다. 피에르를 은연중에 깔보고 있었던 잇송은 안타까움을 보이면서 동시에 세브린느에게 대신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한다. 왜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것일까? 잇송은 피에르는 자신에게 헌신하는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자면 세브린느 역시 자신에게 여전히 다정한 피에르에 대해 사랑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되는 것으로 사랑을 유지하면서도 욕망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아냈지만, 결국 엇나가버렸다. 당신이 총에 맞은 이후 꿈을 꾸지 않는다는 세브린느의 고백은 기괴한 순정을 담고 있다.

부뉴엘은 서로를 향한 이 기괴한 헌신을 비웃지 않는다. 잇송에게 사실을 들은 후 눈물을 흘리던 피에르가 일어나는 샷은, 부뉴엘식 현실 파괴지만 조롱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일어난 피에르는 세브린느를 비난하지 않고 대신 휴가를 떠나자고 말한다. 이때 마차 방울 소리가 울리고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말한다. "저 소리 들려요?" 소리를 따라 발코니로 나간 세브린느의 시점 샷 뒤에 이어진 반응 샷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마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마차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세브린느를 향한 반응 샷임에도 가상선이 파괴된 이 샷은, 더 이상 굴절된 욕망과 조응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라진다. 부뉴엘은 세브린느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일탈은 큰 죄가 아니였으며, 그저 왜곡된 부르주아 체제 하에 세속적인 해소 행위에 불과했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세브린느는 욕망의 소리를 피에르와 공유하면서 행복해진다. 이상한 꿈은 끝났고 남은 것은 달콤한 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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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깊은 욕망 [神々の深き欲望 / The Profound Desire of the Gods] (1968)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시작은 바다 생물들의 모습이다. 꿈틀거리는 이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해보인다. 이 위험천만한 생물들은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나라야마 부시코]나 [우나기]가 그랬듯이 이마무라는 자연 근처에서 영화를 시작할때, 강렬한 생물 이미지에 매혹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마무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명의 이미지를 잘게 쪼개 나열한 뒤 그 위에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배치한다. 그 다음 우마와 네키치로 대표되는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등장시키면서, 도덕률을 어기고 본능에 따라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자연과 근친 상간이라는 두 이미지는 [신들의 깊은 욕망], 나아가 이마무라 쇼헤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앞에서 신 남매의 근친 관계와 섬의 탄생을 다루는 전래 민요를 부르는 가객의 모습이다. 인류 문화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예술 양태를 꼽으라면 노래와 그림, 연극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이마무라 쇼헤이가 [신들의 깊은 욕망]을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다. 가객의 노래는 [신들의 깊은 욕망]을 휘감는 원초적인 자연과 근친상간적인 관계가 신화적 기반에 바탕에 두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마무라는 영화라는 매체가 문명에 기반한 것이며, 이 서사를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선 신화적인 화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입부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섬에 사는 우마와 네키치는 근친상간적 관계이며 네키치에겐 전 부인에게 얻은 카메타로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토리코라는 자식이 있다. 네키치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바다에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낚시를 하는 바람에, 바위를 떨어트릴 구멍을 만들라는 벌을 받는다. 한편 우마는 류 류겐이라는 지역 유지의 첩으로 무녀일을 하고 있으며, 카메타로는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때 카리야라는 측량 기사가 제당 공장 개발건으로 도쿄에서 내려온다. 전임 시마지리를 찾아온 카리야는 어떻게든 공장 개발을 하고 싶어하고 카메타로는 카리야를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네키치의 방해와 더불어 카리야는 토리코에게 빠져버린다. 하지만 개발의 손길은 서서히 쿠라게 섬으로 다가오고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맞는다.

[신들의 깊은 욕망]의 절반은 기가 약한 문명인이 쿠라게 섬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끌려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리야는 개발을 위해 섬으로 찾아오지만, 옛 동료는 섬에 동화해버렸다는걸 발견한다. 카리야는 측량을 위해 섬의 숲으로 들어가지만, 마을 사람들과 문명의 연계를 담당하는 류는 그 영역이 신성한 무녀들의 영역이라고 뜯어말린다. 카리야의 눈에는 쿠라게 마을은 알 수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지만, 그는 혼자 왔기에 마을 전체의 규칙을 깨부술 수 없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카리야의 의지는 점점 시들어가고 때마침 끼어든 네키치의 계략과 토리코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버린다. 카리야는 후토리 가에 편입되어 있는 동안 안경을 쓰지 않는다.

반면 후토리 가는 복잡하다. 이미 [인류학 입문] 같은 영화에서 근친상간적 관계와 기괴한 욕망에 탐닉하며 광기에 빠져드는 인물을 차분히 보여줬던 이마무라 쇼헤이는 후토리 가에게도 비슷한 잣대를 댄다. 후토리 가의 부자 네키치와 카메타로는 둘 다 쿠라게 마을의 아웃사이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며 마을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탈주의 방법은 차이가 난다. 네키치 부자가 무인도로 건너와 섬 밖을 빠져나가는 걸 얘기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네키치는 폭탄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지만, 실상은 마을에 내려오는 미신에 매혹되어 있다. 그는 근친상간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돌이 떨어질 구멍을 파며, 개발 계획에 대해 마뜩치 않아한다. 구멍에 돌이 들어가는 순간 네키치는 우마와 함께 신화에 등장하는 무인도에 정착할 생각이다. 네키치는 그 점에서 신화적인 욕망과 탈주를 꿈꾸는 자다.

