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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1967 (2)
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2017/04/02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멸의 천사 [El ángel exterminador /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2017/09/24 - [Deeper Into Movie/리뷰] -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멀리서 마차가 다가온다. 제목 타이틀이 뜬 뒤 마차는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숲 속으로 들어온다. 두 남녀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만 다음 샷에서 갑자기 상황은 반전된다. “부드러움이 무슨 소용이죠?”라는 질문을 한 여자는 곧 모욕을 들으며 옷이 벗겨지고 남자는 여자를 벌하라고 마부들에게 명한다. 묶여있는 여자는 맞으면서 애원한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질것 같은 다음 샷에서 여자, 세브린느는 남자 피에르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우리 생각이요.”

조셉 케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루이스 부뉴엘의 [세브린느]의 도입부는 마치 농담처럼 시작한다. 피학적인 상상으로 사랑하는 남편과의 지고지순한 부부 관계를 전복하려는 세브린느의 속내를 피에르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멀쩡한 부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딘가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둘의 대화는 진심으로 위장하면서 문제의 근원에 닿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부뉴엘은 완벽하고 순종적인 부르주아 부부라는 정형적인 관계가 서로를 질식시키고 있다는걸 보여준다.

부부는 다음 시퀀스에서 겨울 산으로 놀러간다. 보통 사람들은 겨울 산에서 소복히 쌓인 눈을 생각하지만, 부뉴엘은 한번도 하얀 눈으로 덮인 산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세브린느와 피에르는 눈 내린 마을을 걸어간다. 이때 바닥에 깔린 눈들은 더러워져 있다. 부뉴엘은 흰색의 순결함을 믿지 않는다. 후술할 세브린느의 하얀 옷과 연결해보면 이 눈 내린 마을은 캐릭터가 내세우는 순결함이 세속적인 욕망을 숨기는 커튼에 불과하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 잇송 씨를 만나게 된다. 이때 세브린느는 잇송을 불편해 하며, 잇송은 피에르를 보고 '자네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잇송이 식당을 떠나면서 한 말은 '밤을 맞으러 가봐야 되겠다'다. 그 시퀀스 직후 세브린느는 잇송과 동행했던 친구랑 (의미심장하게도 그 친구는 잇송을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택시를 타면서 앙리에트를 둘러싼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잇송이 보낸 꽃을 꽃고 이동하다가 꽃병을 깨트린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간 세브린느 화장수 병을 다시 깨트린다. "내가 왜 이러지?" 부뉴엘은 이 순간 최면을 건다. 부뉴엘은 무언가 깨지는 행위를 세브린느의 무의식에 등장하는 더러운 배관공에 대한 플래시백과 조응시키면서 이후 이어질 부르주아의 도덕률의 붕괴를 은유한다. 심지어 자신처럼 정숙했으리라 생각했던 피에르조차도 결혼 전에 창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린다.

잇송의 밤을 맞으러 간다는 대사는,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탈피하러 간다는 얘기며 세브린느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세브린느 역시 일탈하고 싶어한다. 이 순간 잇송이 다시 등장하는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순결해 오히려 페티시적인 (눈처럼) 흰 테니스 복장을 한 세브린느 앞에 잇송은, 은근슬쩍 암시했던 자신의 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불편해하는 세브린느에게 잇송은 아나이스의 창관을 알려준다. 남은 건 세브린느 자신의 선택 뿐이다. 물론 부르주아 룰에 순종적인 세브린느는 타락을 거부하려고 한다. 세브린느가 창관 근처에서 서성거릴때 드러나는 망설임은 다시 얘기치않은 플래시백을 불러오게끔 한다. 영성체을 거부하는 세브린느의 플래시백은 가톨릭을 향한 부뉴엘의 세속적인 저항이며, 동시에 보수적인 도덕률을 거부하기 힘들다는걸 드러낸다.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만나게 되고, 매춘을 하기로 결정한다. 아니아스는 세브린느에게 억지로 키스를 하는 것으로 욕망의 문을 여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세브린느가 만난 손님들은 낯설고 두렵기 그지없다. 악랄하게도 첫 매춘이 이뤄지는 시퀀스에서 부뉴엘은 아돌프라는 무례한 부르주아 남성 캐릭터를 데려온 뒤, 남성기와 사정을 암시하는 샴페인을 배치해 얌전하게 살아온 세브린느에게 충격 효과를 가한다. 어렵게 매춘을 마친 세브린느는 앓아누워 부르주아를 만나는걸 거부하고 한동안 매춘업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브린느는 결국 매춘업소로 돌아온다. 어째서일까?

