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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1980년대영화 (4)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의 유명한 단편 [방파제]의 기본 전제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였다. 마르케는 어린 시절 우연히 잊지 못한 이미지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남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를 거쳐 시간을 횡단하는 행위라 말했다. 그리고 마르케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진 이미지와 기억, 시간을 한데 모아 몽타주로 이뤄진 꿈을 꿨다. 설정이 자세한 영화는 아니였지만, 이 우울한 단편 영화가 지금까지도 SF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들어가는지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서 마르케는 정지한 사진들 속 살아있는 여인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음의 놀라움을 끌어냈다.

마르케의 실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는 [방파제]에서 뻗어나온 묵상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에서 제목 따온 [태양 없이]는 일종의 기행문 영화다. [태양 없이]에서 시간과 이미지의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여기에 있는 개별 공간을 횡단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제 시간과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은 픽션 속 주인공이 아닌 크리스 마르케의 분신인 사진작가 샌도르 크리스나다. 샌도르는 카메라 한 대와 종이와 펜을 챙긴 채 지구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아이슬란드의 아이들 세 명이다. 샌도르는 이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행복의 이미지를 얘기하지만, 이 행복의 이미지가 쉽게 다른 이미지랑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 그 다른 이미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이 정녕 하나로 연결될 수 없는지, 고민한다. 

제목이 뜨고, 그는 아이슬란드를 떠나 홋카이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북쪽 섬에서 돌아오던 샌도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 순간은 전쟁의 순간이다. [밤과 안개]에서 겪었고 [방파제]의 남자가 살아가야만 했던 그 순간. [밤과 안개]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있었던 전쟁을 상상한 뒤, [방파제]에서 마르케는 도래할 전쟁을 상상하는 것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회고했다면, [태양 없이]의 샌도르는 평화의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전쟁를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산발적인 편지를 보낸다.

마르케는 얼핏 보면 연결되지 않을듯 같은 순간들을 연결한다. 샌도르가 발길을 내딯는 곳은 둘로 나눠진 세계다. 한편엔 섹스 박물관과 산리즈카 투쟁이 이어지는 일본과 제국주의와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낸 미국, 프랑스가 있으며, 한편엔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가 있다. 태양이 있는 세계와 태양이 없는 세계. 마르케는 이 둘로 나눠진 세계를 영화의 몽타쥬를 이용해 하나로 통합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태양 없이]는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의 결합이다. 

하지만 훈련된 르포 작가이기도 한 마르케=샌도르가 선택한 스케치 영상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다. 그는 일본 문화에 깊게 매료되어 인류학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산리즈카와 우익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들을 잡아내고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자연 풍경과 가난한 현실을 끌어온다. 편지를 통해 차분히 전해지는 나레이션에서는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지식인의 결기가 돋보인다. 샌도르의 통찰 일부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을 찌르기도 한다. [태양 없이]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광주 시민들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도쿄 좌파 시위대를 잠시 보여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편린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준다. 

이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에서 통일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샌도르가 보낸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샌도르가 읽지 않는다. 샌도르의 묵상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이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즉 [태양 없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뤄진 기행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왜 이런 형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여기서 [태양 없이]가 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보자.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를 찍으면서 동시 더빙이 아닌, 후시 더빙을 사용했다. 이 후시 더빙은 단순히 독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음향에도 적용되어 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일부는 기술적인 문제기도 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마이크가 달린 ENG 카메라는 그리 흔한게 아니였고, 필름 카메라는 녹음 기사를 동반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대표적이다.) 필시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느라 8-16mm 카메라를 사용했어야 할 크리스 마르케에게 기록과 동시 녹음은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하야오 야마네코가 등장한다. 비디오 게임 개발자인 하야오 야마네코는 현실을 바꿀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테이프로 채집한 전쟁과 시위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조작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야오 야마네코는 그것이 TV에 등장하는 이미지보다 더 진실하며, 대상의 특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하야오의 말은 상당히 궤변처럼 들린다. 어떻게 추상화 된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크리스 마르케는 반대로 추상화되지 않은 이미지조차도 언제든지 풍화되어 소멸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는 [밤과 안개]에 관여한 사람이다.) 하야오는 그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려는 시도보다, 본질을 잡는 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야오는 이 이미지들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구역'이라고 부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은 법칙을 따라 길을 찾아가야 했다. 하야오는 컴퓨터로 왜곡된 이미지로 '구역'을 만들어 전쟁과 투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스스로 다시 생각할 영역을 만들고자 한다. 