반대로 카메타로는 처음에 카리야 기사의 조수로 배치되는 장면도 그렇지만, 쿠라게 마을 자체를 지긋지긋해한다. 카메타로는 문명화된 술집과 카리야 기사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 문명 사회에 편입될 기회를 노린다. 카메타로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탈주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지만, 그가 선택한 탈주 방법을 믿지 않는다. 그는 그런 식으로는 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카리야 기사로 대표되는 본토의 문명만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도 카메타로는 가문에 내려오는 근친상간 관계를 거부하는 자다. 영화 초반 토리코의 유혹에도 카메타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짜증만 낼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남자들 사이엔 여자들이 있다. [신들의 깊은 욕망]을 이끌어가는 기괴한 에너지는 근친상간 관계의 목표이자, 주체인 여성들에게서 비롯된다. 이 둘이 마을의 샤머니즘 전통과 연계되어있는 캐릭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지역 유지의 집에 강제로 머물며 성적인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오빠 네키치와의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는 우마도 인상적이지만 토리코는 이마무라가 만들어낸 여성상 중에서도 강렬하기 그지 없다. 정신박약을 앓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인 토리코 앞에서 전통과 문명은 일시적으로 대립이 무화된다. 토리코가 미국에서 온 속옷을 입고 좋아하는 장면과 신내림을 받는 장면은 토리코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두 세계를 포섭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토리코의 불가해함은, [신들의 깊은 욕망] 전체를 이끌어가는 우연과 초자연적 전개와 맞물려 들어가며 영화의 신화적 성격을 강화한다.

이마무라는 [인류학 입문]에서도 그랬듯이 근친상간을, 문명의 도덕률을 반하는 행위며 자연과 가깝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매혹을 보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이 문명과 자연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서사를 진행했던 [인류학 입문]과 달리 자연에서 진행되는 영화인지라 이런 대비가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리야와 토리코의 관계가 있다. 카리야는 토리코랑 사랑을 나눌때도 마치 여동생 다루듯이 다루고, 주변 사람들은 그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진짜 근친상간 관계인 네키치와 우마에 이르면 더 할말이 없다. 네키치와 우마의 관계는 어떤 사랑보다도 순수하기에 더욱 기괴하다. 네키치가 구멍을 파는 행위는, 지극히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기괴한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국엔 승자는 현대 문명이다. 역설적으로 그 문명이 들어서는 과정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시작된다. 완벽하게 쿠라게의 미신에 속해있던 후토리 가의 가장 야마모리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뒤 죽는다. 그리고 돌이 구멍 속으로 들어간 뒤 인물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우마는 노로로써 힘을 잃고, 토리코가 대신 우마를 잇는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토리코가 노로의 힘과 의무를 이해하기 만무하다. 카리야는 도쿄로 돌아가버리고 노로로 대표되는 마을의 샤머니즘적 전통은 몰락한다. 여기서 이마무라는 미신을 지탱하는 믿음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미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때 어떻게 사람들은 스스로 전통과 미신을 폐기처분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네키치와 우마의 파멸 시퀀스는 그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의 신화/제의적 속성을 밀어붙이는 시퀀스다. 이마무라는 여기서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망망대해에서 도망가려는 네키치와 우마, 그리고 그들을 쫓는 마을 사람들의 동선을 서스펜스를 빌어 쉴새없이 밀어붙인다. 특히 말 없이 가면을 쓴 채 네키치와 우마를 쫓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호러 영화 속 살인마와 다름없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 자체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인 증오와 편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들의 깊은 욕망]은 작은 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이 와중에 카메타로는 문명 사회로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와 고모를 살해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폭력을 받아들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과거의 복수다.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쿠라게 마을은 비행장과 코카콜라가 자연스러운 곳이 된다. 영화 후반부에 사라진 카리야는 아무렇지 않게 본처와 외가 사람들을 끌고 자본가 계급 행사를 한다. 카리야 앞에 나타난 건 얼마 전 고향으로 돌아와 기관사가 된 카메타로다. 카리야는 변해버린 쿠라게 마을을 둘러보며 미신을 믿었던 마을은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한다. 하지만 고민에 잠겨 있는 카메타로는 카리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쿄에 있을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그 날 있었던 일이 마을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이에 대답하듯이 이마무라는 기차를 운전하는 카메타로 시점 샷으로 수풀 사이로 뛰어가는 토리코를 툭 던져놓는다. 문명의 아이콘인 기차는 갑자기 멈춰서고 카메타로는 극도의 충격과 흥분 상태에 빠진다. 카메타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카메타로 다음에 우마를 묶었던 붉은 돛을 단 빈 배가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분명한 것은 토리코와 붉은 돛의 샷은 유령처럼 홀연히 등장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쿠라게를 상징하는 토리코와 우마는 이미 죽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망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리야 기사는 토리코 얘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즉슨 카리야는 토리코랑 이 섬 자체를 백일몽처럼 여기고 있다.)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토리코는 무녀의 춤을 추듯이 격렬하게 등장해 기차를 신경쓰지 않고 달려가다가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토리코로 대표되는 대자연은 자신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킨 쿠라게 마을과 본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긴 셈이다.

이마무라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쿠라게 마을은 과거의 미신을 벗어던진 곳인가? 이마무라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쿠라게 마을의 근대화는 결국엔 제물이 필요했고, 이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다시 폭력적인 신화적 제의를 거쳐야 했다. 이마무라는 문명은 쿠라게 마을에서 또다른 이름의 미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마무라는 그 과정을 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자화하는 문명과 작은 사회의 폐쇄성을 경멸한다. 그리고 언젠가 대자연과 대자연에서 비롯된 전통은 유령처럼 돌아와 근대인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이 결말은 [복수는 나의 것]의 결말과 비슷하면서도 더 복잡한 인류학적 화두를 찌르고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불러일으켰지만 [신들의 깊은 욕망]은 그 점에서 쇼치쿠/닛카츠 뉴웨이브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희대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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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의 첫 장면은 황급하게 노빌의 저택을 빠져나가는 하인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각자 이유를 대면서 저택을 빠져나가지만 그 이유가 알리바이라는건 명백하다. 왜냐하면 저택엔 곧 부르주아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인들의 머릿속엔 그런건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마치 모종의 사실을 깨닫고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야 되겠어라고 외치며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티는 계속되어야 하고, 하인들이 없어도 그들에겐 집사가 있다. 노빌 부부를 위시한 부르주아들은 하인들이 빠져나간것도 모르고 예정된 파티를 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음식, 멋진 음악, 아름다운 그림들... 부뉴엘은 하인들이 알수 없는 이유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잊은 것마냥 이들의 파티를 보여준다.