부뉴엘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의 욕망이 영화 전체의 구조를 흔드는데 있다. [세브린느] 역시 루이스 부뉴엘의 뻔뻔스러운 욕망과 서사 구조에 대한 풍자적인 도발이 잘 드러나 있다. [세브린느]는 일단 시공간을 흐트러트린다. 이 영화의 소품들이나 배경은 분명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19세기적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마차라던가, 호화롭지만 공허해보이는 귀족 저택, 세브린느의 집은 이야기의 시공간을 의심케한다.반면 부뉴엘은 텔레비전을 아니아스의 창관에만 배치하면서 현대 문명을 매춘과 동일시시킨다. 19세기적 엄숙한 도덕에 갇힌 현대의 부르주아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창관에서 기괴한 욕망을 배출한다. 

부뉴엘은 매춘과 자본주의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부르주아의 허울과 위선을 조롱한다. 아니아스는 매춘부들에게 매번 예절과 교양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아니아스의 창관이 어떤 가치관으로 움직이는지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의 매춘부들은 처음엔 부르주아에 걸맞는 예절과 교양으로 맞이하지만, 그 예절과 교양은 이내 섹스라는 동물적인 행위 앞에서 벗겨진다. 교수와 샤를로트가 벌이는 SM극 도중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중단과 지속은 부르주아에 내재된 사회적 페르소나와 동물적 욕망의 기괴한 진자 운동을 잘 보여준다. 아니아스와 부뉴엘은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이중성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이중성을 지켜보면서 세브린느의 비틀린 욕망은 분절적인 플래시백으로 분출된다. 이 플래시백에서 세브린느의 위치는 상당히 복잡하다. 어떤 플래시백에선 과감히 유리병을 깨는 잇송과 함께 피에르 앞에서 섹스하기도 하며 (NTR!), 어떤 플래시백에선 잇송 씨를 이기고 남성성을 뽐내는 (잇송은 '피에르에게 초콜릿이나 선물하라'고 세브린느에게 돈을 준다. 절대로 독립된 성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다.) 피에르에게 구출받는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명백한 점은 환상 속 세브린느가 아무리 피학적인 위치에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이 플래시백들은 세브린느의 주체적 욕망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의 플래시백은 중간중간 영화 서사를 가로막고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의 재구성을 유도하게 한다.

앓아누웠던 세브린느가 다시 매춘업소로 돌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춘을 한 세브린느를 묶어두고 피에르가 진흙을 던지면서 매도하는 환상은 여러모로 이중적이다. 이 환상은 순결을 포기하고 세속적으로 군 여성에 대한 징벌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세브린느 자신의 주체적인 피학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에르는 현실에선 세브린느의 피학 욕망을 충족해줄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세브린느는 매춘을 통해 자본가의 이면과 마주해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세브린느는 변한다. 영화 중반에 이르면 세브린느는 환상 밖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고 매춘할때 입던 옷을 입고 피에르와 데이트를 할 정도로 변해간다.

