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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1970년대영화 (6)
자유의 이차선 [Two-Lane Blacktop] (1971)

2016/12/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1966)

2017/01/26 - [Deeper Into Movie/리뷰] - 복수의 총성 [The Shooting] (1966)

[자유의 이차선]은 이전작처럼 길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길 위에 선 몬테 헬만의 인물들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고,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으로 서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전작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먼저 시대가 현대로 변했고 주인공 자리엔 잭 니콜슨 대신 비치 보이즈의 데니스 윌슨과 싱어송라이터 제임스 테일러가 대신하고 있다. (헬만이 사랑한 워렌 오츠는 계속 나온다.)

또한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길을 잃거나 도주해야 했던 이전작과 달리, [자유의 이차선]의 주인공들은 아예 목표 의식이 희박해져버렸다. 부조리한 상황 역시 훨씬 은밀하게 영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운전수와 정비공은 드래그 레이스를 한다. 그러다가 경찰이 등장해 도망쳐 어디론가 달린다. 대체 얼마나 달렸나 싶을까 잠시 차를 멈춰세웠을때 한 여자가 몰래 차를 탄다. 하지만 운전수와 정비공은 여자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운전수와 정비공이 G.T.O를 만나면서 헬만은 그만의 기이한 실존주의를 슬슬 펼쳐가기 시작한다. 운전수와 정비공과 달리 나이가 많아보이는 G.T.O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캐릭터다. 그는 히치하이킹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다를 떨어대며 끊임없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다. 그는 여자에게 영영 떠돌수 없다고 말하며, 스피드에만 집중하는 주인공 일행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자신에게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주인공 콤비랑 별반 다르지 않은 캐릭터다. 그의 수다는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헬만은 G.T.O.와 주인공 일행을 대조시키면서 캐릭터들이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관객이 재고하도록 한다.

이들이 뉴욕을 향해 경주 내기를 걸면서 [자유의 이차선]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자유의 이차선]은 모든 요소들은 헬만 특유의 완만한 리듬에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장소들은 비슷비슷하기 그지 없다. 저예산의 한계였을수도 있겠지만, 헬만이 선정한 공간들은 유달리 시간이 고여 흐르지 않는 곳들이다. 모텔, 휴게소, 농장, 주유소, 불법 드래그 레이싱, 한적한 시골길... 길과 길 사이엔 아무것도 없거나 무덤덤한 사건들 뿐이다. 가끔 등장하는 불법 드래그 레이싱 역시 그런 무덤덤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질주와 휴식 이 두 개의 행위를 오갈 뿐이며, 그 이상의 요소들은 집어넣지 않는다.

요컨데 [자유의 이차선]은 익명의 영화다. IMDB 가서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캐릭터는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워렌 오츠가 맡은 G.T.O처럼 가명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들에게 개성을 부여하는 것은 미국 머슬카 문화와 거기서 파생된 레이싱, 기계 부품들이며 상대방에 대한 관심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자동차와 길 위의 열정을 그려냈던 [길 위에서] 같은 비트 기행 문학을 오마주/패러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서 그렸던 저항과 흥청망청한 열정은 밋밋한 미국 중서부 풍경 속에서 가라앉아버리고, 프리 섹스의 대안 공동체는 동승객에 대한 덤덤함으로 대체된다. 이 영화에는 섹스는 암시로 처리된다.

헬만은 대신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중음악부터 시작해 자동차 음향이 스크린을 채우고, 음향은 조용한 인물들과 밋밋한 풍경을 대신해 리듬을 그려간다. 기이하게도 이 순간 헬만은 로베르 브레송과 닮아간다. 이 영화의 연기는 제한적이다. 비전문 배우인 제임스 테일러와 데니스 윌슨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며 연기하는 워렌 오츠조차 많은 연기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브레송이 그랬듯이 공허함과 침묵의 공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어둠에 묻혀있다가 점점 밝아오는 와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클로즈업 쇼트들의 감흥은 쉽사리 잊기 힘들다.

대놓고 코믹한 영화는 아니지만 [자유의 이차선]은 은근 무성 코미디스러운 구석이 있는 영화다. 주인공 일행과 G.T.O가 벌이는 경주는 사실상 전 재산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지만, 헬만은 이 경주를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에 은근히 가볍게 다루고 있다. 운전수랑 정비공은 그닥 잃어도 별 상관은 없어보이고, 여자는 애시당초 제 3자다. 심지어 이 경주에 안달복달해야할 G.T.O조차도 종종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정신 팔린 모습을 보인다. 캐리커처화된 히치하이킹 승객들도 그렇고 고작 앞섰다 싶으면 자동차가 고장나 뒤따라온 경쟁 상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헬만은 전지적 작가의 권능을 활용한 뒤 슬쩍 웃는다.