바보 같은 부르주아. 이게 지옥의 저택인지도 모르고! 부뉴엘과 원작을 쓴 호세 베르가민이 마련한 이 저택은 예삿 저택이 아니다. [절멸의 천사]는 도입부에 등장했던 불가해한 탈출이 가져다주는 카오스를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먼저 피아노 독주회 도중 그 유명한 닭발이 등장하는 샷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이 닭발이 왜 등장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절멸의 천사]는 이유를 대면 지는 초현실주의자가 만드는 영화다. 그러니 닭발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상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소도구로써 인식하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독주회라는 우아한 상황에서, 고급 레스토랑에도 안 어울릴법한 닭발은 시공을 뒤흔들 폭풍의 전조다. [절멸의 천사]는 그 유명한 설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문명의 보호를 받는 부르주아를 야만으로 퇴화시키는걸 보여주는게 최우선인 영화다. 닭발은 연주회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부뉴엘의 중지 손가락으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이런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소품과 거기서 기반한 비논리적인 샷들은 [절멸의 천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닭발을 꺼내는 샷을 기점으로 부뉴엘은 영화의 개연성을 붕괴시키기 시작한다. 첫번째 징조는 의지의 삭제다. 부뉴엘은 아무렇지 않게 파티가 끝나고 나가려는 인물들을 붙잡아 뇌세척을 하고 재운다. 이 과정이 은근슬쩍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의심하지만 그 의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한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 계급은 다양한 공간에서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릴수 있는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부르주아 문화의 중심이지만 역설적으로 생존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인 접대실"에다 가둬버린다. 피아노와 소파, 미술품이 밥을 먹여주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한정된 공간 밖에 머물수 없게 된다. 심지어 그들을 보좌해줄 하인들조차 없다. (재미있게도 부뉴엘은 집사장도 부르주아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간 관리자도 노동자 계급을 탄압하는 부르주아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본 것일까?)  [절멸의 천사]는 부르주아의 저택이 '생존과 본능의 공간'과 '문명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부르주아를 보살피는 수족이 없으면 무너지는 곳이라는걸 폭로한다.

부뉴엘과 베르가민은 낄낄거리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그들은 캐릭터의 이성을 붕괴시킨다. 의지가 삭제된 캐릭터들은 그래도 여기 머무르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갈려고 생각은 하지만, 그 경계선상에 서는 순간 중요한 연결고리를 잊고 '아 그 뭐더라.' 하면서 돌아선다. 등장 인물들은 이 부분을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악랄하게도 그 해결책은 중요한 '선'을 넘지 못한다. 절박한 갈망은 있되, 의지와 해결책은 원천봉쇄된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초반부에 등장한 하인들의 도주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절멸의 천사]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언제든지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빠져나갈수 있지만 부르주아는 그러지 못하는 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웃는다.

접대실의 물자가 바닥날수록 합리적으로 판단할 이성은 본능 앞에서 초라해진다. 절정인 세번째 단계는 당연하게도 아포칼립스적 생존 투쟁기다. 부르주아는 이 순간부터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근친상간, 유치하지만 무시무시한 투닥거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자, 굴러다니는 동물뼈, 카발라에 심취해버린 부르주아들, 마약, 잘린 손의 호러스러움... 부뉴엘은 중간에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 시퀀스를 삽입하면서 그들을 한껏 비웃는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비슷하게 부르주아의 문명 속 고립극을 다룬 J.G.발라드의 [하이 라이즈]의 선조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난처함은 구경거리가 된다. 

부뉴엘은 이 황당한 문명 속 아포칼립스를 벽에 있는 수도 파이프를 뜯어서 목을 축이는 시퀀스와 갑자기 저택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동선으로 극대화한다. 문명의 화려함을 누리기 위해 벽 뒤에 은폐한 수도 파이프는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기계장치의 베르가민과 부뉴엘이 바깥에서 보낸 양은 자유롭게 '선'을 넘나들며 부르주아를 희롱한다. 그 앞에 선 부르주아들은 굶주린 짐승과 다름없다. 부뉴엘은 은폐된 소도구 (파이프)의 폭로와 두 동선의 대조 (갇혀있는 부르주아와 저택 밖에서 들어온 양)로 부르주아의 허울을 벗겨낸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부르주아는 의지만 사라진다면 문명과 가장 멀어져 추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덤으로 이뤄지는 가톨릭 모독은 더욱 노골적이다. [절멸의 천사]에서 가톨릭과 가톨릭 예술은 말그대로 변기통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의 설정이 상당히 인공적이고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 속 부르주아들은 현실에 속해있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창작자의 미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쥐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이 영화 속 캐릭터 설정은 일관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단적으로 이 영화에 우르르 몰려나오는 부르주아 캐릭터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성격보다는 일련의 기행들로 기억된다. 심지어 각 시퀀스 별로 캐릭터들의 설정이 일관성도 없다. 하지만 일관성 없이 캐릭터가 그려짐에도 영화의 카오스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에 더욱 매정하게 다가온다. 부르주아의 캐릭터 따윈 아무런 상관없다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베르가민과 부뉴엘은 캐릭터들을 그냥 멍청이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들을 모욕하는 법을 알고 있다. 상술했지만 이 부르주아들은 나름 이성적으로 재난을 풀려고 하는데, 이 점 때문에 [절멸의 천사]은 오히려 더 매정해진다. 그들은 똑똑하지만 베르가민과 부뉴엘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여기다 부뉴엘은 갑작스럽고 비논리적인 이미지를 담은 샷과 몽타주로 서사를 흔들어놓고, 캐릭터의 일관성을 발기발기 찢어가면서 카오스를 만든다. 부뉴엘은 그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던가 데이빗 린치로 이어지는 전후 현대 영화의 비논리적 구성과 후대 "병맛"의 선구주자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절멸의 천사]는 명성과 달리 디씨 막장 만화들처럼 가볍게 즐기면 되는 영화다.