하야오의 시도는 [태양 없이]의 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수 있는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현실을 단순히 기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낼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 다.  [아름다운 5월]에서 그는 파리라는 한 공간에 집약된 다양한 영역들을 옮겨다니면서 한 시대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장르 픽션을 정지된 사진으로 재구성한 [방파제]를 거쳐 [태양 없이]에 이르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개별적으로 분리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꾸는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악과 나레이션, 현장 녹음한 소음을 후시 더빙한 음향들... 때문에 별다른 플롯이 없어도 집중력이 높은 영화기도 하다. [태양 없이]를 본다는 것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성한 꿈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소 난해할수도 있는 이 한편이 지독히도 감성을 건드린다면 영화가 가지는 시청각적 매력을 마르케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샌도르가 생각하는 [현기증]은 살인 사건 그 이상으로 은밀하게 시간과 공간의 현기증을 설명하는 영화다. 샌도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겹쳐 생각한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죽은 매들린을 다른 인물인 주디를 통해 재현하려는 시도는 샌도르가 필름과 테이프로 기록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재구성해 꿈, 나아가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로 은유된다. 그리고 샌도르와 하야오가 만든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구역'을 만들어낸다. 필름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즉물적인 기록이 가능한 점)을 인지한 뒤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라는 글에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 이후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케의 구성된 꿈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단순히 영상에 멈추지 않는다. 하야오의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크리스 마르케는 컴퓨터 게임 비평가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 도쿄를 들르던 도중 샌도르는 남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팩맨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샌도르는 이 노란색 구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피력한다. 샌도르의 눈에서 바라본 팩맨은 인간의 운명을 픽셀을 통해 은유한 완벽한 예시다. 그리고 그 은유는 당분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마르케는 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세상을 은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미지와 결합될때 강한 힘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딩시 노년을 바라보는 영화 감독이 태동기에 있던 컴퓨터 게임에게서 가능성과 유효한 통찰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마르케는 단순히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태양 없이]를 만든게 아니다. 오히려 샌도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마르케의 속내는 절박하다. 열렬한 좌파였던 마르케는 다양한 공간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무구할 정도로 순수한, 행복의 이미지로 쉽사리 등장하지 못한다. 기니비사우 프라이아 시장에 만난 여자의 표정을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샌도르의 고민은 마르케의 고민이기도 하다. 마르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태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그는 진심으로 땅에 발을 붙이는 사람들을 염원하고 걱정하고 있다.

친구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샌도르는 [태양 없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샌도르 크리슈나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닌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시를 쓰는 법은 영화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하며 글과 편지이기도 하다. 이제 샌도르는 일본에서도, 기니비사우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껏 쌓여왔던 과거를 바라보고 동시에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호주의 에뮤처럼 샌도르가 길어올린 영상과 편지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지의 수신인이 말한다.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이 기대감이야말로 [태양 없이]가 진정 바라는 소통의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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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강 [泥の河 / Muddy River] (1981)

오구리 코헤이는 기본적으로 과작의 영화작가다. [진흙강]과 [가야코를 위하여] 이후 그는 6년-9년 텀을 두고 조심스럽게 영화를 내놓고 있다. 그가 등장했던 1980년대 일본 영화계는 산업 기반의 붕괴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와중에 이타미 주조는 경박하기까지 한 템포의 풍자 코미디 영화로 흥행을 이끌고 있었고, 신인 감독들은 로망 포르노를 통해 색정적인 얘기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연출론을 조심스럽게 숨겨넣고 있었다. 하지만 오구리 코헤이는 [진흙강]을 통해 그런 흐름과 상관없다듯이, 마치 네오 리얼리즘이나 고전기 일본 영화들을 연상케하는 1.33:1 흑백 화면의 전후 일본 배경 성장물을 들고 나타났다. 