[자유의 이차선]이 작가로써 몬테 헬만을 파악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하면, 은유적이었던 서부극과 달리 좀 더 본격적으로 196-70년대 미국 청년 문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일단 주역 둘 캐스팅이 1960년대 미국 록 음악에 중요한 뮤지션이다. 또한 이 영화에 빼곡히 등장하는 자동차에 대한 디테일들은 히피즘과 결합된 자동차 개조 문화인 커스텀 컬처를 반영하고 있다. 어느 정도 상업적인 고려도 있었겠지만, 헬만은 팝 문화의 아이콘과 당대 로드 무비 장르를 끌어들여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실존적인 침묵 (실제로 헬만은 연극 무대에 있을땐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리기도 했다.)으로 가득찬 여정에 시대상을 반영하려고 한다. 그들이 서부에서 시작해 뉴욕으로 가는 이유도 헐리우드에 대한 환멸과 뉴욕의 현실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당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성 캐릭터의 활용도 눈에 띈다. 다른 주인공들처럼 이름이 없는 이 여성 캐릭터는 [바람 속의 질주]와 [복수의 총성]에서 밀리 퍼킨스와 함께 발전시킨 도발적인 여성 캐릭터 활용과 맥이 닿아있다. 이 여자는 무심하게 남자들의 경주를 지켜보며 관계를 가지고 차를 바꿔탄다. 그녀는 애초에 어느 남자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캐릭터며, 자기 흥미와 욕망에 따라 여정을 함께 한다. 마지막에 이 여자가 떠나는 것으로 경주가 마무리되는 것도 흥미롭다. 여자는 마치 자동차가 질렸다듯이 휴게소에서 만난 바이크를 탄 남자랑 같이 떠나버리고 두 남자들의 경주는 흐지부지된다. 

G.T.O.는 여느때처럼 다른 손님을 태우며 자신의 차가 방금 전에 있었던 두 남자와의 경주에서 땄다고 거짓말한다. 한편 운전수와 수리공은 드래그 레이싱을 하러 간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에 가지 않고, 서부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그 사이의 황야를 방황할 뿐이다. 몬테 헬만은 196-70년대 미국 도로를 달린다는 것, 나아가 청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무덤덤한 황야를 떠돌아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방황이 마냥 무기력한건 아니라고 헬만은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드래그 레이싱이 시작하기 전 불타오르는 필름이다. 이 불타오르는 필름이 [바람 속 질주] 마지막에 등장하는 질주하는 말과 주인공의 쇼트에서 확장된 건 명백하다. 헬만에게 196-70년대 미국 청년들의 삶은 과묵한 불꽃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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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 [Ο Θίασος / The Travelling Players] (1975)

한 사람이 등장해 [양 치는 처녀 골포]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선언한다. 다음 샷.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역에 도착한다. 카메라는 그들이 역 앞에 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멈춰 섰을때 카메라는 그들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이 프레임이 친숙하다고 생각하다면, 정확하게 봤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이 등장인물들을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다룬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뜬다. 1952년. "고참들이 있었고 젊은 배우가 있는" 이 유랑 극단은 옛날에 들렀던 마을 에이온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는 유랑극단이 건물로 들어가고 난 뒤, 갑자기 유세 방송을 바꿔버린다. 파파고스 (로 위장한 그리스 독재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는 괴벨스와 메탁사스로 바뀌고, 국가소년단원들이 단복을 입고 그들을 맞이해야 한다.

[유랑극단]은 [양 치는 처녀 골포]를 올리려는 극단의 시도와 좌절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시작해 전후 독재 정권에서 끝난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극단을 떠나가고 아이가 태어나고, 새로운 단원이 들어온다. 그들을 좌절로 밀어넣는 것은, 그리스 독재 권력이다. 파파고스와 괴벨스, 메탁사스가 하나의 시퀀스에서 음향 몽타주로 얽히는 장면은 [유랑극단]의 정치적 지형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앙겔로풀로스에겐 2차 세계 대전 파시즘과 전후 파시즘이 하나의 흐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하나의 몽타주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민중들은 다르다. 사실 [유랑극단]의 서사를 복기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선형적으로 흐르는 듯 하면서도, 헷갈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설명 대신 앙겔로풀로스가 이끌어오는 이름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다. [유랑극단]의 시퀀스는 단일한 시간이 아닌 여러 개의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형적으로 흐르는듯 하다가 긴 독백을 빌어 과거를 회고하거나 반대로 기나긴 롱테이크 속에 돌연 시간을 뛰어넘는다. 배우들은 카메라를 보면서 당시 시대를 설명하거나, 현실과 연극 무대의 연출이 겹쳐저 아이러니한 신화적 비극을 만들어내거나, 사람들이 사라진 텅 빈 화면 위에 울려퍼지는 전쟁을 암시하는 음향들은 끊임없이 화면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둔다. [유랑극단]은 하나의 몽타주로 이뤄진 파시즘이 어떻게 역사를 난도질했는지, 의도적인 분절을 통해 관객들이 인식하길 유도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 민중을 다룰때 [유랑극단]은 그리스 신화를 빌어온다. [유랑극단]의 등장 인물들은 엘렉트라, 오레스테스, 아가멤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원형적 비극을 그리스 현대사와 연결시킨다. 한국인들이 [유랑극단]를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 비극이 어떻게 재해석되어 있는지는 완벽하게 이해하긴 쉽지 않을것이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비극적인 관계에서 유추할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유랑극단]의 서사가 퇴장과 이별을 통해 전진한다는 점은, 허우샤오셴의 [비정성시]만큼이나 한국인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한국사를 닮아있다. [유랑극단]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폭력적인 흐름에 자유롭지 못하고 숙명론적인 퇴장을 받아들어야 한다. [유랑극단]을 만들면서 앙겔로풀로스가 자크 리베트의 영화를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세계를 무대처럼 다루고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서사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랑극단]은 리베트 영화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 폭력적인 흐름은, 상술했던 음향 몽타주와 파시즘과의 관계랑 연계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음향 몽타주는 총소리다. 총소리가 들릴때마다 모여있던 민중들은 그 소리에 놀라 도망간다.)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는 그 큰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 빨치산이 되지만, 그들은 영화 말미에 패배한다. 심지어 오레스테스는 밀고자였던 후임 단장을 처벌했음에도, 유랑극단의 일그러짐 나아가 그리스사를 정화하지 못한다. 와중에 남아있던 엘렉트라는 강간당한다. 이들의 싸움과 패배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조각나버린 영화적 시간에서 탈출하려는 시도와 실패를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을 가로지르며 행진할 수 있는 건 나치-왕당파-파시스트 뿐이다.