[절멸의 천사]의 결말 부분은 싱거워 보인다. 이 영화는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기대할법한 전멸로 끝나지 않는다. 부뉴엘은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외국인인 레티시아와 피아니스트 실비아에게 준다.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피아노 독주회를 재현하는 것으로 저택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한다. 야만의 끝에서 예술와 문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그들은 간신히 그 공간을 빠져나올 의지를 얻게 된다. 예술에 대한 긍정일까? 그것보다는 상황 자체를 재구성할 논리를 기어이 부여함으로써 탈출했다고 보는게 좋을듯 하다. 결국 부르주아들은 예술과 외부인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올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견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부뉴엘은 그 다음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성당으로 장소를 바꿔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부뉴엘은 예정된 아포칼립스를 보여주지 않고 군중에게 발포하는 경찰과 또다시 흘러들어오는 양떼를 보여주면서 좀 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부뉴엘은 부르주아의 꼴불견은 총을 쏴댈 상황까지는 아니였지만, 가톨릭의 꼴불견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풍경이라는걸 암시한다. 또한 이 장면은 스페인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부뉴엘 자신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끝으로 부뉴엘은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데, 부뉴엘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멕시코 시절을 총결산하고 멕시코보다 좀 더 자유로운 영역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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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타임 [Playtime] (1967)

2015/01/18 - [Deeper Into Movie/리뷰] - 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그 자체로 완결된 전설로 남은 작품이다. 왜 타티는 성공적이였던 [나의 아저씨] 후속작을 만들지 않고 8년동안 이 영화를 만들며 침묵을 지켜왔는가? 적어도 그가 반복하는걸 싫어했다는건 명백했다. 그래도 [플레이타임]은 성공을 믿고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너무나 무모한 영화다. 타티가 [플레이타임]를 위해 만들려고 했던 장소는 건물 몇 개가 아닌, 그 자체로 완성된 도시였다. 하나의 세계를 그대로 담은 세트로 만든다는 시도는 도무지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비물질인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를 설계해 담아야 하는 매체다. 그렇기에 편법이 동원되는데 타티는 그걸 거부한 것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처음부터 실패가 내정되있는 선택이다. 실제로 타티는 영화의 실패로 몰락했고 평생 거기서 못 벗어났다.

대체 뭘 했길래 타티는 그렇게 파산했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던가. 영화의 시작을 보자. 재즈 음악과 하늘이다. 처음부터 타티가 왜 그런 세계가 필요했는지 명징하게 설명된다. 재즈 음악의 복잡한 임프로바이제이션과 거대한 70mm 스크린과의 결합. 타티는 복잡하지만 자유롭게 요동치는 에너지를 영화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내린 다음 타티가 시작하는 곳은 공항이다. 어찌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스크린을 통해 영화 내 세계로 관객이 초청받는 것이다. 그것이 배우의 얼굴이든, 풍경이든 영화의 시작은 어떤 대상을 다룰지를 보여주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플레이타임]은 그 전통을 공항과 관광객으로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타임]의 도입부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윌로 씨가 아닌, 윌로 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장소에 배치된 무수한 사람들이다. 관객은 윌로 씨가 언제 나타날지 기다리면서, 거기 배치된 사람들의 행동과 대사를 유심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그 행동들과 대화들은 사실 그렇게 큰 의미가 없으며, 오직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지문들이다. [플레이타임]은 처음부터 타티는 왜 자신에게 그런 무모한 짓이 필요했는지 설명해낸다. [나의 아저씨]에서 팬터마임과 무언극, 무성 코미디 영화의 결과물을 총결산한 타티는 그 총결산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영화적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사가 아니라 윌로 씨가 만들어내는 행동이였던걸 생각해보라. [플레이타임]은 그런 행동의 업그레이드라 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업그레이드는 범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플레이타임]은 정말 아무도 가지 않았고, 쉽게 갈 수 없는 아름다움에 훌쩍 도달한 영화다. 윌로 씨와 바바라라는 미국 관광객이 표면적인 주인공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 큰 스크린에서 그들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타티빌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소우주에서 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타티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플레이타임]에 이르면 이야기는 몇 단어로 축소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른다. 윌로 씨가 우연히 만난 바바라에게 여러 소동 끝에 꽃을 준다. 이게 전부다. [플레이타임]은 [윌리를 찾아라]가 그랬듯이 의미도 맥락도 거의 없어진 거대한 흐름이 만드는 리듬에 동참하고 발견해야지 영화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서 서브플롯은 슬그머니 등장하고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씬스틸러 역할을 한다.

자크 타티는 분명 이 영화에서 장 르누아르가 [게임의 규칙]에서 만들었던 흐름의 영화을 명백히 인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로 대표되는 유동적인 카메라와 끊임없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통해 영화의 흐름을 잡아냈다. 타티는 거기서 더 나아가 기어이 인물을 삭제하고 도시 속 거대한 흐름에 주목한다. [플레이타임]의 코미디는 그런 거대한 흐름이 엉키는 순간에서 드러난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초자연적으로 사랑스러운 재해인 윌로 씨가 중심이 되어 주변을 돌아다니며 흐름을 만들어냈다면, [플레이타임]에서 흐름은 이제 윌로 씨에 머물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정부적 카오스로 넘어간다.
 
타티는 다양한 도시의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그 역동적인 에너지와 흐름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길을 잃거나 엉뚱한 슬랩스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아저씨]에 등장했던 (현대 건축의 창시자 르 코르뷔지에가 흡족해할만한) 아르펠 씨의 집이 확장된 타티빌은 그렇게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데다, 타티의 카메라조차 그들을 위해 움직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타티는 약간 짗궃게 '르 코르뷔지에 씨 보고 계신가요.... 당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철근과 유리의 도시에선 인간들이 이렇게 산답니다 (에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타티가 바라보는 관광객과 도시인들은 강박적인 목적을 위해 우스꽝스럽게 바둥바둥거리는 사람들이기에 이 우스꽝스러움은 강해진다. 