[세브린느]의 전환점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모든 점에서 완벽한 피에르의 안티테제다. 아무런 직업 없이 아버지뻘인 히폴리테 (부뉴엘은 이 캐릭터에 은연중에 스페인 망명객이라는 암시를 남긴다.)와 함께 퍽치기 범죄를 저지르며, 등에 새겨진 상처와 빠진 이를 드러내며 여성에게 폭력적인 마르셀은 야성적인 청년 무산자이다. 세브린느의 피학적인 정열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남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마르셀을 묘사할때 부뉴엘은 명백히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셀이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는 개선문 근처며 그 주변에서는 엑스트라가 진 세버그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잘 될 것만 같았던 마르셀과 세브린느의 관계는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메꽃, 오후의 미녀, Belle De Jour. 세브린느는 오후에만 욕망에 충실해질수 있는 불완전한 부르주아의 죄수다. 세브린느에게 매춘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폭력적이고 여자를 소유하려는 마르셀에게 매춘부 세브린느는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존재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아닌 매일의 미녀 Belle de Chaque jour가 되야 한다. 하지만 마르셀의 욕망은 내려치려는 허리띠 앞에서 당당한 세브린느 앞에서 좌절된다. 마르셀이 있는 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될수 없다는 걸 안 세브린느는 아니아스를 떠난다. 아니아스의 억지 키스로 열어젖힌 욕망의 문은 세브린느가 아니아스에게 키스하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기어이 세브린느의 사적 영역에 들어선 마르셀은 진실을 폭로하겠다고 세브린느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던 마르셀은 피에르의 사진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한다. 세브린느가 선택한 욕망의 충족과 통제는 궁극적으로 피에르를 사랑하기 위해서였고, 세브린느와 피에르 사이에서 자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걸 마르셀은 알아버린다. 좌절한 마르셀은 모든 관계를 파탄내고 피에르를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고 마르셀은 마치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미셸 푸가드처럼 롱 숏 속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는다. 부뉴엘은 마르셀을 통해 [네 멋대로 해라]를 패러디하면서 프랑스 누벨바그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남기고 있다. 아마 부뉴엘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프랑스 청년 세대의 좌절과 기득권을 향한 파괴 본능을 잡아냈던 걸지도 모른다.

남은 건 반신불수가 된 피에르와 정숙한 부인으로 돌아온 세브린느다. 이때 잇송 씨가 다시 등장한다. 피에르를 은연중에 깔보고 있었던 잇송은 안타까움을 보이면서 동시에 세브린느에게 대신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한다. 왜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것일까? 잇송은 피에르는 자신에게 헌신하는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자면 세브린느 역시 자신에게 여전히 다정한 피에르에 대해 사랑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브린느는 오후의 미녀가 되는 것으로 사랑을 유지하면서도 욕망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아냈지만, 결국 엇나가버렸다. 당신이 총에 맞은 이후 꿈을 꾸지 않는다는 세브린느의 고백은 기괴한 순정을 담고 있다.

부뉴엘은 서로를 향한 이 기괴한 헌신을 비웃지 않는다. 잇송에게 사실을 들은 후 눈물을 흘리던 피에르가 일어나는 샷은, 부뉴엘식 현실 파괴지만 조롱의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일어난 피에르는 세브린느를 비난하지 않고 대신 휴가를 떠나자고 말한다. 이때 마차 방울 소리가 울리고 세브린느는 피에르에게 말한다. "저 소리 들려요?" 소리를 따라 발코니로 나간 세브린느의 시점 샷 뒤에 이어진 반응 샷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마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 마차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세브린느를 향한 반응 샷임에도 가상선이 파괴된 이 샷은, 더 이상 굴절된 욕망과 조응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라진다. 부뉴엘은 세브린느가 가지고 있는 욕망과 일탈은 큰 죄가 아니였으며, 그저 왜곡된 부르주아 체제 하에 세속적인 해소 행위에 불과했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세브린느는 욕망의 소리를 피에르와 공유하면서 행복해진다. 이상한 꿈은 끝났고 남은 것은 달콤한 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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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타임 [Playtime] (1967)

2015/01/18 - [Deeper Into Movie/리뷰] - 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그 자체로 완결된 전설로 남은 작품이다. 왜 타티는 성공적이였던 [나의 아저씨] 후속작을 만들지 않고 8년동안 이 영화를 만들며 침묵을 지켜왔는가? 적어도 그가 반복하는걸 싫어했다는건 명백했다. 그래도 [플레이타임]은 성공을 믿고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너무나 무모한 영화다. 타티가 [플레이타임]를 위해 만들려고 했던 장소는 건물 몇 개가 아닌, 그 자체로 완성된 도시였다. 하나의 세계를 그대로 담은 세트로 만든다는 시도는 도무지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비물질인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를 설계해 담아야 하는 매체다. 그렇기에 편법이 동원되는데 타티는 그걸 거부한 것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처음부터 실패가 내정되있는 선택이다. 실제로 타티는 영화의 실패로 몰락했고 평생 거기서 못 벗어났다.