영화 속 [양 치는 처녀 골포]가 지극히 통속적인 희극임에도 비극으로 다가온다면, 끊임없이 일관된 파시즘에게 짓눌림에도 극을 올리려는 시도가 정치적 저항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희생양이 되던 영국과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매력에 이끌려 그리스를 떠나더라도, 좌파 투쟁 끝에 처형당하더라도 유랑극단은 끊임없이 [양 치는 처녀 골포]를 올리려고 한다. 그것은 픽션이기에 가능한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전향 선언을 한 필라데스와 반대로 옥사한 오레스테스를 목도한 엘렉트라가 떠나버린 여동생 크리소테미스의 아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슬프다. 허우샤오셴의 가족들이 그 비극 속에서도 식탁으로 돌아온다면, 앙겔로풀로스의 극단원들은 희극을 올린다. 한마디로 [유랑극단]은 시지포스적인 비극이다.

그리고 카메라가 있다. [유랑극단]의 카메라는 처연하고 아름답게 그 분절된 시공간과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 앙겔로풀로스의 카메라는 프레임 속 그리스 민중들을 군무처럼 다룬다. 하지만 그들은 1940년대에서 50년대로 넘어온 파시스트들처럼 분절된 시공간을 넘지 못한다.그들은 오직 서사를 찢고 등장하는 소격 효과 시퀀스에서만 자신의 비극을 토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격 효과가 끝나면 다시 역사의 비극에 투신해야만 한다. 단체이면서도 뿔뿔이 흩어져만 가는 유랑극단은 그 점에서 지극히 앙겔로풀로스적인 피사체다. 어떤 지점에서 [유랑극단]은 30년 이상을 이어갈 앙겔로풀로스만의 인물 동선을 완성시킨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끝은 다시 에이온에 도착한 유랑극단이다. 하지만 이 결말 시퀀스의 시간대는 1952년 이후가 아니라 1939년이다. 이 결말이 당혹스럽다면, 시작 (1939년)과 끝(1952년)이 뒤집어져 있기 때문이다. 앙겔로풀로스는 수미상관적인 미장센을 이용해 루프물마냥 결말을 짓는다. 하지만 관객들은 두 쇼트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뒤집혀진 결말은 영화의 정치적 지향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며, 1970년대 중반 그리스 현실에 대한 앙겔로풀로스의 대답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1970년대에 만들어졌음에도 끝내 1952년을 넘지 못하고 30년대에 50년대 사이를 계속 헤맨다. 그리고 헤멤의 끝에서 [양 치는 처녀 골포]는 겨우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는 [유랑극단]을 만들면서 막 파파도풀로스 독재 정권에서 해방된 그리스가 어디로 가야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유랑극단]은 그 점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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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달려가는 차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옷차림과 멋진 저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제목이 지칭하는 부르주아라는걸 알게 된다. 부르주아들은 저택의 주인 부부 앨리스와 앙리 세네샬이랑 같이 밥을 먹으러 왔다. 하지만 앙리는 일하느라 바쁘고 결국 앨리스가 그들과 함께 만찬을 하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 뒤부터는 조금 이상해진다. 앨리스와 부르주아들은 고오급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식당의 주인이 죽는 바람에 밥을 먹지 못한다. 부뉴엘은 시침 뚝 떼고 평이한 어법으로 부르주아의 일상을 그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비일상적인 사건을 등장시키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뒤집는다.

첫번째 좌절 시퀀스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식당을 나오는 이유가 예의와 체면이라는 이유가 강하게 대두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짐짓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약속이 파토난 시퀀스 다음에 라파엘이 대사로 있는 미란다 공화국 대사관에서 앙리와 프랑소와, 라파엘이 모인다.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가던 도중 라파엘은 개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반정부주의자 여성을 발견한다. 라파엘의 선택은? 옆에 있던 저격총을 들어 인형을 쓰러트린다. 이 황당무계한 라파엘의 행동은, 그 자체로 훌륭한 블랙 유머이면서도 부르주아의 가치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예의와 체면은 상대와 마주하지 않으면 쉽게 벗겨지는 가면이다.