반대로 바바라와 윌로 씨는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다. 바바라는 줄곳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사진에 담을 기회를 노리려고 하고, 윌로 씨는 [나의 아저씨]에서 그랬듯이 어리숙한 표정으로 휩쓸리면서 선의에 가득찬 행동을 한다. 물론 그런 선의도 하나의 카오스를 일으키는건 자명하다. 그 점에서 [플레이타임]은 샤를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바라보았던 '근대적 산보자로써의 대도시' 파리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근현대인인 윌로 씨와 바바라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도시를 거닐며 자신이 포함된 많은 사람들과 흐름을 관찰하고 동시에 휩쓸린다. 때문에 이 영화가 [심시티]가 나왔던 시대에 나왔다면 좀 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웠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 영화의 비전은 소름끼칠 정도로 거대한 도시 문명이나 사람들의 공시성을 현미경으로 들어다보는 [심시티]나 [심즈]의 비전을 닮았다.

종종 타티는 그런 엄청난 흐름 속에서 어처구니 없는 장면을 잡아내곤 한다. 윌로 씨가 군대 동기를 만나러 아파트에 들어가는 시퀀스이 그렇다. 여기서 타티는 음향마저 빼버린 채 아파트 하나를 만화 패널처럼 그려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타티는 창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고정하고 창틀로 구성된 두 프레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무성영화적으로 구성한다. 두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이 동시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걸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인물이 개를 끌고 지나가는걸 볼 수 있다. 카메라가 위치한 곳에서 좌석이 되고, 그 앞에서 일어나는 서로 무관한 두 개의 흐름이 하나의 프레임에서 움직인다. 타티는 그게 바로 영화라고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타티의 이런 생각은 고전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카메라의 자의식을 생각했던 현대 영화에 가깝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레스토랑의 재난은 타티빌의 미학을 한번에 압축하고 그걸 뛰어넘는 장면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레스토랑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들어오고 밴드는 연주를 하고 주문은 계속 들어오고 종업원의 옷은 끊임없이 더러워지고, 대화는 넘쳐나고, 몇몇 사람들은 떠나고.... 타티는 이 시퀀스에서 몇몇 상황을 정한 뒤 그것을 꾸준하게 반복/변주해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유머를 만들어낸다. 그 장관의 몰입도가 엄청나고  길이도 제법 되는지라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영화적 임프로바이제이션에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은근 폐소공포증을 자극하게 한달까. 그렇기에 이 시퀀스 말미에 윌로 씨와 바바라가 거리로 나올때 해방감을 느끼는 거겠지만.

하지만 그 임프로바이제이션에 관객이 점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타티가 카메라를 윌로 씨와 바바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바바라가 무대에 올라와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에 타티는 클로즈업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알려준다. 그는 도시 문명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윌로 씨나 바바라, 미국인 부자 같이 그 카오스를 느긋하고 유머러스하게 즐길수 있는 인물들이 있는 한 괜찮을거라고 말한다. 영화 도중 히피를 연상케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타티가 히피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카오스에서 히피는 자연스럽게 양복 입은 신사숙녀들 사이에서 잘 어울린다. 윌로 씨가 바바라에게 꽃을 건네주고 (그나마도 대신 부탁하기 때문에 만나지는 못하지만) 바바라가 행복해하는 결말은 그 점에서 타티의 낙천주의가 발하는 멋진 결말이다.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의 종말은 비참했지만, 타티는 적어도 어렵게 살긴 해도 불행하지는 않았을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평생 꿈꿨던 영화를 완성했고 아마 고생은 했어도 만든 사실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윌로 씨의 익살스러움과 반대로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자크 타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머에 솔직하고 거기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길 바라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큰 스크린에서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에 방문하길 바란다. 이 영화는 진정으로 영화가 무엇인지, 성숙하지만 낙천적인 긍정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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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복수의 총성]에서 주인공 윌렛은 모래에 흔적을 남기면서 등장한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복수의 총성]에서는 무의미하다 윌렛이 친구 콜리를 만나는 순간 미스터리가 윌렛을 포박하기 때문이다. 공포에 떨고 있는 콜리는 윌렛에게 윌렛의 형이자 동행인이였던 코인과 리랜드가 마을에서 어떤 가족을 쏴 죽였으며, 코인이 볼일을 보러 떠난 뒤 리랜드가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한다. 앞뒤를 살펴보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의 복수인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리랜드를 쏴죽였단 말인가?

도입부의 미스터리가 제공하는 [복수의 총성]을 진행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그렇듯이 몬테 헬만은 주인공들을 부조리한 카오스로 밀어넣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만 [바람 속의 질주]가 대항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낸 부조리와 무기력함으로 주인공들을 밀어넣고 거기서 탈출하려는 인물들의 액션에 집중한다면, [복수의 총성]은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가 윌렛과 콜리를 이끈다. 이 미스터리의 중심이 여성 캐릭터라는 점도 흥미롭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소녀 애비게일를 연기했던 밀리 퍼킨스가 다시 맡은) 윌렛 일행 앞에 나타난 이름 없는 여자는 윌렛과 콜리에게 킹스턴으로 데려달라고 말하지만, 윌렛은 곧 이 여자에게 다른 목표가 있다는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캐릭터를 살펴보자. 먼저 윌렛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소시민적 카우보이이다. 윌렛과 여자의 대화에서 윌렛이 한땐 현상금 사냥꾼이였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를 부정하고 소시민적인 삶을 누리길 원하는 인물이라는게 밝혀진다. 이 점에서 난폭하게 사람을 쏴죽이고 도망가버린 윌렛의 형 코인과는 대조된다. 윌렛은 여자에게 적당한 보수를 받고 아무 탈 없이 헤어지길 원한다. 반대로 여자는 현실감각이 다소 떨어지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캐릭터인데, 때문에 윌렛과 여자 간에는 불편한 긴장이 흐른다. 윌렛은 여자의 목적을 집요하게 의심하고 여자는 그의 의심에 짜증을 낸다.