대체 뭘 했길래 타티는 그렇게 파산했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던가. 영화의 시작을 보자. 재즈 음악과 하늘이다. 처음부터 타티가 왜 그런 세계가 필요했는지 명징하게 설명된다. 재즈 음악의 복잡한 임프로바이제이션과 거대한 70mm 스크린과의 결합. 타티는 복잡하지만 자유롭게 요동치는 에너지를 영화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내린 다음 타티가 시작하는 곳은 공항이다. 어찌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스크린을 통해 영화 내 세계로 관객이 초청받는 것이다. 그것이 배우의 얼굴이든, 풍경이든 영화의 시작은 어떤 대상을 다룰지를 보여주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플레이타임]은 그 전통을 공항과 관광객으로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타임]의 도입부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윌로 씨가 아닌, 윌로 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장소에 배치된 무수한 사람들이다. 관객은 윌로 씨가 언제 나타날지 기다리면서, 거기 배치된 사람들의 행동과 대사를 유심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그 행동들과 대화들은 사실 그렇게 큰 의미가 없으며, 오직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지문들이다. [플레이타임]은 처음부터 타티는 왜 자신에게 그런 무모한 짓이 필요했는지 설명해낸다. [나의 아저씨]에서 팬터마임과 무언극, 무성 코미디 영화의 결과물을 총결산한 타티는 그 총결산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영화적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사가 아니라 윌로 씨가 만들어내는 행동이였던걸 생각해보라. [플레이타임]은 그런 행동의 업그레이드라 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업그레이드는 범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플레이타임]은 정말 아무도 가지 않았고, 쉽게 갈 수 없는 아름다움에 훌쩍 도달한 영화다. 윌로 씨와 바바라라는 미국 관광객이 표면적인 주인공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 큰 스크린에서 그들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타티빌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소우주에서 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타티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플레이타임]에 이르면 이야기는 몇 단어로 축소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른다. 윌로 씨가 우연히 만난 바바라에게 여러 소동 끝에 꽃을 준다. 이게 전부다. [플레이타임]은 [윌리를 찾아라]가 그랬듯이 의미도 맥락도 거의 없어진 거대한 흐름이 만드는 리듬에 동참하고 발견해야지 영화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서 서브플롯은 슬그머니 등장하고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씬스틸러 역할을 한다.

자크 타티는 분명 이 영화에서 장 르누아르가 [게임의 규칙]에서 만들었던 흐름의 영화을 명백히 인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로 대표되는 유동적인 카메라와 끊임없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통해 영화의 흐름을 잡아냈다. 타티는 거기서 더 나아가 기어이 인물을 삭제하고 도시 속 거대한 흐름에 주목한다. [플레이타임]의 코미디는 그런 거대한 흐름이 엉키는 순간에서 드러난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초자연적으로 사랑스러운 재해인 윌로 씨가 중심이 되어 주변을 돌아다니며 흐름을 만들어냈다면, [플레이타임]에서 흐름은 이제 윌로 씨에 머물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정부적 카오스로 넘어간다.
 
타티는 다양한 도시의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그 역동적인 에너지와 흐름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길을 잃거나 엉뚱한 슬랩스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아저씨]에 등장했던 (현대 건축의 창시자 르 코르뷔지에가 흡족해할만한) 아르펠 씨의 집이 확장된 타티빌은 그렇게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데다, 타티의 카메라조차 그들을 위해 움직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타티는 약간 짗궃게 '르 코르뷔지에 씨 보고 계신가요.... 당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철근과 유리의 도시에선 인간들이 이렇게 산답니다 (에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타티가 바라보는 관광객과 도시인들은 강박적인 목적을 위해 우스꽝스럽게 바둥바둥거리는 사람들이기에 이 우스꽝스러움은 강해진다. 