사실상 [절멸의 천사]의 리메이크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하지만 구성 면에서는 훨씬 대담한 영화다. [절멸의 천사]가 집 밖을 나가려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고 난파된 상황을 서서히 비틀어갔다면,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만찬을 벌인다는 행위를 중심에 두고 사방팔방 에피소드가 뻗어나가는 영화로 만든다. 몇몇 장면은 순전히 만찬을 기다리다가 끼어든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진행된다. 멕시코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면서 부뉴엘의 영화는 서사 형식이 대담해지는 구석이 있는데 (로드 무비 구성만 세워둔 뒤 온갖 상징/풍자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은하수]가 대표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그 대담해진 서사 구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파악하기 편하게 구성된 편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시도와 좌절이라는 두 축을 오가는 시지프스와 같은 영화다. 그들에게 만찬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는 행위이며, 그 항유는 식탁 뒤쪽에서 노동자들을 부려먹어야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식탁과 부엌은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저택의 식탁과 부엌을 연상케 한다. 등장 인물들은 그런 계급적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심지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품위없다고 비웃는다. 코냑 마시는 법을 모르는 운전 기사를 데려다 놓고 마시게 한 뒤, 저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대목은 부르주아의 교양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런 예의범절과 교양을 내세우면서도 성욕과 식욕에 주체를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원초적인 욕망들은 세네샬 부부 머리에 달려있는 풀잎처럼 집요하고 너저분하게 매달려 그들을 까발리고 모욕한다. 이 위선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조롱이 이중성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부뉴엘과 카리에 칼끝은 부르주아에 머물지 않는다. 미셸 피콜리가 연기하는 주교 역은 부뉴엘의 가톨릭을 향한 조롱을 압축한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 결말 이후 이 캐릭터가 아무 언급없이 사라지는 부분은 한이 서린 악의가 느껴진다. 부뉴엘에게 종교란 세속적인 감정 앞에서 무너지고 소멸해버리는 하찮은 것이다. 온갖 부정부패로 넘쳐나는 미란다 공화국에 이르면 할 말은 더 없을 것이다. 부뉴엘과 카리에의 조롱은 딱히 숨기는 부분 없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부뉴엘 영화가 된 것도, 그 대담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에 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부뉴엘과 카리에의 징벌이 떨어진다. 부르주아들은 영화 내내 계속 만찬을 방해받은 뒤, 좌절한다. 그리고 이 뒤엔 부뉴엘과 카리에가 있다. 특히 부뉴엘이 만찬을 방해하는 방식은,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어이없는 자유연상으로 이뤄진다.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하기도 하며, 젊은 장교의 넊두리를 듣다가 식당의 음식이 모조리 사라졌다는걸 알아차리기도 하며, 갱단이 총을 쏴 죽기도 한다. 부뉴엘이 꾸려가는 자유연상은 파시스트의 폭력과 종교의 엄숙주의을 풍자하는 것이기도 하며, 유령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별다른 개연성 없이 서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유연상이 계속 이어질수록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유령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은근슬쩍 튀어나온다. 부뉴엘과 카리에는 서사상에서 가능할것 같지 않은 상황을 기어이 이끌어내 진행시키면서 영화 자체의 현실성을 파괴한다. 델 토로를 비롯한 라틴 환상 영화들의 대가가 부뉴엘의 어떤 지점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부뉴엘은 이런 자유연상을 도구 삼아 환몽 구조를 통해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들은 이 환몽을 통해, 욕망 때문에 도래할 파국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피는 도피일뿐. 부르주아는 도피한 곳에서도 끊임없이 욕망과 파국을 만나야 한다. 개연성 없는 자유 연상과 환몽 구조 속에서 부르주아들의 캐릭터들은 얄팍해져 가고 자신의 죽음 역시 한낱 개꿈으로 취급된다. 심지어 그 개꿈엔 전혀 관련없는 경찰들도 포함된다. 부르주아들이 들어간 장군의 저택이 아무런 복선없이 연극 무대로 돌변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꿈과 풍자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준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저택은 언제든지 갈아치울수 있는 무대 장치에 불과하며, 부르주아와 만찬은 연기의 재료로 격하된다.

이 영화의 결론은 죽음이 다시 꿈으로 무화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부뉴엘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경멸스럽게 여겼던 캐릭터는 라파엘인것 같다. 착취가 은밀하고 비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부르주아랑 달리 그는 정말로 국민들을 쥐어짜고 경멸하는 파시스트 권력자다. 심지어 라파엘은 자신을 암살하러 온 반정부주의자 여성에게 성희롱적 모욕과 동시에 비밀 경찰을 시켜 잡아가게 만든다. 그 점에서 (꿈 속 식탁 아래에서도, 꿈 밖에서도)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든 게걸스럽게 집어먹으려는 라파엘의 샷은 부뉴엘의 블랙 코미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부뉴엘은 파시스트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음에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찌질스럽게 표출해대는 파시스트를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다시, 시지포스의 반복이다. 부뉴엘이 선택한 결말은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했던 부르주아들의 행진 샷이다. 처음엔 만찬을 즐기러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샷은, 온갖 환몽 구조를 거치고 나서 결말에 등장했을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대체 저 길은 만찬이 있을 세네샬 부부의 저택으로 이어지는게 맞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건가? 확실한건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은 다시 시작될 만찬을 고대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부뉴엘은 끊임없이 부르주아의 만찬을 방해할것이다. 어둠 속 길이 마침내 환하게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걷는다. 영화의 결말은 그 점에서 벗어날수 없는 림보다. 정말이지 악랄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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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자 [Le Boucher / The Butcher] (1970)

[도살자]의 시작은 평온한 마을 전경 쇼트 직후 사소한 실수를 배치한다. 행복한 결혼식을 위해 준비하던 일꾼들 중 한 사람이 실수로 음식을 엎지른다. 이윽고 바삐 일하는 주방에 들어가면서 샤브롤은 삼각형으로 세워진 케이크 위의 신랑 신부와 진짜 신랑 신부를 매치 컷으로 이어붙인다. 고기에 대한 수다가 이어진 뒤, 관객들은 고기를 준비한 포폴이라는 남자를 소개받는다. 그런데 이 남자 앞으로 오는 건 따로 준비된 식칼과 포크에 푹 찔린 고기다. 심지어 그 다음 샷에서 샤브롤은 잘려지는 고기의 질감이 보일 정도로 클로즈업한다. 사전 정보 없이 들어온 관객이더라도 이 장면에서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샷에서 고기는 맛있다기 보다는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브롤은 아무렇지 않게 그 식칼과 고기를 치워두고 행복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작지만 불길한 메아리처럼 남는다.