반대로 콜리는 미성숙한 소년이다. 콜리는 여자를 보는 순간 홀딱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윌렛과 달리 소년다운 아직 무법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버리지 못했다는걸 보여준다. 그가 미성숙한 남성이라는 부분은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하다가 적당한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엄마의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여성은 어머니 밖에 없다. 그런데 각본을 맡은 캐롤 이스트먼이 여성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뒤이어 이어지는 여자의 거절은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이 무명의 여자는 모성으로 환원되는걸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콜리)는 내가 보는 걸 보지 못해요"라는 대사는 이스트먼과 헬만이 콜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자가 어떤 캐릭터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여자가 복수하려고 하는 대상이 누군지 결말 전까지 보여주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여자의 심리가 어떤지 간신히 파악만 가능할 것이다. 이스트먼과 헬먼은 여자의 동기와 심리 묘사에 크게 관심이 없다. 남아있는 단서들을 긁어모아 추리를 해도, 이 여자는 끝끝내 이성적인 이해는 할수 있되 공감할 수는 없는 '타자'로 남는다. 그렇기에 여자의 집요한 집념은 더욱 무서워진다. 여자를 향한 "당신은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안내할게야. 자신 마저도 말이오."라는 윌렛의 대사는 영화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윌렛의 이 대사는 후술할 결말하고도 맞닿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엔 잭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 스피어스가 끼어든다. 빌리가 끼어들면서 [복수의 총성]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번은 반항아이긴 했지만 그 속내를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복수의 총성]에서 니콜슨이 연기한 빌리는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공격성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그의 첫 등장은 줄곳 숨어있다가 윌렛이 도발하면서 이뤄진다. 마치 야생동물이 서로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끌어내는걸 연상케 한달까. 윌렛은 여기서 빌리가 문명의 소통방식으로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걸 알아채지만 콜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반항하다가 파국으로 이어진다. 

빌리가 등장하면서 [복수의 총성]은 표면적 의도 아래에 있는 이해할수 없는 가학적이고 불온한 흐름으로 인물들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인물의 감성은 바가지를 긁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부터 시작해 광활하지만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사막만이 소통이 사라진 인물들의 대화를 보조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서부극의 대가들이 그랬듯이, 자연 풍광에서 영화적 매력을 이끌어낼줄 아는 감독인데 그의 세계에서 자연은 인물의 실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바람 속의 질주]에서 돌멩이가 푸석한 흙먼지 산이 고립되고 힘겨운 여정에 나선 인물들을 강조했다면 [복수의 총성]에서 등장하는 말라붙은 사막은 점점 삭막해지고 신경을 긁는듯한 인물 간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서부극 장르가 구축해온 언어들은 산산조각난다. 복수를 하려던 콜리가 죽는 장면이라던가 빌리와 윌렛의 다툼은 서부극적 전통에서 기반해있지만, 이 장면들엔 품위나 공동체의 신념과 믿음 대신 메마르고 야만적인 악독함이 줄줄 배어나고 있다. 어느 순간 가히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파멸의 여정이 되버린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 영화가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에서 링크와 콜리가 몸싸움을 벌이다가 링크가 콜리를 죽이고 전율하는 장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악독함은 촬영 당시 헬만과 워렌 오츠, 니콜슨 사이에 있었던 충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 속의 질주]가 샷과 컷의 변화가 평이하고 단조로운 대신, 톤과 무드를 비틀어놓는 타입의 영화라면, [복수의 총성]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샷과 컷을 이상하게 밀고 간다. 리랜드가 죽을 당시를 보여주는 시퀀스의 연출을 돌아가보자. 콜리의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이 시퀀스는 아무런 대사가 없다. 그런데 리랜드가 누구랑 대화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의 시점 샷들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콜리의 회고에 따르면 총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콜리는 텐트에 누워 바깥에 있는 리랜드랑 눈을 마주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헬만이 이 장면을 보여주면서 콜리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진 않다. 이상한 장면은 그 다음 경악에 찬 눈빛으로 쓰러지는 리랜드를 보여주는 샷이다. 이 샷이 이상한 이유는, 지금까지 콜리의 시점이라 못 박아둔 샷 다음에 거리상으로 불가능한 풀 샷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몽타쥬 배치상 이 샷은 콜리의 주관적인 샷의 연장선상이라는건 명백하다. 이 샷이 이상하고 낯선 이유는 죽음의 순간이 갑자기 확대된 채 정지한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샷 속에서 리랜드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에 머물러 있다. 헬만은 이를 통해 콜리가 왜 미친듯이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한다. 리랜드가 맞이한 이해할수 없는 죽음이 언제든지 자신을 덮칠수 있다는 공포가 콜리를 사로잡은 것이다. 

재미있는건 다음날 윌렛은 리랜드가 죽은 그 자리에 우연히 비슷한 자세로 앉을 뻔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영화의 결말에 나오는 반전과 연출은 이 사소한 행동을 다시 재고하게 된다. [복수의 총성]의 결말은 정말 난해하고 당혹스럽고, 매우 인상적이다. 마침내 여자가 복수 대상을 발견해 달려가고 여자를 쫓아간 윌렛은 여자의 복수 대상이 자신의 형제인 코인이라는걸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몬테 헬만은 코인 역으로 윌렛을 맡은 워렌 오츠를 기용한다. 그리고 슬로우 모션을 이용한 클로즈 업 샷으로 코인의 죽음을 보여준 뒤, 좀비처럼 살아와 걸어오는 빌리를 롱 샷으로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내버린다. 