당연히 저예산에 흑백 화면으로 제작된 [진흙강]은 가히 페드로 코스타의 [피]만큼이나 불시착한 영화였지만 [진흙강]은 그런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국제적으로 먹히는데 성공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탄하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 부문까지 나가는 등 오구리 코헤이는 이 영화를 통해 꽤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감독한 [환상의 빛]으로도 유명한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진흙강]은 성장물이다. 1955년 오사카 하천에 사는 우동집 아들 이타쿠라 노부오는 어느날 하천 보트하우스에 사는 마츠모토 키이치와 긴코 남매를 알게 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타쿠라와 달리 마츠모토 남매는 어머니 쇼코와 함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노부오와 마츠모토 남매는 금세 친해지게 된다. 그러던 중 노부오는 쇼코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죽음의 가시] 이후의 고도로 형식화된 오구리 코헤이 영화를 경유해 온 관객들이라면 [진흙강]의 소박한 모양새에 놀랄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네오 리얼리즘의 유령을 불러내듯이 인공성을 배재한 캐릭터에게 사실적인 배경을 배정하고 서사를 진행해나간다. 전반적으로 [진흙강]은 나루세 미키오의 [가을이 오다]에 영감을 받은듯한, 순수하면서도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가득찬 아이들의 우정을 그려내고 있다. 고레에다 팬들이라면 오구리가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는 방식이 이후 고레에다에게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걸 확인 할 수 있다.

하지만 [진흙강]에는 [가을이 오다]엔 없는 어떤 그림자가 있다. [가을이 오다]은 기본적으로 역사/사회적 맥락이 희박했고, 히데오와 준코의 우정은 어른들과는 무관한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흙강]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의 우정을 그릴때도 패전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할까. 영화는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와중에 참전용사였던 노부오의 아버지 신페이는 그런 영화 내 드리운 상흔을 집약해 보여준다. 미야모토와 오구리는 신페이를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으로 그리면서도, 어딘가 전후의 허무함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내는데, 이 때문에 [진흙강]의 성장담을 어떤 사회/역사적 맥락으로 재구성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런 상실과 허무감 같은 부분은 미야모토 테루의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환상의 빛]에서도 쉬이 드러났던 부분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미야모토 테루의 개성이 오구리의 연출에 자연스럽게 접합되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이런 상실감과 허무감이 단순히 배경으로 머물지 않고 아이들의 우정에도 스며드는 걸 포착한다는 점에서 [진흙강]은 [가을이 오다]와 다른 방식으로 놀라운 영화적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 전체의 반전으로 준비된 쇼코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 그렇다. 이 장면은 그렇게 '반전'을 노리고 만든 장면은 아니지만 (복선 자체가 무수하기 때문에 파악하기 쉬운 편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의 서늘함은 도무지 잊기 힘들다. 차분히 쌓여왔던 순진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어떤 엄혹한 현실 앞에서 한방에 박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구리는 모든 관계가 파탄난 이후에도 뒤늦게 마츠모토 남매를 쫓아가는 노부오를 결말로 선택하면서 아이들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루세가 [가을이 오다]에서 그랬듯이, 오구리 역시 아이들의 선의를 믿고 존중해주지만, 그 선의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는 약하다는 것도 같이 보여준다.

오구리 코헤이의 연출법도 영화의 내용처럼 단순해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복잡하다. 오구리 감독은 일견 네오 리얼리즘 특유의 손이 덜 간듯한 외양과 달리, 신인 감독답지 않게 상당히 고도의 테크닉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누나와 함께 이타쿠라 집으로 저녁 먹으러 온 키이치가 신페이의 부탁을 받아 옛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라. 단순한 시퀀스 설정과 달리 이 장면에서 오구리 코헤이는 아웃포커스와 트래킹, 인물의 배치를 통해 아이들의 우정과 어른들의 상흔 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어떤 공력을 발휘하고 있다. 상술했던 반전의 순간 역시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이나 마이클 파웰의 [저주의 카메라]가 정립한 관음증적인 시선을 역으로 활용해 관객에게 서늘함을 안겨주고 있다. 결말 시퀀스의 흐름도 상당히 세련되게 통제되어 있다.