그래도 주인공 엘렌에게는 별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시골로 내려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엘렌 앞에 등장한 정육점 주인 포폴은 수줍고 친절한 남자다. 결혼에 관심없고, 군대 시절이 즐겁지 않다고 회상하지만 그래도 연애하기엔 무리없는 배려심을 지니고 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서스펜스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도살자]의 초반 전개는 심심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샤브롤은 초중반를 트뤼포나 로메르의 영화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중산층 커플의 이야기로 끌어간다. 놀랍게도 그는 그들의 사랑을 이죽거리지 않는다. 엘렌이나 포폴은 많은걸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 이입하기엔 무리 없는 캐릭터고, 샤브롤 역시 그들의 사랑를 그릴때 어떤 블랙 유머 따윈 집어넣지 않는다.

하지만 엘렌과 포폴의 수줍은 사랑이 진행되는 동안 [도살자]는 도입부에서 제시되었던 이물적인 샷을 스멀스멀 퍼트린다. 처음은 비가시적인 소문이다. 엘렌은 학생들에게서 우체부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엘렌은 무심하게 넘기려고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저번주까지 멀쩡하게 춤추던 여자라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낀다. 대도시였다면 피해자는 익명의 존재로 남았겠지만 [도살자]의 배경은 얼굴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시골이다. 이 영화의 불안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상의 순간이 사라지거나 흐트러지면서 발생한다. 샤브롤은 그 불안을 점점 키워나가면서 미심쩍은 단서와 쇼트들을 엘렌 주변에 흩뿌린다. 

여기서 흥미로운 시퀀스가 등장한다. 포폴을 학교로 데려온 엘렌은 학생들에게 왈츠를 가르치는데, 이때 학생들과 포폴은 프랑스 귀족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여기서 다시 이상한 쇼트를 집어넣는다. 포폴이 잠시 벽에 기대서 엘렌과 학생들을 보는 도중, 포폴의 시점에서 엘렌의 뒷머리를 줌 인하는 쇼트가 갑자기 끼어든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관객들은 재고를 할수 밖에 없다. 대체 샤브롤은 왜 엘렌의 뒷머리를 극단적으로 클로즈업 해서 담아냈을까? 만약 포폴이 엘렌에 대한 상념을 지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면 엘렌의 뒷 모습을 중간 크기의 쇼트에서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했을건데 말이다. 게다가 직후 이어지는 포폴의 반응 쇼트 역시 어딘가 불편해보인다.
 
대체 '무엇이' 포폴을 불편하게 했던 것일까?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이 쇼트에 담긴 엘렌의 붉은 뒷머리가 포폴이 다루던 생고기랑 비슷하게 보여서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물론 머리카락과 생고기는 완전히 다른 물체지만, 적어도 이 쇼트에서 붉은 뒷머리는 지나치게 확대된 나머지, 본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수 없을 정도다. 마치 조지아 오키프의 대상을 확대시켜 추상적으로 찍은 사진들처럼 말이다. 극단적으로 확대된 이미지는 본 의미를 잃고 생경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추상화된 붉은 이미지는 고기의 색감을 떠올리기 충분하다. 샤브롤은 우아함을 중시했던 프랑스 귀족을 분장한 인물들 사이에 극단적으로 확대된 뒷머리 쇼트를 집어넣으면서 이물감을 발생시킨다.

[도살자]의 오프닝 크레딧은 동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그 오프닝을 잊지 않았다듯이 영화 속에서 동굴을 등장시킨다. 체험학습을 위해 아이들을 데려간 엘렌은 이 동굴이 원시인이 살던 동굴이라 설명하고, 이에 아이들은 잠들어있던 원시인이 깨어난다면 분명 착할거라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 직후 엘렌과 아이들은 시체를 발견한다. 살인 현장의 피가 하얀 샌드위치 위로 떨어지는 장면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문명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샌드위치의 깔끔한 하얀 이미지 위에 원시적인 피가 떨어지면서 얼룩지기 때문이다. 동굴과 식빵은 서로 화해할 수 없어보인다.

사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후반부터 명백해진다. 바로 끊임없이 야만과 폭력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포폴이 범인이었다. [도살자]가 흥미로운 점은 엘렌의 일상에 비일상적인 살인과 폭력이 끼어들면서도, 엘렌과 살인마 포폴의 연애담을 장르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은 이 사실을 눈치채는 순간 포폴이 엘렌을 죽일지 모른다고 긴장하게 된다. 서스펜스의 공식에서 남성 연쇄살인마와 여성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연쇄살인마가 여성을 착취하면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브롤이 두 캐릭터를 존중하면서 신중하게 감정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도살자]는 쉽게 착취적인 태도로 빠지지 않는다.