이는 로저 코먼 밑에서 영화 경력을 시작한 헬만 특유의 B 무비의 뻔뻔함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헬만은 주인공 형제를 등장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 배우를 캐스팅해 B무비의 뻔뻔함과 제작비 절감을 성립시키지만,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복수의 총성]은 무의미하게 모든걸 파괴해버리는 서부의 야만성과 그 속에서 파멸할수 밖에 없는 인물들을 신화적인 제의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다. 가장 중요한 단서로는 여자는 윌렛을 보면서 당신은 광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현상금 사냥꾼이던 윌렛의 과거 역시 그리 깨끗하지 않았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 점에서 형제로 설정된 코인은 윌렛의 이면이라 볼 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될수록 윌렛은 코인처럼 점점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이처럼 헬만과 이스트먼은 코인의 야만성은 윌렛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서부 그 자체라 보고 있다. 일견 모호해보였던 여자의 캐릭터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부의 야만성에 복수하려고 하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여자가 사건의 휘말린 계기라던가 인간적인 면모는 끝끝내 묘사되지 않기에, 여자의 복수심은 당위성이 있다기 보다는 막연하고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모성을 거부하고 복수에 나선 여자 역시 코인과 다를게 없어진다. 아예 초자연적 재해처럼 그려지는 야수 빌리는 말할것도 없다. 헬만은 그 야만성이 이끄는 신화적 여정의 끝은 '죽음'이라 본다. 초반부 리랜드의 죽음을 강조한 이유도 그 죽음의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윌렛의 이면인, 코인의 죽음은 리랜드의 죽음처럼 영원히 정지한듯한 슬로 모션 샷으로 보여진다. 헬만은 파국의 절정을 박제한 뒤, 야만의 화신인 빌리가 부활해 다가오는걸로 끝내버린다. 이 결말이 두려운 이유는, 상당히 낯선 화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그랬듯이 파국 이후를 전혀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코인의 죽음은 윌렛의 죽음이며, 여자의 복수는 윌렛에게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남은 건 죽여도 죽지 않는 악마와 같은 빌리가 가져올 궁극적인 종말이다. 엄청나게 묵시록적인 비전을 담은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복수의 총성]은 그렇기에 정통 서부극에서 그려왔던 신화의 이면과 그것이 인간들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상당히 이상하게 그려내고 있는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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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시작은 이렇다: 황야 저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고 일련의 도적 무리들이 튀어나와 돈을 요구한다. 카우보이 세 명이 멀리서 그 과정을 지켜본다. 익숙한 서부극의 설정이다. 하지만 다음 샷. 도적들은 마차에 있던 승객과 마부의 호주머니를 털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도적들은 짜증내며 그들을 내보내고 지켜보던 카우보이 세 명은 다시 길을 떠난다.

서부극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뭔가 기대가 어긋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영화의 악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카우보이들은 악행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바람 속의 질주]는 무언가 중요한 동기와 열정 자체가 배제되어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바람 속의 질주]는 하지도 않은 일을 오해받은 사람들의 얘기다. 번과 웨스, 오티스는 어떤 대단한 사명감이나 정의감을 지닌 인물들이 아니다. 초반부에 만났던 도적 무리랑 같이 오두막을 쓸때도 약간의 경계심을 제외하면 그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든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카우보이 자체는 엄청나게 특이한 인물상은 아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가 이상한 이유는, [자니 기타]가 그랬듯이 정통 서부극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징후는 갑자기 등장한 자경대가 도적떼들을 쏴죽이고 번과 웨스, 오티스를 도적 패거리로 오해했을때 생긴다. 갑자기 이 세 명은 공권력에 반항한 악당이 되고, 오티스는 죽는다. 남은 번과 웨스는 살기 위해 도망간다.

사실 수동적인 쪽은 웨스와 오티스만 해당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잭 니콜슨이 맡은 번은 반항적이고 행동적인 캐릭터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도적떼를 다시 만났을때 웨스와 오티스는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하는 반면, 번은 반발한다. 심지어 무기력한 상황들이 이어질때도 번은 계속 불만을 표출하고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저돌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저돌성은 각본과 연기를 모두 맡은 잭 니콜슨의 연기에서 비롯된다. 후일 [샤이닝]이나 [배트맨]에서 널리 알려지게 될 특유의 오버액팅은 아니지만, 이미 여기서 완성된 니콜슨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 연기는 여전하다. 오히려 과시 없이 다른 연기자와의 조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샤이닝]이나 [배트맨]보다도 훨씬 뛰어난 구석이 있다.

번과 웨스가 한 민가에 숨어들면서 이야기는 다시 한번 다른 방향으로 꺾는다. 번과 웨스가 들어선 민가는 에반과 캐서린 부부와 10대로 보이는 딸 아비게일로 구성된 가족이 사는데, 이들 역시 다른 의미로 짓눌려있는 캐릭터들이다. 번과 웨스, 오티스가 부조리한 시스템의 희생양이라면, 이들은 단조로운 현실에 찌들어 있다. 무성의하게 반복되는 도끼질과 삭막한 식탁은 그런 단조로운 현실의 체화다. 이들의 단조로운 일상은 번과 웨스라는 비일상이 끼어들면서 흔들린다.

하지만 이 흔들림에도 어떤 짜릿함이 결여되어있다. 번과 웨스는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생각이 없고 (웨스가 별 일 없을거라고 강조하는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들 역시 그들의 단조로움을 끼어든 불청객을 불편해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가족은 개성조차 희미하다. 번이 아비게일을 데리고 나가면서 "멀리서는 내가 애비의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는 대사는 이 가족이 얼마나 몰개성한 존재인지 아이러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바람 속의 질주]은 어떤 짓누름에 대한 반발이 영화적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짓누름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압적이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거의 실존적인 경지로 주인공들을 밀고 간다.  주인공들은 한번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자신을 변론하지 못한다. 캐서린이 그들에게 무고를 어떻게 증명할거냐고 물어보자, 그들도 증명할 수 없는 방법이 없다고 시인해버린다. 남은 건 그저 생존 뿐이다. 소통의 순간조차 이어지지 못하고 파탄으로 끝난다.

