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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1982 (1)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크리스 마르케의 유명한 단편 [방파제]의 기본 전제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였다. 마르케는 어린 시절 우연히 잊지 못한 이미지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남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를 거쳐 시간을 횡단하는 행위라 말했다. 그리고 마르케는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진 이미지와 기억, 시간을 한데 모아 몽타주로 이뤄진 꿈을 꿨다. 설정이 자세한 영화는 아니였지만, 이 우울한 단편 영화가 지금까지도 SF계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들어가는지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꿈 속에서 마르케는 정지한 사진들 속 살아있는 여인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음의 놀라움을 끌어냈다.

마르케의 실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는 [방파제]에서 뻗어나온 묵상 중 하나다.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에서 제목 따온 [태양 없이]는 일종의 기행문 영화다. [태양 없이]에서 시간과 이미지의 여행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 여기에 있는 개별 공간을 횡단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제 시간과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은 픽션 속 주인공이 아닌 크리스 마르케의 분신인 사진작가 샌도르 크리스나다. 샌도르는 카메라 한 대와 종이와 펜을 챙긴 채 지구를 횡단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아이슬란드의 아이들 세 명이다. 샌도르는 이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행복의 이미지를 얘기하지만, 이 행복의 이미지가 쉽게 다른 이미지랑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마 그 다른 이미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의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이 정녕 하나로 연결될 수 없는지, 고민한다. 

제목이 뜨고, 그는 아이슬란드를 떠나 홋카이도에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북쪽 섬에서 돌아오던 샌도르는 배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순간을 동시에 떠올린다. 그 순간은 전쟁의 순간이다. [밤과 안개]에서 겪었고 [방파제]의 남자가 살아가야만 했던 그 순간. [밤과 안개]에서는 없는 자리에서 있었던 전쟁을 상상한 뒤, [방파제]에서 마르케는 도래할 전쟁을 상상하는 것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회고했다면, [태양 없이]의 샌도르는 평화의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전쟁를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산발적인 편지를 보낸다.

마르케는 얼핏 보면 연결되지 않을듯 같은 순간들을 연결한다. 샌도르가 발길을 내딯는 곳은 둘로 나눠진 세계다. 한편엔 섹스 박물관과 산리즈카 투쟁이 이어지는 일본과 제국주의와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낸 미국, 프랑스가 있으며, 한편엔 제국주의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가 있다. 태양이 있는 세계와 태양이 없는 세계. 마르케는 이 둘로 나눠진 세계를 영화의 몽타쥬를 이용해 하나로 통합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태양 없이]는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의 결합이다. 

하지만 훈련된 르포 작가이기도 한 마르케=샌도르가 선택한 스케치 영상들은 날카롭기 그지 없다. 그는 일본 문화에 깊게 매료되어 인류학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도, 산리즈카와 우익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들을 잡아내고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자연 풍경과 가난한 현실을 끌어온다. 편지를 통해 차분히 전해지는 나레이션에서는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려는 한 지식인의 결기가 돋보인다. 샌도르의 통찰 일부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을 찌르기도 한다. [태양 없이]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던 광주 시민들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도쿄 좌파 시위대를 잠시 보여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편린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준다. 

이 산발적인 스케치 영상들에서 통일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샌도르가 보낸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샌도르가 읽지 않는다. 샌도르의 묵상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이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즉 [태양 없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뤄진 기행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왜 이런 형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여기서 [태양 없이]가 소리를 활용하는 법을 보자.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 없이]를 찍으면서 동시 더빙이 아닌, 후시 더빙을 사용했다. 이 후시 더빙은 단순히 독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음향에도 적용되어 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일부는 기술적인 문제기도 하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마이크가 달린 ENG 카메라는 그리 흔한게 아니였고, 필름 카메라는 녹음 기사를 동반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대표적이다.) 필시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느라 8-16mm 카메라를 사용했어야 할 크리스 마르케에게 기록과 동시 녹음은 힘든 일이었을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하야오 야마네코가 등장한다. 비디오 게임 개발자인 하야오 야마네코는 현실을 바꿀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테이프로 채집한 전쟁과 시위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조작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야오 야마네코는 그것이 TV에 등장하는 이미지보다 더 진실하며, 대상의 특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하야오의 말은 상당히 궤변처럼 들린다. 어떻게 추상화 된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보다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크리스 마르케는 반대로 추상화되지 않은 이미지조차도 언제든지 풍화되어 소멸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는 [밤과 안개]에 관여한 사람이다.) 하야오는 그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기계적으로 압축하려는 시도보다, 본질을 잡는 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야오는 이 이미지들의 연결을 보여주면서 '구역'이라고 부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에서 비롯된 이 용어는,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은 법칙을 따라 길을 찾아가야 했다. 하야오는 컴퓨터로 왜곡된 이미지로 '구역'을 만들어 전쟁과 투쟁을 영원히 기억하고 스스로 다시 생각할 영역을 만들고자 한다. 