모든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는 그 점에서 [도살자]의 섬뜩하면서도 애절한 매력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늘거리는 커튼을 보여준 다음, 어둠 속 교실에 홀로 있는 엘렌 앞에 불쑥 나타나는 포폴의 샷은 히치콕에 대한 존경심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순간 포폴은 부정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인마다. 샤브롤은 포폴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더욱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도 포폴과 엘렌의 로맨스는 일상이 끝난 오후에서 밤에 이뤄졌지만, 살인이 등장한 순간 샤브롤은 포폴과 엘렌의 로맨스는 빛 아래에서 이뤄질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하지만 포폴은 쉽게 단죄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도 샤브롤은 명백히한다. 때문에 [도살자]의 멜로 드라마는 도피적인 면모가 강하다. 이런 도피적인 멜로 드라마는 자해한 뒤 죽어가는 포폴을 싣고 엘렌이 밤의 도로를 질주할때 극한에 달한다. 이 순간 관객은 포폴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동정하고 그가 엘렌과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 포폴은 깨어났지만 환대받지 못하는 착한 원시인이며, PTSD를 앓는 군인이다. 구체적인 정치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포폴의 캐릭터는 알제리 전쟁의 맥락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 들어갔을때 샤브롤은 병원 의사들이나 병원 풍경을 보여주지 않고 포폴과 엘렌의 샷-리버스 샷만을 고집하면서 둘만의 감정을 기어이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 완성은 동시에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고, 엘렌의 마음을 간직한 채 포폴은 쓸쓸히 죽는다. 샤브롤은 이제 홀로 남은 엘렌의 모습을 보여준다. 엘렌을 보여주는 마지막 쇼트야말로 [도살자]의 무표정한 쓸쓸함을 집약하고 있다. 다시 찾아온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뒤, 엘렌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때 샤브롤은 엘렌 뒤에 물안개와 불이 켜진 차 전조등을 보여준다. 엘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남겨진 엘렌이 이어갈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샤브롤은 그저 물안개라는 흐릿한 상황 속에 등대처럼 켜진 전조등을 통해 엘렌과 포폴의 사랑을 집약한다. 파국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무의미하지 않았다듯이. [도살자]가 만약 샤브롤의 대표작으로 불릴 수 있다면 샤브롤의 무표정함이 상당히 절절하게 메아리치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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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 Mrs. Miller] (1971)

(누설이 있습니다.)

로버트 알트만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시작은 그래도 익숙한 서부극 도입부다. 떠돌아다니던 한 남자가 개척 마을에 당도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전형적인 서부극의 도입부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알트만은 심술궃게도 서부극에서 기대할법한 상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주인공 존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거나 악당과 대치하는게 아니라 카드를 꺼내들어 포커판을 벌인다. 그 광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맥케이브에 대한 소문 (아이러니하게도 "악당을 잔혹하게 죽인 악랄한 총잡이"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서부식 소문이다.)을 수군거린다. 다음 시퀀스. 맥케이브는 어느새 이 마을 개발에 관여하고 있다. 요컨데 도입부 시퀀스와 다음 시퀀스 간의 격차가 느껴진다.

맥케이브가 어느 정도 기틀을 닦아놓은 마을에 영국인 포주 콘스탄스 밀러가 당도한다. 밀러 부인으로 불리는 이 여자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업가다. 그는 맥케이브에게 마을을 문명화할수 있는 사업을 제안하고, 그들은 계약을 맺는다. 마을 창녀의 구질구질함을 지적하며 투자 비용을 요구하는 밀러 부인의 대사는 알트만이 서부의 야만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하는지 잘 알려주는 대사다. 영국인인 밀러 부인이 보기엔 미국 서부는 문명의 손길이 못한 낙후된 지역에 불과하다. 

사실 고전 서부극에서도 야만성은 미화되지 않고 오히려 거리감을 두고 섬뜩하게 그려졌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접근 방식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다. 이 영화의 관점은 존 포드를 비롯한 서부극 감독들보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가깝다. 자연히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속 서부는 다른 모습을 띌 수 밖에 없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관계는 사업 투자와 개발 계획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며, 인물들 역시 우아함을 찾아볼 수 없다. 섹스 조차도 일종의 상거래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보타이 정장, 털코트를 입은 채 트름을 하며 돌아다니는 맥케이브는 우아하고 고독한 무법자가 아니라 약삭빠른 도박가이자 지방 유지에 가깝다.

자연히 배경이 되는 공간 역시 완전히 다르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일반적인 서부극에게서 기대할 쨍한 햇빛 아래의 사막이 아니다. 오히려 깊숙한 산 속 눈내리는 마을의 질척한 진흙과 더러운 눈더미로 가득한, 척박한 동네다. '눈'과 '비'는 그 점에서 일종의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함과 동시에,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있다. 여기다 산으로 둘러쌓여 평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주변 환경은 유폐된듯한 느낌마저 주게 한다.

여기서 촬영 기법에 대해 언급해야 되겠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인 빌모스 지그몬드는 렌즈에 뿌연 느낌을 강조하는 디퓨전 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디퓨전 필터는 극도로 로맨틱한 질감을 강조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대다. 이 영화의 질감은 (고감도 필름을 썼는지) 필름 입자가 강조된, 탁하고 희뿌연 질감이다. 이 거칠거칠한 화면에다가 상술한 눈과 비가 상시 내리는 작중 배경이 겹쳐지면 영화 속 한기는 단순히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한기의 영화다. 그리고 그 한기 속 서부의 정경은 로맨티시즘이 깃들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서서히 꽁꽁 싸맸던 현실주의자의 갑옷을 벗어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알트만이 선택한 '탈의'의 방식은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는 반-서부극으로써 자본주의와 서부극으로써 전통적인 공동체를 오가면서 생긴다. 발단은 지방 유지들의 재산을 탐식하는 기업의 등장이다. 번창하는 맥케이브의 마을에 눈독들이는 해리슨 쇼네시 광산 회사가 맥케이브에게 접근했을때, 맥케이브는 거만을 떨면서 그들의 제안을 거부한다. 자본가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기에 가능했던 행동이다. 여기까지는 이전 장면들처럼 철저히 자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해 있다.