오구리 코헤이는 이 다음 영화인 [가야코를 위하여]까지는 이런 고도로 다듬어진 네오 리얼리즘적인 기조를 꾸준히 유지했다. 하지만 그가 [가야코를 위하여] 이후 6년동안 침묵한 뒤 내놓은 [죽음의 가시]는 오즈와 미조구치를 흠모한 영화적 기교로 무장한 서늘한 기운의 사적 심리극이라는, 전혀 다른 영화로 탈바꿈했다. 자신의 관심사가 어린 아이들의 순수함이 아닌, 그 순수함 뒤에 서린 어떤 서늘한 분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것은 [죽음의 가시]를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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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O Sangue / The Blood] (1989)

2014/05/17 - [Deeper Into Movie/리뷰] - 뼈 [Ossos / Bone] (1997)

많은 이들이 칭찬했듯이 페드로 코스타의 [피]의 도입부는 간결하고 인상적이다. 천둥 소리와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두 사람. 떠나지 말라는 청년의 간청에 불구하고 늙은 남자는 청년의 뺨을 때린 뒤, 어두운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진다. 분명 로케이션 촬영임에도 이 장면은 마치 매트 페인팅한 배경을 배우 뒤에다 세워놓고 찍은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인공적이면서도 어떤 화려함이 일체 배제된 이 장면에서 페드로 코스타는 현실을 그대로 가져다놓기보다는 재구성할 의도로 이 영화를 찍었다는걸 선언한다.

[피]의 세계는 아트하우스 영화들이 자주 다루던 '아버지가 부재한 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얘기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빈센트와 니노는 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는 클라라를 만나게 된다. 이 세 사람은 곧 대안가족과 같은 기묘한 유대감을 나누게 되지만, 그런 유대감과 평온함은 아버지의 빚 문제로 찾아오는 자들로 인해 흔들리게 된다.

훗날 발표한 [뼈]의 등장인물들이 생기를 잃은채 식은 재처럼 덤덤히 얘기를 나누고 피로한 기색을 그대로 노출했던 것처럼 [피]의 등장 인물들을 역시 생기를 잃고 죽은듯이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이들은 잠을 자거나 반쯤 깨어있거나 몽롱한 표정으로 리스본 거리를 좀비처럼 배회한다. 아버지는 갑자기 다시 등장했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나마 생기를 보이는 것 같은 채권자들 역시 몽유병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유령처럼 불쑥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 와중에 아이들은 다른 이에게 속박당하거나 그 속박에서 탈출하기를 꿈꾼다. (그 속박이 어른의 세계라는건 명백하다.) 다만 [뼈]는 모호하고 성긴 이야기와 실제 빈민가에 사는 비전문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 때문에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느낌이 강했다면, [피]는 훨씬 관습적인 이야기를 취하고 있다.

그렇기에 [피]의 이야기는 분명 현실적이면서도 어딘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이 꿈은 후기작들에 비해 매우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페드로 코스타와 빔 벤더스의 동반자였던 촬영감독 마르틴 셰퍼가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으로 잡아낸 이미지들은 마치 당시 영원한 침묵에 빠져있던 로베르 브레송과 이미 죽어버린 독일 표현주의와 포르투갈 뉴웨이브, 고전 할리우드 영화 (특히 발 루튼과 [사냥꾼의 밤]) 강령술이라도 하듯이 몽유병에 걸린듯한 인물들을 잡아낸다. 