하야오의 시도는 [태양 없이]의 미학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크리스 마르케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수 있는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현실을 단순히 기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낼수 있는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 다.  [아름다운 5월]에서 그는 파리라는 한 공간에 집약된 다양한 영역들을 옮겨다니면서 한 시대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장르 픽션을 정지된 사진으로 재구성한 [방파제]를 거쳐 [태양 없이]에 이르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개별적으로 분리되며, 다른 방식으로 꿈꾸는 기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음악과 나레이션, 현장 녹음한 소음을 후시 더빙한 음향들... 때문에 별다른 플롯이 없어도 집중력이 높은 영화기도 하다. [태양 없이]를 본다는 것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성한 꿈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소 난해할수도 있는 이 한편이 지독히도 감성을 건드린다면 영화가 가지는 시청각적 매력을 마르케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화광적인 꿈이기도 하다. 크리스 마르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샌도르가 생각하는 [현기증]은 살인 사건 그 이상으로 은밀하게 시간과 공간의 현기증을 설명하는 영화다. 샌도르는 샌프란시스코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겹쳐 생각한다.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죽은 매들린을 다른 인물인 주디를 통해 재현하려는 시도는 샌도르가 필름과 테이프로 기록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재구성해 꿈, 나아가 영화로 만드려는 시도로 은유된다. 그리고 샌도르와 하야오가 만든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구역'을 만들어낸다. 필름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특성 (즉물적인 기록이 가능한 점)을 인지한 뒤 그 특성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라는 글에서 사진 매체의 가능성을 주장했던 발터 벤야민 이후 영화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케의 구성된 꿈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단순히 영상에 멈추지 않는다. 하야오의 직업이 게임 디자이너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크리스 마르케는 컴퓨터 게임 비평가의 선구자일지도 모른다. 도쿄를 들르던 도중 샌도르는 남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팩맨을 발견한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샌도르는 이 노란색 구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피력한다. 샌도르의 눈에서 바라본 팩맨은 인간의 운명을 픽셀을 통해 은유한 완벽한 예시다. 그리고 그 은유는 당분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마르케는 이를 통해 비디오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세상을 은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미지와 결합될때 강한 힘을 가진다고 정리한다. 딩시 노년을 바라보는 영화 감독이 태동기에 있던 컴퓨터 게임에게서 가능성과 유효한 통찰력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마르케는 단순히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태양 없이]를 만든게 아니다. 오히려 샌도르의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마르케의 속내는 절박하다. 열렬한 좌파였던 마르케는 다양한 공간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봤던 무구할 정도로 순수한, 행복의 이미지로 쉽사리 등장하지 못한다. 기니비사우 프라이아 시장에 만난 여자의 표정을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샌도르의 고민은 마르케의 고민이기도 하다. 마르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에 어떻게 짓눌려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태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한다. 그는 진심으로 땅에 발을 붙이는 사람들을 염원하고 걱정하고 있다.

친구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샌도르는 [태양 없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마지막. 샌도르 크리슈나는 현재와 과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닌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시를 쓰는 법은 영화이기도 하고 비디오 게임이기도 하고, 사진이기도 하며 글과 편지이기도 하다. 이제 샌도르는 일본에서도, 기니비사우에서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지금껏 쌓여왔던 과거를 바라보고 동시에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호주의 에뮤처럼 샌도르가 길어올린 영상과 편지는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때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지의 수신인이 말한다.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이 기대감이야말로 [태양 없이]가 진정 바라는 소통의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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