맥케이브가 뒤늦게 마음을 돌려서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을때, 실책은 돌이킬수 없는 파국으로 돌아온다. 회사에서 고용한 킬러 삼인조 (버틀러, 브리드, 키드)을 문명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했던 맥케이브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로 돌아간다. 이 삼인조는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서부극의 사악한 악당들이지만, 동시에 거대 기업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묘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맥케이브의 토착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는 현대화된 기업 앞에서는 사라져야 하는 서부와 동일시된다. 알트만은 여기다 맥케이브가 무법자는 커녕 총조차 제대로 쏘지 못하는 건달이라는걸 폭로하면서, 맥케이브를 강제적으로 서부의 사나이가 되도록 몰아붙인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지금까지 폐기했던 고전 서부극의 가치로 은근슬쩍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일면 자본주의에 찌든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들의 인상이 달라지는 부분도 이 지점부터다. 맥케이브는 자신의 본성이 건달이라는걸 잘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꼬이는 여자는 창녀 밖에 없다고 자조한다. 그의 자조는 그가 왜 밀러 부인이 제시한 매각/이주 제안을 거부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마을 경영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하는 게이머처럼 공동체의 정 따윈 관심없고 이득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답은 간단하다. 이 마을에서 그는 선구자로 존경받기 때문이다.

아마 별 의미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하루하루 살아온 맥케이브에게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었을 것이다. 킬러 삼인조에게 거부 당하고 맥케이브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 비티와 알트만은 자신의 성취감이 부정당해서 화가 났다는걸 명백히 한다. 이 지점부터 맥케이브는 고전적인 서부 사나이의 모습로 돌아간다. 밀러 부인과 다툰 뒤, 사과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통속적이지만 제대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 맥케이브는 고결함 따윈 없는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사업가지만, 그 이상의 탐욕을 바라지 않고 만족해하는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이며, 거칠고 투박한 로맨티스트다. 이 너저분한 이상주의자가 마침내 모든 외피를 벗어던졌을때, 밀러 부인은 그 진심을 인정하게 된다. 일견 서부극과 어울리지 않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레너드 코헨의 포크곡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때도 이때다.

하지만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자본주의를 다루는 영화다. 이 말은, 맥케이브의 이상주의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밀러 부인은 그걸 잘 알고 있던게 분명하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결말은 차갑지만 비장미가 느껴지는 서부 사나이의 비극과 살아남을 자들의 단결, 한 개인의 모호한 동선을 통한 애도가 겹쳐져 있다. 같이 섹스를 하고 난 뒤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를 떠나 쓸쓸히 사라진다. 알트만이 밀러 부인이 어디로 갔는지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동안, 맥케이브는 총을 꺼내들고 킬러 삼인조와 어설프게 싸우다가 눈 속에 파묻혀 죽는다. 맥케이브가 역사 속으로 냉동되는 동안 알트만은 불타오르는 교회를 끄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을 중간중간 보여주면서 아이러니를 강화한다. 그리고 알트만은 맥케이브가 줬던 보석을 바라보는 밀러 부인의 눈을 클로즈업 하는걸로 끝난다.

밀러 부인의 심경이 제대로 표현되진 않지만, 적어도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와 킬러 삼인조간의 대결, 나아가 해리슨 쇼네시의 탐욕을 막을 수 없는 위치다. 그렇기에 밀러 부인은 그저 개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도주를 제안하지만 맥케이브는 거절하고 죽는다. 밀러 부인이 어떻게 살지는 미지수지만, 해리슨 쇼네시 손아귀에 들어간 마을에서 밀러 부인의 입지가 좁아질 것은 분명하다. 이제 맥케이브로 대표되던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는 끝났고 도시에서 온 자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밀러 부인 역시 자신 역시 사라질 것을 예감한다. 알트만은 그런 밀러 부인의 우울하고 허탈한 심정을 줄리 크리스티의 조용한 침묵이 담긴 얼굴과 눈을 통해 모호하지만 근사하게 표현해낸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반서부극/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불리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안티테제는 서부극의 원형을 이해해야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알트만은 반서부적 가치와 서부적 가치 사이를 오가며 아이러니와 쓸쓸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서부극을 반대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소멸의 안타까움과 애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알트만은 중간중간 서사에 복속되지 않거나, 추상적인 샷을 통해 (상술한 결말이 그렇다.) 영화의 주제를 꼬아서 표현하는데 이게 효과적이였는지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차가운 한기의 아름다움으로 한 시대의 종언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절에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서부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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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범죄 [Indagine Su Un Cittadino Al Di Sopra Di Ogni Sospetto / 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 (1970)

[완전범죄]의 시작은 흐름이 있는 모호한 파편이다. 아마 처음 보는 관객들은 왜 남녀가 아파트로 몰래 숨어들어가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도착적인 섹스 끝에 여자를 살해했을때조차도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가 없다. 마침내 살인을 저지른 남자가 수사 사건으로 현장에 불려갔을때 관객들은 [완전범죄]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지 갈피를 잡게 된다. [완전범죄]는 범죄를 숨기려고 하는 경찰 수사관의 얘기다.
 