전반적으로 꽤나 복고적인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요란한 총천연색이 지배하고 있던 1989년 영화라고 믿기기 힘들 정도다. 평화로운 강변 둔치에 떠내려오는 시체와 그걸 구경하는 인파들, 어둠 속에 잠겨 있다가 디졸브되는 얼굴 클로즈업, 리스본의 야경, 복도에서 싸우는 두 사람의 인영, 부둥켜안은채 굴러떨어지는 두 남녀... 어딘가 불시착한 것 같지만 아름다운 영화적인 순간들이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피]는 동시에 미완의 질문으로 남아있는 영화기도 하다. 다시 스토리로 돌아가보자. 페드로 코스타는 이 대안가족을 산산히 부서트리고 난 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소 머뭇거리는 인상을 보인다. 니노는 아버지를 자청하는 친척이 마음에 안들어 탈주를 시도하고, 빈센트는 그런 니노를 구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쓰지만 정작 니노는 그런 빈센트와 클라라의 행동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이때 페드로 코스타는 갑자기 빈센트와 클라라의 행보를 모호하게 처리해버린다. 페드로 코스타가 선택한 결말은 도망치는 니노의 얼굴이다. 감독은 조각배를 탄 니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혼자서 운전할 수 있는지, 잘 갈수 있는지"라고 뱃사공의 입을 빌어 물어본다. 니노는 예라고 대답하고 뱃사공은 잠이 든다.

분명 어른이 부재한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인 니노의 성장을 의도한 결말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어른의 경계에 서있던 빈센트와 클라라는 어떻게 된 것인가, 니노가 어디로 가는지, 라는 의문을 지울수 없다. 그저 모호한 사라짐과 브레송식 무표정함이 가져다 주는 아름다움만이 영화의 결말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뼈]의 결말이 죽음에 대한 암시와 "눈 앞에서 문을 닫는" 거부의 제스처로 단호하게 관객과 폰타야나스 사이에 거리를 두면서, 그들의 메마른 일상을 영화적으로 구원할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을 담았지만 [피]는 버림받은 자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라는 애매한 희망을 남겨두는 것으로 일단은 만족해한다. 

또한 선배 영화에 대한 강한 존경이 담긴 스타일 역시 [피]를 걸작이 아닌 데뷔한 감독의 재능있는 시작으로 머물게 하고 있다. 상기한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와 표현주의의 영향력을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할까. 그렇기에 [피]는 페드로 코스타의 포스트 펑크적인 개성이, 강한 영화사적인 전통에 조심스럽게 숨어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비주얼적으로는 여전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페드로 코스타가 [뼈]를 시작으로 폰타야나스에 머물기 시작한 것도 답을 찾기 위해서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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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1988)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9.5
감독
시드니 루멧
출연
리버 피닉스, 크리스틴 라티, 주드 허쉬, 조나스 애브리, 마사 플림튼
정보
범죄, 드라마 | 미국 | 115 분 | -


시드니 루멧의 [허공의 질주]의 도입부는 로버트 맥기가 정석적인 시나리오라고 할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소년의 평범한 일상에서 출발한 이 장면은 컷을 넘길수록 정보를 제한하고 인물들의 행동에 여분의 모호함을 더해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미스터리가 극에 달했을 무렵, 영화는 재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긴장감과 흥미를 만들어낸다. 평범한 소년의 일상에서 1960년대 신좌익 테러리스트의 후일담과 연결되는 도입부는 간결하면서도 매혹적인 터치로 그려지고 있으며 시드니 루멧의 연출 역시 그 시나리오를 무리하게 뛰어넘지 않는다. 그 점에서 [허공에의 질주]는 우리가 '미국 영화'를 기대할때 바라는 모범적인 연출론이 담겨 있는 영화기도 하다.

하지만 모범적이고 정석적이라고 해서 맥빠지는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시드니 루멧이 놀라운 점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태동부터 경력을 시작해 1990년대 미국 영화의 새로운 세대들이 경배해 마지 않는 조상이 되고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완고한 매서움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소위 시드니 루멧의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꼽으라면 [네트워크]라던지 [12인의 성난 사람들], [뜨거운 오후], [형사 서피코] 같은 비타협적이다 싶을 정도로 선연한 독기가 어려있는 영화들이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루멧은 뉴욕이라는 대도시 출신답게 도회적이고 냉철한 감독이다.