여기까지 오면 알 수 있겠지만 고전기 서부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체념의 정서가 [바람 속의 질주]를 감싸고 있다. 결국 태생적으로 도주극이 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에센셜 킬링]에겐 먼 선조뻘 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을 짓누르고 있는 건 무엇인가? 말을 보면서 번과 애비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딸이 이방인과 얘길 나누기 싫어하는 에반, 치안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번의 혐오, 단조로운 삶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당신들이 하는 일이 더 외로워 보인다'라고 반문하는 애비... 이 영화가 1960년대 서구 청년 문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에 발표된 영화라는걸 유념하자. [바람 속의 질주]는 서부극의 영역에서 1960년대의 공기를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조금 더 나아가 베트남전에 대한 서브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바람 속의 질주]는 해석보다도 그 시대를 안고 돌파하려는 독특한 영화적 에너지가 매력적인 영화다. [바람 속의 질주]의 샷을 정의하자면 단조로움의 샷이다. 단적으로 몬테 헬만은 총격전을 찍을때도 긴장감을 노릴 생각이 없다. 단적으로 총격전 시퀀스에서 샷과 리버스 샷 길이는 느긋하기 그지없고, 주인공 일행은 싸우기는 커녕 도망가기 급급하다. 배우들의 연기 언어 역시 최소화되어 있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의 단조로움은 통제가 안 된 방만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단조로움은 확실한 리듬이 있다. 삭막하고 건조하기 그지 없는 황무지를 담아낸 촬영, 절제되어 있지만 핵심을 찌르는 배우들의 뛰어난 앙상블 연기를 통해 몬테 헬만은 관객들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 관객들은 최면에 빠진 채 단조로움 속에 담긴 꿈틀거리는 리듬을 쫓아간다. 샘 페킨파가 죽음의 순간을 파편화하고 늘리는 방식으로 허무주의의 아름다움을 설파한다면 몬테 헬만은 삭막할 정도로 이질적인 황무지를 배경으로 삼고 샷과 컷, 시퀀스들의 흐름을 단조로 편곡해 반복하는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바람 속의 질주]는 생경하고 느슨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집중력이 높은 영화다. 
 
영화의 결말이 폭발적인 질주로 끝나는 점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행동하던 웨스는 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번은 웨스를 버려둔 채 말을 타고 도주한다. 마치 지금까지 쌓여왔던 억압과 단조로움의 샷을 깨트리려고 하듯이 이 승마 장면은 박력이 넘친다. 고전기 서부극를 연상케하는 질주의 쾌감이 담겨있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번은 마침내 허무주의의 늪에서 탈출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번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번이 도망갈 수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 점에서 [바람 속의 질주]의 결말은 상당히 양가적이다. 영화는 억압에서 탈주를 꿈꾸면서도 '그 뒤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엔 대답을 아낀다. 어쩌면 정직한 답일 것이다. 이 영화를 발표할 당시 몬테 헬만이나 잭 니콜슨 모두 한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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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다 [秋立ちぬ / The Approach of Autumn] (1960)

[가을이 오다]는 나루세 미키오 필모그래피를 봐도 매우 희귀한 축에 속하는 영화다. 성인 남녀간의 애정이라던가 여성, 특히 게이샤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그간 나루세 미키오의 작풍과 달리 어린 아이, 그것도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나쁜 놈일수록 더 잘 잔다]랑 동시상영했다는 점, 이후 나루세가 잘 다루던 게이샤나 성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다시 이어진걸 보면, 나루세 자신도 이 세계가 자신이 계속 머물 세계는 아니라는건 인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점 때문에 [가을이 오다]는 나루세 커리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가을이 오다]의 각본은 카사하라 료조가 쓴 [도회지의 아이]를 원작으로 나루세 자신이 개작해 만들어졌다. 이야기는 시골에서 도쿄로 올라온 후카야 모자를 주인공으로 이뤄진다. (나루세 영화에 종종 출연했던 오토와 노부코가 맡은) 어머니 시게코는 도쿄 여관에 취직해 일을 하기 시작하지만 이내 친척에게 히데오를 맡기고 야반도주를 해버리고, 히데오는 어머니에게 방치당한 채로 삼촌이랑 살아가다가, 미시마 준코라는 동갑내기 소녀랑 친해지게 된다.

상영시간을 보면 알수 있겠지만, [가을이 오다]는 상당히 소품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시네마스코프를 사용한 영화를 소품이라 볼 수 있다면) 우선 이 영화에는 [여자가 계단을 오를때]라던가 [흐르다], [만국], [흐트러진 구름]에서 볼 수 있었던 심각하고 쓸쓸한 감정의 저류는 찾아보기 힘들며 두 아이의 모험은 다소 철없지만 귀여운 감정 교류와 일상의 모험이 중심이 된다. 이야기 구조는 일상 에피소드 위주지만, 나루세와 카사하라는 이런 간단한 서사에 딱정벌레를 잡아 준코에게 주려는 히데오의 모험을 통해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가을이 오다]는 여전히 나루세 식으로 애잔한 영화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어찌할수 없는 환경이나 관계를 세팅해놓고 그 상황이나 관계를 타개하려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멜로드라마를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가을이 오다]는 심각함이 없음에도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다른 나루세 영화 못지 않게 애잔한 영화다. 주인공 소년소녀들은 부모와 어른이라는 존재들 때문에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며, 조그마한 저항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철부지 같은 행동으로 치부된다.

[번개]를 필두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은 오즈의 가족보다 훨씬 세파에 찌튼, 비틀린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가을이 오다]에서도 그런 나루세 미키오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시게코는 아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훨씬 중요시하며 끝내 오빠에게 아들을 맏기고 떠나버리는 가벼운 모습을 보이며, 준코의 어머니는 딸을 사랑하면서도, 속물적인 잣대로 후카야 모자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작 그런 준코의 어머니 역시 오사카 부자의 현지처로 살아가는 모순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어른들이 어떤 인습에 모습을 보일수록, [가을이 오다]에 등장하는 준코와 히데오는 더욱 의연하게 그려진다. 물론 그들도 아이들답게 삐치고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어떤 인습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순수한 관계를 이뤄나간다. 준코를 위해 딱정벌레를 찾으러 나서는 히데오의 모험과 동선은 어딘가 돈키호테적인 귀여움과 쓸쓸함을 품고 있다. 

결국 [가을이 오다]는 예정된 이별로 끝난다는 점에서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진 구름]와 가까이 있는 영화기도 하다. 떠나가는 트럭을 쫓아가려고 하지만 결국엔 홀로 남겨지는 결말부 히데오의 컷에서 나루세 감독의 사적인 감정이 느껴진다면 과잉된 해석일까? 다만 나루세의 유년 시절이 이 영화의 히데오랑 비슷했다는걸 생각해보면, 각본까지 참여한 [가을이 오다]는 다른 의미로 나루세 미키오 본인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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