관객은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 경찰인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거나 들킬 생각이 전혀 없다. 수사관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이 세 전제는 오오바 츠구미와 오바타 타케시의 [데스노트]나 김성훈의 [끝까지 간다]랑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완전범죄]는 [데스노트]나 [끝까지 간다]에서는 기능적으로 쓰였던 '권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서사를 뒤틀어버린다. 이 영화엔 동료 수사관들은 범인을 가르키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의심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완전범죄]는 이를테면 파시즘적 권력이라는 블랙홀 때문에 상식의 벡터가 왜곡되고 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이런 비정상적인 설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단적으로 영화가 끝날때까지 주인공은 이름 없이 직위로만 불린다. 마치 그에겐 어떤 개성이 필요없다듯이 말이다. 이 익명성은 마치 그의 캐릭터가 같은 위치에 있는 다른 이들게도 적용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본가 우고 피로와 엘리오 페트리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바로 피의자와 피해자, 증인이라는 일반인들과 수사관이라는 권력자 간의 인간 관계다. 수사관들은 가식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언론인들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그 권력에 야합한다. 와중에 일반인들은 권력 앞에 무력하다.

페트리와 피로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성 권력이다. 페트리와 피로는 사도마조히즘과 강간 이미지야말로 파시즘의 성적 이미지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연기하다가 진짜로 살해당한 아우구스타는 일반인들이 파시즘에게 매료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아우구스타 입을 빌려 주인공에게 매력 없다고 조롱해버림으로써 그 매료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이때 아우구스타가 퍼붓는 '유아기'와 '발기부전'야말로 영화의 핵심을 궤뚫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게도 아우구스타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혁명가인 안토니오다. 페트리와 피로는 파시즘보다 사회주의가 더 '성숙'하고 '섹시'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엘리오 페트리가 [완전범죄]를 위해 동원한 영화적 수법은 클로즈 업과 몽타쥬의 교란이다. 먼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컷은 클로즈업이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얼굴이나 대상을 강조해 보여주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페트리가 공을 들이는 클로즈 업은 주인공 얼굴의 클로즈 업이다. 애인과 바람을 피울때도, 파시스트적인 연설을 할때도, 수사를 할때도, 자신에게 범죄 증거를 받아 고발하러 온 시민을 교묘하게 압박할때도 페트리는 지안 마리아 볼론테의 오만한 표정 연기로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심지어 심문당하는 증인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할때도 프레임 밖 주인공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페트리에게 클로즈 업은 파시스트의 언어이자 파시즘적 관계의 정점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다.

그 결과 [완전범죄]는 클로즈 업과 클로즈 업이 아닌 샷 간의 몽타주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클로즈 업에서 드러난 파시스트의 권력이 다른 평범한 샷들의 방향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페트리는 수사과정을 시간순으로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서브 플롯이나 연설, 플래시백, 환영으로 도주한다. 마치 명백한 서사적 목표인 '살인마 주인공을 처벌한다' 를 일부로 방기하는 등장인물들을 조롱하듯이 말이다. 도입부의 파편화된 샷으로 이뤄진 미스터리는 일종의 예고였던 셈이다. 페트리는 서사와 몽타쥬의 교란, 파편화를 이용해 상식적인 영화 언어를 휜다. 그리고 그 휘어짐은 파시즘에 대한 은유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가족의 친구]나 [일 디보]의 선조인 셈이다. 이런 휘어짐은 야비한 느낌의 엔리오 모리코네의 사운드트랙도 한 몫한다.

하지만 소렌티노가 펠리니식 성찰과 유미주의로 나아간다면, 페트리와 피로는 정반대로 그 혼란을 밀어붙인다. 그 결과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오네스코나 카프카, 피란델로 같은 부조리극의 세계다. 징후는 아우구스타의 애인인 안토니오에게서 시작한다. 다른 심문자랑 달리 안토니오의 등장 시퀀스에서 주인공은 롱 샷에 짓눌려 초라하게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안토니오와 주인공이 마주 섰을때, 이 영화가 유지하던 클로즈업의 권력은 파괴된다. 안토니오는 이 영화 인물들 중에서 아우구스타랑 더불어 주인공에게 정면으로 반항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죽어버린 아우구스타랑 달리 안토니오는 자신의 알리바이와 논리를 갖춰 또박또박 반박한다. 

성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좌파 혁명가에게 밀려버린 파시스트가 선택한 끝은 자폭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베르톨루치의 [순응자]처럼 한 떨기의 쓸쓸함조차도 허락받지 못한다. 아니 페트리와 피로의 야유는 여기서 절정에 달한다. 이 영화의 끝은 훌륭한 부조리극이다. 자신이 살인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울부짖는 주인공의 말에도 동료들은 허튼 소리하지 말라고 일축해버린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되버린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건 오직 시스템의 종이 되는것 뿐이다. 페트리와 피로는 확인 사실로 이 모든 과정을 환상으로 처리하고 동료들을 불러모으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지으면서 명백하게 한다.

[완전범죄]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파시즘이 휘두르는 권력을 신랄할정도로 까내리면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구축'되는가를 체계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완전범죄]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여럿이나 청와대에 들이앉아 추태를 부리며 자멸하는걸 똑똑히 보고 있다. 만약 이들의 속성을 정확하게 짚어낸 한국 영화가 등장한다면 그 영화는 [완전범죄]처럼 한국 영화사의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어떤 인상을 가졌더라도 그는 법의 종복이며, 법에 귀속되어 인간의 판단을 벗어난다."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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