다만 [허공에의 질주]는 [네트워크]에서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패디 체예프스키의 비타협적인 각본을 그대로 밀고가던 독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다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이 강한 물렁한 군의 루멧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허공에의 질주]의 물렁한 분위기는 각본가인 나오미 포너의 공이 크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나오미가 쓴 다른 유명한 각본들 ([다섯번째 계절]이나 [베리 굿 걸], [모정])을 살펴보면 이 추측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높아보이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자식이 가족 관계에 파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전개는 나오미의 다른 각본을 영화화한 [다섯번째 계절]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사실 [허공에의 질주]는 진짜 루멧의 걸작이 되기엔 이 멜로드라마적인 물렁한 분위기가 발목을 잡는 부분이 없잖아 있기도 하다. 단적으로 대니의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 실력은 극의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해 넣은 장르적 장치라는 느낌이 매우 강해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쉽게 들고 다닐수 없는 악기라는 점도 매우 상징적이다.) 루멧의 냉정한 터치하고는 충돌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지만 루멧은 자신이 장기를 발휘하는 부분이 아닌 물렁하고 감성적인 재료들도 의외로 진솔하게 다뤄내면서 그가 왜 '장인'이라고 불리는지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허공에의 질주]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인물들이 서 있는 배경과 정치사회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좁게는 1960년대 히피들이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던 현실부터 시작해 넓게는 사랑과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자들이 변하지 않는 현실과 뜻하지 않은 희생감에서 나오는 죄책감 초라해져버린 자신을 보며 쓸쓸하게 반추하고 있다고 할까. 이쁘지 않게 매우 미국 아저씨 아줌마처럼 나오는 주드 허시와 크리스틴 라티는 그 점에서 매우 적확한 캐스팅이며 연기도 훌륭하다. 

그런 반추와 동시에 [허공에의 질주]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정치사회적인 관계로 엮여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루멧과 포너는 그토록 불합리한 권력에 반발하며 이상적인 가치관을 내걸었던 좌파 지식인들도 부모자식이라는 권력관계의 주를 차지하고 있다는걸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묘사들은 포프 부부를 향한 거스의 '결국엔 자본주의 체제에 또다른 투항자일뿐'라는 비난과 더불어 좌파 이상론자들이 그렇게 기존 사회에서 분리해 만들고 싶어했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뭐가 다른지에 대한 고뇌로 이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허공에의 질주]는 서부극이나 [보니와 클라이드]를 뒤집어놓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불의 저항해 공동체에 총을 갈기고 떠난 무법자들이 자신들이 만들려고 했던 새로운 공동체가 기실 기존 공동체랑 다른게 무엇인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기 떄문이다. 하지만 루멧은 그 기존 공동체에서 탈주한 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캐릭터의 주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니가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그런데, 한 치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으면서 왜 이렇게 되었을까 씁쓸해하는 장면이야말로 그런 루멧의 어른스러운 시선을 확인할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 식으로 [허공에의 질주]는 캐릭터가 처한 정치사회적인 현실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기 때문에 일견 장르적이고 인공적으로 보였던 장치들조차 그 속에서 합당한 위치를 찾아가게 된다. 냉정할 정도로 탈출하기 힘겨보이는 현실과 꿈결같이 아름다운 로맨스와 예술에 대한 매료가 충돌하면서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절절한 진실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대니의 연애 대상으로 나오는 로나라는 캐릭터 역시 그런 점에서 상당한 깊이와 계급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는 대니와 달리 충실한 중상류층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로나는 반대로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반대되는 '자유'를 꿈꾼다. 그렇기에 로나는 대니에게서 해방감을 발견하고 대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안정된 삶으로써 로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그 안정된 삶을 파괴할까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 양가적인 감정 때문에 [허공에의 질주]에 일견 장르적일수도 있던 로맨스에 계급 텍스트를 부여하면서 영화의 드라마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허공에의 질주]는 대니의 정착으로 결말이 난다. 계속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한 사람의 미래를 방해할수 없기에 가족은 대니가 어른으로써 공동체에 편입되는걸 선택한다. 이는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이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한다고,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영화의 첫 장면과 결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댓구를 이루고 있다. 첫 장면이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없는 일자 도로를 질주한다면, 결말에서는 환한 낮에 여러 길로 나눠진 도로에서 가족이 작별을 하고 세 가족를 태운 차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영화 내내 어둑어둑한 길을 해메고 있던 인물들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해방감과 씁쓸함을 느끼는 이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대구에서 [허공에의 질주]는 가족에 대한 멜로 시드니 루멧의 냉철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은 시선을 담은 영화라는걸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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