반대로 바바라와 윌로 씨는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다. 바바라는 줄곳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사진에 담을 기회를 노리려고 하고, 윌로 씨는 [나의 아저씨]에서 그랬듯이 어리숙한 표정으로 휩쓸리면서 선의에 가득찬 행동을 한다. 물론 그런 선의도 하나의 카오스를 일으키는건 자명하다. 그 점에서 [플레이타임]은 샤를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바라보았던 '근대적 산보자로써의 대도시' 파리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근현대인인 윌로 씨와 바바라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도시를 거닐며 자신이 포함된 많은 사람들과 흐름을 관찰하고 동시에 휩쓸린다. 때문에 이 영화가 [심시티]가 나왔던 시대에 나왔다면 좀 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웠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 영화의 비전은 소름끼칠 정도로 거대한 도시 문명이나 사람들의 공시성을 현미경으로 들어다보는 [심시티]나 [심즈]의 비전을 닮았다.

종종 타티는 그런 엄청난 흐름 속에서 어처구니 없는 장면을 잡아내곤 한다. 윌로 씨가 군대 동기를 만나러 아파트에 들어가는 시퀀스이 그렇다. 여기서 타티는 음향마저 빼버린 채 아파트 하나를 만화 패널처럼 그려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타티는 창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고정하고 창틀로 구성된 두 프레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무성영화적으로 구성한다. 두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이 동시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걸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인물이 개를 끌고 지나가는걸 볼 수 있다. 카메라가 위치한 곳에서 좌석이 되고, 그 앞에서 일어나는 서로 무관한 두 개의 흐름이 하나의 프레임에서 움직인다. 타티는 그게 바로 영화라고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타티의 이런 생각은 고전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카메라의 자의식을 생각했던 현대 영화에 가깝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레스토랑의 재난은 타티빌의 미학을 한번에 압축하고 그걸 뛰어넘는 장면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레스토랑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들어오고 밴드는 연주를 하고 주문은 계속 들어오고 종업원의 옷은 끊임없이 더러워지고, 대화는 넘쳐나고, 몇몇 사람들은 떠나고.... 타티는 이 시퀀스에서 몇몇 상황을 정한 뒤 그것을 꾸준하게 반복/변주해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유머를 만들어낸다. 그 장관의 몰입도가 엄청나고  길이도 제법 되는지라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영화적 임프로바이제이션에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은근 폐소공포증을 자극하게 한달까. 그렇기에 이 시퀀스 말미에 윌로 씨와 바바라가 거리로 나올때 해방감을 느끼는 거겠지만.

하지만 그 임프로바이제이션에 관객이 점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타티가 카메라를 윌로 씨와 바바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바바라가 무대에 올라와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에 타티는 클로즈업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알려준다. 그는 도시 문명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윌로 씨나 바바라, 미국인 부자 같이 그 카오스를 느긋하고 유머러스하게 즐길수 있는 인물들이 있는 한 괜찮을거라고 말한다. 영화 도중 히피를 연상케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타티가 히피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카오스에서 히피는 자연스럽게 양복 입은 신사숙녀들 사이에서 잘 어울린다. 윌로 씨가 바바라에게 꽃을 건네주고 (그나마도 대신 부탁하기 때문에 만나지는 못하지만) 바바라가 행복해하는 결말은 그 점에서 타티의 낙천주의가 발하는 멋진 결말이다.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의 종말은 비참했지만, 타티는 적어도 어렵게 살긴 해도 불행하지는 않았을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평생 꿈꿨던 영화를 완성했고 아마 고생은 했어도 만든 사실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윌로 씨의 익살스러움과 반대로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자크 타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머에 솔직하고 거기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길 바라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큰 스크린에서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에 방문하길 바란다. 이 영화는 진정으로 영화가 무엇인지, 성숙하지만 낙천적인 긍정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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